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漢詩와 漢文 (1490)
耽古樓主의 한문과 고전 공부
騎牛之辯 有一達官未達時 常騎牛出郊.어떤 높은 관리가 아직 출세하지 못했을 때, 언제나 소를 타고 郊外로 나갔다. 人譏之曰何不騎馬而牛乎 사람들이 그것을 기롱하였다.“왜 말을 타지 않고 소를 타십니까?” 答曰馬者午也 縮頭爲午 出頭爲牛 此吾出頭象也 그가 대답하였다.“말은 午이니, 머리를 움츠리면 午이고, 머리를 내면 牛가 된다. 이것은 내가 머리를 드러내는 象이다."▶ 支干으로 午는 馬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午가 붙은 해에 태어난 사람은 말띠고, 午가 붙은 날은 말날이다.▶ 이것은 문맥상으로는 '내가 말을 타지 않고 소를 타는 까닭은'이라는 뜻이다. 人皆奇之 後脫麻至達顯사람들이 모두 기이하게 생각했더니, 뒷날 麻衣에서 벗어나 높은 관리에 이르렀다.▶ 脫麻: 벼슬하지 못하고 있던 상태에서 몸..
寃哉牛乎 李孝權夢牛則吉 孔頎夢牛則凶.李孝權이 소 꿈을 꾸면 吉하고, 孔頎가 소 꿈을 꾸면 凶했다.▶ 李孝權: 이 이야기에 선비로 되어 있으나 더 이상은 알 수 없다. 二人將赴會圍 李熟睡 孔假寐 忽有牛大如巨岳 暫過於庭 向孔吼曰子欲不見 我來見子 두 사람이 장차 會試에 응시하려고 할 제, 이(李)는 깊이 잠들고, 공(孔)은 살풋 잠이 들었는데, 갑자기 큰 산 같은 소가 잠깐 마당을 지나가면서, 孔을 보고 울고는 말하였다."그대가 보지 않으려 하므로 내가 그대를 보러 왔다."▶ 會試: 文武科의 初試 급제자가 서울에 모여 다시 보는 과거 시험을 말한다. 覆試라고도 하는데, 여기서 합격하면 다시 殿試를 보게 되어 있었다. 會圍: 회시(會試)를 보는 시험장. 孔蹴李曰子亦見之乎 曰不見 孔이 李를 툭툭 차면서 말하기..
別安東妓 有一朝官姓金者 別安東妓於豊山郡 痛哭移時 行四五里 見路傍古墳 下馬拜哭.성이 김씨(金氏)인 朝官이 豊山郡에서 安東 기생을 이별하면서 통곡하고 떠날 때, 한참을 지나 네댓 마장을 가서는 길가의 오래된 무덤을 보고 말에서 내려 절을 하고 곡했다.▶ 豊山郡: 여기서는 郡이라고 했으나 사실은 縣이었고, 풍산현은 安東府에 속해 있었다.▶ 安東: 안동부, 安東人都護府. 경상도에 속했던 지명으로 오늘날의 경상북도 안동이다. 有老奴曰郎君何哭之哀也.늙은 종이 말하였다."서방님께서는 어찌해서 곡을 하며 슬퍼하십니까?" 郎君曰此吾先祖墳也 餘二十年 今來過謁 是以哭之.郎君이 말하였다"이것은 내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무덤이다. 20여 년 만에 지나다가 뵙게 되었기에 곡하였다." 奴曰郎君與娘氏相別 痛哭之後 涕淚盈睫 餘哀未盡.老..
此老屈强 趙石磵爲司諫 被臺官所劾.趙石磵이 司諫일 때 臺官의 탄핵을 받았다.▶ 趙石磵: 趙云仡. 고려 충숙왕 복위 1년(1332~조선 태종 4년(1404). 문신으로, 石磵은 그의 호다. 본관은 풍양(豊壤)이다. ▶ 司諫: 조선시대 사간원의 종삼품 벼슬 이름이다. 본래는 知院事였는데 세조 12년에 이 이름으로 고쳤다. 臺官以公緘劾問 石磵不答 但書一絶曰一杯酒 一杯酒 大諫醉倒春風前 不願富 不願貴 但願無事終天年.대관이 公緘劾問했더니, 石磵은 대답하지 않고 다만 한 絶句를 써서 일렀다.“한 잔술 또 한잔 술로 大諫은 봄바람에 취해 쓰러졌네. 부유하기도 바라지 않고 귀하기도 바라지 않고 단지 아무 일 없이 타고난 나이를 마치기를 바라네.”▶ 公緘: 공사(公事)에 관하여 주고 받는 글월.公緘劾問: 서신으로 죄상을 따..
被罪室人 有文武官妻同里閈 文官과 武官의 아내가 같은 마을에 살고 있었다.▶閈(한) : 이문, 마을, 담 武官能制室人 常加毆打 文官受制室人 常被毆打 隣里常稱 武官爲丈夫 文官爲非丈夫무관은 능히 아내를 제압해 항상 아내를 때렸으나, 문관은 아내에게 제압당해 항상 맞으니, 동네 이웃들이 항상 무관을 장부(丈夫)라고 칭찬하고, 문관은 장부가 못 된다고 했다. 南政丞智曰男子之被毆打婦人 聞之懦弱 思之則非惡德.男子之加手於婦人 聞之則嚴斷 思之則非美德也.정승인 南智가 말하였다."남자가 아내에게 맞았다는 말을 들으면, 나약하다는 소문이 나고 악덕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남자가 아내에게 손찌검을 하면, 엄하게 단속한다고 소문이 나고 미덕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南智: 문신으로 자는 智叔, 본관은 宜寧이다. 영의정 在의 손자..
做工三上 洪先生日休 喜作詩 柳先生太初曰子於何地做工洪日休 선생이 시 짓기를 즐겼는데, 柳太初 선생이 물었다.“그대는 어디서 짓는 것이 가장 공교로운가?”▶ 洪日休: 이름은 逸童, 자는 日休, 호는 麻川子, 본관은 南陽이다. 조선 초의 문신이다.▶ 유태초: 유성원[柳誠源, ?~세조 2년(1456)]. 死六臣의 한 사람으로 자는 태초(太初), 호는 琅玕, 본관은 문화(文化)이다. 舍人 士根의 아들이다. 日休曰古人所謂三上也.日休가 말하였다.“옛날 사람이 이른바 삼상(三上)이라는 곳이다.”▶ 三上: 시문을 지을 때 가장 착상이 잘 떠오르는 세 곳을 말하는데, 곧 마상(馬上: 말 위)・침상(枕上: 베개 위)・측상(上: 화장실 위)이다. 중국 시인 구양수의 ≪歸田錄≫에 나온 말이다. 柳曰見子之詩 馬上枕上廁上 吾可一一..
行乎與崔揚善 禪宗住寺和尙行乎 博該經文 且機警 術士崔揚善 恃口才.禪宗 住寺和尙 行乎는 經文에 해박하고 또한 예민하고 민첩했고, 術士인 崔揚善은 말재주를 자부했다.▶ 機警: 매우 재빠르고 날래며 재치(才致) 있음.▶ 住寺和尙: 고유명사로 볼 수도 있겠고, 관점에 따라서는 住持僧을 말한 것으로 볼 수도 있을 듯하다.▶ 行乎: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세종 때에 判禪宗事를 지낸 스님이다.▶ 崔揚善: 조선 초기의 술사였다. 세종 때에 서운장루(書雲掌漏)를 지냈다. 一日 詣和尙 論辯 縱橫如流 和尙難之.하루는 和尙을 방문해 논변하는데, 종횡하기를 물 흐르는 듯하니 화상이 곤란하였다. 揚善問和尙曰三歲童子 皆有頭髮 七十和尙 何無頭髮.하루는 揚善이 화상에게 물었다.“세 살 먹은 아이도 모두 머리카락이 있는데, 일흔 먹은 ..
以名爲姓 釋家稱名 以下字爲主 如佛稱兩.佛家에서는 이름을 부를 때 아래에 있는 글자를 위주로 하니, 마치 불가에서는 두 이름을 부르듯이 한다.▶ 稱兩: 언뜻 들어서는 이름이 둘인 것으로 오해하게 되어 있다는 뜻이다. 아니면 서로 다른 사람을 부르는 것으로 오해하게 되어 있다는 뜻으로 볼 수도 있을 듯하다. 上人一雲 稱雲和尙之類.上人 一雲을 雲和尙이라고 부르는 따위가 그렇다.▶ 上人: 知德을 갖춘 佛弟子, 혹은 승려를 높여 부르는 말이다. 여기서는 후자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譯官 有艾儉 唐夢賢者 皆中國來姓.譯官 艾儉과 唐夢賢은 모두 중국에서 온 姓이다.▶ 艾儉과 唐夢賢은 중국계의 역관(譯官)으로 조선 초기, 특히 세종 때에 활약했던 사람들의 이름이다. 或問艾 子是誰後耶 艾猝應曰鄧艾之後 어떤 사람이 艾儉..
無子與十子 有一宰相 無子 妻甚悍妬 平生不睨粉黛.어떤 宰相이 자식이 없으나, 아내가 투기가 심해서 평생 젊은 여자를 곁눈질하지 못했다. 晩年自悔 有詩曰自從人道起於寅 父子相傳到此身 我罪如何天不弔 未爲人父鬢孫新 늘그막에 스스로 후회해 지은 시가 있다.“저절로 사람의 도리를 좇아 寅에서 일어나, 父子가 서로 전해서 이 몸에 이르렀네. 내 죄가 어떠하기에 하늘도 불쌍히 여기지 않아서, 아직 남의 아버지가 되지 못하고 귀밑털 움만 새롭네.”▶ 自從人道: ‘누가 가르쳐 준 것이 아니라 저절로 알게 된 남녀 관계를 통해서'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起於寅: 남녀 간의 혼인법은 인황씨(人皇氏)가 만든 법이고, 인황씨는 寅時에 생겨났다고 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으로 이해된다.▶ 鬢孫: 귀밑털움. 살짝에 돋아난 흰 머리..
黜僧 高麗全盛時 王輪寺僧千數百人 皆有穢行.고려 전성시대에 王輪寺의 승려가 천 수백 명이었는데 모두 더러운 행실이 있었다.▶ 王輪寺: 개성 송악산 기슭에 있는 고려 시대의 큰 절 이름이다. 有一髡慝淫尤縱 淄徒共議黜之.한 스님이 간특함과 음란함이 더욱 제멋대로니 스님들이 그를 내쫓으려고 함께 의논했다. 髡曰若然則闔寺.그 스님이 말하였다.“만약 그렇게 하면 곧 절을 닫게 될 터이다.”▶ '만약 그런 정도를 허물이라고 해서 나를 내쫓는다면 이 영통사에는 쫒겨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고, 그래서 스님들을 다 쫓아내면 절은 문을 닫게 될 것이다'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諸長老 齊聲作隊而出議 遂寢.모든 長老가 일제히 소리내며 무리를 지어 의견을 내더니, 마침내 잠잠해졌다.▶ 長老: 학식이 풍부하고 나이 많으며 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