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賞春曲(상춘곡)-丁克仁(정극인)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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賞春曲(상춘곡)-丁克仁(정극인)

耽古樓主 2025. 2. 4. 23:57

 

賞春曲에 관하여

 

 

 원문 및 현대어 해석

 

紅塵에 뭇친 분네 이 내 生涯 엇더ᄒᆞᆫ고

녯사ᄅᆞᆷ 風流ᄅᆞᆯ 미ᄎᆞᆯ가 ᄆᆞᆺ 미ᄎᆞᆯ가

天地間 男子 몸이 날만ᄒᆞᆫ 이 하건마ᄂᆞᆫ

山林에 뭇쳐 이셔 至樂을 ᄆᆞᄅᆞᆯ 것가

數間茅屋을 碧溪水 앏픠 두고

松竹 鬱鬱裏예 風月主人 되여셔라

세속에 묻혀 사는 사람들아, 이 나의 살아가는 모습이 어떠한가?
옛 사람의 풍류를 따를 것인가 못 따를 것인가?
천지간 남자의 몸이 나와 같은 사람이 많건마는,
산림에 묻히어서 지극한 즐거움을 모른다는 말인가?
초가삼간을 시냇물 앞에 두고,

소나무와 대나무 울창한 속에 자연을 즐기는 사람이 되었어라.

 

엇그제 겨을 지나 새봄이 도라오니

桃花杏花ᄂᆞᆫ 夕陽裏예 퓌여 잇고

綠楊芳草ᄂᆞᆫ 細雨中에 프르도다

칼로 ᄆᆞᆯ아 낸가 붓으로 그려 낸가

造化神功이 物物마다 헌ᄉᆞᄅᆞᆸ다

수풀에 우ᄂᆞᆫ 새ᄂᆞᆫ 春氣ᄅᆞᆯ ᄆᆞᆺ내 계워 소ᄅᆡ마다 嬌態로다

物我一體어니 興이ᄋᆡ 다ᄅᆞᆯ소냐

柴扉예 거러 보고 亭子애 안자보니

逍遙吟詠ᄒᆞ야 山日이 寂寂ᄒᆞᆫᄃᆡ

閒中眞味ᄅᆞᆯ 알 니 업시 호재로다

엊그제 겨울 지나 새 봄이 돌아오니,

복숭아꽃과 살구꽃은 저녁 햇살 속에 피어 있고,
푸르른 버들과 꽃다운 풀은 가랑비 속에 푸르도다.

칼로 오려내었는가, 붓으로 그려내었는가?
조물주의 신비한 공덕이 사물마다 야단스럽다.
수풀에 우는 새는 봄 기운을 끝내 못이기어 소리마다 교태로다.
자연과 내가 한 몸이니 흥이 이와 다르겠는가?
사립문 앞을 이리저리 걸어 보고, 정자에 앉아도 보며,
천천히 거닐며 시를 읊조리니 산 속의 하루가 적적한데,
한가한 가운데의 진정한 즐거움을 아는 사람 없이 혼자로구나.

 

이바 니웃드라 山水 구경 가쟈스라

踏靑으란 오ᄂᆞᆯ ᄒᆞ고 浴沂란 來日ᄒᆞ새

아ᄎᆞᆷ에 採山ᄒᆞ고 나조ᄒᆡ 釣水ᄒᆞ새

ᄀᆞᆺ 괴여 닉은 술을 葛巾으로 밧타 노코

곳나모 가지 것거 수 노코 먹으리라

和風이 건ᄃᆞᆺ 부러 綠水ᄅᆞᆯ 건너오니

淸香은 잔에 지고 落紅은 옷새 진다

여보시오 이웃 사람들아, 산수 구경 가자꾸나.
풀 밟기는 오늘하고 목욕은 내일하세.
아침에 산나물 캐고, 낮에는 낚시질 하세.
갓 괴어 익은 술을 두건으로 걸러놓고

꽃나무 가지 꺾어 수 놓고 먹으리라.
따뜻한 바람이 문득 불어 푸른 물을 건너오니,

맑은 향기는 잔에 지고 떨어지는 꽃잎은 옷에 진다.

 

樽中이 뷔엿거ᄃᆞᆫ 날ᄃᆞ려 알외여라

小童 아ᄒᆡ ᄃᆞ려 酒家에 술을 믈어

얼운은 막대 집고 아ᄒᆡᄂᆞᆫ 술을 메고

微吟緩步ᄒᆞ야 시냇ᄀᆞ의 호자 안자

明沙 조ᄒᆞᆫ 믈에 잔 시어 부어 들고

淸流ᄅᆞᆯ 굽어보니 ᄯᅥ오ᄂᆞ니 桃花ㅣ로다

武陵이 갓갑도다 져 ᄆᆡ이 긘 거인고

松間細路에 杜鵑花ᄅᆞᆯ 부치 들고

峰頭에 급피 올나 구름 소긔 안자보니

千村萬落이 곳곳이 버러 잇ᄂᆡ

煙霞日輝ᄂᆞᆫ 錦繡ᄅᆞᆯ 재폇ᄂᆞᆫ ᄃᆞᆺ

엇그제 검은 들이 봄빗도 有餘ᄒᆞᆯ샤.

술독이 비었거든 나에게 알리어라.

아이를 시켜 술집에 술이 있는지를 물어서,
어른은 막대 짚고 아이는 술을 메고,

나직이 시를 읊조리며 천천히 걸어서 시냇가에 혼자 앉아,
깨끗한 모래 맑은 물에 잔 씻어 부어 들고

맑은 물을 굽어보니 떠오는 것이란 복숭아 꽃이로다.

무릉도원이 가깝구나. 아마도 저 들이 그것인가?
소나무 숲 가느다란 길에 진달래꽃을 붙들고

산봉우리에 급히 올라 구름 속에 앉아보니

수많은 촌락들이 곳곳에 널려 있네.

아름다운 자연은 비단을 펼쳐 놓은 듯 하고,
엊그제까지만 하여도 겨울 들판에  봄빛이 넘치는구나.

 

功名도 날 ᄭᅴ우고 富貴도 날 ᄭᅴ우니

淸風明月外예 엇던 벗이 잇ᄉᆞ올고

簞瓢陋巷에 흣튼 혜음 아니 ᄒᆞᄂᆡ.

아모타 百年行樂이 이만ᄒᆞᆫᄃᆞᆯ 엇지ᄒᆞ리

공명도 날 꺼리고 부귀도 날 꺼리니,
청풍과 명월 외에 어떤 벗이 있겠느냐.
청빈한 선비의 살림에 헛된 생각 아니하네.
아무튼 한평생 즐겁게 지냄이 이만하면 어떠한가.

 

 

 판본

 

해설 및 감상

 

이 작품은 前章 79구로 이루어진 가사로, 작자가 고향에 돌아와 자연에 묻혀 살 때 지은 것이다.
속세를 떠나 자연에 몰입하여 봄을 완상하고 인생을 즐기는 지극히 낙천적인 성격의 노래이다.

조선시대 사대부 가사의 첫 작품이자, 산림 처사로서의 생활을 다루는 은일지사의 첫 작품으로 자연을 기리는 頌歌이면서 또한, 자연을 소재로 하여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주제를 부각시켜 소위 사림파 문학의 계기를 마련한 작품이기도 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자연 속에서 조화로운 삶을 추구하는 은일지사의 한정과 물아일체의 경지와 취락을 즐기는 풍류의 미학이 어떤 가치를 창출해 낼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볼 수 있게 하는 작품이다.

 산중에 거처하며 봄날의 흥취에 한껏 젖어 온갖 풍류의 즐거움을 느낀다.

높은 산에 올라 수많은 마을을 바라보니 더욱 아름답다.

이러한 자연의 품 안에서 부귀와 공명을 욕심내지 않고 청풍과 명월을 벗하는 안빈낙도의 생활 자세를 지니며 살아가겠다는 내용의 '상춘곡'은 가사 문학의 첫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고려 말의 승려인 나옹화상 혜근이 지었다는 <西往歌>가 이 갈래 문학 작품의 시작이라는 학설도 있다.

 한편, 이 노래는 자연에 묻혀 사는 즐거움을 표방하는 은일가사의 첫 작품으로, 또한 송순과 정철로 이어지는 호남 가단 형성의 계기가 되는 작품으로도 평가된다. 초기 가사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우리 선조들의 전통적인 자연관이 무엇인가를 선명하게 보여 준다.  서양에서 자연은 전통적으로 인간이 정복해야 하는 대상으로 인식되어 왔던 반면, 동양에서 자연은 인간과 조화를 이루며 '곁에 두고 즐기는'친근한 대상으로 존재해 왔다.
 이러한 인식은 이 작품의 하자가 보여주는 삶의 태도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화자는 속세를 떠나 자연 속에 사는 즐거움을 자랑스럽게 노래하며, 안분지족의 생활 철학을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감상하며 착안할 사항

 

◆ 연대 : 상춘곡의 창작 연대는 확실히 알 수는 없다. 단지 정극인이 만년에 고향인 태안으로 물러가 후배를 교육하던 성종 때에 지었으리라 추정할 뿐이다.

◆ 갈래 : 서정가사, 정격가사, 양반가사

◆ 성격 : 서정적, 예찬적, 묘사적

◆ 문체 : 운문체, 가사체

◆ 구성
  - 서사 : 은일지사의 풍류생활과 그 기상
  - 본사 : 春景과 春興
  - 결사 : 안빈낙도

◆ 주제 : 봄 경치의 玩賞과 安貧樂道

◆ 형식 :3·4(4·4)조. 전 79규의 연속체로 된 가사 문학

◆ 표현상의 특징
 · 39행 79구 4음보(단, 제 12행은 6음보)의 정형 가사로 4음보 연속체 율문의 형태로 이루어짐.
 · 설의법, 의인법, 대구법, 직유법 등의 여러 표현기교를 사용하고,  고사를 많이 인용하면서 작품 전체를 유려하게 이끌고 있다.
 · 화자의 시선이 이동함에 따라 시상이 전개되고 있으며, 시선은 공간의 이동을 따라 변화되고 있다.  공간이 이동할수록 좁은 공간에서 점점 넓은 공간으로(수간모옥 →정자 →시냇가 →봉두)확대되는 양상을 보인다.
 · 표기법은 창작 당대(15세기)의 것이 아니고, 후손에 의해 <불우헌집>이 간행된 18세기의 음운과 어법에 따르고 있다.
 · 주객 전도된 표현 → 공명이나 부귀와 같은 세속적인 욕망을 멀리하고자 하는 화자의 태도를 드러냄.

◆ 작가의 자연관 : 이 작품의 화자는 속세를 떠나 자연 속에 동화된 삶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자연은 속세와 대립되는 공간이면서, 완상과 친화의 대상이 되는 공간이다. 화자는 봄의 경치가 아름다움을 예찬하면서
물아일체의 경지에 이르러 취흥에 젖고, 자연을 무릉도원으로 여기면서 안빈낙도하는 삶을 추구하고 있다.

◆ 의의
  - 상춘곡 → 송순의 면앙정가 → 정철의 성산별곡으로 이어지는 강호가도의 시풍 형성
  - 조선 시대 사대부 가사의 첫 작품
  - 산림 처사로서의 생활을 은일 가사의 첫 작품으로 사림파 문학의 계기를 마련한 작품이다.

◆ 출전 : 불우헌집(정조 10년 1786년)

◆ 표기 : 창작 당시(성종)의 기록이 아니라, 조선 정조(1786) 때 그의 후손 정효목이 기록한 것이다.

 

 

 작자 丁克仁(정극인)에 관하여

 

자는 可宅, 호는 不憂軒, 본관은 靈城이다.

아버지는 진사 丁坤이다. 한편, 『國朝榜目』에는 丁寅의 아들로 되어 있다.

 

1429년(세종 11) 생원이 된 후 여러 번 과시에 응시했으나 번번이 떨어졌다. 1437년(세종 19) 세종이 興天寺를 중건하기 위하여 토목공사를 일으키자 太學生을 이끌고 부당함을 항소하다가 왕의 진노를 사매 北道로 귀양을 갔다.

 

그 뒤 풀려나 泰仁으로 가 집을 짓고 거처하며 집의 이름을 불우헌이라고 지었다. 불우헌 앞 泌水川 주변에 송죽을 심고 밭을 갈아 양성을 힘쓰면서 향리의 자제들을 모아 가르치는 한편으로 鄕約 契軸을 만들어 향리의 교화에 힘썼다. 한편, 정극인은 원래 廣州 두모포리 태생인데, 처가가 태인인 까닭으로 이곳에 우거하게 된 것이다. 宋世琳의 「洞中鄕飮酒序」 발문에도 애초의 태인 사람이 아니었음을 밝히고 있다.

 

1451년(문종 1) 천거로 廣興倉副丞이 되어 六品을 받았다. 이어 仁壽府丞으로 있다가 1453년(단종 1) 한성판관 成順祖의 권유로 殿試에 응시하여 金壽寧榜 丁科 13명에 들었다.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全州府敎授參賑事로 있다가 그 직을 사임하고 태인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 해 12월 조정에서는 仁順府丞錄으로서 佐翼原從功券 4등을 내렸다. 이로부터 다시 출사하여 약 10년간, 네 번의 성균관주부, 두 번의 宗學博士를 지냈고, 사헌부감찰 및 通禮門通贊 등을 역임했다.

 

1469년(예종 원년) 69세 때 태인현 훈도로 있다가 사간원헌납으로 다시 옮겨 朝散大夫行司諫院正言이 되었다. 또 불교를 배척하는 논의를 하다가 하옥되기도 했으나 오래지 않아 석방됐다.

 

1470년(성종 1) 나이가 많음을 이유로 관직을 사양하고 귀향해 후진을 양성했다. 1472년 벼슬에 뜻을 접고 향리의 자제를 열심히 가르친 공으로 3품 산관(散官)이 내려지자 이에 감격해 「不憂軒歌」 · 「不憂軒曲」을 지어 송축했다. 1481(성종 12)년 81세의 나이로 죽었다.

 

비록 환로의 영달은 없었으나 선비로서의 청렴한 삶을 고수했고, 검소하며 소박한 삶을 살았다. 문학에 특출한 재능을 보여 최초의 가사 작품으로 알려진 「상춘곡」과 短歌 「불우헌가」, 景幾體歌의 「불우헌곡」 등을 지어 한국시가사에 공헌했다. 특히 「불우헌가」 · 「불우헌곡」은 모두 우리말을 사용하여 지음으로써 국문학사에 큰 의미가 있다.

 

문집으로 『不憂軒集』2권 1책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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