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廣은 隴西 成紀 사람으로 漢文帝 때 良家의 자제로 종군하여 흉노를 격퇴하여 郞이 되었고, 武騎常侍가 되었다.
景帝 때 驍騎徒尉에 올랐다. 나중에 隴西와 北地, 雁門 등 郡의 太守를 역임하였다. 武帝 때 입조하여 未央衛尉가 되고, 右北平太守를 지냈다.
활을 잘 쏘았으며 병졸을 아끼고 잘 이끌어 모두 날래고 용맹해 전투하기를 좋아하였다.
흉노가 두려워하여 몇 년 동안 감히 국경을 침범하지 못하고 전장을 날아다니는 장수라 하여 飛將軍이라 칭송하였다.
40여 년 동안 군대를 이끌고 흉노와 대치하면서 70여 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를 치렀다. 병사들의 마음을 깊이 얻었지만 끝내 封侯되지는 못하였다.
元狩 4년(기원전 119년) 대장군 衛靑을 따라 흉노를 공격하다 길을 잃어 문책당하자 자살하였다.
李將軍廣者,隴西成紀人也。
李將軍 廣은 隴西郡 成紀縣 사람이다.
其先曰李信,秦時為將,逐得燕太子丹者也。
그의 선조는 李信으로 秦나라 때의 장군로서 燕太子 丹을 추격하여 사로잡았다.
故槐裏,徙成紀。
그의 고향은 원래 槐里縣이었고 성기현으로 이주하였다.
廣家世世受射。
李廣의 가문은 대대로 궁술을 익혔다.
孝文帝十四年,匈奴大入蕭關,而廣以良家子從軍擊胡.
漢文帝 14년(기원전 166년)에 匈奴族이 대거 蕭關으로 침입할 때, 이광은 良家의 子弟로 從軍하여 흉노를 공격하였다.
用善騎射,殺首虜多,為漢中郎。
기마술과 궁술에 능하여 적을 首虜가 많아 漢의 中郎이 되었다.
廣從弟李蔡亦為郎,皆為武騎常侍,秩八百石。
이광의 從弟인 李蔡 역시 중랑이 되었고, 모두 武騎常侍가 되어 8백 석의 봉록을 받았다.
▶ 李信 : 전국시대 말기와 진나라 초기에 활약한 장수.
▶ 燕 太子丹 : 연나라의 마지막 태자이다. 燕王 喜의 아들이다. 성은 姬, 휘는 丹이다.
▶ 首虜 : 首级和俘虏(수급과 포로 俘:사로잡다. 포로. 벌)
▶ 從弟 : 사촌동생.
▶ 郎 : 궁정의 호위나 시종을 맡는 벼슬.
▶ 武騎常侍 : 황제를 호위하는 기병.
▶ 秩 : 관리의 녹봉.
嘗從行,有所衝陷折關及格猛獸,而文帝曰:
「惜乎,子不遇時!
如令子當高帝時,萬戶侯豈足道哉!」
이광이 文帝를 수행한 적이 있었는데, 衝陷折關하며 맹수를 擊殺하니 문제가 말하였다.
“애석하구나, 그대는 때를 잘못 만났구나!
만약 그대가 高帝 때에 해당한다면 족히 萬戶侯라고 부를 것인데!”
及孝景初立,廣為隴西都尉,徙為騎郎將。
景帝가 즉위한 초기에 이광은 隴西都尉가 되었고, 騎郎將으로 전임되었다.
吳楚軍時,廣為驍騎都尉,從太尉亞夫擊吳楚軍,取旗,顯功名昌邑下。
吳楚7國의 亂에 이광은 驍騎都尉가 되어 太尉 周亞夫를 따라 吳楚의 군대를 격파하였으며, 적군의 軍旗를 빼앗아서 昌邑城에서 功名을 떨쳤다.
以梁王授廣將軍印,還,賞不行。
梁王이 그에게 將軍印을 주었기 때문에, 경성으로 돌아와서 포상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 衝陷 : 發起衝鋒, 攻破敵陣(돌격하여 적진을 함락시키다.)
▶ 折關 : 破關(관문을 깨뜨리다.)
▶ 萬戶侯 : 萬戶를 봉읍으로 하는 諸侯.
▶ 徙 : 전임시키다.
▶ 吳楚軍時 : 景帝 3년에 일어난 오초칠국의 난.<사기 吳王濞列傳>
▶ 亞夫 : 周亞夫. 吳楚七國의 난 때 군사를 이끌고 3개월 만에 반군을 평정하였다.
▶ 梁王授廣將軍印 : 오초칠국의 난 때 梁에서 공을 세운 이광에게 梁王 劉武가 장군의 인수를 주었다. 이광을 장군으로 임명한 양왕의 행동은 제후왕의 월권 행위여서 한나라 조정에서 월권을 용납할 수 없었으므로 양왕에게 장군으로 임명된 이광은 그 공적을 인정받지 못하였다.
徙為上谷太守,匈奴日以合戰。
上谷郡太守로 전임되어 흉노와 날마다 교전하였다.
典屬國公孫昆邪為上泣曰:
「李廣才氣,天下無雙,自負其能,數與虜敵戰,恐亡之。」
典屬國인 公孫昆邪가 황제에게 울면서 아뢰었다.
“이광의 재능은 天下無雙이나, 자신의 능력을 과신한 나머지 자주 적과 전투를 벌이고 있으니, 그를 잃을까 염려됩니다.”
於是乃徙為上郡太守。
이리하여 上郡太守로 전임시켰다.
後廣轉為邊郡太守,徙上郡。
그 후 이광은 변경 여러 군의 태수를 지내다가 다시 상군태수로 전임되었다.
嘗為隴西、北地、鴈門、代郡、雲中太守,皆以力戰為名。
隴西, 北地, 雁門, 代郡, 雲中의 태수를 지낸 적이 있는데, 가는 곳마다 힘써 싸워서 명성을 떨쳤다.
匈奴大入上郡,天子使中貴人從廣勒習兵擊匈奴。
흉노가 대거 上郡을 침입하자, 황제는 총애하는 환관을 보내어 이광을 수행하면서 병사들을 훈련시켜 흉노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中貴人將騎數十縱,見匈奴三人,與戰。
환관이 수십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달리다가 흉노병 3人을 만나 교전을 벌이게 되었다.
三人還射,傷中貴人,殺其騎且盡。
그 세 사람이 몸을 돌려 활을 쏘아 환관에게 상처를 입히고, 기병을 거의 몰살시켰다.
中貴人走廣。
환관이 이광에게 달려갔다.
廣曰:
「是必射雕者也。」
이광이 말하였다.
“저들은 필경 명사수일 터이다.”
廣乃遂從百騎往馳三人。
이광이 이에 1백 騎를 거느리고 말을 달려 세 사람을 추격하였다.
三人亡馬步行,行數十里。
세 사람은 말이 없어서 걸어서 갔으므로 수십 리밖에 가지 못하였다.
廣令其騎張左右翼,而廣身自射彼三人者,殺其二人,生得一人,果匈奴射雕者也。
이광은 자신의 기병에게 左右翼으로 펼치게 하고, 자신이 그 세 사람을 쏘았으며, 두 사람을 사살하고 한 사람을 생포했는데, 과연 그들은 흉노의 명사수들이었다.
已縛之上馬,望匈奴有數千騎,見廣,以為誘騎,皆驚,上山陳。
포로를 결박하고 말에 올라 앞을 살펴보니, 흉노에 수천의 기병이 있었는데 이광 일행을 보고 자신들을 유인하려는 기병으로 여기고, 모두 놀라서 산으로 올라가 진을 쳤다.
廣之百騎皆大恐,欲馳還走。
이광의 백여 기병도 모두 크게 두려워하여 말을 되돌려서 달아나려 하였다.
廣曰:
「吾去大軍數十里,今如此以百騎走,匈奴追射我立盡。
今我留,匈奴必以我為大軍之誘,必不敢擊我。」
이광이 말하였다.
“우리는 대군에서 수십 리나 떨어져 있으니, 지금 백여 騎가 이렇게 달아나면, 흉노는 추격하여 모두 사살할 터이다.
지금 우리가 이곳에 머물러 있으면, 흉노는 우리를 대군의 誘引兵으로 여기고 절대로 감히 우리를 공격하지 못할 터이다.”
廣令諸騎曰:
「前!」
이광은 기병들에게 명령하였다.
“전진하라.”
前未到匈奴陳二里所,止,令曰:
「皆下馬解鞍!」
전진하여 흉노의 진영에 2리쯤 못미친 곳에서 멈추고 명령을 내렸다.
“모두 下馬하여 안장을 풀어 놓아라!”
其騎曰:
「虜多且近,即有急,柰何?」
기병들이 말하였다.
“적들은 수가 많고 또 근접해 있는데, 만약 급한 상황이 생기면 어떻게 합니까?”
廣曰:
「彼虜以我為走,今皆解鞍以示不走,用堅其意。」
이광이 대답하였다.
“저 오랑캐는 우리가 달아날 것이라 여길 터이니, 지금 모두가 안장을 풀고 달아나지 않음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의 뜻을 굳히게 하겠다.”
於是胡騎遂不敢擊。
이에 흉노 기병은 마침내 감히 공격하지 못하였다.
有白馬將出護其兵,李廣上馬與十餘騎奔射殺胡白馬將,而復還至其騎中,解鞍,令士皆縱馬臥。
백마를 탄 장군이 나와서 병사들을 호위하고 있으므로, 이광이 말에 올라 십여 기병과 함께 달려가서 白馬將을 사살한 후에, 다시 자신의 기병들에게 돌아와 안장을 풀고 병사들에게 모두 말고삐를 놓고 누워서 쉬도록 하였다.
是時會暮,胡兵終怪之,不敢擊。
이때가 해 질 무렵이어서 흉노 병사들은 끝내 괴이하게 여기고, 감히 출격하지 못하였다.
夜半時,胡兵亦以為漢有伏軍於旁欲夜取之,胡皆引兵而去。
한밤중이 되자, 胡兵은 한나라가 주변에 복병을 두었다가 밤에 자신들을 습격하리라 여기고, 군사들을 모조리 이끌고 가버렸다.
平旦,李廣乃歸其大軍。
날이 밝자 이광은 대군이 주둔하는 곳으로 돌아왔다.
大軍不知廣所之,故弗從。
大軍은 이광의 간 곳을 몰랐으매, 뒤따라가서 돕지 못하였다.
▶ 典屬國 : 漢武帝 때 설치한 벼슬로 귀순해 온 오랑캐들을 관장하였다.
▶ 公孫昆邪 : 오초칠국의 난이 일어났을 때 농서수 공손곤야는 장군이 되어 진압에 나섰고, 진압 후 공적을 인정받아 平曲侯에 봉해졌다. 이후 관직이 전속국에 이르렀다.
▶ 中貴人 : 궁중에서 총애를 받는 사람으로 宦官을 말한다.
▶ 勒 : 다스리다.
▶ 射鵰者 : 射鵰手. 명궁. 鵰는 독수리.
▶ 亡 : 無. 없다.
▶ 誘騎 : 적의 기병을 유인하다.
▶ 陳 : 陣과 같다.
▶ 護 : 감독 보호하다. 호위하다.
▶ 縱馬 : 말고삐를 놓다.
▶ 平旦 : 동틀 녘. 날 샐 무렵.
居久之,孝景崩,武帝立,左右以為廣名將也,於是廣以上郡太守為未央衛尉,而程不識亦為長樂衛尉。
오랜 후에 景帝가 붕어하고 武帝가 즉위했으며, 측근은 이광을 명장이라 여겨, 이광을 상군태수에서 未央宮의 衛尉로 삼았고, 程不識 또한 長樂宮의 위위로 임명하였다.
程不識故與李廣俱以邊太守將軍屯。
정불식은 예전에 이광과 더불어 변경의 태수와 장군으로 주둔하였다.
及出擊胡,而廣行無部伍行陳,就善水草屯,舍止,人人自便.
흉노로 출격할 때, 이광의 부대는 엄격한 대열과 진형을 제대로 갖추지 않고, 좋은 물과 풀이 있는 지대에서 주둔하여 머물면서 병사마다 편리하도록 하였다.
不擊刀鬬以自衛,莫府省約文書籍事,然亦遠斥候,未嘗遇害。
밤에 刁斗를 쳐서 自隊를 방비하지도 않았고, 幕府에서는 문서나 장부의 관리를 간소화했으나, 척후병을 멀리 배치했기 때문에 피해를 입은 적이 없었다.
程不識正部曲行伍營陳,擊刀鬬,士吏治軍簿至明,軍不得休息,然亦未嘗遇害。
정불식은 부대의 편제와 진영의 운영을 바르게 하고, 조두를 쳐서 경계하고, 군관은 날이 밝을 때까지 장부를 정리하였기 때문에 군사들은 휴식을 취할 수 없었으나, 역시 피해를 입은 적이 없었다.
不識曰:
「李廣軍極簡易,然虜卒犯之,無以禁也;
而其士卒亦佚樂,咸樂為之死。
我軍雖煩擾,然虜亦不得犯我。」
정불식이 말하였다.
“이광의 군대는 지극히 簡易하므로, 적이 갑자기 침범해오면 抵當할 수 없다.
그러나 그의 사졸들은 편하고 즐겁게 지내니, 모두 기꺼이 이광을 위해 죽으려 한다.
우리 군대는 비록 번거롭고 성가시지만, 적이 역시 감히 아군을 침범할 수 없다.”
▶ 未央 : 未央宮. 궁전 이름으로 황제의 거처였다.
▶ 程不識 : 漢의 장수. 처음에 長樂衛尉를 지냈는데 나중에는 李廣과 더불어 邊郡의 태수가 되었다가 흉노를 쳐서 일시에 명장이 되었다.<漢書 李廣傳>
▶ 長樂 : 長樂宮. 궁전명으로 당시 太后의 거처였다.
▶ 部伍 : 군대의 편제를 말한다.
▶ 擊刀鬬(격도투) : 刁斗를 두드리다. 刁斗(조두)는 옛날 군대에서 쓰는 취사도구인데, 밤에는 진중에 순라를 돌며 두들겨 시간을 알렸다.
▶ 莫府: 幕府。莫,通"幕"。막부는 야외에 설치한 장군의 執務處이다.
▶ 省約 : 간소화하다.
▶ 籍 : 공과를 기록하는 장부.
▶ 斥侯 : 척후병. 적의 동정을 살피는 일을 맡아보는 군사.
▶ 部曲 : 고대 군대의 편성 단위. 한나라 때에는 대장의 군영이 5部로 되어 있었는데, 部 아래에 曲이 있고, 곡 아래에 屯이 있었다. 부곡은 또 군대 혹은 사병의 대명사로도 쓰였다.
▶ 行伍 : 고대 군대의 기본 편제. 5명을 伍라하고 25명을 行이라 하였다.
▶ 營陳 : 군대의 주둔지와 진의 형세.
是時漢邊郡李廣、程不識皆為名將,然匈奴畏李廣之略,士卒亦多樂從李廣而苦程不識。
이때 한나라 邊郡의 이광과 정불식은 모두 명장이었으나, 흉노는 이광의 책략을 두려워했으며, 사졸들도 대부분 이광을 따르기를 좋아했고 정불식을 따르기를 고통스러워하였다.
程不識孝景時以數直諫為太中大夫。
정불식은 景帝 때에 자주 直諫하여 太中大夫가 되었다.
為人廉,謹於文法。
그는 사람됨이 청렴하고 조정의 조문과 법령을 엄격하게 집행하였다.
後漢以馬邑城誘單于,使大軍伏馬邑旁谷,而廣為驍騎將軍,領屬護軍將軍。
그 후 한나라는 馬邑城으로 單于를 유인하고, 大軍을 마읍성 부근의 골짜기에 매복시켜 놓았으며, 이광은 驍騎將軍으로 護軍將軍 韓安國에게 예속되어 있었다.
是時單于覺之,去,漢軍皆無功。
당시에 선우가 이 계략을 알아차리고 철수하자 漢軍에게는 모두 戰功이 없었다.
▶ 數 : 여러 차례.
▶ 文法 : 조정이 제정한 條文과 法令.
▶ 領屬 : 예속되다.
▶ 大軍伏馬邑旁谷 : 당시 漢나라에서는 기병과 보병 등 30여 만을 마읍성 부근의 산골짜기에 매복시켜두었다.(當是時,漢伏兵車騎材官三十餘萬,匿馬邑旁谷中.) <사기 권108.한장유열전(韓長孺列傳)>
▶ 護軍將軍 : 韓安國을 말한다.
其後四歲,廣以衛尉為將軍,出鴈門擊匈奴。
4년이 지나 이광이 衛尉에서 장군이 되어 雁門에서 출병하여 흉노를 공격하였다.
匈奴兵多,破敗廣軍,生得廣。
흉노는 병사가 많아서 이광의 군대를 격파하고 이광을 생포하였다.
單于素聞廣賢,令曰:
「得李廣必生致之。」
선우는 평소 이광이 현명하다고 들었으매 부하들에게 명령하였다.
“이광을 잡되 반드시 생포해서 데리고 와라!”
胡騎得廣,廣時傷病,置廣兩馬閒,絡而盛臥廣。
흉노 기병이 이광을 생포함에 이광은 이때 부상하였고, 두 필의 말 사이에 그물을 연결하여 이광을 눕혀서 싣고 갔다.
行十餘里,廣詳死,睨其旁有一胡兒騎善馬.
10여 리를 갔을 때, 이광이 죽은 척하면서 곁눈질해보니, 그의 곁에 한 흉노 소년이 좋은 말을 타고 있었다.
廣暫騰而上胡兒馬,因推墮兒,取其弓,鞭馬南馳數十里,復得其餘軍,因引而入塞。
이광이 갑자기 흉노 소년의 말에 뛰어올라 소년을 말에서 밀어 떨어뜨리고, 활을 빼앗고 말을 채찍질하여 남쪽으로 수십 리를 내달리다가, 다시 잔여부대를 만나서 그들을 이끌고 요새로 들어왔다.
匈奴捕者騎數百追之,廣行取胡兒弓,射殺追騎,以故得脫。
흉노의 逮捕兵 수백 騎가 추격하였으나, 이광은 가던 중에 탈취한 흉노 소년의 활로 追兵을 사살하매 탈출할 수 있었다.
於是至漢,漢下廣吏。
이렇게 한나라로 돌아오니, 漢 朝廷은 이광을 옥리에게 넘겼다.
吏當廣所失亡多,為虜所生得,當斬,贖為庶人。
법관이 이광은 부하를 많이 잃고 또 적에게 생포되었으니 참수형을 판결하였으나 속죄금을 내고 庶人으로 강등되었다.
▶ 絡(낙) : 그물.
▶ 盛 : 담다. 싣다.
▶ 詳(양) : 속이다.
▶ 睨(예) : 곁눈질하다.
▶ 暫 : 갑자기.
▶ 吏 : 법을 집행하는 관리. 법관.
▶ 失亡 : 亡失. 喪失
▶ 當 : 판결하다.
▶ 贖 : 고대에 형벌을 면하기 위하여 돈을 바치는 제도를 말한다.
頃之,家居數歲。
얼마 후, 이광이 집에 있은 지 몇 년이 지났다.
廣家與故潁陰侯孫屏野居藍田南山中射獵。
이광은 예전 穎陰侯 관영의 손자와 더불어 시골에 은거하면서 藍田縣의 南山에서 사냥하며 지냈다.
嘗夜從一騎出,從人田間飲。
한번은 밤에 1騎만 거느리고 나갔다가 지인들과 들에서 술을 마셨다.
還至霸陵亭,霸陵尉醉,呵止廣。
돌아오다가 霸陵亭에 이르렀는데, 패릉의 亭尉가 술에 취해 호통을 치며 이광의 통행을 저지하였다.
廣騎曰:
「故李將軍。」
이광의 시종이 말하였다.
“예전의 이광장군이십니다.”
尉曰:
「今將軍尚不得夜行,何乃故也!」
정위가 말하였다.
“현직 장군도 야간 통행을 할 수 없거늘, 하물며 전직 장군이라니!”
止廣宿亭下。
이광의 통행을 제지하고, 패릉정 아래에서 밤을 새게 하였다.
居無何,匈奴入殺遼西太守,敗韓將軍,後韓將軍徙右北平。
얼마 지나지 않아 흉노가 침입하여 遼西太守를 죽이고 한안국 장군의 군대를 격파하니, 그 후 한장군은 右北平郡의 태수로 전출되었다.
於是天子乃召拜廣為右北平太守。
(한장군이 그곳에서 病死하자) 이에 무제가 이광을 불러 우북평군 태수로 임명하였다.
廣即請霸陵尉與俱,至軍而斬之。
이광은 황제에게 패릉의 정위도 함께 가기를 청하고, 군영에 이르자 참수하였다.
廣居右北平,匈奴聞之,號曰「漢之飛將軍」,避之數歲,不敢入右北平。
이광이 右北平에 주둔하자 흉노가 듣고, 그를 ‘한나라의 飛將軍’라고 일컫고, 그를 회피하여 수년 동안 감히 우북평을 침범하지 못하였다.
廣出獵,見草中石,以為虎而射之,中石沒鏃,視之石也。
이광이 사냥을 나갔다가 잡초 속의 바위를 보고 호랑이로 여겨서 활을 쏘았는데, 바위에 맞아 화살촉이 깊숙이 박혔으나 가서 보니 바위였다.
因復更射之,終不能復入石矣。
그리하여 다시 바위에 쏘아보았는데, 아무리 해도 화살촉은 다시 바위에 박히지 않았다.
廣所居郡聞有虎,嘗自射之。
이광은 부임한 군에 호랑이가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언제나 친히 활로 쏘아 죽였다.
及居右北平射虎,虎騰傷廣,廣亦竟射殺之。
우북평에서도 호랑이를 활로 쏘았는데, 호랑이가 달려들어 상처를 입혔으나, 이광은 결국 그 호랑이를 쏘아 죽였다.
廣廉,得賞賜輒分其麾下,飲食與士共之。
이광은 청렴하여 상을 받으면 그때마다 부하들에게 나누어주었고, 음식은 사병들과 함께 먹었다.
▶ 潁陰侯孫 : 潁陰侯 灌嬰의 손자 灌強.
▶ 屏野 : 물러나 전원에 은거하다. 屏은 隱居.
▶ 射獵 : 사냥.
▶ 呵(아) : 큰 소리로 꾸짖다.
▶ 居無何 : 얼마 지나지 않아.
▶ 韓將軍 : 韓安國. 元朔 원년(기원전 128년) 흉노가 대거 침입하자 材官將軍으로 漁陽에 주둔했지만 패하자 右北平으로 옮겨 주둔했는데, 몇 개월 뒤 울화병으로 피를 토하고 죽었다. <사기 권108. 한장유열전(韓長孺列傳)>
▶ 鏃(촉) : 화살촉.
▶ 輒(첩) : 항상. 곧. ~할 때마다
▶ 麾下 : 부하.
終廣之身,為二千石四十餘年,家無餘財,終不言家產事。
이광이 종신토록 2천 석의 관리임이 40여 년이었지만, 집에 남은 재물이 없었고, 시종일관 家産에 관한 일은 말하지 않았다.
廣為人長,猨臂,其善射亦天性也,雖其子孫他人學者,莫能及廣。
이광은 장대하고 팔이 원숭이처럼 길어서 善射도 천부적이었으니, 비록 그의 자손이나 다른 자들이 궁술을 배워도 이광에 미칠 수 없었다.
廣訥口少言,與人居則畫地為軍陳,射闊狹以飲。
이광은 말주변이 없어 말수가 적었고. 남과 함께 있을 때는 땅 위에 軍陣을 그려놓고, 활을 멀리 쏘기를 하여 벌주를 마시게 하였다.
專以射為戲,竟死。
그는 오로지 활쏘기를 놀이로 삼아 일생을 마쳤다.
廣之將兵,乏絕之處,見水,士卒不盡飲,廣不近水,士卒不盡食,廣不嘗食。
이광이 병사를 이끎에, 식수와 식량이 결핍된 곳에서 물을 발견하면, 사졸들이 모두 물을 마시지 않으면 물 근처에도 가지 않았고, 사졸들이 모두 밥을 먹지 않으면 밥을 먹은 적이 없었다.
寬緩不苛,士以此愛樂為用。
관대하고 緩和하며 가혹하지 않았기 때문에 병사들은 그에게 쓰임을 기뻐하였다.
其射,見敵急,非在數十步之內,度不中不發,發即應弦而倒。
그의 射法은, 적을 발견하여 다급함에도 수십 보 이내가 아니거나, 맞히지 못한다고 판단되면 쏘지 않는 것이니, 쏘기만 하면 시위 소리와 함께 적이 쓰러졌다.
用此,其將兵數困辱,其射猛獸亦為所傷云。
이 때문에 병사를 통솔함에 자주 곤욕을 치렀고, 그가 맹수를 쏠 때도 이 때문에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
▶ 猿臂 : 원숭이의 팔이라는 뜻으로 "팔이 길고 힘이 있음"을 이르는 말이다.
▶ 訥口 : 말을 더듬거리다. 말주변이 없다.
▶ 闊狹 : 멀고 가까움.
▶ 乏絕 : 결핍해서 없어지다.
▶ 愛樂 : 爱悦,喜爱。
▶ 寬緩 : 관대하며 너그럽다.
▶ 急 : 바싹 접근하다.
▶ 用此 : 이 때문에. =以此
居頃之,石建卒,於是上召廣代建為郎中令。
얼마 지나지 않아 石建이 죽자, 이에 황제가 이광을 불러 석건을 대신해 郎中令으로 임명하였다.
元朔六年,廣復為後將軍,從大將軍軍出定襄,擊匈奴。
元朔 6년(기원전 123년), 이광은 다시 後將軍으로 임명되어, 大將軍 衛青이 이끄는 군대를 따라 定襄郡에서 나가 흉노를 공격하였다.
諸將多中首虜率,以功為侯者,而廣軍無功。
장수들이 대부분 수급과 포로의 수를 맞추고, 전공으로 삼아 제후에 봉해졌는데, 이광의 군에는 전공이 없었다.
▶ 居頃之 : 얼마 지나지 않아.
▶ 石建 : 石奮의 맏아들이자 승상 석경의 형으로 당시 郎中令이었다.
▶ 元朔 : 漢武帝의 세 번째 연호로 기원전 128년부터 123년까지 사용하였다.
▶ 大將軍 : 衛青. 字는 仲卿으로 일곱 차례나 흉노를 물리쳐, 관직이 大司馬‧大將軍에 이르렀다.
▶ 首虜率 : 참수한 적의 首級과 포로의 수를 규정하여 작위의 기준으로 한 것. 한나라 조정의 제도로 정한 수량을 말한다.
後二歲,廣以郎中令將四千騎出右北平,博望侯張騫將萬騎與廣俱,異道。
2년 후 이광이 郎中令의 신분으로 4천 騎를 거느리고 우북평에서 출정했고, 博望侯 張騫도 1만 騎를 거느리고 이광과 함께 출정했는데 행군하는 길이 달랐다.
行可數百里,匈奴左賢王將四萬騎圍廣,廣軍士皆恐,廣乃使其子敢往馳之。
수백 리 정도를 행군했을 때, 흉노의 左賢王이 4만 騎를 이끌고 이광의 군대를 포위하니, 이광의 군사가 모두 두려워하였고, 이광이 그의 아들인 李敢을 적진으로 달려가게 하였다.
敢獨與數十騎馳,直貫胡騎,出其左右而還,告廣曰:
「胡虜易與耳。」
이감이 홀로 수십 기와 함께 달려가서, 곧바로 흉노 기병의 포위를 뚫고 적진의 좌우로 나와서 돌아온 후 이광에게 보고하였다.
“흉노 따위는 상대하기 쉽습니다.”
軍士乃安。
군사가 비로소 안정되었다.
廣為圜陳外向,胡急擊之,矢下如雨。
이광은 원형의 군진을 치고 밖을 향하도록 했는데, 흉노가 맹렬하게 공격하니 화살이 마치 비처럼 쏟아졌다.
漢兵死者過半,漢矢且盡。
漢軍은 죽은 자가 과반이고, 화살은 바닥났다.
廣乃令士持滿毋發,而廣身自以大黃射其裨將, 殺數人,胡虜益解。
이광은 이에 군사들에게 활을 당기되 쏘지는 말도록 명령하고, 자신은 大黃이라는 석궁으로 적의 裨將을 쏘고, 또 몇 명을 사살하니 흉노의 포위망이 점차 풀렸다.
會日暮,吏士皆無人色,而廣意氣自如,益治軍。
날이 저물자 군관과 병사들은 모두 핏기가 가셨지만, 이광은 의기양양하여 더욱 힘을 내서 군대를 통솔하였다.
軍中自是服其勇也。
군중에서 이때부터 그의 용기에 감복하였다.
明日,復力戰,而博望侯軍亦至,匈奴軍乃解去。
이튿날 다시 힘써 싸웠는데, 박망후의 군대 역시 도착하니, 흉노의 군대는 포위를 풀고 떠났다.
漢軍罷,弗能追。
漢軍은 피곤하여 추격할 수 없었다.
是時廣軍幾沒,罷歸。
이때 이광의 군대는 거의 궤멸된 상태이매 병사를 거두어 조정으로 돌아왔다.
漢法,博望侯留遲後期,當死,贖為庶人。
漢의 법에 따르면, 박망후는 약속된 기일에 늦었기 때문에 사형에 해당하나, 속죄금을 내고 서민이 되었다.
廣軍功自如,無賞。
이광은 軍功과 과오가 서로 같아서, 포상은 없었다.
▶ 易與 : 상대하기 쉽다.
▶ 圜陳 : 원형의 軍陣.
▶ 持滿 : 활을 당기다.
▶ 大黃 : 석궁의 이름. 당시 사정거리가 가장 먼 무기이다.
▶ 裨將 : 副將.
▶ 解 : 흩어지다.
▶ 無人色 : 겁에 질려 얼굴에 핏기가 없음.
▶ 罷(피) : 疲와 통하여 고달프다.
▶ 軍功自如 : 功과 과오가 같다. 自如: 自當. 相當
初,廣之從弟李蔡與廣俱事孝文帝。
처음에 이광의 從弟인 李蔡와 이광은 모두 文帝를 섬겼다.
景帝時,蔡積功勞至二千石。
경제 때 이채는 공로를 쌓아 2천석의 봉록을 받는 지위에 올랐다.
孝武帝時,至代相。
문제 때에 代의 승상이 되었다.
以元朔五年為輕車將軍,從大將軍擊右賢王,有功中率,封為樂安侯。
원삭 5년(기원전 124년)에 輕車將軍이 되어 대장군을 따라서 흉노 右賢王을 공격했는데, 이때 공로가 포상규정에 맞아 樂安侯로 봉해졌다.
元狩二年中,代公孫弘為丞相。
元狩 2년(기원전 121년)에 이채는 公孫弘을 대신하여 승상이 되었다.
蔡為人在下中,名聲出廣下甚遠,然廣不得爵邑,官不過九卿,而蔡為列侯,位至三公。
이채의 인품은 하위권의 중간 정도이었고 명성도 이광보다 훨씬 뒤떨어졌지만, 이광은 작위나 봉읍도 얻지 못하고 관직도 九卿을 능가하지 못했으나, 이채는 列侯에 봉해졌고 지위가 三公에 이르렀다.
諸廣之軍吏及士卒或取封侯。
이광의 군관과 병사가 열후로 봉해지기도 하였다.
廣嘗與望氣王朔燕語,曰:
이광이 雲氣를 보고 길흉을 점치는 王朔과 허물없이 말한 적이 있다.
「自漢擊匈奴而廣未嘗不在其中,而諸部校尉以下,才能不及中人,然以擊胡軍功取侯者數十人,而廣不為後人,然無尺寸之功以得封邑者,何也?
“한나라가 흉노를 공격한 이래 저는 그곳에 있지 않은 적이 없으나, 제가 거느린 校尉 이하의 인물로서 재능이 중간 등급에도 못 미치면서, 흉노를 격파한 軍功으로 열후의 작위를 받은 자가 수십 명입니다.
그러나 저는 남에게 뒤떨어지지 않는데도, 작은 공로로써 봉읍받지 못함은 무슨 까닭입니까?
豈吾相不當侯邪?
저의 관상이 제후로 합당하지 못합니까?
且固命也?」
아무래도 이미 정해진 운명입니까?”
朔曰:
「將軍自念,豈嘗有所恨乎?」
왕삭이 물었다.
“장군께서 스스로 생각함에, 뼈저리게 뉘우칠 일이 있었습니까?”
廣曰:
「吾嘗為隴西守,羌嘗反,吾誘而降,降者八百餘人,吾詐而同日殺之。
至今大恨獨此耳。」
이광이 대답하였다.
“제가 농서태수일 때 羌族이 반란을 일으킨 적이 있었고, 제가 항복을 권유해서 투항한 자가 8백여 명이었으되, 제가 속이고 그날로 죽여버렸습니다.
지금까지 크게 뉘우치는 것은 오직 이 일뿐입니다.”
朔曰:
「禍莫大於殺已降,此乃將軍所以不得侯者也。」
왕삭이 말하였다.
“화근 중에 이미 투항한 자를 죽임보다 큰 것은 없으니, 이것이야말로 장군이 제후가 되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 大將軍 : 衛青을 말한다.
▶ 率 : 首虜率을 말한다.
▶ 元狩 : 漢武帝의 네 번째 연호로 기원전 122년에서 127까지 사용하였다.
▶ 望氣 : 별자리나 구름을 보고 길흉 및 운세를 점치는 古代의 점술의 하나.
▶ 燕語 : 허물없이 이야기하다.
▶ 尺寸之功 : 얼마 안 되는 공로. 작은 功勞.
▶ 固命: 定命,定数。
▶ 恨 : 뼈저리게 뉘우치다. 悔恨.
▶ 羌 : 고대 서쪽의 소수민족 중의 하나.
後二歲,大將軍、驃騎將軍大出擊匈奴,廣數自請行。
2년 후, 대장군 위청과 표기장군 霍去病이 대거 흉노로 출정하자, 이광이 여러 차례 자신도 종군하기를 청하였다.
天子以為老,弗許;
良久乃許之,以為前將軍。
황제는 연로하다고 여겨서 허락하지 않다가,
한참 뒤에 허락하고 前將軍으로 임명하였다.
是歲,元狩四年也。
이 해가 원수 4년(기원전 119년)이었다.
廣既從大將軍青擊匈奴.
이광은 대장군 위청을 따라 흉노로 출정하였다.
既出塞,青捕虜知單于所居,乃自以精兵走之,而令廣并於右將軍軍,出東道。
변방의 요새로 나가자, 위청은 포로를 잡아서 선우의 소재지를 알아내고, 자신은 정예 병사를 이끌고 선우를 추격하며, 이광에게는 右將軍 趙食其의 군대와 합하여 동쪽 길로 출병하라고 명령하였다.
東道少回遠,而大軍行水草少,其勢不屯行。
동쪽 길은 조금 멀리 우회해야 하며, 대군이 행군하기에는 물과 풀이 적으매, 무리지어 행군할 형편이 아니었다.
廣自請曰:
「臣部為前將軍,今大將軍乃徙令臣出東道.
且臣結發而與匈奴戰,今乃一得當單于,臣願居前,先死單于。」
이광이 스스로 대장군에게 청하였다.
“신의 部署는 前將軍인데, 지금 대장군께서 저를 동쪽 길로 출정하라고 바꾸어 명령하셨습니다.
신은 성년이 된 이래 흉노와 전투함에, 오늘에서야 單于와 대적할 수 있게 되었으니, 신이 선봉에 서서 먼저 선우와 死戰하게 해주십시오.”
大將軍青亦陰受上誡,以為李廣老,數奇,毋令當單于,恐不得所欲。
대장군 위청 역시 황제의 주의를 은밀히 받았으므로, 이광이 늙고 운수가 기구하다고 여겨서 선우와 대적하지 말게 하였으니,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까 걱정하였기 때문이었다.
而是時公孫敖新失侯,為中將軍從大將軍,大將軍亦欲使敖與俱當單于,故徙前將軍廣。
이때 公孫敖가 갓 제후의 작위를 상실하고 中將軍이 되어 대장군을 따라 출전하였고, 대장군 또한 공손오를 시켜 함께 선우를 대적하고자 하였으매, 前將軍 이광의 부서를 바꾸어버린 것이다.
廣時知之,固自辭於大將軍。
이광이 당시 이런 사정을 알고, 완강하게 대장군에게 명령을 거두라고 요구한 것이다.
大將軍不聽,令長史封書與廣之莫府,曰:
「急詣部,如書。」
대장군이 듣지 않고, 長史에게 명령하여 封書를 이광의 막부로 보내며 말하였다.
“서둘러서 소속 부대로 가서 명령서대로 하라.”
廣不謝大將軍而起行.
이광은 대장군에게 작별인사도 하지 않고 출발하였다.
意甚慍怒而就部,引兵與右將軍食其合軍出東道。
마음속으로 매우 화가 나서 부대로 돌아간 후, 병사들을 이끌고 우장군 趙食其와 合軍하고 동쪽 길로 진군하였다.
軍亡導,或失道,後大將軍。
군대에 嚮導가 없어서 길을 잃기도 하매 대장군보다 늦게 도착하였다.
大將軍與單于接戰,單于遁走,弗能得而還。
대장군은 선우와 접전하였는데, 선우가 도주해 버리자 戰果 없이 돌아오고 있었다.
南絕幕,遇前將軍、右將軍。
남쪽의 먼 사막에서 전장군 이광과 우장군 조이기의 군대를 만났다.
廣已見大將軍,還入軍。
이광이 대장군을 만나본 후 군영으로 돌아왔다.
大將軍使長史持糒醪遺廣,因問廣、食其失道狀.
대장군은 長史를 파견하여 마른 음식과 탁주를 이광에게 보내고, 이광과 조이기의 부대가 길을 잃은 정황을 물어보게 하였다.
青欲上書報天子軍曲折。
위청은 황제에게 글을 올려 군의 상세한 정황을 보고하려 하였다.
廣未對,大將軍使長史急責廣之幕府對簿。
이광이 답하지 않자 대장군은 長史를 보내어 이광 막부의 교위에게 狀啓를 올리라고 재촉하였다.
廣曰:
「諸校尉無罪,乃我自失道。
吾今自上簿。」
이에 이광이 말하였다.
“교위들에게 죄가 없고, 내가 길을 잃고 헤맨 것이다.
내가 지금 장계를 올리겠다.”
至莫府,廣謂其麾下曰;
「廣結發與匈奴大小七十餘戰,今幸從大將軍出接單于兵,而大將軍又徙廣部行回遠,而又迷失道,豈非天哉!
且廣年六十餘矣,終不能復對刀筆之吏。」
莫府에 가서 이광이 부하들에게 말하였다.
“나는 젊을 때부터 흉노와 크고 작은 70여 회 전투하였는데, 이번에 다행히 대장군을 종군하여 선우의 군사와 접전하려 했으나, 대장군이 또 나의 부서를 바꿔서 멀리 돌아 행군하도록 한 데다, 길을 잃기도 하였으니, 어찌 천명이 아니겠느냐!
내 나이가 이미 육십여 세인데도, 다시 刀筆吏에게 조사까지 받을 수는 없다.”
遂引刀自剄。
이어 칼을 뽑아 自剄하였다.
廣軍士大夫一軍皆哭。
이광 군대의 장교와 사졸 全軍이 모두 통곡하였다.
▶ 驃騎將軍 : 霍去病을 말한다. 무제 때의 명장으로 흉노 토벌에 큰 공을 세웠다. 정예부대를 이끌고 대군보다 먼저 적진 깊숙이 쳐들어가는 전법으로 한제국의 영토 확대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
▶ 走 : 쫓다.
▶ 右將軍 : 趙食其. 조이기는 우장군이 되어 조양·이광·공손하와 함께 위청을 따라 정양에서 출전하였으나, 길을 잃어 참형에 해당되었고, 속죄금을 내고 관작이 박탈되었다.
▶ 屯行 : 많은 수의 군사가 모여 나아감.
▶ 結發 : 結髮. 束髮. 고대에 남자는 15세가 되면 머리를 묶는 풍습이 있었으므로 젊었을 때를 말한다.
▶ 當 : 대적하다.
▶ 死 : 사투하다. 결사전.
▶ 數奇 : 운수가 사납다. 數는 운수이며 奇는 홀수. 고대 점술에 偶數는 길하고 奇數는 불길하다고 하였다.
▶ 公孫敖 : 車騎將軍 衛靑이 흉노를 공격하였으며, 上谷郡에서 출정하여 龍城에서 흉노를 물리쳤다. 이때 장군 李廣은 흉노의 포로가 되었다가 다시 탈출했고, 公孫敖는 많은 병사를 잃었다. 그들은 모두 마땅히 참수를 당해야 했으나 속죄금을 내고 서인으로 강등되었다.<사기 권108. 韓長孺列傳>
▶ 長史 : 관직명. 대장군의 비서.
▶ 詣 : 이르다. 도달하다.
▶ 謝 : 작별인사를 하다.
▶ 慍怒 : 노하다. 성을 발칵 내다.
▶ 食其 : 趙食其.
▶ 亡導 : 嚮導가 없다. 亡은 無. 導는 嚮導, 길 안내자.
▶ 絕幕 : 사막을 횡단하다. 絕은 횡단하다. 幕은 漠과 통하여 ‘사막’. 또는 极远的沙漠地区(극히 먼 사막지구)
▶ 糒(비) : 건량. 말린 밥.
▶ 曲折 : 상세한 정황.
▶ 對簿 : 訊問할 때 필요한 부책.
▶ 且 : 且는 접속사로서 연관 관계를 나타낸다. 순접 관계를 나타내기도 하며( “…하고도” “…한 후에”) 역접 관계를 나타내기도 한다.( “그러나”) <허사 且 참조>
▶ 刀筆吏 : 刀筆은 대쪽에 글씨를 쓰는 붓과 잘못된 글씨를 깎아내는 칼을 가리키며, 도필리는 문서를 작성하는 낮은 벼슬아치를 말한다.
▶ 引刀 : 칼을 뽑다.
▶ 自剄 : 칼로 자기 목을 베거나 찌르다. 自刎.
▶ 士大夫 : 장교와 병사를 말한다.
百姓聞之,知與不知,無老壯皆為垂涕。
백성들도 소식을 듣고 이광을 알거나 모르거나, 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눈물을 흘렸다.
而右將軍獨下吏,當死,贖為庶人。
우장군 조이기 혼자 법관에게 넘겨져 사형 판결을 받았으나 속죄금을 내고 서민이 되었다.
廣子三人,曰當戶、椒、敢,為郎。
이광의 세 아들은 李當戶, 李椒, 李敢라 하며 모두 郎官에 임명되었다.
天子與韓嫣戲,嫣少不遜,當戶擊嫣,嫣走。
황제가 韓嫣과 놀고 있음에 한언이 황제에게 다소 불손하자, 이당호가 한언을 때렸고 한언이 달아났다.
於是天子以為勇。
이에 황제는 이당호가 용감하다고 여겼다.
當戶早死,拜椒為代郡太守,皆先廣死。
이당호가 일찍 죽자, 李椒를 代郡太守로 임명했으나 모두 이광보다 먼저 죽었다.
當戶有遺腹子名陵。
이당호에게는 유복자가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陵이었다.
廣死軍時,敢從驃騎將軍。
이광이 군중에서 죽을 때, 李敢은 표기장군 곽거병을 종전하였다.
廣死明年,李蔡以丞相坐侵孝景園壖地,當下吏治.
이광이 죽은 다음 해, 從弟 李蔡는 승상의 신분으로 景帝 陵園의 빈터를 침범한 죄로 법관에게 넘겨져 처벌받게 되었다.
蔡亦自殺,不對獄,國除。
이채 또한 자살하니, 심문은 받지 않았고, 그의 작위는 폐지되었다.
▶ 韓嫣 : 한왕 신의 증손이자, 弓高侯 한퇴당의 손자로, 말타기에 능하고 총명한 자였다. 무제가 교동왕이던 시절에 동문수학한 사이였다. 무제가 즉위한 후에는 흉노 정벌을 지지하였으며, 또 무예에 뛰어나 무제의 총애를 받아 같은 침실에서 잠잘 정도였다.
▶ 遺腹子 : 아비가 죽을 때 어미 뱃속에 있던 자식.
▶ 坐 : 죄에 대하여 벌을 받다.
▶ 孝景園 : 景帝의 陵園.
▶ 壖地 : 빈 터. 묘의 안 담과 바깥 담 사이에 있는 땅
▶ 對獄 : 심문을 받다. 재판을 받다.
▶ 國除 : 군국제에서 제후의 분봉을 박탈함. 군현제에서 작위를 박탈함
李敢以校尉從驃騎將軍擊胡左賢王,力戰.
李敢은 校尉가 되어 표기장군 곽거병을 따라 흉노의 좌현왕을 공격하여 힘써 싸웠다.
奪左賢王鼓旗,斬首多,賜爵關內侯,食邑二百戶,代廣為郎中令。
좌현왕의 군기와 북을 탈취하고 斬首가 많으니 關內侯의 작위와 식읍 2백호를 하사하였고, 이광을 대신해서 郎中令이 되었다.
頃之,怨大將軍青之恨其父,乃擊傷大將軍.
얼마 후, 李敢은 대장군 위청이 그의 아버지에게 한을 품음을 원망하여, 대장군을 공격하여 상처를 입혔다.
大將軍匿諱之。
대장군은 이 사건을 남들이 모르게 숨기었다.
居無何,敢從上雍,至甘泉宮獵。
얼마 지나지 않아 이감이 雍縣에서 황제를 수행하여 甘泉宮까지 가서 사냥하였다.
驃騎將軍去病與青有親,射殺敢。
표기장군 곽거병은 위청의 생질이었는데 이감을 활로 쏘아 죽였다.
去病時方貴幸,上諱云鹿觸殺之。
곽거병은 당시 막 지위가 존귀하고 총애를 받으니, 무제가 사실을 숨기고 사슴이 떠받아서 이감을 죽였다고 하였다.
居歲餘,去病死。
일 년여 후에 곽거병은 병사하였다.
而敢有女為太子中人,愛幸,敢男禹有寵於太子,然好利,李氏陵遲衰微矣。
이감에게 딸이 있었는데 태자의 시첩이 되어 총애를 받았으며, 이감의 아들 李禹도 태자에게 총애를 받았지만, 이익만을 탐했기 때문에, 이씨 가문은 점차 쇠퇴하고 말았다.
李陵既壯,選為建章監,監諸騎。
이당호의 아들 李陵이 장성하여 建章監으로 선발되어 기병들을 감독하였다.
善射,愛士卒。
이릉은 궁술에 능했고, 병사들을 아꼈다.
天子以為李氏世將,而使將八百騎。
황제는 이씨 가문이 대대로 무장이었음을 참작하여 이릉에게 기병 8백 명을 통솔하게 하였다.
嘗深入匈奴二千餘里,過居延視地形,無所見虜而還。
이릉은 이전에 흉노의 국경 안으로 2천여 리나 깊숙이 들어가 居延을 지나 지형을 살피고, 적에게 잡히지 않고 돌아온 적이 있었다.
拜為騎都尉,將丹陽楚人五千人,教射酒泉、張掖以屯衛胡。
조정에서는 그를 騎都尉로 임명하여 丹陽의 楚의 사람 5천 명을 거느리고, 酒泉, 張掖 일대에서 궁술을 훈련하며 주둔하여 흉노를 지키도록 하였다.
數歲,天漢二年秋,貳師將軍李廣利將三萬騎擊匈奴右賢王於祁連天山 而使陵將其射士步兵五千人出居延北可千餘里
몇 년 후 天漢 2년(기원전 99년) 가을에, 貳師將軍 李廣利는 3만 騎를 거느리고 祁連天山에 있는 흉노 우현왕을 공격하였으며, 이릉에게 步兵射手 5천명을 거느리고 居延에서 북쪽으로 1천여 리를 출병하게 하였다.
欲以分匈奴兵,毋令專走貳師也。
흉노의 병력을 분산시키고, 이사장군을 집중하여 공격하지 못하게 하려던 것이다.
陵既至期還,而單于以兵八萬圍擊陵軍。
이릉은 기일이 되어 철군하려 하였으나 선우가 8만의 병력으로 이릉의 부대를 포위하여 공격하였다.
陵軍五千人,兵矢既盡.
이릉 부대의 5천 명에게 화살이 다 떨어졌다.
士死者過半,而所殺傷匈奴亦萬餘人。
전사한 병사가 과반이었고, 흉노 병사를 죽인 것도 역시 일만여 명이었다.
且引且戰,連鬬八日,還未到居延百餘里,匈奴遮狹絕道.
한편으로 퇴각하면서 한편으로 응전하기를 8일이었으며, 거연에서 일백여 리가 못 되는 곳에 도착함에, 흉노가 협곡을 막고 귀로를 차단하였다.
陵食乏而救兵不到,虜急擊招降陵。
이릉은 식량이 부족했고, 구원병도 오지 않았는데, 흉노는 맹렬하게 공격하며 이릉에게 투항을 권유하였다.
陵曰:
「無面目報陛下。」
이릉이 말하였다.
“폐하에게 보고할 면목이 없구나.”
遂降匈奴。
마침내 흉노에게 항복하였다.
其兵盡沒,餘亡散得歸漢者四百餘人。
그의 병사는 거의 전사했는데, 나머지 병사로 도망하여 흩어졌는데, 한나라로 돌아온 자는 4백여 명이었다.
單于既得陵,素聞其家聲,及戰又壯,乃以其女妻陵而貴之。
선우는 이릉을 얻고 나서, 평소에 그 가문의 명성을 들었고, 전투에 씩씩했던 기상을 감안하여 자신의 딸을 이릉에게 시집보내고 높은 지위를 주었다.
漢聞,族陵母妻子。
한나라에서 알고 이릉의 모친과 처자식을 모두 죽여버렸다.
自是之後,李氏名敗,而隴西之士居門下者皆用為恥焉。
이후부터 이씨의 명성이 쇠락했고, 隴西 일대의 선비로 이씨 문하에 있던 빈객이 모두 수치스럽게 여겼다.
▶ 匿諱(닉휘) : 남이 모르게 숨김.
▶ 有親 : 霍去病은 위청의 甥姪(:누이의 아들)이다.
▶ 中人 : 侍妾. 귀인의 시중을 드는 첩.
▶ 陵遲 : 경사도가 완만하다.
▶ 衰微 : 형세가 기울어짐. 쇠퇴하다.
▶ 李陵 : 이광의 손자. 李當戶의 아들. 젊은 시절부터 이사장군 李廣利와 함께 흉노와의 전쟁에 참가하여 여러 차례 공을 세웠다. 이광리의 별동대를 지휘하여 흉노의 배후를 기습하였으나, 오히려 흉노에게 포위당하였다. 이릉은 부하들을 살리기 위해 흉노에 항복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무제는 크게 노하여 이릉의 족속을 멸하였다. 이릉은 이 소식을 듣고 흉노에 완전히 투항하여 선우의 사위가 되어 흉노의 右校王이 되었다. 이릉은 司馬遷의 친구였는데, 이릉이 항복할 당시 사마천은 무제에게 이릉을 변호하다가 궁형에 처해졌다. <漢書 李陵傳〉
▶ 屯衛 : 주둔한 군대를 방위함. 군영을 지킴
▶ 天漢 : 漢武帝의 여덟 번째 연호로 기원전 100년부터 기원전 97년까지 사용되었다.
▶ 貳師將軍 李廣利 : 황제가 寵姬인 李氏의 집안을 侯로 삼고자 하였는데, 李夫人의 오빠인 廣利를 임명하여 貳師將軍으로 삼아 大宛을 정벌하게 하니, 貳師城에 이르러서 좋은 말을 취할 것을 기약하였다. 그래서 그를 貳師將軍이라 호칭하였다.
▶ 祁連天山 : 祁連山을 말한다. 흉노에 있는 산 이름.
▶ 專走貳師 : 貳師將軍 李廣利가 흉노를 공격할 때 李陵이 스스로 한 부대를 담당할 것을 청하여 單于의 군대를 분산시켜 오로지 貳師城으로만 향하지 않게 한 것이다
▶ 引 : 퇴각하다.
▶ 遮狹絕道 : 협곡을 차단하여 이릉의 군대가 퇴각하는 길을 끊었다.
▶ 族 : 일족을 멸하다.
▶ 居門下者 : 문하에 있는 빈객.
太史公曰:
傳曰:
「其身正,不令而行;
其身不正,雖令不從。」
태사공은 말한다.
“논어에 이르기를
‘자신이 바르면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저절로 행해지고,
자신이 바르지 않으면 명령하여도 따르지 않을 터이다.’라고 하였다.
其李將軍之謂也?
이 구절은 바로 李將軍을 두고 한 말인가?
余睹李將軍悛悛如鄙人,口不能道辭。
내가 이릉장군을 본 적이 있는데 성실하고 너그럽기가 마치 시골 사람 같았으며 언변도 능하지 못하였다.
及死之日,天下知與不知,皆為盡哀。
그가 죽었은 날, 천하에 그를 알았거나 몰랐거나 모두 그를 위해서 매우 애통해하였다.
彼其忠實心誠信於士大夫也?
그의 충실한 마음은 참으로 그의 부하 장교와 병사들에게 신뢰를 받지 않았던가?
諺曰
「桃李不言,下自成蹊」。
속담에 이르기를
‘복숭아와 오얏은 말하지 않지만, 그 아래에 저절로 작은 길이 생긴다.’라고 하였다.
此言雖小,可以諭大也。
이 말이 비록 사소한 듯하나, 큰 이치를 비유하였다.”
▶ 傳 : 경서를 해설한 것을 傳이라 칭하며 여기서는 <論語>를 말한다.
▶ 其身正,不令而行 : “子曰 其身正, 不令而行. 其身不正, 雖令不從.”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자기 자신이 바르면 명령하지 않아도 행해지고, 자신이 바르지 못하면 비록 명령한다 하더라도 따르지 않는다.”<論語, 子路 제6장>
爲政者는 마땅히 자신이 솔선해야 함을 말한 것이다.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 그 몸이 바르면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백성들이 스스로 행하고, 그 몸이 바르지 않으면 비록 명령하더라도 백성들이 따르지 않는다는 뜻이다.
▶ 悛悛(전전) : 성실하고 너그럽다.
▶ 蹊(혜) : 좁은 길.
▶ 桃李不言,下自成蹊 : 복숭아와 오얏은 말하지 않아도 아름다운 꽃과 열매가 있어 사람들이 모이므로 저절로 길이 생긴다. 즉, 덕이 있는 자는 잠자코 있어도 그 덕을 사모하여 사람들이 따른다는 뜻이다.
참고 기원전 99년에 무제의 명으로 흉노를 정벌하러 떠났던 장군 이릉이 패전하여 포로가 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을 보고받은 무제는 진노하여, 이릉의 처분 문제를 결정하기 위한 중신 회의를 열었다. 신하들은 모두들 이릉을 비난하고는 이릉의 가족들을 모두 능지처참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사마천은 이릉의 충절과 용감함을 찬양하고 두둔했기 때문에 무제의 노여움을 샀다. 사마천은 태사령의 직책에서 파면되고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사형을 받게 되었는데, 당시 사형을 면하는 것은 두 가지 방법, 즉, 어마어마한 벌금을 내거나 궁형을 받는 것 둘뿐이었다. 이 벌금의 액수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라서 사마천이 태사령이라는 직책으로 받는 녹봉으로 이 벌금을 냄은 불가능하였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은 궁형을 받느니, 죽음을 택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회 풍조였으나, 사마천은 《사기》의 완성을 위해 궁형을 받아들였다(궁형으로 인하여 고환이 제거되어 그의 초상화에는 수염이 없다). 궁형으로 죽음을 모면한 사마천은 아버지의 대부터 편찬 중이었던 역사서 《사기》의 편찬을 완료하였다.<위키백과> ※ 당나라 시인들의 邊塞詩에 이광 장군을 칭송한 시가 다수 있다. [당시삼백수] 출새(出塞)/出塞二首(출새2수) -王昌齡(왕창령) 但使龍城飛將在(단사룡성비장재),不教胡馬度陰山(불교호마도음산)。: 다만 龍城에 飛將軍만 있다면, 胡馬가 陰山을 넘어오지 못하게 했을 터이다. [전당시] 塞下曲六首(새하곡 6수) - 李白(이백) 漢皇按劒起(한황안검기),還召李將軍(환소이장군)。 兵氣天上合(병기천상합),鼓聲隴底聞(고성롱저문)。: 한나라 황제 칼을 짚고 일어나 다시 李廣장군을 부르니 병사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하고 북소리는 隴山 비탈까지 들린다. [당시삼백수] 老將行(노장행) - 王維(왕유) 衞青不敗由天幸(위청불패유천행),李廣無功緣數奇(이광무공연수기)。: 衞青이 패하지 않았음은 천행이고 李廣의 공이 없었음은 운수가 기구하였네. [당시삼백수] 塞下曲(새하곡 1~4)/화장복사새하곡 - 노륜(盧綸) 林暗草驚風(임암초경풍),將軍夜引弓(장군야인궁)。 平明尋白羽(평명심백우),沒在石稜中(몰재석릉중)。: 캄캄한 숲속 풀이 바람에 흔들리자 장군은 밤에 활을 당기네. 동틀 무렵 화살을 찾아보니 바위 모서리에 박혀 있구나. |
'史記 > 列傳' 카테고리의 다른 글
列傳권111-衛將軍驃騎列傳(위장군표기열전) (1) | 2023.09.24 |
---|---|
列傳권110-匈奴列傳(흉노열전) (0) | 2023.09.21 |
列傳권108-韓長孺列傳(한장유열전) (0) | 2023.09.19 |
列傳권107-魏其武安侯列傳(위기무안후열전) (0) | 2023.09.18 |
列傳권106.吳王濞列傳(오왕비열전) (0) | 2023.09.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