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文章 269

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73. 인체 시계

현대 생활에서 시계를 갖는다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일이지만 시계에 갇혀진 몸이 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 현대를 사는 지혜랄 것이다. 이미 돌아가신지 20여 년이 됐지만 통도사(通度寺)에 구하(九河)라는 법명의 고승(高僧)이 있었다. 한말(韓末)에 이등박문(伊藤博文, 이토 히로부미)에 붙어 요염을 부렸던 배정자(裵貞子)와 더불어 통도사에서 동승(童僧) 생활을 했다던 분인지라 노쇠하여 눈도 안 보이고 귀도 들리지 않으며 오로지 觸覺과 영감(靈感)만이 살아 있을 때 만나뵌 적이 있다. 스님은 빗물을 손바닥에 받아보는 것만으로 이 비 끝에 어느 법당 앞의 모란이 꽃망울을 터뜨릴 것이라고 하고, 아침 안개를 얼굴에 쐬어보고 종각 곁의 단풍이 오늘부터 붉어지기 시작할 것이라는 등 시후(時候)를 단 하루도 어김없이 ..

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72. 호사다마

앞으로 닥칠 일을 예견케 하는 조짐이 나쁘면 좋은 미래가, 그 조짐이 좋으면 나쁜 미래가 약속된다는 相反 思考가 우리 한국인의 독특한 사고방식으로 정착돼 내려 왔던 것이다. 성종 때 학자 성현(成俔, 1439~1504)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 이런 이야기가 적혀 있다. 성안에 소문난 점가(占家)가 있어 과거를 앞둔 세 명의 서생이 흉몽을 꾸고 夢占을 치러 찾아왔다. 때마침 그 점장이가 출타 중이라 그의 아들에게 해몽을 의뢰했다. 한 서생이 거울이 땅에 떨어져 깨진 파경(破鏡)의 꿈을, 다른 서생이 강풍이 불어 떨어지는 낙화(落花)의 꿈을, 그리고 나머지 서생이 허수아비가 거꾸로 매달린 꿈을 이야기하자 모두 상서롭지 못한 꿈으로 해몽을 했다. 낙심하고 있는데 그의 아버지가 돌아왔다. 꿈 이야기를 듣고 ..

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71. 일찍 일어나는 한국인

우리 한국인은 별을 보고 그 많은 손을 요구하는 들에 나아가, 별을 보고 들어와야 했으며 이 한국적인 농경 구조가 한국인으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유수한 조기 민족으로 만들어줌 직하다. 한국인의 노동관의 한 특성으로 부지런하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우리 한국인이 별나게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조기민족(早起民族)인 것도 이 같은 부지런하다는 노동관의 한 나타남이라고 본다. 얼핏 보기에 부지런하다는 것은 시나브로이즘과 배치되고 모순되는 행동방식 같으나 한국의 농사가 시한에 쫓긴다는 구조적 특성에서 형성된 양면성의 노동관으로 봐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의식구조란 절대적이라기보다 상황에 따라 정반대로도 나타날 수 있는 상대적인 것이기에 모순된 것끼리도 공존하기 때문이다. 상황이나 시대의 여건에 따라 어떤 것이 강하..

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70. 삭은 맛과 맛난 맛

옷은 양복을 입고 사는 데 저항을 못 느끼고, 집도 양옥에 사는 데 저항을 못 느끼며, 사고도서양의 사고에 곧잘 적응하면서 유독 먹는 것만은 적응, 동화하지 못하는 것일까. 흔히들 서양 사람들은 네 가지 맛밖에 모르고 중국 사람들은 다섯 가지 맛밖에 모르는 데 비해 한국 사람들은 여섯 가지 맛을 안다고 한다. 서양 사람들은 단맛, 신맛, 짠맛, 매운맛의 네 가지 맛이요, 중국사람들은 이 네 맛에 쓴맛이 더해 다섯 맛이 된다. 곧 다섯 맛을 조화시킨다는 '오미조화(五味調和)'가 중국 요리의 기본이 되고 있다. 이에 비해 한국 사람은 이 외국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삭은 맛'을 더 맛보고 살아왔다. 삭은 맛이란 쉽게 이야기해서 김치가 알맞게 익었을 때 나는 맛이다. 김치류나 된장, 간장, 고추장, 그리고 젓갈..

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69. 오래 묵을수록 맛난 장맛

옛날 우리 선조들은 1백여 년 그러니까 자손 3대까지 물려가며 묵은 된장을 먹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간장은 5년 10년 묵혀 먹는 것이 관례였었다. 흔히들 우리 선조들을 두고 독창성이 없었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우리 한국인들이 우리 자신의 것을 잘 관찰해보지 않고 하는 말에 불과하다. 먹는 것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우리 선조들처럼 가짓수 많고 변화 많은 음식을 먹어 본 민족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일 것이다. 이같이 많고 변화있는 음식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집요한 실험 정신과 체험에 의한 독창적인 발상 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이를테면 소금 하나를 놓고 보아도 자명해진다. 오늘날 우리들이 먹고 있는 소금은 이온분해법으로 만들어 낸 순수한 염화나트륨이다. 보기에도 희고 깨끗하고 염분의 순도도 높다. 보..

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68. 싸리나무 기둥

과학적으로 산답시고 순도 높은 염화나트륨을 만들어 먹는 현대인과 거친 소금을 먹었던 우리 선조들과 어느 편이 더 과학적인가는 자명해질 줄 안다. 자연에 협조하면서 자연을 극복하는 과학적 지혜는 그 밖에도 많다. 마을이 취락하면 반드시 그 마을 앞에는 숲이 조성돼 있게 마련이다. 이 마을 앞 숲은 다목적이다. 차가운 바람을 막는 방풍(防風)의 구실, 그리고 마을이 외부에 노출되지 않게끔 가리는 구실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를 여행하면서 퍽 흥미있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경기도에서 북상할수록 이 마을 앞 방풍림(防風林)이 느티나무나 상수리나무 등 가을에 잎이 지는 낙엽수로 되어 있고 충청도에서 경상도나 전라도로 남하할수록 이 방풍림은 소나무나 잣나무 그리고 대나무 같은 겨울에도 잎이 지지 않는 상록..

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67.삼국시대의 과학자

과학적 두뇌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그 과학적인 두뇌를 개발하고 체계화하는 능력이 서양사람에 비해 모자랐을 뿐, 과학적인 두뇌는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흔히들 서양 사람들은 과학적이고 한국 사람들은 비과학적이라고들 말들 한다. 온 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서양 과학의 원점(原點)은 자연이란 정복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데서 비롯되고있다. 지금 우리들은 이 같은 서양의 발상에 길들어 있기에 사람의 힘은 자연의 힘에 미치지 못한다는 원점에서 시작된 우리 선조들의 발상을 비과학적이라고 깔보는 데 예외가 없다. 하지만 우리 선조들은 과학이란 말로 부르지 않았을 뿐이요, 실은 고도의 과학적 지혜로 각각이 변하는 자연에 대응해서 살아왔던 것이다. 그 가운데 하나로써 바닷가에 배를 대기 위한 방파제의 축조를 들..

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66.제너럴 셔먼 호의 복원

한말에 우리나라에 와 있었던 알렌 미국공사는 만약 물리학이 유럽만큼 발달해 있었다면 한국인은 유럽에 백여 년은 앞서서 증기기관을 발명해냈을 것이라고 감탄했다. 한말 대원군이 집정하고 있을 때 제너럴 셔먼호라는 미국 상선이 평양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무역을 강요한 일이 있었다. 그 배는 화륜선이라 불리었던 증기 기관의 기선이었다. 당시 국책이 외국과 무역해서는 안 되게끔 되어 있었기에 거부를 하자 이 무장한 승무원들이 횡포를 부렸고 이에 평양감사였던 박규수(朴珪壽)는 화공법(火攻法)을 써서 이 제너럴 셔먼호를 불태워 버렸던 것이다. 그런 일이 있은 지 얼마 후 프랑스 함대와 미국 함대의 영토 공격이 잇따랐으며 대원군은 이 신무기인 화륜선의 위력을 실감하고 우리나라에서도 이 증기선을 만들어 볼 맘을 먹었던..

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65. 1592년형 조선 비행기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기는 과학적인 근거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분명하다. 비행기의 시조는 라이트형제가 아니라 그보다 몇백 년 앞선 우리 한국의 선조들이었던 것이다. 이미 임진왜란 때 우리 선조들이 비행기를 만들어 썼다면 곧이듣지 않을 것이다. 호남 순창에 신경준(申景濬)이란 선비가 있었다. 신숙주(申叔舟)의 형제인 신말주(申末舟, 1429~1503)의 후손되는 사람이다. 이분이 각종 수레를 발달시켜 교통을 편하게 하고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는데 그 상소문 속에 비행기 이야기가 나온다. 임진왜란 때 진주성은 왜군에 완전 포위되어 성 안 사람들은 독 안에 든 쥐가 되어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을 때 일이다. 궁하면 통한다는 말도 있듯이, 성안에 어느 한 재간 있는 사람이 날아다니는 수레를 만들어 ..

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64.젓가락과 포크

서양사람들은 기도할 때 그저 손을 맞붙이거나 맞쥐고 허공을 응시하는 그래서 눈으로 신을 보려 하는데, 한국사람들은 두손을 닳도록 비비대는 이유도 손으로 신을 잡으려 하기 때문이다. 우리 옛 어머니들에게 있어 옷을 누빈다는 것은 시집살이 등 한국여성의 쓰라린 조건이 주는 괴로움, 슬픔, 아픔을 인내케 하는 정신적 인고 습속이었던 것이다. 인고전이라 하여 심적인 괴로움이 있을 때마다 엽전을 표면이 닳도록 손에 굴리며 참는 습속이 있었듯이 이누비 습속을 인고봉이라 불렀으며 여자 평생에 누비옷 몇 벌씩 짓는다는 건 상식이었던 것이다. 어떤 똑같은 일의 계속적인 되풀이는 괴로움이나 슬픔을 참는 방편으로 효과적이라는 것은 현대심리학에서도 입증되고 있지만, 너무나 괴로움이 잦았던 우리 옛 부녀자들이 눈물을 흘리기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