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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조선-이제마(李濟馬)

구글서생 2023. 5. 19. 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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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제마(李濟馬)

 

이능화(李能和)
1869~1962. 학자. 호 간정(侃亭). 충북 괴산 생. 정동 영어학당, 한어(漢語)학교, 관립법어 (法語 : 프랑스어 )학교 졸업. 칭경례식사무소(稱慶禮式事務所) 위원을 거쳐, 관립한성 외국어학교 학감 역임.
저서에 「조선불교통사」, 「조선무속고」, 「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 「한국도교사(韓國道敎史)」 등이 있음.

 

선생의 성은 이씨요 휘(諱)는 제마요 본관은 전주이시다. 이조 헌종 4년(무술)에 함흥 남리(南里)에서 출생하셨다. 선생의 조부는 일찌기 진사를 지내셨는데 하루는 꿈을 꾸시던 중 한 마리 용마(龍馬)가 시내를 건너오는 것을 보셨다. 이윽고 꿈을 깨고 보니 어디서 고고한 소리가 들리며 이때 바로 제마 선생이 출생하였다. 그래서 선생의 조부는 이 아이는 우리 집의 천리구(千里駒)라고 하며 명명하되 제마라고 하였다. 선생이 장성하여서도 이 이름으로 행세하신 것이다.

 

선생이 평상에 병법을 좋아하시기 때문에 호를 동무(東武)라고 하셨다. 선생의 상모(相貌)가 웅위(雄偉)하고 안광(眼光)이 형형하여 마치 샛별 빛같이 빛났었다. 그리고 권골1)이 융기하고 음성이 종소리 같아서 사람이 한번 보면 가히 비상한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1)顴骨 : 광대뼈.

 

선생의 집안이 饒富하여 집에는 서고가 있고 장서가 많았는데 선생이 이미 10세에 문리(文理)를 통하여 서고에 나아가 책을 읽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경사(經史)와 자집(子集)을 모두 통달하였는데 그중에 주역을 더욱 좋아하셔서 그 오의(奧義)를 연구하시기에 몰두하였다. 때로는 식사를 폐하고 연구에 심혈을 다하기 때문에 집안 사람들이 술을 들어 밥을 입에 떠넣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누년(屢年)을 연구하는 동안에 마침내 주역의 이치를 통달하여 그 묘체를 발명케 되었다.

 

대개 사람이나 물체를 물론하고 사상(四象)의 덕(太陽,太陰,少陽,少陰)을 구비치 않음이 없었다. 이로써 헤아려 본다면 사람 알기를 신과 같이 할 수가 있다. 곧 사람의 수명 장단과 부귀빈천과 心術의 선악과 또는 길흉회린(吉凶悔吝)2)을 불로 비춰 보듯이 호리(毫釐)도 틀림없이 잘 알 수가 있다는 것이다.

2) 悔吝: 회한(悔恨)

 

선생의 나이 20이 되매 생각한 바 있어서 가재(家財)를 기울여 널리 빈민을 구제하고 또는 조선의 산천과 인물을 구경하던 중 나중에는 만주까지 가서 두루 산천을 구경한 바 있었다. 유람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의주에 들렀던바 의주의 부호 홍씨가 집에 만 권 도서를 비치하고 정결한 초당을 지어 일반에게 열람시킴을 알게 되었다. 선생도 역시 홍씨 집에 가서 그 도서를 득람하며 지식을 더욱 넓히게 되었다. 이로써 경향을 물론하고 선생의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게 되었다.

 

고종 때에 조정에서 널리 인재를 구하게 되어 장신(將臣) 김기석(金基錫)이 특별히 선생을 조정에 추천하여

“이제마는 힘이 넉넉히 천 근을 들 수 있고 안목이 충분히 만 리를 볼 수 있다.”

하고 아뢰었다.

 

조정에서도 그의 추천을 양승(諒承)하고 특히 제마 선생을 불러 군관(軍官)의 직을 임명했다. 그때 고종이 춘천에 이궁(離宮)을 경영하려고 하셨는데 하루는 고종께서 제마 선생을 불러 조용히 말하되

“내가 듣건대 춘천에 피난할 곳이 있다고 하는데 경이 가보고 자세한 것을 보고하라.”

하였다.

선생이 왕의 명을 받고 춘천에 가서 실정을 조사한 후 서울로 돌아와서 왕께 알현하였다.

왕이 기뻐 묻기를

“춘천이 과연 피난할 만하더냐.”

하였다.

선생이 아뢰기를

“산은 심히 좋으나 전국 사람이 피난한다면 모두 수용할 수가 없소이다.”

하였다.

왕이 불쾌히 여기시어 퇴거하라 명령하시고 그로부터 소우(疎遇)하여 다시 부르시지 않았었다.

 

후에 진해 현감에 임명되었는데 그때는 임진 계사년경이었다. 선생이 부임하여 시무하는 중에 한 죄인이 있어서 매를 맞게 되었다. 그자는 그 고통을 참지 못하여 소리를 지르며 신음하였다. 이 광경을 보고 선생이 당에 내려가 그자의 엉덩이를 쓸어 주고 그만 석방한 후 우연히 탄식하되

“비록 국법이 있어서 죄인을 태형한다 할지라도 사람으로는 차마 할 수 없다.”

하였다.

 

그 후 갑오년 여름에 벼슬을 그만두고 서울로 돌아오셨다. 선생은 필자의 집에서 유숙하시며 우리 선친과 우교(友交)를 위목(爲)睦히 하셨다.

 

그때 선생이 사상의서(四象醫書)를 저작하셨다. 선생은 매일 남산에 올라가 송엽(松葉)을 뜯어 씹으시며 약리(藥理)를 연구하셨는데 송엽의 성질이 태양인에게 가장 적합하였다. 선생은 태양인으로 자처하셨는데 병이 나면 건시(乾秭)와 교맥면(蕎麥麵)3)을 복용하시면 쾌유하셨다.

(3)蕎麥麵: 메밀국수

 

필자도 안질이 나서 몇 번이나 눈이 멀었는데 선생이 내 안질을 보고

“네 눈병은 소양인(少陽人)의 위열병(胃熱病)으로 생기는 병인즉 보통 안질로만 치료하면 나을 수 없다. 급히 석고와 활석(滑石)을 조제하여 먹어라. 그 중량은 대변이 순활히 내릴 정도면 좋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우리집 사람들은 활석은 지극히 냉한 것이라 함부로 쓸 수가 없으니 처음은 조금씩 먹고 차차 많이 먹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그래서 처음은 조금씩 먹었으나 약 반 근 가량 먹은 후에 비로소 대변이 원활히 되고 안질도 전쾌하게 되었다.

이에 선생은 미리 소양인에게 응용할 만한 4, 5가지 약방을 만들어 모모 증세에는 모모 약방을 응용하라고 부탁하시고 훈계하시기를

“대개 범인의 병이란 7정(七情)의 절도를 잃는 데서 발하는 것이다. 너는 소양인인즉 애로편급(哀怒偏急)을 주의하여 함부로 애로의 정을 발하지 말라. 애로의 정을 함부로 발하지 아니하면 평생에 병이 없을 것이라.”

고 말씀하셨다. 내가 지금까지 삼가 지키고 그 훈계를 어기지 않았다. 내가 어려서 병이 많았으나 30 이후부터는 자못 건강한 것은 선생의 교훈한 덕이었다.

 

선생이 을미년경에 함흥 옛 마을로 돌아오셨으니 이는 어머님이 병드신 까닭이었다. 병신년에 남중(南中)의 비괴(匪魁) 최문환이 그 도중(徒衆)을 데리고 강원도를 거쳐 함흥에 들어와 관찰사 대리 목모(睦某)를 살해하고 전단을 군현에 두루 붙여 함경도 내는 물끓듯하게 되었다. 때의 함흥의 부로(父老)들이 의논하고 선생으로 하여금 난국을 처리하게 하였다.

 

선생이 기계(奇計)를 써서 최문환을 잡아 영옥(營獄)에 가두고 비밀히 3공형(三公兄)을 경사(京師)에 보내어 새로 관찰사 김유성(金裕成)을 맞아오게 되었다.

김유성이 마침내 부임하여 최문환을 베어 죽이고 함남의 난을 평정하였다. 관찰사가 선생의 공을 생각하여 고원군수를 주천(奏薦)하였으나 선생이 굳이 사양하고 취임치 않았다.

 

그 후엔 다만 한운야학(閑雲野鶴)으로 짝을 삼아 저술과 가르치기로 일을 삼았는데 그때 저술한 것은 사상의서인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1책이었다. 이것은 특히 병고로 신음하는 창생(蒼生)을 구제하려는 자비심에서 하신 일이었다. 그리고 그때 문인으로는 김영관(金永寬), 한직연(韓稷淵) 등이 있었으며 또는 구수심전(口受心傳)한 사람도 많았고 이외에 사숙한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이에 사상의학이 천하에 퍼져서 우리 의학계에 한 이채를 이루었다.

 

그러나 「동의수세보원」이란 실은 선생이 창작한 것이 아니고 모두 고인(古人)의 의방으로 특별히 사상(四象)을 응용하고 분별한 데 불과하다. 그 예로는 같은 하리제(下痢劑)라고 할지라도 석고는 소양인의 병에 적당하고 대황은 태음인의 병에 적당하며 파두(巴豆)는 소음인의 병에 적당하다. 그리고 같은 보익제(補益劑)라고 할지라도 인삼은 소음인의 병에 적당하여 만약 소양인이 복용하면 도리어 해가 되고 녹용은 태음인에 적당하며 숙호4)는 소양인에 적당하다고 한다. 이로써 모든 것을 미루어 가히 알 수가 있다.

(4)숙호: 뜨거운 지황.

 

이 책은 성명론(性命論)으로부터 시작하여 사단론(四端論), 확충론(擴充論), 장부론(臟附論), 의원론(醫源論)에 이르렀는데 (소음인의 위가 밖에서 열을 받으면 열병, 소음인의 위가 안에서 냉을 받으면 寒病으로 논하고 소양인의 비장이 곁에서 냉을 받으면 한병, 소양인의 위가 속에서 열을 받으면 열병으로 논하고 태음인의 위장이 곁에서 냉을 받으면 한병, 태음인의 간이 속에서 열을 받으면 열병, 태음인이 속이 만져지면 소장병이라 논한다) 나중에는 사상인변증론(四象人辯證論)으로써 끝을 막았다. 그 이치가 지극히 묘하고 그 효력이 신과 같아 가히 전 사람들이 발명치 못한 바를 발명한 것이다.

 

그러나 사상인을 변별하는 방법으로는 체격과 상모와 성질과 행위 등을 보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의심이 있어서 잘 알 수가 없는 경우에는 선생은 그 사람과 함께 숙식을 같이하며 수삼 일 지내면서 여러 가지로 물어본 후에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 것을 알게 되었다. 선생의 태도가 이같이 신중하고 정녕(叮嚀)5)하였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선생의 학(學)은 격치(格致)요 선생의 서(書)는 인술(仁術)이었다.

5) 정녕(叮嚀): 틀림없음.

 

고종 4년 경자에 선생이 돌아가시니 향년이 63세였다. 그 익년에 명인(名人)이 이 책을 간행하여 세상에 전하게 되었다.

 

부동의수세보원 선생 자발(附東醫壽世保元先生自跋)

 

“이 책은 계사년 7월 30일 시작한 이래 밤낮으로 생각하고 헤아려 쉴 틈이 없이 하여 익년 4월 13일에야 마쳤다.

소음인과 소양인을 논한 것은 대략 상세함을 갖추었고, 태음인과 태양인을 논한 것은 삼가서 그 간략함을이루었다. 모든 것의 경험이 두루 미치지 못했는데 정력이 미비한 까닭이다. 날짜를 기록하였으니 이르지 못한 것은 생각을 하여라. 만약 태음, 태양인과 같으면 헤아려 이해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어찌 간략한 것이 손해가 되지 않으리오.

만 가구나 되는 마을에 도공이 하나면 그릇이 부족하고 백 가구가 되는 마을에 의원이 하나면 사람들을 치료하는 것이 부족할 것이다.

반드시 의학을 널리 알려 집집마다 의술을 알고 사람마다 병이 무엇인지 알면 연후에는 가히 원래의 수명을 보전하여 세상을 살 수 있으리라.

갑오년 4월 13일 함흥 이제마는 한성(漢城)의 남산 가운데서 이 책을 마친다.

오호라, 갑오에 쓰기를 마친 후에 을미에 고향으로 내려가 경자년에 이르렀도다. 인하여 이 초본(草本)을 고치니 성명(性命論)에서부터 태음인에 관한 여러 이론에 이르기까지 각각 증산(增刪)하였는데 태양인 이하 3논(論)은 증산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제 갑오년 옛 판본으로서 간행하는 것이다.

 

광무(光武) 5년 신축 6월 일

함흥군 율동계(栗洞契) 신간(新刊 ; 율동 선생 묘지에 소재한 문인 등이설치한 계의 이름)

문인(門人) 김영관, 한직연, 송현수(宋賢秀), 한창연(韓昌淵), 최겸용(崔謙鏞), 위준혁(魏俊赫), 이섭항(李恒)” (편집자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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