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史記/列傳 (70)
耽古樓主의 한문과 고전 공부
季布欒布列傳은 西漢 초기의 名臣 季布와 欒布의 합전이다. 계포와 난포의 행적 외에 季心과 丁公의 행적도 기술하였다. 1.季布 季布는 楚 사람으로 項羽의 武將으로 있으면서 漢의 高祖 유방과 싸울 때 많은 전공을 올렸지만 項羽가 패하자 유방이 현상금을 걸고 그를 수배하였다. 추적의 손길이 뻗치자 스스로 노예가 되어 魯의 朱家에게 팔려갔다. 주가도 이 노예가 계포임을 알아보고 滕公 夏侯嬰을 설득하여 유방에게 간언케 하매, 高祖 유방이 사면하여 郎中이 되었으며, 惠帝 때에는 中郞將이 되었다. 계포는 체면을 소중히 여기고 신의를 지키는 任俠으로 알려져, 한번 허락한 이상 그 약속은 반드시 지켰다. 楚 사람들은 이런 그를 두고 “황금 백근을 얻는 것이 계포의 일낙을 얻는 것만 못하다(得黃金百斤, 不如得季布一諾.)”..
이篇은 漢의 초엽에 주요 관료였던 劉敬과 叔孫通의 合傳이다. 1. 劉敬劉敬은 前漢 때 齊 사람으로 본래의 姓은 婁였는데, 漢高祖 때 長安으로 도읍을 정할 것을 주장하여 高祖가 이를 받아들이고 劉氏 성을 하사하여 劉敬이라 불리고 奉春君에 봉해졌다.나중에 關內侯에 봉해졌고, 建信侯란 호를 받았다. 高祖가 白登에서 匈奴의 冒頓單于에게 패한 뒤 북방의 변란 때문에 괴로워할 때 화친정책을 제안하고 사신으로 가서 조약을 매듭지었다. 劉敬者,齊人也。劉敬은 齊 사람이다.漢五年,戍隴西,過洛陽,高帝在焉。漢高帝 5년(기원전 202년), 隴西로 수자리를 가면서 낙양에 들렀는데, 高帝도 그곳에 있었다.婁敬脫輓輅,衣其羊裘,見齊人虞將軍曰:「臣願見上言便事。」婁敬은 몰고 가던 수레의 횡목을 풀어 놓고 양가죽 갖옷을 입고 齊 출신 虞..
이篇은 秦 말기 陳勝·吳廣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高祖 유방의 近衛侍從官員이었던 傅寬, 靳歙, 蒯成侯 周緤에 대한 合傳이다. 1.傅寬 傅寬(? ~ 기원전 190년)은 前漢의 개국 공신이며 魏 五大夫 기병대장이었다가 유방에게 귀순하여 秦과의 전투에서 공을 세워 경의 작위를 받았다. 韓信, 조참 등이 이끄는 齊 정복 전쟁에 참여하여 공적을 세워 식읍이 늘었고, 齊가 완전히 평정되자 漢王 6년(기원전 201년)에 陽陵侯에 봉해졌다. 高帝 11년 곧 齊 도혜왕 5년(기원전 196년), 齊의 相國이 되었다. 4월에 周勃에 속하여 진희의 난 진압에 나섰고, 1월에는 代의 相國으로 전임하였다. 孝惠帝 5년( 기원전 190년) 노환으로 죽었다. 시호는 景侯이다. 陽陵侯傅寬,以魏五大夫騎將從,為舍人,起橫陽。 陽陵侯 傅寬은 ..
이篇은 酈生 酈食其, 陸生 陸賈, 平原君 朱建 세 사람의 합전이다. 세 사람은 秦 말기 및 전한 초기의 達辯家임이 공통점이다. 酈生의 이름은 食其이며, 陳留 高陽 출신이다. 秦 말기에 가난하고 미천한 출신이었으나 유방을 설득하여 참모이자 說客이 되었으며, 漢高祖를 도와 제후를 설득하여 끌어들이는 외교 활동에서 큰 공을 세웠다. 齊王 田廣에게 漢에 복속하라고 설득하기 위하여 齊에 머물다가, 공을 탐한 韓信이 齊를 침공하자 역이기에게 속았다고 분노한 齊王에게 烹殺되었다. 이편의 마지막 부분에는 酈生과 高祖 유방이 만나는 모습을 재차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1. 酈食其 酈生食其者,陳留高陽人也。 酈生 食其는 陳留 高陽 사람이다. 好讀書,家貧落魄,無以為衣食業,為里監門吏。 독서를 좋아하였으나 집안이 가난하여 뜻한 ..
張丞相列傳은 西漢 초의 대신 張蒼, 周昌, 任敖, 申屠嘉 네 명에 대한 合傳이다. 사마천이 서한의 사학가였으므로 서한의 재상들에 대하여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후반부에는 魏相, 邴吉, 黃霸, 匡衡에 대하여 추가로 실려 있다. 이것은 사마천의 기록이 아니고, 나중에 褚小孫이 덧붙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征和(漢武帝의 열 번째 年號) 시기 이후의 기록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태사공 사마천은 張蒼은 문학·음률·역법에 뛰어난 漢의 명재상이었으며, 周昌은 강직하고 성실한 사람이었고, 任敖는 옛날의 은덕으로 인해 등용되었으며, 申屠嘉는 강직해 절조를 지켰다고 하였다. 1.張蒼 張丞相蒼者,陽武人也。 승상 張蒼은 陽武 사람이다. 好書律歷。 圖書·音律·曆法을 좋아하였다. 秦時為御史,主柱下方書。 秦 때 御史가 되어 황궁..
樊酈滕灌列傳은 樊噲, 酈商, 滕公 夏侯嬰, 灌嬰 네 사람의 合傳이다. 이 네 사람은 모두 유방의 휘하에서 武功을 세운 장수들이며, 미천한 신분이었다가 秦 말기의 혼란한 틈을 타서 영웅이 됨이 공통점이다. 이편에서는 주로 네 사람의 공적을 기술하고 있다. 樊噲는 沛縣 출신으로 원래 개고기를 파는 미천한 신분이었으나 劉邦이 군사를 일으킬 때 무장으로서 용맹을 떨쳐 공을 세웠다. 유방과 項羽의 鴻門의 연회에서 유방이 項羽에게 살해될 위기에서 극적으로 유방을 구해내었다. 유방이 皇帝로 즉위한 뒤 左丞相, 相國이 되었으며 그 후 여러 반란을 평정하였으며 舞陽侯에 봉해졌다. 1.樊噲 舞陽侯樊噲者,沛人也。 舞陽候 樊噲는 沛縣 사람이다. 以屠狗為事,與高祖俱隱。 개 도살을 생업으로 하면서 高祖와 함께 은둔하고 있었다. ..
田儋列傳은 초한전쟁시 齊의 田氏 일가의 合傳이다. 齊 狄縣 출신인 田儋은 옛 齊의 왕족으로 齊가 秦에 의해 패망한 후 사촌동생 田榮, 田橫과 狄縣으로 이주하여 강성한 종족을 거느리며 세력을 형성하였ek. 田儋이 齊의 왕위에 오른 후 章邯이 魏王 魏咎를 공격하여 臨濟를 포위하자, 田儋과 楚王의 군대가 魏를 구원하러 출진하였으나 장한의 야습에 패배해 田儋은 임제에서 죽고 말았다. 이 편에서는 田儋과 그의 사촌 동생 田榮, 田橫이 차례로 왕이 되었다가 패망하는 과정이 실려 있다. 1.田儋 田儋者,狄人也,故齊王田氏族也。 田儋은 狄縣 출신으로 옛 齊王족 田氏 一族이다. 儋從弟田榮,榮弟田橫,皆豪,宗彊,能得人。 田儋의 從弟 田榮과 田榮의 동생 田橫은 모두 호걸이었고 종족이 강성하여 민심을 얻었다. 陳涉之初起王楚也,..
韓信盧綰列傳은 韓王 韓信과 盧綰, 陳豨 세 사람의 合傳이다. 세 사람은 각각 흉노와 연합하여 漢에 반란을 일으킨 공통점이 있다. 韓王 韓信은 史記 권92 淮陰侯列傳에서의 淮陰侯 韓信과 同名異人으로 같은 시기에 살았으므로 혼동되고 있어 회음후 韓信과 구별하기 위하여 韓王 信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韓王 韓信은 秦 말기에서 漢 초기 사이의 인물로 성은 姬, 씨는 韓, 이름은 信이다. 전국시대 韓襄王의 후손으로, 漢의 高祖 유방에 의해 韓王으로 봉해졌으나 흉노와 화친하려고 함에 오해를 받자, 흉노의 군대를 이끌고 漢의 변경을 쳐들어갔다. 韓信은 기원전 196년 봄에 다시 흉노의 기병을 이끌고 參合을 점령하였으나, 柴武가 이끄는 漢軍에 패하고 붙잡혀 참수되었다. 1.韓信 韓王信者,故韓襄王孽孫也,長八尺五寸。 韓王 ..
韓信( ? ~ 기원전 196년)은 前漢의 장군이자 제후이다. 회음현 출신으로 유방의 부하로 있을 때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해, 유방의 패권을 결정지었다. 漢初三傑 중 하나로 꼽히며, 蕭何가 國士無雙이라고 일컬은 명장이다. 기원전 206년 유방이 項羽에게 漢王으로 봉해지자 漢中으로 함께 갔다. 그곳에서 韓信은 漢王에게 항우와 천하를 놓고 다툴 것을 건의하였다. 해하 전투에서 항우를 제압하면서 세운 공을 인정받아 제왕에 이어 초왕이 되었으나 반란을 꾀하다가 회음후로 격하되었다가 여태후에 의해 참수형에 처해지고 삼족이 멸족되었다. 회음후열전에서 나오는 一飯千金, 胯下之辱, 兎死狗烹 등이 유명한 고사성어이다. 淮陰侯韓信者,淮陰人也。 淮陰侯 韓信은 淮陰 사람이다. 始為布衣時,貧無行,不得推擇為吏,又不能治生商賈,常從人..
黥布는 본명이 英布(미상 ~ BC 195년)이며, 前漢 六安 六縣 사람으로 법을 어겨 黥刑을 당해 黥布로 불렸다. 劉邦을 도와 전한을 세운 장군이다. 秦 말 陳勝의 난이 일어나자 무리를 이끌고 番君에 귀의했다가 후에 項梁에게 의탁했으며, 項梁이 죽자 項羽에게 귀속하였다. 전투 때마다 항상 적은 병력으로 많은 적군을 물리쳤다. 항우를 따라 入關한 뒤 九江王에 봉해졌으며, 항우의 명령에 따라 衡山王 吳芮와 함께 楚懷王 義帝를 죽였다. 楚漢 전쟁 중에 漢이 그를 설득하자 漢으로 귀순하였다. 淮南王에 봉해졌고, 유방을 따라 垓下 전투에서 항우를 격파하였다. 漢이 선 뒤 韓信과 彭越 등 개국 공신들이 하나하나 피살되자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강남으로 달아났다가 長沙王에게 유인되어 誅殺되었다. 黥布者,六人也,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