耽古樓主의 한문과 고전 공부
99.조선-김정호(金正浩) 본문
문일평(文一平)
1888~1939. 사학자. 호 호암(湖巖). 평북 의주 생. 일본 와세다(早稻田) 대학 정치학부중퇴. 상해에 있는 대공화보사(大共和報社)에 근무, 귀국 후 중동·중앙 등에서 교편을 잡았고, 중외일보 기자를 거쳐 조선일보 편집 고문으로 7년간 근무.
저서에 「조선사화」, 「호암전집」, 「조선문화예술」, 「한국의 문화」 등이 있음.
예술을 즐겨하고 학문을 좋아하는 문화애(文化愛)란 것이 일반적으로 결핍하다, 조선인의 심원(心園)이 황폐한 지 이미 오래다고 이렇게 말하는 이가 흔히 있다.
오늘날 현상으로 본다면 이 설을 반드시 부인할 수 없는 바다. 그러나 한편으로 본다면 국제적 풍운이 잦은 반도에서 이만큼이나마 문화를 보존해 온 것은 문화애가 없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할 바다.
멀리는 그만두고 이조 중엽 이후로만 말하여도 임진창양(壬辰搶攘)의 제(際)에 석경(石磬)을 경화루 연지 속에 감추었으므로 아악이 금일까지 보존된 것이 아니냐.
1)搶攘: 몹시 혼란하고 수선스러움.
동 난리 중에 실록을 묘향산으로 끌고 다니며 진호(珍護)했기 때문에 500년 기록이 유루 없이 금일까지 보존된 것이 아니냐.
평시와 달라 이른바 간과(千戈)가 만목(滿目)하고 거국이 판탕(板蕩)하여 온갖 보물을 다 버리고 가는 판에 하가(何暇)에 일념이 이 석경과 실록에 미쳐 그것을 수장 가호하였는지 생각할수록 감사할 일이라 하겠다.
어찌 이뿐이랴.
우량 관측에 대하여 영조 이래 융희 원년에 이르기까지 138년이란 세계 최장 기록을 지은 이가 조선인이 아니냐. 모든 시비에 초연하여 그 직무에 충근(忠勤)하던 관측자의 태도야말로 학자의 전형이 될만하다.
이상에 말한 이는 모두 조정에 관계 있는 관리로서 문화를 위하여 애쓰던 문화의 성도(聖徒)들이다. 그러나 초야에 묻힌 학자로서 학술상 불멸의 금자탑을 쌓았으되 그것이 일개인으로 국가적 사업을 한 것이라면 누구나 크게 놀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놀라운 민간 학자가 한말 반도에 있었다면 일층 더 놀랄 일이 아니냐. 그러면 그는 누구이냐 하면 조선 지세 실측에 필생을 바쳐 한손으로 「대동여지도」와 「대동지지(大東地志)」를 만들어 낸 고산자(古山子) 金正浩(김정호)이다.
국가로서 장려는커녕 지도 작성을 엄금하였으므로 고산자는 혹은 투옥의 화를 당하면서도 조금도 굴하지 아니하고 또는 생활이 곤궁하여 3순9식(三旬九食)2)하면서도 조금도 흔들리지 아니하고 분투노력하여 학료목적(學寮目的)을 관철하고 만 그 순학적(殉學的) 지순지고한 정신에 이르러는 누구나 감복하고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2)3순9식(三旬九食): 서른 날에 아홉 끼니 밖에 먹지 못한다는 뜻으로 매우 가난함을 가리킴.
그는 이로써 의식(衣食)을 구하려고 함도 아니요 박람을 자랑하려고 함도 아니요 다만 문화애에 타오르는 일편 촛점이 조선 지도 작성에만 집중되었던 것으로 이 때문에 온갖 것을 희생에 공(供)하되 스스로 알지 못했다.
그의 노력의 結晶(결정)인 「대동여지도」와 그 「대동지지」는 오늘날 반도학계에 있는 보물의 하나이거니와 그보다도 만난과 고투하며 이런 업적을 남겨 놓은 문화의 성도인 고산자를 학계의 지보(至寶)로서 일층 더 자랑하고 싶다.
고산자는 그 약력조차 알 수 없으니 그가 근대인이요 또 경성인이건만 미천한 고로 전해지지 않았다. 그의 약력은커녕 성명까지도 미상하던 것이 겨우 최근 학자의 고거(考據)에 의하여 고산자가 곧 김정호임을 알게 되었다.
고산자의 성명은 김정호요 자는 백원(伯元;혹은 伯溫)이니 고산자는 그 호이다. 남대문 밖 만리재에 살았다 하며 군교(軍校)를 다녔다는데 그 역시 확증은 없으나 어쨌든지 그가 미천한 계급에 태어난 한 한사(寒士)인 것만은 틀림없다.
閥閱(벌열)을 숭상하던 당시 누속(陋俗)으로 누가 그를 아는 체했겠으며 기교를 천시하던 당시 폐습으로 누가 그를 탐탁하게 굴었겠느냐. 장안 인해(人海) 속에 살면서 불후의 업적을 남기면서도 약력 하나 알려지지 못한 것이 어찌 이유가 없다 하랴.
신자하(申紫霞)가 추앙하던 개성 한재렴(韓在濂)과 김추사(金秋史)가 사사하던 평양 조광진(曺匡振)은 하나는 시인으로 하나는 명필로 그 실력이 혹은 자하, 추사 이상일는지 모르나 세간에서 그 이름을 아는 이가 몇 사람이나 되는가.
고산자는 그 우인(友人) 최한기(崔漢綺)가 아니더면 김정호라는 그 성명 3자도 후세에 전하지 못할 뻔하였다.
최한기는 김정호의 유일한 心友로서 전하는 말에 2인이 서로 서약하기를 최는 천문에 관한 것을 맡고 김은 지리에 관한 것을 맡아 각기 그 목적 달성에 매진하여 최는 300책의 저술이 있고(천문 이외에 종종의것이 포함되었으나) 김은 「대동여지도」22첩과 「대동지지」15권의 저작이 있다.
이 최한기가 대동여지도의 전신인 「청구도(靑邱圖)」에 제변(題弁)한 일절에
“벗 김정호는 나이가 약관에서부터 지도 만드는 일에 깊은 뜻을 두었다. 세월이 오래되어 그것들을 뽑아 보니 법도의 상세함이 있다. 운운”(편집자 역)
한 것이 있어 김종호의 씨명(氏名)이 명백하게 드러났다.
「청구도」의 김정호는 곧 「대동여지도」의 고산자와 동일인임은 그 지도와 또 그 지지에 의하여도 짐작하려니와 더욱이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권 8 가운데
“김정호는 자호를 고산자라 했는데 평소에 여지(輿地)의 학에 솜씨와 재주가 많았다.
널리 고구하고 수집하여 일찍이 「지구도」를 만들었으며 또 「대동여지도」를 만들어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하여 세상에 인행(印行)했다. … 또 「동국여지고(東國輿地攷)」10권을 편집했으나 탈고에 이르기 전에 숨을 거두니 심히 애석한 노릇이다.”(편집자 역)
라고 한 것을 보면 고산자는 확실히 김정호로서 그가 자호하여 고산자라고 했던 것을 알겠다.
그의 제작으로 「대동여지도」 외에도 「지구도」가 있고 「동국여지고」가 있는 것을 말하였으니 「동국여지고」는 아마도 「대동지지」의 별칭인 듯하나 다만 그 수가 10권이라 함이 다를 뿐이다. 그러나 금일 「대동지지」가 혹은 15권 또 혹은 32권으로 기록이 상좌(相左)하여 알 수 없다. 현 보전(普專) 도서관에 소장한 원본은 1권이 결한 15권이라 한다.
고산자 김정호는 그 생사연월이 언제인지 알 길이 없으되 그 전후 지도의 간행과 또 그 「대동지지」의 편성한 연대에 의하여 그가 순조조에서 고종 초까지 존재했던 인물임을 추찰할 수 있다. 순조 3년 계해에 생하여 고중 16년 기묘에 졸한 그 우인 최한기와 거의 동시대라고 보아도 크게 틀림이 없을 것이다.
여기 주의할 것은 사람은 시대의 산물이라 아무리 학자라도 그 시대 풍조에는 초연함을 얻지 못하는 법이다. 이런 견지에서 고산자의 출생한 시대를 살필 때에 얼핏 눈에 띄는 것은 영·정 이래 일세에 성행하던 구시학풍(求是學風)의 여파가 고산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었는가 함이다.
고산자의 타고난 그 천재와 또는 꾸준한 그 노력이 대업을 성취하는 2대 요건이 되었겠으나 어디까지 실지 답사를 수행하던 그의 근본정신이야말로 구시학풍의 요체 그것을 그대로 구현한 것이 아닌가.
고산자가 직접 간접으로 받은 시대적 감화를 들추어 내자면 얼마든지 있을 것이나 불행히 그에 관한 사실이 전해지지 않는 오늘날에 무엇이라고 지적해 말할 수 없거니와, 「청구도」 범례에 적은 것을 일일이 거론할 것도 없이 그의 목우심완(目寓心玩)3) 하던 기다의 도본(圖本)이 거의 영·정 이래 부흥하게 된 지도학파의 산물이었음은 앙탈하지 못할 바이다.
3)목우심완(目寓心玩): 눈이 머무르고 마음이 즐거워짐.
한마디로 하면 고산자의 공적은 종래 지도학파를 집대성한 데 있다. 그러나 그것이 한갓 도본과 본적에만 의뢰한 것이 아니요 몸소 답사로써 도적(圖籍)의 오류를 정정하고 실지의 정확을 자기(自期)하여 일보를 갱진(更進)하는 곳에 「대동여지도」의 진면목이 있는 것이니 그는 이 점에서 확실히 획기적으로 볼 수 있다.
「대동여지도」의 정확 여하는 한번 그것을 전개하면 반도 강산이 섬실무유(纖悉無遺)4)하게 일목에 거둘 수 있음에 의하여 알 것이다.
4)섬실무유(纖悉無遺):細微한 데까지 두루 미쳐 빠뜨림이 없음.
최근 토지조사국의 실측도가 생기기 전까지는 고산자의 「대동여지도」가 사계의 유일한 권위로 조선지도를 작성함에는 반드시 이것을 표본으로 삼았다 하거니와 일청전쟁에 일본군이 이 「대동여지도」를 가지고 지리적 도사(導師)를 삼아 크게 효과를 내었다 한다.
일찌기 퇴계학이 일본 황실에 들어가게 되고 충무공의 전술이 살마인(薩摩人)에게 전하게 된 것과 같이 근대에 와서 고산자의 「대동여지도」가 일본군의 안내가 되었은 즉, 반도에서 생긴 모든 문물이 도국(島國)에 가서 도리어 많은 효과를 낸 것은 고대에만 있는 사실이 아니다.
▶사쓰마(薩摩)는 현재 일본 큐슈(九州) 서남쪽 가고시마현의 옛지명이다.
이 「대동여지도」를 제작한 고산자는 영·정 이래 구시학의 일파로 볼 수 있는 「대동여지도」의 완성자인 만큼 학예사상 한 독특한 지위를 점유하게 될 것은 췌설(贅說)을 요하지 않는 바다. 그러나 고산자의 고산자 된 소이는 말할 수 없는 역경에서 악전고투한 결과 마침내 역사적 업적을 이룬 거인임을 알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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