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世家

世家37-衛康叔世家(위강숙세가)

耽古樓主 2023. 6. 6. 23:14

이 편은 30世家 중 일곱 번째 편으로 周나라의 제후국인 衛의 흥망과정을 기록하였다. 衛는 주 周 武王의 동생 康叔을 시조로 하는 諸侯國이다. 무왕이 죽은 뒤 周公은 반란을 일으킨 殷나라의 遺民을 정벌하고 강숙을 은나라의 舊都인 朝歌에 封하여 나라 이름을 衛라 하였다.

西周말년 제8대 頃侯때 最盛期를 맞이하였고, 주나라의 幽王이 蠻族에게 살해되었을 때는 제11대 武公이 주나라 왕실을 도와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春秋時代에 이르러서는 齊·晉·宋·魯 등으로부터 압박을 받아 점차 쇠퇴하여 기원전600년에는 狄의 침략을 받아 한때 국토를 잃기도 하였다. 戰國時代에 이르러서는 강국인 秦·魏사이에 끼어 겨우 명맥을 유지하다가 기원전209년 제46대 君角때 秦의 2세황제에 의해 멸망하였다.

사마천은 太史公自序에서

“周公은 殷나라의 유민들을 거두어 叔封을 衛땅에 봉하며, 은나라의 혼란했던 상황을 타이르기 위해 <尙書>의 酒誥와 梓材를 예로 들어 훈계하였으며, 위공자 朔이 태어날 무렵에 衛는 기울어져 편치 못하였다. 위영공의 부인 男子가 태자 蒯聵를 미워하여 내쫓으니, 아들과 아버지가 명분이 뒤바뀌는 일이 벌어졌다. 주 왕실의 덕이 미미해지고, 전국의 열강들이 강해졌다. 衛는 소국으로 전락하여 角王 때까지 홀로 버틴 후에 망하였다. 저 ‘康誥’를 찬미하여 제7편 ‘衛世家’를 지었다.”

라고 하였다.

衛康叔名封,周武王同母少弟也。
衛康叔은 이름이 封이며, 주무왕과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동생이다.

其次尚有冉季,冉季最少。
그 밑으로 또 冉季가 있는데, 염계가 가장 어렸다.

▶ 衛康叔: 康叔封. 西周 때의 왕족. 衛의 國君으로 이름은 封이다. 武王과 어머니가 같은 형제이다. 처음에 康에 봉해졌다. 武庚의 난이 평정되자 周公이 殷나라의 옛 땅을 강숙에게 봉하여 은나라의 유민들을 관리하게 하였다. 나라 이름은 衛라고 하고 도읍을 朝歌로 하니 衛의 시조가 되었다.

 

武王已克殷紂,復以殷餘民封紂子武庚祿父,比諸侯,以奉其先祀勿絕。
무왕이 殷나라 紂王을 물리치고 다시 은나라의 유민에게 紂왕의 아들 武庚祿父를 봉하여 제후와 동등한 지위를 주고 은나라 선조의 제사가 끊어지지 않게 받들도록 하였다.
 
為武庚未集,恐其有賊心,武王乃令其弟管叔、蔡叔傅相武庚祿父,以和其民。
무경이 그래도 따르지 않자 그에게 반역을 일으킬 마음이 있을까 염려하여, 무왕은 동생 管叔과 蔡叔에게 무경녹보를 보좌하게 하여 그 백성을 화합시키도록 하였다.

▶ 武庚祿父: 商나라의 마지막 임금인 紂王의 아들로 商이 멸망한 뒤 商의 도읍이었던 殷에 머무르며 遺民들을 다스렸고, 周武王이 죽은 뒤에 周公이 成王을 대신해 攝政하자, 周公의 동생들인 管叔, 蔡叔, 霍叔과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 比: 대등하다.
▶ 集: 따르다.
▶ 傅相: 보좌하다.

 

武王既崩,成王少。
무왕이 세상을 뜨고 成王은 어렸다.
 
周公旦代成王治,當國。
周公旦이 성왕을 대신하여 나라를 맡아 다스렸다.
 
管叔、蔡叔疑周公,乃與武庚祿父作亂,欲攻成周。
管叔과 蔡叔은 주공을 의심하여 무경녹보와 함께 반란을 일으켜 成周를 공격하려고 하였다.
 
周公旦以成王命興師伐殷,殺武庚祿父、管叔,放蔡叔,以武庚殷餘民封康叔為衛君,居河、淇閒故商墟。
주공 단이 성왕의 명을 받아 군대를 일으켜 은나라를 정벌하여 무경녹보와 관숙을 죽이고 채숙은 추방했으며, 무경의 은나라 유민들에게 강숙을 봉해주어 그를 衛의 군주로 삼고, 黃河와 淇水사이 옛 상나라의 터를 관할하게 하였다.

▶ 成王: 주나라의 제2대 왕. 주무왕의 아들로 성은 姬, 이름은 誦이다. 주무왕이 역성혁명 후 불과 2년 만에 사망하자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성왕이 어렸으므로 무왕의 아우 周公 旦이 攝政하였다.
▶ 周公旦: 周나라 文王의 넷째 아들로 武王의 아우. 이름은 旦, 시호는 元.
▶ 當國: 국정을 맡아 다스리다.
▶ 成周: 周公 辅 成王 的兴盛时代。(주공이 성왕을 보필하여 흥성하였던 시대)
引汉 扬雄 《解嘲》:“有建 娄敬 之策於 成周 之世,则繆矣。”
唐 陈陶 《闲居杂兴》诗之二:“一顾 成周 力有餘,白云闲钓五溪鱼。”
傅尃 《变雅楼三十年诗征序》:“夫《关雎》始《风》,《清庙》始《颂》,《鹿鸣》始《小雅》,《文王》始《大雅》,拨乱返正,而多士翕化,思进进善,而天下向风, 成周 之盛,虨乎备矣。”



周公旦懼康叔齒少,乃申告康叔曰:
「必求殷之賢人君子長者,問其先殷所以興,所以亡,而務愛民。」
주공 단은 康叔이 나이가 어림을 걱정하여 거듭 강숙에게 훈계하였다.
“너는 반드시 은나라의 현인과 군자와 장자를 찾아 그들의 선조인 은나라가 흥하고 망한 까닭을 묻고 백성을 사랑하는 데 힘을 써야 한다.”

告以紂所以亡者以淫於酒,酒之失,婦人是用,故紂之亂自此始。
紂왕이 망한 까닭이 지나친 음주로 정치를 그르치고 여자 말만 들었기 때문에 주왕의 혼란이 그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훈계하였다.

為梓材,示君子可法則。
주공은 ‘梓材’를 지어 군자가 따라야 할 도리를 보여주었다.

故謂之《康誥》、《酒誥》、《梓材》以命之。
주공은 이에 따라 <康誥>, <酒誥>, <梓材>라는 이름의 글을 지어 가르쳤다.

康叔之國,既以此命,能和集其民,民大說。
강숙이 봉국으로 가서 이 가르침을 실천하여 백성을 화합시키고 안정시키니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 申: 거듭. 되풀이하여.
▶ 梓材: 尙書의 편명. 자재는 가래나무로 된 재목이라는 뜻이며 무왕이 강숙에게 사람을 가래나무가 재목이 되도록 다스리라고 충고한 글이다. 梓는 목수.
▶ 示: 보여주다.
▶ 康誥: <書經>周書의 篇名. 誥는 제왕이 백성에게 고하거나, 관리를 임명하는 데 쓴 문체로 周나라 때 백성에게 고하여 가르치는 문서인<尙書>의 盤庚·大誥·康誥·酒誥·召誥·洛誥등을 말한다.
▶ 酒誥: 尙書의 편명. 주공이 강숙을 衛의 제후로 봉하였을 때 성왕의 훈시와 말을 대신하여 들려준 것으로 술을 삼갈 것을 말하였다.
▶ 誥: 훈계하고 면려하는 글.
▶ 命: 가르치다. 지도하다.
▶ 說: 悦과 통용된다.



成王長,用事,舉康叔為周司寇,賜衛寶祭器,以章有德。
성왕이 장성하여 정사를 보게 되자, 강숙을 주나라의 司寇로 임명하고 衛에는 보물과 祭器를 내려 그 덕을 널리 드러냈다.

▶ 用事: 권력을 장악하다.
▶ 章: 드러내다.

康叔卒,子康伯代立。
강숙이 죽고, 아들 康伯이 뒤를 이었다.

康伯卒,子考伯立。
강백이 죽고, 아들 考伯이 즉위하였다.

考伯卒,子嗣伯立。
고백이 죽고, 아들 嗣伯이 즉위하였다.

嗣伯卒,子偼伯立。
사백이 죽고, 아들 𢈻伯이 즉위하였다.

偼伯卒,子靖伯立。
첩백이 죽고, 아들 靖伯이 즉위하였다.

靖伯卒,子貞伯立。
정백이 죽고, 아들 貞伯이 즉위하였다.

貞伯卒,子頃侯立。
정백이 죽고, 아들 頃侯가 즉위하였다.

頃侯厚賂周夷王,夷王命衛為侯。
頃侯는 주夷王에게 많은 뇌물을 바쳤고, 이왕은 衛를 侯로 칭할 것을 명하였다.

頃侯立十二年卒,子釐侯立。
경후는 재위12년 만에 죽고, 아들 釐侯가 즉위하였다.
 
釐侯十三年,周厲王出奔于彘,共和行政焉。
희후13년(기원전841년), 주厲王이 彘로 도망치고 공화정이 시작되었다.
 
二十八年,周宣王立。
희후28년(기원전827년), 주宣王이 즉위했다

▶ 周厲王: 춘추시대 周나라의 國君. 성은 姬씨고, 이름은 胡다. 夷王의 아들이고, 周穆王의 4대손이다.
▶ 共和: 周厲王이 國人暴動으로 쫓겨나고 召公과 周公이 공동으로 왕을 대신하여 執政하던 시기를 뜻하며, 왕이 없이 정치가 이루어지는 ‘共和制’란 말이 여기에 기원한다. 기원전841년~기원전828년. <사기 본기 권04. 주본기>

 

四十二年,釐侯卒,太子共伯餘立為君。
희후42년(기원전813년), 희후가 죽고 태자 共伯餘가 군주로 즉위하였다.
 
共伯弟和有寵於釐侯,多予之賂;
和以其賂賂士,以襲攻共伯於墓上,共伯入釐侯羨自殺。
공백의 동생인 和는 희후의 총애를 받아 희후가 많은 재물을 주었는데, 和는 그 재물을 무사들에게 뇌물로 주어 공백을 희후의 묘지에서 습격하니, 공백은 희후의 무덤 길로 들어가 자살하였다.
 
衛人因葬之釐侯旁,謚曰共伯,而立和為衛侯,是為武公。
衛 사람들이 희후의 묘 옆에 매장을 하고, 諡號를 共伯이라 하였으며, 和를 衛의 제후로 옹립하니 그가 武公이다.

▶ 多予之賂: 많은 재물을 주다. 賂는 재물.
▶ 賂賂: 재물을 뇌물로 주다.
▶ 羨: 墓道. 무덤으로 통하는 길.

 

武公即位,修康叔之政,百姓和集。
무공은 즉위 후 康叔의 정치를 행하고 백성을 화합시켰다.
 
四十二年,犬戎殺周幽王,武公將兵往佐周平戎,甚有功,周平王命武公為公。
무공42년(기원전771년), 犬戎이 주幽王을 죽이자, 무공은 군대를 이끌고 가서 주나라를 도와 견융을 평정하는데 큰 공을 세워 주平王이 무공을 公으로 칭하도록 하였다.
 
五十五年,卒,子莊公揚立。
무공55년(기원전758년), 무공이 죽고 아들 莊公揚이 즉위하였다.

▶ 衛武公: 춘추시대 衛의 군주로 이름은 和이고 康叔의 9세손이다. 형 共伯을 죽이고 등극하였다. 犬戎이 周幽王을 죽이자 병사를 끌고 가 왕실을 도와 견융을 평정하는 공을 세웠다. 周平王의 명령으로 公이 되었다
▶ 周幽王: 주나라의 12대 왕. 애첩 褒似를 총애한 나머지 정비 申后와 그 소생인 태자 宜臼를 폐하고 포사와 그 소생 伯服을 정비와 태자에 책봉함으로써 申侯를 격분시켰고, 결국 견융과 신후의 연합 공격을 받고 사살되었다. <사기 권04. 주본기>
▶ 周平王命武公為公: 周나라 때까지만 하더라도 天子를 제외한 公, 侯, 伯, 子, 男의 5등작이 있었다. 5등작의 작위는 지위와 권력이 비슷했고 그저 예절상의 대우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었을 뿐이었다.

 

莊公五年,取齊女為夫人,好而無子。
장공5년(기원전753년), 齊 여자를 부인으로 맞이했는데 미인이었으나 아들이 없었다.
 
又取陳女為夫人,生子,蚤死。
장공은 또 陳의 여인을 부인으로 맞이하여 아들을 낳고 일찍 죽었다.
 
陳女女弟亦幸於莊公,而生子完。
陳女의 여동생도 장공의 총애를 받아 아들 完을 낳았다.
 
完母死,莊公令夫人齊女子之,立為太子。
완의 어머니가 죽자 장공은 부인인 齊女에게 完을 아들로 삼게 하고 태자로 세웠다.

▶ 衛莊公: 춘추시대 衛의 군주로 이름은 揚이고 武公의 아들이다.
▶ 取齊女為夫人: 위장공이 齊의 東宮得臣의 누이를 아내로 맞이하였으니 그녀가 莊姜이다. 取는 娶와 통하여 아내를 얻다. 장가들다. 
▶ 取陳女為夫人: 위장공이 또 陳에서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그가 厲嬀이다.
▶ 蚤: 早와 통용된다. 일찍



莊公有寵妾,生子州吁。
장공에게 또한 애첩이 있었는데 아들 州吁를 낳았다.
 
十八年,州吁長,好兵,莊公使將。
장공18년(기원전740년), 주우가 성장해서 兵事를 좋아하자, 장공이 그를 장군으로 삼았다.
 
石碏諫莊公曰:
「庶子好兵,使將,亂自此起。」
石碏이 장공에게 간언하였다.
“서자께서 兵事를 좋아한다 하여 장군을 시키면 그 때문에 난이 일어날 터입니다. ”
不聽。
장공은 듣지 않았다.
 
二十三年,莊公卒,太子完立,是為桓公。
장공23년(기원전735년), 장공이 죽고 태자 完이 즉위하니 그가 桓公이다.

▶ 州吁: 衛의 14대 군주가 되며 莊公의 아들이자 衛桓公의 동생이다. 위환공16년(기원전719)봄, 주우는 衛의 도망자들과 함께 환공을 습격하여 죽이고 스스로 衛의 군주가 되었다. 주우는 측근 石厚와 함께 陳에 붙잡혀 濮땅에서 처형되었다.

 

桓公二年,弟州吁驕奢,桓公絀之,州吁出奔。
환공2년(기원전733년), 동생 州吁가 교만하고 사치스러워 환공이 내쫓으려 하자 주우가 도망쳤다.
 
十三年,鄭伯弟段攻其兄,不勝,亡,而州吁求與之友。
환공13년(기원전722년), 鄭伯의 동생 段이 그의 형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도망치자 주우가 그에게 벗이 되길 청하였다.
 
十六年,州吁收聚衛亡人以襲殺桓公,州吁自立為衛君。
환공16년(기원전719년), 주우는 衛에서 도망쳐 온 사람들을 모아서 환공을 습격하여 죽이고 자신이 衛의 군주가 되었다.
 
為鄭伯弟段欲伐鄭,請宋、陳、蔡與俱,三國皆許州吁。
주우가 정백의 동생 단을 위하여 鄭을 공격하려고 宋, 陳, 蔡에 동참을 요청하자, 세 나라가 모두 주우의 청을 받아들였다.
 
州吁新立,好兵,弒桓公,衛人皆不愛。
주우가 새로 즉위하여 전쟁을 좋아하는 데다 환공을 시해했기 때문에 衛 백성은 모두 주우를 좋아하지 않았다.

▶ 絀: 黜과 통용된다. 쫓아내다.
▶ 鄭伯弟段: 鄭伯의 동생 段. 鄭武公의 아들이며 이름은 寤生이다. 鄭莊公의 동복아우로 어머니 武姜이 莊公을 미워하고 段을 편애하여 武公에게 段을 후계자로 세울 것을 여러 번 청하였으나 무공이 허락하지 않았다. 莊公이 즉위하자 장공과의 불화가 심해져 段이 마침내 반란을 획책하고 도성을 기습 공격할 것을 도모하였으나 장공은 鄢땅을 공격하여 마침내 段을 죽였다. <春秋左氏傳 魯隱公 元年>



石碏乃因桓公母家於陳,詳為善州吁。
石碏은 환공 어머니의 친정이 陳인 까닭에 주우와 잘 지내는 척하였다.
 
至鄭郊,石碏與陳侯共謀,使右宰丑進食,因殺州吁于濮,而迎桓公弟晉於邢而立之,是為宣公。
衛의 군대가 鄭의 교외에 이르자, 석작은 陳侯와 공모하여 右宰 로 하여금 먹을 것을 바치면서 濮에서 주우를 죽이도록 하고, 환공의 동생 晉을 邢에서 맞아들여 옹립하니 그가 宣公이다.

▶ 石碏: 春秋時代衛의 大夫. 衛莊公의 아들 州吁가 石碏의 아들 石厚와 어울려 다니다 환공을 죽이고 왕위를 차지하려 하였다. 주우가 환공을 시해하자 석작이 주우와 아들 석후를 죽이고 公子晉을 맞이하여 衛의 군주로 옹립하였. <춘추좌씨전 魯隱公 4년>
▶ 詳: 佯과 통용되어 가장하다.
▶ 右宰丑: 陳이 주우와 석후를 체포하고서 衛에 사람을 보내어 처리하기를 청하자 衛는 右宰丑를 보내 濮에서 주우를 죽이고, 석작이 宰獳羊肩을 보내 석후를 陳에서 죽였다. 右宰는 관직명이고, 丑는 衛의 신하 이름이다.
※大義滅親: 君臣의 의리를 앞세워 父子의 정을 단절하다.
衛의 현신 石碏이 昏君州吁와 작당해 온갖 간계를 일삼던 자신의 아들 石厚를 냉정히 처형하고 公子晉을 맞이하여 衛의 군주로 옹립시킨 일에 대한 고사성어이다. 즉, 대의를 위해서는 친족도 멸한다는 뜻으로, 국가나 사회의 대의를 위해서는 부모 형제의 정도 돌보지 않는다는 말이다.



宣公七年,魯弒其君隱公。
선공7년(기원전712년), 魯가 그들의 군주 隱公을 시해하였다.
 
九年,宋督弒其君殤公,及孔父。
선공9년(기원전710년), 宋의 華父督이 그의 군주 殤公과 대부 孔父嘉를 죽였다.
 
十年,晉曲沃莊伯弒其君哀侯。
선공10년(기원전709년), 晉 曲沃의 莊伯이 그의 군주 哀侯를 시해하였다.

▶ 宋督: 華督. 華父督. 춘추시대 宋戴公의 손자다. 太宰를 맡았다. 宋殤公 10년 大夫 孔父嘉를 살해한 뒤 그 아내를 취하였다. 다시 殤公을 시해한 뒤 鄭에 있던 公子馮을 데려다 宋莊公으로 세우고, 자신은 재상이 되었다. 閔公때 대부 南宮萬에게 살해당하였다.
▶ 晉曲沃莊伯弒其君哀侯: 晉世家와 기록이 다르다. 曲沃 莊伯은 진 곡옥의 제2대 백작으로 곡옥 환숙의 아들이다. 晉世家에는 효후15년에 곡옥 장백이 국군 효후를 익성에서 시해하였고, 소자 원년에 곡옥 曲沃 武公이 韓萬을 시켜 포로로 잡힌 애후를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十八年,初,宣公愛夫人夷姜,夷姜生子伋,以為太子,而令右公子傅之。
선공18년(기원전701년), 당초 선공이 총애하던 부인 夷姜이 아들 伋을 낳자 태자로 삼고, 右公子로 하여금 가르치게 하였다.
 
右公子為太子取齊女,未入室,而宣公見所欲為太子婦者好,說而自取之,更為太子取他女。
우공자가 태자를 위해 齊女를 아내로 맞게 했는데, 혼례를 치르기 전에 선공이 태자비로 삼고자 하는 여자의 미모를 보고 기뻐하며 자신의 아내로 맞이하고, 다시 태자는 다른 여자를 娶妻하게 하였다.
 
宣公得齊女,生子壽、子朔,令左公子傅之。
선공은 齊女를 얻어서 아들 壽와 朔를 낳자 左公子에게 가르치게 하였다.

▶ 衛宣公: 춘추시대 衛의 군주로 이름은 晉이고, 桓公의 동생이다. 형 환공이 공자 주우에게 살해당하자, 공자 주우를 죽인 석작에 의하여 15대 군주로 옹립되었다. 아버지 衛莊公의 첩 夷姜과 사통하여 낳은 아들 급을 태자로 삼았다. 齊女 선강을 세자 급의 비로 맞이하기로 하였는데 宣姜의 미모를 보고 반하여 자기가 차지해 아들 壽와 朔을 낳았다. 이강은 총애를 잃자 자살하였으며, 부인 宣姜과 公子삭의 참언을 듣고 공자급을 제에 가게 한 뒤 자객을 시켜 변방에서 살해하였다. 그리고 삭을 태자로 앉혔다. 19년 동안 재위하였다.
▶ 夷姜: 선공의 아버지 衛莊公의 첩. 선공은 이강과 사통하여 아들을 낳자 이름을 伋이라 하였다. 뒤에 이강을 정실 공비로 책봉하고 급을 세자로 삼았다
▶ 伋: 이강과 사통하여 낳은 아들. 이름을 伋 또는 急이라 한다.
▶ 右公子: 左右媵妾: 시녀의 아들이므로 좌우를 호칭으로 삼은 것이다.



太子伋母死,宣公正夫人與朔共讒惡太子伋。
태자 급의 어머니가 죽자 선공의 정부인 宣姜이 朔과 함께 태자 伋을 참소하며 헐뜯었다.
 
宣公自以其奪太子妻也,心惡太子,欲廢之。
선공은 태자의 아내가 될 여자를 빼앗은 뒤로 태자를 미워하며 태자를 폐위시키려 하였다.
 
及聞其惡,大怒,乃使太子伋於齊而令盜遮界上殺之,與太子白旄,而告界盜見持白旄者殺之。
태자를 나쁘게 말하는 것을 듣자 크게 노하여 태자 급을 齊로 보내면서 도적을 시켜 국경을 막고 죽이라고 하되, 태자에게 흰 깃발을 들도록 하고 국경의 도적에게는 흰 깃발을 가진 자를 보면 죽이라고 하였다.

▶ 太子伋母死: 宣公의 총애를 잃었으므로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 宣公正夫人: 宣姜을 말하며 삭의 어머니이다.
▶ 讒惡: 참소하며 헐뜯다. 惡는 헐뜯다. 중상하다.
▶ 心惡太子: 마음으로 태자를 미워하다. 惡는 미워하다.
▶ 及聞其惡: 태자 급에 대해 나쁘게 말하는 것을 듣다. 惡은 나쁘다.
▶ 白旄: 털이 긴 쇠꼬리를 장대 끝에 달아 놓은 旗로 使臣의 표지이다.



且行,子朔之兄壽,太子異母弟也,知朔之惡太子而君欲殺之,乃謂太子曰:
「界盜見太子白旄,即殺太子,太子可毋行。」
태자 급이 떠나려 할 때 朔의 형인 壽는 태자의 배다른 동생이었는데, 삭이 태자를 미워하여 군주가 태자를 죽이려 한다는 것을 알고 태자에게 말하였다.
“국경의 도적이 태자의 흰 깃발을 보면 바로 태자를 죽일 터이니 태자께서는 가시면 안 됩니다. ”
太子曰:
「逆父命求生,不可。」
태자가 말하였다.
“아버지의 명을 거역하고 살기를 바라서는 안 된다.”
遂行。
끝내 떠났다.
 
壽見太子不止,乃盜其白旄而先馳至界。
壽는 태자를 못 가게 할 수 없음을 알고, 흰 깃발을 훔쳐 먼저 국경으로 달려갔다.
 
界盜見其驗,即殺之。
국경의 도적은 그 표지를 보고는 곧바로 壽를 죽였다.
 
壽已死,而太子伋又至,謂盜曰:
「所當殺乃我也。」
壽가 죽고 나서 태자 급이 또 도착해서 도적에게 말하였다.
“죽여야 할 사람은 바로 나다. ”
盜并殺太子伋,以報宣公。
도적이 태자 급마저 죽이고 이를 선공에게 보고하였다.
宣公乃以子朔為太子。
선공은 이에 아들 朔을 태자로 삼았다.
 
十九年,宣公卒,太子朔立,是為惠公。
선공19년(기원전709년), 선공이 죽고 태자 삭이 즉위하니 그가 惠公이다.

▶ 乃盜其白旄而先馳至界: 출발에 임하여 壽가 伋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하고는 자신이 急의 旗를 수레에 싣고 먼저 가니 자객이 그를 죽였다. <東萊博議>
▶ 驗: 증거.
※二子乘舟: <詩經> 邶風에 실려 있는 시이다. 衛宣公이 아들 伋의 아내가 될 宣姜을 빼앗아 살며 壽와 朔 두 아들을 낳았는데, 선강이 급을 미워하자 위선공이 급을 제거하려고 齊에 사신으로 보내 도중에서 살해하려 하였다. 선강의 아들 壽는 착한 사람이라 급을 취하도록 술을 먹이고 자기가 사신으로 먼저 가서 죽으니, 급이 이를 알고 수를 구하러 갔다가 자기도 죽고 말았다. <史記>에서와는 달리 <詩經>에서는 배를 타고 떠난 것으로 노래하였다.
<詩經邶風二子乘舟>
二子乘舟, 汎汎其景。
願言思子, 中心養養。
二子乘舟, 汎汎其逝。
願言思子, 不瑕有害。

두 아들이 배를 타고 두둥실 떠가는 배 그림자.

아까운 아들을 생각하면 가슴 속 안타까워라.

두 아들이 배를 타고 두둥실 멀리 떠나가네.

아까운 아들을 생각하면 행여 피해입지 않을까 걱정이네.



 

 

左右公子不平朔之立也,惠公四年,左右公子怨惠公之讒殺前太子伋而代立,乃作亂,攻惠公,立太子伋之弟黔牟為君,惠公奔齊。
좌우 두 공자는 朔의 즉위에 대해 불만을 가졌다가, 혜공4년(기원전696년)에 좌우 두 공자가 혜공이 이전의 태자 伋을 헐뜯어 죽이고 대신 즉위한 것에 원한을 품고, 반란을 일으켜 혜공을 공격하고, 태자 급의 동생인 黔牟를 군주로 옹립하자 혜공은 齊로 달아났다.

▶ 左右公子: 좌우 媵(시녀)의 아들. 좌공자의 이름은 洩이며 우공자 이름은 職이다. 媵은 시집갈 때 데리고 가던 하인이나 몸종.
▶ 衛惠公: 춘추시대 衛의 군주로 이름은 朔이다. 위혜공4년 주변의 公子들이 혜공의 참언을 듣고 태자 伋을 살해한 것을 원망하여 공격하였고 급의 동생 黔牟를 옹립해 국군으로 삼았다. 혜공은 齊로 달아났다가 8년 만에 복위하였다.



衛君黔牟立八年,齊襄公率諸侯奉王命共伐衛,納衛惠公,誅左右公子。
衛의 군주 黔牟가 즉위한 지 8년(기원전689년)에 제襄公이 주나라 왕의 명을 받들어 제후들을 거느리고 衛를 정벌하여 위혜공을 衛로 돌려보내고 좌우 공자를 죽였다.
 
衛君黔牟奔于周,惠公復立。
衛의 군주 검모는 주나라로 달아났고, 혜공이 復位하였다.
 
惠公立三年出亡,亡八年復入,與前通年凡十三年矣。
혜공이 즉위 3년 만에 도망쳤다가 망명 8년 만에 돌아오니, 이전까지 합치면 13년인 셈이다.

▶ 黔牟: 춘추시대 衛군주. 宣公의 아들로 太子 伋의 동생이다. 태자 급이 참언으로 죽임을 당하고 선공이 죽자 태자 朔이 즉위했는데, 그가 惠公이다. 衛사람들이 혜공이 급을 참언해 죽인 것에 분노하여 혜공을 공격해 내쫓고 검모를 군주로 삼았다. 즉위한 지 8년 齊襄公이 제후들을 이끌고 왕명을 빌어 정벌하여 혜공을 衛로 돌려보내고 衛의 여러 公子들을 살해하였다. 검모는 周나라로 달아났다.
▶ 納衛惠公: 겨울에 衛를 토벌하였으니, 이는 衛惠公을 衛로 들여보내기 위해서였다. 納은 들여보내다.
<史記世家권33. 魯周公世家>

 

 

世家33-魯周公世家(노주공세가)

이 편은 30世家 중 세 번째 편으로 주나라의 개국공신인 周公 旦의 사적과 魯의 역사에 대하여 기록한 것이다. 魯는 周武王이 商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통일한 뒤 주공을 曲阜에 分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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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五年,惠公怨周之容舍黔牟,與燕伐周。
혜공25년(기원전675년), 혜공은 주나라가 검모의 체류를 허용한 것에 원망을 품고 燕과 함께 주나라를 공격하였다.
 
周惠王奔溫,衛、燕立惠王弟穨為王。
周惠王은 溫 땅으로 달아나고, 衛와 연은 주혜왕의 동생 頹를 왕으로 세웠다.
 
二十九年,鄭復納惠王。
혜공29년(기원전671년), 鄭이 周惠王을 다시 주나라로 돌려보냈다.
 
三十一年,惠公卒,子懿公赤立。
혜공31년(기원전669년), 혜공이 죽고 아들 懿公 赤이 즉위하였다.

▶ 容舍: 체류를 허용하다.
▶ 頹: 王子 頹. 동주의 비정통 왕이다. 子頹라고 칭하기도 한다. 주장왕의 서자로 주혜왕의 숙부이다. 장왕의 총애를 받아 혜왕 때 난을 일으켜 왕을 칭하였다. 혜왕 측이 한 번은 반란군을 소자의 영읍인 溫으로 쫓아냈으나, 연과 위 두 나라가 자퇴를 지원해 혜왕이 쫓겨났다. 혜왕은 온으로 피했고 鄭의 여공은 자신이 13년간 망명할 때의 근거지인 櫟에서 혜왕을 맞이하였다. 자퇴는 겨울에 주나라 왕으로 등극하였다. 혜왕4년(기원전673년), 정백이 괵숙과 협력해 자퇴와 그 일당 다섯 대부를 죽이고 혜왕을 복위시켰다.
<사기 권04. 周本紀-동주>

 

 

본기4. 周本紀2(주본기2)

召公、周公二相行政,號曰「共和」。 召公과 周公 두 재상이 정치를 다스린 것을 라고 불렀다. 共和十四年,厲王死于彘。 공화 14년(기원전 828년), 厲王이 彘에서 죽었다. 太子靜長於召公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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懿公即位,好鶴,淫樂奢侈。
懿公이 즉위한 후 학을 좋아하며, 음란하고 사치스러웠다.
 
九年,翟伐衛,衛懿公欲發兵,兵或畔。
의공9년(기원전660년), 翟이 衛를 침공하자 의공이 군사를 일으키려 했으나, 군사 중에 배반하는 자도 있었다.
 
大臣言曰:
「君好鶴,鶴可令擊翟。」
대신들이 말하였다.
“군주께서 학을 좋아하시니 학에게 翟을 공격하라고 명령하시오. ”
翟於是遂入,殺懿公。
적이 마침내 침입해 의공을 죽였다.

▶ 懿公: 衛懿公. 춘추시대 衛군주로 혜공이 죽자 그 뒤를 이어 衛의 18대 군주가 되었다. 사생활이 문란하고 사치하며 鶴을 좋아하여 3백 마리를 기르면서 학들을 대신들처럼 대우했으므로 인심을 잃었다. 翟이 쳐들어오자 병사를 일으켜 막으려 했으나 백성들은 징집을 거부하여 적에게 참패하고 살해당하였다. 翟은 위의공의 군대를 격파하고 도성마저 함몰하여, 衛는 멸망했다가 패자 제환공이 제후들을 회합하고 살아남은 衛의 유민들을 도와 초구를 새 서울로 삼아 부활시켰다.
▶ 翟: 고대 몽골민족의 北狄의 나라 이름. 춘추시대 지명이 鲜虞이며 후에 中山国이 되었다.
▶ 畔: 叛과 통용된다. 배반하다. 반역하다.
▶ 大臣言曰: 狄과 전쟁하려 할 때 갑옷을 받은 도성 안의 백성들이 모두
“학에게 싸우게 하라. ”
라고 하였다. <춘추좌씨전魯閔公2년>

 

懿公之立也,百姓大臣皆不服。
의공이 즉위하자 백성과 대신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다.
 
自懿公父惠公朔之讒殺太子伋代立至於懿公,常欲敗之,卒滅惠公之後而更立黔牟之弟昭伯頑之子申為君,是為戴公。
의공이 아버지인 惠公 朔이 태자 급을 헐뜯어 죽이고 대신 즉위한 이래 의공 때까지 늘 그들을 자리에서 내쫓으려고 했는데 마침내 혜공의 후손들을 멸하고 다시 검모의 아우 소백 頑의 아들 申을 군주로 세우니 그가 戴公이다.
 
戴公申元年卒。
대공 신은 즉위 원년(기원전660년)에 죽었다.
 
齊桓公以衛數亂,乃率諸侯伐翟,為衛筑楚丘,立戴公弟燬為衛君,是為文公。
제桓公은 衛가 여러 차례 난을 당하는 것을 보고 제후들을 거느리고 翟을 토벌하여 衛를 위해 楚丘에 성을 쌓고, 대공의 동생 燬를 衛의 군주로 세우니 그가 文公이다.
 
文公以亂故奔齊,齊人入之。
문공은 환란 때문에 齊로 달아났었는데 齊의 사람이 돌려보낸 것이다.
 
初,翟殺懿公也,衛人憐之,思復立宣公前死太子伋之後,伋子又死,而代伋死者子壽又無子。
당초 翟이 의공을 죽이자 衛의 사람들은 그를 가엾게 여겨 선공이 전에 죽인 태자 급의 후손을 복위할 생각이었으나, 급의 아들 역시 죽었고, 급을 대신하여 죽은 壽도 아들이 없었다.
 
太子伋同母弟二人:
其一曰黔牟,黔牟嘗代惠公為君,八年復去;
其二曰昭伯, 昭伯、黔牟皆已前死,故立昭伯子申為戴公。
태자 급에게는 같은 어머니에게서 난 동생이 둘 있었다.
그중 하나가 黔牟로 일찍이 혜공을 대신하여 군주가 되었다가 8년 만에 물러났다.
둘째가 昭伯인데 소백과 검모가 모두 이미 죽었기 때문에 소백의 아들 申을 대공으로 세운 것이다.
 
戴公卒,復立其弟燬為文公。
대공이 죽자 다시 그 동생을 燬를 문공으로 세웠다.
 
文公初立,輕賦平罪,身自勞,與百姓同苦,以收衛民。
문공은 처음 즉위하여 세금을 가볍게 하고 형벌을 공평하게 했으며, 몸소 일하고 백성과 고통을 같이 하면서 衛의 백성들의 민심을 얻었다.

▶ 衛文公: 춘추시대 衛의 國君으로 이름은 辟疆인데, 燬로 고쳤다. 昭伯 頑의 아들이고, 戴公의 동생이다. 처음에 齊로 달아났는데, 齊桓公이 衛가 여러 차례 狄에게 침범을 당한 것을 알고 제후를 이끌고 狄을 공격하고, 楚丘땅에 성을 쌓아주고 위문공으로 삼았다.

 

十六年,晉公子重耳過,無禮。
문공16년(기원전644년), 晉의 공자 重耳가 衛를 들렸는데 위문공이 무례하게 대하였다.
 
十七年,齊桓公卒。
문공17년(기원전643년), 제환공이 죽었다.
 
二十五年,文公卒,子成公鄭立。
문공25년(기원전635년), 문공이 죽고 아들 成公 鄭이 즉위하였다.

▶ 重耳: 춘추전국시대 제후국인 晋獻公의 둘째 아들이다. 헌공의 후처로 들어온 驪姬의 계략에 빠져 형인 申生이 사망하고 자신은 진을 떠나 翟으로 망명하였다. 헌공이 죽고 마침내 여희의 아들이 왕위에 올랐지만 측근에 의해 살해되고 중이의 동생 夷吾가 晉惠公에 올랐다. 하지만 重耳는 동생 이오의 견제로 진으로 돌아갈 수 없었고 자객으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齊로 달아났다. 혜공이 죽자 19년간의 긴 망명생활을 마치고 마침내 秦의 도움으로 군사를 이끌고 귀국하여 文公에 올랐다.

 

成公三年,晉欲假道於衛救宋,成公不許。
성공3년(기원전632년), 晉이 宋을 구원하기 위해 衛에 길을 빌리려 했으나 성공이 허락하지 않았다.
 
晉更從南河度,救宋。
晉은 길을 변경하여 남쪽으로 황하를 건너 宋을 구원하였다.
 
徵師於衛,衛大夫欲許,成公不肯。
衛에 군사 징발을 요청하자 衛의 대부들은 응하려 했으나 성공이 거절하였다.
大夫元咺攻成公,成公出奔。
그러자 衛대부 元咺이 成公을 공격했고, 성공은 楚로 달아났다.
 
晉文公重耳伐衛,分其地予宋,討前過無禮及不救宋患也。
晉文公 重耳는 衛를 정벌하고 그 땅을 宋에 줌으로써 이전에 衛가 자신에게 무례하게 대한 것과 宋을 구원하지 않은 원한을 갚았다.

▶ 成公: 衛成公. 춘추시대 衛의 군주로 이름은 鄭이고, 文公의 아들이다. 成公 3년 晉이 길을 빌려 宋을 구원하려 했는데, 衛가 허락하지 않자 晉이 衛를 공격했고, 성공은 楚로 달아났다. 晉이 제후들을 踐土에 불러 모으자 대부 元晅에게 동생 叔武을 데리고 가 맹약을 받게 하였다. 얼마 뒤 진의 명령을 받들어 귀국했는데, 맹약을 어기고 숙무를 죽였다. 이에 진이 성공을 잡아 周王에게 보냈다. 원훤이 공자 公子 瑕를 세웠다. 성공이 뇌물을 써서 석방되어 귀국한 뒤 원훤과 공자 하를 죽였다.
▶ 晉欲假道於衛救宋: 좌전에는 진이 曺를 정벌하기 위해 길을 빌렸다고 하였다. <춘추좌씨전 노희공28년>
▶ 度: 渡와 통용된다. 건너다.
▶ 元咺: 춘추시대 衛의 大夫. 成公을 내쫓고 공자 公子 瑕를 왕위에 등극시켰지만 성공이 복위하자 죽임을 당하였다.

 

 

 

衛成公遂出奔陳。
衛成公은 이에 陳으로 도망쳤다.
 
二歲,如周求入,與晉文公會。
2년 뒤 성공은 주나라에 가서 자신의 귀국을 호소하여 晉文公을 만나게 되었다.
 
晉使人鴆衛成公,成公私於周主鴆,令薄,得不死。
晉은 사람을 시켜서 위성공을 독살하려 했는데, 성공이 주 왕실의 독살하려는 사람에게 사사로이 뇌물을 주어 독을 약하게 타게 하여 죽지 않을 수 있었다.
 
已而周為請晉文公,卒入之衛,而誅元咺,衛君瑕出奔。
이일이 있은 후 주나라가 晉文公에게 간청하여 마침내 성공이 衛로 돌아와서 元咺을 죽이니 衛군주 瑕는 달아났다.

▶ 鴆: 鴆毒. 짐새의 깃에 있다는 맹렬한 毒. 毒酒.

 

七年,晉文公卒。
성공7년(기원전628년), 晉文公이 죽었다.
 
十二年,成公朝晉襄公。
성공12년(기원전623년), 성공이 晉襄公에게 조회하였다.
 
十四年,秦穆公卒。
성공14년(기원전621년), 秦穆公이 죽었다.
 
二十六年,齊邴歜弒其君懿公。
성공26년(기원전609년), 齊의 대부 邴歜이 그의 군주 懿公을 시해하였다.
 
三十五年,成公卒,子穆公遫立。
성공35년(기원전600년)에 성공이 죽고, 아들 穆公 遫이 즉위하였다.

▶ 齊邴歜弒其君懿公: 齊懿公은 춘추시대 齊의 제21대 후작이며, 성은 姜이고 휘는 商人이다. <사기>에서는 丙戎庸職이 제의공을 살해한 것으로 나오며, <춘추좌씨전>에는 병융과 용직이 각각 邴歜과 閻職으로 나온다. <춘추좌씨전魯文公18기원전609년><[史記] 世家권32. 齊太公世家>

 

世家32-齊太公世家(제태공세가)

世家는 역사편찬 방식의 하나인 紀傳體 史書의 한 편목으로 司馬遷이 를 편찬하면서 처음으로 만들었으며, 분봉된 국가의 군주나 제후들 혹은 중요한 역사적 인물의 사적 및 사회에 특출한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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穆公二年,楚莊王伐陳,殺夏徵舒。
목공2년(기원전598년), 楚莊王이 陳을 공격하여 夏徵舒를 죽였다.
 
三年,楚莊王圍鄭,鄭降,復釋之。
목공3년(기원전597년), 초장왕이 鄭을 포위하여 鄭이 항복했고 다시 鄭伯을 풀어주었다.
 
十一年,孫良夫救魯伐齊,復得侵地。
목공11년(기원전589년), 衛의 대부 孫良夫가 魯를 구하려고 齊를 공격하여 빼앗긴 땅을 되찾았다.
 
穆公卒,子定公臧立。
목공이 죽고, 아들 定公藏이 즉위하였다.
 
定公十二年卒,子獻公衎立。
정공은 재위12년(기원전577년) 만에 죽고, 아들 獻公 衎이 즉위하였다.

▶ 穆公: 衛穆公. 춘추시대 衛의 군주로 이름은 遫이고, 衛成公의 아들이다.
▶ 夏徵舒: 춘추시대 陳의 대부. 어머니는 음녀로 유명하였던 夏姬인데, 수년간 어머니 하희가 陳靈公 등과 음란한 짓을 계속하고 자신마저 욕보이자, 화가 난 하징서는 진영공을 죽였다. 하징서는 집으로 들어가 어머니 하희를 감금하고 새로 진영공의 아들 공자 孔子 午를 군주에 즉위를 오르게 하였다. 그러나 楚莊王이 楚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오자, 하징서는 습격을 받고 달아났으나 끝내 잡혀 陳으로 끌려와 임금을 죽인 죄로 거열형에 처해져 죽었다.



獻公十三年,公令師曹教宮妾鼓琴,妾不善,曹笞之。
헌공13년(기원전576년)에 헌공이 악사 曹로 하여금 宮妾에게 거문고를 가르치게 했는데, 첩이 잘하지 못하자 曹가 첩을 매질하였다.
 
妾以幸惡曹於公,公亦笞曹三百。
첩이 寵幸을 업고 헌공에게 조를 비방하자 헌공도 역시 조에게 300대를 매질하였다.
 
十八年,獻公戒孫文子、甯惠子食,皆往。
헌공18년(기원전571년)에 헌공이 孫文子와 甯惠子에게 함께 식사를 하자고 청하자 두 사람이 와서 기다렸다.
 
日旰不召,而去射鴻於囿。
날이 저물어도 헌공은 이들을 부르지 않고 苑囿에 가서 기러기를 쏘아 잡고 있었다.

二子從之,公不釋射服與之言。
두 사람이 사냥터로 찾아갔으나 헌공은 사냥 복장을 벗지도 않은 채 두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二子怒,如宿。
두 사람은 화가 나서 宿邑으로 가버렸다.

▶ 師曹: 樂師曹. 曺는 악사의 이름.
▶ 笞: 매질하다. 
▶ 戒: 청하다. 두 사람에게 勅令을 내려 함께 식사를 하자고 한 것이다.
▶ 孫文子: 孫林父. 춘추시대 衛의 大夫로 文子라고도 한다. 獻公때 甯殖과 함께 동열에 섰다. 헌공이 두 사람에게 무례하자 헌공을 폐하고 殤公을 세우니 헌공은 齊로 달아났다. 상공12년 달아난 헌공이 영식의 아들 甯喜와 복위를 도모해 寗氏가 孫氏를 공격했는데, 손씨가 패하자 采邑戚을 근거지로 반란을 일으키고 晉으로 달아났다. <춘추좌씨전魯襄公24년>
▶ 寧惠子: 寧殖. 춘추시대 衛定公때 大夫를 지냈다. 정공의 병이 위독해지자 그와 孔成子를 시켜 獻公을 옹립하게 하였다. 나중에 헌공이 무례하게 굴자 孫林父와 함께 헌공을 내쫓고 殤公을 세웠다.
▶ 旰: 해가 지다.
▶ 射: 쏘아잡다. 射은 맞힐 ‘석’
▶ 囿: 고대 제왕의 사냥터.
▶ 宿: 戚과 통용된다. 戚邑. 척읍은 孫文子의 읍으로 자기의 私邑으로 돌아간 것은 장차 배반하기 위해서이다.



孫文子子數侍公飲,使師曹歌巧言之卒章。
손문자의 아들이 헌공의 술자리를 여러 차례 시중들었는데, 헌공이 악사 曺에게<巧言>의 마지막 장을 노래하게 하였다.
 
師曹又怒公之嘗笞三百,乃歌之,欲以怒孫文子,報衛獻公。
악사 조는 헌공이 예전에 300대를 매질한 것에 화가 나 있던 터라 그 노래를 부르면서 손문자를 노하게 만들어 위헌공에게 보복하고자 하였다.
文子語蘧伯玉,伯玉曰:
「臣不知也。」
손문자가 이 일을 蘧伯玉에게 말하자 거백옥이 말하였다.
“신은 모르겠소이다. ”
遂攻出獻公。
이에 손문자가 헌공을 공격하였다.
 
獻公奔齊,齊置衛獻公於聚邑。
헌공은 齊로 달아났고 齊는 衛헌공을 聚읍에 머물게 하였다.
 
孫文子、甯惠子共立定公弟秋為衛君,是為殤公。
손문자와 영혜자는 함께 定公의 동생 秋를 衛의 군주로 세우니 그가 殤公이다.

▶ 孫文子子: 손문자의 아들 孫蒯.
▶ 巧言之卒章: 〈巧言〉은 <詩經> <小雅>의 편명이다. 小人의 讒言에 농락을 당하는 임금을 비난한 노래이다.
그 마지막 章에
“저 사람은 누구인가? 황하 가에 사네. 주먹도 용기도 없으면서 재난 일으키기를 일삼는다. (彼何人斯, 居河之麋. 無拳無勇, 職為亂階. ”
라고 하였다.
獻公은 이 시로써 손문자가 황하 가에 살면서 반란하려는 것을 비유하고자 한 것이다.
▶ 蘧伯玉: 蘧瑗. 춘추시대 衛사람. 字가 백옥이다. 靈公때 大夫를 지냈다.

 



殤公秋立,封孫文子林父於宿。
상공 추가 즉위하자 손문자 林父를 宿邑에 봉하였다.
 
十二年,甯喜與孫林父爭寵相惡,殤公使甯喜攻孫林父。
상공12년(기원전547년), 대부 寧喜와 손림보가 총애를 다투어 서로를 미워했으며, 상공이 영희를 시켜 손림보를 공격하게 하였다.
 
林父奔晉,復求入故衛獻公。
손림보는 晉으로 도망쳐 晉에 예전의 군주 위헌공이 衛로 복귀하도록 요청하였다.
 
獻公在齊,齊景公聞之,與衛獻公如晉求入。
헌공은 齊에 있었는데 齊景公이 이 소식을 듣고 衛헌공과 晉으로 가서 귀국을 도와달라고 요청하였다.
 
晉為伐衛,誘與盟。
晉이 衛를 공격하여 회맹을 이끌어냈다.
 
衛殤公會晉平公,平公執殤公與甯喜而復入衛獻公。
衛상공이 진평공과 회맹하려 했으나 평공은 殤公과 甯喜를 체포하고 衛헌공을 복위시켰다.
 
獻公亡在外十二年而入。
헌공은 외국에서 12년을 망명했다가 귀국하였다.

▶ 寧喜: 衛정공의 대부로 寧悼子로도 불리며, 寧殖의 아들이다. 衛獻公이 영식과 孫林父에 의해 쫓겨나 齊에 있었는데, 나중에 사람을 시켜 그와 약속하기를 만약 자신을 복위시켜 준다면‘정치는 영씨에게서 나오고, 제사만 자신이 맡겠다.’고 하였다. 이에 손림보를 공격해 殤公을 살해하고 헌공을 맞아 복위시켰다. 그러나 헌공의 공격을 받아 살해당하였다.

 

獻公後元年,誅甯喜。
헌공 복위 원년(기원전546년)에 甯喜를 죽였다.
 
三年,吳延陵季子使過衛,見蘧伯玉、史,曰:
「衛多君子,其國無故。」
헌공3년(기원전544년)에 吳의 延陵季子가 사신으로 衛에 들러 거백옥과 史鰌를 만나 말하였다.
“衛에는 군자들이 많이 있으니 환난이 없을 터입니다. ”
過宿,孫林父為擊磬,曰:
「不樂,音大悲,使衛亂乃此矣。」
연릉계자가 숙읍에 들러 손림보가 磬을 연주하는 것을 듣고 말하였다.
“즐겁지 않고 음이 아주 슬픈 것이 衛의 분란이 여기서 비롯되었구나!”
是年,獻公卒,子襄公惡立。
이 해에 헌공이 죽고, 아들 襄公惡이 즉위하였다.

▶ 季札: 춘추시대 吳王 壽夢의 네 아들 중 막내로 延陵에 봉해져 延陵季子라고 부른다. 왕의 자리를 넘겨주려 했으나, 계찰은 이를 받지 않고 시골로 내려가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훗날 계찰이 魯를 방문하여 악공에게 <周南>, <召南>, <風>, <雅>, <頌>을 연주하게 하였다. <左傳·襄公二十九年> [史記世家]권31. 吳太伯世家

 

 

世家31-吳太伯世家(오태백세가)

史記는 前漢의 사학자 太史公 司馬遷이 상고시대로부터 전한 武帝에 이르기까지 2천여 년간의 역사를 기술한 고대 중국 역사서로 12권, 10권, 8권, 30권, 7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世家는 역사편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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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宿: 戚과 통용된다. 地名. 戚은 衛대부 孫文子의 封邑이다.
▶ 擊磬: 孫文子가 음악을 연주하면서 치는 악기인 磬소리를 들은 것이다.

 

襄公六年,楚靈王會諸侯,襄公稱病不往。
양공6년(기원전538년), 楚靈王이 제후들과 회맹하는데 양공은 병을 핑계로 가지 않았다.

▶ 襄公: 衛襄公. 춘추시대 衛의 군주로 이름은 惡이고, 衛獻公의 아들이다.

 

九年,襄公卒。
양공9년(기원전535년)에 양공이 죽었다.
 
初,襄公有賤妾,幸之,有身,夢有人謂曰:
「我康叔也,令若子必有衛,名而子曰『元』。」
당초 양공에게는 천한 첩이 하나 있었는데 총애를 받아 임신했을 때 꿈에 어떤 사람이 그녀에게 말하였다.
“나는 康叔인데, 네 아들이 꼭 衛를 차지할 수 있게 할 테니 아들 이름을 <元>이라 하여라.”
妾怪之,問孔成子。
첩이 괴이하게 여겨 孔成子에게 물었다.
 
成子曰:
康叔者,衛祖也。」
공성자가 말하였다.
“강숙은 衛의 始祖입니다. ”
及生子,男也,以告襄公。
아이를 낳으니 사내였고, 첩은 꿈을 양공에게 알렸다.
 
襄公曰:
「天所置也。」
名之曰元。
양공이 말하기를,
“하늘의 안배로다!”
라고 하면서 元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襄公夫人無子,於是乃立元為嗣,是為靈公。
양공의 부인은 아들이 없어 元을 후계자로 세우니 그가 靈公이다.

▶ 夢有人謂曰: <춘추좌씨전>에는 공성자가 꿈을 꾼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衛襄公의 부인 姜氏는 아들을 낳지 못하였고, 嬖人 婤姶이 孟縶을 낳았다. 孔成子의 꿈에 康叔이 공성자에게 말하기를 “元을 임금으로 세우라. ”고 하였다. <춘추좌씨전 魯昭公 7년, 기원전535년>
▶ 孔成子: 衛의 卿으로 孔達의 손자 烝鉏이다.
▶ 靈公: 衛靈公. 춘추시대 衛의 군주로 이름은 元이며, 獻公의 손자다. 33년 晉과 맹약을 맺으면서 수모를 당하자 마침내 晉에 반기를 들었다. 39년 태자 蒯聵가 영공의 부인 南子를 죽이려다 실패하자 영공의 노여움을 두려워한 괴외가 宋으로 달아나고, 얼마 뒤 晉으로 들어갔다. 태자가 달아난 것에 화가 난 영공이 少子郢을 세우려고 했는데, 영이 사양하였다.

 

<이 부분은 원문에는 기록이 없다>

靈公五年,朝晋昭公。
영공5년(기원전530년)에 영공이 진昭公에게 조회하였다.
 
六年,楚公子弃疾弑靈王自立,為平王。
영공6년(기원전529년), 楚공자 棄疾이 楚靈王을 시해하고 자신이 군주에 오르니 그가 平王이다.
 
十一年,火。
영공11년(기원전524년)에 큰 화재가 발생하였다.
 
三十八年,孔子来,祿之如鲁。
영공38년(기원전498년)에 孔子가 衛에 오자 공자에게 魯에 있을 때와 같이 많은 녹봉을 주었다.
 
後有隙,孔子去。後復来。
후에 孔子와 위영공이 사이가 벌어져 공자가 떠났다. 얼마 뒤에 다시 衛로 왔다.

▶ 火: 바람이 심하게 불어 宋 ‧ 衛 ‧ 陳 ‧ 鄭에 모두 화재가 발생하였다. <춘추좌씨전魯昭公18기원전524년〉

 

<이 부분은 원문에는 기록이 없다>

三十九年,太子蒯聵與靈公夫人南子有惡,欲殺南子。
영공39년(기원전497년)에 태자 蒯聵가 아버지 영공의 부인인 南子를 미워하여 그녀를 죽이려 하였다.
 
蒯聵與其徒戱陽遫謀,朝,使殺夫人。
괴외가 그의 가신인 戱陽遫과 모의하여 조회 때 부인을 죽이라고 하였다.
 
戱陽遫悔,不果。
희양속이 후회하며 결단을 내리지 못하였다.
 
蒯聵数目之,夫人覺之,惧,呼曰:
“太子欲殺我!”
괴외가 여러 차례 눈짓을 하자 부인이 이를 알아채고는 두려워하며 크게 외쳤다.
“태자가 나를 죽이려 한다!”
靈公怒,太子蒯聵奔宋,已而之晋趙氏。
영공이 노하였고, 태자 괴외는 宋으로 도망쳤다가 얼마 후 晉의 趙簡子에게로 갔다.

▶ 蒯聵: 衛莊公. 춘추시대 衛의 군주가 된다. 이름은 蒯聵이고 위영공의 맏아들이다. 영공의 맏아들로 태어나 세자가 되었다. 衛12대 군주에 莊公이 이미 있으므로 ‘後莊公’이라고도 한다. 괴외가 세자 때 晉에 사신으로 가다가 宋을 지나던 도중 宋의 사람들이 송공자 朝와 괴외의 계모인 南子의 사통을 노래하며 조롱하였다. 그 사실을 안 괴외는 부끄러워했고 격분하여 귀국한 뒤 곧 자객을 시켜 영공의 부인 男子를 죽이려 하다가 발각되어 실패하고 송으로 달아났다가 晉으로 다시 달아났다.
▶ 戱陽遫: 춘추시대 위영공의 아들 괴외의 가신.

 

四十二年春,靈公游于郊,令子郢仆。
영공42년(기원전494년) 봄에 영공이 교외로 놀러 나가면서 子郢에게 수레를 몰도록 하였다.
 
郢,靈公少子也,字子南。
자영은 영공의 작은 아들로 자를 子南이라 하였다.
 
靈公怨太子出奔,謂郢曰:
「我將立若為後。」
영공은 태자가 도망친 일을 원망하면서 자영에게 말하였다.
“나는 너를 후계자로 삼을까 한다. ”
郢對曰:
「郢不足以辱社稷,君更圖之。」
자영이 대답하였다.
“제가 모자라서 사직을 욕되게 할 터이니 군주께서는 생각을 바꾸소서. ”
夏,靈公卒,夫人命子郢為太子,曰:
「此靈公命也。」
여름에 영공이 죽자 부인은 子郢을 태자로 삼으면서 말하였다.
“이는 영공의 명령이다. ”
郢曰:
「亡人太子蒯聵之子輒在也,不敢當。」
자영이 말하였다.
“도망간 태자 괴외의 아들 輒이 이곳에 있으니 저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
於是衛乃以輒為君,是為出公。
이에 衛 사람들이 輒을 군주로 삼으니 그가 出公이다.

▶ 仆: 마부. 거마를 몰다.
▶ 輒: 剻聵의 아들로 出公을 말한다. 위영공의 適孫이다.



六月乙酉,趙簡子欲入蒯聵,乃令陽虎詐命衛十餘人衰绖歸,簡子送蒯聵。
6월 을유(기원전493년)에 晉의 대부 趙簡子가 괴외를 귀국시키려고 陽虎를 시켜 10여 명에게 상복을 입히고는 衛에서 태자를 맞이하러 온 사람으로 위장하고, 조간자 자신은 괴외를 배웅하였다.
 
衛人聞之,發兵擊蒯聵。
衛군주가 이 소식을 듣고 군사를 일으켜 괴외를 공격하였다.
 
蒯聵不得入,入宿而保,衛人亦罷兵。
괴외가 입국하지 못하고 宿邑으로 가서 스스로를 지키자 衛의 군주도 罷軍하였다.

▶ 趙簡子: 趙鞅. 춘추시대 말기 晉의 사람으로 趙孟 또는 志父로도 불린다. 晉 내부에서 6卿이 세력 다툼을 벌일 때 2경인 范氏와 中行氏를 몰아내고 趙를 일으키는 바탕을 마련하였다.
▶ 衰絰: 상복을 입다. 喪服의 하나로 衰는 상복의 가슴에 붙이는 길이 6寸 너비4촌의 삼베 조각이고, 絰은 머리에 두르는 首絰과 허리에 두르는 腰絰이다.



出公輒四年,齊田乞弒其君孺子。
출공 희첩4년(기원전489년), 齊의 田乞이 국군 孺子荼를 시해하였다.
 
八年,齊鮑子弒其君悼公。
출공8년(기원전485년), 齊의 鮑子가 그의 국군 悼公을 시해하였다.

▶ 出公: 衛出公. 춘추시대 衛의 군주로 이름은 輒이다. 衛靈公의 태자 蒯聵의 아들이다. 영공이 죽자 夫人이 영공의 명령이라며 郢을 세우려고 했지만, 영이 사양하였다. 이에 衛사람이 첩을 세워 임금으로 삼았다. 재위12년에 孔悝가 난을 일으켜 괴외를 세우자 魯로 달아났다. 출공이 외국에서 4년을 있는 동안 衛는 임금이 세 번 바뀌었고, 이에 제에서 돌아와 제위에 올랐다. 재위7년에 大夫 褚師가 匠人들과 연합해 난을 일으키자 달아났고, 越에서 죽었다.

 

孔子自陳入衛。
공자가 陳에서 衛로 왔다.
 
九年,孔文子問兵於仲尼,仲尼不對。
출공9년(기원전484년), 孔文子가 공자에게 군대 일에 관해 물었으나 공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其後魯迎仲尼,仲尼反魯。
그 뒤 魯가 공자를 맞이하자 공자는 魯로 돌아갔다.

▶ 孔文子: 孔圉. 시호가 文으로 사람들은 그를 孔文子라고 불렀다
孔達의 4대손으로 靈公을 섬겼고, 出公때 卿이 되었다. 孔子를 찾아가 병사를 쓰는 법을 묻자 대답도 않고 공자는 魯로 돌아와 버렸다. <論語公冶長篇 14장>

 

十二年,初,孔圉文子取太子蒯聵之姊,生悝。
출공12년(기원전481년), 당초 孔圉文子는 태자 괴외의 누이를 아내로 맞이하여 孔悝를 낳았다.
 
孔氏之豎渾良夫美好,孔文子卒,良夫通於悝母。
공씨 집에 渾良夫라는 잘 생긴 노비가 있었는데, 공문자가 죽자 혼양부는 공회의 어머니와 간통하였다.
 
太子在宿,悝母使良夫於太子。
태자 괴외가 숙읍에 머물고 있었는데 공회의 어머니는 혼양부를 태자에게 보냈다.
 
太子與良夫言曰:
「茍能入我國,報子以乘軒,免子三死,毋所與。」
태자가 혼양부에게 말하였다.
“내 나라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대에게 대부가 타는 수레로 보답할 것이며. 죽을죄 세 가지를 사면하여 묻지 않을 터이다!”
與之盟,許以悝母為妻。
태자가 그와 맹약을 맺고 또 공회의 어머니를 아내로 삼을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 蒯聵之姊: 蒯聵의 누이는 孔伯姬이다.
▶ 豎: 노비.
▶ 茍: 만약.
▶ 軒: 고대 大夫이상이 타는 수레.
▶ 三死: 죽을죄를 세 번 짓는 것.



閏月,良夫與太子入,舍孔氏之外圃。
윤달에 혼양부와 태자 괴외가 함께 衛로 들어가서 공씨 집 뒤뜰에 숨었다.
 
昏,二人蒙衣而乘,宦者羅御,如孔氏。
날이 어두워지자 두 사람은 여자 옷을 입고 내시 羅에게 수레를 몰게 하여 공씨 집으로 갔다.
 
孔氏之老欒甯問之,稱姻妾以告。
공씨 집의 가신 欒寧이 누구냐고 묻자 인척의 첩이라고 하였다.
 
遂入,適伯姬氏。
마침내 집 안으로 들어와 공회의 어머니인 伯姬氏에게로 갔다.
 
既食,悝母杖戈而先,太子與五人介,輿猳從之。
식사를 마친 뒤에 공회의 어머니가 창을 짚고 앞장을 서고, 태자와 갑옷 입은 사람 다섯 사람이 수레에 수퇘지를 싣고 그 뒤를 따랐다.
 
伯姬劫悝於廁,彊盟之,遂劫以登臺。
백희가 공회를 겁박하여 담장 모퉁이로 데려가 억지로 맹약을 하고 마침내 그를 누대로 올라가게 하였다.
 
欒甯將飲酒,炙未熟,聞亂,使告仲由。
난녕이 술을 마시려고 고기를 굽다가 미처 익지 않았는데 반란 소식을 듣고서 사람을 시켜 仲由에게 알렸다.
 
召護駕乘車,行爵食炙,奉出公輒奔魯。
護을 불러 수레에 말을 매게 하고서 술과 구운 고기를 먹고서 출공 첩을 모시고 노로 달아났다.

▶ 圃: 채마밭.
▶ 蒙衣: 婦人의 복장을 하다.
▶ 老: 家臣을 老라고 한다.
▶ 姻妾: 혼인한 친척집의 侍妾.
▶ 伯姬氏: 衛伯姬. 衛莊公 蒯聵의 누이이며, 孔圉의 아내다. 공어가 죽자 奴僕 渾良夫와 간통하였다. 당시 태자 괴외가 유랑 중이었는데, 혼량부를 시켜 괴외와 동맹하여 괴외를 들어오게 하여 國君이 되게 해주면 자신과 혼량부가 혼인하는 것을 허락해 주기로 하였다. 이때 그녀의 아들 衛大夫 悝를 시켜 난을 일으키게 하고 괴외를 등극시키니 그가 장공이었다. 나중에 위대부에게 살해당하였다.
▶ 輿: 수레에 싣다.
▶ 猳: 수퇘지.
▶ 劫悝於廁: 孔氏가 정권을 독점하였기 때문에 孔悝를 겁박하여 輒을 축출하게 하고자 한 것이다. 廁은 側과 통용된다. 담장 모퉁이.
▶ 炙: 구운 고기.
▶ 仲由: 季子. 子路이다. 공자와 14년의 천하주유과 망명생활을 함께 했으며, 공자가 魯로 돌아갈 때 衛에 남아서 孔씨의 가신이 되었으나, 왕실 계승 분쟁에 휘말려 괴외의 난 때 전사하였다.
▶ 召護: 召獲. 獲은 人名. 欒寧이 획을 부른 것이다. <춘추좌씨전> 召獲을 衛大夫의 이름이라고 한〈杜注〉는 옳지 않다. 〈楊注〉

 

 

仲由將入,遇子羔將出,曰:
「門已閉矣。」
子路(仲由)가 공씨 집으로 들어가면서 나가는 子羔와 만났는데 자고가 말하였다.
“성문은 이미 닫혔습니다. ”
子路曰:
「吾姑至矣。」
자로가 말하였다.
“내가 가서 잠시 살펴보겠소. ”

子羔曰:
「不及,莫踐其難。」
자고가 말하였다.
“늦었습니다. 난리에 뛰어들지 마십시오. ”

子路曰:
「食焉不辟其難。」
자로가 말하였다.
“이 집 녹을 먹었으면 그 사람의 환란을 피하지 않는 것이오. ”

子羔遂出。
子羔는 결국 가 버렸다.

▶ 仲由: 字는 子路 또는 季路이며 卞사람이다. 공자의 핵심 제자 중의 한 사람으로 공자의 천하유세 동안 고난을 끝까지 함께 하였다. 공자와 14년의 천하주유과 망명생활을 함께 했으며, 공자가 魯로 돌아갈 때 衛에 남아서 공씨의 가신이 되었으나 왕실 계승 분쟁에 휘말려 괴외의 난 때 전사하였다.[史記列傳]권67仲尼弟子列傳
▶ 仲由將入: 자로는 들어가서 孔氏를 구제하려 한 것이다.
▶ 子羔將出: 자고가 달아나려 한 것이다. 자고는 大夫 高柴로서 孔子의 제자이다. 공자보다 30세 아래이다. 자고는 신장이 5척에 미치지 못했으며, 공자에게 가르침을 받았는데 공자는 그를 우직하다고 생각하였다. <論語 先進25>
▶ 姑: 잠시. 잠깐.



子路入,及門,公孫敢闔門,曰:
「毋入為也!」
자로가 들어가 문에 이르니 公孫敢이 문을 닫으면서 말하였다.
“못 들어가오!”
子路曰:
「是公孫也?
求利而逃其難。
由不然,利其祿,必救其患。」
자로가 말하였다.
“공손감인가?
이익을 위하여 환란을 피하고 있다니.
나 중유는 그렇게 할 수 없소, 공씨의 녹을 이익으로 챙겼으니 반드시 그의 재난을 구원할 터이오.”

有使者出,子路乃得入。
曰:
「太子焉用孔悝?
雖殺之,必或繼之。」
심부름꾼 하나가 나오는 틈에 자로가 안으로 들어가서 말하였다.
“태자께서는 어찌하여 하필 공회를 이용하십니까?
그를 죽인다 해도 누군가가 그 뒤를 이어 태자를 공격할 것입니다. ”

且曰:
「太子無勇。若燔臺,必舍孔叔。」
자로가 또 말하였다.
“태자께서는 용기가 없습니다. 만약 누대에다 불을 지르면 분명 공회를 놓아줄 것이오. ”

▶ 燔: 불사르다.
▶ 舍: 놓아주다.



太子聞之,懼,下石乞、盂黶敵子路,以戈擊之,割纓。
태자가 그 말을 듣고 겁이 나서 石乞와 盂黶을 내려보내 자로에게 맞서게 하니
창으로 자로를 공격하여 갓끈을 잘랐다.
 
子路曰:
「君子死,冠不免。」結纓而死。
자로가 말하였다.
“군자는 죽을지언정 갓을 벗지 않는다. ”라고 하며 갓끈을 매면서 죽었다.

▶ 纓: 갓끈.

 

孔子聞衛亂,曰:
「嗟乎!柴也其來乎?
由也其死矣。」
공자가 衛에 변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말하였다.
“아! 柴(자고)는 돌아오지 않겠느냐?
由(자로)는 죽겠구나. ”
孔悝竟立太子蒯聵,是為莊公。
공회가 끝내 태자 괴외를 군주로 세우니 그가 莊公이다.

 

 

莊公蒯聵者,出公父也,居外,怨大夫莫迎立。
장공 괴외는 出公의 아버지인데 국외에 도망갔을 때 대부들이 자신을 맞이하여 군주로 세우지 않았음을 원망하였다.
 
元年即位,欲盡誅大臣,曰:
「寡人居外久矣,子亦嘗聞之乎?」
즉위 원년(기원전480년)에 장공이 대신들을 다 죽이려 하면서 말하였다.
“과인이 나라 밖에 오랫동안 머묾을 그대들도 들은 적이 있지 않은가?”
群臣欲作亂,乃止。
신하들이 난을 일으키려 하자 그만두었다.

▶ 莊公: 衛莊公. 춘추시대 衛의 군주로 이름은 蒯聵이고 위영공의 맏아들로 태어나 태자가 되었다. 衛12대 군주에 莊公이 이미 있으므로 ‘後莊公’이라고도 한다
▶ 群臣欲作亂: 莊公은 출공 輒의 대신들이 자기에게 해가 된다고 여겨 모두 제거하고자 하여, 먼저 司徒 瞞成에게 말하기를
‘과인은 망명하여 외국에서 오랫동안 괴로움을 당하였으니, 그대 또한 그런 괴로움을 맛보기를 청하오.’
하니, 瞞成은 돌아가서 褚師比에게 고하고서 그와 함께 莊公을 공격하고자 하였으나, 끝내 결행하지 못하였다. <춘추좌씨전魯哀公15기원전480년>

 

二年,魯孔丘卒。
장공2년(기원전479년)에 魯의 孔丘(孔子)가 세상을 떠났다.
 
三年,莊公上城,見戎州。曰:「戎虜何為是?」
장공3년(기원전478년), 장공이 성에 올라 戎州를 보면서 말하였다.
“융 놈들이 어찌 여기에 있단 말인가?”
戎州病之。
융주 사람들이 이를 근심하였다.
 
十月,戎州告趙簡子,簡子圍衛。
10월에 융주 사람들이 趙簡子에게 알리자 조간자가 衛를 포위하였다.
 
十一月,莊公出奔,衛人立公子斑師為衛君。
11월에 장공이 도망치자 衛 사람들은 공자 斑師를 衛의 군주로 세웠다.
 
齊伐衛,虜斑師,更立公子起為衛君。
齊가 衛를 정벌하여 반사를 포로로 잡고 공자 起를 衛의 군주로 바꾸어 세웠다.

▶ 戎州: 戎人이 거주하는 읍.
▶ 戎虜何為是: 莊公은
“우리나라는 姬姓인데, 어찌 戎人이 있을 수 있느냐?”
고 하였다. 姬姓의 나라에 어째서 융읍이 있느냐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戎州의 취락을 파괴하였다.
▶ 病: 걱정하다.
▶ 斑師: 괴외의 동생.
▶ 起: 괴외의 동생.

衛君起元年,衛石曼尃逐其君起,起奔齊。
위군 起 원년(기원전477년), 衛의 대부 石曼尃가 군주 起를 내쫓으려 하자 기는 齊로 달아났다.
 
衛出公輒自齊復歸立。
衛 출공 輒이 齊에서 와서 복위하였다.
 
初,出公立十二年亡,亡在外四年復入。
당초 출공은 12년간 재위하다가 망명하여 나라 밖에서 4년을 보낸 뒤 다시 들어온 것이다.
 
出公後元年,賞從亡者。
출공 복위 후 원년(기원전476년)에 망명 당시 그를 따르던 사람들에게 상을 내렸다.
 
立二十一年卒,出公季父黔攻出公子而自立,是為悼公。
출공이 즉위했던 전후 21년(기원전456년) 만에 죽자, 출공의 숙부 黔이 출공의 아들을 몰아내고 스스로 군주에 오르니 그가 悼公이다.

▶ 出公: 衛出公. 춘추시대 衛의 군주로 이름은 輒이다. 衛靈公의 태자 蒯聵의 아들이다. 재위12년에 孔悝가 난을 일으켜 괴외를 세우자 魯로 달아났다. 출공이 외국에 있는 4년 동안 衛는 군주가 세 번 바뀌었고, 이에 제에서 돌아와 군주의 자리에 다시 올랐다.
▶ 石曼尃: 衛의 대부. <춘추좌씨전>에는 石圃로 기록하고 있다.

 

悼公五年卒,子敬公弗立。
도공이 재위5년(기원전451년) 만에 죽고, 아들 敬公 弗이 즉위하였다.
 
敬公十九年卒,子昭公糾立。
경공이 재위19년(기원전432년) 만에 죽고, 아들 昭公 糾가 즉위하였다.
 
是時三晉彊,衛如小侯,屬之。
이 당시 三晉이 강해지고 衛군주는 작은 나라의 제후처럼 되어 趙의 속국이 되었다.

▶ 三晉: 春秋時代 강국의 하나였던 晉가 분리되어 세워진 韓・魏・趙의 세 나라.

 

昭公六年,公子亹弒之代立,是為懷公。
소공6년(기원전426년), 공자 亹가 소공을 시해하고 대신하여 즉위하니 그가 懷公이다.
 
懷公十一年,公子穨弒懷公而代立,是為慎公。
회공11년(기원전415년), 공자 頹가 회공을 시해하고 대신하여 즉위하니 그가 愼公이다.
 
慎公父,公子適;適父,敬公也。
신공의 아버지는 공자 適이고, 적의 아버지가 敬公이다.
 
慎公四十二年卒,子聲公訓立。
신공이 재위42년(기원전373년) 만에 죽고, 아들 聲公 訓이 즉위하였다.
 
聲公十一年卒,子成侯遫立。
聲公이 재위11년(기원전362년) 만에 죽고, 아들 成侯遫이 즉위하였다.

▶ 成侯: 衛成侯. 전국시대 衛의 군주로 이름은 遫 또는 不逝라 하기도 한다. 衛聲公의 아들이다. 당시 衛는 약소국이었는데, 성후16년 公爵國에서 侯爵國으로 전락하여 成侯라 한 것이다.

 

成侯十一年,公孫鞅入秦。
성후11년(기원전351년), 公孫鞅이 秦에 들어갔다.
 
十六年,衛更貶號曰侯。
성후16년(기원전346년), 衛의 군주의 호칭이 侯로 낮추어졌다.

▶ 公孫鞅: 商君. 商鞅. 전국시대 진의 법가를 대표하는 중요한 정치가였다. 상나라를 분봉받아 후작이 되어 상앙으로 부르며 본래의 姓은 姬, 氏는 公孫, 이름은 鞅이다. 또 다른 별칭으로 衛의 公族출신이라서 衛鞅이라 불렸다. <史記 卷68商君列傳>
▶ 衛更貶號曰侯: 周나라 때 天子를 제외한 公, 侯, 伯, 子, 男의 5등작이 있었다. 衛군주의 호칭이 公에서 侯로 낮추어진 것이다.

 

二十九年,成侯卒,子平侯立。
성후29년(기원전333년), 성후가 죽고 아들 平侯가 즉위하였다.
 
平侯八年卒,子嗣君立。
평후는 재위8년(기원전325년) 만에 죽고, 아들 嗣君이 즉위하였다.
 
嗣君五年,更貶號曰君,獨有濮陽。
사군5년(기원전320년)에 다시 衛의 군주 호칭이 다시 君으로 낮추어졌으며, 濮陽땅만 소유하였다.

▶ 更貶號曰君: 衛의 군주의 호칭이 侯에서 君으로 다시 낮추어 호칭되었다. 성후 때 秦이 강성해져 衛는 자신을 낮춰 侯라 불렀다. 사군5년 衛는 다시 낮춰 君이라 불렀고, 영토도 濮陽을 겨우 지키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君은 공로가 있는 신하에게 주는 작위.

 

四十二年卒,子懷君立。
사군이 재위42년(기원전283년) 만에 죽고, 아들 懷君이 즉위하였다.
 
懷君三十一年,朝魏,魏囚殺懷君。
회군31년(기원전252년)에 회군이 魏에 조회하러 가자 魏가 회군을 가두었다가 죽였다.
 
魏更立嗣君弟,是為元君。
魏가 사군의 동생으로 바꾸어 세우니 그가 元君이다.
 
元君為魏婿,故魏立之。
원군은 魏의 사위였기 때문에 魏가 그를 세운 것이라 한다.
元君十四年,秦拔魏東地,秦初置東郡,更徙衛野王縣,而并濮陽為東郡。
원군14년(기원전239년), 秦이 魏의 동쪽 땅을 점령하고 진이 東郡을 처음으로 설치하였다. 다시 衛 元君을 野王縣으로 옮기고, 복양을 동군에 합병시켰다.
 
二十五年,元君卒,子君角立。
원군25년(기원전228년)에 원군이 죽고, 아들 角이 즉위하였다.
 
君角九年,秦并天下,立為始皇帝。
衛君角9년(기원전221년)에 秦이 천하를 통일하고 始皇帝가 즉위하였다.
二十一年,二世廢君角為庶人,衛絕祀。
위군각21년(기원전209년), 秦二世황제가 衛의 군주를 없애고 角을 평민으로 내치니 衛의 제사가 끊어지고 말았다.

▶ 二世: 秦二世皇帝 嬴胡亥. 秦의 제32대 군주이자 제2대 황제로, 진시황제의 막내아들이다. 성은 嬴, 씨는 趙 혹 秦, 휘는 胡亥다
▶ 君角: 衛君 角(위군 각. 衛의 마지막 군주로 이름은 角이다. 기원전209년 秦 이세황제 호해에 의해 폐위되어 서인으로 강등되었다. 이로써 衛는 멸망하였다.

太史公曰:
余讀世家言,至於宣公之太子以婦見誅,弟壽爭死以相讓,此與晉太子申生不敢明驪姬之過同,俱惡傷父之志。
然卒死亡,何其悲也!
或父子相殺,兄弟相滅,亦獨何哉?
태사공은 말한다.
“내가 世家의 기록을 읽다가 衛宣公의 태자가 부인 때문에 살해당하고, 동생 壽가 서로 사양하며 죽으려고 다투는 대목에 이르렀는데, 이는 晉의 태자 申生이 驪姬의 잘못을 감히 밝히지 않은 것과 같은 경우로 모두 아버지의 뜻이 상하지는 않을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끝내는 죽음에 이르렀으니 어찌 슬프지 않은가!
어떤 자들은 아비와 아들이 서로를 죽이고 형과 아우가 서로를 없애려 했으니, 이는 대체 무엇 때문이란 말인가?”

▶ 宣公之太子: 衛宣公은 춘추시대 衛의 군주로 이름은 晉이고, 桓公의 동생이다. 형 환공이 공자 주우에게 살해당하자, 공자 주우를 죽인 석작에게15대 군주로 옹립되었다. 아버지 衛莊公의 첩 夷姜과 사통하여 낳은 아들 급을 태자로 삼았다. 齊 여자 선강을 세자 급의 비로 맞이하기로 하였는데 宣姜의 미모를 보고 반하여 자기가 차지해 아들 壽와 朔을 낳았다. 이강은 총애를 잃자 자살하였으며, 부인 宣姜과 公子삭의 참언을 듣고 공자 급을 제에 가게 한 뒤 자객을 시켜 변방에서 살해하였다. 그리고 삭을 태자로 앉혔다
※二子乘舟: <詩經>邶風에 실려 있는 시이다. 衛宣公이 아들 伋의 아내가 될 宣姜을 빼앗아 살며 壽와 朔두 아들을 낳았는데, 선강이 급을 미워하자 위선공이 급을 제거하려고 齊에 사신으로 보내 도중에서 살해하려 하였다. 선강의 아들 壽는 착한 사람이라 급을 취하도록 술을 먹이고 자기가 사신으로 먼저 가서 죽으니, 급이 이를 알고 수를 구하러 갔다가 자기도 죽고 말았다. <史記>에서와는 달리<詩經>에서는 배를 타고 떠난 것으로 노래하였다.
▶ 驪姬: 春秋時代 晉獻公의 妃이다. 원래는 이민족인 驪戎군주의 딸이지만 헌공이 驪戎을 정벌하였을 때 사로잡혀 동생과 함께 헌공의 後宮이 되었다. 헌공의 총애를 받아 왕비가 된 뒤 태자인 申生을 모함하여 죽이며 정치의 혼란을 가져왔다. 자신의 자식인 奚斉를 태자로 삼으려고 태자인 申生을 비롯해 重耳, 夷吾등을 모함하여 차례로 죽이려 하였다. 결국 태자인 신생은 죽었고 아버지인 晉獻公이 자신의 두 아들인 중이와 이오를 공격하는 상황까지 벌어지면서 晉의 정치는 큰 혼란에 빠졌다. <춘추좌씨전 魯僖公上 4년, 기원전656년>
▶ 太子申生: 진헌공의 태자 신생은 新城에서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춘추좌씨전 魯僖公 4기원전65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