小學集註(소학집주) 431

8-6-3-66. 외편 - 선행 - 실경신 - 第六十六章

范文正公 少有大節 其於富貴貧賤毁譽歡戚 不一動其心 而慨然有志於天下. 范文正公[范仲淹]은 젊어서 큰 절개가 있어, 富貴貧賤毁譽歡戚에 대하여 한 번도 그 마음을 동요하지 않고, 慨然히 천하에 뜻을 두었다. 嘗自誦曰 士當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也 《歐陽文忠公文集》〈碑銘〉 일찍이 스스로 말하였다. “선비는 마땅히 천하 사람들의 근심에 앞서서 근심해야 하고, 천하 사람들의 즐거움에 뒤서서 즐거워해야 한다.” 【增註】 不一動其心 謂富貴不慕 貧賤不厭 毁之不怒 譽之不喜 得而不歡 失而不戚也. 不一動其心은 부귀를 사모하지 않고 빈천을 싫어하지 않으며, 비방해도 노여워하지 않고 칭찬해도 기뻐하지 않으며, 얻어도 즐거워하지 않고 잃어도 근심하지 않음을 이른다. 天下未憂而先憂 天下已樂而後樂 천하가 근심하기 전에 먼저 근심하고..

8-6-3-65. 외편 - 선행 - 실경신 - 第六十五章

王文正公 發解南省廷試 皆爲首冠 或之曰 壯元試三場 一生喫著 不盡. 王文正公이 發解·南省·廷試에서 모두 首冠[수석]이 되었는데, 혹자가 희롱하였다. “三場에서 시험을 보아 장원하였으니, 일생토록 먹고 입음이 다하지 않겠다.” ▶ 發解南省廷試 : 發解는 州縣의 시험에서 우수자가 있으면, 그 지방관청으로부터 解라는 공문서를 중앙에 발송하고, 다시 그 사람들을 서울에서 시험을 보게 하는 것으로, 明·淸代에는 鄕試에 합격함을 곧바로 칭하기도 하였다. 南省은 尙書省의 별칭으로 궁궐의 남쪽에 있다 하여 붙인 이름인데, 여기서는 尙書省에서 보이는 省試를 가리키는바, 후일의 會試에 해당하며, 廷試는 조정에서 시행하는 시험으로 후일의 殿試와 朝考에 해당한다. 公正色曰 曾平生之志不在溫飽 《宋名臣言行錄》 公은 정색하고 말하였다..

8-6-3-64. 외편 - 선행 - 실경신 - 第六十四章

柳玭曰 王相國涯方居相位 掌利權 竇氏女歸 請曰 玉工貨一釵 奇巧 須七十萬錢. 王曰 七十萬錢 我一月俸金耳 豈於女惜 但一釵七十萬 此妖物也 必與禍相隨. 女子不復敢言 《柳氏家訓》 柳玭이 말하였다. “王相國 涯가 정승 지위에 있으면서 利權을 관장하였는데, 竇氏에게 시집간 딸이 歸省하여 청하였다. ‘玉工이 한 비녀를 파는데 기이하고 정교한바, 70만 전을 받으려 합니다.’ 王相國은 말하였다. ‘70만 전은 나의 한달 봉급이니, 어찌 너에게 아깝겠는가마는 다만 비녀 한 개가 70만 전이면, 이는 요망한 물건이니, 반드시 禍가 서로 따르리라.’ 이에 딸은 다시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集解】 王涯 字廣津 唐文宗朝 拜相. 王涯는 字가 廣津이니, 唐나라 文宗朝에 정승에 제수되었다. 掌利權 謂居相位 又兼度支, 鹽鐵, 榷茶等使也..

8-6-3-63. 외편 - 선행 - 실경신 - 第六十三章

柳仲郢 以禮律身 居家無事 亦端坐拱手 出內齋 未嘗不束帶. 柳仲郢은 禮로써 몸을 다스려 집에 있을 적에 일이 없더라도 또한 단정히 앉아 拱手하며, 中門 안의 서재에서 나올 때는 띠를 묶지 않은 적이 없었다. 三爲大鎭 廐無良馬 衣不薰香 公退 必讀書 手不釋卷 《柳氏家訓》 세 번 큰 藩鎭을 맡았으나 마구간에는 좋은 말이 없었고, 옷은 향내를 풍기지 않았으며, 공무에서 물러 나오면 항상 책을 읽어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集解】 仲郢 嘗爲山南劍南天平三道節度使 故 曰三爲大鎭. 仲郢이 일찍이 山南·劍南·天平 3道의 절도사가 되었으므로, 세 번 큰 藩鎭을 맡았다고 하였다. 家法 在官不奏祥瑞 不度僧道 不貸贓吏法. 家法에 관직에 있음에 상서로움을 아뢰지 않으며, 중과 도사에게 度牒을 발부하지 않았으며, 不正한 관리로서 ..

8-6-3-62. 외편 - 선행 - 실경신 - 第六十二章

柳公綽居外藩 其子每入境 郡邑未嘗知 旣至 每出入 常於戟門外下馬 呼幕賓爲丈 皆許納拜 未嘗笑語款洽 《柳氏家訓》 柳公綽이 外藩에 있을 적에 그 아들이 경내로 들어올 때마다 郡邑에서는 이것을 안 적이 없었고, (아들이) 오고 나서는 매양 출입함에 항상 戟門 밖에서 말을 내렸으며, 막하의 손님을 어른이라 부르고 모두 절을 받도록 허락하고, 일찍이 웃으며 말하거나 다정하고 흐뭇하게 대하지 않았다. 【集說】 陳氏曰 外藩 謂節度使 取屛蔽之義也. 其門 得列戟 故曰戟門. 納 受也 陳氏가 말하였다. “外藩은 절도사를 이르니, 병풍처럼 가리우는 뜻을 취한 것이다. 그 문에 창을 늘어놓기 때문에 戟門이라고 말한다. 納은 받음이다.

8-6-3-61. 외편 - 선행 - 실경신 - 第六十一章

孔戡 於爲義 若嗜慾 不顧前後 於利與祿 則畏避退怯 如懦夫然 《昌黎集》〈墓誌〉 孔戡은 義를 행함에는 욕심을 내듯이 하여 앞뒤를 돌아보지 않았으며, 이익과 봉록에는 두려워 피하고 물러나 겁내니, 마치 나약한 사내 같았다. 【集解】 戡 字君勝 孔子三十八世孫. 戡은 字가 君勝이니, 孔子의 38세손이다. 【增註】 懦 柔弱也. 懦는 유약함이다. 言其勇於爲義而怯於趨利祿也 그가 義를 행함에 용감하고, 利와 祿에 달려감을 겁냈다는 말이다.

8-6-3-60. 외편 - 선행 - 실경신 - 第六十章

王勃, 楊炯, 盧照隣, 駱賓王 皆有文名 謂之四傑 裵行儉曰 士之致遠 先器識而後文藝 勃等雖有文才 而浮躁淺露 豈享爵祿之器耶? 楊子沈靜 應得令長 餘得令終 爲幸. 王勃·楊炯·盧照隣·駱賓王은 모두 문학으로 명성이 있어, 이들을 四傑이라고 일렀는데, 裵行儉이 말하였다. “선비가 원대함에 이름은 器局과 識見을 우선하고 문예를 뒤에 두어야 하는데, 王勃 등에게 비록 文才가 있으나 가볍고 조급하며 淺近하여 노출되니, 어찌 爵祿을 누릴 수 있는 기국이겠는가? 楊子는 침착하고 안정되니 마땅히 令長[守令]을 얻을 수 있겠지만, 나머지는 좋은 죽음을 얻으면 다행이다.” 其後 勃溺南海 照隣投潁水 賓王被誅 炯終盈川令 皆如行儉之言 《唐書》〈裵行儉列傳〉, 《資治通鑑》〈唐紀〉 그 후 王勃은 남해에 빠져 죽었고, 盧照隣은 潁水에 투신하였고..

8-6-3-59. 외편 - 선행 - 실경신 - 第五十九章

陶侃 爲廣州刺史 在州無事 輒朝運百甓於齋外 莫運於齋內. 陶侃이 廣州刺史가 되어 州에 있으면서 일이 없으면, 그때마다 아침에 백 개의 벽돌을 집 밖으로 옮기고, 저녁에는 집 안으로 옮겼다. 人 問其故 答曰 吾方致力中原 過爾優逸 恐不堪事.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묻자, 대답하였다. “내 장차 중원에 힘을 다하려 하는데, 지나치게 편안하면 일을 감당하지 못할까 염려하기 때문이다.” 其勵志勤力 皆此類也 《晉書》〈陶侃列傳〉 그가 뜻을 힘쓰고 노력을 부지런히 함이 모두 이러한 部類였다. 【集說】 陳氏曰 侃 字士行 鄱陽人 仕至太尉. 甓磚也 時 中原之地爲劉石所據 侃欲致力興復 故 朝夕運 以習勞也 陳氏가 말하였다. “侃은 字가 士行이니, 鄱陽 사람으로 벼슬이 太尉에 이르렀다.. 甓은 벽돌이다. 당시에 中原의 땅이 劉曜와 石勒에..

8-6-3-58. 외편 - 선행 - 실경신 - 第五十八章

茅容 與等輩 避雨樹下 衆皆夷踞相對 容獨危坐愈恭. 茅容이 같은 무리와 나무 아래에서 비를 피하였는데, 사람들은 모두 편안히 걸터앉아 서로 대하였으나, 茅容은 홀로 무릎 꿇고 앉아 더욱 공손하였다. 郭林宗行見之 而奇其異 遂與共言 因請寓宿. 郭林宗이 지나가다가 이를 보고, 그의 특이함을 남달리 여겨 함께 말을 나누니 인하여 그의 집에 유숙하기를 청하였다. 旦日 容殺雞爲饌 林宗 謂爲己設 旣而供其母 自以草蔬 與客同飯. 다음 날 아침 茅容이 닭을 잡아 반찬을 만들자, 郭林宗은 자기를 위하여 마련하였다고 생각하였는데, 조금 후에 그의 어머니에게 공양하고 자신은 채소로써 손님과 함께 밥을 먹었다. 林宗 起 拜之曰 卿 賢乎哉. 郭林宗은 일어나 절하고 말하였다. “卿[그대]은 어질구려.” 因勸令學 卒以成德 《後漢書》〈郭泰..

8-6-3-57. 외편 - 선행 - 실경신 - 第五十七章

楊震所擧荊州茂才王密 爲昌邑令. 楊震이 천거하였던 荊州의 茂才 王密이 昌邑令이 되었다. ▶ 茂才: 漢代에 인물을 천거하여 등용하던 科目으로, 원래는 秀才라 하였으나 뒤에 光武帝 劉秀의 諱를 피하여 개칭되었다. 謁見 懷金十斤 以遺震 震曰 故人知君 君不知故人 何也? 楊震을 알현함에 황금 10근을 품고 가서 楊震에게 바치자, 楊震이 말하였다. “故人[나]은 그대를 아는데, 그대는 故人을 알지 못함은 무엇 때문인가?” 密曰 莫夜 無知者. 王密이 말하였다. “늦은 밤이어서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震曰 天知神知我知子知 何謂無知. 楊震이 말하였다. “하늘이 알고 귀신이 알고 내가 알고 그대가 아는데, 어찌 아는 이가 없다고 말하는가?” 密 愧而去 《後漢書》〈楊震列傳〉 王密이 부끄러워하며 떠났다. 【集說】 陳氏曰 震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