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篇은 30世家 중 아홉 번째 편으로 周나라의 제후국인 晉의 흥망과정을 기록하였다. 晉은 西周초기에 周成王이 자기의 동생 叔虞를 唐에 봉하면서 시작되었으며, 숙우의 아들 燮父가 도읍을 晉水 가로 옮겨 晉으로 개명하였다.
기원전745~678년 동안 유력 世卿家인 曲沃의 영주와 國都인 絳, 후에 翼으로 개명에 위치한 公室이 대립되었다가 晉武公에 의해 양 세력이 통합되면서 일시 안정을 되찾았다. 그러나 바로 뒤인 晉獻公과 晉惠公 시기에 여희의 난으로 정쟁이 끊이지 않아 혼란스럽다가 내란 끝에 즉위한 文公 때 晉은 제후 간의 회맹의 覇者가 되어 齊의 桓公과 더불어 춘추오패의 대표로 취급되었다. 문공 사후 경대부의 세력이 강해지고 결국 頃公때 失政하여 권력이 경대부에게 넘어갔다. 마침내 기원전376년 靜公때 경대부의 후예가 세운 韓·魏·趙의 三晉에게 멸망되었다.
사마천은 태사공 자서에서
“주무왕이 죽고 무왕의 아들 叔虞는 唐 땅에 봉해졌다. 군자들이 晉穆候가 아들 이름을 잘못 지었음을 나무랐는데, 그 아들이 결국 武公에게 멸망하였다.
晉獻公이 驪姬에게 빠져 晉은 5대에 걸쳐 혼란스러웠다. 晉文公 重耳는 처음에는 뜻을 얻지 못했으나 결국에는 패업을 이루었다. 六卿이 권력을 좌우하니 晉은 멸망하였다.
晉文公이 주나라 천자로부터 珪와 울창주의 예물을 받은 일을 칭송하여 제9편 ‘晉世家’를 지었다. ”
라고 하였다.
秦과 晉은 한글로는 같은 글자라 혼동하기 쉽다. 두 나라는 서로 이웃하고 있던 周나라의 제후국이다. 秦은 중국을 통일한 秦의 전신으로 秦本紀 및 秦始皇本紀에 기록되어 있으며, 晉은 三晋(韓·魏·趙)으로 분리되어 멸망되는 제후국이다.
晉唐叔虞者,周武王子而成王弟。
晉 唐叔 虞는 周나라 武王의 아들이며 周成王의 동생이다.
初,武王與叔虞母會時,夢天謂武王曰:
「余命女生子,名虞,余與之唐。」
일찍이 무왕이 숙우의 어머니와 합방할 때 꿈에 천신이 무왕에게 말하였다.
“내가 너에게 아들을 낳게 할 터이니 이름을 虞라 하라, 내가 唐을 그에게 주겠노라. ”
及生子,文在其手曰「虞」,故遂因命之曰虞。
아들을 낳았을 때 그 손에 ‘虞’라는 무늬가 있었으므로 이름을 虞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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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唐叔虞: 唐叔 姬虞. 성은 姬이고, 자는 子於(:子于)이다. 周武王의 아들이자 周成王의 아우이다.
周公이 唐를 멸망시킨 후에 당의 땅을 叔虞에게 하사하여 당숙우로 불리게 되었으며, 周나라 諸侯國인 晉의 始祖가 되었다.그의 아들인 燮父가 도읍을 晉水 가로 옮겨 晉으로 개명하였다.
武王崩,成王立,唐有亂,周公誅滅唐。
무왕이 죽고 성왕이 즉위한 후 唐에 난이 일어나 周公이 唐을 멸망시켰다.
成王與叔虞戲,削桐葉為珪以與叔虞,曰:
「以此封若。」
성왕이 숙우와 놀다가 오동나무 잎을 오려 珪를 만들어 숙우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이것으로 너를 봉하노라. ”라고 하였다.
史佚因請擇日立叔虞。
史佚이 이로 인하여 날을 잡아 숙우를 제후로 세우라고 청하였다.
成王曰:
「吾與之戲耳。」
성왕이 말하였다.
“나는 그와 장난을 쳤을 뿐이다. ”
史佚曰:
「天子無戲言。言則史書之,禮成之,樂歌之。」
사일이 말하였다.
“천자에게는 농담이 없습니다.
천자가 말씀하시면 사관이 기록하고, 예절로 완성하고 음악으로 노래합니다. ”
於是遂封叔虞於唐。
이리하여 숙우를 唐에 봉하였다.
唐在河、汾之東,方百里,故曰唐叔虞。
당은 황하와 汾河 동쪽의 사방100리의 땅이기 때문에 唐叔虞라고 불렀다.
姓姬氏,字子于。
성은 姬며 자는 子于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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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珪: 圭와 같다. 옥으로 만든 笏. 천자가 제후에게 신분의 信標로 주는 符信인데, 禮를 행할 때 잡는다.
▶ 若: 너.
▶ 史佚: 사관 尹佚. 본명은 尹佚이지만 주나라 초기인 문왕과 무왕 때 태사직을 역임하였기 때문에 史佚로 불리었다.
唐叔子燮,是為晉侯。
당숙의 아들 燮이 晉侯가 되었다.
晉侯子寧族,是為武侯。
진후의 아들 寧族이 곧 武侯이다.
武侯之子服人,是為成侯。
무후의 아들 服人이 곧 成侯이다.
成侯子福,是為厲侯。
성후의 아들 福이 곧 厲侯이다.
厲侯之子宜臼,是為靖侯。
여후의 아들 宜臼가 곧 靖侯이다.
靖侯已來,年紀可推。
정후 이후는 연대를 추산할 수 있다.
自唐叔至靖侯五世,無其年數。
당숙으로부터 정후에 이르는 5대는 재위 연수의 기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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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晉侯: 숙우는 본래 唐侯에 봉해졌으나 그의 아들 섭보가 요임금의 옛터인 진수 가로 옮겨 晉으로 개명하였다.
靖侯十七年,周厲王迷惑暴虐,國人作亂,厲王出奔于彘,大臣行政,故曰「共和」。
정후17년(기원전842년)에 周厲王이 미혹되고 포학하여 국인이 난을 일으키니 여왕은 彘로 달아났으며, 대신들이 정치를 대행했으므로 ‘共和’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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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共和: 周나라의 厲王이 國人暴動으로 쫓겨나고 召穆公과 周定公이 공동으로 왕을 대신하여 執政하던 시기를 뜻하며, 왕이 없이 정치가 이루어지는 ‘共和制’란 말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기원전841년~기원전828년) 이 공화 원년부터 사기의 <12제후연표>가 시작되고 있다. <사기 본기 권04. 주본기>
十八年,靖侯卒,子釐侯司徒立。
정후18년(기원전841년)에 여후가 죽고 아들 釐侯 司徒가 즉위하였다.
釐侯十四年,周宣王初立。
희후14년(기원전827년), 주나라 宣王이 막 즉위하였다.
十八年,釐侯卒,子獻侯籍立。
희후18년(기원전823년), 희후가 죽고 아들 獻侯 籍이 즉위하였다.
獻侯十一年卒,子穆侯費王立。
헌후가 재위11년(기원전812년)에 죽고, 아들 穆侯費王이 즉위하였다.
穆侯四年,取齊女姜氏為夫人。
목후4년(기원전808년), 齊의 여자 姜氏를 부인으로 맞았다.
七年,伐條。生太子仇。
목후7년(기원전805년)에 條 땅을 정벌하였다. 태자 仇를 낳았다.
十年,伐千畝,有功。
목후10년(기원전802년)에 千畝를 정벌하여 공을 세웠다.
生少子,名曰成師。
목후가 작은아들을 낳아 成師라 이름지었다.
晉人師服曰:
「異哉,君之命子也!
太子曰仇,仇者讎也。
少子曰成師,成師大號,成之者也。
名自命也;物自定也。
今適庶名反逆,此後晉其能毋亂乎?」
晉 사람 師服이 말하였다.
“괴이하구나, 군주가 아들 이름을 지음이여!
태자를 仇라 했는데 구란 원수이다.
그리고 작은아들은 成師라 했는데, 성사란 큰 이름으로 큰일을 이루는 자이다.
이름은 나름의 召命이 있고, 사물은 나름 정해진 질서가 있다.
지금 적자와 서자의 이름이 거꾸로 거스르니, 훗날 晉에 혼란이 없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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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取: 娶와 통용된다. 아내로 맞이하다.
▶ 條: 晉 땅이다.
▶ 師服: 晉의 대부.
▶ 太子曰仇: 당초에 晉穆侯의 부인 강씨가 條와 전쟁 때에 태자를 낳으니 그 이름을 ‘仇’라 하고, 그의 동생이 千苗의 전쟁 때 태어나니 그 이름을 ‘成師’라 하였다. 태자는 후일 文侯가 된다.
‘仇’는 전쟁으로 서로 원수가 된 데에서 뜻을 취한 것이며 ‘成師’는 大軍을 이룬 데에서 뜻을 취한 것이다.
▶ 千畝: 地名.
▶ 適庶名反逆: 穆侯는 작은아들 桓叔을 사랑하여, 두 아들의 이름을 모두 전쟁에서 취하여 지었지만 붙인 뜻이 달랐기 때문에 師服이 桓叔의 무리가 반드시 강성하여 晉을 전복시킬 줄을 안 것이다. 그러므로 이름으로 인하여 완곡한 말로 넌지시 간한 것이다.
二十七年,穆侯卒,弟殤叔自立,太子仇出奔。
목후27년(기원전785년)에 목후가 죽고, 아우 殤叔이 스스로 즉위하니 태자 仇는 달아났다.
殤叔三年,周宣王崩。
상숙3년(기원전782년)에 주나라 선왕이 세상을 떠났다.
四年,穆侯太子仇率其徒襲殤叔而立,是為文侯。
상숙4년(기원전781년)에 목후의 태자 仇가 그의 무리를 이끌고 상숙을 습격하여 즉위하니 그가 文侯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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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殤叔: 주나라의 제후국인 晉의 제10대 군주.
▶ 文侯: 晉文侯는 춘추시대 晉의 제11대 임금이다. 이름은 仇이고 穆侯의 아들이다. 목후 때 태자가 되었다가 목후가 죽고 동생 殤叔이 즉위하자 달아났다. 나중에 무리를 이끌고 상숙을 기습한 뒤 晉의 군주가 되었다.
文侯十年,周幽王無道,犬戎殺幽王,周東徙。
문후10년(기원전771년)에 주나라 幽王이 無道하여 犬戎이 유왕을 죽이자, 주나라는 동쪽으로 천도하였다.
而秦襄公始列為諸侯。
秦襄公이 처음으로 제후의 반열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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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文侯: 晉文侯. 춘추시대 晉의 제11대 군주로 이름은 仇이고, 穆侯의 아들이다. 목후 때 태자가 되었다. 목후가 죽고 동생 殤叔이 즉위하자 달아났다. 나중에 무리를 이끌고 상숙을 기습한 뒤 晉의 군주가 되었다.
▶ 周東徙: 주나라는 犬戎에 의해 수도 鎬京이 함락되고, 洛邑으로 遷都하게 되어 西周시대가 끝나고 東周시대가 이어지게 되었다.
三十五年,文侯仇卒,子昭侯伯立。
문후35년(기원전746년)에 문후 仇가 죽고, 아들 昭侯 伯이 즉위하였다.
昭侯元年,封文侯弟成師于曲沃。
소후 원년(기원전745년)에 문후의 동생 成師를 曲沃에 봉하였다.
曲沃邑大於翼。
곡옥의 城邑이 翼城보다 커졌다.
翼,晉君都邑也。
익성은 晉君의 도읍이다.
成師封曲沃,號為桓叔。
成師는 곡옥에 봉해져 桓叔으로 불렸다.
靖侯庶孫欒賓相桓叔。
정후의 庶孫 欒賓이 환숙의 재상이 되었다.
桓叔是時年五十八矣,好德,晉國之眾皆附焉。
환숙이 이때 58세였는데 덕을 즐겨 베푸니, 晉 백성들이 모두 그를 따랐다.
君子曰:
「晉之亂其在曲沃矣。
末大於本而得民心,不亂何待!」
군자가 말하였다.
“晉의 亂은 곡옥에 있다.
가지가 줄기보다 크고 민심까지 얻었으니 어찌 난이 없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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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昭侯: 晉昭侯. 西周 때 晉의 군주로 이름은 伯이고, 文侯의 아들이다. 晉文侯가 죽고 아들인 昭侯가 즉위한 원년에 숙부 환숙의 세력이 강해지자 위험을 느껴 마음이 불안한 나머지 成師를 봉해 曲沃伯으로 삼았다. 재위 7년에 대신 潘父에게 살해당하고, 곡옥 환숙이 왕위에 올랐다.
▶ 成師: 桓叔. 진목후의 아들이며 진문후의 동생. 진소후가 曲沃伯에 봉하니 곡옥 환숙으로 불렸다.
▶ 曲沃: 曲沃城. 서주 초기에 唐晉이 발흥했던 곳으로 지금의 山西省 曲沃縣이다.
▶ 翼: 翼城. 문후 사후 세자 伯(소후)이 그 뒤를 이었으나 숙부 환숙의 강력한 세력을 두려워해 曲沃땅에 환숙을 봉해 曲沃伯이라 부르게 하였다. 그런데 곡옥은 수도 翼보다 넓어 여전히 환숙이 더 강하였다. 진소후 사후 익과 곡옥은 치열한 세력 경쟁을 벌였으나, 곡옥의 세력이 익에 비해 강성하여 곡옥백이 여러 차례 익을 쳐 군주들을 죽이거나 쫓아냈다. 익의 백성들은 곡옥백을 군주로 인정하지 않고 군주가 죽을 때마다 새 군주를 세우고 곡옥백을 쫓아냈기 때문에 싸움은 길어졌으나, 결국 곡옥 무공이 晉文侯계통의 마지막 군주인 진후 민을 죽이면서 끝나고 다시 하나로 통합되었다.
▶ 欒賓: 靖侯의 손자.
▶ 君子曰: 師服이 말하기를
“내가 듣건대 ‘국가의 존립은 수목과 같아서 根幹이 크고 枝葉이 작아야 안정할 수 있다. ’고 하였다.” <東萊博議 卷303-07>
七年,晉大臣潘父弒其君昭侯而迎曲沃桓叔。
소후7년(기원전739년), 晉의 대신 潘父가 그의 군주 昭侯를 시해하고, 곡옥 환숙을 맞아들였다.
桓叔欲入晉,晉人發兵攻桓叔。
환숙이 晉으로 들어가려 하니, 晉 사람들이軍을 일으켜 환숙을 공격하였다.
桓叔敗,還歸曲沃。
환숙은 패하여 곡옥으로 다시 돌아갔다.
晉人共立昭侯子平為君,是為孝侯。
晉 사람들이 함께 소후의 아들 平을 군주로 세우니 이가 孝侯이다.
誅潘父。
반보를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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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潘父: 晉소후 때의 大臣.
▶ 孝侯: 춘추시대 晉의 군주로 이름은 平이고, 昭侯의 아들이다. 大臣 潘父가 소후를 살해하고 曲沃 桓叔을 맞아 군주로 추대했으나 晉 사람들이 병사를 일으켜 환숙을 공격하였다. 환숙이 패하자 나라 사람들이 반보를 죽이고 그를 세웠다. 환숙의 아들 鮮이 봉호를 이어 曲沃莊伯이 되었다. 장백이 翼에서 효후를 살해하였다.
孝侯八年,曲沃桓叔卒,子鳝代桓叔,是為曲沃莊伯。
효후8년(기원전732년)에 곡옥 환숙이 죽고, 아들 鳝이 환숙을 대신하니 그가 곡옥 莊伯이다.
孝侯十五年,曲沃莊伯弒其君晉孝侯于翼。
효후15년(기원전725년)에 곡옥 장백이 그의 군주 진효후를 翼城에서 시해하였다.
晉人攻曲沃莊伯,莊伯復入曲沃。
晉 사람들이 곡옥 장백을 공격하자 장백은 다시 곡옥으로 들어갔다.
晉人復立孝侯子郄為君,是為鄂侯。
晉 사람들이 다시 효후의 아들 郄을 군주로 세우니 그가 鄂侯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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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曲沃莊伯: 晉文侯의 동생인 桓叔 成師의 아들로 이름은 鳝이다. 부친 환숙이 文侯 아들이자 조카인 昭侯에게서 曲沃땅을 분봉받아 영주가 되자 후에 그 자리를 계승하여 점차 세력을 확장함으로써 진공실을 사실상 능가하는 실력자로 성장하였다. 곡옥을 분봉해준 후 진 公室은 도읍 絳을 근거지로 삼으면서 국호를 翼으로 개명함으로써, 晉은 환숙 가문이 영유한 곡옥과 공실이 영유한 翼으로 이분되었다. 孝侯 15년(기원전725년)에 효후를 시해했으나 翼의 都邑人들이 장백을 공격해 곡옥으로 쫓아버린 뒤 효후의 아들 郄을 鄂侯로 옹립하였기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鄂侯二年,鲁隐公初立。<이 부분은 원문에는 실려 있지 않다>
악후2년(기원전722년), 魯의 隱公이 막 즉위하였다.
鄂侯六年卒。
악후는 재위6년(기원전718년) 만에 죽었다.
曲沃莊伯聞晉鄂侯卒,乃興兵伐晉。
곡옥 장백은 晉악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곧 병사를 일으켜 晉을 공격하였다.
周平王使虢公將兵伐曲沃莊伯,莊伯走保曲沃。
주나라 평왕이 虢公에게 군사를 이끌고 곡옥 장백을 토벌하게 하니, 장백은 달아나 곡옥을 지켰다.
晉人共立鄂侯子光,是為哀侯。
晉 사람들이 함께 악후의 아들 光을 옹립하니 그가 哀侯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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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平王: 周平王. 주나라의 제13대 왕이며 동주의 제1대 왕이다. 성은 姬, 이름은 宜臼이다. 西周의 마지막 왕인 周幽王의 아들이다. 서방의 이민족이 강성해져 주나라 영토를 침공하므로, 도읍인 鎬京을 버리고 동쪽의 洛邑(洛陽)으로 도읍을 옮겼다.
▶ 哀侯: 晉哀侯. 춘추시대 晉의 군주로 이름은 光이고, 孝侯의 손자이다. 재위2년 曲沃莊伯이 죽었다. 그 아들이 後嗣를 칭하니, 그가 曲沃武公이다. 재위8년 곡옥무공이 晉을 공격하여 애후를 포로로 잡았는데, 얼마 뒤 살해당하였다.
哀侯二年曲沃莊伯卒,子稱代莊伯立,是為曲沃武公。
애후2년(기원전716년)에 곡옥의 장백이 죽고, 그 아들 稱이 장백의 뒤를 이었는데 그가 曲沃武公이다.
哀侯六年,魯弒其君隱公。
애후6년(기원전712년), 魯에서 그들의 주군 隱公을 시해하였다.
哀侯八年,晉侵陘廷。
애후8년(기원전710년), 晉이 陘廷을 침공하였다.
陘廷與曲沃武公謀,九年,伐晉于汾旁,虜哀侯。
형정 사람들은 곡옥 무공과 모의하여 애후9년(기원전709년) 汾河 가에서 晉을 공격하여 애후를 사로잡았다.
晉人乃立哀侯子小子為君,是為小子侯。
晉 사람들이 애후의 아들 小子를 군주로 옹립하니 그가 小子侯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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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曲沃武公: 晉武公. 춘추시대 晉의 군주로 이름은 稱이고, 曲沃莊伯의 아들이다. 곡옥이 晉공실의 庶子로 땅을 봉해 받아 오랜 기간 晉과 왕위 쟁탈을 벌였다. 武公 7년 晉을 침공해 애후를 죽였다. 4년 뒤에는 晉小子侯를 살해하였다. 무공37년 晉侯 緡을 공격하여 멸하고 寶器를 周僖王에게 뇌물로 바쳐 희왕으로부터 晉君으로 인정을 받았다. 晉의 영토를 모두 병합한 뒤 이름을 晉武公으로 고쳤다. 2년 뒤 죽었다.
▶ 小子侯: 춘추시대 晉의 國君. 哀侯의 아들이다. 曲沃武公이 애후를 포로로 잡자 晉 사람들이 小子를 세워 侯로 삼았다. 곡옥은 더욱 강해지고 晉은 대처할 방법이 없었다. 소자후 4년 곡옥무공이 유인해 불러놓고 살해하였다.
小子元年,曲沃武公使韓萬殺所虜晉哀侯。
소자 원년(기원전709년), 곡옥 무공이 韓萬을 시켜 포로로 잡힌 애후를 죽였다.
曲沃益彊,晉無如之何。
곡옥이 더욱 강해졌지만, 晉은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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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小子: 小子侯. 춘추시대 晉의 군주로 哀侯의 아들이다. 曲沃 武公이 애후를 포로로 잡자 晉 사람들이 小子를 세워 侯로 삼았다. 소자4년 곡옥무공이 소자를 유인해 불러놓고 살해하였다.
▶ 韓萬: 曲沃 莊伯의 아우.
▶ 曲沃武公: 晉武公. 춘추시대 晉의 군주로 이름은 稱이고, 곡옥 曲沃 莊伯의 아들이다. 晉공실의 庶子가 곡옥 땅에 봉해져 오랜 기간 晉과 왕위 쟁탈을 벌였다. 武公 7년 晉을 정벌해 애후를 죽였다. 4년 뒤에는 晉小子侯를 살해하였다. 무공37년 晉侯緡을 공격하여 멸하고 寶器를 周僖王에게 뇌물로 바쳐 희왕으로부터 晉君으로 인정받았다. 晉의 영토를 모두 병합한 뒤 이름을 晉 武公으로 고쳤다. 2년 뒤 죽었다.
晉小子之四年,曲沃武公誘召晉小子殺之。
진소자 4년(기원전706년), 곡옥 무공이 晉小子를 유인하여 죽였다.
周桓王使虢仲伐曲沃武公,武公入于曲沃,乃立晉哀侯弟緡為晉侯。
周桓王이 虢仲을 보내 곡옥 무공을 토벌하자, 무공은 곡옥으로 도망했고, 괵중은 晉애후의 동생 緡을 晉侯로 옹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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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桓王: 周桓王. 주나라의 14대 왕으로 성은 姬, 이름은 林이다. 주평왕의 아들인 태자 洩父의 아들이다. 평왕이 사망했을 때 태자 예보가 이미 요절했기 때문에 즉위하였다.
▶ 虢仲: 주문왕의 동생으로 제(制, 지금의 허난성 싱양시) 땅에 봉해져 동괵이라 칭하며 주나라의 울타리 역할을 하였다. 여기서는 制를 말하는 듯.
▶ 緡: 晉侯 緡. 춘추시대 晉의 군주로 哀侯의 동생이다. 춘추시대 晉의 제17대 임금이다. 시호가 없어, 이름인 緡을 써서 진후 민이라고 한다.
晉侯緡四年,宋執鄭祭仲而立突為鄭君。
진후緡 4년(기원전703년)에 宋이 鄭의 대부 祭仲을 사로잡아 突을 鄭의 군주로 옹립하였다.
晉侯十九年,齊人管至父弒其君襄公。
진후민19년(기원전688년)에 齊사람 管至父가 그의 군주 襄公을 시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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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祭仲: 춘추시대 鄭의 중신이다. 제중은 장공의 맏아들인 태자 홀의 후견인이 되어 宋의 후원을 받고 있던 공자 돌의 견제를 물리치고, 정장공의 사후 태자 홀이 鄭의 군주가 되는 일을 도왔다. 宋의 군주 송장공은 크게 노하여 제중을 사로잡아 돌을 즉위시키지 않으면 살해하겠다고 협박하였다. 이에 제중은 태자 홀을 버리고 돌을 옹립하니 그가 곧 정여공이다.
▶ 襄公: 齊襄公. 춘추시대 齊의 군주로 이름은 諸兒, 莊公의 손자다. 12년 동안 재위했고 시호는 襄이다. 양공은 황음무도하여, 무고한 자를 죽이고, 이복동생인 노환공의 부인 문강과 사통하였으며 노환공을 모살하였으므로 인심을 크게 잃었다. 대부 연칭과 관지보가 병란을 일으켰고, 양공을 사로잡아 살해한 뒤 양공의 종제 공손 무지를 즉위시켰다.
晉侯二十八年,齊桓公始霸。
진후민28년(기원전681년)에 齊환공이 처음으로 覇者가 되었다.
曲沃武公伐晉侯緡,滅之,盡以其寶器賂獻于周釐王。
곡옥 무공이 진후 민을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그의 寶器를 모두 주나라 釐王에게 뇌물로 바쳤다.
釐王命曲沃武公為晉君,列為諸侯,於是盡併晉地而有之。
희왕은 곡옥 무공을 晉의 군주로 임명하고 제후의 반열에 오르게 했으며, 이에 무공은 晉의 땅 전부를 병합하여 차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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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齊桓公始霸: 제환공이 처음으로 패자를 칭한 것은 기원전679년 일이다.
▶ 盡以其寶器賂獻于周釐王: 곡옥 무공이 주희왕에게 왕명을 간청할 때의 일을 풍자한 노래가<詩經> <無衣>에 실려 있다. <詩經國風唐風無衣>
※無衣 : 이 시의 題名은 ‘옷이 없을까만’이다. <毛詩序>에 晉의 分家인 곡옥 땅의 武公이 宗國인 晉侯緡을 멸망시키고 晉을 차지한 다음, 그의 대부가 周僖王의 使臣에게 뇌물을 바치며 제후의 반열에 올려 달라고 왕명을 간청했을 때의 심정을 시인이 노래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衣七과 衣六을, 각각 侯伯과 天子의 卿들이 입는 옷으로 보고, 그러한 자리에 임명해 달라는 뜻으로 풀이한 것이라 하였다.
<無衣>
豈曰無衣七兮, 不如子之衣, 安且吉兮。
豈曰無衣六兮, 不如子之衣, 安且燠兮。
어찌 일곱 벌의 수놓은 옷이 없으리요, 그러나 천자가 내리신 옷만큼이나 편안하고 좋은 것 없어라.
어찌 여섯 벌의 수놓은 옷이 없으리요, 그러나 천자가 내리신 옷만큼이나 편안하고 따뜻한 것 없어라.
曲沃武公已即位三十七年矣,更號曰晉武公。
곡옥 무공은 즉위37년이 되어서 晉武公으로 호칭을 바꾸었다.
晉武公始都晉國,前即位曲沃,通年三十八年。
진무공이 처음으로 晉으로 도읍을 옮겼으니 이전 곡옥의 재위 기간까지 더하여 모두 38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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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晉武公始都晉國: 무왕의 아들 叔虞는 唐땅에 봉해졌으며, 숙우의 아들 燮父가 도읍을 晉水 가로 옮겨 晉으로 개명하였다. 증손자인 成侯가 曲沃으로 천도하고 穆侯에 이르러 絳으로 도읍을 옮겼으며, 昭侯이하는 翼으로 도읍을 옮겼다. 또한 곡옥 무공이 진을 병합하면서 絳으로 도읍했으며 景公은 新田으로 천도하였다. 여기서는 진무공이 처음으로 晉으로 도읍을 옮겨갔다는 뜻이리라.
武公稱者,先晉穆侯曾孫也,曲沃桓叔孫也。
무공 稱은 先晉 穆侯의 증손이며, 곡옥 환숙의 손자이다.
桓叔者,始封曲沃。
桓叔이 처음으로 곡옥에 봉해졌었다.
武公,莊伯子也。
무공은 곡옥항백의 아들이다
自桓叔初封曲沃以至武公滅晉也,凡六十七歲,而卒代晉為諸侯。
환숙이 처음 곡옥에 봉해진 이후 무공에 이르러 晉을 멸할 때까지 총 67년이 걸려 마침내 晉을 대체하여 제후가 되었다.
武公代晉二歲,卒。
무공이 晉을 대체한 지 2년 만에 죽었다.
與曲沃通年,即位凡三十九年而卒。
곡옥에서의 햇수를 합쳐 즉위한 지 총 39년 만에 죽은 것이다.
子獻公詭諸立。
아들 獻公 詭諸가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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獻公元年,周惠王弟穨攻惠王,惠王出奔,居鄭之櫟邑。
헌공 원년(기원전676년), 주혜왕의 동생 穨가 혜왕을 공격하자 혜왕은 도망쳐 鄭의 櫟邑에 머물렀다. |
▶ 頹: 王子 頹. 동주의 비정통 왕이다. 子頹라고 칭하기도 한다. 주장왕의 서자로, 주혜왕의 숙부이다. 장왕의 총애를 받아 혜왕 때 난을 일으켜 왕을 칭하였다. 혜왕측이 한 번은 반란군을 소자의 영읍인 溫으로 쫓아냈으나, 연과 위 두 나라가 자퇴를 지원해 혜왕이 쫓겨났다. 혜왕은 온으로 피했고 鄭의 여공은 자신이 13년간 망명할 때의 근거지인 櫟에서 혜왕을 맞이하였다. 자퇴는 겨울에 주나라 왕으로 등극하였다. 혜왕4년(기원전673년), 정백이 괵숙과 협력해 자퇴와 그 일당 다섯 대부를 죽이고 혜왕을 복위시켰다. <사기 권04. 周本紀>
五年,伐驪戎,得驪姬、驪姬弟,俱愛幸之。
헌공5년(기원전672년), 헌공이 驪戎을 정벌하여 驪姬와 여희의 여동생을 얻었는데, 그들 모두를 총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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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驪戎: 西戎의 별종으로 驪山에서 유목하며 지낸 데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의 陝西省 臨潼 일대 지역이다. 여융의 군주는 그 지위가 남작이었고 주나라와 같은 성씨인 姬姓이었다.
▶ 得驪姬、驪姬弟: 晉이 驪戎을 토벌할 때 여융의 군주가 驪姬와 여희의 여동생을 獻公에게 주니 그녀들을 데리고 돌아왔는데, 驪姬는 奚齊를 낳고 驪姬의 동생은 卓子를 낳았다.
▶ 驪姬: 춘추시대 晉獻公의 妃이다. 원래는 이민족인 驪戎군주의 딸이지만 헌공이 驪戎을 정벌하였을 때 사로잡혀 동생과 함께 진헌공의 後宮이 되었다. 헌공의 총애를 받아 왕비가 된 뒤 태자인 申生을 모함하여 죽이며 정치의 혼란을 가져왔다. 자신의 자식인 奚斉를 태자로 삼으려고 태자인 申生을 비롯해 重耳, 夷吾등을 모함하여 차례로 죽이려 하였다. 결국 태자인 신생은 죽었고 아버지인 晉獻公이 자신의 두 아들인 중이와 이오를 공격하는 상황까지 벌어지면서 晉의 정치는 큰 혼란에 빠졌다. <춘추좌씨전 魯僖公 4년, 기원전656년>
八年,士蒍說公曰:
「故晉之群公子多,不誅,亂且起。」
헌공8년(기원전670년)에 대부 士蔿가 헌공에게 권하였다.
“晉은 공자들이 많기 때문에 그들을 죽이지 않으면 난이 일어날 터입니다. ”
乃使盡殺諸公子,而城聚都之,命曰絳,始都絳。
이에 사람을 시켜 공자들을 다 죽이게 하고는 聚에 성을 쌓아 도읍으로 삼고 絳이라 하니 도읍으로서의 絳이 시작되었다.
九年,晉群公子既亡奔虢,虢以其故再伐晉,弗克。
헌공9년(기원전669년), 晉의 공자들이 虢으로 망명하자 虢은 이를 구실로 晉을 다시 정벌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十年,晉欲伐虢,士蒍曰:
「且待其亂。」
헌공10년(기원전668년), 晉이 虢을 공격하려고 하자 士蒍가 말하였다.
“그들의 내란을 잠시 기다리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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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士蒍: 晉의 대부.
▶ 說: 권고하다. 설득하다.
十二年,驪姬生奚齊。
헌공12년(기원전666년), 여희가 奚齊를 낳았다.
獻公有意廢太子,乃曰:
「曲沃吾先祖宗廟所在,而蒲邊秦,屈邊翟,不使諸子居之,我懼焉。」
헌공은 태자 신생을 폐위시킬 생각으로 말하였다.
“곡옥은 우리 선조의 종묘가 있는 곳이고, 蒲邑은 秦과 가까우며, 屈邑은 翟과 가까워 아들들이 그곳을 지키게 하지 않으면 내가 두렵다. ”
於是使太子申生居曲沃,公子重耳居蒲,公子夷吾居屈。
이에 태자 申生은 곡옥을, 공자 重耳는 포읍을, 공자 夷吾는 굴읍을 지키게 하였다.
獻公與驪姬子奚齊居絳。
헌공과 여희의 아들 해제는 絳에 머물렀다.
晉國以此知太子不立也。
晉 사람들은 이로써 태자 신생이 즉위하지 못할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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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申生: 晉獻公의 태자. 제강의 소생. 제강이 죽은 뒤 驪姬가 자신의 아들인 해제를 태자로 세우기 위해 그를 모함하니, 끝내 新城에서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 公子重耳: 춘추시대 제후국인 晋獻公의 둘째 아들이다. 헌공의 후처로 들어온 驪姬의 계략에 빠져 형인 申生이 사망하고 자신은 晉을 떠나 翟으로 망명하였다. 19년간 긴 망명생활을 마치고 마침내 秦의 도움으로 군사를 이끌고 귀국하여 晉文公에 올랐다.
▶ 曲沃: 桓叔이 봉해진 곳으로 先君의 宗廟가 있는 곳이다.
▶ 蒲: 지금의 平陽 蒲子縣.
▶ 屈: 지금의 平陽 北屈縣.
太子申生,其母齊桓公女也,曰齊姜,早死。
태자 신생의 어머니는 齊환공의 딸인 齊姜이었는데 일찍 죽었다.
申生同母女弟為秦穆公夫人。
신생의 同母女은 秦穆公의 부인이 되었다.
重耳母,翟之狐氏女也。
重耳의 어머니는 翟나라 狐氏의 딸이었다.
夷吾母,重耳母女弟也。
夷吾의 어머니는 중이 어머니의 여동생이었다.
獻公子八人,而太子申生、重耳、夷吾皆有賢行。
헌공의 아들은 여덟이었는데, 태자 신생과 공자 중이와 이오가 모두 현명하였다.
及得驪姬,乃遠此三子。
여희를 얻자 진헌공은 세 아들과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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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齊姜: 晉武公의 妾. 제환공의 딸로 晉武公의 후취가 되었다가 그 아들인 晉獻公 詭諸의 정부인이 되었다. 태자 신생과 후에 秦穆公의 부인이 되는 穆姬를 낳았으나 요절하였다.
▶ 繆公: 秦穆公 嬴任好. 秦의 군주. 繆은 穆으로도 쓴다.
이름은 任好이고, 秦德公의 셋째 아들이며, 春秋五覇의 한 사람이다. 재위기간 동안 어진 인재를 힘써 구해 百里奚과 蹇叔 등을 등용해 謀臣으로 삼았고, 올바른 정치에 전력을 기울여 국세가 날로 강해졌다.
十六年,晉獻公作二軍。
헌공16년(기원전662년), 진헌공이 二軍을 만들었다.
公將上軍,太子申生將下軍,趙夙御戎,畢萬為右,伐滅霍,滅魏,滅耿。
헌공은 상군을 통솔하고, 태자 신생은 하군을 통솔했으며, 趙夙이 헌공의 병거를 몰고, 畢萬은 호위를 담당하여 霍, 魏, 耿을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還,為太子城曲沃,賜趙夙耿,賜畢萬魏,以為大夫。
돌아와서 태자를 위해 곡옥에 성을 쌓고, 조숙에게 耿을 하사하고 필만에게는 魏를 하사하여 각각 대부로 삼았다.
士蒍曰:
「太子不得立矣。
分之都城,而位以卿,先為之極,又安得立!
不如逃之,無使罪至。
為吳太伯,不亦可乎,猶有令名。」
士蒍가 말하였다.
“태자께서는 군주가 될 수 없을 터입니다.
도성을 나누어 주고 또 경의 지위를 주어 미리 지극한 지위에 올랐으니, 어찌 군주가 될 수 있겠습니까!
도망가서 죄를 피하는 편이 낫겠습니다.
吳의 太伯처럼 좋은 명성을 남기는 것 또한 좋지 않겠습니까?”
太子不從。
태자는 따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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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晉獻公作二軍: 晉은 본래 1軍이었으며, 周나라 제도에 大國은 3軍, 次國은 2軍, 小國은 1軍이었다. 晉은 본래 大國이었으나, 曲沃武公이 宗國인 晉을 멸망시킨 후 周僖王이 곡옥무공에게 명하여 1軍으로 晉侯로 삼은 뒤부터 小國의 제도를 따랐다가 비로소 2軍을 만든 것이다.
▶ 趙夙: 晉獻公 16년에 霍, 魏, 耿을 정벌할 때 장수가 되었다.
▶ 戎: 兵車. 전차.
▶ 吳太伯: 周의 古公亶父의 장남으로 형제로는 仲雍과 季歷과 조카로는 주문왕이 있었다. 성은 姬. 太伯으로도 호칭되며, 자기 대신 동생 季歷에게 후계를 넘기려는 아버지의 뜻을 알아채고 동생 仲雍과 함께 이민족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달아났다. 춘추시대 吳의 초대 군주이자, 吳의 시조가 되었다. <사기 본기 권04. 주본기>
▶ 猶有令名: 비록 떠나더라도 아름다운 명성이 있을 것이니, 그냥 머물러 있다가 禍를 당하는 것보다 낫다는 말이다. 令名은 아름다운 명성.
卜偃曰:
「畢萬之後必大。
萬,盈數也;魏,大名也。
以是始賞,天開之矣。
天子曰兆民,諸侯曰萬民,今命之大,以從盈數,其必有眾。」
卜偃이 말하였다.
“畢萬의 후손들이 틀림없이 번창할 터이다.
萬은 가득 찬 숫자이고, 魏는 크다는 뜻이다.
이런 위 땅을 상으로 주었으니 하늘이 그 후손의 번창을 틔워줄 터이다.
천자가 통치하는 백성을 兆民이라 하고, 제후가 통치하는 백성을 만민이라고 하는데, 지금 큰 것을 명칭하기를 가득 찬 숫자에 따르게 하였으니, 그는 반드시 대중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
初,畢萬卜仕於晉國,遇屯之比。
당초 필만이 晉에서 벼슬하는 것이 길한지 점을 쳤더니 ‘屯’괘가 ‘比’괘로 변하는 점괘가 나왔다.
辛廖占之曰:
「吉。屯固比入,吉孰大焉。
其後必蕃昌。」
辛廖가 점괘를 말하였다.
“길하다. 屯은 단단하고 比는 들어간다는 뜻이니, 이보다 더 길한 괘가 무엇이겠는가.
그 후손이 필시 번창할 터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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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卜偃: 郭偃. 卜筮를 맡은 晉 大夫.
▶ 畢萬: 춘추시대 晉 사람. 畢公 高의 후예로, 晉獻公을 섬겼다. 헌공을 도와 耿, 霍, 魏를 멸망시켰다. 魏 땅에 봉해져서 大夫가 되었다.
▶ 魏: 巍와 통용된다. 높고 큰 모양. 魏字는 그 뜻이 ‘大’이다
▶ 遇屯之比: 屯卦(☵☳)가 比卦(☵☷)로 변한 卦를 만났다. 屯은 險難의 象이므로 堅固가 되고, 比는 親密의 象이므로 進入이 된다. 屯卦가 변하여 比卦가 되었기 때문에 대중을 규합하여 견고히 지킬 수 있다는 뜻이다. 필만은 魏땅에 봉해져 대부가 되었다.
▶ 辛廖: 晉 대부.
十七年,晉侯使太子申生伐東山。
헌공17년(기원전661년)에 헌공이 태자 신생에게 東山을 공격하게 하였다.
裏克諫獻公曰:
太子奉冢祀社稷之粢盛,以朝夕視君膳者也,故曰冢子。
君行則守,有守則從,從曰撫軍,守曰監國,古之制也。
夫率師,專行謀也;誓軍旅,君與國政之所圖也:非太子之事也。
師在制命而已,稟命則不威,專命則不孝,故君之嗣適不可以帥師。
君失其官,率師不威,將安用之?」
里克이 헌공에게 간하였다.
“태자는 종묘의 제사와 사직의 제물을 받들고, 아침저녁으로 군주의 음식을 살피는 까닭에 冢子라고 합니다.
군주가 행차하면 나라를 지키고, 지키는 사람이 있으면 군주를 수행하는데, 수행하는 것을 ‘撫軍’이라 하고 나라를 지키는 것을 ‘監國’이라 하는 것이 옛날의 제도입니다.
군대를 통솔함은 전담하는 자가 꾀를 내고,軍을 호령하는 일은 군주와 정경들이 꾀하는 것이지 태자의 일이 아닙니다.
군의 통솔은 명령의 제정에 달렸을 뿐인데, 모든 일을 군주에게 여쭙고 행하면 위엄이 서지 않고, 마음대로 명령하면 불효가 되는 까닭에, 군주의 嫡子는軍을 통솔해서는 안 됩니다.
군주가 관원을 임명하는 법도를 잃어서, 태자가軍을 거느려도 위엄이 서지 않으면 장차 어디에 쓰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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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東山: 헌공이 태자 신생에게 東山의 皐落氏를 토벌하게 하였다. 동산은 赤狄의 別種이다. 皐落은 그 氏族이다.
▶ 里克: 晉의 대부.
▶ 冢祀: 고대 제왕이나 제후가 종묘에 지내는 제사.
▶ 社稷: 일반적으로 국가를 말한다.
▶ 粢盛: 제사를 지낼 때 제기에 넣어 바치는 곡물. 粢는 곡식.
▶ 膳: 음식.
▶ 冢子: 太子·世子 또는 嫡長子들을 말한다.
▶ 撫軍: 군주를 도와軍을 위로하는 것을 말한다.
▶ 監國: 군주를 대신해서 국가를 감독하는 것.
▶ 誓: 군령을 내리다.
▶ 國政: 국가 정권. 여기서는 정권을 장악한 正卿을 말한다.
▶ 禀命: 명령을 받다.
▶ 專命: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제 마음대로 일을 처리하다
▶ 嗣適: 군주를 계승할 적자.
▶ 君失其官: 태자가軍을 통솔하면 관원을 임명하는 법도를 잃는 것이고, 태자가軍을 거느리고서 마음대로 명령을 내리면 불효가 되니, 태자가 장수가 되더라도 반드시 위엄이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公曰:
「寡人有子,未知其太子誰立。」
헌공이 말하였다.
“과인에게는 아들이 여럿 있으나, 누구를 태자로 세워야 할지 알 수 없다. ”
裏克不對而退,見太子。
이극이 대꾸하지 않고 물러나와 태자를 알현하였다.
太子曰:
「吾其廢乎?」
태자가 물었다.
“내가 폐위되겠는지요?”
裏克曰:
「太子勉之!
教以軍旅,不共是懼,何故廢乎?
且子懼不孝,毋懼不得立。
修己而不責人,則免於難。」
이극이 말하였다.
“태자께서는 노력하십시오!
군대에 명령을 내리면서 직분을 다하지 못할까 걱정한다면 무슨 까닭으로 폐위되겠습니까?
또 자식으로서 불효가 아닐까 걱정하시고 君位를 잇지 못할까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자신을 수양하고 남을 책망하지 않는다면 난을 면할 수 있을 터입니다. ”
太子帥師,公衣之偏衣,佩之金玦。
태자가軍을 거느리고 출정함에, 헌공이 태자에게 좌우 색이 다른 옷을 입게 하고, 청동제 패옥을 차게 하였다.
裏克謝病,不從太子。
이극은 병을 핑계로 태자를 따르지 않았다.
太子遂伐東山。
태자가 마침내 동산을 정벌하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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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未知其太子誰立: 내가 죽은 뒤에 누구를 임금으로 세워야 할지를 모르기 때문이라는 말이니, 이는 獻公이 태자를 廢하려는 뜻을 약간 드러낸 것이다.
▶ 共: 恭과 통용된다. 직분을 다하다.
▶ 偏衣: 좌우의 색깔이 다른 옷으로 그 반쪽의 색깔이 獻公의 服色과 같은 것으로 태자가 헌공의 분신임을 표시한 것이다.
▶ 金玦: 군대 통솔권의 표지. 쇠로 만든 玦로 병권을 준 것이다.
十九年,獻公曰:
「始吾先君莊伯、武公之誅晉亂,而虢常助晉伐我,又匿晉亡公子,果為亂。
弗誅,後遺子孫憂。」
헌공19년(기원전659년)헌공이 말하였다.
“당초 우리 선군이신 장백과 무공께서 晉의 난을 평정하셨을 때, 虢은 늘 晉을 도와 우리 곡옥을 공격했고, 또 晉에서 망명한 공자를 숨겨주더니 과연 난을 일으켰다.
주벌하지 않으면 후일 자손에게 근심을 남길 터이다. ”
乃使荀息以屈產之乘假道於虞。
이에 荀息에게 屈邑에서 나오는 말을 타고 虞에게 길을 빌리게 하였다.
虞假道,遂伐虢,取其下陽以歸。
虞가 길을 빌려주자 虢을 토벌하여 下陽을 취하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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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荀息: 晉의 上卿.
※脣亡齒寒: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다는 의미로,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 이해관계가 서로 밀접하여 한쪽이 망하면 다른 한쪽도 보전하기 어려움을 비유한 말이다.
춘추시대의 친한 이웃 나라였던 虞와 虢이 晉의 上卿인 荀息의 이간 계책에 넘어가 서로 돌보지 않게 된 결과, 두 차례에 걸쳐 晉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아 둘 다 멸망한 사례에서 유래된 말이다. <춘추좌씨전魯僖公5기원전655년>
獻公私謂驪姬曰:
「吾欲廢太子,以奚齊代之。」
헌공이 사사로이 여희에게 말하였다.
“내가 태자를 폐하고 해제로 그를 대신하고자 한다. ”
驪姬泣曰:
「太子之立,諸侯皆已知之,而數將兵,百姓附之,柰何以賤妾之故廢適立庶?
君必行之,妾自殺也。」
여희가 울면서 말하였다.
“태자를 세운 일을 제후들이 다 알고 있으며, 여러 차례軍을 거느려 백성이 그를 따르는데 천첩 때문에 어떻게 태자를 폐하고 서자를 세운단 말씀입니까?
군주께서 꼭 그렇게 하시겠다면 첩은 자살하겠습니다. ”
驪姬詳譽太子,而陰令人譖惡太子,而欲立其子。
여희는 태자를 치켜세우는 척하면서, 몰래 사람을 시켜 태자를 나쁜 말로 비방하여 자기 아들을 태자로 세우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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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詳: 佯과 통용된다. 가장하다.
▶ 譖惡: 나쁜 말로 비방하다.
二十一年,驪姬謂太子曰:
「君夢見齊姜,太子速祭曲沃,歸釐於君。」
헌공21년(기원전657)년에 여희가 태자에게 말하였다.
“군주께서 꿈에 齊姜을 보셨다 하니 태자께서는 서둘러 곡옥으로 가서 제사를 올리고 돌아와 군주에게 제사고기를 바치세요. ”
太子於是祭其母齊姜於曲沃,上其薦胙於獻公。
이에 태자는 곡옥에서 그의 어머니 제강에게 제사를 올리고 돌아와 제사 고기를 헌공에게 올렸다.
獻公時出獵,置胙於宮中。
헌공이 마침 사냥 나갔으므로 고기를 궁중에 두었다.
驪姬使人置毒藥胙中。
여희가 사람을 시켜 고기에 독약을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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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齊姜: 태자 申生의 어머니로 齊桓公의 딸이다.
▶ 釐: 禧와 통용된다. 제사에 쓰는 고기.
▶ 薦: 올리다.
▶ 胙: 제사에 쓴 고기.
居二日,獻公從獵來還,宰人上胙獻公,獻公欲饗之。
이틀 뒤 헌공이 사냥에서 돌아오자 요리사가 제사 고기를 헌공에게 올렸고, 헌공이 그것을 맛보려 하였다.
驪姬從旁止之,曰:
「胙所從來遠,宜試之。」
옆에 있던 여희가 제지하여 말하였다.
“제사 고기가 먼 곳에서 왔으니 시식해 보아야 합니다. ”
祭地,地墳;與犬,犬死;與小臣,小臣死。
술을 땅에 뿌리니 땅이 부풀어 올랐으며, 고기를 개에게 주니 개가 죽었고, 어린 환관에게 주니 어린 환관도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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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宰人: 요리사.
▶ 饗: 享과 통용된다. 맛보다.
▶ 墳: 부풀어 오르다.
▶ 小臣: 궁중의 宦官.
驪姬泣曰:
「太子何忍也!
其父而欲弒代之,況他人乎?
且君老矣,旦暮之人,曾不能待而欲弒之!」
여희가 울면서 말하였다.
“태자가 어찌 이리도 잔인합니까!
그 아버지를 죽이고 대신하려 하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이겠습니까?
더구나 군주께서 연로하시어 머지않았는데도 그걸 못 기다리고 시해하려 하다니!”
謂獻公曰:
「太子所以然者,不過以妾及奚齊之故。
妾願子母辟之他國,若早自殺,毋徒使母子為太子所魚肉也。
始君欲廢之,妾猶恨之;
至於今,妾殊自失於此。」
헌공에게 말하였다.
“태자가 이렇게 하는 까닭은 신첩과 奚齊 때문에 지나지 않습니다.
신첩은 아들과 다른 나라로 피하길 원하오나, 만약 일찌감치 자살하더라도 헛되이 우리 모자를 태자가 어육으로 만들지 않게 해주십시오.
당초 국군께서 태자를 폐위하려 함에 첩이 오히려 옳지 않게 여겼는데, 지금 보니 첩이 크게 실수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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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旦暮: 아침과 저녁. 단시간.
▶ 辟: 避와 통용된다. 피하다.
▶ 徒: 헛되이
太子聞之,奔新城。
태자가 이 소식을 듣고 곡옥의 新城으로 달아났다.
獻公怒,乃誅其傅杜原款。
헌공은 노하여 태자의 스승 杜原款을 죽였다.
或謂太子曰:
「為此藥者乃驪姬也,太子何不自辭明之?」
누군가 태자에게 말하였다.
“독약을 쓴 사람은 여희인데 태자께서는 어째서 스스로 해명하지 않으십니까?”
太子曰:
「吾君老矣,非驪姬,寢不安,食不甘。
即辭之,君且怒之。不可。」
태자가 말하였다.
“우리 군주께서 연로하여 여희가 아니면 잠도 편히 못 주무시고 먹어도 맛을 모르시오.
해명하면 군주께서 여희에게 화를 낼 터이니 안 됩니다. ”
或謂太子曰:
「可奔他國。」
또 어떤 자가 태자에게 말하였다.
“다른 나라로 달아나야 합니다.”
太子曰:
「被此惡名以出,人誰內我?
我自殺耳。」
태자가 말하였다.
“이런 오명을 뒤집어쓴 채 나간들 누가 날 받아주겠소?
나는 자살할 뿐이오. ”
十二月戊申,申生自殺於新城。
12월 무신일에 신생이 新城에서 자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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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新城: 태자가 머무르고 있는 곡옥에 태자를 위해 쌓은 성이라 하여 신성이라 이름 붙여진 곳이다.
▶ 杜原款: 태자 신생의 스승.
▶ 内: 納과 통용된다. 받아들이다.
此時重耳、夷吾來朝。
이때 중이와 이오가 헌공에게 조회를 드렸다.
人或告驪姬曰:
「二公子怨驪姬譖殺太子。」
누군가가 여희에게 알렸다.
“두 공자는 여희께서 모함하여 태자를 죽였다고 원한을 품고 있습니다. ”
驪姬恐,因譖二公子:
「申生之藥胙,二公子知之。」
여희는 두려워하여 두 공자를 모함하였다.
“신생이 제사 고기에 독약을 넣는 것을 두 공자도 알고 있었습니다. ”
二子聞之,恐,重耳走蒲,夷吾走屈,保其城,自備守。
두 공자가 이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여 중이는 포읍으로, 이오는 굴읍으로 달아나서, 성을 지키며 자신을 수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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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重耳: 춘추전국시대 제후국인 晋獻公의 둘째 아들이다. 헌공의 후처로 들어온 驪姬의 계략에 빠져 형인 申生이 자살하자 晉을 떠나 적으로 망명하였다. 중이의 동생 夷吾가 晉惠公에 올랐다. 하지만 重耳는 동생 이오의 견제로 晉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고 자객으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齊로 달아났다. 혜공이 죽자 19년간의 긴 망명생활을 마치고 마침내 秦의 도움으로 군사를 이끌고 귀국하여 晉文公에 올랐다.
▶ 夷吾: 晉惠公. 춘추시대 晉의 군주로 이름은 夷吾이며, 獻公의 셋째 아들이다. 헌공이 총희 驪姬의 참언으로 태자 申生이 자살하자 자신에게도 위해가 닥칠 것을 두려워해 梁으로 달아났다. 여희의 소생 奚齊가 즉위하자, 신하 里克이 해제와 卓子를 죽이고 그를 晉의 군주로 옹립하였다.
初,獻公使士蒍為二公子筑蒲、屈城,弗就。
당초 헌공은 士蔿에게 두 공자를 위해 포읍과 굴읍의 성을 쌓게 했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있었다.
夷吾以告公,公怒士蒍。
이오가 이를 헌공에게 보고하자 헌공은 사위에게 화를 냈다.
士蒍謝曰:
「邊城少寇,安用之?」
사위가 사죄하며 말하였다.
“변방의 성읍에 도적도 적은데 어디다 쓰려 하십니까?”
退而歌曰:
「狐裘蒙茸,一國三公,吾誰適從!」
사위가 물러나오며 노래하였다.
“여우 가죽으로 만든 옷 털이 어수선하구나, 한 나라에 공자가 셋, 나는 누구를 따라야 할까!”
卒就城。及申生死,二子亦歸保其城。
마침내 성이 완성되었고, 신생이 죽자 두 공자도 각자 그들의 성으로 돌아가 지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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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士蔿: 晉의 대부.
▶ 蒙茸: 잡초가 자라 무성한 모양.
二十二年,獻公怒二子不辭而去,果有謀矣,乃使兵伐蒲。
헌공22년(기원전656년), 헌공은 두 아들이 인사도 없이 떠남에 화를 내며 정말 모반이 있다고 생각하여軍을 보내 포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蒲人之宦者勃鞮命重耳促自殺。
포성 사람 환관 勃鞮가 중이에게 명령하여 자살하기를 재촉하였다.
重耳踰垣,宦者追斬其衣袪。
중이는 담을 넘었고, 환관이 쫓아가서 중이의 옷소매를 베었다.
重耳遂奔翟。
중이는 마침내 翟으로 도망갔다.
使人伐屈,屈城守,不可下。
헌공은 굴읍도 공격하게 했으나 굴읍은 성을 굳게 지켜 함락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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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袪: 옷소매.
是歲也,晉復假道於虞以伐虢。
이해 晉은 다시 虢을 공격하기 위해 虞에 길을 빌려달라고 하였다.
虞之大夫宮之奇諫虞君曰:
「晉不可假道也,是且滅虞。」
우의 대부 宮之奇가 虞의 군주에게 간하였다.
“晉에 길을 빌려주어서는 안 됩니다, 또한 虞도 멸할 터입니다. ”
虞君曰:
「晉我同姓,不宜伐我。」
虞의 군주가 말하였다.
“晉은 우리와 同姓이니 우리나라를 공격하지 않을 터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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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宮之奇諫: 宮之奇는 춘추시대 虞의 대부이다. 晉이 虢을 치려면 虞를 통과해야 하므로 晉에서는 虞 임금에게 많은 뇌물을 주고 길을 빌려주기를 요청하였다. 이때 宮之奇는 脣亡齒寒의 이치를 들어 길을 빌려주지 말라고 간하였다. 그러나 뇌물에 눈이 먼 虞 군주가 그의 말을 듣지 않자, 궁지기는 가족을 데리고 虞를 떠났는데, 晉은 虢을 정벌하고 돌아오는 길에 虞마저 멸망시켰다.
▶ 虢: 주나라의 동성 제후국으로, 서주 문왕의 두 동생 괵중과 괵숙을 시조로 삼는 여러 제후국들을 말한다.
▶ 虞: 주나라 太王의 둘째 아들인 仲雍의 증손 虞仲에게 봉해 준 나라이다. 虢이 虞의 남쪽에 있어 晉이 虢을 정벌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虞를 경유해야 하였다.
宮之奇曰:
「太伯、虞仲,太王之子也,太伯亡去,是以不嗣。
虢仲、虢叔,王季之子也,為文王卿士,其記勳在王室,藏於盟府。
將虢是滅,何愛于虞?
且虞之親能親於桓、莊之族乎?
桓、莊之族何罪,盡滅之。
虞之與虢,脣之與齒,脣亡則齒寒。」
宮之奇가 말하였다.
“태백과 虞仲은 태왕의 아들들이었는데, 태백은 도망갔기 때문에 자리를 잇지 못했습니다.
괵중과 괵숙은 왕계의 아들이자 문왕의 卿士가 되어 주나라 왕실에 공훈을 세운 기록이 맹약 문서부에 간직되어 있습니다.
虢조차 멸망시키려 하거늘 어찌 虞에 애정을 두겠습니까?
또 虞가 환숙과 장백의 자손보다 더 친근할 수 있겠습니까?
환숙과 장백 자손이 무슨 죄가 있기에 모두 죽였습니까?
虞와 虢는 입술과 이 같아서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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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太白: 吳太伯. 춘추시대 吳의 초대 군주이자, 吳의 시조이다. 周의 古公亶父의 장남으로 형제로는 仲雍과 季歷과 조카로는 주문왕이 있었다. 성은 姬. 太伯으로도 호칭되며, 자기 대신 동생 季歷에게 후계를 넘기려는 아버지의 뜻을 알아채고 동생 仲雍과 함께 이민족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달아났다. 춘추시대 吳의 초대 군주이자, 吳의 시조가 된다. <사기 본기 권04. 주본기>
▶ 虞仲: 태백의 동생은 仲雍인데 虞仲이라고도 한다. 무왕이 虞에 봉한 제후의 이름이 虞仲이므로 우중은 두 사람인 셈이다. 後孫 虞仲은 先祖 虞仲(중옹)의 증손자이다.
▶ 虢仲, 虢叔: 계력의 아들. 주문왕의 동생.
▶ 王季: 季歷. 성은 姬이고, 이름은 季歷이다. 商나라 시대의 제후국이던 周의 군주였으므로 公季나 周公季라고 하며, 뒷날 손자인 주나라 武王에게 왕으로 추존되어 王季나 周王季 등으로도 불린다. 亶父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생모는 太姜이다. 太任을 아내로 맞이해 昌과 虢仲, 虢叔을 낳았다. <사기 권31. 오태백세가>
▶ 盟府: 功臣의 官府.
▶ 桓, 莊之族何罪,盡滅之: 桓叔과 莊伯의 자손은 모두 獻公의 6촌 형제인데, 獻公은 그들의 위협을 근심하여 모두 살해하였다.
▶ 脣亡則齒寒: 脣亡齒寒.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다는 의미로,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 이해관계가 서로 밀접하여 한쪽이 망하면 다른 한쪽도 보전하기 어려움을 비유한 말이다. 춘추시대의 절친한 이웃 나라였던 虞와 虢이 晉의 上卿인 荀息의 이간 계책에 넘어가 서로 돌보지 않게 된 결과, 두 차례에 걸쳐 晉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아 둘 다 멸망한 사례에서 유래된 말이다. <춘추좌씨전魯僖公5기원전655년>
虞公不聽,遂許晉。
虞의 군주는 듣지 않고 마침내 晉에 길을 빌려주기로 하였다.
宮之奇以其族去虞。
궁지기는 그 가족을 데리고 虞를 떠났다.
其冬,晉滅虢,虢公丑奔周。
그해 겨울에 晉은 虢을 멸망시켰고, 괵공 丑는 주나라로 달아났다.
還,襲滅虞,虜虞公及其大夫井伯百里奚以媵秦穆姬,而修虞祀。
돌아오는 길에 虞를 습격하여 멸망시키고, 虞군주와 대부 井伯 그리고 百里奚를 포로로 잡아 秦穆姬의 媵臣으로 삼고, 虞의 제사를 대신 지냈다.
荀息牽曩所遺虞屈產之乘馬奉之獻公,獻公笑曰:
「馬則吾馬,齒亦老矣!」
순식이 전에 虞에 주었던 굴읍의 말을 끌고 와서 헌공에게 바치니 헌공은 웃으면서 말하였다.
“말은 내 말인데, 이빨을 보니 많이 늙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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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虢公丑: 虢公 丑. 虢의 군주로 周나라 王季의 아들이자 文王의 아우인 虢仲의 후손인 虢丑이다.
▶ 媵: 媵臣. 고대 제후의 딸이 시집갈 때 데리고 가던 하인이나 몸종.
▶ 修虞祀: 虞의 제사는 周王이 虞公에게 명하여 그 경내 산천의 신에게 지내게 한 제사이다. 晉이 이미 虞를 멸하였기 때문에 虞를 대신해 제사 지낸 것이다.
▶ 曩: 전에. 앞서.
▶ 齒亦老矣: 순식이 연로했음을 비유한 것이다.
二十三年,獻公遂發賈華等伐屈,屈潰。
헌공23년(기원전655년), 헌공은 賈華등을 보내 굴읍을 공격하니 굴읍 사람들이 모두 달아났다.
夷吾將奔翟。
이오가 翟나라로 달아나려 하였다.
冀芮曰:
「不可,重耳已在矣,今往,晉必移兵伐翟,翟畏晉,禍且及。
不如走梁,梁近於秦,秦彊,吾君百歲後可以求入焉。」
冀芮가 말하였다.
“안 됩니다. 중이가 이미 거기에 있는데 지금 갔다가는 晉이 분명軍을 이동시켜 적을 칠 터이고, 翟은 晉을 무서워하니 화가 우리에게 미칠 터입니다.
梁으로 도망가는 것이 나으니, 양은 秦과 가깝고 秦은 강하여 우리 군주가 죽으면 귀국을 요청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遂奔梁。
그리하여 이오는 梁으로 달아났다.
二十五年,晉伐翟,翟以重耳故,亦擊晉於齧桑,晉兵解而去。
헌공25년(기원전653년) 晉이 翟을 공격하자 翟은 중이 때문에 晉을 齧桑에서 공격했고, 晉의 軍은 물러나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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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冀芮: 晉의 大夫. 본래 성명은 郤芮이나 그의 식읍이 冀여서 冀芮라고 이른 것이다. 夷吾가 돌아와 군주 자리에 오른 뒤 卿이 되었으나 文公(重耳)을 죽이려다 秦穆公의 꾀임에 빠져 죽임을 당하였다.
▶ 百歲後: 百歲之後. 죽은 뒤.
當此時,晉彊,西有河西,與秦接境,北邊翟,東至河內。
이 무렵 晉은 강성하여 서쪽으로 河西를 차지하여 秦과 국경을 접했고, 북쪽으로는 翟에 이르고, 동쪽으로는 河內에 닿았다.
驪姬弟生悼子。
여희의 여동생이 悼子(卓子)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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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悼子: 春秋左氏傳과 秦本紀, 齊世家등에는 ‘卓子’로 되어 있다. 悼子는 오류이다.
▶ 卓子: 춘추시대 晉獻公의 庶子로, 驪姬의 여동생이 낳았다. 헌공이 죽자 荀息이 奚齊를 세웠는데 里克이 해제를 죽였다. 순식이 탁자를 다시 세우자 이극이 朝에서 탁자를 죽였다.
二十六年夏,齊桓公大會諸侯於葵丘。
헌공26년(기원전652년)여름에 齊환공이 葵丘에서 제후들과 크게 회맹을 가졌다.
晉獻公病,行後,未至,逢周之宰孔。
晉 獻公은 병으로 늦게 출발하여 도착하지 않았을 때 마침 주나라 왕실의 宰孔을 만났다.
宰孔曰:
「齊桓公益驕,不務德而務遠略,諸侯弗平。
君弟毋會,毋如晉何。」
재공이 말하였다.
“齊환공이 갈수록 교만해져 덕을 닦는 일에 힘쓰지 않고 변방을 공략하는 데만 힘쓰니, 제후들이 불평하고 있습니다.
군주께서 마음 놓고 회맹에 가지 않으셔도 晉을 어떻게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獻公亦病,復還歸。
헌공 역시 병이 심해져 다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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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葵丘之會: 齊桓公의 주도로 제후들이 宋의 葵丘에서 회맹한 모임이다.
▶ 弟: 第와 통하여 마음 놓다. 얼마든지. 허사 第 참조
▶ 宰孔: 주나라의 太宰벼슬에 있는 孔이다.
病甚,乃謂荀息曰:
「吾以奚齊為後,年少,諸大臣不服,恐亂起,子能立之乎?」
헌공의 병이 심해지자 荀息에게 말하였다.
“내가 해제에게 뒤를 잇게 할 터인데 나이가 어려 대신들이 불복하고 난을 일으킬까 두렵소. 그대가 해제를 옹립할 수 있겠소?”
荀息曰:
「能。」
순식이 말하였다.
“가능합니다. ”
獻公曰:
「何以為驗?」
헌공이 말하였다.
“무엇을 증거로 삼겠소?”
對曰:
「使死者復生,生者不慚,為之驗。」
순식이 대답하였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도 산 자로서 부끄럽지 않다]는 것을 증거로 삼겠습니다. ”
於是遂屬奚齊於荀息。
이에 해제를 순식에게 付屬하였다.
荀息為相,主國政。
순식을 재상으로 삼아 국정을 주도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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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荀息: 晉의 上卿. 驪姬의 아들인 奚齊의 스승이다.
▶ 屬: 부탁하다.
秋九月,獻公卒。
헌공26년 가을 9월에 헌공이 죽었다.
裏克、邳鄭欲內重耳,以三公子之徒作亂,謂荀息曰:
「三怨將起,秦、晉輔之,子將何如?」
裏克과 邳鄭은 重耳를 맞아들이고자 세 공자의 무리로 난을 일으키고는 순식에게 말하였다.
“세 공자의 무리가 원한으로 일어나고, 秦과 晉이 그들을 돕고 있으니 그대는 어떻게 하려는가?”
荀息曰:
「吾不可負先君言。」
순식은 말하였다.
“나는 선군의 말씀을 어길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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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秋九月: 獻公 26년으로 기원전651년이다.
▶ 內: 받아들이다.
▶ 三公子之徒: 申生‧重耳‧夷吾 세 공자를 따르는 사람들을 말한다.
▶ 裏克: 里克. 晉獻公의 책사이자 권신. 무공과 전략에 뛰어나 진헌공 시기에 虞·虢을 정벌하는 데 절대적인 공을 세웠다. 헌공이 죽자 荀息이 여희의 소생인 奚齊를 세웠는데 里克이 해제를 죽였다. 순식이 헌공의 서자인 탁자를 다시 세우자 이극이 朝에서 탁자를 죽였다. 晉惠公 이오에 의하여 賜死되었다.
▶ 丕鄭: 晉의 대부. 里克의 거사를 도왔다.
十月,裏克殺奚齊于喪次,獻公未葬也。
10월에 이극이 헌공의 빈소에서 해제를 살해하니, 헌공을 장사지내지 못하였다.
荀息將死之,或曰不如立奚齊弟悼子而傅之,荀息立悼子而葬獻公。
순식이 따라 죽으려 하는데, 누군가 해제의 동생 도자를 옹립하여 그를 돕는 것이 낫다고 하여, 순식이 도자를 세우고 헌공의 葬事를 치렀다.
十一月,裏克弒悼子于朝,荀息死之。
11월에 이극이 조정에서 도자를 시해하자 순식은 따라서 죽었다.
君子曰:
「詩所謂 『白珪之玷,猶可磨也,斯言之玷,不可為也』, 其荀息之謂乎!
不負其言。」
군자들이 말하였다.
“<시경>에 ‘백옥의 반점은 그래도 갈아버릴 수 있으나 말이 잘못되면 어쩔 도리가 없다’라고 한 것은 순식을 두고 한 말이리라!
자신의 말을 어기지 않았다. ”
初,獻公將伐驪戎,卜曰 「齒牙為禍」。
당초 헌공이 여융을 정벌할 즈음 占을 쳤는데 ‘치아가 화근이다’라고 하였다.
及破驪戎,獲驪姬,愛之,竟以亂晉。
여융을 깨뜨리고 여희를 얻어 총애하였으나 결국은 그 때문에 晉에 난리를 초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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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喪次: 부모의 상에 상주가 머무르는 곳
▶ 卓子: 晉獻公의 庶子로, 驪姬의 여동생이 낳았다. 이극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 白珪之玷: <詩經大雅抑>에 “흰 玉의 결점은 그래도 갈아버릴 수 있지만, 말의 결점은 갈아 없앨 수 없다. (白圭之玷, 尙可磨也. 斯言之玷, 不可爲也.)
옥의 결점은 오히려 갈아서 평평하게 할 수 있지만 임금이 정치와 교화는 한번 잘못하면 누가 되돌릴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으니, 더욱 근신해야 한다는 뜻이다.
▶ 珪: 玉.
▶ 玷: 옥의 반점. 缺陷.
▶ 卜曰「齒牙為禍」: 獻公이 驪戎정벌의 길흉을 두고 점을 치게 하자 史蘇가 점을 쳐보고서 말하기를, “나타난 조짐에 의한 占辭에 갈라져 나간 두 개의 금이 만나는 지점에 뼈가 물려져 치아 사이에서 희롱하니 驪戎과 晉이 서로 겨룰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齒牙는 거북의 등딱지에 드러난 두 줄의 금에 들쭉날쭉하게 터진 모습이 마치 사람의 이빨 모양 같다 하여 이른 말이다.
裏克等已殺奚齊、悼子,使人迎公子重耳於翟,欲立之。
이극 등이 해제와 도자를 죽인 후, 翟에 사람을 보내어 공자 重耳를 맞아들여서 옹립하고자 하였다.
重耳謝曰:
「負父之命出奔,父死不得修人子之禮侍喪,重耳何敢入!
大夫其更立他子。」
중이가 사양하며 말하였다.
“아버지의 명을 어기고 나라 밖으로 도망쳤고,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도 자식의 예로 상례를 치르지 못한 이 중이가 어찌 감히 들어가겠소!
대부께서는 다른 아들을 세우시오. ”
還報裏克,裏克使迎夷吾於梁。
돌아와 이극에게 보고하자, 이극은 梁에 있는 이오를 맞이하게 하였다.
夷吾欲往,呂省、郤芮曰:
「內猶有公子可立者而外求,難信。
計非之秦,輔彊國之威以入,恐危。」
이오가 가려 하자 呂省과 郤芮가 말하였다.
“안에 세울 만한 공자가 있는데도 밖에서 구하니 믿기 어렵습니다.
秦에 가서 강한 나라의 위엄을 빌리지 않고 들어가면 아마 위험하겠습니다. ”
乃使郤芮厚賂秦,約曰:
「即得入,請以晉河西之地與秦。」
이에 극예에게 후한 뇌물을 秦에 주고 약속하게 하였다.
“입국할 수 있다면 晉의 河西 땅을 秦에 주겠습니다.”
及遺裏克書曰:
「誠得立,請遂封子於汾陽之邑。」
이극에게도 편지를 보내어 말하였다.
“정말 君位에 오른다면 汾陽의 읍에 그대를 봉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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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夷吾: 晉惠公. 춘추시대 晉의 군주로 이름은 夷吾이며, 獻公의 셋째 아들이다. 총희 驪姬의 참언으로 태자 申生이 자살하자, 자신에게도 위해가 닥칠까 두려워하여 梁으로 달아났다. 여희의 소생 奚齊가 즉위하자, 신하 里克이 해제와 卓子를 죽이고 그를 맞았다. 秦繆公에게 河西의 땅을 주겠다면서 귀국하기를 부탁하였다.
▶ 呂省: 呂甥. 晉 大夫. 呂甥은 字를 子金이라고 하며, 呂省‧瑕甥‧瑕呂鮐甥 등으로도 쓴다.
▶ 郤芮: 冀芮. 晉 大夫. 본래 성명은 郤芮이나 그의 식읍이 冀여서 冀芮라고도 한다. 夷吾가 돌아와 군주에 오른 뒤 卿이 되었으나 文公(:重耳)을 죽이려다 秦穆公의 꾀임에 빠져 죽임을 당하였다.
秦繆公乃發兵送夷吾於晉。
秦穆公은 곧軍을 일으켜 이오를 晉으로 호송하였다.
齊桓公聞晉內亂,亦率諸侯如晉。
齊桓公은 晉에 내란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역시 제후를 이끌고 晉으로 갔다.
秦兵與夷吾亦至晉,齊乃使隰朋會秦俱入夷吾,立為晉君,是為惠公。
秦의 군대와 이오가 晉에 이르자 齊는 隰朋을 시켜 秦과 합류하여 함께 이오를 입국시켜 晉의 군주로 옹립하니 그가 惠公이다.
齊桓公至晉之高梁而還歸。
제환공은 晉의 高梁까지 갔다가 돌아갔다.
惠公夷吾元年,使邳鄭謝秦曰:
「始夷吾以河西地許君,今幸得入立。
大臣曰:『地者先君之地,君亡在外,何以得擅許秦者?』
寡人爭之弗能得,故謝秦。」
혜공 이오 원년(기원전650년)에 邳鄭을 秦에 보내 사죄하게 하였다.
“처음 이오가 하서를 군주께 드리기로 하고 지금 다행히 귀국하여 즉위하였습니다.
대신들이 말하기를,
‘땅은 선군의 땅인데 군주가 나라 밖에 망명하였다가 어찌 마음대로 秦에 주겠다고 허락하실 것이겠습니까?’
라고 하기에 과인이 그들과 다투기까지 했으나 어쩔 수 없어 秦에 사죄합니다.”
亦不與裏克汾陽邑,而奪之權。
또 이극에게는 汾陽邑을 주지 않고 권력을 빼앗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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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夷吾: 晉惠公. 晉의20대 군주. 여희의 간계로 태자 신생이 자결하고 내란이 발생하자 梁으로 피신했다가 里克·呂甥등의 활약으로 여희 일파가 숙청되자 돌아와 齊의 군주가 되었다.
四月,周襄王使周公忌父會齊、秦大夫共禮晉惠公。
4월에 주襄王이 周公 忌父를 보내 齊와 秦의 대부와 회합하고 함께 晉惠公을 예우하도록 하였다.
惠公以重耳在外,畏裏克為變,賜裏克死。
혜공은 중이가 국외에 있고 이극이 변란을 일으킬까 두려워 이극에게 죽음을 내렸다.
謂曰:
「微裏子寡人不得立。
雖然,子亦殺二君一大夫,為子君者不亦難乎?」
그리고는 말하였다.
“그대가 없었더라면 과인은 자리에 오르지 못했을 터이다.
그렇지만 그대 역시 두 군주와 한 대부를 죽였으니, 그대 때문에 군주노릇 하기가 또한 어렵지 않겠는가?”
裏克對曰:
「不有所廢,君何以興?
欲誅之,其無辭乎?
乃言為此!臣聞命矣。」
이극이 대답하였다.
“폐위가 없었다면 군주께서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겠습니까?
저를 죽이고 싶은데 어찌 핑계 댈 말이 없겠습니까?
그렇게 말씀하시니 신은 명을 따르겠습니다!”
遂伏劍而死。
그리고는 칼에 엎어져 죽었다,
於是邳鄭使謝秦未還,故不及難。
이때 邳鄭은 사신으로 사죄하러 秦에로 갔다가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난리에 미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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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周公忌父: 周나라의 卿士. 여름 4월에 周公忌父‧王子黨이 齊隰朋과 회합하여 惠公을 晉侯로 세웠다. <춘추좌씨전魯僖公10기원전650년>
▶ 微: 無. 없다.
▶ 二君一大夫: 군주는 奚齊와 卓子이고 대부는 荀息이다.
晉君改葬恭太子申生。
진혜공이 恭太子 申生을 改葬하였다.
秋,狐突之下國,遇申生,申生與載而告之曰:
「夷吾無禮,余得請於帝,將以晉與秦,秦將祀余。」
가을에 狐突이 곡옥에 갔다가 꿈에서 신생을 만났는데, 신생이 수레를 함께 타고 수레를 몰게 하면서 말하였다.
“이오가 무례하여 내가 상제께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장차 晉을 秦에게 주어 秦이 나를 제사지내게 될 터이다. ”
狐突對曰:
「臣聞神不食非其宗,君其祀毋乃絕乎?
君其圖之。」
호돌이 대답하였다.
“신이 듣기에 신령은 그 종친이 아니면 제사를 받지 않는다는데, 그렇다면 군의 제사가 끊어지는 것 아닙니까?
군께서는 이 점을 살피십시오. ”
申生曰:
「諾,吾將復請帝。
後十日,新城西偏將有巫者見我焉。」
신생이 말하였다.
“좋다, 내가 다시 상제께 청해보겠다.
열흘 뒤 新城 서쪽 편에 무당이 있어 나를 볼 것이다. ”
許之,遂不見。
호돌이 그러겠노라 하자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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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下國: 新城을 말하며 즉 곡옥이다. 곡옥에 종묘가 있고 绛에 있기 때문에 하국이라 한 것이다.
▶ 改葬: 獻公때 申生의 장사를 예를 차려 지내지 않았던 까닭에 다시 태자의 예로 장례를 치르고자 개장한 것이다.
▶ 恭太子: 태자 申生을 말하며 시호가 共(: 恭)이어서 공태자라 불렸다.
▶ 夷吾無禮: 夷吾가 申生을 위해 改葬하고 諡號까지 올렸는데도 무례하다고 한 것에 대해 혹자는 夷吾가 賈君을 간음한 일을 가리켜 말한 것이라고 하였다.
▶ 狐突: 狐突은 본래 申生의 마부였기 때문에 다시 수레에 올라 수레를 몰게 한 것이다.
及期而往,復見,申生告之曰:
「帝許罰有罪矣,弊於韓。」
기한이 되어 호돌이 갔더니 다시 나타나 신생이 호돌에게 말하였다.
“상제께서 죄 있는 자를 벌하라고 허락하셨으니 韓原에서 패할 것이다. ”
兒乃謠曰:
「恭太子更葬矣,後十四年,晉亦不昌,昌乃在兄。」
아이들이 이에 노래하였다.
“恭태자의 무덤을 개장했다네,
14년이 지나면 晉은 번창하지 못한다네.
번창함은 형에게 있다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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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敝: 패배하다.
▶ 昌乃在兄: 重耳를 말한다. 춘추시대 제후인 晋獻公의 둘째 아들이다. 헌공의 후처로 들어온 驪姬의 계략에 빠져 형인 申生이 사망하자 자신은 晉을 떠나 적으로 망명하였다. 헌공이 죽고 마침내 여희의 아들이 왕위에 올랐지만 측근에 의해 살해되었고, 중이의 동생 夷吾가 晉의 惠公에 올랐다. 하지만 重耳는 동생 이오의 견제로 晉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고 자객으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齊로 달아났다. 혜공이 죽자 19년간의 긴 망명생활을 마치고 마침내 秦의 도움으로 군사를 이끌고 귀국하여 文公에 올랐다.
邳鄭使秦,聞裏克誅,乃說秦繆公曰:
「呂省、郤稱、冀芮實為不從。
若重賂與謀,出晉君,入重耳,事必就。」
비정은 秦에 사신으로 갔다가 裏克이 誅殺된 소식을 듣고 秦목공을 설득하였다.
“呂省, 郤稱, 冀芮는 실제로는 따르지 않고 있습니다.
만약 후한 뇌물로 함께 모의하면 晉軍을 내쫓고 중이를 입국시키는 일은 분명 성사되겠습니다. ”
秦繆公許之,使人與歸報晉,厚賂三子。
秦繆公은 이를 허락하고, 사람을 비정과 함께 보내어, 晉에 돌아가 보고하게 하고 세 사람에게 많은 뇌물을 주었다.
三子曰:
「幣厚言甘,此必邳鄭賣我於秦。」
세 사람이 말하였다.
“선물은 후하고 言辭는 달콤하니, 이것은 비정이 우리를 秦에 팔려는 것이 분명하다. ”
遂殺邳鄭及裏克、邳鄭之黨七輿大夫。
그리고는 邳鄭과 裏克·邳鄭의 黨人 일곱 대부를 죽였다.
邳鄭子豹奔秦,言伐晉,繆公弗聽。
비정의 아들 邳豹는 秦으로 달아나서 晉을 공격해야 한다고 말했으나 목공이 듣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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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丕鄭: 晉의 대부로 이극의 거사를 도왔다.
▶ 秦繆公: 秦穆公 嬴任好. 晉의 군주. 繆은 穆으로도 쓴다. 이름은 任好이고, 秦德公의 셋째 아들이며, 春秋五覇의 한 사람이다. 재위기간 동안 어진 인재를 힘써 구해 百里奚과 蹇叔 등을 등용해 謀臣으로 삼았고, 올바른 정치에 전력을 기울여 국세가 날로 강해졌다.
▶ 呂省: 呂甥. 晉 大夫. 呂甥은 字가 子金이라고 하며, 呂省‧瑕甥‧瑕呂‧鮐甥 등으로도 쓴다.
▶ 郤稱, 冀芮: 晉의 大夫. 기예의 본래 이름은 郤芮이나 그의 식읍이 冀여서 冀芮라고도 한다.
▶ 七輿大夫: 신생이 통솔했던 군대의 대부들을 말한다. (共華‧賈華‧叔堅‧騅歂‧纍虎‧特宮‧山祁)
▶ 邳豹: 晉의 대부 邳鄭의 아들.
惠公之立,倍秦地及裏克,誅七輿大夫,國人不附。
혜공 즉위하여 秦에게 땅을 준다는 것과 이극에게 한 약속을 어긴 데다, 일곱 대부를 죽이니 國人들이 따르지 않았다.
二年,周使召公過禮晉惠公,惠公禮倨,召公譏之。
혜공2년(기원전649년), 주나라가 召公 過에게 晉惠公을 禮訪하게 했는데, 혜공이 오만하게 굴자 소공이 그를 조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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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惠公: 晉惠公. 춘추시대 晉의 군주로 이름은 夷吾이며, 獻公의 셋째 아들이다. 총희 驪姬의 참언으로 태자 申生이 자살하자 자신에게도 위해가 닥칠 것을 두려워해 梁으로 달아났다. 여희의 소생 奚齊가 즉위하자, 신하 里克이 해제와 卓子를 죽이고 그를 맞았다. 秦繆公에게 河西의 땅을 주겠다면서 귀국하기를 부탁하였다.
▶ 倍: 背와 통용된다. 倍는 ‘등질 패’. 배반하여 버리다. 파기하다.
▶ 召公過: 周나라의 卿士. 召穆公의 후손이며 이름은 過.
四年,晉饑,乞糴於秦。
혜공4년(기원전647년), 晉에 기근이 들자 秦에 식량을 사겠다고 청하였다.
繆公問百里奚,百里奚曰:
「天菑流行,國家代有,救菑恤鄰,國之道也。與之。」
목공이 百里奚에게 묻자 백리해가 말하였다.
“天災는 돌고 도는 것이라 나라마다 번갈아 생기니, 재난을 구원하고 이웃을 구휼하는 것은 나라의 도리입니다. 주도록 하십시오. ”
邳鄭子豹曰:
「伐之。」
비정의 아들 邳豹가 말하였다.
“저들을 정벌합시다. ”
繆公曰:
「其君是惡,其民何罪!」
진목공이 말하였다.
“그 군주는 모질지만, 그 백성들에 무슨 죄가 있는가!”
卒與粟,自雍屬絳。
결국 식량을 보내니 그 행렬이 雍에서 絳邑까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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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饑: 곡식이 흉년 든 것을 이른다.
▶ 糴: 식량을 사다.
▶ 屬: 이어지다.
五年,秦饑,請糴於晉。
혜공5년(기원전646년), 秦에 기근이 들어 晉에게 식량을 사겠다고 청하였다.
晉君謀之,慶鄭曰:
「以秦得立,已而倍其地約。
晉饑而秦貸我,今秦饑請糴,與之何疑?
而謀之!」
晉혜공이 이를 상의하자 慶鄭이 말하였다.
“秦 때문에 즉위하고 나자, 땅을 주기로 한 약속을 어겼습니다.
晉에 기근이 들었을 때 秦은 우리에게 양식을 팔았으며, 지금 秦에 기근이 들어 식량을 사겠다고 청하는데, 주는 일에 무엇을 의심하십니까?
상의한단 말입니까!”
虢射曰:
「往年天以晉賜秦,秦弗知取而貸我。
今天以秦賜晉,晉其可以逆天乎?
遂伐之。」
虢射이 말하였다.
“지난해 하늘이 晉을 秦에게 주어도, 秦은 그 기회를 취할 줄 모르고 우리에게 식량을 팔았습니다.
지금 하늘이 秦을 晉에게 주는데 晉이 하늘의 뜻을 거스를 수 있습니까?
그러니 秦을 공격해야 합니다. ”
惠公用虢射謀,不與秦粟,而發兵且伐秦。
혜공은 괵석의 계략을 채용하여 秦에 식량을 주지 않고軍을 일으켜 秦을 공격하였다.
秦大怒,亦發兵伐晉。
秦은 크게 노하여 역시軍을 일으켜 晉을 공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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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慶鄭: 춘추시대 晉의 대부.
▶ 虢射: 춘추시대 晉의 대부.
六年春,秦繆公將兵伐晉。
혜공6년(기원전645년)봄에 秦목공이軍을 이끌고 晉을 침공하였다.
晉惠公謂慶鄭曰:
「秦師深矣,柰何?」
晉혜공이 경정에게 말하였다.
“晉의軍이 깊숙이 들어왔는데 어찌해야 하겠는가?”
鄭曰:
「秦內君,君倍其賂;
晉饑秦輸粟,秦饑而晉倍之,乃欲因其饑伐之:其深不亦宜乎!」
경정이 대답하였다.
“秦이 군주를 귀국시켰는데 군주께서는 땅을 주기로 한 약속을 저버렸습니다.
우리 晉에 흉년이 들었을 때 秦은 식량을 보냈는데, 秦에 기근이 들자 晉은 배반하여 기근을 틈타 저들을 공격하였으니, 깊숙이 쳐들어오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晉卜御右,慶鄭皆吉。
이에 晉은 수레와 호위 담당을 점쳤는데 경정이 모두 좋다고 하였다.
公曰:
「鄭不孫。」
혜공은 말하였다.
“경정은 불손하다.”
乃更令步陽御戎,家仆徒為右,進兵。
이에 步陽에게 병거를 몰게 하고 家僕徒를 호위로 바꾸게 하여 진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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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卜御右: 兵車의 오른쪽에 타고서 병거에 탄 군주나 장수를 보호할 책임을 지는 무사를 점쳐 정하는 일로, 그렇게 결정된 사람을 車右라고 한다. 兵車는 장수가 병거의 왼쪽에 자리하고, 모는 사람이 중앙에 위치하고, 무력을 갖춘 사람이 오른쪽에서 비상사태를 대비한다.
九月壬戌,秦繆公、晉惠公合戰韓原。
9월 임술일에 秦繆公과 晉惠公이 韓原에서 교전하였다.
惠公馬騺不行,秦兵至,公窘,召慶鄭為御。
혜공의 말이 깊은 수렁에 빠져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데, 秦의 병사가 접근하자 진 혜공이 군색하여 경정을 불러 수레를 몰게 하였다.
鄭曰:
「不用卜,敗不亦當乎!」
遂去。
경정이 말하기를,
“점괘를 채용하지 않으셨으니 패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라고 하고는 그냥 가버렸다.
更令梁繇靡御,虢射為右,輅秦繆公。
다시 梁繇靡에게 전차를 몰게 하고, 괵석에게 호위를 맡기고 진목공을 맞받아쳤다.
繆公壯士冒敗晉軍,晉軍敗,遂失秦繆公,反獲晉公以歸。
목공의 장사들이 晉軍을 패퇴하니 晉의 軍은 패하여 마침내 진목공을 놓쳤으며, 오히려 목공이 혜공을 사로잡아 돌아갔다.
秦將以祀上帝。
秦이 혜공을 죽여 상제에게 제사를 드리고자 하였다.
晉君姊為繆公夫人,衰绖涕泣。
진혜공의 누이는 목공의 부인이었는데 상복을 입고 끊임없이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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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韓原: 晉의 땅.
▶ 騺: 무겁다. 혜공의 병거를 끄는 말이 깊은 수렁에 빠졌다. <國語 晉語 三卷>
▶ 輅: 迓와 통용된다. 맞받아치다.
▶ 晉君姊為繆公夫人: 秦穆公의 부인은 晉獻公의 딸로 진혜공의 누이이다. 穆姬라고도 한다.
▶ 衰绖: 상복. 衰는 상복‘최’. 绖은 상복을 입을 때 머리에 쓰는 首絰과 허리에 감는 腰絰.
公曰:
「得晉侯將以為樂,今乃如此。
且吾聞箕子見唐叔之初封,曰
『其後必當大矣』,晉庸可滅乎!」
秦繆公이 말하였다.
“晉侯를 잡아 기뻐해야 하거늘 지금 이런 일이 생길 줄이야.
또 내가 듣기에 箕子가 唐叔이 처음 제후에 봉함을 보고 말하기를,
‘그 후손이 분명 창성할 것이다. ’
라 하였으니 晉을 어찌 멸망시키겠는가!”
乃與晉侯盟王城而許之歸。
이에 진후와 왕성에서 맹약을 하고 귀국을 허락하였다.
晉侯亦使呂省等報國人曰:
「孤雖得歸,毋面目見社稷,卜日立子圉。」
혜공도 여생 등을 보내 국인들에게 알렸다.
“내가 비록 돌아갈 수는 있지만 사직을 뵐 면목이 없으니, 길일을 잡아 子圉를 세우도록 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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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庸: 어찌. 허사 庸 참조
▶ 子圉: 晉公 子圉. 晉懷公. 춘추시대 晉의 군주로 이름은 圉이고, 惠公의 아들이다. 秦에 인질로 갔다가 혜공이 병든 소식을 듣고 달아나 돌아왔다. 즉위한 뒤 秦穆公이 앙심을 품고 공자 重耳를 요구하면서 병사를 일으켜 晉 국경으로 쳐들어갔다. 중이가 사람을 시켜 高梁에서 회공을 죽였다. 재위 기간은 5개월이었다.
晉人聞之,皆哭。
晉 사람들이 그 사실을 듣고 모두 통곡하였다.
秦繆公問呂省:
「晉國和乎?」
秦목공이 여생에게 물었다.
“晉은 평화로운가?”
對曰:
「不和。
小人懼失君亡親,不憚立子圉,曰『必報讎,寧事戎、狄』。
其君子則愛君而知罪,以待秦命,曰『必報德』。
有此二故,不和。」
여생이 대답하였다.
“평화롭지 못합니다.
소인들은 군주와 부모를 잃을까 겁을 낼 뿐 자어를 세우는 일은 걱정하지 않으면서 ‘원수를 반드시 갚겠다, 융이나 적을 섬길지언정’
이라고 말합니다.
군자들은 군주를 사랑하나 그 죄를 아는지라, 秦의 명령만 기다리면서
‘은혜에 반드시 보답할 것이오. ’라고 말합니다.
의견이 이렇듯 둘로 나뉘었으니 평화롭지 못합니다.”
於是秦繆公更舍晉惠公,餽之七牢。
이에 진목공은 혜공의 숙소를 바꾸고 7牢의 음식을 보내 제후로 대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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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七牢: 소, 양, 돼지 각 한 마리를 ‘1뢰’ 라고 한다. 7뢰는 후한 음식을 보낸 것이다.
十一月,歸晉侯。
11월에 혜공을 晉으로 돌려보냈다.
晉侯至國,誅慶鄭,修政教。
혜공은 귀국하자 경정을 죽이고 정치와 교화에 힘을 쏟았다.
謀曰:
「重耳在外,諸侯多利內之。」
모의하여 말하였다.
“중이가 국외에 있고 제후들은 대부분 그를 귀국시키는 것이 이롭다고 생각한다. ”
欲使人殺重耳於狄。
사람을 보내 狄에서 중이를 죽이려 하였다.
重耳聞之,如齊。
중이가 이를 듣고 齊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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八年,使太子圉質秦。
혜공8년(기원전641년), 태자 圉를 秦에 인질로 보냈다.
初,惠公亡在梁,梁伯以其女妻之,生一男一女。
당초 혜공이 梁에 망명했을 때 양의 군주 梁伯이 딸을 혜공에게 아내로 주어 1남 1녀를 낳았다.
梁伯卜之,男為人臣,女為人妾,故名男為圉,女為妾。
양백이 점을 쳐보니 사내아이는 남의 신하가 되고 여자아이는 남의 첩이 된다고 나온 까닭에 사내아이는 圉, 여자아이는 妾이라 이름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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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太子圉質秦: 진목공15년(기원전645년) 11월에 晉군주 이오를 돌려보냈고, 이오는 하서 지역을 바치는 한편 기원전641년에 태자 圉를 秦에 인질로 보내게 하였다. 秦은 종실의 딸을 圉의 아내로 삼게 하였다. 이 무렵 秦의 땅은 동쪽으로 황하까지 이르렀다.
[史記本紀]권05. 秦本紀
▶ 子圉: 晉公子圉. 晉懷公. 춘추시대 晉의 군주로 이름은 圉이고, 惠公의 아들이다. 秦에 인질로 갔다가 혜공이 병든 소식을 듣고 달아나 돌아왔다. 즉위한 뒤 진 秦穆公이 앙심을 품고 공자 重耳를 요구하면서 병사를 일으켜 晉 국경으로 쳐들어갔다. 중이가 사람을 시켜 高梁에서 회공을 죽였다. 재위 기간은 5개월이었다.
▶ 故名男為圉,女為妾: 子圉가 秦의 인질이 되었을 때 妾은 秦의 宦女가 되었다.
十年,秦滅梁。
혜공10년(기원전641년), 秦이 梁를 멸망시켰다.
梁伯好土功,治城溝,民力罷怨,其眾數相驚,曰「秦寇至」,民恐惑,秦竟滅之。
양백이 토목건축을 좋아하여 성벽을 쌓고 해자를 파는 등 백성의 힘을 고달프게 하니 원성이 많았으며, 그 무리들이 여러 차례 “秦 도적놈들이 쳐들어온다!”며 서로 소란을 떨어 백성이 두려워하고 미혹하였으므로 秦이 결국 梁를 멸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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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罷: 疲와 통용된다. 고달프다.
十三年,晉惠公病,內有數子。
혜공13년(기원전638년), 晉惠公이 병이 났는데 그에게는 국내에 자식이 여럿 있었다.
太子圉曰:
「吾母家在梁,梁今秦滅之,我外輕於秦而內無援於國。
君即不起,病大夫輕,更立他公子。」
태자 圉가 말하였다.
“내 外家는 梁에 있는데 梁이 지금 秦에게 멸망당했으니, 내가 밖으로는 秦에 무시당하고 국내에서는 구원받을 곳이 없다.
군주께서 병에서 일어나지 못한다면 대부들이 경솔하게 다른 공자로 바꾸어 옹립하지 않을까 걱정이다. ”
乃謀與其妻俱亡歸。
이에 그의 아내와 함께 도망쳐 돌아갈 일을 모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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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吾母家在梁: 공자 圉의 어머니가 梁伯의 딸이다.
▶ 病: 걱정스럽다.
秦女曰:
「子一國太子,辱在此。
秦使婢子侍,以固子之心。
子亡矣,我不從子,亦不敢言。」
秦 출신인 그의 아내가 말하였다.
“당신은 한 나라의 태자로서 이곳에서 치욕을 당하고 있습니다.
秦이 보잘것 없는 저에게 당신을 모시며 당신의 마음을 다잡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도망친다면 저는 당신을 따를 수도 없고 이 일을 감히 발설할 수도 없습니다. ”
子圉遂亡歸晉。
자어는 마침내 도망쳐 晉으로 돌아갔다.
十四年九月,惠公卒,太子圉立,是為懷公。
혜공14년(기원전637년) 9월에 혜공이 죽고, 태자 圉가 즉위하니 그가 懷公이다.
子圉之亡,秦怨之,乃求公子重耳,欲內之。
자어가 도망가자 秦은 그를 원망하여 곧 공자 重耳를 찾아 그를 귀국시키고자 하였다.
子圉之立,畏秦之伐也。
자어는 즉위한 후 秦이 침공할까 두려웠다.
乃令國中諸從重耳亡者與期,期盡不到者盡滅其家。
이에 나라에 명령을 내리기를, 중이를 따라 망명한 사람들에게 돌아올 기한을 주고, 기한이 다 하여도 돌아오지 않으면 그 집안을 멸문하겠다고 하였다..
狐突之子毛及偃從重耳在秦,弗肯召。
호돌의 아들 狐毛와 狐偃이 중이를 따라 秦에 있었는데 호돌이 불러들이려 하지 않았다.
懷公怒,囚狐突。
회공이 노하여 호돌을 가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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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狐突: 춘추시대 晋의 大夫. 태자 申生의 마부였다.
突曰:
「臣子事重耳有年數矣,今召之,是教之反君也。
何以教之?」
호돌이 말하였다.
“신의 아들이 중이를 모신지 벌써 몇 년인데, 지금 그들을 부르면 주군을 배반하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제가 어찌 그것을 가르치겠습니까?”
懷公卒殺狐突。
회공은 끝내 호돌을 죽였다.
秦繆公乃發兵送內重耳,使人告欒、郤之黨為內應,殺懷公於高梁,入重耳。
秦穆公이 군사를 일으켜 중이를 호송하여 귀국시키되, 사람을 보내 欒枝와 郤穀의 무리에게 내응하게 하여 고량에서 회공을 죽이고 중이를 맞아들이게 하였다.
重耳立,是為文公。
중이가 즉위하니 그가 文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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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欒郤: 欒枝와 郤穀.
晉文公重耳,晉獻公之子也。
晉文公 重耳는 晉獻公의 아들이다.
自少好士,年十七,有賢士五人:
曰趙衰; 狐偃咎犯,文公舅也;賈佗;先軫;魏武子。
젊어서부터 선비를 좋아하여 17세에 그에게 유능한 선비 다섯이 있었으니, 趙衰, 문공의 외삼촌인 狐偃 咎犯, 賈佗, 先軫, 魏武子이다.
自獻公為太子時,重耳固已成人矣。
헌공이 태자 때 중이는 이미 성인이었다.
獻公即位,重耳年二十一。
헌공이 즉위할 때 중이 나이 스물 하나였다.
獻公十三年,以驪姬故,重耳備蒲城守秦。
헌공13년(기원전664년)에 여희로 인해 중이는 蒲城에서 秦을 방어하였다.
獻公二十一年,獻公殺太子申生,驪姬讒之,恐,不辭獻公而守蒲城。
헌공21년(기원전656년)에 헌공이 태자 신생을 죽이고 여희가 중이를 모함하자 두려워하여 헌공에게 인사도 드리지 않고 달아나 포성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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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趙衰: 趙夙의 아우.
▶ 舅: 舅父. 외삼촌.
▶ 魏武子: 武子는 魏犨이다.
獻公二十二年,獻公使宦者履鞮趣殺重耳。
헌공22년(기원전655년)에 헌공이 환관 履鞮을 시켜 중이를 죽이게 하였다.
重耳踰垣,宦者逐斬其衣袪。
중이가 담을 넘어 도망가자 환관이 뒤쫓아 그 옷소매를 베었다.
重耳遂奔狄。狄,其母國也。
중이는 이에 狄으로 달아났다. 狄은 중이 어머니의 나라이다.
是時重耳年四十三。
이때 중이의 나이 마흔 셋이었다.
從此五士,其餘不名者數十人,至狄。
수행한 다섯 사람과 그밖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십여 명이 狄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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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趣: 재촉하다.
▶ 狄,其母國也: 重耳의 어머니는 翟나라 狐氏의 딸이다.
狄伐咎如,得二女:
以長女妻重耳,生伯鯈、叔劉;
以少女妻趙衰,生盾。
狄은 咎如를 공격하여 그의 두 딸을 포로로 잡아왔는데,
장녀는 重耳의 처로 삼아 伯鯈와 叔劉를 낳았고,
작은딸은 趙衰에게 아내로 주어 趙盾을 낳았다.
居狄五歲而晉獻公卒,裏克已殺奚齊、悼子,乃使人迎,欲立重耳。
중이가 狄에서 5년 머무르는 사이 晉獻公이 죽자, 이극이 해제와 도자를 살해하고 나서 사람을 보내 중이를 맞아들여 옹립하려 하였다.
重耳畏殺,因固謝,不敢入。
중이는 죽임을 두려워하고 한사코 사양하며 감히 入國하지 않았다.
已而晉更迎其弟夷吾立之,是為惠公。
얼마 후 晉은 다시 중이의 동생 이오로 바꾸어 맞아들여 옹립하니 그가 惠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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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狄: 고대 중국의 북쪽에 있던 야만의 종족. 翟. 北狄. 貉狄을 말한다.
▶ 咎如: 廧咎如는 赤狄의 別種으로 隗姓이다.
▶ 得二女: 狄은 叔隗와 季隗를 포로로 잡아와서 공자 중이에게 바쳤다. <춘추좌씨전魯僖公23기원전637년>
▶ 趙衰: 춘추시대 晉 中軍長. 字는 子餘이고, 趙成子 또는 成季, 孟子餘 등으로도 불린다. 晉 공자 重耳(: 晉文公)를 따라 19년 동안 망명 생활을 한 뒤 중이가 왕위에 오르자 中軍長이 되어 진문공의 패업 성취를 도왔다.
▶ 盾: 조순. 趙宣子이다.
惠公七年,畏重耳,乃使宦者履鞮與壯士欲殺重耳。
혜공7년(기원전644년)에 중이를 두려워하여 환관 履鞮를 시켜 장사들과 함께 중이를 죽이려 하였다.
重耳聞之,乃謀趙衰等曰:
「始吾奔狄,非以為可用與,以近易通,故且休足。
休足久矣,固願徙之大國。
夫齊桓公好善,志在霸王,收恤諸侯。
今聞管仲、隰朋死,此亦欲得賢佐,盍往乎?」
중이가 이를 듣고 趙衰등과 모의하였다.
“처음 내가 狄으로 도망쳐 옴에 狄이 쓸모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거리가 가까워 쉽게 갈 수 있으므로 휴식함을 취한 것이오.
그런데 휴식이 오래되어 큰 나라로 옮겨가고 싶소.
제환공이 선행을 좋아하고 패왕에 뜻을 두고 제후들을 거두어 돕고 있소.
지금 듣기로, 管仲과 隰朋이 죽어서 지금 유능한 인재의 도움을 받고자 하니 어찌 가지 않겠소?”
於是遂行。
이에 마침내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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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且休足: 잠시 휴식을 취하다.
▶ 盍: 어찌 ~ 않는가.
重耳謂其妻曰:
「待我二十五年不來,乃嫁。」
중이가 그의 아내에게 말하였다.
“나를 25년 동안 기다려도 오지 않으면 改嫁하시오. ”
其妻笑曰:
「犁二十五年,吾冢上柏大矣。
雖然,妾待子。」
그의 아내가 웃으면서 말하였다.
“25년이 지나면 제 무덤 위 측백나무도 크게 자랄 터입니다.
하지만 첩은 당신을 기다릴 터입니다. ”
重耳居狄凡十二年而去。
중이는 狄에 머문 지 모두 12년 만에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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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犁(이, 리): ~의 때에 이르다.
過衛,衛文公不禮。
衛를 지날 때 衛 衛文公이 예우하지 않았다.
去,過五鹿,饑而從野人乞食,野人盛土器中進之。
그곳을 떠나 五鹿에 들렀는데, 배가 고파 촌사람에게 乞食하자 촌사람은 그릇에 흙을 담아 내놓았다.
重耳怒。趙衰曰:
「土者,有土也,君其拜受之。」
중이가 화를 내자 조최가 말하였다.
“흙은 땅을 갖는다는 의미이니 주군께서는 절하고 받으시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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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五鹿: 衛의 땅.
至齊,齊桓公厚禮,而以宗女妻之,有馬二十乘,重耳安之。
齊에 도착하자 齊桓公은 후한 예로 대접하여, 종실의 여자를 아내로 삼게 하고, 20乘의 말을 주니 중이가 齊의 생활에 안주하였다.
重耳至齊二歲而桓公卒,會豎刀等為內亂,齊孝公之立,諸侯兵數至。
중이가 齊에 온 지 2년 만에 제환공이 죽고, 竪刁 등의 내란을 겪었고 齊孝公이 즉위하자, 제후의軍이 여러 차례 침범하였다.
留齊凡五歲。
齊에 머문 지 5년째였다.
重耳愛齊女,毋去心。
중이는 齊의 여자를 사랑하여 떠날 마음이 없었다.
趙衰、咎犯乃於桑下謀行。
조최와 구범이 뽕나무 아래에서 떠나기를 모의하였다.
齊女侍者在桑上聞之,以告其主。
齊女의 시종이 뽕나무 위에서 이 말을 듣고는 주인 강씨에게 알렸다.
其主乃殺侍者,勸重耳趣行。
주인 강씨는 시종을 죽이고, 중이에게 서둘러 떠나기를 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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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宗女妻: 宗室의 딸 姜氏를 重耳의 아내로 주었다.
▶ 豎刀: 豎刁 또는 豎貂로도 쓴다. 춘추시대 齊 宦官으로 寺人을 지냈다. 齊桓公의 총애를 받았다. 管仲이 생각이 정상적이지 않다면서 마땅히 멀리하고 배척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환공이 듣지 않았다. 환공과 관중이 公子昭를 太子로 세웠다. 관중이 죽자 易牙와 開方 등과 함께 권력을 독차지했고, 다섯 公子가 태자가 되겠다며 다투었다. 환공이 죽은 뒤 역아와 함께 여러 大夫들을 죽이고 공자 無亏를 세우니, 태자소는 宋로 달아났다. 이때부터 齊는 큰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 其主: 여종의 주인 姜氏이며 重耳의 아내이다. 齊孝公이 중이가 떠날 것을 알면 노할 것이 두려웠기 때문에 그 시종을 죽여 입을 막은 것이다.
重耳曰:
「人生安樂,孰知其他!
必死於此,不能去。」
중이가 말하였다.
“인생이 이렇게 편한데 다른 일을 알아서 무엇 하겠소!
반드시 여기서 죽을 뿐, 떠나지 않겠소. ”
齊女曰:
「子一國公子,窮而來此,數士者以子為命。
子不疾反國,報勞臣,而懷女德,竊為子羞之。
且不求,何時得功?」
齊女가 말하였다.
“당신은 한 나라의 공자로서 곤군하여 이곳에 오셨고, 몇 명의 선비는 당신께 목숨을 맡겼습니다.
당신이 빨리 還國하여 신하들의 노고에 보답하지 않고 여색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시니, 당신을 위하여 부끄러워합니다.
게다가 구하지 않고 언제 功을 이루겠습니까?”
乃與趙衰等謀,醉重耳,載以行。
이에 조최 등과 모의하여 중이를 취하게 한 다음 수레에 실어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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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疾: 빨리.
▶ 反: 返과 통용된다. 돌아가다.
行遠而覺,重耳大怒,引戈欲殺咎犯。
한참을 가다가 중이가 깨어나서는 크게 성을 내며 창을 들어 구범을 죽이려 하였다.
咎犯曰:
「殺臣成子,偃之願也。」
구범이 말하였다.
“신을 죽여 주군의 뜻을 이룬다면 그것은 이 偃이 원하는 바입니다. ”
重耳曰:
「事不成,我食舅氏之肉。」
중이가 말하였다.
“일이 성사되지 못하면 내가 외삼촌의 살을 씹어 먹을 터입니다. ”
咎犯曰:
「事不成,犯肉腥臊,何足食!」
구범이 말하였다.
“일이 성사되지 못하면 이 구범의 살은 비리고 구린내가 날 터이니 어찌 먹을 수 있겠습니까!”
乃止,遂行。
이에 중지하고 길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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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咎犯: 舅犯. 중이의 狐偃을 말한다.
▶ 腥臊: 비리고 구리다.
過曹,曹共公不禮,欲觀重耳駢脅。
曹에 들렀는데 曹共公이 무례하게 중이의 통갈비뼈를 구경하려 하였다.
曹大夫釐負羈曰:
「晉公子賢,又同姓,窮來過我,柰何不禮!」
曺의 대부 釐負羈가 말하였다.
“晉의 공자는 현명하고 우리와 같은 성씨로 곤궁에 처하여 우리나라를 지나는데, 어찌 무례하게 대하십니까!”
共公不從其謀。
共公이 그의 의견을 따르지 않았다.
負羈乃私遺重耳食,置璧其下。
희부기는 이에 개인적으로 중이에게 먹을 것을 보내면서 음식 아래에 璧玉을 넣어 두었다.
重耳受其食,還其璧。
중이는 먹을 것만 받고 벽옥은 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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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共公: 姬姓,氏는 曹, 이름은 襄으로 춘추시대 曺의 16대 군주이며 曹昭公의 아들이다.
▶ 欲觀其駢脅: 共公은 公子 重耳가 통갈비뼈라는 소문을 듣고 그 모습을 보고자 하여, 그의 객사에 머물게 하면서 그가 목욕하는 것을 가리개를 설치해 놓고 다가가서 보았다. 駢脅은 통갈비뼈. <國語·晉語>
▶ 釐負羈: 僖負羈. 曹의 大夫이다. 희부기가 曹伯에게 말하기를
“晉 公子가 여기에 있는데 군주의 상대자인지라, 군주께서는 또한 그를 예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니, 조백이 말하기를
“제후들의 망명한 공자들이 많은데 누가 여기를 지나지 않겠는가? 망명한 자는 모두 무례한 자들이니, 내가 어찌 예를 다할 수 있겠느냐?”
라고 하였다. <國語·晉語>
去,過宋。
曺를 떠나서 宋을 지나게 되었다.
宋襄公新困兵於楚,傷於泓,聞重耳賢,乃以國禮禮於重耳。
宋襄公은 최근 楚에서軍이 곤욕을 치르고 泓水에서 負傷하였으나, 중이가 어짊을 알고는 국빈의 예로 중이를 대접하였다.
宋司馬公孫固善於咎犯,曰:
「宋小國新困,不足以求入,更之大國。」
宋의 司馬 公孫固는 구범과 친분이 있어서 말하였다.
“宋은 작은 나라로 최근 곤란하여, 入國의 요청을 도울 수 없으니, 큰 나라로 가십시오. ”
乃去。
이에 중이는 곧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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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宋襄公: 춘추시대 宋의 군주로 史家에 따라서는 춘추시대 五霸의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기원전638년 송양공은 적은 병력으로 楚와 싸웠는데, 楚의軍이 泓水를 반쯤 건넜을 때 司馬인 子魚: 목이가 공격할 것을 청했으나, 양공은 正道가 아니라 하여 듣지 않았으며, 楚軍이 홍수를 건너고 나서 미처 대열을 정리하기 전에 다시 공격할 것을 청했으나 역시 듣지 않다가, 楚의軍이 대열을 갖추기를 기다려 싸워서 負傷하고 크게 패하였다. 이에 세상 사람들이 ‘宋襄之仁’이라 하여 이를 비웃었다. <춘추좌씨전 노희공22년>
기원전638년, 晉공자 重耳가 宋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楚와의 전투에서 부상한 양공은 晉의 원조를 얻고 싶어, 후한 예로 중이를 접대하고 전차 20乘을 선물하였다. <사기 세가 권38. 송미자세가>
▶ 公孫固: 宋의 大司馬.
過鄭,鄭文公弗禮。
중이가 鄭을 지나게 되었는데 鄭文公이 예우하지 않았다.
鄭叔瞻諫其君曰:
「晉公子賢,而其從者皆國相,且又同姓。
鄭之出自厲王,而晉之出自武王。」
鄭의 叔瞻이 그의 군주에게 간언하였다.
“晉의 공자는 어질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나라의 재상감이며, 게다가 우리와 同姓입니다.
鄭은 厲王에게서 나왔고, 晉은 武王에서 나왔습니다. ”
鄭君曰:
「諸侯亡公子過此者眾,安可盡禮!」
정문공이 말하였다.
“제후의 망명 공자들로 여기를 지나가는 사람이 많은데, 어찌 일일이 예를 갖추겠는가!”
叔瞻曰:
「君不禮,不如殺之,且後為國患。」
숙첨이 말하였다.
“주군께서 예로 대하지 않으시겠다면 죽이는 편이 낫습니다, 차후에 나라의 근심거리가 될 터입니다. ”
鄭君不聽。
정문공은 듣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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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鄭文公: 춘추시대 鄭의 군주로 鄭厲公의 아들이며 이름은 捷이다. 齊桓公을 배신하고 楚와 친교하였다. 晉의 公子 重耳가 망명하여 鄭을 지나갔는데 문공이 박대하였다.
▶ 叔瞻: 叔詹. 춘추시대 鄭의 대부. 鄭文公의 동생. 晉公子 重耳가 망명하여 鄭을 지나갔는데 문공이 예를 갖추지 않았다. 숙첨이 일찍이 문공에게 간하여 예로써 대하든가 아니면 죽여 후환을 없애라고 했지만 문공이 듣지 않았다. 나중에 晉과 秦이 鄭을 포위하고 숙첨을 죽이려 하자 자살하였다.
▶ 鄭之出自厲王: 鄭은 기원전806년, 周厲王의 아들이자 주선왕의 동생인 정환공 友가 서주의 기내에 있는 鄭 땅에 봉해짐으로써 세워졌다
▶ 晉之出自武王: 晉은 주나라 무왕의 둘째 아들 당숙 唐叔 虞가 형인 성왕에게 삼감의 난이 평정된 이후 그 땅에 봉하여진 제후국이다.
重耳去之楚,楚成王以適諸侯禮待之,重耳謝不敢當。
중이는 鄭을 떠나 楚로 갔으며, 楚成王이 제후의 예로 그를 우대하니, 중이는 감당할 수 없다며 사양하였다.
趙衰曰:
「子亡在外十餘年,小國輕子,況大國乎?
今楚大國而固遇子,子其毋讓,此天開子也。」
조최가 말하였다.
“주군께서 망명하여 밖으로 떠돈 지 10여 년, 小國도 주군을 輕視하는데 大國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지금 楚는 大國으로 한사코 주군을 대우하니, 주군께서는 사양하지 마십시오, 이는 하늘이 주군의 앞날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
遂以客禮見之。
이에 중이는 객의 예로 성왕을 만났다.
成王厚遇重耳,重耳甚卑。
성왕은 중이를 후하게 예우했고, 중이는 한껏 자신을 낮추었다.
成王曰:
「子即反國,何以報寡人?」
성왕이 말하였다.
“그대가 還國하면 과인에게 무엇으로 보답하겠소?”
重耳曰:
「羽毛齒角玉帛,君王所餘,未知所以報。」
중이가 대답하였다.
“진기한 禽獸나 옥과 비단 따위는 군왕께 남아도는 것이니, 보답해야 할 것을 모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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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楚成王: 楚의 제20대 군주로 이름은 惲이다. 초문왕의 차남으로, 형인 도오가 사냥 나갔을 때 습격해서 죽이고 자립하였다. 즉위한 초에 안으로는 덕정을 베풀었고, 밖으로는 諸侯들과 우호관계를 맺으면서 남쪽으로 국토 1천 리를 개척하였다. 여러 차례 군사를 이끌고 中原으로 가 齊와 패권을 다투었다.
楚成王이 周나라의 예법으로 중이에게 宴享을 베푸니 뜰 안에 진설한 예물이 백 가지로 많았다. <國語晉語>
▶ 遇: 접대하다.
▶ 羽毛齒角: 깃털이 있는 짐승이나 이빨과 뿔이 있는 짐승.
王曰:
「雖然,何以報不穀?」
초성왕이 말하였다.
“비록 그러하나 무엇으로든 내게 보답해야 하지 않겠소?”
重耳曰:
「即不得已,與君王以兵車會平原廣澤,請辟王三舍。」
중이가 말하였다.
“만약 어쩔 수 없이 군왕의 군대와 평원이나 너른 늪에서 마주치게 되면, 왕에게 90리를 피해 드리겠습니다.”
楚將子玉怒曰:
「王遇晉公子至厚,今重耳言不孫,請殺之。」
楚의 장수 子玉이 화를 내며 말하였다.
“왕께서 晉 공자를 아주 후하게 대하셨거늘 지금 중이의 말이 불손하니 죽이십시오.”
成王曰:
「晉公子賢而困於外久,從者皆國器,此天所置,庸可殺乎?
且言何以易之!」
성왕이 말하였다.
“晉공자는 어질지만 오래 국외에서 困乏하였으며, 따르는 사람은 모두 나라의 인재로 이는 하늘이 안배한 것이니 어찌 죽여야 하겠소?
게다가 뱉은 말을 어찌 바꾸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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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不穀: 제후의 自稱. 나.
▶ 三舍: 고대 행군시 30리를 1舍라 하였으니 三舍는 90里를 말한다.
▶ 子玉: 楚의 令尹 成得臣.
▶ 國器: 국가에 공헌할 만한 재능을 지닌 인재.
▶ 庸: 어찌.
居楚數月,而晉太子圉亡秦,秦怨之;
聞重耳在楚,乃召之。
楚에 몇 달을 머무는데, 晉태자 圉가 秦에서 도망치자 秦이 그를 원망하였다.
중이가 楚에 있음을 알고 그를 불렀다.
成王曰:
「楚遠,更數國乃至晉。
秦晉接境,秦君賢,子其勉行!」
성왕이 말하였다.
“楚는 멀어서 다시 몇 개 나라를 거쳐야 晉에 이를 터이오.
秦과 晉은 접경하고 秦의 군주는 현명하니 그대는 힘써 행하시오!”
厚送重耳。
초성왕은 후하게 대접하여 중이를 보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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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晉太子圉亡秦: 晉태자 圉가 秦에 인질로 있다가 도주하여 晉으로 돌아가서 즉위하여 懷公이 되었다.
重耳至秦,繆公以宗女五人妻重耳,故子圉妻與往。
중이가 秦에 이르자 秦穆公은 종실의 여자 다섯을 중이의 아내로 삼았는데 예전 子圉의 아내도 함께 왔다.
重耳不欲受,司空季子曰:
「其國且伐,況其故妻乎!
且受以結秦親而求入,子乃拘小禮,忘大丑乎!」
중이는 받으려 하지 않았으나 司空 季子가 말하였다.
“그의 나라도 장차 토벌할 터인데, 하물며 그의 전처 정도이겠습니까!
또 그녀를 받아서 秦과 친분을 맺고 환국을 추구해야 하는데, 주군께서는 자잘한 예에 얽매여 큰 치욕을 잊고 계십니다!”
遂受。
이에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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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秦穆公: 춘추시대 秦의 군주로 이름은 任好이며 춘추오패의 한 사람이다.
▶ 司空 季子: 晉의 大夫.
▶ 丑: 치욕. 부끄러움.
繆公大歡,與重耳飲。
진목공이 크게 기뻐하며 중이와 함께 술을 마셨다.
趙衰歌黍苗詩。
조최가 <黍苗>라는 시를 노래하였다.
繆公曰:
「知子欲急反國矣。」
목공이 말하였다.
“그대가 서둘러 還國하려는 마음을 알겠소. ”
趙衰與重耳下,再拜曰:
「孤臣之仰君,如百穀之望時雨。」
조최가 중이와 함께 당에서 내려가서 再拜하고 말하였다.
“孤臣이 군주를 우러러봄이 백곡이 時雨(때맞추어 내리는 비)를 바라는 것 같습니다. ”
是時晉惠公十四年秋。
때는 晉惠公 14년(기원전637년)가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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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黍苗: 기장의 싹. <詩經> 小雅의 편명으로 召나라 穆公이 謝邑에 축성한 것을 찬양한 시이다. 첫 장에서 말하기를,
“무성한 기장 싹은 촉촉이 내린 비에 젖어 있네. 머나먼 남쪽으로 행역을 떠나니 召伯께서 위로하시리. (芃芃黍苗, 陰雨膏之. 悠悠南行, 召伯勞之. ”
라고 하였다.
惠公以九月卒,子圉立。
혜공이 9월에 죽고 자어가 즉위하였다.
十一月,葬惠公。
11월에 혜공을 장사지냈다.
十二月,晉國大夫欒、郤等聞重耳在秦,皆陰來勸重耳、趙衰等反國,為內應甚眾。
12월에 晉의 대부 欒枝와 郤穀 등이 중이가 秦에 있음을 듣고, 다 같이 몰래 와서는 중이와 조최 등에게 還國을 권하니 내응하는 자가 아주 많았다.
於是秦繆公乃發兵與重耳歸晉。
이에 晉 목공은 군사를 일으켜 중이가 晉으로 돌아감을 도왔다.
晉聞秦兵來,亦發兵拒之。
晉은 秦의軍이 온다는 소식에 역시軍을 일으켜 맞섰다.
然皆陰知公子重耳入也。
그러나 모두가 공자 중이가 입국할 것임을 암암리에 알고 있었다.
唯惠公之故貴臣呂、郤之屬不欲立重耳。
오직 혜공의 옛 대신들인 呂甥과 郤芮 등의 무리는 중이를 옹립하려 하지 않았다.
重耳出亡凡十九歲而得入,時年六十二矣,晉人多附焉。
중이는 망명을 떠난 지 19년 만에 돌아왔는데, 그때 나이가 62세였으며 晉 사람들 중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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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公元年春,秦送重耳至河。
문공 원년(기원전636년)봄에 秦이 중이를 황하까지 호송하였다.
咎犯曰:
「臣從君周旋天下,過亦多矣。
臣猶知之,況於君乎?
請從此去矣。」
구범이 말하였다.
“신이 주군을 따라 천하를 떠돌면서 잘못한 일도 많았습니다.
신이 그것을 알고 있는데 하물며 주군께서야 어떠하셨겠습니까?
이제 저는 여기서 떠나고자 합니다. ”
重耳曰:
「若反國,所不與子犯共者,河伯視之!」
중이가 말하였다.
“만약 환국하여 구범과 마음이 같지 않다면 河伯께서 보고 있소!”
乃投璧河中,以與子犯盟。
그리고는 璧玉을 황하에 던지면서 구범과 맹서하였다.
是時介子推從,在船中,乃笑曰:
「天實開公子,而子犯以為己功而要市於君,固足羞也。
吾不忍與同位。」
이때 介子推가 뒤따르다가 배 위에서 웃으면서 말하였다.
“하늘이 실로 공자를 돌보셨는데, 구범이 자신의 공이라 여기고는 주군과 거래를 하니 참으로 부끄럽구나.
내가 차마 그와 같은 자리에 있을 수 없다. ”
乃自隱渡河。
이에 자신을 숨긴 채 황하를 건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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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河伯: 고대 신화에 물의 신으로 본명은 馮夷이다.
▶ 乃投璧河中: 황하의 신에게 신의를 입증하기 위해 璧玉을 던진 것이다. 重耳가 황하에 이르렀을 때 구범이 벽옥을 중이에게 주었다. <춘추좌씨전魯僖公24기원전636년>
▶ 介子推: 춘추시대 晉사람으로 子는 어조사이다. 推는 이름이다. 晉文公이 公子로서 망명할 때 19년 동안 따르며 온갖 고생을 다하며 모셨으나, 귀국하여 즉위한 뒤 봉록을 주지 않자 綿上의 介山에 은거하였다. 뒤늦게 깨달은 문공이 산에서 나오도록 산에 불을 질렀으나 나오지 않고 불에 타 죽었다. <春秋左氏傳 魯僖公24년>
<韓詩外傳>에는
“晉文公이 曹를 지나갈 때 이부수가 따르다가 중이의 재물을 도적질하여 도망가니, 중이는 식량이 없어서 굶주려 갈 수 없었다. 介子推가 다리 살을 베어서 중이에게 먹인 연후에 잘 갈 수 있었다.”
하였다.
▶ 要市: 구하다. 추구하다.
秦兵圍令狐,晉軍于廬柳。
秦의 병사들이 令狐를 포위하자 晉軍은 廬柳에 군을 주둔하였다.
二月辛丑,咎犯與秦晉大夫盟于郇。
2월 신축일, 구범과 秦과 晉의 대부들이 郇에서 회맹하였다.
壬寅,重耳入于晉師。
임인일에 중이가 晉軍의 진영으로 들어갔다.
丙午,入于曲沃。
병오일에 곡옥으로 들어갔다.
丁未,朝于武宮,即位為晉君,是為文公。
정미일에 武公의 묘를 알현하고 晉의 군주로 즉위하니 그가 文公이다.
群臣皆往。
신하들이 모두 왔다.
懷公圉奔高梁。
회공 어는 高梁으로 달아났다.
戊申,使人殺懷公。
무신일에 고량으로 사람을 보내 회공을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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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咎犯與秦晉大夫盟于郇: 郇에서 결맹하여 文公을 들여보내기로 약정한 것이다. 郇은 解縣 서북쪽에 있는 郇城이다.
▶ 武宮: 文公의 祖父 武公의 廟이다. 武公이 曲沃伯으로서 晉을 병합하였기 때문에 곡옥에 그의 사당을 세웠다.
懷公故大臣呂省、郤芮本不附文公,文公立,恐誅,乃欲與其徒謀燒公宮,殺文公。
회공의 옛 대신들인 呂甥과 郤芮는 본래부터 문공을 따르지 않았으며, 문공이 즉위하자 주살당할까 두려워하여, 그 무리들과 모의하여 문공의 궁에 불을 질러 문공을 죽이려고 하였다.
文公不知。
문공은 알지 못하였다.
始嘗欲殺文公宦者履鞮知其謀,欲以告文公,解前罪,求見文公。
예전에 문공을 죽이려고 했던 환관 履鞮가 이 음모를 알고는 문공에게 알려서 지난 죄를 갚고자 문공을 뵙고자 하였다.
文公不見,使人讓曰:
蒲城之事,女斬予袪。
其後我從狄君獵,女為惠公來求殺我。
惠公與女期三日至,而女一日至,何速也?
女其念之。」
문공은 만나지 않고 사람을 보내 꾸짖었다.
“포성의 일인데, 네가 내 옷소매를 벤 일이 있었다.
그 뒤 내가 狄의 군주와 사냥을 나갔는데 너는 혜공을 위해 와서 나를 죽이려 하였.
혜공이 너에게 3일의 기한을 주었는데, 너는 하루 만에 왔으니 어찌 그리 빨랐더냐?
네가 이런 일들을 생각해 보아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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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呂省: 呂甥. 晉 大夫. 呂甥은 字가 子金이라고 하며, 呂省‧瑕甥‧瑕呂鮐甥 등으로도 쓴다.
▶ 郤芮: 冀芮. 晉의 大夫. 본래 이름은 郤芮이나 그의 식읍이 冀여서 冀芮라고도 한다.
▶ 履鞮: 勃鞮. 字는 伯楚. 당초에 獻公이 환관 勃鞮를 시켜서 重耳를 蒲城에서 살해토록 하였으며, 중이가 담을 넘어 달아날 때 발제가 그의 소맷자락을 베었다. <國語晉語>
▶ 讓: 꾸짖다.
宦者曰:
「臣刀鋸之餘,不敢以二心事君倍主,故得罪於君。
君已反國,其毋蒲、翟乎?
且管仲射鉤,桓公以霸。
今刑餘之人以事告而君不見,禍又且及矣。」
환관 이제가 말하였다.
“저는 궁형을 당한 몸으로 감히 두 마음을 품고 군주를 섬기거나 주인을 배반하지 않았기 때문에 군주께 죄를 지었습니다.
군주께서 이미 환국하셨지만 蒲城이나 翟에서와 같은 일들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또한 관중은 환공의 허리띠의 고리를 쏘았지만 환공은 관중 덕에 패자가 되었습니다.
지금 궁형을 당한 사람이 일이 있어 보고하려 하는데 군주께서는 만나지 않으려 하시니 화가 곧 이를 터입니다. ”
於是見之,遂以呂、郤等告文公。
이에 그를 만나니 여생과 극예 등의 음모를 문공에게 고하였다.
文公欲召呂、郤,呂、郤等黨多,文公恐初入國,國人賣己,乃為微行,會秦繆公於王城,國人莫知。
문공이 여생과 극예를 불러들이려 했으나 그들의 黨人이 많았다. 문공은 당초 입국할 때 국인이 자신을 팔아먹을까 두려워 평민 복장으로 갈아입고 王城에서 秦목공을 만났기 때문에 국인들이 몰라보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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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刀鋸之餘: 刀鋸餘人. 환관을 말한다. 궁형을 받은 사람. 刀鋸는 칼과 톱으로 고대의 형구이다.
▶ 其毋蒲、翟乎?: 어찌 군주께서 蒲와 狄에 있을 때처럼 해치고자 하는 자가 없겠느냐는 뜻이다.
▶ 管仲射鉤: 管仲의 이름은 夷吾이며, 齊桓公과 적대관계였으나 환공의 신하 鮑叔의 추천에 의하여 환공의 신하로서 재상이 된 후 齊를 춘추시대의 5대 강국 중 제일가는 강국으로 만든 공적을 세웠다. <사기 권32. 제태공세가>
三月己丑,呂、郤等果反,焚公宮,不得文公。
3월 기축일, 여생과 극예 등이 과연 반란을 일으켜 문공의 궁에 불을 질렀으나 문공을 찾지 못하였다.
文公之衛徒與戰,呂、郤等引兵欲奔,秦繆公誘呂、郤等,殺之河上,晉國復而文公得歸。
문공의 위병들과 싸우다가, 여생과 극예 등은 병사들을 이끌고 달아나려 하는데, 진목공이 여생과 극예 등을 유인하여 황하 가에서 죽이니 晉은 평정을 되찾고 문공은 되돌아왔다.
夏,迎夫人於秦,秦所與文公妻者卒為夫人。
여름에 문공은 秦으로부터 부인을 맞아들였고, 秦이 문공에게 아내로 주었던 사람들이 부인이 되었다.
秦送三千人為衛,以備晉亂。
秦이 3천 명의 군사를 보내 호위하며 晉의 내란에 대비하였다.
文公修政,施惠百姓。
문공은 정치를 잘해서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賞從亡者及功臣,大者封邑,小者尊爵。
망명을 따른 자와 功臣에게 상을 내렸는데, 공이 큰 자는 封邑하고 작은 자에게는 작위를 올려주었다.
未盡行賞,周襄王以弟帶難出居鄭地,來告急晉。
포상을 다하기 전에, 주襄王의 동생 帶가 난을 일으켜 양왕이 鄭으로 도망치고 晉에 위급함을 알렸다.
晉初定,欲發兵,恐他亂起,是以賞從亡未至隱者介子推。
晉이 갓 안정되었으므로 출동하려 하였으나 다른 난이 일어날까 두려워하였고, 이 때문에 망명에 따른 사람에 대한 상이 隱者 개자추에게 이르지 못하였다.
推亦不言祿,祿亦不及。
개자추 또한 작록을 말하지 않았기에 작록 또한 주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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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周襄王以弟帶難: 주양왕 16년 翟(: 狄)이 주나라를 공격하여 숙대를 왕으로 옹립하였다. 양왕은 鄭으로 달아나고 諸侯들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양왕17년(기원전635년), 양왕은 晉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진의 문공이 융·적을 추방하고 숙대를 주살해 양왕은 복위할 수 있었다. 양왕은 진의 문공에게 방백의 지위와 하내의 땅을 주었다. <사기 본기 권04. 주본기>
推曰:
「獻公子九人,唯君在矣。
惠、懷無親,外內棄之;
天未絕晉,必將有主,主晉祀者,非君而誰?
天實開之,二三子以為己力,不亦誣乎?
竊人之財,猶曰是盜,況貪天之功以為己力乎?
下冒其罪,上賞其姦,上下相蒙,難與處矣!」
介子推가 이렇게 말하였다.
“헌공의 아들이 아홉이었는데 주군만 살아 계신다.
혜공과 회공은 가까운 사람이 없어서 안팎으로 버림을 받았다.
하늘이 晉을 없애지 않아 기어이 나라에 주인이 있게 하였으니 晉의 제사를 주재할 사람이 주군이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하늘이 실로 주군을 도우셨거늘 몇몇 사람이 자신들의 덕이라 하니 어찌 기만이 아니겠는가?
남의 재물을 훔치는 것을 도둑이라 하거늘, 하물며 하늘의 공을 탐하여 자신의 덕이라 여김이겠는가?
아랫사람들은 그 죄를 무릅쓰고, 윗사람은 그 간사함에 상을 내리면서 위아래가 서로 속이니 저들과 함께하기 어렵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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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介子推: 晉文公의 신하인 개자추는 지극히 충성스러웠는지라 자기 넓적다리 살을 베어 문공에게 먹였는데 문공이 뒤에 그를 배반하였더니, 자추는 노하여 晉을 떠나 나무를 껴안은 채 불에 타 죽음. 개자추는 진문공을 따라 19년 동안 망명하였는데, 문공이 즉위한 후 다른 공신에게는 상작을 내렸으나 그는 누락되었으므로 어머니와 함께 綿山으로 은거하였는데 문공이 뒤늦게 깨닫고 그를 찾으려고 산에 불을 질렀으나 나타나지 않고 마침내 불에 타 죽었다고 한다. <國語>와 <春秋左氏傳> 등에는 介之推라고 표기되어 있고, <史記>에는 介推로도 표기되어 있다.
▶ 蒙: 속이다. 기만하다.
其母曰:
「盍亦求之,以死誰懟?」
개자추의 어머니가 말하였다.
“왜 상을 달라고 하지 않느냐?
이렇게 죽는다면 누구를 원망하겠느냐?”
推曰:
「尤而效之,罪有甚焉。
且出怨言,不食其祿。」
개자추가 말하였다.
“허물하면서 그것을 본받으면, 죄는 매우 심해집니다.
또 원망의 말까지 하였으니 그 녹봉을 먹지 않겠습니다. ”
母曰:
「亦使知之,若何?」
어머니가 말하였다.
“그래도 주군이 알게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對曰:
「言,身之文也;
身欲隱,安用文之?
文之,是求顯也。」
개자추가 대답하였다.
“말이란 사람의 몸을 꾸미는 것입니다.
몸을 숨기려 하면서 어찌 몸을 꾸미겠습니까?
꾸민다는 것은 일신의 영달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
其母曰:
「能如此乎?與女偕隱。」
어머니가 말하였다.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
너와 함께 몸을 숨기겠다. ”
至死不復見。
죽을 때까지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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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懟: 원망하다.
▶ 尤: 허물. 과실.
▶ 若何: 어떠한가.
▶ 見: 나타나다.
介子推從者憐之,乃懸書宮門曰:
「龍欲上天,五蛇為輔。
龍已升雲,四蛇各入其宇,一蛇獨怨,終不見處所。」
개자추를 따르던 사람이 그를 가련하게 여기고 궁문에다 글을 적어 걸었다.
“용이 하늘에 오르고자 하여 다섯 마리의 뱀이 보좌하였다.
용은 구름에 올랐고 뱀 네 마리는 각자 집으로 들어갔거늘, 한 마리만은 원망하여 끝내 처소를 보이지 않는구나. ”
文公出,見其書,曰:
「此介子推也。
吾方憂王室,未圖其功。」
문공이 나가다가 이 글을 보고 말하였다.
“이 사람은 개자추이다.
내가 왕실 걱정 때문에 그의 공을 챙기지 못했구나. ”
使人召之,則亡。
사람을 시켜 개자추를 불렀으나 이미 없었다.
遂求所在,聞其入綿上山中,於是文公環綿上山中而封之,以為介推田,號曰介山,「以記吾過,且旌善人」。
그 所在를 찾아 그가 綿上山으로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 이에 문공은 면상산 주변의 땅을 봉지로 주어 개자추의 농지로 삼고, 산 이름을 ‘介山’으로 부르게 하면서“이것으로 나의 잘못을 기억하고 또한 착한 사람을 표창하노라. ”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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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五蛇: 晉文公이 망명생활을 할 때 따르던 다섯 신하를 비유한 말이다. 곧 狐偃‧趙衰‧魏武子‧司空季子‧介子推를 이른다.
▶ 旌: 표창하다.
▶ 介推田: 綿上의 땅을 개자추의 私田으로 삼아 그 제사를 받들게 한 것이다.
從亡賤臣壺叔曰;
「君三行賞,賞不及臣,敢請罪。」
망명에 따라왔던 시종 壺叔이 말하였다.
“군주께서 세 번이나 상을 내리셨는데, 신에게는 상이 미치지 않았으니, 감히 저의 죄를 묻습니다. ”
文公報曰:
「夫導我以仁義,防我以德惠,此受上賞。
輔我以行,卒以成立,此受次賞。
矢石之難,汗馬之勞,此復受次賞。
若以力事我而無補吾缺者,此[復]受次賞。
三賞之後,故且及子。」
문공이 답하였다.
“인의로 나를 인도하고 덕과 은혜로 나를 지키니, 그들은 가장 높은 상을 받았다.
망명 중에 나를 보좌하고 마침내 즉위하게 하니, 그들은 그 다음 상을 받았다.
화살과 돌의 위험을 무릅쓰고 땀 흘린 공로가 있으니, 그들은 그 다음 상을 받았다.
가령 힘으로 나를 섬기되 나의 부족함을 보완하지 못한 사람은 그 다음 상을 받았다.
세 가지 상들을 모두 내린 후이니 곧 그대에게 미치리라. ”
晉人聞之,皆說。
晉 사람들이 이를 듣고 모두 기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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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說: 기뻐하다.
二年春,秦軍河上,將入王。
문공2년(기원전635년)봄에 秦의軍이 황하 가에 있다가 주襄王을 귀국시키려 하였다.
趙衰曰;
「求霸莫如入王尊周。
周晉同姓,晉不先入王,後秦入之,毋以令于天下。
方今尊王,晉之資也。」
조최가 말하였다.
“패주가 되시려면 양왕을 귀국시켜 주나라를 존중함이 최선입니다.
周와 晉은 同姓데, 晉이 먼저 왕을 귀국시키지 않고 후에 秦이 입국시킨다면 천하를 호령할 수 없습니다.
바야흐로 지금 周王을 높임이 晉의 밑천이 될 터입니다. ”
三月甲辰,晉乃發兵至陽樊,圍溫,入襄王于周。
3월 갑진일에 晉이 병사를 출동시켜 陽樊에 이르러 溫을 포위하고 양왕을 주나라로 귀국시켰다.
四月,殺王弟帶。
4월에 양왕의 동생인 帶를 죽였다.
周襄王賜晉河內陽樊之地。
주양왕은 하내의 陽樊땅을 晉에 하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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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周襄王: 주양왕 16년 翟(: 狄)이 주나라를 공격하여 숙대를 왕으로 옹립하였다. 양왕은 鄭으로 달아나고 諸侯들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양왕17년(기원전635년), 양왕은 晉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晉文公이 융·적을 추방하고 숙대를 주살해 양왕은 복위할 수 있었다. 양왕은 진의 문공에게 방백의 지위와 하내의 땅을 주었다.
▶ 陽樊: 周나라의 읍.
四年,楚成王及諸侯圍宋,宋公孫固如晉告急。
문공4년(기원전633년), 楚성왕과 제후들이 宋을 포위하자 宋의 公孫固가 晉으로 가서 위급함을 알렸다.
先軫曰:
「報施定霸,於今在矣。」
先軫이 말하였다.
“은혜를 갚고 패업을 정하는 것이 이 일에 달렸습니다. ”
狐偃曰:
「楚新得曹而初婚於衛,若伐曹、衛,楚必救之,則宋免矣。」
狐偃이 말하였다.
“楚가 최근 曹를 얻고 衛와 처음으로 혼인 관계를 맺었으니 만약 曺와 衛를 공격하면 楚가 필시 구원하러 나설 터이고 宋은 위기를 면할 터입니다. ”
於是晉作三軍。
이에 晉은 3軍을 만들었다.
趙衰舉郤縠將中軍,郤臻佐之;
使狐偃將上軍,狐毛佐之,命趙衰為卿;
欒枝將下軍,先軫佐之;
荀林父御戎,魏犫為右:往伐。
조최는 郤縠이 중군을 이끌도록 추천했고, 郤臻이 보좌하였다.
狐偃에게 상군을 이끌게 하고 狐毛가 보좌했으며, 조최는 卿으로 임명하였다.
欒枝가 하군을 이끌고 선진이 보좌하였다.
荀林父는 전차를 맡았고, 魏犫는 호위를 맡아 공격에 나섰다.
冬十二月,晉兵先下山東,而以原封趙衰。
겨울12월에 晉의軍이 먼저 산동을 점령하여 조최에게 原邑을 봉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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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楚成王及諸侯圍宋: 宋이 楚를 배반하고 晉을 섬겼으므로, 楚가 공격한 것이다.
▶ 公孫固: 宋의 司馬
▶ 先軫: 晉下軍의 副將 原軫.
▶ 報施: 기원전638년, 晉공자 重耳가 宋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楚와의 전투에서 부상한 양공은 晉의 원조를 얻고 싶어, 후한 예로 중이를 접대하고 전차 20乘을 선물하였으므로 宋의 은혜를 갚는다는 말이다.
▶ 狐偃: 舅犯. 중이의 외삼촌.
▶ 荀林父: 中行桓子. 춘추시대 晉의 정치가며, 6卿의 일원으로 관위는 중군원수에 이르렀다.
▶ 中行: 晉의 군대 편제의 한 단위의 대장을 맡은 고로 中行을 씨로 삼아, 晉의 6경 중 중항씨의 시조가 되었다.
▶ 御戎: 文公의 전차를 모는 것이다.
五年春,晉文公欲伐曹,假道於衛,衛人弗許。
5년 기원전632년, 晉文公이 曹를 공격하기 위해 衛에 길을 빌려달라고 했으나 衛 의 군주가 허락하지 않았다.
還自河南度,侵曹,伐衛。
길을 돌아 황하 남쪽에서 강을 건너 曺를 치고 衛까지 공격하였다.
正月,取五鹿。
정월에 五鹿을 빼앗았다.
二月,晉侯、齊侯盟于斂盂。
2월에 문공은 齊소공과 斂盂에서 회맹하였다.
衛侯請盟晉,晉人不許。
衛의 군주가 晉과 결맹하길 청했으나 晉문공은 허락하지 않았다.
衛侯欲與楚,國人不欲,故出其君以說晉。
衛의 군주가 楚와 동맹하고자 했으나, 국인이 원치 않고 군주를 축출하여 晉의 환심을 샀다.
衛侯居襄牛,公子買守衛。
衛의 군주는 襄牛에 머무르고, 공자 買가 衛를 지켰다.
楚救衛,不卒。
楚가 衛를 구원했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晉侯圍曹。
晉문공이 曺를 포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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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五鹿: 衛 땅이다
▶ 斂盂: 衛의 땅. 진문공에게 구원을 요청한 것이다.
▶ 襄牛: 衛 땅이다. 晉이 衛를 친 것은 衛가 楚의 婚姻國이기 때문이다. 衛는 楚와 화친하려 하였기 때문에 公子買를 보내어 衛를 지키게 한 것이다
▶ 卒: 勝으로 기록된 곳도 있다.
三月丙午,晉師入曹,數之以其不用釐負羈言,而用美女乘軒者三百人也。
3월 병오일에 晉의軍이 曹로 침입하여 희부기의 말을 듣지 않고 미녀300명을 화려한 수레에 태워 보낸 죄상을 열거하며 나무랐다.
令軍毋入僖負羈宗家以報德。
군대에 명령하기를 僖負羈의 종족이 사는 마을에는 침범하지 말라 하여 그의 덕에 보답하였다.
楚圍宋,宋復告急晉。
楚가 宋을 포위하자 宋은 다시 晉에 위급함을 알렸다.
文公欲救則攻楚,為楚嘗有德,不欲伐也;
欲釋宋,宋又嘗有德於晉:患之。
진문공은 구원하여 楚를 공격하고 싶었으나, 일찍이 楚에 은덕를 입었으므로 정벌하려고 하지 않았다.
宋을 포기하자니 宋 또한 과거 晉에 은덕이 있어 난감하였다.
先軫曰:
「執曹伯,分曹、衛地以與宋,楚急曹、衛,其勢宜釋宋。」
선진이 말하였다.
“曺의 군주를 잡고 曺와 衛의 땅을 나누어 宋에 주겠다고 하면, 楚는 曺와 衛를 급하다고 여길 터이고, 이런 형세라면 마땅히 宋의 포위를 풀 터입니다. ”
於是文公從之,而楚成王乃引兵歸。
이에 문공은 그말을 따랐고, 楚성왕은 곧軍을 이끌고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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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數之: 죄상을 열거하다.
▶ 釐負羈: 僖負羈. 曹 사람으로 春秋시기 曹의 大夫이다. 희부기가 曹伯에게 간하기를
“晉 公子가 여기에 있는데 군주의 상대자인지라, 군주께서는 또한 그를 예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라고 하니, 조백이 말하기를
“제후들의 망명한 공자들이 많은데 누가 여기를 지나지 않겠는가? 망명한 자는 모두 무례한 자들이니, 내가 어찌 예를 다할 수 있겠느냐?”
라고 하였다. <國語·晉語>
▶ 軒: 大夫의 수레.
楚將子玉曰:
「王遇晉至厚,今知楚急曹、衛而故伐之,是輕王。」
楚의 장군 子玉이 말하였다.
“왕께서 晉을 지극히 후대했는데, 지금 楚가 曺와 衛를 도움을 알면서도 일부러 그들을 공격하니 이는 왕을 깔보는 것입니다. ”
王曰:
「晉侯亡在外十九年,困日久矣,果得反國,險阸盡知之,能用其民,天之所開,不可當。」
초성왕이 말하였다.
“晉의 군주는 19년을 외지에 망명하며, 곤궁한 세월이 오래이다가 끝내 환국하여, 험난함을 너무 잘 알고 있고 백성도 잘 활용하니 이는 하늘이 도우는 것이므로 당해 낼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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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子玉: 楚의 令尹 成得臣.
▶ 楚成王: 楚의 제20대 군주로 이름은 惲이다. 초 문왕의 차남으로, 형인 도오가 사냥을 나갔을 때 습격해서 죽이고 자립하였다. 즉위한 초에 안으로는 덕정을 베풀었고, 밖으로는 諸侯들과 우호관계를 맺으면서 남쪽으로 국토 1천 리를 개척하였다. 여러 차례 군사를 이끌고 中原으로 가 齊와 패권을 다투었다.
楚成王은 중이가 망명하였을 때 周나라의 예법으로 후한 연향을 베풀었었다.
子玉請曰:
「非敢必有功,願以閒執讒慝之口也。」
자옥이 초성왕에게 청하였다.
“감히 틀림없이 공을 세우겠다는 것이 아니라, 참언하는 사특한 자의 입을 막고자 합니다. ”
楚王怒,少與之兵。
성왕은 화가 나서 병력을 조금만 내주었다.
於是子玉使宛春告晉:
「請復衛侯而封曹,臣亦釋宋。」
이에 자옥은 대부 宛春을 보내 晉에 고하였다.
“衛의 군주를 복위시키고 曺의 땅을 돌려준다면 신도 宋의 포위를 줄겠소. ”
咎犯曰:
「子玉無禮矣,君取一,臣取二,勿許。」
구범이 말하였다.
“자옥은 무례합니다. 군주는 하나를 취하려 하는데 신하는 둘을 취하려 하니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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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閒執: 間執. 가로막다.
▶ 讒慝: 사악한 자. 멸시해서 헐뜯는 말.
▶ 宛春: 楚의 大夫.
▶ 復衛侯而封曹: 曹 군주는 잡혀 宋에 있고, 衛의 군주는 아직 국경을 벗어나지 않았으나 이미 군주의 자리를 잃었다. 그러므로 衛의 군주를 복위시키고 曺의 땅을 돌려주라고 한 것이다.
▶ 君取一,臣取二: 君은 진문공이며, 臣은 子玉이다.
진문공은 宋의 포위를 푸는 하나의 功 만을 취하려 하는데, 楚의 신하인 子玉은 曹와 衛를 회복시키는 두 功을 취하려 한다는 말이다.
先軫曰:
「定人之謂禮。
楚一言定三國,子一言而亡之,我則毋禮。
不許楚,是棄宋也。
不如私許曹、衛以誘之,執宛春以怒楚,既戰而後圖之。」
선진이 말하였다.
“사람을 안정시킴을 예라 합니다.
楚는 한마디 말로 세 나라를 안정시키려 하는데, 주군은 한마디 말로 세 나라를 망하게 함이니 우리가 무례한 것입니다.
楚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는 宋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은밀히 曺와 衛를 회복한다고 약속하여 그들을 유인하고, 완춘을 포로로 잡아 楚를 화나게 만들어 결전한 다음 뒤에 도모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
晉侯乃囚宛春於衛,且私許復曹、衛。
진문공은 이에 완춘을 衛에 감금하고, 또 은밀히 曺와 衛를 회복하겠노라 허락하였다.
曹、衛告絕於楚。
曺와 衛는 楚에 단교를 통보하였다.
楚得臣怒,擊晉師,晉師退。
楚의 得臣(: 자옥)이 화가 나서 晉軍을 공격하자 晉의 軍은 후퇴하였다.
軍吏曰:
「為何退?」
군리가 물었다.
“왜 후퇴하십니까?”
文公曰:
「昔在楚,約退三舍,可倍乎!」
문공이 대답하였다.
“지난날 楚에 있을 때 90리를 뒤로 물리겠다고 약속했으니 어겨서야 되겠는가!”
楚師欲去,得臣不肯。
楚의 군대도 물러나려 했으나 득신이 반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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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楚一言定三國: 子玉은 한 마디 말로 衛를 회복시키고, 曹의 땅을 돌려주고, 宋의 포위를 푸는 방안을 제시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세 나라를 안정시키는 것이다.
▶ 子一言而亡之: 晉이 楚의 요청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晉은 曹와 衛를 멸망시킬 것이고, 楚도 宋를 멸망시킬 것이니, 이것이 바로 세 나라를 망치는 것이다.
▶ 楚得臣: 子玉. 楚의 令尹 成得臣.
▶ 約退三舍: 重耳가 楚를 지날 때 초 楚成王이 제후의 예로 우대하였다. 당시 초 성왕이
‘公子가 만약 晉으로 돌아가 군주가 된다면 나에게 무엇으로 보답하겠는가?’
라고 물었을 때 重耳는 三舍를 피하겠다고 대답하였다. 그러므로 90리를 피해주어 보답으로 여긴 것이다. 고대 행군시 30리를 1舍라 하였으며 3舍는 90里를 말한다.
四月戊辰,宋公、齊將、秦將與晉侯次城濮。
4월 무진일에 宋 군주와 齊 장군, 秦의 장군 등이 진문공과 함께 城濮에 진을 쳤다.
己巳,與楚兵合戰,楚兵敗,得臣收餘兵去。
기사일, 晉과 楚의軍이 맞붙어 싸우니 楚의軍이 패했고, 득신은 남은 병사들을 거두어 돌아갔다.
甲午,晉師還至衡雍,作王宮于踐土。
갑오일에 晉의 軍은 衡雍으로 돌아갔고, 踐土에 왕궁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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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四月戊辰: 4월 戊辰日에 晉侯‧宋公‧齊대부‧秦小子憖이軍을 거느리고서 城濮에 주둔하였다. 城濮은 衛 땅이다. <춘추좌씨전魯僖公18기원전632년>
▶ 衡雍: 鄭 땅으로 지금의 熒陽卷縣이다. 晉軍이 승전하고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周襄王이 직접 가서 위로하였기 때문에 王宮을 지은 것이다.
初,鄭助楚,楚敗,懼,使人請盟晉侯。
당초 鄭은 楚를 도왔는데 楚가 패하자 겁이 나서 사람을 보내 진문공에게 맹약을 청하였다.
晉侯與鄭伯盟。
진문공이 정백과 結盟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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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晉侯與鄭伯盟: 5월 丙午日에 진문공이 鄭伯과 衡雍에서 結盟하였다.
五月丁未,獻楚俘於周,駟介百乘,徒兵千。
5월 정미일에 진문공이 楚의 포로들을 周王에게 바치니, 갑옷을 입힌 네 마리 말이 끄는 수레가 100乘, 보병이 1천 명이었다.
天子使王子虎命晉侯為伯,賜大輅,彤弓矢百,玈弓矢千,秬鬯一卣,珪瓚,虎賁三百人。
천자는 王子虎를 보내 문공을 패주로 명하고 큰 수레, 붉은 활에 화살 100개, 검은 활에 화살 1,000개, 좋은 술 한 항아리, 옥으로 만든 주걱, 용맹한 병사 300명을 내려주었다.
晉侯三辭,然后稽首受之。
문공은 세 번 사양한 다음 절을 하고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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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駟介: 갑옷을 입힌 네 匹의 말.
▶ 徒兵: 보병.
▶ 王子虎: 周나라의 卿士.
▶ 大輅: 金輅. 황금으로 장식한 큰 수레. 제사 때 타는 수레.
▶ 彤弓: 붉은 활. 천자가 붉은 활을 제후에게 하사하여 제후로 하여금 정벌할 수 있는 대권을 준 것을 말한다. 당시 제후가 弓矢를 하사받은 뒤에야 정벌을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붉은 활. 彤은 붉을‘동’
▶ 玈弓: 검은 활. 彤은 赤弓이고, 玈는 黑弓이다. 활 한 자루에 살 백대씩을 주니, 살이 천 대면 활은 열 자루이다.
▶ 秬鬯: 검은 기장에 香草를 섞어 빚은 鬱鬯酒인데 제사 지낼 때 이 술을 땅에 부어 神을 降臨케 한다.
▶ 卣: 술통.
▶ 珪瓚: 제사 때 사용하는 제기로 손잡이를 옥으로 만든 酒器를 말한다.
▶ 虎賁: 용사. 무사.
周作晉文侯命:
「王若曰:
父義和,丕顯文、武,能慎明德,昭登於上,布聞在下,維時上帝集厥命于文、武。
恤朕身、繼予一人永其在位。」
주왕은 <晉文侯命>을 지었다.
“왕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義和숙부여, 밝고 빛나신 문왕과 무왕께서는 덕을 삼가 밝히시어 하늘에까지 밝게 올라가고 널리 세상에 알려졌으니, 이에 상제께서는 그의 명을 문왕과 무왕께 내리셨던 것이오.
나를 도와 조상의 업을 계승하여 영원히 왕위에 있도록 해주시오. ’”
於是晉文公稱伯。
이에 진문공을 覇者로 칭하였다.
癸亥,王子虎盟諸侯於王庭。
계해일에 王子虎가 제후들과 왕정에서 회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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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晉文侯命: <尙書>의 <文侯之命>. 周나라의 平王이 그의 제후인 춘추오패의 한 사람인 晉의 文侯에게 기장으로 빚은 술과 圭瓚을 하사할 때, 策命을 기록한 것이다. 후대의 周나라 襄王때 晉文公重耳에게 준 글이라고도 한 것은 사마천의 오류로 보고 있다. <尙書釋義>에서는 <史記>의 주장을 부인하면서 역시 평왕 때의 글로 보고 있다.
▶ 若: ~과 같다.
▶ 父: 숙부. 姓이 같은 제후들을 父라고 호칭한 것이다.
▶ 義和: 晉문후. 西周말기 晉의 군주로 이름은 仇이고, 字가 義和였다. 穆侯의 아들이다. 周平王의 東遷을 보좌하고 周携王을 주살하여 東周초기에 정국을 안정시키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 上: 하늘.
▶ 下: 백성. 세상.
▶ 維時: 於是와 같다. 이에.
▶ 伯: 霸와 통용된다. 覇者
▶ 王子虎: 周나라의 卿士.
▶ 王庭: 踐土에 있는 왕궁의 뜰.
晉焚楚軍,火數日不息,文公嘆。
晉이 楚의 군대에 불을 질러 며칠이 지나도록 꺼지지 않자, 문공이 탄식하였다.
左右曰:
「勝楚而君猶憂,何?」
측근이 말하였다.
“楚에게 이겼는데 군주께서 오히려 울적하시니 무엇 때문입니까?”
文公曰:
「吾聞能戰勝安者唯聖人,是以懼。
且子玉猶在,庸可喜乎!」
문공이 말하였다.
“내가 듣기에 전쟁에서 이기고 편한 사람은 성인뿐이라니 그것이 두렵소.
게다가 子玉이 아직 있는데 어찌 기뻐하겠소!”
子玉之敗而歸,楚成王怒其不用其言,貪與晉戰,讓責子玉,子玉自殺。
자옥이 패하여 돌아가니 초성왕은 화를 내며 그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욕심에서 晉과 싸웠다고 자옥을 꾸짖으니 자옥이 자살하였다.
晉文公曰:
「我擊其外,楚誅其內,內外相應。」
진문공이 말하였다.
“나는 밖에서 楚를 공격하고 楚는 안에서 대장을 죽이니 안팎이 잘 맞는구나. ”
於是乃喜。
이에 기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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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子玉: 楚의 令尹 成得臣. 楚成王에게 공자 중이를 죽이라고 간하였었다.
六月,晉人復入衛侯。
6월에 晉이 다시 衛 군주를 귀국시켰다.
壬午,晉侯度河北歸國。
임오일에 진문공이 황하를 건너 북쪽 길로 귀국하였다.
行賞,狐偃為首。
行賞하였는데, 狐偃이 으뜸이었다.
或曰:
「城濮之事,先軫之謀。」
누군가가 말하였다.
“城濮의 전투는 先軫의 계책이었습니다. ”
文公曰:
「城濮之事,偃說我毋失信。
先軫曰『軍事勝為右』,吾用之以勝。
然此一時之說,偃言萬世之功,柰何以一時之利而加萬世功乎?
是以先之。」
문공이 말하였다.
“성복의 전투에서 호언은 내게 信義를 잃지 말라고 했소.
선진은 말하기를 ‘군사는 승리가 으뜸입니다’라고 했고, 나는 그 말을 듣고 승리하였소.
그러나 그 말은 한때의 주장이고 호언의 말은 만세의 공적이니, 한순간의 이익이 어찌 만세의 공적보다 더하겠소?
그래서 호언을 于先하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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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加: 초과하다.
冬,晉侯會諸侯於溫,欲率之朝周。
겨울에 진문공은 온읍에서 제후들과 회맹하고 그들을 이끌고 周王에게 조회하려 하였다.
力未能,恐其有畔者,乃使人言周襄王狩于河陽。
역량이 미치지 못하고 제후 중 배반자가 있을까 염려하여, 사람을 보내 주양왕더러 河陽으로 사냥하러 나오라고 말하게 하였다.
壬申,遂率諸侯朝王於踐土。
임신일에 제후들을 이끌고 踐土에서 주왕에게 조회하였다.
孔子讀史記至文公,曰:
「諸侯無召王」.
孔子가 역사 기록을 읽다가 문공편에 이르러 말하였다.
“제후는 왕을 부를 수 없다.”
「王狩河陽」者,春秋諱之也。
‘양왕이 河陽에서 사냥하였다.’라고 한 것은 <春秋>가 이를 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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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畔: 叛과 통용된다. 배반하다.
▶ 史記: 역사 서적.
▶ 諱: 꺼리다. 피하다.
丁丑,諸侯圍許。
정축일에 제후들이 許를 포위하였다.
曹伯臣或說晉侯曰:
「齊桓公合諸侯而國異姓,今君為會而滅同姓。
曹,叔振鐸之後;晉,唐叔之後。
合諸侯而滅兄弟,非禮。」
曹의 신하 중 어떤 자가 문공을 설득하였다.
“齊환공은 제후들을 모아 姓이 다른 나라를 보존했는데, 지금 군주께서는 제후들을 모아 同姓을 멸망시킵니다.
曺는 叔振 鐸의 후손이고, 晉은 唐叔 虞의 후손입니다.
제후들을 모아 형제를 멸함은 예가 아닙니다. ”
晉侯說,復曹伯。
진문공이 기뻐하며 曺의 군주를 복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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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曹叔振鐸: 曹에 처음 봉해진 군주로 周 文王의 아들이다.
▶ 唐叔: 晉은 西周초기에 周成王이 자기의 동생 叔虞를 唐에 봉하면서 시작되었으며, 숙우의 아들 燮父가 도읍을 晉水 가로 옮기고 晉으로 개명하였다.
於是晉始作三行。
이 당시 晉은 三行을 신설하였다.
荀林父將中行,先縠將右行,先蔑將左行。
荀林父가 중행을, 先縠이 우행을, 先蔑이 좌행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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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三行: 晉은 이미 上‧中‧下의 三軍을 설치하였는데, 다시 三行을 증설하여 天子의 六軍의 명칭을 피하였다.
七年,晉文公、秦繆公共圍鄭,以其無禮於文公亡過時,及城濮時鄭助楚也。
문공7년(기원전630년), 晉文公과 秦繆公이 함께 鄭을 포위하였는데, 문공이 망명할 때의 무례함과, 성복 전투 때 鄭의 楚를 도움 때문이었다.
圍鄭,欲得叔瞻。
鄭을 포위하여 叔瞻을 얻고자 하였다.
叔瞻聞之,自殺。
숙첨이 이를 듣고 자살하였다.
鄭持叔瞻告晉。
鄭이 숙첨의 시신을 晉에 보냈다.
晉曰:
「必得鄭君而甘心焉。」
진문공이 말하였다.
“기어이 鄭의 군주를 얻어야 마음이 풀릴 터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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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叔瞻: 叔詹. 춘추시대 鄭의 대부. 鄭文公의 동생. 晉公子 重耳가 달아나다가 鄭에 들렀는데 문공이 예를 갖추지 않았다. 숙첨이 일찍이 문공에게 간하여 예로써 대하든가 아니면 죽여 후환을 없애라고 했지만 문공이 듣지 않았다. 나중에 晉과 秦이 鄭을 포위하자 자살하였다.
鄭恐,乃閒令使謂秦繆公曰:
「亡鄭厚晉,於晉得矣,而秦未為利。
君何不解鄭,得為東道交?」
鄭이 두려워하여 기회를 보아 진목공에게 사람을 보내 말하였다.
“鄭을 망하게 하고 晉을 후대함은 晉에게는 득이 되고 秦에게는 이득이 되지 않습니다.
주군께서는 어째서 鄭의 포위를 풀어 동쪽 길의 우방으로 삼지 않습니까?”
秦伯說,罷兵。
진목공은 기뻐하며 철군하였다.
晉亦罷兵。
晉 역시 철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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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閒: 빈틈을 이용하다.
▶ 東道交: 鄭이 晉의 동쪽에 있었다.
九年冬,晉文公卒,子襄公歡立。
문공9년(기원전628년), 겨울에 진문공이 죽고, 아들 襄公 歡이 즉위하였다.
是歲鄭伯亦卒。
이해에 鄭의 군주도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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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鄭伯亦卒: 여름4월 기축일에 鄭伯 捷이 죽었다. 鄭文公은 춘추시대 鄭의 군주로 鄭厲公의 아들이며 이름은 捷이다. <춘추좌씨전魯僖公32기원전628년>
鄭人或賣其國於秦,秦繆公發兵往襲鄭。
鄭의 누군가가 秦에 나라를 팔아넘기려고 하자, 秦繆公이軍을 일으켜 鄭을 습격하였다.
十二月,秦兵過我郊。
12월에 秦의 병사가 晉의 교외를 지나갔다.
襄公元年春,秦師過周,無禮,王孫滿譏之。
양공 원년(기원전627년) 봄에 秦의軍이 周나라를 지나면서 무례하게 굴자 王孫滿이 이를 나무랐다.
兵至滑,鄭賈人弦高將市于周,遇之,以十二牛勞秦師。
군대가 滑에 이르렀을 때, 鄭의 상인 弦高가 주나라로 장사를 하러 가다가 晉軍과 마주치자 소 열두 마리로 秦의 병사들을 위로하였다.
秦師驚而還,滅滑而去。
秦의軍이 놀라 돌아가면서 활을 멸망시키고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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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鄭: 鄭은 기원전806년, 주여왕의 아들이자 주선왕의 동생인 정환공 友가 서주의 기내에 있는 鄭땅에 봉해짐으로써 세워졌다. 韓에 의해 기원전375년에 멸망하였다.
▶ 賣其國於秦: 秦穆公이 大夫 杞子를 파견해 鄭을 지키게 했는데, 杞子가 鄭에서 사람을 보내 秦에 고하기를
“鄭 사람이 우리에게 北門의 열쇠를 맡겼으니, 은밀히 군사를 이끌고 온다면 鄭을 얻을 수 있다. ”
라고 하였다. <춘추좌전·僖公 32년>
▶ 襄公: 晉襄公. 춘추시대 晉의 25대 군주이다. 이름은 歡인데, 驩으로도 쓴다. 晉文公의 아들이다. 秦穆公이 병사를 일으켜 鄭을 습격하자, 晉文公이 죽어 장례도 치르지 않은 상태에서 상복을 입은 채 출병하여 殽에서 秦軍을 공격해 秦의 장군 셋을 사로잡았다. 전쟁이 끝난 뒤 세 장군을 秦으로 돌려보냈다. 나중에 秦과 여러 차례 전쟁을 벌였다. 7년 동안 재위하였다.
▶ 王孫滿: 주나라의 大夫. 周共王의 玄孫. 秦軍이 鄭을 습격하려고 周나라를 지나가면서 무례한 행동을 하자, 王孫 滿이 이를 보고는 秦軍이 반드시 패전할 것임을 예언하였다. <國語 周語19. 王孫滿觀秦師>
▶ 賈人: 상인.
▶ 滑: 周나라의 同姓의 제후로, 지금의 하남성 偃師縣 緱氏城에 도읍했었다. 활읍은 晉 변경의 읍이다.
▶ 秦師驚而還: 秦이 鄭을 습격하고자 하는 것을 鄭이 이미 알아챘다고 여겨 놀라서 돌아가려고 한 것이다.
晉先軫曰:
「秦伯不用蹇叔,反其眾心,此可擊。」
晉의 先軫이 말하였다.
“秦의 군주는 蹇叔의 말을 듣지 않는 데다, 사람들의 마음에 반하니 그를 공격할 만합니다.”
欒枝曰:
「未報先君施於秦,擊之,不可。」
欒枝가 말하였다.
“선군께서 秦에서 받은 은혜를 아직 갚지 않았는데 공격함은 불가합니다. ”
先軫曰:
「秦侮吾孤,伐吾同姓,何德之報?」
선진이 말하였다.
“秦이 우리의 부친상을 모욕하고 同姓의 나라를 공격하는데 무슨 은덕을 갚는단 말인가?”
遂擊之。
이에 秦을 공격하였다.
襄公墨衰绖。
양공은 검은 상복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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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先軫: 晉의 뛰어난 전략가이자 책사. 晉文公이 망명했을 때 보필한 신하 중 하나이며, 군사와 전술 방면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해 유명한 城濮전에서 成得臣이 이끈 楚의 대군을 궤멸시키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 蹇叔: 齊의 현인. 세상이 몰라주는 百里奚의 비범함을 첫눈에 간파하고 그를 오랫동안 거두어주었으며, 백리해가 秦穆公에게 발탁되자 그의 추천으로 역시 진목공을 섬기게 되었다.
▶ 孤: 晉襄公이 아버지의 상을 당하였으므로 孤라고 칭한 것이다.
▶ 衰绖: 상복. 衰는 상복 ‘최’. 绖은 상복을 입을 때 머리에 쓰는 首絰과 허리에 감는 腰絰.
四月,敗秦師于殽,虜秦三將孟明視、西乞秫、白乙丙以歸。
4월, 殽山에서 秦軍을 물리치고 晉의 세 장수 孟明視, 西乞秫, 白乙丙을 포로로 잡아 돌아왔다.
遂墨以葬文公。
양공은 검은 상복을 입고 마침내 문공을 안장하였다.
文公夫人秦女,謂襄公曰:
「秦欲得其三將戮之。」
진문공의 부인인 秦의 여자는, 양공에게 말하였다.
“秦은 그 세 장수를 얻으면 죽일 터입니다. ”
公許,遣之。
양공이 이 말을 받아들여 그들을 돌려보내었다.
先軫聞之,謂襄公曰:
「患生矣。」
선진이 그 소식을 듣고 양공에게 말하였다.
“걱정거리가 될 터입니다.”
軫乃追秦將。
선진이 이에 晉의 세 장수를 뒤쫓았다.
秦將渡河,已在船中,頓首謝,卒不反。
晉의 장수들은 황하를 건너 배 안에서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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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虜秦三將: 秦의 세 장군. 白乙丙‧西乞術‧孟明視를 말한다. 孟明視는 백리해의 아들, 西乞秫과 白乙丙은 건숙의 아들이다.
▶ 殽: 殽山. 지금의 함곡관이라고도 한다.
▶ 文公夫人: 文嬴. 秦이 종실의 딸을 圉(: 진회공)의 아내로 삼게 했으며, 晉공자 重耳(: 진문공)를 맞아들이고 이전의 어의 아내도 중이의 아내로 삼게 하였다. 즉, 문공부인은 晉襄公의 어머니이다.
晉文公의 부인은 秦의 여자였기에 포로로 잡혀 온 秦의 세 장군을 살려주기 위하여 말하였다.
“목공은 이 세 사람에 대한 원망이 골수에 사무쳐 있을 터이니, 이들을 돌려보내 우리나라 군주 목공이 통쾌하게 삶아 죽이도록 하시지요.”
晉襄公이 이를 허락하여 세 장수를 秦으로 돌려보냈다.
後三年,秦果使孟明伐晉,報殽之敗,取晉汪以歸。
그후 양공 3년(기원전625년), 秦은 과연 맹명시를 보내어 晉을 공격하여 효산에서의 패배를 갚는 한편 晉의 汪땅을 취하고 돌아갔다.
四年,秦繆公大興兵伐我,度河,取王官,封殽尸而去。
양공4년(기원전624년)에 秦繆公은 대대적으로 군사를 일으켜 晉을 공격하여 황하를 건너 王官을 취한 다음 효산에서 병사들의 시신을 묻고 돌아갔다.
晉恐,不敢出,遂城守。
晉은 두려워 감히 나오지 못한 채 성을 지켰다.
五年,晉伐秦,取新城,報王官役也。
양공5년(기원전623년)에 晉이 秦을 공격하여 新城을 취함으로써 왕관 전투의 패배를 되갚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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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孟明: 백리해의 아들. 孟明視
▶ 封殽尸而去: 진목공은 몸소 茅津에서 황하를 건넌 뒤 효산 전투에서 죽은 병사들을 위해서 봉분을 쌓아 장례를 치르고 사흘 동안 곡하였다. <사기 본기 권05. 진본기>
▶ 役: 전투.
六年,趙衰成子、欒貞子、咎季子犯、霍伯皆卒。
양공6년(기원전622년)에 趙衰成子, 欒貞子, 咎季子犯, 霍伯이 모두 죽었다.
趙盾代趙衰執政。
趙盾이 趙衰를 이어 집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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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趙衰成子: 춘추시대 晉 中軍長. 字는 子餘이고, 趙成子 또는 成季, 孟子餘등으로도 불린다.
▶ 欒貞子: 欒枝.
▶ 咎季子犯: 狐偃. 舅犯. 진문공의 외삼촌.
七年八月,襄公卒。
양공7년(기원전621년) 8월에 양공이 죽었다.
太子夷皋少。
태자 夷皐는 어렸다.
晉人以難故,欲立長君。
晉 사람들은 환난 때문에 나이 많은 군주를 세우고 싶어 하였다.
趙盾曰:
「立襄公弟雍。
好善而長,先君愛之;
且近於秦,秦故好也。
立善則固,事長則順,奉愛則孝,結舊好則安。」
조돈이 말하였다.
“양공의 동생인 雍을 세웁시다.
선행을 좋아하고 나이가 많으며 선군께서 사랑하셨습니다.
또 秦과 우리는 가까운데 秦과는 옛날부터 사이가 좋았습니다.
착한 사람을 세우면 나라가 공고해지고,
나이가 든 사람을 섬기면 순조로워지며,
사랑받는 사람을 받들면 효도가 되며,
오랫동안 잘 지내던 나라와 친분을 맺으면 나라가 편안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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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夷皐: 晉靈公. 춘추시대 晉의 군주로 이름은 夷皐이며, 襄公의 아들이다.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장성하자 사치하고 난폭해져 마구 사람을 죽였다. 趙盾이 간언하자 鉏麑를 시켜 조돈을 살해하게 했는데, 서예가 차마 죽이지 못하고 자살하였다. 조돈의 동생 趙穿에게 살해당하였다.
▶ 雍: 진양공의 동생. 진문공의 아들.
▶ 趙盾(조돈: zhào dùn): 趙宣子. 趙宣盟. 이름은 盾이며, 시호는 宣, 존칭으로 조맹 혹은 선맹이라 불리었다. 춘추시대 晉의 대부로 조최의 아들이다.
賈季曰:
「不如其弟樂。
辰嬴嬖於二君,立其子,民必安之。」
賈季가 말하였다.
“그 동생 樂만 못합니다. 그의 어머니 辰嬴은 두 군주의 총애를 받았으니 그 아들을 세우면 백성들이 틀림없이 안정될 것입니다. ”
趙盾曰:
「辰嬴賤,班在九人下,其子何震之有!
且為二君嬖,淫也。
為先君子,不能求大而出在小國,僻也。
母淫子僻,無威;陳小而遠,無援:將何可乎!」
조돈이 말하였다.
“신영은 신분이 천하고 부인 중에 서열이 아홉 번째이니 그 아들에게 무슨 위엄이 있겠소!
또 두 선군의 총애를 받음은 음란함이오.
선군의 아들로서 큰 나라의 도움도 구하지 못한 채 작은 나라에 나가 있으니 비루합니다.
어미는 음란하고 아들은 비루하니 위엄이 없소이다.
陳은 작고 멀어서 도움이 되지 못하니, 무엇을 가지고 가하다 하시오!”
使士會如秦迎公子雍。
士會를 秦에 보내 공자 雍을 맞아들였다.
賈季亦使人召公子樂於陳。
가계 역시 사람을 보내 陳에서 공자 樂을 불러들였다.
趙盾廢賈季,以其殺陽處父。
조돈은 陽處父를 살해했다는 이유로 賈季를 파면시켰다.
十月,葬襄公。
10월에 양공을 안장하였다.
十一月,賈季奔翟。
11월에 가계가 翟으로 달아났다.
是歲,秦繆公亦卒。
이해에 秦목공도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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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賈季: 狐射姑. 춘추시대 晉 狐偃의 아들이다. 晉襄公때 中軍帥가 되었는데 陽處父는 中軍佐가 되었다. 이를 원망해 族人 續鞫居를 시켜 양처보를 습격해 살해하였다. 晉 사람이 속국거를 죽이자 狄으로 달아났다. 진양공이 죽을 때 靈公이 아직 갓난아기였는데, 曹盾이 공자 公子 雍을 세우려 하자 그는 공자 公子 樂을 세우려고 하여 공자 낙이 조돈에게 살해당하였다.
▶ 辰嬴: 진목공의 딸 懷嬴. 두 임금은 懷公과文公이다. 懷嬴은 晉 懷公에게 시집갔다가 다시 진 晉文公과 재혼하여 辰嬴으로 불렸다
▶ 嬖: 총애하다.
▶ 班在九人下: 嫡夫人으로부터 서열이 아홉 번째라는 뜻이다. 班은 순위.
▶ 震: 위엄.
▶ 為先君子: 文公의 아들로서 大國으로 가서 벼슬을 구하지 않고 小國인 陳에 벼슬한 것은 비루하다는 말이다.
▶ 僻: 궁벽하다. 비루하다.
▶ 士會: 隨季. 춘추시대 晉의 대부. 자는 季이고, 隨와 范을 봉지로 받아 범계 또는 수계라고도 한다. 文公 등 네 임금을 섬기면서 法制를 정비하는 등 큰 치적을 쌓았다.
靈公元年四月,秦康公曰:
「昔文公之入也無衛,故有呂、郤之患。」
靈公원년(기원전620년) 4월에 秦康公이 말하였다.
“전에 文公을 晉으로 보낼 때 호위가 없었기 때문에 呂甥과 郤芮의 난이 일어난 것이다. ”
乃多與公子雍衛。
이에 공자 雍에게 호위병을 많이 주었다.
太子母繆嬴日夜抱太子以號泣於朝,曰:
「先君何罪?其嗣亦何罪?
舍適而外求君,將安置此?」
태자의 어머니 穆嬴은 밤낮으로 태자를 안고 조정에서 소리 내어 울면서 말하였다.
“선군께서 무슨 죄가 있으며, 그 후계자에게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적자를 버리고 밖에서 군주를 구하니 장차 이 아이를 어떻게 하려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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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秦康公: 춘추시대 秦의 군주로 이름은 罃이고, 穆公의 아들이다.
▶ 呂郤之患: 晉 大夫인 呂甥과 郤芮등이 반란을 일으켜 문공의 궁에 불을 질러 문공을 죽이려 하였으며, 秦繆公이 여생과 극예 등을 유인하여 황하 가에서 죽이니 晉이 평정을 되찾았다.
▶ 雍: 晉襄公의 동생. 진문공의 아들.
▶ 繆嬴: 진양공의 부인. 夷皐(: 晉영공)의 어머니.
出朝,則抱以適趙盾所,頓首曰:
「先君奉此子而屬之子,曰『此子材,吾受其賜;不材,吾怨子』。
今君卒,言猶在耳,而棄之,若何?」
조정을 나와 태자를 안고 조돈의 집으로 가서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였다.
“선군께서 이 아이를 끌어안고서 그대에게 부탁하면서 말씀하시기를,
‘이 아이를 재목으로 키워준다면 내가 그대의 은혜를 받겠지만 재목으로 크지 못한다면 나는 그대를 원망할 터이오.’라고 하셨소.
지금 군주께서 돌아가셔도 그 말씀이 아직 귓가에 맴도는데, 그 당부를 저버리시니 어찌 이럴 수가 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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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趙盾(조돈: zhào dùn): 趙宣子. 趙宣盟. 이름은 盾이며,시호는 宣,존칭으로 조맹 혹은 선맹이라 불리었다. 춘추시대 晉의 대부로 조최의 아들이다.
襄公 7년 中軍元帥가 되어 국정을 장악하였다. 양공이 죽자 先蔑과 士會를 시켜 공자 公子 雍을 秦에서 맞으려 했는데 양공의 부인 穆嬴으로 인하여 靈公(: 이고)을 세우고 공자 옹을 세우려는 秦軍을 방어하였다. 영공이 즉위하여 음란하고 폭압을 일삼자 간언을 올렸지만 뜻이 맞지 않고 오히려 죽이려고 하자 도망하여 망명길에 올랐다. 그가 아직 국경을 넘지 않았을 때 조돈의 동생 趙穿이 영공을 시해하자 晉으로 돌아왔다.
▶ 奉: 捧과 통용된다. 끌어안다.
趙盾與諸大夫皆患繆嬴,且畏誅,乃背所迎而立太子夷皋,是為靈公。
조돈과 대부들은 모두 繆嬴을 걱정하고, 또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하여 이에 맞이하려던 雍을 배반하고 태자 夷皋를 옹립하니 그가 靈公이다.
發兵以距秦送公子雍者。
軍을 일으켜 공자 옹을 호송해 오는 秦軍을 막았다.
趙盾為將,往擊秦,敗之令狐。
조돈이 장수가 되어 秦을 공격하여 令狐에서 물리쳤다.
先蔑、隨會亡奔秦。
先蔑과 隨會는 秦으로 달아났다.
秋,齊、宋、衛、鄭、曹、許君皆會趙盾,盟於扈,以靈公初立故也。
가을에 齊, 宋, 衛, 鄭, 曹, 許의 군주들이 모두 조돈과 합류하여 扈邑에서 회맹하니 영공이 막 즉위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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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距: 저항하다.
▶ 背所迎: 당초에 先蔑에게 공자 公子 雍을 맞이해 오게 하였기 때문에 先蔑을 배신하고 靈公을 세웠다고 한 것이다.
▶ 夷皐: 晉靈公. 춘추시대 晉의 군주로 이름은 夷皐이며, 襄公의 아들이다.
▶ 隨會: 춘추시대 晉의 大夫인 士會를 말하며 봉토가 隨와 范땅이므로 隨會, 范會등으로도 불린다. 晉 大臣 趙盾이 雍을 옹립하기 위해서 隨會를 보내 맞아들이게 하였으나, 晉이 양공의 아들 夷皐를 옹립하고 秦軍을 공격하는 바람에 수회는 秦으로 망명하였다.
四年,伐秦,取少梁。
영공4년(기원전617년)에 秦을 정벌하여 少梁을 빼앗았다.
秦亦取晉之郩。
秦 역시 晉의 郩邑을 빼앗았다.
六年,秦康公伐晉,取羈馬。
영공6년(기원전615년)에 秦 강공이 晉을 공격하여 羈馬를 빼앗았다.
晉侯怒,使趙盾、趙穿、郤缺擊秦,大戰河曲,趙穿最有功。
영공이 노하여 趙盾, 趙穿, 郤缺로 하여금 秦을 공격하게 하여 河曲에서 크게 싸웠으며, 조천이 가장 큰 공을 세웠다.
七年,晉六卿患隨會之在秦,常為晉亂,乃詳令魏壽餘反晉降秦。
영공7년(기원전614년)에 晉의 六卿들이 秦에 있는 隨會가 항상 晉에 내란을 일으킬까 걱정되어 魏壽餘에게 거짓으로 晉을 배반하고 秦에 항복하게 하였다.
秦使隨會之魏,因執會以歸晉。
秦이 隨會를 魏邑에 보내자 위수여가 수회를 잡아서 晉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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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取羈馬: 秦은 令狐에서 패전한 까닭에 진강공이 晉을 토벌해 羈馬를 탈취하였다. 羈馬는 晉의 邑이다.
▶ 魏壽餘: 畢萬의 후예이다. 壽餘는 魏邑을 지키는 大夫이다. 수여가 위읍의 백성들을 거느리고서 晉을 배반하고 秦에 붙을 것처럼 위장한 것인데, 실은 수회가 魏邑을 취하기 위해 오도록 유인해 귀국시키기로 계책을 꾸민 것이다.
八年,周頃王崩,公卿爭權,故不赴。
영공8년(기원전613년), 주나라 頃王이 붕어하자 공경들이 권력을 다투느라 喪을 알리지도 않았다.
晉使趙盾以車八百乘平周亂而立匡王。
晉은 조돈에게 兵車 800승을 거느리고 가서 주나라의 난을 평정하고 匡王을 세우게 하였다.
是年,楚莊王初即位。
이해에 楚 장왕이 막 즉위하였다.
十二年,齊人弒其君懿公。
영공12년(기원전609년), 齊 사람이 그들의 군주 懿公을 시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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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赴: 訃告하다.
▶ 匡王: 주나라의 제20대 왕이자 동주 시대의 여덟 번째 왕으로, 성은 姬, 이름은 班, 시호는 匡王이다. 주나라 제19대 頃王의 아들이자 제21대 定王의 형이다.
▶ 懿公: 齊懿公. 춘추시대 齊의 제21대 후작이며, 성은 姜이고 휘는 商人이다. 제환공과 밀희의 아들이다. 의공이 마부인 병융과 참승인 용직을 모욕하자, 두 사람이 함께 모의하여 의공과 대나무 숲으로 놀러가서 마차 위에서 의공을 시해하고 대나무 숲에 버리고 도망쳤다.
[史記世家]권32. 齊太公世家
十四年,靈公壯,侈,厚斂以彫墻。
영공14년(기원전607년), 영공이 장성하자 사치스러워져 세금을 무겁게 거두고 궁실의 담장을 그림으로 치장하였다.
從臺上彈人,觀其避丸也。
누대 위에서 사람들을 향해 탄환을 쏘며, 탄환을 피하는 모습을 구경하였다.
宰夫胹熊蹯不熟,靈公怒,殺宰夫,使婦人持其尸出棄之,過朝。
궁중 요리사가 곰발바닥을 덜 익혀서 내오자 영공은 화가 나서 요리사를 죽이고, 그의 부인에게 시체를 들고 조정 앞을 지나 내다 버리게 하였다.
趙盾、隨會前數諫,不聽;已又見死人手,二人前諫。
조돈과 수회가 전부터 몇 차례 간하였지만 영공은 듣지 않았다.
그러다 또 죽은 사람의 손을 보게 되자 두 사람은 나아가 간하였다.
隨會先諫,不聽。
수회가 먼저 간했으나 듣지 않았다.
靈公患之,使鉏麑刺趙盾。
영공은 이들을 근심하여 鉏麑를 시켜 조돈을 죽이라고 하였다.
盾閨門開,居處節,鉏麑退,嘆曰:
「殺忠臣,棄君命,罪一也。」
조돈의 내실 문이 열려 있었는데 그의 행동거지에 절도가 있어 서예가 물러나와 탄식하하였다.
“충신을 죽이는 것과 군주의 명령을 어기는 것, 죄가 됨은 같구나!”
遂觸樹而死。
이어 나무에 머리를 부딪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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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彫: 아로새기다. 그림으로 장식하다.
▶ 宰夫: 요리사.
▶ 胹: 삶다.
▶ 熊蹯: 곰발바닥.
▶ 鉏麑: 晉의 力士.
※觸槐: 鉏麑가 진 晉 靈公의 명을 받아 趙盾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조돈의 자세가 엄숙함을 보고 뜰에 있는 홰나무에 몸을 부딪쳐 죽었다는 고사이다.
▶ 閨: 內室.
初,盾常田首山,見桑下有餓人。
이전에 조돈은 首山으로 자주 사냥을 나갔는데, 뽕나무 아래에서 굶주린 사람을 보았다.
餓人,示瞇明也。
굶주린 사람은 示眯明이란 자였다.
盾與之食,食其半。
조돈이 먹을 것을 주자 그 절반만 먹었다.
問其故,曰:
「宦三年,未知母之存不,願遺母。」
그 까닭을 물었더니 말하였다.
“遊學한 지 3년에 어머니가 살아 계신지 조차 모르지만 어머니께 드리려고 합니다. ”
盾義之,益與之飯肉。
조돈은 그를 의롭게 여겨 밥과 고기를 더 주었다.
已而為晉宰夫,趙盾弗復知也。
뒤에 진영공의 요리사가 되었지만 조돈은 알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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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示瞇明: 提彌明. 춘추시대 晉의 正卿인 趙盾의 호위무사. <사기>에서는 뽕나무 아래에서 굶주렸던 靈輒을 시미명으로 혼동하여 기록하고 있으나 <춘추좌씨전>에는 晉 정경인 조돈의 호위무사로 기록하고 있다. <춘추좌씨전魯宣公2기원전607년>
▶ 田: 畋과 통용된다. 사냥하다.
▶ 宦: 배우다.
九月,晉靈公飲趙盾酒,伏甲將攻盾。
9월에 晉영공이 조돈에게 술을 먹이고 매복한 甲兵이 조돈을 공격하려 하였다.
公宰示瞇明知之,恐盾醉不能起,而進曰:
「君賜臣,觴三行可以罷。」
영공의 요리사 시미명이 이를 알고서 조돈이 취하여 일어나지 못할까 걱정하여 앞으로 나아가 말하였다.
“군주께서 신하에게 술을 베풂에, 석 잔이 돌면 끝나는 것입니다.”
欲以去趙盾,令先,毋及難。
이렇게 하여 조돈을 물리치고 먼저 자리를 떠서 화가 미치지 않도록 하였다.
盾既去,靈公伏士未會,先縱齧狗名敖。
조돈이 자리를 뜬 후, 영공이 매복시킨 병사들이 모이기에 앞서 먼저 獒라는 사나운 개를 풀어 놓았었다.
明為盾搏殺狗。
시미명이 조돈을 위해 개를 때려 죽였다.
盾曰:
「棄人用狗,雖猛何為。」
조돈이 말하였다.
“사람을 버리고 개를 부리니 아무리 사납다고 해도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然不知明之為陰德也。
그러나 조돈은 시미명이 몰래 베푼 은덕을 몰랐다.
已而靈公縱伏士出逐趙盾,示瞇明反擊靈公之伏士,伏士不能進,而竟脫盾。
얼마 후 영공은 매복 병사들을 풀어 조돈을 쫓게 했으나, 시미명이 영공의 병사들에게 반격하자 병사들이 나아가지 못했고 조돈은 결국 벗어날 수 있었다.
盾問其故,曰:
「我桑下餓人。」
조돈이 자신을 구해준 까닭을 묻자 시미명이 말하였다.
“내가 뽕나무 아래의 그 굶주린 사람입니다. ”
問其名,弗告。
이름을 물으니 대답하지 않았다.
明亦因亡去。
시미명도 이어서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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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齧狗: 맹견.
盾遂奔,未出晉境。
趙盾은 달아나긴 했으나 晉의 국경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乙丑,盾昆弟將軍趙穿襲殺靈公於桃園而迎趙盾。
을축일에 조돈의 동생인 장군 趙穿이 桃園에서 영공을 습격하여 죽이고 조돈을 맞아들였다.
趙盾素貴,得民和;靈公少,侈,民不附,故為弒易。
조돈이 평소 존귀하여 민심을 얻은 반면 영공은 젊은 나이에 사치스러워 백성이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시해하기 수월하였다.
盾復位。
조돈은 종전의 지위를 회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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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趙穿: 춘추시대 晉의 대부. 趙盾의 동생이다.
晉太史董狐書曰:
「趙盾弒其君」,以視於朝。
晉의 太史 董狐가
“조돈이 그 국군을 시해하였다. ”라고 적어 조정에서 보여주었다.
盾曰:
「弒者趙穿,我無罪。」
조돈이 말하였다.
“시해한 사람은 조천이고 나는 죄가 없다. ”
太史曰:
「子為正卿,而亡不出境,反不誅國亂,非子而誰?」
태사가 말하였다.
“그대는 正卿의 신분으로 도망쳤으나 국경을 넘지 않았고, 돌아와서도 나라를 어지럽힌 자를 죽이지 않았으니 그대가 아니면 누구란 말이오?”
孔子聞之,曰:
「董狐,古之良史也,書法不隱。
宣子,良大夫也,為法受惡。
惜也,出疆乃免。」
孔子가 이 일을 듣고 말하였다.
“동호는 옛날에 훌륭한 사관이었기에 죄를 숨기지 않는 기록의 원칙을 지켰다.
趙宣子는 훌륭한 대부였기에 서법을 위하여 오명을 받아들였다.
애석하다, 국경을 넘었더라면 오명을 면할 수 있었을 터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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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董狐: 춘추시대 晉의 史官이다. 史狐라고도 한다.
▶ 疆: 국경.
趙盾使趙穿迎襄公弟黑臀于周而立之,是為成公。
조돈은 조천을 시켜 양공의 동생 黑臀을 주나라에서 맞아들여 옹립하니 그가 成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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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成公: 晉成公. 黑臀. 晉文公의 아들이며 襄公의 동생. 趙穿이 靈公을 죽이고 周나라에 인질로 있던 그를 맞아 세웠다. 楚와 힘을 겨루면서 宋와 衛, 鄭, 曹의 제후를 扈에 모이게 하였다. 陳이 楚를 두려워하여 참여하지 않자 荀林父에게 군사를 이끌고 치게 했지만 楚와의 전투에서 패하였다. 7년 동안 재위하였다.
成公者,文公少子,其母周女也。
성공은 진문공의 작은 아들로 그 어머니는 周나라 여자였다.
壬申,朝于武宮。
임신일에 武宮에 조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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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武宮: 曲沃 武公의 宗廟.
成公元年,賜趙氏為公族。
성공 원년(기원전606년에 趙氏를 公族으로 삼았다.
伐鄭,鄭倍晉故也。
鄭을 토벌했는데 鄭이 晉을 배반했기 때문이다.
三年,鄭伯初立,附晉而棄楚。
성공3년(기원전604년), 鄭의 군주가 막 즉위하여 晉을 따르고 楚를 버렸다.
楚怒,伐鄭,晉往救之。
楚가 노하여 鄭을 공격하자 晉이 가서 구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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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公族: 제후의 일족.
六年,伐秦,虜秦將赤。
성공6년(기원전601년), 晉이 秦을 공격하여 장수 赤을 포로로 잡았다.
七年,成公與楚莊王爭彊,會諸侯于扈。
성공7년(기원전600년), 진성공과 초장왕이 패권을 다투며 호읍에서 제후들과 회맹하였다.
陳畏楚,不會。
陳은 楚를 두려워하여 회맹에 오지 않았다.
晉使中行桓子伐陳,因救鄭,與楚戰,敗楚師。
晉이 中行桓子를 보내 陳을 토벌했으며, 鄭을 구원하려고 楚와 싸워 楚軍을 물리쳤다.
是年,成公卒,子景公據立。
이해에 성공이 죽고, 아들 景公 據가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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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會諸侯于扈: 9월에 晉侯‧宋公‧衛侯‧鄭伯‧曹伯이 扈읍에서 회합하였다. 扈는 鄭 땅이다. 이는 晉에 복종하지 않는 나라를 토벌할 것을 모의하기 위함이었다. 陳侯가 회합에 오지 않으니, 晉 荀林父가 제후軍을 거느리고 가서 陳을 토벌하였다 이때 진성공이 호읍에서 죽으니 제후의軍이 돌아갔다.
▶ 陳畏楚,不會. : 前年에 楚와 화친하였기 때문에 오지 않은 것이다
▶ 陳: 舜임금의 후손 胡公滿이 기원전 1045년 주나라 무왕에 의하여 陳에 책봉되어 성립되었으며, 기원전478년 楚에 의해 멸망하였다.
▶ 中行桓子: 荀林父. 춘추시대 晉의 정치가이며, 6卿의 일원으로 관위는 중군원수에 이르렀다. 中行: 晉의 군대 편제의 한 단위의 대장을 맡은 고로 中行을 씨로 삼아, 晉의 6경 중 중항씨의 시조가 되었다.
▶ 景公據: 晉景公. 춘추시대 晉의 제26대 임금이다. 이름은 獳이다. 據라는 설도 있다. 진성공의 아들로 아버지가 초와 강화한 陳을 토벌하기 위해 연합군을 이끌고 출전했다가 사망하자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景公元年春,陳大夫夏徵舒弒其君靈公。
경공 원년(기원전599년) 봄에 陳의 대부 夏徵舒가 그의 군주 陳靈公을 시해하였다.
二年,楚莊王伐陳,誅徵舒。
경공2년(기원전598년)에 楚莊王이 陳나라를 공격하여 하징서를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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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景公: 晉景公. 춘추시대 晉의 제26대 임금이다. 이름은 獳이다. 據라는 설도 있다. 진 성공의 아들로 아버지가 楚와 강화한 陳나라를 토벌하기 위해 연합군을 이끌고 출전했다가 사망하자 뒤를 이어 즉위했다
▶ 夏徵舒: 춘추시대 陳나라의 대부. 어머니는 음녀로 유명하였던 夏姬인데, 수년간 어머니 하희가 陳靈公 등과 음란한 짓을 계속하고 자신마저 욕보이자, 화가 난 하징서는 진영공을 죽였다. 하징서는 집으로 들어가 어머니 하희를 감금하고 진영공의 아들 공자 孔子 午를 군주에 즉위하게 하였다. 그러나 楚莊王이 楚軍을 이끌고 쳐들어오자, 하징서는 습격을 받고 달아났으나 끝내 잡혀 晉으로 끌려와 임금을 죽인 죄로 거열형에 처해져 죽었다.
<[史記世家]권36. 陳杞世家(03/05>
▶ 楚莊王伐陳: 기원전598년, 楚莊王이 陳을 공격하여 夏徵舒를 죽였다.
三年,楚莊王圍鄭,鄭告急晉。
경공3년(기원전597년), 초장왕이 鄭을 포위하자 鄭은 晉에 위급함을 알렸다.
晉使荀林父將中軍,隨會將上軍,趙朔將下軍,郤克、欒書、先縠、韓厥、鞏朔佐之。
晉은 荀林父에게 중군을, 隨會에게 상군을 趙朔에게 하군을 이끌게 하고, 郤克, 欒書, 先縠, 韓厥, 鞏朔이 보좌하게 하였다.
六月,至河。
6월에 晉軍이 황하에 이르렀다.
聞楚已服鄭,鄭伯肉袒與盟而去,荀林父欲還。
楚가 이미 鄭을 항복시켜 鄭의 군주가 肉袒하고 동맹을 맺으니 楚軍이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荀林父는 돌아가려 하였다.
先縠曰:
「凡來救鄭,不至不可,將率離心。」
先縠이 말하였다.
“간신히 鄭을 구하러 왔는데 가지 않으면 안 되오,
장수들의 마음이 흩어질 터이오. ”
卒度河。
마침내 황하를 건넜다.
楚已服鄭,欲飲馬于河為名而去。
楚는 이미 鄭을 항복시키고 황하에서 말에게 물을 먹이며 위세를 뽐내고 떠나려 하고 있었다.
楚與晉軍大戰。
楚와 晉의 軍이 크게 싸웠다.
鄭新附楚,畏之,反助楚攻晉。
갓 楚를 따른 鄭은 楚를 두려워하여 도리어 楚를 도와 晉을 공격하였다.
晉軍敗,走河,爭度,船中人指甚眾。
晉의 軍은 패하여 황하로 달아나 서로 건너려고 다투다가 배 안에는 잘린 손가락이 아주 많았다.
楚虜我將智罃。
楚는 晉의 장수 智罃을 사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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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肉袒: 웃통을 벗어 상체를 드러내는 것으로 복종, 사죄 등의 뜻을 나타낸다.
▶ 荀林父: 中行桓子. 춘추시대 晉의 정치가이며, 6卿의 일원으로 관위는 중군원수에 이르렀다.
▶ 將率: 將帥. 率(우두머리 수)는 帥와 통한다.
▶ 人指甚眾: 晉軍이 패배하자 晉桓子는 어찌할 바를 몰라 軍中에서 북을 치며 말하기를,
“먼저 황하를 건너가는 자에게는 상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니, 中軍과 下軍이 먼저 배에 오르려고 다투어 배 안에 잘린 손가락이 두 손으로 움킬 정도였다. <춘추좌씨전 노선공12년>
▶ 智罃: 智武子. 字는 子羽. 춘추시대 晋의 卿士. 순림보의 조카이다.
歸而林父曰:
「臣為督將,軍敗當誅,請死。」
晉軍이 귀국하자 순림보가 말하였다.
“신은 통솔 장군으로서 군이 패하여 죽어 마땅하오니 죽여 주십시오.”
景公欲許之。
경공이 이를 허락하려고 하였다.
隨會曰:
「昔文公之與楚戰城濮,成王歸殺子玉,而文公乃喜。
今楚已敗我師,又誅其將,是助楚殺仇也。」
隨會가 말하였다.
“지난날 文公께서 楚와 성복에서 싸웠을 때 楚成王은 돌아가 자옥을 죽였고, 문공께서는 기뻐하셨습니다.
지금 楚가 이미 우리 軍을 패퇴시켰는데, 또 그 장수를 죽인다면 楚를 도와 초의 원수를 죽이는 꼴입니다. ”
乃止。
경공은 이에 그만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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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隨會: 춘추시대 晉의 大夫 士會를 말하며 봉토가 隨와 范땅이므로 隨會, 范會등으로도 불린다. 晉의 대신 趙盾이 雍을 옹립하기 위해서 隨會를 보내 맞아들이게 하였으나 晉이 양공의 아들 夷皐를 옹립하고 秦軍을 공격하는 바람에 수회는 秦으로 망명했다가 돌아왔다.
四年,先縠以首計而敗晉軍河上,恐誅,乃奔翟,與翟謀伐晉。
경공4년(기원전596년), 先縠은 맨 먼저 계책을 냈다가 황하에서 晉軍이 패하자 죽음이 두려워 翟으로 달아나서 翟과 함께 晉 공격을 모의하였다.
晉覺,乃族縠。
晉이 이를 알고 곧 선곡의 가족을 다 죽였다.
縠,先軫子也。
선곡은 先軫의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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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先縠: 先軫의 후대. 춘추시대 晉의 대부.
▶ 先軫: 晉의 뛰어난 전략가이자 책사. 晉文公이 망명했을 때 보필한 신하 중 하나이며, 군사와 전술 방면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해 유명한 城濮전투에서 成得臣이 이끈 楚의 대군을 궤멸시키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 族: 범죄자의 三族을 멸했던 형벌
五年,伐鄭,為助楚故也。
경공5년(기원전595년)에 鄭을 토벌했는데 鄭이 楚를 도왔기 때문이다.
是時楚莊王彊,以挫晉兵河上也。
이 무렵 楚장왕은 강했는데, 황하에서 晉軍을 꺾었기 때문이다.
六年,楚伐宋,宋來告急晉,晉欲救之,伯宗謀曰:
「楚,天方開之,不可當。」
경공6년(기원전594년), 楚가 宋을 공격하자 宋이 와서 晉에 시급함을 알렸고, 晉이 구원하려 하는데 伯宗이 계책을 말하였다.
“하늘이 바야흐로 楚를 돕고 있어 對敵해서는 안 됩니다.”
乃使解揚紿為救宋。
이에 解揚을 宋에 사자로 보내 宋을 구원한다고 속이게 하였다.
鄭人執與楚,楚厚賜,使反其言,令宋急下。
그러나 鄭의 군주가 그를 잡아 楚에 보내니, 楚는 해양에게 많은 뇌물을 주며 宋에게 반대로 말하도록 하여 宋을 빨리 굴복시키려 하였다.
解揚紿許之,卒致晉君言。
해양이 거짓으로 허락하고 끝내 晉의 군주가 한 말을 전하였다.
楚欲殺之,或諫,乃歸解揚。
楚가 그를 죽이려 했으나 누군가 말려서 해양을 晉으로 돌려보냈다.
七年,晉使隨會滅赤狄。
경공7년(기원전593년), 晉이 수회를 시켜 赤狄을 멸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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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伯宗: 晉의 大夫.
▶ 紿: 기만하다. 속이다.
▶ 解揚: 字는 子虎. 晉 霍邑사람으로 霍虎라고도 한다.
진경공6년(기원전594년), 초장왕이 宋의 수양성을 포위하자 宋은 晉에 구원을 요청했으나 晉의 伯宗이 필 전투의 패배를 볼 때 하늘이 楚를 돕고 있는 만큼 이번에도 이기기 어려울 것이므로 실제로 軍을 동원하지 않되 구원병을 보낼 것처럼 꾸며 楚의 포위를 풀자는 계략을 내놓자 진경공은 解揚을 宋에 사자로 보냈다. 해양은 가는 길에 楚에 사로잡히게 되며, 초장왕은 해양에게 宋에게 晉의 구원군이 오지 않을 것이니 어서 항복하라고 말하면 살려주고 楚에서 중히 쓸 것이라고 말했으나 해양은 죽음을 각오하고 宋의 성에 진군이 곧 당도할 것이라고 외쳤다. 초장왕은 진노했지만 그가 晉의 신하로서 목숨을 걸고 사명을 마쳤다는 점을 치하하고 그를 풀어주었다. 이 일로 “解揚守信”이라는 성어가 전해진다.
八年,使郤克於齊。
경공8년(기원전592년), 郤克을 齊에 사신으로 보냈다.
齊頃公母從樓上觀而笑之。
齊頃公의 어머니가 누각 위에서 극극을 보고 웃었다.
所以然者,郤克僂,而魯使蹇,衛使眇,故齊亦令人如之以導客。
그렇게 한 까닭은 극극은 꼽추, 魯의 사신은 절름발이, 衛의 사신은 애꾸였기 때문으로, 그런 까닭에 齊 역시 이들과 같은 사람들로 하여금 손님을 인도하도록 하였다.
郤克怒,歸至河上,曰:
「不報齊者,河伯視之!」
극극은 화가 났고, 돌아가는 길에 황하에서 말하였다.
“齊에 보복하지 않음을 하백께서 보고 있다!”
至國,請君,欲伐齊。
극극이 晉에 도착하여 군주에게 청하기를 齊를 공격하자고 하였다.
景公問知其故,曰:
「子之怨,安足以煩國!」
景公이 그 까닭을 묻고 말하였다.
“그대의 원한 때문에 어찌 나라를 번거롭게 하겠는가!”
弗聽。
들어주지 않았다.
魏文子請老休,辟郤克,克執政。
魏文子가 나이를 이유로 은퇴를 청하며 극극을 피하니 극극이 집정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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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卻克(극극/각극: 郤献子. 성은 姬, 씨는 郤, 이름은 克이다. 춘추시대 晉의 정경이었다. 몸이 불구였으나 장군으로 齊와 鞍땅의 전투에서 齊를 대패시켰다.
▶ 齊頃公母: 제경공의 어머니. 蕭桐叔의 딸.
▶ 笑之: 극극이 곱추였기 때문에 웃은 것이다. <穀梁傳>에
“郤克이 절름발이였기 때문에 제경공이 절름발이를 시켜 그를 맞이하게 하였다.”
라고 하였다. <춘추좌씨전 노선공17기원전592년>
▶ 僂: 곱추.
▶ 蹇: 절름발이.
▶ 眇: 애꾸눈.
九年,楚莊王卒。
경공9기원전591년, 楚장왕이 죽었다.
晉伐齊,齊使太子彊為質於晉,晉兵罷。
晉이 齊를 공격하자 齊는 태자 彊을 晉에 인질로 보냈고, 晉은 撤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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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晉伐齊: 齊侯가 晉侯와 회합하여 결맹하고서 공자 疆을 晉에 인질로 보내니 晉軍이 돌아갔다. <춘추좌씨전 노선공18기원전591년>
十一年春,齊伐魯,取隆。
경공11년(기원전589년)봄, 齊가 魯를 공격하여 隆邑을 탈취하였다.
魯告急衛,衛與魯皆因郤克告急於晉。
魯가 衛에 위급함을 알리자 衛와 魯는 모두 郤克을 통해 晉에 급함을 알렸다.
晉乃使郤克、欒書、韓厥以兵車八百乘與魯、衛共伐齊。
晉은 이에 극극, 난서, 한궐에게 전차 800승을 주어 魯, 衛와 함께 齊를 공격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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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景公: 晉景公. 춘추시대 晉의 제26대 임금이다. 이름은 獳이다. 據라는 설도 있다. 진 공의 아들로 아버지가 楚와 강화한 陳을 토벌하기 위해 연합군을 이끌고 출전했다가 사망하자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夏,與頃公戰於砹傷困頃公。
여름에 砹(:鞍)땅에서 齊頃公과 싸워 제경공에게 상처를 입히고 곤경으로 몰았다.
頃公乃與其右易位,下取飲,以得脫去。
경공은 전차의 호위병과 자리를 바꾸고, 내려서 물을 마시는 척하다가 탈출하였다.
齊師敗走,晉追北至齊。
齊軍이 패하여 달아나자 晉은 敗軍을 齊에까지 뒤쫓았다.
頃公獻寶器以求平,不聽。
제경공이 보화와 기물을 바치며 강화를 요청했으나 晉이 들어주지 않았다.
郤克曰:
「必得蕭桐姪子為質。」
극극이 말하기를,
“반드시 蕭桐의 조카를 인질로 잡아야만 한다. ”라고 하였다.
齊使曰:
「蕭桐姪子,頃公母;
頃公母猶晉君母,柰何必得之?
不義,請復戰。」
齊의 사신이 말하였다.
“소동의 조카는 頃公의 어머니입니다.
頃公의 어머니는 晉 군주의 어머니와 같거늘 어찌 기어이 인질로 요구한단 말입니까?
의리가 아니니 다시 싸웁시다. ”
晉乃許與平而去。
晉은 이에 강화를 받아들이고 철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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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砹: 鞍은 齊 땅.
▶ 頃公: 齊頃公. 춘추시대 齊의 國君으로 이름은 無野이며, 桓公의 손자다. 경공의 어머니가 晉의 사신 郤克이 꼽추임을 비웃어 晉과 원한을 갖게 되었다. 경공10년 齊가 魯와 衛를 공격하는데 晉이 와서 구원하여 鞍에서 싸웠는데 대패하였다. 그 결과 魯와 衛에게 빼앗은 땅을 모두 반환하였다. 나중에 나라의 苑囿를 개방하고 세금을 경감하며 어려운 백성을 돌보니, 백성들이 기뻐해 귀의했고 제후들도 넘보지 못하였다. 재위 기간은 17년이고, 시호는 頃이다.
▶ 頃公乃與其右易位: 전투 중 齊가 위급해졌으며, 逄丑父는 경공이 잡힐까 걱정되어 전차에서 자리를 바꾸었으며, 경공이 오른쪽 자리를 잡았으나 전차가 나무에 걸려 멈추고 말았다. 방추보가 거짓으로 경공에게 마실 물을 떠오게 하여 경공은 도망쳐 나와 齊軍으로 돌아갔다. <史記世家권32. 齊太公世家>
▶ 平: 강화하다.
▶ 追北: 패배하여 달아나는 적을 추격하다. 北는 달아날 ‘배’.
▶ 蕭桐姪子: 제경공의 어머니를 말한다. 蕭桐叔의 딸이다. 桐叔은 蕭君의 字로 제경공의 외조부이다. 子는 딸이다. 제경공의 어머니라고 직접 지적하기 곤란하기 때문에 완곡하게 말한 것이다.
楚申公巫臣盜夏姬以奔晉,晉以巫臣為邢大夫。
楚의 申公 巫臣이 夏姬를 훔쳐 晉으로 도망쳐 오자 晉은 무신을 邢읍의 大夫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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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申公巫臣: 춘추시대 楚 사람인 屈申. 字는 子夷로 楚의 대부인데, 申公巫臣이라고도 한다. 楚 大夫 巫臣은 子反이 夏姬를 취하려 할 때 저지하고는 마침내 자신이 하희를 취해 도망가자 楚의 장수 子反이 무신의 집안사람들을 죽이고 재산을 가로채어 무신이 자반을 원망하게 되었다. 무신이 晉에서 吳로 사신으로 갔다가 吳의 군사를 훈련시키고 수레를 타고 전투를 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었으며, 아들로 하여금 吳의 行人이 되게 하였다. <춘추좌씨전·노성공2년>
十二年冬,齊頃公如晉,欲上尊晉景公為王,景公讓不敢。
경공12년(기원전588년) 겨울에 齊頃公이 晉으로 가서 晉景公을 천자의 예절로 알현코자 했으나 晉景公이 감당할 수 없다며 사양하였다.
晉始作六卿[軍],韓厥、鞏朔、趙穿、荀騅、趙括、趙旃皆為卿。
晉이 처음으로 六軍을 창설하고, 한궐, 공삭, 조천, 순추, 조괄, 조전을 卿으로 삼았다.
智罃自楚歸。
지앵이 楚에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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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齊頃公如晉: 제경공이 晉에 조회를 가서 晉景公을 천자의 예절로 알현코자 했으나 진경공이 감당할 수 없다며 받아들이지 않자 齊로 돌아갔다. <史記世家]권32. 齊太公世家>
▶ 六軍: <周禮>에
“天子는 六軍이고, 諸侯로서 大國은 三軍이다. ”
라고 하였다.
▶ 智罃: 智武子. 字는 子羽. 춘추시대 晋의 卿士. 순림보의 조카이다. 楚와 전투에서 楚에 포로로 잡혔었다.
十三年,魯成公朝晉,晉弗敬,魯怒去,倍晉。
경공13년(기원전587년)에 魯成公이 晉에 조회하려 했으나, 晉이 그를 공경하지 않자 노성공이 화가 나서 가버리고 晉을 등져버렸다.
晉伐鄭,取氾。
晉이 鄭을 공격하여 氾땅을 취하였다.
十四年,梁山崩。
경공14년(기원전586년)에 梁山이 무너졌다.
問伯宗,伯宗以為不足怪也。
경공이 伯宗에게 물으니 백종은 괴이하게 여길 것 없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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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梁山崩: 異變을 기록한 것이다. <춘추좌씨전 노성공5기원전586년>
十六年,楚將子反怨巫臣,滅其族。
경공16년(기원전584년)에 楚의 장수 子反이 무신에 원한을 품고 그의 가족을 滅門하였다.
巫臣怒,遺子反書曰:
「必令子罷於奔命!」
무신이 노하여 자반에게 서신을 보내 말하였다.
“반드시 네 놈을 분주히 돌아다니는 고달픈 신세로 만들겠다!”
乃請使吳,令其子為吳行人,教吳乘車用兵。
이에 무신은 吳에 사신으로 가기를 청하여, 그의 아들을 吳의 行人이 되게 하고 吳에게 兵車를 모는 기술과 용병을 가르쳤다.
吳晉始通,約伐楚。
吳와 晉이 처음으로 교류하며 楚를 공격하기로 약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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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子反: 초 장왕의 동생으로 楚의 司馬이다.
▶ 奔命: 君命을 받고 분주히 돌아다니며 변경의 위급을 구원하는 것이다.
▶ 行人: 朝覲·聘問의 일을 맡은 관직.
十七年,誅趙同、趙括,族滅之。
경공17년(기원전583년)에 晉이 趙同과 趙括을 죽이고 집안을 멸하였다.
韓厥曰:
「趙衰、趙盾之功豈可忘乎?
柰何絕祀!」
한궐이 말하였다.
“趙衰와 趙盾의 공을 어찌 잊을 수 있는가?
어찌 제사를 끊는가!”
乃復令趙庶子武為趙後,復與之邑。
이에 다시 조씨의 서자 趙武를 조씨의 후사로 삼고 조씨의 채읍을 회복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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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誅趙同、趙括: 晉의 趙莊姬가 趙嬰이 망명한 일로 趙同과 趙括을 경공에게 참소하기를,
“原同과 屛括이 반란을 일으키려 합니다.”
고 하니, 欒氏와 郤氏가 그들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증언하였다. 6월에 晉이 趙同과 趙括을 죽였다.
▶ 趙庶子武: 趙武는 莊姬의 아들이다. 趙武는 莊姬를 따라가서 진성공의 궁중에서 양육되었기 때문에 화를 면하였다. 莊姬는 晉成公의 딸이다.
▶ 韓厥: 춘추시대 晉 사람으로 韓獻子 또는 獻子로도 불린다. 韓의 선조는 周와 같은 성인 姬氏이다. 齊에 승리한 공으로 新中軍將이 되었다.
十九年夏,景公病,立其太子壽曼為君,是為厲公。
경공19년(기원전581년) 여름에 경공의 병이 깊어져 태자 壽曼을 군주로 세우니 그가 厲公이다.
後月餘,景公卒。
한달여 뒤에 경공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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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厲公: 晉厲公. 춘추시대 晉의 군주로 이름은 壽曼이고, 景公의 아들이다. 나중에 교만하고 사치에 빠져 寵姬를 여럿 거느리고, 大夫들을 모두 내쫓고 총희의 형제들로 채웠다. 총희의 오빠 胥童을 卿으로 삼고, 대부 郤錡와 郤犫, 郤至를 살해하였다. 결국 欒書와 中行偃에게 살해당하였다. 8년 동안 재위하였다.
厲公元年,初立,欲和諸侯,與秦桓公夾河而盟。
厲公원년(기원전580년)에 여공이 막 즉위하여 제후들과 화평하기 위해 秦桓公과 황하를 사이에 두고 회맹하였다.
歸而秦倍盟,與翟謀伐晉。
여공이 귀국하니 秦이 회맹을 깨고 翟과 함께 晉 침공을 꾀하였다.
三年,使呂相讓秦,因與諸侯伐秦。
여공3년(기원전578년)에 呂相을 사신으로 보내 秦을 꾸짖게 하고 이어 제후들과 秦 공격에 나섰다.
至涇,敗秦於麻隧,虜其將成差。
涇河에 이르러 麻隨에서 秦을 물리치고 장수 成差를 사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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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厲公: 晉厲公. 춘추시대 晉의 군주로 이름은 壽曼이며 景公의 아들이다. 鄭이 晉을 배신하고 楚와 동맹을 맺자 여공6년 군사를 이끌고 정벌하였다. 楚 사람들이 와서 구원하자 鄢陵에서 楚軍을 대파하였다. 이때부터 위명을 크게 떨쳤다. 나중에 교만하고 사치에 빠져 寵姬를 여럿을 거느리고, 大夫들을 모두 내쫓고 총희의 형제들로 채웠다. 총희의 오빠 胥童을 卿으로 삼고, 대부 郤錡와 郤犫, 郤至를 살해하였다. 결국 欒書와 中行偃에게 살해되었다. 8년 동안 재위하였다.
▶ 桓公: 秦桓公. 성은 嬴, 씨는 秦이며 이름은 榮이다. 秦의 제13대 군주이며 진공공의 아들이다.
▶ 呂相讓秦: 晉厲公은 전년에 秦이 晉과 令狐에서 결맹하기로 약정하고서 진여공이 먼저 도착했다는 이유로 진환공은 약정을 어기고 신하를 보내 결맹하게 하였다. 그 뒤로도 秦은 晉을 우호국으로 대우하지 않으니 진여공이 呂相을 보내 단교를 통고한 것이다.
五年,三郤讒伯宗,殺之。
여공5년(기원전576년), 극씨 셋이 백종을 헐뜯어 그를 죽였다.
伯宗以好直諫得此禍,國人以是不附厲公。
백종이 바른 소리를 잘하여 이런 화를 당하자 국인이 이 때문에 여공을 따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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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三郤: 晉의 대부 郤錡와 郤犫, 郤至.
▶ 伯宗: 성은 姬, 씨는 郤이다. 춘추시대 晉大夫로 어질고 直言을 잘하였다. 郤氏 삼형제인 郤至, 郤犨, 郤錡의 모함으로 피살되었다.
六年春,鄭倍晉與楚盟,晉怒。
여공6년(기원전575년) 봄에 鄭이 晉을 배신하고 楚와 동맹하자 진여공이 노하였다.
欒書曰:
「不可以當吾世而失諸侯。」
欒書가 말하였다.
“나의 대에서 제후들을 잃을 수 없습니다. ”
乃發兵。厲公自將,五月度河。
이에 軍을 일으켜 厲公이 스스로 장수가 되어 5월에 황하를 건넜다.
聞楚兵來救,范文子請公欲還。
楚軍이 鄭을 구원하러 온다는 소식을 듣자 范文子가 여공에게 軍을 돌리자고 청하였다.
郤至曰:
「發兵誅逆,見彊辟之,無以令諸侯。」
郤至가 말하였다.
“군사를 일으켜 반역자를 죽이려 하는데 강자를 만났다고 피한다면 제후들을 호령할 수 없습니다. ”
遂與戰。
마침내 楚와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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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欒書: 欒武子. 춘추시대 晉의 大夫. 欒枝의 손자다. 晉景公 11년 鞍전투에서 齊軍을 대파하였다. 나중에 郤克을 대신해 中軍을 이끌었다. 여공이 정치를 잘못하자 中行偃과 함께 사람을 시켜 여공을 죽이고 悼公을 옹립하였다. 시호는 武子이다.
▶ 范文子: 士燮이다. 춘추시대 晉 사람으로 士會의 아들이다. 景公때 大夫를 지냈다. 경공11년 齊가 魯와 衛를 공격하자 晉이 가서 구원했는데, 上軍의 보좌로 郤克과 함께 鞍에서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 厲公때 또 中軍帥 欒書등과 함께 秦과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 여공7년 鄢陵에서 楚軍과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두었다. 여공이 점점 교만해지고 횡포를 부리면서 사치해지자 근심 속에 죽었다. 시호가 文이어서 범문자로 불린다.
癸巳,射中楚共王目,楚兵敗於鄢陵。
계사일에 화살로 楚共王의 눈을 쏘아 맞추니, 楚軍이 鄢陵에서 패배하였다.
子反收餘兵,拊循欲復戰,晉患之。
子反이 남은 병사들을 거두어 격려한 뒤 다시 싸우고자 하니 晉이 걱정하였다.
共王召子反,其侍者豎陽穀進酒,子反醉,不能見。
楚共王이 자반을 부름에 시종 豎陽穀이 올린 술에 취하여 초왕을 알현할 수 없었다.
王怒,讓子反,子反死。
공왕이 화가 나서 자반을 꾸짖으니 자반이 자결하였다.
王遂引兵歸。
공왕은 이에 軍을 이끌고 돌아갔다.
晉由此威諸侯,欲以令天下求霸。
晉은 이로 말미암아 제후에게 위엄을 떨치고 천하의 패주로 호령하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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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楚共王: 춘추시대 楚의 군주로 이름은 審이며, 莊王의 아들이다. 오랜 기간 동안 晉과 패권을 다투었다. 공왕16년 楚가 鄭을 구원하러 鄢陵에서 晉과 전투를 벌였지만 패하여 귀국하였다. 나중에 晉, 鄭, 宋 등과 자주 전쟁을 벌였다. 31년 동안 재위했고, 시호는 共이다.
▶ 鄢陵: 지금의 하남성 鄢陵 북쪽 지역. 기원전575년에 晉厲公이 鄭을 치자 楚共王이 鄭을 구원하려고 출병하여 언릉에서 격전을 벌여 晉軍이 크게 승리하였다.
▶ 子反: 초장왕의 동생으로 楚의 司馬이다.
▶ 拊循: 위로하다.
▶ 豎陽穀: 子反의 집안에서 부리는 천한 家臣.
厲公多外嬖姬,歸,欲盡去群大夫而立諸姬兄弟。
厲公에게는 총애하는 신하와 희첩이 많았는데 귀국한 뒤로 대부들을 모두 몰아내고 여러 희첩의 형제를 기용하려 하였다.
寵姬兄曰胥童,嘗與郤至有怨,及欒書又怨郤至不用其計而遂敗楚,乃使人閒謝楚。
총애하는 희첩의 오라비로 胥童이란 자가 일찍이 郤至와 원한이 있었는데, 欒書 또한 극지가 자신의 계책을 쓰지 않고 楚를 물리친 데 원한을 품게 되자, 몰래 사람을 보내 楚에게 사죄하였다.
楚來詐厲公曰:
「鄢陵之戰,實至召楚,欲作亂,內子周立之。
會與國不具,是以事不成。」
楚가 사람을 보내 여공에게 거짓말을 하였다.
“언릉의 전투는 사실 극지가 楚를 불러 난을 일으키고, 공자 周를 불러들여 옹립하려 한 것입니다.
함께 할 나라가 없어서 일이 성사되지 않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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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外嬖: 총애받는 신하.
▶ 胥童: 胥克의 아들이다. 진성공 때 郤缺이 서동의 아버지 胥克을 폐출하여 극씨에게 원한을 갖고 있었다.
▶ 郤至: 춘추시대 晉의 외교가 및 장수로 형인 郤錡, 숙부인 郤犨와 함께 三郤으로 불리었다. 温땅에 봉해져서 温季, 季子로 일컬었다.
▶ 內: 받아들이다.
▶ 子周: 孫周. 晉襄公의 曾孫으로 悼公이 된다.
厲公告欒書。欒書曰:
「其殆有矣!
願公試使人之周微考之。」
여공이 欒書에게 이를 알리자 난서가 말하였다.
“아마도 그런 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군주께서 사람을 周나라로 보내 암암리에 조사해보시기 바랍니다. ”
果使郤至於周。
과연 여공은 극지를 주나라로 보냈다.
欒書又使公子周見郤至,郤至不知見賣也。
난서는 또 公子周에게 극지를 만나게 했으나 극지는 속임수에 당함을 몰랐다.
厲公驗之,信然,遂怨郤至,欲殺之。
여공이 이 일을 검증해보고 사실임을 믿게 되어 극지를 원망하고 죽이려 하였다.
八年,厲公獵,與姬飲,郤至殺豕奉進,宦者奪之。
여공8년(기원전573년), 여공이 사냥을 나가서 희첩과 술을 마시는데, 극지가 멧돼지를 잡아 바치자 환관 孟張이 빼앗아갔다.
郤至射殺宦者。
극지가 환관 맹장을 쏘아 죽였다.
公怒,曰:
「季子欺予!」
여공이 노하여 말하였다.
“季子(:극지)가 나를 속였다!”
將誅三郤,未發也。
하고는 극씨 셋을 죽이려 했으나 미처 손을 쓰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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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殆: 대개. 마땅히.
▶ 微考: 암암리에 관찰하다.
▶ 三郤: 三郤大夫. 대부 郤錡와 郤犫, 郤至. 기원전574년 晉厲公이 교만하고 사치에 빠져 寵姬를 여럿 거느리고, 大夫들을 모두 내쫓고 총희의 형제들로 채웠으며, 총희의 오빠 胥童을 卿으로 삼고, 대부 郤錡와 郤犫, 郤至를 살해하였다. 진여공은 결국 欒書와 中行偃에게 살해되었다.
▶ 欒書又使公子周見郤至: 난서가 사람을 시켜 孫周(: 후일 도공)에게 이르기를
“극지가 장차 가리니 반드시 그를 만나보시오. ”
라며 음모를 꾸민 것이다.
▶ 見賣: 속임을 당함.
▶ 季子: 郤至. 厲公은 郤至가 孟張의 멧돼지를 빼앗았다고 반대로 생각한 것이다.
郤鉤欲攻公,曰:
「我雖死,公亦病矣。」
郤鉤(:극의)가 여공을 공격하려고 하면서 말하였다.
“내가 비록 죽더라도 여공 역시 재앙을 입을 터이다!”
郤至曰:
「信不反君,智不害民,勇不作亂。
失此三者,誰與我?
我死耳!」
郤至가 말하였다.
“신의 있는 자는 군주를 배반하지 않고, 지혜로운 자는 백성을 해치지 않고, 용기있는 자는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다.
이 세 가지를 잃으면 누가 우리를 돕겠는가?
우리는 죽으면 그만이다!”
十二月壬午,公令胥童以兵八百人襲攻殺三郤。
12월 임오일에 여공은 서동에게 병사 800명을 주고 세 극씨를 습격하여 죽이도록 명하였다.
胥童因以劫欒書、中行偃于朝,曰:
「不殺二子,患必及公。」
서동은 이 틈에 조정에서 난서와 中行偃을 겁박하면서 여공에게 말하였다.
“이 두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우환이 어김없이 군주에게 미칠 터입니다.”
公曰:
「一旦殺三卿,寡人不忍益也。」
여공이 말하였다.
“하루아침에 三卿을 죽였는데 과인은 차마 더 죽일 수 없다. ”
對曰:
「人將忍君。」
서동이 말하였다.
“저 사람들은 장차 군주를 서슴지 않고 해칠 터입니다. ”
公弗聽,謝欒書等以誅郤氏罪:
「大夫復位。」
여공은 듣지 않고 난서 등에게 극씨의 죄를 물은 것을 사과하였다.
“대부들을 복위하겠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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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郤鉤: 郤錡. 姬姓,郤氏,이름은 錡. 호를 鉤伯. 춘추시대 晉의 정치가이며 장군으로 극극의 아들이다. 극지, 극주와 함께 三郤으로 일컫는다.
▶ 郤犫: 姬姓,郤氏,이름은 犫. 춘추시대 晉의 대부. 극지, 극의와 함께 三郤으로 일컫는다.
▶ 襲攻殺三郤: <춘추좌씨전> 成公 17년에 이르기를
“三郤이 榭에서 모의하려고 할 때 長魚蟜가 그들을 창으로 죽였다.”
라고 하였다.
▶ 中行偃: 춘추시대 晉의 정치가로, 씨는 荀 혹은 中行. 荀偃이라고도 하며, 시호는 獻으로 中行獻子다. 字는 伯游이다. 난서와 함께 진여공을 시해하고 도공을 옹립하였다.
▶ 不殺二子: 두 사람은 난서와 중항언을 말한다.
二子頓首曰:
「幸甚幸甚!」
두 사람은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였다.
“정말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公使胥童為卿。
여공이 서동을 卿에 임명하였다.
閏月乙卯,厲公游匠驪氏,欒書、中行偃以其黨襲捕厲公,囚之,殺胥童,而使人迎公子周于周而立之,是為悼公。
윤달 을묘일, 여공은 匠驪氏의 집으로 놀러가자, 난서와 중항언이 그들의 무리에게 여공을 습격하여 체포해서는 가두게 하고, 서동을 죽이고 주나라로 사람을 보내 공자 周를 맞아들여 옹립하니 그가 悼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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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匠驪氏: 晉의 대부. 여공이 총애하는 대부이다.
悼公元年正月庚申,欒書、中行偃弒厲公,葬之以一乘車。
도공 원년(기원전572년) 정월 경신일에 난서와 중항언이 여공을 시해하고 수레 한 대로 장례를 치렀다.
厲公囚六日死,死十日庚午,智罃迎公子周來,至絳,刑雞與大夫盟而立之,是為悼公。
여공은 갇힌 지 엿새 만에 죽었으며, 죽은 뒤 열흘 경오일에 지앵이 공자 주를 맞아들여 絳城으로 오니 닭을 잡아 대부들과 맹서하고 옹립하니 그가 도공이다.
辛巳,朝武宮。二月乙酉,即位。
신사일에 武宮으로 가서 조현하고 2월 을유일에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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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悼公: 晉悼公. 춘추시대 晉의 군주로 周 또는 糾이며, 晉襄公의 증손이다. 欒書가 厲公을 살해하고 周나라에서 맞이하였다.
▶ 葬之以一乘車: 제후의 禮로 장사지내지 않은 것을 말한다. 諸侯의 葬車는 7乘이다.
▶ 刑: 죽이다.
▶ 武宮: 武公의 묘. 무공은 曲沃伯으로 周王의 명을 받아 晉의 군주가 되었다.
悼公周者,其大父捷,晉襄公少子也,不得立,號為桓叔,桓叔最愛。
悼公 周의 할아버지 姬捷은 晉襄公의 작은아들로 군주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기 때문에 桓叔이라 불리었으며, 환숙이 가장 사랑을 받았다.
桓叔生惠伯談,談生悼公周。
환숙이 惠伯 姬談을 낳았고, 담이 도공 周를 낳았다.
周之立,年十四矣。
周가 즉위했을 때의 나이는 14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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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悼公: 晉의 悼公. 춘추시대 晉의 군주로 이름은 周 또는 糾이고, 襄公의 증손이다. 欒書가 厲公을 살해하고 周나라에서 맞이하여 14세의 나이에 즉위하였다. 功業을 닦고 덕정을 베풀면서, 제후를 모아 여러 차례 楚와 鄭을 두고 전쟁을 벌였는데, 鄭이 항복하자 楚도 감히 다투지 못하였다. 魏絳을 보내 戎과 화해하니 戎人이 직접 歸附하였다. 晉이 다시 覇者가 되었다. 15년 동안 재위하였다.
悼公曰:
「大父、父皆不得立而辟難於周,客死焉。
寡人自以疏遠,毋幾為君。
今大夫不忘文、襄之意而惠立桓叔之後,賴宗廟大夫之靈,得奉晉祀,豈敢不戰戰乎?
大夫其亦佐寡人!」
悼公이 말하였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모두 군주의 자리에 오를 수 없어 난을 피해 周나라로 가셨다가 객사했습니다.
과인도 스스로 소원해졌기 때문에 군주가 되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지금 대부들께서 文公과 襄公의 뜻을 잊지 않고 은혜롭게 桓叔의 후손을 세움으로써 종묘와 대부들의 혼령에 기대어 晉의 제사를 받들게 되었으니 어찌 삼가 조심하지 않겠습니까?
대부들께서도 과인을 도와주십시오!”
於是逐不臣者七人,修舊功,施德惠,收文公入時功臣後。
이에 불충한 대신 일곱 명을 내치고, 과거의 공업을 닦고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고, 文公이 귀국할 당시 공신의 후손을 거두었다.
秋,伐鄭。鄭師敗,遂至陳。
가을에 鄭을 공격하였다. 鄭軍을 패퇴시키고 陳에까지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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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辟: 避와 통용된다.
▶ 幾: 冀와 통용된다. 바라다.
▶ 戰戰: 벌벌 떨다.
三年,晉會諸侯。
도공3년(기원전570년)에 晉이 鷄澤에서 제후들과 회맹하였다.
悼公問群臣可用者,祁傒舉解狐。
도공은 신하들에게 기용할 만한 사람을 물었더니 祁傒가 解狐를 천거하였다.
解狐,傒之仇。
해호는 기해와 원수지간이었다.
復問,舉其子祁午。
또 물으니 기해는 자신의 아들 祁午를 천거하였다.
君子曰:
「祁傒可謂不黨矣!
外舉不隱仇,內舉不隱子。」
군자가 말하였다.
“祁傒는 당파를 짓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밖에서 사람을 천거하되 원수라 해서 숨기지 않고, 안에서 사람을 천거하되 자식이라 해서 숨기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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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祁傒: 춘추시대 晉의 大夫. 悼公때 中軍尉가 되었는데 늙어 물러날 때 도공이 후계자를 묻자 원수 관계인 解狐를 추천하였고, 부임하기 전에 해호가 죽자 자기의 아들 午를 추천하여 공정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大公無私: 매우 공평하여 사사로움이 없다는 말로, 공적인 일의 처리에 있어서 개인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는다는 뜻이다. 祁傒가 解狐를 천거한 것이 아첨하여 그 원수에게 잘 보이기 위함이 아니고, 아들 祁午를 천거한 것이 가깝게 여겨 그 아들을 편애한 것이 아니었다는 고사를 인용한 말이다.
方會諸侯,悼公弟楊干亂行,魏絳戮其仆。
이윽고 제후들이 회맹하려는데 도공의 동생 楊干이 軍陣의 대열을 어지럽혀 魏絳이 양간의 마부를 죽였다.
悼公怒,或諫公,公卒賢絳,任之政,使和戎,戎大親附。
도공이 노하였으나, 누군가 도공에게 간하자 도공은 마침내 위강이 현명하다고 여겨 그에게 정치를 맡기고, 戎에 사신으로 보내니 융은 한결 晉과 친근해졌다.
十一年,悼公曰:
「自吾用魏絳,九合諸侯,和戎、翟,魏子之力也。」
도공11년(기원전562년)에 도공이 말하였다.
“내가 魏絳을 기용하고부터 아홉 번이나 제후들을 회합하고 戎, 翟과 가까워졌으니 위강의 덕분이다. ”
賜之樂,三讓乃受之。
그에게 女樂士를 내리니 위강은 세 번 사양하고 받았다.
冬,秦取我櫟。
겨울에 秦은 晉의 櫟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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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行: 軍陳의 隊伍.
▶ 魏絳戮其仆: 魏絳이 中軍司馬였는데, 양간의 마부가 수레로 군대의 行列을 어지럽혔으니 마부의 죄로 여겨 마부를 죽였다. 仆은 마부.
▶ 賜之樂: 도공이 魏絳에게 8사람씩 1줄로 이룩된 女樂士와 노래할 때 쓰는 編鐘 1벌을 주었다.
十四年,晉使六卿率諸侯伐秦,度涇,大敗秦軍,至棫林而去。
도공14년(기원전559년), 晉이 六卿에게 제후들을 이끌고 秦을 토벌하게 하니, 涇河를 건너서 秦軍을 크게 물리치고 棫林에 이르렀다가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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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六卿: 晉의 6대 世卿家. 대대로 卿의 지위를 계승한 유력한 귀족 가문로 范·中行·智·韓·魏·趙씨.
▶ 棫林: 秦 땅이다.
十五年,悼公問治國於師曠。
도공15년(기원전558년)에 도공이 師廣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를 물었다.
師曠曰:
「惟仁義為本。」
사광이 대답하였다.
“오직 인의를 근본으로 삼아야 합니다. ”
冬,悼公卒,子平公彪立。
겨울에 도공이 죽고 그 아들 平公 彪가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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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師曠: 춘추시대 晉의 대부로 字는 子野다. 晉平公때 樂師를 지냈다. 전하는 말로 태어날 때부터 장님이었는데, 音律을 잘 판별했고 소리로 吉凶까지 점쳤다고 한다.
▶ 平公彪: 晉平公. 춘추시대 晉의 군주로 이름은 彪이고, 悼公의 아들이다. 3년 제후軍을 이끌고 魯를 구하기 위해 齊를 공격하여 수도를 포위하였다. 다음 해 제후들과 督揚에서 모여 대국이 소국을 침범하지 않는다는 조약을 맺었다. 세금을 지나치게 많이 걷고 백성들의 형편을 돌보지 않았으며, 淫樂을 즐겨, 정치가 趙·韓·魏의 三家로 넘어갔다. 26년 동안 재위하였다.
平公元年,伐齊,齊靈公與戰靡下,齊師敗走。
평공 원년(기원전557년)에 齊를 정벌하여 齊靈公과 靡下에서 싸웠다. 齊軍이 패하여 달아났다.
晏嬰曰:
「君亦毋勇,何不止戰?」
齊의 재상 晏嬰이 말하였다.
“군주께서는 역시 용기가 없으시군요, 어째서 싸움을 멈추지 않으시는 겁니까?”
遂去。
마침내 떠났다.
晉追,遂圍臨菑,盡燒屠其郭中。
晉이 추격하여 임치를 포위해서 그 외성을 모조리 태우고 도살하였다.
東至膠,南至沂,齊皆城守,晉乃引兵歸。
동쪽으로 膠水, 남쪽으로 沂水에 이르기까지 齊는 모든 성을 닫고 수비에 들어가자, 晉은 곧 병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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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晏嬰: 晏子. 춘추시대 齊의 명재상으로 자는 仲, 시호는 平이다. 齊靈公, 莊公, 景公 3대를 섬긴 재상으로서 절약 검소하고 군주에게 기탄없이 간언한 것으로 유명하였다. <사기 권62, 管晏列傳>
六年,魯襄公朝晉。
평공6년(기원전552년)에 魯襄公이 晉에 朝見하러 왔다.
晉欒逞有罪,奔齊。
晉의 欒逞이 죄를 지어 齊로 달아났다.
八年,齊莊公微遣欒逞於曲沃,以兵隨之。
평공8년(기원전550년)에 齊莊公이 난영을 비밀리에 곡옥으로 보내고 군사가 난영을 수행하게 하였다.
齊兵上太行,欒逞從曲沃中反,襲入絳。
齊의 군사들이 太行山에 오르자 난영이 곡옥에서 반란을 일으키어 絳城을 기습하였다.
絳不戒,平公欲自殺,范獻子止公,以其徒擊逞,逞敗走曲沃。
강성은 경계하지 않았고 평공이 자살하려 했으나 范獻子가 평공을 말리고 자신의 무리로 난영을 공격하니 난영은 패하여 곡옥으로 달아났다.
曲沃攻逞,逞死,遂滅欒氏宗。
곡옥 사람들이 난영을 공격하니 난영은 죽었고, 마침내 난영의 일족을 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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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欒逞: 춘추시대 晉 下卿. 欒盈으로도 쓴다. 欒黶의 아들이고, 시호는 懷이다. 晉平公이 처음 즉위했을 때 그를 公族大夫로 삼았다. 어머니 欒祁가 范宣子의 딸이었는데, 난염이 죽은 뒤 음행을 저질렀다. 어머니의 음행을 난영이 걱정하자 이를 두려워해 범선자에게 난영이 범씨 집안을 원망해 나쁜 일을 꾸민다고 모함을 하였다. 범선자가 이 말을 믿고 난영을 죽이려 하자 楚로 도망을 갔고, 다시 齊로 갔다. 평공8년에 몰래 齊 사신을 따라 晉에 들어와 난을 일으켰지만 싸움에 져서 曲沃으로 달아났다. 晉 사람이 포위해서 함락시키고 난씨 일족을 모두 죽여 버렸다. <春秋左氏傳 魯襄公21‧23년>
▶ 齊兵上太行: 제장공 4년(기원전550년), 제장공이 난영을 비밀리에 晉의 曲沃으로 침투시켜 내응하게 하면서 軍을 딸려 보내 太行山에 올라 孟門의 관문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그러나 난영은 패했으며, 齊의 軍은 돌아오면서 朝歌城을 빼앗았다.
[史記世家]권32. 齊太公世家
▶ 范獻子: 范宣子의 아들. 士鞅또는 范鞅이라고도 지칭한다. 晉의 正卿이었다.
逞者,欒書孫也。
난영은 欒書의 손자이다.
其入絳,與魏氏謀。
絳城으로 들어와서 魏氏와 결탁했었다.
齊莊公聞逞敗,乃還,取晉之朝歌去,以報臨菑之役也。
齊장공은 난영이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와 晉의 朝歌를 빼앗고 돌아감으로써 임치 전투의 패배를 갚았다.
十年,齊崔杼弒其君莊公。
평공10년(기원전548년)에 齊의 崔杼가 그의 군주 齊莊公을 시해하였다.
晉因齊亂,伐敗齊於高唐去,報太行之役也。
晉은 齊의 난리를 틈타 齊를 공격하여 高唐에서 패배시키고 태행 전투에서의 패배를 보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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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崔杼: 齊의 大夫. 崔武子 또는 崔子로도 불린다. 자신의 후처와 사통한 莊公을 시해하고 景公을 세워 전권을 휘둘렀지만 집안의 불화를 틈탄 慶封에 의해 멸문을 당하였다.
<史記世家권32. 齊太公世家>
▶ 莊公: 齊莊公. 춘추시대 齊의 제25대 후작이며 이름은 光이다. 장공은 崔杼의 후처 당강과 정을 통했으며 이로 인해 최저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 役: 전투.
十四年,吳延陵季子來使,與趙文子、韓宣子、魏獻子語,曰:
「晉國之政,卒歸此三家矣。」
평공14년(기원전544년)에 吳의 延陵季子가 晉에 사신으로 와서 趙文子, 韓宣子, 魏獻子와 이야기를 나누고 말하였다.
“晉의 정권이 끝내 이 세 집안에게 돌아갈 터이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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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延陵季子: 季札. 춘추시대 吳王 壽夢의 네 아들 중 막내로 延陵에 봉해져 延陵季子라고 부른다. 왕의 자리를 넘겨주려 했으나, 계찰은 이를 받지 않고 시골로 내려가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훗날 계찰이 魯를 방문하여 악공에게 <周南>, <召南>, <風>, <雅><頌>을 연주하게 하였다. <左傳·襄公二十九年>
[史記世家]권31. 吳太伯世家
▶ 趙文子: 趙武. 춘추시대 晉의 大夫.
▶ 韓宣子: 韓起. 춘추시대 晉의 大夫.
▶ 魏獻子: 魏舒. 춘추시대 晉의 大夫.
▶ 三家: 晉의 趙, 韓, 魏 3대부의 집안.
十九年,齊使晏嬰如晉,與叔向語。
평공19년(기원전539년)에 齊는 晏嬰을 晉에 사신으로 보내니, 叔向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叔向曰:
「晉,季世也。
公厚賦為臺池而不恤政,政在私門,其可久乎!」
숙향이 말하였다.
“晉이 말세에 처했습니다.
군주는 세금을 잔뜩 거두어 누대와 연못을 만들고 정사는 돌보지 않고, 정치가 개개인의 가문에서 나오니 오래 갈 수 있겠습니까!”
晏子然之。
안영도 그렇다고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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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晏嬰: 晏子. 춘추시대 齊의 명재상으로 자는 仲, 시호는 平이다.
▶ 叔向: 춘추시대 晉의 정치가이다. 진平公의 사부로서 박학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辭令에 밝았다. 子産, 晏嬰과 더불어 춘추시대의 명현으로 손꼽힌다.
▶ 季世: 말세.
▶ 恤: 돌보다.
二十二年,伐燕。
평공22년(기원전536년)에 연나라를 공격하였다.
二十六年,平公卒,子昭公夷立。
평공26년(기원전532년)에 평공이 죽고, 아들 昭公 夷가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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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昭公: 晉昭公. 춘추시대 晉의 군주로 이름은 夷이고, 平公의 아들이다. 재위하는 중에 晉의 六卿(: 韓ㆍ趙ㆍ魏ㆍ范ㆍ中行ㆍ智氏) 등이 강해지고 公室은 약화되었다. 6년 동안 재위하였다.
昭公六年卒。
소공은 재위한 지 6년(기원전526년) 만에 죽었다.
六卿彊,公室卑。
六卿이 강해지니 공실이 보잘것없었다.
子頃公去疾立。
아들 頃公 去疾이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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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六卿: 晉의 6대 世卿家: 대대로 卿의 지위를 계승한 유력한 귀족 가문로 范·中行·智·韓·魏·趙씨.
頃公六年,周景王崩,王子爭立。
경공6년(기원전520년)에 주나라 景王이 세상을 떠나고, 왕자들이 자리를 다투었다.
晉六卿平王室亂,立敬王。
晉의 6경이 周왕실의 난리를 평정하고 周敬王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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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周敬王: 춘추시대 주나라의 군주로 성은 姬고, 이름은 貴다. 靈王의 아들이다. 周景王이 죽자 왕자 丐의 도당이 왕자 朝와 왕위를 놓고 다투었으며, 사대부들이 景王의 큰아들 猛을 왕으로 옹립했으나 왕자 朝가 맹을 공격하여 죽였다. 그래서 맹을 悼王이라고 하였다. 晉 사람들이 왕자 朝를 공격하고 왕자 丐를 옹립하니 그가 곧 敬王이다. <사기 본기 권04. 주본기>
九年,魯季氏逐其君昭公,昭公居乾侯。
경공9년(기원전517년)에 魯의 季氏가 그의 군주 昭公을 내쫓으니, 소공은 乾侯에 머물렀다.
十一年,衛、宋使使請晉納魯君。
경공11년(기원전515년)에 衛와 宋이 사신을 보내와 晉에게 魯의 군주가 귀국하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季平子私賂范獻子,獻子受之,乃謂晉君曰:
「季氏無罪。」
계평자가 사사로이 范獻子에게 뇌물을 주니 범헌자가 이를 받고, 진경공에게 말하였다.
“계씨는 죄가 없습니다. ”
不果入魯君。
결국 魯의 군주를 귀국시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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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季氏: 季平子. 季孫意如. 춘추시대 말기 魯나라의 大夫. 季孫宿의 손자다. 郈氏및 臧氏와 불화하자 후씨와 장씨가 昭公에게 고자질하였다. 소공이 季氏를 공격하여 宅에서 포위하였으나 叔孫, 孟孫과 연합하여 三家가 소공을 함께 공격하니 포위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소공이 달아나 齊와 晉에 원조를 청하였다. 계씨는 齊에는 대항하고 晉에는 뇌물을 먹여 소공을 乾侯에 머무르게 하였다. 소공은 돌아오지 않고 간후에서 죽으니, 魯陵墓道 남쪽에 장사지내 祖宗과 같은 반열에 있지 못하게 하였다.
33-11[史記世家]권33. 魯周公世家 <魯昭公>
▶ 不果: 실현되지 않다. 이루어지지 않다.
十二年,晉之宗家祁傒孫,叔向子,相惡於君。
晉益弱,六卿皆大。
경공12년(기원전514년)에 晉의 종실인 祁傒의 손자와 叔向의 아들이 경공 앞에서 서로를 비방하였다.
六卿欲弱公室,乃遂以法盡滅其族。
6六卿은 종실을 약화시키려고 형법으로 그 일족을 모두 멸하였다.
而分其邑為十縣,各令其子為大夫。
그들의 봉읍을 열 개의 현으로 나누어 각자 자기 아들들을 대부로 삼았다.
晉益弱,六卿皆大。
晉의 종실은 더욱 약해졌고, 6경은 모두 강대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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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祁傒: 춘추시대 晉의 大夫. 悼公때 中軍尉가 되었는데 늙어 물러날 때 도공이 후계자를 묻자 원수 관계인 解狐를 추천하였고, 부임하기 전에 해호가 죽자 자기의 아들 午를 추천하여 공정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 祁傒孫: 기해의 아들은 祁午이며 기오의 아들은 祁盈이다.
▶ 叔向子: 楊食我. 叔向의 아들 伯石. 楊은 叔向의 食邑으로 그의 아들을 楊食我로 칭하였다. 숙향은 진平公의 사부였다.
▶ 惡: 헐뜯다. 비방하다.
十四年,頃公卒,子定公午立。
경공14년(기원전512년)에 경공이 죽고, 아들 定公 午가 즉위하였다.
定公十一年,魯陽虎奔晉,趙鞅簡子捨之。
정공11년(기원전501년)에 魯의 陽虎가 晉으로 도망쳐오자 趙鞅簡子가 거처를 내주었다.
十二年,孔子相魯。
정공12년(기원전500년)에 孔子가 魯의 재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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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定公午: 晉定公. 춘추시대 晉의 군주로 이름은 午이며, 頃公의 아들이다. 재위한 지 15년 趙鞅과 中行寅, 范吉射등 三卿이 內訌을 일으키자 나라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범씨와 중항씨를 격퇴했지만, 조앙의 자리는 회복시켰다. 黃池의 會盟에서 吳의 夫差와 우두머리를 다투다가 조앙의 도움을 받아 吳가 晉을 받들게 되었다. 37년 동안 재위하였다.
▶ 陽虎: 춘추시대 말기 魯 사람. 자는 貨이고, 얼굴이 孔子와 닮았다고 한다. 季氏의 家臣으로, 季平子를 섬겼다. 계평자가 죽자 권력을 장악하였다. 일찍 季桓子를 잡아 강제로 동맹을 맺게 하였다. 魯定公 8년에 三桓을 제거하고 삼환의 嫡子들을 모두 죽이려다가 실패하고 陽關으로 달아났다. 다음 해에 삼환이 양관을 공격하자 齊로 달아났고, 다시 晉으로 달아났다. 趙盾에게 귀의하여 趙簡子의 謀臣이 되었다.
<[史記世家]권33. 魯周公世家>
▶ 趙鞅簡子: 趙鞅. 趙簡子. 춘추시대 말기 晉 사람으로 趙孟 또는 志父로도 불린다. 晉 내부에서 6卿이 세력 다툼을 벌일 때 2경인 范氏와 中行氏를 몰아내고 趙나라를 일으키는 바탕을 마련하였다.
十五年,趙鞅使邯鄲大夫午,不信,欲殺午,午與中行寅、范吉射親攻趙鞅,鞅走保晉陽。
정공15년(기원전497년), 趙鞅이 邯鄲의 대부 午를 사신으로 보내고 믿지 못하여 午를 죽이려 하자, 오는 中行寅, 范吉射와 함께 몸소 조앙을 공격했고, 조앙은 달아나 晉陽을 지켰다.
定公圍晉陽。
定公이 晉陽을 포위하였다.
荀櫟、韓不信、魏侈與范、中行為仇,乃移兵伐范、中行。
荀櫟, 韓不信, 魏侈는 범길사와 중항인과는 원수지간이라 군대를 이동시켜 범길사와 중항인을 공격하였다.
范、中行反,晉君擊之,敗范、中行。
범길사와 중항인이 반란을 일으키자 정공은 그들을 공격하여 패퇴시켰다.
范、中行走朝歌,保之。
범길사와 중항인은 朝歌로 도망가서 그곳을 지켰다.
韓、魏為趙鞅謝晉君,乃赦趙鞅,復位。
韓不信과 魏侈가 조앙을 위하여 정공에게 사죄하니 정공은 조앙을 사면하고 복위시켰다.
二十二年,晉敗范、中行氏,二子奔齊。
정공22년(기원전490년)에 晉이 범길사와 중항인을 공격해 패배시키자 두 사람은 齊로 도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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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趙鞅: 춘추시대 말기 晉 사람. 趙簡子. 趙孟 또는 志父로도 불린다. 晉 내부에서 6卿이 세력 다툼을 벌일 때 2경인 范氏와 中行氏를 몰아내고 趙나라를 일으키는 바탕을 마련하였다.
▶ 午: 趙午. 춘추시대 晉의 대부.
▶ 趙鞅使邯鄲大夫午: 定公 10년에 趙鞅이 衛를 포위하자, 衛가 겁이 나서 5백 家를 바치니, 조앙은 그 5백 家를 데리고 와서 邯鄲에 두었었는데, 지금 그 5백 家를 晉陽으로 옮겨 정착시키고자 하였다. 定公 14년(기원전498년)에 范氏와 中行氏가 난을 일으켰다. 이듬해 봄에 조앙이 邯鄲대부 午에게 “衛의 백성 500가를 내게 돌려주면 내가 晉陽에다 안치하겠소. ”라고 하였다. 대부 오가 허락한 다음 돌아갔으나 그 인척들이 동의하지 않아 말을 어기게 되었다. 趙鞅은 오를 잡아 진양에다 가두고는 한단 사람들에게 “내가 개인적으로 오를 죽이려는데 여러분들은 누구를 세우고 싶은가?”라 하고는 드디어 오를 죽였다. 趙稷과 涉賓이 한단에서 반발하였다. 晉정공이 籍秦에게 한단을 포위하게 하였다. 荀寅과 范吉射는 趙午와 잘 지냈기에 적진을 돕지 않고 난을 일으키려 했으나 동안우가 이를 알게 되었다. <사기 세가 권43. 趙世家>
▶ 范吉射(范昭子): 范氏,이름은 吉射. 范氏는 士氏로부터 나왔으므로 士吉射라고도 한다. 춘추시대 晋의 6경의 하나인 범씨의 종주인 范鞅의 아들이다.
▶ 中行寅: 荀寅. 中行文子. 춘추시대 晋 6경의 하나이다. 荀吳의 아들이다. 진 정공15년(기원전497년) 조앙이 한단 대부 조오를 죽이자 范吉射와 함께 조앙을 공격했으나 패배하여 齊로 달아났다.
▶ 中行(háng)氏: 춘추시대 晉의 6경의 하나로 기원전632년 성립하여 기원전490년 패망하였다. 중항씨의 선조는 中行桓子이며 중항씨가 荀氏에서 나왔으므로 荀林父라고 한다.
▶ 荀櫟、韓不信、魏侈: 11월에 荀櫟, 韓不佞, 魏哆가 명을 받고 범씨, 중항씨를 토벌했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범씨, 중항씨가 오히려 정공을 공격하여 정공이 반격하자 범씨, 중항씨가 패하여 달아났다. 정미일, 두 사람은 朝歌로 달아났다. 한불녕과 위치는 조앙을 용서해달라고 청하였다. 12월 신미에 조앙이 絳城으로 들어와 정공의 궁에서 맹서하였다. <사기 세가 권43. 조세가>
▶ 晉陽: 趙鞅의 봉읍.
三十年,定公與吳王夫差會黃池,爭長,趙鞅時從,卒長吳。
정공30년(기원전482년)에 정공이 吳王 夫差와 黃池에서 회맹하며 맹주를 다투었는데, 그때 조앙이 수행했는데 결국 오왕 부차가 맹주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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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吳王夫差: 吳의 군주로 오왕 闔閭의 아들. 아버지가 越王 句踐에게 패하여 죽자 그 유언을 받들어, 臥薪하며 복수를 다짐하였다. 마침내 기원전494년 越나라를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고 굴복시켰다
三十一年,齊田常弒其君簡公,而立簡公弟驁為平公。
정공31년(기원전481년)에 齊의 田常이 그의 군주 簡公을 시해하고 간공의 동생 驁를 세우니 그가 平公이다.
三十三年,孔子卒。
정공33년(기원전479)년에 공자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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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田常: 陳成子 또는 田成子로도 불린다. 춘추시대 齊 사람. 田乞의 아들이다. 齊簡公 때 闞止와 함께 左右相을 맡았다. 선조들의 전통을 계승하여 大斗로 재어 양식으로 대여하고, 小斗로 재어 거둬들여 民心을 얻었다. 제간공 4년 감지와 간공을 공격해 살해하고, 간공의 동생 驁를 세워 平公으로 삼았다. 스스로 재상이 되어 齊의 국정을 장악하고, 公族 가운데 강성한 이들은 모두 제거하였다.
三十七年,定公卒,子出公鑿立。
정공37년(기원전475년)에 정공이 죽고, 아들 出公 鑿이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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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出公鑿: 晉出公. 전국시대 晉의 군주로 이름은 鑿이고, 定公의 아들이다. 출공17년 韓ㆍ趙ㆍ魏가 智伯 瑤와 함께 范氏와 中行氏의 땅을 나눠 食邑으로 삼았다. 출공이 노하여 齊와 魯에 알리면서 四卿을 치려고 하였다. 사경이 두려워하여 출공을 공격하니 齊로 달아났고, 도중에 길에서 죽었다.
出公十七年,知伯與趙、韓、魏共分范、中行地以為邑。
출공17년(기원전458년)에 知伯이 趙鞅, 韓不信, 魏侈와 함께 范吉射, 中行寅의 땅을 나누어 자신들의 봉읍으로 삼았다.
出公怒,告齊、魯,欲以伐四卿。
출공이 화가 나서 齊와 魯에 도움을 요청하여 이들 四卿을 공격코자 하였다.
四卿恐,遂反攻出公。
4경이 두려워하고 오히려 출공을 공격하였다.
出公奔齊,道死。
출공은 齊로 달아나다가 길에서 죽었다.
故知伯乃立昭公曾孫驕為晉君,是為哀公。
이런 까닭에 知伯이 곧 소공의 증손자 驕를 晉의 군주로 옹립하니 그가 哀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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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知伯: 荀瑤(원래의 씨는 荀이기 때문) 또는 智伯, 智襄子라고도 부른다. 춘추시대 말 전국시대 초기 晉 知罃의 현손이다. 晉 出公 17년 趙, 韓, 魏와 함께 范氏와 中行氏의 땅을 나눠 邑으로 삼았다. 趙襄子가 한, 위와 함께 知氏를 멸족시켰다.
▶ 四卿: 知伯, 趙鞅, 韓不信, 魏侈.
▶ 哀公: <史記> <趙世家> 懿公으로 기록되어 있다.
哀公大父雍,晉昭公少子也,號為戴子。
애공의 할아버지 雍은 晉昭公의 작은아들로 戴子로 불렸다.
戴子生忌。
대자는 忌를 낳았다.
忌善知伯,蚤死,故知伯欲盡并晉,未敢,乃立忌子驕為君。
忌는 지백과 잘 지냈으나, 일찍 죽었으므로 지백이 晉을 완전히 차지하려다가 감히 그렇게 하지 못하고 忌의 아들 驕를 군주로 세운 것이다.
當是時,晉國政皆決知伯,晉哀公不得有所制。
당시 晉의 국정은 모두 지백이 결정했고, 晉애공은 통제할 수 없었다.
知伯遂有范、中行地,最彊。
지백이 마침내 범씨와 중항씨의 땅까지 차지하여 최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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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蚤: 早와 통용된다. 일찍.
哀公四年,趙襄子、韓康子、魏桓子共殺知伯,盡并其地。
애공4년(기원전453년)에 趙襄子, 韓康子, 魏桓子가 함께 지백을 죽이고 그의 땅을 모두 차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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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趙襄子, 韓康子, 魏桓子: 기원전453년에 晉의 3卿인 韓虎 韓康子, 魏駒 魏桓子, 趙孟 趙襄子이 당시 晉의 최대 실권자이자 최대의 영토를 보유한 知伯 瑤를 죽이고 知氏 일문을 멸문한 다음 그 영토를 공평하게 나눔으로써 사실상 晉을 삼분하고 三晉이 성립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 智伯: 춘추시대 말 전국시대 초기의 晉 사람으로 이름은 瑤이고, 智襄子라고도 부른다. 晉出公 17년에 趙, 韓, 魏와 함께 范氏와 中行氏의 땅을 나눠 邑으로 삼았다. 趙襄子가 한, 위와 함께 知氏를 멸족시켰다.
▶ 三晉: 春秋時代 강국의 하나였던 晉이 분리되어 세워진 韓・魏・趙의 세 나라. 晉의 三卿이었던 文侯魏斯・烈侯趙籍・景侯韓虔의 3家가 기원전 453년에 쇠약해진 晉을 분할하여 각각 나라를 세웠는데, 이때부터 戰國時代가 시작되었다.
十八年,哀公卒,子幽公柳立。
애공18년(기원전439년)에 애공이 죽고, 아들 幽公 柳가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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幽公之時,晉畏,反朝韓、趙、魏之君。
幽公때는 유공이 두려워하며 반대로 韓, 趙, 魏의 군주에게 조현하였다.
獨有絳、曲沃,餘皆入三晉。
유공은 絳과 曲沃만 차지하고 나머지는 모두 三晉이 차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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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幽公: 晉幽公. 晉의 군주로 이름은 柳이며, 진애공의 아들이다.
▶ 三晉: 春秋時代 강국의 하나였던 晉이 분리되어 세워진 韓・趙・魏의 세 나라.
十五年,魏文侯初立。
유공15년(기원전423년)에 魏文侯가 처음 즉위하였다.
十八年,幽公淫婦人,夜竊出邑中,盜殺幽公。
유공18년(기원전420년)에 幽公이 부녀자를 간음하며 밤에 몰래 읍으로 나다녔는데, 강도가 유공을 살해하였다.
魏文侯以兵誅晉亂,立幽公子止,是為烈公。
魏문후가 軍을 파견해 晉의 내란을 토벌하고 유공의 아들 止를 세우니 그가 烈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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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魏文侯: 韓虎, 趙孟과 함께 晉공실을 삼분해 魏나라를 세운 魏駒의 아들. 신흥 魏나라의 2대 군주이다. 본명은 斯. 韓虔·趙籍과 함께 周威烈王에게 정식 제후 지위를 승인받은 후 安邑에 도읍해 국가 체제를 정비하였다.
烈公十九年,周威烈王賜趙、韓、魏皆命為諸侯。
열공19년(기원전403년)에 주나라 威烈王이 趙나라, 韓나라, 魏나라 모두를 제후로 임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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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烈公: 晉烈公. 전국시대 晉의 군주로 이름은 止이며, 幽公의 아들이다. 기원전403년 주나라 威烈王이 韓趙魏의 三家에게 모두 諸侯의 작위를 내렸다. 27년 동안 재위하였다.
▶ 周威烈王: 전국시대 주나라의 군주로 이름은 午이며, 考王의 아들이다. 주 위열왕23년 晉의 大夫인 魏斯, 趙籍, 韓虔을 諸侯로 임명하였다.
二十七年,烈公卒,子孝公頎立。
열공27년(기원전393년)에 열공이 죽고, 아들 孝公 頎가 즉위하였다.
孝公九年,魏武侯初立,襲邯鄲,不勝而去。
효공9년(기원전384년)에 魏武侯가 새로 즉위하여 趙의 한단을 기습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十七年,孝公卒,子靜公俱酒立。
효공17년(기원전376년)에 효공이 죽고, 靜公 俱酒가 즉위하였다.
是歲,齊威王元年也。
이해가 齊威王원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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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孝公頎: 晉孝公. 晉의 제38대 군주. 진열공의 아들.
▶ 魏武侯: 전국시대 衛의 군주로 文侯의 아들이다. 韓나라, 趙나라와 晉 영토를 삼분하였다. 16년 동안 재위하였다.
▶ 齊威王: 전국시대 齊의 16대 군주이자 桓公의 아들이다. 田因齊 또는 田嬰齊라고 한다.
靜公二年,魏武侯、韓哀侯、趙敬侯滅晉後而三分其地。
정공2년(기원전376년)에 魏武侯, 韓哀侯, 曺敬侯가 晉을 멸망시킨 다음 그 땅을 셋으로 나누었다.
靜公遷為家人,晉絕不祀。
정공은 평민으로 떨어졌고, 晉의 제사는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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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靜公: 晋静公. 晉靖公, 晉後悼公이라고도 한다. 이름은 俱酒이며 晋孝公의 아들이다. 정공2년(기원전376년)에 衛武侯, 韓哀侯, 曺敬侯가 晉을 멸망시킨 다음 그 땅을 셋으로 나누었다.
▶ 家人: 평민.
太史公曰:
태사공은 말한다.
晉文公,古所謂明君也,亡居外十九年,至困約,及即位而行賞,尚忘介子推,況驕主乎?
“晉文公은 옛날의 소위 明君으로, 나라 밖으로 19년 동안 망명하여, 극도로 곤궁하였으며, 즉위하여 논공행상을 할 때 개자추를 잊긴 했지만, 어찌 교만한 군주라 하겠는가?
靈公既弒,其後成、景致嚴,至厲大刻,大夫懼誅,禍作。
靈公이 시해당한 후 成公과 景公은 아주 엄격해졌고, 厲公 때는 더 심해져 대부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다가 끝내 난이 일어났다.
悼公以後日衰,六卿專權。
悼公이후 晉은 날이 날로 쇠약해지고 六卿이 권력을 독점하였다.
故君道之御其臣下。固不易哉!
그런 까닭에 군주가 자신의 신하를 부리는 일이 본래 쉽지 않았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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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晉文公: 성은 姬이고, 이름은 重耳이다. 춘추시대 晉의 22대 군주로 晉獻公의 아들이고, 모친은 狐姬이다. 驪姬의 난으로 국외로 도피하여 19년 동안 망명생활을 하였다. 기원전636년에 秦穆公의 지지하에 晉으로 돌아와 晉懷公을 죽이고 군주가 되었다. 재임 중에 인재를 임용하여 晉을 발전시켰으며, 秦과 연합하여 齊에 대항했으며, 宋를 보호하고 鄭을 견제하였다. 周王을 보필하고 楚를 물리쳐서 春秋시대에 霸主가 되었다.
▶ 困約: 가난하다. 빈곤하다.
▶ 成公: 晉成公. 黑臀. 晉文公의 아들이며 襄公의 동생. 趙穿이 靈公을 죽이고 周나라에 인질로 있던 그를 맞아 세웠다. 楚와 힘을 겨루면서 宋와 衛, 鄭, 曹의 제후를 扈읍에 모이게 하였다. 陳이 楚를 두려워하여 참여하지 않자 荀林父에게 군사를 이끌고 치게 했지만 楚와의 전투에서 패하였다. 7년 동안 재위하였다.
▶ 景公: 晉景公. 춘추시대 晉의 제26대 임금이다. 이름은 獳이다. 據라는 설도 있다. 진성공의 아들로 아버지가 楚와 강화한 陳을 토벌하기 위해 연합군을 이끌고 출전했다가 사망하자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 厲公: 晉厲公. 춘추시대 晉의 군주로 이름은 壽曼이며 景公의 아들이다. 鄭이 晉을 배신하고 楚와 동맹을 맺자 여공 6년 군사를 이끌고 정벌하였다. 楚 사람들이 와서 구원하자 鄢陵에서 楚軍을 대파하였다. 이때부터 위명을 크게 떨쳤다. 나중에 교만하고 사치에 빠져 寵姬를 여럿을 거느리고, 大夫들을 모두 내쫓고 총희의 형제들로 채웠다. 총희의 오빠 胥童을 卿으로 삼고, 대부 郤錡와 郤犫, 郤至를 살해하였다. 결국 欒書와 中行偃에게 살해당하였다. 8년 동안 재위하였다.
▶ 悼公: 晉悼公. 춘추시대 晉의 군주로 이름은 周 또는 糾이고, 襄公의 증손이다. 欒書가 厲公을 살해하고 周나라에서 맞이하여 14세의 나이에 즉위하였다. 功業을 닦고 덕정을 베풀면서, 제후를 모아 여러 차례 楚와 鄭을 두고 전쟁을 벌였는데, 鄭이 항복하자 楚도 감히 다투지 못하였다. 魏絳을 보내 戎과 화해하니 戎人이 직접 歸附하였다. 晉이 다시 覇者가 되었다. 15년 동안 재위하였다.
▶ 六卿( 晉의 6대 世卿家): 대대로 卿의 지위를 계승한 유력한 귀족 가문으로 范·中行·智·韓·魏·趙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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