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列傳

列傳권111-衛將軍驃騎列傳(위장군표기열전)

耽古樓主 2023. 9. 24. 03:48

 

이 은 漢將인 衛青과 霍去病 및 副將들에 대한 합전이다
위청과 위청의 조카인 곽거병은 漢武帝 때 흉노를 정벌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장군들이다.

 

1.衛青

 

 

衛靑은 전한의 장군으로 자는 仲卿이며 平陽縣 사람으로 작위는 長平侯다누나가 무제의 황후 무사황후이다
하급관리인 아버지 鄭季와 평양후의 첩인 衛媼의 사생아로 태어나 평양후의 집에서 가인으로 있다가 평양후의 기사가 되어 평양공주를 모셨다
출세한 이후에 평양공주와 결혼하였다
생질 곽거병과 함께 무제 때 흉노를 일곱 차례나 물리쳐 관직이 大司馬‧大將軍에 이르렀다.

 


大將軍衛青者,平陽人也。
大將軍 衛靑은 平陽縣 사람이다.

其父鄭季,為吏,給事平陽侯家,與侯妾衛媼通,生青。
그의 부친 鄭季는 관리가 되어 平陽侯 曹壽의 집에서 일하다가 평양후의 첩 衛媼과 사통하여 아들 을 낳았다.

青同母兄衛長子,而姊衛子夫自平陽公主家得幸天子,故冒姓為衛氏。
위청의 동복형은 衛長子이며동복누이 衛子夫가 平陽公主를 모시다가 천자의 총애를 받았기 때문에 를 성으로 삼았다.

字仲卿。
위청의 는 仲卿이다.

長子更字長君。
위장자는 자를 長君으로 바꿨다.

長君母號為衛媼。
장군의 어머니를 위온이라고 하였다.

媼長女衛孺,次女少兒,次女即子夫。
위온의 장녀는 衛孺차녀는 少兒三女가 바로 子夫였다.

後子夫男弟步、廣皆冒衛氏。
후일 위자부의 남동생 와 도 모두 위를 성으로 삼았다.

▶ 給事 : 직무를 맡다.
▶ 平陽侯 : 曹壽를 말한다.
▶ 通 : 私通하다.
▶ 衛子夫 : 武思皇后 衛氏. 漢武帝의 두 번째 황후이다. 미천한 가문 출신이었던 위자부는 漢武帝의 누이 平陽公主의 집 歌女였는데 漢武帝의 눈에 띄어 후궁이 되었다. 漢武帝의 총애를 받게 된 위자부를 왕비 陳皇后가 무척 질투하였다. 진아교의 질투로 고생하였던 위자부는 漢武帝가 후궁과 궁녀들을 출궁시킬 때 자신도 출궁시켜 달라고 울면서 간청하였고, 漢武帝는 그를 더욱 가련히 여겼다. 그 뒤 진아교와 그의 친정어머니 관도공주가 짜고 위자부의 오라비 衛淸을 죽이려 하다가 발각되자 무제는 진아교를 폐출시키고 위자부를 황후에 앉혔다. 위자부는 세 딸 위장공주, 제읍공주, 양석공주를 낳고 아들 여태자 유거를 두었다.<사기 세가 권 49. 외척세가>

 

 

世家49-外戚世家(외척세가)

이篇은 30世家 중 19번째 편으로 漢나라의 外戚에 대한 기록이다. 外戚은 군주의 모친과 后妃의 친족을 말하며, 漢高祖로부터 漢武帝에 이르기까지 韓 후비의 친족에 대한 기록이므로 外戚世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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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平陽公主 : 平陽公主 劉氏. 漢景帝와 효경황후 왕씨 사이에서 태어난 딸로 漢武帝의 누나이다. 위자부의 시누이에 해당한다.
▶ 冒 : 가장하다. 사칭하다. 위청의 생부는 鄭季이나 위청이 사통하여 낳은 자식이기 때문에 어머니의 성을 사용하였다.
▶ 字 : 별명.

青為侯家人,少時歸其父,其父使牧羊。
위청이 평양후의 하인으로 지내다가 소년이 되어서야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왔으며그의 부친은 위청에게 양을 치게 하였다.

先母之子皆奴畜之,不以為兄弟數。
본처의 자식들이 모두 그를 하인으로 취급하며 형제로 여기지 않았다.

青嘗從入至甘泉居室,有一鉗徒相青曰:
「貴人也,官至封侯。」
위청이 어떤 사람을 따라 甘泉宮의 감옥에 간 적이 있었는데목에 칼을 쓴 죄인 한 사람이 위청의 관상을 보고 말하였다.
귀인이 될 상으로 벼슬은 제후가 되겠다.”

青笑曰:
「人奴之生,得毋笞罵即足矣,安得封侯事乎!」
위청이 웃으며 말하였다.
남의 종으로 태어난 몸이니 매를 맞지 않고 욕이나 안 먹으면 족하지어찌 봉후되는 일이 있겠습니까!”

▶ 先母 : 鄭季의 본 부인.
▶ 奴畜之 : 하인으로 취급하다.
▶ 甘泉 : 감천궁.
▶ 居室 : 保宮. 범죄를 저지른 관원과 그 가족을 가두는 감옥.
▶ 鉗徒 : 목에 칼을 쓴 죄인.
▶ 笞罵 : 매질하며 욕하다.

青壯,為侯家騎,從平陽主。
위청이 장년이 되자 평양후 집안의 騎士가 되어 평양공주를 섬겼다.

建元二年春,青姊子夫得入宮幸上。
建元 2(기원전 139위청의 누이 위자부가 입궁하여 무제의 총애를 받았다.

皇后,堂邑大長公主女也,無子,妒。
황후는 堂邑候의 부인인 大長公主의 딸인 陳阿嬌였는데 아들을 낳지 못하였고 질투가 심하였다.

大長公主聞衛子夫幸,有身,妒之,乃使人捕青。
대장공주는 위자부가 황제의 총애를 받아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질투하여 위청을 체포하게 하였다.

青時給事建章,未知名。
위청이 그때 建章宮에서 일하되아직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

大長公主執囚青,欲殺之。
대장공주가 위청을 잡아 가두고 죽이려고 하였다.

▶ 騎 : 騎士.
▶ 建元二年 : 기원전 139년. 建元은 漢武帝의 첫 번째 연호이다.
▶ 幸上 : 황제의 총애를 받다.
▶ 堂邑大長公主 : 漢文帝의 長女. 즉 漢武帝의 고모인 劉嫖를 말하며 堂邑侯 陳午에게 시집갔으므로 堂邑大長公主라 한 것이다. 황제의 고모를 大長公主라 한다.
▶ 阿嬌 : 漢武帝의 왕비 陳皇后의 兒名. 무제가 어렸을 때 어린 궁녀 진아교를 보고 만약 진아교에게 장가들면 금으로 집을 지어 그 속에 가두어 두겠다고 하였으나, 진아교는 황후가 된 뒤 오만하고 질투가 심하며 아들이 없어 장문궁에 유폐되었다가 폐비가 되고 말았다.
▶ 有身 : 임신하다.
▶ 建章 : 건장궁.

其友騎郎公孫敖與壯士往篡取之,以故得不死。
그의 친구인 騎郎 公孫敖가 壯士들과 함께 건장궁의 감옥에 쳐들어가서 그를 구하매 죽음을 면하였다.

上聞,乃召青為建章監,侍中,及同母昆弟貴,賞賜數日閒累千金。
황제가 듣고 위청을 불러 건장궁의 宮監 겸 侍中으로 임명하고그의 동복형제들도 모두 귀한 신분이 되었고며칠 동안 수천 금을 하사하였다.

孺為太仆公孫賀妻。
위청의 맏누이인 衛孺는 太僕 公孫賀의 아내가 되었다.

少兒故與陳掌通,上召貴掌。
누이 衛少兒는 원래 陳掌과 사통하고 있었는데황제가 진장을 불러 높은 지위에 오르게 하였다.

公孫敖由此益貴。
공손오가 위청을 구해준 일로 더욱 높은 지위에 올랐다.

子夫為夫人。青為大中大夫。
위자부는 夫人이 되었고위청이 太中大夫로 임명되었다.

▶ 篡取 : 빼앗다. 강탈하다.
▶ 昆弟 : 형제.
▶ 故 : 원래. 종전.
▶ 夫人 : 황제의 소첩.

 

元光五年,青為車騎將軍,擊匈奴,出上谷;
太仆公孫賀為輕車將軍,出雲中;
大中大夫公孫敖為騎將軍,出代郡;
衛尉李廣為驍騎將軍,出雁門:
軍各萬騎。
元光 5(기원전 130), 위청이 車騎將軍이 되어 匈奴를 정벌하려 上谷에서 출병하였고,
太仆公孫賀는 輕車將軍이 되어 雲中에서 출병하였고,
大中大夫公孫敖는 騎將軍이 되어 代郡에서 출병하였고,
衛尉 李廣은 驍騎將軍이 되어 雁門에서 출병하니,
군대는 각기 1만 이었다.

青至蘢城,斬首虜數百。
위청이 蘢城에 도착하여 흉노를 참수하기 수백 명이었다.

騎將軍敖亡七千騎;
衛尉李廣為虜所得,得脫歸:
皆當斬,贖為庶人。
기장군 공손오는 7천 를 잃었고위위 이광은 적군에게 포로로 잡혔으나 탈출하여 돌아왔다.
모두 참수형에 해당하였으나 속죄금을 내고 서민이 되었다.

賀亦無功。
공손하 또한 전공이 없었다.

▶ 元光五年 : 기원전 130년. 元光은 漢武帝의 두 번 째연호.
▶ 車騎將軍 : 車騎將軍 衛靑이 흉노를 공격하였으며, 上谷郡에서 출정하여 龍城에서 흉노를 물리쳤다. 이때 장군 李廣은 흉노의 포로가 되었다가 다시 탈출하였고, 公孫敖는 많은 병사를 잃었다. 그들은 모두 마땅히 참수를 당해야 하였으나 속죄금을 내고 서인으로 강등되었다.<사기 권108. 韓長孺列傳>
▶ 斬首虜 : 흉노를 참수하다. 虜는 匈奴.

 

元朔元年春,衛夫人有男,立為皇后。
元朔 원년(기원전 128衛夫人이 사내아이를 출산하매황후로 삼았다.

其秋,青為車騎將軍,出雁門,三萬騎擊匈奴,斬首虜數千人。
그해 가을위청이 거기장군이 되어 안문에서 출병하여 3만 기로 흉노를 공격하여 흉노 수천 명을 참수하였다.

明年,匈奴入殺遼西太守,虜略漁陽二千餘人,敗韓將軍軍。
이듬해흉노가 침입하여 遼西태수를 살해하고 漁陽 백성 2천여 명을 약탈하였으며韓安國 장군의 군대를 패퇴시켰다.

漢令將軍李息擊之,出代;
令車騎將軍青出雲中以西至高闕。
이 장군 李息을 시켜 흉노를 공격하라고 代郡에서 출병하게 하고,
거기장군 위청을 시켜 운중에서 출병하여 서쪽으로 高闕까지 진격하게 하였다.

▶ 元朔 : 漢武帝의 세 번째 연호.
▶ 衛夫人 : 衛子夫.
▶ 車騎將軍 : 지위가 上卿에 해당되며, 京師의 수비와 四夷에 대한 방어를 담당하였다.
▶ 虜略 : =擄掠. 약탈하다.
▶ 韓將軍 : 韓安國.

 

遂略河南地,至于隴西,捕首虜數千,畜數十萬,走白羊、樓煩王。
위청이 河南 지역을 빼앗고 隴西에 이르도록 흉노를 捕首하기 수천이었고가축 수십 만을 노획하고 白羊王과 樓煩王을 쫓아냈다.

遂以河南地為朔方郡。
이어 하남 땅에 朔方郡을 설치하였다.

以三千八百戶封青為長平侯。
3천 8백호를 위청에게 봉하여 長平侯로 삼았다.

青校尉蘇建有功,以千一百戶封建為平陵侯。
위청의 校尉 蘇建에게도 공이 있으매 11백 호를 봉하고 平陵侯로 삼았다.

使建筑朔方城。
소건에게 朔方城을 축조하게 하였다.

青校尉張次公有功,封為岸頭侯。
위청의 교위 張次公도 공이 있어 岸頭侯로 봉하였다.

天子曰:
「匈奴逆天理,亂人倫,暴長虐老,以盜竊為務,行詐諸蠻夷,造謀藉兵,數為邊害,故興師遣將,以征厥罪。
천자가 말하였다.
匈奴가 하늘의 도리를 거역하고인륜을 어지럽히고윗사람을 능멸하고 노인을 학대하고도적질을 일삼고蠻夷國들을 속이고 음모를 꾸며 그들의 병력을 빌려서 자주 변경 지방을 침략하였으매군사를 일으키고 장수를 파견하여 흉노의 죄를 응징하였다.

詩不云乎,
『薄伐玁狁,至于太原』,
『出車彭彭,城彼朔方』。
詩經에서도 말하지 않았는가, ‘玁狁을 쳐부수어 太原에 이르렀다.’,
수많은 수레를 내어저 북방에 성을 쌓았네.’

今車騎將軍青度西河至高闕,獲首虜二千三百級,車輜畜產畢收為鹵,已封為列侯,遂西定河南地,按榆谿舊塞,絕梓領,梁北河,討蒲泥,破符離,斬輕銳之卒,捕伏聽者三千七十一級,執訊獲丑,驅馬牛羊百有餘萬,全甲兵而還,益封青三千戶。」
지금 거기장군 위청이 西河를 건너 高闕까지 진격하여, 흉노의 首虜를 획득하기 2천3백 級이고 전차와 輜重 및 가축을 모두 노획하였으며, 이에 위청을 列侯에 봉한 후 서쪽으로 하남 지역을 평정하게 하였니, 楡谿의 옛 요새를 순시하고 梓嶺을 가로질러 北河에 다리를 놓고, 蒲泥를 토벌하고 符離를 격파하였으며, 흉노의 정예 병사들을 참수하거나 사로잡은 정찰병이 3, 071명이었고, 포로를 심문하여 적군을 잡아들이고, 1백여 만 마리의 말, 소, 양을 몰아서, 군대를 보전하여 귀환하였다.
이에 위청에게 3천호의 식읍을 더하여 봉하노라.”

▶ 略 : 공격하여 빼앗다.
▶ 造謀 : 음모를 꾸미다.
▶ 藉兵 : 병력을 빌리다.
▶ 厥 : 그. 흉노를 말한다.
▶ 薄伐獫狁 : 詩經 小雅에 나오는 시이다. “薄伐玁狁、至于大原.” <詩經·小雅·彤弓之什·六月> 薄伐은 토벌하다. 獫狁은 흉노를 말하며 漢 이후에 흉노라고 불이었다.
▶ 出車彭彭 : 詩經 小雅에 나오는 시이다. “出車彭彭、旂旐央央。天子命我、城彼朔方” <詩經·小雅·鹿鳴之什·出車>
▶ 彭彭 : 말이 대단히 많은 모양. 彭은 곁 ‘방’으로 성한 모양.
▶ 城 : 성을 쌓다.
▶ 朔方 : 北方.
▶ 級 : 首級.
▶ 輜 : 郡守품.
▶ 鹵 : 擄와 통하여 노획하다.
▶ 按 : 순시하다.
▶ 榆谿 : 요새명.
▶ 梓領 : 梓嶺과 통한다. 요새명.
▶ 蒲泥 : 部族의 首領 이름.
▶ 符離 : 요새명.
▶ 伏聽者 : 적군의 정찰병.
▶ 執訊 : 간첩을 취조하다.
▶ 獲丑 : 馘丑과 통한다. 적의 귀를 잘라 공훈을 계산함. 丑은 적을 경멸하는 칭호.
▶ 驅 : 몰다.
▶ 全 : 보전하다.
▶ 甲兵 : 군대.

 

其明年,匈奴入殺代郡太守友,入略鴈門千餘人。
다음해흉노가 침입하여 代郡태수 共友를 살해하고안문을 침입하여 1천여 명을 약탈하였다.

其明年,匈奴大入代、定襄、上郡,殺略漢數千人。
이듬해(기원전 125), 匈奴가 代郡定襄上郡을 대거 침입하여 漢 백성 수천 명을 죽이거나 약탈하였다.

其明年,元朔之五年春,漢令車騎將軍青將三萬騎,出高闕;
衛尉蘇建為游擊將軍,左內史李沮為彊弩將軍,太仆公孫賀為騎將軍,代相李蔡為輕車將軍,皆領屬車騎將軍,俱出朔方;
大行李息、岸頭侯張次公為將軍,出右北平:
咸擊匈奴。
다음해 원삭 5(기원전 124년 봄), 이 거기장군 위청에게 명령하여 3만 를 거느리고 고궐에서 출병하였고,
위위 소건을 遊擊將軍左內史 李沮를 彊弩將軍태복 공손하를 騎將軍의 재상 李蔡를 경거장군으로 삼아 모두 거기장군 위청에게 배속하고 함께 삭방에서 출병하게 하였고,
大行 李息과 안두후 張次公을 장군으로 삼아 右北平에서 출병하여 모두 흉노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 太守友 : 태수 共友.
▶ 明年 : 元朔 4년. 기원전 125년.
▶ 領屬 : 예속하다.
▶ 咸 : 모두.

 

匈奴右賢王當衛青等兵,以為漢兵不能至此,飲醉。
흉노의 右賢王은 위청 등의 대군을 抵當함에漢軍 이 그곳까지 올 수 없으리라 생각하여 술에 취하여 있었다.

漢兵夜至,圍右賢王,右賢王驚,夜逃,獨與其愛妾一人壯騎數百馳,潰圍北去。
漢軍이 한밤중에 도착하여 우현왕을 포위하자 우현왕은 몹시 놀라고 야음을 틈타 도망쳤는데애첩 한 사람과 건장한 기병 수백 만 데리고 말을 달려 포위를 뚫고 북쪽으로 달아났다.

漢輕騎校尉郭成等逐數百里,不及,得右賢裨王十餘人,眾男女萬五千餘人,畜數千百萬,於是引兵而還。
의 輕騎校尉 郭成 등이 수백 리를 추격함에 미치지 못하였으나우현왕의 裨王 10여 명과 남녀 만 5천여 명가축 10만 내지 100만 마리를 노획하고 병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至塞,天子使使者持大將軍印,即軍中拜車騎將軍青為大將軍,諸將皆以兵屬大將軍,大將軍立號而歸。
요새에 도착하자천자가 사자를 시켜 대장군의 印綬를 가지고 군중에 가서 거기장군 위청을 大將軍에 임명하고장수들은 병사를 거느리고 대장군에게 배속시키니대장군의 官號를 세우고 京師로 돌아왔다.

天子曰:
「大將軍青躬率戎士,師大捷,獲匈奴王十有餘人,益封青六千戶。」
천자가 말하였다.
대장군 위청이 몸소 군대를 이끌고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어 흉노왕 10여 명을 사로잡았으니 위청에게 6천호를 더 봉하노라

而封青子伉為宜春侯,青子不疑為陰安侯,青子登為發干侯。
위청의 아들인 衛伉을 宜春侯衛不疑를 陰安侯衛登을 發干侯에 봉하였다.

青固謝曰:
위청이 固辭하며 말하였다.

「臣幸得待罪行閒,賴陛下神靈,軍大捷,皆諸校尉力戰之功也。
신은 종군 도중에 관직을 맡는 행운을 얻고 폐하의 神靈에 힘입어 군대가 대승하였으나모두 교위들이 힘껏 싸운 공로였습니다.

陛下幸已益封臣青。
폐하께서 황공하게도 이미 신에게 식읍을 더 봉해주셨습니다.

臣青子在繦緥中,未有勤勞,上幸列地封為三侯,非臣待罪行閒所以勸士力戰之意也。
신의 자식들은 강보에 싸여 공로가 없는데황제께서 황공하게 땅을 나누어 주고 세 아들을 열후에 봉하시니신이 대장군에 임명되어 종군함에 병사들을 독려하여 힘껏 싸우게 한 本意가 아닙니다.

伉等三人何敢受封!」
위항 등 세 아들이 어찌 감히 로 封爵을 받겠습니까!”

天子曰:
「我非忘諸校尉功也,今固且圖之。」
이에 천자가 말하였다.
짐이 교위들의 공로를 잊음이 아니니이제 잠시 그것을 고려하겠소.”

乃詔御史曰:
그러고는 御史에게 조서를 내렸다.

「護軍都尉公孫敖三從大將軍擊匈奴,常護軍,傅校獲王,以千五百戶封敖為合騎侯。
護軍都尉 공손오는 대장군을 세 번 따르며 흉노를 공격함에항상 護軍으로서 교위를 거느리고 흉노의 왕을 사로잡았으매식읍 15백 호를 주어 合騎侯에 봉한다.

都尉韓說從大將軍出窳渾,至匈奴右賢王庭,為麾下搏戰獲王,以千三百戶封說為龍頟侯。
都尉 韓說은 대장군을 따라 窳渾에서 출병하여 흉노 우현왕의 本陣까지 진격하고대장군의 휘하가 되어 용감히 싸워 흉노의 왕을 사로잡았으매 식읍 13백 호를 하사하고 龍額侯에 봉한다.

騎將軍公孫賀從大將軍獲王,以千三百戶封賀為南窌侯。
騎將軍 公孫賀는 대장군을 따라 흉노의 왕을 사로잡았으매식읍 13백 호를 하사하고 南窌侯에 봉한다.

輕車將軍李蔡再從大將軍獲王,以千六百戶封蔡為樂安侯。
輕車將軍 李蔡는 두 번 대장군을 따르며 흉노의 왕을 사로잡았으매 식읍 16백 호를 하사하고 樂安侯에 봉한다.

校尉李朔,校尉趙不虞,校尉公孫戎奴,各三從大將軍獲王,以千三百戶封朔為涉軹侯,以千三百戶封不虞為隨成侯,以千三百戶封戎奴為從平侯。
교위 李朔교위 趙不虞교위 公孫戎奴는 각각 세 차례나 대장군을 따라 흉노의 왕을 사로잡았으매이삭에게 13백 호를 하사하고 涉軹侯에 봉하고조불우에게 13백 호를 하사하고 隨成侯에 봉하고공손융노에게 13백 호를 하사하고 從平侯에 봉한다.

將軍李沮、李息及校尉豆如意有功,賜爵關內侯,食邑各三百戶。」
장군 李沮李息 및 교위 豆如意에게도 공로가 있으니 關內侯의 작위를 하사하고 식읍으로 각각 3백호를 하사한다.”

其秋,匈奴入代,殺都尉朱英。
그해 가을 흉노가 代郡으로 쳐들어와 都尉 주영을 죽였다.

▶ 潰圍 : 포위망을 뚫다.
▶ 裨王 : 小王. 작은 나라의 왕.
▶ 躬率 : 몸소 군대를 거느리다.
▶ 戎士 : 군대. 병사.
▶ 固謝 : 단호히 사양하다.
▶ 待罪 : 관리가 자기 직책을 수행하는 것을 겸손하게 이른 말.
▶ 行間 : 行伍 사이. 즉 군대 가운데.
▶ 勤勞 : 功勞.
▶ 繦緥 : 포대기. 어려서 세상 물정을 모른다는 뜻.
▶ 列 : 裂과 통하여 나누다. 쪼개다.
▶ 勸 : 격려하다.
▶ 固且圖之 : 지금 그들의 공로를 고려하다. 固=姑 잠시, 잠깐 , 且는 ~하려 하다. 圖는 고려하다.
▶ 傅 : 거느리다.
▶ 校 : 오백 명에 1명의 교위가 있었다.
▶ 窳渾 : 요새 이름.
▶ 庭 : 흉노 선우 등의 거처.
▶ 搏戰 : 백병전.

 

其明年春,大將軍青出定襄,合騎侯敖為中將軍,太仆賀為左將軍,翕侯趙信為前將軍,衛尉蘇建為右將軍,郎中令李廣為後將軍,右內史李沮為彊弩將軍,咸屬大將軍,斬首數千級而還。
그 이듬해(기원전 123대장군 위청이 정양에서 출병함에合騎侯 公孫敖는 中將軍태복 公孫賀는 左將軍翕侯 趙信은 前將軍衛尉 蘇建은 右將軍郎中令 李廣은 後將軍右內史 李沮는 彊弩將軍이 되어 모두 대장군에 배속하니 수천 을 참수하고 돌아왔다.

月餘,悉復出定襄擊匈奴,斬首虜萬餘人。
한 달 남짓 후에 그들 모두 다시 정양에서 출병하고 흉노를 공격하여 흉노 만여 명을 참수하였다.

右將軍建、前將軍信并軍三千餘騎,獨逢單于兵,與戰一日餘,漢兵且盡。
우장군 蘇建과 전장군 趙信은 군사를 병합하여, 3천여 만으로 선우의 군대와 마주쳐서 하루 남짓 교전함에漢軍이 곧 전멸하게 되었다.

前將軍故胡人,降為翕侯,見急,匈奴誘之,遂將其餘騎可八百,奔降單于。
전장군은 원래 흉노 사람으로 에 투항하여 흡후가 되었으매상황이 위급할 때 흉노가 권유하니 마침내 남은 기병 약 8백을 이끌고 선우에게 투항하였다.

右將軍蘇建盡亡其軍,獨以身得亡去,自歸大將軍。
우장군 소건은 그의 병사를 모두 잃고 단신으로 도망쳐 대장군에게로 돌아왔다.

大將軍問其罪正閎、長史安、議郎周霸等:
「建當云何?」
대장군은 소건의 죄를 軍正 閎長史 安議郎 周霸 등에게 물었다.
소건의 처벌은 어찌해야 좋겠는가?”

霸曰:
「自大將軍出,未嘗斬裨將。
今建棄軍,可斬以明將軍之威。」
주패가 말하였다.
대장군이 출정한 이래 副將을 참수한 적이 아직 없었습니다.
그러나 소건이 군사를 버렸으니 마땅히 참수하여 장군의 위엄을 밝힘이 옳습니다.”

閎、安曰:
「不然。
兵法『小敵之堅,大敵之禽也』。
今建以數千當單于數萬,力戰一日餘,士盡,不敢有二心,自歸。
自歸而斬之,是示後無反意也。不當斬。」
굉과 안이 말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병법에 작은 군대가 피하지 않고 굳게 버티면대군에게 사로잡힌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번에 소건은 수천 명으로 선우의 수만 군사를 대적하여 힘껏 싸우기 하루 남짓병사가 전멸하였으나 감히 두 마음을 품지 않고 스스로 돌아왔습니다.
스스로 귀환하였는데도 참수함은 이후에는 돌아오지 말라는 뜻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참수함이 부당합니다.”

大將軍曰:
「青幸得以肺腑待罪行閒,不患無威,而霸說我以明威,甚失臣意。
대장군이 말하였다.
나는 요행이 인척으로 군중에서 대장군에 임명되었으매위엄이 없음을 걱정하지 않으니주패가 나에게 위엄을 밝히라고 주장하였으나 이것은 신하된 자의 취지를 심하게 잃어버리는 것이다.

且使臣職雖當斬將,以臣之尊寵而不敢自擅專誅於境外,而具歸天子,天子自裁之,於是以見為人臣不敢專權不亦可乎?」
나의 직권으로 비록 장수를 참수할 수 있다고 해도폐하의 총애를 받는 신하로서 감히 국경 밖에서 제멋대로 죽이지 못하니이 사실을 천자께 상세히 보고하고 천자께서 직접 처리하도록 하여人臣이 감히 권력을 전횡하지 않음을 보여줌이 또한 좋지 않겠는가?”

軍吏皆曰
「善」。
군관들이 모두 말하였다.
좋습니다.”

遂囚建詣行在所。入塞罷兵。
이에 소건을 붙잡아서 行在所로 보내고 요새로 들어와 撤兵하였다.

▶ 明年春 : 元朔 6기원전 123년 봄.
▶ 悉 : 전부.
▶ 可 : 約.
▶ 正 : 軍正. 군중의 법관.
▶ 裨將 : 副將.
▶ 小敵之堅, 大敵之禽也 : 孫子兵法 謀攻篇에서 인용한 말이다. 약한 군대가 자기의 힘을 헤아리지 아니하여 도망가지도 않고 피하지도 않고서 굳게 적과 싸우면 반드시 강한 적에게 사로잡힌다는 말이다.
▶ 肺腑 : 친밀한 관계.
▶ 說 : 권고하다.
▶ 明威 : 위엄을 분명하게 보이다.
▶ 裁 : 처리하다.
▶ 行在所 : 천자가 순행시 머무르는 곳.



2. 霍去病

 

霍去病은 전한의 명장으로 대장군 위청의 조카이다.
정예부대를 이끌고 대군보다 먼저 적진 깊숙이 쳐들어가는 전법으로 한나라의 영토 확대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
그러나 불과 24세에 병으로 죽었다.

 


是歲也,大將軍姊子霍去病年十八,幸,為天子侍中。
이해(기원전 123), 대장군 위청의 누이의 아들인 霍去病은 나이가 18세로서총애를 입어 천자의 侍中이 되었다.

善騎射,再從大將軍,受詔與壯士,為剽姚校尉,與輕勇騎八百直棄大軍數百里赴利,斬捕首虜過當。

騎射에 뛰어나서 대장군을 두 번 종군함에대장군은 조칙을 받들어 壯士라고 여기고 剽姚校尉로 임명하니,, 곽거병은 날쌔고 용감한 기병 8백과 함께 곧장 대군과 떨어져 수백 리나 진격하여 전공을 세웠는데참수하거나 사로잡은 적이 손실보다는 많았다.

於是天子曰:
「剽姚校尉去病斬首虜二千二十八級,及相國、當戶,斬單于大父行籍若侯產,生捕季父羅姑比,再冠軍,以千六百戶封去病為冠軍侯。
이에 천자가 말하였다.
표요교위 곽거병이 참수한 적이 2,028 명인데흉노의 相國과 當戶에 미치고선우의 조부 항렬인 籍若侯 産을 참수하고선우의 숙부인 羅姑比를 생포하여전공이 두 차례나 全軍의 으뜸이매, 16백 호의 식읍을 하사하고 冠軍侯에 봉한다.

上谷太守郝賢四從大將軍,捕斬首虜二千餘人,以千一百戶封賢為眾利侯。」
上谷 태수 郝賢은 네 차례나 대장군을 따라 출정하여 참수하거나 사로잡은 적이 2천여 명이니, 11백 호의 식읍을 하사하고 衆利侯에 봉한다.”

是歲,失兩將軍軍,亡翕侯,軍功不多,故大將軍不益封。
이 해에 두 장군의 군사를 잃었고흡후가 흉노로 도망치게 하여전공이 많지 않으매대장군 위청은 봉읍을 늘리지 못하였다.

右將軍建至,天子不誅,赦其罪,贖為庶人。
우장군 소건이 도착함에천자가 죽이지 않고 죄를 사면하매속죄금을 내고 庶人이 되었다.

大將軍既還,賜千金。
대장군 위청이 경성으로 돌아오자 1천금을 하사하였다.

是時王夫人方幸於上,甯乘說大將軍曰:
「將軍所以功未甚多,身食萬戶,三子皆為侯者,徒以皇后故也。
今王夫人幸而宗族未富貴,願將軍奉所賜千金為王夫人親壽。」
당시 王夫人이 바야흐로 천자의 총애를 받았으매寧乘이 대장군에게 권하였다.
장군께 공로가 아주 많지도 않은데본인은 일만 호의 식읍을 하사받고세 아들이 모두 에 봉해진 까닭은 오로지 위황후 덕분입니다.
그런데 왕부인이 총애를 받되 일족들은 아직 부귀를 누리지 못하니원컨대 장군께서는 하사받은 1천 금으로 왕부인의 부모님을 위하여 祝壽하십시오.”

大將軍乃以五百金為壽。
대장군이 이에 5백 금으로 축수하였다.

天子聞之,問大將軍,大將軍以實言,上乃拜甯乘為東海都尉。
천자가 알고 대장군에게 물음에대장군이 사실대로 말하자천자는 영승을 東海 都尉에 임명하였다.

張騫從大將軍,以嘗使大夏,留匈奴中久,導軍,知善水草處,軍得以無饑渴,因前使絕國功,封騫博望侯。
張騫이 대장군을 따라 출병함에예전에 大夏에 사신으로 갔다가 흉노에게 억류되기 오래였기에嚮導를 맡아서 물과 풀이 풍부한 곳을 알고 있으매 군사들이 기갈을 면하였다앞서 먼 나라에 사신으로 간 공로로 인하여 장건을 博望侯에 봉하였다.

冠軍侯去病既侯三歲,元狩二年春,以冠軍侯去病為驃騎將軍,將萬騎出隴西,有功。
관군후 곽거병이 에 봉해진 지 3년 후인 元狩 2(기원전 121곽거병은 驃騎將軍이 됨으로써 1만 를 이끌고 隴西에서 출병하여 전공을 세웠다.

天子曰:
「驃騎將軍率戎士踰烏盭,討遬濮,涉狐奴,歷五王國,輜重人眾懾慴者弗取,冀獲單于子。
천자가 말하였다.
표기장군이 戰士를 이끌고 烏盭山을 넘어 遫濮을 토벌하고狐奴江을 건너 다섯 나라를 거침에輜重이나 두려워 복종하는 자를 약탈하지 않고 선우의 아들을 사로잡기만을 노렸다.

轉戰六日,過焉支山千有餘里,合短兵,殺折蘭王,斬盧胡王,誅全甲,執渾邪王子及相國、都尉,首虜八千餘級,收休屠祭天金人,益封去病二千戶。」
옮겨다니며 전투하기 6焉支山 1천여 리를 지나 짧은 병기로 교전하여 折蘭王을 죽이고 盧胡王을 참수하였고 全軍을 주살하고渾邪王의 아들과 相國都尉를 붙잡았고참수한 적이 8천여 이었다.
또 休屠王이 하늘에 제사지낼 때 사용하는 황금상을 노획하여 왔으니곽거병에게 2천 호의 식읍을 더 봉하라.”

▶ 是歲 : 元朔 6년. 기원전 123년.
▶ 直棄 : 곧장 벗어나다.
▶ 赴利 : 달려가서 공명을 취하다. 특히 적진에 가서 적을 죽임을 가리킴.
▶ 相國, 當戶 : 흉노의 관직명.
▶ 大父行 : 祖行. 할아버지뻘이 되는 行列.
▶ 籍若侯 : 흉노의 제후명.
▶ 產 : 사람 이름.
▶ 季父 : 숙부
▶ 羅姑比 : 單于의 숙부 이름.
▶ 冠軍 : 1등. 우승.
▶ 王夫人 : 漢武帝 寵姬. 齊懷王 劉閎을 낳았다.
▶ 親 : 부모.
▶ 壽 : 祝壽. 장수를 기원함.
▶ 導軍 : 군대의 嚮導.
▶ 絕國 :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
▶ 元狩二年 : 기원전 121년. 元狩는 漢武帝의 네 번째 연호.
▶ 戎士 : 병사.
▶ 逾 : 넘다.
▶ 烏盭 : 烏戾와 통한다. 산 이름.
▶ 遬濮 : 흉노의 부족명.
▶ 狐奴 : 강이름.
▶ 歷 : 지나다.
▶ 懾慴 : 두려워서 복종하다.
▶ 弗取 : 약탈하지 않다.
▶ 冀 : 희망하다.
▶ 合短兵 : 짧은 병기로 교전함. 육박전.
▶ 全甲 : 무장을 모두 갖춘 적군.
▶ 祭天金人 :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쓰는 금속 우상. 금으로 만든 사람 모습.

其夏,驃騎將軍與合騎侯敖俱出北地,異道;
博望侯張騫、郎中令李廣俱出右北平,異道:
皆擊匈奴。
그해 여름표기장군은 합기후 공손오와 함께 北地에서 출병하여 두 갈래로 進軍하였고,
박망후 장건낭중령 이광은 右北平에서 함께 출병하여 두 갈래로 進軍하여 일제히 흉노를 공격하였다.

郎中令將四千騎先至,博望侯將萬騎在後至。
낭중령 이광이 4천 를 이끌고 먼저 도착하고 박망후는 1만 를 거느리고 뒤에 도착하였다.

匈奴左賢王將數萬騎圍郎中令,郎中令與戰二日,死者過半,所殺亦過當。
흉노의 左賢王이 수만 를 거느리고 낭중령의 부대를 포위하니이광이 그들과 이틀 동안 전투함에 전사자가 반을 넘었으나 사살한 적군은 그보다 많았다.

博望侯至,匈奴兵引去。
박망후의 부대가 당도하자 흉노가 군대를 거두어 퇴각하였다.

博望侯坐行留,當斬,贖為庶人。
박망후가 행군을 지체한 죄에 걸려 참수형에 해당하였으나 속죄금을 내고 서민이 되었다.

而驃騎將軍出北地,已遂深入,與合騎侯失道,不相得,驃騎將軍踰居延至祁連山,捕首虜甚多。
표기장군의 군대는 북지에서 출병하여 이미 깊숙이 침투하였는데합기후와의 합류는 길을 잃어서 되지 않았으며표기장군이 居延澤을 넘어 祁連山까지 진격하면서 생포하거나 참수한 적이 대단히 많았다.

天子曰:
「驃騎將軍踰居延,遂過小月氏,攻祁連山,得酋涂王,以眾降者二千五百人,斬首虜三萬二百級,獲五王,五王母,單于閼氏、王子五十九人,相國、將軍、當戶、都尉六十三人,師大率減什三,益封去病五千戶。
천자가 말하였다.
표기장군은 거연을 넘어 小月氏國을 통과하고기련산의 흉노를 공격하여 酋涂王을 사로잡았고군사가 투항함이 25백명참수한 적이 3만 2백 이었고다섯 왕과 그들의 어미선우의 閼氏와 왕자 59相國장군당호都尉 63명을 사로잡았는데군대의 손실은 대략 10분의 3밖에 되지 않았으매곽거병에게 5천 호를 더 봉하노라.

賜校尉從至小月氏爵左庶長。
곽거병을 따라 소월지국까지 진격하였던 교위에게는 左庶長의 작위를 하사한다.

鷹擊司馬破奴再從驃騎將軍斬遬濮王,捕稽沮王,千騎將得王、王母各一人,王子以下四十一人,捕虜三千三百三十人,前行捕虜千四百人,以千五百戶封破奴為從驃侯。
鷹擊司馬 趙破奴는 두 번 표기장군을 따르며遫濮王을 참수하고 稽沮王을 생포하고그의 千騎將은 왕과 왕의 어미 각각 1왕자 이하 41명을 잡아 포로가 3,330명이고그의 선봉부대가 1,400명을 사로잡았으매, 15백 호를 조파노에게 하사하여 從驃侯에 봉한다.

校尉句王高不識,從驃騎將軍捕呼于屠王王子以下十一人,捕虜千七百六十八人,以千一百戶封不識為宜冠侯。
교위 句王 高不識은 표기장군을 따르며呼于屠王과 왕자 이하 11명을 잡고 1,768명을 포로로 잡았으매, 11백 호를 하사하여 고불식을 宜冠侯에 봉한다.

校尉仆多有功,封為煇渠侯。」
교위 僕多에게 전공이 있으니 煇渠侯에 봉한다.”

合騎侯敖坐行留不與驃騎會,當斬,贖為庶人。
합기후 공손오는 행군을 지체하여 표기장군과 합류하지 못한 죄를 지어 참수형에 해당하였으나 속죄금을 내고 서민이 되었다.

諸宿將所將士馬兵亦不如驃騎,驃騎所將常選,然亦敢深入,常與壯騎先其大軍,軍亦有天幸,未嘗困絕也。
의 노련한 장수들이 거느리는 병사와 말과 무기들은 표기장군만 못하였으며표기장군은 항상 정예병을 선발하여 과감히 적진 깊숙이 진입하고항상 건장한 기병들과 함께 대군의 선봉에 섰으나그의 부대 역시 천운이 있으매곤경에 빠진 적이 없었다.

然而諸宿將常坐留落不遇。
그러나 노련한 장수들은 늘 행군이 지체되매 공을 세울 기회를 놓쳤다.

由此驃騎日以親貴,比大將軍。
이로부터 표기장군이 나날이 천자의 친근과 顯貴를 더하여대장군과 比等하였다.

其秋,單于怒渾邪王居西方數為漢所破,亡數萬人,以驃騎之兵也。
그해 가을單于는 渾邪王이 서쪽에 머물면서 누차 漢軍에게 패하여 수만 명을 잃으매 노하였는데이것은 표기장군의 군사 때문이었다.

單于怒,欲召誅渾邪王。
單于가 분노하여 혼야왕을 소환하여 죽이려고 하였다.

渾邪王與休屠王等謀欲降漢,使人先要邊。
혼야왕이 휴도왕 등과 함께 에 투항하려 모의하고사람을 보내어 먼저 변경에서 영접하게 했다.

是時大行李息將城河上,得渾邪王使,即馳傳以聞。
당시 大行 李息이 군사를 거느리고 황하 가에 을 축조하다가혼야왕의 사신을 만나자 즉시 파발마를 급히 보내 조정에 보고하였다.

天子聞之,於是恐其以詐降而襲邊,乃令驃騎將軍將兵往迎之。
천자가 듣고그들이 거짓으로 투항하여 변경을 습격할까 걱정하여 표기장군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그들을 맞이하라고 명령하였다.

驃騎既渡河,與渾邪王眾相望。
표기장군이 황하를 건너서 혼야왕의 군대와 서로 마주보았다.

渾邪王裨將見漢軍而多欲不降者,頗遁去。
혼야왕의 副將들이 漢軍을 보자 투항하지 않으려는 자가 많으매도망가는 자가 많았다.

驃騎乃馳入與渾邪王相見,斬其欲亡者八千人,遂獨遣渾邪王乘傳先詣行在所,盡將其眾渡河,降者數萬,號稱十萬。
표기장군이 이에 말을 달려 적진으로 들어가서 혼야왕을 만나보고도망치려는 자 8천 명을 죽이고 이어 혼야왕만 역참의 수레에 태워 먼저 행재소로 보내고그의 군사를 거느리고 황하를 건너니항복한 자가 수만 명이었는데 10만 명이라고 불렀다.

既至長安,天子所以賞賜者數十巨萬。
長安에 도착한 후 천자가 수십 만의 거금을 상금으로 하사했기 때문이었다.

封渾邪王萬戶,為漯陰侯。
천자가 혼야왕에게 1만 호를 하사하고 漯陰侯로 봉하였다.

封其裨王呼毒尼為下摩侯,鷹庇為煇渠侯,禽為河綦侯,大當戶銅離為常樂侯。
그의 副王인 呼毒尼를 下摩侯鷹庇를 煇渠侯禽梨를 河綦侯大當戶 銅離를 常樂侯에 봉하였다.

於是天子嘉驃騎之功曰:
이에 천자가 표기장군의 공로를 칭찬하며 말하였다.

「驃騎將軍去病率師攻匈奴西域王渾邪,王及厥眾萌咸相奔,率以軍糧接食,
并將控弦萬有餘人,誅獟駻,獲首虜八千餘級,降異國之王三十二人,
戰士不離傷,十萬之眾咸懷集服,
仍與之勞,爰及河塞,庶幾無患,幸既永綏矣。
표기장군 곽거병이 군대를 거느리고 흉노의 서쪽 지역 왕인 혼야왕을 공격함에왕과 그의 백성이 모두 의탁고자 군량을 보급하였다.
표기장군이 군대를 아울러 弓手 1만여 명을 이끌고거칠고 사나운 자를 죽이고 적군 8천여 을 참수하였으며다른 적국의 왕 32명을 항복시켰다.
戰士에 死傷者 없이 10만 대군이 모두 귀환하였다.
표기장군이 누차 전쟁의 노고를 담당하였으매 황하의 변새 지방은 걱정이 거의 사라져서 다행히 오래도록 안정을 누리게 되었다.

以千七百戶益封驃騎將軍。」
표기장군에게 17백 호를 더 봉하노라.”

減隴西、北地、上郡戍卒之半,以寬天下之繇。
농서북지상군의 수자리 병사를 반으로 줄여서천하 백성의 부역을 줄여 주었다.

居頃之,乃分徙降者邊五郡故塞外,而皆在河南,因其故俗,為屬國。
얼마 지나지 않아투항자를 원래는 塞外이었던 변경 5군에 나누어 이주시키니모두 하남에 살면서 자신들의 풍습을 유지한 채로 의 속국이 되었다.

其明年,匈奴入右北平、定襄,殺略漢千餘人。
이듬해(기원전 120), 흉노가 우북평과 정양을 침입하여 漢 백성 1천여 명을 살육하고 약탈하였다.

▶ 異道 : 다른 길로 進軍하다.
▶ 行留 : 행군을 지체하다.
▶ 遂 : 邃와 통하여 깊다. 멀다.
▶ 失道 : 길을 잃다.
▶ 閼氏 : 흉노 선우의 正妻.
▶ 師 : 군대.
▶ 大率 : 대략.
▶ 什三 : 3/10.
▶ 前行 : 선두부대.
▶ 宿將 : 노장. 경험이 풍부하고 노련한 장군.
▶ 士馬兵 : 병사, 말, 병기.
▶ 坐 : ~ 때문에.
▶ 留落 : 행군이 지연되어 뒤떨어지다.
▶ 渾邪王 : 흉노 왕족 1순위이다.
▶ 休屠王 : 흉노 이치사 선우 때의 번왕이다.
▶ 數 : 여러 차례.
▶ 要 : 邀와 통하여 영접하다.
▶ 城 : 축성하다.
▶ 馳傳 : 역참 마차를 급히 보내다.
▶ 頗遁去 : 도망하는 자가 많았다.
▶ 乘傳 : 역참의 수레에 태우다.
▶ 行在所 : 황제가 지방 순시 때 머무는 처소.
▶ 厥 : 그의.
▶ 眾萌 : 眾氓과 통한다. 백성.
▶ 奔 : 의탁하다.
▶ 接食 : 보급하다.
▶ 控弦 : 궁수.
▶ 獟駻 : 본래의 뜻은 사납고 용감한 사람의 뜻이나 여기서는 도망하려는 무리를 말한다.
▶ 離 : 罹와 통하여 당하다.
▶ 懷集 : 돌아오다. 귀환하다. 怀集:归来。按《玉篇》曰:“怀,归也。”《国语》“不其集亡”,韦昭注:“集,至也。” 服:承担。按泷川资言《史记汇注考证》: “服,犹任也;任频兴之劳。”
据此,此“服”字当属下句,应于“怀集”之后断句。(이에 따르면 "服"은 다음 문장에 속해야 하며 "怀集" 뒤에서 끊어야 합니다.)
▶ 仍 : 자주, 누차
▶ 爰 : 이에.
▶ 河塞 : 황하 이북에서 변새 바깥 지역.
▶ 庶幾 : 거의.
▶ 綏 : 편안하다.
▶ 繇 : 徭役. 부역.
▶ 邊五郡 : 변경의 5개군. 隴西, 北地, 上郡, 雲中, 朔方.
▶ 故 : 원래.
▶ 明年 : 漢武帝 元狩 3년(기원전 120년)


其明年,天子與諸將議曰:
「翕侯趙信為單于畫計,常以為漢兵不能度幕輕留,今大發士卒,其勢必得所欲。」
다음해 천자가 장수들과 의논하였다.
흡후 조신이 선우를 위하여 계책을 세우고 있는데항상 漢軍이 사막을 넘어와서 머물기가 쉽지 않다고 여기니지금 대군을 출격시키면 틀림없이 바라는 바를 얻을 터이다.”

是歲元狩四年也。
이 해가 원수 4(기원전 119)이었다.

元狩四年春,上令大將軍青、驃騎將軍去病將各五萬騎,步兵轉者踵軍數十萬,而敢力戰深入之士皆屬驃騎。
원수 4(기원전 119), 천자가 대장군 위청과 표기장군 곽거병에게 각기 5만 를 거느리게 하고보병과 군수품 운반자 수십 만이 군대를 따르게 하고과감히 힘껏 싸우며 적진에 깊숙이 진격할 자는 모두 표기장군 휘하로 소속시켰다.

驃騎始為出定襄,當單于。
표기장군은 처음에 정양에서 출병하여 선우와 맞설 작정이었다.

捕虜言單于東,乃更令驃騎出代郡,令大將軍出定襄。
포로가 말하기를單于가 동쪽으로 갔다고 하매천자가 명령을 바꾸어 표기장군이 代郡에서 출병하게 하고 대장군은 정양에서 출병하게 하였다.

郎中令為前將軍,太仆為左將軍,主爵趙食其為右將軍,平陽侯襄為後將軍,皆屬大將軍。
郎中令 李廣은 전장군太仆 公孫賀는 좌장군主爵都尉 趙食其는 우장군平陽侯 曹襄은 후장군으로 삼아 모두 대장군에 소속시켰다.

兵即度幕,人馬凡五萬騎,與驃騎等咸擊匈奴單于。
대군이 곧 사막을 건넜으며 인마 총 5만 가 표기장군 등과 함께 흉노의 선우를 공격하였다.

趙信為單于謀曰:
「漢兵既度幕,人馬罷,匈奴可坐收虜耳。」
조신은 선우에게 계책을 말하였다.
漢軍이 사막을 건너고 나면 人馬가 모두 지칠 터이니우리는 앉아서 그들을 사로잡으면 됩니다.”

乃悉遠北其輜重,皆以精兵待幕北。
이에 그들의 輜重을 전부 멀리 북쪽에 옮겨 놓고모든 정예병이 사막 북쪽에서 漢軍을 기다리고 있었다.

而適值大將軍軍出塞千餘里,見單于兵陳而待,
於是大將軍令武剛車自環為營,而縱五千騎往當匈奴。
때마침 대장군의 군대가 요새에서 출병하여 천여 리쯤 진격하고선우의 병사들이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이에 대장군은 武剛車를 원형으로 배치하여 군영으로 삼고, 5천 를 풀어 흉노와 대적하였다.

匈奴亦縱可萬騎。
흉노도 약 1만 명를 내보냈다.

會日且入,大風起,沙礫擊面,兩軍不相見,漢益縱左右翼繞單于。
해가 저물 무렵에 바람이 크게 일자모래와 돌이 얼굴에 부딪혀서 양군이 서로 볼 수가 없음에은 左右翼의 군사를 증가시켜 선우를 둘러쌌다.

單于視漢兵多,而士馬尚彊,戰而匈奴不利,
薄莫,單于遂乘六驘,壯騎可數百,直冒漢圍西北馳去。
單于가 보니 의 병사가 많고 병사와 군마가 아직도 강성하여 교전하여도 흉노에게 불리하다고 판단하였다.
해가 질 무렵 單于가 마침내 6마리의 노새가 끄는 수레를 타고 건장한 기병 약 수백을 거느린 채곧장 漢軍의 포위망에 돌진하여 서북쪽으로 달려갔다.

時已昏,漢匈奴相紛挐,殺傷大當。
날은 이미 어두웠는데과 흉노가 서로 혼전을 벌이니사상자가 서로 많았다.

漢軍左校捕虜言單于未昏而去,漢軍因發輕騎夜追之,大將軍軍因隨其後。
漢軍의 좌교위가 잡은 포로가 말하기를單于가 날이 저물기 전에 달아났다고 하매한군은 輕騎를 보내어 밤중에 추격하였고 대장군은 군대를 이끌고 그 뒤를 따라갔다.

匈奴兵亦散走。
흉노 병사도 흩어져 달아났다.

遲明,行二百餘里,不得單于,頗捕斬首虜萬餘級,遂至窴顏山趙信城,得匈奴積粟食軍。
동틀 무렵까지 2백여 리를 갔으나 선우를 잡지 못하였다.
이 과정에서 1만여 을 참수하거나 사로잡았으며마침내 窴顔山의 趙信城에 이르러 흉노가 쌓아 놓은 양식을 획득하여 군사를 먹였다.

軍留一日而還,悉燒其城餘粟以歸。
漢軍이 하루를 머물고 回軍하였는데그 성에 남은 식량을 모조리 불살랐다.

大將軍之與單于會也,而前將軍廣、右將軍食其軍別從東道,或失道,後擊單于。
대장군이 선우와 교전함에전장군 이광과 우장군 趙食其의 군사는 별도로 동쪽 길로 진격하였는데길을 잃고 헤매는 등 선우를 공격함에 늦었다.

大將軍引還過幕南,乃得前將軍、右將軍。
대장군이 철수하여 사막 남쪽을 지날 때에야 전장군과 우장군을 만났다.

大將軍欲使使歸報,令長史簿責前將軍廣,廣自殺。
대장군이 조정에 사신을 보내어 보고하려고長史로 하여금 전장군 이광의 죄상을 심문하게 하자 이광이 자살하였다.

右將軍至,下吏,贖為庶人。
우장군 조이기가 장안에 도착하여 법관에게 넘겨졌으나속죄금을 내고 평민이 되었다.

大將軍軍入塞,凡斬捕首虜萬九千級。
대장군의 군대가 요새에 귀환함에참수하거나 포로로 잡은 적이 총 1만 9천 이었다.

是時匈奴眾失單于十餘日,右谷蠡王聞之,自立為單于。
이때 흉노의 군대가 선우를 잃어버린 지 10여 일이매右谷蠡王이 그 일을 알고 스스로 선우의 자리에 올랐다.

單于後得其眾,右王乃去單于之號。
선우가 훗날 그의 군대를 만나게 되자右谷蠡王은 선우의 칭호를 버렸다.

驃騎將軍亦將五萬騎,車重與大將軍軍等,而無裨將。
표기장군도 5만 를 거느렸으며전차와 치중이 대장군의 군대와 대등하였으나 副將이 없었다.

悉以李敢等為大校,當裨將,出代、右北平千餘里,直左方兵,所斬捕功已多大將軍。
李敢 등을 모두 大校로 임명하여 부장의 역할을 하게 하고代郡과 우북평에서 출병하여 1천여 리 진격하여 흉노의 좌익부대와 맞닥뜨렸는데이때 斬捕의 공이 대장군보다 많았다.

軍既還,天子曰:
군대가 돌아온 후 천자가 말하였다.

「驃騎將軍去病率師,躬將所獲葷粥之士,約輕齎,絕大幕,涉獲章渠,以誅比車耆,
轉擊左大將,斬獲旗鼓,歷涉離侯。
표기장군 곽거병은 군사를 거느리고사로잡은 흉노의 병사들을 친히 이끌고군수품을 가볍게 지니고大幕을 넘고 강을 건너 章渠를 포획하고 흉노의 왕 比車耆를 주살하였다.
방향을 돌려 左大將을 공격하여 적장을 죽이고 軍旗와 戰鼓를 탈취하였으며離侯山을 지났다.

濟弓閭,獲屯頭王、韓王等三人,將軍、相國、當戶、都尉八十三人,封狼居胥山,禪於姑衍,登臨翰海。
弓閭江을 건너 屯頭王韓王 등 3장군相國당호都尉 등 83명을 사로잡았고狼居胥山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姑衍山에서 地神에게 제사 지내고는 翰海 부근의 산에 올랐다.

執鹵獲丑七萬有四百四十三級,師率減什三,取食於敵,閒行殊遠而糧不絕,以五千八百戶益封驃騎將軍。」
사로잡은 포로가 7만 443인데병력이 대략 10분의 3이 줄었을 뿐이고적군에게서 식량을 탈취하여 멀리 행군하면서도 군량이 떨어지지 않았다.
표기장군에게 58백 호를 더 봉하노라. ”

右北平太守路博德屬驃騎將軍,會與城,不失期,從至梼余山,斬首捕虜二千七百級,以千六百戶封博德為符離侯。
右北平 태수 路博德은 표기장군에게 예속되어 與城에서 합류하였으며시기를 놓치지 않고 표기장군을 따라 檮佘山까지 진격하여 참수하거나 사로잡은 적이 2,700 이매, 16백 호를 노박덕에게 주어 符離侯에 봉하였다.

北地都尉邢山從驃騎將軍獲王,以千二百戶封山為義陽侯。
北地의 都尉 邢山은 표기장군을 따르며 흉노의 왕을 사로잡았으매 12백 호를 형산에게 하사하여 義陽侯에 봉하였다.

故歸義因淳王復陸支、樓專王伊即靬皆從驃騎將軍有功,以千三百戶封復陸支為壯侯,以千八百戶封伊即靬為眾利侯。
원래 흉노 사람으로 에 귀의한 因淳王 復陸支와 樓專王 李卽靬은 모두 표기장군을 따라 전공을 세우매복륙지에게 13백 호를 하사하여 壯侯로 봉하였고이즉간에게 18백 호를 주어 衆利侯에 봉하였다.

▶ 畫計 : 계책을 세우다.
▶ 幕 : 漠과 통하여 사막.
▶ 輕留 : 쉽게 머무르다.
▶ 是歲 : 元狩 4년. 기원전 119년.
▶ 轉者 : 군수품을 나르는 병사.
▶ 踵 : 뒤따르다.
▶ 更令 : 명령을 변경하다.
▶ 郎中令 : 李廣.
▶ 太僕 : 公孫賀.
▶ 主爵 : 主爵都尉 趙食其.
▶ 襄 : 曹襄.
▶ 罷 : 疲와 통하여 지치다.
▶ 悉 : 전부.
▶ 適值 : 때마침 ~에 즈음하다.
▶ 武剛車 : 덮개가 있어 몸을 보호할 수 있는 군용 수레.
▶ 可萬騎 : 약 일만 기병. 可는 約.
▶ 會日且入 : 마침 해가 저물다.
▶ 沙礫 : 모래와 자갈.
▶ 益 : 다시.
▶ 繞單于 : 선우를 둘러싸다.
▶ 薄莫 : 해질 무렵. 莫는 暮와 같다.
▶ 六驘 : 여섯 마리의 노새가 끄는 수레.
▶ 紛挐 : 혼전을 벌이다.
▶ 遲明 : 동틀 무렵.
▶ 趙信城 : 趙信은 흉노에게 투항한 장수이고, 흉노가 窴顔山에 성을 쌓고 그곳에 살게 하였기 때문에 趙信城이라 불렀다.
▶ 會 : 교전하다.
▶ 幕南 : =漠南. 대사막의 남쪽.
▶ 簿責 : 죄상을 조사 기록한 문서.
▶ 廣自殺 : 이광은 공을 세우긴 하였지만 결국 제후에 봉해지지 못하고 도리어 벌을 받게 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사기 권109. 이장군열전>

 

 

列傳권109-李將軍列傳(이장군열전)

李廣은 隴西 成紀 사람으로 漢文帝 때 良家의 자제로 종군하여 흉노를 격퇴하여 郞이 되었고, 武騎常侍가 되었다. 景帝 때 驍騎徒尉에 올랐다. 나중에 隴西와 北地, 雁門 등 郡의 太守를 역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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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車重 : 수레와 치중.
▶ 直 : 맞닥뜨리다.
▶ 左方兵 : 흉노의 좌익부대. 즉 左賢王의 군대.
▶ 躬將 : 직접 인솔하다.
▶ 葷粥 : 흉노를 말한다. 은나라 때 흉노를 훈육이라 칭하였다.
▶ 約 : 다발로 묶다.
▶ 輕齎 : 소량의 물자. 齎는 資와 통한다.
▶ 左大將 : 흉노의 고급 장군 명칭.
▶ 歷涉 : 타고 넘다. 뛰어넘다.
▶ 離侯 : 산 이름.
▶ 濟 : 건너다.
▶ 弓閭 : 강 이름.
▶ 狼居胥山 : 지금의 내몽고 자치구 克什克騰旗 서북쪽에 있다.
▶ 封 : 奉祭祀. 산에 올라 신단에서 올리는 제천의식.
▶ 禪 : 산천에 제사를 올림.
▶ 姑衍 : 산 이름.
▶ 瀚海 : 지금의 내몽고 자치구 동북부의 대사막 즉 고비사막이다.
▶ 鹵 : 擄와 통하여 노획하다. 여기서는 흉노를 말한다.
▶ 丑 : 적을 경멸하는 칭호.
▶ 會 : 부대가 합류하다.
▶ 歸義 : 漢에 투항함.

 

從驃侯破奴、昌武侯安稽從驃騎有功,益封各三百戶。
從驃侯 조파노와 昌武侯 安稽도 표기장군을 따라 전공을 세워서 각기 3백 호를 더하여 봉하였다.

校尉敢得旗鼓,為關內侯,食邑二百戶。
교위 이감이 적군의 軍旗와 軍鼓를 탈취하매 관내후로 봉하였고 2백 호를 식읍으로 하사하였다.

校尉自為爵大庶長。
교위 徐自爲에게 大庶長의 작위를 하사하였다.
軍吏卒為官,賞賜甚多。
표기장군의 군관과 병사 중 官位를 받고 포상받은 자가 매우 많았다.

而大將軍不得益封,軍吏卒皆無封侯者。
그러나 대장군 위청은 식읍을 더 늘려주지 않았고그의 군관과 병사에 후작으로 봉해진 자가 없었다.

兩軍之出塞,塞閱官及私馬凡十四萬匹,而復入塞者不滿三萬匹。
두 장군의 군대가 요새를 나설 때 검열한 官馬 및 私馬는 모두 14만 필이었으나다시 요새로 돌아온 말은 3만 필에 불과하였다.

乃益置大司馬位,大將軍、驃騎將軍皆為大司馬。
이에 大司馬의 관직을 증설하여 대장군과 표기장군을 모두 대사마로 임명하였다.

定令,令驃騎將軍秩祿與大將軍等。
칙령을 정하여 표기장군의 품계와 봉록을 대장군과 대등하게 하였다.

自是之後,大將軍青日退,而驃騎日益貴。
이때부터 대장군 위청의 권세는 날로 쇠퇴하고 표기장군은 날이 갈수록 존귀해졌다.

舉大將軍故人門下多去事驃騎,輒得官爵,唯任安不肯。
대장군의 옛 친구와 문객에 대장군을 떠나서 표기장군을 섬기기만 하면 관작을 얻는 자가 많았으나 오직 任安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驃騎將軍為人少言不泄,有氣敢任。
표기장군 곽거병의 사람됨은 과묵하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으나기백이 있어 대담하게 행동하였다.

天子嘗欲教之孫吳兵法,對曰:
「顧方略何如耳,不至學古兵法。」
천자가 일찍이 그에게 孫吳兵法을 가르치려고 하자 곽거병이 대답하였다.
전략을 어떻게 세울지 고려할 뿐고대의 병법을 배움에 이르지 않겠습니다.”

天子為治第,令驃騎視之,對曰:
「匈奴未滅,無以家為也。」
천자가 그를 위하여 府第를 짓고 그에게 보라고 하자 대답하였다.
흉노가 아직 멸망하지 않았으므로집안의 사정을 돌보지 못합니다.”

由此上益重愛之。
이 일이 있고부터 천자가 그를 더욱 중용하고 사랑하였다.

然少而侍中,貴,不省士。
그러니 표기장군은 젊어서 侍中이 되었으므로신분이 귀해지자 사병들을 돌보지 않았다.

其從軍,天子為遣太官齎數十乘,
既還,重車餘棄粱肉,而士有饑者。
그가 출병함에 천자가 그를 위하여 太官을 시켜 수십 의 음식물을 보내주었다.
돌아왔을 때 輜重의 수레에 남아서 버리는 양식과 고기가 있는데도 사병에 굶주린 자가 있었다.

其在塞外,卒乏糧,或不能自振,而驃騎尚穿域蹋鞠。
그가 塞外에 있을 때 사졸의 식량이 떨어져서스스로 일어서지 못하기도 하였지만표기장군은 그래도 땅에 금을 긋고 공차기에 몰두하였다.

事多此類。
매사에 이런 부류가 많았다.

大將軍為人仁善退讓,以和柔自媚於上,然天下未有稱也。
대장군 위청의 사람됨은 어질고 선량하며 겸손하고 사양하였고너그럽고 온화하여 황제의 환심을 샀으나세상에서는 그를 칭찬하는 사람이 없었다.

▶ 校尉敢 : 校尉 李敢.
▶ 旗鼓 : 싸움터에서 사용한 旗와 북
▶ 自為 : 徐自為.
▶ 塞閱 : 出塞시 군대를 검열함.
▶ 益置 : 증설하다.
▶ 大司馬 : 漢武帝 元狩 4년(기원전 119년) 신설한 직위로 후일 정권을 잡은 외척에게 이 직책을 수여하였다.
▶ 定令 : 법령을 확정하다.
▶ 秩祿 : 관리의 품계와 봉록.
▶ 舉 : 전부.
▶ 故人 : 옛 친구.
▶ 門下 : 문객.
▶ 任安 : 益州刺史와 北軍使者護軍을 역임하고, 戾太子의 巫蠱 사건으로 하옥되어 주살되었다.
▶ 少言不泄 : 과묵하고 다른 사람과 이야기할 때 감정을 드러내지 않다.
▶ 孫吳兵法 : 孫武, 孫臏과 吳起의 병법. <참고: 사기 권 65. 손자오기열전>
▶ 方略 : 전략.
▶ 不至 : 필요치 않다.
▶ 治第 : 관저를 짓다. 제는 府第 즉 관저.
▶ 無以 : ~할 필요가 없다.
▶ 不省士 : 병사들을 살피지 않다. 省은 살피다.
▶ 齎 : 주다. 보내다.
▶ 重車 : 군수품을 실은 수레.
▶ 粱 : 일반적으로 식량을 일컫는다.
▶ 振 : 일어서다.
▶ 穿域 : 땅에 구역을 표시하다.
▶ 塌鞠 : 축구.
▶ 自媚 : 환심을 사다.

驃騎將軍自四年軍後三年,元狩六年而卒。
표기장군은 원수 4(기원전 119)에 출격하기 시작하여 3년 뒤인 원수 6년에 죽었다.

天子悼之,發屬國玄甲軍,陳自長安至茂陵,為冢象祁連山。
천자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여 속국의 玄甲軍을 파견하여 장안에서 茂陵까지 堵列하게 하고곽거병의 분묘를 지으며 기련산을 본떴다.

謚之,并武與廣地曰景桓侯。
시호는 武勇을 뜻하는 자와 영토를 넓혔다는 뜻의 자를 합쳐 景桓侯라고 하였다.

子嬗代侯。
아들 郭嬗이 열후를 계승하였다.

嬗少,字子侯,上愛之,幸其壯而將之。
곽선은 나이가 어렸고 자를 子侯라고 불렀는데천자가 사랑하여 그가 장성하면 장군으로 임명하려 하였다.

居六歲,元封元年,嬗卒,謚哀侯。
6년 후원봉 원년에 곽선이 죽자 시호를 哀侯라고 하였다.

無子,絕,國除。
아들이 없어 후대가 끊겼으며 봉국도 폐기되었다.

自驃騎將軍死後,大將軍長子宜春侯伉坐法失侯。
표기장군 죽은 후에 대장군 위청의 장자 宜春侯 衛伉이 법을 위반하여 작위를 잃었다.

後五歲,伉弟二人,陰安侯不疑及發干侯登皆坐酎金失侯。
5년 후(기원전 112위항의 두 아우인 陰安侯 衛不疑와 發干侯 衛登이 모두 酎金의 규정을 어겨서 작위를 상실하였다.

失侯後二歲,冠軍侯國除。
작위를 상실한 2년 뒤에 곽거병의 冠軍侯의 봉국도 폐기되었다.

其後四年,大將軍青卒,謚為烈侯。
4년 후(기원전 106), 대장군 위청이 세상을 떠나자 烈侯라는 시호를 내렸다.

子伉代為長平侯。
장남 衛伉이 이어 長平侯가 되었다.

▶ 四年 : 元狩 4년 (기원전 119년)
▶ 元狩六年 : 기원전 117년. 표기장군 곽거병은 불과 24세의 나이로 죽었다.
▶ 悼 : 애도하다.
▶ 屬國 : 변경의 五郡을 말한다.
▶ 玄甲軍 : 鐵甲兵.
▶ 為冢 : 墳墓를 만들다.
▶ 謚 : 諡號. 죽은 후에 공덕을 칭송하여 추증하는 칭호.
▶ 將之 : 그를 장군으로 임명하려 하다.
▶ 元封 : 漢武帝 여섯 번째 연호. 기원전 110년부터 기원전 105년까지 사용하였다.
▶ 國除 : 봉국을 폐기하다.
▶ 後五歲 : 漢武帝 元狩 6년 이후 5년. 즉 元鼎 5년(기원전 112년)
▶ 酎金 : 漢 때 종묘의 제사 때 제후가 황제에게 바치는 貢金. 원정 5년에 종묘 제사 시 주금의 규정을 어겨 작위를 잃은 자가 106명에 이르렀다.
▶ 失侯後二歲 : 武帝 元封 元年. 기원전 110년.
▶ 冠軍侯 : 기원전 123년 곽거병이 흉노를 정벌한 공이 전군에서 1등이라고 하여 관군후에 봉해졌었다.
▶ 其後四年 : 元封 5년 (기원전 106년).

自大將軍圍單于之後,十四年而卒。
대장군 위청이 흉노 선우를 포위하고 공략하다 14년 만에 죽었다.

竟不復擊匈奴者,以漢馬少,而方南誅兩越,東伐朝鮮,擊羌、西南夷,以故久不伐胡。
마침내 흉노를 다시 공격하지 않음은 의 軍馬가 적은 데다때마침 남쪽으로는 東越과 南越동쪽으로는 朝鮮서쪽으로 羌族 및 西南夷를 정벌하였으매 오랫동안 흉노를 정벌하지 않았다.

大將軍以其得尚平陽長公主故,長平侯伉代侯。
대장군 위청이 평양공주를 아내로 맞이했기 때문에 장평후 위항이 작위를 물려받았다.

六歲,坐法失侯。
6년 뒤에 위항은 법에 저촉되어 작위를 상실하고 봉국은 취소되었다.

▶ 南誅兩越 : 兩越은 南越과 東越을 말한다.
元鼎 6년(기원전 111년) 겨울, 누선장군은 정예 병사를 끌고 먼저 尋陜을 함락시킨 후에 石門을 격파하여 漢이 남월 지역에 9개의 郡을 설치하였다. <사기 권113. 南越列傳>
元封 원년(서기전 110년) 겨울, 무제는 ‘동월은 좁고 험지가 많고, 민월은 흉포하여 자주 반복하여 반역을 일으킨다.’라고 하며, 軍吏에게 조서를 내려 현지 백성을 모두 江淮 일대로 이주시켰다. 동월의 지역은 마침내 텅 비게 되었다. <사기 권114. 東越列傳>
▶ 東伐朝鮮 : 원봉 3년(기원前 108년) 여름, 이계의 재상 삼이 조선 왕 우거를 죽이고 항복하였다. 마침내 조선이 평정되어 四郡을 두었다.<사기 권115 朝鮮列傳>
▶ 擊羌西南夷 : 강족은 티베트, 진족, 한족, 유목 민족, 일부 돌궐 혼합 민족이다. 漢 때에는 西羌이라고도 하였다. 武帝 때에는 이 지역에 西海郡을 설치하였다.
서남 각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소수 민족을 西南夷라고 불렀으며, 그 가운데 비교적 큰 것이 야랑〔夜郞, 귀주 桐梓〕·滇이었다. 漢武帝 元封 2년(서기전 109년)에 황제가 巴蜀의 군대를 동원하여 근침, 미모를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대군을 滇 근방에 주둔시켰다. 전왕은 처음부터 漢에 선의를 가지고 있으매 주살되지 않았다.<사기 권116 西南夷列傳>
▶ 尚公主 : 공주와 결혼하다. 고대에 신하가 군주의 딸과 혼인함을 ‘尚’이라 한다.
▶ 平陽公主 : 平陽公主 劉氏. 漢景帝와 효경황후 왕씨 사이에서 태어난 딸로 漢武帝의 누나이다. 평양후 조수와 결혼하였다가 조수가 병에 걸려 죽자 漢武帝가 위청을 평양공주와 혼인하게 하였다.
▶ 六歲 : 漢武帝 天漢 2년(기원전 99년)
▶ 坐法失侯 : 태초 기원전 104년, 衛伉이 위청의 뒤를 이어 長平侯에 봉해졌으나 5년 후 함부로 궁에 들어간 죄로 형벌을 받고 작위가 박탈되었다.

左方兩大將軍及諸裨將名:
다음은 두 대장군과 副將들의 이름과 공적을 기술한 것이다.

最大將軍青,凡七出擊匈奴,斬捕首虜五萬餘級。
대장군 위청이 都合 7번 출정하여 흉노를 공격함에 참수하거나 사로잡은 것이 5만여 이었다.

一與單于戰,收河南地,遂置朔方郡,再益封,凡萬一千八百戶。
선우와 한 번 교전하여 하남지구를 수복하고 이어 삭방군을 설치하였고두 번 식읍을 더 받았는데 모두 1만 1천 8백 호였다.

封三子為侯,侯千三百戶。
세 아들도 후작에 봉해지니후마다 1,300호이었다.

并之,萬五千七百戶。
모두 합하면 157백 호였다.

其校尉裨將以從大將軍侯者九人。
그의 교위와 副將으로 대장군을 종군함으로써 후작에 봉해진 자가 9명이었다.

其裨將及校尉已為將者十四人。
그의 부장과 교위로서 장군이 된 자는 14명이었다.

為裨將者曰李廣,自有傳。
副將이었던 자로 李廣에 대하여는 별도로 傳記가 있다.

無傳者曰:
전기가 없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

▶ 左方 : 고대에는 문자를 세로로 쓰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썼기 때문에 좌방이라고 하였으며 ‘아래’와 같은 말이다.
▶ 兩大將軍 : 衛青, 霍去病을 말한다.
▶ 最 : 총계.
▶ 凡 : 합계.
▶ 七出 : 일곱 차례 출병함.
▶ 侯者 : 侯에 봉해진 자.
▶ 李廣 : 40여 년 동안 군대를 이끌고 흉노와 대치하면서 70여 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를 치렀다. 元狩 4기원전 119년 대장군 衛靑을 따라 흉노를 공격하다 길을 잃어 문책을 받자 자살하였다. <사기 권109. 李將軍列傳>


 

3. 公孫賀

將軍公孫賀。
장군 公孫賀.

賀,義渠人,其先胡種。
公孫賀는 義渠 사람으로 그의 선조는 胡族이었다.

賀父渾邪,景帝時為平曲侯,坐法失侯。
공손하의 부친 渾邪가 景帝 때 平曲侯로 봉해졌으나 법을 어겨 죄를 얻어 작위를 상실하였다.

賀,武帝為太子時舍人。
공손하는 武帝가 태자이던 시절에 舍人이었다.

武帝立八歲,以太仆為輕車將軍,軍馬邑。
무제가 즉위한 지 8년째 되던 기원전 133太僕의 신분으로 輕車將軍이 되어 馬邑에 주둔하였다.

後四歲,以輕車將軍出雲中。
4년 후(기원전 130輕車將軍의 신분으로 雲中에서 출병하여 흉노를 공격하였다.

後五歲,以騎將軍從大將軍有功,封為南窌侯。
5년 후에 騎將軍의 신분으로 대장군을 종군하여 전공을 세워 南窌侯에 봉해졌다.

後一歲,以左將軍再從大將軍出定襄,無功。
1년 후(기원전 123), 좌장군으로 두 차례 대장군을 따라 정양에서 출병하였으나 공을 세우지 못하였다.

後四歲,以坐酎金失侯。
4년 후酎金의 규정을 위반하여 작위를 상실하였다.

後八歲,以浮沮將軍出五原二千餘里,無功。
8년 후(기원전 111), 浮沮將軍의 신분으로 五原에서 출병하여 2천여 리를 진격하였지만 戰功이 없었다.

後八歲,以太仆為丞相,封葛繹侯。
8년 후(기원전 103), 태복의 신분으로 출정하여 승상이 되었으며 葛繹侯에 봉해졌다.

賀七為將軍,出擊匈奴無大功,而再侯,為丞相。
공손하는 일곱 번 장군이 되어 출병하여 흉노를 공격함에 큰 공이 없었으나두 차례 후에 봉해졌고 승상이 되었다.

坐子敬聲與陽石公主姦,為巫蠱,族滅,無後。
아들 公孫敬聲이 陽石公主와 사통하고 巫蠱의 난에 연루되어 멸족당하매 후대가 끊겼다.

▶ 先 : 祖先.
▶ 胡種 : 흉노 종족의 하나.
▶ 武帝立八歲 : 元光 2년(기원전 133년).
▶ 軍 : 주둔하다.
▶ 後四歲 : 後三歲가 올바르며 元光 5년(기원전 130년).
▶ 後五歲 : 元朔 5년(기원전 124년).
▶ 後一歲 : 元朔 6년(기원전 123년).
▶ 後四歲 : 元狩 4년(기원전 119년).
▶ 酎金 : 漢의 종묘 제사 때 제후가 황제에게 바치는 貢金.
▶ 後八歲 : 元鼎 6년(기원전 111년).
▶ 後八歲 : 武帝 太初 2년(기원전 103년).
▶ 子敬聲 : 공손하의 아들 公孫敬聲. 공손경성은 정화 연간에 北軍의 공금 1,900만 전을 횡령한 것이 발각되어 하옥되었다. 아버지 공손하는 당대의 유명한 도적 朱安世를 잡아들여 공손경성의 죄를 갚으려 하였고, 주안세를 잡는 데 성공하였으나, 도리어 주안세가 공손경성이 陽石公主와 사통한 사실과 무고로 황제를 저주한 사실을 고발하였다. 결국 공손하 또한 하옥되었고, 정화 2년(기원전 91년) 일족이 모두 주살되었다.
▶ 巫蠱 : 迷信으로 나무인형을 땅에 묻어 巫術을 사용하여 사람을 죽게 하는 주술이다. 당시 武帝를 저주한다는 유언비어가 있자 武帝가 江充에게 이를 다스리게 하였다. 江充이 武帝의 총애를 믿고 평소 사이가 좋지 않던 戾太子를 압박하고자 저주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나무로 만든 인형이 태자궁에서 많이 나왔다고 무고하였다. 이에 戾太子가 황제가 도성에 있지 않은 틈을 타 궁중 수비병을 동원하여 江充을 살해하였다. 이를 태자의 반란이라고 여긴 무제가 군대를 보내 체포하려 하자 戾太子는 虢州로 도망갔으나 죄를 면할 수 없음을 알고 자결하였는데, 이 사건으로 그의 처자식과 수많은 사람이 처형되었다.

 

4.李息

將軍李息,郁郅人。
장군 李息은 郁郅 사람이다.

事景帝。
경제를 섬겼다.

至武帝立八歲,為材官將軍,軍馬邑;
後六歲,為將軍,出代;
後三歲,為將軍,從大將軍出朔方:皆無功。
무제가 즉위한 지 8년째 되던 기원전 133년에 材官將軍이 되어 마읍에 주둔하였다.
6년 후장군이 되어 代郡에서 출병하였다.
3년 후에 장군이 되어 대장군을 따라 삭방에서 출병하였으나 전공이 없었다.

凡三為將軍,其後常為大行。
모두 세 차례 장군이 되었고그 후에는 늘 大行의 관직을 맡았다.

▶ 後六歲 : 武帝 元朔 원년(기원전 128년).
▶ 後三歲 : 元朔 3년(기원전 126년).
▶ 이식에 대한 기록은 한장유열전, 흉노열전, 위장군표기열전 등에 기록되어 있다.

 

5.公孫敖

將軍公孫敖,義渠人。
장군 公孫敖는 의거 사람이다.

以郎事武帝。
郎官의 신분으로 무제를 섬겼다.

武帝立十二歲,為騎將軍,出代,亡卒七千人,當斬,贖為庶人。
무제가 즉위한 지 12년째 되던 기원전 130년에 기장군이 되어 代郡에서 출병하였는데군사 7천 명을 잃어 참수형에 해당하였으나 속죄금을 내고 서민이 되었다.

後五歲,以校尉從大將軍有功,封為合騎侯。
5년 후다시 교위의 신분으로 대장군을 따라 출병하여 공을 세워 合騎侯로 봉해졌다.

後一歲,以中將軍從大將軍,再出定襄,無功。
1년 후(기원전 123), 中將軍의 신분으로 대장군을 따라 두 차례 정양에서 출병하였지만 전공을 세우지 못하였다.

後二歲,以將軍出北地,後驃騎期,當斬,贖為庶人。
2년 후장군의 신분으로 北地에서 출병하였으나 표기장군과 약정한 기일을 어겨참수형에 해당하였으나 속죄금을 내고 서민이 되었다.

後二歲,以校尉從大將軍,無功。
2년 후교위의 신분으로 대장군을 따라 출병하였으나 전공을 세우지 못하였다.

後十四歲,以因杅將軍筑受降城。
14년 후(기원전 105), 因杅將軍의 신분으로 受降城을 축조하였다.

七歲,復以因杅將軍再出擊匈奴,至余吾,亡士卒多,下吏,當斬,詐死,亡居民閒五六歲。
7년 후다시 인우장군으로 두 차례 출전하여 흉노를 공격함에余吾水까지 진격했다가 많은 사졸을 잃어 법관에게 넘겨져 사형의 판결을 받았으나옥중에서 죽은 척하다가 도망쳐서 민간에서 5~6년 동안 숨어 살았다.

後發覺,復系。
그 뒤 발각되어 다시 체포되었다.

坐妻為巫蠱,族。
그의 처가 무고의 난에 연루되어 일족이 멸족되었다.

凡四為將軍,出擊匈奴,一侯。
모두 네 차례 장군이 되어 흉노와 전투를 벌여 한 차례 열후에 봉해졌다.

▶ 武帝立十二歲 : 元光 5년(기원전 130년).
▶ 後五歲 : 元朔 5년(기원전 124년).
▶ 後一歲 : 元朔 6년(기원전 123년).
▶ 後二歲 : 元狩 2년(기원전 121년).
▶ 後二歲 : 元狩 4년(기원전 119년).
▶ 後十四歲 : 武帝 元封 6년(기원전 105년).
▶ 七歲 : 칠년 후. 武帝 天漢 3년(기원전 98년).
▶ 詐死 : 죽은 체하다.
▶ 亡居 : 도망쳐서 숨어 살다.
▶ 系 : 체포하다.
▶ 族 : 滅族.
▶ 공손오에 대한 기록은 한장유열전, 흉노열전, 위장군표기열전 등에 기록되어 있다.

 

6. 李沮

將軍李沮,雲中人。事景帝。
장군 李沮는 운중 사람으로 경제를 섬겼다.

武帝立十七歲,以左內史為彊弩將軍。
무제가 즉위한 지 17년 되던 기원전 124년에 左內史의 신분으로서 彊弩將軍이 되었다.

後一歲,復為彊弩將軍。
1년 후다시 강노장군이 되었다.

▶ 武帝立十七歲 : 元朔 5년(기원전 124년).
좌내사 이저는 彊弩將軍이 되어 소건 · 공손하 · 이채와 함께 거기장군 위청을 따라 흉노를 쳤다. 이후 공적을 인정받아 관내후에 봉해지고 식읍 3백 호를 받았다.
이듬해, 위청이 정양에서 출격하였다. 이저는 다시 강노장군이 되어 종군하고 흉노를 무찔렀다. <사기 권110. 흉노열전, 사기 권111.위장군표기열전>

 

7. 李蔡

將軍李蔡,成紀人也。
장군 李蔡는 成紀 사람이다.

事孝文帝、景帝、武帝。
文帝景帝武帝를 섬겼다.

以輕車將軍從大將軍有功,封為樂安侯。
輕車將軍의 신분으로 대장군을 따라 출전하여 공로를 세워 樂安侯에 봉해졌다.

已為丞相,坐法死。
그 후 승상까지 올랐으나 법을 위반하여 처형당하였다.

▶ 已 : 그 후.
▶ 坐法死 : 법을 위반하여 처형당하다. 李蔡는 원수 5년(기원전 118년), 무제에게서 경제의 능묘에 딸린 토지 20畝를 무덤자리로 하사받았다. 그러나 능묘에서 3頃을 몰래 더 떼어서 40여만 전에 팔아치웠고, 또 경제의 제사에 쓰이던 공터 1무를 침범하여 거기에 장례를 치렀다. 사실이 발각되어 형리에게 넘겨지게 되었고,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 李蔡는 李廣의 사촌 동생으로 공적은 <사기 권109. 이장군열전>에 기록되어 있다.

 

8.張次公

將軍張次公,河東人。
장군 張次公은 河東 사람이다.

以校尉從衛將軍青有功,封為岸頭侯。
교위의 신분으로 대장군 위청을 따라 출전하여 전공을 세워 岸頭侯로 봉해졌다.

其後太后崩,為將軍,軍北軍。
그 후 王太后가 붕어하자 장군이 되어 北軍에 주둔하였다.

後一歲,為將軍,從大將軍,再為將軍,坐法失侯。
1년 후장군이 되어 대장군을 따라 출정하였다두 차례 장군이 되었으나 법을 위반하여 작위를 상실하였다.

次公父隆,輕車武射也。
장차공의 부친 張隆은 輕車부대의 용감한 射手였다.

以善射,景帝幸近之也。
활을 잘 쏘아 경제가 그를 총애하고 측근으로 두었다.

▶ 太后崩 : 武帝의 모친 王太后가 죽다. 元朔 3년(기원전 126년).
▶ 後一歲 : 元朔 5년.
▶ 輕車 : 고대의 전차.
▶ 武射 : 용감하고 활을 잘 쏘는 병사.
※ 장차공에 대한 기록은 <사기 권110. 흉노열전> 및 <권111.위장군표기열전>에 실려 있다.

 

9. 蘇建

將軍蘇建,杜陵人。
장군 蘇建은 杜陵 사람이다.

以校尉從衛將軍青,有功,為平陵侯,以將軍筑朔方。
교위의 신분으로 대장군 위청을 따라 출전하여 전공을 세워 平陵侯에 봉해졌으며 장군의 신분으로 朔方에 성을 축조하였다.

後四歲,為游擊將軍,從大將軍出朔方。
4년 후유격장군의 신분으로 대장군을 따라 삭방에서 출전하였다.

後一歲,以右將軍再從大將軍出定襄,亡翕侯,失軍,當斬,贖為庶人。
1년 후우장군이 되어 두 차례 대장군을 따라 정양에서 출전하였으나흉노의 대군을 만나 翕侯 조신이 도망가고 휘하의 군사를 잃어 참수형에 해당하였으나 속죄금을 내고 서민이 되었다.

其後為代郡太守,卒,冢在大猶鄉。
그 후 代郡 태수가 되었다가 죽었으며무덤이 大猶鄕에 있다.

▶ 以將軍 : 장군의 신분으로.
▶ 後四歲 : 蘇建은 元朔 원년(기원전 128년)에 平陵侯에 봉해졌으며 그 후 4년은 元朔 5년으로 그해 봄에 유격장군의 신분으로 대장군을 따라가서 흉노를 정벌하였다.
▶ 後一歲 : 元朔 6년.
※ 蘇建에 대한 기록은 <사기 권110. 흉노열전> 및 <권111.위장군표기열전>에 실려 있다.

 

10. 趙信

將軍趙信,以匈奴相國降,為翕侯。
장군 趙信은 흉노의 相國 출신으로 으로 투항하여 翕侯로 봉해졌다.

武帝立十七歲,為前將軍,與單于戰,敗,降匈奴。
무제가 즉위한 지 17년째 되던 기원전 124년에 前將軍이 되어 선우와 싸우다가 패하여 다시 흉노에 투항하였다.

▶ 武帝立十七歲 : 元朔 6년(기원전 123년) 조신은 원래 흉노 사람으로 漢에 투항하여 흡후가 되었다. 전장군이 되어 위청을 따라 흉노를 공격하였다가 상황이 위급하자, 흉노의 투항 권유를 받고 마침내 남은 약 8백 명의 기병을 이끌고 선우에게 투항하였다. <사기 권111.衛將軍驃騎列傳>


11. 張騫

將軍張騫,以使通大夏,還,為校尉。
장군 張騫은 大夏에 사신으로 가서 국교를 맺었으며돌아와 교위가 되었다.

從大將軍有功,封為博望侯。
대장군을 따라 출전하여 전공을 세워 博望侯로 봉해졌다.

後三歲,為將軍,出右北平,失期,當斬,贖為庶人。
3년 후장군이 되어 우북평에서 출전하였으나 대장군과 약속한 기일을 어겨 참수형에 해당하였으나 속죄금을 내고 서민이 되었다.

其後使通烏孫,為大行而卒,冢在漢中。
그 후 사신이 되어 烏孫과 국교를 열었으며大行의 신분으로 죽었으며무덤은 漢中에 있다.

▶ 從大將軍 : 元朔 6년 (기원전 123년). 張騫이 대장군을 따라 출병하였을 때, 예전에 大夏에 사신으로 갔다가 오랫동안 흉노에게 억류되어 嚮導를 하여서 물과 풀이 풍부한 곳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군사들은 기갈을 면할 수가 있었으며, 게다가 앞서 먼 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공로를 인정받아 장건을 博望侯에 봉하였다.<사기 권111.위장군표기열전>
▶ 後三歲 : 元狩 2년(기원전 121년) 여름.
▶ 其後 : 元狩 4년.
※ 蘇建에 대한 기록은 <사기 권109.이장군열전>, <사기 권110.흉노열전> 및 <권111.위장군표기열전>에 실려 있다.

 

12. 趙食其

將軍趙食其,祋祤人也。
장군 趙食其는 祋祤 사람이다.

武帝立二十二歲,以主爵為右將軍,從大將軍出定襄,迷失道,當斬,贖為庶人。
무제 즉위 22(기원전 119)에 主爵都尉의 신분으로 우장군이 되어 대장군을 따라 정양에서 출전하였으나 도중에 길을 잃으매 참수형에 해당하였으나 속죄금을 내고 서민이 되었다.

▶ 武帝立二十二歲 : 武帝 元狩 4년(기원전 119년).
▶ 趙食其 : 기원전 119년, 조이기는 우장군이 되어 조양·이광·공손하와 함께 위청을 따라 정양에서 출진하였으나, 길을 잃어 참형에 처하게 되었고, 속죄금을 내고 관작이 박탈되었다. <사기 권109. 이장군열전>


13.曹襄

將軍曹襄,以平陽侯為後將軍,從大將軍出定襄。
장군 趙襄은 平陽侯의 신분으로 後將軍이 되어 대장군을 따라 정양에서 출병하였다.

襄,曹參孫也。
조양은 相國 曹參의 손자이다.

▶ 曹參 : 高祖의 功臣이다. 조참은 蕭何와 더불어 高祖를 보좌하여 천하를 평정하였다.<史記 54. 조상국세가>


14. 韓說

將軍韓說,弓高侯庶孫也。
장군 韓說은 弓高侯 韓頹當의 庶孫이다.

以校尉從大將軍有功,為龍頟侯,坐酎金失侯。
교위의 신분으로 대장군을 따라 출전하여 공을 세웠으므로 龍頟侯가 되었으나酎金의 규정을 위반하여 작위를 잃었다.

元鼎六年,以待詔為橫海將軍,擊東越有功,為按道侯。
元鼎 6(기원전 111), 待詔의 신분으로 橫海將軍이 되었으며 東越을 공격하여 전공을 세웠으므로 按道侯에 봉해졌다.

以太初三年為游擊將軍,屯於五原外列城。
太初 3(기원전 102)에 유격장군이 되어 五原의 변경 지역의 여러 성곽지대에 주둔하였다.

為光祿勳,掘蠱太子宮,衛太子殺之。
光祿勛이 되었으며태자궁에서 나무 인형을 파냈으매 衛太子가 그를 살해하였다.

▶ 弓高侯 : 韓頹當. 韓王 信의 아들로, 漢王이 기원전 200년에 흉노로 달아나 頹當城에서 낳았기에 그 성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지어줬다. 문제 때 형의 아들 한영과 함께 무리를 이끌고 漢에 투항하여 문제 16년(기원전 164년)에 弓高侯에 봉해졌다. 오초칠국의 난에서는 주아부의 명령을 받고 장수들과 함께 경기병으로 오·초의 양도를 끊는 작전에 참여하였고, 齊를 포위하고 있다가 본국으로 돌아간 교서왕 유앙을 꾸짖어 자결하게 하였다.
▶ 酎金 : 漢 때 종묘의 제사 시 제후가 황제에게 바치는 貢金. 원정 5년(기원전 112년), 주금에 연루되어 작위를 빼앗겼다.
▶ 元鼎六年 : 기원전 111년.
▶ 太初三年 : 기원전 102년.
▶ 列城 : 五原 변경의 여러 성루.
▶ 掘蠱 : 정화 2년(기원전 91년), 수형都尉 강충이 戾太子가 武帝를 저주하였다고 고변하였다. 이때 韓說은 강충과 함께 문초를 맡았는데, 강충이 끝내 증거를 날조하기까지 하니 여태자는 반란을 일으켰다(무고의 난). 여태자는 자신의 빈객을 조정의 사자로 꾸며 강충 등을 체포하게 하였다. 한열은 사자가 건넨 조서를 가짜로 의심하여 응하지 않았고, 결국 빈객에게 맞아 죽었다.
▶ 衛太子 : 武帝의 태자 劉據. 衛子夫 황후의 소생이다. 太子 劉據는 武帝 征和 2년(기원전 91년)에 江充에 의하여 誣陷을 받자, 당시 요양차 甘泉宮에 있던 武帝에게 일의 전말을 자세히 아뢰어 자신의 억울함을 하소연하지 않고 군대를 일으켜 江充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결국 패하여 도망갔다가 자살하였다.(巫蠱의 난).
※ 韓說에 대한 기록은 <사기 권110. 흉노열전> 및 <권111.위장군표기열전>에 실려 있다.

 

15.郭昌

將軍郭昌,雲中人也。
장군 郭昌은 운중 사람이다.

以校尉從大將軍。
교위의 신분으로 대장군을 따라 출정하였다.

元封四年,以太中大夫為拔胡將軍,屯朔方。
元封 4(기원전 107), 태중대부의 신분으로 拔胡將軍이 되어 삭방에 주둔하였다.

還擊昆明,毋功,奪印。
돌아와서 昆明을 공격하였으나 공로가 없어 장군의 직위를 잃었다.

▶ 元封四年 : 기원전 107년.
▶ 奪印 : 장군의 관인을 회수하다. 즉, 해직하다.

 

16.荀彘

將軍荀彘,太原廣武人。
장군 荀彘는 太原 廣武 사람이다.

以御見,侍中,為校尉,數從大將軍。
황제의 수레를 잘 몲으로 알현을 청하여 侍中에 임명되었으며교위의 신분으로 여러 차례 대장군을 따라 출정하였다.

以元封三年為左將軍擊朝鮮,毋功。
원봉 3(기원전 108), 좌장군이 되어 朝鮮을 공격하였으나 공을 세우지 못하였다.

以捕樓船將軍坐法死。
樓船將軍 楊僕을 체포한 죄로 사형되었다.

▶ 御 : 황제의 수레.
▶ 元封三年 : 기원전 108년.
▶ 捕樓船將軍 : 樓船將軍 楊僕을 체포하다. 순체가 조선을 정벌할 때 누선장군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공손수와 함께 부절로 누선장군을 부르며 좌장군의 군영에서 일을 상의하자고 하여 좌장군 휘하에게 누선장군을 체포하게 하는 한편, 그 군대를 병합한 다음 천자에게 보고하였다. 천자는 공손수를 죽여버렸다. 좌장군 순체는 위만조선을 평정한 후 공을 다툰 죄목으로 사형되었다.<사기 권115. 朝鮮列傳>

 

17. 霍去病

最驃騎將軍去病,凡六出擊匈奴,其四出以將軍,斬捕首虜十一萬餘級。
표기장군 곽거병은 도합 여섯 차례 출격하여 흉노와 전투를 벌였으며그중에서 네 차례는 장군의 신분으로 출격하여 11만여 명의 적을 참수하거나 사로잡았다.

及渾邪王以眾降數萬,遂開河西酒泉之地,西方益少胡寇。
혼야왕이 군대 수만으로 투항하자河西酒泉 지역을 개척하니서쪽에 흉노의 침입이 더욱 적어졌다.

四益封,凡萬五千一百戶。
네 차례 봉지를 더하였는데총 151백 호였다.

其校吏有功為侯者凡六人,而後為將軍二人。
그를 따라 출정하였던 교위와 군관 중에서 공로가 있어 가 된 자가 모두 6명이었으며후일 장군이 된 자는 2명이었다.

▶ 最 : 합계.
▶ 後為將軍二人 : 후일 장군이 된 자는 다음에 소개되는 路博德과 趙破奴이다.

 

18. 路博德

將軍路博德,平州人。
장군 路博德은 平州 사람이다.

以右北平太守從驃騎將軍有功,為符離侯。
그는 右北平 태수의 신분으로 표기장군을 따라 출전하여 공을 세워 符離侯로 봉해졌다.

驃騎死後,博德以衛尉為伏波將軍,伐破南越,益封。
표기장군 곽거병이 죽은 후노박덕이 衛尉의 신분으로 伏波將軍이 되어 南越을 토벌하여 격파하니 봉록을 더 늘였다.

其後坐法失侯。
그 후 법을 위반하여 작위를 상실하였다.

為彊弩都尉,屯居延,卒。
彊弩都尉가 되어 거연에 주둔하던 중에 죽었다.

▶ 從驃騎將軍有功 : 元狩 4년(기원전119년), 路博德은 곽거병을 따라 출정하여 적군 2,700명을 참수하거나 포로로 잡았은 공으로 1,600호의 식읍을 받고 符離侯에 봉해졌다.
※ 노박덕에 대한 기록은 <사기권110. 흉노열전> 및 <권111.위장군표기열전>에 실려 있다.

 

19. 趙破奴

將軍趙破奴,故九原人。
장군 趙破奴는 원래 九原 사람이다.

嘗亡入匈奴,已而歸漢,為驃騎將軍司馬。
예전에 흉노로 도망하였다가 다시 에 귀순하여 표기장군의 司馬가 되었다.

出北地時有功,封為從驃侯。
북지에서 출전하였을 때 전공을 세워 從驃侯로 봉해졌다.

坐酎金失侯。
뒤에 酎金의 규정을 위반하여 작위를 잃었다.

後一歲,為匈河將軍,攻胡至匈河水,無功。
1년 후匈河將軍이 되어 흉노를 공격하여 匈河水까지 진격하였으나 전공을 세우지 못하였다.

後二歲,擊虜樓蘭王,復封為浞野侯。
2년 후樓蘭王을 공격하여 사로잡자 다시 浞野侯로 봉해졌다.

後六歲,為浚稽將軍,將二萬騎擊匈奴左賢王,左賢王與戰,兵八萬騎圍破奴,破奴生為虜所得,遂沒其軍。
6년 후浚稽將軍이 되어 2만 를 거느리고 흉노의 左賢王을 공격함에좌현왕이 교전하며 군사 8만으로 조파노를 포위하니 조파노가 사로잡히고 그의 군사는 전멸하였다.

居匈奴中十歲,復與其太子安國亡入漢。
흉노에서 10년 동안 지내다가다시 그의 長子인 安國과 함께 도망쳐 으로 돌아왔다.

後坐巫蠱,族。
훗날 巫蠱의 난에 연루되어 族滅되었다.

▶ 為驃騎將軍司馬 : 元狩 2년(기원전121년), 趙破奴는 鷹擊司馬가 되어 霍去病을 따라 흉노를 공격하여 큰 공을 세워 從驃侯에 봉해졌으며 1천5백 호의 식읍을 받았다.
▶ 酎金 : 漢 때 종묘의 제사 시 제후가 황제에게 바치는 貢金.
▶ 後一歲 : 武帝 元鼎 6년(기원전 111년).
▶ 後二歲 : 武帝 元封 2년(기원전 109년).
▶ 後六歲 : 武帝 太初 2년(기원전 103년).
▶ 居匈奴中十歲 : 十歲가 아니라 四歲가 되어야 옳다.
▶ 太子安國 : 趙破奴의 맏아들.
▶ 巫蠱 : 정화 2년(기원전 91년), 수형都尉 강충이 戾太子가 武帝를 저주하였다고 고변하였다. 이때 韓說은 강충과 함께 문초를 맡았는데, 강충이 끝내 증거를 날조하기까지 하여 여태자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수많은 사람이 처형되었다.
※ 조파노에 대한 기록은 <권110. 흉노열전> 및 <권111.위장군표기열전>에 실려 있다.

自衛氏興,大將軍青首封,其後枝屬為五侯。
위씨 일족이 흥기하면서 대장군 위청이 처음으로 열후로 봉해졌고그의 자손과 親屬 중에 다섯 명이 열후로 봉해졌다.

凡二十四歲而五侯盡奪,衛氏無為侯者。
도합 24년 동안에 다섯 명의 열후가 모두 작위를 박탈당하였고위씨에 더이상 열후가 된 사람이 없었다.

▶ 首封 : 처음으로 후작에 봉해지다.
▶ 枝屬 : 자손과 친속.

太史公曰:
蘇建語余曰:
「吾嘗責大將軍至尊重,而天下之賢大夫毋稱焉,願將軍觀古名將所招選擇賢者,勉之哉。
大將軍謝曰:
『自魏其、武安之厚賓客,天子常切齒。
彼親附士大夫,招賢絀不肖者,人主之柄也。
人臣奉法遵職而已,何與招士!』」
驃騎亦放此意,其為將如此。
태사공은 말한다.
蘇建이 나에게 말해주었다.
나는 大將軍 위청을 책망하기를대장군께서 지극히 존귀한 지위에 계시지만 천하의 현명한 대부가 대장군을 칭송하지 않으니장군께서 옛날의 명장들이 현명한 사람을 불러서 선택한 일을 관찰함에 힘쓰시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대장군은 이를 거절하면서 말씀하시기를,
예전에 魏其侯 竇嬰과 武安侯 田蚡이 빈객을 후대하자 천자가 항상 이를 갈았소.
그렇게 사대부를 친근하게 위로하며 현명한 자들을 초빙하고 현명하지 않은 자들을 물리침은 군주의 권한이오.
남의 신하 된 자가 법을 받들고 직책에 충실하면 그만이지무엇 때문에 선비를 초빙하겠는가!라고 하셨습니다.’
驃騎將軍 霍去病도 이러한 대장군의 뜻을 본받았으니그들의 장군됨이 이와 같았다.

▶ 蘇建 : 蘇武의 아버지이며, 校尉로 衛靑을 따라 흉노와 싸워 공을 세우고 武帝 元朔 2기원전 127년 平陵候에 봉해졌다
▶ 責 : 책망하다.
▶ 毋 : 無와 통한다.
▶ 謝 : 거절하다.
▶ 魏其 : 魏其侯 竇嬰. 西漢의 大臣이며 字는 王孫이다. 文帝의 황후인 竇皇后의 조카로 오초칠국의 난 때 대장군으로 임명되어 형양을 지키며 齊·趙의 병사를 감독하였다. 오초칠국의 난이 평정된 후 魏其侯로 임명되었다. 景帝는 두영이 사람됨이 가벼워 스스로를 진중하게 유지하지 못한다고 하여 재상으로 기용하지 않았다. 武帝 초에 丞相에 임명되었고, 儒學을 숭상하여 두태후의 뜻을 거슬러 파직되었으며, 승상 田蚡과 사이가 나빠져 그의 모함을 받아 사형되었다.<史記 권107.魏其武安侯列傳 ①魏其侯 竇嬰>
▶ 武安 : 武安侯 田蚡. 長陵 사람으로 景帝 王皇后 王娡와 어머니는 같고 아버지가 다른 동생이다. 처음에 諸曹郞이 되고, 경제 말년에 총애를 받기 시작하였다. 외척의 신분으로 武帝의 총애를 받아 太尉를 지냈고, 武安侯에 봉해진 뒤 太尉를 거쳐 丞相이 되었다. 미천할 때 竇嬰을 섬겼는데, 출세하고 두영이 세력을 잃자 무고하여 두영과 灌夫를 살해하였다. 유가 사상을 숭상하였지만 黃老 사상을 좋아한 竇太后에 의하여 파직되었다. 두태후가 죽은 뒤 복직되어 무제의 유학 장려 정책에 크게 기여하였다. 병으로 죽었다.
<史記 권107.魏其武安侯列傳 ②武安侯 田蚡>
▶ 切齒 : 매우 증오하다. 이를 갈다. 切齿腐心
▶ 親附 : 친근하게 위로하다.
▶ 絀 : 黜과 통하여 제거하다.
▶ 柄 : 권력.
▶ 放 : 仿과 통하여 모방하다. 본받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