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耽古樓主의 한문과 고전 공부
본 편은 汲黯과 鄭當時의 合傳이다. 두 사람은 漢武帝 때 九卿을 지냈으며, 모두 청렴하고 直諫을 잘하여 좌천을 당하기도 하였다. 사마천은 평하였다. “정장과 급암이 처음으로 구경의 반열에 올랐을 때 청렴하고 집안에서의 행실이 결백하였다. 이 두 사람이 모두 중도에 파직됨에, 그들의 집이 청빈했기에 빈객들은 점차적으로 떨어져 나갔다. 모두 한 郡을 다스렸으나, 죽은 뒤에 집안에 남긴 재산이라곤 없었다.” 1. 汲黯 汲黯은 前漢의 관료로 자는 長儒이며 濮陽縣 사람이다. 漢의 景帝와 武帝 때 太子洗馬와 主爵都尉 등을 지냈다. 그는 황제 앞에서도 직언을 서슴지 않았으며, 黃老之道와 무위의 정치를 주장하였으나 황제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자, 회양태수를 마지막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汲黯字長孺,濮陽人也。 汲黯의 字는 ..
이 편은 춘추전국시대의 선량한 관리 다섯 명의 사적을 기록한 것이다. 循吏란 법을 잘 지키는 선량한 관리를 말하며 다섯 명 중 네 명은 재상이며 한 명은 법관이다. 사마천은 “孫叔敖는 한마디의 말로써 郢都의 시장 질서를 회복시켰다. 鄭子産이 병으로 죽자 鄭 백성은 목 놓아 슬피 울었다. 公儀休는 집안에서 좋은 베를 짜는 것을 보고 베 짜는 아낙네를 내쫓았다. 石奢는 자기 아버지를 놓아주고 자결함으로써 楚昭王의 대의명분을 세워주었다. 李離는 판결을 잘못 내려 사람을 죽이자 칼로 자결함으로써 晋文公이 국법을 바로잡을 수 있게 하였다.”라고 평하였다. 1. 司馬遷의 序論 太史公曰: 태사공은 말한다. 法令所以導民也,刑罰所以禁姦也。 “법령이란 백성을 善으로 인도하기 위한 수단이고, 형벌이란 사악한 행위를 금하기 ..
본 편은 회남 淮南 厲王 劉長과 그의 아들인 淮南王 劉安, 衡山王 劉賜의 合傳이다. 이들이 劉氏의 제후왕으로 世家에 기록되어야 하지만 吳王濞列傳과 마찬가지로 열전에 기록된 것은 반역의 죄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1. 淮南 厲王 劉長 회남 여왕 유장은 高祖의 서얼 막내였으며, 漢文帝와는 아버지가 같고 어머니가 다른 형제지간이다. 高帝 11년(기원전 196년), 회남왕 영포가 반란을 일으켰고, 유장은 영포를 대신하여 회남왕에 봉해졌다. 유장은 장성하여 솥을 들어 올릴 정도로 힘이 셌으며, 문제가 즉위한 후 유장은 자신이 문제와 가장 친밀한 황족임을 들먹여 교만해지고 법을 어기는 경우가 많았다. 회남 여왕 23년(기원전 174년), 유장은 柴奇 등과 반란을 획책하다가 발각되었는데, 文帝는 유장의 목숨을 살려..
司馬相如列傳은 前漢의 저명한 문학가인 사마상여의 전기이다.사마상여(기원전 179년~기원전 117년)의 字는 長卿이며 四川省 成都 출신이다.전국시대의 명재상인 藺相如를 흠모하여 相如로 이름을 바꿨다.어렸을 때 독서와 擊劍을 좋아하였으며 이십 여세 때 漢景帝의 경위인 武騎常侍가 되었다. 임공현의 부자인 卓王孫의 딸 文君과 결혼하여 부유하게 되었다.‘子虛賦’로 무제의 칭송을 받고 부름을 받아 중랑장이 되어 愼과 夜郎에 부임하여 서남의 蠻夷 땅에서 공적을 올렸다. 이 편에서는 사마상여의 작품 중 〈子虛賦〉, 〈上林賦〉, 〈大人賦〉 등을 소개하였다.사마천은 평하기를, 사마상여의 글은 비록 공허한 문자와 함부로 하는 말이 많으나 그 취지는 절약과 검소에 귀착된다. 이것이 의 諷諫과 무엇이 차이가 있겠는가? 라고 하..
西南夷列傳은 중국의 서남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소수 민족인 西南夷의 위치와 풍속 등에 대하여 기록하였으며, 漢武帝에 이르러 이들을 평정하는 과정을 기록하였다. 그 가운데 비교적 큰 것이 夜郞·滇이었다. 이들 민족의 발전은 다 같지 않았으나, 그 가운데 滇이 한문화의 영향을 받아 비교적 발달되었다. 이들은 남월과 인도로 왕래하고 있었는데, 무제 때 唐蒙을 야랑에 파견하자 야랑은 漢에 예속되어 이곳에 군을 두게 되었다. 또 司馬相如를 보내 이곳을 漢의 촉군에 편입시켜 서남 지방이 모두 漢의 수중에 들어왔다. 사마천은 漢이 西南夷를 정벌하여 많은 나라가 멸망당하였는데 오직 滇만이 다시 漢王의 총애를 받았다고 평하였다. 西南夷君長以什數,夜郎最大; 其西靡莫之屬以什數,滇最大; 自滇以北君長以什數,邛都最大: 此皆魋結,..
朝鮮列傳은 西漢 前期의 衛滿朝鮮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 燕 출신의 위만이 漢高祖 말기에 古朝鮮으로 도망하여 위만조선을 세웠다. 漢惠帝 3년(기원전 193년) 漢이 이를 승인하였으며, 漢武帝 元封 2년(기원전 109년) 사신 섭하가 古朝鮮軍에 살해됨을 빌미로 漢이 대대적으로 위만조선을 침공하였다. 漢과의 1년간의 전쟁 끝에 내분이 발생, 위만의 손자이자 古朝鮮의 마지막 왕인 우거왕이 살해되고, 성기가 주살당하면서 왕검성이 함락되어 기원전 108년에 멸망하고 그 땅에 낙랑, 현토, 진번, 임둔의 한사군이 설치되었다. 우리나라가 보는 역사적 관점에 異見이 있으나 이 편은 사기의 기록이라는 점을 감안하여야 한다. 朝鮮王滿者,故燕人也。 朝鮮의 왕 衛滿은 옛 燕의 사람이다. 自始全燕時嘗略屬真番、朝鮮,為置吏,筑鄣塞..
東越列傳은 동월의 변천사를 기록한 것이다. 東越은 東甌라고도 하며 閩越과 東甌 등 현재의 福建省과 절강성 남부에 거주하였던 越族의 일파이다. 秦 말기에서 漢 초에 민월국과 동해국이 동월로 바뀌었다. 秦의 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하자, 월왕 句踐의 후손인 민월왕 無諸를 폐하고, 이곳에 郢中郡을 설치하였다. 秦 말기에 無諸가 漢에 협조하여 漢 高祖가 무제를 왕으로 삼고 東冶를 도읍으로 삼아 閩越國을 세우게 하였다. 無諸의 후손인 郢이 東甌·南越 등의 주변 국가를 침범하여 漢武帝가 군사를 동원하여 민월을 공격하자, 영의 동생 餘善이 영을 죽이고 漢에 항복하였다. 얼마 뒤 여선이 東越國을 세웠는데, 漢에서도 이를 인정하였다. 기원전 110년 동월국도 건국한 지 약 20년 만에 멸망하였다. 閩越王無諸及越東海王搖者,其..
南越列傳은 趙佗가 남월을 건국하여 4대를 계승한 역사적 기록과 그간의 漢과의 관계 및 漢武帝가 남월을 공략하여 멸망시키고 漢이 직접 통치하게 된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越은 중국 浙江·福建·江西·廣東省에서 베트남 북부에 이르는 지역의 옛 이름으로 於越·閩越·楊越·南越·駱越 등 많은 소수민족의 총칭이다. 조타는 秦 말기 혼란기에 龍川縣令이었는데 남해郡尉가 되어 남해군과 그 주변 지역을 병합하고 秦의 멸망과 함께 桂林郡과 象郡의 2군을 합쳐 南越國을 창건하고 武王이라 칭하였다. 기원전 137년에 조타가 죽고, 그의 손자인 趙胡가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면서 남월에 대한 漢의 압박이 점차 강화되었다. 趙胡가 죽자 趙嬰齊가 뒤를 이었다가, 趙興이 왕위에 오르자 내란이 일어나 재상 呂嘉가 권력을 장악하고 漢에 入朝..
平津侯主父列傳은 平津侯 公孫弘과 主父偃의 合傳이다. 이 편의 후반부에는 徐樂과 嚴安이 무제에게 흉노 및 西南夷에 대한 정책을 상소한 글이 실려 있으며, 끝부분에 왕정군의 조서와 반고의 논평은 사마천의 원문이 아닌 후세 사람이 추가한 것이다. 사마천은 평진후 公孫弘은 行義가 뛰어났지만 시기도 잘 만났다고 하였으며, 主父偃이 요직에 있을 때, 사람들이 모두 사귀는 것을 명예롭게 생각하고 그를 칭송하였으나 그의 명성이 실추되어 사형을 당하자 모두 다투어 그의 악행을 비난하였다고 하였다. 1.公孫弘 평진후 공손홍은 漢武帝때 內史·御史大夫를 역임하였으며, 기원전 124년 丞相이 되고 平津侯에 봉해졌다. 淮南王·衡山王이 반란을 일으키자 책임을 지고 사임하려 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아 유임하였으며 그 이듬해 병사하..
이 篇은 漢將인 衛青과 霍去病 및 副將들에 대한 합전이다. 위청과 위청의 조카인 곽거병은 漢武帝 때 흉노를 정벌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장군들이다. 1.衛青 衛靑은 전한의 장군으로 자는 仲卿이며 平陽縣 사람으로 작위는 長平侯다. 누나가 무제의 황후 무사황후이다. 하급관리인 아버지 鄭季와 평양후의 첩인 衛媼의 사생아로 태어나 평양후의 집에서 가인으로 있다가 평양후의 기사가 되어 평양공주를 모셨다. 출세한 이후에 평양공주와 결혼하였다. 생질 곽거병과 함께 무제 때 흉노를 일곱 차례나 물리쳐 관직이 大司馬‧大將軍에 이르렀다. 大將軍衛青者,平陽人也。 大將軍 衛靑은 平陽縣 사람이다. 其父鄭季,為吏,給事平陽侯家,與侯妾衛媼通,生青。 그의 부친 鄭季는 관리가 되어 平陽侯 曹壽의 집에서 일하다가 평양후의 첩 衛媼과 사통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