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생활에서 시계를 갖는다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일이지만 시계에 갇혀진 몸이 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 현대를 사는 지혜랄 것이다. 이미 돌아가신지 20여 년이 됐지만 통도사(通度寺)에 구하(九河)라는 법명의 고승(高僧)이 있었다. 한말(韓末)에 이등박문(伊藤博文, 이토 히로부미)에 붙어 요염을 부렸던 배정자(裵貞子)와 더불어 통도사에서 동승(童僧) 생활을 했다던 분인지라 노쇠하여 눈도 안 보이고 귀도 들리지 않으며 오로지 觸覺과 영감(靈感)만이 살아 있을 때 만나뵌 적이 있다. 스님은 빗물을 손바닥에 받아보는 것만으로 이 비 끝에 어느 법당 앞의 모란이 꽃망울을 터뜨릴 것이라고 하고, 아침 안개를 얼굴에 쐬어보고 종각 곁의 단풍이 오늘부터 붉어지기 시작할 것이라는 등 시후(時候)를 단 하루도 어김없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