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는 前漢의 사학가 太史 司馬遷이 상고시대로부터 전한 武帝에 이르기까지 2천여 년간의 역사를 기술한 고대 중국 역사서로 <本紀>12권, <表>10권, <書>8권, <世家>30권, <列傳>7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太史公自序는 司馬遷 <史記>의 마지막 130권, 列傳의 마지막 제70편으로 수록되어 있다.
태사공자서는 열전의 마지막 편이지만 사실은 史記 129권 전체에 대한 序文이자 結論에 해당한다. 자신의 생애와 가문내력, 그리고 학술적 배경과 경력을 담고 있다. 특히 아버지 사마담의 중요 논문인 「논육가요지」 전문을 수록하여 아버지의 염원을 계승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자신의 학술적 입장을 동시에 밝혔다.
전문은 7,812자로 이루어졌는데,
1)사마천의 가계 서술,
2)사마씨 부자의 「논육가요지」,
3)사마천의 청년시절과 부친의 죽음, 그리고 태사령이 된 자신,
4)사마천이 아버지 유언을 받는 과정,
5)사마천과 호수와의 《춘추》논쟁,
6)궁형을 받고 발분하여 저술하게 된 동기,
7)《사기》 전편의 解題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司馬氏의 집안 내력>
昔在顓頊,命南正重以司天,北正黎以司地。
옛날 顓頊 임금 때에 南正 重에게 명령하여 천문을 관장하게 하고, 北正 黎에게는 地理를 관장하게 하였다.
唐虞之際,紹重黎之後,使復典之,至于夏商,故重黎氏世序天地。
唐堯와 虞舜 때에 重과 黎의 후손들이 계승하여 다시 그 일을 맡도록 하니, 夏와 商에 이르기까지 중씨와 여씨는 대대로 천문과 지리에 관한 일을 맡았다.
其在周,程伯休甫其後也。
주나라 때 程伯休甫가 黎의 후손이다.
▲ 顓頊 : 중국 고대의 전설상의 임금. 五帝 가운데 한 사람으로 黃帝의 손자이자 昌意의 아들이다. 처음에 高陽에서 나라를 일으켰기 때문에 高陽氏라고도 불렸다. <사기권1 五帝本紀>
▲ 南正 : 전설상의 관직명. 重은 인명이니 천문을 관리하였다.
▲ 司 : 관장하다.
▲ 北正 : 전설상의 관직명. 黎는 인명이니 지리를 관리하였다.
▲ 唐虞 : 陶唐氏 堯와 有虞氏 舜을 말한다.
▲ 紹 : 계승하다.
▲ 程伯休甫 : 程休父. 程伯休父라고도 한다. 周宣王 때 관직이 大司馬에 이르렀다. 군대를 관장하고 徐方을 평정하여 안정후로 봉해졌다. 주나라 때에는 관직과 함께 氏를 하사하여 후에 司馬氏가 되었다.<晉書 제1권 帝記>
當周宣王時,失其守而為司馬氏。
周宣王에 이르러 그의 후손이 관직을 잃어 군사 일을 담당하는 司馬氏가 되었다.
司馬氏世典周史。
사마씨는 대대로 주나라의 역사를 관장하였다.
惠襄之閒,司馬氏去周適晉。
주나라의 惠王에서 襄王에 이르는 기간에 사마씨는 주나라를 떠나 晉으로 갔다.
晉中軍隨會奔秦,而司馬氏入少梁。
晉의 中軍 隨會가 秦으로 달아남에, 사마씨는 少梁으로 들어갔다.
▲ 周宣王 : 주나라의 제11대 왕으로 姬, 이름은 靜이다. 아버지 주여왕이 기원전 842년에 국민 폭동에 의해 彘로 도망했고 이후 왕이 不在하는 共和政이 실시되었다. 기원전 828년에 주여왕이 사망한 후, 주여왕의 아들인 靜을 왕으로서 세우니 주선왕이다.
▲ 守 : 官守. 관리의 직책.
▲ 司馬 : 고대 관직명. 군사의 일을 관장하였다. 고대에는 관직과 함께 성씨를 하사하여 사마씨가 되었다.
▲ 典 : 관장하다.
▲ 隨會 : 春秋時代 晉나라의 大夫인 士會를 말하며 봉토가 隨와 范 땅이므로 隨會, 范會 등으로도 불린다. 주양왕 때 왕위 계승 문제에 관여했다가 조돈의 공격으로 섬진으로 달아났다.
自司馬氏去周適晉,分散,或在衛,或在趙,或在秦。
사마씨가 주나라를 떠나 晉으로 간 후, 종족이 뿔뿔이 흩어져 혹은 衛, 혹은 趙, 혹은 秦에서 살았다.
其在衛者,相中山。
衛에 살던 일족에 中山國의 재상이 된 사람이 있었다.
在趙者,以傳劍論顯,蒯聵其後也。
趙에 살던 일족에 검술 이론을 전하여 명성을 날린 사람이 있었으니, 蒯聵가 그 후손이다.
在秦者名錯,與張儀爭論,於是惠王使錯將伐蜀,遂拔,因而守之。
秦에 사는 司馬錯는 張儀와 논쟁을 벌였고, 이에 秦惠王은 사마조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촉을 정벌하게 하니, 사마조가 촉의 땅을 빼앗아 그곳의 수령이 되었다.
▲ 蒯聵 : 또는 蕢聵. 春秋時代 衛의 國君 衛靈公의 아들이다. 태자로 있을 때 영공의 부인 南子를 죽이려고 하다가 실패하고 晉로 달아났다. 영공이 죽자 괴외의 아들 輒을 왕으로 세우니 그가 出公이다.
▲ 劍論 : 검술 이론.
▲ 顯 : 명성이 세상에 드러나다.
▲ 與張儀爭論 : 司馬錯가 장의와 더불어 혜왕 앞에서 논쟁을 벌임에, 사마조가 촉을 치자고 하자 장의는 ‘韓를 치느니만 못합니다.’라고 하였다.<사기권70. 張儀列傳>
錯孫靳,事武安君白起。
사마조의 손자 司馬靳이 武安君 白起를 섬겼다.
而少梁更名曰夏陽。
이 무렵 소량의 이름이 夏陽으로 바뀌었다.
靳與武安君阬趙長平軍,還而與之俱賜死杜郵,葬於華池。
사마근이 무안군과 함께 趙의 長平軍을 생매장하였는데, 돌아오자 두 사람을 모두 杜郵에서 賜死하고 華池에 장사지냈다.
▲ 白起 : 전국시대 秦의 장군이다. 王翦과 더불어 戰國時代 秦의 대표적인 명장으로 평가받는다. 昭襄王 때 韓魏趙, 楚 등을 공격하여 많은 승리를 거두어 秦의 영토를 크게 넓혔다. 범수의 참언으로 인하여 소양왕이 검을 보내 자결을 명하자 두우에서 자살하였다. <사기권79 范睡蔡澤列傳>
▲ 阬趙長平軍 : 秦昭王 47년(기원전 260년)에 秦과 趙가 장평에서 전투했는데 秦 장군 백기가 趙括을 죽이고 투항한 趙軍 40여만 명을 생매장하였다.<사기권73 白起王剪列傳>
▲ 阬(갱) : 阬은 坑과 같으며 ‘생매장하다’.
靳孫昌,昌為秦主鐵官,當始皇之時。
사마근의 손자 司馬昌은 秦의 主鐵官을 지냈는데 당시는 진시황 때였다.
蒯聵玄孫卬為武信君將而徇朝歌。
괴외의 현손 司馬卬은 武信君의 장수가 되어 朝歌縣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諸侯之相王,王卬於殷。
제후들이 서로 왕이라고 자칭함에 사마앙은 殷에서 왕이 되었다.
漢之伐楚,卬歸漢,以其地為河內郡。
漢이 楚를 정벌하자 사마앙은 漢에 귀순했고, 그 땅은 河內郡이 되었다.
昌生無澤,無澤為漢市長。
사마창은 無澤을 낳았고, 무택은 漢의 市長이 되었다.
無澤生喜,喜為五大夫,卒,皆葬高門。
무택이 사마희를 낳았고, 사마희는 五大夫가 되었으며, 죽은 뒤 모두 高門에 묻혔다.
喜生談,談為太史公。
司馬喜는 司馬談을 낳았는데, 司馬談이 太史公이다.
▲ 主鐵官 : 철을 녹여 그릇을 만드는 일을 관장하는 관리.
▲ 玄孫 : 高孫子. 손자의 손자.
▲ 徇: 攻占、掠取。
▲ 市長: 職官名。漢代五都置市長。
《史記.卷一三○.太史公自序》:「昌生無澤,無澤為漢市長。」
《漢書.卷二四.食貨志下》:「遂於長安及五都立五均官,更名長安東西市令及洛陽、邯鄲、臨甾、宛、成都市長,皆為五均司市師。」
▲ 司馬談 : 사마천의 아버지. 사마담은 漢에서 천문과 역법을 주관하고 황실의 전적을 관장하는 太史公이 되었다.
<司馬談의 六家要旨>
太史公學天官於唐都,受易於楊何,習道論於黃子。
아버지 태사공은 唐都에게서 천문학을 배웠고, 楊何로부터 <역>을 傳受받았고, 黃子에게서 道家의 이론을 익혔다.
太史公仕於建元元封之閒,愍學者之不達其意而師悖,乃論六家之要指曰:
태사공은 漢武帝 建元에서 元封에 이르는 기간에 벼슬했으며, 학자들이 각 학파의 요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스승의 본뜻을 거스름 걱정하여 六家의 요지를 다음과 같이 논하였다.
▲ 天官 : 천문학.
▲ 唐都 : 천문학자 겸 방술사. 사마천의 부친 司馬談은 唐都에게서 천문학을 수학하였다.
▲ 楊何 : 치천 사람으로 <역경>에 능통하여 元光 원년(기원전 134년)에 조정으로 초빙되어 관직이 中大夫에 이르렀다.
▲ 道論 : 道家의 이론.
▲ 黃子 : 黃生. 전한 때 사람으로 黃老術을 좋아해 司馬談이 그에게 道論을 배웠다. <사기 권121. 儒林列傳>
▲ 建元元封 : 建元은 漢武帝의 첫 번째 연호(기원전 140~135년)이며, 元封은 漢武帝의 여섯 번째 연호(기원전 110~105년).
▲ 愍 : 근심하다. 걱정하다.
▲ 其意 : 각 학파의 요지.
▲ 師悖 : 스승의 본뜻을 거스르다. 悖는 거스르다.
▲ 六家 : 陰陽家·儒家·墨家·名家·法家·道德家의 6개 학파.
▲ 要指 : 주요 사상.
<陰陽家의 학설>
易大傳:
「天下一致而百慮,同歸而殊涂。」
<易>의 大傳에서 일렀다.
“천하의 이치는 하나이지만 백 가지 생각이 있고, 다 같은 곳으로 돌아가지만 저마다의 길이 있다.”
夫陰陽、儒、墨、名、法、道德,此務為治者也,直所從言之異路,有省不省耳。
무릇 陰陽家·儒家·墨家·名家·法家·道德家가 세상을 다스림에 힘을 쓰는 것이나, 다만 그들이 따르는 논리는 길이 다르매, 명백한 것과 명백하지 않은 것이 있다.
嘗竊觀陰陽之術,大祥而眾忌諱,使人拘而多所畏;
然其序四時之大順,不可失也。
음양가의 학술을 살펴본 적이 있는데, 길흉의 징조에 너무 집착하여 忌諱가 많아서 사람을 구속하고 겁을 줌이 많았다.
그러나 그것이 4계절의 커다란 운행을 서술하였음을 버려서는 안 된다.
▲ 易大傳 : 유교의 경전으로 주역의 전문을 간행한 책. 周易.
▲ 天下一致而百慮 : 천하의 이치는 하나이지만 백 가지 생각이 있고 다 같은 곳으로 돌아가지만 저마다의 길이 있다.<周易 繫辭下 5>
“易曰:「憧憧往來,朋從爾思。」 子曰:「天下何思何慮?天下同歸而殊塗,一致而百慮,天下何思何慮?」 : 역에서 자주 자주 가고 오면 벗들이 네 생각을 좇는다, 하니 공자가 말하기를, 천하가 어찌 생각하겠는가? 천하가 돌아가는 곳은 같으나 길이 다르며, 이르는 것은 하나이나 백 가지 생각이 있으니, 어찌 생각하겠는가.”
▲ 殊涂(수도) : 殊途. 다른 길. 다른 방법.
▲ 務 : 애쓰다. 힘쓰다.
▲ 直 : 다만. 단지.
▲ 省 : 살피다. 명백하다. 明瞭、領悟。
▲ 竊觀 : 남모르게 가만히 살펴봄.
▲ 大祥 : 길흉의 조짐을 중시함.
▲ 眾忌諱 : 염두에 두어 기피함이 많다.
▲ 四時之大顺 : 사계절의 운행의 순서를 말한다
<儒家의 학설>
儒者博而寡要,勞而少功,是以其事難盡從;
然其序君臣父子之禮,列夫婦長幼之別,不可易也。
유가의 학설은 넓으나 요점이 적어서 애써 보았자 얻음이 적기 때문에, 그 학설을 모두 따르기란 어렵다.
그러나 군신과 부자간의 예를 서술함과 부부와 장유의 구별을 나열하였음은 바꾸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묵가,법가,명가의 학설>
墨者儉而難遵,是以其事不可遍循;
然其彊本節用,不可廢也。
묵가는 근검절약을 내세워 따르기가 어려우므로 그들의 주장을 모두 좇을 수는 없지만,
농업을 강화하고 지출을 줄여야 한다는 주장을 없애서는 안 된다.
法家嚴而少恩;然其正君臣上下之分,不可改矣。
법가는 엄격하여 恩愛가 적지만
그것이 군주와 신하의 상하 구분을 명확하게 함은 고쳐서는 안 된다.
名家使人儉而善失真;
然其正名實,不可不察也。
名家는 사람을 속박하여 진실성을 잃기 쉽지만,
명분과 실질의 관계를 바로잡으니 살피지 않아서는 안 된다.
▲ 墨者 : 묵가. 제자백가의 하나로 가족이나 국가의 경제를 초월한 兼愛의 정신을 역설하였다. 전국시대에는 유가와 나란히 가장 유력한 학파였다.
▲ 强本節用 : 기초산업을 강화하고 지출을 절약하다. 농업을 강화하고 지출을 줄이다.
▲ 法家 : 법치주의를 제창한 중국의 정치사상. 전국시대 제자백가의 한 유파로 그 계통을 이은 一群의 정치 사상가에 대한 총칭이다. 管子·商鞅·韓非子 등이다.
<도가의 학설>
道家使人精神專一,動合無形,贍足萬物。
道家는 사람으로 하여금 정신을 하나로 모아, 행동을 무형의 道에 들어맞게 하고 만물을 풍족하게 한다.
其為術也,因陰陽之大順,采儒墨之善,撮名法之要,與時遷移,應物變化,立俗施事,無所不宜,指約而易操,事少而功多。
그 학술은 음양가의 사계절의 운행 순서에서 유래하고, 유가와 묵가의 좋은 점을 채용하고, 명가와 법가의 요점을 취합하여, 시대와 함께 變遷하고, 만물의 변화에 호응하고, 풍속을 수립하여 사람의 일에 응용하니, 적절하지 않음이 없고 요지는 간략하여 파악하기가 쉬워, 노고는 적지만 성과는 크다.
儒者則不然。
유가는 그렇지 못하다.
以為人主天下之儀表也,主倡而臣和,主先而臣隨。
군주를 천하의 모범이라 여겨 군주가 외치면 신하가 화답하고, 군주가 앞장서면 신하는 따른다.
如此則主勞而臣逸。
이와 같게 하면 군주는 지치고 신하는 편안하다.
至於大道之要,去健羨,絀聰明,釋此而任術。
도가의 대도의 요지를 말하자면, 강함과 탐욕을 버리고, 총명과 지혜를 버리고, 이러한 것을 방치하여 자연의 법도에 맡기는 것이다.
夫神大用則竭,形大勞則敝。
무릇 정신을 너무 많이 쓰면 고갈되고, 육체를 혹사하면 피곤하다.
形神騷動,欲與天地長久,非所聞也。
육체와 정신이 동요하면서 천지와 더불어 長久하려 함은 들은 바가 아니다.
▲ 贍 : 넉넉하다. 풍부하다.
▲ 因 : 의거하다.
▲ 撮 : 모으다. 취합하다.
▲ 儀表 : 모범. 귀감.
▲ 去健羡 : 강함과 탐욕을 버리다.
▲ 絀聰明 : 총명과 지혜를 버리다. 絀은 黜과 통용되어 ‘버리다’. “絶聖棄智, 民利百倍, 絶仁棄義, 民復孝慈, 絶巧棄利, 盜賊無有. : 정치하는 사람이 재주와 지혜를 버리면 백성의 행복과 이익은 백 배가 되고 정치하는 사람이 인과 의를 버리면 백성은 본래의 사랑과 효도로 돌아가게 된다.<老子 道德經 제19장>
<음양가의 사상>
夫陰陽四時、八位、十二度、二十四節各有教令,順之者昌,逆之者不死則亡,未必然也,故曰
「使人拘而多畏」。
음양가는 4계절·8位·12度·24절기에 敎令이 있어서 그에 따르면 번창하고 거스르면 죽거나 망한다고 하나, 반드시 그러한 이치가 아니므로 일렀다.
“사람들을 구속하여 겁을 먹게 하는 일이 많다.”
夫春生夏長,秋收冬藏,此天道之大經也,弗順則無以為天下綱紀,故曰
「四時之大順,不可失也」。
봄에 태어나고 여름에 자라고 가을에 수확하고 겨울에 저장함은 자연계의 큰 법칙으로 이를 따르지 않으면 천하의 기강이 서지 않는다. 그래서 일렀다.
“사계절의 운행 순서는 놓칠 수가 없다.”
▲ 八位 : 八卦의 方位. 乾卦는 서북, 兑卦는 서, 离卦는 남, 震卦는 동, 巽卦는 동남, 坎卦는 북, 艮卦는 동북, 坤卦는 서남 방향이다.
▲ 十二度 : 十二星次를 말한다. 고대 중국 사람들은 日月五星의 운동법칙을 밝히기 위해 하늘의 黃道를 12개 부분으로 나누었다. 이것을 十二次라고도 부른다.
▲ 教令 : 교화. 즉 지켜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의 규정.
▲ 經 : 항상 지켜야 할 도리.
<유가의 사상>
夫儒者以六藝為法。
유가는 육예를 법도로 삼는다.
六藝經傳以千萬數,累世不能通其學,當年不能究其禮,故曰
「博而寡要,勞而少功」。
육예의 經傳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아서, 여러 세대에 걸쳐 배워도 그 학술에 통달할 수 없으며, 죽을 때까지 그 예절을 제대로 연구할 수 없다. 그래서 일렀다.
“범위가 너무 넓어 그 요점을 파악하기 힘들어서, 애써 보았자 얻음이 적다.”
若夫列君臣父子之禮,序夫婦長幼之別,雖百家弗能易也。
君臣과 父子의 예절을 열거하고 夫婦와 長幼의 분별을 서술함은 비록 다른 학파라도 바꿀 수는 없다.
▲ 六藝 : 禮·樂·射·御·書·數. 남자 특히 선비가 익혀야 할 여섯 종류의 技藝. 덕행에 뛰어난 사람을 賢者라고 하는 데 대해 이것에 뛰어난 사람을 能者라고 하였다. 技術이기는 하나 禮로써 中을 가르치고 樂으로써 和를 가르치듯 덕행에도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 六藝의 전반이다. 육예는 또한 六經(詩經, 書經, 禮記, 易經, 樂經, 春秋)을 통하여 가르침을 받았다.
▲ 經 : 경서의 본문을 말한다.
▲ 傳 : 주석 또는 경서의 뜻을 해설한 것.
▲ 當年 : 살아 있는 동안. 여생.
<묵가의 사상>
墨者亦尚堯舜道,言其德行曰:
묵가도 역시 堯舜의 道를 숭상하여 그들의 덕행에 대해 말하였다.
「堂高三尺,土階三等,茅茨不翦,采椽不刮。
“堂의 높이는 3자이고, 흙으로 만든 계단은 3계단이고, 지붕을 띠 풀로 이되 다듬지 않고, 서까래는 참나무를 다듬지 않고 그대로 썼다.
食土簋,啜土刑,糲粱之食,藜霍之羹。
질그릇에 밥을 먹고 질그릇에 국을 담아 마셨는데, 현미나 기장 쌀로 만든 밥에 명아주 잎과 콩잎으로 끓인 국을 먹었다.
夏日葛衣,冬日鹿裘。」
여름에는 葛布의 옷을 입고, 겨울에는 사슴 가죽의 옷을 입었다.”
其送死,桐棺三寸,舉音不盡其哀。
묵가의 장례에서는 오동나무 관의 두께는 세 치로 하고, 곡소리도 그 슬픔을 다 드러내지 않았다.
教喪禮,必以此為萬民之率。
상례를 가르칠 때는 반드시 이것으로 만백성의 모범으로 삼았다.
使天下法若此,則尊卑無別也。
천하의 법이 이와 같다면 尊卑의 구별이 없어질 터이다.
夫世異時移,事業不必同,故曰
「儉而難遵」。
세상이 달라지고 시대가 변화하면, 하는 일이 같을 필요가 없으므로 말한다.
“지나친 근검절약은 따르기 어렵다.”
要曰彊本節用,則人給家足之道也。
요지에서 말하는 농업을 강화하고 지출을 줄이자는 주장은 사람이 풍족하고 가정이 부유하게 되는 방법이다.
此墨子之所長,雖百長弗能廢也。
이것이 묵자의 장점으로, 비록 百家의 장점으로도 없앨 수 없다.
▲ 堂高三尺~ : 이 문장은 韓非子 五蠹를 인용한 문장이다.
“堯之王天下也,茅茨不翦,采椽不斲,糲粢之食,藜藿之羹,冬日麑裘,夏日葛衣,雖監門之服養,不虧於此矣. : 요임금이 천하의 왕이 되자 지붕을 띠 풀로 이되 다듬지 않았으며, 서까래는 참나무를 다듬지 않고 그대로 썼으며, 거친 기장밥과 아욱국을 질그릇에 밥을 담아 먹고 토기에 국을 담아 먹었으며, 겨울에는 사슴 갖옷을 입고 여름에는 갈포로 만든 옷을 입었으니 문지기의 삶이라도 이렇게 누추하지 않았을 것이다.”<韓非子 五蠹>
▲ 茅茨不翦 : 지붕을 이은 띠 풀을 다듬지 않다. 茅茨(모자)는 짚 이엉. 翦은 (가위로) 자르다.
▲ 采椽不刮 : 서까래는 참나무를 다듬지 않다. 采는 참나무, 椽은 서까래, 刮은 깍다.
▲ 土簋(토궤) : 진흙으로 만든 원형 식기.
▲ 啜(철) : 마시다.
▲ 土刑 : 진흙으로 만든 국그릇. 刑은 鉶과 통용된다.
▲ 糲粱(여량) : 현미와 기장.
▲ 藜霍(여곽) : 명아주 잎과 콩잎. 변변치 못한 반찬을 말한다.
▲ 葛衣 : 갈포로 만든 옷. 삼베옷.
▲ 舉音: 为悼死者而放声哀哭。
▲ 率 : 모범. 귀감.
▲ 使 : 만약.
▲ 給 : 풍족하다.
<법가의 사상>
法家不別親疏,不殊貴賤,一斷於法,則親親尊尊之恩絕矣。
법가는 親疏를 구별하지 않고, 貴賤을 다르게 여기지 않으며, 오로지 법에 따라 단죄하므로, 친족을 친애하고 존귀한 사람을 존경하는 情谊가 단절되고 만다.
可以行一時之計,而不可長用也,故曰
「嚴而少恩」。
한때의 계책은 될 수 있으나 오래 사용할 수는 없다. 그래서 말하였다.
“엄격하고 恩愛가 적다.”
若尊主卑臣,明分職不得相踰越,雖百家弗能改也。
이같이 군주를 높이고 신하를 낮추며, 명분과 직분을 명확하게 하여 서로 침범하지 못하게 함은 비록 百家라도 고칠 수 없다.
▲ 殊 : 다르다.
▲ 親親尊尊 : 친족을 친애하고 연장자를 존경하다.
▲ 恩: 情谊 [friendship]
▲ 分職 : 명분과 직분.
<명가의 사상>
名家苛察繳繞,使人不得反其意,專決於名而失人情,故曰
「使人儉而善失真」。
명가는 뒤엉켜서 분명치 않은 것을 철저하게 살펴봄으로써, 사람이 그 뜻을 어기지 못하게 하고, 명분에 관하여 專決하기 때문에 인정을 잃게 만든다. 그래서 말하였다.
“명분에 얽매여 진실을 잃기 쉽다.”
若夫控名責實,參伍不失,此不可不察也。
이같이 명실상부함을 구하기 위해 명과 실을 상호 비교함으로서 그것들을 잃지 않음은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 苛察 : 지나치게 살피다.
▲ 繳繞(격요) : 서로 뒤엉켜서 분명하지 않다.
▲ 控名責實 : 명분에서 실제를 구하여 명실상부하게 하다.
▲ 参伍 : 三五. 여기저기 흩어져 있음. 뒤섞여 있는 것을 비교하다. 参合错杂
<도가의 사상>
道家無為,又曰無不為,其實易行,其辭難知。
도가는 無為를 말하면서 또 無不為 말하니, 그들의 주장은 실제로 행동하기는 쉬우나 그 말은 이해하기 어렵다.
其術以虛無為本,以因循為用。
도가의 학술은 허무를 근본으로 삼고, 자연에 순응함을 작용으로 삼는다.
無成埶,無常形,故能究萬物之情。
만물은 불변의 형세가 없고 고정된 형상도 없으매, 만물의 情况을 밝힐 수 있다.
不為物先,不為物後,故能為萬物主。
만물에 앞서지도 않고 뒤처지지도 않기 때문에 만물의 주인이 될 수 있다.
有法無法,因時為業;有度無度,因物與合。
법이 있지만 법에만 맡기지 않으며, 시세에 순응함으로써 일을 이루며, 법도가 있지만 법도에만 의지하지 않으며 만물에 근거하여 서로 어울린다.
故曰
「聖人不朽,時變是守。
虛者道之常也,因者君之綱」也。
그러므로 말하였다.
“聖人의 사상은 영원히 썩지 않고 시세의 변화에 맞추어 순응한다.
허무는 도의 변치 않는 규율이며, 자연에 순응함은 군주가 나라를 다스리는 강령이다.”
群臣并至,使各自明也。
신하들이 모두 이름은 군주가 각자의 직분을 명확하게 함이다.
其實中其聲者謂之端,實不中其聲者謂之窾。
실행이 말과 부합함을 ‘端’이라 하고, 실행이 말에 부합하지 않음을 ‘窾(관)’이라 한다.
窾言不聽,姦乃不生,賢不肖自分,白黑乃形。
窾言을 듣지 않으면 간사함이 생기지 않고, 현명한 자와 현명하지 않은 자가 저절로 가려지며, 흑백이 저절로 드러날 터이다.
在所欲用耳,何事不成。
문제는 현명한 자를 기용하고자 함에 있을 뿐이니, 무슨 일인들 이루지 못하겠는가?
乃合大道,混混冥冥。
이렇게 해야 대도에 부합하고, 음양이 섞여 어두컴컴한 경지로 들어간다.
光燿天下,復反無名。
빛이 천하를 환하게 비추게 되면 결국 無名의 경지로 돌아간다.
凡人所生者神也,所託者形也。
대저 사람이 살아 있음은 정신인데 정신은 육체에 假託한다.
神大用則竭,形大勞則敝,形神離則死。
정신을 지나치게 사용하면 고갈되고, 육신을 너무 혹사하면 피폐해지고, 정신과 육체가 분리되면 죽는다.
死者不可復生,離者不可復反,故聖人重之。
죽은 사람은 다시 살아날 수 없고, 정신과 육체가 분리된 것은 다시 결합할 수 없으매, 聖人은 정신과 육체를 모두 重視한다.
由是觀之,神者生之本也,形者生之具也。
이런 관점에서 보면 정신은 생명의 근본이요, 육체는 생명이 깃드는 도구이다.
不先定其神形,而曰
「我有以治天下」,
何由哉?
먼저 자신의 정신과 육체를 안정시키지 않고
“내가 천하를 다스릴 방법이 있다.”
라고 하니 대체 어디서 연유하였는가?
▲ 道家無為 又曰無不為 : 無爲는 자연법칙에 따라 행위하고 인위적인 작위를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노자는 “도는 항상 하는 것이 없지만 하지 않는 것도 없다(道常無爲而無不爲).”고 하였다. <노자 도덕경 제48장>
▲ 因循 : 자연에 순응하다.
▲ 成埶 : 이미 이루어져 불변하는 형세. 埶는 권세 ‘세’.
▲ 主 : 主宰하다.
▲ 常 : 규율.
▲ 中 : 부합하다.
▲ 端 : 바르다(正).
▲ 窾 : 비다(空).
▲ 混混冥冥 : 혼잡하고 무지몽매하다.
▲ 光燿 : 환하게 비추다. 광채. 燿은 耀와 같다.
▲ 反 : 返과 같다. 되돌리다.
<사마담의 아들 사마천>
太史公既掌天官,不治民。
태사공은 천문을 관장하게 되자 백성을 다스리지 않았다.
有子曰遷。
아들이 있었는데 이름이 遷이다.
遷生龍門,耕牧河山之陽。
遷은 龍門에서 태어나 黃河의 북쪽에 있는 용문산 남쪽에서 농사짓고 가축을 키웠다.
年十歲則誦古文。
열 살이 되자 古文을 암송하였다.
二十而南游江、淮,上會稽,探禹穴,闚九疑,浮於沅、湘;
스무 살에 남쪽으로 長江과 淮水 일대를 여행하며 會稽山에 올라 禹임금의 무덤을 탐사한 다음 九疑山을 살피고, 沅水과 湘水를 배를 타고 다녔다.
北涉汶、泗,講業齊、魯之都,觀孔子之遺風,鄉射鄒、嶧;
북쪽 汶水와 泗水를 건너 齊와 魯의 수도에서 학문을 연구하여 孔子의 유풍을 살펴보았으며, 鄒와 嶧 지방에서 鄉射를 참관하였다.
戹困鄱、薛、彭城,過梁、楚以歸。
鄱·薛·彭城에서 곤욕을 치렀고, 梁·楚를 거쳐 고향으로 돌아왔다.
於是遷仕為郎中,奉使西征巴、蜀以南,南略邛、笮、昆明,還報命。
이에 사마천이 벼슬하여 郎中이 되고, 조정의 명을 받들어 서쪽으로 巴蜀 남쪽을 정벌하고, 남쪽으로 邛·笮·昆明을 빼앗고, 돌아와서 결과를 보고하였다.
是歲天子始建漢家之封,而太史公留滯周南,不得與從事,故發憤且卒。
이 해(기원전 110년)에 천자가 처음으로 한나라 황실의 封禪을 거행했으나, 周南에 머무르던 태사공은 봉선에 참가할 수 없어서 火病이 나서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而子遷適使反,見父於河洛之閒。
아들 사마천이 사자로 가서 돌아오다가, 황하와 낙수 사이에서 아버지를 만났다.
▲ 太史公 : 여기서는 사마천의 아버지 司馬談을 말한다. 사마천은 이 편에서 제3자의 입장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하였다. 태사는 天文과 曆法을 관장하는 관리.
▲ 天官 : 天文.
▲ 遷 : 司馬遷.
▲ 陽 : 산의 남쪽.
▲ 古文 ; 先秦時代의 문자나 그 문자로 쓴 책. 漢나라 隸書에 대하여 蝌蚪文字를 말한다.
▲ 江淮 : 장강과 회수 지역.
▲ 禹穴 ; 우임금의 무덤. 浙江省 會稽山 뒤에 있으며, 우임금이 巡狩 중 회계산에 이르러 붕하니 그 자리에 장사했다고 한다.
▲ 九疑山 : 순임금의 능이 있는 곳. 湖南省 零陵道에 있는 산.
▲ 浮 : 배를 타고 다니다.
▲ 講業 : 학문을 연구하다.
▲ 鄉射 : 고대 弓術의 禮式. 활을 쏠 적에 행하는 儀式.
▲ 略 : 탈취하다.
▲ 報命 : 復命. 명을 수행하고 보고함.
▲ 是歲 : 이 해. 漢武帝 元封 元年(기원전 110년).
▲ 封 : 封禪. 帝王이 천지에 제사지내던 의례로 최초로 봉선한 것은 秦始皇帝였는데 泰山의 산정에서 하늘을 제사지내고, 부근의 작은 동산인 梁父山에서 땅에 제사지냈었다.
▲ 周南 : 하남성 낙양 지방.
▲ 與 : 참가하다.
▲ 且 : 장차 ~하려 하다.
太史公執遷手而泣曰:
태사공이 아들 천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였다.
「余先周室之太史也。
“우리 선조는 주나라 왕실의 太史이었다.
自上世嘗顯功名於虞夏,典天官事。
그 위 세대는 일찍이 虞·夏에서 공명을 드러낸 이래 천문에 관한 일을 맡았다.
後世中衰,絕於予乎?
후세에 쇠락하였는데 나에게서 끊어질 터인가?
汝復為太史,則續吾祖矣。
네가 다시 태사가 되면 우리 선조의 유업을 잇는 것이다.
今天子接千歲之統,封泰山,而余不得從行,是命也夫,命也夫!
지금 천자께서 천 년의 대통을 이어받아 태산에서 封禪함에 내가 수행하지 못하니 이것은 운명이로다, 운명이로다!
余死,汝必為太史;
為太史,無忘吾所欲論著矣。
내가 죽으면 너는 반드시 태사가 되어야 하고,
태사가 되거든 내가 논하여 저술하려고 했던 바를 잊지 말라.
且夫孝始於事親,中於事君,終於立身。
더구나 효도란 부모를 섬김에서 시작하여, 군주를 섬김을 거쳐, 立身함에서 마치는 것이다.
揚名於後世,以顯父母,此孝之大者。
후세에 이름을 날려 부모를 드러냄이야말로 가장 큰 효도니라.
夫天下稱誦周公,言其能論歌文武之德,宣周邵之風,達太王王季之思慮,爰及公劉,以尊后稷也。
천하 사람이 周公을 칭송함에 말하기를, 그가 文王과 武王의 덕을 논하여 노래할 수 있고, 周南과 召南의 기풍을 선양하고, 太王과 王季의 사상에 통달하여 이에 公劉의 업적에 미치고, 后稷을 尊崇하였다고 한다.
幽厲之後,王道缺,禮樂衰,孔子修舊起廢,論詩書,作春秋,則學者至今則之。
幽왕과 厲왕 이후 왕도가 무너지고 예악이 쇠퇴하자, 공자께서 舊來의 典籍을 연구 정리하고, 예악을 다시 일으켜 <시경>과 <서경>을 논술하고 <춘추>를 지으니, 학자들이 지금까지도 準則으로 삼고 있다.
自獲麟以來四百有餘歲,而諸侯相兼,史記放絕。
獲麟 이래 400여 년, 제후들이 서로 병탄하며 역사 기록이 버려져서 끊어졌다.
今漢興,海內一統,明主賢君忠臣死義之士,余為太史而弗論載,廢天下之史文,余甚懼焉,汝其念哉!」
이제 한나라가 일어나서 천하가 통일됨에, 明主·賢君·忠臣·義士들을 내가 태사이면서도 이를 논하여 기록으로 남기지 못하여 천하의 역사 편찬을 폐하게 되니, 나는 이것을 심히 두려워한다. 너는 이런 점을 유념하여라!”
▲ 虞夏 : 虞나라와 夏나라. 虞는 帝舜 有虞氏를 말하며, 夏는 요순시대 이후 禹가 세운 왕조이다
▲ 周公 : 주나라를 세운 주무왕의 동생이다. 무왕이 죽고 어린 그의 아들 성왕이 즉위하자 스스로 섭정의 자리에 앉아 주나라를 통치하다가 성왕이 장성하자 섭정의 자리에서 내려와 신하의 자리로 돌아갔다.
▲ 文武 : 周 文王과 周 武王.
▲ 周邵 : 周南과 召南. 詩經 國風에 실려 있는 편명. 지금의 하남성 낙양 지방.
▲ 太王 : 周太王 古公亶父.
▲ 王季 : 주나라 태왕의 서자인 季歷으로 주문왕의 아버지이다.
▲ 公劉 : 周나라의 건설자라고 이르는 后稷 棄의 증손자이자 不窋의 손자. 공류는 비록 戎狄의 땅에 가까이 살았으나 다시 后稷의 業을 일으켜서 백성이 넉넉하게 되었으므로 마땅한 땅을 잘 살펴서 豳谷에 나라를 세웠다.
▲ 后稷 : 神農과 더불어 중국에서 농업의 신으로 숭배되는 인물
▲ 幽厲 : 周幽王과 周厲王. 주유왕은 주의 12대 왕. 정치에는 관심이 없이 여흥과 酒色만을 탐닉하다 서주 왕실을 망하게 하였으며, 주여왕은 탐욕스럽고 잔인하며 이익만 좇았고, 榮夷公을 卿士로 삼았으며 포학하고 사치스러운 데다 오만한 성격이라 諸侯는 조회를 오지 않았고, 나라 사람들은 그를 비방하였다.
▲ 則之 : 準則으로 삼다.
▲ 獲麟 : 魯哀公 14년(기원전 481년, 공자 71세), 魯 서쪽에서 기린이 잡혔는데, 처음엔 그것이 무슨 동물인지 의아해하였다. 孔子도 그것을 구경하러 갔다가 그것이 기린임을 알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기린은 예부터 상서로운 짐승으로서 훌륭한 임금에 의해 올바른 정치가 행해지면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공자가 살았던 春秋時代는 매우 혼란한 시대였다. 그러므로 聖君의 治世가 아닌 亂世에 잘못 나와 어리석은 인간들에게 잡힌 기린을 보고, 공자는 자신의 운명을 비춰서 슬퍼하였으며, 魯의 역사책인 춘추의 저술도 이 기린을 잡은 대목에서 붓을 꺾고 말았다.<사기권47 孔子世家>
▲ 四百有餘歲 : 획린은 기원전 481년의 일이고 원봉 원년은 기원전 110년이다. 371년이 지났으므로 사백여 년이라고 하였다.
▲ 放絕 : 방치하여 중단되다.
▲ 死義 : 정의를 위해 죽다.
遷俯首流涕曰:
「小子不敏,請悉論先人所次舊聞,弗敢闕。」
사마천은 고개를 수그리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였다.
“소자가 어리석지만, 선조들이 예전에 듣고 정리한 기록을 모두 논하되, 감히 빠뜨리지 않겠습니다.”
卒三歲而遷為太史令,紬史記石室金匱之書。
세상을 떠나고 3년이 지나자 사마천이 太史令이 되어서 역사 기록과 나라의 石室과 金匱에 소장된 서적을 편철하였다.
五年而當太初元年,十一月甲子朔旦冬至,天歷始改,建於明堂,諸神受紀。
5년이 지나 太初 원년 11월 甲子 朔旦 冬至에, 역법을 개정하여 太初曆을 반포하면서 明堂에서 神들에게 천하가 다시 紀元함을 고하였다.
▲ 不敏 : 어리석다. 둔하다.
▲ 次 :순서대로 배열하다.
▲ 闕 : 빠뜨리다.
▲ 紬 : 철하다. 모아서 엮다.
▲ 石室金匮 : 모두 국가가 소장한 도서가 소장되어 있는 곳.
▲ 太初 :漢武帝의 일곱 번째 연호.(기원전 104~101년).
▲ 太初元年 : 한나라는 秦의 역법을 따라서 10월을 새해로 하였으나 태초 원년에 태초력으로 개정하여 1월을 새해로 정하였다. 태초력은 기존 달력의 10월을 正月로 하였기 때문에 태초 원년은 기존 달력의 10월부터 다음해 12월까지 15개월 동안을 포함하고 있다.
▲ 甲子朔旦 : 甲子를 초하루의 日辰으로 하는 달을 지칭한다. 오늘날 祭祀 祝文에서 朔을 씀과 같은 용법으로 년·월을 정확히 표기하는 방법이다. 朔旦은 초하루를 말한다.
▲ 明堂 : 천자가 政敎를 반포하고 제후의 朝會를 받으며 제사를 거행하는 곳이다.
▲ 諸神受紀 : 神에게 천하가 다시 시작됨을 알리다.
太史公曰:
태사공 사마천은 말한다.
「先人有言:
『自周公卒五百歲而有孔子。
孔子卒後至於今五百歲,有能紹明世,正易傳,繼春秋,本詩書禮樂之際?』
“선친께서 말씀하시기를,
‘주공이 세상을 떠난 지 500년이 지나 공자가 있었다.
공자가 죽은 후 지금까지 500년이 지났는데, 이제 누가 청명한 세상을 이어받아 易傳을 바로 잡고, <춘추>를 계승하며, <시>·<서>·<예>·<악>의 분야에서 근본을 밝힐 수 있을까?’라고 하셨다.
意在斯乎!意在斯乎!
선친의 뜻이 여기에 있으리라! 그 뜻이 여기에 있으리라!
小子何敢讓焉。」
그러니 내가 어찌 감히 이 일을 마다하겠는가?”
▲ 先人 : 司馬談을 말한다.
▲ 紹明世 : 정치가 청명한 시대를 이어받다.
▲ 易傳 : 주역을 해설한 서적.
▲ 讓 : 사양하다.
<사마천과 壺遂의 대화>
上大夫壺遂曰:
「昔孔子何為而作春秋哉?」
上大夫 壺遂가 물었다.
“예전에 공자께서 무엇을 위하여 <춘추>를 지으셨습니까?”
太史公曰:
나 태사공이 대답하였다.
「余聞董生曰:
『周道衰廢,孔子為魯司寇,諸侯害之,大夫壅之。
孔子知言之不用,道之不行也,是非二百四十二年之中,以為天下儀表,貶天子,退諸侯,討大夫,以達王事而已矣。』
“제가 듣기에 董仲舒가 말하기를,
‘주나라의 왕도가 쇠퇴함에 공자가 魯의 司寇가 되자, 제후들이 공자를 시기하고 대부들은 공자를 방해하였습니다.
공자는 자신의 주장이 쓰이지 않고 도가 행하여지지 않음을 알고, 242년의 魯의 역사를 是是非非하여 천하의 본보기로 삼아서, 천자를 비판하거나 제후를 배격하거나 대부를 성토함으로써 왕의 정사가 통하게 했을 따름이다.’라고 하였습니다.
子曰:
『我欲載之空言,不如見之於行事之深切著明也。』
공자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내가 추상적인 말로 기록하려 했으나, 제왕이 행한 일을 구체적으로 명백하게 나타냄만 못하다.’라고 하셨습니다.
夫春秋,上明三王之道,下辨人事之紀,別嫌疑,明是非,定猶豫,善善惡惡,賢賢賤不肖,存亡國,繼絕世,補敝起廢,王道之大者也。
<춘추>는 위로 三王의 도를 밝히고, 아래로 인간사의 법도를 분별하고, 의심스러운 바를 구별하고, 시비를 밝히고, 주저함을 결정하게 하고, 선은 장려하고 악은 미워하고, 현명한 자를 존중하고 불초한 자는 賤視하고, 멸망한 나라를 다시 세우고, 끊어진 세대를 잇게 하고, 낡음은 기워주고 폐기됨을 다시 일으키니, 이것이야말로 왕도의 위대함입니다.
易著天地陰陽四時五行,故長於變;
禮經紀人倫,故長於行;
書記先王之事,故長於政;
詩記山川谿谷禽獸草木牝牡雌雄,故長於風;
樂樂所以立,故長於和;
春秋辯是非,故長於治人。
<역>은 천지·음양·사시·오행을 저술하였으매 변화를 논함에 뛰어납니다.
<예>는 인륜의 규범이매 실제 행동을 논함에 뛰어납니다.
<서>는 선왕의 사적이매 정치에 관한 서술이 뛰어납니다.
<시>는 山川·溪谷·禽獸·草木·牝牡·雌雄에 관한 기록이매 풍속에 관한 서술이 뛰어납니다.
<악>은 사람을 즐겁게 하매 인간관계를 조화롭게 함에 뛰어납니다.
<춘추>는 시비를 辨說하매 사람을 다스림에 뛰어납니다.
是故禮以節人,樂以發和,書以道事,詩以達意,易以道化,春秋以道義。
따라서 <예>로써 사람의 행동을 절제하고, <악>으로써 평화로운 마음을 發現하고, <서>로써 政事를 말하고, <시>로써 감정을 전달하고, <역>으로써 변화를 말하고, <춘추>로써 道義를 말합니다.
撥亂世反之正,莫近於春秋。
어지러운 세상을 다스려 正道로 되돌림에는 <춘추>보다 比近한 것이 없습니다.
春秋文成數萬,其指數千。
<춘추>의 문장은 불과 수만 字로 이루어졌으나 그 요지는 수천 條目입니다.
萬物之散聚皆在春秋。
만물이 흩어지고 모임이 모두 <춘추>에 실려 있습니다.
春秋之中,弒君三十六,亡國五十二,諸侯奔走不得保其社稷者不可勝數。
<춘추>에는 군주를 시해함이 36건, 나라를 망침이 52건이고, 제후가 도망쳐서 사직을 보존하지 못한 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察其所以,皆失其本已。
그 까닭을 살펴보면 모두가 다스림의 근본을 잃었을 뿐입니다.
故易曰
『失之豪釐,差以千里』。
그래서 <역>에서 일렀습니다
‘잘못이 아주 작더라도, 천 리의 큰 차이가 난다.’
故曰
『臣弒君,子弒父,非一旦一夕之故也,其漸久矣』。
그러므로 말합니다.
‘신하가 군주를 시해하고, 아들이 아버지를 살해함은 一朝一夕의 까닭이 아니라 점점 진전하여 오래된 결과이다.’
故有國者不可以不知春秋,前有讒而弗見,後有賊而不知。
그러므로 나라를 가진 자라면 <춘추>를 몰라서는 안 되나니, 눈앞에 讒言者가 있어도 보지 못하고, 뒤에 盜賊이 있어도 알지 못합니다.
為人臣者不可以不知春秋,守經事而不知其宜,遭變事而不知其權。
신하 된 자도 <춘추>를 몰라서는 안 되느니, 經常의 일을 맡아도 마땅함을 알지 못하고, 변화하는 일을 당하면 상황에 맞추어 대처할 줄 모릅니다.
為人君父而不通於春秋之義者,必蒙首惡之名。
君父로서 <춘추>의 大義를 통달하지 못하면, 틀림없이 惡의 首領이라는 汚名을 씁니다.
為人臣子而不通於春秋之義者,必陷篡弒之誅,死罪之名。
신하로서 <춘추>의 大義를 통달하지 못하면 틀림없이 簒奪이나 弑君의 죽임의 처지에 빠지거나, 죽을죄의 汚名을 얻습니다.
其實皆以為善,為之不知其義,被之空言而不敢辭。
그들은 사실 모두 좋다고 여기고 행하지만, 그 大義를 모르기 때문에 역사가들의 불실한 질책을 받아도 감히 반박하지 못합니다.
夫不通禮義之旨,至於君不君,臣不臣,父不父,子不子。
예의의 요지를 잘 모르면 군주는 군주답지 못하고, 신하는 신하답지 못하며, 아버지는 아버지답지 못하고 자식은 자식답지 못하게 됩니다.
夫君不君則犯,臣不臣則誅,父不父則無道,子不子則不孝。
군주가 군주답지 못하면 남이 범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면 죽임을 당하고, 아버지가 아버지답지 못하면 無道하게 되고, 자식이 자식답지 못하면 不孝합니다.
此四行者,天下之大過也。
이 네 가지 행실은 천하의 가장 큰 罪過입니다.
以天下之大過予之,則受而弗敢辭。
천하의 최대 罪過를 그의 신상에 加하여도, 받아들일 뿐 감히 떨치지 못합니다.
故春秋者,禮義之大宗也。
그러므로 <춘추>는 예의의 커다란 宗旨입니다.
夫禮禁未然之前,法施已然之後;
法之所為用者易見,而禮之所為禁者難知。」
예는 어떤 일이 생기기 전에 禁하는 것이고, 법은 사건이 발생한 다음에 시행하는 것입니다.
법의 적용 효과는 쉽게 보이지만 예의 예방 효과는 알기가 어렵습니다.”
▲ 經紀 : 안배하다. 경영하다.
▲ 風 : 풍토와 인심.
▲ 道 : 말하다.
▲ 撥 : 다스리다.
▲ 豪釐 : 잣대나 저울의 눈금을 말하며 아주 작은 것을 말한다. 豪는 毫와 통용된다.
▲ 毫釐千里 : 처음의 작은 차이가 나중에는 큰 차이가 나게 됨. 처음에 조금 틀리면 나중에 크게 그르치게 되므로 시초가 중요함을 뜻한다.
▲ 賊 : 살인자.
▲ 經事 : 세상일. 겪어 온 일.
▲ 權 : 임기응변하다.
▲ 蒙 : 씌우다.
▲ 首惡 : 주모자. 원흉.
▲ 陷 : 빠지다.
▲ 篡 : 찬탈하다.
▲ 空言 : 공론. 헛소리.
▲ 君不君 : 군주가 군주답지 못하다.
壺遂曰:
호수가 물었다.
「孔子之時,上無明君,下不得任用,故作春秋,垂空文以斷禮義,當一王之法。
“공자 때에는 위에 현명한 군주가 없어서 아랫사람이 임용되지 못하매, 공자가 <춘추>를 지어 공허한 역사서를 퍼뜨려 예의라고 단정하고, 제왕의 법전으로 삼았습니다.
今夫子上遇明天子,下得守職,萬事既具,咸各序其宜,夫子所論,欲以何明?」
지금 선생은 위로 현명한 천자를 만났고 아래에서 관직을 얻었으며, 모든 일이 다 갖추어졌고, 모두가 제각각 순서의 마땅함을 얻었는데, 선생의 논저에서는 무엇을 밝히려고 하십니까?”
▲ 垂 : 유전하다. 세상에 널리 퍼지다.
▲ 空文 : 추상적인 글. 쓸데없는 글.
▲ 咸 : 모두.
▲ 各序其宜 : 각자의 순서가 마땅함을 얻다.
太史公曰:
태사공이 대답하였다.
「唯唯,否否,不然。
“예예, 아니 아니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余聞之先人曰:
『伏羲至純厚,作易八卦。
堯舜之盛,尚書載之,禮樂作焉。
湯武之隆,詩人歌之。
春秋采善貶惡,推三代之德,褒周室,非獨刺譏而已也。』
제가 선친에게 듣기에,
‘복희는 지극히 순박하고 후덕하여 <역>의 팔괘를 만들었다.
요순의 넘치는 덕은 <상서>에 기재되어 있고 예악이 여기에서 만들어졌다.
탕왕과 무왕 시대의 융성함에 대해서는 시인들이 이를 노래하였다.
<춘추>는 선을 취하고 악을 물리치며, 三代의 성덕을 추앙하고, 주나라 왕실을 찬양하였으며 단지 풍자나 비방에만 그친 것이 아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漢興以來,至明天子,獲符瑞,封禪,改正朔,易服色,受命於穆清,澤流罔極,海外殊俗,重譯款塞,請來獻見者,不可勝道。
한나라가 개국한 이래, 현명하신 지금의 천자에 이르러, 상서로운 징조가 나타나 封禪하고, 역법을 개정하고, 服色을 바꾸고, 하늘로부터 명을 받아 황제의 은택이 흘러 끝이 없고, 국외의 풍속이 다른 나라들도 여러 차례 통역을 거쳐 변경에 와서 공물을 바치고 알현을 청함을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臣下百官力誦聖德,猶不能宣盡其意。
문무백관이 황제의 聖德을 애써 칭송하고는 있지만, 그래도 그 本意를 다 나타내지 못합니다.
且士賢能而不用,有國者之恥;主上明聖而德不布聞,有司之過也。
더구나 선비가 賢能한 데도 기용하지 않음은 나라를 가진 자의 부끄러움이며,
황제의 英明함과 성덕이 온 나라에 알려지지 못함은 有司의 過失입니다.
且余嘗掌其官,廢明聖盛德不載,滅功臣世家賢大夫之業不述,墮先人所言,罪莫大焉。
더구나 제가 일찍이 태사령의 직무를 관장하면서도, 황제의 明聖盛德을 폐기하고 저술하지 않거나, 功臣·世家·賢大夫의 업적을 없애고 기술하지 않아서, 아버지의 유언을 태만하면 죄에 그보다 큰 것이 없을 터입니다.
余所謂述故事,整齊其世傳,非所謂作也,而君比之於春秋,謬矣。」
저의 소위 ‘述故事(옛일을 서술함)’는 세상에 전해오는 것을 정리함이지, 소위 ‘作(지어냄)’이 아닌데, 선생께서 <춘추>에 비교하시니 잘못된 것입니다.”
▲ 唯唯,否否,不然 : 현대적인 말로는 “是是,不不,不對”와 같다.
▲ 推 : 推崇. 추앙하다. 숭배하다.
▲ 刺譏 : 풍자와 비방.
▲ 符瑞 : 상서로운 징조.
▲ 改正朔 : 曆法을 수정한다. 正朔은 한 해의 첫날.
▲ 穆清 : 하늘을 말한다.
▲ 罔極 : 끝이 없다.
▲ 重譯 : 여러 차례 번역하다.
▲ 款塞 : 변방의 문을 두드리다.
▲ 墮 : 훼손하다.
<李陵之禍>
於是論次其文。
그리하여 그 문헌을 차례로 논술하게 되었다.
七年而太史公遭李陵之禍,幽於縲紲。
7년이 지나 태사공이 李陵의 화를 만나 감옥에 幽閉되었다.
乃喟然而嘆曰:
「是余之罪也夫!
是余之罪也夫!
身毀不用矣。」
이에 나는 한숨을 쉬며 탄식하였다.
“이것이 내 죄란 말인가!
이것이 내 죄란 말인가!
몸이 망가져 쓸모가 없구나.”
退而深惟曰:
물러 나와 깊이 생각해 보았다.
「夫詩書隱約者,欲遂其志之思也。
“<시경>과 <서경>은 含意가 隱微하고 言辭가 簡約한데, 작자가 心志와 정서를 표출하려 하였기 때문이다.
昔西伯拘羑里,演周易;
孔子戹陳蔡,作春秋;
屈原放逐,著離騷;
左丘失明,厥有國語;
孫子臏腳,而論兵法;
不韋遷蜀,世傳呂覽;
韓非囚秦,說難、孤憤;
詩三百篇,大抵賢聖發憤之所為作也。
옛날 西伯은 羑里에 갇혀 <주역>을 풀이하였고,
공자는 陳과 蔡에서 곤경에 빠져 <춘추>를 지었고,
屈原은 쫓겨나서 <離騷>를 썼고,
左丘明은 실명한 뒤에 <國語>를 지었고,
孫臏은 臏腳이라는 형벌을 당하고도 <병법>을 논하였고,
呂不韋는 촉으로 쫓겨났지만 세상에 <呂覽>을 전하였고,
韓非는 秦의 옥에 갇혀서 ‘說難’과 ‘孤憤’편을 저술하였고,
<시경> 300편의 시들도 대체로 성현들이 發憤하여 지은 것이다.
此人皆意有所郁結,不得通其道也,故述往事,思來者。」
이들은 모두 마음속에 맺힌 바가 있었지만, 그의 이상을 밝힐 길이 없으매, 지난 일을 서술하며 후세를 생각하였다.”
於是卒述陶唐以來,至于麟止,自黃帝始。
그리하여 드디어 요임금에서 漢武帝가 ‘獲麟’한 그해까지 역사를 서술하기로 결심하였으니, 黃帝부터 시작한다.
▲ 論次 : 차례로 논술하다.
▲ 李陵之禍 : 漢武帝 天漢 2년(기원전 99년), 이광의 손자인 李陵이 흉노를 토벌하러 나갔다가 흉노에게 항복하였다. 李陵이 항복할 당시 사마천은 武帝에게 이릉을 변호하다가 궁형에 처해졌다. 司馬遷의 <報任少卿書>에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 縲紲(유설) : 오랏줄. 즉 감옥을 말한다.
▲ 喟然(위연) : 한숨을 쉬며 서글프게 탄식함.
▲ 惟 : 생각하다.
▲ 隱約 : 아주 작고 간략함.
▲ 遂 : 이루다.
▲ 西伯 : 서쪽 제후의 우두머리. 周文王. 주나라의 첫 임금인 武王의 아버지로 西伯昌이다. 羑里라고 불리는 감옥에서 유교의 고전인 周易의 卦辭를 지었다.
▲ 孔子戹陳蔡 : 공자는 陳와 蔡의 국경에서 포위당해 7일간이나 불로 요리한 음식을 먹지 못하였다.
▲ 屈原 : 전국시대 楚의 시인이며 정치가이다. 성은 羋, 씨는 屈, 이름은 平이며 자는 原이다. 楚의 왕족으로 태어나 楚회왕 때 좌도에 임명되었다. 학식이 높고 정치적 식견도 뛰어난 정치가였으며, 회왕의 상담역으로 국사를 도모하고, 외교적 수완이 뛰어났으나, 모함을 받아 신임을 잃고 끝내 자살하였다. 그는 이러한 아픔을 시 離騷에 담아내었다.<사기 권 84. 굴원가생열전>
▲ 左丘明 : 春秋時代 魯의 학자. <左氏傳>, <國語>의 저자로 일컬어진다. 左丘失明이라는 司馬遷의 말에 의하여 후세 사람은 그를 가리켜 盲左라고도 하였다.
▲ 厥 : 그. 그것.
▲ 臏腳 : 孫臏은 孫武의 5대손이고, 孫武와 같이 孫子로 불린다. 臏이란 이름의 무릎뼈를 도려내는 형벌을 받아서 이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사기권65. 孫子吳起列傳>
▲ 呂覽 : 呂氏春秋. 呂不韋는 재상직을 지냈으며, 전국 말기의 귀중한 사료로 평가받는 呂氏春秋를 3,000여 빈객의 학식을 모아 편찬하였다. <사기권85. 여불위열전>
▲ 韓非 : 전국시대 말기 韓 출신이며 法家의 사상을 집대성한 정치 사상가이다. 韓非子는 法治主義를 주창한 韓非와 그 일파의 論著이다. 한비는 말더듬이라 달변가는 아니었지만 논리 정연한 글 솜씨에 진시황이 감탄하였으나 李斯와 요가가 한비를 질투하여 감옥에 가두어 독살시킨다.<사기 권 63. 노자한비열전>
▲ 獲麟 : 魯哀公 14년(기원전 481년, 공자 71세), 魯 서쪽에서 기린이 잡혀 그것이 무슨 동물인지 의아해하였다. 孔子도 그것을 구경하러 갔다가 그것이 기린임을 알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기린은 예부터 상서로운 짐승으로서 훌륭한 임금에 의해 올바른 정치가 행해지면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공자가 살았던 春秋時代는 매우 혼란한 시대였다. 그러므로 聖君의 治世가 아닌 亂世에 잘못 나와 어리석은 인간들에게 잡힌 기린을 보고, 공자는 자신의 운명을 비춰서 슬퍼하였으며, 魯의 역사책인 춘추의 저술도 이 기린을 잡은 대목에서 붓을 꺾고 말았다.<사기권47 孔子世家>
여기서 말하는 획린은 漢武帝의 획린을 가리킨다.
武帝获麟在元狩元年(기원前 122년), 见卷十二《孝武本纪》
<춘추>는 공자 시대의 획린에서 마쳤고 <사기>는 漢武帝 시대의 획린에서 마쳤다.
제1편 <五帝本紀>
維昔黃帝,法天則地,四聖遵序,各成法度;
唐堯遜位,虞舜不台;
厥美帝功,萬世載之。
옛날 황제는 하늘과 땅을 법칙으로 삼았고, 네 명의 성왕은 연이어 각각의 법도를 세웠다.
堯임금이 제왕의 자리를 물려주었으나, 舜은 이를 기뻐하지 않았다.
천하는 이들 제왕의 공덕을 찬미하여 만세까지 이를 전할 것이다.
作五帝本紀第一。
‘五帝本紀’를 지어 제1편으로 한다.
▲ 維 : 發語詞.
▲ 四聖 : 4인의 聖王. 顓頊, 帝嚳, 堯, 舜을 말한다.
▲ 遵序 : 앞뒤로 연달아 잇다.
▲ 唐堯遜位 : 요임금이 직위를 물려주다.
▲ 台 : 怡와 통용된다. 기뻐하다.
▲ 厥 : 그. 그것.
제2편 <夏本紀>
維禹之功,九州攸同,光唐虞際,德流苗裔;
夏桀淫驕,乃放鳴條。
禹임금의 공적으로 구주가 두루 혜택을 입었으며, 요순시대를 빛내고 그 은덕이 후손에까지 이르렀다.
하나라의 桀왕은 방탕하고 교만하여 鳴條로 쫓겨났다.
作夏本紀第二。
‘夏本紀’를 지어 제2편으로 한다.
▲ 九州 : 중국의 전체 영토. 우임금이 중국을 아홉으로 나누어 다스렸다.
▲ 攸 : 바, 곧.
▲ 唐虞 : 요임금과 순임금.
▲ 苗裔 : 먼 후대의 자손. 후대.
▲ 鳴條 : 夏桀王이 虐政을 하자 탕왕은 賢相 伊尹 등의 도움을 받아 곧 걸왕을 有娀과 鳴條에서 격파하고 敗死시켰다.
제3편 <殷本紀>
維契作商,爰及成湯;
太甲居桐,德盛阿衡;
武丁得說,乃稱高宗;
帝辛湛湎,諸侯不享。
契이 商나라를 일으켜 이에 成湯에 이르렀다.
太甲은 桐으로 쫓겨났으나 阿衡 伊尹의 도움으로 공덕이 융성하였다.
武丁은 傅說을 얻음으로써 高宗으로 일컬어졌다.
帝辛은 술과 여자에 빠져 제후들이 그를 섬기지 않았다.
作殷本紀第三。
‘殷本紀’를 지어 제3편으로 삼는다.
▲ 契(설) : 殷나라의 시조로 전해지는 전설상의 인물. 乾, 卨, 閼伯으로 쓰기도 한다.
▲ 成湯 : 湯王. 殷나라의 초대 임금. 이름은 履 또는 天乙, 太乙이고, 탕은 자인데, 成湯이라고도 한다. 史記에 따르면 시조 契의 14세에 해당한다.
▲ 太甲 : 商나라 제3대 임금인 太宗의 이름. 成湯의 손자이고, 太丁의 아들이다. 즉위한 뒤 법을 어기고 방탕 포악하게 생활하여 伊尹에 의해 쫓겨났다. 3년 뒤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자 이윤이 맞아 복위시켰다.
▲ 武丁 : 상나라의 제22대 왕. 성은 子이며, 이름은 武丁이고 시호는 高宗이다
▲ 傅說 : 은나라 고종의 賢相. 부암에서 담 쌓는 일을 하던 어진 이를 얻었다 하여 고종이 부열이라 하였다.
▲ 帝辛 : 은나라의 마지막 왕 紂. 문왕의 아들 무왕이 제후들과 군사를 일으켜 상 왕조를 멸망시켰다. 夏의 桀王과 함께 桀紂로 병칭되는 惡德天子의 대표적 존재이다. 본명은 帝辛 또는 受이고, 紂는 무도한 군주에게 주어진 시호이다.
▲ 湛湎(담면) : (주색 따위에) 깊이 빠지다. 탐닉하다.
▲ 享 : 대접하다.
제4편 <周本紀>
維棄作稷,德盛西伯;
武王牧野,實撫天下;
幽厲昏亂,既喪酆鎬;
陵遲至赧;洛邑不祀。
棄는 농업을 창시하여 后稷이 되었고, 周文王 때 공덕이 융성하였다.
周武王이 牧野에서 승리함으로써 천하를 위로하였다.
幽王과 厲王이 혼미하여, 도성인 酆과 鎬를 잃었다.
이후 점점 쇠락하더니 赧王에 이르러 洛邑의 제사가 끊어지게 되었다.
作周本紀第四。
‘周本紀’를 지어 제4편으로 삼는다.
▲ 棄 : 周 王朝의 건설자. 어릴 때부터 대인의 뜻을 품어서 나무와 곡식을 심어 가꾸기를 좋아하더니 成人이 되어서도 농사짓기를 좋아하고 토질을 잘 살펴서 적합한 곡식을 심었기 때문에 당시 백성들이 다 그를 본받았다고 한다. 舜임금이 邰國에 봉하고, 后稷이라 일컬었다. 別姓은 姬씨고, 아들 이름은 불줄(不窋)이다.
▲ 武王牧野 : 周武王은 부친 文王의 뒤를 이어 다른 8개의 변경국가들과 연합하여 河南省 牧野에서 紂王의 대군을 격파하고 殷의 마지막 왕이며 폭군이었던 紂王을 몰아냈다.
▲ 實撫 : 위로하다.
▲ 幽厲 : 周幽王과 周厲王. 유왕은 12대 왕. 정치에는 관심이 없이 여흥과 酒色만을 탐닉하다 서주 왕실을 망하게 하였으며, 여왕은 탐욕스럽고 잔인하며 이익만 좇아 諸侯들이 조회를 오지 않았고, 나라 사람들은 그를 비방하였다.
▲ 昏亂 : 혼미하다. 어지럽다.
▲ 陵遲 : 쇠락하다.
▲ 赧(난) : 周赧王. 주나라의 제37대 왕으로 성은 姬, 이름은 延이다. 난왕 59년(기원전 256년), 秦將 嬴摎의 공격을 받자, 서주 무공과 함께 秦에 항복한 뒤 영토를 헌상하였다. 주나라는 마침내 난왕 때에 이르러서 멸망하였다.
▲ 不祀 : 제사를 받지 못하다. 즉 주나라가 망했다는 뜻이다.
제5편 <秦本紀>
維秦之先,伯翳佐禹;
穆公思義,悼豪之旅;
以人為殉,詩歌黃鳥;
昭襄業帝。
秦의 선조 伯翳는 禹임금을 보좌하였다.
秦穆公은 뉘우칠 줄 알아 殽山에서 전사한 병사들을 애도하였다.
목공이 죽자 산 사람을 함께 묻었고, 시경의 ‘黃鳥’에서 이것을 노래하였다.
秦昭襄王은 제왕의 업적을 위한 터를 닦았다.
作秦本紀第五。
‘秦本紀’를 지어 제5편으로 삼는다.
▲ 先 : 선조.
▲ 伯翳(백예) : 고대 전설상의 인물. 일명 益이다. 柏翳라고도 한다. 舜임금의 명령으로 虞가 되어 草木鳥獸를 관장하였다. 또 禹임금 밑에서 치수를 도와 嬴씨 성을 하사받아 영씨 성을 가진 諸侯의 조상이 되었다.
▲ 佐 : 보좌하다.
▲ 穆公 : 秦穆公. 春秋時代 秦의 제9대 군주로 성은 嬴, 이름은 任好이다. 목공 36년 晉을 공격하여 대파하고 효산에서의 패전을 설욕하였으며, 茅津에서 황하를 건너 효산 전투에서 죽은 병사들을 위해서 봉분을 쌓아 장례를 치르고 3일 동안 곡을 하였다.
▲ 豪 : 殽山을 말한다.
▲ 旅 : 군대.
▲ 黃鳥 : <詩經·秦風>의 編名. 秦穆公이 죽었을 때 177명이 순장되었는데 충신 子車氏의 세 아들을 함께 순장함을 비난한 노래이다.
▲ 昭襄 : 秦昭襄王. 전국시대 秦의 제28대 군주로 주변국을 복속시키고 영토를 확장해 秦이 중국을 통일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하였다. 성은 嬴, 名은 則이며, 稷이라고도 한다. 시호는 昭襄王이며, 昭王이라고도 부른다.
▲ 業帝 : 제왕의 기업을 닦다.
제6편 <始皇本紀>
始皇既立,并兼六國,銷鋒鑄鐻,維偃干革,尊號稱帝,矜武任力;
二世受運,子嬰降虜。
진시황은 즉위한 후 6국을 합병했고, 병기를 녹여서 종틀로 만들어 전쟁을 중지토록 하였으며, 자신을 높여 황제라 부르고 무력을 과시하며 폭력을 일삼았다.
2세가 국운을 이어받았으나 子嬰은 항복하여 포로가 되었다.
作始皇本紀第六。
‘始皇本紀’를 지었으니 제6편이다.
▲ 銷鋒鑄鐻 : 시황은 천하의 병기를 거두어 함양에 모으고 녹여서, 종과 종틀을 주조함으로써 다시는 무기를 쓰지 않겠다고 보여주었다. 鋒은 병기. 鐻는 종틀. 종을 매다는 틀로 鍾은 고대 악기를 말한다.
▲ 偃 : 그치다.
▲ 干革 : 兵器. 전쟁을 말한다.
▲ 矜武任力 : 무력을 과시하며 폭력을 일삼다.
▲ 二世 : 秦 二世皇帝 嬴胡亥. 秦의 제2대 황제로 진시황제의 막내아들이다.
▲ 子嬰 : 호해의 조카인 子嬰이 秦왕이 된 지 46일째, 초의 장수 패공이 秦軍을 격파하고 무관에 입관하여 마침내 覇上에 이르러 자영에게 사람을 보내 투항을 약속받았다. 자영은 죄인처럼 목에 끈을 매고 흰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나와 천자의 옥새와 부절을 받들고 軹道 부근에서 항복하였다.
제7편 <項羽本紀>
秦失其道,豪桀并擾;
項梁業之,子羽接之;
殺慶救趙,諸侯立之;
誅嬰背懷,天下非之。
秦이 王道를 상실하자 호걸들이 일제히 반란을 일으켰다.
項梁이 처음으로 봉기했고 項羽가 그 뒤를 이어 일어났다.
宋義를 죽이고 趙를 구원하니 제후들이 그를 옹립하였다.
항우가 子嬰을 죽이고 懷王을 배반하자 천하가 그를 비난하였다.
作項羽本紀第七。
‘項羽本紀’를 지으니 제7편이다.
▲ 項梁 : 항우의 숙부.
▲ 子羽 : 項羽.
▲ 慶 : 卿子冠軍 宋義. 楚懷王의 신하. 秦이 趙의 한단을 포위하니 초회왕이 송의와 항우를 보내 趙를 구원하고자 하였으나 송의가 공격을 지체하자 항우가 송의를 죽이고 거록에서 秦 軍을 대파시켰다.
▲ 誅嬰 : 항우가 항복한 秦王 子嬰을 죽이다. 자영은 중국 통일 후 秦의 제3대이자 마지막 왕이다. 姓은 嬴, 이름은 子婴 혹은 嬰이다. 왕위에 오른 지 46일 만에 劉邦에게 투항했지만, 뒤이어 咸陽에 입성한 항우에게 살해되었다.
▲ 背懷 : 楚懷王을 배반하다. 항우가 초회왕과 제후에게 관중에 먼저 들어오는 자가 왕이 된다는 약속을 어겼다. 초회왕은 姓은 芈, 氏는 熊, 이름은 心으로 芈心 혹은 熊心이라고 불린다. 戰國時代 말기 秦에 抑留되었다가 楚의 멸망 이후에 羊을 키우며 숨어 지냈지만, 기원전 208년 項梁과 項羽가 楚를 다시 세운 뒤에 懷王으로 옹립되었다가 뒤에 義帝로 개칭하였다. 反秦 세력의 상징적인 盟主 구실을 하였지만, 秦이 멸망한 뒤에 항우에게 살해되었다.
▲ 非 : 나무라다. 비방하다.
제8편 <高祖本紀>
子羽暴虐,漢行功德;
憤發蜀漢,還定三秦;
誅籍業帝,天下惟寧,改制易俗。
項羽는 포학하였으나, 漢王 劉邦은 공을 세우고 덕을 베풀었다.
한왕은 파촉과 漢中에서 발분하여 군대를 이끌고 돌아와 三秦을 평정하였다.
항우를 죽이고 제왕의 基業을 이루어 천하가 안정되자 제도를 개혁하고 풍속을 바꾸었다.
作高祖本紀第八。
‘高祖本紀’를 지었으니 제8편이다.
▲ 漢 : 漢王 劉邦을 말한다. 후에 전한의 초대 황제가 되었으며 자는 季, 묘호는 高祖이다.
▲ 蜀漢 : 巴蜀과 漢中.
▲ 三秦 : 항우가 秦을 멸망시키고 그 땅을 나누어 셋으로 만들어 분봉하고 雍王, 塞王, 翟王이라 이름하고는 三秦이라 불렀다.〈秦始皇本紀〉
▲ 誅籍 : 항적을 죽이다. 한왕 5년(기원전 202년) 漢王이 垓下에서 楚를 격파하고 항적을 죽였다.
제9편 <呂太后本紀>
惠之早霣,諸呂不台;
崇彊祿、產,諸侯謀之;
殺隱幽友,大臣洞疑,遂及宗禍。
惠帝가 일찍 세상을 떠나니 여씨 일족을 백성이 좋아하지 않았다.
여록·여산의 권력이 커지자 제후들이 그들을 제거하려고 도모하였다.
여태후가 趙隐王 如意를 죽이고 趙幽王 劉友를 감금하자 대신들이 두려워하였으나 마침내 여씨 종족은 멸족의 화를 당하였다.
作呂太后本紀第九。
‘呂太后本紀’를 지었으니 제9편이다.
▲ 惠 : 漢惠帝 劉盈. 한고조 유방의 아들로서 23세에 죽었다.
▲ 早霣(조운) : 일찍 죽다. 霣은 죽다.
▲ 台 : 기뻐하다.
▲ 崇 : (지위를) 높이다.
▲ 祿,產 : 呂祿과 呂産. 呂祿은 고황후의 작은 오라버니 여석지의 아들이며 전한 혜제 7년(기원전 188년) 혜제가 죽고 고황후가 태황태후로 칭제하면서 여태, 여산과 함께 남북군을 통제해 여씨 일족의 專制에 一助하였다. 여산은 고황후의 오라버니인 여택의 아들이다. 呂太后는 한고조 유방의 처 高后.
▲ 殺隱幽友 : 여태후가 趙隐王 如意를 죽이고 趙幽王 劉友를 감금하다. 趙隱王 여의는 한고조의 넷째 아들로 戚夫人의 소생이었는데 고조가 죽은 후 呂后의 소생 盈이 혜제로 즉위하자 여후에 의해 독살되었다.
趙幽王 劉友는 전한의 제후국 趙의 왕으로, 고제의 아들이다. 여태후에게 소환되어 장안으로 가서 감금되어 식량 공급이 끊어지니, 여씨의 횡포를 비난하고 저주하는 노래를 짓고 굶어 죽었다.
여태후는 조왕의 장례를 평민의 예에 따르게 하였다.
▲ 洞疑 : 두려워하다. 洞은 恫과 통용된다.
▲ 宗禍 : 여씨 일족이 멸족의 화를 당하다.
제10편 <孝文本紀>
漢既初興,繼嗣不明,迎王踐祚,天下歸心; 蠲除肉刑,開通關梁,廣恩博施,厥稱太宗。 作孝文本紀第十。 한나라가 처음 일어난 후 혜제가 죽어 후계자가 분명치 않았으나 代王 劉恒을 모셔 즉위하자 천하의 인심이 돌아왔다. 肉刑을 없애고, 육로인 관문과 교량을 개통시켜 널리 은덕을 베푸니 太宗이라 불렀다. ‘孝文本紀’를 지었으니 제10편이다. |
▲ 迎王 : 代王 劉恒을 영입하다. 여태후 8년(기원전 180년) 여태후가 죽자 주발·진평·제애왕·성양경왕 등이 여씨 세력을 토벌하고 代王 劉恒을 한문제로 세웠다.
▲ 踐祚 : 즉위하다.
▲ 蠲除 : 면제하다.
▲ 肉刑 : 옛날의 體刑. 墨刑(이마에 문신하던 형벌), 劓刑(코를 베는 형벌), 剕刑(발을 자르는 형벌), 宫刑(거세하는 형벌) 등.
제11편 <孝景本紀>
諸侯驕恣,吳首為亂,京師行誅,七國伏辜,天下翕然,大安殷富。
제후가 驕慢放恣하더니 吳王 劉濞가 앞장서서 반란을 일으켰다. 조정에서 정벌에 나서 반란자들을 주살하니 7국이 모두 굴복하여 천하가 화목해져서 태평하고 풍요로워졌다.
作孝景本紀第十一。
'孝景本紀'를 지으니 제11편이다.
▲ 吳首為亂 : 吳楚7국의 난. 吳王 劉濞는 前漢의 제후왕으로 劉邦의 형 劉仲의 아들이다. 황실이 제후국을 견제함에 반발하여 한경제 전원 3년(기원전 154년) 오초칠국의 난을 일으켰다.<사기권106. 吳王濞列傳>
▲ 伏辜 : 자기 죄를 인정하다.
▲ 翕然 ; 화합하는 모양.
제12편 <今上本紀>
漢興五世,隆在建元,外攘夷狄,內修法度,封禪,改正朔,易服色。
한나라를 건국한 지 5世, 무제 建元 연간에 흥성해졌다. 밖으로는 夷狄을 물리치고 안으로는 법도를 정비하였으며, 封禪의 의식을 행하고 역법을 고치고 복색을 바꾸었다.
作今上本紀第十二。
‘今上本紀’를 지으니 제12편이다.
▲ 五世 : 漢高祖, 惠帝, 文帝, 景帝, 武帝의 5대 황제.
▲ 隆 : 흥성하다.
▲ 建元 : 漢武帝의 첫 번째 연호(기원전 140~135년).
▲ 夷狄 : 소수민족.
▲ 今上本紀 : 본문은 망실되었으며 孝武本紀로 보완하였다. 今上은 漢武帝를 말한다.
제1편 <三代世表>
維三代尚矣,年紀不可考,蓋取之譜牒舊聞,本于茲,於是略推,作三代世表第一。
夏·殷·周 三代는 아주 오래되어 구체적인 햇수를 고찰할 수 없다. 대개 전해오는 족보의 옛 기록들을 취하여 이를 근거로 하여 개략적으로 추정하였다.
‘三代世表’를 지으니 제1편이다.
▲ 尚 : 멀고 오래다. 까마득하다.
▲ 譜牒 ; 한 가문의 계통과 혈연관계를 부계를 중심으로 체계적으로 나타낸 책. 계보학 또는 譜學에서 말하는 계보를 기록한 문서를 말하는데, 흔히 族譜라고 한다
▲ 三代世表 : 황제. 제곡, 요, 순, 하, 은, 주 등의 계보와 인물을 기록한 표.
제2편 <十二諸侯年表>
幽厲之後,周室衰微,諸侯專政,春秋有所不紀;
而譜牒經略,五霸更盛衰,欲睹周世相先後之意,作十二諸侯年表第二。
幽王과 厲王 이후 주나라 왕실이 쇠락해지자 제후들이 제멋대로 독재정치를 하여서 <춘추>에 기재되지 못한 것이 있었다.
譜牒에도 대강만 기록되었고 五覇가 번갈아 盛衰하였으매, 주나라 조정과 각 제후국의 전후 관계를 고찰하려는 뜻에서 ‘十二諸侯年表’를 지으니 제2편이다.
▲ 幽厲 : 周幽王과 厲王.
▲ 紀 : 記와 통용되어 기재하다.
▲ 五覇 : 春秋時代의 다섯 사람의 패자. 一般的으로 齊桓公·晉文公·楚莊王·吳夫差·越句踐을 말한다. 吳와 越을 除外하고 宋襄公ㆍ秦穆王을 더하기도 한다.
▲ 更 : 번갈아. 교대로
▲ 十二諸侯年表 : 周·魯·齊·晉·秦·楚·宋·衛·陳·蔡·曹·鄭·燕·吳 14국에 대한 역사와 사건의 연표.
제3편 <六國年表>
春秋之後,陪臣秉政,彊國相王;
以至于秦,卒并諸夏,滅封地,擅其號。
作六國年表第三。
春秋時代 이후 제후의 신하가 정권을 장악하고, 强國이 서로 왕을 자처하고 나섰다.
秦에 이르러 마침내 중원 제후들을 합병하여 그들의 봉지를 없애고 황제의 칭호를 멋대로 사용하였다.
‘六國年表’를 지으니 제3편이다.
▲ 陪臣 : 신하의 신하. 곧 제후의 신하. 제후의 신하인 大夫가 천자를 대할 때 자신을 칭하는 말.
▲ 相王 : 서로 왕이라 칭하다.
▲ 諸夏 : 중국의 여러 나라. 제후국. 夏는 크다는 의미.
▲ 六國年表 : 기원전 104년부터 기원전 91년까지 秦에 의해 멸망된 6국의 연표.
제4편 <秦楚之際月表>
秦既暴虐,楚人發難,項氏遂亂,漢乃扶義征伐;
八年之閒,天下三嬗,事繁變眾,故詳著秦楚之際月表第四。
秦 황제가 포악하여 楚의 陳涉이 반란을 일으키고, 항우가 이어 세상을 어지럽히니, 漢王이 이에 정의를 내세워 항우를 정벌하였다.
8년 동안 천하가 세 번이나 주인이 바뀌어 사건은 복잡하고 변화가 많았으니, 이에 상세히 저술하여 ‘秦楚之際月表’를 지으니 제4편이다.
▲ 嬗(선) : 바뀌다. 선양하다.
▲ 秦楚之際月表 : 秦 2세 황제 재위 시기와 항우의 통치기간으로 기간이 짧았으므로 월표라고 하였다.
제5편 <漢興已來諸侯年表>
漢興已來,至于太初百年,諸侯廢立分削,譜紀不明,有司靡踵,彊弱之原云以世。
作漢興已來諸侯年表第五。
한나라가 일어난 이래로 太初에 이르는 100년 동안 제후들이 바뀌고 봉토가 분할되고 삭감되었지만, 족보의 기록이 불명하여 史官들이 그 후손을 따라갈 수 없어서, 강하고 약했던 원인 정도만 언급하였다.
‘漢興已來諸侯年表’를 지으니 제5편이다.
▲ 太初 : 漢武帝의 일곱 번째 연호(기원전 104~101년).
▲ 廢立分削 : 제후들을 폐하고 옹립하며 봉토를 분할하고 삭감함.
▲ 有司 : 담당관리. 史官.
▲ 靡踵 : 뒤따르다. 계승하다. 靡는 없다. 踵은 발뒤꿈치. 계승하다.
▲ 漢興已來諸侯年表 : 한나라를 개국한 이후의 제후들에 대한 연표.
제6편 <高祖功臣侯者年表>
維高祖元功,輔臣股肱,剖符而爵,澤流苗裔,忘其昭穆,或殺身隕國。
作高祖功臣侯者年表第六。
고조가 천하를 취함에 股肱의 輔臣은 符節을 받아 封爵되고 그 은택이 후손에 미쳤으나 선조의 서열을 망각하고 혹은 죽거나 나라를 망친 자도 있다.
‘高祖功臣侯者年表’를 지으니 제6편이다.
▲ 元功 : 높은 공훈. 천하를 취한 공.
▲ 股肱 : 팔다리. 군왕을 보좌한 대신.
▲ 剖符 : 부절을 쪼개다. 符節은 구리나 대나무, 옥 따위로 만든 符信. 직위를 증명하는 것으로, 둘로 갈라 하나는 조정에 보관하고 하나는 본인이 가지고 信標로 사용하였다.
▲ 昭穆 : 여기서는 친근함과 소원함을 말한다. 昭穆은 祠堂에서 神主를 모시는 차례로 왼쪽 줄을 昭, 오른쪽 줄을 穆이라 한다. <주례>에 의하면 제1세를 중앙에 모시는데 천자는 소에 2·4·6세, 목에 3·5·7세를 각각 봉안하여 三昭三穆의 七廟가 되고, 제후는 소에 2·4세, 목에 3·5세를 각각 봉안하여 二昭二穆의 五廟가 되며, 大夫는 일소일목의 三廟가 된다.
▲ 高祖功臣侯者年表 : 한고조의 공신의 업적과 그 가족의 흥망성쇠를 기록한 연표.
제8편 <建元以來侯者年表>
惠景之閒,維申功臣宗屬爵邑,作惠景閒侯者年表第七。 惠帝에서 景帝 연간에 공신과 宗室成员에게 작위와 식읍을 늘려 주었으므로 ‘惠景閒侯者年表’를 지으니 7편이다. 北討彊胡,南誅勁越,征伐夷蠻,武功爰列。 북쪽으로 사나운 흉노를 토벌하고, 남쪽으로는 굳센 越를 토벌하였으며, 사방의 만이를 정벌하여 그 무공에 따라 候로 봉하였다. 作建元以來侯者年表第八。 ‘建元以來侯者年表’를 지으니 제8편이다. |
▲ 申 : 伸과 같다. 펴다. 작위와 식읍을 늘려주다.
▲ 爵邑 : 작위와 封邑.
▲ 惠景閒侯者年表 : 혜제 원년(기원전 194년) 이래 여후와 문제를 거쳐 경제말년(기원전 141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분봉된 제후들과 이 시기부터 무제 원봉 6년(기원전 105년) 사이 몇십 년간의 역사적 변천과정을 수록한 연표.
▲ 爰 : 이에.
▲ 列 : 많다.
▲ 建元以來侯者年表 : 漢武帝 건원 원년(기원전 140년)부터 태초 연간(기원전 104년에서101년)에 이르는 시기에 분봉된 공신들의 상황을 기록한 연표.
제9편 <王子侯者年表>
諸侯既彊,七國為從,子弟眾多,無爵封邑,推恩行義,其埶銷弱,德歸京師。
作王子侯者年表第九。
제후가 강해져 7국이 한 덩어리로 뭉치는데, 제후의 자손은 많으나 작위와 봉읍을 받지 못하게 되자, 조정에서 은혜를 베풀어 땅과 작위를 내려주니, 제후국의 세력은 약해지고 덕은 모두 한나라 조정으로 돌아갔다.
王子侯者年表’를 지으니 제9편이다.
▲ 從 : 縱과 같다. 오초 7국이 남북으로 뭉쳐진 형세를 말한다.
▲ 推恩 : 은혜를 베풀다. 元朔 2년(기원전127년), 무제는 주보언의 주장을 받아들여 제후의 자제들에게 分封토록 하였다.<사기 권112. 平津侯·主父列傳>
▲ 銷弱 : 쇠약해지다. 銷는 消와 통한다.
▲ 王子侯者年表 : 지금 전해지는 사기에는 “建元已来王子侯者年表”로도 기록되어 있다. 武帝 元光 5년(기원전 130년)부터 元鼎 원년(기원전 116년)까지의 제후왕의 자식들에게 후를 봉한 정황을 기록한 연표이다.
제10편 <漢興以來將相名臣年表>
國有賢相良將,民之師表也。
維見漢興以來將相名臣年表,賢者記其治,不賢者彰其事。
作漢興以來將相名臣年表第十。
나라의 유능한 재상과 뛰어난 장수는 백성의 귀감이다.
한나라가 개국한 이래 장수와 재상 그리고 이름난 신하들의 연표를 살펴서, 현명한 사람은 그 치적을 기록하고 현명하지 못한 자라도 잘못한 행적을 밝혔다.
‘漢興以來將相名臣年表’를 지으니 제10편이다.
▲ 師表 : 모범. 귀감.
▲ 治 : 치적.
▲ 彰 : 드러내다.
▲ 漢興以來將相名臣年表 : 한고조가 한나라를 건국한 이래 成帝 鴻嘉 원년(기원전 20년)까지의 사건을 기록한 연표이다.
제1편 <禮書>
維三代之禮,所損益各殊務,然要以近性情,通王道,故禮因人質為之節文,略協古今之變。
夏·殷·周 삼대의 禮는 덜고 더함이 있어서 각각 같지는 않았으나, 그 요지는 인간의 성정에 가깝고 왕도와 통하였으므로, 예는 사람의 질박한 본성에 근거하여 화려함을 절제하고, 대체로 古今의 변화에 순응하는 것이었다.
作禮書第一。
‘禮書’를 지으니 제1편이다.
▲ 要 : 요령.
▲ 質 : 수수하고 질박하다.
▲ 文 : 화려하다.
▲ 禮書 : 禮의 발생과 기능 및 그 발전 역사를 서술한 책.
제2편 <樂書>
樂者,所以移風易俗也。
음악이란 풍속을 옮기고 바꾼다.
自雅頌聲興,則已好鄭衛之音,鄭衛之音所從來久矣。
<시경>의 雅와 頌이 유행하자 鄭과 衛의 음악을 좋아하게 되어 鄭와 衛의 음악이 오래도록 전해졌다.
人情之所感,遠俗則懷。
人情의 느낌은 같아서 풍속이 다른 먼 곳에서도 귀순한다.
比樂書以述來古,作樂書第二。
<악서>를 본떠서 옛날을 서술하기 위해 ‘樂書’를 지으니 제2편이다.
▲ 雅 : 시경의 大雅와 小雅.
▲ 頌 : 시경의 周頌, 鲁頌, 商頌.
▲ 鄭衛之音 : 春秋時代와 전국시대의 鄭와 衛의 민간의 음악.
▲ 比 : 비교 대조하다. 본따다.
▲ 來古 : 옛날. 이전.
▲ 樂書 : 음악의 변천사를 기술한 책.
제3편 <律書>
非兵不彊,非德不昌,黃帝、湯、武以興,桀、紂、二世以崩,可不慎歟?
군대가 없으면 나라가 강해질 수 없고 덕이 없으면 나라가 창성할 수 없으매, 黃帝와 湯王과 武王은 이것으로 일어났고, 夏桀과 殷紂와 秦2세는 이것으로 멸망하였으니 신중하지 않아서 되겠는가?
司馬法所從來尚矣,太公、孫、吳、王子能紹而明之,切近世,極人變。
‘司馬法’은 전해 온 지 오래되었으며, 姜太公·孫武·吳起·王子成甫 등이 이를 계승하여 그것을 밝혔는데, 근세에 적합하고 人事의 변화에 지극하였다.
作律書第三。
‘律書’를 지으니 제3편이다.
▲ 兵 : 군대.
▲ 司馬法 : 春秋時代 齊의 병법가 司馬穰苴가 저작한 병법서.<사기권4. 사마양저열전>
▲ 尚 : 아주 오래되다.
▲ 王子 : 王子成甫. 春秋時代 齊襄公 때 正卿으로 유명한 군사전략가이다.
▲ 切 : 적합하다.
▲ 極人變 : 인간사의 변화에 극진함.
▲ 律書 : 音律의 이론을 다룬 책이다.
제4편 <易書>
律居陰而治陽,歷居陽而治陰,
律歷更相治,閒不容翲忽。
音律은 陰에 깃들어서 陽을 다스리고, 曆法은 陽에 깃들어서 陰을 다스린다.
律歷이 서로를 다스리므로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다.
五家之文怫異,維太初之元論。
五家의 역법은 서로 다 달랐고, 태초 원년에 제정한 역법이 으뜸 이론이다.
作歷書第四。
<易書>를 지으니 제4편이다.
▲ 翲忽 : 한 치의 오차. 표는 1秒를 말하며 忽은 1寸의 만 분의 일이며 십홀은 1초이다.
▲ 五家之文 : 黄帝·顓頊·夏·殷·周 5대의 曆法.
▲ 怫異(불이) : 어긋나다. 위배되다. 怫은 悖(거스를 ‘패’)와 통용된다.
▲ 太初 : 漢武帝 태초 원년(기원전 104년).
▲ 歷書 : 역법의 발생과 발전의 과정에 관하여 夏殷周 三代 이후 존재하는 정치와 역법의 상호관계를 위주로 서술하였다.
제5편 <天官書>
星氣之書,多雜禨祥,不經;
推其文,考其應,不殊。
별과 기상으로 점을 치는 책에는 길흉화복이 복잡하게 섞여 있어 황당하다.
그 문장과 효험을 따져보아도 별다르지 않다.
比集論其行事,驗于軌度以次,作天官書第五。
漢武帝가 이와 관련된 일들을 전문가와 토의 연구하여, 별들이 운행하는 법도를 차례로 검증하였으므로, ‘天官書’를 지으니 제5편이다.
▲ 星氣 : 별과 氣象.
▲ 禨祥(기상) : 신에게 복을 빌고 재앙을 물리치게 기도함.
▲ 不經 : 황당하여 이치에 맞지 않다.
▲ 比 : 이에.
▲ 集論 : 漢武帝가 唐都와 司馬達 등을 불러 천문역법에 대해 토론한 일을 말한다.
▲ 軌度 : 법도. 법칙.
▲ 天官書 : 천관이란 恒星을 판별하고 하늘의 형상을 관측하고 기록하기 위하여 그 이웃 영역이나 가까운 항성까지 이름을 부여한 단위를 말하며 星官이라고도 말한다. 천관서는 天象과 人事에 입각하여 변혁을 탐구한 것이다.
제6편 <封禪書>
受命而王,封禪之符罕用,用則萬靈罔不禋祀。
천명을 받아 제왕이 되지만, 封禪의 상서로운 의식은 드물게 행한다. 봉선을 거행하면 모든 신령이 제사를 받게 된다.
追本諸神名山大川禮,作封禪書第六。
여러 신과 명산대천에 제사 지내는 의례의 근본을 거슬러 살피어 ‘封禪書’를 지으니 제6편 이다.
▲ 封禪 : 帝王이 천지에 제사지내던 의례로 최초로 봉선한 것은 秦始皇帝였는데 泰山의 산정에서 하늘을 제사지내고, 부근의 작은 동산인 梁父山에서 땅에 제사지냈다.
▲ 符 : 조짐. 징조.
▲ 罕 : 드물다.
▲ 禋祀 : 정결히 하고 제사를 지냄. 禋은 고대 제천행사의 제사명.
▲ 追本 : 본질을 거슬러 올라가다. 근본으로 거슬러 올라가 살피다.
▲ 封禪書 : 명산대천의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禮의 本源을 거슬러 올라가 연구하여 지은 것으로 舜임금부터 漢武帝까지의 봉선제도에 관하여 기록한 것이다.
제7편 <河渠書>
維禹浚川,九州攸寧;
爰及宣防,決瀆通溝。
우임금은 하천을 준설하여 九州의 백성들이 안녕을 누리게 되었다.
宣房宮을 지으면서 물길을 터서 서로 통하게 하였다.
作河渠書第七。
‘河渠書’를 지으니 제7편이다.
▲ 禹 : 夏나라의 禹임금. 순임금 때 아버지 鲧이 治水에 실패하여 죽임을 당한 후 그 유업을 물려받았다.
▲ 浚 : 浚渫. 수로를 넓히고 깊게 함.
▲ 九州: 고대 하나라의 禹임금이 나라를 冀·兗·靑·徐·荊·揚·豫·梁·雍의 九州로 구별하였으며, 중국 전체를 일컫는 말이 되었다.
▲ 宣防 : 宣房宮. 漢武帝 元光 3년(기원전 132년) 황하가 瓠子에서 범람하였다. 그 후 20여 년 후에 漢武帝가 명하여 호자의 둑을 다시 만들고 그 자리에 궁을 짓고 선방궁이라 이름하였다.
▲ 決瀆通溝 : 수로와 도랑을 준설하여 통하게 하다.
▲ 河渠書 : 夏나라를 세운 禹임금부터 시작해서 漢武帝 때까지 행한 고대 중국의 수리사업에 관해 서술한 책.
제8편 <平準書>
維幣之行,以通農商;
其極則玩巧,并兼茲殖,
爭於機利,去本趨末。
화폐의 유통으로 농업과 상업이 통하게 한다.
그것이 극에 이르면 교묘한 수단으로 재산을 불리려고 남의 것을 빼앗는다.
투기와 이익을 다투어 농사는 팽개치고 장사하는 쪽으로 달려든다.
作平準書以觀事變,第八。
‘平準書’를 지어 그 상황의 변화를 관찰하니 제8편이다.
▲ 玩巧 : 솜씨가 뛰어나다.
▲ 并兼 : 兼并. 합병하다.
▲ 兹 : 滋와 통한다. 늘리다.
▲ 殖 : 증가하다.
▲ 去本趨末 : 농사를 그만두고 장사에 달려든다. 本은 농업을 말하며, 末은 상공업을 말한다.
▲ 平準書 : 한나라가 서고 나서부터 무제에 이르기까지의 100여 년 동안 국가의 재정정책과 경제발전 과정을 서술한 책이다. 平準法은 漢武帝가 쓴 물가조정책으로 풍년에 물자를 平準創에 貯藏하여 두었다가. 흉년에 방출하여 물가를 조정하고, 그 이윤을 歲入으로 한 것이다.
제1편 <吳世家>
太伯避歷,江蠻是適;
文武攸興,古公王跡。
吳太伯은 季歷의 즉위를 위해 강남 이민족의 땅에 피하여 살았고,
文王과 武王은 주 왕조를 일으켜 古公亶父의 왕업을 일으켰다.
闔廬弒僚,賓服荊楚;
夫差克齊,子胥鴟夷;
信嚭親越,吳國既滅。
闔廬는 僚를 시해하고 楚를 굴복시켰고,
夫差는 齊와 싸워 이기고, 오자서의 시체를 말가죽에 싸서 물에 던져버렸고,
부차는 간신 伯嚭(백비)를 신임하여 越과 가까이 지내더니 결국 越에게 멸망되었다.
嘉伯之讓,作吳世家第一。
태백의 讓位를 칭송하며 ‘吳世家’를 지으니 제1편이다.
▲ 吳太伯 : 春秋時代 吳의 초대 군주이자, 吳의 시조이다. 周 古公亶父의 장남으로 형제로는 仲雍과 季歷과 조카로는 주문왕이 있었다. 성은 姬. 太伯으로도 호칭되며, 자기 대신 동생 季歷에게 후계를 넘기려는 아버지의 뜻을 알아채고 동생 仲雍과 함께 이민족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달아났다.
▲ 闔廬 : 春秋時代 吳의 왕. 이름은 光이다. 專諸를 시켜 오왕 요를 찔러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楚를 무찌르고 위세를 떨쳤으나 월왕 句踐과 싸워 부상하여 죽었다. <闔閭>라고도 한다.
▲ 闔廬弒僚 : 오왕 僚 12년(기원전 515년) 공자 광이 오왕 요를 자신의 집으로 초청하여 전제에게 구운 생선 요리를 왕에게 올리게 했는데, 생선의 뱃속에는 비수가 숨겨져 있었다. 왕 앞에 나아간 전제는 생선을 찢어 가르고 그 비수로 요를 찔렀다. 요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고 전제도 왕의 측근들에게 살해되었다. <사기 자객열전><권66 伍子胥列傳> 僚는 吳王 僚를 말하며 春秋時代 吳의 제21대 군주이다. 성은 姬. 휘는 僚 또는 州于이다.
▲ 賓服荊楚 : 楚를 항복시키다. 賓服은 항복시키다. 荊楚는 楚.
▲ 鴟夷(치이) : 말가죽으로 만든 가죽 부대. 오왕 부차가 오자서에게 칼을 내리자 오자서가 그 칼로 자살하였고 오자서의 시체를 끌어내다가 말가죽으로 만든 자루에 넣어 강물에 던져버렸다. <사기 권 권66 伍子胥列傳>
▲ 伯嚭(백비) : 오왕 부차 원년(기원전 495년), 대부 백비를 태재로 삼았다. 백비는 越王 구천에게 뇌물을 받고 오자서를 비방하며 越을 옹호하였다.
제2편 <齊太公世家>
申、呂肖矣,尚父側微,
卒歸西伯,文武是師;
功冠群公,繆權于幽;
番番黃髪,爰饗營丘。
申과 呂 두 나라가 쇠약해지자 尚父 姜太公은 미천한 신분이 되었다가 마침내 西伯에게 귀의했고 주 문왕과 무왕의 스승이 되었다.
그의 공은 신하 중에 으뜸이었고 권모술수에 능하였다.
머리카락이 황백색으로 변한 노년에 營丘를 封地로 받았다.
不背柯盟,桓公以昌,
九合諸侯,霸功顯彰。
柯에서의 맹약을 배신하지 않았기에 齊桓公은 번창하였으며, 아홉 차례나 제후들을 불러 모으니 패자로서의 공적이 두드러졌다.
田闞爭寵,姜姓解亡。
田常과 闞止 두 권신이 총애를 다투었고, 姜氏의 齊는 망하였다.
嘉父之謀,作齊太公世家第二。
尚父 제태공의 지략을 칭송하여 ‘齊太公世家’를 지으니 제2편이다.
▲ 申呂肖矣 : 夏商 양대에 걸쳐 申과 呂 땅의 봉지는 강씨들의 방계 자손들에게 전해졌으나 후대에 이르러 몰락하여 평민으로 되었다. 肖는 꺼질 ‘소’.
▲ 尚父 : 太公望 呂尙을 말하며 周文王이 상보라는 존칭으로 불렀다. 그의 선조는 堯舜 시절에 四岳이라는 벼슬을 살았고 夏나라의 禹임금이 치수를 위해 토목공사를 벌릴 때 그를 보좌하여 큰 공을 세웠다. 舜과 우임금 때 呂와 申 땅에 봉해지고 姜을 姓으로 받았다. 姜太公은 주나라 문왕, 무왕의 스승이자 장인이며 천하의 스승국의 위치로 군림하여 제후국인 齊의 군주(제태공)가 되었다.
▲ 西伯 : 서쪽 제후의 우두머리. 周文王. 주나라의 첫 임금인 武王의 아버지로 西伯 昌이다.
▲ 肖(소) : 쇠하다. 쇠미하다.
▲ 側微 : 미천하다.
▲ 繆權于幽(무권우유) : 권모술수에 능하다. 주도면밀하다. 幽는 깊다.
▲ 番番(파파) : 皤皤(파파)와 통용된다. 머리가 하얗게 세다.
▲ 爰饗營丘 : 齊에 봉해져 營丘를 食邑으로 하다.
▲ 柯盟 : 周釐王 원년(기원전 681년) 齊와 魯는 柯에서 맹약했는데 齊가 빼앗은 魯의 땅을 돌려주었으나 齊桓公이 이를 후회하여 나중에 맹약을 배반하고자 했으나, 管仲의 간언으로 맹약을 지켰다.
▲ 九合諸侯 : 제후들과 아홉 번 회합하다. “아홉 번은 軍用 수레로 모인 것이 세 번이고 乘用 수레로 모인 것이 여섯 번이다.”라고 하였다.(論語 憲問) 合은 會盟으로 제후와 제후가 만나서 맹약을 맺는다는 뜻이다.
▲ 田闞爭寵 : 春秋時代 齊簡公 때 田常과 監止가 함께 相으로 있었는데, 간공이 감지를 총애하고 田氏를 내쫓으려고 계획하였다.
▲ 田常 : 齊 대부 陳恒을 가리킨다. 齊簡公을 시해하고 平公을 옹립한 다음에 자신은 재상이 되었다.<사기 권 46. 田敬仲完世家>
▲ 嘉 : 칭찬하다. 기리다.
제3편 <周公世家>
依之違之,周公綏之;
憤發文德,天下和之;
輔翼成王,諸侯宗周。
주공이 섭정하자 이에 따르는 제후도 있고 반대하는 제후도 있어 정국이 어지러웠지만 주공이 이를 안정시켰다.
文德으로 힘껏 교화하자 천하 사람들이 이에 호응하였다.
주공이 成王을 보필하니 제후들은 주 왕실을 종주로 떠받들었다.
隱桓之際,是獨何哉?
魯隱公과 魯桓公에 이르러 어쩌다 그렇게 나라가 혼란스러워졌을까?
三桓爭彊,魯乃不昌。
三桓의 무력 다툼으로 魯는 끝내 번창하지 못하였다.
嘉旦金縢,作周公世家第三。
주공 단의 금등(金縢)을 칭송하여 ‘周公世家’를 지으니 제3편이다.
▲ 依之違之 : 무왕이 죽고 어린 성왕이 즉위하여 주공이 섭정하자 이에 따르는 제후도 있고 반대하는 제후도 있었다.
▲ 綏 : 안정시키다.
▲ 憤發文德 : 문덕으로 한층 분발하다.
▲ 和 : 호응하다.
▲ 隱桓 : 魯隱公과 魯桓公.
▲ 三桓 : 三桓氏. 春秋時代 魯의 대부였던 仲孫氏, 叔孫氏, 季孫氏를 가리킨다. 모두가 桓公의 아들이었으므로 삼환이라 칭하였다. 중손씨는 나중에 孟孫氏로 불렸다. 기원전 562년 삼환씨는 魯의 公室을 무너뜨리고 정권을 인수하여 분권정치를 실시하였다. 그 중 계손씨의 세력이 가장 강하였다.
▲ 金縢(금등) : 주무왕이 은나라를 멸하고 1년 만에 병에 걸려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자 주공 단이 사관에게 太王, 王季, 文王께 武王 發을 대신해 죽겠다는 축문을 고하게 하고 바로 세 왕을 향해 점을 쳤다. 점의 괘가 길하게 나오자 그 점괘를 금궤 안에 보관하고 금으로 밀봉하였다. 금등이란 금을 녹여 그 물로 봉함한 궤를 말했으나 후에 그 안에 든 축문의 내용을 말하게 되었다.<尚書·周書>
제4편 <燕世家>
武王克紂,天下未協而崩。
周武王이 紂왕을 이겼으나 천하의 화합이 이루어지기 전에 세상을 떴다.
成王既幼,管蔡疑之,淮夷叛之,於是召公率德,安集王室,以寧東土。
성왕은 어려서 주공이 섭정하자 관숙과 채숙이 의심하여 淮水의 夷族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으나 召公이 앞장서서 덕으로 다스려 왕실을 편안하게 하고 동쪽의 땅도 안녕을 되찾았다.
燕易噲之禪,乃成禍亂。
燕王 噲의 섣부른 선양이 재앙과 난리를 불러일으켰다.
嘉甘棠之詩,作燕世家第四。
<시경>의 ‘甘棠’ 시를 칭송하며 ‘燕世家’를 지으니 제4편이다.
▲ 武王克紂 : 주무왕이 은나라 주왕을 토벌하여 은나라를 멸망시켰다.
▲ 管蔡 : 管叔과 蔡叔. 이들은 모두 周公의 형제다.
▲ 淮夷 : 春秋 시대 江蘇에 있던 부족.
▲ 召公 : 邵公. 召公 姬奭은 周왕실과 同姓의 사람으로 주공과 함께 周의 대표적인 현신이다. 〈周本紀〉에는 둘은 함께 武王의 혁명을 돕고 무왕의 아들 성왕을 보좌하여 천하를 다스렸다고 하였다.
▲ 燕噲之禪 : 아버지 易王에게 왕위를 이어받은 燕 왕 子噲가 계책을 쓰는데 어리석어서 소대의 유세에 따라 요순이 선양하였음을 본받아 재상이었던 子之에게 임금 자리를 양보하니 3년 만에 燕이 어지러워졌다(燕王噲拙於謀 用蘇代之說 效堯舜讓位與子之 三年而國亂). 옛날 堯와 舜은 임금 자리를 사양함으로써 제왕이 되었는데, 燕의 宰相 子之와 燕王 子噲는 같은 방법으로 나라를 멸망시켰다. <장자 외편 추수(秋水)>
▲ 甘棠 : <詩經·召南>의 편명으로 召公 姬奭을 기리는 노래로 전해진다. “우거진 팥배나무, 자르지도 베지도 말라. 소백께서 쉬시던 곳이니라(蔽芾甘棠, 勿剪勿伐, 召伯所茇.........). 召伯이 南國을 순행하여 文王의 政令을 펼 적에 甘棠 아래에 집을 지었는데, 그 후에 사람들이 그 덕을 사모하였다.
제5편 <管蔡世家>
管蔡相武庚,將寧舊商;
及旦攝政,二叔不饗;
殺鮮放度,周公為盟;
大任十子,周以宗彊。
嘉仲悔過,作管蔡世家第五。
管叔과 蔡叔은 武庚을 보좌하여 옛 商나라의 유민을 안정시키려 하였다.
周公 旦이 섭정하자 관숙과 채숙은 복종하지 않았다.
주공은 관숙 鮮을 죽이고 채숙 度를 추방하고 어린 成王에게 충성을 맹세하였다.
문왕의 왕비 太姒에게는 아들이 열 명이나 되어 주나라의 종실이 강성해졌다.
잘못을 뉘우친 蔡叔의 아들 蔡仲을 칭송하여 ‘管蔡世家’를 지으니 제5편이다.
▲ 管蔡 : 周나라의 管叔과 蔡叔을 말하며 周公의 형제들이다.
▲ 武庚 : 중국 商의 마지막 임금인 紂王의 아들로 ‘禄父’라고도 한다. 商이 멸망한 뒤 商의 도읍이었던 殷에 머무르며 遺民들을 다스렸고, 周武王이 죽은 뒤에 周公이 成王을 대신해 攝政하자, 周公의 동생들인 管叔, 蔡叔, 霍叔과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 殺鮮放度 : (주공이) 관숙을 죽이고 채숙을 추방하다. 관숙의 이름은 鲜이며, 채숙의 이름은 度이다.
▲ 大任十子 : 문왕의 왕비 태사의 슬하의 아들이 열 명이나 된다. 大任은 太任 혹은 太姒라고도 한다. 주문왕의 정비이며 주무왕의 모친이다. 아들에 武王發, 管叔鮮, 周公旦, 蔡叔度, 康叔封 등이 있다.
▲ 蔡仲 : 蔡仲胡. 蔡의 제2대 군주이다. 성은 姬이다. 蔡叔度의 아들로, 아버지가 삼감의 난을 일으켰다 쫓겨난 후 자신의 행위를 고쳐 주공의 인정을 받아 주나라 정계에 채숙의 집안이 복귀할 수 있었다. 먼저 주공의 봉국인 魯의 경사를 지내며 魯를 다스렸고, 주공은 이를 보고 성왕에게 말해 호에게 蔡를 다시 봉해 채숙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제6편 <陳杞世家>
王后不絕,舜禹是說;
維德休明,苗裔蒙烈。
덕 있는 제왕의 후손은 끊어지지 않으니 순임금과 우임금은 이를 기뻐할 것이다.
그들의 공덕이 맑고 깨끗하여 후대가 그 공적을 계승하였다.
百世享祀,爰周陳杞,楚實滅之。
백 代가 지나도록 제사를 받았고, 주나라 때 陳과 杞의 나라에 봉해졌지만 楚에게 멸망당하였다.
齊田既起,舜何人哉?
그 후손이 齊에서 田씨로 일어났으니 순임금은 얼마나 대단한가?
作陳杞世家第六。
‘陳杞世家’를 지으니 제6편이다.
▲ 說 : 悦과 통용된다. 기쁘다.
▲ 休明 : 맑고 깨끗하다.
▲ 苗裔 : 후손
▲ 蒙烈 : 공적을 계승하다. 蒙은 이어받다. 烈은 공적.
▲ 陳杞 : 舜임금의 후손 胡公 滿이 분봉받은 陳과 주무왕이 虞임금의 후손 東樓公에게 분봉한 杞를 말한다.
▲ 實 : 뜻이 없는 語氣詞.
제7편 <衛世家>
收殷餘民,叔封始邑,申以商亂,酒材是告,及朔之生,衛頃不寧;
南子惡蒯聵,子父易名。
周公은 殷나라의 유민을 거두어 康叔 封을 衛 땅에 봉하며, 商나라의 혼란했던 상황을 타이르기 위해 <상서>의 酒誥와 梓材를 예로 들어 훈계하였으며, 衛惠公 朔이 태어날 무렵에 衛는 기울어져 편치 못하였다.
衛靈公의 부인 男子가 태자 蒯聵를 미워하여 내쫓으니, 아들과 아버지가 명분이 뒤바뀌는 일이 벌어졌다.
周德卑微,戰國既彊,衛以小弱,角獨後亡。
주왕실의 덕이 미미해지고, 戰國의 열국이 강해지고 衛는 소국으로 전락하니 角王 때까지 홀로 버틴 후에 망하였다.
喜彼康誥,作衛世家第七。
저 ‘康誥’를 찬미하여 ‘衛世家’를 지으니 제7편이다.
▲ 收殷餘民 : 周武王이 죽은 뒤 周公은 반란을 일으킨 殷나라의 遺民을 정벌하고 武庚의 난이 평정되자 康叔 封을 은나라의 舊都인 朝歌에 封하여 나라 이름을 衛라 하여 은나라의 유민을 관리하게 하였다.
▲ 康叔封 ; 西周 때의 왕족. 衛의 國君. 이름이 封이다. 武王과 어머니가 같은 형제이다. 처음에 康에 봉해졌다. 武庚(紂王의 아들)의 난이 평정되자 周公이 殷나라의 옛 땅을 강숙에게 봉하고, 은나라의 유민을 관리하게 하여, 나라 이름은 衛라고 하고 도읍을 朝歌로 하니 衛의 시조가 되었다.
▲ 申 : 훈계하다. 타이르다.
▲ 酒材是告 : 酒誥와 梓材는 <書經> 周書의 篇名으로 술의 해로움과 그에 대한 경계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를 본받아 국가에서 금주령을 발표할 때 임금이 敎旨나 宣諭文의 형식으로 일반 백성들에게 술에 대한 경계의 글을 인용하였다.
▲ 朔 : 衛惠公. 春秋時代 衛의 國君. 이름은 朔이고, 宣公의 아들이다.
▲ 南子 : 衛靈公의 부인. 宋 사람으로 南子로 일컬어진다. 春秋 시기 衛靈公의 부인이자 정치가이다. 南子는 본래 성생활이 음란하여 宋의 公子朝와 私通한 바가 있었다. 衛靈公의 太子인 蒯聵가 이 사실을 알고 매우 분노하여 家臣인 戲陽速과 상의해 南子를 암살하려고 했다가 도리어 南子의 측근들에게 발각되어 태자 괴외와 그 측근들은 달아나버렸다.
▲ 蒯聵 : 또는 괴외(蕢聵). 春秋時代 衛의 國君. 衛靈公의 아들이다. 태자로 있을 때 영공의 부인 南子를 죽이려고 하다가 실패하고 晉으로 달아났다. 영공이 죽자 그의 아들 輒을 세우니 그가 出公이다. 晉에서 괴외를 보냈지만 衛에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출공 13년 괴외가 누이 孔伯姬의 도움을 얻어 衛에 들어와 출공을 핍박해 魯로 내쫓고 국군이 되었다.
▲ 卑微 : 지체가 낮고 천함.
▲ 角獨後亡 : 衛는 戰國時代에 이르러서는 강국인 秦·魏 사이에 끼어 겨우 명맥을 유지하다가 기원전 209년 제46대 君角 때 秦의 2세황제에 의해 멸망되었다.
▲ 康誥 : <書經> 周書의 篇名. 誥는 제왕이 백성에게 고하거나, 관리를 임명하는 데 쓴 문체로 周나라 때 백성에게 고하여 가르치는 문서인 <尙書>의 盤庚·大誥·康誥·酒誥·召誥·洛誥 등을 말한다.
▲ 衛世家 : 현재 존재하는 <사기>에는 衛康世家로 기록되어 있다.
제8편 <宋世家>
嗟箕子乎!嗟箕子乎!
正言不用,乃反為奴。
아아, 箕子여! 아아, 箕子여! 바른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미치광이 행세를 하며 노예가 되었구나.
武庚既死,周封微子。
武庚이 죽자 주 왕실은 微子를 宋에 봉하였다.
襄公傷於泓,君子孰稱。
후세에 宋襄公이 泓水에서 楚와 싸우다 부상하고 패했는데, 군자라고 누가 칭할 수 있겠는가?
景公謙德,熒惑退行。
宋景公이 겸양의 덕을 쌓으니 좋지 않은 징조인 火星이 서쪽으로 물러났다.
剔成暴虐,宋乃滅亡。
剔成이 포악하여 宋은 마침내 멸망하고 말았다.
喜微子問太師,作宋世家第八。
微子가 箕子를 太師로 삼아 자문함을 칭송하여 ‘宋世家’를 지으니 제8편이다.
▲ 箕子 : 殷나라 紂王의 숙부로 이름은 胥餘이고 벼슬은 太師에 이르렀으며, 箕에 봉해졌다. 紂왕이 포악함 보고 간했지만 듣지 않자, 머리를 풀고 미친 척 가장하여 노예가 되었다가 紂에 의해 구금되었다. 周武王이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紂를 죽인 뒤에 箕子를 석방하고 朝鮮에 책봉하였다.
微子 : 殷나라의 마지막 임금인 紂王의 이복형으로 이름은 啟이다. 은나라가 멸망한 뒤에 周成王이 宋의 제후로 封하였다. 比干, 箕子와 함께 殷 말기의 세 명의 어진 사람으로 꼽힌다. 春秋시대 諸侯國인 宋의 始祖이기도 하여 宋微子라고도 한다.
▲ 宋襄公 : 春秋時代 宋의 군주로 春秋五霸로 꼽히기도 한다. 公子 目夷의 충고를 따르지 않고 楚와 패권을 다투다가 楚에 억류되는 수모를 겪기도 하고, 楚와 泓水에서 싸울 적에도 楚의 군대가 홍수를 반쯤 건넜을 때 공격하자는 목이의 간쟁을 물리치고 초군이 물을 다 건너고 대열을 다 갖출 때까지 기다렸다가 싸워 크게 패하였다. 이에 세상 사람들이 ‘宋襄之仁’이라 하여 이를 비웃었다.<春秋左氏傳 僖公 22년>
▲ 宋景公 : 春秋時代 宋의 國君으로 이름은 頭曼이고, 元公의 아들이다. 曹가 宋를 배신하고 晉과 가까워지자 군사를 풀어 曹를 멸망시켰다.
▲ 熒惑(형혹) : 熒惑星. 고대 火星의 다른 이름. 형혹은 천벌을 의미한다.
▲ 退行(퇴행) : 惑星이 天球 위를 서쪽으로 향하여 운행하다.
▲ 剔成(척성) : 剔成君. 춘추전국시대 宋의 제33대 임금이다. 성은 子, 씨는 戴, 휘는 剔成이다. 척성 41년에 척성의 동생인 偃이 척성을 기습하였다. 척성이 패하여 齊로 달아나고 언이 宋의 국군으로 자립하였다. 宋王 언 47년(기원전 282년)에 齊湣王과 魏, 楚가 宋을 정벌하여 송왕 언을 죽이고, 마침내 宋을 멸망시키고 그 땅을 셋으로 나누었다.
제9편 <晉世家>
武王既崩,叔虞邑唐。
무왕이 죽자 무왕의 아들 叔虞는 唐 땅에 봉해졌다.
君子譏名,卒滅武公。
군자들이 晉穆候가 아들 이름을 잘못 지었음을 나무랐는데, 그 아들이 결국 武公에게 멸망당하였다.
驪姬之愛,亂者五世;
晉獻公이 驪姬에게 빠져 晉은 5대에 걸쳐 혼란스러웠다.
重耳不得意,乃能成霸。
晉文公 重耳는 처음에는 뜻을 얻지 못했으나 결국에는 패업을 이루었다.
六卿專權,晉國以秏。
六卿이 권력을 좌우하니 晉國은 멸망되었다.
嘉文公錫珪鬯,作晉世家第九。
晉文公이 주나라 천자로부터 珪와 울창주의 예물을 받은 일을 칭송하여 ‘晉世家’를 지으니 제9편이다.
▲ 叔虞 : 성은 姬이고, 자는 子於이다. 周武王의 아들이자 周成王 아우이다. 周나라 諸侯國인 晉의 始祖로 周武王 사후에 周成王이 어렸기 때문에 주무왕의 아우인 周公이 섭정하였다. 周公이 唐을 멸망시킨 후에 그 땅을 叔虞에게 하사하였다. 그의 아들인 燮父가 도읍을 晉水로 옮겨 晉으로 개명하였다.
▲ 譏名 : 晋穆候는 태자의 이름을 仇라 하고 태자의 동생 이름을 成師라 지어 이름에 따라 아들에 의한 난이 일어났다.
▲ 武公 : 曲沃武公. 春秋時代 晉의 國君. 이름은 稱이고, 曲沃莊伯의 아들이다. 곡옥이 晉 왕실의 庶子로 땅을 봉해 받아 오랜 기간 晉과 왕위 쟁탈을 벌였다. 武公 7년 晉을 정벌해 哀王을 죽였다. 4년 뒤에는 晉小子 侯를 살해하였다.
▲ 驪姬 : 春秋時代 晉獻公의 妃이다. 원래는 이민족인 驪戎 군주의 딸이지만 헌공이 驪戎을 정벌하였을 때 사로잡혀 동생과 함께 헌공의 後宮이 되었다. 헌공의 총애를 받아 왕비가 된 뒤 태자인 신생을 모함하여 죽이며 정치의 혼란을 가져왔다. 자신의 자식인 奚斉를 태자로 삼으려고 태자인 申生을 비롯해 重耳, 夷吾 등을 모함하여 차례로 죽이려 하였다. 결국 태자인 신생은 죽임을 당하고 아버지인 헌공이 자신의 두 아들인 중이와 이오를 공격하는 상황까지 벌어지면서 晉의 정치는 큰 혼란에 빠졌다.
▲ 重耳 : 晉文公 重耳. 春秋時代 五覇의 한 사람인 晉의 군주. 아버지 献公이 驪戎을 토벌하고 잡아온 寵妃인 驪妃를 특히 사랑하여 여비의 소생인 奚齐를 후계자로 삼고자 태자 申生을 죽이고, 重耳와 그의 동생 夷吾를 추방하였는데 중이는 狄으로 도망하여 국외에서 19년을 지내다가 义兄이 되는 秦穆公의 원조로 晉으로 돌아와 62세에 즉위하였다.
▲ 五世 : 晉獻公, 奚齊, 卓子, 惠公, 懷公의 五代를 말한다.
▲ 六卿 : 晉의 强臣인 智·范·中行·韓·魏·趙 6姓을 말한다. 이들 6성은 서로 간에 정권을 차지하기 위하여 다투었는데, 晉은 결국 이들 중 한·위·조 3성에 의해 3분되었다.
▲ 秏 : 耗로 변형되어 멸망하다는 뜻.
▲ 錫 : 賜와 같다. 하사하다.
▲ 珪 : 圭와 같다. 제사를 지낼 때 쓰는 玉器
▲ 鬯(창) : 울창주. 울금향을 넣어 빚은 향기 나는 술. 제사용 술.
제10편 <楚世家>
重黎業之,吳回接之;
殷之季世,粥子牒之。
重黎가 火正이 되었으며 吳回가 그 뒤를 이어받았다.
은나라 말년에 鬻熊이 楚의 역사를 기록하기 시작하였다.
周用熊繹,熊渠是續。
周成王이 熊繹을 기용하고 熊渠가 계속 그 일을 이었다.
莊王之賢,乃復國陳;
既赦鄭伯,班師華元。
楚莊王이 현명하여 陳의 사직을 다시 복구시켜 주고,
鄭伯의 죄를 용서했으며, 宋를 포위했다가 宋의 右師 華元의 말을 듣고 군대를 돌렸다.
懷王客死,蘭咎屈原;
好諛信讒,楚并於秦。
楚懷王이 秦에서 객사했고, 子蘭은 屈原을 책망하였다.
초회왕이 아첨하는 말을 좋아하고 모함하는 자를 믿었기 때문에 楚는 秦에 합병되었다.
嘉莊王之義,作楚世家第十。
초장왕의 의로운 뜻을 기리어 ‘楚世家’를 지으니 제10편이다.
▲ 重黎 : 고대 중국의 전설에 楚의 선조 顓頊의 후손인 重黎가 제곡이 즉위한 뒤에 火正(불을 관리하는 벼슬)을 맡았다. 중려는 불빛으로 천하를 밝게 비추어 큰 공을 세웠으므로 제곡이 그를 祝融이라 부르도록 명하였다. 祝融의 후손이 己씨라고 전하기도 하는데, 주나라 시대 蘇씨가 되었다
▲ 季世 ; 말세. 말년.
▲ 粥子(육자) : 鬻子. 鬻熊. 周나라 때 사람으로 楚의 선조이며 나이 아흔에 도를 깨달아 周文王의 스승이 되었다. 후세 사람이 그가 남긴 말을 모아 만든 <鬻子> 1권이 전한다.
▲ 熊繹(웅역) : 西周 때 사람. 楚의 先祖로 鬻熊의 증손이고, 熊狂의 아들이다. 周나라 成王에 의해 처음으로 楚의 제1대 군주가 되었다.
▲ 熊渠 : 楚의 제6대 군주이다. 웅양의 아들이다. 아들인 웅무강이 뒤를 이었지만 웅무강이 일찍 죽어서 웅무강의 동생인 웅지홍이 뒤를 이었다.
▲ 楚莊王 : 春秋時代 楚의 國君. 熊氏이며 이름은 旅 또는 여(侶, 呂)며, 穆王의 아들이다. 春秋五覇의 한 사람이다. 晋軍을 격파하고 대승을 거두었다. 역대 楚王 중에 명분을 중시했던 첫 군주였으며 한때 陳을 멸망시켰으나 명신 신숙시의 간언을 듣고 독립시켜주었다.
▲ 既赦鄭伯 : 鄭伯牽羊. 肉袒牽羊. 春秋時代 楚 임금이 鄭을 침략하여 항복시키자, 鄭伯이 웃옷을 벗어 몸을 드러낸 채 양을 몰고 楚 임금을 맞이하였다는 고사에서 유래하는 말로 상대방에게 항복함을 뜻함.
▲ 班師華元 : 초장왕이 齊에 보낸 사신이 宋를 지나가다가 피살당하자 宋에 쳐들어가 그 수도 商丘를 포위하였다. 그러나 華元을 비롯한 宋軍의 저항을 맞아 기원전 594년 5월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상구를 함락하지 못하여 장왕은 결국 퇴각하였다. 후에 宋은 楚에게 항복하였다.
▲ 楚懷王 : 楚의 제37대 군주. 이름은 槐이다. 張儀의 辯舌에 넘어가 국력을 소진하였고, 결국은 秦에 사로잡혀 幽閉되었다가 죽었다.
▲ 蘭咎屈原 : 기원전 299년, 秦은 다시 楚를 공격하여 8城을 빼앗았으며, 懷王에게 秦의 영토인 武關에서 會見하자고 제안하였다. 屈原이 반대하였으나 子蘭 등이 秦과 친교를 맺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懷王이 武關으로 갔다. 秦昭襄王은 懷王을 抑留하였고 기원전 296년 懷王은 咸陽에서 죽었다.
제11편 <越王句踐世家>
少康之子,實賓南海,
文身斷發,黿鱓與處,
既守封禺,奉禹之祀。
少康의 아들 無餘는 남해의 바닷가로 가서
몸에 문신하고 머리는 짧게 잘랐으며, 물가에서 큰 자라와 악어와 더불어 살았으며,
封山과 禺山을 지키며 禹임금의 제사를 받들었다.
句踐困彼,乃用種、蠡。
句踐은 부차에게 치욕을 당한 뒤 文宗과 范蠡를 중용하였다.
嘉句踐夷蠻能修其德,滅彊吳以尊周室,作越王句踐世家第十一。
구천이 蠻夷들과 있으면서 그 덕을 쌓아 강대한 吳를 멸망시키고 주 왕실을 받듦을 칭찬하여 ‘越王句踐世家’를 지으니 제11편이다.
▲ 少康 : 夏나라의 제6대 왕. 少康帝, 少康王. 姓은 姒, 氏는 夏后이다.
▲ 無餘 : 夏나라 때 사람으로 小康帝의 庶子이다. 소강제가 禹임금의 자취가 끊겨 종묘제사가 끊길까 염려하여 그를 會稽에 봉하였다.
▲ 文身斷發 : 越은 無餘가 周왕실로부터 책봉 받은 춘추전국시대의 한 국가로 저장성 북부에 본거지를 두고 江蘇省까지 진출했던 제후국이다. 단발로 몸에 문신했으며 汉族과는 다른 東南夷系 민족국가로 기원전 6세기 구천의 아버지 允常 때 楚의 원조를 받고 강대해졌고 吴와 항쟁을 벌였으며, 그 아들 句踐은 오왕 夫差에게 會稽山에서 패하고 한때 은인자중하고 있었으나 부차가 북진한 틈을 타서 吳를 공격해서 멸망시킨 뒤에 북진하여 중원을 제패하였다. 그 후 쇠퇴하여 기원전 334년에 楚에게 멸망하였다.
▲ 黿鱓(원선) : 큰 자라와 악어. 鱓은 鼍(악어 ‘타’)와 같다.
▲ 句践 : 勾践. 春秋時代 말기의 越의 왕. 오왕 합려와 싸워 그를 죽였고 부차에게 패하였다. 그 후 부차를 꺾어 자살하게 하고 徐州에서 제후와 회맹하여 覇者가 되었다.
▲ 夷蠻 : 蠻夷. 남방의 미개한 민족이라는 의미로 南蠻을 말한다. 南蠻은 중국 역사에서 남쪽에 사는 이민족을 일컬어 부르는 말이다.
▲ 困彼 : 기원전 494년 구천은 부차에게 패배하여 會稽山에 숨었다가 버티지 못하고 용서를 빌어 오왕의 신하가 되었었다.
▲ 種蠡(종려) : 越의 대부 文種과 책사 范蠡를 말한다.
제12편 <鄭世家>
桓公之東,太史是庸。
鄭桓公이 동쪽으로 봉지를 옮김은 주나라 太史 伯의 말을 채용한 것이다.
及侵周禾,王人是議。
鄭莊公이 주나라를 침략하여 벼 이삭을 베어오자 주나라의 군신과 백성들이 이를 비방하였다.
祭仲要盟,鄭久不昌。
祭仲이 宋의 강요로 강제로 맹약을 맺은 이후 鄭은 줄곧 발전하지 못하였다.
子產之仁,紹世稱賢。
子產은 어진 정치로 후세에 그의 현명함을 칭송하였다.
三晉侵伐,鄭納於韓。
三晉이 침략하자 鄭은 결국 韓에 바쳐졌다.
嘉厲公納惠王,作鄭世家第十二。
鄭厲公이 周惠王을 주나라로 돌려보낸 일을 기리며 ‘鄭世家’를 지으니 제12편이다.
▲ 鄭桓公 : 서주 말기의 왕족이며, 鄭의 초대 백작이다. 이름은 友이며, 姓은 姬, 氏는 鄭이다. 기원전 806년에 서주 선왕으로부터 鄭에 봉해졌고, 백성들의 사랑을 받았다.
▲ 太史是庸 : 周幽王이 褒姒에게 빠지자 환공은 太史 伯에게 “왕실에 변고가 많으니, 내가 어찌하면 죽음을 피할 수 있겠소?”라고 묻자 태사 백은 “낙수 동쪽 땅과 황하, 제수 남쪽이 살 만합니다.”라고 답하였다.<정세가 본문 중>
▲ 鄭莊公 : 春秋時代 鄭의 3대 임금으로, 휘는 寤生이다. 정무공과 정비 무강의 적자이다. 정장공 22년(기원전 722년), 太叔 단이 어머니 무강과 호응하여 본국을 치려 하자, 정장공은 드디어 군사를 일으켜 단을 치고, 단의 봉읍 경성을 치니 경성 사람들이 단을 배반하였다.
▲ 要 : 위협하다.
▲ 紹世 : 후세.
▲ 祭仲 : 자는 仲足으로 祭足이라고도 한다. 정장공의 뛰어난 策士. 鄭이 동주 왕실과 宋·陳·衛 등 주변 제후국과의 외교, 정벌전 등에서 곤경에 처할 때마다 기묘한 계책을 생각해내 매번 엄청난 전과를 올리게 함으로써 정장공으로부터 萬全之計라는 극찬을 받았다. 鄭昭公이 君位에 오르자 제중이 송장공의 협박에 의해 소공 대신 세자 돌을 君位에 오르게 하였다.
▲ 子產 : 鄭의 東里 사람으로 자는 子產, 子美이고, 호는 成子이다. 鄭子產으로 일컬어진다. 鄭簡公 때 卿이 되어서 23년간 執政하였다. 재임 중에 왕실의 이익을 보호하고 귀족의 특권을 제한하였으며, 위로부터 아래로의 개혁을 추진하였다. 토지제도를 정돈하고, 公卿士庶 즉 귀족과 선비, 서민들의 토지를 구분지어 주고 토지와 인구에 적합한 賦稅를 매겼다. 또한 成文法을 만들어 공포하였다.
▲ 厲公 : 鄭厲公. 春秋時代 鄭의 國君. 이름은 突이고, 鄭莊公의 둘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宋大夫 雍氏의 딸인데, 宋莊公에게 총애를 받았다. 정장공이 죽자 昭公이 즉위했는데, 송장공의 지지를 받아 祭仲을 위협하여 왕위를 탈취하여 厲公이 되었다. 재위 4년에 제중이 정권을 독점하는 데 불만을 품고 제중의 사위 雍糾를 시켜 살해하려고 하였다. 일이 누설되어 옹규는 피살되었고, 여공은 달아나 邊邑 櫟에 머물렀다. 鄭子儀 14년에 鄭의 대부 傅瑕가 자의를 죽이자 복위하였다.
▲ 王子頹 : 春秋時代 周나라 사람. 莊王의 庶子로, 총애를 받았다. 惠王 3년에 大夫 邊伯이 난을 일으키면서 燕과 衛의 군사를 끌어들여 혜왕을 치려고 모의하자 혜왕이 鄭으로 달아났다. 이에 그를 세워 왕으로 삼았다. 혜왕 4년 鄭厲公이 虢叔과 함께 그를 쳐 죽이고 다시 惠王을 주나라로 돌려보냈다.
제13편 <趙世家>
維驥騄耳,乃章造父。
명마 驥와 녹이(騄耳)를 주목왕에게 바친 造父는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趙夙事獻,衰續厥緒。
趙夙은 晉獻公을 섬겼고, 조숙의 아들 趙衰가 유업을 계승하였다.
佐文尊王,卒為晉輔。
조쇠는 晉文公이 覇者의 지위에 오르게 하여 마침내 晉의 공신이 되었다.
襄子困辱,乃禽智伯。
趙襄子는 知伯에게 곤욕을 치른 뒤 지백을 사로잡았다.
主父生縛,餓死探爵。
主父 武靈王은 沙丘宮에 산채로 갇혀 참새를 잡아 배고픔을 때우다 굶어 죽었다.
王遷辟淫,良將是斥。
趙王遷은 편벽되고 음탕하여 훌륭한 장수를 배척하였다.
嘉鞅討周亂,作趙世家第十三。
趙鞅이 주왕실의 난을 토벌한 공을 기리며 ‘趙世家’를 지으니 제13편이다.
▲ 造父 : 주나라 목왕 시대에 말을 아주 잘 몰았던 사람이다. 造父는 주목왕의 赤驥·盜驪·驊騮·騄耳·白犧·渠黃·踰輪·山子라는 말과 수레도 잘 몰아 周穆王의 총애를 받았다. 주목왕이 조보와 함께 지방에 출사하였을 때 徐가 난을 일으키자, 造父가 수레를 신속하게 몰아 주목왕이 빠르게 수도로 돌아와 徐의 난을 진압할 수 있게 하였다. 이 공으로 晉에 속하였던 趙 땅에 봉해져 후손들이 조씨가 되었다.
▲ 驥騄耳 : 驥는 천리마. 騄耳는 명마의 이름.
▲ 章 : 彰과 통용되어 드러내다.
▲ 趙夙 : 晉獻公 16년에 霍, 魏, 耿을 정벌할 때 장수가 되어 곽을 정벌하였다.
▲ 衰 : 趙衰. 春秋時代 晉의 사람으로 자는 子餘이고, 趙成子 또는 成季, 孟子餘 등으로도 불린다. 晉의 공자 重耳를 따라 19년 동안 망명 생활을 한 뒤 중이가 왕위에 오르자 中軍長이 되어 진문공의 패업 성취를 도왔다.
▲ 襄子困辱 : 조양자가 일찍이 아버지 簡子를 대신해서 군사를 거느릴 때 知伯과 같은 소속이었다. 知伯이 襄子에게 억지로 술을 먹이려 하였으나 먹지 않자 襄子의 뺨을 때리고 아버지 簡子에게 襄子를 후계자로 삼지 말고 다른 사람을 세우라고 한 적이 있었다.
▲ 趙襄子 : 戰國 초기 趙의 제후. 기원전 453년에 晉의 3卿인 韓虎(韓康子), 魏駒(魏桓子), 趙孟(趙襄子)이 당시 晉의 최대 실권자이자 최대의 영토를 보유한 知伯 瑤를 죽이고 知氏 일문을 멸문시킨 다음 그 영토를 공평하게 나눔으로써 사실상 晉을 삼분하고 단일 국가로 독립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 主父(주보) : 趙 武靈王. 趙 武靈王이 秦의 침입을 물리치는 데만 전념하겠다고 왕위를 태자인 何에게 물려주니 하가 바로 惠文王이다. 그리고 스스로는 主父(太上王과 같음)의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애초 태자를 정할 때 長子인 章을 삼았으나 뒤에 첩인 何(惠文王)의 어머니를 총애한 끝에 태자 자리를 바꾸어 버렸기 때문에 장자 章이 원한을 품게 되었다. 마침 惠王 4년에 父子 세 사람이 沙丘의 행궁으로 놀러 갔을 때 태자 장이 난을 일으켰다. 그때 서울에 있던 다른 公子 成과 대부인 李兌가 동조하여 主父(武靈王)를 행궁에 석 달 남짓 가두어 버렸는데 후에 문을 열고 들어가 보았더니 이미 마른 해골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
▲ 爵 : 雀과 통용된다. 참새.
▲ 王遷 : 趙王 遷 7년(기원전 229년), 秦이 趙에 반간계를 써서 이목과 사마상이 반란을 꾀한다고 하니, 조왕 천은 이목을 죽이고 안취를 장군으로 하였다가 대패하여 趙가 멸망하였다.<사기 권81 廉頗藺相如列傳>
▲ 鞅討周亂 : 趙鞅. 趙簡子. 春秋時代 趙의 領袖이다. 또는 志父라고도 한다. 晋昭公 때 正卿이다. 晉 내부에서 6卿이 세력 다툼을 벌일 때 2경인 范氏와 中行氏를 몰아내고 趙를 일으키는 바탕을 마련하였다.
제14편 <魏世家>
畢萬爵魏,卜人知之。
畢萬이 魏에 봉해졌고, 점쟁이는 이를 예언하였다.
及絳戮干,戎翟和之。
魏絳이 晉悼公의 동생 楊干을 모욕하고, 山戎과 晉가 동맹을 맺도록 하였다.
文侯慕義,子夏師之。
魏文侯는 인의를 귀하게 여겨 子夏를 스승으로 모셨다.
惠王自矜,齊秦攻之。
魏惠王이 스스로 교만하여 齊와 秦의 공격을 받았다.
既疑信陵,諸侯罷之。
安釐王이 信陵君을 의심하자 제후들이 魏를 멀리하였다.
卒亡大梁,王假廝之。
결국은 수도 大梁에서 秦에게 멸망되어 魏王 假는 포로로 잡혀 노복이 되었다.
嘉武佐晉文申霸道,作魏世家第十四。
晉文公의 패업 성취를 도운 魏武子를 칭송하며 ‘魏世家’를 지으니 제14편이다.
▲ 畢萬 : 春秋時代 晉 사람. 畢公高의 후예로, 晉獻公을 섬겼다. 헌공을 도와 耿·霍·魏를 멸망시켰다. 魏地에 봉해져서 大夫가 되었다.
▲ 絳戮干 : 魏絳은 春秋時代 晉 사람으로 大夫를 지냈다. 시호는 莊 또는 昭다. 魏莊子로도 불린다. 처음에 中軍司馬에 임명되었다. 晉悼公이 제후들을 불러모았을 때 도공의 동생 楊幹이 軍陣에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 무리를 소탕하였다. 나중에 下軍主將이 되어 정치를 맡았을 때 山戎과의 화친을 주장하면서 화친을 맺었을 때 얻을 다섯 가지 이익에 대해 설파하였다. 마침내 동맹을 맺고 왕명으로 諸戎을 감독함으로써 晉의 국세를 떨치게 하여 霸業을 이루도록 하였다. 鄭 사람이 晉에 음악을 뇌물로 바치자 도공이 음악의 반을 그에게 하사하였다. 사양하며 받지 않고 도공에게도 居安思危의 자세를 잃지 말라고 간하였다. 이로써 晉이 더욱 강해졌다.
▲ 文侯 : 魏文侯. 韓虎, 趙孟, 趙無恤과 함께 晉 공실을 삼분해 魏를 세운 開祖. 魏駒(魏桓子)의 아들이자 신흥 魏의 2대 군주. 본명은 斯. 法家인 李悝를 등용하여 내정을 개혁하고 法典을 정비하며 平糴法을 실시하는 한편, 西門豹를 등용해 鄴 땅의 폐습을 없애고 漳水 12莒를 개척해 그 일대의 농업 생산력을 제고하였다.
▲ 子夏 : 卜商. 공자의 제자로 孔門十哲의 한 사람이다. 공자가 죽은 뒤에 西河에서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었으며 魏文侯에게 초빙되어 스승이 되었다.
▲ 戮(육) : 모욕하다.
▲ 翟(적) : 狄과 통한다. 고대 북방의 소수민족.
▲ 惠王 : 魏惠王. 梁惠王으로도 불린다. 전국시대 魏의 國君. 이름은 罃이고, 武侯의 아들이다. 즉위한 뒤 大梁으로 천도하였다. 趙와 韓과의 관계는 악화되고 齊軍에 의해 馬陵에서 대패하였다. 여러 차례 秦과의 전투에서도 패하였다. 逢澤 회의를 소집해 侯에서 王으로 호칭을 바꾸었다. 자신을 낮추고 폐백을 후하게 하여 賢者를 초빙하자 鄒衍과 淳于髡, 孟軻 등이 대량으로 몰려들었다. 맹자가 일찍이 왕에게 仁義를 행하라고 권했지만 쓰지 못하였다. 국세가 점점 쇠약해져 갔다. 36년 동안 재위하였다.
▲ 既疑信陵 : 魏의 安釐王이 신릉군을 의심하다. 안리왕 釐는 僖로도 쓴다. 성은 姬. 씨는 魏,이름은 圉이다. 魏昭王의 아들이며, 전국시대 魏의 6대 군주이다. 안리왕은 신릉군의 현명함과 능력을 두려워하여 감히 위공자에게 국정을 맡기지 않았다
▲ 信陵君 : 魏無忌. 전국시대 위나라의 저명한 군사가로 기원전 276년 信陵에 봉해지면서 信陵君으로 불리었다.
▲ 厮 : 노예. 하인.
▲ 王假廝之 : 魏王 假는 전국시대 魏의 國君으로 景愍王의 아들이다. 재위한 지 3년 뒤 秦이 河水의 물을 끌어들여 大梁에 부어 넣었고, 魏王 가를 포로로 잡아갔다. 마침내 魏를 멸망시키고 郡縣으로 만들었다.
▲ 武佐晉文 : 春秋時代 晋의 魏武子가 병이 들자, 아들 魏顆에게 자신이 죽으면 후처, 즉 위과의 庶母를 개가시켜 殉死(죽은 사람을 따라 죽는 풍습)를 면하게 하라고 유언하였다. 그러나 병세가 악화되어 정신이 혼미해진 위무자는 후처를 자살하도록 하여 죽으면 같이 묻어 달라고 유언을 번복하였다. 위무자가 죽은 뒤 위과는 정신이 혼미했을 때의 유언을 따르지 않고 서모를 개가시켜 순사를 면하게 하였다. 후에 위과가 전쟁에 나가 秦의 장수인 杜回와 싸워 위태로울 때, 庶母 아버지의 亡魂이 나와 적군의 앞길에 풀을 잡아 매어 두회가 탄 말의 다리가 걸려 넘어지게 하여 두회가 사로잡히게 하였다. 이로써 위과는 위기를 모면하고 전쟁에서 살아 돌아왔는데 이를 두고 結草報恩이라는 고사가 생겼다.<春秋左氏傳>
제15편 <韓世家>
韓厥陰德,趙武攸興。
韓厥의 음덕으로 趙武가 조씨 집안을 다시 일으키게 하였다.
紹絕立廢,晉人宗之。
끊어진 대를 잇게 하고 폐지된 제사를 회복케 하니 晉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였다.
昭侯顯列,申子庸之。
韓昭侯가 열후들 사이에서 이름을 날린 것은 申不害를 중용하였기 때문이다.
疑非不信,秦人襲之。
한왕 安이 韓非를 의심하여 믿지 않으니 秦이 공격해왔다.
嘉厥輔晉匡周天子之賦,作韓世家第十五。
韓厥이 晉을 도와 周 천자를 수호한 일을 칭송하여 ‘韓世家’를 지으니 제15편이다.
▲ 韓厥 ; 春秋時代 晉 사람. 韓獻子로도 불린다.
韓의 선조는 周와 같은 성인 姬氏이다. 그 후예들은 晉을 섬겨 韓原을 봉지로 얻어 韓武子라 하였다. 한무자 이후 3세손에 韓厥이 있었는데, 봉지의 이름을 성으로 삼아 韓氏라 하였다.
▲ 昭侯 : 韓昭侯. 昭僖侯. 전국시대 韓의 제6대 군주. 시호는 昭侯인데, 다른 시호로는 韓釐侯 또는 韓昭僖侯로도 전해진다. 이름은 武.
▲ 申子 : 申不害. 韓의 명재상이며, 형명지학의 대가였다. 법가 사상 중 術을 강조하였으며, 韓의 昭侯 밑에서 재상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 疑非不信 : 韓王 安이 한비를 불신하다. 韓王 安은 전국시대 韓의 제11대 왕으로 桓惠王의 아들. 韓은 희왕과 환혜왕 대의 계속된 패배 누적을 견디지 못하고 멸망하였다. 기원전 226년 韓의 옛 수도인 신정에서 반란이 일어나 秦이 반란군을 진압하였다. 이 반란으로 韓의 마지막 군주인 韓王 安이 처형됐다.
▲ 非 : 韓非. 法家의 사상을 집대성한 전국시대 말기의 정치사상가. 한비는 韓의 세력이 약해지는 것을 염려하여 누차 왕에게 간언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끝내 진의 공격을 받자 화평의 사신으로서 秦으로 갔다. 시황제는 한비를 보자 크게 기뻐하며 그를 秦에 머물게 하려 하였으나, 이사가 내심 이를 못마땅히 여겨 한비를 韓으로 돌려보내면 반드시 後患이 있을 것이라고 모함하였다. 이사는 시황제에게 讒言하여 한비를 옥에 가두게 한 후, 死藥을 내려 자살하게 하였다.
제16편 <田敬仲完世家>
完子避難,適齊為援,陰施五世,齊人歌之。
陳完이 난리를 피해 齊에 도움을 청하러 갔다가 5대에 걸쳐 은밀히 은혜를 베푸니 齊 사람들이 그들을 칭송하였다.
成子得政,田和為侯。
田成子 때 齊 정권을 독점했고, 田和 때 제후에 봉해졌다.
王建動心,乃遷于共。
제왕 建이 간계에 빠져 秦에 항복하니 秦이 그를 共으로 옮겨 살게 하였다.
嘉威、宣能撥濁世而獨宗周,作田敬仲完世家第十六。
齊威王과 齊宣王이 난세를 이겨내고 홀로 주 왕실을 받듦을 칭송하여 <田敬仲完世家>를 지으니 제16편이다.
▲ 完子 : 陳完. 田完. 陳厲公 他의 아들이었는데 齊로 망명하여 桓公을 섬겨 卿大夫가 되고, 후에 田으로 성을 바꾸었다. 敬仲 또는 公子完, 陳完으로도 불린다. 그래서 <田敬仲完世家>라고 한 것이다.
▲ 成子 : 陳成子 또는 田成子, 田常으로도 불린다. 齊簡公 때 闞止와 함께 左右相을 맡았다. 선조들의 전통을 계승하여 大斗로 재어 양식으로 대여하고, 小斗로 재어 거둬들여 民心을 얻었다. 제간공 4년 감지와 간공을 공격해 살해하고, 간공의 동생 驁를 세워 平公으로 삼았다. 스스로 재상이 되어 齊의 국정을 장악하고, 公族 가운데 강성한 이들은 모두 제거하였다. 封邑을 확대하니, 이때부터 齊의 권력은 田氏가 독차지하게 되었다.
▲ 田和 : 齊太公. 田常의 증손이다. 齊에서 벼슬하여 卿이 되었다. 齊康公이 주색에 빠져 정치를 돌보지 않았다. 태공이 그를 바닷가로 내쫓고 성 하나를 식읍으로 주어 조상 제사를 모시도록 하였다.
▲ 王建 : 齊王 建. 전국시대 齊의 마지막 왕으로, 성은 嬀, 씨는 田이다. 양왕의 아들로 왕조가 멸망하여 시호가 없다. 제왕 건 45년(기원전 221), 진시황이 齊를 공격하였다. 건은 싸우지 않고 항복하였고, 이로써 秦이 전국을 통일하였다. 건은 共 땅으로 유배되었다.
▲ 齊威王 : 田因齊 또는 田嬰齊. 전국시대 齊의 國君. 桓公의 아들이다. 9년 정치를 卿大夫에게 맡기고 제후들은 서로 싸우는 등 나라가 제대로 다스려지지 않았다. 나중에 정치를 바로하고 군대를 정비하면서 鄒忌를 재상, 田忌를 장군, 孫臏을 軍師에 기용하였다.
▲ 齊宣王 : 田辟疆. 전국시대 齊의 國君. 威王의 아들이다. 재위 중에 田嬰과 儲子를 기용해 재상으로 삼고 匡章과 聲子를 장군으로 삼았다. 5년 燕에 내란이 일어난 틈을 이용해 병사를 일으켜 燕을 점령하였다.
제17편 <孔子世家>
周室既衰,諸侯恣行。
주 왕실이 쇠락하자 제후들이 제멋대로 행동하였다.
仲尼悼禮廢樂崩,追修經術,以達王道,匡亂世反之於正,見其文辭,為天下制儀法,垂六藝之統紀於後世。
孔子는 禮樂이 무너짐을 슬퍼하여, 經書의 학술을 연구하고 왕도를 재건하고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고자 하여 이에 자신의 사상을 글로 나타내어, 천하를 위한 예의 규범을 만들고 六藝의 강령을 후세에 남겼다.
作孔子世家第十七。
‘孔子世家’를 지으니 제17편이다.
▲ 見 : 現과 같다. 나타내다. 드러내다.
▲ 六藝 : 六經을 말하며, <詩經>, <書經>, <禮記>, <易經>, <樂經>, <春秋> 등 여섯 종의 유가의 고대 경전을 가리킨다.
▲ 孔子 : 본명은 孔丘이며 春秋時代 魯의 사람으로 유교의 始祖이다. 春秋時代의 정치가·사상가·교육자이며 魯의 문신이자 작가이면서 시인이기도 하다. 공자는 제자에 육예를 통달한 자가 77명이라고 한다.
제18편 <陳涉世家>
桀、紂失其道而湯、武作,周失其道而春秋作。
桀과 紂가 왕도를 잃자 탕왕과 무왕이 일어났고, 주 왕실이 왕도를 잃자 <春秋>가 세상에 나왔다.
秦失其政,而陳涉發跡,諸侯作難,風起雲蒸,卒亡秦族。
秦이 바른 정치를 잃어 陳涉이 들고 일어났다. 제후들도 따라서 반란을 일으키니 바람과 구름이 몰아치듯 마침내 秦을 멸망시켰다.
天下之端,自涉發難。
천하가 秦을 멸망시킨 발단은 진섭의 반란으로부터 시작되었다.
作陳涉世家第十八。
‘陳涉世家’를 지으니 제18편이다.
▲ 桀紂 : 하나라 桀王과 은나라 紂王.
▲ 湯武 : 殷湯王과 周武王. 인의가 있는 군왕으로 일컬어진다.
▲ 陳涉 : 陳勝. 陽城 사람으로 字는 涉이다. 秦의 학정에 맨 먼저 반기를 들고 일어난 인물로, 본래 秦의 농민 출신으로 戍卒로 가던 중 봉기하자 이곳저곳에서 반란이 일어나 秦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져 끝내 멸망하였다.
제19편 <外戚世家>
成皋之臺,薄氏始基。
成皋臺에서 薄氏가 高祖의 총애를 처음 받았다.
詘意適代,厥崇諸竇。
竇씨는 뜻을 꺾고 마지못해 代로 갔으며 이에 두씨 일족이 귀하신 몸이 되었다.
栗姬偩貴,王氏乃遂。
栗姬는 존귀한 자리만 믿고 교만하게 굴다가 그 틈을 탄 王氏가 뜻을 얻었다.
陳後太驕,卒尊子夫。
陳皇后가 너무 교만하게 굴어 끝내 衛子夫가 귀하신 몸이 되었다.
嘉夫德若斯,作外戚世家十九。
衛子夫의 이 같은 덕을 칭찬하는 뜻에서 ‘外戚世家’를 지으니 제19편이다.
▲ 薄氏始基 : 薄氏는 高帝 유방의 후궁으로 5대 황제인 文帝의 생모이다. 관부인, 조자아와 함께 “먼저 귀해지고서 서로 잊지 말자!”고 맹약했었다. 한왕 4년, 한왕이 하남의 성고대에 앉아서 이 두 후궁을 끼고 있었는데, 둘이서 박씨와 함께 맹약한 것을 가지고 웃다가 그것을 보고 의아하게 여긴 한왕이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를 듣고 처연하다고 여긴 한왕의 부름을 받아 단 한 번 잠자리를 함께하였다. 박희는 유항(후의 문제)을 낳았고, 이후로는 거의 남편을 보지 못했으나 薄太后가 되었다.
▲ 詘意適代(굴의적대) : 두씨는 뜻을 꺾고 마지못해 代로 갔다. 詘意는 뜻을 굽히다. 竇猗房, 竇太后는 漢文帝 劉恆의 처이며 景帝의 어머니이다. 代王 劉恒이 漢나라의 5대 皇帝가 되어 장안으로 돌아왔다. 슬하에 자녀로는 장남 漢景帝 劉啟, 차남 梁孝王 劉武, 長女로 館陶長公主 劉嫖가 있다.
▲ 栗姬 : 景帝의 후궁이다. 齊 출신으로, 경제의 장자 임강민왕 유영을 낳았으나 권력 암투 끝에 몰락하였다. 景帝의 황후는 원래 박황후였으나, 그는 경제의 사랑을 받지도 못하고 아들을 낳지도 못하니, 율희가 경제에게 장자 유영을 낳아주었으므로 경제 4년 여름(기원전 153년)에 유영은 태자가 됐고 경제 6년(기원전 151년) 박황후가 쫓겨났다.
▲ 偩貴 : 귀하게 되는 것에 의지하다. 偩는 負와 같다.
▲ 王氏乃遂 : 孝景皇后 王娡. 제6대 황제 경제의 부인이자 제7대 황제 무제의 어머니이므로 王太后가 되었다. 왕씨는 당시 황태자였던 유계의 총애를 얻어 평양공주·남궁공주·융려공주 등을 낳았고, 아들 유철을 임신한 상태에서 시아버지 문제가 죽어 기원전 157년에 유계가 즉위하니, 그 해에 유철을 낳았다.
▲ 陳後太驕,卒尊子夫 : 진후는 陳皇后 진아교를 말하며, 衛子夫는 무제의 두 번째 황후이다. 미천한 가문 출신이었던 衛子夫는 漢武帝의 누이 平陽公主의 집 歌女였는데 漢武帝의 눈에 띄어 후궁이 되었다. 漢武帝의 총애를 받게 된 衛子夫를 왕비 陳皇后 진아교가 무척 질투하였다. 진아교의 질투로 고생하였던 衛子夫는 漢武帝가 후궁과 궁녀들을 출궁시킬 때 자신도 출궁시켜 달라고 울면서 간청하였고, 漢武帝는 그를 더욱 가련히 여겼다. 그 뒤 진아교와 그의 친정어머니 관도공주가 짜고 衛子夫의 오라비 衛淸을 죽이려 하다가 발각되자 무제는 진아교를 폐출시키고 衛子夫를 황후에 앉혔다. 衛子夫는 세 딸 위장공주, 제읍공주, 양석공주를 낳고 아들 여태자 유거를 두었다.<사기 세가 권 49. 외척세가>
제20편 <楚元王世家>
漢既譎謀,禽信於陳;
越荊剽輕,乃封弟交為楚王,爰都彭城,以彊淮泗,為漢宗藩。
한고조는 속임수로 韓信을 陳縣에서 사로잡았고,
越와 楚 사람들은 민첩하고 용맹하여 고조의 동생 劉交를 초왕으로 봉하고 팽성에 도읍하여 회수와 사수 유역의 통치를 강화하니 한나라 종실의 울타리가 되었다.
戊溺於邪,禮復紹之。
劉戊가 사악함에 빠졌으나 劉禮를 초왕으로 봉하여 왕업을 다시 잇게 하였다.
嘉游輔祖,作楚元王世家二十。
楚元王 游(劉交)가 고조를 보필한 공을 칭찬하여 ‘楚元王世家’를 지으니 제20편이다.
▲ 譎謀(휼모) : 남을 속이는 꾀.
▲ 禽信於陳 : 陳縣에서 楚王 韓信을 체포하였다. 楚王 信은 淮陰侯 韓信을 말하며 기원전 203년 齊王이 되었다가 2년 후 楚王에 봉해졌다.<사기 권92. 회음후열전>
▲ 劉交 : 楚元王. 자는 游, 시호는 元이며, 漢高祖 劉邦의 배다른 동생이다. 유방을 따라 반란을 일으켰고, 入關한 뒤 文信君에 봉해졌으며, 유방을 따라 각지에서 전투를 벌였다. 고조가 즉위하자 楚王에 봉해졌다.
▲ 戊溺於邪 : 楚王 劉戊가 반란을 일으킨 것을 말한다. 楚王 劉戊는 오왕 유비와 함께 오초칠국의 난을 주도하였다. 재위 21년(기원전 154년) 반군을 일으켰고, 반대하는 재상 장상과 태부 조이오를 죽였다. 吳와 군대를 합해 梁을 공격했으나, 한의 중앙군을 이끄는 주아부와 싸워 양도가 끊기자 군사들이 굶주려 패배해 자결하였다.
▲ 禮復紹之 : 楚文王 劉禮를 초왕으로 봉하였다. 초왕의 작위를 이은 경제의 조카 劉戊가 오초칠국의 난에 가담했다가 패배하고 자결하매, 황실에서 원왕의 후사로 삼으니 초왕이 되었다.
제21편 <荊燕世家>
維祖師旅,劉賈是與;
為布所襲,喪其荊、吳。
고조가 秦을 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을 때 劉賈가 함께하였고,
그 후 英布의 공격을 받아 荊과 吳 땅을 잃었다.
營陵激呂,乃王瑯邪;
怵午信齊,往而不歸,遂西入關,遭立孝文,獲復王燕。
營陵侯 劉澤이 여태후를 감동시켜 琅琊王에 봉해졌고,
祝午에게 기만당해 齊哀王을 믿어 齊로 돌아올 수 없게 되자 꾀를 내어 서쪽으로 관중으로 돌아와서 文帝를 옹립한 공으로 다시 燕王에 봉해졌다.
天下未集,賈、澤以族,為漢藩輔。
천하가 아직 평정되지 못한 때 유고와 유택은 친족의 신분으로 한나라의 속국이 되었다.
作荊燕世家第二十一。
‘荊燕世家’를 지으니 제21편이다.
▲ 祖 : 漢高祖. 劉邦.
▲ 劉賈 : 고제의 종형으로 荊王을 지냈으며 영포의 반란 때 전사하였다. 한고조 11년. 기원전 196년. 영포는 동쪽으로 荊을 치니, 형왕 劉賈는 달아나다가 富陵에서 죽었다. 영포는 그의 군대를 모두 빼앗아 이끌고 회수를 건너 초를 쳤다. <사기열전 권91. 경포열전>
▲ 營陵激呂 : 營陵侯 劉澤이 여태후를 감동시키다. 유택은 고제의 재종형제로 한왕 3년(기원전 204년)에 낭중이 되었고, 고제 11년(기원전 196년) 진희의 난 진압에서 진희의 장수 王黃을 사로잡는 공을 세워 營陵侯에 봉해짐으로써 3대 52년간 지속되는 燕敬王 계통의 초대 연왕이 되었다. 고황후 치세 기간에 유세하다 여비가 떨어진 齊 사람 田子春을 도와준 인연으로 전자춘이 고황후(여태후)의 측근 張澤과 교류하였다. 장택이 고황후에게 여씨들을 왕으로 세우려는 희망을 이루려면 유택을 왕으로 세워야 한다고 권하니, 유택이 齊에서 떼어낸 낭야의 왕으로 봉해졌다. 낭야왕 유택 2년(기원전 180년), 고황후가 죽자 제애왕·관영·주발·진평·유장 등과 함께 여씨 세력을 타도함에 공을 세웠다.
▲ 集 : 안정되다.
▲ 怵午信齊(술오신제) : 祝午에게 유혹당해 제 애왕을 믿다. 怵은 유혹당하다. 제애왕은 여씨 일족을 치기 위해 여씨 일족이 감시역으로 파견한 승상 召平을 공격해 자살로 내몰고 장인 사균, 낭중령 祝午, 중위 위발과 군사를 일으켰다. 그리고 낭야왕 유택을 속여 유택의 군사를 빼앗고 여나라 땅인 제남군을 공격하였다.
▲ 藩輔(번보) : 屬國.
제22편 <齊悼惠王世家>
天下已平,親屬既寡;
悼惠先壯,實鎮東土。
천하는 평정되었으나 고조의 친족들이 적었다.
悼惠王 劉肥가 먼저 장성하여 동쪽 齊 땅을 지켰다.
哀王擅興,發怒諸呂,駟鈞暴戾,京師弗許。
齊哀王은 여씨 일족의 행위에 분노하여 자기 멋대로 군대를 일으켰으나 난폭한 그의 장인 駟鈞 때문에 황제 자리에 오르지 못하였다.
厲之內淫,禍成主父。
厲王은 누이와 간통하다가 主父偃의 조사를 받고 자살하는 화를 당하였다.
嘉肥股肱,作齊悼惠王世家第二十二。
황제의 손발과 같았던 劉肥를 기리며 ‘齊悼惠王世家’를 지으니 제22편이다.
▲ 悼惠 : 齊 悼惠王 劉肥. 고조 유방의 서얼 장자로 생모는 曹씨다. 고제 6년(기원전 201년), 韓信을 대신하여 제후국인 齊王에 봉해졌고, 교동·교서·임치·제북·박양·성양 6군 73현을 통치하였다.
▲ 哀王 : 齊哀王 劉襄. 고조 유방의 손자로 齊王이며, 아버지는 제 도혜왕 劉肥이다. 황실의 장손이고 여씨 정권 타도에 많은 공이 있어, 황제 자리를 두고 문제와 겨루었다.
▲ 駟鈞暴戾,京師弗許 : 駟鈞은 齊哀王의 장인이다. 고후 8년(기원전 180년) 고후가 죽자 제애왕의 동생 유장은 외척 呂씨 일족이 모반함을 알아차려 동생 유흥거과 함께 제애왕에게 거병을 재촉하였고, 진압에 성공하면 제애왕을 황제로 추대하겠다고 하였다. 제애왕은 사균·낭중령 축오·중위 위발과 함께 병사를 일으켜 여씨 일족을 주살하게 하였다. 조정의 대신들은 다음 황제를 누구로 할지 논의하였는데, 제애왕의 외척 駟鈞이 포악하니 여씨의 전철을 밟으리라 생각하여, 제애왕 대신 代王 유항(문제)을 황제로 추대하였다.
▲ 厲之內淫 : 齊厲王 劉次景. 齊厲王의 어머니 紀太后는 동생의 딸을 齊厲王의 왕후로 삼았으나, 齊厲王은 이 왕후를 사랑하지 않았다. 기태후는 자기 집안이 거듭해서 왕의 총애를 받게 하고자 맏딸 기옹주를 궁으로 들여보내, 후궁들이 齊厲王을 가까이하지 못하게 하고 왕후만을 사랑하게 만들고자 하였다. 그러나 齊厲王은 도리어 자기 누나인 기옹주와 간통하였다. 무제가 主父偃을 齊의 재상으로 삼고 일을 바로잡게 하니, 주보언이 환관 중 齊厲王과 기옹주의 간통을 주선한 자들을 법으로 처분했으나 齊厲王은 자살하였다.
▲ 主父 : 主父偃. 齊 임치현 사람으로 종횡가의 학술을 익혔으나 중용되지 못하자 漢武帝에게 상소한 것이 인정을 받아 낭중이 된 후 일 년 만에 중대부로 승진하였다. 남의 비밀을 폭로하기 좋아하므로 대신들이 두려워하여 뇌물을 바쳤으며, 齊의 재상이 된 후 주보언이 齊 왕 유차경이 기옹주와 간통한 사실을 황제에게 간한 것으로 인해 일족이 멸족되었다.
제23편 <蕭相國世家>
楚人圍我滎陽,相守三年;
蕭何填撫山西,推計踵兵,給糧食不絕,使百姓愛漢不樂為楚。
楚가 漢을 滎陽에서 포위하여 3년 동안 서로 대치하였는데
蕭何가 關中을 안정시키고 인구를 계산하여 군사를 보충하고 식량이 끊어지지 않게 보급하였으며, 백성이 한나라를 사랑하고 楚에 대하여 못마땅히 여기게 하였다.
作蕭相國世家第二十三。
<蕭相國世家>를 지으니 제23편이다.
▲ 蕭何 : 前漢 초기의 정치가. 고조 劉邦의 재상으로 한신, 장량과 함께 한의 三傑로 꼽힌다. 한나라 유방과 楚 항우의 싸움에서는 관중에 머물러 있으면서 고조를 위하여 양식과 군병의 보급을 확보했으므로, 고조가 즉위할 때 논공행상에서 으뜸가는 공신이 되었다.
▲ 填撫 : 鎭撫. 난리를 평정하고 민심을 가라앉히다.
▲ 山西 : 關中.
▲ 推計 : 계산하다.
▲ 踵兵 : 부대를 보충하다.
▲ 不樂為楚: 爲는 “于(於)[… 에 대하여]”의 뜻으로 쓰인다. 對、向。
晉·陶淵明〈桃花源記〉:「此中人語云,不足為外人道也。」
唐·韓愈〈答李翊書〉:「不可不為生言之,生所謂立言者是也。」
¶ 此其爲親戚兄弟若此, 而又況于仇讎之敵國也。《戰國策 魏策》
○ 이렇게 그는 부모형제에 대해서도 이와 같은데, 황차 원수 국가에 대해서야 말할 것도 없지.
¶ 魏為逢澤之遇, 朝爲天子。《戰國策 秦策》
○ 위나라가 [조나라 한단을 정벌하고] 봉택이란 곳에서 제후들과 회맹했다. [이때 위왕은 夏王이라 칭하며] 천자에게 朝謁하러 가게 되었다.
¶ 爲其來也, 臣請縛一人過王而行。《晏子春秋 雜篇》
○ 그가 왔을 때, 내가 한 사람을 포박하여 대왕의 앞으로 지나가기를 청합니다.
제24편 <曹相國世家>
與信定魏,破趙拔齊,遂弱楚人。
韓信과 함께 魏를 평정하고 趙를 격파하고 齊를 함락시킴으로써 마침내 楚를 약하게 만들었다.
續何相國,不變不革,黎庶攸寧。
蕭何를 이어 相國이 됨에 제도를 바꾸지도 개혁하지도 않으니 백성들이 편안하였다.
嘉參不伐功矜能,作曹相國世家第二十四。
曹參이 자기 공과 능력을 자랑하지 않음을 칭송하여 <曹相國世家>를 지으니 제24편이다.
▲ 曹參 : 전한의 군인이자 개국 공신으로, 자는 敬伯이다. 원래 秦의 옥리였으나, 고조 유방의 거병 시에 뜻을 같이하였다. 한신과 더불어 군사면에서 활약을 하였다. 秦과 항우를 공략하여 한나라의 통일대업에 이바지한 공으로 건국 후에는 공신서열 2번째, 平陽侯로 책봉되었다.
▲ 黎庶 : 백성.
▲ 不伐功矜能 : 자기의 공로와 재능을 자랑하지 않다. 伐, 矜은 자랑하다.
제25편 <留侯世家>
運籌帷幄之中,制勝於無形,子房計謀其事.
군대의 장막 안에서 책략을 구사하여 무형 중에 승리를 거두니 張良이 그 일을 꾸몄다.
無知名,無勇功,圖難於易,為大於細。
슬기롭다는 이름도 없었고 용맹스러운 공적도 없었으며, 어려운 일은 쉬울 때 해결하고 큰일은 커지기 전에 처리하였다.
作留侯世家第二十五。
<留侯世家>를 지으니 제25편이다.
▲ 運籌帷幄 : 장막 안에서 작전 계획을 짜다. 후방에서 책략을 세우다. 帷幄은 군대의 장막.
▲ 無形 : 孫子兵法의 虛失篇에 무형은 형태가 없는 전략을 뜻한다.
“因形而措勝于眾,眾不能知,人皆知我所以勝之形.而莫知吾所以制勝之形;故其戰勝不復,而應形於無窮。: 무형으로 인한 전승을 널리 여러 사람들에게 보이더라도 그들은 알지를 못한다. 모두가 아군이 승리한 작전 방식은 알지만, 승리의 원인이 된 무형의 묘는 알지를 못한다. 또한, 한번 전승한 방법을 두번 다시 사용하지 않으며 때와 장소에 따라 적군에게 응전하는 형태는 무궁무진하다.”
▲ 無知名,無勇功 : 손자병법의 形篇에 “古之善戰者,勝于易勝者;故善戰者之勝也,無智名,無勇功.: 옛날에 전쟁을 잘했던 사람은 쉽게 이길 수 있는 것에 이긴다. 그러므로 잘 싸운 사람의 승리에는 슬기로웠다는 이름도 없고, 용맹스러웠다는 공적도 없다.”라고 하였다. 知는 智와 통한다.
▲ 圖難於易,為大於細 : 노자 도덕경 63에 “為無為,事無事,味無味。大小多少,報怨以德。圖難於其易,為大於其細. : 무위를 생활태도로 하고, 일없는 것을 일로 하며 맛없는 것을 맛으로 한다. 작은 것은 크게 하고, 적은 것은 많게 하며 원한은 덕으로 갚는다. 어려운 일은 어려워지기 전에 손을 쓰고 큰일은 커지기 전에 해결한다.”라고 한 것을 인용한 것이다.
▲ 張良 : 자는 子房. 시호 文成公. 博浪沙에서 始皇帝를 습격했으나 실패하고 下邳에 은신하고 있을 때 黃石公으로부터 <太公兵法書>를 물려받았다고 한다. 陳勝·吳廣의 난이 일어났을 때 유방의 진영에 속하였으며, 후일 項羽와 유방이 만난 '홍문의 會'에서는 유방의 위기를 구하였다. 선견지명이 있는 策士로서 한나라의 서울을 秦의 故地인 關中으로 정하고자 한 劉敬의 주장을 지지하였다. 蕭何와 함께 책략에 뛰어나 한나라 창업에 힘썼다. 그 공으로 留侯에 책봉되었다.
제26편 <陳丞相世家>
六奇既用,諸侯賓從於漢;
呂氏之事,平為本謀,終安宗廟,定社稷。
여섯 가지 기발한 계책을 사용하니 제후들이 모두 한나라에 복종하였다.
呂氏를 토벌함은 陳平이 주모한 것으로 끝내 종묘사직을 안정시켰다.
作陳丞相世家第二十六。
<陳丞相世家>를 지으니 제26편이다.
▲ 六奇既用 : 진평은 유방을 섬긴 후 여섯 번 기발한 계책을 내고 유방이 이를 채택하여 여섯 번 봉록이 올라갔다. 상세한 내용은 세가 본문에 실려 있다.
▲ 賓從 : 복종하다.
▲ 呂氏之事 : 여씨 일족을 토벌한 일.
▲ 本謀 : 주모하다.
▲ 陳平 : 처음에는 項羽를 섬겼으나, 이후 劉邦의 진영으로 옮겨가 漢나라의 통일에 공을 세웠다. 그는 계략에 뛰어나 항우의 책사였던 범증이 쫓겨나게 모략을 꾸몄고, 항우 휘하의 대장군으로 실력자로 평가받았던 종리매가 신임을 잃게 하였다. 유방의 신임을 받았으며 고향의 戶牖侯에 임명되었다. 그 후 曲逆侯로 승진하였고, 相國 曹參이 죽은 후에는 左丞相이 되어, 周勃과 함께 여씨의 난을 평정하고 유방의 아들 文帝를 옹립하였다.
제27편 <絳侯世家>
諸呂為從,謀弱京師,而勃反經合於權;
吳楚之兵,亞夫駐於昌邑,以戹齊趙,而出委以梁。
여씨 일족이 방종하여 황실을 약화하려는 음모를 꾸몄으나 周勃이 권모술수를 써서 여씨 일족을 제거하였다.
오초의 반란 때 周亞夫는 昌邑에 주둔하며 齊와 趙의 길을 막았고, 梁을 고의로 구원하지 않았다.
作絳侯世家第二十七。
<絳侯世家>를 지으니 제27편이다.
▲ 從 : 방종하다.
▲ 周勃 : 前漢의 명신. 시호는 武侯公. 고조에 봉사하여 천하 평정의 공을 세우고, 絳侯에 봉하여졌다. 후에 呂氏一族이 난을 일으키자, 陳平과 더불어 여씨를 평정하고, 文帝를 세워서 漢室을 안정하게 하였다.
▲ 反經合於權 : 관례에서 벗어나 일시적인 대책을 씀. 反經(반경)은 관례에 어긋나다.
▲ 吳楚之兵 : 오초칠국의 반란을 말한다.
▲ 戹(액) : 곤경에 처하다.
▲ 委 : 저버리다.
▲ 周亞夫 : 周勃의 아들로 승상을 역임했으며, 작위는 條侯다. 文帝 6년(기원전 158) 河內太守로 있다가 아버지가 죽자 뒤를 이어 條侯로 봉해졌다. 흉노가 침범하자 장군이 되어 細柳를 방어하였다. 景帝 前元 3년(기원전 154) 吳楚가 반란을 일으키자 太尉로서 七國의 난을 평정하였다. 吳王을 죽인 뒤 丞相이 되었다. 後元 원년(기원전 143) 그의 아들이 官器를 훔쳐 팔았다는 고발을 당하고 연루되어 廷尉에게 넘겨지자 음식을 전폐하고 굶어 죽었다.
▲ 出委以梁 : 주아부가 梁을 저버리다. 오초칠국의 난이 일어나자 梁은 맨 먼저 吳와 楚의 공격을 받아 棘壁에서 지고 수만 명이 살해당하였다. 양효왕이 두려워하며 다시 요격했으나 패하였다. 전세가 급해지자 수양성을 지키면서 조정의 토벌군을 이끄는 주아부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주아부는 응하지 않고 다만 吳와 楚의 양도를 끊었다. 양효왕은 한안국과 장우를 장수로 쓰고 겨우 吳와 楚를 이겼다. 吳와 楚는 서쪽으로 나아가고 싶었으나 梁을 꺼려 그러하지 못했고 마침내 주아부에게 싸움을 걸었다가 대패하였다.
제28편 <梁孝王世家>
七國叛逆,蕃屏京師唯梁為捍;
偩愛矜功,幾獲于禍。
오초 7국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황실의 제후국 중 梁만이 대항하였다.
梁孝王 劉武는 두태후의 총애를 믿고 공로를 뽐내다가 화를 입어 목숨을 잃을 뻔하였다.
嘉其能距吳楚,作梁孝王世家第二十八。
오초 7국의 난을 막은 공로를 칭송하여 <梁孝王世家>를 지으니 제28편이다.
▲ 七國叛逆 : 吳楚七國의 난은 前漢 景帝 치세인 기원전 154년 제후국 吳왕 劉濞가 주축이 되어 楚왕 劉成, 趙왕 劉遂, 濟南王 劉辟光, 菑川王 劉賢, 膠西王 劉卬, 膠東王 劉雄渠 등이 중앙 정부에 일으킨 반란이다.
▲ 蕃屏京師 : 황실의 제후국. 蕃은 藩과 통한다. 울타리. 보호벽.
▲ 捍 : 막다. 방어하다.
▲ 距 : 拒와 통한다. 막아내다.
▲ 偩愛矜功,幾獲于禍 : 梁孝王 劉武는 代王, 회양왕을 역임했고 최종적으로는 양왕이다. 전한 문제의 둘째 아들이며 전한 경제의 친동생으로, 오초칠국의 난 진압에서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景帝의 황태제를 노렸는데 이를 좌절시킨 袁盎을 암살해 위기에 몰렸으나 어머니 효문황후(두태후)·누나 관도장공주의 도움으로 모면했으며 형 경제와의 사이는 회복되지 못하였다.
오초칠국의 난이 일어나자, 梁은 맨 먼저 吳·楚의 공격을 받아 棘壁에서 지고 수만 명이 살해당하였다. 양효왕이 두려워하며 다시 요격했으나 패하였다. 사세가 급해지자 수양성을 지키면서 조정의 토벌군을 이끄는 주아부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주아부가 응하지 않고 다만 吳와 楚의 양도를 끊었다. 양효왕이 한안국과 장우를 장수로 써서 겨우 吳와 楚를 이겼다.
제29편 <五宗世家>
五宗既王,親屬洽和,諸侯大小為藩,爰得其宜,僭擬之事稍衰貶矣。
景帝의 다섯 후비의 자식들이 제후왕이 되어 친족이 화합을 이루었고, 크고 작은 제후들이 蕃國이 되어 각자 자기 직분을 다하니, 분수를 모르고 천자 행세를 하려는 일이 점점 줄어들었다.
作五宗世家第二十九。
<五宗世家>를 지으니 제29편이다.
▲ 五宗 : 漢景帝의 다섯 명의 부인에게서 태어난 열세 명의 아들을 말한다. 경제는 슬하에 모두 14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중 한 사람이 漢武帝이고 나머지 13명이 모두 諸侯王에 봉해졌다. 13명은 모두 다섯 여인들 소생이었다. 이에 5명의 여인을 모두 모친으로 여겨 같은 종친으로 지낸다고 해서 오종이라고 한 것이다.
宗은 일정한 男系祖上을 같이하는 친족집단으로서 크게 大宗과 小宗으로 나눈다. 오종은 이 때의 대종(부계친족) 이외 소종을 다시 넷으로 나누어 모두 다섯 종으로 하는 일종의 친족개념이다.
▲ 僭擬 : 분수에 넘치게 윗사람과 견줌. 스스로 분수에 넘치는 천자 행세를 하다.
▲ 衰貶 : 약해지다. 감소하다.
제30편 <三王世家>
三子之王,文辭可觀。
황제의 세 아들이 왕으로 봉해졌는데 그때 지은 황제와 신하들의 策文이 볼만하다.
作三王世家第三十。
<三王世家>를 지으니 제30편이다.
▲ 三子之王 : 漢武帝의 세 아들인 齊王 劉閎, 燕王 劉旦, 廣陵王 劉胥를 말한다.
▲ 文辭 : 무제가 삼왕을 봉할 때 신하들에게 묻고 답한 글이며 策文은 황제의 물음에 답한 글을 말한다. 사마천은 “세 왕을 봉하면서 천자가 겸양을 보이고 신하들의 의리를 지킨 것과 책문의 문장이 아름다움을 볼만하여 세가에 덧붙였다.”라고 하였다.
제1편 <伯夷列傳>
末世爭利,維彼奔義;
讓國餓死,天下稱之。
말세에는 이익을 다투지만 오직 伯夷와 叔齊만은 의를 추구하였다.
나라를 양보하고 굶어 죽으니 세상 사람들이 그들을 칭송하였다.
作伯夷列傳第一。
열전 제1편 伯夷列傳을 지었다.
▲ 彼 : 伯夷와 叔齊. 孤竹國 군주의 두 아들인 伯夷와 叔齊는 商나라가 망한 뒤에도 상나라에 대한 충성을 버릴 수 없으며, 고죽군 영주로 받는 녹봉 역시 받을 수 없다며 首陽山으로 들어가 고사리를 캐어 먹다가 굶어서 죽었다.
제2편 <管晏列傳>
晏子儉矣,夷吾則奢;
齊桓以霸,景公以治。
晏子는 검소했고, 管仲은 사치스러웠다.
齊桓公은 관중을 써서 覇者가 되었고, 齊景公은 안자를 써서 나라를 잘 다스렸다.
作管晏列傳第二。
제2편 管晏列傳를 지었다.
▲ 夷吾 : 管仲의 이름은 夷吾이며, 齊桓公과 적대관계였으나 환공의 신하 鮑叔의 추천에 의하여 환공의 재상이 된 후 齊를 春秋時代의 5대 강국 중 제일가는 강국으로 만든 공적을 세웠다. 관중은 齊에 있어서는 전설적인 인물이며 포숙아와의 관포지교로 유명하다. 사마천은 “관중을 세상 사람들은 賢臣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공자는 그가 예의에 어긋남을 근거로 소인으로 지목하였다.”라고 기술하였다.
▲ 景公以治 : 齊景公이 안영을 써서 나라를 잘 다스리다. 晏嬰(晏子)은 春秋時代 齊의 명재상으로 자는 仲, 시호는 平이다. 齊靈公, 莊公, 景公 3대를 섬긴 재상으로서 절약 검소하고 군주에게 기탄없이 간언한 것으로 유명하였다. 晏子春秋는 안영의 언행을 기록한 책이다. 사마천은 안영을 용기가 있는 자이며, 군주에게 기탄없이 간언하였으니 충신이라고 평하고 안자가 같은 시대에 산다면 그의 마부가 될지라도 기꺼이 그를 흠모겠다고 하였다.
제3편 <老子韓非列傳>
李耳無為自化,清凈自正;
韓非揣事情,循埶理。
老子(李耳)는 ‘내가 無爲로 대하면 백성들은 감화되고, 내가 고요히 있는 것을 좋아하면 백성들이 바르게 된다.’라고 하였다.
韓非는 사물의 정황을 헤아려 사물의 추세와 도리를 준수하였다.
作老子韓非列傳第三。
제3편 老子韓非列傳을 지었다.
▲ 無為 : 노자 도덕경 57장에 “故聖人云, 我無爲而民自化, 我好靜而民自正: 성인이 말하기를 내가 무위로 대하면 백성들은 감화되고 내가 고요히 있는 것을 좋아하면 백성이 바르게 된다.”고 하였다.
▲ 揣 : 헤아리다. 추측하다.
▲ 事情 : 사물의 실제 정황.
▲ 李耳 : 老子. 司馬遷은 <사기>에서 노자로 상정되는 인물이 3인이 있다고 하였다. 첫째로 이이, 자는 담(聃=老聃)을 들었다. 그는 楚 사람으로 공자가 禮를 배운 사람이며, 도덕의 말 5천여 言을 저작한 사람인데 그의 최후는 알지 못한다고 한다. 둘째로 공자와 동시대의 老萊子로서 저서는 15편이 있었다 한다. 세 번째 든 것은 周의 太史儋이라는 사람으로 공자의 사후 100년 이상 경과한 때에 秦의 헌공과 회담하였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노자는 隱君子라는 것이다. 세상에서 말하는 노자라고 하는 이는 은자로서 그 사람됨을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것이다.
▲ 莊子 : 전국시대의 사상가 莊子(莊周). 저서 <장자>는 당나라 玄宗에게 南華眞經이라는 존칭을 받아 南華眞經이라고도 한다. 내편(內編) 7, 외편(外編) 15, 잡편(雜編) 11로 모두 33편이다.
▲ 申不害 : 韓의 명재상이며, 형명지학의 대가였다. 법가 사상 중 術을 강조하였으며, 韓의 昭侯 밑에서 재상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 韓非 : 이름은 韓非이고 전국시대 말기 韓 출신이며 法家 사상을 집대성한 정치사상가이다. 한비자는 法治主義를 주창한 韓非와 그 일파의 論著이다.
제4편 <司馬穰苴列傳>
自古王者而有司馬法,穰苴能申明之。
옛날부터 제왕들에게도 司馬法이 있었는데 司馬穰苴가 이를 분명히 설명할 수 있었다.
作司馬穰苴列傳第四。
제4편 司馬穰苴列傳을 지었다.
▲ 申明 : 표명하다. 공표하다.
▲ 司馬穰苴 : 春秋時代 齊의 장군으로, 성은 嬀, 씨는 田, 이름은 穰苴이다. 晏嬰이 경공의 신임을 얻어 재상의 지위에 올라 사마양저를 추천하여 등용된 후 齊의 번영에 공적을 올리자 景公이 대사마로 임명하였으며, 이때 司馬씨로 칭하여 사마양저라 불리었다. 사마씨를 칭하기 전의 씨인 田을 붙여 전양저로 불리기도 한다. 병법서 <사마법>의 저자로 田完의 후예이다.
제5편 <孫子吳起列傳>
非信廉仁勇不能傳兵論劍,與道同符,內可以治身,外可以應變,君子比德焉。
믿음과 청렴, 어짊과 용기가 없이는 병법을 전수하고 검술을 논할 수 없으며, 병법과 검술이 서로 부합되면 안으로는 자신의 몸을 다스릴 수 있고 밖으로는 임기응변할 수 있으니, 군자는 이것을 덕에 견주었다.
作孫子吳起列傳第五。
제5편 孫子吳起列傳을 지었다.
▲ 比 : 접근하다. 가까이하다.
▲ 孫子 : 春秋時代의 전략가로 본명이 孫武이며 자는 長卿으로 齊 출신이다. 吳왕 闔廬 때 등용되어 伍子胥와 함께 楚를 무찔렀다. 孫子는 敬稱이며 <손자병법>을 13편을 지었으며 강태공의 六韜三略을 기초하여 만든 것으로 전해진다.
▲ 孫臏 : 전국시대의 전략가로 兵家의 대표적 인물의 한 명이다. 孫武의 5대손이고, 孫武와 같이 孫子로 불린다. 臏이란 이름은 무릎뼈를 도려내는 형벌을 받아서 이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의 본명은 알 수 없다.
▲ 吳起 : 吳子로 불리며, 전국시대 군사 지도자이며 정치가였다. 魏 사람으로 魯, 魏, 楚를 섬겼다. 魏에서 많고 큰 전투를 지휘하여 많은 공을 세웠으며, 후에 楚로 도주하여 悼王에 의해 재상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楚에서 봉건 혁명을 이끌어 楚를 강국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혁명이 楚 귀족들을 노하게 하여 楚悼王이 죽은 뒤 대신들에 의해 피살되었다. 그가 남긴 저서로는 吳子兵法이 있다.
제6편 <伍子胥列傳>
維建遇讒,爰及子奢,尚既匡父,伍員奔吳。
太子 建이 참소를 당하자 화가 伍子奢에게 미쳤다.
伍尙은 아버지를 구하려다 잡히고 伍員은 吳로 달아났다.
作伍子胥列傳第六。
제6편 伍子胥列傳을 지었다.
▲ 建遇讒 : 태자 건의 태부였던 아버지 伍奢가 費無忌의 흉계로 인하여 楚平王의 노여움을 서사 아버지와 형이 처형되고 오자서는 楚를 탈출하였다.
▲ 子奢 : 伍奢. 오자서의 아버지. 伍子奢라고도 한다
▲ 伍尙 : 오자서의 형.
▲ 伍子胥 : 春秋時代의 정치가로, 이름은 員이며 子胥는 字이다. 楚 출신이다. 아버지가 費無忌의 흉계로 인하여 楚平王의 노여움을 사서 아버지와 형이 처형되매 楚를 탈출하였다.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 吳로 망명하여 오왕 闔閭에게 등용되어 손무와 함께 초를 격파하고 복수하였으나, 오왕 합려가 죽고 아들인 夫差가 즉위하자 사이가 벌어지고 모함을 받아 자살하였다.
제7편 <仲尼弟子列傳>
孔氏述文,弟子興業,咸為師傅,崇仁厲義。
孔子가 文德을 전수하니 제자들이 이를 크게 발전시켰으며, 그들은 모두가 사람들의 스승이 되어 인을 숭상하고 의를 행하게 하였다.
作仲尼弟子列傳第七。
제7편 仲尼弟子列傳을 지었다.
▲ 孔子 : 세계 4대 성인의 한 사람으로 본명은 孔丘이며 春秋時代 魯 사람으로 유교의 始祖이다. 春秋時代의 정치가·사상가·교육자이고, 魯의 문신이자 작가이면서 시인이기도 하다.
공자는 제자 중 육예에 통달한 자는 77명이라고 하였으며, 사마천은 論語 및 孔子世家, 春秋左氏傳 등을 인용하여 제자들을 낱낱이 설명하여 장문의 형식을 취하였다.
제8편 <商君列傳>
鞅去衛適秦,能明其術,彊霸孝公,後世遵其法。
商鞅이 衛를 떠나 秦으로 가서 법가의 학술을 밝히니 孝公은 강성해져 覇者로 칭해졌으며, 후세 사람들이 그의 법도를 그대로 지키며 따랐다.
作商君列傳第八。
제8편 商君列傳을 지었다.
▲ 彊霸孝公 : 孝公이 강성해져 覇者로 칭해지다.
▲ 商君 : 商鞅. 전국시대 秦의 법가를 대표하는 중요한 정치가였다. 상나라를 분봉받아 후작이 되어 商鞅으로 부르며 본래의 姓은 姬, 氏는 公孫, 이름은 鞅이다. 또 다른 별칭으로 衛 公族출신이라서 衛鞅이라 불렸다. 거열형의 창시자였는데, 후일 그 자신이 거열형으로 처형된다.
제9편 <蘇秦列傳>
天下患衡秦毋饜,而蘇子能存諸侯,約從以抑貪彊。
천하가 秦의 연횡책과 그칠 줄 모르는 탐욕을 걱정하자 蘇秦이 합종을 내세워 제후국을 존립하게 하고 합종의 맹약을 맺게 하여 탐욕스럽고 강한 秦을 억제하였다.
作蘇秦列傳第九。
제9편 蘇秦列傳을 지었다.
▲ 衡 : 通“横과 통하여 連橫을 말한다.
▲ 毋饜(무염) : 만족할 줄 모르고 탐하다.
▲ 從 : 縱橫을 말한다. 合從連橫은 戰國時代의 최강국인 秦과 燕·齊·楚·韓·魏·趙의 6국 사이의 외교 전술이며, 秦을 제외한 6개국의 제후가 秦에 대항하는 것을 合從이라 하여 소진이 유세하였고, 위나라 장의가 秦을 섬겨야 한다고 6국을 돌며 연합할 것을 설득하여 秦이 6국과 개별로 횡적 동맹을 맺은 것을 連橫이라 한다.
▲ 蘇秦 : 전국시대 중엽의 정치가. 강국 秦에 대적하기 위해 나머지 6국이 연합하는 합종설을 주장하였다. 張儀와 함께 鬼谷子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처음에 秦의 惠王을 비롯하여 제후 밑에서 유세를 하였으나 채용되지 않았다.
제10편 <張儀列傳>
六國既從親,而張儀能明其說,復散解諸侯。
6국이 合縱하여 친근해지자 張儀는 連橫을 내세워 제후국들을 다시 흩어 놓았다.
作張儀列傳第十。
제10편 張儀列傳을 지었다.
▲ 從親 : 합종하여 서로 친근해지다.
▲ 張儀 : 전국시대 魏의 모사. 蘇秦의 주선으로 秦에서 벼슬살이를 하게 되어 혜문왕 때 재상이 되었다. 연횡책을 주창하면서, 위·조·한 등 동서로 잇닿은 6국을 설득, 秦을 중심으로 하는 동맹관계를 맺게 하였다. 合從策을 제창한 蘇秦과 더불어 鬼谷先生에게 師事하였다.
제11편 <樗裏甘茂列傳>
秦所以東攘雄諸侯,樗裏、甘茂之策。
秦이 동쪽의 제후국들을 물리치고 제후에 군림할 수 있었던 까닭은 樗里子와 甘茂의 책략이 있었기 때문이다.
作樗裏甘茂列傳第十一。
제11편 樗裏甘茂列傳을 지었다.
▲ 樗里子 : 전국시대 秦 사람. 秦惠文君의 이복동생이고, 이름은 疾이다. 渭南 陰鄕의 樗里에서 살아 樗里子라 불렸다. 또는 楮里疾로도 쓴다. 辨說에 능하고 해학이 풍부하면서 지혜가 많아 秦 사람들이 智囊으로 불렀다. 혜문군 8년 右更이 되었다. 更元 13년 趙와 楚를 공격하는 데 공을 세워 嚴君에 봉해졌다. 秦武王 2년 右丞相이 되었다. 죽은 뒤 위남 章臺 남쪽에 장사지냈다.
▲ 甘茂 : 전국시대 秦의 정치가로 秦惠王에 인정되어 군장이 되고 이어서 武王, 昭王의 重臣으로서 정권을 좌우하고 諸國 평정에 성공했으나 참소받고 失脚하였다.
제12편 <穰侯列傳>
苞河山,圍大梁,使諸侯斂手而事秦者,魏冉之功。
황하와 화산 일대를 차지하고 大梁을 포위하여 제후들이 두 손을 공손히 모은 채 秦을 섬기게 함은 魏冉의 공이었다.
作穰侯列傳第十二。
제12편 穰侯列傳을 지었다.
▲ 苞 : 包와 같다. 휘감다. 감싸다.
▲ 斂手 : 두 손을 마주 잡곤 공손히 서 있음.
▲ 魏冉 : 穰侯 魏冉. 전국시대 秦 大臣이며 秦昭襄王의 외숙이다. 惠王 때에 관직을 맡아 집정하였다. 昭襄王이 즉위하자, 장군이 되었으며 食邑을 穰에 두었기 때문에 穰侯라 불렸다. 명장 백기를 등용해 주위의 나라들을 여러 차례 토벌해 영토를 획득하였다. 소양왕 41년 기원전 266년 재상의 자리에 파직되었다. 다음 해 봉읍인 陶邑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죽었다.
제13편 <白起王翦列傳>
南拔鄢郢,北摧長平,遂圍邯鄲,武安為率;
破荊滅趙,王翦之計。
秦이 남쪽으로 楚의 鄢과 郢을 공격하고, 북쪽으로는 趙를 長平에서 무찌르고, 趙의 한단을 포위함에 武安君 白起가 앞장섰다.
楚를 격파하고 趙를 멸망시킴은 王翦의 계책이었다.
作白起王翦列傳第十三。
제13편 白起王翦列傳을 지었다.
▲ 率 : 장수. 우두머리.
▲ 白起 : 公孫起. 전국시대 말 秦昭王에게 등용되어 魏, 趙에게 대승을 거두었으며, 韓과 魏, 趙, 楚 등의 70여 성을 탈취하였다. 楚의 수도 郢을 공격해 함락시키고, 武安君에 봉해졌다. 長平전투에서 趙軍에 대승을 거둔 다음 항복한 趙軍 40여만 명을 하룻밤 사이에 구덩이에 묻어 죽여 천하를 경악시켰다. 秦이 邯鄲을 포위했다가 실패했는데 병을 핑계로 참전하지 않았었다. 이로 인해 士伍로 강등되고, 재상 범수와 틈이 벌어져 자결하고 말았다.
▲ 王翦 : 전국시대 秦의 將帥로서 趙와 楚 등을 점령해 秦의 천하통일에 큰 공을 세웠다. 아들인 王賁과 함께 始皇帝의 天下統一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白起, 廉頗, 李牧 등과 함께 戰國時代 4대 名將으로 꼽힌다. (천자문의 起翦頗牧)
제14편 <孟子荀卿列傳>
獵儒墨之遺文,明禮義之統紀,絕惠王利端,列往世興衰。
作孟子荀卿列傳第十四。
유가와 묵가가 남긴 저작을 섭렵하여 예의의 기강을 밝혔으며, 이익을 추구하는 梁惠王의 마음을 단념시키고 과거의 흥망성쇠를 진술하였다.
제14편 孟子荀卿列傳을 지었다.
▲ 絕惠王利端 : “어찌하면 우리나라를 이롭게 하겠소?”라는 양혜왕의 질문에 맹자는 “웃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이익만을 취하게 되니 나라가 위태로워질 것입니다.”라고 답하였다. <孟子 梁惠王章句 上>
▲ 맹자 : 孟軻. 전국시대 추나라 사람으로 이름은 軻이고, 자는 子輿 또는 子車이다. 어릴 때부터 공자를 숭상하고, 공자의 사상을 발전시켜 유학을 후세에 전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제자백가 시대에 돌입한 시대에 묵적과 양주의 사상과 경쟁하며 유가 사상을 확립하였다.
▲ 荀卿 : 荀子. 戰國時代 말기의 유가 사상가이자 학자로 이름은 荀況이다. 前漢 宣帝의 劉詢과 이름이 비슷한 것을 피하기를 위해서 孫況이라고도 불렀다. 경칭으로 荀卿 또는 孫卿子로도 불린다. 공자의 사상 중 禮를 강조하여 발전시켰는데, 사람의 본성은 착하다는 맹자의 性善說에 반대하여, 악한 본성을 禮를 통해 변화시켜 선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性惡說을 주장하였다
▲ 孟子荀卿列傳 : 孟子와 荀卿의 合傳이며 전국시대의 음양가, 도가, 법가, 명가, 묵가의 대표적인 인물 12명에 대하여 기술하였다.
※ 孟子列傳(맹자열전) : 孟子(맹자)/騶忌(추기)/騶衍(추연)/淳于髡(순우곤)/慎到(신도)/田駢(전병)/環淵(환연)/接子(접자)/騶奭(추석).
※ 荀卿列傳(순경열전) : 荀卿(순경)/公孫龍(공손룡)/墨翟(묵적).
제15편 <孟嘗君列傳>
好客喜士,士歸于薛,為齊捍楚魏。
문객과 선비를 좋아하여 선비들이 薛 땅으로 모여들어 齊를 위해 楚와 魏의 침략을 막았다.
作孟嘗君列傳第十五。
제15편 孟嘗君列傳을 지었다.
▲ 薛 : 지금의 山東省 滕州. 이 지역에 封地를 두고 있었기에 전문의 아버지 전영을 薛公이라고 불렀다.
▲ 孟嘗君 : 田文. 戰國時代의 정치가로 戰國四君(全國4公子)의 한 사람이다. 성은 嬀, 氏는 田, 諱는 文이며, 맹상군은 그의 諡號이다. 전국4공자는 齊의 孟嘗君 田文, 趙의 平原君 趙勝, 魏의 信陵君 魏無忌, 楚의 春申君 黃歇을 말하며, 전국 칠웅 간에 외교활동으로 강국 秦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활약을 했었다. 맹상군은 齊 왕족으로 평소 3천 명의 식객을 두었으며 鷄鳴狗盜와 狡免三窟의 고사로 유명하다.
제16편 <平原君虞卿列傳>
爭馮亭以權,如楚以救邯鄲之圍,使其君復稱於諸侯。
馮亭과 권력을 다투다가 秦의 공격을 초래하여 楚의 구원병으로 한단의 포위를 풀었으며, 그의 군주를 다시 제후들 사이에서 이름을 드높이게 하였다.
作平原君虞卿列傳第十六。
제16편 平原君虞卿列傳을 지었다.
▲ 爭馮亭以權 : 기원전 262년 秦이 韓을 공격하자 韓의 上黨태수 馮亭이 상당 땅을 趙에 바쳤다. 趙 孝成王은 平陽君 조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平原君 趙勝으로 하여금 이를 받아들여 魏가 취하자, 秦이 기원전 260년 장평을 공격하였으며 趙軍은 대패하고 40여만 명의 군사가 秦의 장군 白起에게 생매장되었다. <史記 卷43 趙世家>
▲ 平原君 : 趙勝. 戰國時代 趙의 公子이며 정치가이다. 氏는 趙, 諱는 勝이다. 武靈王의 아들로 惠文王의 동생이다. 휘하의 食客을 모아 형인 혜문왕과 조카 孝成王을 보좌하였다. 전국시대 戰國四君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人士을 좋아해서 식객이 수천에 달하였다. 그중에는 公孫竜이나 鄒衍 등도 있었다.
▲ 虞卿 : 유세객으로 姓은 虞, 이름은 未詳이다. 趙成王을 두 번 만나 上卿 벼슬에 올랐다. 趙를 盟主로 삼고 合縱하여 秦에 항거하자고 주장한 반면, 樓緩은 趙의 땅을 떼어주어 秦에 복종하자고 주장하였다.
제17편 <魏公子列傳>
能以富貴下貧賤,賢能詘於不肖,唯信陵君為能行之。
부귀한 몸으로 빈천한 사람에게 자기를 낮출 수 있고, 현명하고 능력이 있으면서도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게 자신을 굽히었으니 오직 信陵君만이 할 수 있었다.
作魏公子列傳第十七。
제17편 魏公子列傳을 지었다.
▲ 下貧賤 : 가난하고 천한 사람에게 자기를 낮춤.
▲ 詘 : 屈과 통한다. 자신을 굽히다.
▲ 魏公子 : 魏無忌. 전국시대 魏의 저명한 군사가로 信陵에 봉해지면서 信陵君으로 불리었다. 4공자 중 가장 어질고 능력 있는 인물로서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趙 평원군이 매형이었으며 趙를 도와 楚, 趙, 韓와 연합하여 秦 군대를 크게 격퇴하였다. 위공자병법이 전해지고 있으며 秦의 이간으로 魏王의 미움을 사서 술로 지내다 술독으로 죽었다.
제18편 <春申君列傳>
以身徇君,遂脫彊秦,使馳說之士南鄉走楚者,黃歇之義。
군주를 위해 목숨을 걸어 마침내 강국 秦에서 탈출시켰으며, 유세가들을 남쪽의 楚로 오게 함은 黃歇의 의로움이었다.
作春申君列傳第十八。
제18편 春申君列傳을 지었다.
▲ 以身徇君 : 황헐은 楚의 태자 完과 秦에 볼모로 갔었으며, 진의 재상인 범수를 설득하여 태자 완을 楚로 탈출시켰다. 얼마 뒤에 태자인 完이 考烈王으로 즉위하였다.
▲ 徇 : 殉과 통한다. ~에 목숨을 바치다.
▲ 馳說 : 遊說.
▲ 鄉 : 向과 같다. 향하다.
▲ 走 : ~를 향하여 달려가다.
▲ 春申君 : 黃歇. 전국시대 楚의 정치가이며, 성은 黃, 이름은 歇이다. 戰國四君의 한 사람으로 식객 수천을 거느렸다. 楚의 태자 完과 秦에 볼모로 갔었으며, 태자 完을 탈출시켜 楚로 돌아와 즉위하여 考烈王이 되자 春申君이 되었다. 고열왕이 병사하여 장례식에 가던 춘신군은 棘門에서 매복하고 있던 李園의 자객에게 종자와 함께 살해되어 그 목이 성 밖에 버려졌고, 一族과 따르던 무리도 모두 살해되었다.
제19편 <范睢蔡澤列傳>
能忍於魏齊,而信威於彊秦,推賢讓位,二子有之。
范睢는 魏齊에게 당한 치욕을 참아내고 강국 秦에서 위세를 떨치다가, 유능한 인재 菜澤을 추천하고 자리를 양보하니 두 사람이 모두 미덕을 갖출 수 있었다.
作范睢蔡澤列傳第十九。
제19편 范睢蔡澤列傳을 지었다.
▲ 魏齊 : 魏의 재상인 魏齊.
▲ 信 : 伸과 통한다. 펼치다.
▲ 范睢 : 전국책에는 范雎로 되어 있다. 魏 사람으로 위나라 재상 魏齊에게 죽임을 당할 위기에서 벗어나 秦으로 들어가 秦昭王에게 遠交近攻策을 유세하여 전국시대 秦의 재상이 되었다.
▲ 菜澤 : 전국시대 燕 사람으로 변설이 좋았고 지략이 풍부해 제후들에게 다니면서 유세하였다. 채택은 秦으로 들어가서 재상인 범수를 설득하기를, 공을 세운 후에는 물러남이 최상의 도라고 하여, 범수가 물러나자 재상이 되었다. 후에 자신도 물러나 평안한 말년을 보냈다. 달도 차면 기운다는 月滿則虧의 유명한 말을 남겼다. 秦에서 10여 년 동안 머무르면서 昭王, 孝文王, 莊襄王, 始皇을 섬겼다.
제20편 <樂毅列傳>
率行其謀,連五國兵,為弱燕報彊齊之讎,雪其先君之恥。
앞장서서 책략을 펼쳐 5개국 군사들과 연합하여 약한 燕를 위해 강국 齊에 원수를 갚고 선조의 치욕을 씻었다.
作樂毅列傳第二十。
제20편 樂毅列傳을 지었다.
▲ 樂毅 : 전국시대 魏 출신으로 燕의 명장이다. 전국시대 중엽에 燕은 燕王噲가 왕위를 정승인 子之에게 禪讓하였다가 나라가 큰 혼란에 빠졌다. 그리하여 齊의 침공을 받아 燕王噲가 죽고 나라가 거의 망하게 되었는데, 燕 사람들이 태자 平을 세우니 바로 昭王이다. 당시 齊湣王은 宋을 멸망시키고 자만에 빠져 기고만장하였다. 燕昭王은 齊에 복수하기 위해 樂毅를 대장군으로 등용하고, 제후들과 연합군을 편성하여 齊를 공격해서 70여 성을 함락하는 큰 성과를 거뒀다. 昭王이 죽고 태자인 惠王이 즉위하였는데, 혜왕이 齊의 反間計에 말려들어 樂毅를 의심하고 대장군의 직위를 박탈하자, 樂毅는 趙로 망명하였다.
▲ 雪 : 洗雪. 치욕을 씻다.
제21편 <廉頗藺相如列傳>
能信意彊秦,而屈體廉子,用徇其君,俱重於諸侯。
강한 秦에게는 자신의 의지를 펼쳤으나 廉頗에게는 자신을 낮추었으며, 군주에게는 충성을 다하였으매 두 사람 모두 제후들에게 이름을 날렸다.
作廉頗藺相如列傳第二十一。
제21편 廉頗藺相如列傳을 지었다.
▲ 信 : 伸과 같다. 펼치다.
▲ 廉頗 : 趙의 명장으로 秦와 魏 등과 싸워 여러 차례 적을 물리쳤으며, 信平君의 칭호를 받았다. 같은 시대에 활약한 趙의 재상 藺相如와의 교우는 刎頸之交라는 고사의 유래가 되기도 하였다.
▲ 藺相如 : 전국시대 趙의 재상으로서, 秦이 속임수를 써서 뺏으려던 和氏璧을 지켜내고, 趙將 廉頗와 합심하여 趙를 굳건하게 지켜낸 일로 유명하다.
인상여가 秦에 사신으로 가서 화씨의 벽을 되찾아옴에 공을 세워 재상이 되매, 이를 시기한 염파가 결국 負荊請罪하는 刎頸之交의 고사가 유명하다. 完璧, 布衣之交, 兩鼠鬪穴, 膠柱鼓瑟 등의 고사성어와 관련되는 인물이다.
제22편 <田單列傳>
湣王既失臨淄而奔莒,唯田單用即墨破走騎劫,遂存齊社稷。
齊湣王이 수도 臨淄를 잃고 莒 땅으로 달아났지만, 오로지 전단이 即墨을 지키며 燕將 騎劫을 격파하여 몰아내고 齊의 사직을 보존하였다.
作田單列傳第二十二。
제22편 田單列傳을 지었다.
▲ 湣王既失臨淄 : 燕將 樂毅가 五國을 연합해서 齊에 쳐들어오자 齊湣王이 莒로 도망치고 楚에 구원을 청하니, 楚는 장군 淖齒를 보내 구해 주었다. 민왕이 감격해서 요치를 재상으로 삼았으나 요치는 齊 땅을 燕과 반분할 셈으로 莒에서 민왕을 죽여 그 筋骨을 뽑아 대들보에 매다는 만행을 저질렀다.<史記 권79 范睡·蔡澤列傳>
▲ 破走 : 물리쳐서 몰아내다.
▲ 田單 : 臨淄사람으로 성은 媯이고, 氏는 田, 이름은 單이다. 원래 齊의 종친의 먼 친척으로 처음에는 수도 臨淄의 小吏였으나 燕과의 卽墨 싸움에서 火牛陣의 전법으로 燕軍을 대패시키고 齊를 수복하여 安平君에 봉해져 相國이 되었다.
제23편 <魯仲連鄒陽列傳>
能設詭說解患於圍城,輕爵祿,樂肆志。
교묘한 말로 秦에 포위된 城을 구했으며, 지위와 녹봉을 가벼이 여기며, 그의 뜻을 성취함을 즐겼다.
作魯仲連鄒陽列傳第二十三。
제23편 魯仲連鄒陽列傳을 지었다.
▲ 詭說 : 거짓으로 하는 말. 교묘한 말.
▲ 肆 : (힘을) 다하다.
▲ 魯仲連 : 전국시대 齊 사람으로 유세가이다. 魯連이라고도 칭한다. 秦이 趙를 공격하여 수도 邯鄲을 포위하자, 제후들이 秦을 두려워하여 감히 趙를 구원하지 못하였다. 魏安釐王은 新垣衍이란 辯士를 趙에 보내, 秦 임금을 황제로 섬기면 포위를 풀 것이라는 계책을 고하게 하였는데, 이 말을 들은 魯仲連이 “포악한 秦이 방자하게 황제를 칭한다면 나는 차라리 동해에 빠져 죽겠다.”라고 하니, 제후들이 이 말을 듣고 연합하여 秦軍을 패퇴시켰다. 후에 齊 將 田單이 燕에게 빼앗긴 聊城을 되찾기 위해 군사를 동원하여 공격했으나 여러 달이 지나도 함락하지 못하였다. 이에 노중련이 이해득실을 논하는 편지를 한 통 써서 화살에 매달아 성안으로 날려 보냈다. 燕將은 노중련의 편지를 보고 싸우지도 않고 곧바로 항복해 왔다. 전단이 그에게 작위를 내려 상을 주려 했으나 아무도 몰래 달아나 바닷가로 나가 숨었다.
▲ 鄒陽 : 前漢 齊郡 臨淄 사람으로 景帝 때 吳王 劉濞를 섬겼다. 오왕이 한나라에 반란을 획책하자 景帝의 동생 梁孝王의 문객이 되었다가 羊勝 등의 참소로 투옥되었는데, 간곡한 상소문을 올려 석방되었다. 후에 양효왕에게 上客의 대우를 받았다. 이 상소문을 獄中上梁王書라 하며 명문으로 일컬어진다. “한쪽의 말만 들으면 간사함이 생겨나고 한 사람에게 권력을 맡기면 난이 이루어지게 된다(偏聽生姦 獨任成亂).”라는 유명한 글을 남겼다.
제24편 <屈原賈生列傳>
作辭以諷諫,連類以爭義,離騷有之。
글을 지어 諷諫하고 비유를 들어 의로움을 주장하였으니, ‘離騷’가 그것이다.
作屈原賈生列傳第二十四。
제24편 屈原賈生列傳을 지었다.
▲ 屈原 : 전국시대 楚의 시인이며 정치가이다. 성은 羋, 씨는 屈, 이름은 平이며 자는 原이다. 楚의 왕족으로 태어나 楚懷王 때 좌도에 임명되었다. 학식이 높고 정치적 식견도 뛰어난 정치가였으며, 회왕의 상담역으로 국사를 도모하고, 외교적 수완이 뛰어났으나, 모함을 받아 신임을 잃고 끝내 자살하였다. 이러한 아픔을 그의 시 離騷에 담아내었다.
▲ 離騷 : 楚 屈原의 작품. 楚懷王과 충돌하여 물러나야 했던 실망과 憂國의 정을 노래하였다.
▲ 賈誼 : 前漢의 학자이며 정치가로 洛陽사람으로 나이 20여 세에 漢文帝에게 발탁되어 博士가 되고, 다시 1년 동안 여러 번 직위가 파격적으로 올라 약관에 太中大夫의 자리까지 올랐다. 그러나 대신들의 참소로 長沙王의 태부로 좌천되었다. 漢文帝 4년(기원전 176년)에 湘水를 건너다 굴원을 추모하고 비분강개의 뜻을 담은 弔屈原賦를 지어 상수에 띄웠다.
제25편 <呂不韋列傳>
結子楚親,使諸侯之士斐然爭入事秦。
子楚와 친분을 맺어 제후들이 어지러이 앞을 다투어 秦을 섬기게 하였다.
作呂不韋列傳第二十五。
제25편 呂不韋列傳을 지었다.
▲ 子楚 : 여불위가 趙의 邯鄲으로 갔을 때, 秦의 庶公子로서 볼모로 잡혀 있던 子楚를 도왔다. 여불위의 도움으로 귀국한 자초는 왕위에 올라 莊襄王이 되었고, 그 공로에 여불위는 丞相이 되고 文信侯로 봉하여졌다
▲ 斐然 : 뒤섞여 어지럽다는 뜻. 文彩가 있는 모양.
▲ 呂不韋 : 趙 출신의 상인으로 秦의 정치가이다. 莊襄王 때 승상이 되었으며, 장양왕이 즉위한 지 3년 만에 죽자 여불위의 친자식이라고 기록된 태자 政이 왕위에 올랐으며 그가 진시황제이다. 이에 여불위는 재상을 지냈으며, 전국 말기의 귀중한 사료로 평가받는 呂氏春秋를 3,000여 빈객의 학식을 모아 편찬하였다. 최고의 相國이 되어 仲父라는 칭호로 불리며 중용되었으나 太后와 밀통관계를 유지하였다. 여불위는 이 관계가 들통날까 두려워 노애라는 사내를 태후에게 보내어 정을 통하게 하였다. 태자 정이 성장하여 이 관계를 눈치채자 노애가 태자를 제거하려는 반란을 일으켰다가 극형을 당하였다. 여불위는 이 사건에 연루되어 상국에서 파면되어 촉 땅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여불위는 점점 압박해오는 진왕 정의 중압감을 못 이겨 마침내 자살하였다.
제26편 <刺客列傳>
曹子匕首,魯獲其田,齊明其信;
豫讓義不為二心。
曹沫은 비수로 빼앗겼던 魯 땅을 되찾고, 齊는 약속을 지킨다고 밝혔으며,
豫讓은 의리를 지켜 두 마음을 품지 않았다.
作刺客列傳第二十六。
제26편 刺客列傳을 지었다.
▲ 曹子 : 曹沫. 曹劌, 曹翽라고도 한다. 春秋時代 魯의 大夫로 지략과 의리가 뛰어났다고 하며 魯莊公을 섬긴 장군이다. 제환공 5년에 魯가 遂邑을 바치는 조건으로 齊와 회맹을 맺게 되었는데, 맹약하는 자리에서 장공이 수읍을 헌상한다는 내용이 담긴 맹약서를 쓰는 도중에, 조말이 난입해서 비수로 환공을 위협하며 자신의 패전을 보상하기 위해 앞서 세 번의 전투에서 빼앗아간 魯의 땅을 돌려달라고 협박하였고, 환공은 마지못해 서약서를 썼다.
▲ 專諸 : 春秋時代 吳 사람이다. 楚의 伍子胥가 왕위 승계에 불만을 가진 吳의 공자 光에게 추천한 사람이다. 공자 광을 위해 吳王 僚를 죽이고자 비수를 구운 생선 뱃속에 숨겨 가지고 들어가 그를 찔러 죽였으나, 자기도 그 자리에서 잡혀 죽임을 당하였고 공자 광은 왕이 되니 곧 吳王 闔閭이다.
▲ 豫讓 : 春秋時代 말기 晉의 智氏의 가신이다. 처음에 范氏와 中行氏를 섬기다가 뒤에 智伯을 주인으로 섬겼는데, 지백이 그를 매우 존경하고 총애하였다. 趙襄子가 智伯을 살해하자, 예양은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이를 위하여 죽는다.”하고 보복을 맹세한 뒤 죄인으로 가장하여 비수를 품고 조양자의 변소에 잠입하여 그를 죽이려다가 발각되었다. 조양자는 그를 義人이라 생각하고 석방하였다. 그 뒤 예양은 몸에 옻칠을 하여 나환자로 변장하고, 벙어리·거지의 행세를 하며 다시 기회를 기다렸다. 조양자가 외출할 때 다리 밑에 숨었다가 그를 찔러 죽이려고 하였으나, 말이 놀라는 바람에 다시 붙들렸다. 조양자가 이번에는 그를 용서하지 않자, 예양은 조양자에게 간청하여 그의 옷을 받아 칼로 3번 친 뒤, “내가 지백에게 보답할 수 있게 되었구나!”라고 말하고, 칼에 엎어져 자결하였다.
▲ 聶政 : 魏 사람으로 일찍이 사람을 죽여 도망 끝에 어머니를 모시고 齊에서 백정이 되었다. 자신을 후대한 韓의 卿인 嚴仲子가 엄중자의 원수인 韓의 재상 俠累를 죽여 달라는 부탁을 받았지만, 자신의 어머니를 모셔야 한다고 거절하다가 어머니가 죽자 의리를 지켜 협루를 죽이고 자살하였다. 섭정이 죽은 후 그의 누나가 섭정의 시체를 안고 따라 죽었다.
▲ 荊軻 : 전국시대 말기의 자객이며 衛 사람이다. 秦 始皇帝를 암살하려 했던 인물이다. 秦王 政은 왕으로 즉위하기 전에 燕 태자 丹과 함께 趙에 볼모로 있으면서 친하게 지냈는데, 귀국하여 즉위하고 나서 태자 단을 무시하자, 태자 丹은 진왕 政에게 복수를 꾀하면서 荊軻가 용감한 자객이라는 말을 듣고 그에게 복수해달라고 간청하였다. 荊軻는 燕의 사신으로 위장하여 값진 보물과 함께 땅을 바치겠다는 뜻으로 督亢이란 지역의 지도를 바치기로 하였다. 진왕 정이 백관들을 모아놓고 사신을 접견하는데, 이때 荊軻가 지도 속에 감춰둔 단검을 빼 들고 진왕 정을 죽이려고 하다 실패하여 처형당하였다. 형가가 암살에 실패하고 죽은 후, 고점리가 황제로 즉위한 진시황제 앞에서 축을 연주함에 축 속에 납덩이를 숨기고 있다가 황제를 내려쳤으나 실패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제27편 <李斯列傳>
能明其畫,因時推秦,遂得意於海內,斯為謀首。
자신의 계책을 천명하고, 시세에 순응하여 秦을 推尊하여, 마침내 秦이 천하에 뜻을 이루게 하였는데, 이사가 모략의 우두머리였다.
作李斯列傳第二十七。
제27편 李斯列傳을 지었다.
▲ 畫 : 계책. 畵는 그을 ‘획’
▲ 李斯 : 楚 上蔡 출신으로 秦의 法家流의 정치가이다. 荀子에게 배우고 秦으로 가서 丞相 呂不韋에게 발탁되어 客卿이 되었다. 鄭國渠라는 운하를 완성함에 노력하였으며, 始皇帝가 6국을 통일한 후에는 봉건제에 반대하고 郡縣制를 진언하여 丞相이 되고 焚書坑儒를 단행하였다. 시황제가 죽은 후 환관 趙高와 공모하여 막내아들 胡亥를 2세황제로 옹립하고 시황제의 장자 扶蘇와 장군 蒙恬을 자살하게 하였는데, 조고의 참소로 투옥되어 그 아들과 함께 처형되고 三族이 몰살되었다.
제28편 <蒙恬列傳>
為秦開地益眾,北靡匈奴,據河為塞,因山為固,建榆中。 秦을 위해 땅을 개척하고 인구를 늘리고, 북으로 흉노를 몰아내고, 황하를 거점으로 장성을 쌓고, 산의 견고함을 이용하여 榆中縣을 건설하였다. 作蒙恬列傳第二十八。 제28편 蒙恬列傳을 지었다. |
▲ 蒙恬 : 전국시대 秦의 관료이자 장군이다. 秦將 蒙武의 아들이자 蒙毅의 형으로, 전국 통일 이후에 북쪽의 흉노를 몰아내고 만리장성의 건축 및 북방의 수비를 감독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진시황제의 신임을 얻고 그의 측근이 되어 권세를 누렸으나, 진시황제 사후에 조고 등의 모함을 당하여 태자 부소가 자살한 후 2세 황제 胡亥의 압박에 못 이겨 자살하였다.
제29편 <張耳陳餘列傳>
填趙塞常山以廣河內,弱楚權,明漢王之信於天下。
趙를 평정하고 常山에 요새를 만들어 세력을 河內까지 확장했으며, 楚의 세력을 약하게 만들어 漢王의 신의를 천하에 밝혔다.
作張耳陳餘列傳第二十九。
제29편 張耳陳餘列傳을 지었다.
▲ 填 : 鎭과 통하여 평정하다.
▲ 張耳와 陳餘는 전국시대 말기 魏의 大梁사람이다. 장이는 陳餘와 함께 刎頸之交를 맺었으며, 秦 2세황제 원년에 陳涉이 반란을 일으키자 진여와 함께 校尉가 되어 武臣을 따라 趙 땅을 정벌하였다. 무신이 趙王이 되자 장이는 右丞相에 올랐고, 진여는 大將軍이 되었다. 그 후 장이와 진여는 사이가 벌어져 진여가 장이를 공격하자 장이는 劉邦에게 투항했고, 진여는 조왕 헐을 도와 趙王으로 세웠으나 전한의 장수 한신의 공격을 받아 죽었다.
제30편 <魏豹彭越列傳>
收西河、上黨之兵,從至彭城;越之侵掠梁地以苦項羽。
魏豹는 西河와 上黨의 군대를 거두어 漢王을 따라 팽성에 이르렀고, 彭越은 梁 땅을 침략하여 項羽를 괴롭혔다.
作魏豹彭越列傳第三十。
제30편 魏豹彭越列傳을 지었다.
▲ 魏豹 : 魏 왕실의 일족으며 魏咎의 사촌동생으로 陳勝의 반란 이후 周市과 함께 형 위구를 魏王으로 옹립하였다
▲ 彭越 : 秦의 山陽 昌邑 출신으로 도적이었다. 字는 仲이다. 秦 말기 각지에서 봉기하여 군웅들이 할거하자 스스로 봉기하여 군사를 일으켜 楚 項羽의 군사가 되었다. 하지만 항우가 자신의 공로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반란을 일으켜 유방에게 귀순하였다. 한나라를 도와 楚를 공격하여 여러 차례 楚의 식량 보급로를 끊었다. 병사를 인솔해 垓下에서 項羽를 격멸하고 梁王에 봉해졌다. 陳豨가 代 땅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병을 핑계하고 유방의 징병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여태후의 모함을 받아 유방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제31편 <黥布列傳>
以淮南叛楚歸漢,漢用得大司馬殷,卒破子羽于垓下。
淮南에서 楚를 배반하고 漢나라에 귀의했으며, 한나라는 黥布를 써서 大司馬 周殷을 얻고 마침내 해하에서 항우를 격파하였다.
作黥布列傳第三十一。
제31편 黥布列傳을 지었다.
▲ 黥布 : 본명이 英布이며, 前漢의 六安 六縣 사람으로 법을 어겨 黥刑을 당해 黥布로 불렸다. 劉邦을 도와 전한을 세운 장군이다. 秦 말 진승의 난이 일어나자 무리를 이끌고 番君에 귀의했다가 후에 項梁에게 의탁했으며, 항량이 죽자 項羽에게 귀속하였다. 전투 때마다 항상 적은 병력으로 많은 적군을 물리쳤다. 항우를 따라 入關한 뒤 九江王에 봉해졌으며, 항우의 명령에 따라 衡山王 吳芮와 함께 楚懷王 義帝를 죽였다. 楚漢전쟁 중에 한나라가 그를 설득하자 한나라로 귀순하였다. 淮南王에 봉해졌고, 유방을 따라 垓下전투에서 항우를 격파하였다. 漢나라 건국 후 韓信과 彭越 등 개국공신이 하나하나 피살되자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강남으로 달아났으나 長沙王에게 유인되어 誅殺되었다.
▲ 周殷 : 초한전쟁기의 군인으로, 서초의 대사마였다. 한왕 유방이 형양에서 서초패왕 항우의 공격으로 고전하여 진평이 서초패왕과 신하 사이를 이간하려 함에, 범증·용저·종리말과 함께 패왕이 믿고 의지하는 몇 안 되는 신하로 언급됐다. 한왕 6년(기원전 202년) 12월, 영포와 유고가 대사마 주은을 꾀어내자 주은은 楚에 반기를 들고, 구강의 병력으로 한나라와 함께 楚를 쳐서 垓下에서 격파하였다.
제32편 <淮陰侯列傳>
楚人迫我京索,而信拔魏趙,定燕齊,使漢三分天下有其二,以滅項籍。
楚가 한나라의 京城과 索城을 압박할 때 韓信이 魏와 趙를 공략하고 燕와 齊를 평정하여, 천하의 2/3를 한나라가 차지하게 하여 항우를 멸망시킬 수 있었다.
作淮陰侯列傳第三十二。
제32편 淮陰侯列傳을 지었다.
▲ 韓信 : 前漢의 장군이자 제후이다. 회음현 출신으로 유방의 부하로 있을 때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해, 유방의 패권을 결정지었다. 漢初三傑 중 하나로 꼽히며, 蕭何가 國士無雙이라고 일컬은 명장이다. 기원전 206년 유방이 項羽에게 漢王으로 봉해지자 漢中으로 함께 갔다. 그곳에서 한신은 한왕에게 항우와 천하를 놓고 다투자고 건의하였다. 해하 전투에서 항우를 제압하면서 세운 공을 인정받아 齊王에 이어 楚王이 되었다. 반란을 꾀하다가 회음후로 격하되었다가 여태후에 의해 참수당하고 삼족이 멸족되었다. 회음후열전에서 나오는 一飯千金, 胯下之辱, 兎死狗烹 등의 고사가 유명하다.
제33편 <韓信盧綰列傳>
楚漢相距鞏洛,而韓信為填潁川,盧綰絕籍糧餉。
楚와 한나라가 鞏城과 洛陽에서 대치하고 있을 때 韓王 信은 영천을 평정하고, 盧綰은 항우의 군량 수송로를 끊었다.
作韓信盧綰列傳第三十三。
제33편 韓信盧綰列傳을 지었다.
▲ 韓王 信 : 秦 말기에서 한나라 초기 사이의 인물로 성은 姬, 씨는 韓, 이름은 信이다. 전국시대 韓襄王의 후손으로, 漢나라의 고조 유방에 의해 韓王으로 봉해졌으나 흉노와 화친하려고 함에 오해를 받자, 흉노의 군대를 이끌고 漢나라의 변경을 쳐들어갔다. 한신은 기원전 196년 봄에 다시 흉노의 기병을 이끌고 參合을 점령했으나, 柴武가 이끄는 한나라 군대에 패하고 붙잡혀 참수되었다.
▲ 盧綰 : 沛國 豊邑 사람으로 劉邦과 같은 날에 태어난 동향인으로 유방의 총애를 받았다. 초한 전쟁 때 太尉가 되었고 長安侯에 봉해졌다. 후에 유방을 따라 燕王 藏荼를 격파하여 燕王에 봉해졌다. 高帝 12년(기원전 195)에 陳豨가 반란을 일으키자 군사를 일으켜 진희를 공격하고, 흉노와 연대하려는 진희의 계획을 방해하려다가 오히려 흉노와의 연대를 도왔는데, 이 일이 알려지자 흉노로 도망하였다. 흉노가 東胡 盧王으로 삼았으나 1년여 만에 흉노에서 죽었다.
▲ 陳豨 : 漢나라의 개국공신으로 漢高祖를 따라 燕王 藏荼를 평정하여 陽夏侯에 봉해졌다. 고조 7년(기원전 200년)에 代의 相國이 되어 趙, 代의 군사를 관할하였다. 고조 10년(기원전 197년) 韓信과 모반을 도모하여 王黃, 曼丘臣 등과 반란을 일으키고 代王으로 자칭하였다. 고조의 親征으로 진압되었다. 고조 12년 겨울(기원전 196년) 한나라의 진압군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번쾌의 별장의 공격을 받아 당성에서 죽었다고도 하고, 혹은 주발의 공격을 받아 靈丘에서 격파돼 베어졌다고도 한다.
제34편 <田儋列傳>
諸侯畔項王,唯齊連子羽城陽,漢得以閒遂入彭城。
제후들이 초왕 항우에게 반란했을 때 齊王 田儋은 城陽에서 항우를 견제했으며, 漢이 그 틈을 타서 彭城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作田儋列傳第三十四。
제34편 田儋列傳을 지었다.
▲ 畔 : 叛과 통용되어 반란하다.
▲ 連 : 견제하다.
▲ 閒 : 틈. 기회.
▲ 田儋列傳은 초한전쟁시 齊의 田氏 일가의 合傳이다. 齊의 狄縣 출신인 田儋은 옛 齊의 왕족으로 齊가 秦에 의해 패망한 후 사촌동생 田榮, 田橫과 狄縣으로 이주하여 강성한 종족을 거느리며 세력을 형성하였으며, 전담이 齊의 왕위에 오른 후 章邯이 魏王 魏咎를 공격해 臨濟를 포위하자, 전담과 초왕의 군대가 魏를 구원하러 출진했으나 장한의 야습에 패배해 전담은 임제에서 죽고 말았다. 이편에는 전담과 그의 사촌 동생 田榮, 田橫이 차례로 왕이 되었다가 패망하는 과정이 실려 있다.
제35편 <樊酈列傳>
攻城野戰,獲功歸報,噲、商有力焉,非獨鞭策,又與之脫難。
성을 공략하고 야전에서 공을 세워 승전보를 알린 것은 樊噲와 酈商의 힘이었으며, 漢王을 위해 말채찍을 잡았을 뿐만 아니라 함께 어려움에서 벗어나기도 하였다.
作樊酈列傳第三十五。
제35편 樊酈列傳을 지었다.
▲ 鞭策(편책) : 말채찍. 채찍질하다.
▲ 與之의 之 : 漢王 劉邦을 말한다.
▲ 樊酈列傳 : 지금의 사기에는 樊酈滕灌列傳으로 기록되어 있다.
▲ 樊酈滕灌列傳은 樊噲, 酈商, 滕公 夏侯嬰, 灌嬰 네 사람의 合傳이다. 이 네 사람은 모두 유방의 휘하에서 무공을 세운 장수들이며 미천한 신분이었다가 秦 말기의 혼란한 틈을 타 영웅이 된 것이 공통점이다. 이 편에서는 주로 네 사람의 공적을 기술하고 있다.
▲ 樊噲 : 沛縣 출신으로 원래 개고기를 파는 미천한 신분이었으나 劉邦이 군사를 일으킬 때 무장으로서 용맹을 떨쳐 공을 세웠다. 유방과 항우의 鴻門의 연회에서 유방이 項羽에게 살해될 위기에서 극적으로 유방을 구해내었다. 유방이 즉위한 뒤 左丞相, 相國이 되었으며 그 후 여러 반란을 평정하였으며 舞陽侯로 봉해졌다.
▲ 酈商 : 탕군 陳留縣 高陽鄕사람으로, 酈食其의 아우이다. 秦 2세황제 원년(기원전 209년) 진승·오광이 봉기할 당시에 수천 명의 무리를 모아 거느리고 있다가, 형 역이기가 유방에게 속해 陳留를 함락하자 자신도 유방에게 귀순하였다. 長社 공격에서 가장 먼저 성에 올라 信成君의 작호를 받았고, 유방을 따라 관중에 들어가기 전까지 전공을 세웠으며 별군을 거느리고 한중을 평정하였다.
▲ 夏侯嬰 : 沛縣 사람으로 西漢 시기의 開國功臣이다. 원래는 패현 관청의 마구간지기인데 패현의 사상정을 지나다니면서 정장이었던 유방과 친분을 맺었다. 秦과 전투를 할 때 兵車를 질풍처럼 몰아쳐 용감히 싸워 滕公의 작위를 받았다. 滕令이 되어서 유방의 수레를 몰았기 때문에 滕公이라 호칭한 것이다.
▲ 灌嬰 : 전한 초기 睡陽 사람으로 젊었을 때는 비단을 파는 일을 생업으로 삼았다. 秦 말기 劉邦의 시종관으로 전공을 세워 執珪의 작위에 오르고 昌文侯로 불렸다. 郎中과 中謁者, 中大夫 등을 역임하였다. 장군으로 齊를 평정하고, 항우를 무찔러 고조 6년(기원전 201) 潁陰侯에 봉해졌다. 呂后가 죽은 뒤 周勃, 陳平 등과 함께 여씨 일족을 주살하였다. 文帝를 옹립한 뒤 太尉가 되었다가 얼마 후 주발을 대신해 丞相에 올랐다. 시호는 懿侯이다.
제36편 <張丞相列傳>
漢既初定,文理未明,蒼為主計,整齊度量,序律歷。
한나라가 처음 안정되었으나 문물제도가 분명치 못하니, 張蒼이 재정을 맡아 도량형을 정비하고 율력을 새로 제정하였다.
作張丞相列傳第三十六。
제36편 張丞相列傳을 지었다.
▲ 主計 : 职官名。汉代时掌管国家财政,计算出入
▲ 整齊 : 질서 있게 하다. 통일이 되도록 정리하다.
▲ 張丞相列傳은 西漢 초의 대신 張蒼, 周昌, 任敖, 申屠嘉 네 명에 대한 合傳이다. 사마천이 서한의 사학가였으므로 서한의 재상들에 대하여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후반부에는 魏相, 邴吉, 黃霸, 匡衡에 대하여 추가로 실려 있다. 이는 사마천의 기록이 아니고 나중에 褚小孫이 덧붙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정화(征和:漢武帝의 열 번째 年號) 시기 이후의 기록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태사공 사마천은 ‘張蒼은 문학·음률·역법에 뛰어난 漢나라의 명재상이었으며, 周昌은 강직하고 성실한 사람이었고, 任敖는 옛날의 은덕으로 인해 등용되었으며, 申屠嘉는 강직해 절조를 지켰다.’라고 하였다.
제37편 <酈生陸賈列傳>
結言通使,約懷諸侯;
諸侯咸親,歸漢為藩輔。
遊說로 친교를 맺어 사신을 왕래하게 하고 제후들을 설득하며 위로하였다.
제후들은 모두 한나라와 가까워지고 한나라에 귀순하여 속국이 되어 보좌하였다.
作酈生陸賈列傳第三十七。
권37편 酈生陸賈列傳를 지었다.
▲ 懷 : 위로하다. 위안하다.
▲ 酈生 : 酈食其. 이름은 食其이며, 陳留 高陽 출신이다. 秦 말기에 가난하고 미천한 출신이었으나 유방을 설득하여 참모이자 說客이 되었으며, 劉邦을 도와 제후들을 설득하여 끌어들이는 외교 활동에서 큰 공을 세웠다. 齊王 田廣에게 漢에 복속하라고 설득하기 위해 齊에 머물다가, 공을 탐한 韓信이 齊를 침공하자 속았다고 분노한 齊王에게 烹殺되었다.
▲ 陸賈(육고/육가) : 楚 사람으로 西漢 시기의 정치가이자 문학가, 사상가이다. 웅변에 능한 외교가로서도 역할을 감당하였는데, 南越王 尉他(趙他)를 달변으로 漢나라에 종속시켰다. 유방에게도 문과 무가 조화를 이루어야 나라를 다스릴 수 있음을 설득하였고, <新語> 12편을 저술하여 국가 존망의 갖가지 모습을 약술하여 유방의 통치를 도왔다.
▲ 朱建 : 前漢 초의 정치가로, 楚 사람이다. 말재주가 뛰어나고 청렴 강직하였다. 한때 淮南王 黥布의 재상으로 있었으며 경포가 반란에 실패한 후 고조 유방이 平原君으로 임명하였다. 辟陽侯 審食其와 친교를 맺었으나 심이기가 여태후의 총애를 받다가 여태후가 죽고 여씨 일족이 죽임을 당하였고 文帝 3년에 淮南 麗王이 심이기를 죽였다. 주건이 예전에 심이기의 죽음을 구해 주었다는 이유로 문제가 체포하려고 하자 자살하였다.
제38편 <傅靳蒯成列傳>
欲詳知秦楚之事, 維周牒常從高祖,平定諸侯。
秦과 楚의 사건을 상세히 알고 싶으면 오로지 蒯成侯 周緤이 늘 고조를 따르며 제후들을 평정한 것으로 알 수 있다.
作傅靳蒯成列傳第三十八。
제38편 傅靳蒯成列傳을 지었다.
▲ 傅寬 : 前漢의 개국공신이며 魏 五大夫의 기병대장이었다가 유방에게 귀순하여 秦과의 전투에서 공을 세워 경의 작위를 받았다. 한신, 조참 등이 이끄는 齊와의 전쟁에 참여해 공적을 세워 식읍이 늘었고, 齊가 완전히 평정되자 漢王 6년(기원전 201년)에 陽陵侯에 봉해졌다. 高帝 11년 곧 제 도혜왕 5년(기원전 196년), 齊의 상국이 되었다. 4월에 주발에 속해 진희의 난 진압에 나섰고, 1월에는 代의 상국으로 전임하였다. 孝惠帝 5년 기원전 190년 노환으로 죽었다. 시호는 景侯다.
▲ 靳歙 : 冤句사람으로 西漢의 개국공신이다. 秦 말기에 유방이 군사를 일으켰을 때 中涓의 신분으로 秦과 싸워 공을 세워 建武侯의 작위를 받았고 三秦을 정벌하고 항우를 격파하는 데 공을 세워 信武侯에 봉해졌다. 高后 5년(기원전 183년)에 죽었으며 諡號는 肅侯이다.
▲ 蒯成侯 周緤 : 沛縣 사람이며 高祖 劉邦의 參乘이었다가 고조가 삼진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蒯成侯가 되었다. 크고 작은 전투에 참여하면서 유방의 뜻을 배반하지 않았다. 효문제 5년(기원전 175년), 천수를 누리고 죽었으며 시호는 貞侯라 하였다.
제39편 劉敬叔孫通列傳
徙彊族,都關中,和約匈奴;
明朝廷禮,次宗廟儀法。
劉敬은 강한 호족들을 이주시키고 관중에 도읍하자고 건의하고 흉노와 화친의 조약을 맺었다.
叔孫通은 조정의 의례를 밝히고 이어 종묘 제례의식에 관한 법도 제정하였다.
作劉敬叔孫通列傳第三十九。
제39편 劉敬叔孫通列傳을 지었다.
▲ 劉敬 : 前漢 齊 사람으로 본래의 姓은 婁인데 漢高祖 때 長安에 도읍하자고 주장하여 고조가 이를 받아들이고 劉氏 성을 하사하여 劉敬이라 부르고 奉春君에 봉하였다. 나중에 關內侯에 봉해졌고, 建信侯란 호를 받았다. 유방이 白登에서 匈奴의 冒頓單于에게 패한 뒤 북방의 변란 때문에 괴로워할 때 화친정책을 제안하고 사신으로 가서 조약을 매듭지었다.
▲ 叔孫通 : 秦 말기 전한초기의 관료로 薛縣 사람이다. 처음에는 秦 二世皇帝를 섬겨 博士를 지내다가 위태로움을 알고 달아나 項梁과 項羽를 섬겼다. 그 후 劉邦에게 귀순하여 박사가 되고, 稷嗣君으로 불렸다. 유방이 천하를 차지한 뒤에 魯의 유생들을 불러 나라의 예법을 다시 만들라고 설득하여 한나라의 예악과 조정의 예법을 새롭게 제정하였다. 高祖 7년(기원전 200) 長樂宮이 완공되자 제후와 신하들이 예법에 맞게 조회를 하도록 주도하여 太常에 임명되었다. 후에 太子太傅가 되었고, 한고조에게 태자를 바꾸지 말라고 간하였다. 惠帝 때 다시 太常으로 宗廟儀法을 제정하였다.
제40편 <季布欒布列傳>
能摧剛作柔,卒為列臣;
欒公不劫於埶而倍死。
季布는 강직한 성격을 부드럽게 바꾸어 마침내 한나라의 烈臣이 되었다.
欒布는 위세에 눌리지 않고 죽은 彭越을 배신하지 않았다.
作季布欒布列傳第四十。
제40편 季布欒布列傳을 지었다.
▲ 列臣 : 강직한 신하. 列은 烈과 통한다.
▲ 不劫於埶 : 위세에 굴하지 않다.
▲ 倍死 : 죽은 자를 배신하다. 倍는 背와 같다. 배반하다.
▲ 季布 : 楚 사람으로 項羽의 武將으로 있으면서 漢나라의 고조 유방과 싸울 때 많은 전공을 올렸지만 항우가 패하자 유방이 현상금을 걸고 그를 수배하였다. 추적의 손길이 뻗치자 스스로 노예가 되어 魯의 朱家에게 팔려갔다. 주가도 이 노예가 계포임을 알아보고 滕公 夏侯嬰을 설득하여 유방에게 간언케 하여 고조 유방에게 사면되어 郎中이 되었으며, 惠帝 때에는 中郞將이 되었다.
계포는 체면을 소중히 여기고 신의를 지키는 任俠으로 알려져, 한번 허락한 이상 그 약속은 반드시 지켰다. 楚 사람들은 이런 그를 두고 “황금 백근을 얻음이 계포의 일낙을 얻음만 못하다(得黃金百斤, 不如得季布一諾.)”라고 하여 一諾千金이라는 고사가 전해진다.
▲ 欒布 : 梁 사람이며 양왕 彭越이 왕이 되기 전에 친분이 있었다. 난포가 燕에서 노예로 있을 때 臧荼에게 발탁되어 경비대장이 되었고 장도가 燕王이 되면서 장군이 되었다. 한나라가 연을 쳐서 난포가 사로잡히자 양왕이 된 팽월이 난포를 구해 주었으며 梁의 대부로 삼았다. 그 후 팽월이 모반죄로 효수되자 통곡하며 제를 지낸 죄로 고조가 문책하여 삶아 죽이려 하자 난포는 팽월의 공적과 정당치 못한 판결을 따져 고조를 도리어 책하였다. 고조는 난포의 죄를 용서하고 도위 벼슬을 주었다. 한 문제 때 燕의 재상이 되었으며 장군에까지 이르렀다.
제41편 <袁盎晁錯列傳>
敢犯顏色以達主義,不顧其身,為國家樹長畫。
감히 천자의 싫어하는 안색에도 개의치 않고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간하였으며,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나라의 장기적인 계획을 세웠다.
作袁盎晁錯列傳第四十一。
제41편 袁盎晁錯列傳을 지었다.
▲ 犯顏 : 윗사람의 안색에 개의치 않고 諫하다.
▲ 畫 : 계획.
▲ 袁盎 : 楚 사람으로 자는 絲이다. 西漢시대의 대신으로 개성이 강직하고 재간과 담력이 있었다. 조정에서 儒家의 禮治思想으로 통치할 것을 강조했고, 서슴없이 直諫하여 漢文帝의 노여움을 사서 隴西都尉, 吳相으로 좌천되기도 하였다. 漢景帝가 즉위한 후에 吳楚七國의 반란이 일어나자 晁錯를 주살하자고 간청하여 제후들의 원망을 잠재웠다. 그 공으로 太常이 되고, 吳에 사신으로 가서 반란을 평정한 후에 楚相이 되었다. 그 후 梁孝王을 황제의 후사로 결정하는 일을 중지하라고 간언을 올렸다가 安陵의 郭門 밖에서 양효왕이 보낸 자객의 손에 죽임을 당하였다.
▲ 晁錯 : 鼂錯로도 쓴다. 漢나라 文帝와 景帝 때의 문신으로 潁川 사람이다. 성품이 강하고 위엄을 앞세웠으나 재주와 식견이 뛰어나 좋은 계책을 많이 내었다. 文帝 때에 후일 景帝가 된 太子의 舍人으로 있다가 家令이 되어 태자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나, 각박한 성품 때문에 사람들의 미움을 받았다. 景帝가 즉위하자, 內史에 임명되고 자주 景帝와 독대하여 자신의 계책을 실현하였으며, 御史大夫가 되자 제후들의 세력이 너무 강성해서 장차 나라의 큰 우환이 될 것을 우려하여 제후들의 봉지를 삭감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매, 吳․楚 등 7국이 조조를 처단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반란을 일으켰다.
조조가 반란의 소식을 듣고 경제와 함께 이들을 토벌할 계책을 논의하고 있었는데, 竇嬰과 袁盎이 입궐하여 景帝에게 조조를 처형하면 제후들의 반란이 그칠 것이라고 진언하자, 전쟁을 두려워한 경제가 이를 받아들여, 조조에게 저자를 순행하라고 속여서 동쪽 시장에 보내고 처형하게 하니, 조조는 朝衣를 입은 채로 영문도 모른 채 참수되었다.
제42편 <張釋之馮唐列傳>
守法不失大理,言古賢人,增主之明。
법을 지키고 큰 이치를 잃지 않았으며, 옛 현인의 덕을 말해서 군주를 더욱 현명하게 하였다.
作張釋之馮唐列傳第四十二。
제42편 張釋之馮唐列傳을 지었다.
▲ 張釋之 : 南陽 堵陽 사람으로 자는 季이며, 文帝때 騎郞이었다가 후에 謁者와 謁者僕射, 公車令을 지냈다. 태자가 梁王과 함께 수레를 타고 입조했는데 司馬門에서 내리지 않자 두 사람이 탄 수레를 정지시키고 불경함을 탄핵하였다. 문제가 이 일로 기특하게 보아 中大夫에 임명하였다. 나중에 廷尉가 되었는데, 형벌의 집행이 공정하고 후덕하다는 평을 들었다.
▲ 馮唐 : 漢文帝 때의 賢士로 中郞署長을 지내면서 황제에게 直言을 서슴지 않았던 인물이다. 扶風 安陵 사람으로 선조는 趙 사람이었다. 효자로 명성을 얻어 文帝 때 中郞署長이 되었다. 景帝 때 楚相 등 중앙고위관직을 지냈다.
제43편 <萬石張叔列傳>
敦厚慈孝,訥於言,敏於行,務在鞠躬,君子長者。
인정이 두텁고 인자하고 효성스러웠으며, 말은 느리고 행동은 민첩하며, 자신을 낮춰 조심스럽게 처신하니 군자나 장자의 풍모를 갖추었다.
作萬石張叔列傳第四十三。
제43편 萬石張叔列傳을 지었다.
▲ 訥 : 떠듬떠듬 말하다.
▲ 石奮 : 前漢의 관료로 河内郡 溫縣 사람이다. 아버지는 본래 趙 사람인데, 趙 멸망 후 온현으로 이주하였다. 석분은 열다섯 살의 나이로 말단 벼슬아치가 되어 고조 유방을 섬겼다. 이후 공로를 쌓아 文帝 때 太中大夫가 되었으며 景帝 때에는 九卿의 반열에 올랐다. 석분은 공손하고 신중한 면에서는 견줄 이가 없었으며, 그의 네 아들도 아버지와 같은 성품을 가져 모두 2천 석의 녹봉에 해당하는 직위에 올랐다. 이에 景帝가 석분을 萬石君이라 호칭하여 萬石君 石奮으로 불리었다.
▲ 衛綰 : 代郡 大陵縣 사람으로 수레를 가지고 부리는 기예로 郞官이 되어 文帝를 섬겨 中郞將이 되었다. 景帝가 즉위하여 청렴하고 충성스러움에 남과 견줄 수 없다고 하여 河間王太傅에 임명하였다. 경제 3년 오초칠국의 난이 일어나자 조서를 받아 장수가 되어 河間王의 병사를 이끌고 싸워 공을 세워 中尉가 되었으며 경제 6년에 군공으로 건릉후에 봉해졌다.
▲ 直不疑 : 南陽 사람으로 文帝 때 郞官으로 있었다. 억울한 의심을 받아도 자신을 위해 변명도 하지 않는 인품이었다. 덕망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아 太中大夫가 되었고, 오초 반란을 평정한 공로로 어사대부가 되었으며 塞侯에 봉해졌다. 武帝때 과실로 인하여 면직당하였다.
▲ 周文 : 이름은 仁이며 의술이 뛰어나 景帝가 태자였을 때 舍人으로 임명되었고 文帝 때에는 태중대부가 되었다. 경제가 즉위한 후 낭중령이 되었다. 신중한 사람으로 남들의 말을 누설하지 않아 경제의 총애를 받았으며 청렴결백하였다.
▲ 張歐 : 字는 叔으로 개국공신 張說의 서자이다. 형명학을 연구하여 문제의 태자를 섬겼으며 경제 즉위 후에는 항상 관직이 九卿의 지위에 있었다. 장구는 벼슬한 이래 죄인을 문초할 것을 상주한 적이 없었고, 관원들은 장구를 어진 자라고 생각하여 감히 속이지 못하였다. 늙어서 병이 위중해져 관직을 사퇴하길 청하였고, 무제는 上大夫의 봉록을 내려 陽陵의 집에서 여생을 보내게 하였다.
제44편 <田叔列傳>
守節切直,義足以言廉,行足以厲賢,任重權不可以非理撓。
절조를 지키며 강직하며, 의리는 청렴이라는 말에 충분히 어울렸고, 행동은 어진 이들을 격려하기에 충분했으며, 큰 권력을 맡았다고 하여 無理한 수단으로는 굴복시킬 수 없었다.
作田叔列傳第四十四。
제44편 田叔列傳을 지었다.
▲ 厲 : 격려하다.
▲ 撓 : 橈(뇨)와 통하여 굴복시키다.
▲ 田叔 : 趙 陘城縣 사람으로 齊 왕족의 후손이다. 趙王 張敖를 섬겨 낭중이 되었으며, 조왕 장오의 모반 사건으로 조왕이 체포되고 孟舒 등과 함께 漢나라에 자발적으로 압송되었으나 고조 유방이 조왕의 신하들을 높이 평가해 전숙을 漢中 郡守로 기용하였다. 文帝 때 면직되었다가 景帝 때 梁孝王 劉武가 袁盎을 암살한 사건의 조사관에 임명되었으며 경제가 이 사건의 조언을 현명하게 여겨 魯의 승상으로 삼았다.
▲ 任安 : 漢武帝 때 司馬遷의 벗으로 字가 少卿이다. 어려서 고아가 되어 빈곤하였으며 衛青장군의 가신이 되어 田仁을 만났으며 전인과 함께 漢武帝의 낭관으로 발탁된 후 임안은 益州刺史가 되고 전인은 승상의 長史가 되었다. 그 후 太子 劉據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사형당하였다.
제45편 <扁鵲倉公列傳>
扁鵲言醫,為方者宗,守數精明;後世循序,弗能易也,而倉公可謂近之矣。
扁鵲은 의술을 논하여 의학의 조종이 되었고, 그의 의술은 대단히 정교하고 뛰어나 후세에도 그것을 따르며 바꾸지 못하였고, 倉公이 그에 접근했다고 말할 수 있다.
作扁鵲倉公列傳第四十五。
제45편 扁鵲倉公列傳을 지었다.
▲ 方者 : 의술가.
▲ 守數 : 의술을 다루다. 數는 의술.
▲ 扁鵲 : 전국시대 뛰어난 의사로 성은 秦이고 이름은 越人이며 渤海 사람이다. 長桑君에게 秘方을 전수받고 名醫가 되어 齊와 越 사이를 오가며 환자를 치료하다가 秦에 들어갔는데, 秦 太醫令 李醯가 편작의 뛰어난 의술을 시기하여 자객을 시켜 암살하였다.
▲ 倉公 淳于意 : 西漢시대의 名醫이다. 齊 臨菑사람으로 齊 양식창고를 관리하는 太倉長의 벼슬을 지냈기 때문에 倉公,太倉公이라고도 일컫는다. 公乘인 陽慶에게서 의술을 배웠다. 의술이 높았으며 특히 脈法의 운용을 중시하였고 병을 치료할 때마다 침과 약물을 아울러 같이 써서 제법 좋은 치료 효과를 보았다.
제46편 <吳王濞列傳>
維仲之省,厥濞王吳,遭漢初定,以填撫江淮之閒。
유중은 왕위가 폐위되었으나 그의 아들 劉濞가 吳王이 되었으며, 한나라가 안정된 초기에 그를 시켜 장강과 회수 사이를 鎭撫하였다.
作吳王濞列傳第四十六。
제46편 吳王濞列傳을 지었다.
▲ 劉仲 : 代頃王 劉喜. 한고조의 작은형이다. 자는 仲이며, 시호는 頃이다. 고제가 흉노와 싸워 백등산 포위전에서 곤궁에 처했다가 겨우 빠져나오고 나서, 고제 7년(기원전 200년)에 代王으로 봉하였다. 그 후 匈奴가 代를 공격하자 유중은 지켜내지 못하고 나라를 버리고 달아나 사잇길로 달려 雒陽으로 들어가 천자에게 자수하였다. 고제는 그와 혈육인 까닭에 차마 법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왕위를 폐하고 郃陽侯로 낮추었다.
▲ 省 : 삭감하다. 유중의 제후왕의 작위를 폐하였다.
▲ 厥 : 그의 아들. 유중의 아들.
▲ 填撫 : 鎭撫하다. 난리를 평정하고 민심을 가라앉히다.
▲ 吳王濞 : 吳王 劉濞. 前漢의 제후왕으로 한고조의 형 劉仲의 아들이다. 황실이 제후국을 견제함에 반발하여 오초칠국의 난을 일으켰다.
유비는 고조 12년(기원전 195) 吳王에 봉해졌으며 封國에 있으면서 망명객들을 모으고 鑄錢과 製鹽을 대대적으로 시행하면서 세금을 걷지 않는 등 위민책으로 세력을 불려나갔다. 漢文帝 때 유비의 아들 劉賢이 천자를 알현하고 황태자 劉啟와 술을 마시며 雙六놀이를 하는 중에 황태자가 유현을 죽이자, 이에 앙심을 품고 병을 핑계로 조회하지 않았다. 漢景帝 때 晁錯의 건의로 봉국을 빼앗기자 조조를 誅戮한다는 명분으로 楚와 趙, 膠西, 膠東 등 제후국들과 함께 吳楚七國의 난을 일으켰고 한나라가 周亞夫를 보내 격퇴시켰다. 유비는 東越로 달아났다가 동월왕에 의해 살해당하였다.
제47편 <魏其武安列傳>
吳楚為亂,宗屬唯嬰賢而喜士,士鄉之,率師抗山東滎陽。
오초칠국이 난을 일으켰을 때 종실과 외척들 중 오직 竇嬰만이 어질고 선비들을 좋아했고 선비들도 그를 따랐으며, 군사를 이끌고 산동 滎陽에서 반란군에 맞서 싸웠다.
作魏其武安列傳第四十七。
제47편 魏其武安列傳을 지었다.
▲ 吳楚為亂 : 吳楚七國의 亂. 前漢 景帝 치세인 기원전 154년 吳王 劉濞가 주축이 되어 楚王 劉成, 趙王 劉遂, 濟南王 劉辟光, 菑川王 劉賢, 膠西王 劉卬, 膠東王 劉雄渠 등이 전한 중앙 정부에 일으킨 반란이다.
▲ 竇嬰 : 西漢의 大臣이며 字는 王孫이다. 文帝의 황후인 竇皇后의 조카로 오초칠국의 난 때 대장군으로 임명되어 형양을 지키며 齊·趙의 병사를 감독하였다. 오초칠국의 난이 평정된 후 魏其侯로 임명되었다. 景帝는 두영이 사람됨이 가벼워 자신을 진중하게 유지하지 못한다고 하여 재상으로 기용하지 않았다. 武帝 초에 丞相에 임명되었고, 儒學을 숭상하매 두태후의 뜻을 거슬러 파직되었으며, 승상 田蚡과 사이가 나빠져 그의 모함을 받아 사형에 처해졌다.
▲ 武安侯 田蚡 : 長陵 사람으로 景帝 王皇后 王娡와 어머니는 같고 아버지가 다른 동생이다. 처음에 諸曹郞이 되고, 경제 말년에 총애를 받기 시작하였다. 외척의 신분으로 武帝의 총애를 받아 太尉를 지냈고, 武安侯에 봉해진 뒤 太尉를 거쳐 丞相이 되었다. 미천할 때 竇嬰을 섬겼는데, 출세하고 두영이 세력을 잃자 무고하여 두영과 灌夫를 살해하였다. 유가 사상을 숭상하매 黃老사상을 좋아한 竇太后에 의해 파직되었다. 두태후가 죽은 뒤 복직되어 무제의 유학 장려 정책에 크게 기여하였다. 병으로 죽었다.
▲ 灌夫 : 前漢 潁川 潁陰 사람이며 자는 仲孺이다. 아버지는 張孟인데, 灌嬰의 舍人이 되어 총애를 받자 성을 灌氏로 바꾸었다. 吳楚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아버지와 함께 전쟁에 나섰다가 아버지가 전투 중에 죽자,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자 吳 진영으로 들어가 적병 수십 명을 죽여 이름을 천하에 떨쳤다. 이 공으로 中郞將이 되었다. 武帝 建元 원년(기원전 140년) 淮陽太守가 되었고, 이어 입조하여 太僕이 되었다가 다음 해 燕의 宰相이 되었다. 사람됨이 강직하고 酒邪가 있었으며, 家産만 수천만이었고 食客이 수백 명에 이르렀다. 魏其候 竇嬰과 부자지간처럼 사귀었다. 술에 취해 丞相 田蚡을 모욕하는 不敬罪를 저질러 탄핵받고 일족이 誅殺당하였다.
제48편 <韓長孺列傳>
智足以應近世之變,寬足用得人。
지혜는 최근의 변화에 대응하기에 충분하고, 너그러움은 인재를 얻어 쓰기에 충분하였다.
作韓長孺列傳第四十八。
제48편 韓長孺列傳을 지었다.
▲ 韓長孺 : 韓安國. 전한 초기의 名將으로 오초칠국의 난 때 공을 세워 명성을 얻었다. 梁의 成安 출신으로 字는 長孺이다. 일찍이 田生에게 韓非子와 雜說을 배웠고, 梁孝王을 섬겨 中大夫가 되었다.
양효왕이 자국의 승상을 임명할 권리를 얻었는데, 궁을 드나들 때의 의례를 황제처럼 하여 형 景帝의 노여움을 샀다. 한안국은 梁의 사자가 되어 大長公主에게 이를 변명하였고, 대장공주는 황태후와 의논하여 경제의 노여움을 풀었다. 이 일로 한안국은 황실에서도 명성을 떨쳤다. 建元 6년(기원전 135년) 御史大夫가 되었으며, 사람됨이 忠厚하고 지략이 있으면서도 재물에 대한 욕심이 상당했는데, 그가 추천한 사람들은 모두 廉士였다. 元朔 원년(기원전 128년) 匈奴가 대거 침입하자 材官將軍으로 漁陽에 주둔했지만 패하자 右北平으로 옮겨 주둔했는데, 울화병으로 피를 토한 뒤 죽었다.
제49편 <李將軍列傳>
勇於當敵,仁愛士卒,號令不煩,師徒鄉之。
적과 싸울 때는 용감했으며, 병사들에게는 어질게 사랑으로 대하였고, 군령은 번거롭지 않았으니 장수와 사병들도 그를 따랐다.
作李將軍列傳第四十九。
제49편 李將軍列傳을 지었다.
▲ 師徒 : 장수와 사병.
▲ 鄉 : 向과 같다.
▲ 李將軍 : 李廣. 隴西 成紀 사람으로 漢文帝 때 良家의 자제로 종군하여 흉노를 격퇴하여 郞이 되었고, 武騎常侍가 되었다. 景帝 때 驍騎徒尉에 올랐다. 나중에 隴西와 北地, 雁門 등 郡의 太守를 역임하였다. 武帝 때 입조하여 未央衛尉가 되고, 右北平太守를 지냈다. 활을 잘 쏘았으며 병졸을 아끼고 잘 이끌어 모두 날래고 용맹해 전투하기를 좋아하였다. 흉노가 두려워하여 몇 년 동안 감히 국경을 침범하지 못하고 전장을 날아다니는 장수라 하여 飛將軍이라 칭송하였다. 40여 년 동안 군대를 이끌고 흉노와 대치하면서 70여 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를 치렀다. 병사들의 마음을 깊이 얻었지만 끝내 封侯되지는 못하였다. 元狩 4년(기원전 119년) 대장군 衛靑을 따라 흉노를 공격하다 길을 잃어 문책을 받자 자살하였다.
제50편 <匈奴列傳>
自三代以來,匈奴常為中國患害;
欲知彊弱之時,設備征討.
夏, 殷, 周 삼대 이래로 匈奴는 늘 중원지역에 근심과 피해를 주었다.
흉노가 강하거나 약한 때를 살펴서 군비를 갖추거나 정벌에 나서고자 하였다.
作匈奴列傳第五十。
제50편 匈奴列傳을 지었다.
▲ 中國 : 중원지역.
▲ 設備 : 갖추다. 방비하다.
▲ 匈奴列傳 : 匈奴에 대한 역사적인 기록과 漢나라와 흉노와의 관계에 관한 기록이다. 흉노는 기원전 3세기 말부터 기원후 1세기 말까지 몽골고원과 만리장성 일대를 중심으로 활약한 遊牧騎馬民族 및 그들이 형성한 북몽고와 중앙아시아 일대의 국가를 일컫는다.
제51편 <衛將軍驃騎列傳>
直曲塞,廣河南,破祁連,通西國,靡北胡。
구불구불한 변방 요새의 길을 바르게 개통하여 황하 이남까지 땅을 넓혔으며, 祁連山에서 적을 격파하고 서역의 길을 통하게 하고 북쪽의 흉노를 격파하였다.
作衛將軍驃騎列傳第五十一。
제51편 衛將軍驃騎列傳을 지었다.
▲ 西國 : 서역의 여러 나라.
▲ 靡 : 무찌르다.
▲ 衛將軍 : 衛靑. 전한의 장군으로 자는 仲卿이며 平陽縣 사람이다. 작위는 長平侯다. 누나는 무제의 무사황후 衛子夫이다. 하급관리인 아버지 鄭季와 평양후의 첩인 衛媼의 사생아로 태어나 평양후의 집에서 가인으로 있다가 평양후의 기사가 되어 평양공주를 모셨다. 출세한 이후에는 평양공주와 결혼하였다. 생질 곽거병과 함께 무제 때 흉노를 일곱 차례나 물리쳐 관직이 大司馬‧大將軍에 이르렀다.
▲ 霍去病 : 위청의 조카인 곽거병은 漢武帝 때 흉노를 정벌함에 큰 공을 세웠다. 정예부대를 이끌고 大軍보다 먼저 적진 깊숙이 쳐들어가는 전법을 써서, 한제국의 영토 확대에 지대한 공을 세워 위청과 함께 大司馬가 되었고 그 권세는 위청을 능가했다고 한다. 그러나 불과 24세로 죽었다.
제52편 <平津侯列傳>
大臣宗室以侈靡相高,唯弘用節衣食為百吏先。
대신과 종친들이 지나치게 사치스러움을 다툴 때, 公孫弘만은 衣食을 절약하여 백관의 모범이 되었다.
作平津侯列傳第五十二。
제52편 平津侯列傳을 지었다.
▲ 侈靡 : 지나치게 사치스럽다.
▲ 相高 : 서로 간의 높고 낮음을 비교하다.
▲ 平津侯 : 公孫弘. 漢武帝때 內史·御史大夫를 역임하였으며, 기원전 124년 丞相이 되고 平津侯에 봉해졌다. 항상 검소하게 布衣를 입고 지내어 ‘公孫布被’라 했으며, 자기 집의 東閣을 개방하고 빈객을 맞아들여 정치를 자문하였다. 淮南王·衡山王이 반란을 일으키자 책임을 지고 사임하려 했으나 받아들이지 않아 유임하였으며 그 이듬해 병사하였다.
▲ 主父偃 : 齊 임치현 사람으로 종횡가의 학술을 익혔으나 중용되지 못하자 漢武帝에게 상소한 것이 인정을 받아 낭중이 된 후 1년 만에 중대부로 승진하였다. 남의 비밀을 폭로하기 좋아하므로 대신들이 두려워하여 뇌물을 바쳤으며, 齊 재상이 된 후 주보언이 齊王 유차경이 기옹주와 간통한 사실을 황제에게 간한 것으로 인해 일족이 멸족되었다.
제53편 <南越列傳>
漢既平中國,而佗能集楊越以保南藩,納貢職。
한나라가 중원을 평정하자 趙佗는 楊越을 안정시키고 남방의 속국의 땅을 보호하고 한나라에 조공하였다.
作南越列傳第五十三。
제53편 南越列傳을 지었다.
▲ 集 : 輯과 통하여 안정시키다.
▲ 南越列傳 : 남월왕 趙佗가 남월을 건국하여 4대를 계승한 역사적 기록과 그간의 한나라와의 관계 및 漢武帝가 남월을 공략하여 멸망시켜 한나라 조정이 직접 통치하게 된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越은 중국 浙江·福建·江西·廣東省에서 베트남 북부에 이르는 지역의 옛 이름으로 於越·閩越·楊越·南越·駱越 등 많은 소수민족들의 총칭이다. 南越은 趙佗가 초대 왕이었으며, 조타는 秦 말기 혼란기에 龍川縣令이었는데 남해군위가 되어 남해군과 그 주변 지역을 병합하고 秦의 멸망과 함께 桂林郡과 象郡의 2군을 합쳐 南越國을 창건하고 武王이라 칭하였다.
제54편 <東越列傳>
吳之叛逆,甌人斬濞,葆守封禺為臣。
吳가 난을 일으켰을 때 東甌 사람들이 오왕 劉濞를 죽이고 封山과 禺山을 굳게 지키면서 한나라의 신하가 되었다.
作東越列傳第五十四。
제54편 東越列傳을 지었다.
▲ 葆(보) : 保와 통한다. 보전하다.
▲ 甌人斬濞 : 孝景帝 3년(기원전 154년)에 吳王 劉濞가 반란을 일으키고, 민월을 반란에 동참시키려고 했으나 민월은 동조하지 않았고, 단지 東甌만이 오왕 유비의 반란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吳가 패전하자 동구는 한나라에게 금전을 받고 매수되어 丹徒에서 오왕 유비를 살해하였다. <사기 권106. 오왕비열전>
▲ 東越列傳 : 동월의 변천사를 기록한 것으로 東越은 東甌라고도 하며 閩越과 東甌 등 현재의 福建省과 절강성 남부에 거주하였던 越族의 일파이다. 秦 말기에서 한나라 초에 민월국과 동해국이 동월로 바뀌었다.
제55편 <朝鮮列傳>
燕丹散亂遼閒,滿收其亡民,厥聚海東,以集真藩,葆塞為外臣。
燕 태자 丹이 요동 일대로 흩어지자 衛滿은 망명자들을 거두어 海東에 집결시켜 真藩 등을 안정시키고, 변방을 지키면서 外臣이 되었다.
作朝鮮列傳第五十五。
제55편 朝鮮列傳을 지었다.
▲ 燕丹散亂遼閒 : 秦王 政은 형가의 암살 사건을 계기로 燕을 상대로 대규모 전쟁을 시작한다. 10개월 만에 燕의 수도가 함락되고 燕王 喜와 태자 丹은 요동으로 도망하였다. <사기 권34. 燕召公世家>
▲ 集 : 輯과 통하여 안정시키다.
▲ 外臣 : 속국의 군주.
▲ 朝鮮列傳 : 西漢 前期의 衛滿朝鮮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 燕 출신의 위만이 漢高祖 말기에 古朝鮮으로 도망하여 위만조선을 세웠다. 漢惠帝 3년(기원전 193년) 한나라가 이를 승인하였으며, 漢武帝 元封 2년(기원전 109년) 사신 涉何가 古朝鮮軍에 살해됨을 빌미로 한나라가 대대적으로 위만조선을 침공하였다. 한나라와의 1년간의 전쟁 끝에 내분이 발생, 위만의 손자이자 고조선의 마지막 왕인 우거왕이 살해되고, 성기가 주살당하면서 왕검성이 함락되어 기원전 108년에 멸망하고 그 땅에 낙랑, 현토, 진번, 임둔의 한사군이 설치되었다.
제56편 <西南夷列傳>
唐蒙使略通夜郎,而邛笮之君請為內臣受吏。
唐蒙이 사신이 되어 夜郎과의 교통로를 개통하니 邛과 笮 부족의 우두머리들이 한나라 조정의 신하가 되어 관리를 파견하기를 청하였다.
作西南夷列傳第五十六。
제56편 西南夷列傳을 지었다.
▲ 唐蒙 : 남월에 파견한 파양현령. 唐蒙이 야랑의 존재를 촉 상인에게 듣고 야랑 정복을 제안하였다. 곧 야랑을 복속시켜 한나라의 군현으로 편입하고 그 길을 통해 남월을 공격하자는 것이었다. 무제는 당몽을 낭중장으로 삼고 夜郎으로 보냈고, 당몽이 야랑후 多同을 만나 야량이 한나라에 귀속하게 하였다.
▲ 略 : 경영하다. 다스리다.
▲ 通 : 개통하다.
▲ 內臣 : 한나라 조정의 신하.
▲ 請吏 : 한나라 조정에서 파견한 관리의 관할이 되기를 청함.
▲ 邛 : 고대 부족명. 지금의 사천성 西昌市 동남 일대
▲ 筰 : 고대 부족명.
▲ 西南夷列傳 : 중국의 서남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소수 민족인 西南夷의 위치와 풍속 등에 대하여 기록했으며, 漢武帝에 이르러 이들을 평정하는 과정을 기록하였다. 그 가운데 비교적 큰 것이 夜郞과 滇이었다. 이들 민족의 발전은 다 같지 않았으나, 그 가운데 滇이 한문화의 영향을 받아 비교적 발달하였다. 이들은 남월과 인도로 왕래하고 있었는데, 무제 때 唐蒙을 야랑에 파견하자 야랑은 한나라에 예속되어 이곳에 군을 두게 되었다. 또 司馬相如를 보내 이곳을 한나라의 속군에 편입시켜 서남 지방이 모두 한나라의 수중에 들어왔다.
제57편 <司馬相如列傳>
子虛之事,大人賦說,靡麗多誇,然其指風諫,歸於無為。
사마상여가 지은 <子虛賦>와 <大人賦>는 군주를 기쁘게 하였고, 문장이 화려하고 과장된 부분이 많지만 그 요지는 풍간하여 無為의 정치로 돌아가자는 뜻이었다.
作司馬相如列傳第五十七。
제57편 司馬相如列傳을 지었다.
▲ 指 : 旨와 같다. 요지. 의도.
▲ 風諫 : 諷諫. 風은 諷과 통한다. 완곡히 타이르다.
▲ 司馬相如 : 字는 長卿이며 四川省 成都 출신이다. 전국시대 명재상인 藺相如를 흠모하여 相如로 이름을 바꿨다. 어렸을 때 독서와 격검을 좋아했으며 이십 여세 때 한경제의 경위인 武騎常侍가 되었다. 임공현의 부자인 卓王孫의 딸 文君과 결혼하여 부유하게 되었다. ‘子虛賦’로 무제의 칭송을 받고 부름을 받아 중랑장이 되어 愼과 夜郎에 부임하여 서남의 蠻夷 땅에서 공적을 올렸다. 사마상여열전에서는 사마상여의 작품 중 〈子虛賦〉, 〈上林賦〉, 〈大人賦〉 등을 소개하였다.
▲ 子虛賦 : 司馬相如가 천자의 덕을 찬양하여 지은 游獵賦는 〈子虛賦〉와 〈上林賦〉를 합친 것이다. 자허부는 子虛와 烏有先生과 無是公이 서로 문답한 내용을 실었는데, 子虛는 ‘비었다’는 뜻이며, 烏有는 ‘어찌 이러한 일이 있겠느냐?’는 뜻이고, 無是는 ‘이러한 사람은 없다.’라는 뜻으로 모두 가공인물이며 군주에게 사냥을 삼가라고 충고한 것이다.
▲ 大人賦 : 漢武帝가 신선사상을 좋아함을 보고 사마상여가 지은 賦이다. 대인은 君王을 말하며 군왕이 구름과 용의 수레를 타고 신선의 세계를 노니는 모습을 화려한 필치로 풍자한 부이다. 풍부한 상상의 세계를 표현하였으며 문장이 난해하고 화려하게 道家 사상을 펼친 내용이다. 이는 列子의 주목왕편에서 周穆王이 서극의 나라를 유람하는 것을 연상케 한다.
제58편 <淮南衡山列傳>
黥布叛逆,子長國之,以填江淮之南,安剽楚庶民。
黥布가 반역하자 아들 劉長이 그 나라를 받아 장강과 회수 남쪽을 평정했으며, 劉安은 사나운 楚 지역의 백성들을 다독거렸다.
作淮南衡山列傳第五十八。
제58편 淮南衡山列傳을 지었다.
▲ 黥布叛逆 : 高帝 11년(기원전 196년), 회남왕 영포가 반란을 일으켰다. 劉長이 영포를 대신하여 회남왕에 봉해졌다
▲ 國之 : 나라를 이어 받아 국왕이 되다.
▲ 淮南衡山列傳 : 淮南 厲王 劉長과 그의 아들인 淮南王 劉安, 衡山王 劉賜의 合傳이다.
▲ 劉長 : 회남 여왕 유장은 한고조의 서얼 막내였으며, 漢文帝와는 아버지가 같고 어머니가 다른 형제지간이다. 고제 11년(기원전 196년), 회남왕 영포가 반란을 일으켰고, 유장은 영포를 대신하여 회남왕에 봉해졌다. 유장은 장성하여 솥을 들어 올릴 정도로 힘이 셌으며, 문제가 즉위한 후 유장은 자신이 문제와 가장 친밀한 황족임을 들먹여 교만해지고 법을 어기는 경우가 많았다. 회남 여왕 23년(기원전 174년), 유장은 시기 등과 반란을 획책하다가 발각되었으나, 文帝는 유장의 목숨을 살려주는 대신 봉국을 빼앗고 蜀郡으로 유배시켰다. 유장은 유배 가는 도중에 굶어 죽었다.
▲ 劉安 : 淮南王 劉安 漢高祖의 손자이며 淮南 厲王 劉長의 아들이다. 독서와 거문고를 좋아했으며 즉위 후 백성들을 잘 다스려 명망이 높았다. 많은 文士들을 초치하여 <淮南子>를 짓게 하였으니, 회남자는 內篇 21편과 外篇을 만들고 中篇 8권에서 道家의 煙丹藥法을 써 藝文을 즐기던 武帝가 상을 주고 秘藏하였다. 유안은 田蚡에게 회유되어 모반을 꾀하다 俉被의 고발로 무제가 대노하여 宗正을 시켜 탄핵함에 자살하였다.
형산왕 衡山王 劉賜는 회남 여왕 유장의 셋째 아들로 廬江王과 衡山王을 지냈다.
▲ 劉賜 : 漢文帝는 동생인 회남 여왕을 죽였다는 비난이 두려워 淮南國을 셋으로 나누어 劉長의 세 아들에게 나누어주고 왕으로 삼았다. 劉安이 淮南王이 되고, 劉勃은 衡山王이 되었으며, 劉賜가 廬江王이 되었다. 景帝 3년(기원전 154년), 오초칠국의 난이 일어나면서 여강왕 유사는 이에 가담하지 않아 유발의 옛 제후국인 형산국을 이어 받아 형산왕이 되었다. 武帝 元狩 원년(서기전 122년) 형산왕 유사의 寵姬 徐來가 태자 劉爽을 모함해 태자를 폐위하고 동생 劉孝를 태자로 세우려고 하자 유상은 아버지와 동생이 逆謀를 꾀한다고 고발하여 조정에서 형산왕 유사를 심문하려 하자 자살하였다.
제59편 <循吏列傳>
奉法循理之吏,不伐功矜能,百姓無稱,亦無過行。
법을 받들고 이치에 따라 일하는 관리들은 자신들의 공로와 능력을 뽐내지 않으며, 백성들이 그들을 칭찬하지도 않지만 스스로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
作循吏列傳第五十九。
제59편 循吏列傳을 지었다.
▲ 循吏列傳 : 춘추전국시대의 선량한 관리 다섯 명의 사적을 기록한 것이다. 循吏란 법을 잘 지키는 선량한 관리를 말하며 다섯 명 중 네 명은 재상이며 한 명은 법관이다. 사마천은 “孫叔敖는 한마디의 말로써 郢都의 시장 질서를 회복시켰다. 鄭子産이 병으로 죽자 鄭 백성들은 목 놓아 슬피 울었다. 公儀休는 집안에서 좋은 베를 짜는 것을 보고 베 짜는 아낙네를 내쫓았다. 石奢는 자기 아버지를 놓아주고 자결함으로써 楚昭王의 대의명분을 세워주었다. 李離는 판결을 잘못 내려 사람을 죽이자 칼로 자결함으로써 晋文公이 국법을 바로잡을 수 있게 하였다.”라고 평하였다.
제60편 <汲鄭列傳>
正衣冠立於朝廷,而群臣莫敢言浮說,長孺矜焉;
好薦人,稱長者,壯有溉。
옷매무새를 반듯하게 하고 조정에 서면 신하들이 감히 허튼소리를 못 꺼냈는데, 汲黯에게 그런 엄숙함이 있었다.
인재를 추천하길 좋아하여 長者라는 칭찬을 들었는데, 鄭當時에게 바로 그런 기개가 있었다.
作汲鄭列傳第六十。
제60편 汲鄭列傳을 지었다.
▲ 矜 : 근엄하다.
▲ 溉 : 기개.
▲ 汲黯 : 前漢의 관료로 자는 長儒이며 濮陽縣 사람이다. 漢나라 景帝와 武帝 때 太子洗馬와 主爵都尉 등을 지냈다. 그는 황제 앞에서도 직언을 서슴지 않았으며, 黃老之道와 무위의 정치를 주장했으나 황제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자, 회양태수를 마지막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 鄭當時 : 前漢 淮陽陳 사람으로 자는 莊이다. 景帝 때 太子舍人이 되었다. 黃老의 학술을 좋아했고, 사귀는 사람은 모두 천하의 명사들이었다. 武帝가 즉위하자 濟南太守와 江都相을 맡았고, 大司農으로 옮겼다. 사람됨이 청렴하고 행동이 깨끗했으며, 인재를 추천하기를 좋아하였다. 나중에 죄를 지어 속죄금을 내고 庶人이 되었다. 얼마 뒤 丞相長史에 임명되었다가 汝南太守로 옮겼다가 재직 중 죽었는데 집안에 가산이 전혀 없었다.
제61편 <儒林列傳>
自孔子卒,京師莫崇庠序,唯建元元狩之閒,文辭粲如也。
공자가 세상을 떠난 후 조정에서는 학교 교육을 중시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漢武帝 建元에서 元狩에 이르는 동안 교육사업이 선명히 빛났다.
作儒林列傳第六十一。
제61편 儒林列傳을 지었다.
▲ 庠序 : 학교. 庠은 은나라와 주나라 때의 鄕學.
▲ 建元元狩 : 建元은 漢武帝의 첫 번째 연호(기원전 140~135년). 원수는 漢武帝의 네 번째 연호(기원전 122년~117년).
▲ 粲如 : 선명하다. 밝다.
▲ 儒林列傳은 前漢 때 儒學의 발전과정과 다수의 유학자들에 대한 전기이다. 儒林은 ‘孔子를 숭상하고 유교를 따르는 사람들’이란 뜻으로 漢武帝가 유학에 깊은 관심을 가져 五經博士‧博士祭酒를 신설하여 유학자들을 우대함으로써 유학이 융성하기 시작하였다. 유림열전에서는 유학의 발전과정을 설명하고, 유학을 발전시킨 인물들에 대한 전기로 사마천이 기술한 주요 인물로는 申公, 王臧, 趙綰, 轅固生, 韓嬰, 伏生, 董仲舒, 胡毋生 등이다.
제62편 <酷吏列傳>
民倍本多巧,姦軌弄法,善人不能化,唯一切嚴削為能齊之。
백성이 본분을 버리고 매우 교활해지며, 속임수를 쓰는 죄를 범하며 법을 우롱하니, 善人은 그들을 교화시킬 수 없어서, 오직 모든 것을 엄격한 형벌로 다스려 바로잡으려 하였다.
作酷吏列傳第六十二。
제62편 酷吏列傳을 지었다.
▲ 倍本多巧 : 본분을 배반하고 매우 교활해짐. 倍는 背와 통한다.
▲ 姦軌 : 법을 위반하여 나쁜 짓을 함.
▲ 酷吏列傳 : 西漢 전기에 가혹한 형벌과 준엄한 법률을 통치 도구로 삼았던 포악한 관리 10명의 전기이며, 혹리로 열거한 사람은 郅都, 寧成, 周陽由, 趙禹, 張湯, 義縱, 王溫舒, 尹齊, 減宣, 杜周 등이다. 사마천은 “여기에서 열거한 10명 중에 청렴결백한 자들은 족히 사람들의 모범이 될 만하고, 탐관오리는 족히 사람들의 경계로 삼을 만하다. 그들의 세운 계획과 책략은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고 간교함과 사악함을 금지시키게 만들고, 일체의 행위가 모두 점잖고 예의가 바르며 교화와 형벌을 더불어 베풀었다. 법을 집행함에 비록 잔혹했어도 그 직무에 걸맞은 것이었다.”라고 평하였다.
제63편 <大宛列傳>
漢既通使大夏,而西極遠蠻引領內鄉,欲觀中國。
한나라가 사신을 大夏로 보내 왕래하게 하니 서쪽 끝 먼 만족들이 중원을 향해 목을 길게 뺀 채 중원의 문화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作大宛列傳第六十三。
제63편 大宛列傳을 지었다.
▲ 引領 : 목을 길게 빼다.
▲ 大宛列傳 : 西域 여러 나라의 역사적 기록에 대한 전기이다. 大宛(dà yuān)은 일반적으로 파미르고원 바로 서쪽에 위치한 페르가나(Ferghana) 지방을 지칭하며, 張騫은 한나라 때 여행가이자 외교관으로 탁월한 탐험으로 실크로드의 개척에 중대하게 공헌하였다. 이 편에서는 장건이 서역을 탐험하여 서역으로 가는 도로를 개척한 내용을 위주로 서역의 여러 나라의 사적을 기록하고 있다.
제64편 <游俠列傳>
救人於緦振人不贍,仁者有乎;
不既信,不倍言,義者有取焉。
곤경에 처한 사람을 구하고 빈곤한 사람을 구제하는 일은 어진 사람의 자세이며,
믿음을 잃지 않고 약속을 저버리지 않음은 의로운 사람이 취하는 행동이다.
作游俠列傳第六十四。
제64편 游俠列傳을 지었다.
▲ 緦 : 가는 삼베. 喪服.
▲ 振 : 賑과 같다. 구제하다.
▲ 不贍 : 살림이 넉넉지 못함.
▲ 游俠列傳 : 한나라 때 저명한 俠客인 朱家, 劇孟, 郭解 등에 관한 전기이다. 사마천은 遊俠은 믿음이 있고 결정에 과감하며 약속에 성실하고 남을 위해 생사를 돌보지 않고 자신의 능력이나 공덕을 과시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또한 협객을 鄕谷之俠, 布衣之俠, 閭巷之俠으로 분류하여 논하였으며, 협객으로 한나라 때의 朱家, 田仲, 王公, 劇孟, 郭解 등을 소개하면서 그중 같은 시대에 살았던 郭解에 대해 중점적으로 기록하였다.
제65편 <佞幸列傳>
夫事人君能說主耳目,和主顏色,而獲親近,非獨色愛,能亦各有所長。
군주를 모시며 군주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하고 안색을 편안하게 만들어서, 친근한 감정을 얻어내니, 그저 미모만 가지고 총애를 얻음이 아니라 각자의 장점이 있었다.
作佞幸列傳第六十五。
제65편 佞幸列傳을 지었다.
▲ 佞幸列傳 : 한나라 때 佞臣이었던 鄧通, 韓嫣, 李延年 등의 合傳이다. 佞幸은 아양을 떨어 얻게 된 총애를 말하며, 아첨하는 자 또는 宦官을 총칭하여 말하기도 한다. 사마천은 高祖로부터 文帝, 景帝, 武帝에 이르기까지의 미색으로 인하여 총애를 받은 영신들에 대하여 간략히 평가하였다.
제66편 <滑稽列傳>
不流世俗,不爭埶利,上下無所凝滯,人莫之害,以道之用。
세속에 휩쓸리지 않고 권세와 이익을 다투지 않으며, 위아래 어디와도 마찰을 일으키지 않으며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음은 그것을 道로써 행하였기 때문이다.
作滑稽列傳第六十六。
제66편 滑稽列傳을 지었다.
▲ 凝滯 : 막히거나 걸림.
▲ 滑稽列傳 : 익살스러운 말로 사람들을 감동시킨 사람들에 대한 일화를 열전으로 엮은 것이다. 사마천은 전국시대의 인물인 淳于髡, 優孟, 優旃에 대해 기록했으며, 후세에 前漢의 사학자인 褚少孫이 郭舍人, 東方朔, 東郭先生, 淳于髡, 王先生, 西門豹 등 여섯 명의 일화를 이 편에 덧붙여 놓으며 호사가들의 마음과 귀를 편하고 놀라게 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 중 순우곤은 중복되어 있다.
제67편 <日者列傳>
齊、楚、秦、趙為日者,各有俗所用。
齊·楚·秦·趙의 점쟁이들은 각자 풍속에 따라 점을 치는 방법이 달랐다.
欲循觀其大旨,作日者列傳第六十七。
그 대체적인 방법을 종합적으로 살펴보기 위해 제67편 日者列傳을 지었다.
▲ 日者 : 고대에 점쟁이를 말한다.
▲ 日者列傳 : 日者에 대한 전기이다. 日者는 고대에서 점쟁이를 말하며 음양학으로 길흉을 점치는 사람을 말한다.
이 편에서는 楚 사람인 司馬季主에 대한 내용으로 中大夫인 宋忠과 博士인 賈誼가 日者 司馬季主를 만나 점쟁이를 비판하자 사마계주가 이에 대해 반박을 하는 내용이 주된 내용이다. 褚少孫이 사마천의 유실된 기록을 보충한 것으로 전해지며 저소손은 일자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기록하였다.
제68편 <龜策列傳>
三王不同龜,四夷各異卜,然各以決吉凶。
하, 은, 주 삼대의 군주는 거북점을 치는 방법이 다 달랐으며, 사방의 이민족들도 점치는 방법이 각자 달랐으나 모두 그것으로 길흉화복을 판단하였다.
略闚其要,作龜策列傳第六十八。
대략적으로 그 요지를 엿보려고 제68편 龜策列傳을 지었다.
▲ 三王 : 夏, 殷, 周의 3대 군왕.
▲ 龜 : 龜甲으로 길흉을 점치다.
▲ 龜策列傳 :占術에 대한 기록으로 龜策은 고대에 거북이의 등껍질과 蓍草로 점을 치는 것을 말한다. 蓍草는 가새풀로 점을 치는 데 사용한 것을 말하며 후에는 대나무를 깎아 시초 대신 점을 쳤으므로 筮竹이란 말이 생기게 되었다.
卜筮는 禮記 曲禮上에 “龜甲으로 길흉을 점치는 것을 卜이라 하고, 蓍草로 길흉을 점치는 것을 筮라 한다(龜爲卜,策爲筮)”라고 하였다.
제69편 <貨殖列傳>
布衣匹夫之人,不害於政,不妨百姓,取與以時而息財富,智者有采焉。
벼슬 없는 보통사람의 신분으로 정치를 방해하지 않고 백성들의 생활에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시기를 놓치지 않고 물건을 사고팔아 재산과 부를 늘렸으니,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이것으로부터 얻는 바가 있을 터이다.
作貨殖列傳第六十九。
제69편 貨殖列傳을 지었다.
▲ 布衣匹夫 : 벼슬 없는 보통사람.
▲ 取與 : 매매하다.
▲ 息 : 이자. 재산을 늘리다.
▲ 貨殖列傳 : 春秋時代 말기부터 한나라 초기까지 재산을 늘리는 활동에 걸출한 인물들에 대한 전기이다. 貨殖은 재산을 늘림을 말하며 상인을 말하기도 한다.
이 편에서는 사마천의 경제사상과 물질관을 피력하였으며 중국 각지의 지형과 산물 풍토를 기술하고, 春秋時代의 大商人으로 꼽히는 范蠡, 子贛, 白圭, 猗頓과 한나라 초기의 대상인인 卓氏, 程鄭, 孔氏, 任氏 등의 행적을 간략히 기술하였다.
제70편
維我漢繼五帝末流,接三代絕業。
우리 漢나라는 五帝의 유풍을 계승하였고, 三代의 중단된 대업을 이어받았다.
周道廢,秦撥去古文,焚滅詩書,故明堂石室金匱玉版圖籍散亂。
주나라의 도가 폐기되고, 秦은 고대의 문화서적을 훼손하고 <시경>과 <서경>을 불태웠으며, 이 때문에 명당과 석실과 금궤에 보관했던 옥판의 圖籍들이 어지럽게 흩어지고 말았다.
於是漢興,蕭何次律令,韓信申軍法,張蒼為章程,叔孫通定禮儀,則文學彬彬稍進,詩書往往閒出矣。
한나라가 일어남에 蕭何가 법령을 정비하고, 韓信이 군법을 분명하게 밝히고, 張蒼은 법규를 제정하고, 叔孫通은 의례를 정하니, 문학지사들이 적절하게 점차 등용되고 <시경>과 <서경>도 끊임없이 각지에서 나타나기에 이르렀다.
▲ 末流 : 遺風. 말세.
▲ 古文 : 고대 문화서적.
▲ 圖籍 : 지적도와 호적.
▲ 彬彬 : 너무 소박하지도 않고 너무 화려하지도 않아 정도가 아주 적절한 모양
▲ 稍 : 점차. 차츰.
自曹參薦蓋公言黃老,而賈生、晁錯明申、商,公孫弘以儒顯,百年之閒,天下遺文古事靡不畢集太史公。
曹參이 蓋公을 추천하여 황로사상을 강론하고, 賈誼와 晁錯는 申不害와 商鞅의 법가 학문을 밝히고, 공손홍은 유학으로 이름을 떨친 이래 100년 동안, 천하에 남아 있던 서적이나 고문서가 빠짐없이 태사공에게 수집되었다.
太史公仍父子相續纂其職。
태사공 직책은 부자가 상속하여 맡게 되었다.
曰:
「於戲!余維先人嘗掌斯事,顯於唐虞,至于周,復典之,故司馬氏世主天官。
至於余乎,欽念哉!欽念哉!」
아버지 태사공께서 말씀하셨다.
“아아! 내 선조께서 일찍부터 이 일을 주관하여 唐虞 때부터 이름이 났고, 주나라에서도 다시 그 일을 맡았으니 사마씨는 대대로 천문을 주관하였다.
이윽고 나에게 이르렀으니, 명심하라! 명심하라!”
▲ 蓋公 : 漢나라 초기의 학자이며 膠西사람으로 黃老學에 조예가 깊었다. 蓋公은 성명이 아니고 公은 그에 대한 존칭으로 이름을 전하지 않는 바, 蓋자는 姓이나 地名으로 쓸 경우에는 ‘합’으로 읽는다. <[史記列傳] 권80 樂毅列傳 >
▲ 靡 : 없다.
▲ 畢集 : 모두 집중하다.
▲ 仍 : 거듭.
▲ 纂 : 纘과 통하여 계승하다. 잇다.
▲ 於戲 : 嗚呼와 같다. 아. 어허.
▲ 唐虞 : 陶唐氏 堯와 有虞氏 舜을 말한다.
罔羅天下放失舊聞,王跡所興,原始察終,見盛觀衰,論考之行事,略推三代,錄秦漢,上記軒轅,下至于茲,著十二本紀,既科條之矣。
이에 천하에 흩어진 오랜 이야기들을 망라하여 제왕들이 일어나게 된 자취를 살폈는데, 그 처음과 끝을 탐구하고 그 흥망성쇠를 보되 사실에 근거하여 논하고 고찰하고, 삼대 이상은 간략하게 추정하고, 秦과 漢은 상세하게 기록하되, 위로는 황제 軒轅으로부터 아래로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12편의 本紀로 저술하였는데 조목별로 배열하였다.
▲ 科條之 : 종류 및 항목별로 배열하여 강목을 배치함.
并時異世,年差不明,作十表。
왕조가 다른데 같은 시기에 일어나고, 발생한 연대의 차이가 분명치 않은 사건들이 있으므로, 10편의 表를 지었다.
禮樂損益,律歷改易,兵權山川鬼神,天人之際,承敝通變,作八書。
예악의 증감, 율력의 개역, 병법의 권모술수와 산천의 귀신, 하늘과 인간과의 관계 등에 대해 그 성패와 변화를 살피기 위해 8편의 書를 지었다.
二十八宿環北辰,三十輻共一轂,運行無窮,輔拂股肱之臣配焉,忠信行道,以奉主上,作三十世家。
28宿의 별자리가 북극성을 중심으로 돌고, 수레바퀴살 30개가 바퀴통에 모여 끊임없이 돌고 도는 것에 제왕을 보필하는 팔다리와 같은 신하들을 빗대어, 충신으로서 도를 행하여 군주를 받드는 모습을 30편의 世家로 지었다.
扶義俶儻,不令己失時,立功名於天下,作七十列傳。
정의롭게 행동하고 자잘한 일에 매이지 않으면서 시기를 놓치지 않고, 천하에 공명을 세운 사람에 대해 70편의 列傳을 지었다.
▲ 二十八 : 중국에서 달의 공전주기가 27.32일이라는 것에 착안하여 적도대를 28개의 구역으로 나눈 것으로, 각 구역이 각각의 수이다. 星宿라고도 한다.
▲ 北辰 : 북극성.
▲ 輻 : 수레의 바퀴살.
▲ 轂 : 바퀴통, 수레바퀴.
▲ 股肱之臣 : 임금이 가장 믿고 중하게 여기는 신하를 말한다.
▲ 輔拂(보필) : 輔弼. 보좌하다. 拂(도울 ‘필’)은 弼과 통한다.
▲ 俶儻 : 倜傥(척당)과 통하여 호방하다. 뜻이 크고 기개가 있다.
凡百三十篇,五十二萬六千五百字,為太史公書。
총 130편에 526,500자를 太史公書라고 이름지었다.
序略,以拾遺補闕,成一家之言,厥協六經異傳,整齊百家雜語.
간략한 서문을 통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자료들을 모으고 빠진 곳을 보충하여 나름의 체계를 세우고, 아울러 6경과 주석을 단 서적으로 보충하였으며, 제자백가의 잡다한 학설을 정리하였다.
藏之名山,副在京師,俟後世聖人君子。
정본은 명산에 보관하고, 부본은 조정에 남겨 후세의 성인군자를 기다리겠다.
第七十。
이것으로 열전 제70편으로 삼는다.
▲ 拾遺補闕 : 빠진 글을 보충하고 부족함을 메우다.
▲ 一家之言 : 한 부분의 권위자로서 체계를 갖춘 학설이나 저술
▲ 六藝 : 六經을 말하며, <詩經>, <書經>, <禮記>, <易經>, <樂經>, <春秋> 등 여섯 종의 유가의 고대 경전을 가리킨다.
▲ 異傳 : 경전에 주석 또는 해석을 단 각종의 저작서.
▲ 名山 : 書府. 고대 제왕들의 서적을 보관하는 부서.
▲ 俟 : 기다리다. 대기하다.
太史公曰:
余述歷黃帝以來至太初而訖,百三十篇。
태사공은 말한다.
“내가 黃帝로부터 太初 연간에 이르기까지의 기술을 마치니 모두 130편이다.”
▲ 歷 : 이르다.
▲ 太初 : 漢武帝의 일곱 번째 연호(기원전 104년~101년).
▲ 訖 : 마치다. 다하다.
耽古樓主는 말한다.
올해 1월 상순에 사기를 해석하기 시작하여 <본기> 12권, <세가> 30권, <열전> 70권을 10월 하순에 마치니 대략 10개월이 걸렸다. 시작할 땐 마칠 날이 아득하였는데, 아! 眼慢手快로다.
<표> 10권과 <서> 8권은 해석하지 않았다. 023.10.27
다음 싸이트에서 해석의 도움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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