耽古樓主의 한문과 고전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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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한흑구

耽古樓主 2025. 2. 5. 04:56

1.

보리.

너는 차가운 땅 속에서 온 겨울을 자라 왔다.

이미 한 해도 저물어, 벼도 아무런 곡식도 남김 없이 다 거두어들인 뒤에, 해도 짧은 늦은 가을 날, 농부(農夫)는 밭을 갈고, 논을 잘 손질하여서, 너를 차디찬 땅 속에 깊이 묻어 놓았었다.

 

차가움에 응결된 흙덩이들을, 호미와 고무래로 낱낱이 부숴 가며, 농부는 너를 추위에 얼지 않도록 주의해서 굳고 차가운 땅 속에 깊이 심어 놓았었다.

씨도 제 키의 열 길이 넘도록 심어지면, 움이 나오기 힘이 든다.

옛 늙은이의 가르침을 잊지 않으며, 농부는 너를 정성껏 땅 속에 묻어 놓고, 이에 늦은 가을의 짧은 해도 서산을 넘은 지 오래고, 날개를 자주 저어 까마귀들이 깃을 찾아간 지도 오랜, 어두운 들길을 걸어서, 농부는 희망(希望)의 봄을 머릿속에 간직하며, 굳어진 허리도 잊으면서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2

온갖 벌레들도, 부지런한 꿀벌들과 개미들도, 다 제 구멍 속으로 들어가고, 몇 마리의 산새들만이 나지막하게 울고 있던 무덤가에는, 온 여름 동안 키만 자랐던 억새풀 더미가, 갈대꽃 같은 솜꽃만을 싸늘한 하늘에 날리고 있었다.

 

물도 흐르지 않고, 다 말라 버린 갯강변 밭둑 위에는 앙상한 가시덤불 밑에 늦게 핀 들국화들이 찬 서리를 맞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논둑 위에 깔렸던 잔디들도 푸른빛을 잃어버리고, 그 맑고 높던 하늘도 검푸른 구름을 지니고 찌푸리고 있는데, 너, 보리만은 차가운 대기(大氣) 속에서도 솔잎과 같은 새파란 머리를 들고, 하늘을 향하여, 하늘을 향하여 솟아오르고만 있었다.

 

이제, 모든 화초(花草)는 지심(地心) 속에 따스함을 찾아서 다 잠자고 있을 때, 너, 보리만은 그 억센 팔들을 내뻗치고, 새말간 얼굴로 생명의 보금자리를 깊이 뿌리박고 자라 왔다.

 

날이 갈수록 해는 빛을 잃고, 따스함을 잃었어도, 너는 꿈쩍도 아니 하고, 그 푸른 얼굴을 잃지 않고 자라왔다.

 

칼날같이 매서운 바람이 너의 등을 밀고, 얼음같이 차디찬 눈이 너의 온몸을 덮어 엎눌러도, 너는 너의 푸른 생명을 잃지 않았었다.

 

지금, 어둡고 찬 눈 밑에서도, 너, 보리는 장미꽃 향내를 풍겨 오는 그윽한 6 월의 훈풍(薰風)과, 노고지리 우짖는 새파란 하늘과, 산 밑을 훤히 비추어 주는 태양을 꿈꾸면서, 오로지 기다림과 희망(希望) 속에서 아무 말이 없이 참고 견디어 왔으며, 5 월의 맑은 하늘 아래서 아직도 쌀쌀한 바람에 자라고 있었다.

 

3

춥고 어두운 겨울이 오랜 것은 아니었다.

어느덧 남향(南向) 언덕 위에 누렇던 잔디가 파아란 속잎을 날리고, 들판마다 민들레가 웃음을 웃을 때면, 너, 보리는 논과 밭과 산등성이에까지, 이미 푸른 바다의 물결로써 온 누리를 뒤덮는다.

 

낮은 논에도, 높은 밭에도, 산등성이 위에도 보리다.

푸른 보리다. 푸른 봄이다.

 

아지랑이를 몰고 가는 봄바람과 함께 온 누리는 푸른 봄의 물결을 이고, 들에도, 언덕 위에도, 산등성이 위에도, 봄의 춤이 벌어진다.

 

푸르른 생명의 춤, 새말간 봄의 춤이 흘러 넘친다.

이윽고 봄은 너의 얼굴에서, 또한 너의 춤 속에서 노래하고 또한 자라난다.

 

아침 이슬을 머금고, 너의 푸른 얼굴들이 새 날과 함께 빛날 때에는, 노고지리들이 쌍쌍이 짝을 지어 너의 머리 위에서 봄의 노래를 자지러지게 불러대고, 또한 너의 깊고 아늑한 품 속에 깃을 들이고, 사랑의 보금자리를 틀어 놓는다.

 

4

어느덧 갯가에 서 있는 수양버들이 그의 그늘을 시내 속에 깊게 드리우고, 나비들과 꿀벌들이 들과 산 위를 넘나들고, 뜰 안에 장미들이 그 무르익은 향기(香氣)를 솜같이 부드러운 바람에 풍겨 보낼 때면, 너, 보리는 고요히 머리를 숙이기 시작한다.

 

온 겨울의 어둠과 추위를 다 이겨내고, 봄의 아지랑이와, 따뜻한 햇볕과 무르익은 장미의 그윽한 향기를 온 몸에 지니면서, 너, 보리는 이제 모든 고초(苦楚)와 비명(悲鳴)을 다 마친 듯이 고요히 머리를 숙이고, 성자(聖者)인 양 기도를 드린다.

 

5

이마 위에는 땀방울을 흘리면서, 농부(農夫)는 기쁜 얼굴로 너를 한 아름 덥석 안아서, 낫으로 스르릉스르릉 너를 거둔다.

 

너, 보리는 그 순박하고, 억세고, 참을성 많은 농부들과 함께 자라나고, 또한 농부들은 너를 심고, 너를 키우고, 너를 사랑하면서 살아간다.

 

6

보리, 너는 항상 순박(淳朴)하고, 억세고, 참을성 많은 농부들과 함께,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1955년 동아일보에 실은 글입니다. 이 한흑구 교수님의 글은 참 아름답고 순수합니다.]

 

작자 소개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한흑구(韓黑鷗, 1909~1979)

본명은 세광(世光). 평양 출생.

 

 아버지 한승곤은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은 애국지사다. 1881년 평양에서 태어나 일찍이 예수교 장로회에 들어가 평양 산정현교회 목사를 지냈다. 일제에 저항한 ‘105인 사건’에 연루돼 쫓겨가듯 1916년 미국으로 건너가 시카고, 로스앤젤레스 등지에서 한인교회 목사로 시무하였다고 전한다. 1919년 도산 안창호(安昌浩) 선생이 미국에서 조직한 흥사단(興士團) 본부의 의사장(議事長)을 맡아 활약했다.

 

아들 흑구가 미국 유학을 떠난 것도 아버지 때문이었다.

 

1928년 숭인학교(崇仁學校)를 졸업하고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 상과에 입학하였다. 1929년 도미하여 시카고의 노스파크대학에서 영문학을, 템플대학에서 신문학을 전공하였다.

수필 <젊은 시절>, 시 <북미대륙방랑시편>을 ≪동광 東光≫에 발표하는 한편, 미국에서 발간되던 ≪신한민보 新韓民報≫에 시와 평론을 발표하였다.

 

종합지 ≪대평양 大平壤≫(1934)과 문예지 ≪백광 白光≫을 창간 주재한 것으로 전하여진다. 미국에 유학할 때 동인지에 영시를 쓰고 필라델피아의 신문에 동양시사평론을 기고하기도 하였으며, <호텔콘>(1932) · <어떤 젊은 예술가(藝術家)>(1935) · <사형제 四兄弟>(1936) 등 다수의 소설 창작과 함께 시작과 번역 · 평론을 병행하였다.

 

1939년 흥사단사건에 연루되어 피검된 일을 계기로 글을 발표하지 않았다. 광복 후 1945년 월남하여 수필 창작에 주력하면서 1948년에 서울에서 포항으로 거처를 옮겼으며, 이 무렵부터 <최근의 미국문단>(1947) · <이미지스트의 시운동> · <흑인문학의 지위>(1948) · <윌터휫트맨論>(1950) 등 미국문학 및 작가론에 대한 평론을 발표하였다.

 

평양 출신의 그가 6·25 직전 정착한 곳이 포항이었다. 〈보리〉를 쓸 무렵, 당시만 해도 조그마한 어항이던 포항은 주변이 온통 보리밭 물결이었다고 한다. 동네 처녀들이 ‘쌀 한 말을 다 못 먹고 시집간다’고 했을 정도로 해마다 4월이면 청보리밭 천지였다.

 

특히 ≪동광≫ · ≪ 開闢≫ 등에 흑인의 시를 최초로 번역, 소개한 대표적인 전신자(轉信者)로 일컬어진다. 저서로 ≪현대미국시선 現代美國詩選≫을 편역하여 1949년 선문사(宣文社)에서 출간하였다.

 

<하늘> · <바다> · <사랑>(1949)을 위시하여 <눈> · <보리>(1955), <노년 老年>(1965), <갈매기>(1969), <겨울바다> · <석류 石榴>(1971), <들밖에 벼향기 드높을 때>(1973), <흙>(1974) 등 100여 편의 수필을 남겼다.

 

수필집 ≪동해산문 東海散文≫(1971)과 ≪인생산문 人生散文≫(1974)을 각각 일지사(一志社)에서 출간하였다. 1958년부터 포항 수산초급대학의 교수로 재직하다가 1974년 같은 대학에서 정년 퇴임하였다.

 

자연물로부터 소재를 가져온 그의 작품은 서정적인 문장과 산문시적 구성으로 아름다움의 진실을 추구하고 있으며, 생명의 존엄성과 다른 생명체와 동등한 존재로서의 인간의 겸손에 관심을 표명하였다.

 

타계할 때까지 포항에 은둔하며 주옥같은 글을 남겼다. 친일(親日)문학을 연구한 문학평론가 임종국은 “단 한 편의 친일문장도 쓰지 않은 영광된 작가”라고 한흑구를 헌사(獻詞)했다.

 

시적 구성의 아름다움과 작품에 일관하는 인생에 대한 관조는 한국 수필문학이 창작 문학의 본령으로 자리를 굳히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겨울의 추위를 이겨내고 자라는 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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