耽古樓主의 한문과 고전 공부
赤壁賦(적벽부)/蘇軾(소식) 본문
赤壁賦(적벽부) / 蘇軾(소식)
▶ 赤壁賦 : 이 글은 神宗 元豐 5년(1082) 가을 7월에 쓰였다. 당시 東坡는 烏臺詩案으로 黃州(지금의 湖北省 黃岡縣)에 安置되어 있었다.
삼국시대 周瑜가 曹操를 격파한 赤壁은 이곳이 아니고 지금의 湖北省 嘉魚縣이다. 東坡는 자신이 있었던 赤壁이 적벽대전의 적벽인 줄 잘못 알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후적벽부 또한 그러하니, 동파는 적벽대전이 일어난 적벽을 사실상 보지 못한 셈이 된다.
이 시를 지은 송나라의 소식(蘇軾, 호는 東坡)는 당송 8대가의 한명으로 더구나 아버지, 동생과 더불어 한 집안 인물이 당송을 대표하는 문인으로 자리하여 三蘇로 불리었다.
그는 글뿐 아니라 서화 · 그림에도 능하였다.
왕안석과 대립하다 좌천되어 중국 호북성 황주에 유배되어 있을 당시 그 곳에다가 세웠던 서재의 이름을 따서 동파거사라 하였고, 1802년 가울과 겨울 황주 성벽 적벽에서 놀면서 지은 작품이 赤壁賦이다.
7월에 지은 것이 ‘전적벽부’라 하였고 10월에 지은 것을 ‘후적벽부’ 라고 하였으며 그의 대표작이다.
壬戌之秋七月旣望, 蘇子與客泛舟, 遊於赤壁之下.
壬戌年 가을 七月 旣望에 나 蘇軾은 손님과 赤壁 아래에 배를 띄우고 놀았노라.
▶ 壬戌은 宋 元豐 5년인 1082년이고 이때 소식의 나이는 47세였다. 旣望은 음력 16일이다.
▶ 赤壁 : 양자강 상류에 있는 황강현 황주의 강언덕 이름. 중국 하북성에 있는 암벽으로 붉은 빛을 띠고 있다.
淸風徐來, 水波不興, 擧酒屬客, 誦明月之詩, 歌窈窕之章.
맑은 바람은 천천히 불어오고 물결은 일지도 않으매, 술잔을 들어 손님에게 勸하면서 明月의 詩를 읖조리고 窈窕章을 노래하였더라.
▶ 屬客 : 손님에게 술을 따르다. 屬은 '기울이다'의 뜻이 연장되어 술을 권하다라는 뜻으로 쓰였다.
▶ 明月之詩 《唐宋八大家文鈔 校注集評》에는 曹操가 지은 〈短歌行〉을 이른다고 보았다. 이 詩에 "明星稀 烏鵲南飛"와 "明明如月 何時可掇"라는 구절이 있음을 착안한 것이다.
그러나 《詩經》 〈陳風 月出〉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여기에 “달이 떠서 환하거늘 아름다운 사람 예쁘기도 하도다. 어이하면 그윽한 시름을 펼까. 마음에 애태우기를 심히 하노라(月出皎兮 佼人僚兮 舒窈糾兮 勞心悄兮).”라는 구절을 가리킨 것이라 한다.
▶窈窕之章 : 《唐宋八大家文鈔 校注集評》에는 《詩經》 〈周南 關雎〉를 이른 것이라 하였는바, 이 詩의 첫 장에 “窈窕한 淑女, 君子의 좋은 짝이로다(窈窕淑女 君子好逑).”라는 구절이 있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의 窈窕는 위에 보이는 〈陳風 月出〉의 ‘窈糾’를 가리키는 것이라는 주장이 있음을 밝혀둔다. 東坡가 이때 뱃놀이를 하면서 ‘窈窕淑女’를 노래했다는 것은 실정에 맞지 않는 듯하다.
少焉, 月出於東山之上, 徘徊於斗牛之間, 白露橫江, 水光接天.
조금 있으니 달이 東山 위로 떠올라 南斗星과 牽牛星 사이를 배회하니, 흰 이슬이 江을 가로질러 있고 물빛은 하늘에 닿았더라.
▶ 少焉 : 얼마 뒤에
▶ 斗牛之間 : 南斗星과 牽牛星의 사이.
南斗星은 청명한 여름밤 남쪽하늘에 射手별자리에 밝게 보인다. 射手座에는 6개의 밝은 主星이 南斗星을 형성하고 있으며 상호 어우러져 밝게 비추고 아름다움을 뽐낸다.
北斗七星은 大熊座, 南斗六星은 人馬座에 있다.
▶ 白露:가을 하늘에 茫茫한 이슬.
▶ 橫江:강면을 가로지르다. 즉 강면 위에 옆으로 펼쳐져 있다.
縱一葦之所如, 凌萬頃之茫然, 浩浩乎! 如憑虛御風而不知其所止, 飄飄乎! 如遺世獨立, 羽化而登仙.
갈대 만한 배가 가는대로 맡겨 두어 萬頃의 아득한 물결을 타고 가니, 넓고도 넓도다! 虛空에 依支하여 바람을 탄 듯 그칠 곳을 모르겠고, 훨훨 나부끼도다! 人間世上을 버리고 홀로 서서, 날개가 돋아나서 仙境에 오르는 듯하도다.
▶ 縱 : 任憑
▶ 一葦 : 한 잎의 갈대. 작은 배를 가리킨다.
▶ 所如 : 如는 往, 去의 뜻. 가는 바
▶ 凌萬頃之茫然 : 凌은 배를 타고 건너가다. 萬頃은 한없이 너른 바다. 茫然은 하도 너르고 멀어서 아득한 모양을 말함.
▶ 浩浩乎 : 넓고 큰 것을 뜻하는 형용하는 말.
▶ 憑虛御風 : 憑은 의지한다. 虛는 허공을 가리키며, 御는 乘과 같다.
▶ 飄飄乎 : 가볍게 나부끼는 모습. 몸이 두둥실 가벼이 떠오른 모양을 말함.
▶ 遺世獨立 : 遺世는 속세를 떠나다. 속세를 떠나 그 어떠한 사물 에도 속박되지 아니한 대자연의 경지에 홀로 섬.
遺世: 티끌같은 세상을 떠나다.
▶ 羽化而登仙 : 몸에 날개가 돋아 신선이 되어 仙境에 오르다.
於是, 飮酒樂甚, 扣舷而歌之, 歌曰, 桂棹兮蘭槳, 擊空明兮泝流光, 渺渺兮予懷, 望美人兮天一方.
이에 술을 마시고 몹시 즐거워 뱃전을 두드리며 노래하니, 노래말에 이르기를,
「桂樹나무 노와 木蘭 삿대로 물에 비친 달을 치며 흐르는 달빛을 거슬러 오르나니, 아득하여라 내 그리움이여 미인을 바라보니 하늘 한쪽에 있네. 」라고 하였다.
▶ 扣舷 : 뱃전을 두드리다.
▶ 桂棹兮蘭槳 : 계수나무로 만든 櫓와 난 나무로 만든 상앗대
▶ 空明 : 달이 물속을 환히 비친 것을 가리킴.
▶ 泝 : =溯. 물결을 거슬러 올라감
▶ 流光 : 달빛으로 물결이 반짝이는 것.
▶ 渺渺 : 아득히 먼 모양
▶ 予懷 : 자기가 품고 있는 회포
▶ 望美人兮天一方 : 美人은 일반적으로 君主를 가리키며, 天一方은 하늘의 어느 한쪽을 가리킨다.
松江 鄭澈의 〈思美人曲〉 역시 군주를 사랑하는 심정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一說에는 美人을 東坡가 그리워하는 벗으로 보기도 하고, 神仙으로 보기도 한다.
客有吹洞簫者, 依歌而和之, 其聲嗚嗚然, 如怨如慕如泣如訴.
손님 가운데 洞簫를 부는 이가 있어 노래를 따라 和答하니, 그 소리가 오열하듯 구슬퍼 怨望하는 듯, 思慕하는 듯, 흐느끼는 듯, 하소연 하는 듯 하였더라.
▶洞簫 : 퉁소. 악기 이름
▶嗚嗚然 : 오열하듯 구슬픈 소리의 형용.
餘音嫋嫋, 不絶如縷, 舞幽壑之潛蚊, 泣孤舟之釐婦.
그 餘音이 가냘프게 실처럼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니, 깊은 골짜기의 물에 잠긴 蛟龍을 춤추게 하고, 외롭게 홀로 떠있는 배의 寡婦를 눈물짓게 하였더라.
▶ 嫋嫋 : 실같이 가늘고 긴 것을 표현한 형용사. 가냘프고 길게 이어지다.
▶ 縷:가느다란 실.
▶ 幽壑 : 깊은 골짜기
▶ 潛蛟 : 숨어 있는 蛟龍. 교룡-뿔 없는 용
▶ 孤舟之釐婦 : 孤舟는 외로운 작은 배요, 嫠婦는 과부이다.
白居易의 《琵琶行》에 홀로 있는 商人의 처가 말하는 것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저는 강어귀 왔다갔다하며 빈 배 지키오니, 배를 둘러싼 것은 밝은 달과 차가운 강물이었습니다.
밤 깊자 홀연히 젊었을 적 일 꿈꾸니 꿈에 우느라 화장한 얼굴에 눈물이 붉게 흐른답니다(去來江口守空船 繞船月明江水寒 夜深忽夢少年事 夢啼妝淚紅闌幹)." 여기서는 이것을 원용한 것이다.。
蘇子愀然正襟, 危坐而問客曰, 何爲其然也?
나는 슬픈 마음이 들어 옷깃을 여미고 곧추앉아 손님에게 묻기를,
「어찌 그리 슬픈게요?」라고 하니,
▶ 愀然(초연) : 감상에 젖어 얼굴색이 변한 모습. 애처로운 얼굴빛
▶ 正襟:옷소매를 바로잡다.
▶ 危坐 : 몸을 바로하여 앉다.
短歌行(단가행)/ 曹操(조조)
▶단가행(短歌行)은 한나라 악부(樂府)의 명칭. 장가행(長歌行)이라는 악부가 따로 있는 것으로 보아 단가, 장가는 소리의 장단으로 구분한 것임을 추측해 볼 수 있음. 對酒當歌,人生几何? 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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客曰, 月明星稀烏鵲南飛, 此非曹孟德之詩乎?
西望夏口東望武昌, 山川相繆鬱乎蒼蒼, 此非盟德之困於周郞者乎?
方其破荊州下江陵, 順流而東也, 軸艫千里旌旗蔽空.
釃酒臨江橫槊賦詩, 固一世之雄也而今安在哉?
況吾與子, 漁樵於江渚之上, 侶魚鰕而友麋鹿.
駕一葉之扁舟, 擧匏樽而相屬, 寄蜉蝣於天地, 渺滄海之一粟.
哀吾生之須臾, 羨長江之無窮, 挾飛仙以遨游, 抱明月而長終, 知不可乎驟得, 託遺響於悲風.
손님이 답하기를,
"「달은 밝고 별은 성긴데 까막까치가 南쪽으로 날아간다」라 함은 曹孟德의 詩가 아니오?
서쪽으로 夏口를 바라보고, 동쪽으로 武昌을 바라보며 山川이 서로 얽혀 빽빽하고 푸르니, 여기가 바로 盟德이 周郞에게 困辱을 치른 곳이 아니던가요?
바야흐로 荊州를 擊破하고 江陵으로 내려가서 물의 흐름을 따라 동쪽으로 갈 적에, 전함은 千里에 이어지고 깃발은 하늘을 가리었소.
술을 걸러 강가에서 槍을 비껴들고 詩를 읊었으니, 참으로 一世의 英雄일진대 只今은 어디에 있는가요?
하물며 나는 그대와 강가에서 고기 잡고 나무하며, 물고기와 새우를 벗하고 고라니와 사슴을 벗하고 있구려.
一葉片舟를 타고서 표주박 盞을 들어 서로 勸하며, 하루살이같은 人生을 天地에 맡기니, 滄海에 한 알의 좁쌀과 같소이다.
우리의 삶이 잠깐임을 슬퍼하고 長江의 無窮함을 부러워하며, 하늘을 나는 神仙을 끼고 즐겁게 놀고 밝은 달을 끌어안고 오래도록 살아보려 하나, 불현듯 불가능함을 알게 되니 그 餘韻을 가을 바람에 맡겨 남긴 것이오."라고 하였다.
▶ 月明星稀 烏鵲南飛 : 曹操가 지은 短歌行의 일절.
▶ 曹孟德 : 曹操(155~220)로 孟德은 그의 字이다. 沛國 譙縣 사람으로 後漢 말기 黃巾賊의 난에 공을 세워 두각을 나타내었으며, 여러 군벌들을 차례로 평정하고 이후 승승장구하여 獻帝로부터 魏王에 봉해졌다.
뒤에 아들 曹丕가 선양을 받아 魏나라 황제가 된 뒤에 太祖 武帝로 추존되었다. 後漢 獻帝 建安 13년(208)에, 曹操가 천하를 통일하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여 劉備와 孫權의 연합군과 맞선 赤壁大戰에서 대패하고, 이로부터 魏․蜀․吳 三國이 鼎立하게 되었다. 한편 曹操는 建安時代 가장 뛰어난 문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많은 문학 작품을 남겼으며, 때로는 창을 비껴 들고 詩를 지어 읊기도 하였다.
▶ 夏口 : 지명. 지금의 湖北省 漢口
▶ 武昌 : 지명. 지금의 湖北省 무창.
▶ 繆:얽을 무. 감길 료(繚)와 통한다. 감아돌다.
▶ 鬱乎 : 초목이 빽빽하게 들어서 무성한 모양.
▶ 孟德之困於周郞: 漢獻帝 建安 13년(208), 吳 나라 장수 周瑜가 赤壁大戰에서 曹操의 80만 大軍을 공격하여 궤멸시킨 것을 말한다. 周郞은 周瑜(175~210)의 애칭으로 吳나라 사람들이 周瑜를 사랑하여 이렇게 불렀다 한다. 字가 公瑾이며 廬江 舒縣(지금의 安徽省 舒城) 사람으로 孫策이 王業을 일으킬 적에 24세로 建威中郞將이라는 중책을 맡아, 건국에 큰 공을 세웠다. 孫策이 죽자 孫權을 보좌하여 前部大都督이 되어 吳나라의 병권을 장악하였는데, 建安 13년(208)에 劉備와 연합하여 曹操의 대군을 赤壁에서 대파하였다.
▶ 方其破荊州下江陵 :
荊州는 南陽 · 江夏 · 長沙 등 8郡을 관할하였고 지금의 湖南과 湖北 일대를 말한다.
江陵은 당시 荊州의 수도로 지금은 湖北省의 縣名(江陵縣)이다. 당시 劉表가 荊州를 맡아 다스리고 있었는데, 劉備가 그에게 귀의하였다. 劉表가 죽자 그의 둘째 아들 劉琮이 뒤를 이었는데, 용렬한 劉琮은 조조曹操가 80만 대군으로 쳐들어온다는 말을 듣자 그대로 曹操에게 항복하였다. 이에 曹操는 싸우지 않고 荊州를 점령한 다음 長江 하류에 있던 吳나라 孫權에게 항복하기를 강요하였다.
曹操에게 쫓겨 멸망 직전에 몰렸던 劉備는 諸葛亮의 계책에 따라 吳나라와 연합하여 赤壁의 一戰으로 曹操를 대파하고 三國鼎立의 기반을 구축하였다. 曹操는 패전한 뒤에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華容道로 도망하여 다시는 長江 지방을 엿보지 못하였다. 下江陵의 下를下城으로 보아 江陵을 함락한 것으로 보기도 하나, 실제로 曹操는 荊州에 無血入城함으로써 이 일대를 싸움 없이 접수하였으므로 ‘내려가다’의 뜻으로 해석하였다.
▶ 舳艫千里 : 舳(축)은 배의 뒤쪽 즉 船尾이고 艫(로)는 배의 앞머리 즉 船頭이다. 배가 천리를 잇닿아 있음을 뜻한다.
▶ 旌旗 : 軍에서 쓰는 여러 가지 旗.
▶ 釃酒 : 술을 거르다. 따르다(斟酒)
▶ 橫槊(횡삭) : 槊은 여덟 자나 되는 긴 창. 창을 비껴 들다.
▶ 漁樵 : 고기 잡고 나무 하는 일.
▶ 江渚 : 강 가.
▶ 蝦 : 새우.
▶ 麋鹿(미녹) : 고라니.
▶ 匏樽(포준) : 표주박 술잔.
▶ 相屬(상촉) : 主客이 서로 술을 권하는 일.
▶ 寄蜉蝣於天地 : 천지에 붙어 사는 하루살이. 즉 인생이란 짧고 잠시적인 것을 비유한 것. 寄는 붙어 머무르다. 蜉蝣는 하루살이.
▶ 渺滄海之一粟 : 창해의 좁쌀 같이 작은 것. 인류라는 것이 천지 사이에 존재하는 극히 작은 것임을 비유함.
渺:극히 작다. 滄海:큰 바다.
▶ 須臾 : 잠깐 동안, 눈 깜짝할 사이.
▶ 遨遊(오유) : 멀리 가서 놀다. 밖에 나와 자유롭게 노니는 것.
▶ 驟 : 갑자기, 별안간.
▶ 遺響 : 퉁소 소리의 餘韻.
▶ 悲風 : 가을바람(秋風).
蘇子曰,
客亦知夫水與月乎?
逝者如斯而未嘗往也, 盈虛者如彼而卒莫消長也.
蓋將自其變者而觀之, 則天地曾不能以一瞬, 自其不變者而觀之, 則物與我皆無盡也, 而又何羨乎?
且夫天地之間, 物各有主, 苟非吾之所有, 雖一毫而莫取, 惟江上之淸風與山間之明月, 而得之而爲聲, 目遇之而成色, 取之無禁, 用之不竭, 是造物者之無盡藏也, 而吾與子之所共樂.
내(蘇軾)가 말하였다.
「그대도 저 물과 달을 알고 있소?
흘러감이 이 물과 같지만 흘러가서 없어진 적은 아직 없고, 차고 빔은 저 달과 같지만 끝내 줄거나 늘지는 않는구려.
그것이 變하는 입장에서 보면 天地는 한 瞬間도 變하지 않은 적이 없지만, 變하지 않는다는 입장에서 보면 萬物과 나는 모두 다함이 없으니 또 무엇을 부러워하리오?
게다가 天地 사이의 事物에는 저마다 따로 임자가 있어서, 眞實로 나의 소유가 아니면 비록 털끝 하나라도 取하지 말아야 하나, 오직 江 위의 淸風과 山間의 明月은 귀로 들으면 소리가 되고, 눈에 뜨이면 빛을 이루나니, 취함에 禁하지 않고 씀에 다함이 없으매, 이는 造物主의 다함이 없는 寶藏이니 나와 그대가 함께 누릴 바로다. 」라고 하였다.
▶ 盈虛者如彼……而吾與子之所共樂 : 《古文眞寶後集》 註에 “《朱子語錄》 한 조항에……‘盈虛者如代’의 代자는 대부분 彼자로 잘못되어 있고, ‘吾與子之所共食’의 食자는 대부분 樂자로 잘못되어 있다. 일찍이 東坡가 손수 쓴 本을 보니 모두 代자와 食자로 되어 있다. 食은 食邑의 食과 같다(朱子語錄一條……云 盈虛者如代 代字多誤作彼字 而吾與子之所共食 食字多誤作樂字 嘗見東坡手本 皆作代字食字 食如食邑之食).”라고 되어만 있고 고치지는 않았다. 이 내용은 《朱子語錄》 130권에 보이는바, 食은 ‘누리다’의 뜻이라고 하며, 中華書局에서 刊行한 《唐宋八大家文抄》의 校勘記에도 이 사실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도 彼자와 樂자를 그대로 써서 해석하였다.
▶ 逝者如斯 : 흘러감이 이 강물과 같다. 逝는 가다. 斯는 이것으로 강물을 가리킨다.
《論語·子罕》에 공자가 강 위에서 말하기를 "가는 것이 이와 같구나. 낮이나 밤이나 그치지 않는구나(逝者如斯夫 不捨晝夜)."라고 하였다.
▶ 未嘗往也 : 돌아온 일이 없다.
▶ 盈虛 : 곧 달이 차고 이지러지는 것
▶ 天地曾不能以一瞬: 여기서 以는 실사로서 '말다, 정지하다, 그치다'의 의미이다(=已)
▶ 自其變者而觀之~ 物與我皆無盡也 : 우주 만상을 動的인 개념으로 본다면 어느 것 하나 그대로 가만히 있는 것이 없고, 不變의 개념으로 본다면 天地萬物은 오직 하나의 근원이라, 나고 죽음이 따로 없으니, 그 생명 또한 無限하여 다함이 없다.
▶ 取之 : 맑은 바람을 쏘이고 밝은 달을 보는 것.
▶ 造物者 : 造物主.
▶ 無盡藏 : 한 없이 있는 보물. 써도 다함이 없을 정도로 한정없이 많은 것.
▶ 樂 : 누리다. 蘇軾의 손글씨 원본에는 “食”으로 되어 있다. “食”의 의미는 《釋典》에 “六識은 사람을 기르는 여석가지이다. 기르는 것을 모두 食이라한다. 눈은 색으로 기르고, 귀는 소리로 기르며, 코는 향기로 기르고 입은 맛으로 기른다. 몸은 닿는 것으로 기르고, 뜻은 법으로서 기른다(謂六識以六人為養 其養也胥謂之食 目以色為食 耳以聲為食 鼻以香為食 口以味為食 身以觸為食 意以法為食).”라고 되어있다.
청풍명월은 귀에 들려 소리가 되고 눈에 비쳐 색을 이룬다 그래서 ‘공식’이라 한 것이다(清風明月 耳得成聲 目遇成色 故曰 共食).”
당시 蘇軾에게 “食”자의 뜻을 물어보았는데, 소식이 답하기를 “함께 먹는다의 食과 같이, 함께 사용하는 것이다(如食吧之食 猶共用也).“라고 하였다. 소식은 대개 두루 돌려보기를 원하지 않아 겸손하게 대답한 것이다.
客喜而笑, 洗盞更酌, 肴核旣盡, 杯盤狼藉.
손님이 기뻐하며 웃고 盞을 씻어 다시 술을 따르니, 按酒는 이미 다하고 술잔과 錚盤이 어지러이 흩어졌도다.
▶ 肴核(효핵) : 肴는 魚肉의 안주요, 核은 果實의 안주임.(술안주와 과실)
▶ 杯盤 : 잔과 접시
▶ 狼藉 : 어지럽게 흩어지다.
相與枕藉乎舟中, 不知東方之旣白.
서로 함께 포개어 배안에서 누웠더니, 동방이 이미 밝아오는 줄도 알지 못하였노라.
개요
《赤壁賦》는 북송北宋의 문학가 蘇軾이 지은 賦로, 宋 神宗 元豐 5년(1082) 저자가 일생에 가장 어려웠던 시기 중 하나인, 黃州(지금의 湖北 黃岡)로 좌천되었을 때 지은 것이다.
소식은 元豐 2년(1079), “謗訕朝廷”는 시를 썼다는 誣告로 몰리고 《湖州謝上表》를 썼다는 이유로 御史의 탄핵을 받고, 조정 비방 혐의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것을 역사에서는 "烏台詩案"이라고 한다. 여러 차례 고초를 겪으며 참혹하게 시달리다가, 여러 가지 구조활동 끝에 그해 12월 석방되어 黃州團練副使로 좌천되었는데, 공적인 일에 서명할 수도 없고, 허가 없이 安置所를 떠날 수도 없었다. 일종의 "半犯人“식 단속생활이었다.
元豐 5년, 소식은 7월 16일과 10월 15일 두 차례에 걸쳐 赤壁을 유람하며 적벽을 주제로 한 두 편의 賦를 썼는데, 후세 사람들은 제1편을 《赤壁賦》, 제2편을 《后赤壁賦》라고 불렀다.
이 賦는 저자와 친구들이 달밤에 赤壁을 유람하며 느낀 점을 기술하고 있으며, 저자의 주관적인 느낌을 단서로 하여 主客 問答의 형식을 통해, 달밤에 배를 띄운 저자의 편안함, 옛날을 회고하고 현재를 슬퍼하는 마음과 정신적 解脫의 達觀을 반영하고 있다.
全賦는 독특한 예술적 발상을 곳곳에 배치하여 반영하고 깊은 정취와 투철한 논리를 가지고 있어, 중국 문학에서 높은 문학적 지위를 가지고 있다. 그와 함께 후대의 賦, 散文 및 詩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달밤에 배를 띄우고 술을 마시며 시를 지어 主客의 대화를 묘사한 이 賦는, 손님의 입을 통해 과거를 슬퍼할 뿐만 아니라, 소식의 말에서 뜻을 듣고 뜻을 굽히지 않는 마음을 전해주며, 정취가 깊고 뜻이 투철하여 사실상 文賦 중에서 가장 훌륭한 작품이다.
첫 번째 단락은 赤壁을 밤에 유람하는 모습을 묘사한다.
작가는 '적벽 아래에서 손님과 함께 배를 띄워 유람하면서, 자연의 품에 안겨 그 사이의 清風, 白露, 高山, 流水, 달빛, 하늘빛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맛보며 흥이 나서 《月出》 시의 첫 장 “달이 떠서 환하거늘 아름다운 사람 예쁘기도 하도다.”를 읊었다. 《月出》이라는 시에 화답해 "조금 있다가 달이 동산 위로 떠올라 斗星(南斗星)과 牛星(牽牛星)의 사이에 배회하니,”를 다시 읊는다. 그리고 작가의 자작곡인 歌雲을 끌어내어 "미인을 바라보니 하늘 한쪽에 있도다."라며 감정과 문체를 일관시킨다. 徘徊라는 두 글자는 부드러운 달빛이 관광객에게 애틋하게 느껴질 정도로 생생하고 형상화했다. 휘영청 밝은 달빛을 받아 희뿌연 물안개가 강물을 뒤덮고, 하늘빛과 물빛이 한데 어우러진 “가을 물결은 모두 秋水共長天一色.”(王勃《滕王閣序》)이다. 유람객은 이때 마음이 탁 트이고 편안하며 구속이 없기 때문에 "일엽편주로 만경창파를 유유히 떠돌아 다닌다." 즉 유유히 세상을 떠나 초연히 독립한다. 드넓은 강물과 소탈한 마음이 저자의 필치로 솟구쳐 오르고, 배를 띄워 유람하는 즐거움이 말과 표정에 넘친다.
두 번째 단락은 술을 마시고 노래를 하는 작가의 환희와 손님의 구슬픈 퉁소소리를 묘사한다.
작가는 술을 마시며 뱃전을 두드리고 노래를 부르며 “美人”을 그리워하지만 볼 수 없는 실망과 실의에 빠진 마음을 표현했다. 여기서 말하는 “美人”은 사실 저자의 理想과 모든 아름다운 사물의 화신이다.
노래는 “계수나무 노와 木蘭 상앗대로 물속에 비친 달그림자를 치며 달빛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간다. 아득하고 아득한 내 그리움이여, 미인을 바라보니 하늘 한쪽에 있도다."인데, 이 가사는 모두 《楚辭·少司命》을 인용한 것이다. 미인을 보고 싶어도 볼 수 없어 실의와 슬픔을 드러내고, 게다가 객이 퉁소를 불며 그 노래에 맞추어 화답하니, 퉁소의 음조가 구슬프고 한스러우며, "원망하듯, 흐느끼듯, 여음이 모락모락 끊이질 않는다"고 하여 골짜기에 숨어 있던 교룡을 춤추게 하고 외로운 배 속에 홀로 남겨둔 과부를 울게 하였다.”고 표현하였다. 한 곡의 퉁소는 슬프고 완곡하며, 그 구슬픈 음조가 매우 감동적이어서, 작가의 감정이 갑자기 변화하여, 기쁨에서 슬픔으로 바뀌었고, 문장도 이로 인해 기복이 심하고, 문장의 기세가 한번 진동하였다.
세 번째 단락은 손님의 인생의 짧고 덧없음에 대한 감탄을 그린다.
이 단락에서 필봉은 적벽의 자연경관에서 적벽의 역사 이야기로 옮겨졌다. 주인은 "퉁소 소리가 왜 그렇게 슬프냐"고 물었고, 손님은 적벽의 역사 이야기로 답해 문맥이 자연스럽게 바뀌었다.그러나 글은 직설적인 것이 아니라 두 개의 질문을 연거푸 사용했다. 먼저 曹操의 “短歌行”을 소환하여, "조맹덕의 시가 아닌가?”라 하고, 또 눈앞의 산천 형세로 "孟德이 周瑜에게 곤액을 당하던 곳이 아닌가?"라고 하여, 두 번의 질문으로 글이 다시 파문을 일으켰다. 이어 조조가 형주를 부수고 유종을 항복시킨 일을 추적했다. 그해, 광대한 조조의 군대은 강릉에서 강을 따라 내려왔고, 전선이 천 리나 이어져 있었고, 깃발은 하늘을 가렸다. 조조는 의기양양하여 뱃머리에서 강을 향해 술을 마시고, 창을 들고 시를 지어 일세의 영웅이라 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이미 행방을 알 수 없다.
조조 같은 영웅도 한때 유명했을 뿐인데, 하물며 자신은 지금 자신의 짧은 생명을 탄식할 뿐이고, 강물이 끊임없이 흐르는 것을 부러워하며, 신선과 교제하여 밝은 달과 함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비현실적인 환상이었기 때문에 슬픔을 퉁소의 여운에 담아 바람을 통해 전달한 것이다. 손님의 대답은 일종의 허무주의 사상과 소극적인 인생관을 표현하였는데, 이는 소식이 손님의 입을 빌려 자신의 사상을 드러낸 한 단면이다.
네 번째 단락은 소식이 손님의 人生無常의 감회에 대하여 자기의 견해를 진술함으로써 상대방을 안심시키는 것이다.
객은 앞에서 "양자강의 무궁함이 부럽다"며 "밝은 달을 안고 영원하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소식은 강물과 밝은 달을 빗대 “강물은 흘러가는 것이 이와 같은데도 일찍이 다한 적이 없으며, 달은 찼다 기우는 것이 저와 같은데도 끝내 사라지거나 자라지 않는다.”라는 인식을 제시한 것이다.
천지의 존재는 사물 변화의 관점에서 보면 순식간일 뿐이고, 변하지 않는 관점에서 보면 사물과 인간은 무궁무진하므로 강물과 명월, 천지를 부러워할 필요가 없다. 자연히 “우리 인생이 너무 짧음을 슬퍼할” 필요가 없게 됐다.
다양한 관점에서 문제를 보는 데 찬성하고 절대화하는 데 동의하지 않는 소식의 활달한 우주관과 인생관을 표현한 것으로 역경 속에서도 활달하고 초탈하며 낙천적이고 유연한 정신상태를 유지하며 인생의 덧없는 낙망에서 벗어나 이성적으로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표현이다.
그런 다음 저자는 세상의 모든 것에는 주인이 있어서, 개인은 억지로 취할 수 없다. 다만 오직 江에서 불어오는 淸風과 山 사이의 明月은 영원히 존재하며, 천지는 사심이 없고, 소리와 색은 사람을 즐겁게 하니, 작가는 마침 그 사이를 배회하며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이는 李白의 《가襄陽歌》가 "청풍명월은 한 푼으로 사지 않아도 되고, 옥산은 밀지 않아도 스스로 무너진다"고 한 데서 비롯됐다.
다섯 번째 단락에서 손님은 저자의 대화를 듣고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 서로 배속에서 베고 자면서 해뜨는 것도 모르도록 취했다. 첫단락에 호응하여 유람의 즐거움을 쓰고, 득실을 잊고 초연한 경지에 도달하였다.
감상
[古文眞寶] 각주
陳靜觀批
진정관陳靜觀의 비평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二賦皆東坡謫黃州時作 是時放情事外 寄興風月 直將無意於人世
두 賦(〈前赤壁賦〉, 〈後赤壁賦〉)는 蘇東坡가 黃州로 귀양 갔을 적에 지은 것이다. 이때 東坡는 일 밖에 마음을 버려두고 바람과 달에 興을 붙여 장차 인간 세상에 뜻이 없으려 하였다.
是故皆托仙以爲言 前篇謂風月之常新 吾亦樂之 亦不必羨於仙 後篇驚江山之忽異 凜不可以久樂 又復有羨於仙矣
이 때문에 모두 神仙에 가탁하여 말하였으니, 前篇은 바람과 달이 항상 새로움을 내 즐거워하니 굳이 神仙을 부러워할 것이 없음을 말하였고, 後篇은 강산이 갑자기 달라짐에 두려워 오래 즐길 수가 없었으니, 또다시 神仙을 부러워한 것이다.
二篇大意 皆倣寓言之莊 遠遊之屈 賦鵩之賈 未爲正論
두 편의 큰 뜻은 모두 莊周의 <寓言>과 屈原의 <遠遊賦>와 賈誼의 <鵬鳥賦>를 모방한 것으로 정론이 될 수 없고,
但其凌厲飄逸之言 無一句類食烟火人語 讀之令人亦覺有登閬風涉蓬萊氣象 蓋眞可與造物遊者 非可執筆學爲如此也
다만 凌厲(의기양양)하고 飄逸(자연스러운)한 말은 한 句도 곡식을 익혀 먹는 사람과 유사한 말이 없으니, 읽어보면 사람으로 하여금 신선이 사는 閬風山에 오르고 蓬萊山을 건너가는 기상이 있음을 느끼게 한다. 이는 참으로 조물주와 노니는 자이니, 이와 같은 글은 붓을 잡고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坡自書此賦後云 黃州少西山麓 斗入江中 石色如丹 傳云曹公敗處 所謂赤壁者 或曰非也
東坡는 이 賦의 뒤에 스스로 쓰기를
“黃州의 약간 서쪽에 있는 산기슭이 강 가운데로 쑥 들어가 있는데 돌빛이 丹砂와 같다. 전하는 이야기에 이르기를 曹公(曹操)이 패전한 곳으로, 이른바 赤壁이라 하기도 하고 혹은 아니라고 하기도 한다.
曹公敗歸 由華容路 今赤壁少西對岸 卽華容鎭 庶幾是也 然岳州復有華容縣 竟不知孰是
曹公이 패하고 돌아갈 적에 華容路로 갔었는데, 지금 赤壁의 약간 서쪽 對岸이 바로 華容鎭이니, 아마도 이곳인 듯하다. 그러나 岳州에도 華容縣이 있으니, 마침내 어느 곳이 옳은지 알 수 없다."
○⟪江夏辨疑⟫云 江漢之間 指赤壁者三 一在漢水之側竟陵之東 卽今復州 一在齊安郡之步下 卽今黃州 一在江夏西南二百里許 今屬漢陽縣
《江夏辨疑》에 이르기를
“長江과 漢水 사이에 赤壁이라고 칭하는 곳이 셋인데, 하나는 漢水의 곁, 竟陵의 동쪽에 있으니 바로 지금의 復州이고, 하나는 齊安郡의 步下縣에 있으니 바로 지금의 黃州이며, 하나는 江夏의 서남쪽 2백 리 지점에 있으니 지금 漢陽縣에 속해 있다.” 하였다.
予謂江夏西南者 正曹公所敗之地也
내 생각하건대 江夏의 서남쪽은 바로 曹公이 패전한 곳이다.
按三國志 劉琮降備走夏口 操自江陵征備 至赤壁戰不利
《三國志》에
“劉琮이 항복하자 劉備가 夏口로 도망하니, 曹操는 江陵에서 劉備를 정벌하기 위하여 赤壁에 이르러 싸웠으나 승리하지 못하였다.” 하였고,
又周瑜傳 備進住夏口 權遣瑜 幷力迎操 遇於赤壁
또 《三國志》 〈周瑜傳〉에
“劉備가 夏口에 進住하자 孫權은 周瑜를 보내어 힘을 합해 曹操를 맞아 싸우게 하여 적벽赤壁에서 조우했다.” 하였으니,
夫操自江陵下 瑜由夏口往逆戰 則赤壁非竟陵之東者與齊安之步下者明矣
曹操가 江陵에서부터 내려왔고 周瑜가 夏口로부터 가서 맞아 싸웠다면 赤壁은 竟陵의 동쪽과 齊安의 步下에 있는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문초唐宋八大家文抄] 각주
予嘗謂 東坡文章仙也 讀此二賦 令人有遺世之想
내 일찍이 말하기를
“東坡는 文章의 신선이다.”라고 하였으니,
이 두 賦(〈前赤壁賦〉, 〈後赤壁賦〉)를 읽어보면 사람으로 하여금 세상을 버리고 홀로 서려는 생각이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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