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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조선-임상옥(林尙沃)

구글서생 2023. 5. 19.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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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임상옥(林尙沃)

 

문일평(文一平)
1888-1939. 사학자, 호 호암(湖), 평북 의주 생. 일본 와세다(早) 대학 정치학부 중퇴. 상해에 있는 대공화보사(大共和報社)에 근무, 귀국 후 중동·중앙 등에서 교편을 잡았고, 중외일보 기자를 거쳐 조선일보 편집 고문으로 7년간 근무.
저서에 「조선사화」, 「호암전집」, 「조선문화예술」, 「한국의 문화」 등이 있음.

 

지하에 묻힌 고적 유물을 파내는 것만이 문화적 발굴이 아니다. 사회 저층에 묻힌 역사적 인물을 들추어 내는 것도 역시 문화적 발굴의 하나이다. 이런 의미에서 순조조 국제 거상(巨商) 임상옥 같은 인물을 잘 구명하여 당시 무역계의 대표자로서의 역사테 안에 집어넣는 것이 어떠할까. 모르면 모르거니와 문화사를 설명할 때 오늘날 새 각도로 본다면 역사테 밖에 두어서는 아니 될 인물인가 한다.

 

그러나 종래 조선 습속이 사관(仕官)을 중시하고 상고(商賈)를 멸시하여 임상옥을 비록 일반인이 구비(口碑)로 성전(盛傳)하되 사적 인물로 평가한 일은 없었다. 시이사변(時異事變)한 금일에 앉아 조선사를 총결산할 때 영상대감보다도 한 무역상 임상옥이 오히려 문화적 가치 있는 인물로서 이채를 가졌음은 부인하지 못할 바이다.

 

치자군(治者群)에게만 편중한 과거의 기록이 일반 사회생활에 대해서는 한각(閑却)했으므로 국제적 거상의 활약하던 사실이 당시 「승정원일기」 한 줄에나 본군 읍지 한 페이지에 적혀 있지 아니하다. 그 자손이 만든 행장을 보건대 국가와 사회에 끼친 그의 업적을 다 말하면서도 정작 필요한 알맹이인 상업적 사적을 은폐하기 때문에 당시 동양의 제일 대도(大都)인 연경으로 오락가락하며 무역상 엄청난 활동을 하던 거인의 면모가 나타나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유자(儒者)의 일정한 繩墨 아래 그린 문자보다도 속인의 구비전설이 도리어 사실을 전함에 있어서 가까울는지 모른다. 그러므로 먼저 그 행장을 소개한 뒤에 다시 그 구비전설을 들어서 오로지 거인 임상옥의 국제무역가로서의 활동한 일단을 추미(推摩)1)코자 한다.

1) 추마(推摩): 추구하여 헤아림.

 

폐관자수(閉關自守)하던 시대에도 국경 방면에 조그만 무역시장이 있었으니 남쪽 부산과 북쪽 회령과 서쪽 의주가 그것이다. 전자는 일본인을 상대로, 중자는 여진인을 상대로, 후자는 지나인을 상대로 한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들의 국경 무역시 중에 가장 크기는 연경 통로의 관문이요 연강물화(沿江物貨)의 출구인 의주이었다.

 

매년 정기로 국제무역이 의주시장을 통하여 행하게 될새 가장 중요한 무역품은 반도 명산인 인삼이었는데 의주 출생으로 국제 거상이 된 임상옥의 성공도 이 인삼 매매에 대리(大利)를 박득(博得)한 때문임을 알아야 하겠다.

 

만일 조선인이 인삼을 당시 국제의 무역품으로 좀더 이용의 방법을 강구하였을진대 국제적 거상으로 임상옥 같은 부호가 몇천백이 났을는지 모를 것이거늘 그것을 잘 이용하지 못하고 만 것도 조선인이다. 그러나 여기 주의할 것은 임상옥이 대성공한 그 배후에는 정권이란 것이 있었던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임상옥은 순조조에 세도하던 박종경(朴宗慶) 집과 깊은 관계를 지어 국가의 힘으로도 터주기 어려운 인삼 무역의 10년간 독점권을 얻었다. 이것이 임상옥으로 하여금 그 상업상 천재를 마음대로 발휘케 할 일대 기회를 준 것이거니와, 자본가와 정치가가 서로 결탁하는 것은 오늘날만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아무리 정권의 배경과 독점의 기회를 가졌더라도 그것을 잘 활용하여 대리를 획득하는 것은 인간 자신에게 달린 것이 아닌가. 임상옥은 그 명석하고 치밀한 두뇌와 민첩하고 영롱한 수완과 그리고도 또 비상한 담략이 있어 위대한 국제무역가가 될 만한 온갖 요소를 구비하였다. 임상옥이 한번은 예년과 같이 입연(入燕)하는 조선 사신을 따라 인삼 판매차로 당시 동양 대도인 북경에 갔더니 그의 독점을 시기하여 그리했던지 북경 청상(淸商)들이 비매동맹(非賣同盟)을 조직하여 가지고 임상옥이 있는 데는 인영(人影)도 얼씬하지 못하게 하니 문자 그대로 문전에 작라(雀羅)2)하게 쯤 되었다.

2) 작라(雀羅): 새 잡는 그물.

 

그런데 귀기(歸期)는 차츰 박두하게 되므로 인삼을 염가에라도 방매하지 않을 수 없게 되니 청상의 비매동맹한 내용은 그 실은 이 한 몫을 보자던 것이다. 임상옥의 명안냉뇌(明眼冷腦)로 어찌 이런 형편을 추찰하지 못하랴. 그는 비매동맹에 대하여 일대 보복책을 강구하였으니 보복책은 무엇이냐 하면 가지고 갔던 인삼을 온통 불로 소각하려 한 것이었다.

 

그는 일대 결심하에 인삼포(人蔘包)를 잔뜩 뜰에 내쌓고 불을 지르매 연염(煙焰)이 일어났다. 비매동맹한 청상들은 밤낮 임상옥의 행동을 밀탐하고 있다가 이때 급보를 듣고 놀라 모두 달려와서 제각기 연염 중에 있는 인삼포를 끄집어 내니 그 가격은 10배나 폭등하였다. 그러나 가격의 고하는 불문하고 서로 경쟁적으로 집어가게 되었다. 당시 청인들은 조선 인삼을 먹지 못하면 죽는 줄로 인정했으므로 이처럼 머리를 싸매고 들이덤빈 것이다. 다만 가소할 일은 청상들이 임상옥을 골리려고 하다가 도리어 그 술(術) 중에 떨어지되 떨어지는 줄도 알지 못한 점이다. 청상의 비매동맹을 당하던 임상옥은 역경을 잘 전환시켜 일거에 누백만 금을 획득하여 국제적 거부를 이루니 그 혁혁한 대성공이야말로 천하 상고의 선망의 的이 되었다.

 

그리하여 많은 은괴와 단속(緞屬)을 싣고 금의환향하게 된 임상옥은 의문(倚門)하여 바라던 노모에게 보이고 그 묻는 말씀에 대답하여 가로되

“은괴는 쌓으면 저 마이산만 하고 단속은 쌓으면 저 남문루만 하겠다.”고 하였다 한다.

이로써 그 부력(富力)의 일단을 추찰하려니와 이 성공이 그의 장년 시절에 있는 만큼 천재의 조달(早達)하던 것을 알 것이다.

 

무역계 거인 임상옥은 이조 정조 3년 기해(1779) 12월 10일에 평북 의주에서 출생하여 철종 6년 을묘 (1855) 5월 29일에 77의 고령으로 의주 본제(本第)에서 장서(長逝)하였다. 상옥의 자는 경략(景若)이요 호는 가포(稼圃)이니 전주 임씨라.

본래 평남 안주에 거주하다가 그 증조 때에 의주로 옮겨 왔는데 선년(先年)부터 상업에 종사하였으며 그 父 봉핵도 역시 연경에 왕래하던 상고이었다.

 

이로 보면 임상옥의 상고적 전통은 그 유래가 유구함을 알 것이다.

 

「가포집(稼圃集)」 자서(自序)를 據하건대 그가 18세부터 상업에 나서 연로(燕路)에 출입할새 풍찬노숙(風餐露宿)에 온갖 고초를 비상(備嘗)하였으며 28세에 그 부상(父喪)을 만날 때에는 적채산압(積債山壓)하고 가세 경공하여 상신(喪身)임에 불구하고 상업을 계속하여 38세에 이르렀다. 이해에 백마산성 서쪽 삼봉산 밑에 선묘(先墓)를 천봉(遷封)하고 그 익년에 가서 묘 아래 대하(大厦) 수백 간을 영축하고 장차 복거(卜居)의 계(計)를 하니 그 주장간가(周墻間架)3)가 굉려박치(宏麗博多)한 듯하나 동성이척(同姓異戚)이 군거함에는 그렇지 않을 수 없다고 임상옥은 그 자서에서 변명하였다. 그리하여 그 신축의 가옥이 4, 5년 만에 낙성하매 구대(舊垈) 남곽에서 이리로 입거하니 임당화석(林塘花石)의 승(勝)이 있어 만년 휴식의 소(所)가 될 만하여 이로부터 봉사양객(奉祀養客)과 독서 영시로 자오(自娛)하였다.

3) 주장간가(周墻間架) : 주위의 담장과 간살.

 

그 행장을 보건대 그는 일찌기 신미 홍경래난에 수성(守城)의 공과 또 신사년 변무사(辨誣使) 수원(隨員)으로 입연(入燕)의 공이 있음에 의하여 조가(朝家)에서 오위장(五衛將)을 시키고 또 완영중군(完營中軍)을 주었으나 사양하고 부임하지 아니하였으며 54세에 특지로써 곽산군수가 되매 혜정(惠政)이 많았다 하고 익년에 구성부사가 되었다가 정부의 論斥으로 해서 罷歸 이후로 드디어 仕進에 절의(絶意)하였다 한다.

 

거인 임상옥도 가정적으로 결코 행복스럽다고 할 수 없으니 그 두 아우 한 아들이 모두 조사(早死)하였다. 그리고 그는 세로(世路)에도 풍파가 많았으니 한번은 어사 모가 그 가옥이 참람(僭濫)4)되다 하여 대부분을 훼철하고 또 임상옥을 착수(捉囚)하여 일시는 생명의 위험이 있을 뻔하였다.

4) 참람(僭濫): 분수에 넘침.

 

그는 봉신미수(丰神美鬚)5)에 사변(辭辯)이 여류(如流)하고 겸공유신(謙恭有信)에 교류하는 바는 다 당시의 명류요, 대인 접물에 모두 온언(溫言)으로 하고 수응을 민활히 하여 문에 머무는 객이 없었다 한다.

5) 봉신미수(丰神美鬚):당당한 풍채와 아름다운 수염.

 

치가(治家)하기를 근검 상밀(詳密)히 하여 일용집물(日用什物)을 반드시 정소(定所)에 두었으며 부서(簿書) 정연하여 사호(毫)도 차착(差錯)이 없었으며 서신 왕복에 있어서는 비록 아랫사람에게라도 반드시 楷正6)하게 하고 봉함까지도 극히 정제하게 하여 아무리 분요분급(紛擾忿急)한 때라도 조금이나마 소홀함이 없었다.

6) 楷正: 글자의 획이 똑바른 것.

 

천성이 효우(孝友)하여 부모에게 진성하고 형제에게 사랑을 다하고 그 다른 원근 친척에게 은혜가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40세도 되기 전에 대성공한 국제적 부호 임상옥은 공익과 사혜(私惠)에 많은 금전을 희사했으니 그는 참말 적이능산(積而能散)하고 복의소재(伏義疎財)하던 고마운 인물이었다.

적이능산(積而能散): 재물을 모아 유익한 일에 씀.

 

의주읍인에게 대해서만 그의 전후 진시(賑施)가 누만 냥에 달했으므로 동읍지에 임상옥은 주궁휼빈(周窮恤貧)하여 약장불급(若將不及)이라고 했거니와 이 밖에 각종 각양인에게 구급제간(救急濟艱)한 것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若將不及: 굴원의 이소경에 나오는데. ‘장차 미치지 못할까의 뜻이다

汩余若將不及兮(골여약장불급혜) 나는 늦을까 서둘렀으나 恐年歲之不吾與(공년세지불오여) 세월이 나와 같이 아니할까 두렵다.

 

한번은 전주감영인가 어느 이방이 공금을 많이 흠포(欠逋)8)하고 장차 그 생명이 위태하게 되매 하루는 그가 비상한 결심하에 멀리 임상옥을 의주에 찾아가 보고 당돌하게도 5만 낭을 청구하니 임상옥이 일언에 쾌락하고 경성으로 환전하여 주었다.

8)흠포(欠逋): 관청의 재물을 사사로이 씀.

 

이 일면식이 없는 과객에게 거액의 금전을 시여(施與)하는 것이 너무나 수상하여 時下人 하나가 임상옥에게 물었더니 임상옥이 말하되 그 사람의 면모에 살기가 뻗친 것을 보라고 하였다. 사람을 시켜 비밀히 그자의 뒤를 탐지하매 과연 불여의(不如意)하면 임상옥을 해하려고 회중(懷中)에 비수까지 감추고 왔던 사실이 판명되었다 한다. 이는 그 많은 일화 중의 하나에 불과하나 이에 의하여 그 견인(見人)의 명감(明鑑)과 구급의 아량이 얼마나 투철함을 짐작할 수 있는 동시에 그의 지점 또는 연락 상인이 의주 본점을 중심하여 조선 각처에 널려있던 것을 알 것이다.

 

임상옥은 지인의 명감이 투철할 뿐 아니라 무슨 물품이든지 잘 감정하는 안식이 있으므로 박물군자의 칭을 들었었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큰 산삼을 가지고 와서 임상옥에게 감정을 청하매 임상옥이 아침 일광에 그 산삼을 자세히 검시하더니 말하여 가로되 이것이 경삼(驚蔘)9)이라고 하였다. 그자가 감히 은폐하지 못하고 과연 어떤 산사 정방(井傍)의 수림 중에서 채취한 것을 자백하였다 한다.

9)경삼(驚蔘): 산삼의 한 가지로 자연 그대로 자란 것이 아니고 옮겨 심어서 기른 삼

 

이 비슷한 일화 전설을 꼽자면 항간에 유행하는 것이 얼마든지 있으나 여기서는 특히 그 한두 예를 보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부호로서의 임상옥의 생활은 어떠했는가 하면 그 집에는 簿記 적는 자만 해도 70여 인이 되었다 한다. 그 집 곳간에는 천하 보물과 일용집기가 다 있었는데 한번은 의주부윤의 옥로(玉鷺)가 파손되어 이를 임상옥의 집에서 구했더니 그 집엔 몇 십백의 옥로가 저축되었더라고 하며, 한번은 미산(美山) 홍도정(洪都正)이 산호장(珊瑚杖)을 가지고 임상옥 집에 갔다가 그것이 최절(崔折)되매 그 집에 있던 많은 산호장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 한번은 임상옥 집에 원접사(遠接使), 평안감사, 의주부윤이 찾아갔는데 그 일행 700명의 요리를 각상으로 하여 일시에 들였다. 음식도 음식이려니와 그 기구가 얼마나 놀라운가. 여기서 그 호화로운 생활의 일단을 엿볼 것이다.

 

사적 인물인 임상옥에게 대한 평가는 고금이 크게 부동(不同)하니 옛날은 그를 아무쪼록 관서의 사대부로서 보려 하였고 오늘날은 그를 적나라하게 국경 무역상으로 보려고 한다. 이것이 곧 고금의 관찰이 크게 부동한 점이다. 그러므로 이른바 그의 오위장, 곽산군수 및 구성부사 같은 벼슬은 그 당시 하향인(遐鄕人)10)에게 얼마만큼 영예이었을는지 모르되 그 인물의 사적 가치에는 아무 관계가 없으며 홍경래난의 방수와 변무사행의 수원 같은 공로도 그 당시 인리(隣里) 부로(父老)에게 다소 자랑거리가 될는지 모르되 그 인물의 사적 가치에는 아무 증감이 없는 바이다.

10) 하향인(遐鄕人): 서울에서 먼 시골에 사는 사람.

 

차라리 홍경래를 도왔다면 방수보다는 특색이 있을는지 모른다. 다만 빈궁을 주휼하고 급난을 구제하던 기다(幾多)의 자선 공익사업과 같은 것은 확실히 그 인격의 미를 빛내기에 족하나 그러나 그것이 한 읍 한 지방의 사료가 됨에는 유여(有餘)하고 일국 일민족의 사료가 됨에는 부족하다.

 

요컨대 이상에 말한 관직과 훈공과 진휼 같은 것이 모두 그가 훌륭한 사대부가 될 만한 것을 사실적으로 명증하는 바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무역상을 떼어 버리고 사대부로서만 본다면 이러한 사대부는 거의 전 조선에서 얼마든지 수출(搜出)할 수 있다.

 

임상옥이 임상옥이 된 소이는 그의 이른바 사대부에 있지 않고 무역상에 있으니 이것은 이미 여러 번 말한 바이다. 이조에 있는 그는 인삼 무역에 황금시기인 순조조의 대표적 무역가인 만큼 인삼 무역의 추세 일단으로 자본가의 대두를 설명함에 있어 빠뜨리지 못할 인물인가 한다. 조선 인삼이 중국 시장에 다량으로 수출되기 시작한 것은 정조 말부터이니 조선 인삼의 우월성을 깊이 알게 된 당시 청국 상고들은 조선 인삼을 자꾸 찾아 수요가 격증하게 된 때문이다.

 

종래 공무역은 역관에게만 속한 것으로 인삼은 1인에게 8포 곧 80근으로 한하였던 것이 정조 말에 이르러는 100근이 되고 순조 때에 가서는 일약하여 8천 근이 되고 그 후 헌종 때는 4만 근이 되었다. 그러나 이는 법정의 근수뿐이요 내용으로는 밀무역이 성행하여 도저히 방지할 수 없으므로 순조 10년 경오(1810)에는 정부로부터 의주 상고 6인에게 5년 기한(다시 5년 연장?)으로 인삼 무역권을 허여하는 동시에 세금을 과하니 정부가 공공연하게 상고에게 인삼 무역권을 허여함은 이것이 처음이다.

 

이 이면에는 당시 거상 임상옥의 책동이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임상옥 외에도 홍득주(洪得周) 같은 기다의 부호가 당시 의주에서 굴기하게 된 것은 이 인삼 무역권을 튼 이후의 일이다. 임상옥은 이렇게 순조 이래 인삼에 대한 국제무역을 한 손에 장악했던 대표적 거상으로서 일종 이채 있는 인물임을 한 번 더 말하여 둔다.

 

영웅회수(英雄回首) 즉 신선이라 하더니 무역계 거인인 임상옥은 물루(物累)를 초월하여 시계(詩界)에 소요함을 즐겨하였다. 이재(異才)를 품고도 하향(遐鄕)에 나기 때문에 일개 무역상에 멎게 한 당시 사회적 환경과 또는 그 두 아우 한 자식이 조사(早死)하기 때문에 가정적 고적이 그로 하여금 비현실계에서 위안을 구하려 한 것도 미상불 시인이 되게 한 일인 (一因)일 것이다.

英雄回首卽神仙(영웅도 머리만 돌리면 바로 신선이다)

 

그러나 다정다한한 그는 천생(天生) 시인의 소질을 가졌던 것이다. 18세까지는 독서 영시로 전문하고 40세 이후로는 또다시 독서 영시로 消遣하였다. 그는 비직업적 一 시인이었다. 가장 타산적인 상업과 가장 비타산적인 시를 겸유한 그는 일견하면 정반대성임에 틀림없으나 여기서 그 고결한 인격이 드러난다.

 

“재물 위에서는 물과 같이 평평하고 사람 가운데는 저울같이 곧네” (편집자 역)11)

는 그의 인격을 그린 輓詩이거니와 그의 인격은 부(富)에 가리우게 되고 그의 시는 인격에 가리우게 되었다.

11) “財上平如水 人中直似衡

 

「가포집」이란 그의 창화시(唱和詩)를 보건대 무려 누천백 수에 달하며 만년에 가서 그가 자영(自詠)한 것을 추려내어 따로 한 책을 만들어 「적중일기(寂中日記)」라고 이름하였는데 그중에 가송(可誦)할 싯구가 많이 있다.

그가 곽산 관아에 재임할 때 〈삼교시붕(三橋詩朋)〉 1연에

“새봄 처마엔 제비 다투어 날아오니 강호의 옛 약속 잊어질까 두렵네” (편집자 역)12)

12)“新春簾幕爭來燕 舊約江湖恐負鷗

 

기타 〈월야유홍(月夜遺興)〉의 1연에

“들에 남은 꽃은 취한 자취 깨게 하고 성 머리의 달은 창가로 끌어내도다”(편집자 역)

 

또 <영청각야회(永淸閣夜會)>의 4율 1수에

“삼경의 관촉(官燭)은 꽃샘 추위 부끄러하고

몇해 만에 서로 만나니 만단을 말하도다

누각 주인은 전날의 태수이고

시 읊는 가객(嘉客)은 늙은 선비로다

즐겨 놀며 오늘의 만남을 기뻐하니

이 지방에 순박한 풍속이 어찌 이리 많은가

서주에 돌아가면 많은 일 있으리니

영청교 위의 달은 유유히 흐르는구나” (편집자 역)

 

지금 그 「가포집」 자서의 수행의 글을 소개하건대 그 초두에

“남쪽 성곽의 아래에 거주하는 곳은 곧 조상들이 사시던 곳이다. 6, 7세로부터 외부의 스승에게 나아가 15세에 이르기까지 경사를 대충 섭렵하고 문리가 겨우 나게 되었다. 혹은 명사들을 쫓아다니고 혹은 사찰에서 홀로 공부하여 읽은 것을 거의 스스로 해독하였다. 시가 거의 스스로 이루어진 것은 꽃이 스스로 피며 달이 스스로 둥글게 되는 것과 같아 하루에는 하루의 공부가 있었고 한 달에는 한 달만큼의 효과가 있었다. (중략) 아! 이때에 이르러 부친께서 연로하시고 가정에는 근심이 많았다. 올려 보면 부모님 봉양할 길이 없었고 굽어보면 가솔들을 거느리고 기를 방법이 없었다. 동쪽에 고각을 설치한 것이 지름길이라고 잘못 알게 되니 이때가 18세였다. 이로부터 연경에 10여 년을 출입했다. (중략) 병인년에 이르러…아버님께서 돌아가시는 비통함을 만났으니 하늘이 노래지고 울음이 솟구쳤다. 그러나 빚더미는 산과 같았고 가세는 완전히 기울어 앉아서 먹을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비록 상복을 입은 몸이지만 계속 장사를 하게 되었다. 다시 갑술년에 첫째 동생의 상을 당하고 기묘년에는 막내 동생의 죽음에 이르렀다. 동기간의 죽음이 쌓이고 드디어 혼자 남음에 이르니 이때의 일은 말하기 어렵고 정황은 측량키 어려웠다. 세월은 물의 흐름과 같아서 벌써 38세에 이르니 곧 병자년이었다. 이해에 아버님의 묘소를 백마성의 서쪽 삼봉산 아래 신동(薪洞)의 동북쪽 첫번째 산기슭으로 옮겼다.(중략) 정축년에는 선고의 묘소 아래에 몇 개의 서까래를 엮어서 조석으로 바라볼 수 있는 장소를 만들었다. 남들은 이것이 궁궐과 같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나 나는 그러한 이름을 감당할 수 없다. 집이 다 지어지매 집 주위에 길게 담장을 두르니 굉장히 화려하고 너무 사치한 것이라고 하지만 동성이척의 여러 사람들이 모두 거처하려면 마땅히 이 정도는 되어야 할 것이다. 경진년에 새집에 들어오매 숲과 연못, 꽃과 돌 사이에 새들이 집을 지으니 책이나 읽으면서 만년에 휴식할 만한 장소가 될 만하다.”(하략)(편집자 역)

 

의주뿐이 아니라 관서지방에서는 임곽산(林郭山)이라면 아동 부녀까지도 모르는 이 없고 또 그를 일종의 이인(異人)으로 여긴다. 그는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평생 행적이 인의(人意)에 超出하여 남 못 보는 것을 보고 남 못 하는 일을 하는 때문이다.

돛대즙

 

일거에 수백만 냥을 획득함도 심상인(尋常人)의 상상키 어려운 바이거니와 금전을 사용함에 있어도 횡으로 동포를, 종으로 자손을 위하여 영구의 계를 하였다.

 

일례를 들면 거액을 던져 교량과 주즙(舟楫)13)을 장만하여 연로의 교통을 편리케 함과 천 석을 내어 산성 수비의 자량(資糧)을 삼게 함과 같음은 그 원려(遠慮)에서 나온 것이며, 자녀에게 금전을 그대로 주면 지키지 못한다 하여 사토(私土)를 궁지(宮地)로 만들어 영구히 이동할 수 없이 한 것도 역시 원려에서 나온 것이다.

13) 주즙(舟楫):배와 돛대.

 

그것을 그 증손이 근년까지 보지하여 오다가 유명한 불이(不二)농장이 되었음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지마는 임상옥은 이렇게 백 년 앞길을 내다본다고 칭도하는 이가 있는 것도 그럴듯이 수긍된다.

 

그는 본디 이지적 사람인 데다가 다년간 상업상 경험이 부(富)했으므로그 안광이 이인(異人)의 칭을 들을 만큼 원대했던 것도 알 수 있다. 상인은 농민보다는 지혜가 밝고 계획이 원대한 법이니 농민은 기껏해야 일년지계에 지나지 못하나 상인은 십년 내지 수십년지계를 세우는 것은 항다반사이다.

 

이로 보면 당시 국제 거상이던 그로서 이만한 선견과 이만한 원려가 있다는 것은 반드시 놀랄 바 아니다. 다만 홍경래난에 관서 부호가 많이 관련하였으되 임상옥 그는 홍경래를 미리 알고 모면했다 한다(전하는 말에 홍경래가 임상옥 집에 장부 적는 서기로 들어갔더니 임상옥이 조용히 경래를 불러 말하되 “그대 같은 이는 朝家 서기에는 적합하나 私家 서기에는 부적하다”고 婉辭로 拒送했다 한다).

 

세간에서는 임상옥이 이처럼 두상(頭上)에 임박했던 대화(大禍)를 미연에 방지했다 하여 이로써 그를 또한 이인시(異人視)하는 이도 있다. 어쨌든지 그가 내심으로 다소 불평이 있었는지 모르나 표면으로 전술한 바와 같이 홍경래 방수의 공이 있기 때문에 살아서는 오위장을 제수하게 되고 죽어서는 학봉사(鶴峰祠)에 배향하게 되었다. 오늘날까지 이인으로 숭앙되는 임상옥은 의주 고군면(古郡面) 마렵산 좌축지원(坐丑之原)에서 영면하고 있다.

 

그가 등을 구르던 의주군 곽 저택은 오늘날에 와서는 6, 7개의 대가로 나뉘었고 삼봉산 밑의 촌장(村莊)은 그 대부분이 훼철되고도 오늘날 남아있는 間架가 오히려 백 간으로 헤아리게끔 宏大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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