耽古樓主의 한문과 고전 공부
91.조선-김홍도(金弘道) 본문
高裕燮
1905∼1944. 미술사학가. 호 우현(又玄). 경기도 인천 생, 경성제대 철학과 졸업. 이화여전, 연희전문 등에 출강하면서 국내의 명승 고적을 답사하여 미술문화 연구에 진력.
저서에 「송도고적(松都古蹟)」, 「조선 탑파(塔婆)의 연구」, 「조선미술문화사논총(朝鮮美術文化史論叢)」및 유저로 「한국미술사 급미학논고(韓國美術史 及 美學論攷)」 등이 있음.
김홍도의 자는 사능(士能)이요, 호는 단원(檀園)이요, 단구(丹邱)·서호(西湖)·고면거사(高眠居士) 등 별호도 있었다. 김해인(金海人)으로 만호(萬戶) 김진창(金震昌)의 증조요 영조 36년 경진생(이 생년에는 다소 의심되는 바가 있다. 이것은 뒤에서 고증하겠다)으로 향년이 미상이요 화원 화원(畵院畫員)이었고 음보(蔭補)로 연풍현감에 이르렀다.
「호산외사(壺山外史;헌종 10년 갑진 趙熙龍 저)」에 그 전(傳)이 있으되 단원은 풍도(風度)가 아름답고 성품이 낙뇌불기(落磊不羈)1)해서 사람들이 그를 신선 중 사람이라 하였고 평생이 소광고결(疎曠高潔)하여 치산제가(治産齊家)하지 못하였다 한다.
1) 낙뇌불기(落磊不羈): 마음이 활달하여 거리낌이 없음.
조석이 불계(不繼)한 처지로서 기매(奇梅) 일주(一株)를 누가 팔러 왔는데 때마침 구화췌전(求畫贅錢) 3천이 수중에 들어온지라, 2천으로 매화를 사고 800으로 술을 사서 동취(同趣)와 더불어 매화음(梅花飮)을 하고 나서 200으로 시량(柴糧)을 보태니 겨우 하루의 생계밖에 안 되었다는 일화도 남아 있다.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 의하면 복헌(復軒) 김응환(金應煥;영조18년 임술 생 정조 13년 기유 졸)이 정조 12년 무신에 금강(金剛) 내외제산(內外諸山)을 봉명편행(奉命遍行)하여 사생하고 돌아온 익년 다시 복명하여 일본 지도를 잠사(潛寫)하러 가다가 부산에서 조질불기(遭疾不起)하였는데 단원이 연소(年少)로 수행하여 상사(喪事)를 경리(經理)하고 대마도에 독왕(獨往)하여 그 지도를 그려 올렸다 한다(단원이 영조 경진 생이라면 이때 28세가 된다).
「호산외사」 김홍도전에 상(上)이 금강4군(金剛四郡) 산수를 명사(命寫)케 하실 때 列郡에게 영(令)하시어 주공(廚供)이 이수(異數)2)하였다는 사실이 있으니 이는 아마 김응환과 동행할 때의 사실인 듯하다.
2) 이수(異數): 보통이 아닌 특별한 예우.
하여간 그는 복헌에 수종하고 있었던만치 복헌의 문도로 볼 수 있고 따라서 화풍이 그에 속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당시 복헌의 문(門)에 놀던 사람으로 복헌의 종자인 긍재(兢齋) 김득신(金得臣; 영조 30년 갑술 생, 졸년 69)이 있고 긍재의 아우로 초원(蕉園) 김석신(金碩臣;영조 34년 무인 생)이 있어 이는 복헌에게 출후(出後)하였고 긍재에게는 그 가법(家法)을 계승하여 김수종(金秀鍾;순조조), 김건종(金健鍾;정조 5년 신축생, 향년 61), 유당 김하종(金夏鍾 ; 정조 17년 계축 생) 등 3자가 모두 能畫로 화원이었고 어해(魚蟹)로 유명한 장준량(張駿良;순조 2년 임술 생졸년 69)의 부(父) 옥산(玉山) 장한종(張漢宗;영조 44년 무자 생)과 채접사용(彩蝶寫容)으로 유명한 화산관(華山館) 이명기(李命基 ; 영·정간) 등은 김응환의 여서(女婚)이었다.
단원의 아들 긍원(肯園) 김양기 (金良驥; 헌종 초대까지 생존)도 그 부에 못지 아니하여 그 필법을 분간할 수 없다 하니 이 여러 사람의 개성적 구별이 각기 물론 있지마는 어떠한 점에서 또 필법의 유사도 다소 있을 것이다.
그의 전(傳)에는 산수·인물·화훼·영모가 진묘(臻妙)3)치 않은 것이 없고 신선도에 더욱 능하여 추찰구염4)과 구간의문(軀幹衣紋)5)이 전인(前人)의 수법을 답습치 않고 스스로 천예(天倪)를 운거(運擧)하여 신리(神理)가 소상(蕭爽)하며 혁혁열인(奕奕悅人)6)함이 예원(藝苑) 중 실로 별조(別調)라 하였으니 복헌의 문에 그가 비록 놀았다 하여도 출람(出藍)7)의 예(譽)가 대단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3) 진묘(臻妙):묘함에 이름.
4)推察句染:句染(화법(畫法)의 한 가지. 그림의 윤곽을 그린 다음에 채색하는 방법을 이른다. 鉤染)을 살핌.
5)구간의문(軀幹衣紋):몸에 걸친 옷의 무늬.
6)혁혁열인(奕奕悅人): 아름다와 사람들을 기쁘게 함.
7)출람(出藍):청출어람(靑出於藍).
당대에 단원과 함께 이름이 있기는 긍재 김득신이었고 호생관(毫生館) 최북(崔北;숙종조 사람)이었고 고송(古松) 유수관(流水館) 이인문(李寅文;영조 21년 을축 생 향년 77)이었고 후에 손암(巽庵) 김현우(金鉉宇 ; 영조조 사람)도 병칭(竝稱)되었다 하나 「연천집(淵泉集;洪奭周 저)」에
“김군은 진실로 근고(近古)의 명화(名畵)라(永明의 아우가 소장한 「海山畫卷」)”
고 할 만치 그중에 초연특출한 인물이었다.
그는 이미 도화서(圖畵署)화원이니 마땅히 분묵(粉墨)간에 구구하여 전이모사와 응물상형(應物象形)에 세심치 아니치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소광(疎曠)한 성격은 이에 구애되지 못하여 왕왕히 필단(筆端)의 분방함을 본다. 아니 오히려 분방 광탕함이 그의 한 성격이라, 그가 그린 신선도 중에는 으레 이 기취(氣趣)가 노골로 드러나 있고, 그렇지 않은 곳에도 이러한 기풍은 숨길 수 없이 나타나 있다. 이왕가미술관에 소장된 유명한 〈투견도(鬪犬圖)〉는 오히려 단원으로서 있기 어려운 것이며 그의 의문(衣紋)에서 보는 소광(疎狂)8)함이 그의 특색이라 할 수 있다.
8) 소광(疎狂):너무 지나치게 소탈하여 상규에 벗어나는 일.
그의 화작에 있어서의 소광된 품(品)은 이미 한 유명한 전설로 남아 있으니 즉 정조께서 그로 하여금 분영 거벽(粉靈巨壁)에 〈해상군선도(海上群仙圖)〉를 그리게 하셨더니 단원은 환자(宦者)로 하여금 농묵(濃墨) 수승(數升)을 받들게 하고서 탈모섭의이립(脫帽攝衣而立)하여 풍우같이 휘호하기 수시(數時)에 이내 곧 흉흉(洶洶)한 수파(水波)와 구구10)한 인물이 붕애능운(崩崖凌雲)할 듯이 호타(毫沱)한 기세를 보였다 한다.
9) 탈모섭의이립(脫帽攝衣而立):갓을 벗고 옷을 거두어 잡고 섬.
10) 구구 : 아름다움.
이로써 그의 화풍을 알 수 있지만 당대의 대세로 말하면 최북의 소광방타(疎狂放咤)함이라든지, 이인문의 건립폐락(巾笠弊落)하고 모구심기11) 하여 화불인사(畫不人師)하고 조화사(造化師)하였다는 기개라든지, 좀더 올라가 연담(蓮譚) 김강국(金剛國 ; 인조조 사람)의 방광(放狂)한 풍도(風度),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 숙종 33년 정해 생, 졸년 63)의 종횡분방한 기풍 등 적어도 이름있는 대가들로서 세근(細勤)12)한 평을 받고 있는 사람은 없다.
▶화불인사(畫不人師)하고 조화사(造化師): 그림에 있어서 사람을 본받지 않고 조화를 본받음.
11) 모구심기 : 모습은 파리하고 심기는 기이함.
12) 세근(細勤): 세세한 것에도 정성을 들임.
그러나 이러한 화작에 있어서의 기풍은 조선뿐이 아니었고 당시의 청조(淸朝)의 화단을 두고 말하더라도 세경(細勁)한 작화는 덜어 버리고 주관적 일흥(逸興)만 좇던 문인화가 궁극에 다다라 소위 ‘황한송수13)’의 기풍을 존중하는 경향이 농후하였다.
13) 荒寒松秀 : 황량하고 추운 가운데 거친 소나무가 우뚝함.
석도(石濤), 이선,, 장종(張宗), 창(蒼), 목위 기타 적지 않다.
조선에 있어 이것을 대성한 이는 김추사(金秋史) 일인에게 있다 하겠지만 소당(小塘) 이재관(李在寬;정조조 사람), 소치(小痴) 허유(許維; 순조 9년 기사 생, 졸년 84), 북산(北山) 김수철(金秀哲 ; 순조조 사람), 고람(古藍) 전기(田琦 ; 순조 25년 을유 생, 졸년 30) 등에도 왕왕 이러한 경향의 작(作)을 본다.
그들은 작화에 세필보다 독필(禿筆)을 사용함이 역력히 보이니 이는 요컨대 세근함을 위함이 아니다. 단원에 있어선 아직 이러한 '황한송수’ 정도의 것은 없다. 시대가 아직 경향의 선구였을 뿐이요 도화서 화원이었다는 것이 그로 하여금 아직 정돈된 입장에 남게 하였던 것인가. 분방하면서 또 파격된 작품을 남기지 않은 것은 결국 그의 위대성을 보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산수, 인물, 영모에 응향(應向)치 못함이 없었다 하는 것은 그의 실적(實蹟)에 있어 우리는 수긍할 수 있다.
그에게는 많은 신선도와(永明에게도 어명으로 지은 〈海上群化圖〉가 있다 하고 이왕가박물관, 기타 개인 소장으로도 꽤 있는 모양이다) 풍속도와 도석도(道釋圖;수원 용주사 대웅전 보탑 뒤 삼세여래상이 그의 필적이라고 용주사 사적기 중에 보인다)가 있다.
산수, 영모 등도 또한 항간에 적지 않다. 다만 사진(寫眞;초상을 고대에는 사진이라 한다)만은 그의 유적으로 확실한 것을 볼 수 없는데 문헌에는 그의 사진에 관하여 칭송하는 일파와 칭송치 아니하는 일파의 양개 관점이 있는 모양이다.
즉 칭송치 않는 파의 문례(文例)는 신위(申緯)의 「경수당집(警修堂集)」에 보이니
“임금의 모습을 그리는 화가 이명기(李命基), 김홍도, 패인 이팔룡(李八龍)의 초상화는 천격이 있다. 닮지 않을 것을 근심하여 옹담계가 왕재청(汪載靑)에게 부탁하여 행장을 그리게 하였으나 역시 우리나라의 의관만 비슷할 뿐이다. 이르되 왕재청도 실패하였으니 두 이(李)와 단원의 그림도 같지 않다.”(「근역서화징」)(편집자 역)
라는 것이 그것이다. 즉 이명기, 김홍도, 이팔룡 3인에게 신자하의 초상을 그리게 하려다가 그 같지 않아질 것을 미리 염려하여 옹방강이 소개한 청인(淸人) 왕재청에게 그리게 하였으나 그 역시 의복만 같고 실패하였다는 뜻이다. 실제로 양이(兩李) 및 단원으로 하여금 그려 보게 한 것은 아니니 그 결과는 나지 않아 알 수 없지만 미리 염려한 것은 그만치 신임이 안 되었던 것으로 결국 김홍도의 사진의 능력을 의심케 하는 것이다.
신자하로 말하면 당대의 시·서·화 삼절로 일컬었고 회화에 대하여 안식이 있던 이이니 이 기록은 결코 범연히 볼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남공철(南公轍)의 「금릉집(金陵集)」이라든지 정약용의 「여유당집(與猶堂集)」에는 이명기가 당대의 사진으로 고명했던 것을 말하였으며 정조는 병진년에 집복헌(集福軒)에 임어(臨)하시어 이명기에게 어용을 그리게 하시고 그 득사(得似)함을 기꺼하시어 축장(軸藏)14)케 하셨을 뿐더러 그때 동역(董役)의 학사 서용보(徐龍輔), 이만수(李晩秀), 이시원(李始源), 남공철(南公轍) 4인에게도 각기 조상(照像)을 그려 갖게 하셨다 한다.
14) 축장(軸藏): 두루마리에 감아 보관함.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정조나 정약용은 또한 화재에 능하셨을 뿐더러 일가견이 계셨던 터이니 이네들의 비평도 또한 무시할 수 없다. 그보다도 문제의 김홍도에 관하여 정조의 어제문집(御製文集)인 「홍재전서(弘齋全書)」(권 7 33엽)에 석품봉원운주(石票峯原韻注)라 하여
“김홍도는 그림에 재주 있는 자다. 그 이름을 들은 지 오래니 30년 전 어진을 그린 것에서다. 이로부터 무릇 그림 그리는 일에 속한 이들이 모두 홍도를 주인으로 그를 스승삼았다.
의례적인 법에 해마다 초에 임금의 초상화를 그리는 법이 있었는데 금년에는 김홍도가 웅물헌(熊勿軒)이 주석을 단 주자(朱子)의 시를 8폭 병풍에 그리게 하니 취성정의 뜻을 깊이 그려 내어 원운(原韻)을 쓰고 덧붙여 장(章)에 그려서 조화를 이루어 항상보게 하라고 하였다.” (편집자 역)
라 하셨다.
일 화공으로서 어의(御意)에 이만치 칭지(稱旨)되어 어제 문집에까지 그 성명이 오르게 된 것은 결코 범공(凡工)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또 사진에 능숙함이 없었더라면 결코 저러한 권고(眷顧)15)가 없었을 것이다.
15) 권고(眷顧) : 돌보아 줌.
「정조실록」에 의하면 왕의 5년 신축 8월 26일에 화사(畫師) 한종유(韓宗裕), 신한평, 김홍도 3인으로 하여금 어용(御容) 초본을 각 일 폭씩 모케 하시고 9월 초1일 영화당(花堂)에 임하시어 승지, 각신(閣臣) 등을 소견(召見)하시고 어진 초본을 보신 후 3일에 다시 희우정에 임어하시어 익선관(翼善冠), 곤룡포로 화사 김홍도만 부르시어 어용을 그리게 하셨다가 16일에 완성됨에 서향각(書香閣)에 임어하시어 대신·제신을 소견하시고 서사관(書寫官) 윤동섬(尹東暹;자는 德升 호는 八無堂, 관은 참판에 이름. 숙종 36년 경인 생), 조윤형(曺允亨 ; 자는 釋行 혹은 時中, 호松下翁, 관 知敦寧, 영조 원년 을사 생)으로 하여금 어진 표제(御眞標題)를 쓰게 하시어 드디어 주합루(宙合樓)에 봉안케 하신 사실이 있다.
당시 한종유로 말하면 그 아우 한종일(韓宗一)과 함께 선화(善畫)로 화원이었고 긍재 김득신의 외숙이었으며 신한평으로 말하면 풍속화로 유명한 혜원 신윤복의 부군(父君)으로 역시 화원이었다.
모두 단원보다 선배인데 결국 단원의 사용(寫容)을 취케 되신 것은 단원이 사진으로서 역시 凡手가 아니었음을 알 것이다.
결국 신자하의 김홍도에 대한 의구는 김홍도의 본격을 두고 말함이 아니요, 어떠한 특수한 경우를 두고 말한 것이 아니었던가 생각케 된다. 이때 특수한 경우란 다른 것을 지금 생각할 수는 없고 다만 그의 노경(老境)이란 것을 작량(酌量)할 수밖에 없다.
신자하가 양이(兩李) 및 단원에게 사진케 하려던 연대는 좌우에 그 문집이 없어 곧 알기 어려우나 순조 11년 신미 전후까지는 있었을 법한 것이, 그때 옹방강이 서중(書贈)한 당편(堂扁)에 의하여 그 전 시고(詩稿)를 모두 없애고 그 이후의 것만 수집하여 「경수당집」이라 하였다고 하는 까닭이다.
「호산외사」 김홍도전에 김홍도의 아들 긍원 양기가 '몰이수년(沒已數年)'이라 하였는데 「호산외사」의 서(序)가 헌종 10년에 된 것인즉 단원은 많아서 순조 말년까지 생존하였을 것이요, 그가 영조 36년 경진 생이 사실이라면 순조 말년까지는 73을 계산하고 순조 신미까지는 50세를 계산한다.
그러나 단원이 영조 경진 생이라는 것이 의심되는 것은 전에 「홍재전서」 김홍도기에 보이는 바, 30년 전에 어진(御眞)을 그렸다는 주기(註記)에서이다. 그 주기의 연대가 또한 미상하나 전에 말한 바와 같이 정조 어진을 그린 것이 정조 5년 신축에 있었고 그 후 화공의 이름은 드러나지 아니하였으나 왕의 15년 신해에 다시 사진 사실이 실록에 보일 뿐이다.
왕의 저 주기는 늦잡아 왕의 薨御 이전에 있었을 것이니 왕이 홍어하시기는 경신년이라, 이로부터 30년 전을 잡는다면 영조 신묘년에 속하여 단원의 나이 겨우 12세 때에 속한다.
아무리 천재라 하더라도 12세로서 어국(御局)에 있어 태자(太子)의 어용을 봉사(奉寫)하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정조는 바로 그 전년인 기미년 12월 21일에 어제 문집인 「홍재전서」를 선사완집(繕寫完集)케 하시고 그전 10월 3일에 왕이 친선(親選)하신 주자(朱子)의 아송(雅頌;415편 범 8권)이 완성되어 주자소에서 인진(印進)한 일이 있으니 이때를 기준하여 30년 전을 따진다면 단원이 11세 때가 된다.
이는 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이때를 기준하여 따진 30년 전인 영조 경인년에 바로 화상의 어찬시(御贊詩)가 계시다.
시 중에는 단원의 이름이 드러나지 않았으나 저 30년 전 운운의 주기를 표준한다면 바로 그것이 단원의 봉사(奉寫)였음이 짐작된다. 이러고 보면 결국 단원의 생년은 저 경진년으로부터 아무리 적어도 10년 내지 15년 이상은 추가시키지 아니할 수 없다.
이 10년 내지 15년은 사리상 아무래도 가상(加上)시키지 아니할 수 없으니 이것을 가상한 순조 신미 전후를 본다면 60 넘어 근 70의 노경이다.
평생에 소광하던 단원으로 6, 70에 사진에 실필(失筆) 없기를 기대하기는 곤란한 것이니 신자하의 의구는 결국 이 점에 있었을 것이다.
김복헌에게 수행할 제 단원이 연소하였다 하지만 영조 경진생을 인정하고서도 벌써 28세의 청년이었다. 하물며 10년 내지 15년을 가상시킨다면 38 내지 43~44세에 달한다. 때의 김응환이 48로 졸하였다니 김복헌과의 연차 불과 4~5년이다. 이 역시 전설의 오류일지, 김복현의 생사 연대의 오전(誤傳)일지, 단원의 생년의 오전일지 하여간 엄밀한 고증이 더욱 필요하나 이 문제는 이 이상 더 축구(逐究)하지 않는다.
이상 단원의 생사 연대는 아직 문제이다. 그러나 아무리 신자하가 단원의 사진 능력을 의구했다 하더라도 그는 요컨대 특수한 사정일 뿐이요, 실제에 있어서 단원이 사진에도 능하였던 것을 인정치 않을 수 없다. 사진과 통칭 인물화와는 닮은 것이니 결국 단원은 인물사진, 산수, 화조, 영모에 무불응향하였던 대장(大匠)임을 알 수 있다.
안견, 이상좌, 강희안과 같이 창경(蒼勁)한 고의(古意)를 갖지 못한 것은 시대이라 그를 험할 수 없으나 모든 방면에 있어 활달자재하면서 건실한 화골(畵骨;데생)을 갖고 있음은 이조 500년 이래 또한 비주(比疇)16)가 없을 것이다. 이리하여 우리는 결국 단원의 위대한 소이를 인정하는 바이다.
16) 비주(比疇): 비교할 짝. 비견,
<비고>
「조선고적도적(朝鮮古蹟圖籍)」 제14 책 제 5983도에 신선도 대병(大屛)이 있는데 '병신 춘사(丙申春寫)'라 있고 동 5984도 선동취적도(仙童吹笛圖)에 ‘기해 양월(己亥陽月)'이라 있고 이왕직박물관 소장품 사진첩 상권제89도에 '무술하(戊戌夏)’라 있어 만일 단원이 영조 경진 생이라면 이것들은 그의 15세, 19세, 18세 등 때의 작이 된다. 이는 그 화태(畵態)에서 도저히 시인할 수 없다. 즉 이러한 유작에서도 경진 생이 아니었음이 방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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