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편은 匈奴에 대한 역사적인 기록과 漢과 흉노와의 관계에 관한 기록이다.
匈奴가 기원전 3세기 말부터 기원후 1세기 말까지 몽골고원과 만리장성 일대를 중심으로 활약한 遊牧騎馬民族 및 그들이 형성한 북몽고와 중앙아시아 일대의 국가를 일컫는다.
이 편에서는 흉노에 대한 역사적 기록을 중국의 역사와 비교하였으며, 漢 초에는 흉노와 화친관계를 유지하였으나 漢武帝 때에 이르러 흉노와의 장기적인 전쟁으로 긴장관계를 유지하였음을 기록하였다.
사마천은 漢武帝 시대에 사기를 기록하였으므로 이 부분을 자세히 서술하였다.
匈奴,其先祖夏后氏之苗裔也,曰淳維。
匈奴의 선조는 夏后氏의 후예로 淳維라고 한다.
唐虞以上有山戎、獫狁、葷粥,居于北蠻,隨畜牧而轉移。
唐堯와 虞舜 이전에는 山戎, 獫狁, 葷粥 등이 있었으며 북쪽의 미개척지에서 가축을 기르며 옮겨 다녔다.
其畜之所多則馬、牛、羊,其奇畜則橐駞、驢、驘、駃騠、騊駼、騨騱。
그들이 치는 것으로 주된 것은 말, 소, 양이었는데, 기이한 가축으로는 橐駞, 나귀, 노새, 명마인 駃騠, 준마인 騊駼, 야생마인 騨騱 등이 있었다.
逐水草遷徙,毋城郭常處耕田之業,然亦各有分地。
물과 풀을 따라 옮겨 다니며, 성곽이나 일정한 주거지도 없고 농사를 짓지 않았으나, 각 부족은 분할된 땅을 가졌다.
毋文書,以言語為約束。
문자와 서적이 없었으므로 말로써 약속하였다.
兒能騎羊,引弓射鳥鼠;
少長則射狐兔:用為食。
어린아이도 능히 양을 타고 다니며 활로 새나 쥐를 쏘고,
조금 더 자라면 여우나 토끼 사냥을 하여 식량으로 삼았다.
士力能毋弓,盡為甲騎。
장정들의 힘은 자유자재로 활을 당길 수 있어 모두 무장 기병이 되었다.
其俗,寬則隨畜,因射獵禽獸為生業,急則人習戰攻以侵伐,其天性也。
그들의 풍속은 평상시에는 목축에 종사하며 새나 짐승의 사냥을 생업으로 삼고, 긴급한 상황일 때에는 사람들이 전투와 공격에 익숙하여 침략함이 그들의 천성이었다.
其長兵則弓矢,短兵則刀鋋。
그들이 먼 거리에 쓰는 무기는 활과 화살이고, 가까운 거리에서 쓰는 무기는 칼과 작은 창이었다.
利則進,不利則退,不羞遁走。
싸움이 유리하면 진격하고 불리하면 퇴각하되 도주함을 수치로 여기지 않았다.
茍利所在,不知禮義。
단지 이익이 있으면 예의를 차리지 않았다.
自君王以下,咸食畜肉,衣其皮革,被旃裘。
君王 이하 모두가 가축의 고기를 먹고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고 털로는 갖옷을 만들어 입었다.
壯者食肥美,老者食其餘。
장정들은 기름지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노약자들은 그 나머지를 먹었다.
貴壯健,賤老弱。
건장한 사람을 중히 여기고, 노약자들은 천시하였다.
父死,妻其後母;
兄弟死,皆取其妻妻之。
아버지가 죽으면 아들이 아버지의 후처를 아내로 삼고,
형제가 죽으면 남아 있는 형제가 죽은 형제의 아내를 아내로 삼았다.
其俗有名不諱,而無姓字。
그들의 풍속에 이름이 있었는데, 이름을 부름을 꺼리지 않았고, 姓이나 字는 없었다.
▶ 夏后氏 : 夏后氏 禹는 性이 姒이고 이름은 文命이다. 그는 鯀의 아들이고 顓頊의 손자이다. 순임금 때 홍수를 다스린 공로로 천자의 자리를 물려받아 하나라를 세웠다.
▶ 苗裔 : 여러 대를 거친 먼 후대의 자손.
▶ 唐虞 : 陶唐氏 堯와 有虞氏 舜을 말한다.
▶ 橐駞 : 橐駝. 駱駝.
▶ 驢 : 당나귀.
▶ 驘 : 노새. 암말과 수나귀 사이에 난 튀기.
▶ 駃騠 : 명마의 이름. 駃騠는 중국 북방의 소수민족이 수말과 암 노새를 교접시켜 낳은 말이다. 거친 사료를 거뜬하게 먹고 노역을 견디며 질병에 강하고 지구력이 좋아 준마로 분류된다.
▶ 騊駼 : 털빛이 푸른 야생마. 준마의 이름
▶ 騨騱 : 야생마의 이름.
▶ 毋 : 無와 통한다.
▶ 文書 : 문자와 서적.
▶ 毌弓 : 貫弓과 통하여 활을 당기다.
▶ 甲騎 : 갑옷을 입고 무장한 기병.
▶ 寬 : 전쟁을 하지 않을 때. 평상시.
▶ 刀鋋 : 칼과 작은 창.
▶ 遁走 : 도망쳐 달아남.
▶ 茍 : 단지.
▶ 咸 : 모두.
▶ 旃裘 : 짐승의 털로 안을 댄 옷.
▶ 後母 : 아버지의 후처.
▶ 取 : 娶와 같다. 아내로 맞다.
夏道衰,而公劉失其稷官,變于西戎,邑于豳。
夏나라의 정치가 쇠퇴하자 公劉가 농사일을 관장하는 稷官의 지위를 잃고 西戎 지역의 풍속을 바꾸어 豳에 도읍을 정하였다.
其後三百有餘歲,戎狄攻大王亶父,亶父亡走岐下,而豳人悉從亶父而邑焉,作周。
3백여 년이 지난 후 戎狄이 古公亶父를 공격하여 고공단보가 岐山 기슭으로 달아나자, 豳 사람들은 모두 고공단보를 따라 옮겨와서 그곳을 도읍으로 하고 周나라를 세웠다.
其後百有餘歲,周西伯昌伐畎夷氏。
1백여 년이 지난 후 주나라 西伯昌이 畎夷氏를 정벌하였다.
▶ 公劉 : 周나라 王朝의 건설자라고 이르는 后稷 棄의 증손자이자 不窋의 손자이다. 공유는 비록 戎狄의 땅에 살았으나 다시 后稷의 業을 일으켜서 백성이 넉넉하게 되었으므로 마땅한 땅을 잘 살펴서 豳에 나라를 세웠다.<사기 권4. 周本紀>
▶ 稷官 : 농업을 관장하는 벼슬.
▶ 邑 : 도읍을 건립함.
▶ 大王亶父 : 太王. 古公亶父. 성은 姬이고, 이름은 亶父이다. 商나라 시대 周族의 수장으로 古公이라고 불려 흔히 이름과 함께 古公亶父라고 한다. 뒷날 증손자인 주나라 武王에게 太王으로 추존되어 周太王이라고도 불린다. 아버지는 公祖이고, 생모에 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太姜을 아내로 맞이하여 太伯과 虞仲, 季歷을 낳았다.<사기 권4. 주본기>
▶ 亡走 : 달아나다.
▶ 西伯昌 : 周文王. 이름은 姬昌이며, 은나라의 속국인 주나라의 제후이다. 서쪽의 제후의 수장을 西伯이라고 하였으므로 주문왕 희창을 서백창이라 하였다.
後十有餘年,武王伐紂而營雒邑,復居于酆鄗,放逐戎夷涇、洛之北,以時入貢,命曰「荒服」。
10여 년 뒤에 주武王이 은紂王을 토벌하고 雒邑을 도읍으로 하고, 다시 酆鄗에 살면서 戎夷들을 涇水와 洛水 이북으로 내쫓았으며 융이 철따라 조공을 바치므로 그들이 사는 지역을 ‘荒服’이라고 불렀다.
其後二百有餘年,周道衰,而穆王伐犬戎,得四白狼四白鹿以歸。
2백여 년 후에, 주나라의 정치가 쇠하였으나 주穆王이 犬戎을 정벌하여 네 마리의 흰 이리와 네 마리의 흰 사슴을 잡아서 돌아왔다.
自是之後,荒服不至。
이후로 황복 땅의 戎夷가 입조하지 않았다.
於是周遂作甫刑之辟。
이에 주나라는 마침내 甫刑이라는 법을 만들었다.
▶ 營 : 세우다.
▶ 荒服 : 천자의 감화가 미치지 않는 먼 나라. 고대에 王都 이외의 지방을 五服이라 하였으며, 오복은 王畿를 중심으로 하여 주위를 每服 5백 리씩 순차적으로 나눈 다섯 구역이다. 상고에는 甸服•侯服•綏服•要服•荒服을 오복이라 하였으나, 周代에는 侯服•甸服•男服•采服•衛服을 오복이라 칭하였다.
▶ 周穆王 : 姬滿. 주나라의 제5대 왕으로 성은 姬, 이름은 滿이다. 주소왕의 아들이다. 소왕이 楚의 원정 도중에 행방불명되자, 임시로 왕위에 즉위하였고 이후 소왕이 죽은 것으로 판명되자 정식으로 즉위하였다.
▶ 甫刑 : 西周 때 사람. 周穆王의 신하로, 甫侯라고도 한다. 司寇를 지냈고, 甫에 봉해졌다. 목왕의 명령으로 夏나라 禹임금 때 만들어진 형법을 수정하였는데, 이때 만들어진 법이 呂刑 또는 甫刑이다
▶ 辟 : 法.
穆王之後二百有餘年,周幽王用寵姬褒姒之故,與申侯有卻。
주목왕 이후 이백여 년, 周幽王이 애첩 褒姒에게 빠져 왕비를 내치자, 왕비의 친정아버지인 申侯와 사이가 벌어졌다.
申侯怒而與犬戎共攻殺周幽王于驪山之下,遂取周之焦穫,而居于涇渭之閒,侵暴中國。
신후가 노하여 犬戎과 함께 쳐들어와서 周幽王을 驪山 아래에서 죽이고, 견융이 주나라의 焦穫를 점령하고 경수와 渭水 사이에 머물러 살면서 중원 지역을 침범하였다.
▶ 周幽王 : 주나라의 12대 왕. 정치에는 관심이 없이 여흥과 주색만을 탐닉하다가 서주 왕실을 망하게 하였다. 애첩 褒似를 총애한 나머지 정비 申后와 그 소생인 태자 宜臼를 폐하고 포사와 그 소생 伯服을 정비와 태자에 책봉함으로써 申侯를 격분시켰고, 결국 견융과 신후의 연합 공격을 받고 사살되었다.
▶ 褒似 : 중국 서주의 마지막 왕인 유왕의 애첩. 유왕은 그녀를 웃기려고 거짓 봉화를 올려 군사와 제후를 놀라게 하여 포사를 웃겼다 한다. 유왕이 褒國을 토벌하였을 때 褒人이 바쳤으므로 褒姒라 하였다.
▶ 申侯 : 주나라 말년의 申國의 군주.
▶ 郤 : 隙과 통하여 사이가 벌어지다.
▶ 侵暴 : 침범하다. 侵擄하여 暴虐하게 행동하다.
▶ 中國 : 中原 지역.
秦襄公救周,於是周平王去酆鄗而東徙雒邑。
秦襄公이 주나라를 구원하여 주나라 平王은 풍호를 떠나 동쪽 낙읍으로 도읍을 옮겼다.
當是之時,秦襄公伐戎至岐,始列為諸侯。
이때 秦襄公은 견융을 정벌하기 위하여 기산에 이르자 비로소 제후의 반열에 올랐다.
是後六十有五年,而山戎越燕而伐齊,齊釐公與戰于齊郊。
그로부터 65년(기원전 706년)에 산융이 燕나라를 넘어와서 齊를 침범하여 齊釐公이 齊 교외에서 산융과 싸웠다.
其後四十四年,而山戎伐燕。
그로부터 44년(기원전 664년)에 산융이 燕을 침공하였다.
燕告急于齊,齊桓公北伐山戎,山戎走。
燕이 위급함을 齊에 알리자 齊桓公이 북쪽으로 가서 산융을 공격하니 산융이 패주하였다.
其後二十有餘年,而戎狄至洛邑,伐周襄王,襄王奔于鄭之氾邑。
그로부터 20여 년(기원전 636년)에 융적이 낙읍으로 침범하여 주나라 襄王을 공격하자 양왕은 鄭의 氾邑으로 달아났다.
▶ 秦襄公 : 춘추 시대 秦의 國君. 이름은 전해지지 않고, 莊公의 둘째 아들이다. 양공 7년 西戎과 犬戎이 申侯와 함께 周王室을 공격하여 酈山 아래에서 幽王을 살해하자 西周가 멸망하고 말았다. 양공이 군대를 이끌고 주나라를 구하여 平王을 호송하여 東遷하는 데 공을 세워 주나라에서 秦岐 서쪽의 땅을 하사하였다. 이때부터 秦이 附庸國에서 제후국이 되었다.
▶ 齊釐公 : 齊僖公. 춘추시대 齊의 제13대 후작이다. 이름은 祿甫이다. <사기>에서는 저자의 할아버지 사마희를 피휘하여 釐公으로 표기하였다. 희공 25년(기원전 706년), 북융이 齊를 쳤다. 鄭에서는 태자(후의 정소공)을 보내 齊를 구원하여 대승을 거두고 대장과 갑병들의 목을 齊에 바쳤다.
▶ 齊桓公 : 춘추시대의 齊의 제16대 후작이다. 성은 姜, 휘는 小白, 시호는 桓公. 춘추 시대의 패자이다. 포숙아의 활약에 의하여 공자 규와의 공위계승 분쟁에서 승리하여 齊의 군주가 되었다. 관중을 재상으로 삼고 齊를 강대한 나라로 만들었으며, 실권을 잃어버린 중국 동주 왕실을 대신하여 회맹을 거행하였다.
初,周襄王欲伐鄭,故娶戎狄女為后,與戎狄兵共伐鄭。
본래 周襄王은 鄭을 정벌하기 위하여 戎狄의 부족장의 딸을 왕후로 맞이하여 융적의 군대와 더불어 鄭을 정벌할 생각이었다.
已而黜狄后,狄后怨,而襄王後母曰惠后,有子子帶,欲立之,於是惠后與狄后、子帶為內應,開戎狄,戎狄以故得入,破逐周襄王,而立子帶為天子。
얼마 후에 周襄王이 狄后를 내쫓으니, 狄后는 왕에게 원한을 품었다. 그때 周襄王의 후모 惠后에게 子帶라는 아들이 있어 자대를 왕으로 앉히려 하였으매, 이에 혜후가 狄后, 자대와 함께 몰래 융적과 내통하고 성문을 열어주었다. 융적이 이로 인하여 도성으로 쳐들어와서 周襄王을 이겨서 내쫓고 자대를 천자로 세웠다.
於是戎狄或居于陸渾,東至於衛,侵盜暴虐中國。
이때부터 융적은 陸渾에서 살기도 하고 동쪽으로 衛의 변경에까지 진출하여 중원의 제후국을 침략하여 약탈하였다.
▶ 周襄王 : 주나라의 제18대 왕으로 성은 姬, 이름은 鄭이다. 주혜왕의 아들이다. 양왕 16년(기원전 636년)에 양왕이 적후에게 싫증내자 적후는 분개하여 혜후의 아들 자대를 왕으로 세울 계획을 세웠고 혜후, 적후, 자대가 내응하여 융·적을 맞아들이고 양왕을 추방하였으며 자대를 천자로 옹립하였다. 양왕은 鄭으로 도망쳤고 鄭은 왕을 汜에 머물게 하였다.
▶ 黜 : 내치다. 물리치다.
▶ 開戎狄 : 성문을 열어 戎狄이 도성으로 들어오게 하다.
中國疾之,故詩人歌之曰
「戎狄是應」,
「薄伐獫狁,至於大原」,
「出輿彭彭,城彼朔方」。
중원의 제후국이 그들을 미워하여 옛 시인은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융적을 응징하도다. ”
“獫狁을 쳐부수어 大原에 이르렀다.”
“수많은 수레를 내어, 저 북방의 땅에 성을 쌓았다.”
周襄王既居外四年,乃使使告急于晉。
주양왕은 도성 밖에서 살기를 4년, 사신을 晋으로 보내 위급함을 고하였다.
晉文公初立,欲修霸業,乃興師伐逐戎翟,誅子帶,迎內周襄王,居于雒邑。
그때 晉文公이 막 즉위하여 패업을 이룰 생각에 군사를 일으켜 戎翟을 토벌하여 내쫓고 자대를 죽인 다음, 주양왕을 맞아들여 낙읍에서 살게 하였다.
▶ 疾 : 몹시 미워하다.
▶ 詩人 : <詩經>의 작가들.
▶ 戎狄是應 : 詩經 魯頌에 나오는 시이다. 원문은 ‘戎狄是膺’으로 되어 있으며 應과 膺은 ‘공격하다’는 의미이다.<詩經·頌·魯頌·閟宮>
▶ 薄伐獫狁 : 詩經 小雅에 나오는 시이다. <詩經·小雅·彤弓之什·六月> 薄伐은 토벌하다.
▶ 彭彭 : 말이 대단히 많은 모양. 彭은 곁 ‘방’으로 성한 모양.
▶ 城 : 성을 쌓다.
▶ 朔方 : 북방.
▶ 晉文公 : 성은 姬이고, 이름은 重耳이다. 춘추시대 晋의 22대 군주로 晉獻公의 아들이고, 모친은 狐姬이다. 진헌공의 애첩인 驪姬의 난으로 국외로 도피하여 19년 동안 망명생활을 하였다. 기원전 636년에 秦穆公의 지지하에 晉으로 돌아와 晉懷公을 죽이고 군주가 되었다.
▶ 戎翟 : 戎狄과 통한다. 중국에서 서쪽 이민족을 戎이라 하고, 북쪽 이민족을 狄이라 하였다.
▶ 內 : 納과 같다. 거두어들이다.
當是之時,秦晉為彊國。
그 당시에 秦과 晋이 강국이었다.
晉文公攘戎翟,居于河西圁、洛之閒,號曰赤翟、白翟。
晉文公은 戎翟을 내쫓아서 河西의 圁水와 洛水 사이에 거주하도록 하고 그들을 赤翟과 白翟으로 불렀다.
秦穆公得由余,西戎八國服於秦,故自隴以西有綿諸、緄戎、翟、獂之戎,岐、梁山、涇、漆之北有義渠、大荔、烏氏、朐衍之戎。
秦穆公은 서융의 사신이었던 由余를 얻어서 서융의 여덟 나라를 복속시켰으며, 그 나라들은 隴 지방의 서쪽에 있는 綿諸, 緄戎, 翟, 獂 등의 융족과 岐山, 梁山과 涇水, 漆水의 북쪽에 있는 義渠, 大荔, 烏氏, 胊衍 등의 융족이었다.
▶ 晉文公 : 성은 姬이고, 이름은 重耳이다. 춘추시대 晋의 22대 군주로 晉獻公의 아들이고, 모친은 狐姬이다. 진헌공의 애첩인 驪姬의 난으로 국외로 도피하여 19년 동안 망명생활을 하였다. 기원전 636년에 秦穆公의 지지하에 秦으로 돌아와 晉懷公을 죽이고 군주가 되었다.
▶ 攘 : 밀어내다. 배척하다.
▶ 戎翟 : 戎狄과 통한다. 중국에서 서쪽 이민족을 戎이라 하고, 북쪽 이민족을 狄이라 하였다.
▶ 圁 : 강 이름.
▶ 秦穆公 : 嬴任好. 춘추시대 秦의 9대 군주이다. 춘추시대 주襄王 때 秦의 영토를 크게 확장하였다. 명재상인 百里奚와 蹇叔을 등용하여 春秋時代 五霸의 하나가 되었다
▶ 由余 : 춘추시대 秦의 명재상이다. 본래 晉사람으로 西戎에 들어가서 戎王에게 등용되었다가 戎王의 사신이 되어 秦에 왔었는데, 穆公이 그의 유능함을 알아보고 계략을 써서 억류하고 융왕과 틈이 벌어지게 한 다음 재상으로 발탁하였다. 由余는 이에 穆公을 도와 西戎을 정벌하여 20여 개의 나라를 얻고 국토를 천 리나 넓히니 秦이 서쪽 일대의 패자가 되었다. <史記 秦本紀>
▶ 漆 : 강 이름.
而晉北有林胡、樓煩之戎,燕北有東胡、山戎。
그리고 晉북쪽에는 林胡, 樓煩 등의 융족이 있었고, 燕 북쪽에는 東胡, 山戎이 있었다.
各分散居谿谷,自有君長,往往而聚者百有餘戎,然莫能相一。
이들은 각자 산의 골짜기에 거주하면서 자신들의 君長이 있었다. 종종 1백여 융족 부락이 모이기도 하였지만 서로 통일하지는 못하였다.
自是之後百有餘年,晉悼公使魏絳和戎翟,戎翟朝晉。
그로부터 1백여 년 뒤에 晉悼公이 魏絳을 융적에 사신으로 보내 화친을 맺음으매 융적은 晋에 조회하였다.
後百有餘年,趙襄子踰句注而破并代以臨胡貉。
그로부터 1백여 년 뒤에 趙襄子가 句注山을 넘어 代를 쳐부수고 그 땅을 병합하고 胡와 貉까지 이르렀다.
其後既與韓魏共滅智伯,分晉地而有之,則趙有代、句注之北,魏有河西、上郡,以與戎界邊。
그 후 조양자는 秦의 韓康子, 魏桓子와 함께 智伯을 멸하고 晉의 영토를 나누어 가졌는데, 즉 趙는 代와 구주산 북쪽을 차지하고, 魏는 河西와 上郡을 차지하여 융족과 경계를 접하게 되었다.
▶ 往往 : 항상. 종종.
▶ 相一 : 서로 통일하다.
▶ 晉悼公 : 춘추시대 晋의 제30대 군주. 이름은 周로, 진양공의 손자인 惠伯 談의 아들.
▶ 魏絳 : 晉悼公 시기의 猛將. 悼公 때 山戎이 화친을 청하자 화친함에 5가지 이로움이 있다고 하였다.
▶ 趙襄子 : 戰國 초기 趙 나라의 제후. 조양자가 智伯에게 쫓기게 되자, 長子라는 곳이 가깝고 성이 튼튼하여 안전하니 그곳으로 피하자는 신하의 말을 듣지 않고, 일찍이 尹鐸이 부임하여 관대한 정치로 민심을 무마시켜 놓은 晋陽으로 들어가서 회복의 터전을 삼았다.<사기 권43. 조세가>
▶ 句注 : 산 이름.
▶ 韓魏共滅智伯 : 기원전 453년에 晋의 3卿인 韓虎 韓康子, 魏駒 魏桓子, 趙孟 趙襄子가 당시 晉의 최대 실권자이자 최대의 영토를 보유한 知伯 瑤를 죽이고 知氏 일문을 멸문시키고, 그 영토를 공평하게 나눔으로써 사실상 晋을 삼분하고 단일 국가로 三晉이 성립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 智伯 : 전국시대 晉사람. 이름은 瑤고, 智襄子라고도 부른다. 晉 말기 유력 씨족들이 분열하여 서로 다툴 때 자체 세력을 형성하여 趙襄子를 공격하였지만 멸망하였다.
▶ 破並 : 쳐부수고 병합함.
▶ 代 : 地名.
▶ 貉 : 중국의 고대 동북쪽에 살던 민족. 貊이라고도 한다.
其後義渠之戎筑城郭以自守,而秦稍蠶食,至於惠王,遂拔義渠二十五城。
그 후에 義渠의 융족들은 성곽을 쌓고 스스로 지키고 있었으나 秦이 점차 잠식하여 들어가서 秦惠王에 이르러 마침내 의거의 25개 성을 빼앗았다.
惠王擊魏,魏盡入西河及上郡于秦。
혜왕이 魏를 공격하니, 魏가 西河와 上郡을 전부 秦에 바쳤다.
秦昭王時,義渠戎王與宣太后亂,有二子。
秦昭王 때 의거의 戎王이 소왕의 어머니 宣太后와 사통하여 두 아들을 낳았다.
宣太后詐而殺義渠戎王於甘泉,遂起兵伐殘義渠。
선태후는 의거의 융왕을 속여 甘泉宮으로 유인하여 죽이고, 이어 군사를 일으켜 의거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於是秦有隴西、北地、上郡,筑長城以拒胡。
그래서 秦은 隴西, 北地, 上郡을 차지하고 거기에 장성을 쌓아 융적의 침입을 막았다.
▶ 義渠 : 고대 西戎國의 이름.
▶ 秦惠王 : 전국시대 秦의 제26대 군주로 성은 嬴, 名은 駟이다. 시호는 惠文王으로 惠王이라고도 한다. 秦의 제25대 군주인 孝公의 아들이며, 제27대 武王과 제28대 昭襄王의 아버지이다.
▶ 秦昭王 : 秦昭襄王, 전국시대 秦의 國君. 이름은 稷 또는 則이다. 秦武王의 이복동생이다. 왕위를 이은 뒤 처음에는 어머니 宣太后가 섭정을 하였는데, 내란을 평정한 뒤 왕권을 강화하였다.
▶ 拔 : 쳐서 빼앗다.
▶ 宣太后 : 중국 최초의 太后이다. 전국시대 楚의 공주로 성은 芈, 씨는 熊이며, 秦惠文王의 후궁이자 秦昭襄王의 모후이다. 혜문왕 시절 비교적 낮은 직첩인 八子로 芈八子라고 불리었고, 혜문왕 이후 武王에 이어 아들인 영직이 왕으로 등극하자 宣太后로 불리게 됐다.
▶ 亂 : 간음하다. 사통하다.
▶ 甘泉 : 감천궁.
▶ 伐殘 : 쳐서 멸하다.
而趙武靈王亦變俗胡服,習騎射,北破林胡、樓煩。
趙의 武靈王은 趙의 풍속을 개혁하여 군사들에게 호복을 입고 騎射를 익혀 북쪽의 林胡와 樓煩을 무찔렀다.
筑長城,自代并陰山下,至高闕為塞。
장성을 쌓고 代에서부터 陰山산맥 기슭을 따라 高闕에 이르는 지역을 요새로 만들었다.
而置雲中、鴈門、代郡。
趙는 그 땅에 雲中, 雁門, 代 등 郡을 설치하였다.
其後燕有賢將秦開,為質於胡,胡甚信之。
그 후에 燕의 명장 秦開가 흉노에 인질로 가 있었는데, 흉노가 그를 매우 신임하였다.
歸而襲破走東胡,東胡卻千餘里。
燕으로 돌와서 동호를 습격하여 패주시키매, 동호는 1천여 리나 물러갔다.
與荊軻刺秦王秦舞陽者,開之孫也。
荊軻와 함께 진왕을 암살하려던 秦舞陽은 진개의 손자이다.
燕亦筑長城,自造陽至襄平。
燕도 造陽에서 襄平에 이르는 지역에 장성을 쌓았다.
置上谷、漁陽、右北平、遼西、遼東郡以拒胡。
上谷, 漁陽, 右北平, 遼西, 遼東 등에 군을 설치하여 북방 융적을 방어하였다.
▶ 武靈王 : 전국시대 趙의 國君. 이름은 雍이고, 肅侯의 아들이다. 무령왕 19년 胡服을 입고 말 타기와 활쏘기를 시행하여 유목 부족을 방어하였다. 나중에 中山을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林胡와 樓煩을 격파하는 등 국세를 크게 신장시켰다. 군사개혁을 시도하였고, 변방을 개척하였다.<사기 권43. 趙世家>。
▶ 高闕 : 산 이름.
▶ 秦開 : 전국시대 燕의 장군이다. 東胡와 古朝鮮을 정벌하여 많은 영토를 획득하여 "賢將"이라 칭해졌다.
▶ 秦舞陽 : 燕 태자 丹은 燕이 위험에 처하자 始皇帝를 암살하려고 魏 출신의 자객 荊軻와 燕將 秦舞陽을 秦에 보냈다. <史記 권86 刺客列傳>
當是之時,冠帶戰國七,而三國邊於匈奴。
당시에 문명과 예의와 풍속이 발달한 戰國七雄이 있었는데 그중 세 나라가 흉노와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
其後趙將李牧時,匈奴不敢入趙邊。
그 후 趙將 李牧이 있는 동안은 흉노가 감히 趙의 국경을 침범하지 못하였다.
後秦滅六國,而始皇帝使蒙恬將十萬之眾北擊胡,悉收河南地。
뒤에 秦이 6국을 멸망시켰고, 始皇帝는 蒙恬을 시켜 10만의 군사를 이끌고 북진하여 흉노를 공격하여, 하남의 땅을 모두 秦의 영토로 거두었다.
因河為塞,筑四十四縣城臨河,徙適戍以充之。
이로 인하여 황하를 이용하여 요새를 만들고, 황하를 따라 44縣의 城을 축조하고, 죄를 지은 수자리를 옮겨와서 縣城에 충당하였다.
而通直道,自九原至雲陽,因邊山險塹谿谷可繕者治之,起臨洮至遼東萬餘里。
直道를 만들어 九原에서 雲陽에 이르게 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산자락의 험한 협곡과 계곡을 개척하니, 臨洮를 기점으로 요동에 이르기까지 만여 리였다.
又度河據陽山北假中。
또 황하를 건너가서 陽山과 北假 일대를 점거하였다.
▶ 冠帶 : 관리의 제복. 여기서는 문명과 예의와 풍속을 말한다.
▶ 戰國七雄 : 전국시대부터 秦의 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할 때까지 멸망하지 않고 살아남은 일곱 나라를 지칭한다. 전국시대에는 그 외에도 여러 나라가 있었으나, 이들 일곱 나라가 가장 강력하였고 중국사에서 중요하게 취급된다. 秦, 韓, 魏, 趙, 燕, 齊, 楚.
▶ 李牧 : 趙의 장수로 북쪽 변경을 수비하면서 匈奴와 東胡를 대파하였다. 秦이 趙의 郭開를 이용하여 반간계를 써서 이목을 죽게 하고 秦의 왕전이 趙를 공격하여서 趙는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史記 권81.廉頗藺相如列傳>
▶ 適 : 謫과 통한다. 범죄를 저질러 쫓겨나다.
▶ 戍 : 수자리. 변방을 지키는 일.
▶ 度河 : 황하를 건너다. 度는 渡와 통한다.
▶ 陽山 : 산 이름.
▶ 北假 : 地名.
當是之時,東胡彊而月氏盛。
당시는 東胡의 세력이 강하고 月氏도 번성하였다.
匈奴單于曰頭曼,頭曼不勝秦,北徙。
흉노의 單于는 頭曼이라 하였으며. 두만은 秦을 이기지 못하여 북쪽으로 옮겨 갔다.
十餘年而蒙恬死,諸侯畔秦,中國擾亂,諸秦所徙適戍邊者皆復去,於是匈奴得寬,復稍度河南與中國界於故塞。
10여 년이 지나 蒙恬이 죽고 제후가 秦을 배반하자, 중원이 혼란상태가 되니 秦의 죄수로서 변경을 지키려 배치한 수비병들이 모두 돌아가 버렸다.
그리하여 匈奴가 느슨해진 틈에 다시 점차 황하를 건너 남쪽으로 내려와 中原의 옛 요새에 경계를 접하게 되었다.
▶ 東胡 : 몽골 동쪽의 수렵 목축 민족.
▶ 月氏 : 月支 또는 大月氏. 고대 중앙아시아에서 활약한 민족.
▶ 頭曼 : 蒙古 지방에서 일어났던 匈奴의 초대 單于. 성은 攣鞮氏다. 재위할 때는 흉노가 열세에 놓여 있었다. 몽고 남부를 근거지로 하여 전국시대 중국과 대립하였고, 東胡와 大月氏의 동서세력과도 대립했다
▶ 單于 : 흉노 君長의 칭호.
▶ 河 : 黃河.
▶ 寬 : 느슨하다.
單于有太子名冒頓。
두만 선우에게 冒頓이라는 태자가 있었다.
後有所愛閼氏,生少子,而單于欲廢冒頓而立少子,乃使冒頓質於月氏。
뒤에 총애하는 閼氏에게서 막내아들을 낳자, 선우가 묵돌을 폐하고 막내아들을 태자로 세우려고 하여 묵돌을 月氏에 인질로 보냈다.
冒頓既質於月氏,而頭曼急擊月氏。
묵돌이 월지에 인질로 있을 때, 두만이 갑자기 월지를 공격하였다.
月氏欲殺冒頓,冒頓盜其善馬,騎之亡歸。
월지가 묵돌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묵돌은 준마를 훔쳐 타고 본국으로 도망쳐 왔다.
▶ 頭曼 : 蒙古 지방에서 일어났던 匈奴의 초대 單于. 성은 攣鞮氏다.
▶ 冒頓(묵돌/묵특/모돈) : 전한 때의 匈奴單于. 성은 攣鞮氏다. 秦二世 원년(기원전 209년) 아버지 頭曼을 살해하고 自立하여 선우가 되었다.
▶ 閼氏 : 흉노족 선우의 正妻.
頭曼以為壯,令將萬騎。
두만은 묵돌의 씩씩함을 인정하고 1만 騎를 통솔하게 하였다.
冒頓乃作為鳴鏑,習勒其騎射,令曰:
「鳴鏑所射而不悉射者,斬之。」
묵돌이 鳴鏑을 만들고 기병에게 활쏘기를 훈련시키며 명령하였다.
“내가 명적을 쏜 곳마다, 나를 따라서 전력으로 쏘지 않는 자는 참수하리라.”
行獵鳥獸,有不射鳴鏑所射者,輒斬之。
조수를 사냥함에 명적을 쏜 곳에 활을 쏘지 않는 자는 그때마다 죽였다.
已而冒頓以鳴鏑自射其善馬,左右或不敢射者,冒頓立斬不射善馬者。
그 뒤 묵돌이 명적을 자신의 준마에게 쏘니, 측근이 감히 쏘지 못하면, 묵돌은 준마를 쏘지 않은 자를 즉각 참수하였다.
居頃之,復以鳴鏑自射其愛妻,左右或頗恐,不敢射,冒頓又復斬之。
얼마 후에 다시 명적을 자기의 사랑하는 처에게 쏘았는데, 측근이 두려워서 감히 쏘지 못하자, 묵돌이 또 다시 그들을 죽였다.
▶ 將 : 통솔하다.
▶ 鳴鏑 : 발사하면 소리를 내는 화살로 開戰의 신호로 우는 화살을 적진에 쏘았다.
▶ 習勒 : 훈련시키다.
居頃之,冒頓出獵,以鳴鏑射單于善馬,左右皆射之。
얼마 후에 묵돌이 사냥을 나가서 명적으로 선우의 준마를 쏘자 측근이 모두 거기에 쏘아댔다.
於是冒頓知其左右皆可用。
이에 묵돌은 그의 부하를 모두 쓸 수 있음을 알았다.
從其父單于頭曼獵,以鳴鏑射頭曼,其左右亦皆隨鳴鏑而射殺單于頭曼,遂盡誅其後母與弟及大臣不聽從者。
자신의 아버지 두만 선우를 따라 사냥함에, 명적으로 두만을 쏘자 그의 부하들 역시 모두 명적이 향하는 곳에 화살을 쏘아 두만 선우를 죽이고, 이어서 그의 계모와 이복동생 및 자신을 따르지 않는 대신들을 모두 죽였다.
冒頓自立為單于。
묵돌은 스스로 즉위하여 선우가 되었다.
冒頓既立,是時東胡彊盛,聞冒頓殺父自立,乃使使謂冒頓,欲得頭曼時有千里馬。
묵돌이 선우가 된 후, 당시 동호의 세력이 강성하였는데, 묵돌이 아버지를 죽이고 스스로 선우가 되었음을 알고, 묵돌에게 사자를 보내 말하기를, 두만이 가지고 있던 천리마를 얻고 싶다고 하였다.
冒頓問群臣,群臣皆曰:
「千里馬,匈奴寶馬也,勿與。」
묵돌이 신하들의 의견을 묻자, 신하들이 모두 말하였다.
“천리마는 흉노의 보배로운 말이니 주지 마십시오.”
冒頓曰:
「柰何與人鄰國而愛一馬乎?」
遂與之千里馬。
묵돌이 말하였다.
“이웃 나라인데, 어떻게 말 한 마리를 아끼겠는가?”
이에 천리마를 동호에 보내주었다.
居頃之,東胡以為冒頓畏之,乃使使謂冒頓,欲得單于一閼氏。
얼마 후 동호는 묵돌이 그를 무서워한다고 여기고, 묵돌에게 사신을 보내 선우의 閼氏 한 사람을 달라고 하였다.
冒頓復問左右,左右皆怒曰:
「東胡無道,乃求閼氏!請擊之。」
묵돌이 다시 좌우에 물으니 신하들이 모두 성을 내며 말하였다.
“동호가 매우 무례합니다. 감히 선우의 閼氏를 요구하다니!
공격하십시오.”
冒頓曰:
「柰何與人鄰國愛一女子乎?」
묵돌이 말하였다.
“남과 이웃 나라로서 어떻게 여자 하나를 아낄 수 있겠는가?”
遂取所愛閼氏予東胡。
총애하는 연지 한 사람을 골라 동호로 보내주었다.
東胡王愈益驕,西侵。
동호가 더욱 교만해져서 서쪽으로 흉노의 변경을 침범하였다.
與匈奴閒,中有棄地,莫居,千餘里,各居其邊為甌脫。
당시 흉노와의 사이에는 버려진 땅으로 아무도 살지 않는 천여 리가 있어, 각각 자기들의 변경에 수비초소를 두고 있었다.
東胡使使謂冒頓曰:
「匈奴所與我界甌脫外棄地,匈奴非能至也,吾欲有之。」
동호가 사신을 보내 묵돌에게 전하였다.
“흉노와 우리가 경계하고 있는 수비초소 이외의 황무지는 흉노로서는 이르지 못하니, 우리가 갖도록 하겠다.”
冒頓問群臣,群臣或曰:
「此棄地,予之亦可,勿予亦可。」
묵돌은 신하들에게 의견을 묻자 군신 중 어떤 자들이 말하였다.
“그것은 버린 땅이니 주어도 좋고 안 주어도 좋습니다.”
於是冒頓大怒曰:
「地者,國之本也,柰何予之!」
諸言予之者,皆斬之。
이에 묵돌이 대노하며 말하였다.
“땅은 나라의 근본인데 어떻게 줄 수 있단 말인가!”
주어도 좋다고 한 자들을 모두 죽였다.
冒頓上馬,令國中有後者斬,遂東襲擊東胡。
묵돌이 말을 타고 도성에 명하기를, 뒤처지는 자는 즉시 죽이겠다고 하고, 이어 동쪽으로 동호를 습격하였다.
東胡初輕冒頓,不為備。
동호는 처음부터 묵돌을 경시하매 방비하지 않았다.
及冒頓以兵至,擊,大破滅東胡王,而虜其民人及畜產。
묵돌이 군사를 이끌고 습격하여 동호의 군사를 대파하고 왕을 죽였으며, 백성과 가축과 재산을 노략하였다.
既歸,西擊走月氏,南并樓煩、白羊河南王。
본국으로 돌아오자, 서쪽으로 월지국을 공격하여 패주시키고, 남쪽으로 누번왕, 白羊河南王 의 영토를 병탄하였다.
侵燕代悉復收秦所使蒙恬所奪匈奴地者,與漢關故河南塞,至朝那、膚施,遂侵燕、代。
또 연과 대를 공격하여 秦이 목염을 시켜 빼앗았던 흉노 땅을 모조리 되찾았으며, 예전 하남의 요새에 漢과의 관문을 설치하여 朝那, 膚施에까지 이르렀고, 마침내 연과 대까지 침범하였다.
是時漢兵與項羽相距,中國罷於兵革,以故冒頓得自彊,控弦之士三十餘萬。
당시 漢軍은 項羽와 대치함에 중원은 전쟁에 지쳐있었으매, 이 때문에 묵돌이 자신을 강화할 수 있었으니, 활쏘기에 능한 군사만 해도 30여만 명이나 되었다.
自淳維以至頭曼千有餘歲,時大時小,別散分離,尚矣,其世傳不可得而次云。
淳維에서 頭曼에 이르기까지 천여 년 동안 혹은 강대하고 혹은 약소하였으며, 이합집산하고 시간이 오래 흘렀으매, 그들의 世系를 차례대로 기록할 수는 없다.
然至冒頓而匈奴最彊大,盡服從北夷,而南與中國為敵國,其世傳國官號乃可得而記云。
그러나 묵돌에 이르러 흉노가 가장 강성해져서 북방 오랑캐를 모두 복속시키고 남쪽으로는 중국과 적국이 되었으매, 이후로는 世系, 국가의 관직명칭을 기록할 수 있으니 아래와 같다.
▶ 愛 : 내놓기를 아까워하다.
▶ 甌脫(구탈) : 적의 동정을 살피는 초소.
▶ 白羊河南王 : 흉노의 왕 중에 하나로 백양은 흉노의 일부이며 하남지역에 거주하였으므로 불리어진 칭호이다.
▶ 罷 : 고달프다. 지치다.
▶ 兵革 : 전쟁.
▶ 控弦之士 : 활을 잘 쏘는 병사.
▶ 尚 : 몹시 오래됨.
▶ 世傳 : 대대로 전하여 내려옴. 世系. 系譜
置左右賢王,左右谷蠡王,左右大將,左右大都尉,左右大當戶,左右骨都侯。
左右賢王, 左右谷蠡王, 左右大將, 左右大都尉, 左右大當戶, 左右骨都侯 등의 관직을 두었다.
匈奴謂賢曰「屠耆」,故常以太子為左屠耆王。
흉노에서는 현명한 자를 ‘屠耆’라고 했기 때문에 언제나 태자가 左屠耆王이 되었다.
自如左右賢王以下至當戶,大者萬騎,小者數千,凡二十四長,立號曰「萬騎」。
좌·우의 현왕과 이하 당호에 이르기까지는 많게는 만 명에서 적게는 몇천 명의 기병을 거느렸으며, 모두 합하여 24長이 있었고 ‘萬騎’로 확정하여 불렀다.
諸大臣皆世官。
대신들의 관직은 세습하였다.
呼衍氏,蘭氏,其後有須卜氏,此三姓其貴種也。
呼衍氏, 蘭氏, 그 후의 須卜氏까지 3姓이 흉노의 전통적인 귀족이었다.
諸左方王將居東方,直上谷以往者,東接穢貉、朝鮮;
右方王將居西方,直上郡以西,接月氏、氐、羌;
而單于之庭直代、雲中:
各有分地,逐水草移徙。
左方의 왕과 장수는 동쪽에 거주하고 上谷郡의 동쪽에 이르며, 동쪽으로 穢貉·朝鮮과 접하였다.
右方의 왕과 장수는 서쪽에 거주하고, 上郡의 서쪽에 이르며, 월지와 氐, 羌과 접하였다.
또 선우의 궁정은 代郡과 雲中郡을 마주 보고 있었다.
각기 나누어준 땅을 소유하고 물과 풀을 따라 옮겨 살았다.
而左右賢王、左右谷蠡王最為大,左右骨都侯輔政。
좌우현왕·좌우녹려왕의 나라가 가장 크고, 좌우골도후는 선우의 정치를 보좌하였다.
諸二十四長亦各自置千長、百長、什長、裨小王、相、封都尉、當戶、且渠之屬。
24長들 역시 각자의 千長, 百長, 什長, 裨小王, 相, 封都尉, 當戶, 且渠 등의 속관을 두었다.
歲正月,諸長小會單于庭,祠。
매년 정월에 長들이 선우의 궁정에서 소집회를 열고 제사를 지냈다.
五月,大會蘢城,祭其先、天地、鬼神。
5월에는 蘢城에서 대집회를 열고 자신들의 선조와 천지신명과 귀신들에게 제사 지냈다.
秋,馬肥,大會蹛林,課校人畜計。
가을에 말이 살찔 때에는 蹛林에서 대집회를 열어 백성과 가축의 수효를 헤아렸다.
其法,拔刃尺者死,坐盜者沒入其家;
有罪小者軋,大者死。
그들의 형법은 칼로 一尺 이상의 상처를 낸 사람은 사형에 처하고, 도둑질한 사람은 그의 가족과 재산을 몰수하였다.
작은 죄를 범한 사람은 軋刑에 처하고, 중범죄를 범한 사람은 사형에 처하였다.
獄久者不過十日,一國之囚不過數人。
감옥에 가둠은 10일을 넘지 않으니, 나라 전체의 죄수는 몇 명에 불과하였다.
而單于朝出營,拜日之始生,夕拜月。
單于가 아침에 막사에서 나와 떠오르는 해를 보고 절하고, 저녁에는 달을 보고 절하였다.
其坐,長左而北鄉。
자리에 앉을 때는 연장자가 왼쪽을 차지하고 북쪽을 향하여 앉았다.
日上戊己。
戊日과 己日을 길일로 여겼다.
其送死,有棺槨金銀衣裘,而無封樹喪服;
近幸臣妾從死者,多至數千百人。
그들의 장례 풍속은 棺槨에 시신을 넣고 그 속에 금은과 가죽옷들을 넣었는데, 무덤에 봉분을 하거나 나무를 심지 않았고 상복을 입지 않았다.
근신과 애첩은 죽은 선우를 따라 묻었으니, 많을 때는 수십 명이나 백 명에 이르렀다.
舉事而候星月,月盛壯則攻戰,月虧則退兵。
전쟁을 일으킴에는 별과 달을 살피되, 달이 차서 둥글게 되면 싸우고 이지러지면 退兵하였다.
其攻戰,斬首虜賜一卮酒,而所得鹵獲因以予之,得人以為奴婢。
전투에서 적의 목을 베거나 포로를 잡은 사람에게는 한 잔 술을 하사하고, 노획품은 본인에게 주되, 사로잡은 사람은 노비로 삼았다.
故其戰,人人自為趣利,善為誘兵以冒敵。
이 때문에 그들이 전투함에 저마다 이득을 추구하며, 적을 유인하여 突然히 적을 공격함에 능하다.
故其見敵則逐利,如鳥之集;
其困敗,則瓦解雲散矣。
그래서 적을 발견하면 이득을 쫓아서 새떼처럼 모여들지만,
곤란하고 피폐하면 구름이 흩어지듯 와해된다.
戰而扶輿死者,盡得死者家財。
전투에서 전사자를 거두어준 자는 전사자의 재산을 모두 받았다.
後北服渾庾、屈射、丁零、鬲昆、薪犁之國。
그 후 묵돌이 북쪽으로 渾庾, 屈射, 丁零, 鬲昆, 薪犁 등의 나라를 정복하였다.
於是匈奴貴人大臣皆服,以冒頓單于為賢。
이에 흉노의 귀족과 대신들이 모두 感服하고 묵돌선우를 현명하다고 여겼다.
是時漢初定中國,徙韓王信於代,都馬邑。
이때 漢이 갓 천하를 평정하고 韓王 韓信을 代 땅으로 파견하여 馬邑에 도읍하게 하였다.
匈奴大攻圍馬邑,韓王信降匈奴。
흉노가 대거 기습하여 마읍이 포위되자 漢王 韓信은 흉노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匈奴得信,因引兵南踰句注,攻太原,至晉陽下。
匈奴가 韓信을 손에 넣자 그 기세를 타서 군사를 이끌고 남하하여 구주산을 넘어 太原까지 공격하였고 晉陽城 아래까지 진격하였다.
高帝自將兵往擊之。
이에 高帝가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출전하여 흉노를 공격하였다.
會冬大寒雨雪,卒之墮指者十二三,於是冒頓詳敗走,誘漢兵。
때는 겨울이라 추위가 심하고 눈이 내렸기 때문에 병사들 중에 동상자가 10분의 2, 3이나 되었는데, 묵돌은 도망치는 것처럼 가장하여 漢軍을 유인하였다.
漢兵逐擊冒頓,冒頓匿其精兵,見其羸弱,於是漢悉兵,多步兵,三十二萬,北逐之。
漢軍이 묵돌을 추격하기 시작하자 묵돌은 그들의 精兵을 숨겨두고, 노약자로 가장한 군대를 보여주니 漢이 대부분 보병인 전군 32만 명이 달아나는 적을 추격하였다.
高帝先至平城,步兵未盡到,冒頓縱精兵四十萬騎圍高帝於白登,七日,漢兵中外不得相救餉。
高帝가 먼저 平城에 도착함에 漢의 보병이 도착하기 전이었는데, 묵돌이 精兵 40만 기를 지휘하여 高帝를 白登山으로 몰아넣고 포위하기 7일, 漢軍은 안밖이 서로 구원하거나 군량을 보급하지 못하였다.
匈奴騎,其西方盡白馬,東方盡青駹馬,北方盡烏驪馬,南方盡騂馬。
당시 흉노의 기병은 서쪽에는 흰 말, 동쪽에는 청색 말, 북쪽에 흑색 말, 남쪽에는 붉은 말을 탄 기마대를 배치하였다.
高帝乃使使閒厚遺閼氏,閼氏乃謂冒頓曰:
「兩主不相困。
今得漢地,而單于終非能居之也。
且漢王亦有神,單于察之。」
이에 高帝가 몰래 사자를 연지에게 보내어 후하게 선물하자 연지가 묵돌에게 말하였다.
“두 나라 임금이 서로 곤궁한 처지로 몰아넣으면 안 됩니다.
지금 漢 땅을 얻더라도 선우께서 결국 그곳에 살 수 없습니다.
또 漢王은 하늘의 도움을 받는다고 하니, 선우께서는 부디 고려하시기 바랍니다.”
冒頓與韓王信之將王黃、趙利期,而黃、利兵又不來,疑其與漢有謀,亦取閼氏之言,乃解圍之一角。
묵돌은 韓王 信의 장군 王黃, 趙利와 만날 약속을 하였으나, 군대가 오지 않자 그들이 漢과 謀議가 있다고 의심하여, 역시 연지의 말을 받아들여 포위망의 한 귀퉁이를 열어주었다.
於是高帝令士皆持滿傅矢外鄉,從解角直出,竟與大軍合,而冒頓遂引兵而去。
이에 高帝는 군사들에게 모두 활시위를 당겨 흉노 쪽으로 겨누게 하며 포위망이 풀린 쪽으로 빠져나와 결국 대군과 합류하니 묵돌은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물러갔다.
漢亦引兵而罷,使劉敬結和親之約。
漢 역시 군사를 이끌고 철수하였으며, 劉敬을 사신으로 보내 화친의 조약을 맺도록 하였다.
▶ 世官 : 세습하는 관직.
▶ 穢貉 : 濊貊. 한민족의 근간이 되는 민족. 貊(:貉), 또는 濊(:穢 ·薉)라고도 약칭하였다. 중국 고전의 기록에 의하면 <詩經>, <論語>, <中庸>, <孟子>에는 貊으로, 史記의 匈奴列傳, 貨殖傳에는 예맥으로 기록되어 있다.
▶ 蹛林 : 흉노가 8월 가을 모임에서 제사를 지내던 곳.
▶ 課校 : 심사하여 계산함.
▶ 家 : 家產.
▶ 軋(알) : 고대의 형벌의 한 가지. 수레의 바퀴 밑에 깔아 뼈를 부숨.
▶ 北鄉 : 북쪽을 향함. 鄉은 向과 통한다.
▶ 日上戊己 : 上은 尚과 통하여 尊崇하다. 무일과 기일을 길일로 여기다. 戊와 己는 十干 중에 土에 해당한다.
▶ 數千百人 : <漢書·匈奴傳>에 ‘數十百人’으로 기록되어 있다. 즉 몇십 명에서 백여 명 이하의 뜻.
▶ 舉事 : 행사. 전쟁을 일으키다.
▶ 侯星月 : 별과 달을 관측하다.
▶ 卮酒 : 한 잔의 술.
▶ 鹵獲(로획) : 전리품을 말한다.
▶ 趣 : 趨와 통하여 뒤쫓다.
▶ 冒敵 : 적을 갑작스레 공격하다.
▶ 扶輿死者 : 전사자의 시체를 거두어 오다.
▶ 韓王 信 : 韓信. 秦 말기에서 漢 초기 사이의 인물로 성은 姬, 씨는 韓, 이름은 信이다. 전국시대 韓襄王의 후손으로, 漢의 高祖 유방에 의하여 韓王으로 봉해졌다.<사기 권 93. 韓信盧綰列傳>
▶ 雨雪 : 눈이 내리다.
▶ 墮指 : 손가락이 얼어 떨어지다.
▶ 詳 : 佯과 통하여 假裝하다.
▶ 見 : 現과 같다.
▶ 羸弱 : 여위고 약하다. 연로하고 몸이 약하여 능력이 없는 사람.
▶ 悉兵 : 전군이 출동하다.
▶ 北逐 : 달아나는 적을 추격하다. 北는 달아날 ‘배’.
▶ 餉 : 군량.
▶ 高帝先至平城 : 漢高祖가 직접 군대를 인솔하고 흉노의 묵돌선우를 공격했다가 平城 인근의 白登山에서 흉노의 40만 대군에게 7일 동안이나 포위를 당하는 곤경에 빠졌던 일을 말한다. 이때 陳平이 계책을 내어 單于의 부인 閼氏에게 후한 뇌물을 써서 겨우 포위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사기 권93. 韓信盧綰列傳> <사기 권95. 樊酈滕灌列傳>
▶ 青駹馬 : 청색 말.
▶ 烏驪馬 : 검은 말.
▶ 騂馬 : 붉은 말.
▶ 期 : 만날 약속을 하다.
▶ 持滿 : 활 시위를 충분히 당기다.
▶ 外鄉 : =外向. 흉노에게 겨누다.
▶ 罷 : 물러가다.
▶ 劉敬 : 高祖가 白登에서 匈奴의 冒頓單于에게 패한 뒤 북방의 변란 때문에 괴로워할 때 유경이 화친정책을 제안하고 사신으로 가서 조약을 매듭지었다. <史記 권99 劉敬·叔孫通列傳>
是後韓王信為匈奴將,及趙利、王黃等數倍約,侵盜代、雲中。
그 후 韓王 信은 흉노의 장군이 되어 조리, 왕황 등과 함께 화친의 조약을 누차 위반하고 代郡과 雲中郡에 침범하여 약탈을 일삼았다.
居無幾何,陳豨反,又與韓信合謀擊代。
얼마 후에 陳豨가 造反함에 漢王 신과 내통하여 代 땅을 공격하였다.
漢使樊噲往擊之,復拔代、鴈門、雲中郡縣,不出塞。
漢에서 樊噲를 파견하여 진희를 공격하게 하였으며 대군·안문·운중의 여러 군현을 함락시켜 수복하되 장성 밖으로는 나가지는 않았다.
是時匈奴以漢將眾往降,故冒頓常往來侵盜代地。
그때 흉노에는 漢將 중에 투항해오는 사람이 많으매, 묵돌이 자주 代 땅을 침범하여 약탈하였다.
於是漢患之,高帝乃使劉敬奉宗室女公主為單于閼氏,歲奉匈奴絮繒酒米食物各有數,約為昆弟以和親,冒頓乃少止。
이에 漢이 우려하여 劉敬으로 하여금 황족의 딸을 공주로 삼아 선우에게 閼氏로 바치게 하고, 매년 흉노에게 솜, 비단, 누룩, 음식물 등을 일정 수량 보내주기로 하고, 의형제로 화친을 맺자 묵돌도 잠시 漢 땅에서 노략질을 중지하였다.
後燕王盧綰反,率其黨數千人降匈奴,往來苦上谷以東。
그 후 燕王 盧綰이 漢을 배반하여 그의 일당 수천 명을 거느리고 흉노에게 투항하자 묵돌은 上谷郡 동쪽 지역을 왕래하며 그곳의 백성을 괴롭혔다.
高祖崩,孝惠、呂太后時,漢初定,故匈奴以驕。
高祖가 붕어하고 孝惠帝가 즉위하고, 呂太后가 섭정할 때 漢이 갓 안정된 까닭에 흉노가 교만하였다.
冒頓乃為書遺高后,妄言。
묵돌이 高后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妄言이었다.
高后欲擊之,諸將曰:
「以高帝賢武,然尚困於平城。」
고후가 묵돌을 치려고 하였으나 장군들이 말하였다.
“高帝의 현명함과 武勇으로도 오히려 평성에서 곤욕을 치르셨습니다.”
於是高后乃止,復與匈奴和親。
이에 고후는 흉노를 정벌할 생각을 포기하고 다시 흉노와 화친하였다.
▶ 數 : 누차.
▶ 倍 : 背와 통하여 파기하다.
▶ 陳豨反 : 陳豨는 高祖 10기원전 197년 9월에 왕황 등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고 스스로 代王이라 하며 趙와 代의 땅을 강탈하였다.<사기 권93. 韓信盧綰列傳>
▶ 樊噲 : 유방과 項羽의 鴻門의 연회에서 유방이 項羽에게 살해될 위기에서 극적으로 유방을 구해내었다. 유방이 즉위한 뒤 左丞相, 相國이 되었으며 그 후 여러 반란을 평정하였으며 舞陽侯로 봉해졌다. 漢이 樊噲를 시켜 진희를 공격하여 베어 죽였다.<사기 권95 樊酈滕灌列傳>
▶ 奉 : 바치다.
▶ 宗室 : 皇族.
▶ 燕王盧綰反 : 盧綰은 高帝 12기원전 195에 陳豨가 반란을 일으키자 군사를 일으켜 진희를 공격하고, 흉노와 연대하려는 진희의 계획을 방해하려다가 오히려 흉노와의 연대를 도왔는데, 이 일이 알려지자 흉노로 도망하였다.<史記 권93. 韓信盧綰列傳>
▶ 為書 : 편지를 쓰다.
▶ 高後 : 呂太后.
▶ 妄言 : 허튼소리를 하다. <漢書 匈奴傳〉에 흉노가 高后에게 보낸 편지에 이르기를 “폐하께서 혼자 사시고 나 또한 혼자 살아서 두 임금이 樂이 없어 스스로 즐길 것이 없으니, 원컨대 있는 것을 가지고 없는 것과 바꿉시다.”라고 하였다.
至孝文帝初立,復修和親之事。
孝文帝가 즉위하자 화친의 정책을 다시 시행하였다.
其三年五月,匈奴右賢王入居河南地,侵盜上郡葆塞蠻夷,殺略人民。
문제 3년(기원전 177년) 5월에 흉노의 右賢王이 하남 땅으로 침입하여 주둔하고, 상군 변새의 작은 성을 공격하여 그곳의 蠻夷族들을 살해하고 약탈하였다.
於是孝文帝詔丞相灌嬰發車騎八萬五千,詣高奴,擊右賢王。
이에 문제가 승상 灌嬰에게 명령하여 車騎 8만 5천을 동원하여 高奴에 이르러 우현왕을 공격하게 하였다.
右賢王走出塞。文帝幸太原。
우현왕이 패하여 요새 밖으로 도주하였다. 문제가 太原으로 순행하였다.
是時濟北王反,文帝歸,罷丞相擊胡之兵。
이 때 濟北王 劉興居가 반란을 일으켜 문제가 장안으로 되돌아왔으며, 승상 관영의 흉노 공격도 그만두었다.
其明年,單于遺漢書曰:
그 다음해 선우가 漢에 글을 보내어 일렀다.
「天所立匈奴大單于敬問皇帝無恙。
“하늘이 세우신 흉노 대선우가 삼가 황제에게 문안인사를 드립니다.
前時皇帝言和親事,稱書意,合歡。
지난 번 황제께서 화친에 관하여 말씀하신 편지의 취지는 쌍방에게 합당하였습니다.
漢邊吏侵侮右賢王,右賢王不請,聽後義盧侯難氏等計,與漢吏相距,絕二主之約,離兄弟之親。
漢 변경의 관리들이 우현왕의 영지를 침범하여 모욕하니 우현왕 또한 선우에게 상의함이 없이 휘하의 後義, 盧侯, 難氏 등의 계책을 받아들여 漢 관리들과 서로 대치하여 두 나라 군주의 약속을 깨트리고 형제로서의 친밀한 관계를 이간시켰습니다.
皇帝讓書再至,發使以書報,不來,漢使不至,漢以其故不和,鄰國不附。
황제가 책망하는 편지가 두 번이나 도착하여, 사신을 보내 황제께 글로써 회답하였는데 그 사신은 돌아오지 않았고, 漢의 사신은 오지 않은 까닭에, 漢이 우리와 화친하지 않으면 이웃인 우리도 따를 수가 없습니다.
今以小吏之敗約故,罰右賢王,使之西求月氏擊之。
지금 작은 관리가 두 나라의 화친 맹약을 깨트렸기 때문에 우현왕에게 그 벌로써 서쪽으로 월지를 정벌하도록 하였습니다.
以天之福,吏卒良,馬彊力,以夷滅月氏,盡斬殺降下之。
하늘이 복을 내려 관리와 정예 병사와 강건한 말로써 월지국을 멸하고 항복한 적을 죽였습니다.
定樓蘭、烏孫、呼揭及其旁二十六國,皆以為匈奴。
樓蘭, 烏孫, 呼揭 및 그 인접 26개국을 모두 평정하여 모두 흉노의 백성으로 삼았습니다.
諸引弓之民,并為一家。
유목민족은 모두 한집안이 되었습니다.
▶ 三年 : 漢文帝 3년(기원전 177년).
▶ 葆 : 堡와 통한다. 작은 성.
▶ 殺略 : 죽이고 약탈함.
▶ 詣 : 다다르다.
▶ 濟北王 : 濟北王 劉興居
▶ 罷 : 해제하다. 그만두다.
▶ 無恙 : 탈이 없다. 건강하다.
▶ 稱 : 서로 걸맞다. 잘 어울리다.
▶ 書意 : 편지의 취지.
▶ 合歡 : 쌍방이 기뻐함.
▶ 讓書 : 책망의 서신.
▶ 敗約 : 맹약을 깨트리다. 敗는 깨트리다.
▶ 夷滅 : 평정하다. 소멸하다.
北州已定,願寢兵休士卒養馬,除前事,復故約,以安邊民,以應始古,使少者得成其長,老者安其處,世世平樂。
북쪽 지방이 이미 안정되었으매 원컨대 병사를 쉬게 하며 말을 기르며, 이전의 일을 잊고 본래의 조약을 회복하여 이로써 변경의 백성을 안정시키고, 당초의 친선관계로 되돌아가서 젊은이가 탈 없이 자라고 늙은이들이 편안히 살게 하여 대대로 평안하고 즐겁게 만들었으면 합니다.
未得皇帝之志也,故使郎中系雩淺奉書請,獻橐他一匹,騎馬二匹,駕二駟。
황제의 의향이 어떤지 알지 못하므로 郎中 係雩淺을 사신으로 보내 이 글을 받들어 올리며, 낙타 한 마리와 기마 두 필, 수레를 끄는 말 여덟 필을 바칩니다.
皇帝即不欲匈奴近塞,則且詔吏民遠舍。
황제께서 만일 漢 변방 지역에 흉노가 접근함을 바라지 않으신다면 관리와 백성에게 다시금 조서를 내려 변방에서 멀리 떨어져 살게 하십시오.
使者至,即遣之。」
사신이 도착하면 곧 돌려보내시기 바랍니다.”
▶ 寢兵 : 휴전하다.
▶ 橐他 : 낙타.
▶ 駕二駟 : 수레를 끄는 여덟 마리의 말. 駟는 수레 한 채를 끄는 네 필의 말.
▶ 即 : 만일.
以六月中來至薪望之地。
흉노의 사신은 6월 중순에 薪望 지방으로 왔다.
書至,漢議擊與和親孰便。
서신이 도착하자, 漢에서는 화친과 전쟁 중 어느 것이 이로운지 의논하였다.
公卿皆曰:
「單于新破月氏,乘勝,不可擊。
且得匈奴地,澤鹵,非可居也。
和親甚便。」
고관들이 모두 말하였다.
“單于가 지금 월지국을 격파하여 승세를 타고 있으니 공격을 해서는 안 됩니다.
또 흉노의 땅은 차지해보아야 소금기가 많은 늪지대로 살 수는 없습니다.
화친이 훨씬 유리합니다.”
漢許之。
漢이 선우의 휴전 요청을 허락하였다.
孝文皇帝前六年,漢遺匈奴書曰:
文帝 前元 6년(기원전 174년)에 漢이 흉노에게 글을 보냈다.
「皇帝敬問匈奴大單于無恙。
“황제가 삼가 흉노의 대선우에게 문안인사를 드립니다.
使郎中系雩淺遺朕書曰:
낭중인 系雩淺을 시켜 짐에게 보낸 글에 이르기를
『右賢王不請,聽後義盧侯難氏等計,絕二主之約,離兄弟之親,漢以故不和,鄰國不附。
今以小吏敗約,故罰右賢王使西擊月氏,盡定之。
願寢兵休士卒養馬,除前事,復故約,以安邊民,使少者得成其長,老者安其處,世世平樂。』
‘우현왕이 선우에게 상의하지 않고 휘하의 後義, 盧侯, 難氏 등의 계책을 받아들여, 두 나라 군주의 약속을 깨트리고 형제로서의 친밀한 관계를 이간시켰다고 하였으며, 그로 인하여서 漢이 흉노와 화친하지 않으면 이웃인 흉노도 따를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작은 관리가 두 나라의 화친 맹약을 깨트렸기 때문에 그 벌로써 우현왕에게 서쪽으로 월지를 정벌하여 모조리 평정시켰다고 하였습니다.
선우가 원하기를 휴전하여 병사들을 쉬게 하며 말을 길러 앞서의 일을 잊고 본래의 조약을 회복하여 변경의 백성을 안정시키고 어린이들이 탈 없이 자라고 늙은이들이 안정된 생활을 보낼 수 있게 하여 대대로 태평한 세상을 만들었으면 합니다.’라고 하였는데
朕甚嘉之,此古聖主之意也。
짐은 심히 이를 가상히 여기며, 이것은 옛 성왕들의 뜻이기도 합니다.
漢與匈奴約為兄弟,所以遺單于甚厚。
漢과 匈奴가 형제가 되기로 약속하였기 때문에, 선우에게 매우 후한 선물을 보내주고 있었습니다.
倍約離兄弟之親者,常在匈奴。
약속을 배반하고 형제로서의 친밀한 관계를 이간한 쪽은 항상 흉노 쪽이었습니다.
然右賢王事已在赦前,單于勿深誅。
그러나 우현왕의 일은 이미 사면하기 이전에 일어났으니, 선우를 심하게 문책하지 않겠습니다.
單于若稱書意,明告諸吏,使無負約,有信,敬如單于書。
만약 선우가 서신의 뜻에 부합하여 모든 관리에게 분명히 고하여 약속을 저버림이 없고 신의가 있다면, 삼가 선우의 서신대로 하겠습니다.
使者言單于自將伐國有功,甚苦兵事。
사신의 말에 의하면 單于가 친히 군대를 거느리고 여러 나라를 정벌하여 공을 세우고 軍事로 수고가 많았다고 하였습니다.
服繡袷綺衣、繡袷長襦、錦袷袍各一,比余一,黃金飾具帶一,黃金胥紕一,繡十匹,錦三十匹,赤綈、綠繒各四十匹,使中大夫意、謁者令肩遺單于。」
그래서 짐이 입는 繡袷綺衣, 繡袷長襦, 錦袷袍를 각각 한 벌, 比余 1개, 황금 飾具帶와 황금 胥紕 1개, 수놓은 비단 10필, 비단 30필, 붉은 비단과 푸른 비단 각각 40필을 中大夫 意와 謁者令 肩을 통하여 선우에게 보냅니다.”
後頃之,冒頓死,子稽粥立,號曰老上單于。
그 뒤 얼마 후에 묵돌 선우가 죽자, 아들 稽粥이 즉위하였으며. 號를 老上單于라고 하였다.
老上稽粥單于初立,孝文皇帝復遣宗室女公主為單于閼氏,使宦者燕人中行說傅公主。
노상 계육 선우가 즉위하자, 文帝가 다시 종실의 딸을 공주라고 하며 선우의 연지로 삼게 하였으며, 燕 출신인 환관 中行說로 하여금 공주를 보좌하게 하였다.
說不欲行,漢彊使之。
중항열이 가지 않으려 하였으나 조정에서 억지로 그를 보냈다.
說曰:
「必我行也,為漢患者。」
중항열이 말하였다.
“기어이 나를 가게 한다면, 漢의 우환이 될 터이다.”
中行說既至,因降單于,單于甚親幸之。
중항열이 도착하자 선우에게 투항하니 선우가 몹시 총애하였다.
▶ 澤鹵 : 염분이 많은 진펄.
▶ 前六年 : 漢 文帝 前元 6년(기원전 174년). 前元은 문제의 첫 번째 연호.
▶ 誅 : 처벌하다. 징벌하다.
▶ 服 : 천자가 입는 의복.
▶ 繡袷綺衣 : 수놓은 비단 상의.
▶ 綉袷長襦 : 수놓은 비단으로 만든 저고리.
▶ 錦袷袍 : 천연색 비단 도포
▶ 比余 : 금으로 만든 머리에 꽂는 빗.
▶ 黃金飾具帶 : 황금으로 장식한 허리띠.
▶ 胥紕 : 금으로 만든 허리띠의 고리.
▶ 赤綈 : 붉은 색의 매끄러운 비단.
▶ 綠繒 : 녹색의 비단.
▶ 稽粥 : 호는 老上單于. 冒頓單于의 아들. 기원전 174년 아버지가 죽자 즉위하여, 漢 종실의 딸을 아내로 맞고, 漢에서 항복해온 中行說을 고문으로 삼았다. 중항열은 흉노의 세력신장에 주력하여 문서작성, 국가재정제도 등을 정비하였다. 月氏를 공격하여 伊犁지방으로 쫓아내고, 죽인 월지왕의 두개골을 술잔으로 쓰는 등 그들에게 타격을 가하였다. 또 기원전 166년에는 漢 깊숙이 쳐들어갔고, 해마다 침공을 거듭하였다. 漢文帝는 종래의 조약 외에, 흉노에게 해마다 공물을 보낼 것을 내용으로 하는 和議를 다시 맺어 흉노를 무마하였다.
▶ 傅 : 보좌하다.
初,匈奴好漢繒絮食物,中行說曰:
처음에 흉노 사람들이 漢의 비단과 솜으로 만든 옷과 음식을 좋아하니, 중항열이 말하였다.
「匈奴人眾不能當漢之一郡,然所以彊者,以衣食異,無仰於漢也。
“흉노의 인구는 漢의 1郡에도 미치지 못하나, 흉노가 강한 이유는 의복과 음식이 漢과 다르고 漢을 우러러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今單于變俗好漢物,漢物不過什二,則匈奴盡歸於漢矣。
지금 선우께서 풍속을 바꿔 漢의 문물을 좋아하게 되면, 그들의 문물의 10분의 2도 소비하기도 전에 匈奴가 모두 漢에 귀속되고 말 터입니다.
其得漢繒絮,以馳草棘中,衣袴皆裂敝,以示不如旃裘之完善也。
漢에서 얻은 비단과 솜으로 만든 옷을 입고 풀과 가시밭을 내달려서, 옷과 바지가 모두 찢기고 해어지게 함으로써, 흉노의 털옷이나 갖옷만큼 튼튼하고 좋지 않음을 보여주십시오.
得漢食物皆去之,以示不如湩酪之便美也。」
漢의 음식물을 얻으면 이를 모두 버려서 흉노의 젖과 유제품만큼 편리하고 맛있지 않음을 보여주십시오.”
於是說教單于左右疏記,以計課其人眾畜物。
이에 중항열이 선우의 측근을 가르쳐 조목별로 기록하게 하고, 이로써 인구와 가축의 수를 헤아려 세금을 매기도록 하였다.
漢遺單于書,牘以尺一寸,辭曰
「皇帝敬問匈奴大單于無恙」,所遺物及言語云云。
漢이 선우에게 편지를 보내올 때 목간을 한 자 한 치의 크기로 하고, 문장을 쓰기를,
“황제가 삼가 흉노의 대선우에게 문안인사를 합니다.”라고 하고, ‘보내는 물품과 용건은 이러이러합니다.’라고 하였다
中行說令單于遺漢書以尺二寸牘,及印封皆令廣大長,倨傲其辭曰
「天地所生日月所置匈奴大單于敬問漢皇帝無恙」,所以遺物言語亦云云。
중항열은 선우가 漢에 편지를 보낼 때 한 자 두 치의 크기의 木簡을 쓰게 하고, 도장과 봉투를 모두 크게 하고, 문장도 오만불손하게 쓰기를,
“천지가 낳으시고 일월이 세우신 흉노의 대선우가 삼가 漢 황제에게 문안드립니다.”라고 하고 ‘보내는 물건과 용건은 역시 이러이러합니다.’라고 하였다
漢使或言曰:
「匈奴俗賤老。」
漢 사신 중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흉노의 풍속에 노인을 천대합니다.”
中行說窮漢使曰:
「而漢俗屯戍從軍當發者,其老親豈有不自脫溫厚肥美以齎送飲食行戍乎?」
중항열이 漢 사신을 힐난하였다.
“당신네 漢 풍속에도 종군하여 변방을 지키러 나가는 이들에게, 늙은 부모가 스스로 자기들의 따뜻한 옷을 벗어주고 살지고 기름진 음식을 수자리 나가는 사람에게 보내지 않는가?”
漢使曰:
「然。」
漢 사신이 말하였다.
“그렇습니다.”
中行說曰:
「匈奴明以戰攻為事,其老弱不能鬬,故以其肥美飲食壯健者,蓋以自為守衛,如此父子各得久相保,何以言匈奴輕老也?」
중항열이 말하였다.
“匈奴가 전투를 가장 일삼으나 노약자는 전투할 수 없기 때문에, 살지고 기름진 음식을 건장한 사람에게 먹임은 대개 이로써 자신을 지킴이며, 이와 같아야 부자가 각기 오랫동안 서로 보호할 수 있으니, 그것을 가지고 어떻게 흉노가 노인을 경시한다고 하겠는가?”
漢使曰:
「匈奴父子乃同穹廬而臥。
父死,妻其後母;
兄弟死,盡取其妻妻之。
無冠帶之飾,闕庭之禮。」
漢 사신이 말하였다.
“匈奴가 父子가 같은 천막 속에 삽니다.
아버지가 죽으면 자식이 그 처를 아내로 삼고,
형제가 죽으면 죽은 자의 아내를 모두 자기 아내로 삼습니다.
관과 허리띠의 복식이 없고 조정에서의 예절도 없습니다.”
中行說曰:
중항열이 대답하였다.
「匈奴之俗,人食畜肉,飲其汁,衣其皮;
畜食草飲水,隨時轉移。
“흉노의 풍속에는 사람은 가축의 고기를 먹고 그 젖을 마시며, 그 털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고,
가축은 풀을 먹고 물을 마시며 아무 때나 이동한다.
故其急則人習騎射,寬則人樂無事,其約束輕,易行也。
그러므로 그들이 다급할 때는 사람들이 騎射에 익숙하고 평소에는 일 없음을 즐기며, 그들의 약속은 간편하여 실행하기가 쉽다.
君臣簡易,一國之政猶一身也。
군신의 관계도 簡易하여, 나라의 정치가 마치 한 사람의 일과 같다.
父子兄弟死,取其妻妻之,惡種姓之失也。
부자나 형제가 죽으면, 죽은 자의 아내를 娶妻함은 종족이 끊어짐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故匈奴雖亂,必立宗種。
그래서 匈奴가 비록 윤리가 혼란하여 보이지만 본래의 종족을 반드시 유지한다.
今中國雖詳不取其父兄之妻,親屬益疏則相殺,至乃易姓,皆從此類。
지금 중원에는 비록 아버지나 형의 처를 娶妻하지 않는다고 가장하나, 친족관계가 멀면 서로 죽이고, 역성까지도 하는데, 모두 여기에서 기인한 부류이다.
且禮義之敝,上下交怨望,而室屋之極,生力必屈。
또 예의의 폐해로 군왕과 신하가 원한으로 맺어져 있으며, 궁전을 지음이 지극하여 백성의 힘을 소모하고 있다.
夫力耕桑以求衣食,筑城郭以自備,故其民急則不習戰功,緩則罷於作業。
힘써 밭갈이하고 누에를 길러 衣食을 구하고, 성곽을 쌓아 자신을 방비하기 때문에, 백성은 위급하여도 싸움에 익숙하지 못하고, 평상시에는 생업에 지치고 만다.
嗟土室之人,顧無多辭,令喋喋而佔佔,冠固何當?」
아! 흙과 돌집에 살고 있는 漢 사람이여, 잠시라도 많은 말을 할 필요가 없구나, 수다스럽게 지껄이며 소곤거리고 있으니, 관을 쓴들 무슨 소용이 되겠는가?”
▶ 袴 : 바지.
▶ 旃 : 모직물.
▶ 湩酪 : 우유와 우유제품.
▶ 疏記 : 조목별로 기록하다.
▶ 牘 : 簡牘. 고대에 글자를 적는 데 쓰인 대나무 조각 또는 나뭇조각.
▶ 封 : 封泥. 고대에 竹簡縑帛을 사용하던 때에 왕복하는 書函을 새끼로 묶고 그 매듭을 진흙으로 봉하는 것. 그 위에 도장을 찍어 남이 함부로 개봉하지 못하게 하였다.
▶ 尺二寸牘 : 漢이 單于에게 편지를 보낼 때 목판의 길이가 1자 1치인 簡牘을 사용하였는데, 中行說이 單于로 하여금 1자 2치의 간독을 사용하게 한 것이다.
▶ 窮 : 詰難하다.
▶ 而漢俗 : 당신네 漢 풍속. 而는 너. 당신네.
▶ 屯戍 : 군영을 지킴. 戍는 수자리.
▶ 肥美 : 살지고 기름지다.
▶ 齎 : 주다.
▶ 行戍 : 수자리를 가다.
▶ 穹廬 : 북방 유목민족의 파오.
▶ 闕庭 : 朝廷을 말한다.
▶ 惡 : 두려워하다.
▶ 種姓 : 종족.
▶ 宗種 : 宗嗣.
▶ 詳 : 가장하다.
▶ 取 : 娶와 같다. 혼인하다.
▶ 易姓 : 정권이 바뀌다.
▶ 敝 : 弊와 통한다. 폐해.
▶ 上下 : 군왕과 신하.
▶ 室屋 : 궁전을 짓다.
▶ 生力 : 기력.
▶ 屈 : 소모하다.
▶ 罷 : 疲와 통한다.
▶ 土室之人 : 흙과 돌집에 살고 있는 사람. 즉 漢 사람을 말한다.
▶ 顧 : 姑와 통하여 잠시.
▶ 喋喋 : 수다스럽게 지껄이다.
▶ 佔佔 : 소곤거리다.
▶ 固 : 어찌.
自是之後,漢使欲辯論者,中行說輒曰:
「漢使無多言,顧漢所輸匈奴繒絮米糱,令其量中,必善美而己矣,何以為言乎?
且所給備善則已;
不備,苦惡,則候秋孰,以騎馳蹂而稼穡耳。」
그 이후로 漢 사신이 변론하려 하면 중항열은 그때마다 말하였다.
“漢 사신은 여러 말 하지 말라. 단지 漢에서 흉노로 보내주기로 한 비단과 솜, 누룩이 만일 수량이 맞고 질이 좋으면 그만이니, 무엇을 말하겠는가?
또 보내온 것이 모두 좋으면 그만이나, 수량이 부족하거나 질이 나쁘면, 가을에 곡식이 익기를 기다렸다가 기마부대를 동원하여 너희들의 농작물을 짓밟아버릴 터이다.”
日夜教單于候利害處。
밤낮으로 선우에게 공격에 유리한 시기와 지점을 살피도록 가르쳤다.
漢孝文皇帝十四年,匈奴單于十四萬騎入朝那、蕭關,殺北地都尉卬,虜人民畜產甚多,遂至彭陽。
孝文帝 14년(기원전 166년), 흉노의 선우의 14만 騎가 朝那, 蕭關으로 침입하여, 北地郡의 都尉 孫卬을 죽이고, 백성과 가축을 약탈함이 매우 많았으며, 마침내 彭陽까지 진출하였다.
使奇兵入燒回中宮,候騎至雍甘泉。
돌격대를 보내어 回中宮을 불태우고, 정찰기병은 雍에 있는 甘泉宮까지 이르렀다.
於是文帝以中尉周舍、郎中令張武為將軍,發車千乘,騎十萬,軍長安旁以備胡寇。
이에 文帝가 中尉 周舍와 郎中令 張武를 장군으로 삼아, 전차 천승과 기병 10만을 동원하여 長安城 주변에 진을 치고 흉노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而拜昌侯盧卿為上郡將軍,甯侯魏遬為北地將軍,隆慮侯周灶為隴西將軍,東陽侯張相如為大將軍,成侯董赤為前將軍,大發車騎往擊胡。
昌侯 盧卿을 上郡將軍으로, 寧侯 魏遫을 北地將軍으로, 隆慮侯 周竈를 隴西將軍으로, 東陽侯 張相如를 大將軍으로 成侯 董赤을 前將軍으로 각각 임명하고 대대적으로 전차와 기병을 일으켜 흉노를 공격하게 하였다.
單于留塞內月餘乃去,漢逐出塞即還,不能有所殺。
單于가 漢의 요새에서 한 달 남짓 머물다가 떠났으며, 漢軍이 뒤쫓아 변경 밖으로 나갔다가 즉시 되돌아오니, 죽인 바가 없었다.
匈奴日已驕,歲入邊,殺略人民畜產甚多,雲中、遼東最甚,至代郡萬餘人。
흉노가 날이 갈수록 교만해져서 해마다 변경을 침범하여, 백성과 가축을 살상하고 노략함이 몹시 많되, 雲中郡과 遼東郡의 피해가 가장 심하였고, 代郡까지 합하여 피해자가 만여 명에 달하였다.
漢患之,乃使使遺匈奴書。
漢이 우려하여 사신을 보내 흉노에게 서신을 전하였다.
單于亦使當戶報謝,復言和親事。
선우도 역시 當戶를 사자로 보내 사과하며 다시 화친의 일을 언급하였다.
孝文帝後二年,使使遺匈奴書曰:
孝文帝 後元 2년(기원전 162년)에 사신을 보내 흉노에게 편지를 보내 일렀다.
「皇帝敬問匈奴大單于無恙。
“황제가 삼가 흉노의 대선우에게 문안드립니다.
使當戶且居雕渠難、郎中韓遼遺朕馬二匹,已至,敬受。
當戶 겸 且居인 雕渠難과 낭중 韓遼를 시켜 짐에게 말 두필을 보내주었는데, 이미 도착하여 삼가 받았습니다.
先帝制:長城以北,引弓之國,受命單于;
長城以內,冠帶之室,朕亦制之。
使萬民耕織射獵衣食,父子無離,臣主相安,俱無暴逆。
先帝의 조칙에, ‘장성 북쪽의 활쏘기에 능한 나라에서는 백성은 선우의 명을 받고,
장성 안의 관복을 갖추어 입는 백성은 또한 짐이 다스린다.
萬民에게 밭을 갈고 베를 짜고 사냥을 하여 입고 먹게 하고, 父子에 이별이 없고
군주와 신하가 서로 안심하여 모두 포악하거나 반역하는 일이 없게 하라.’라고 하였습니다.
今聞渫惡民貪降其進取之利,倍義絕約,忘萬民之命,離兩主之驩,然其事已在前矣。
지금 듣기에, 사악한 백성이 이익을 취함을 도모하여, 의리를 배반하고 약속을 어기고 백성의 생명을 망각하고 두 나라 군주의 歡情을 離反하였다고 하나, 그 일은 이미 전에 있었던 것입니다.
書曰:『二國已和親,兩主驩說,寢兵休卒養馬,世世昌樂,闟然更始。』
편지에 말하기를 ‘두 나라가 이미 화친하여 두 군주가 즐거워하며, 휴전하고 군사를 쉬게 하고 말을 길러 대대로 번영과 즐거움을 누리고 싶어서, 편안히 새로 시작하고 싶다.’라고 하였습니다.
朕甚嘉之。
짐이 매우 가상히 여깁니다.
聖人者日新,改作更始,使老者得息,幼者得長,各保其首領而終其天年。
성인은 날마다 새로워져서 부족한 점을 고쳐 다시 시작하여, 늙은이가 쉬게 하고 어린아이를 성장하게 하며 各自가 생명을 보전하여 천수를 마치도록 합니다.
朕與單于俱由此道,順天恤民,世世相傳,施之無窮,天下莫不咸便。
짐이 선우와 함께 이 도리를 따라, 하늘에 순응하고 백성을 위로하며 대대로 전하여 끝없이 연속된다면, 천하에 편안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터입니다.
漢與匈奴鄰國之敵,匈奴處北地,寒,殺氣早降,故詔吏遺單于秫糱金帛絲絮佗物歲有數。
漢과 匈奴가 이웃 나라로서 세력이 상당하되, 匈奴가 북쪽에 위치하여 춥고 스산한 냉기가 일찍 내리매, 짐은 관리에게 명령하여 선우에게 차조·누룩·황금·비단·무명 및 기타 물건을 보내게 하였으니, 해마다 일정한 수량이었습니다.
今天下大安,萬民熙熙,朕與單于為之父母。
지금 천하가 아주 평안하고 백성이 평화롭게 살고 있으니 짐과 單于가 만백성의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朕追念前事,薄物細故,謀臣計失,皆不足以離兄弟之驩。
짐이 지난 일을 돌이켜보건대 하찮은 일들이었고, 謀臣의 계책이 잘못된 소치이며, 모두가 형제의 우정을 이간할 것은 되지 못하였습니다.
朕聞天不頗覆,地不偏載。
짐이 듣건대 하늘은 한쪽으로 치우쳐 덮지 않으며, 땅은 치우쳐 싣지 않는다고 합니다.
朕與單于皆捐往細故,俱蹈大道,墮壞前惡,以圖長久,使兩國之民若一家子。
짐과 單于가 모두 종전의 사소한 오해를 버리고 함께 천지의 대도를 따르며, 과거의 잘못을 헐어버리고 장구한 계책을 세워서, 양국의 백성을 한집안 자식처럼 살게 하고 싶습니다.
元元萬民,下及魚鱉,上及飛鳥,跂行喙息蠕動之類,莫不就安利而辟危殆。
선량한 백성과 아래로는 물고기와 자라, 위로는 날짐승, 발로 기어 다니는 것, 입으로 숨을 쉬는 것, 꾸물꾸물 움직이는 부류까지도 편안하게 이익을 찾되 위태로움을 피하지 못함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故來者不止,天之道也。
그러므로 귀순하여 옴을 沮止하지 않음이 하늘의 道입니다.
俱去前事:
朕釋逃虜民,單于無言章尼等。
다 함께 지나간 일을 잊어버립시다.
짐은 흉노로 달아난 백성을 모두 사면하겠으니 선우도 章尼와 같은 자들을 나무라지 마십시오.
朕聞古之帝王,約分明而無食言。
짐이 듣건대 옛 帝王은 약속이 분명하고 食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單于留志,天下大安,和親之後,漢過不先。
선우가 화친에 마음을 둔다면 천하는 크게 안정될 터이고, 화친한 뒤에 漢이 잘못을 먼저 저지르지 않을 것입니다.
單于其察之。」
單于가 이 점을 살피십시오.”
▶ 備善 : 모두 좋다 備: 모두 =盡
▶ 櫱 : 누룩.
▶ 苦惡 : 거칠고 나쁘다.
▶ 侯 : 기다리다.
▶ 而 : 너희.
▶ 稼穡 : 농사.
▶ 利害處 : 유리한 공격시기와 지점.
▶ 孝文皇帝十四年 : 문제 14년. 기원전 166년.
▶ 奇兵 : 돌격대.
▶ 回中宮 : 궁궐명.
▶ 候騎 : 정찰기병.
▶ 雍甘泉 : 雍州의 甘泉宮.
▶ 後二年 : 漢文帝 後元 2년(기원전 162년)
▶ 先帝 : 漢高祖 劉邦을 말한다.
▶ 制 : 규정. 조칙.
▶ 冠帶 : 건을 쓰고 띠를 맨다는 뜻으로, 官服을 갖추어 입음을 말한다.
▶ 渫 : 더럽히다.
▶ 貪降 : 탐욕에 빠지다. 탐욕에 연연하다.
▶ 闟然 : 일치하다. 편안하다.
▶ 更始 : 고쳐서 시작함. 처음부터 다시하다.
▶ 首領 : 생명.
▶ 恤民 : 백성을 긍휼히 여기다. 백성을 위로하다.
▶ 施 : 연속되다.
▶ 鄰國之敵 : 세력이 대등한 이웃 나라. 敵은 대등하다.
▶ 殺氣 : 몹시 추운 기운. 스산한 냉기.
▶ 秫 : 차조. 찰수수.
▶ 佗 : 他와 같다.
▶ 熙熙 : 화목한 모양. 평화롭다.
▶ 薄物細故 : 하찮은 일. 故는 일.
▶ 謀臣 : 모략에 능한 신하.
▶ 頗覆 : 한쪽만 치우쳐 덮는다. 頗는 편파적.
▶ 捐 : 포기하다.
▶ 細故 : 사소한 일.
▶ 墮壞 : 헐어버리다.
▶ 元元 : 근본. 백성. 여기서는 선량하다는 뜻.
▶ 跂行 : 땅 위를 기어다님.
▶ 喙息 : 부리로 숨을 쉼. 즉 조류를 말한다.
▶ 蠕動 : 벌레가 꾸물꾸물 움직임.
▶ 章尼 : 漢에 항복한 흉노 사람이다.
▶ 食言 : 언약한 대로 실행하지 않다.
▶ 留志 : 留意. 마음에 두다.
▶ 漢過不先 : 漢 조정이 먼저 잘못을 범하지 않다.
單于既約和親,於是制詔御史曰:
「匈奴大單于遺朕書,言和親已定,亡人不足以益眾廣地,匈奴無入塞,漢無出塞,犯今約者殺之可以久親,后無咎,俱便。
朕已許之。
其布告天下,使明知之。」
선우가 화친을 약속하자, 이에 문제가 어사에게 황제의 칙명을 내렸다.
“흉노의 대선우가 짐에게 서신을 보내 화친이 결정되었다고 알려왔으니, 흉노에서 漢으로 도망해온 자들은 漢의 인구를 늘리는 데도 영토를 넓히는 데도 도움이 못 될 터이다.
흉노가 변방으로 침입하지 않을 터이매, 漢도 변방 요새를 넘어가지 말라. 이 맹약을 어기는 자는 사형에 처할 터이다.
이렇게 하여 화친이 오래되면, 뒷날에도 禍患이 생기지 않아 쌍방에게 이로울 터이다.
짐은 이미 선우의 요구를 허락하였다.
그것을 천하에 포고하여 명확히 알게 하라.”
▶ 制詔 : 황제의 勅命.
▶ 咎 : 재앙. 근심거리.
後四歲,老上稽粥單于死,子軍臣立為單于。
後元 4년(기원전 160년) 노상선우 계육이 죽고 아들 軍臣이 즉위하여 선우가 되었다.
既立,孝文皇帝復與匈奴和親。
군신선우가 즉위하자 문제가 다시 흉노와 화친을 맺었다.
而中行說復事之。
중항열은 다시 군신선우를 섬겼다.
軍臣單于立四歲,匈奴復絕和親,大入上郡、雲中各三萬騎,所殺略甚眾而去。
군신선우 즉위 4년, 흉노가 다시 화친을 끊었고, 上郡과 雲中郡에 각각 3만 명의 기병이 대거 침입하였다가 떠났는데, 殺略한 바가 몹시 많았다.
於是漢使三將軍軍屯北地,代屯句注,趙屯飛狐口,緣邊亦各堅守以備胡寇。
이에 漢이 張武 등 세 장군을 보내어 北地에 주둔하고, 代에서는 句注山에 주둔하고, 趙에서는 飛狐의 입구에 주둔하고. 변경 일대에도 각각 군사를 파견하고 굳게 지키게 하여 흉노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又置三將軍,軍長安西細柳、渭北棘門、霸上以備胡。
또 별도로 周亞夫 등 세 장군을 배치하여 장안 서쪽의 細柳와 渭水 북쪽의 棘門, 霸上에 진을 치고 흉노를 대비하게 하였다.
胡騎入代句注邊,烽火通於甘泉、長安。
흉노의 기병이 代 땅의 句注 변경으로 침입하여 봉화가 甘泉과 장안에 전해졌다.
數月,漢兵至邊,匈奴亦去遠塞,漢兵亦罷。
몇 달이 걸려 漢軍이 변경에 도착함에, 匈奴가 변방으로부터 멀리 떠났으므로 漢軍도 역시 철수하였다.
後歲餘,孝文帝崩,孝景帝立,而趙王遂乃陰使人於匈奴。
그 후 1년여, 文帝가 붕어하고 景帝가 즉위하자, 趙王 劉遂가 몰래 사람을 흉노로 보냈다.
吳楚反,欲與趙合謀入邊。
오초칠국의 난에, 匈奴가 趙와 연합하여 漢 변방으로 침입하려 하였다.
漢圍破趙,匈奴亦止。
漢이 趙를 포위하여 깨뜨리자, 흉노 역시 중지하였다.
自是之後,孝景帝復與匈奴和親,通關市,給遺匈奴,遣公主,如故約。
그 이후에 경제가 다시 흉노와 화친을 맺으니, 변경에서 시장을 열고 흉노에게 물자를 보내고 공주를 시집보내며 종래의 약속대로 하였다.
終孝景時,時小入盜邊,無大寇。
경제 시대가 끝날 때까지 때로 소규모로 침입하여 변경에서 노략질하였으나, 대규모로 침략은 없었다.
今帝即位,明和親約束,厚遇,通關市,饒給之。
지금의 황제가 즉위하자, 화친의 약속을 명확히 하였으니, 후하게 대우하고 관문의 교역시장을 열고, 많은 물자를 보급하였다.
匈奴自單于以下皆親漢,往來長城下。
匈奴가 선우 이하 모두가 漢을 친근하게 여겨 장성 아래까지 왕래하였다.
▶ 後四歲 : 漢文帝 後元 4년(기원전 160년) <漢書·匈奴傳>
▶ 軍臣單于 : 노상선우의 아들. 노상선우가 전한과 체결하였던 평화조약을 파기하고, 문제가 치세의 漢의 북변을 여러 차례 침범하였다. 경제 때 공납을 받으며, 교역하여 이득을 보았다. 그러나 무제가 즉위한 뒤로는 다시 침공하기 시작하여 항쟁을 되풀이함으로써 치세의 후반부터 점차 쇠퇴하였다.
▶ 三將軍軍屯 : 후원 6년 겨울, 흉노 3만이 상군을 침입하였고, 3만은 雲中에 침입하였다. 中大夫令 勉을 거기장군으로 삼아 飛狐에, 초의 승상이었던 蘇意를 장군으로 삼아 句注에, 장군 張武는 북지에 주둔시켜 흉노에 대비하도록 하였다.<사기 권10. 孝文本紀>
▶ 緣邊 : 漢과 흉노의 경계.
▶ 置三將軍 : 河內 郡守 周亞夫을 장군에 임명하여 細柳에, 종정 劉禮도 장군으로 삼아 覇上에, 축자후는 棘門에 주둔시켜 흉노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몇 달 뒤에 흉노가 물러가자 역시 철수시켰다.<사기 권10. 孝文本紀>
▶ 趙王遂 : 高祖의 손자. 제후국 趙의 王 劉遂.
▶ 吳楚反 : 오초칠국의 吳楚七國.
▶ 關市 : 변경에 설치한 시장.
▶ 今帝 : 현재의 황제 즉 漢武帝. 사마천이 사기를 기록할 때가 漢武帝 치세였다.
▶ 饒 : 넉넉하다. 많다.
漢使馬邑下人聶翁壹奸蘭出物與匈奴交,詳為賣馬邑城以誘單于。
漢이 馬邑城에 사는 聶翁壹을 시켜 禁令을 어기고 화물을 갖고 나가서 흉노와 교역하게 하고, 거짓으로 마읍성을 흉노에게 팔아넘기는 척하여 선우를 유인하게 하였다.
單于信之,而貪馬邑財物,乃以十萬騎入武州塞。
單于가 그를 믿고 마읍의 재물을 탐하여 10만 기병을 이끌고 武州의 요새로 침입하였다.
漢伏兵三十餘萬馬邑旁,御史大夫韓安國為護軍,護四將軍以伏單于。
漢은 마읍성 부근에 30여 만을 매복시켜 두고, 어사대부 韓安國을 護軍장군으로 삼아 네 장군을 통솔하여 선우를 매복하여 공격하려고 하였다.
單于既入漢塞,未至馬邑百餘里,見畜布野而無人牧者,怪之,乃攻亭。
선우가 漢의 요새로 들어와서 마읍까지 1백여 리밖에 남지 않았는데도, 들판에 가축이 흩어져 있을 뿐 牧者가 없음을 보고 이상하게 여기매, 漢의 정찰초소를 공격하였다.
是時鴈門尉史行徼,見寇,葆此亭,知漢兵謀,單于得,欲殺之,尉史乃告單于漢兵所居。
이때 雁門의 尉史가 순찰하다가 선우의 부대를 보고 정찰초소를 지키려고 하자, 漢軍의 계략을 선우가 알고 그를 죽이려 하니, 위사가 선우에게 漢軍이 있는 곳을 고하였다.
單于大驚曰:
「吾固疑之。」
單于가 크게 놀라며 말하였다.
“나는 본래 의심하고 있었다.”
乃引兵還。
그러고는 군사를 이끌고 되돌아갔다.
出曰:
「吾得尉史,天也,天使若言。」
以尉史為「天王」。
邊塞를 빠져나오면서 말하였다.
“내가 위사를 잡음은 하늘의 뜻이니. 하늘이 너를 시켜 말하게 하였다.”
위사를 ‘天王’이라고 불렀다.
漢兵約單于入馬邑而縱,單于不至,以故漢兵無所得。
漢軍은 선우가 마읍성에 들어오면 출격하기로 약속하였으나, 선우가 오지 않으매 漢軍에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漢將軍王恢部出代擊胡輜重,聞單于還,兵多,不敢出。
漢將 王恢의 부대는 代郡에서 출격하여 흉노의 보급부대를 공격하기로 약속하였으나, 선우가 철수함에 병력이 많음을 알고 감히 공격하지 못하였다.
漢以恢本造兵謀而不進,斬恢。
漢은 왕회가 원래 이번 계획을 꾸몄으면서도 진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왕회를 참수하였다.
自是之後,匈奴絕和親,攻當路塞,往往入盜於漢邊,不可勝數。
그 후로 匈奴가 화친을 끊고, 직통하는 도로의 변새를 공격하고, 왕왕 漢 변방에 침입하여 약탈하니,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然匈奴貪,尚樂關市,嗜漢財物,漢亦尚關市不絕以中之。
그러면서도 匈奴가 탐욕스러우매, 여전히 관문의 교역을 즐기고, 漢의 재물을 좋아하였으며, 漢은 그래도 관문의 교역을 끊지 않음으로써 흉노와 영합하였다.
▶ 奸蘭 : 禁令을 어기다. 蘭은 欄과 통한다.
▶ 交 : 交易.
▶ 詳為賣馬邑城以誘單于 : 漢武帝 元光 원년(기원전 134년) 馬邑城의 聶翁壹이 왕회를 통하여 흉노를 칠 계책을 바쳤으며, 韓安國은 이를 반대하였으나 무제는 王恢의 편을 들었고, 韓安國은 이광·공손하·왕회 등과 함께 정벌에 나섰다. 그러나 흉노가 계략을 알아차려 결국 실패하였다.<사기 권108 韓長孺列傳>
▶ 亭 : 漢의 정찰 초소.
▶ 行徼 : 순찰하다.
▶ 葆 : 保와 통하여 지키다. 보호하다.
▶ 若 : 너.
▶ 輜重 : 군수품. 후방 보급부대.
▶ 斬恢 : 왕회를 참수하다. <사기 권 108 韓長孺列傳>에서는 자살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 不可勝數 : 많아서 일일이 다 헤아릴 수 없다.
▶ 中之 : 흉노의 심중에 영합하다.
自馬邑軍後五年之秋,漢使四將軍各萬騎擊胡關市下。
마읍사건 후 5년째 가을, 漢이 장군 네 명에게 각각 일만의 기병을 거느리고 관문 교역장의 흉노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將軍衛青出上谷,至蘢城,得胡首虜七百人。
장군 衛靑은 상곡군에서 나가서 蘢城에 도착함에, 흉노 7백 명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다.
公孫賀出雲中,無所得。
公孫賀가 운중군에서 出兵하였으나 전과가 없었다.
公孫敖出代郡,為胡所敗七千餘人。
公孫敖가 代郡에서 出兵하였는데 흉노에게 패하여서 7천여 명의 군사를 잃었다.
李廣出鴈門,為胡所敗,而匈奴生得廣,廣后得亡歸。
李廣은 안문에서 出兵하였다가 흉노에게 패하니, 흉노가 생포하였으며, 이광이 나중에 도망쳐 돌아왔다.
漢囚敖、廣,敖、廣贖為庶人。
漢이 공손오와 이광을 수감하자, 그들은 속죄금을 내고 서민으로 강등되었다.
其冬,匈奴數入盜邊,漁陽尤甚。
그해 겨울, 匈奴가 자주 변경에 침입하여 약탈함에, 漁陽郡의 피해가 더욱 심하였다.
漢使將軍韓安國屯漁陽備胡。
漢이 장군 韓安國을 어양에 주둔시켜 흉노를 대비하였다.
其明年秋,匈奴二萬騎入漢,殺遼西太守,略二千餘人。
그 이듬해 가을, 흉노의 2만 기병이 漢에 침입하여 遼西太守를 죽이고 2천여 명을 잡아갔다.
胡又入敗漁陽太守軍千餘人,圍漢將軍安國,安國時千餘騎亦且盡,會燕救至,匈奴乃去。
匈奴가 또 침입하여 어양 태수의 군사 1천여 명을 물리치고 漢將 韓安國을 포위하였는데, 韓安國은 그때 1천여 기가 또한 전멸될 지경인데, 때마침 燕의 구원병이 도착하니 흉노가 물러갔다.
匈奴又入鴈門,殺略千餘人。
匈奴가 또 鴈門郡에 침입하여 1천여 명을 죽이거나 잡아갔다.
於是漢使將軍衛青將三萬騎出鴈門,李息出代郡,擊胡。
이에 漢이 장군 衛青에게 3만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안문에서 출격하고, 李息에게는 代郡에서 출격하여 흉노를 공격하게 하였다.
得首虜數千人。
수천 명을 참수하거나 포로로 잡았다.
其明年,衛青復出雲中以西至隴西,擊胡之樓煩、白羊王於河南,得胡首虜數千,牛羊百餘萬。
그 이듬해 위청이 또 운중에서 출격하여 서쪽으로 隴西에 도착하여 흉노의 樓煩王과 白羊王을 공격하여, 수천 명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고 소와 양 100여만 마리를 얻었다.
於是漢遂取河南地,筑朔方,復繕故秦時蒙恬所為塞,因河為固。
그리하여 漢이 마침내 하남 지역을 빼앗아 朔方城을 쌓고 옛날 秦 때 蒙恬이 구축한 요새를 다시 수리하니, 황하가 견고한 방어선이 되었다.
漢亦棄上谷之什辟縣造陽地以予胡。
漢 역시 상곡군의 구불구불하고 외진 縣 造陽의 땅을 포기하여 흉노에게 넘겨주었다.
是歲,漢之元朔二年也。
이 해가 漢武帝 元朔 2년(기원전 127년)이었다.
▶ 衛靑 : 字는 仲卿으로 일곱 차례나 흉노를 물리쳐, 관직이 大司馬‧大將軍에 이르렀다.
▶ 蘢城 : 龍城. 單于가 머무는 곳으로 제천의식을 거행하는 곳이다.
▶ 李廣 : 文帝 때 良家의 자제로 종군하여 匈奴를 격퇴하여 郞이 되고, 武騎常侍를 지냈다. 흉노와의 전투에서 생포되었다가 탈출하여 돌아왔다. <사기 권 109. 李將軍列傳>
▶ 贖 : 죄를 면하기 위하여 돈을 바치다
▶ 什辟 : 구부러지고 외지다.
▶ 元朔二年 : 기원전 127년. 元朔은 漢武帝의 세 번째 연호로 기원전 128년에서 기원전 123년까지 사용하였다.
其后冬,匈奴軍臣單于死。
그 다음해 겨울, 흉노의 군신선우가 죽었다.
軍臣單于弟左谷蠡王伊稚斜自立為單于,攻破軍臣單于太子於單。
군신선우의 아우 左谷蠡王 伊稚斜가 스스로 선우에 오르고, 군신선우의 태자인 於單을 공격하여 물리쳤다.
於單亡降漢,漢封於單為涉安侯,數月而死。
오단은 도망쳐 漢에 투항하였으며, 漢이 그를 涉安侯로 봉하였지만 몇 달이 지나 죽고 말았다.
伊稚斜單于既立,其夏,匈奴數萬騎入殺代郡太守恭友,略千餘人。
伊稚斜單于가 즉위하자, 그해(기원전 126년) 여름에 흉노가 수만 騎가 침입하여 代郡太守 恭友를 죽이고 1천여 명을 잡아갔다.
其秋,匈奴又入鴈門,殺略千餘人。
그 해 가을, 匈奴가 또 안문군에 침입하여 1천여 명을 죽이거나 약탈하였다.
其明年,匈奴又復入代郡、定襄、上郡,各三萬騎,殺略數千人。
그 이듬해(기원전 125년), 匈奴가 또 代郡, 定襄郡, 上郡에 침입하니 각각 3만 명의 기병이 었고, 수천 명을 죽이거나 약탈하였다.
匈奴右賢王怨漢奪之河南地而筑朔方,數為寇,盜邊,及入河南,侵擾朔方,殺略吏民甚眾。
흉노 우현왕이 漢이 하남 땅을 빼앗고 삭방성을 쌓음에 원한을 품고, 여러 차례 약탈하고 변경을 노략질하고 하남으로 침입하여 삭방성을 침범하여 소란스럽게 하며, 관리와 백성을 죽이거나 약탈함이 몹시 많았다.
其明年春,漢以衛青為大將軍,將六將軍,十餘萬人,出朔方、高闕擊胡。
그 다음해 봄, 漢이 위청을 대장군에 임명하고 장군 6명과 10여 만 명을 거느리고 朔方과 高闕에서 출병하여 흉노를 공격하게 하였다.
右賢王以為漢兵不能至,飲酒醉,漢兵出塞六七百里,夜圍右賢王。
우현왕은 漢軍이 자신이 있는 곳까지 쳐들어오지 못할 터이라 생각하고, 술을 마시고 취하였는데, 漢軍이 변새에서 6,7백 리나 진격하여 밤에 우현왕을 포위하였다.
右賢王大驚,脫身逃走,諸精騎往往隨后去。
우현왕이 매우 놀라 단신으로 도망쳐 달아났고, 精騎들도 그 뒤를 좇아 서둘러 달아났다.
漢得右賢王眾男女萬五千人,裨小王十餘人。
漢軍은 우현왕 휘하의 남녀 1만 5천 명과 裨小王 10여 명을 사로잡았다.
其秋,匈奴萬騎入殺代郡都尉朱英,略千餘人。
그해 가을, 흉노의 1만 騎가 代郡에 침입하여 都尉 朱英을 죽이고 1천여 명을 약탈하였다.
▶ 其后冬 : 漢武帝 원삭 3년.
▶ 左谷蠡王 : 大臣 중에 신분이 높은 자는 左賢王, 다음은 左谷蠡王, 그 다음은 右賢王, 그 다음은 右谷蠡王이며 이들을 四角이라 불렀다.
▶ 伊稚斜 : 흉노의 제 5대 선우. 묵돌 선우의 손자이자 군신 선우의 동생이다. 좌록리왕을 지내다가 기원전 126년 어린 조카인 오단 태자를 폐위하고 선우로 즉위하였다.
▶ 於單 : 흉노 軍臣單于의 태자였다. 武帝 元朔 3년(기원전 126년) 漢에 투항하였다. 涉安侯에 봉해졌다.
▶ 其夏 : 元朔 3년(기원전 126년) 여름.
▶ 其明年 : 元朔 4년(기원전 125년)
▶ 六將軍 : 游擊將軍 蘇建, 彊弩將軍 李沮, 騎將軍 公孫賀, 輕車將軍 李蔡, 李息, 張次公을 말한다.<사기 권101.衛將軍驃騎將軍列傳>
▶ 高闕 : 산 이름. 삭방의 북쪽에 있다.
▶ 精騎 : 정예기병.
▶ 裨小王 : 裨將(:副將)과 같다.
其明年春,漢復遣大將軍衛青將六將軍,兵十餘萬騎,乃再出定襄數百里擊匈奴,得首虜前后凡萬九千餘級,而漢亦亡兩將軍,軍三千餘騎。
그 다음해 봄, 漢이 다시 대장군 위청을 보내 장군 6명과 기병 10여 만 명을 이끌고 다시 定襄에서 수백 리를 진출하여 흉노를 공격하였는데, 전후를 합하여 죽이거나 포로로 한 적의 숫자는 약 만 9천여 명이었으나, 漢도 장군 2명이 전사하고 3천여 명의 기병을 잃었다.
右將軍建得以身脫,而前將軍翕侯趙信兵不利,降匈奴。
右將軍 蘇建은 단신으로 간신히 탈출하였고, 前將軍인 翕侯 趙信은 전세가 불리하자 흉노에게 투항하였다.
趙信者,故胡小王,降漢,漢封為翕侯,以前將軍與右將軍并軍分行,獨遇單于兵,故盡沒。
조신은 원래 흉노의 小王 출신으로 漢에 항복하매 漢이 흡후에 봉하였으며, 前將軍이 되어 右將軍의 군대와 합치고 나뉘어 進秦軍하다가 단독으로 선우의 군대와 마주쳐서 전멸하였다.
單于既得翕侯,以為自次王,用其姊妻之,與謀漢。
單于가 흡후 조신을 얻은 후 自次王에 임명하고, 자신의 누이를 아내로 삼게 하고 함께 漢에 관하여 모의하였다.
信教單于益北絕幕,以誘罷漢兵,徼極而取之,無近塞。
조신은 선우에게 사막 북쪽으로 더 물러나서 사막을 가로질러 漢軍을 유인하여 피로하게 만든 다음 극도로 지쳐 있을 때 공격하고, 장성에 접근하지 말라고 충고하였다.
單于從其計。
單于가 그의 계책을 따랐다.
其明年,胡騎萬人入上谷,殺數百人。
그 다음해, 흉노의 기병 1만 명이 상곡군에 침입하여 수백 명을 죽였다.
其明年春,漢使驃騎將軍去病將萬騎出隴西,過焉支山千餘里,擊匈奴,得胡首虜萬八千餘級,破得休屠王祭天金人。
그 다음해 봄, 漢이 驃騎將軍 霍去病을 시켜 1만 騎를 거느리고 농서에서 출격하여 焉支山에서 1천여 리나 진격하여 흉노를 공격하고, 흉노 8천여 명을 죽이거나 포로로 하였으며, 休屠王을 무찌르고 황금상을 노획하였다.
其夏,驃騎將軍復與合騎侯數萬騎出隴西、北地二千里,擊匈奴。
그해 여름, 표기장군은 다시 合騎侯 공손오와 함께 수만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농서, 북지에서 2천여 리나 진격하여 흉노를 공격하였다.
過居延,攻祁連山,得胡首虜三萬餘人,裨小王以下七十餘人。
居延을 지나 祁連山을 공격하여서 흉노를 3만여 명을 죽이거나 포로로 하였는데 그 중에는 裨小王 이하 70여 명이 있었다.
是時匈奴亦來入代郡、鴈門,殺略數百人。
이때 흉노 역시 대군, 안문군으로 침입하여 수백 명을 죽이거나 약탈하였다.
漢使博望侯及李將軍廣出右北平,擊匈奴左賢王。
漢이 博望侯 張騫과 장군 이광으로 하여금 右北平에서 출격하여 흉노의 좌현왕을 공격하였다.
左賢王圍李將軍,卒可四千人,且盡,殺虜亦過當。
좌현왕이 이장군을 포위하니. 병사 대략 4천 명이 전멸할 지경이었으나, 병사보다 더 많은 수의 적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會博望侯軍救至,李將軍得脫。
때마침 博望侯의 군사가 당도하여 구원했기 때문에 이광 장군은 탈출할 수 있었다.
漢失亡數千人,合騎侯後驃騎將軍期,及與博望侯皆當死,贖為庶人。
漢軍의 사상자는 수천 명에 달하였으므로 표기장군의 기일을 지켜지 못한 합기후 공손오와 박망후 장건은 사형을 판결받았으나 두 사람 다 속죄금을 물고 평민이 되었다.
其秋,單于怒渾邪王、休屠王居西方為漢所殺虜數萬人,欲召誅之。
그해 가을, 單于는 渾邪王과 休屠王이 서쪽 지방에서 漢軍에게 병사 수만 명이 죽거나 포로가 되게 함에 노하여 소환하여 죽이려고 하였다.
渾邪王與休屠王恐,謀降漢,漢使驃騎將軍往迎之。
이에 혼야왕과 휴도왕이 두려워하여 漢에 투항하려고 모의하자, 漢에서는 표기장군으로 하여금 가서 맞이하도록 하였다.
渾邪王殺休屠王,并將其眾降漢。
혼야왕이 휴도왕을 죽이고 그의 군사를 합쳐서 거느리고 漢에 항복하였다.
凡四萬餘人,號十萬。
모두 4만여 명이었는데 10만 명이라 소문이 났다.
於是漢已得渾邪王,則隴西、北地、河西益少胡寇,徙關東貧民處所奪匈奴河南、新秦中以實之,而減北地以西戍卒半。
이에 漢이 혼야왕의 투항을 받아들인 후 隴西, 北地, 河西의 지역에서 흉노의 약탈이 더욱 줄어들었으므로, 관동의 빈민을 흉노에게서 빼앗은 하남과 新秦中으로 옮겨 살게 하여 그 지역의 인구를 충실히 하였으며, 북지군 서쪽의 수자리를 반으로 줄였다.
其明年,匈奴入右北平、定襄各數萬騎,殺略千餘人而去。
그 다음해, 흉노의 기병 수만 명이 右北平, 定襄을 침범하여 1천여 명을 죽이거나 약탈하고 갔다.
其明年春,漢謀曰
「翕侯信為單于計,居幕北,以為漢兵不能至」。
그 다음해 봄, 漢 조정이 의논하였다.
“흡후 趙信이 선우를 위하여 계책을 세웠으매 單于가 사막 북쪽에 있으며, 이것은 漢軍이 그곳까지 쳐들어올 수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乃粟馬發十萬騎,負從馬凡十四萬匹,糧重不與焉。
이에 말에게 먹이를 충분히 먹인 후에 10만 명의 기병을 출동시켰으며, 물품을 싣고 따라가는 말이 약 14만 마리나 되었으되, 식량과 輜重을 실은 말은 제외한 숫자였다.
令大將軍青、驃騎將軍去病中分軍,大將軍出定襄,驃騎將軍出代,咸約絕幕擊匈奴。
대장군 위청과 표기장군 곽거병에게 군사를 반으로 나누어 거느리게 하였으며, 대장군은 정양에서 出兵하고 표기장군은 代郡에서 出兵하여 모두 사막을 가로질러 흉노를 공격하기로 약속하였다.
單于聞之,遠其輜重,以精兵待於幕北。
單于가 듣고 그들의 郡守품을 멀리 보내고 정예 부대를 이끌고 사막 북쪽에서 기다렸다.
與漢大將軍接戰一日,會暮,大風起,漢兵縱左右翼圍單于。
漢 대장군과 하루 종일 접전하였는데, 저녁 무렵에 큰 바람이 일어나자, 漢이 좌우로 군사를 풀어 선우를 포위하였다.
單于自度戰不能如漢兵,單于遂獨身與壯騎數百潰漢圍西北遁走。
單于가 스스로 판단하기를, 전투에서 漢軍을 당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마침내 혼자 수백 명의 건장한 기병을 데리고 漢 포위를 뚫고 서북쪽으로 달아났다.
漢兵夜追不得。
漢軍는 밤을 새워 추격하였으나 잡을 수가 없었다.
行斬捕匈奴首虜萬九千級,北至闐顏山趙信城而還。
행진 중에 흉노의 首虜가 1만 9천 級이나 되었으며, 북으로 闐顔山에 있는 趙信城까지 진격했다가 되돌아왔다.
單于之遁走,其兵往往與漢兵相亂而隨單于。
선우가 도주함에, 그들 군사는 수시로 漢軍과 서로 혼전을 벌이며 선우를 따르고 있었다.
單于久不與其大眾相得,其右谷蠡王以為單于死,乃自立為單于。
單于가 오랫동안 자기의 본대와 합류하지 못하매, 右谷蠡王은 선우가 죽은 줄 알고 스스로 선우가 되었다.
真單于復得其眾,而右谷蠡王乃去其單于號,復為右谷蠡王。
진짜 선우가 다시 그의 군대를 찾아내자 우녹리왕은 선우의 칭호를 버리고 다시 우녹리왕이 되었다.
漢驃騎將軍之出代二千餘里,與左賢王接戰,漢兵得胡首虜凡七萬餘級,左賢王將皆遁走。
漢의 표기장군 곽거병은 代郡에서 출병하여 2천여 리를 進軍하고, 좌현왕과 접전을 벌인 끝에, 漢軍이 흉노의 首虜 모두 7만여 級을 얻었으되, 좌현왕과 장군들은 모두 달아났다.
驃騎封於狼居胥山,禪姑衍,臨翰海而還。
표기장군은 狼居胥山에서 封祭를 지내고, 姑衍山에서 禪祭를 드린 다음 翰海를 거쳐 되돌아왔다.
是後匈奴遠遁,而幕南無王庭。
그 후 匈奴가 멀리 달아났으며 사막 남쪽에는 선우의 궁정이 없어졌다.
漢度河自朔方以西至令居,往往通渠置田,官吏卒五六萬人,稍蠶食,地接匈奴以北。
漢이 황하를 건너 삭방에서 서쪽의 令居에 이르기까지 곳곳에 도랑을 파서 농지를 개간하고
둔전에 관리와 병졸 5, 6만 명을 배치하니, 차츰 흉노의 땅을 잠식하여, 경계가 흉노의 옛 땅보다 북쪽에 접근하였다.
▶ 六將軍 : 中將軍 공손오, 좌장군 공손하, 전장군 趙信, 우장군 蘇建, 후장군 李廣, 强弩將軍 李沮 등을 말한다.
▶ 身脫 : 單身으로 탈출하다.
▶ 翕侯 : 흡후 趙信이 武帝 元朔 6년에 흉노에게 항복하자, 單于가 그의 누이를 조신에게 시집보내고 그와 더불어 漢을 정벌할 것을 모의하였다
▶ 益北 : 북쪽으로 더 이동하다.
▶ 絕幕 : 사막을 가로지르다. 幕은 漠과 통한다.
▶ 其明年春 : 元狩 2년(기원전 121년)
▶ 霍去病 : 漢武帝 때 흉노와의 전쟁에서 큰 역할을 한 명장이다. 대장군 위청의 조카로 위청과 함께 이름을 드날렸다.
▶ 休屠王 : 흉노 이치사 선우 때 제후 겸 장군. 휴저왕으로 읽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休屠는 흉노가 봉한 제후의 땅.
▶ 祭天金人 :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쓰는 금속 우상. 금으로 만든 사람 모습.
▶ 合騎侯 : 公孫敖.
▶ 博望侯 : 張騫. 漢의 여행가로 중국에서 서역으로의 교통로를 공식 개통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 可 : 約. 대략
▶ 期 : 期限.
▶ 當死 : 사형을 판결하다.
▶ 渾邪王 : 흉노 왕족 1순위이다.
▶ 渾邪王殺休屠王 : 휴도왕이 후회하자 혼야왕이 휴도왕을 죽였다.
▶ 粟馬 : 말에게 먹이를 먹임.
▶ 糧重 : 食糧과 輜重.
▶ 中分 : 各分一半. 반으로 나누다.
▶ 咸 : 모두.
▶ 潰 : 뚫다. 돌파하다.
▶ 趙信城 : 趙信은 흉노에게 투항한 장수인데, 흉노가 窴顔山에 성을 쌓고 그곳에 살게 하였기 때문에 趙信城이라 하였다.
▶ 封 : 奉祭祀. 산에 올라 신단에서 올리는 제천의식.
▶ 禪 : 산천에 제사를 올림.
▶ 幕南無王庭 : 單于가 도읍하는 곳을 王庭이라 하였으니, 높은 천막 앞의 땅이 뜰과 같았으므로 王庭이라 한 것이다. 冒頓單于가 강성할 때 秦將 蒙恬이 빼앗았던 흉노의 땅을 모두 점령하여 王庭을 사막 남쪽에 배치하였는데, 지금 사막 북쪽으로 멀리 도망갔으므로 사막 남쪽에 王庭이 없다고 한 것이다.
▶ 度 : 渡와 통한다.
初,漢兩將軍大出圍單于,所殺虜八九萬,而漢士卒物故亦數萬,漢馬死者十餘萬。
처음에 漢의 두 장군이 대규모로 출격하여 선우를 포위 공격하였을 때, 흉노의 首虜가 8, 9만이나 되었으나 漢 병졸의 物故도 수만이었고, 漢 馬匹의 죽음도 10여 만이었다.
匈奴雖病,遠去,而漢亦馬少,無以復往。
匈奴가 비록 전투에 지쳐서 멀리 달아났지만, 漢에도 戰馬가 적어서 다시 출격할 수 없었다.
匈奴用趙信之計,遣使於漢,好辭請和親。
匈奴가 조신의 계책을 써서 사신을 漢으로 보내어 좋은 말로 화친을 청하였다.
天子下其議,或言和親,或言遂臣之。
황제가 그 의논을 내리니, 혹은 화친을 주장하고 혹은 신하로 만들어야 한다고 하였다.
丞相長史任敞曰:
「匈奴新破,困,宜可使為外臣,朝請於邊。」
승상부의 長史인 任敞이 말하였다.
“匈奴가 막 격파되어 곤란한 처지에 놓여있으니 마땅히 外臣으로 삼고 변경에서 봄가을로 朝見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漢使任敞於單于。
漢이 임창을 선우에게 사신으로 보냈다.
單于聞敞計,大怒,留之不遣。
單于가 임창의 계획을 듣자 크게 노하여 억류하고 보내지 않았다.
先是漢亦有所降匈奴使者,單于亦輒留漢使相當。
그 이전에 漢에서 흉노의 사신을 招降한 일이 있었으매, 선우도 漢 사신을 억류하여 서로 상응한 행동을 한 것이다.
漢方復收士馬,會驃騎將軍去病死,於是漢久不北擊胡。
漢이 다시 병졸과 군마를 징발하려고 하였는데, 그때 표기장군 곽거병이 病死하였으매, 이로부터 漢이 오랫동안 북쪽으로 흉노를 공격하지 못하였다.
數歲,伊稚斜單于立十三年死,子烏維立為單于。
몇 년 후 伊稚斜單于가 재위 13년 만에 죽고, 아들인 烏維가 선우가 되었다.
是歲,漢元鼎三年也。
이 해는 漢武帝 元鼎 3년(기원전 114년)이었다.
烏維單于立,而漢天子始出巡郡縣。
오유선유가 즉위하자 漢 황제가 처음으로 도성에서 나와 군현을 순시하였다.
其後漢方南誅兩越,不擊匈奴,匈奴亦不侵入邊。
그 후에 漢이 남쪽으로 兩越을 정벌해야 했기 때문에 흉노를 공격하지 않았고 흉노 역시 漢의 변경을 침입하지 않았다.
烏維單于立三年,漢已滅南越,遣故太仆賀將萬五千騎出九原二千餘里,至浮苴井而還,不見匈奴一人。
오유선우가 즉위한 지 3년, 漢이 이미 남월을 멸망시켰다.
종전에 太僕이었던 公孫賀에게 1만 5천 騎를 거느리고 九原에서 출병하여 2천여 리를 진격하게 하여, 浮苴井까지 갔다가 돌아왔으나 흉노를 한 사람도 보지 못하였다.
漢又遣故從驃侯趙破奴萬餘騎出令居數千里,至匈河水而還,亦不見匈奴一人。
漢이 또 종전에 從驃侯였던 趙破奴에게 1만여 명의 騎를 이끌고 영거에서 수천 리를 진격하게 하여 匈河水까지 갔다가 돌아왔으나 역시 흉노를 한 사람도 보지 못하였다.
是時天子巡邊,至朔方,勒兵十八萬騎以見武節,而使郭吉風告單于。
이 때 황제가 변경을 순시하여 朔方에 도착하여 18만 명의 기병을 사열하며 군대의 위력을 과시하고 郭吉을 사신으로 보내 선우에게 완곡히 권고하게 하였다.
郭吉既至匈奴,匈奴主客問所使,郭吉禮卑言好,曰:
「吾見單于而口言。」
곽길이 흉노에 당도하자 흉노의 主客이 사자로 온 이유를 물으니, 곽길이 예의를 갖추어 정중하게 말하였다.
“제가 선우를 뵙고 직접 말씀드리겠습니다.”
單于見吉,吉曰:
「南越王頭已懸於漢北闕。
今單于能前與漢戰,天子自將兵待邊;
單于即不能,即南面而臣於漢。
何徒遠走,亡匿於幕北寒苦無水草之地,毋為也。」
선우가 곽길을 접견하자 곽길이 말하였다.
“남월왕의 머리를 이미 漢 조정 북문에 매달아 놓았습니다.
지금 선우께서 앞으로 가서 한과 싸울 수 있으며, 천자께서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변경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선우께서 만약 싸우지 못하겠으면 즉시 남쪽을 향하여 漢에 稱臣하셔야 합니다.
어찌하여 헛되이 멀리 달아나서 사막 북쪽의 춥고 고통스러우며 물도 풀도 없는 땅에 도망하여 숨어계십니까?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語卒而單于大怒,立斬主客見者,而留郭吉不歸,遷之北海上。
말이 끝나자 單于가 대노하여, 알현하도록 한 主客을 그 자리에서 참수하고, 곽길을 억류하고 돌려보내지 않고 북해로 보내버렸다.
而單于終不肯為寇於漢邊,休養息士馬,習射獵,數使使於漢,好辭甘言求請和親。
그러나 單于가 끝내 漢 변경을 약탈하지 않았고, 병사와 말을 휴식시키고 기르며, 활쏘기와 사냥을 익히며 자주 사신을 漢으로 보내 부드러운 말로 화친을 청하였다.
▶ 物故 : 사망하다.
▶ 病 : 지쳐버리다.
▶ 遂 : 기회를 타다.
▶ 臣之 : 흉노를 신하로 만들어 복종시키다.
▶ 朝請 : 고대에 제후가 경성에 와서 황제를 알현하는 일로 春天은 ‘朝’, 秋天은 ‘請’이라 한다.
▶ 留不遣 : 억류하고 보내지 않았다. 흉노가 사신을 보내어 좋은 말로 화친을 청하자, 漢에서는 任敞으로 하여금 답례하게 하였는데, 임창이 선우로 하여금 外朝의 신하가 되라고 하자 선우가 노하여 임창을 억류한 것이다.
▶ 烏維單于 : 伊稚斜 선우의 아들이다. 아버지가 죽자 그 뒤를 이어 선우가 됐다. 오유선우가 즉위하였을 무렵 漢이 남쪽의 남월·동월과 싸우고 있었다.
▶ 元鼎三年 : 漢武帝 원정 3년(기원전 114년). 元鼎은 漢武帝의 다섯 번째 年號. 漢武帝는 원수 6년 여름 분수에 있는 후토 사당 옆에서 솥을 얻은 후 연호를 원정이라고 고쳤다.
▶ 兩越 : 南越과 東越을 말한다.
▶ 故 : 종전.
▶ 賀 : 公孫賀. 자는 子叔이며 북지군 義渠縣 사람이다. 경제 때 젊어서 기병으로서 종군하여 공적을 세웠고, 태자 유철의 舍人이 되었다. 유철이 즉위한 후 태복으로 승진하였다. 공손하는 아내 衛孺가 무사황후의 언니였기 때문에 중용되었고, 장군으로서 흉노와 싸워 그 공으로 南奅侯에 봉해졌으나 죄를 지어 박탈되었다.
▶ 勒兵 : 군사의 대오를 정돈하고 점검함.
▶ 見 : 現과 같다. 과시하다.
▶ 武節 : 군대의 위력.
▶ 郭吉 : 기원전 110년 10월에 무제가 직접 18만 기병을 거느리고 국경에서 무력시위를 하고, 郭吉을 사자로 보내 싸우거나 항복할 것을 요구하였다.
▶ 風 : 諷과 통한다. 풍자하다. 완곡히 권고하다.
▶ 所使 : 사자가 받은 명령.
▶ 北闕 : 玄武闕. 未央宮이 남향하고 있으나 글을 올리고 일을 아뢰고 알현하는 무리는 모두 北闕로 나아갔고 公車司馬도 북쪽에 있었으니, 北闕을 정문으로 삼은 것이다.
▶ 徒 : 헛되다. 보람없다.
▶ 北海 : 지금의 러시아 바이칼호.
▶ 數 : 누차.
▶ 使使 : 사자를 파견하다.
▶ 甘言 : 선의의 말. 부드럽고 좋은 말.
漢使王烏等窺匈奴。
漢이 이에 王烏 등을 시켜 흉노의 동정을 엿보게 하였다.
匈奴法,漢使非去節而以墨黥其面者不得入穹廬。
흉노의 법에는, 漢 사신이라도 符節을 풀어놓고 얼굴에 먹물을 넣은 사람이 아니면 선우의 천막에 들어갈 수 없었다.
王烏,北地人,習胡俗,去其節,黥面,得入穹廬。
왕오는 北地 사람으로 흉노의 풍속에 익숙하므로 그의 符節을 풀어놓고 얼굴에 먹물을 들여 선우의 천막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다.
單于愛之,詳許甘言,為遣其太子入漢為質,以求和親。
單于가 왕오를 그를 아끼고, 부드러운 말로 허락하는 척하며 그의 태자를 漢에 보내 인질로 하여 화친하고 싶다고 하였다.
漢使楊信於匈奴。
漢이 다시 楊信을 흉노에 사신으로 보냈다.
是時漢東拔穢貉、朝鮮以為郡,而西置酒泉郡以鬲絕胡與羌通之路。
당시 漢은 동쪽으로는 穢貉, 朝鮮을 함락하여 군을 설치하였고, 서쪽으로는 酒泉郡을 두어 흉노와 羌과의 통로를 차단하였다.
漢又西通月氏、大夏,又以公主妻烏孫王,以分匈奴西方之援國。
漢은 또 서쪽의 月氏, 大夏 등과 교류함에, 공주를 烏孫王의 아내로 주면서 흉노 서쪽의 지원국들을 분리시켰다.
又北益廣田至胘雷為塞,而匈奴終不敢以為言。
또 북쪽으로는 더욱 농지를 확장하고 胘雷에 이르러 요새를 만들었으나, 匈奴가 끝내 감히 불만을 표시하지 못하였다.
是歲,翕侯信死,漢用事者以匈奴為已弱,可臣從也。
이 해에 흡후 趙信이 죽으니, 漢의 집정자들은 흉노가 이미 쇠약하매 신하로 따르게 할 수 있다고 여겼다.
楊信為人剛直屈彊,素非貴臣,單于不親。
양신은 본래 강직하고 굴복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으나, 본래 지위가 높은 신하가 아니었으매, 선우가 親近하지 않았다.
單于欲召入,不肯去節,單于乃坐穹廬外見楊信。
선우가 불러들이려 해도 양신이 부절을 풀어놓으려 하지 않으매, 선우가 천막 안에 앉아 있다가 밖으로 나와서 양신을 만났다.
楊信既見單于,說曰:
「即欲和親,以單于太子為質於漢。」
양신이 선우를 만난 후 설득하였다.
“만일 화친을 원하신다면 선우의 태자를 漢에 인질로 보내십시오.”
單于曰:
「非故約。
故約,漢常遣翁主,給繒絮食物有品,以和親,而匈奴亦不擾邊。
今乃欲反古,令吾太子為質,無幾矣。」
선우가 대답하였다.
“그것은 옛날의 맹약이 아니오.
예전의 맹약은 漢이 항상 翁主를 보내고, 비단·솜·음식 등 일정 물품을 주어 화친하였고, 흉노도 漢 변경을 어지럽히지 않겠다는 것이었소.
지금 예전과는 반대로 우리 태자를 인질로 보내라고 하니 가망이 없소.”
匈奴俗,見漢使非中貴人,其儒先,以為欲說,折其辯;
其少年,以為欲刺,折其氣。
흉노의 습속에, 漢 사신을 만날 때 궁중의 貴人이 아니고 유생출신이면, 유세하려 한다고 여기고, 그의 辯說을 꺾으려 하고, 사신이 젊은이이면 책망하려 한다고 여겨 그의 기세를 꺾으려 하였다.
每漢使入匈奴,匈奴輒報償。
漢 사신이 흉노로 들어올 때마다 匈奴가 보상하였다.
漢留匈奴使,匈奴亦留漢使,必得當乃肯止。
漢이 흉노의 사신을 억류하면 흉노도 역시 漢 사신을 억류하여 반드시 대등하게 하고 멈추었다.
楊信既歸,漢使王烏,而單于復肴甘言,欲多得漢財物,紿謂王烏曰:
「吾欲入漢見天子,面相約為兄弟。」
楊信이 돌아온 후 漢이 王烏를 사신으로 보냈으나 單于가 달콤한 말로 아첨하며 漢의 재물을 많이 얻고자 왕오에게 거짓으로 말하였다.
“내가 漢으로 가서 황제를 뵙고, 面前에서 맹약하여 형제가 되려 하오.”
王烏歸報漢,漢為單于筑邸于長安。
왕오가 漢에 돌아와 보고하자, 漢에서는 선우를 위하여 장안에 저택을 지었다.
匈奴曰:
「非得漢貴人使,吾不與誠語。」
흉노가 말하였다.
“漢의 貴人인 사신을 만나지 못하면, 나는 진실한 이야기를 하지 않겠다.”
匈奴使其貴人至漢,病,漢予藥,欲愈之,不幸而死。
흉노가 그들의 貴人을 사신으로 보내어 한에 도착하였는데, 그가 병들었으므로 漢에서는 약을 주어 치료하고자 하였으나 불행히도 죽고 말았다.
而漢使路充國佩二千石印綬往使,因送其喪,厚葬直數千金,曰「此漢貴人也」。
이에 漢이 路充國에게 녹봉 2천 석의 印綬를 차고 사신으로 보내니, 유해를 가져가서 수천 금을 들여 후한 장례를 치렀고 “노충국이 漢의 귀인이다.”라고 말하였다.
單于以為漢殺吾貴使者,乃留路充國不歸。
單于가 漢이 자신의 지위 높은 사신을 죽였다고 여겨 노충국을 억류하고 귀국시키지 않았다.
諸所言者,單于特空紿王烏,殊無意入漢及遣太子來質。
말한 것들은 선우가 단지 헛되이 왕오를 속인 것으로, 單于가 漢에 갈 생각도 태자를 인질로 보낼 생각도 전연 없었다.
▶ 節 : 符節. 사신이 가지고 다니던 증표.
▶ 墨黥 : 墨刑. 이마에 죄인이라는 표시를 먹실로 새기는 고대 형벌.
▶ 穹廬 : 북방 유목민족의 파오.
▶ 詳 : 佯과 통하여 假裝하다.
▶ 鬲絕 : 차단하다. 단절시키다. 鬲은 隔과 통한다.
▶ 通之路 : 서로 통하는 도로.
▶ 分 : 분리하다. 떼어놓다.
▶ 廣田 : 농지를 확대하다.
▶ 翕侯信 : 趙信. 흉노에 투항한 장수.
▶ 用事者 : 권력을 장악한 자.
▶ 屈強 : 倔強과 통한다. 고집이 세다.
▶ 翁主 : 漢 때 제후의 딸.
▶ 幾 : 冀와 통하여 바라다. 희망하다.
▶ 儒先 : 儒生. 先은 선생의 약칭.
▶ 說 : 遊說하다.
▶ 刺 : 나무라다. 비난하다.
▶ 紿 : 속이다.
▶ 路充國 : 漢武帝 元封 4년(기원전 107년) 흉노에 고관의 신분이 되어 사신으로 갔다.
▶ 印綬 : 벼슬의 등급을 나타내는 官印을 몸에 차기 위한 끈.
▶ 喪 : 시신.
▶ 直 : 值와 통한다. 값.
於是匈奴數使奇兵侵犯邊。
이에 흉노가 여러 차례 奇兵을 보내어 漢 변경을 침범하였다.
漢乃拜郭昌為拔胡將軍,及浞野侯屯朔方以東,備胡。
漢이 이에 郭昌을 拔胡將軍에 임명하고 또 浞野侯 趙破奴를 삭방 동쪽에 주둔시켜 흉노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路充國留匈奴三歲,單于死。
노충국이 흉노에 억류된 지 3년, 烏維單于가 죽었다.
烏維單于立十歲而死,子烏師廬立為單于。
오유선우가 즉위한 지 10년 만에 죽자, 아들 烏師廬가 즉위하여 선우가 되었다.
年少,號為兒單于。
나이가 어이매 兒單于라고 칭하였다.
是歲元封六年也。
이 해가 元封 6년(기원전 105년)이었다.
自此之後,單于益西北,左方兵直雲中,右方直酒泉、燉煌郡。
그 후로 單于가 더욱 서북쪽으로 이동하니 左方의 군대는 운중군에 맞닿고 右方의 군대는 酒泉·燉煌郡과 맞닿았다.
兒單于立,漢使兩使者,一弔單于,一弔右賢王,欲以乖其國。
아선우가 즉위하자 漢이 두 사람의 사신을 보내되, 한 사람은 선우를 조문하고 다른 한 사람은 右賢王을 조문하여 흉노를 이간시키고자 하였다.
使者入匈奴,匈奴悉將致單于。
사신이 흉노 땅에 들어가자, 흉노는 선우 앞으로 모두 데려갔다.
單于怒而盡留漢使。
單于가 노하여 漢 사신을 모두 억류하였다.
漢使留匈奴者前後十餘輩,而匈奴使來,漢亦輒留相當。
漢의 사신으로서 흉노에 억류된 사람은 前後 10여 명이었는데, 漢 역시 그때마다 억류하여 흉노와 같은 수가 되게 하였다.
是歲,漢使貳師將軍廣利西伐大宛,而令因杅將軍敖筑受降城。
그 해(기원전 104년), 漢은 貳師將軍 李廣利를 보내 서쪽으로 大宛을 정벌하고, 因杅將軍 공손오에게 명령하여 受降城을 축조하였다.
其冬,匈奴大雨雪,畜多饑寒死。
그해 겨울, 흉노 땅에 큰 눈이 내리매, 가축에 굶주리고 얼어 죽는 것이 많았다.
兒單于年少,好殺伐,國人多不安。
兒單于가 나이가 어리고 살육과 전쟁을 좋아하매, 백성에 불안해하는 자가 많았다.
左大都尉欲殺單于,使人閒告漢曰:
「我欲殺單于降漢,漢遠,即兵來迎我,我即發。」
흉노의 左大都尉가 선우를 죽이려 하여, 남몰래 漢에 사람을 보내어 알렸다.
“내가 선우를 죽이고 漢에 항복하고 싶으나 漢이 너무 머니, 만일 漢軍이 와서 나를 맞아준다면 즉시 반란을 일으키겠소.”
初,漢聞此言,故筑受降城,猶以為遠。
처음에 漢이 이 말을 듣고 수항성을 쌓았으나 여전히 흉노와는 너무 멀다고 여겼다.
其明年春,漢使浞野侯破奴將二萬餘騎出朔方西北二千餘里,期至浚稽山而還。
다음 해 봄, 漢은 浞野侯 조파노를 시켜 2만여 騎를 거느리고 삭방에서 나가서 서북쪽 2천여 리까지 진군하게 하고, 浚稽山에 가서 흉노를 맞이하여 되돌아온다고 기약하였다.
浞野侯既至期而還,左大都尉欲發而覺,單于誅之,發左方兵擊浞野。
착야후 조파노가 기일을 맞추어 갔다가 돌아오는데, 좌대都尉가 반란을 일으키려다 발각되매 선우가 좌대都尉를 죽이고 좌방의 군사를 보내어 착야후를 공격하였다.
浞野侯行捕首虜得數千人。
착야후는 후퇴하면서 首虜 수천 명을 얻었다.
還,未至受降城四百里,匈奴兵八萬騎圍之。
돌아옴에 수항성에 4백 리 미치지 못하였는데, 흉노군 8만 騎가 포위하였다.
浞野侯夜自出求水,匈奴閒捕,生得浞野侯,因急擊其軍。
착야후가 밤중에 몸소 나가서 물을 구함에, 흉노가 숨어서 추적하다가 착야후를 생포하니, 이를 계기로 漢軍을 급습하였다.
軍中郭縱為護,維王為渠,相與謀曰:
「及諸校尉畏亡將軍而誅之,莫相勸歸。」
漢軍은 郭縱이 護軍이고 維王이 渠帥이었는데 서로 상의하였다.
“장군을 잃으면 참수됨을 따르는 校尉들이 두려워하매, 귀국하기를 권하는 사람이 없다.”
軍遂沒於匈奴。
군이 흉노에 함몰되었다.
匈奴兒單于大喜,遂遣奇兵攻受降城。
흉노의 아선우가 크게 기뻐하고 이어 기습병을 보내 수항성을 공격하였다.
不能下,乃寇入邊而去。
함락시키지 못하고 변경으로 쳐들어왔다가 물러갔다.
其明年,單于欲自攻受降城,未至,病死。
이듬해(기원전 102년), 單于가 친히 수항성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도착하기 전에 病死하였다.
▶ 郭昌 : 元封 4년(서기전 107년), 태중대부의 신분으로 拔胡將軍이 되어 삭방에 주둔하였다. 그 후 돌아와 昆明을 공격하였으나 공로가 없어 장군의 직위를 잃었다.
▶ 浞野侯 : 趙破奴를 말한다. 浞野는 지명이다. 趙破奴는 본래 九原 사람으로 일찍이 흉노로 도망쳐 들어갔다가 漢으로 돌아온 뒤 표기장군의 司馬가 되어 북지군에서 출정하였다.<사기 권111. 위장군표기열전>
▶ 烏師廬 : 성은 攣鞮, 이름은 烏師廬 혹은 詹師廬다. 兒單于는 어리다는 의미로 붙은 칭호이며 아버지가 죽자 그 뒤를 이어 선우가 됐다.
▶ 元封六年 : 기원전 105년. 元封은 漢武帝의 여섯 번째 연호이다.
▶ 乖 : 거스르다.
▶ 是歲 : 이 해. 漢武帝 太初 원년(기원전 104년).
▶ 貳師將軍廣利 : 李廣利. 황제가 寵姬인 李氏의 집안을 侯로 삼고자 하였는데, 李夫人의 오빠인 廣利를 임명하여 장군으로 삼아 大宛을 정벌하게 하니, 貳師城에 이르러서 좋은 말을 취할 것을 기약하였다. 그래서 그를 貳師將軍이라 호칭하였다.
▶ 因杅將軍敖 : 因杅는 원래 흉노의 地名. 敖는 公孫敖를 말한다.
▶ 間告 : 남몰래 알리다.
▶ 即 : 만일.
▶ 渠 : 渠帥. 즉 흉노에서 투항해온 병사의 수령.
▶ 明年 : 漢武帝 太初 3년(기원전 102년).
兒單于立三歲而死。
兒單于가 즉위한 지 3년 만에 죽었다.
子年少,匈奴乃立其季父烏維單于弟右賢王呴犁湖為單于。
아들이 어렸으매, 흉노는 아선우의 숙부인 烏維單于의 아우 우현왕 呴犁湖를 옹립하니, 선우가 되었다.
是歲太初三年也。
이 해는 太初 3년(기원전 102년)이었다.
呴犁湖單于立,漢使光祿徐自為出五原塞數百里,遠者千餘里,筑城鄣列亭至廬朐,而使游擊將軍韓說、長平侯衛伉屯其旁,使彊弩都尉路博德筑居延澤上。
呴犁湖 선우가 즉위하자, 漢이 光祿勳 徐自爲를 보내어 五原塞에서 수백 리, 멀게는 천여 리까지 진출하여 성과 보루를 쌓고, 초소를 廬胊山까지 연결하였으며, 遊擊將軍 韓說과 長平侯 衛伉을 보내 그 지방에 주둔시키고, 彊弩都尉 路博德를 시켜 居延澤에 성루를 쌓았다.
其秋,匈奴大入定襄、雲中,殺略數千人,敗數二千石而去,行破壞光祿所筑城列亭鄣。
그해 가을, 匈奴가 정양군, 운중군에 대거 침입하여 수천 명을 죽이거나 약탈하고 봉록 2천석의 고관 몇 사람을 물리치고 떠났으며, 행군 도중에 광록훈이 쌓은 성, 보루, 초소를 파괴하였다.
又使右賢王入酒泉、張掖,略數千人。
또 우현왕을 시켜 주천군, 張掖郡에 침입하여 수천 명을 약탈하였다.
會任文擊救,盡復失所得而去。
마침 漢의 任文이 공격하여 구원하매, 匈奴가 얻었던 것을 모두 잃고 떠났다.
是歲,貳師將軍破大宛,斬其王而還。
이 해에 貳師將軍 李廣利가 大宛을 쳐부수고 그 왕을 죽이고 돌아가려 하였다.
匈奴欲遮之,不能至。
흉노가 그의 귀로를 차단하려 하매 도달할 수가 없었다.
其冬,欲攻受降城,會單于病死。
그해 겨울, 匈奴가 수항성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그때 구리호선우가 病死하였다.
呴犁湖單于立一歲死。
구리호 單于는 즉위한 지 1년 만에 죽었다.
匈奴乃立其弟左大都尉且鞮侯為單于。
匈奴가 이에 그의 아우인 左大都尉 且鞮侯를 선우로 세웠다.
漢既誅大宛,威震外國。
漢이 대완국 왕을 죽이자 漢의 위세는 주변 나라를 떨게했다.
天子意欲遂困胡,乃下詔曰:
「高皇帝遺朕平城之憂,高后時單于書絕悖逆。
昔齊襄公復九世之讎,春秋大之。」
황제가 이 기회에 흉노를 궁지로 몰고자 조서를 내렸다.
“高皇帝께서는 짐에게 平城의 원한을 남기셨으며, 高后 때 선우의 편지는 너무나 悖逆하였다.
옛날 齊襄公은 9世의 원수를 갚았는데, <春秋>에서 그것을 찬양하였다.”
是歲太初四年也。
이 해가 太初 4년(기원전 101년)이었다.
▶ 呴犁湖 : 흉노의 제8대 선우. <史記>에는 ‘呴犁湖’로 되어 있으나 <漢書>에는 ‘呴㴝湖’로 되어 있다.
▶ 光祿徐自為 : 光祿勳 서자위. 이 당시 郞中令의 이름을 고쳐 光祿勳이라 하였다.
▶ 五原塞 : 五原郡 楡林塞.
▶ 鄣 : 堡壘.
▶ 亭 : 초소.
▶ 廬朐 : 여구산. 흉노에 있는 산 이름.
▶ 且鞮侯 : 구리호 선우의 아우인 저제후 선우로 시작되는 40년간은 남서 지방의 비옥한 영토와 톈산과 중가리아, 투르판, 야르칸드, 庫車 등 서역 지대를 잃었다. 이것은 국가 수입을 감소시켜 흉노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 平城之憂 : 漢高祖가 직접 군대를 인솔하고 흉노의 묵돌선우를 공격했다가 平城 인근의 白登山에서 흉노의 40만 대군에게 7일 동안이나 포위를 당하는 곤경에 빠졌던 일을 말한다. 이때 陳平이 계책을 내어 單于의 부인에게 후한 뇌물을 써서 겨우 포위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사기 권93. 韓信盧綰列傳> <사기 권95. 樊酈滕灌列傳>
▶ 高后時單于書絕悖逆 : 高后는 呂太后를 말하며, <漢書 匈奴傳〉에 흉노가 高后에게 보낸 편지에 이르기를 “폐하께서 혼자 사시고 나 또한 혼자 살아서 두 임금이 樂이 없어 스스로 즐길 것이 없으니, 원컨대 있는 것을 가지고 없는 것과 바꿉시다.”라고 하였으므로 매우 불경하였다고 한 것이다. 絕은 지극히. 매우. 悖逆은 불경하다.
▶ 九世之讎 : 9代에 가서도 잊지 못할 원수. 대를 두고 잊지 못할 원수.
齊襄公은 춘추시대 齊의 14대 후작으로 이름은 諸兒이다. 魏, 魯, 鄭를 공벌하고 8대 전 紀나라가 齊哀公을 周釐王에게 참소하여 팽살시킨 원한으로 기나라와 원수지간이 되었는데 제양공이 기나라를 멸하여 원수를 갚았음을 말한 것이다.
▶ 春秋 : 春秋公羊傳을 말한다.
▶ 大之 : 크게 찬미하다.
▶ 太初四年 : 기원전 104년. 태초는 漢武帝의 일곱 번째 연호이다.
且鞮侯單于既立,盡歸漢使之不降者。
且鞮侯 선우가 즉위하자, 억류되었던 漢 사신으로 귀순하지 않는 사람들을 모두 귀국시켰다.
路充國等得歸。
노충국 등도 귀국할 수 있었다.
單于初立,恐漢襲之,乃自謂
「我兒子,安敢望漢天子!
漢天子,我丈人行也」。
저제후가 막 선우에 즉위함에 漢이 습격할까 두려워하며 스스로 말하였다.
“나는 어린아이이니 어찌 감히 漢 천자를 넘겨다 보겠는가!
漢 천자는 나의 어르신 항렬이다.”
漢遣中郎將蘇武厚幣賂遺單于。
漢이 中郎將 蘇武를 보내 후한 폐물을 선우에게 주었다.
單于益驕,禮甚倨,非漢所望也。
單于가 더욱 교만해져서 예절이 매우 倨慢하니 漢이 기대하던 바가 아니었다.
其明年,浞野侯破奴得亡歸漢。
이듬해, 浞野侯 趙破奴가 漢으로 도망쳐 돌아왔다.
其明年,漢使貳師將軍廣利以三萬騎出酒泉,擊右賢王於天山,得胡首虜萬餘級而還。
이듬해(기원전 99년), 漢이 貳師將軍 이광리에게 명령하여 3만 기를 거느리고 주천군을 나가서 우현왕을 天山에서 공격하니, 이사장군은 흉노의 首虜 1만여 급을 얻었고 돌아오려 하였다.
匈奴大圍貳師將軍,幾不脫。
흉노가 이사장군을 대거 포위하여 거의 벗어날 수 없었다.
漢兵物故什六七。
漢軍의 사망자가 열에 예닐곱이었다.
漢復使因杅將軍敖出西河,與彊弩都尉會涿涂山,毋所得。
漢이 다시 因杅將軍 공손오를 시켜 西河郡에서 나가서 彊弩都尉 노박덕과 涿涂山에서 합류하게 하였으나 소득이 없었다.
又使騎都尉李陵將步騎五千人,出居延北千餘里,與單于會,合戰,陵所殺傷萬餘人,兵及食盡,欲解歸,匈奴圍陵,陵降匈奴,其兵遂沒,得還者四百人。
또 騎都尉 李陵을 시켜 보병과 기병 5천 명을 거느리고 거연에서 나가게 하니, 북쪽으로 1천여 리까지 진군하고, 선우와 마주쳐 교전하였다.
이릉이 살상한 것이 만여 명이었으나, 무기와 식량이 떨어져서 전투를 멈추고 퇴각하려 함에, 흉노가 이릉을 포위하자 이릉은 흉노에 투항하였으며, 그의 군사는 전멸하여 漢으로 돌아온 자가 4백명이었다.
單于乃貴陵,以其女妻之。
單于가 이릉을 존중하여 그의 딸을 이릉의 아내로 삼았다.
後二歲,復使貳師將軍將六萬騎,步兵十萬,出朔方。
2년 후에, 漢이 다시 貳師將軍 李廣利에게 6만 騎와 보병 10만을 거느리고 朔方郡에서 출격하게 하였다.
彊弩都尉路博德將萬餘人,與貳師會。
강노都尉 路博德이 만여 명을 거느리고 이사장군과 합류하였다.
游擊將軍說將步騎三萬人,出五原。
유격장군 韓說은 보병과 기병 3만 명을 거느리고 五原에서 출격하였다.
因杅將軍敖將萬騎步兵三萬人,出鴈門。
인우장군 公孫敖는 기병 만 명과 보병 3만 명을 거느리고 안문에서 출격하였다.
匈奴聞,悉遠其累重於余吾水北,而單于以十萬騎待水南,與貳師將軍接戰。
匈奴가 그 소식을 듣고 가족과 재산을 멀리 余吾水 북쪽에 모두 숨겨두고, 선우가 10만 騎를 거느리고 여오수 남쪽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이사 장군과 접전하였다.
貳師乃解而引歸,與單于連戰十餘日。
이사장군은 전투를 그치고 군사를 거두어 돌아가려다가, 선우와 계속하여 전투하기 10여 일이었다.
貳師聞其家以巫蠱族滅,因并眾降匈奴,得來還千人一兩人耳。
이사장군은 그의 가족들이 巫蠱의 난으로 멸족되었음을 알았으므로, 군사들과 함께 흉노에 투항하니, 이때 漢으로 살아 돌아온 자는 1천 명에 한둘일 뿐이었다.
游擊說無所得。
유격장군 한열은 소득이 없었다.
▶ 丈人 : 연장자의 존칭.
▶ 行 : 항렬.
▶ 倨 : 오만하다.
▶ 蘇武 : 漢 杜陵사람으로 字가 子卿이다. 漢武帝 天漢 원년(기원전 100년) 中郞將으로서 匈奴에 사신 갔다가 억류당하여 漢으로 돌아오지 못하였다. 흉노 선우가 항복하라고 협박하였으나 굴복하지 않아 북해로 추방당하였고, 그곳에서 양을 치며 괴로운 삶을 살았지만 19년이나 절개를 굽히지 않았다. 昭帝 때 흉노가 漢과 화친하고서야 비로소 풀려나 고국으로 돌아왔고, 당시 소수민족의 일을 관장하던 典屬國에 임명되었다.
▶ 明年 : 漢武帝 天漢 2년(기원전 99년)
▶ 什六七 : 십 분의 6, 7.
▶ 李陵 : 이광의 손자. 李當戶의 아들. 젊은 시절부터 이사장군 李廣利와 함께 흉노와의 전쟁에 참가하여 여러 차례 공을 세웠다. 이광리의 별동대를 지휘하여 흉노의 배후를 기습하였으나, 오히려 흉노에게 포위당하였다. 이릉은 부하들을 살리기 위하여 흉노에 항복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무제는 크게 노하여 이릉의 족속을 멸하였다. 이릉은 이 소식을 듣고 흉노에 완전히 투항하여 선우의 사위가 되어 흉노의 右校王이 되었다. 이릉은 司馬遷의 친구였는데, 이릉이 항복할 당시 사마천은 무제에게 이릉을 변호하다가 궁형에 처해졌다.<漢書 李陵傳〉<史記 권109. 李將軍列傳>
▶ 兵 : 무기.
▶ 解歸 : 전투를 멈추고 돌아가다.
▶ 貴陵 : 李陵을 존중하다.
▶ 游擊將軍說 : 유격장군 韓說을 말한다.
▶ 步騎 : 보병과 기병.
▶ 累重 : 가족, 처자식 등의 무거운 짐.
▶ 余吾水 : 삭방군 북쪽에 있는 강이름.
▶ 巫蠱 : 迷信으로 나무인형을 땅에 묻어 巫術을 사용하여 사람을 죽게 하는 주술이다. 당시 武帝를 저주한다는 유언비어가 있자 武帝가 江充에게 이를 다스리게 하였다. 江充이 武帝의 총애를 믿고 평소 사이가 좋지 않던 戾太子를 압박하고자 저주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나무로 만든 인형이 태자궁에서 많이 나왔다고 誣告하였다. 이에 戾太子는 황제가 도성에 있지 않은 틈을 타 궁중 수비병을 동원하여 江充을 살해하였다. 이를 태자의 반란이라고 여긴 무제가 군대를 보내 체포하려 하자 戾太子는 虢州로 도망갔으나 죄를 면할 수 없음을 알고 자결하였는데, 이 사건으로 그의 처자식과 수많은 사람이 처형되었다.
因杅敖與左賢王戰,不利,引歸。
인우장군 公孫敖이 좌현왕과 전투하였으나 형세가 불리하매 군사를 이끌고 귀환하였다.
是歲漢兵之出擊匈奴者不得言功多少,功不得御。
이 해에 漢軍으로 흉노를 공격한 사람 중에 공의 다소를 논지 못함은, 공로가 손실을 상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有詔捕太醫令隨但,言貳師將軍家室族滅,使廣利得降匈奴。
황제가 조칙을 내려 太醫令 隨但을 체포하였는데, 이사장군의 가족이 멸족당한 사실을 누설하여 이광리로 하여금 흉노에 투항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 御 : 맞먹다. 상쇄하다.
탐고루주가 말한다.
한무제처럼 현명함을 자부하는 사람이 巫蠱의 난과 戾太子의 사건을 헤아리지 못함으로써, 무고한 사람을 대량 살상하고도 자신의 잘못을 뉘우침은 실로 적었고, 일이 그 지경에 이르도록 한 자신에게는 관대하면서도 누설한 자에게 죄를 씌워 太醫令 隨但을 체포하였다니, 아! 통재라!
2023.9.21
太史公曰:
孔氏著春秋,隱桓之閒則章,至定哀之際則微,為其切當世之文而罔褒,忌諱之辭也。
태사공은 말한다.
"孔子가 춘추를 저술함에, 魯隱公과 魯桓公 시기의 일은 뚜렷하게 기록하고, 魯定公과 魯哀公의 시기에 이르러서는 애매하게 기록하였으니, 시기상 가까운 당세의 정치에 대하여 칭찬할 바가 없으매, 忌諱하는 문사이다.
世俗之言匈奴者,患其徼一時之權,而務莖讇納其說,以便偏指,不參彼己;
將率席中國廣大,氣奮,人主因以決策,是以建功不深。
세속의 흉노를 언급하는 사람이 한때의 실리를 얻으려 걱정하고, 자기의 주장이 채택되도록 아첨에 힘쓰고, 편향된 주장을 유리하다고 여겼으매, 彼我를 참고하지 않았고,
장수들은 대륙의 광대함을 믿어 기상만 떨치고, 황제도 그렇게 계책을 결정했기 때문에 공을 세움이 크지 않았다.
堯雖賢,興事業不成,得禹而九州寧。
堯임금이 성현이었는데도 대업을 일으킴이 이루어지지 않다가, 禹를 얻고 나서 천하가 편안하였다.
且欲興聖統,唯在擇任將相哉!
그러니 성왕의 전통을 일으키려면, 그것은 오로지 將相을 임용함에 달렸다!
唯在擇任將相哉!
오로지 將相을 임용함에 달렸다!”
▶ 隱桓 : 魯隱公과 魯桓公.
▶ 章 : 彰과 통한다. 현저하다. 뚜렷하다.
▶ 定哀 : 魯定公과 魯哀公.
▶ 微 : 명확하지 않다.
▶ 切近 : 가깝다.
▶ 文 : 여기서는 정치를 말한다.
▶ 罔褒 : 칭찬할 것이 없다. 罔은 無, 褒는 표창하다.
▶ 忌諱 : 기피하다. 금하다.
▶ 權 : 실리.
▶ 讇 : 아첨.
▶ 說 : 변설. 주장.
▶ 偏指 : 偏旨와 같다. 단편적 주장.
▶ 參 : 考察하다. 살피다.
▶ 彼己 : 흉노와 漢 조정.
▶ 將率 : 將帥. 率(우두머리 수)는 帥와 통한다.
▶ 席 : 믿고 의지하다.
▶ 氣奮 : 기세가 드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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