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史記/列傳 (70)
耽古樓主의 한문과 고전 공부
이 편은 匈奴에 대한 역사적인 기록과 漢과 흉노와의 관계에 관한 기록이다. 匈奴가 기원전 3세기 말부터 기원후 1세기 말까지 몽골고원과 만리장성 일대를 중심으로 활약한 遊牧騎馬民族 및 그들이 형성한 북몽고와 중앙아시아 일대의 국가를 일컫는다. 이 편에서는 흉노에 대한 역사적 기록을 중국의 역사와 비교하였으며, 漢 초에는 흉노와 화친관계를 유지하였으나 漢武帝 때에 이르러 흉노와의 장기적인 전쟁으로 긴장관계를 유지하였음을 기록하였다. 사마천은 漢武帝 시대에 사기를 기록하였으므로 이 부분을 자세히 서술하였다. 匈奴,其先祖夏后氏之苗裔也,曰淳維。 匈奴의 선조는 夏后氏의 후예로 淳維라고 한다. 唐虞以上有山戎、獫狁、葷粥,居于北蠻,隨畜牧而轉移。 唐堯와 虞舜 이전에는 山戎, 獫狁, 葷粥 등이 있었으며 북쪽의 미개척지에서..
李廣은 隴西 成紀 사람으로 漢文帝 때 良家의 자제로 종군하여 흉노를 격퇴하여 郞이 되었고, 武騎常侍가 되었다. 景帝 때 驍騎徒尉에 올랐다. 나중에 隴西와 北地, 雁門 등 郡의 太守를 역임하였다. 武帝 때 입조하여 未央衛尉가 되고, 右北平太守를 지냈다. 활을 잘 쏘았으며 병졸을 아끼고 잘 이끌어 모두 날래고 용맹해 전투하기를 좋아하였다. 흉노가 두려워하여 몇 년 동안 감히 국경을 침범하지 못하고 전장을 날아다니는 장수라 하여 飛將軍이라 칭송하였다. 40여 년 동안 군대를 이끌고 흉노와 대치하면서 70여 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를 치렀다. 병사들의 마음을 깊이 얻었지만 끝내 封侯되지는 못하였다. 元狩 4년(기원전 119년) 대장군 衛靑을 따라 흉노를 공격하다 길을 잃어 문책당하자 자살하였다. 李將軍廣者,隴西成..
韓安國은 전한 초기의 名將으로 오초칠국의 난 때 공을 세워 명성을 얻었다. 梁의 成安 출신으로 字는 長孺이다. 일찍이 田生에게 韓非子와 雜說을 배웠고, 梁孝王을 섬겨 中大夫가 되었다. 梁孝王이 자국의 승상을 임명할 권리를 얻었는데, 궁을 드나들 때의 의례를 황제처럼 하여 형 景帝의 노여움을 샀다. 韓安國은 梁의 사자가 되어 大長公主에게 이를 변명하였고, 대장공주는 황태후와 의논하여 경제의 노여움을 풀었다. 이 일로 韓安國은 황실에서도 명성을 떨쳤다. 建元 6년(기원전 135년) 御史大夫가 되었으며, 사람됨이 忠厚하고 지략이 있으면서도 재물에 대한 욕심이 상당하였는데, 그가 추천한 사람들은 모두 廉士였다. 元朔 원년(기원전 128년) 匈奴가 대거 침입하자 材官將軍으로 漁陽에 주둔하다 패하자 右北平으로 옮겼..
魏其武安侯列傳은 魏其侯 竇嬰, 武安侯 田蚡, 灌夫 3인의 合傳이다. 두영과 전분은 漢 초기 황실의 외척이며 관부는 오초칠국의 난에서 공을 세워 장군이 된 인물이다. 이 편에서는 세 사람이 권력을 쟁취하는 모습을 기술하였다. 1.竇嬰 竇嬰은 西漢의 大臣이며 字는 王孫이다. 文帝의 황후인 竇皇后의 조카로 오초칠국의 난 때 대장군으로 임명되어 형양을 지키며 齊·趙의 병사를 감독하였다. 오초칠국의 난이 평정된 후 魏其侯로 임명되었다. 景帝는 두영이 사람됨이 가벼워 진중하지 못하다고 여겨 재상으로 기용하지 않았다. 武帝 초에 丞相에 임명되었고, 儒學을 숭상하여 두태후의 뜻을 거슬러 파직되었으며, 승상 田蚡과 사이가 나빠져 그의 모함을 받아 사형에 처해졌다. 魏其侯竇嬰者,孝文后從兄子也。 魏其侯 竇嬰은 孝文帝 皇后의..
吳王 劉濞는 前漢의 제후왕으로 高祖 劉邦의 형 劉仲의 아들이다. 황실이 제후국을 견제함에 반발하여 오초칠국의 난을 일으켰다. 劉濞가 高祖 12년(기원전 195) 吳王에 봉해졌으며 封國에 있으면서 망명객들을 모으고 鑄錢과 製鹽을 대대적으로 시행하면서 세금을 걷지 않는 등 爲民策으로 세력을 불렸다. 漢文帝 때 유비의 아들 劉賢이 천자를 알현하고 황태자 劉啟와 함께 술을 마시며 雙六놀이를 하다가, 황태자에게 죽임을 당하자, 이에 앙심을 품어 병을 핑계로 조회에도 나가지 않았다. 漢景帝 때 晁錯의 건의로 봉국을 삭감당하자, 조조를 誅戮한다는 명분으로 楚와 趙, 膠西, 膠東 등 제후국들과 함께 吳楚七國의 난을 일으켰으나, 漢의 周亞夫 등에게 패퇴하였다. 東越로 달아났다가 동월왕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吳王濞者,高帝..
扁鵲倉公列傳은 名醫 扁鹊과 淳于意의 사적을 기록한 合傳이다. 편작은 전국시대의 명의이며, 倉公 淳于意는 西漢 초기의 명의이다. 1. 扁鵲 扁鵲은 전국시대 뛰어난 의사로 성은 秦이고 이름은 越人이며 渤海 사람이다. 長桑君에게 秘方을 전수받고 名醫가 되어 齊와 越 사이를 오가며 환자를 치료하다가 秦에 들어갔는데, 秦 太醫令 李醯가 편작의 뛰어난 의술을 시기하여 자객을 시켜 암살하였다. 이 편에서는 편작이 趙의 趙簡子의 병세를 진맥한 일과 虢나라 태자의 급환을 고쳐 죽음에서 되살린 일과 齊의 桓侯의 병세를 진단한 것에 대한 일화를 기록하고 있다. 扁鵲者,勃海郡鄭人也,姓秦氏,名越人。 扁鵲은 渤海郡 鄚縣 출신이니 성은 秦이고, 이름은 越人이다. 少時為人舍長。 젊었을 때 客舍에서 관리인이었다. 舍客長桑君過,扁鵲獨奇..
田叔列傳은 前漢의 정치가인 田叔에 대한 사적을 기록하였으며 그의 아들인 田仁과 전인의 친구인 任安에 대하여 기술하였다. 임안에 대한 기록은 전한의 사학자 褚小孫이 덧붙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田叔 田叔은 趙 陘城縣 사람으로 齊 王族의 후손이다. 趙王 張敖를 섬겨 낭중이 되었으며, 장오의 모반 사건으로 趙王이 체포되고 孟舒 등과 함께 漢에 자발적으로 압송되었으나, 高祖 유방이 趙王의 신하들을 높이 평가하여 전숙을 漢中郡守로 기용하였다. 文帝 때 면직되었으며 景帝 때 梁孝王 劉武가 袁盎을 암살한 사건의 조사관이 되었고, 경제가 이 사건의 조언을 현명하게 여겨 魯 승상으로 삼았다. 魯共王에게 직언하며 보좌하다가 승상 재임 중에 죽었다. 田叔者,趙陘城人也。 田叔은 趙 陘城 사람이다. 其先,齊田氏苗裔也。 그..
萬石張叔列傳은 萬石君 石奮, 衛綰, 直不疑, 周文, 張叔의 合傳이다. 이 편의 인물들은 前漢 때 신중하고 성실한 품행을 갖춘 인물들이다. 1.石奮 石奮은 前漢의 관료로 河内郡 溫縣 사람이다. 아버지는 본래 趙 사람인데, 趙 멸망 후 온현으로 이주하였다. 석분은 열다섯 살의 나이로 말단 벼슬아치가 되어 高祖 유방을 섬겼다. 이후 공로를 쌓아 文帝 때 太中大夫가 되었으며 景帝 때에는 九卿의 반열에 올랐다. 석분은 공손하고 신중한 면에서는 견줄 이가 없었으며 그의 네 아들도 아버지와 같은 성품을 가져 모두 2천 석의 녹봉에 해당하는 직위에 올랐다. 이에 景帝가 석분을 萬石君이라 호칭하여 萬石君 石奮으로 불리게 되었다. 萬石君名奮,其父趙人也,姓石氏。 萬石君의 이름은 奮이며, 그의 부친은 趙 사람으로 성은 石氏이..
張釋之馮唐列傳은 漢 초기의 관료로 직간하였던 장석지와 풍당의 합전이다. 1. 張釋之張釋之는 南陽 堵陽 사람으로 자는 季이며, 文帝 때 騎郞이었다가 후에 謁者와 謁者僕射, 公車令을 지냈다. 태자가 梁王과 함께 수레를 타고 입조하였는데 司馬門에서 내리지 않자 두 사람이 탄 수레를 정지시키고 불경함을 탄핵하였다. 문제가 이 일로 기특하게 보아 中大夫에 임명하였다. 나중에 廷尉가 되었는데, 형벌의 집행이 공정하고 후덕하다는 평을 들었다.사마천은 장석지를 큰 인물이라 한 것은 법 집행이 엄격하여 황제에게 아부하지 않은 것 때문이라고 평하였다. 張廷尉釋之者,堵陽人也,字季。廷尉 張釋之는 堵陽 사람으로 字는 季이다.有兄仲同居。둘째 형과 함께 살았다.以訾爲騎郞,事孝文帝,十歲不得調,無所知名。재물로써 騎郎이 되어 孝文..
袁盎鼂錯列傳은 前漢의 관료인 袁盎과 鼂錯(:晁錯)에 대한 合傳이다. 吳楚七國의 난이 일어나자 조조와 평소 원수지간이었던 袁盎이 참소하여 鼂錯를 장안 저잣거리에서 참수하게 하였다. 1.袁盎 원앙은 楚 사람으로 자는 絲이다. 西漢 시대의 대신으로 개성이 강직하고 재간과 담력이 있었다. 呂後 집정 시에 呂祿의 家臣이었지만 漢文帝가 즉위한 후에 그의 형 袁噲가 천거하여 中郎이 되었다. 그는 조정에서 儒家의 禮治思想으로 통치할 것을 강조하였고, 서슴없이 直諫하여 漢文帝의 노여움을 사서 隴西都尉, 吳相으로 좌천되기도 하였다. 漢景帝가 즉위한 후에 吳楚七國의 반란이 일어나자 晁錯를 주살할 것을 간청하여 제후의 원망을 잠재웠다. 그 공으로 太常이 되고, 吳에 사신으로 가서 반란을 평정한 후에 楚相이 되었다. 그 후 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