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雜同散異 87

군가-勇進歌(용진가)

* 勇進歌 * 작사/작곡: 미상 1.요동만주 넓은 뜰을 쳐서 파하고 여진국을 토멸하고 개국하옵신 동명왕과 이지란의 용진법대로 우리들도 그와 같이 원수 쳐보세 *나가세 전쟁장으로 나가세 전쟁장으로 검수 도산 무릅쓰고 나아갈 때에 독립군아 용감력을 더욱 분발해 삼천만 번 죽더라도 나아갑시다. 2.한산도의 왜-적을 쳐서 파하고 청천강수 수병 백만 몰살하옵신 이순신과 을지공의 용진법대로 우리들도 그와 같이 원수 쳐보세 3.배를 갈라 만국회에 피를 뿌리고 육혈포로 만군 중에 원수 쏴 죽인 이준공과 안중근의 용진법대로 우리들도 그와 같이 원수 쳐보세 4.창검빛은 번개같이 번쩍거리고 대포알은 우레같이 퉁탕거릴제 우리 군대 사격돌격 앞만 향하면 원수머리 낙엽같이 떨어지리라 5. 횡빈대판 무찌르고 동경 드리쳐 동에 갔다..

雜同散異 2023.04.02

晦箴(회잠)- 李德懋(이덕무) 靑莊館全書(청장관전서)

惜言如金。鞱跡如玉。 淵默沉靜。矯詐莫觸。 斂華于衷。久而外燭。 말 아끼기를 황금같이 하고, 자취 감추기를 옥같이 하라. 깊이 침묵하고 침정(沈靜)하여, 꾸미고 거짓함에 부닥치지 말라. 빛남을 속에 거두어들여서, 오래되면 밖으로 나타나리라. ( 出典:李德懋의 靑莊館全書 第4卷 / 嬰處文稿二 - 箴 ) 晦箴이라 하였으니 靑莊館이 한 달을 마칠 때마다(그믐이 될 때마다) 자신의 경계로 삼았던 글귀이거나, 아니면 晦에는 '가리다. 감추다'의 뜻이 있으니 자신을 감추고 드러내지 말라는 警句이겠습니다. 위의 글은 한국고전종합DB( https://db.itkc.or.kr/)에서 가져왔으니 틀리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옛날의 글귀는 정확을 기하기 위하여 原典을 찾는 노력이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그것만 옳다고는 할 수 없..

雜同散異 2023.03.31

炯言挑筆帖序(형언도필첩서)-朴趾源(박지원)

雖小技有所忘,然後能成,而况大道乎. 비록 작은 기술도 망각이 있고 난 뒤에야 성취되는데 하물며 大道임에랴! 崔興孝通國之善書者也. 최흥효는 나라를 통틀어 서예를 잘하는 사람이었다. 甞赴擧書卷, 得一字, 類王羲之坐視, 終日忍不能捨, 懷卷而歸, 是可謂得失不存於心耳. 일찍이 과거를 보며 시권을 쓰다 한 글자를 얻었는데, 왕희지와 유사하여 앉아서 종일토록 보다가 차마 버릴 수가 없어, 시권을 품고서 돌아왔으니 ‘득실이 마음에 있지 않았다’고 할 만하다. 李澄幼登樓而習畵 家失其所在, 三日乃得. 이징은 어려서 누각에 올라 그림을 익혔는데 집에선 그가 있는 곳을 잃어버렸다가, 사흘 만에 찾았다. 父怒而笞之, 泣引淚而成鳥, 此可謂忘榮辱於畵者也. 아버지가 화가나서 매질하니 울면서 눈물을 끌어 새를 그렸으니, ‘영예와 욕됨을..

雜同散異 2023.03.20

척당불기(倜儻不羈)

글자 [倜척]대범하다 [儻당]소탈하다 [羈]구속하다. 얽매다 意義 ‘큰 뜻과 기개가 있어 남에게 얽매이거나 구속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漢나라許愼의 ‘說文解字’를 보면 ‘倜은 倜儻, 不羈다. 높고 큰 모양이다’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疎脫하고 豪放하여 구속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倜儻의 유래 우선 倜儻이란 단어의 유래는 司馬遷의 報任少卿書에 나온다. [漢詩와 漢文] - 報任少卿書(보임소경서) 報任少卿書(보임소경서) 報任少卿書(보임소경서)- 任安에게 보내는 答書 報任少卿書 또는 報任安書는 漢의 사학가인 司馬遷이 친구인 任安에게 보낸 편지이다. 任安은 漢武帝 때 益州刺史와 北軍使者護軍을 역임하였 koahn.tistory.com 자결을 하지 않고 사서를 쓰는 것은 척당했던 사람들을 본받고자 한다고 나타내고 있..

雜同散異 2023.03.15

第五倫(제오륜)의 사사로움

或問第五倫曰,公有私乎. 어떤 사람이 第五倫에게 묻기를“공께도私私로움이 있습니까?”하였다. 對曰, 昔人有與吾千里馬者, 吾雖不受, 每三公有所選擧, 心不能忘, 而亦終不用也. 吾兄子嘗病, 一夜十往, 退而安寢. 吾子有疾, 雖不省視, 而竟夕不眠. 若是者豈可謂無私乎. 대답하여 가로대 “예전에 나에게 천리마를 줄 사람이 있거늘 내 비록 받지 아니하였으나, 매양 삼공에게 천거하는 일이 있을 때에는, 마음에 능히 잊지 못하되, 또한 마침내 쓰지 아니하였다. 내 형의 아들이 일찍이 병들었거늘, 하룻밤에 열 번 가되 물러와 편히 잤다. 내 아들에게 병이 있거늘, 비록 살펴보지 아니하나 밤이 마치도록 자지 못했다. 이렇듯 함이 어찌 가히 私私가 없다 이르리오?” * 三公은 삼정승, * 選擧은 관리를 시험 보여 뽑음, * 第五는..

雜同散異 2023.03.14

이정암(李廷馣)의 불벌(不伐)

朝廷聞公被圍, 上下憂危. 조정에서 이정암(李廷馣) 공이 왜적에게 포위당했단 말을 듣고 상하가 모두 위태로움을 근심하였다. 及捷至, 只言賊以某日圍城解去. 一無張皇語. 이겼다는 보고가 도착했는데, 단지 “적이 아무 날에 성을 포위한 것을 풀고 물러갔나이다”라고만 했지, 일체의 장황한 말이 없었다. 議者言, 却賊易, 不伐功尤難. 의논하는 사람이 말했다. 적을 물리치기는 쉽다. 공을 자랑하지 않기가 더욱 어렵다. -김육(金堉, 1580-1658),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 임진왜란 때 일이다. 이정암이 황해도 연안을 지나다가 왜적을 맞아 싸우게 되었다. 성안에는 5백의 군사가 있었고, 해주를 함락한 후 승승장구 쳐들어온 왜병은 3천명이 넘었다. 그는 섶을 쌓고 그 위에 앉아 지휘했다. 성이 함락되면 스스로 불..

雜同散異 2023.03.14

冠禮(관례)

1.정의 전통사회에서 남자들의 성인식에 해당하는 유교의례. 전통의례. 2.내용 상투를 틀어 갓[冠巾]을 씌우는 의식을 중심으로 한 여러 가지 절차로서, 남자아이가 15세가 넘으면 관례를 행하고, 그때부터 한 사람의 성인으로 대우하였다. 한편, 여자는 쪽을 찌고 비녀를 꽂아주는 의식으로서 계례(筓禮)를 행하였다. 이와 같은 관례의식은 『家禮』의 유입과 더불어 우리나라에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家禮』의 유입 이전인 고려시대에도 관례의 기록이 나타난다. 『고려사』에는 광종·예종·의종 때에 왕태자의 관례를 행한 기록이 보인다. 이로 보아 고려왕실에서도 유교식 관례를 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사대부 집안에서는 예서에 따라 관례를 행하였지만, 대부분의 경우 예서보다 간소하게 행하였다. 그리고 근래..

雜同散異 2023.03.14

散人(산인)에 관하여

손님이 와서 물었다. 그대는 이 세상에서 자유로운 사람이요, 아니면 절도 있는 사람이요?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못 미치고, 절도 있는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욕망이 깊소. 지금은 고삐 매인 말처럼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닌 상태로 멈추어 서 있으니 뭔가를 얻은 것이요, 잃은 것이요? (客有至而問者曰, 子世之散人也, 拘人也. 散人也而未能, 拘人也而嗜慾深, 今似繫馬止也, 有得乎, 而有失乎.) -蘇軾, ‘雪堂問潘邠老’ 장자의 人間世편에 보면, 제사 지내는 곳에 심겨 있는 거대한 나무를 보고 제자가 아주 좋은 재목이라고 감탄하자, 목수인 스승이 말한다. “그러지 마라. 그렇게 말하지 마라. 저건 성긴 나무다. 저걸로 배를 만들면 가라앉고, 저걸로 관을 만들면 빨리 썩고, 저걸로 그릇을 만들면 빨리 부서..

雜同散異 2023.03.14

字(자)와 號(호)

1.개괄 우리 선현들은 이름 외에 字, 號, 諡號 등을 사용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며, 이를 짓는 데는 어떤 법칙이나 경향이 있었을까. 우리 조상들은 이름을 매우 중요시하고 소중하게 여겼으며, 자신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고 자랑스럽게 보존하고자 노력하였다. 명예라는 말이 바로 이름을 자랑할 수 있게 한다는 뜻이었다. 특히 한자문화권의 사람들은 훌륭한 뜻이 함유된 이름을 짓고 顧命思義라 하여 항상 자신의 이름이 품고 있는 뜻을 되돌아보며, 그 의미를 생각하고 그에 맞는 행동을 하고자 노력했으니 이것이 修身의 한 방법이기도 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태어나면 이름을 갖게 되고, 성년식의 일종인 冠禮를 치르면서 字를 갖게 되며, 號도 짓고, 공적이 있는 사람은 국가에서 죽은 뒤에 諡號까지 내려 주어, 한 사람을 ..

雜同散異 2023.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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