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世家

世家32-齊太公世家(제태공세가)

耽古樓主 2023. 5. 29. 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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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家는 역사편찬 방식의 하나인 紀傳體 史書의 한 편목으로 司馬遷이 <史記>를 편찬하면서 처음으로 만들었으며분봉된 국가의 군주나 제후들 혹은 중요한 역사적 인물의 사적 및 사회에 특출한 재능을 보인 인물들을 주로 다루고 있다.
이 편은 30世家 중 두 번째 편으로 姜氏의 제나라가 西周 초기에 太公 呂尙의 봉국으로 세워져 기원전379년 康公이 죽음으로써 呂氏의 제사가 끊어지고 田氏가 제나라를 차지하는 과정를 기록한 것이다.
사마천은 태사공자서에서 말하였다.
“申과 呂 두 나라가 쇠약해지자 尚父 姜太公은 미천한 신분이 되었다가 마침내 西伯에게 귀의했고 주문왕과 무왕의 스승이 되었다그의 공은 신하들 중 으뜸이었고 권모술수에 능하였다머리카락이 황백색으로 변한 노년에 營丘를 封地로 받았다.
에서의 맹약을 배신하지 않았기에 齊桓公은 번창하였으며아홉 차례나 제후들을 불러 모으니 패자로서의 공적이 두드러졌다.
田常과 闞止 두 권신이 권력을 다투어姜氏의 제나라는 망하게 되었다.
尚父 제태공의 지략을 칭송하여 제2편 齊太公世家를 지었다.”

 

 

太公望呂尚者,東海上人。
太公望 呂尙은 동해 연안 사람이다.


其先祖嘗為四嶽,佐禹平水土甚有功。
그 선조는 일찍이 四嶽의 직에 있었으며, 임금을 도와 물과 땅을 관리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虞夏之際封於呂,或封於申,姓姜氏。
순임금과 우임금 때는 땅 혹은 땅에 봉해지기도 했고 성은 姜氏이다.

夏商之時,申、呂或封枝庶子孫,或為庶人,尚其後苗裔也。
나라와 나라 때는 땅에 혹은 방계 자손이 봉해지기도 하고 평민이 되기도 했는데 여상은 그 후예였다.

本姓姜氏,從其封姓,故曰呂尚。
본래 성은 姜氏이었지만 그 봉지인 에서 성을 취한 까닭에 呂尚이라 하였다.

: 연안. 강가.
四嶽: 고대 중국에서 四方의 제후를 이르던 말.
尚父: 太公望 呂尙을 말하며 周文王이 상보라는 존칭으로 불렀다.
그의 선조는 堯舜시절에 四岳이라는 벼슬을 살았고 나라의 임금이 치수를 위해 토목공사를 벌릴 때 그를 보좌하여 큰 공을 세웠다.
과 우임금 때 땅에 봉해지고 으로 받았다.
姜太公은 주나라 문왕, 무왕의 스승이자 장인이며 천하의 스승국의 위치로 군림하여 제후국인 제나라의 왕(제태공)이 되었다.
: 관리하다. 치수하다.
虞夏之際: 순임금과 우임금의 집정 시기.
는 제순 帝舜 有虞氏를 말하며, 는 요순시대 이후 가 세운 왕조이다
封於呂或封於申: 나라와 나라 양대에 걸쳐 땅의 봉지는 강씨들의 방계 자손들에게 전해졌으나 후대에 이르러 몰락하여 평민으로 되었다.
枝庶: 支子庶子. 와 같다. 방계 자손.
庶人: 평민.
本姓姜氏: 呂尚은 본래 姜姓으로 이름이 이고 子牙이다.
그 선조가 땅에 봉해졌으므로 呂尙이라고 하였다.
상고시대에는 가 같지 않았다. 전국시대 이후에는 姓氏가 합쳐져 통상 이라고 하였다. 은 출생의 혈통을 나타내는 집단의 호칭이며, 는 동일 혈통의 사람들이 각지에 분산될 때에 각 지역에 분산된 일파를 표시하기 위한 표지였다.



呂尚蓋嘗窮困,年老矣,以漁釣奸周西伯。
여상은 일찍이 곤궁하였고 나이가 많았는데 낚시를 하면서 西伯을 만나고자 하였다.

西伯將出獵,卜之,曰
「所獲非龍非彨非虎非羆;所獲霸王之輔」。
서백이 사냥을 나가려고 하는데 사관이 점을 치고 말하였다.
잡는 것은 용도 아니며 이무기도 아니고 호랑이도 곰도 아닙니다. 覇王을 보좌할 신하를 얻겠습니다.”

於是周西伯獵,果遇太公於渭之陽,與語大說,曰:
「自吾先君太公曰
『當有聖人適周,周以興』。
子真是邪?
吾太公望子久矣。」
이에 주의 서백이 사냥에 나섰는데 과연 渭水 북쪽에서 태공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는 몹시 기뻐서 말하였다.
우리 선군이신 太公께서 말씀하시기를,
聖人이 주나라에 가서 주나라를 크게 일어나게 하리라
라고 했는데 당신이 바로 그 분 아니십니까?
우리 太公이 당신을 간절히 기다린 지 오래되었습니다.”

周西伯: 西伯昌. 周文王. 이름은 姬昌이며, 은나라의 속국인 주나라의 제후이다. 서쪽의 제후의 수장을 西伯이라고 하였으므로 주문왕 희창을 서백 창이라 하였다. 周太王의 손자이고, 季历의 아들이며, 周朝의 기초를 놓았다.
아버지 계력이 사망한 뒤에 西伯侯의 지위를 계승하였으므로 西伯昌이라 불린 것이다.
: 語氣詞이며 뜻이 없다.
: 과 통용된다. 구하다. 요구하다.
(): . 이무기. 뿔 없는 용.
(): 큰 곰.
渭水: 南谷山에서 발원하여 鳥鼠山서북쪽에 있고 동쪽으로 흘러 黃河로 들어간다
: 강의 북쪽과 산의 남쪽을 이라고 한다.
: 과 같다.
太公: 주나라 태왕으로 文王의 할아버지이다. 성은 이고 이름은 亶父이다. 나라 시대 周族의 수장으로 古公이라고 불려 흔히 古公亶父라고 한다.
: 가다.
: 그런가. 語助辭.
太公望: ‘太公이 기다리다라는 뜻이다.

 

故號之曰 「太公望」,載與俱歸,立為師。
그런 까닭에 太公望이라고 부르고 함께 수레를 타고 돌아와 太師로 모셨다.

太公望: 太公望 呂相. 姜太公

 

或曰,
太公博聞,嘗事紂。
紂無道,去之。
游說諸侯,無所遇,而卒西歸周西伯。
혹자는 말하였다.
태공은 박학다식하여 일찍이 왕을 섬겼다.
주왕이 무도하므로 그를 떠났다.
제후들에게 유세했으나 군주를 만나지 못하다가 마침내 서쪽으로 와서 서백에게 귀의하였다.”

或曰,
呂尚處士,隱海濱。
周西伯拘羑里,散宜生、閎夭素知而招呂尚。
혹자는 말하였다.
여상은 처사로 바닷가에 은거하였다.
서백이 羑里에 갇히자 서백의 신하인 散宜生閎夭가 평소 여상의 명성을 듣고 그를 초청하였다.’

: 왕조의 마지막 왕. 본명은 帝辛 또는 이고, 는 무도한 군주에게 주어진 시호이다.
處士: 벼슬하지 아니하고 초야에 묻혀 있는 선비.
羑里: 지금의 河南省 安養市 湯陰縣에 있었던 은나라 때의 城邑. 상나라 왕이 서백을 羑里에 있는 감옥에 가뒀다.
散宜生: 서백의 신하.
閎夭: 周文王武王때의 명신. 나라의 가 문왕을 가두었을 때 有莘氏의 미녀와 驪戎의 명마, 기타 귀중한 물품을 구해 주에게 헌납하고 문왕을 구해냈다.나중에 무왕을 따라 를 멸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呂尚亦曰
「吾聞西伯賢,又善養老,盍往焉」。
여상 역시 말하였다.
내가 듣기에 서백은 어질고 늙은이를 잘 모신다고 하니 어찌 가지 않으리오

三人者為西伯求美女奇物,獻之於紂,以贖西伯。
세 사람이 서백을 위하여 미녀와 기이한 물건을 구하여 왕에게 바쳐서 서백의 죄를 면하게 하였다.

西伯得以出,反國。
서백은 풀려나 나라로 돌아왔다.

言呂尚所以事周雖異,然要之為文武師。
여상이 나라를 섬기게 된 까닭을 비록 다르게 말하지만, 그러나 요점은 그가 문왕과 무왕의 스승이 되었다는 것이다.

(): 어찌~않는가.
三人者: 散宜生, 閎夭, 呂尙.
美女奇物: 굉요 등이 有莘氏의 미녀와 驪戎의 준마와 有熊의 네 마리 말이 끄는 수레 아홉 대를 다른 기이한 물건들과 함께 주왕의 총애하는 신하 費仲을 통해 왕에게 바쳤다.

 

본기4. 周本紀1(주본기1)

周本紀는 주왕조의 흥망성쇠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며, 주나라는 文王에 이어 아들 武王이 商나라의 紂王을 정벌하여 西安 부근의 鎬京에 세운 나라로 夏나라와 商나라와 더불어 三代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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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속죄하다. 재물을 바치고 죄를 면제받다.
: 과 같다.

 

周西伯昌之脫羑里歸,與呂尚陰謀修德以傾商政,其事多兵權與奇計,故後世之言兵及周之陰權皆宗太公為本謀。
의 서백 羑里에서 벗어나 돌아와서 여상과 은밀히 모의하여 덕을 닦아 나라의 정권을 전복시켰으니 그 일에 용병술과 기이한 계책이 많이 쓰였다. 그런 까닭에 후세에 용병과 주나라의 은밀한 권모술수를 논함에 모두 태공을 종주로 하여 기본 책략으로 삼았다.

周西伯政平,及斷虞芮之訟,而詩人稱西伯受命曰文王。
주 서백이 정치를 공정하게 하고, 의 소송을 잘 해결하자 시인들은 서백이 천명을 받았다고 칭찬하며 文王이라고 불렀다.

伐崇、密須、犬夷,大作豐邑。
,密須,犬夷를 정벌하고 豐邑을 크게 건설하였다.

天下三分,其二歸周者,太公之謀計居多
천하의 3분의 2가 주나라에 귀의한 것은 태공의 많은 권모와 계책 덕분이었다.

: 전복시키다.
兵權: 용병술.
: 으뜸.근본.
本謀: 기본 책략.
政平: 정치가 청렴하고 공정하다.
斷虞芮之訟: 나라와 나라 군주가 경계로 분쟁이 있어 주나라 서백에게 판결을 요청하였다. 주나라의 국경에 들어서자 밭을 가는 사람은 밭의 경계를 양보하고, 백성들의 풍속도 모두 나이 많은 사람에게 양보하고 있었다. 우나라와 예나라 군주는 서백을 만나보기도 전에 모두 부끄러워하면서 서로에게 말하였다.
우리처럼 싸우는 것을 주나라 사람들은 수치스럽게 여기는 것이니 어찌 가서 그런 일을 하겠는가, 단지 치욕만 얻을 뿐이다.”
마침내 돌아와서 함께 양보하고 헤어졌다.

 

 

본기4. 周本紀1(주본기1)

周本紀는 주왕조의 흥망성쇠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며, 주나라는 文王에 이어 아들 武王이 商나라의 紂王을 정벌하여 西安 부근의 鎬京에 세운 나라로 夏나라와 商나라와 더불어 三代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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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人: 詩經大雅·大明大雅·皇矣를 말한다.
<詩經·大雅·大明>武王과 그 조상의 건국 사적을 기린 노래이며, <詩經·大雅·皇矣>나라가 천명을 받게 되는 유래를 말하고 칭송한 敍事詩이다.
,密須,犬夷: 고대 부족명.
: 건설하다.
豐邑: 지금의 陕西省 户縣

 

文王崩,武王即位。
문왕이 죽고 무왕이 즉위하였다.

九年,欲修文王業,東伐以觀諸侯集否。
무왕9, 무왕이 문왕의 유업을 이어 동방을 정벌하며 제후들이 모이는지 안 모이는지를 살폈다.

師行,師尚父左杖黃鉞,右把白旄以誓,曰:
「蒼兕蒼兕,總爾眾庶,與爾舟楫,後至者斬!」
군대가 출정하는데 師尙父인 강태공이 왼손에 황동의 큰 도끼를, 오른손에는 소꼬리 장식을 한 흰색 깃발을 들고 맹서하였다.
蒼兕, 蒼兕, 너의 병사들을 모두 모으라,
함께 노를 저어라, 늦게 도착하는 자는 목을 벨 터이다!”

武王: 주나라의 제1대 왕이다.성은 ,이름은 이다. 주문왕의 아들이다
師尙父: 太公望 呂尙. 태공망은 文王太史尙父라 불리었다.
상보는 아버지와 같이 존경하여 받들어 모시거나 그런 높임을 받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임금이 특별한 대우로 신하에게 내리던 존칭의 하나이다.

 

 

본기4. 周本紀1(주본기1)

周本紀는 주왕조의 흥망성쇠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며, 주나라는 文王에 이어 아들 武王이 商나라의 紂王을 정벌하여 西安 부근의 鎬京에 세운 나라로 夏나라와 商나라와 더불어 三代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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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鉞: 황동으로 만든 큰 도끼.
白旄: 소꼬리가 장식된 흰색 깃발.
蒼兕: 그 생김새는 소와 비슷한데 몸빛이 검푸르며 외뿔이다. 물속에 산다는 전설상의 맹수이며 돌진에 능해 배를 뒤집어엎을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여기서는 배를 담당하는 관리의 직명이라는 설도 있다.
: 집합하다.
眾庶: 민중. 병사들.
(,): (배의) .

 

遂至盟津。
마침내 盟津에 이르렀다.

諸侯不期而會者八百諸侯。
제후들이 약정하지도 않았는데 모인 자가 800명이나 되었다.

諸侯皆曰:
「紂可伐也。」
제후들이 모두 말하였다.
를 토벌해야 합니다.”

武王曰:
「未可。」
무왕은 말하였다.
지금은 아니오.”

還師,與太公作此太誓。
군대를 이끌고 돌아와 태공과 함께 이 일을 <太誓>로 지었다.

太誓: 고문상서의 편명으로 <泰誓>로 되어 있다. 周武王紂王을 치려고 군사를 이끌고 孟津이라는 나루터에 이르렀을 때, 여러 제후들과 군사들을 모아 놓고 이번 싸움의 취지를 밝히고 군사들을 격려하기 위한 훈시이다.

 

본기4. 周本紀1(주본기1)

周本紀는 주왕조의 흥망성쇠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며, 주나라는 文王에 이어 아들 武王이 商나라의 紂王을 정벌하여 西安 부근의 鎬京에 세운 나라로 夏나라와 商나라와 더불어 三代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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居二年,紂殺王子比干,囚箕子。
2년 뒤, 나라 왕이 왕자 比干을 죽이고 箕子를 가두었다.

武王將伐紂,卜龜兆,不吉,風雨暴至。
武王왕을 정벌하려고 거북점을 쳤는데 징조가 불길하고 비바람이 갑자기 몰아쳤다.

群公盡懼,唯太公彊之勸武王,武王於是遂行。
신하들이 모두 두려워했으나 오직 태공만이 무왕에게 강력하게 권하니 무왕이 마침내 정벌에 나섰다.

十一年正月甲子,誓於牧野,伐商紂。
11년 정월 갑자일, 牧野에서 맹세하고 상나라의 주왕을 정벌하였다.

紂師敗績。
주왕의 군대가 무참히 패하였다.

紂反走,登鹿臺,遂追斬紂。
주왕이 몸을 돌려 달아나 鹿臺로 올라갔으나, 쫓아가 왕을 죽였다.

比干: 殷紂王의 숙부. 주왕의 음란함을 간한다고 하여 죽임을 당하엿다. 비간은 箕子微子와 아울러 은나라의 三仁으로 꼽힌다.
箕子: 폭군 紂王의 숙부로 이름은 胥餘이고 벼슬은 太師에 이르렀으며, 나라에 봉해졌다. 왕이 포악한 것을 보고 간했지만 듣지 않자, 머리를 풀고 미친 척 가장하여 남의 노예가 되었다가 왕에 의해 구금되었다. 周 武王이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왕을 죽인 뒤에 箕子를 석방하고 그를 朝鮮에 책봉하였다.
卜龜: 거북의 등껍질을 태워 나타나는 문양으로 길흉을 점치는 것.
誓於牧野: 목야에서 맹세하다. 목야는 상나라의 교외.
<書經>牧誓에서
그대들이 힘써 명령을 지키지 않으면 그 죄로 그대들은 죽음을 당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사기 본기 권04. 周本紀>
敗績: 군대가 무참히 패배하다.
鹿臺: 紂王이 축조한 의 이름으로 지금의 하남성 湯陰縣 朝歌鎭 남쪽이다
遂追斬紂: 周本紀에는
주왕은 도망쳐 성안으로 들어와 鹿臺위에 올라가 보석으로 치장한 옷을 입고 스스로 불속으로 뛰어들어 죽었다.’
라고 하였다.<사기 본기 권04.주본기>

 

 

본기4. 周本紀1(주본기1)

周本紀는 주왕조의 흥망성쇠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며, 주나라는 文王에 이어 아들 武王이 商나라의 紂王을 정벌하여 西安 부근의 鎬京에 세운 나라로 夏나라와 商나라와 더불어 三代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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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日,武王立于社,群公奉明水,衛康叔封布采席,師尚父牽牲,史佚策祝,以告神討紂之罪。
다음날, 무왕은 社稷의 제단에 서고 신하들은 정화수를 받들었으며, 衛康叔 姬封은 여러 색의 돗자리를 폈고, 사상보 여상은 제사용 가축을 끌고 왔으며, 史官 尹佚이 축문으로 왕의 죄를 토벌한 일을 신에게 아뢰었다.

散鹿臺之錢,發鉅橋之粟,以振貧民。
녹대의 돈과 鉅橋의 양곡을 풀어 가난한 백성을 구제하였다.

封比干墓,釋箕子囚。
比干의 무덤에 봉토를 하고, 갇혀 있던 箕子를 풀어주었다.

遷九鼎,修周政,與天下更始。
九鼎을 옮기고 주나라의 정치를 다듬어서 천하와 함께 다시 시작하였다.

師尚父謀居多。
師尚父의 계책을 따른 것이 많았다.

: 土地神의 제단.
明水: 정화수.
衛康叔封: 衛康叔 姬封. 위나라의 제1대 군주이다. 성은 , 이름은 이다. 주 문왕의 6남이자 주무왕의 동복 동생이다.
史佚: 사관 尹佚. 본명은 尹佚이지만 주나라 초기인 문왕과 무왕 때 태사직을 역임하였기 때문에 史佚로 불렸다
策祝: 筴祝. 竹冊祭文.
鉅橋: 상나라 때의 식량 창고.
: 과 같다. 구제하다. 구휼하다.
: 봉토하다.
九鼎: 나라 우왕이 九州에서 조공으로 받은 쇠를 녹여서 만든 솥이다. ··주 천자에게 보배로 전하여졌다.
更始: 고치어 시작함. 혁신하다.

 

於是武王已平商而王天下,封師尚父於齊營丘。
이로써 무왕은 상나라를 평정하고 천하의 왕이 되었으며, 사상보를 나라의 營丘에 봉하였다.

東就國,道宿行遲。
사상보가 동쪽 봉국으로 가면서 유숙하느라 행차가 더뎠다.

逆旅之人曰:
「吾聞時難得而易失。
客寢甚安,殆非就國者也。」
여인숙의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제가 듣기에 시간이란 얻기는 어려워도 잃기는 쉽다고 합니다.
손님이 아주 편히 주무시는 것을 보니 아마도 봉국으로 가시는 분이 아닌 것 같습니다.”

太公聞之,夜衣而行,犁明至國。
태공 여상이 그 말을 듣고 밤중에 옷을 입고 출발하여 동틀 무렵 봉국에 이르렀다.

萊侯來伐,與之爭營丘。
의 제후가 공격해와서 태공과 영구를 쟁탈하였다.

營丘邊萊。
영구는 내와 가까웠다.

萊人,夷也,會紂之亂而周初定,未能集遠方,是以與太公爭國。
내 지역 사람들은 夷族이었는데 왕의 혼란과 주나라 정권이 막 들어서서 먼 곳까지 힘이 미치지 못하는 틈에 태공과 나라를 다툰 것이다.

逆旅: 여인숙.
: 거의. 대개.
: 와 통용된다. 黎明은 동틀 무렵.
: 동쪽의 소수 부족의 제후국.

 

太公至國,修政,因其俗,簡其禮,通商工之業,便魚鹽之利,而人民多歸齊,齊為大國。
태공이 제나라에 도착하여 정치를 고쳐 그곳의 풍속에 따라 예를 간소하게 했으며, 상공업을 개방하고 어업과 염업의 이익을 발전시키니, 많은 백성이 제나라로 귀의하여 제나라는 대국이 되었다.

及周成王少時,管蔡作亂,淮夷畔周,乃使召康公命太公曰:
「東至海,西至河,南至穆陵,北至無棣,五侯九伯,實得征之。」
成王이 어릴 때 管叔蔡叔이 난을 일으키고 淮夷가 주나라를 배반하자 召康公을 보내 태공에게 명령하였다.
동쪽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황하, 남쪽으로는 穆陵, 북쪽으로는 無棣에 이르기까지 다섯 등급의 제후와 九州의 우두머리들이 죄과가 있으면 정벌하도록 하라.”

齊由此得征伐,為大國。
제나라는 이로 말미암아 정벌권을 가져서 대국이 되었다.

都營丘。
營丘를 도읍으로 삼았다.

周成王: 주나라의 제2대 왕. 주무왕의 아들로 성은 , 이름은 이다.
주무왕이 역성혁명 후 불과 2년 만에 사망하자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성왕이 어렸으므로 무왕의 아우 周公旦攝政하였다.
管蔡作亂: 管蔡나라 武王의 아우인 管叔蔡叔이다.
무왕이 죽고 어린 成王이 즉위하여 周公이 섭정하니, 관숙과 채숙은 주공이 성왕을 해칠 것이라고 모함하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뒤에 성왕이 사실을 알게 되자 이를 두려워하여 다시 의 아들 武庚과 모의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가 주공에 의해 토벌되었다. <사기 세가 권35. 管蔡世家>
淮夷: 春秋시대 江蘇에 있던 부족.
: 과 통용된다. 배반하다.
召康公: 召公. 西周초기 周文王의 서자로 이름은 이다.
주나라의 제후국가인 나라의 시조로, 采邑에 두었기 때문에 소공으로 불린다. 같은 형제인 周公과 함께 어린 成王을 보필하여 주나라 왕조의 기반을 확립하였다. 시호는 이다.
五侯九伯: 五侯는 다섯 등급의 諸侯. 을 말하며, 九伯九州 각지의 장관.

 

蓋太公之卒百有餘年,子丁公呂伋立。
태공이 백 살을 넘기고 죽고 아들 丁公 伋이 즉위하였다.

丁公卒,子乙公得立。
정공이 죽자 아들 乙公 得이 계승하였다.

乙公卒,子癸公慈母立。
을공이 죽자 아들 癸公 慈母가 계승하였다.

癸公卒,子哀公不辰立。
계공이 죽자 아들 哀公 不辰이 계승하였다.

 

 

哀公時,紀侯譖之周,周烹哀公而立其弟靜,是為胡公。
哀公 나라의 제후가 주 왕실에 애공을 참소하자 주나라 왕이 애공을 삶아 죽이고 동생을 을 세우니 그가 胡公이다.

胡公徙都薄泵,而當周夷王之時。
호공은 도읍을 薄姑로 옮겼으니 이 때가 주나라 夷王 재위 시절이다.

哀公: 齊哀公. 제나라의 제5대 제후로 이름은 不辰이다.
아버지 계공이 죽자 뒤를 이었다. 서주 夷王 3년에 紀侯의 참소를 받고 주나라의 서울 호경으로 끌려간 뒤 팽형에 처해졌으며, 이왕은 애공의 이복동생 을 제후로 세웠다.
: 참소하다.헐뜯다.
周夷王: 西周때의 國君. 성은 씨고,이름은 이다. 懿王의 아들이다. 의왕이 죽자 叔孝가 왕이 되었는데, 그가 죽자 諸侯들이 왕으로 세웠다. 齊哀公不敬하자 烹刑에 처하였다.
胡公: 齊胡公. 제나라의 제6대 후작으로, 이름은 . 서주 이왕이 기후의 참소를 듣고 애공을 팽형에 처하고 애공의 이복동생 호공 정을 새 제후로 세웠다.
호공은 수도를 영구에서 薄姑로 옮겼다. 애공의 동복동생이자 호공의 이복동생인 공자 산이 호공에게 원망을 품었고 영구 사람들과 함께 호공을 습격하여 죽이고 뒤를 이었다.
薄泵(박빙): 薄姑. 蒲姑라고도 하며, 지금의 山東省 朴興縣의 동서쪽에 해당한다.

哀公之同母少弟山怨胡公,乃與其黨率營丘人襲攻殺胡公而自立,是為獻公。
애공과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막내동생 이 호공에게 원한을 품고 그의 무리와 영구 사람들을 이끌고 호공을 기습하여 죽이고는 스스로 즉위하니 그가 獻公이다.

獻公元年,盡逐胡公子,因徙薄泵都,治臨菑。
헌공 원년에 胡公의 아들들을 모두 쫓아내고 이 기회를 틈타 薄姑에서 臨菑로 도읍을 옮겼다.

獻公: 齊獻公. 제나라의 제7대 공작으로, 이름은 이다.
齊哀公이 죽은 뒤 계승한 제 호공이 도읍을 영구에서 薄姑로 옮기자, 제 헌공은 호공에게 원망을 품고, 옛 서울인 영구 사람들과 함께 호공을 습격하여 죽이고 스스로 임금이 되었다. 원년(기원전859)에 호공의 아들들을 쫓아내고, 도읍을 박고에서 임치로 옮겼다. 재위 9년 만에 죽어, 아들 제무공이 뒤를 이었다.
臨菑: 山東省 靑州府.

九年,獻公卒,子武公壽立。
헌공9, 獻公이 죽고 아들 武公 壽가 즉위하였다.

武公九年,周厲王出奔,居彘。
무공 9(기원전842), 周厲王이 도망쳐 나와 彘邑에 머물렀다.

十年,王室亂,大臣行政,號曰 「共和」。
무공 10(기원전841), 주 왕실에 난이 일어나 대신들이 국정을 주관하니 이를 共和라 하였다.

二十四年,周宣王初立。
무공 24(기원전827), 宣王이 즉위하였다.

武公壽: 齊武公. 제나라의 제8대 후작으로 이고 이며, 이름은 이다.아버지 제 헌공이 죽자 제후가 되었으며, 재위26년 만에 죽어 아들 무기가 뒤를 이었다. 재위 중에 周厲王이 쫓겨나고 공화 시기가 있었다.
周厲王: 춘추시대 나라의 國君. 성은 씨고, 이름은 .
夷王의 아들이고, 周穆王4대손이다. 탐욕스럽고 잔인하며 이익만 좇았고, 榮夷公卿士로 삼았다. 포악하고 사치스러운 데다 오만한 성격이라 諸侯는 조회를 오지 않았고, 나라 사람들은 그를 비방하였다. 衛巫를 시켜 비방을 감시하니 사람들이 감히 말을 꺼내지 못하고 길에서도 눈으로만 인사를 하였다. 나중에 화가 난 백성이 서로 들고 일어나 공격하니 로 달아났다. 14년 뒤 체에서 죽었다. <사기 본기 권04. 周本紀>

 

 

본기4. 周本紀1(주본기1)

周本紀는 주왕조의 흥망성쇠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며, 주나라는 文王에 이어 아들 武王이 商나라의 紂王을 정벌하여 西安 부근의 鎬京에 세운 나라로 夏나라와 商나라와 더불어 三代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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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망가다.
王室亂: 국인폭동을 말한다. 國人暴動은 기원전 841년 무렵, 나라의 사대부인 國人들이 반란을 일으켜 厲王을 쫓아낸 사건으로 기원전 828년까지 14년 동안 천자가 없이 共和행정이 실시되는 계기가 되었다. 國人은 중국 나라 시대에 경, 大夫 등의 사대부를 가리키는 말이다.
共和: 厲王國人暴動으로 쫓겨나고 召公周公이 공동으로 왕을 대신하여 執政하던 시기를 뜻하며, 왕이 없이 정치가 이루어지는 共和制란 말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기원전841~기원전828). 이 공화 원년부터 사기의 <12제후연표>가 시작되고 있다.<사기 본기 권04.주본기>

 

 

본기4. 周本紀1(주본기1)

周本紀는 주왕조의 흥망성쇠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며, 주나라는 文王에 이어 아들 武王이 商나라의 紂王을 정벌하여 西安 부근의 鎬京에 세운 나라로 夏나라와 商나라와 더불어 三代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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周宣王: 西周國君. 성은 씨고, 이름은 정(,)이며, 厲王의 아들이다. 여왕이 나라 사람들에 의해 쫓겨났을 때 召公虎家에 숨어 있었다. 여왕이 죽자 귀국하여 즉위하였다.

 

二十六年,武公卒,子厲公無忌立。
무공 26(기원전825), 무공이 죽고 아들 厲公 無忌가 즉위하였다.

厲公暴虐,故胡公子復入齊,齊人欲立之,乃與攻殺厲公。
여공이 포학하였기 때문에 胡公의 아들이 다시 제나라로 들어오자, 제나라 사람들이 그를 군주로 세우려고 함께 공격하여 厲公을 죽였다.

胡公子亦戰死。
호공의 아들도 전사하였다.

齊人乃立厲公子赤為君,是為文公,而誅殺厲公者七十人。
제나라 사람들이 여공의 아들 을 군주로 세우니 그가 文公인데, 문공은 여공을 죽인 자 70명을 죽였다.

厲公無忌: 齊厲公. 제나라의 제9대 후작으로,이름은 無忌이다.
아버지 제 무공이 죽자 제후가 되었다. 여공9(기원전816), 여공이 포악하였으므로, 제나라 사람들은 여공의 할아버지 제 헌공이 쫓아낸 제 胡公의 아들을 모셔와 제후로 옹립하고자 해 여공을 공격하여 죽였다. 그러나 호공의 아들도 전사했으므로 여공의 아들 이 뒤를 이어 제 문공이 되었다.
文公: 齊文公. 제나라의 제10대 후작으로, 이름은 이다. 아버지 제 여공이 포학하여, 제나라 사람들이 호공의 아들을 세우고자 여공을 공격하여 죽였다. 그러나 호공의 아들도 전사했으므로 제나라 사람들은 문공을 제후로 세웠다. 문공은 즉위하고서 아버지를 죽인 자 일흔 명을 죽였다. 이로써 제 애공이 죽은 뒤로 계속된 내분이 끝났다.

 

文公十二年卒,子成公脫立。
문공 12(기원전804) 문공이 죽고 아들 成公 脫이 즉위하였다.

成公九年卒,子莊公購立。
성공 9(기원전795) 성공이 죽고 아들 莊公 購가 즉위하였다.

成公脫: 齊成公이름은 이다. 제나라의 제11대 후작. 제문공의 아들. 제장공의 아버지. 제 성공은 9년 동안 제나라의 군주 노릇을 하고 죽어 그 아들 姜贖이 뒤를 이으니 그가 바로 齊莊公이다.
莊公購: 齊莊公. 제나라의 제12대 후작으로,이름은 혹은 이다.
기원전 795, 아버지 제 성공이 재위 9년 만에 죽자 제후가 되었으며, 재위 64년 만에 죽어 아들 제희공이 제후가 되었다.

莊公二十四年,犬戎殺幽王,周東徙雒。
장공 24(기원전771), 犬戎周幽王을 죽이자 주 왕실은 동쪽 雒邑으로 도읍을 옮겼다.

秦始列為諸侯。
나라가 처음으로 제후의 반열에 들었다.

五十六年,晉弒其君昭侯。

장공 56(기원전739), 나라에서 그 국군 晉昭侯를 시해하였다.

犬戎: 陝西省山西省지역에 거주했던 부족
幽王: 周 幽王. 주나라의 12대 왕.
정치에는 관심이 없이 여흥과 주색만을 탐닉하다 서주 왕실을 망하게 하였다. 애첩 褒似를 총애한 나머지 정비 申后와 그 소생인 태자 宜臼를 폐하고 포사와 그 소생 伯服을 정비와 태자에 책봉함으로써 申侯를 격분시켰고, 결국 견융과 신후의 연합 공격을 받고 사살되었다.
周東徙雒: 西周의 마지막 왕인 周幽王의 아들인 周平王이 서방의 이민족이 강성해져 주나라 영토를 침공하므로, 도읍인 鎬京을 버리고 동쪽의 洛邑(洛陽)으로 도읍을 옮겨 주나라의 제13대 왕이며 동주의 제1대 왕이 되었다.
昭侯: 晉昭侯는 춘추시대 진나라의 제12대 임금이다. 이름은 이다.
진소후 7(기원전739), 진나라 대신 潘父가 소후를 죽이고, 곡옥 환숙을 임금으로 모시려 했으나, 진나라 사람들은 환숙을 공격하여 패배시키고, 소후의 아들 평을 진나라 임금으로 세우고, 반보를 주살하였다.

 

六十四年,莊公卒,子釐公祿甫立。
제장공 64(기원전731), 제장공이 죽고 그의 아들 釐公 祿甫가 즉위하였다.

釐公: 제희공(齊僖公: 齊釐公). 제나라의 제13대 후작이다. 이름은 祿甫. <사기>에서는 사마천의 할아버지 司馬僖의 이름을 피하기 위하여 釐公으로 표기하였다.

 

釐公九年,魯隱公初立。
희공 9(기원전722), 隱公이 즉위하였다.

十九年,魯桓公弒其兄隱公而自立為君。
희공 19(기원전712), 桓公이 형 隱公을 시해하고 스스로 군주가 되었다.

魯隱公: 춘추 시대 노나라의 國君. 이름은 息姑 또는 이고, 惠空庶子.노나라 사람이 혜공의 적자 이 어리다고 여겨 함께 그를 세워 섭정을 하게 하고 동생 을 태자로 삼았다.
魯桓公: 춘추 시대 노나라의 國君. 이름은 또는 , 惠公의 적자다. 公子翬隱公을 살해하자 즉위하였다.

 

二十五年,北戎伐齊。
희공 25(기원전706), 北戎이 제나라를 공격하였다.

鄭使太子忽來救齊,齊欲妻之。
나라가 태자 을 보내 제나라를 구원했으며, 제나라가 홀에게 딸을 주려 하였다.

忽曰:
「鄭小齊大,非我敵。」
정나라는 작고 제나라는 크기 때문에 제가 감당할 수 없습니다.”

遂辭之。
그리고는 사양하였다.

北戎: 山戎이라고도 하며 戎族의 일파로 춘추시대 북방에 거주하는 이민족이다.
: ~에 상당하다. 감당하다.
太子忽: 희공25(기원전706), 북융이 제나라를 쳤다. 정나라에서는 태자 을 보내 제나라를 구원해 대승을 거두고 대장과 갑병들의 목을 제나라에 바쳤다.희공은 예전에 홀에게 딸 문강을 시집보내려 했으나 거절당했고,이번에 북융을 격파하자 또 사위를 삼고자 했으나 거절당하였다. <춘추좌씨전 노환공6(기원전706)>

 

三十二年,釐公同母弟夷仲年死。
희공 32(기원전699), 희공과 같은 어머니에게서 난 동생 夷仲年이 죽었다.

其子曰公孫無知,釐公愛之,令其秩服奉養比太子。
그 아들은 公孫無知라 하는데 희공이 아껴서 녹봉의 등급과 거마 복식에 대한 대우를 태자와 같게 해주었다.

公孫無知: 제 희공의 아우 이중년의 아들이다. 공손은 '공작의 손자'라는 의미이며, 무지는 이름이다. 희공은 아들 諸兒를 태자로 세웠으나, 조카 공손 무지를 총애하여 그 대우를 태자와 같게 하였다.
秩服: 녹봉 등급과 거마 服飾.
奉養: 대우하다.
: ~에 따라. ~에 근거하여.

 

三十三年,釐公卒,太子諸兒立,是為襄公。
희공 33(기원전698), 희공이 죽자 태자 諸兒가 즉위하니 그가 襄公이다.

襄公: 齊襄公. 춘추시대 제나라 제14대 후작이다. 이름은 諸兒이며, 제 희공의 아들이고 제 환공, 공자 규의 형이다.

 

襄公元年,始為太子時,嘗與無知鬬,及立,絀無知秩服,無知怨。
양공 원년(기원전697), 양공은 당초 태자 때 無知와 싸운 적이 있었던 터라, 즉위하자 무지의 녹봉과 거마와 복식에 대한 우대를 강등시켰고 무지는 원한을 품었다.

襄公: 齊襄公. 춘추시대 제나라의 군주로 이름은 諸兒, 莊公의 손자다. 12년 동안 재위했고, 시호는 이다. 양공은 황음무도하여 무고한 자를 죽이고, 이복 동생인 노 환공의 부인 문강과 통간하였으며 노 환공을 모살하였으므로 인심을 크게 잃었다. 대부 연칭과 관지보가 병란을 일으켰고, 양공을 사로잡아 살해한 뒤 양공의 종제 공손 무지를 즉위시켰다.
無知: 公孫無知. 춘추시대 제나라 제15대 후작으로 제 희공의 아우인 이중년의 아들이다. 희공의 총애를 받아 세자 諸兒와 같은 대우를 받았으나 제아가 양공으로 즉위하자 대우가 박해져 불만을 품었다. 기원전685, 대부 연칭과 관지보가 양공을 살해하고 왕으로 옹립하였다.
: 과 통용된다. 감소하다.

 

四年,魯桓公與夫人如齊。
양공 4(기원전694), 魯桓公이 부인과 함께 제나라에 왔다.

齊襄公故嘗私通魯夫人。
제양공은 예전에 노환공의 부인인 文姜과 사통한 적이 있었다.

魯夫人者,襄公女弟也,自釐公時嫁為魯桓公婦,及桓公來而襄公復通焉。
노부인은 양공의 이복 여동생으로, 釐公 때 시집가서 노환공의 부인이 되었는데, 노환공이 제나라에 오자 양공이 다시 간통하였다.

魯桓公知之,怒夫人,夫人以告齊襄公。
노 환공이 이를 알고 부인에게 화를 냈고, 부인은 이를 제 양공에게 알렸다.

魯夫人: 文姜. 齊僖公의 차녀로 魯桓公에게 시집갔다. 출가 전부터 이복 오빠인 齊襄公 諸兒와 간통하였고, 출가 후에 노환공이 제나라를 방문했을 때 함께 따라와 관계를 재개하여 이를 안 노환공이 대노하자 제양공이 팽생으로 하여금 살해하게 하였다.
노환공이 죽은 후에도 계속 제,노 양국 국경 지대에 머물면서 제양공과 사통하였고 제양공의 서녀 哀姜과 자신의 아들 魯莊公의 혼인을 강제하여 또 다른 비극을 낳게 되었다.

 

齊襄公與魯君飲,醉之,使力士彭生抱上魯君車,因拉殺魯桓公,桓公下車則死矣。
제양공이 노환공과 술을 마시다 그를 취하게 만든 다음, 역사 彭生을 시켜 노환공을 안아 마차에 태우고 늑골을 으스러뜨려 죽이니, 노환공이 수레에서 내려졌을 때 이미 죽어 있었다.

魯人以為讓,而齊襄公殺彭生以謝魯。
노나라 사람들이 이를 꾸짖자 제양공은 팽생을 죽이고 노나라에 사과하였다.

拉殺: 늑골을 부러뜨려 죽이다.
: 꾸짖다.

 

八年,伐紀,紀遷去其邑。
양공 8(기원전690), 를 공격하자 기가 도읍을 옮겼다.

伐紀: 齊襄公은 위나라, 노나라, 정나라를 공벌하였다.
, 8대 전에 나라가 齊哀公周釐王에게 참소하여 팽살한 원한으로 기나라와 원수지간이 되었는데, 제양공이 기나라를 멸하여 원수를 갚았다는 말이다

十二年,初,襄公使連稱、管至父戍葵丘,瓜時而往,及瓜而代。
양공(襄公) 12(기원전686), 당초 양공은 대부 連稱管至父에게 葵丘를 지키게 하면서 오이가 익을 때 보내며 다음 해 오이가 익으면 교대해 주기로 하였다.

往戍一歲,卒瓜時而公弗為發代。
가서 수자리하기 1, 마침내 오이가 익었는데도 양공은 군사를 보내 교대해 주지 않았다.

或為請代,公弗許。
누군가 교대시켜 주기를 청하였으나 제양공이 허락하지 않았다.

故此二人怒,因公孫無知謀作亂。
그런 까닭에 두 사람은 화가 나서 공손무지에게 의지하여 반란을 꾀하였다.

連稱有從妹在公宮,無寵,使之閒襄公,曰
「事成以女為無知夫人」。
연칭에게는 양공의 후궁인 사촌 누이동생이 있어 총애를 받지 못하였는데, 그녀를 시켜 양공의 동정을 살피게 하며 말하였다.
일이 성공하면 너는 무지의 부인로 삼겠다.”

連稱,管至父: 齊襄公大夫를 지냈다. 연칭과 관지보는 함께 葵丘자리를 갔는데, 다음해에 오이가 익으면 돌아오도록 하였다. 한 해 동안 수자리를 섰지만 명령서가 오지 않아 교체를 청했지만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연칭과 관지보는 함께 반란을 일으켜 양공을 살해하고 공손무지를 군주로 세웠다.
: 수자리. 변방을 지키다.
葵丘: 제나라의 변방.
瓜時: 칠월에 오이가 익으므로 칠월을 말한다. 벼슬아치의 교체 시기. 瓜月. 瓜滿. <左傳 莊公 8>
及瓜而代: 오이가 익으면 바꾼다는 뜻으로 임기가 끝나면 자리를 옮겨준다는 것을 이르는 말이 되었으며, 瓜時而代라고도 한다.
(): 동정을 살피다.
: 와 같다. .

冬十二月,襄公游姑棼,遂獵沛丘。
겨울 12월에 양공이 姑棼에 유람하고 이어 沛丘에서 사냥하였다.

見彘,從者曰
「彭生」。
큰 돼지를 보았는데 따르던 자가
팽생입니다.”
라고 하였다.

公怒,射之,彘人立而啼。
양공이 화를 내며 활을 쏘자 그 돼지가 사람처럼 벌떡 서서 울었다.

公懼,墜車傷足,失屨。
양공이 겁이 나서 수레에서 떨어져 발을 다치고 신발을 잃어버렸다.

反而鞭主屨者茀三百。
돌아와 신발을 담당하는 이란 자에게 채찍질 300대를 가하였다.

茀出宮。
불은 궁에서 나갔다.

(): 큰 돼지.

而無知、連稱、管至父等聞公傷,乃遂率其眾襲宮。
무지와 연칭과 관지보 등은 양공이 다쳤다는 소식을 들고 곧 무리를 이끌고 궁으로 양공을 기습하러 갔다.

逢主屨茀,茀曰:
「且無入驚宮,驚宮未易入也。」
신발을 관리하는 불과 마주쳤는데, 불이 말하였다.
궁궐을 놀라게 하면서 들어가지 마십시오. 궁을 놀라게 하면 들어가기가 쉽지 않을 터입니다.”

無知弗信,茀示之創,乃信之。
무지가 믿지 않으니 불은 상처를 보여 주었고 그때서야 믿었다.

待宮外,令茀先入。
그들은 궁 밖에서 기다리며 불을 먼저 들여보냈다.

茀先入,即匿襄公戶閒。
불은 먼저 들어가 바로 양공을 문 사이에 숨겼다.

: 상처.

 

良久,無知等恐,遂入宮。
한참이 지나서 무지 등은 겁을 먹고 궁중으로 진격하였다.

茀反與宮中及公之幸臣攻無知等,不勝,皆死。
불이 배반하고 궁중 사람들과 양공의 측근들과 함께 무지 등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모두 죽었다.

無知入宮,求公不得。
무지가 입궁하여 양공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였다.

或見人足於戶閒,發視,乃襄公,遂弒之,而無知自立為齊君。
누군가 문틈에 사람 발이 나와 있는 것을 보고는 열어 보니 바로 양공이므로 양공을 시해하고 공손무지 자신이 제나라의 군주 자리에 올랐다.

 

桓公元年春,齊君無知游於雍林。
桓公 원년(기원전685) , 제나라의 군주 무지가 雍林으로 놀러 갔다.

雍林人嘗有怨無知,及其往游,雍林人襲殺無知,告齊大夫曰:
「無知弒襄公自立,臣謹行誅。
唯大夫更立公子之當立者,唯命是聽。」
옹림 사람이 일찍이 무지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는데 무지가 놀러 오자 무지를 습격하여 죽이고, 제나라의 대부에게 고하였다.
무지가 양공을 시해하고 스스로 군주에 즉위했으므로 신이 삼가 처단한 것입니다.
청컨대 대부께서 다른 공자 중 마땅한 자를 즉위시키면 오로지 명에 따르겠습니다.”

桓公: 제나라의 15대 왕. 이름은 소백. 襄公의 동생.
양공이 왕으로 있을 때 정치가 어지럽자 鮑叔牙와 함께 에 망명하였다. 기원전686년에 公孫無知가 양공을 죽이고 왕이 되었다가 죽임을 당하자 환공은 귀국하여 조카 와 싸워 격파하고, 왕위에 올랐다.
雍林: <춘추좌씨전>에는 당초에 공손무지가 雍廩을 학대하였다.’고 기록하여 옹림은 雍廩으로 제나라 대부라 하였으나 <사기>에서는 지명으로 사용하였다. <춘추좌씨전·魯莊公 8(기원전686)>

 

初,襄公之醉殺魯桓公,通其夫人,殺誅數不當,淫於婦人,數欺大臣,群弟恐禍及,故次弟糾奔魯。
당초 襄公魯桓公을 취하게 하여 죽이고, 그의 부인과 사통했으며, 부당하게 여러 사람을 죽이고, 부인들과 음탕한 짓을 하고, 대신들을 자주 기만하자, 동생들은 화가 자신들에게 미칠까 두려운 까닭에 다음 동생인 는 노나라로 달아났다.

其母魯女也。
그의 어머니가 노나라 출신이었다.

管仲、召忽傅之。
管仲召忽이 그를 보좌하였다.

次弟小白奔莒,鮑叔傅之。
그 다음 동생인 小白로 도망쳤는데, 鮑叔이 그를 보좌하였다.

小白母,衛女也,有寵於釐公。
소백의 어머니는 나라 출신으로 釐公의 총애를 받았었다.

: 齊襄公의 동생. 공자 소백의 형.
管仲: 管夷吾. 이름은 夷吾이며, 나라의 公子 糾에게 벼슬하여 후에 桓公과 적대관계였으나 환공의 신하 鮑叔의 추천에 따라 환공의 신하로서 재상이 된 후 나라를 춘추시대의 5대 강국 중 제일의 강국으로 만드는 공적을 세웠다. 제환공이 管夷吾를 존대하여 仲父라고 호칭하여 관중이라 불리게 되었다.
召忽: 공자 규의 師傅. 공자 규의 이복동생 혹은 이복형이라고도 한다.
: 보좌하다.
小白: 공자 규의 동생. 후일 제환공이 된다.
鮑叔: 春秋時代 齊나라의 政治家. 管鮑之交라 일컬어지는 친구 管仲을 제나라의 桓公에게 추천하여 桓公의 정치를 도왔다.

小白自少好善大夫高傒。
小白은 어려서부터 대부 高傒와 사이가 좋았다.

及雍林人殺無知,議立君,高、國先陰召小白於莒。
옹림 사람이 無知를 죽이고 군주를 옹립하는 일을 논의하자, 高傒國懿仲이 남보다 앞서 은밀히 에 있는 소백을 불렀다.

魯聞無知死,亦發兵送公子糾,而使管仲別將兵遮莒道,射中小白帶鉤。
노나라도 무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역시 군대를 보내 공자 규를 제나라로 호송하고, 관중에게는 따로 병사를 이끌고 거로 통하는 길을 막게 하니, 관중이 소백에게 활을 쏘았는데 허리띠 쇠고리 만을 맞추었다.

小白詳死,管仲使人馳報魯。
소백은 죽은 척하였고, 관중은 사람을 시켜 급히 (소백이 죽었다고) 노나라에 보고하였다.

魯送糾者行益遲,六日至齊,則小白已入,高傒立之,是為桓公。
규를 호송하던 노나라 군대는 속도를 늦추어 엿새 만에 제나라에 도착해 보니, 소백이 이미 제나라에 들어와 있었고, 고혜가 그를 옹립하니 그가 桓公이다.

高傒: 나라 사람으로 자는 敬仲이다. 卿大夫로 있으면서 명망이 높았다.
기원전686公孫無知 등이 난을 일으켜 齊襄公을 죽이고 군주에 오르자 鮑叔牙와 함께 계획을 세워 亂黨을 제거하고 公子 小白을 옹립하니 그가 齊桓公이다.
: 차단하다.막다.
: 과 통용된다. 가장하다.

 

桓公之中鉤,詳死以誤管仲,已而載溫車中馳行,亦有高、國內應,故得先入立,發兵距魯。
환공(소백)은 허리띠 쇠고리에 화살을 맞고 죽은 척하여 관중을 미혹시켰으며, 그런 후에 溫車를 타고 곧장 내달렸으며, 고혜와 국의중 역시 안에서 호응하였으므로, 제나라에 먼저 들어와 즉위하고 군대를 보내 노나라 군대를 막았다.

秋,與魯戰于乾時,魯兵敗走,齊兵掩絕魯歸道。
가을, 노나라와 乾時에서 싸웠으며, 노나라의 군대가 패하여 달아났고, 제나라의 군대는 노나라의 퇴로를 끊었다.

溫車: 누워서 타는 수레로 운구용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소백이 죽은 척하며 운구용 수레를 탄 것이다.
: 막아내다. 방어하다.

 

齊遺魯書曰:
「子糾兄弟,弗忍誅,請魯自殺之。
召忽、管仲讎也,請得而甘心醢之。
不然,將圍魯。」
제나라는 노나라에 편지를 보내 말하였다.
공자 규는 형제라 내가 차마 못 죽이겠으니 청컨대 노나라에서 알아서 그를 죽이기를 바란다.
소홀과 관중은 원수이니 잡아다 젓갈을 담아야 만족할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노나라를 포위하여 공격할 테다.”

魯人患之,遂殺子糾于笙瀆。
노나라 군주가 근심하여 공자 규를 笙瀆에서 죽였다.

召忽自殺,管仲請囚。
소홀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관중은 죄수가 되기를 청하였다.

桓公之立,發兵攻魯,心欲殺管仲。
환공이 즉위한 다음 군대를 보내 노나라를 칠 때 심중으로 관중을 죽이려 하였다.

(): 肉醬. 죽여서 소금에 절이는 혹형이다.
甘心: 만족해하다. 달가워하다.
召忽自殺管仲請囚: 소홀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나 관중은 함거에 실려 제나라에 돌아가기를 청하였다.

 

鮑叔牙曰:
「臣幸得從君,君竟以立。
君之尊,臣無以增君。
君將治齊,即高傒與叔牙足也。
君且欲霸王,非管夷吾不可。
夷吾所居國國重,不可失也。」
鮑叔牙가 말하였다.
신이 다행히 주군을 따랐더니 주군께서 마침내 즉위하셨습니다.
주군의 존엄함에 저는 더 이상 보탤 것이 없습니다.
주군께서 제나라를 다스리시려면 高傒와 저 叔牙로 충분합니다.
그러나 주군께서 覇王이 되시고자 하면 管夷吾가 아니고는 불가합니다.
이오가 머무르는 나라는 필히 강해질 것이니 그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於是桓公從之。
이에 환공이 그 말을 따랐다.

乃詳為召管仲欲甘心,實欲用之。
그래서 관중을 소환하여 한을 풀겠다고 꾸몄으나, 실은 그를 기용하려 한 것이었다.

管仲知之,故請往。
관중이 이를 알아채고 제나라로 가기를 청한 것이다.

鮑叔牙迎受管仲,及堂阜而脫桎梏,齋祓而見桓公。
포숙아가 관중을 맞이하여 堂阜에 이르자 차꼬와 수갑을 풀어주고 齋戒한 다음 환공을 만나게 하였다.

桓公厚禮以為大夫,任政。
환공은 후한 예를 갖추어 관중을 대부에 임명하고 정치를 맡겼다.

幸得: 다행히~을 얻다
霸王: 제후국의 맹주.
桎梏: 차꼬와 수갑. 즉 속박이라는 뜻. 차꼬는 발에 채우는 형구이며 수갑은 손에 채우는 형구이다.
: 재계하다.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다.
: 푸닥거리하다. 고대 풍속으로 재난을 물리치고 복을 구하는 일종의 제사 의식.

 

桓公既得管仲,與鮑叔、隰朋、高傒修齊國政,連五家之兵,設輕重魚鹽之利,以贍貧窮,祿賢能,齊人皆說。
환공은 관중을 얻고 나자 포숙, 隰朋, 고혜와 함께 제나라의 정치를 고쳐나갔는데, 다섯 가구를 연계하여 군대를 조직하고, 어업과 소금업의 이점을 살려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한편 유능하고 어진 이들을 기용하니 제나라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였다.

隰朋: 제나라의 대부.
連五家之兵: 관중이 제정한 군사제도. 國都를 제어하여 다섯 가구를 라는 조직으로 만들고 에는 그 을 두고, 10궤는 로 만들어 에는 有司를 두고, 4으로 만들고 에 그 을 두고, 10으로 만들고 良人을 두었다.<國語 齊語>
: 구제하다.

 

二年,伐滅郯,郯子奔莒。
환공 2(기원전684), 을 정벌하여 멸망시키자 담의 군주가 로 달아났다.

初,桓公亡時,過郯,郯無禮,故伐之。
당초 환공이 망명 시절 담()을 지날 때 담이 무례했기 때문에 정벌한 것이다.

 

五年,伐魯,魯將師敗。
환공 5(기원전681), 노나라를 정벌하자 노나라의 군대가 패하게 되었다.

魯莊公請獻遂邑以平,桓公許,與魯會柯而盟。
莊公遂邑을 바치며 강화를 청하자 환공이 허락하고 에서 노나라와 회맹하였다.

魯將盟,曹沬以匕首劫桓公於壇上,曰:
「反魯之侵地!」
노 장공이 맹약을 하려는데 曹沬이 비수를 들고 단 위에서 환공을 협박하며 말하였다.
빼앗은 노의 땅을 돌려주시오!”

桓公許之。
환공이 이를 허락하였다.

已而曹沬去匕首,北面就臣位。
그러자 조말은 비수를 버리고 북면하는 신하들의 자리로 돌아가서 섰다.

桓公後悔,欲無與魯地而殺曹沬。
환공이 후회하며 노나라의 땅을 주지 않고 조말을 죽이려 하였다.

魯莊公: 노나라의 제16대 임금이다. 이름은 이다. 장공13(기원전681),제나라의 공격에 노나라가 패했고, 장공은 遂邑을 바쳐 제나라와 화평하였다. 제나라와 노나라는 에서 맹약했는데 曹沫이 단상에서 제환공을 비수로 위협하여 제나라가 빼앗은 노나라의 땅을 돌려주게 하였다. 제환공은 이를 후회하여 나중에 맹약을 배반하고자 했으나, 管仲의 간언으로 맹약을 지켰다.
: 강화하다.
: 지명으로 지금의 河南省 黃縣의 경내에 있었다.
: 제후와 제후가 만나서 맹약을 맺다.
曹沬: 曹劌(조궤),曹翽(조홰)라고도 한다. 춘추시대 大夫로 지략과 의리가 뛰어났다고 하며 魯莊公을 섬긴 장군이다. 노와 인접해 있던 강국 는 번번이 노를 침략했고, 조말은 노의 장군으로 이를 막았으나 세 번이나 패하고 노는 영토를 잃게 되었다.
[史記列傳] 86 刺客列傳<曹沫>

 

管仲曰:
「夫劫許之而倍信殺之,愈一小快耳,而棄信於諸侯,失天下之援,不可。」
관중이 말하였다.
협박 때문에 허락하였더라도 믿음을 저버리고 죽이는 것은 소소한 일에 만족하며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제후들의 믿음을 저버리고 천하의 지지를 잃는 것이니 안 됩니다.”

於是遂與曹沬三敗所亡地於魯。
이에 조말이 세 번 패하여 잃은 땅을 노나라에 돌려주었다.

諸侯聞之,皆信齊而欲附焉。
제후들이 이 소식을 듣고 모두 제나라를 신뢰하며 따르려고 하였다.

七年,諸侯會桓公於甄,而桓公於是始霸焉。
환공 7(기원전679), 제후들과 제환공이 에서 회맹했고, 제환공이 이로써 첫 覇主가 되었다.

: 와 통하여 파기하다. 위배하다.
: 와 통용된다. 즐거워하다.
: 만족하다.

 

十四年,陳厲公子完,號敬仲,來奔齊。
환공 14(기원전672), 陳厲公의 아들 敬仲陳完이 제나라로 도망쳐왔다.

齊桓公欲以為卿,讓;
於是以為工正。
제환공이 그를 으로 임명하려 했으나 그가 사양하므로 이에 工正에 임명하였다.

田成子常之祖也。
그는 田成子 田常의 선조이다.

陳厲公: 춘추시대 진나라의 國君. 이름은 이다. 陳桓公의 동생인데, 일설에는 환공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채에서 아내를 취했는데, 그녀가 음란하였다. 그도 역시 여러 차례 채에 가서 음란한 일에 참여하였다. 당시 태자 면의 동생 세 사람이 蔡女를 유인해 살해하였다. 그녀의 아들 公子 完나라로 달아났다.
陳完: 田完. 敬仲 또는 公子完으로도 불린다. 公子로서 제나라에 망명하여 환공을 섬겨 이 되고, 뒤에 으로 성을 바꾸었다.
田成子: 陳恒. 陳成子또는 田常으로도 불린다. 춘추시대 나라 사람. 田乞의 아들이다. 齊簡公闞止와 함께 左右相을 맡았다.
工正: 국가의 각종 工事·工業을 감독하는 고위 직책.

 

二十三年,山戎伐燕,燕告急於齊。
환공 23(기원전663), 山戎나라를 공격하자 연나라는 제나라에 급히 알려왔다.

齊桓公救燕,遂伐山戎,至于孤竹而還。
제환공이 연나라를 구하러 나서 산융을 정벌하고 孤竹에 이르러 회군하였다.

燕莊公遂送桓公入齊境。
燕莊公이 환공을 전송하다가 제나라의 국경 안으로 들어왔다.

桓公曰:
「非天子,諸侯相送不出境,吾不可以無禮於燕。」
제 환공이 말하였다.
천자가 아닌 제후가 전송함에 국경을 벗어날 수 없으니, 내가 연나라에게 무례하게 대할 수 없소.”

於是分溝割燕君所至與燕,命燕君復修召公之政,納貢于周,如成康之時。
이에 연나라의 군주가 밟은 땅에 도랑을 파서 분할하여 연나라에 떼어주고, 연장공에게 召公의 정치를 다시 가다듬고 成王康王 때처럼 주 왕실에 공물을 바치라고 명하였다.

諸侯聞之,皆從齊。
제후들이 이를 듣고 모두 제나라를 따랐다.

山戎: 北狄. 서융이라고 하며 주로 감숙성 일대에 거주하던 이민족이다.
燕莊公: 춘추시대 나라의 제17대 군주. 연장공 27(기원전664), 山戎이 연나라를 침범하자 연 장공은 齊桓公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제환공이 승낙하여 병사를 거느리고 북상하여 산융을 쳐서 그들을 무찌르고 孤竹國에 이르러 회군하였다. 연장공이 감사를 표시하다가 제나라와 연나라의 국경을 넘어버린 것이었다.
당대에 그것이 무례로 치부되었으나 제환공이 원체 대범한 인물이라 연장공이 넘어간 만큼 연나라에게 떼어 주었다고 한다. 이 지역을 燕留라고 한다. 제환공은 연장공에게 연나라의 시조인 소공 석의 정치를 하게 하고 주 왕실에 조공을 바치게 하였다.
召公: , 이름은 이다. 나라의 정치가로서 戰國七雄의 하나인 始祖이기도 하다. 周公과 함께 의 건국과 안정에 크게 기여하였다.

 

二十七年,魯湣公母曰哀姜,桓公女弟也。
환공 27(기원전659), 魯湣公의 어머니는 哀姜이라고 하는데 제 환공의 여동생이었다.

哀姜淫於魯公子慶父,慶父弒湣公,哀姜欲立慶父,魯人更立釐公。
애강은 魯公子 慶父와 사통하였으며, 경보가 민공을 시해하자 애강은 경보를 군주로 세우려 했으나 노 사람들은 釐公으로 바꾸어 옹립하였다.

桓公召哀姜,殺之。
제환공은 애강을 불러들여 죽였다.

魯涽公: 魯閔公. 춘추시대 노나라의 國君으로 이름은 啓方. 또는 , 이다.
莊公의 아들이고, 장공의 부인 哀姜의 동생 叔姜소생이다. 장공에게는 동생이 셋 있었는데, 첫째가 慶父, 둘째가 叔牙, 막내가 季友였다. 숙부 慶父가 형의 부인인 애강과 사통하였고, 장공이 병이 들어 죽은 후 季友을 세우자 경보가 圉人 ()을 시켜 반을 죽이고 계방을 등극시키니 그가 민공이다. 2년 동안 재위했는데, 경보가 卜齮를 시켜 몰래 죽였다.<사기 세가 권33. 魯周公世家>
哀姜: 齊襄公庶女. 제환공의 여동생. 고모인 문강의 주선으로 문강의 아들 魯莊公에게 시집갔다. 노장공은 어머니 때문에 억지로 아버지 노환공을 죽인 원수의 딸과 혼인한 후 그녀를 멀리했고 그로 인해 노장공의 이복 동생 慶父와 사통하게 되었으며, 경보를 부추겨 장공의 태자 閔公을 죽이게 만든 뒤 경보는 자살하고 그녀도 제나라의 종용으로 자살하였다.
釐公: 魯僖公. 노나라의 제19대 임금이다. 이름은 이다. <사기>에서는 저자의 할아버지의 이름을 피하기 위해 釐公으로 표기하였다.
민공 2(기원전660), 경보가 민공을 시해하자, 계우가 공자 신을 데리고 있다가 국내로 돌아와 신을 魯侯로 즉위시켰다. 노주공세가에서는 희공을 민공의 아우라고 했으나, <춘추좌씨전>에서는 하보불기가 희공의 신주를 민공의 신주 위로 올린 逆祀를 자행하면서 희공을 큰 분, 민공을 작은 분이라고 했고, 두예는 주석을 달면서 희공을 민공의 형이라고 하였다.

 

二十八年,衛文公有狄亂,告急於齊。
환공 28(기원전658), 衛文公에게 난을 당해 제나라에 급함을 알려왔다.

齊率諸侯城楚丘而立衛君。
제나라가 제후들을 이끌고 楚丘에 성을 쌓고 위나라의 군주로 세웠다.

衛文公: 춘추시대 나라의 國君으로 이름은 辟疆인데, 로 고쳤다. 昭伯頑의 아들이고, 戴公의 동생이다. 처음에 나라로 달아났는데, 齊桓公이 위나라가 여러 차례 狄亂을 당한 것을 알고 제후를 이끌고 을 공격하고, 楚丘땅에 성을 쌓아주고 위문공으로 삼았다.
: 北狄. 중국 북부, 몽골에 사는 匈奴, 鮮卑, 契丹, 蒙古등의 非漢族 집단을 가리킨다. 北狄赤狄, 白狄, 長狄 등 여러 집단으로 나뉘었다.

 

二十九年,桓公與夫人蔡姬戲船中。
환공 29(기원전657), 환공과 부인 蔡姬가 배 안에서 장난을 쳤다.

蔡姬習水,蕩公,公懼,止之,不止,出船,怒,歸蔡姬,弗絕。
채희는 물에 익숙하여 배를 흔들자 환공이 겁이 나서 그만두게 하였지만 멈추지 않자, 배에서 내려서 화를 내며 채희를 친정인 채나라로 돌려보내되 혼인관계를 끊지는 않았다.

蔡亦怒,嫁其女。
蔡侯도 화가 나서 채희를 시집보내 버렸다.

桓公聞而怒,興師往伐。
환공이 이를 듣고 노하여 군대를 일으켜 정벌에 나섰다.

蔡姬: 少姬. 제환공에게는 세 명의 정실부인이 있었는데 王姬, 徐姬, 蔡姬로 채희는 채나라 군주의 여동생으로 환공과 물놀이를 나갔다가 장난으로 배를 흔들자 제환공이 이에 노하여 소희를 채나라로 돌려보내자 蔡候가 소희를 개가시켰다.제환공이 이에 앙심을 품고 채나라를 정벌하자 채후는 초나라에 구원을 청하였다.<춘추좌씨전 노희공3>
: 흔들다.
弗絕: 혼인 관계를 끊지 않다.

 

三十年春,齊桓公率諸侯伐蔡,蔡潰。
환공 30년 봄(기원전656), 제환공이 제후들을 거느리고 채나라를 정벌하니 채나라가 대패하였다.

遂伐楚。
이어 초나라를 정벌하였다.

楚成王興師問曰:
「何故涉吾地?」
楚成王이 군사를 일으켜 물었다.
어째서 내 땅에 오셨소?”

管仲對曰:
「昔召康公命我先君太公曰:
『五侯九伯,若實征之,以夾輔周室。』
賜我先君履,東至海,西至河,南至穆陵,北至無棣。
楚貢包茅不入,王祭不具,是以來責。
昭王南征不復,是以來問。」
관중이 대답하였다.
옛날 召康公께서 우리 선군이신 태공께 이르기를,
다섯 등급의 제후와 구주의 우두머리들이 죄과가 있으면 그대가 정벌하여 주 왕실을 도우라라고 하셨다.
또한 우리 선군께서 동쪽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황하, 남쪽으로는 穆陵, 북쪽으로는 無棣에 이르는 땅을 밟게 하셨다.
초나라의 공물인 包茅를 바치지 않아 왕의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 때문에 꾸짖으러 왔다.
昭王이 남방을 정벌하러 가셨다가 돌아오지 못하셨으니 그것도 물으러 왔다.”

楚成王: 초나라의 제20대 군주로 이름은 이다. 초문왕의 차남으로 형인 초 도오가 사냥을 나갔을 때 습격해서 죽이고 자립하였다. 즉위한 초에 안으로는 덕정을 베풀었고 밖으로는 諸侯들과 우호관계를 맺으면서 남쪽으로 국토 1천 리를 개척하였다. 여러 차례 군사를 이끌고 中原으로 가 나라와 패권을 다투었다.
何故涉吾地: 어째서 내 땅에 오셨소?
춘추좌씨전 노희공 4년에 초나라가 제후의 군중으로 사신을 보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군주는 북해에 살고 과인은 남해에 살아 바람난 牛馬도 서로 미칠 수 없는 먼 거리이니, 군주께서 우리의 땅에 오실 줄은 생각지 못하였소.’ (楚子使與師言曰君處北海寡人處南海唯是風馬牛不相及也不虞君之涉吾地也何故)”라고 기록되어 있다. <춘추좌씨전 魯僖公 4(기원전656)>
風馬牛不相及: 소와 말이 바람이 나서 달아나서 암수가 서로 유혹하려 해도 거리가 멀어 미칠 수 없다는 말이니, 제나라와 초나라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 서로 관계가 없다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召康公: 召公. 西周초기 周文王의 서자로 이름은 이다. 주나라의 제후국가인 나라의 시조로, 采邑에 두었기 때문에 소공으로 불린다. 같은 형제인 周公과 함께 어린 成王을 보필하여 주나라 왕조의 기반을 확립시켰다. 시호는 이다.
五侯九伯: 五侯는 다섯 등급의 諸侯. 을 말하며, 九伯九州 각지의 장관
: .
夾輔: 보좌하다.
: 밟다.
貢包茅不入: 관중이 초나라를 정벌하며 주 왕실에 包茅를 바치지 않은 것을 꾸짖은 것이다. 包茅는 초나라의 특산물인 푸른 띠 풀을 말하며 제사용 술을 거를 때 사용한다. <左傳·僖公四年>
昭王南征不復: 周昭王은 남쪽 초나라로 순수를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하고 漢水에서 죽었다. 그의 죽음을 알리지 않았는데 알리기를 꺼렸기 때문이다. <帝王世紀>에는 소왕이 남쪽 원정에 나섰다가 漢水를 건널 때 뱃사람들에 의해 배가 침몰되면서 물에 빠져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史記本紀]04.周本紀

 

 

본기4. 周本紀1(주본기1)

周本紀는 주왕조의 흥망성쇠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며, 주나라는 文王에 이어 아들 武王이 商나라의 紂王을 정벌하여 西安 부근의 鎬京에 세운 나라로 夏나라와 商나라와 더불어 三代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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楚王曰:
「貢之不入,有之,寡人罪也,敢不共乎!
昭王之出不復,君其問之水濱。」
초왕이 말하였다.
공물을 바치지 않은 것은 그런 일이 있었으니 과인의 잘못이니, 감히 바치지 않겠는가!
소왕이 외출하였다가 돌아오지 못한 일은 그대가 漢水 물가에서 물어 보라.”

齊師進次于陘。
제나라의 군대가 진군하여 형()에 이르렀다.

夏,楚王使屈完將兵捍齊,齊師退次召陵。
여름, 초왕이 屈完에게 군대를 거느리고 제나라를 방어하게 했으며, 제군은 召陵으로 물러나서 주둔하였다.

桓公矜屈完以其眾。
환공이 굴완에게 자신의 군사가 많음을 과시하였다.

: 과 통용된다. 공급하다.
君其問之水濱: 昭王때는 漢水가 초나라의 경내가 아니었기 때문에 죄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 이르다. 머무르다.
屈完: 초나라의 장군.
: 막다. 방어하다.

 

屈完曰:
「君以道則可;若不,則楚方城以為城,江、漢以為溝,君安能進乎?」
굴완이 말하였다.
주군께서 이치를 가지고 따진다면 좋지만, 그렇지 않다면 초나라는 方城山을 성으로 삼고 장강과 한수를 해자로 삼을 것이니 군주께서 무슨 수로 진군할 수 있겠습니까?”

乃與屈完盟而去。
이에 제나라는 굴완과 맹약하고 물러났다.

過陳,陳袁濤涂詐齊,令出東方,覺。
나라를 지나는데 진의 袁濤涂가 제나라를 속여 동쪽으로 돌아가게 하려다가 발각되었다.

秋,齊伐陳。
가을, 제나라가 을 토벌하였다.

是歲,晉殺太子申生。
이해에 나라는 태자 申生을 죽였다.

乃與屈完盟而去: 초성왕 16년에 제나라 환공은 군대를 이끌고 초나라를 정벌하여 陘山에 이르렀다. 초성왕은 장군 屈完에게 군사를 이끌고 막게 하고 환공과 맹약을 맺었다. 환공은 초나라가 바쳐야 할 공물을 왕실에 보내지 않았음을 나무랐다. 초나라가 이를 받아들이자 바로 물러났다.<사기 세가 권40. 초세가>
袁濤涂: 나라 원도도는 제나라가 나라와 나라 사이로 행군하면 두 나라가 피해를 볼 것을 염려하여 제나라 군대를 동쪽으로 행군하도록 하였다.
齊伐陳: 가을에 나라를 토벌하였으니, 이는 轅濤塗의 불충을 토벌한 것이다
晉殺太子申生: 나라는 태자 申生을 죽였다.
晉獻公嬖妾驪姬의 참소로 아들인 태자 申生을 죽이고, 또 아들인 重耳夷吾를 외국으로 쫒아냈다.
태자 申生은 아버지가 驪姬를 총애하여 그 소생 奚齊를 후계자로 봉하고 신생을 烹刑에 처하고자 했으나, 도망하지 않고 공경을 다했으며 12戊申日新城에서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춘추좌씨전 魯僖公 4, 기원전656>
驪姬: 春秋時代 晉獻公이다. 원래는 이민족인 驪戎 군주의 딸이지만 헌공이 驪戎을 정벌하였을 때 사로잡혀 동생과 함께 헌공의 後宮이 되었다. 헌공의 총애를 받아 왕비가 된 뒤 태자인 申生을 모함하여 죽이며 정치의 혼란을 가져왔다.자신의 자식인 奚齊를 태자로 삼으려고 태자인 申生을 비롯해 重耳, 夷吾 등을 모함하여 차례로 죽이려 하였다. 결국 태자인 신생은 죽었고 아버지인 晉獻公이 자신의 두 아들인 중이와 이오를 공격하는 상황까지 벌어지면서 나라의 정치는 큰 혼란에 빠졌다.

 

三十五年夏,會諸侯于葵丘。
환공35(기원전651)여름, 제환공과 제후들이 葵丘에서 회맹하였다.

周襄王使宰孔賜桓公文武胙、彤弓矢、大路,命無拜。
周襄王宰孔을 보내서 환공에게 문왕과 무왕께 제사 드린 고기와 붉은 화살과 천자가 타는 수레를 하사하면서 이를 절하지 않고 받게 하였다.

桓公欲許之,管仲曰 「不可」,乃下拜受賜。
환공은 이에 응하려 했으나 관중이 안 됩니다.”라고 해서 이에 절하고 하사품을 받았다.

葵丘: 나라에 있는 땅으로 지금의 河南省 蘭考縣 동쪽 지역이다. 齊桓公이 기원전651년에 규구에서 제후와 회맹하였다.
周襄王: 주나라의 제18대 왕으로 성은 , 이름은 이다. 주혜왕의 아들이다.
宰孔: 太宰 벼슬에 있는 이다.
文武胙: 주양왕이 주나라의 문왕과 무왕의 제사를 지낸 고기. 는 제사 지낸 고기.
彤弓矢: 붉은 화살. 은 붉을’.
大路: 천자가 타는 수레. <禮記> ‘樂記大路는 천자의 수레이고 술 아홉 개를 드리운 용을 그린 깃발은 천자의 깃발이다.[所謂大路者 天子之車也 龍旂九旒 天子之旌也]”라고 하였다.
下拜: 에서 내려가 동쪽 계단과 서쪽 계단 사이에 서서 하사한 것에 감사하여 北面하여 절하는 것을 이른다.

 

秋,復會諸侯於葵丘,益有驕色。
가을, 다시 제후들과 규구에서 회맹했는데 제환공의 교만한 기색이 더욱 심해졌다.

周使宰孔會。
주나라는 宰孔을 회맹에 보냈다.

諸侯頗有叛者。
제후 중 제환공에게 반발하는 자가 제법 되었다.

晉侯病,後,遇宰孔。
晉獻公은 병 때문에 늦게 오다가 재공과 만났다.

宰孔曰:
「齊侯驕矣,弟無行。」
從之。
宰孔이 말하기를
제환공이 교만하니 마음 놓고 가지 마시오.”
라고 하자 이에 따랐다.

是歲,晉獻公卒,裏克殺奚齊、卓子,秦穆公以夫人入公子夷吾為晉君。
이해에 晉獻公이 죽자 대부 里克奚齊卓子를 죽였으며, 秦穆公은 부인 때문에 공자 夷吾나라로 들여보내 군주가 되게 하였다.

桓公於是討晉亂,至高梁,使隰朋立晉君,還。
제환공이 이에 나라의 난을 토벌한다고 나섰는데, 高梁에 이르러 隰朋을 시켜 나라의 군주를 세우게 하고 돌아갔다.

: 와 통하여 마음 놓다. 얼마든지. 허사 참조

 

 

한문의 허사(虛詞) 第

한문의 허사(虛詞) 第 弟 아우 第令~ 일지라도 藉第令 설사~일지라도 第자와 弟는 동음이다. 고대인들은 이 두 개의 글자를 임의로 바꿔 썼다. (다만, 兄弟의 弟는 第자로 쓸 수 없고, 第宅[제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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裏克: 里克. 晉獻公의 책사이자 권신. 무공과 전략에 뛰어나 진헌공 시기에 ·을 정벌하는 데 절대적인 공을 세웠다. 헌공이 죽자 荀息이 여희의 소생인 奚齊를 세웠는데 里克이 해제를 죽였다. 순식이 헌공의 서자인 탁자를 다시 세우자 이극이 에서 또 그를 죽였다. 晉惠公 이오에 의해 賜死되었다.
卓子: 晉獻公庶子, 驪姬의 여동생이 낳았다. 이극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秦穆公: 기원전651, 의 헌공이 죽자 후계 싸움으로 진나라는 혼란 상태가 되었다. 의 공자 夷吾는 진나라 군주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 목공에게 원조를 요청하였다. 목공은 이오의 형 重耳에 대하여 인격적으로 호감이 있었지만, 이오가 나라 공으로 즉위하면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생각하여 이오를 진나라로 보내 晉惠公으로 즉위시켰다.
以夫人: 진목공의 부인 穆姬夷吾의 누나였다. 목희는 춘추시대 秦穆公夫人으로 晉獻公의 딸이다.
夷吾: 晉惠公. 나라의 20대 군주. 여희의 간계로 태자 신생이 자결하고 내란이 발생하자 나라로 피신했다가 里克·呂飴甥 등의 활약으로 여희 일파가 숙청되자 돌아와 제나라의 군주가 된다.

是時周室微,唯齊、楚、秦、晉為彊。
이 당시 주나라 왕실은 쇠약하고, 오직 ,,,4국이 강성하였다.

晉初與會,獻公死,國內亂。
나라는 처음 회맹에 참여했지만 헌공이 죽자 나라 안이 혼란스러웠다.

秦穆公辟遠,不與中國會盟。
秦穆公은 나라가 멀고 외진 곳이라 중원의 회맹에 참석하지 않았다.

楚成王初收荊蠻有之,夷狄自置。
楚成王은 막 荊蠻을 차지하고는 夷狄의 나라로 자처하였다.

唯獨齊為中國會盟,而桓公能宣其德,故諸侯賓會。
오직 제나라 만이 중원의 회맹을 소집했으며, 환공이 그 덕을 널리 떨칠 수 있었기에 제후들이 회맹에 복종하였다.

: 과 같다. 외지다. 구석지다.
中國: 중원지역을 말한다.
荊蠻: 나라의 본래 이름으로 현재의 湖北省이 있는 장강 중류 지역에서 일어난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나라이며, 춘추오패와 전국칠웅 중의 하나였다.
夷狄自置: 이적의 부족이라고 자처하다. 고대 중국에서 이민족의 지배를 포함해 중국 대륙을 지배한 왕조는 자신을 '中國' 또는 '中華'라고 불렀다. 또 중화의 사방에 거주하며 조정에 귀순하지 않는 주변 민족을 '東夷', '西戎', '南蠻', '北狄'이라 불렀고 四夷(혹은 夷狄)이라고 총칭하였다.
: 복종하다.

 

於是桓公稱曰:
「寡人南伐至召陵,望熊山;
北伐山戎、離枝、孤竹;
西伐大夏,涉流沙;
束馬懸車登太行,至卑耳山而還。
諸侯莫違寡人。
寡人兵車之會三,乘車之會六,九合諸侯,一匡天下。
昔三代受命,有何以異於此乎?
吾欲封泰山,禪梁父。」
이에 환공은 이렇게 공언하였다.
과인은 남쪽으로 召陵까지 정벌하여 熊山에 망제를 지내고,
북쪽으로 山戎, 離枝, 孤竹을 정벌했으며,
서쪽으로는 大夏를 정벌해 사막을 건넜고,
말을 단단히 조여 묶고 수레를 메고 太行山에 오르고 卑耳山에 이른 다음 돌아왔다.
과인을 거스르는 제후는 없었다.
과인은 병거를 타고 모인 회합이 세 번이고, 수레를 타고 모인 회합이 여섯 번으로, 모두 아홉 번 제후들과 회맹하여 천하를 한 번에 바로잡았다.
옛날 삼대가 천명을 받은 것이 이것과 어째서 다르겠는가?
나는 泰山梁父山에 올라 封禪의 행사를 하고자 한다.”

管仲固諫,不聽;
乃說桓公以遠方珍怪物至乃得封,桓公乃止。
관중이 한사코 말렸으나 듣지 않으므로, 이에 먼 지방의 진기하고 기이한 물건들이 와야 봉선할 수 있다고 설득하자 환공이 그때서야 중지하였다.

: 공언하다.
山戎: 鮮卑族으로 불리는 중국 북방의 기마민족. 北戎 또는 無終으로도 불린다. 당시 제,,연과 국경을 접하고 있어 서로 자주 전쟁을 벌였다. 서기전663년에 山戎이 연나라를 침략하여 연나라가 구원을 청하자 이때 환공이 구원하러 나섰다가 산융을 평정하였다.
束馬懸車登太行: 束馬는 말의 뱃대끈 따위를 단단히 조여 묶는 것이고, 縣車兵車를 메고 가는 것을 이른다. 이 지역의 산과 협곡들의 길이 험하여 병거를 타지 못하고 군사들이 들거나 메고서 길을 가고 말도 타지 못하고 끌고서 산을 넘어가는 상황을 형용한 말이다.
流沙: 사막. 모래가 늘 흩날리는 사막지대를 말한다.
兵車之會三: 兵車를 대동하고 제후들끼리 모여 맹약한 것이 세 차례였다. 즉 군사행동으로 소집하여 회맹하였음을 말한다.
乘車之會六: 兵車를 대동하지 않고 천자가 내린 命服만 입고서 모인 것을 말한다. 즉 비군사적 외교활동을 말한다.
三代: ,,三代.
封禪: 고대 帝王이 천지에 제사지내던 의례로 泰山의 산정에서 하늘을 제사지내는 것을 이라하고, 부근의 작은 동산인 梁父山에서 땅에 제사지내는 것을 이라 하였다.
乃說桓公: 관중이 환공을 다음과 같이 설득하였다.
고대에 봉선을 거행할 때에는 鄗上에서 나는 기장과 北里의 벼로써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곡물로 삼았으며, 장강과 회수 사이에서 자라는 三脊茅로 신령의 돗자리를 만들었습니다. 동해에서 조공으로 바친 比目魚와 서해에서 조공으로 바친 比翼鳥가 있었고, 또한 요구하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바친 상서로운 물건이 15종이나 되었습니다. 지금은 이러한 상서로운 물건도 없고 봉황과 기린도 내려오지 않았으며 좋은 곡식도 생산되지 않고, 들판에는 쑥과 잡초만 무성하며 올빼미 등 흉조만 祖堂에 출현할 뿐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봉선을 거행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합니다.”<사기 권28. 封禪書>

 

三十八年,周襄王弟帶與戎、翟合謀伐周,齊使管仲平戎於周。
환공 38(기원전648), 周襄王의 이복 동생 子帶, 과 함께 모의하여 주나라를 공격했으며, 제나라는 관중을 보내 융과 주나라가 강화하도록 하였다.

周欲以上卿禮管仲,管仲頓首曰:
「臣陪臣,安敢!」
三讓,乃受下卿禮以見。
주나라가 관중을 上卿의 예로 대우하려 하자 관중은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였다.
신은 제후국의 신하인데 어찌 감히!”
라며 세 번을 사양하고 下卿의 예를 받음으로써 알현하였다.

三十九年,周襄王弟帶來奔齊。
환공39(기원전647),주양왕의 동생 子帶가 제나라로 도망쳐 왔다.

齊使仲孫請王,為帶謝。
제나라는 仲孫을 보내어 주양왕에게 청하기를 子帶가 사죄하게 하였다.

襄王怒,弗聽。
주양왕은 화가 나서 듣지 않았다.

周襄王: 양왕3(기원전649), 자대는 융·적과 함께 양왕을 공격하였다. 양왕은 자대를 주살하려 했지만 자대는 제나라로 도망쳤다. 제환공은 관중을 통해 주나라와 융을 화해시켰고 습붕을 통해 진나라와 융을 화해시켰다.<사기 본기04. 주본기>

 

 

 

본기4. 周本紀2(주본기2)

召公、周公二相行政,號曰「共和」。 召公과 周公 두 재상이 정치를 다스린 것을 라고 불렀다. 共和十四年,厲王死于彘。 공화 14년(기원전 828년), 厲王이 彘에서 죽었다. 太子靜長於召公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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弟帶: 周襄王의 이복동생 子帶. 叔帶 또는 王子帶, 太叔帶로도 불린다. 周惠王少子이다. 食邑이 있어 甘昭公으로도 불린다. 혜왕이 죽은 뒤 태자 이 주양왕이 되었다. 자대는 戎狄과 양왕을 치기로 모의하고 왕성을 공격하였다. 나라와 나라가 와서 구원하자 제나라로 달아났다. 나중에 주나라로 다시 돌아왔다.
上卿: 집정대신으로 천자가 임명한다.禮記》 〈王制
큰 나라의 三卿은 모두 천자가 임명한다.[大國三卿 皆命于天子]”라고 하였다.
관중은 제후가 임명한 下卿의 신분이다.
陪臣: 신하의 신하. 곧 제후의 신하. 제후의 신하인 大夫가 천자를 대할 때 자신을 칭하는 말. <사기 본기04. 주본기>

 

 

본기4. 周本紀2(주본기2)

召公、周公二相行政,號曰「共和」。 召公과 周公 두 재상이 정치를 다스린 것을 라고 불렀다. 共和十四年,厲王死于彘。 공화 14년(기원전 828년), 厲王이 彘에서 죽었다. 太子靜長於召公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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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구하다.

 

四十一年,秦穆公虜晉惠公,復歸之。
환공 41(기원전645), 秦穆公晉惠公을 사로잡았다가 다시 돌려보냈다.

是歲,管仲、隰朋皆卒。
이해에 관중과 습붕이 모두 죽었다.

管仲病,桓公問曰:
「群臣誰可相者?」
관중의 병들자 환공이 물었다.
신하들 중에 누가 재상이 될 만합니까?”

管仲曰:
「知臣莫如君。」
관중이 대답하였다.
신하를 알아보는 데는 군주만한 사람이 없지요.”

公曰:
「易牙如何?」
환공이 물었다.
易牙는 어떻소?”

對曰:
「殺子以適君,非人情,不可。」
관중이 대답하였다.
자식을 죽여 군주의 비위를 맞추었으니 인정에 어긋나 안 됩니다.”

公曰:
「開方如何?」
환공이 물었다.
開方은 어떻습니까?”

對曰:
「倍親以適君,非人情,難近。」
관중이 대답하였다.
부모를 배반하고 군주의 비위를 맞추었으니 인정에 어긋나 가까이하기 어렵습니다.”

公曰:
「豎刀如何?」
환공이 물었다.
豎刀는 어떻습니까?”

對曰:
「自宮以適君,非人情,難親。」
관중이 대답하였다.
궁형을 자청하여 군주의 비위를 맞추었으니 인정에 어긋나 친하기 어렵습니다.”

管仲死,而桓公不用管仲言,卒近用三子,三子專權。
관중이 죽자 환공은 관중의 말을 듣지 않고 끝내 세 사람을 기용하니 세 사람이 권력을 휘두르게 되었다.

隰朋: 제나라의 대부.
易牙: 狄牙. 齊桓公의 음식을 만들던 요리사로, 당대 제일가는 요리 솜씨를 지녔다고 한다. 환공이 늘 새롭고 기이한 음식을 맛보기를 원하자 나중에는 자기 자식을 죽여서 음식을 만들어 바쳤다.
開方: 본래 나라의 공자인데 제환공을 15년간 섬기면서 나라와 나라 사이가 며칠거리임에도 그 어머니를 버려두고 오래 벼슬하며 돌아가지 않았다.
: 등지다. 배반하다.
豎刀: 宦官으로 寺人을 지냈다. 齊桓公의 총애를 받았다. 管仲이 수도의 생각이 정상적이지 않다면서 마땅히 멀리하고 배척하라고 말했지만 환공이 듣지 않았다. 환공과 관중이 公子昭太子로 세웠다. 관중이 죽자 易牙開方 등과 함께 권력을 독차지했고, 다섯 公子가 태자가 되겠다며 다투었다.
: 생식기를 거세하는 형벌.
桓公不用管仲言: 관중이 죽자 환공은 관중이 천거한 濕朋을 쓰지 않고 자신이 신임한 內侍 豎刀를 기용하였다. 그러나 수도는 개방과 역아 등과 공모하여 난을 일으키고 환공을 남문 寢殿 수위의 방에 가두어 굶어 죽게 하였다. 환공의 여러 아들이 환공의 뒤를 이으려고 서로 싸우는 바람에 환공의 시체는 석 달이나 방치되었고 시체에서 생긴 벌레가 문밖까지 기어 나왔다. 환공이 관중의 말을 듣지 않은 결과는 참담하였다.

 

四十二年,戎伐周,周告急於齊,齊令諸侯各發卒戍周。
환공 42(기원전644), 이 주나라를 공격하자 주나라는 제나라에 위급함을 알렸으며, 제나라는 제후들에게 각자 군사를 내서 주왕실을 지키라고 명령하였다.

是歲,晉公子重耳來,桓公妻之。
이해에 나라의 공자 重耳가 제나라에 오자 환공은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重耳: 춘추전국시대 제후국인 晋獻公의 둘째 아들이다. 헌공의 후처로 들어온 驪姬의 계략에 빠져 형인 申生이 사망하고 자신은 진나라를 떠나 적나라로 망명하였다. 헌공이 죽고 마침내 여희의 아들이 왕위에 올랐지만 측근에 의해 살해되고 중이의 동생 夷吾晉惠公에 올랐다. 하지만 重耳는 동생 이오의 견제로 진나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고 자객으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나라로 달아났다. 혜공이 죽자 19년의 긴 망명생활을 마치고 마침내 나라의 도움으로 군사를 이끌고 귀국하여 文公에 올랐다.

 

四十三年。初,齊桓公之夫人三:曰王姬、徐姬、蔡姬,皆無子。
환공 43(기원전643), 당초 제환공의 부인은 셋이니, 王姬, 徐姬, 蔡姬이며 모두 아들이 없었다.

桓公好內,多內寵,如夫人者六人,長衛姬,生無詭;少衛姬,生惠公元;
鄭姬,生孝公昭;葛嬴,生昭公潘;
密姬,生懿公商人;宋華子,生公子雍。
환공은 여색을 밝혀 총애한 첩들이 많아 夫人의 지위에 있는 여자만 여섯이었는데, 長衛姬無詭를 낳았고, 少衛姬惠公元을 낳았다.
鄭姬孝公昭를 낳았고, 葛嬴昭公潘을 낳았다.
蜜姬懿公商人을 낳았고, 宋華子는 공자 을 낳았다.

: 女色.
無詭: 춘추시대 제나라의 제17대 후작으로 <춘추좌씨전>에서는 無虧라고 기록하고 있다. 제환공 43(기원전643) 10월에 제환공이 죽은 후 무궤가 역아와 수조의 추대를 받아 즉위했으며, 이에 반대하는 신하들을 죽였다. 제효공 원년(기원전642) 3, 송양공이 제후들과 함께 공자 를 지원하여 제나라로 쳐들어오자, 제나라 국인들은 두려워하여 장차 를 세우고자 무궤를 죽였다.
惠公元: 齊惠公. 춘추시대 제나라의 제22대 후작으로 이름은 이다. 제환공과 소위희의 아들이다.
孝公昭: 齊孝公. 춘추시대 제나라의 제18대 후작이며, 이름은 이다. 제환공과 정희의 아들이다. 서장자 무궤가 총신 옹무, 수초와 결탁하여 제환공 사후 군신들을 살해하고 스스로 임금이 되었으므로 송나라로 도주하여 송양공에게 원조를 요청하였다. 송양공이 제나라로 쳐들어가자 이에 제나라 사람들이 무궤를 죽이고 소를 군위에 모시려 했으나, 소는 본국에 남은 제환공의 네 공자에게 공격을 받아 송나라로 도망쳐 돌아왔다. 송양공은 다시 원병을 내어 네 공자의 군사를 에서 무찔렀다. 소는 제나라 서울 臨淄로 들어가 제나라 군위에 올랐다.
昭公潘: 齊昭公. 춘추시대 제나라의 제19대 후작이며, 이름은 이다. 제효공 사후, 제환공 생전부터 자신을 세우려 한 공자 개방이 효공의 아들을 죽이고 제후로 세웠다.
懿公商人: 齊懿公. 춘추시대 제나라의 제21대 후작이며, 성은 이고 휘는 商人이다. 제환공과 밀희의 아들이다. 제효공의 뒤를 이은 다른 배다른 형인 제 소공이 기원전612년에 죽고 소공의 아들인 가 군위에 올랐으나, 세력이 외롭고 약하였다. 이에 많은 사람들과 함께 묘상에서 사를 죽이고 제후로 즉위하였다.

 

桓公與管仲屬孝公於宋襄公,以為太子。
齊桓公管仲孝公昭宋襄公에게 부탁하고 태자로 삼았다.

雍巫有寵於衛共姬,因宦者豎刀以厚獻於桓公,亦有寵,桓公許之立無詭。
易牙(雍巫)衛共姬(長衛姬)의 총애를 받고 있었는데, 내시인 豎刀를 통해 제환공에게 많은 예물을 바쳐 환공의 총애도 받았으며, 환공이 무궤를 후계자로 세울 것을 응낙하였다.

管仲卒,五公子皆求立。
관중이 죽자 다섯 공자가 모두 태자가 되려고 다투었다.

冬十月乙亥,齊桓公卒。
그해 겨울 10월 을해일, 제환공이 죽었다.

易牙入,與豎刀因內寵殺群吏,而立公子無詭為君。
역아가 궁중에 들어와서 수도와 궁중의 寵人과 결탁하여 신하들을 죽이고 공자 無詭를 제나라 군주로 세웠다.

太子昭奔宋。
태자인 나라로 달아났다.

宋襄公: 춘추시대 송나라의 國君으로 이름은 玆父이고, 宋桓公의 아들이다. 齊桓公이 죽은 뒤 覇者가 되려고 나라와 다투었다.
: 과 같다. 부탁하다.
雍巫: 易牙의 다른 이름. 狄牙. 齊桓公의 요리사.
: 통하다.

 

桓公病,五公子各樹黨爭立。
환공이 병들자 다섯 공자는 각기 당파를 만들어 태자 책봉을 다투었다.

及桓公卒,遂相攻,以故宮中空,莫敢棺。
환공이 죽음에 마침내 서로를 공격하니, 이 때문에 궁중이 비어 감히 제환공의 시신을 입관할 사람이 없었다.

桓公尸在床上六十七日,尸蟲出于戶。
환공의 시신은 침상에 67일 동안 방치되어 시체에서 구더기가 문밖으로 기어 나왔다.

十二月乙亥,無詭立,乃棺赴。
12월 을해일, 無詭가 즉위하여 곧 시신을 입관하고 죽음을 알렸다.

辛巳夜,斂殯。
신사일 밤, 염을 하고 빈소를 마련하였다.

: 와 같다. 부고하다. 각국에 사망을 알리다.
斂殯: 입관하고 빈소를 마련하다.

 

桓公十有餘子,要其後立者五人:
無詭立三月死,無謚;
次孝公;次昭公;次懿公;次惠公。
환공에게는 10여 명의 아들이 있었고, 군위에 오른 자가 모두 다섯이었다.
무궤는 즉위 석 달 만에 죽어서 諡號가 없었다.
그 다음이 孝公, 그 다음이 昭公, 그 다음이 懿公, 그 다음이 惠公으로 이어졌다.

孝公元年三月,宋襄公率諸侯兵送齊太子昭而伐齊。
효공 원년(기원전642) 3, 宋襄公이 제후의 군대를 이끌고 제나라의 태자 를 돌려보내면서 제나라를 공격하였다.

: 총계.
: 諡號. 帝王이 죽은 뒤에 그의 공덕을 칭송하여 追贈하는 칭호.

 

齊人恐,殺其君無詭。
제나라 사람들이 두려워 군주인 無詭를 죽였다.

齊人將立太子昭,四公子之徒攻太子,太子走宋,宋遂與齊人四公子戰。
제나라 사람들이 태자 를 군주로 세우려 하자 네 공자의 무리가 태자를 공격하므로 태자는 나라로 도망쳤고, 송나라는 제나라의 네 공자의 군대와 싸웠다.

五月,宋敗齊四公子師而立太子昭,是為齊孝公。
5, 송나라가 제나라의 네 공자의 군대를 물리치고 태자 를 옹립하니 그가 孝公이다.

宋以桓公與管仲屬之太子,故來征之。
송나라는 환공과 관중이 태자를 맡겼기 때문에 와서 제나라를 정벌한 것이다.

以亂故,八月乃葬齊桓公。
이 변란 때문에 8월이 되어서야 제환공을 안장할 수 있었다.

 

六年春,齊伐宋,以其不同盟于齊也。
효공 6(기원전637) , 제나라가 송나라를 정벌했는데, 송나라가 제나라의 회맹에 참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夏,宋襄公卒。
여름, 송양공이 죽었다.

七年,晉文公立。
효공7(기원전636), 나라의 文公이 즉위하였다.

晉文公: 성은 이고 이름은 重耳이다. 춘추시대 나라의 22대 군주로 晉獻公의 아들이고, 모친은 狐姬이다. 驪姬의 난으로 국외로 도피하여 19년 동안 망명하였다. 기원전636년에 秦穆公의 지지하에 진나라로 돌아와 晉懷公을 죽이고 군주가 되었다.

 

十年,孝公卒,孝公弟潘因衛公子開方殺孝公子而立潘,是為昭公。
효공 10(기원전633), 효공이 죽자, 효공의 동생 나라의 공자 開方과 함께 효공의 아들을 죽이고 즉위하니 그가 昭公이다.

昭公,桓公子也,其母曰葛嬴。
소공은 제환공의 아들이고, 그의 어머니는 葛嬴이다.

 

昭公元年,晉文公敗楚於城濮,而會諸侯踐土,朝周,天子使晉稱伯。
소공 원년(기원전632), 晉文公城濮에서 초나라를 이기고 踐土에서 제후들과 회맹한 다음 주나라에 조회를 드리니 천자가 진문공을 覇主로 칭하게 하였다.

六年,翟侵齊。
소공 6(기원전627), 이 제나라를 침입하였다.

晉文公卒。
晉文公이 죽었다.

秦兵敗於殽。
나라의 군대가 殽山에서 나라에게 패하였다.

十二年,秦穆公卒。
소공 12(기원전621), 秦穆公이 죽었다.

: 와 통용된다. 제후의 맹주.
: 고대 몽골민족의 北狄의 나라 이름. 춘추시대 지명이 鲜虞이며 후에 中山国이 되었다.
秦穆公: 춘추시대 나라의 제9대 군주. 성은 . 이름은 任好. 德公의 셋째 아들이며 春秋五覇의 한 사람이다.

 

十九年五月,昭公卒,子舍立為齊君。
소공 195(기원전614), 昭公이 죽고 아들 가 제나라 군주가 되었다.

舍之母無寵於昭公,國人莫畏。
의 어머니가 소공에게 총애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제나라 사람들이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昭公之弟商人以桓公死爭立而不得,陰交賢士,附愛百姓,百姓說。
소공의 동생 商人은 환공이 죽고 자리를 다투다가 이루지 못하자, 은밀히 현사들과 사귀고 백성들을 가까이하고 아끼니 백성들이 기뻐하였다.

及昭公卒,子舍立,孤弱,即與眾十月即墓上弒齊君舍,而商人自立,是為懿公。
소공이 죽고 아들 가 즉위했으나 외롭고 나약하였으므로, 商人이 무리와 함께 10월에 소공의 무덤 앞에서 齊君 舍를 시해하고 스스로 군주에 오르니 그가 懿公이다.

懿公,桓公子也,其母曰密姬。
의공은 桓公의 아들이고, 그의 어머니는 蜜姬이다.

商人: 齊懿公. 춘추시대 제나라의 제21대 후작이며, 성은 이고 휘는 商人이다. 제환공과 밀희의 아들이다. 제효공의 뒤를 이은 이복 형인 제소공이 기원전612년에 죽고 소공의 아들인 가 군위에 올랐다. 商人이 무리와 함께 소공의 무덤 앞에서 제나라의 군주 를 시해하고 스스로 군주에 올랐다.

 

懿公四年春,初,懿公為公子時,與丙戎之父獵,爭獲不勝,及即位,斷丙戎父足,而使丙戎仆。
의공 4(기원전609) , 당초 懿公이 공자였을 때 丙戎의 아버지와 사냥을 나갔다가 포획물로 다투다 빼앗지 못한 일이 있었는데, 군주로 즉위하자 병융의 아버지의 발을 자르고 병융을 자신의 마부로 삼았다.

庸職之妻好,公內之宮,使庸職驂乘。
庸職의 처가 예뻤는데, 의공이 그녀를 궁으로 들이고 용직을 驂乘으로 삼았다.

五月,懿公游於申池,二人浴,戲。
5, 의공이 申池에 놀러 나갔을 때 병융과 용직 두 사람이 목욕하면서 농담을 하였다.

職曰:
「斷足子!」
용직이 말하였다.
발 잘린 놈의 아들아!”

戎曰:
「奪妻者!」
병융이 말하였다.
마누라 빼앗긴 놈아!”

二人俱病此言,乃怨。
두 사람이 모두 이 말에 치욕을 느끼며 의공에게 원한을 품었다.

謀與公游竹中,二人弒懿公車上,棄竹中而亡去。
두사람이 모의하여 의공과 대나무 숲으로 놀러 가서 마차 위에서 의공을 시해하고 대나무 숲에 버리고 도망쳤다.

: 포획물. 說苑復恩篇에 유사한 내용이 실려 있다.
: . 마부.
: 과 같다. 거두어들이다.
驂乘: 參乘. 고대에 수레를 탈 때, 지위가 높은 사람은 왼쪽, 마부는 중앙, 모시는 사람은 오른쪽에 타는데, 오른쪽에 타는 이를 參乘이라 한다. 陪乘이라고도 한다.

 

懿公之立,驕,民不附。
의공은 즉위하자 교만하여 백성들이 따르지 않았다.

齊人廢其子而迎公子元於衛,立之,是為惠公。
제나라 사람들이 의공의 아들을 폐하고 나라에서 공자 을 맞아들여 군주로 세우니 그가 惠公이다.

惠公,桓公子也。
혜공은 환공의 아들이다.

其母衛女,曰少衛姬,避齊亂,故在衛。
그의 어머니는 衛公의 딸로 少衛姬라 불렀으며 제나라의 난리를 피해 위나라에 가 있었다.

公子元: 齊惠公. 춘추시대 제나라의 제22대 후작으로 이름은 이다. 제환공과 소위희의 아들이다.

 

惠公二年,長翟來,王子城父攻殺之,埋之於北門。
혜공 2(기원전607), 長翟이 침입했으나 왕자 城父가 쳐서 수령을 죽이고 목을 북문에 묻었다.

晉趙穿弒其君靈公。
나라의 趙穿이 그 국군 靈公을 시해하였다.

長翟: 長狄. 戎狄이라고도 하여, 일반적인 북방 이민족을 통틀어 가리키는 경우도 있다. 춘추시대에는 陝西에서 山西지방에 걸쳐 거주하였으며, 赤狄· 白狄· 長狄 등으로 나뉘어 中原까지 진출하였다
城父: 춘추시대 제나라의 명장. 원래는 나라의 왕자였으므로 王子城甫라고도 한다. 원래 성이 姬姓이니 본명은 姬城父이다. 씨는 齊昭公이 내린 王氏. 管仲과 더불어 齊桓公을 보좌했다
趙穿: 진나라의 대부.
靈公: 晉靈公. 춘추 시대 나라의 임금으로, 휘는 夷皋이다. 진영공 14(기원전607), 영공은 장성했는데, 사치하고 사람을 함부로 죽였다. 屠岸夷의 손자인 屠岸賈를 총애했으며 수도 降城안에 기이한 화초로 꾸민 桃園을 세우고 그곳에서 정사를 봤다. 조돈과 사회가 이를 간하자 영공은 이를 싫어하여 조돈을 암살하려 했으나, 조돈은 겨우 목숨을 건져 달아났다. 조천이 진영공을 습격하여 죽이고 조돈을 맞이하였다.

十年,惠公卒,子頃公無野立。
혜공 10(기원전599), 혜공이 죽고 아들인 頃公 無野가 즉위하였다.

初,崔杼有寵於惠公,惠公卒,高、國畏其偪也,逐之,崔杼奔衛。
당초 崔杼는 혜공의 총애를 받았는데, 혜공이 죽자 ,의 두 일족이 핍박이 두려워 최저를 쫓아냈으며, 최저는 나라로 달아났다.

頃公: 齊頃公. 춘추시대 제나라의 國君으로 이름은 無野이며, 桓公의 손자다. 7년 어머니 蕭同의 삼촌 子耻나라의 사신 郤克이 절름발이인 것을 비웃어 진나라와 원한을 지게 되었다. 10년 제나라가 나라와 나라를 공격하는데 진나라가 와서 구원하여 에서 싸웠는데 대패하였다. 그 결과 노나라와 위나라에게 빼앗은 땅을 모두 반환하였다. 나중에 나라의 苑囿를 개방하고 세금을 경감하며 어려운 백성을 돌보니, 백성들이 기뻐해 귀의했고 제후들도 넘보지 못하였다. 재위 기간은 17년이고, 시호는 이다.
崔杼: 춘추시대 나라 大夫. 崔武子또는 崔子로도 불린다. 靈公나라와 나라 등의 정벌에 공을 세웠다. 자신의 처와 사통한 莊公을 시해하고 景公을 세워 전권을 휘둘렀지만 집안의 불화를 틈탄 慶封에 의해 멸문을 당하였다.
,: 제나라의 세족. , , , 씨의 세력.

 

頃公元年,楚莊王彊,伐陳;
경공 원년(기원전598), 楚莊王이 강성해져 나라를 정벌하였다.

二年,圍鄭,鄭伯降,已復國鄭伯。
경공 2(기원전597), 초장왕이 나라를 포위하여 鄭伯이 투항했으나 얼마 뒤 정나라를 회복시켜 주었다.

楚莊王: 초나라의 22대 군주로 본명은 ,.
기원전605년에는 왕실의 최대 장애였던 若敖氏 세력을 꺾어 왕권을 대폭 강화했고, 이후 내정에 대한 근심이 없으므로 거침없이 영토 확대를 이루면서 중원의 패권을 쟁취하여 초나라를 제, 진에 이은 세 번째 패권 국가로 부상시켰다.
나라와 나라, 송나라 등 오랜 전통을 지닌 나라를 압박했지만 멸망시키지는 않았다. 이 때문에 齊桓公이나 晉文公등과 더불어 五覇로 불린다. 23년 동안 재위했고, 시호는 이다
鄭伯: 鄭襄公. 춘추시대 정나라의 군주로 이름은 이다. 정양공 7(기원전598, 초나라가 또 쳐들어와 정나라의 별도인 약()땅에 미치자, 자량의 주장을 받아들여 초나라와 화친하고 진나라와 함께 초나라에 복종하였다. 그러나 정나라는 진나라에 두 마음을 품고 있었고, 초나라는 정나라를 굴복시키고자 했으나 이때까지 이루지 못하였다. 정양공 8(기원전597), 초나라는 다시 정나라를 포위하였다. 정양공은 석 달간 맞서 싸웠으나 결국 초 장왕에게 항복하였다.

 

六年春,晉使郤克於齊,齊使夫人帷中而觀之。
경공 6(기원전593) , 나라의 사신 卻克이 제나라에 왔으며, 제나라는 경공의 어머니에게 장막 안에서 그를 엿보게 하였다.

郤克上,夫人笑之。
각극이 계단을 올라오는 것을 보고 (각극이 발을 절었으므로) 부인이 웃었다.

郤克曰:
「不是報,不復涉河!」
각극이 말하였다.
이 치욕을 갚지 않고 다시는 황하를 건너오지 않겠다!”

歸,請伐齊,晉侯弗許。
각극이 귀국하여 제나라를 정벌하자고 청했으나 나라의 군주는 허락하지 않았다.

齊使至晉,郤克執齊使者四人河內,殺之。
제나라의 사신이 나라에 오자 각극은 제나라 사신 넷을 河內에서 잡아서 죽였다.

卻克: 郤献子. 성은 , 씨는 , 이름은 이다. 춘추시대 진나라의 정경이었다. 몸이 불구였으나 장군으로 제나라와 땅의 전투에서 제나라를 대패시켰다.
夫人: 제경공의 어머니인 소동숙자. 蕭桐叔의 딸. 제후의 아내를 일컬어 부인이라고 한다.
夫人笑之: 다리를 절면서 계단을 올랐기 때문에 웃은 것이다. <穀梁傳>郤克이 절름발이였기 때문에 제경공이 절름발이를 시켜 그를 맞이하게 하였다.”라고 하였다.<춘추좌씨전 노선공 17(기원전592)>
<晉世家>에서는晉景公 8년에 극극을 제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제나라 頃公의 어머니가 누각 위에서 보고는 웃었다. 그렇게 한 까닭은 극극은 꼽추, 노나라의 사신은 절름발이, 나라의 사신은 애꾸였기 때문이다.”라고 기술하였다.

 

八年。晉伐齊,齊以公子彊質晉,晉兵去。
경공 8(기원전591), 나라가 제나라를 공격하자 제나라는 공자 을 인질로 보내니, 나라 군대가 물러갔다.

十年春,齊伐魯、衛。
경공 10(기원전589) , 제나라가 나라와 나라를 정벌하였다.

魯、衛大夫如晉請師,皆因郤克。
노나라와 위나라 대부들이 나라에 가서 군대를 요청하되 모두 郤克을 통하였다.

晉使郤克以車八百乘為中軍將,士燮將上軍,欒書將下軍,以救魯、衛,伐齊。
진나라는 각극을 전차 8백승의 중군장으로 삼고, 士燮을 상장군, 欒書를 하장군으로 삼아 노나라와 위나라를 구하기 위해 제나라를 공격하였다.

六月壬申,與齊侯兵合靡笄下。
6월 임신일, 진나라 군대가 제나라의 군대와 靡笄山 아래에서 마주쳤다.

癸酉,陳于礱逄丑父為齊頃公右。
계유일에 땅에 진을 쳤으며, 逄丑父가 제경공의 병거 오른쪽을 호위하였다.

頃公曰:
「馳之,破晉軍會食。」
제 경공이 외쳤다.
쳐들어가서 진군을 쳐부수고 밥이나 먹자!”

射傷郤克,流血至履。
화살에 맞아 부상당한 각극은 피가 신발에까지 흘렀다.

克欲還入壁,其御曰:
「我始入,再傷,不敢言疾,恐懼士卒,願子忍之。」
각극이 진영으로 돌아가려 하자 마부가 말하였다.
저는 처음 싸울 때부터 부상을 두 번 당했지만 감히 아프다는 말조차 못했습니다. 병사들이 겁먹을까 두려우니 장군께서는 부디 참으십시오.”

靡笄山: 제나라에 있는 산이름.
: 과 같다. 포진하다.
: . 택리지에 鞍城은 지금의 馬鞍城으로 濟州 平陰縣에 있었다라고 하였다.
逄丑父: 춘추시대 제나라의 대부.
: 車右. 고대 전차를 오른쪽에서 호위하는 무사.
: 진영. 보루.
: 전차의 마부.

 

遂復戰。
이에 다시 싸웠다.

戰,齊急,丑父恐齊侯得,乃易處,頃公為右,車絓於木而止。
전투하다가 제나라가 위급해졌으며, 방추보는 경공이 잡힐까 걱정되어 전차에서 자리를 바꾸어 경공이 오른쪽 자리를 잡았으나, 전차가 나무에 걸려 멈추고 말았다.

晉小將韓厥伏齊侯車前,曰
「寡君使臣救魯、衛」,
戲之。
나라의 소장 韓厥이 경공의 전차 앞에 엎드려서 말하기를
저의 군주께서 신에게 노나라와 위나라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라며 경공을 비웃었다.

丑父使頃公下取飲,因得亡,脫去,入其軍。
방추보가 경공에게 내려서 마실 물을 가져오게 하니, 경공은 도망칠수 있었고 탈주하여 제나라 군대로 돌아갔다.

晉郤克欲殺丑父。
진나라 각극이 방추보를 죽이려 하였다.

丑父曰:
「代君死而見僇,後人臣無忠其君者矣。」
방추보가 말하였다.
군주를 대신하여 죽으려 한 자가 죽임을 당한다면, 훗날 신하된 자로 군주에게 충성할 사람은 없을 터이다.”

克捨之,丑父遂得亡歸齊。
각극이 그를 놓아주었고, 방추보는 도망쳐 제나라로 돌아올 수 있었다.

韓厥: 춘추시대 나라 사람으로 韓獻子 또는 獻子로도 불린다.
의 선조는 와 같은 성인 姬氏이다. 나라에 승리한 공으로 新中軍將이 되었다.
(): 막히다. 걸리다
: 과 통용된다. 죽이다.

 

於是晉軍追齊至馬陵。
이에 진나라의 군대가 제나라 군대를 馬陵까지 추격하였다.

齊侯請以寶器謝,不聽;
必得笑克者蕭桐叔子,令齊東畝。
제경공이 보물을 바치며 사죄하였으나 각극은 받아들이지 않고, 각극을 비웃은 蕭桐叔子를 반드시 내놓을 것과 제나라의 밭 사이로 난 길을 모두 동서 방향으로 내라고 요구하였다.

對曰:
「叔子,齊君母。
齊君母亦猶晉君母,子安置之?
且子以義伐而以暴為後,其可乎?」
제나라가 답하였다.
蕭桐叔子는 제나라 군주의 어머니이다.
제나라 군주의 어머니라면 진나라 군주의 어머니와 같은데 그대들이 그녀를 어찌한단 말인가?
또 그대들은 정의를 내걸고 정벌에 나서서 이렇게 포악하게 굴다니 말이 되는가?”

於是乃許,令反魯、衛之侵地。
이에 각극은 허락하고 제나라가 노나라와 위나라에게서 빼앗은 땅을 돌려주도록 하였다.

東畝: 나라는 제나라의 서쪽에 있었으므로 언제라도 동쪽의 제나라를 쳐들어가기 쉽도록 길을 만들라는 뜻이다.

 

十一年,晉初置六卿,賞鞌之功。
경공 11(기원전588), 나라가 처음으로 六卿을 두었는데 전투에서 세운 공에 대한 상을 주기 위해서였다.

齊頃公朝晉,欲尊王晉景公,晉景公不敢受,乃歸。
제경공이 나라에 조회를 가서 晉景公을 천자의 예절로 알현코자 했으나 진경공이 감당할 수 없다며 받아들이지 않자 제나라로 돌아왔다.

歸而頃公弛苑囿,薄賦斂,振孤問疾,虛積聚以救民,民亦大說。
頃公이 돌아와 사냥터인 苑囿에 대한 금지를 풀고, 세금을 줄이고, 홀아비와 과부를 구제하고 病者를 위문하며, 창고를 털어 백성을 구제하니 백성들도 매우 기뻐하였다.

厚禮諸侯。
제후들에게도 후한 예로 대하였다.

竟頃公卒,百姓附,諸侯不犯。
경공이 죽을 때까지 백성들이 따랐고 제후들도 제나라를 침범하지 않았다.

尊王: 천자에 대한 예절로 조정에 알현하다.
: 해제하다.
苑囿: 고대에 왕후나 귀족이 수렵을 통해 를 단련하기 위하여 넓은 지역 주위에 울타리를 치고 새나 짐승을 서식시키는 장소로 황제의 사냥터로 활용되었던 곳.
: 꺼내다.

 

十七年,頃公卒,子靈公環立。
경공 17(기원전582), 경공이 죽고 아들 靈公 環이 즉위하였다.

靈公: 齊靈公. 춘추시대 제나라의 國君으로 이름은 이며 頃公의 아들이다. 영공 28戎姬의 부탁으로 태자 을 폐하고 공자 를 대신 세웠다. 대부 崔杼가 영공의 질병을 틈타 광을 맞이해 즉위시키니 바로 齊莊公이다. 얼마 뒤 영공은 병사하였다. 재위 기간은 28년이고, 시호는 이다.

 

靈公九年,晉欒書弒其君厲公。
영공 9(기원전573), 나라의 대부 欒書가 국군 厲公을 시해하였다.

十年,晉悼公伐齊,齊令公子光質晉。
영공 10(기원전572), 晉悼公이 제나라를 공격하자 영공은 공자 나라에 인질로 보냈다.

十九年,立子光為太子,高厚傅之,令會諸侯盟於鐘離。
영공 19(기원전563), 공자 광을 태자로 삼고 高厚로 하여금 그를 보좌하여 제후들과 鍾離에서 회맹하게 하였다.

二十七年,晉使中行獻子伐齊。
영공 27(기원전555), 나라가 中行獻子에게 제나라를 정벌하게 하였다.

齊師敗,靈公走入臨菑。
제나라 군대가 패하자 영공은 臨菑로 달아났다.

晏嬰止靈公,靈公弗從。
晏嬰이 영공을 제지하였으나 영공은 듣지 않았다.

曰:
「君亦無勇矣!」
안영이 말하기를
주군께서는 용기가 없으십니다!”
라고 하였다.

晉兵遂圍臨菑,臨菑城守不敢出,晉焚郭中而去。
진나라 군대가 임치를 포위했고, 제나라는 임치성을 지키며 감히 나오지 못하니, 진나라가 성 밖의 고을을 불태우고 돌아갔다.

厲公: 晉厲公. 춘추시대 진나라의 國君으로 이름은 壽曼이고, 晉景公의 아들이다. 欒書中行偃에게 살해당하였다. 8년 동안 재위하였다.
欒書: 春秋시대 나라의 大夫. 그의 아들 欒黶范宣子의 딸 欒祁에게 聚妻하였는데, 난염이 죽은 뒤 난기가 淫行이 있어 財貨를 탕진하였다. 欒盈이 어미의 음행을 걱정하자 난기가 두려워하여 범선자에게 아들 이 범씨 范氏一家를 원망한다.”라고 무고하므로, 난영이 초나라를 거쳐 제나라로 도망갔다가 몰래 나라에 들어와 曲沃땅에서 戰敗하여 滅族의 화를 당하였다.
郭中: 외성과 내성 사이. 은 성 외곽.
高厚: 성은 이며 씨는 高氏. 춘추시대 제나라의 대부. 제나라 상경이었던 高傒의 후손.
中行獻子: 춘추시대 나라 大夫 荀偃이다. 中行, 獻子는 시호이고, 荀林父의 손자이다. 厲公上軍佐가 되어 欒西와 함께 厲公을 시해하고 悼公을 세워 中軍將이 되었다.
晏嬰: 晏子. 춘추시대 의 명재상으로 자는 , 시호는 이다. 나라 靈公,莊公,景公 3대를 섬긴 재상으로서 절약 검소하고 군주에게 기탄없이 간언한 것으로 유명하였다.<사기 권62,管晏列傳>

 

二十八年,初,靈公取魯女,生子光,以為太子。
영공 28(기원전554), 당초 영공은 노나라의 여자와 혼인하여 광을 낳아 태자로 삼았다.

仲姬,戎姬。
仲姬戎姬를 더 두었다.

戎姬嬖,仲姬生子牙,屬之戎姬。
융희가 총애를 받았고, 중희가 아들 를 낳아 융희에게 맡겼다.

戎姬請以為太子,公許之。
융희가 를 태자로 삼자고 청하자 영공이 이를 허락하였다.

仲姬曰:
「不可。
光之立,列於諸侯矣,今無故廢之,君必悔之。」
중희가 말하였다.
안 됩니다.
광이 태자가 되어 제후의 반열에 섰는데 지금 까닭 없이 그를 폐한다면 주군께서는 틀림없이 후회하실 겁니다.”

公曰:
「在我耳。」
영공이 말하였다.
내가 결정하면 그만이다.”

遂東太子光,使高厚傅牙為太子。
마침내 태자 광을 제나라 동쪽으로 보내고 高厚에게 를 보좌하게 하여 태자로 삼았다.

仲姬戎姬: 제 영공의 姬妾.
: 총애하다.

 

靈公疾,崔杼迎故太子光而立之,是為莊公。
영공이 병들자 崔杼가 원래의 태자 광을 맞이해 군주로 세우니 그가 莊公이다.

莊公殺戎姬。
장공은 융희를 죽였다.

五月壬辰,靈公卒,莊公即位,執太子牙於句竇之丘,殺之。
5월 임진일, 영공이 죽고 장공이 즉위하여 태자 句竇라는 언덕에서 잡아서 죽였다.

八月,崔杼殺高厚。
8, 최저가 고후를 죽였다.

晉聞齊亂,伐齊,至高唐。
나라는 제나라의 내란 소식을 듣고 정벌에 나서 高唐에 이르렀다.

莊公: 춘추시대 제나라의 國君으로 이름은 이며 靈公의 아들이다. 영공이 먼저 광으로 태자를 세웠다가 나중에 폐하고 仲姬의 아들 를 태자로 삼았다. 영공이 병으로 죽기 직전 大夫 崔杼가 광을 맞아 즉위하니 바로 장공이다. 3晉大夫 欒盈나라에서 제나라로 달아났는데 그를 후대하려고 하였다. 晏嬰이 막으려고 했지만 듣지 않고 반대로 난영을 시켜 내응하여 진나라를 습격하도록 했지만 실패하였다. 6년 최저의 아내와 사통하다 그에게 살해당하였다. 6년 동안 재위했고, 시호는 이다.

 

莊公三年,晉大夫欒盈奔齊,莊公厚客待之。
장공 3(기원전551), 나라의 대부 欒盈이 제나라로 도망쳐 오자 장공은 그를 후하게 객으로 대접하였다.

晏嬰、田文子諫,公弗聽。
晏嬰田文子가 간언하여 말렸으나 장공은 듣지 않았다.

四年,齊莊公使欒盈閒入晉曲沃為內應,以兵隨之,上太行,入孟門。
장공 4(기원전550), 제장공이 난영을 비밀리에 나라의 曲沃으로 침투시켜 내응하게 하면서, 군대를 딸려 보내 太行山에 올라 孟門의 관문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欒盈敗,齊兵還,取朝歌。
난영은 패했고 제나라의 군대는 돌아오면서 朝歌城을 빼앗았다.

莊公: 齊莊公. 춘추시대 나라의 제25대 후작이며 이름은 이다. 장공은 崔杼의 후처 당강과 정을 통했으며 이로 인해 최저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欒盈: 나라 大夫. 죄를 얻어 초나라로 망명했다가 초나라에서 제나라로 망명하였다.
閒入: 비밀리 진입하다.
朝歌: 나라의 읍.

 

六年,初,棠公妻好,棠公死,崔杼取之。
장공 6(기원전548), 당초 대부 棠公의 아내가 아름다웠는데 당공이 죽자 崔杼가 그녀를 아내로 맞았다.

莊公通之,數如崔氏,以崔杼之冠賜人。
장공이 그녀와 사통하러 자주 최저의 집에 갔고 최저의 모자()를 다른 사람에게 주기도 하였다.

待者曰:
「不可。」
장공의 시종이 말하였다.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崔杼怒,因其伐晉,欲與晉合謀襲齊而不得閒。
최저가 노하여 경공이 나라를 정벌할 때 진나라와 함께 제나라를 습격하려 했으나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莊公嘗笞宦者賈舉,賈舉復侍,為崔杼閒公以報怨。
장공이 일찍이 환관 賈擧에게 笞刑을 준 적이 있었는데, 가거가 다시 장공의 내시가 되어 최저를 위해 기회를 엿보면서 장공에게 원한을 갚고자 하였다.

棠公: 나라 棠邑大夫.
: 와 같다. 아내를 맞다.
: 가다.
: . 기회.

 

五月,莒子朝齊,齊以甲戌饗之。
5, 나라 군주가 제나라에 조회를 드리러 오자 제나라는 갑술일에 연회를 열어 莒君을 초청하였다.

崔杼稱病不視事。
최저는 병을 핑계로 정무를 보지 않았다.

乙亥,公問崔杼病,遂從崔杼妻。
을해일에 장공이 최저를 문병한 뒤 곧 최저의 아내를 찾아갔다.

崔杼妻入室,與崔杼自閉戶不出,公擁柱而歌。
최저의 아내는 방으로 들어가 최저와 함께 문을 잠그고 나오지 않자,장공이 기둥을 안고 노래를 불렀다.

宦者賈舉遮公從官而入,閉門,崔杼之徒持兵從中起。
환관 가거는 장공의 수행원들을 막고 들어가 문을 잠갔으며, 최저의 무리들이 무기를 들고 안에서 뛰쳐나왔다.

公登臺而請解,不許;
請盟,不許;
請自殺於廟,不許。
장공이 위로 올라가 화해를 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맹세를 하겠다고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종묘에서 자살하겠다고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皆曰:
「君之臣杼疾病,不能聽命。
近於公宮。
陪臣爭趣有淫者,不知二命。」
모두가 말하였다.
군주의 신하인 최저는 병이 위독하여 명을 받들 수 없습니다.
여기는 군주의 궁궐과 가깝기 때문에 최저의 신하인 저희들이 음탕한 자를 붙잡으려 할 뿐 다른 명령은 알지 못합니다.”

公踰墻,射中公股,公反墜,遂弒之。
장공이 담을 넘는데 활을 쏘아 허벅지를 맞추니, 장공이 담 안으로 떨어졌고 이어 시해하였다.

晏嬰立崔杼門外,曰:
「君為社稷死則死之,為社稷亡則亡之。
若為己死己亡,非其私暱,誰敢任之!」
안영이 최저의 집 대문 밖에 서서 말하였다.
군주가 사직을 위해 죽으면 신하는 그를 위해 죽고, 군주가 사직을 위해 도망가면 그를 위해 도망가는 법이다.
만약 군주가 자신을 위해 죽거나 도망치는 것이라면 그가 사사로이 총애하는 사람이 아니면 누가 그 일을 감당한단 말인가!”

門開而入,枕公尸而哭,三踴而出。
문이 열리자 들어가서 장공의 시신을 자신의 다리에 받쳐서 곡하고 세 번 발을 구르고 나왔다.

人謂崔杼:
「必殺之。」
어떤 자가 최저에게 말하였다.
반드시 안영을 죽여야 합니다.”

崔杼曰:
「民之望也,捨之得民。」
최저가 말하였다.
백성들이 신망하는 사람이니, 그냥 놓아두어야 민심을 얻을 수 있다.”

爭趣: 앞다투어 쫓다.
陪臣: 제후의 신하가 天子에 대해 자신을 일컫는 말이다. 매복했던 군사들은 崔杼의 가신이었으므로 제장공에게 자신들을 陪臣이라 칭한 것이다.
私䁥(사닐): 친애하는 사람. 친애하는 사람이 아니고는 그 堪當할 자가 없다는 말이다.
枕公尸: 제장공의 머리 밑에 자기의 다리를 받쳐 베게 한 것이다.
: 哭踊. 장례시 곡을 하고 발을 구르는 애통함을 표시하는 예절. <禮記·喪大記> 장공이 최저에게 죽임을 당하자 안자는 최저의 집에 가 장공의 시체 앞에서 곡하고서 곡을 마친 후 세 번 발을 구르고 나왔다. <춘추좌씨전·魯襄公 25(기원전548)>

 

丁丑,崔杼立莊公異母弟杵臼,是為景公。
정축일, 최저가 장공의 이복동생 杵臼를 옹립하니 그가 景公이다.

景公母,魯叔孫宣伯女也。
경공의 어머니는 노나라의 대부 叔孫宣伯의 딸이다.

景公立,以崔杼為右相,慶封為左相。
경공은 즉위하여 최저를 右相, 慶封左相에 임명하였다.

二相恐亂起,乃與國人盟曰:
「不與崔慶者死!」
두 재상은 난이 일어날까 두려워 國人에게 맹세하게 하였다.
崔氏慶氏를 따르지 않는 자는 죽는다!”

景公: 齊景公. 춘추시대 제나라의 국군. 姜杵臼은 시호이다. 齊莊公의 이복동생으로 장공을 살해한 대부 崔杼에 의해 옹립되었다. 궁실을 짓고 사냥개와 말을 모으기를 좋아하였으며 세금과 형벌을 무겁게 하며 사치가 끝이 없었다. 재위 기간 동안 제나라의 公室이 쇠퇴하고 田氏의 세력이 대두하였다.
叔孫宣伯: 나라 叔孫僑如. 魯成公 16년에 제나라로 도망하여 왔다. 叔孫宣伯이 제나라에 있을 때 叔孫還宣伯의 딸을 齊靈公에게 바쳤는데, 靈公의 총애를 입어 景公을 낳았다.
國人: , 大夫 등의 士大夫를 가리키는 말이다.

 

晏子仰天曰:
「嬰所不唯忠於君利社稷者是從!」
不肯盟。
안영이 하늘을 우러러보며 말하기를,
이 안영이 군주에 충성하고 사직을 이롭게 하는 자를 따르지 않는 사람이겠는가!”라며 맹세를 거부하였다.

慶封欲殺晏子,崔杼曰:
「忠臣也,捨之。」
경봉이 안영을 죽이려 하자 최저가 말하였다.
충신이니 놓아줍시다.”

齊太史書曰
「崔杼弒莊公」,
崔杼殺之。
제나라의 太史
최저가 장공을 시해하였다.”
라고 기록하자 최저가 그를 죽였다.

其弟復書,崔杼復殺之。
그의 동생이 다시 그렇게 쓰자 최저가 그도 죽였다.

少弟復書,崔杼乃捨之。
막내 동생이 다시 그렇게 쓰자 최저가 그를 놓아두었다.

嬰所不唯忠於君利社稷者是從: 와 함께 사용되어 목적어 忠於君利社稷者를 도치시킨다. = 唯從忠於君利社稷者(오직 忠於君利社稷者를 따른다)
허사 참조

 

 

한문의 허사(虛詞) 是

한문의 허사(虛詞) 是 是以 이 때문에 是用 이로 인해 是故 이런 까닭으로 由是 때문에 是는 현대 중국어에서도 많이 사용되고 있는 連繫性動詞로 쓰인다. 고대인들은 연계성동사를 거의 생략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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景公元年,初,崔杼生子成及彊,其母死,取東郭女,生明。
경공 원년(기원전547), 당초에 최저는 아들 崔成崔彊을 낳았으며, 그들의 어머니가 죽자 東郭女를 아내로 맞아 崔明을 낳았다.

東郭女使其前夫子無咎與其弟偃相崔氏。
동곽녀는 전남편의 아들 棠無咎와 그녀의 여동생 東郭偃으로 하여금 최씨 집안의 가신이 되게 하였다.

成有罪,二相急治之,立明為太子。
최성이 죄를 짓자 두 가신은 서둘러 그 죄를 다스리고 최명을 후계자로 세웠다.

成請老於崔[杼],崔杼許之,二相弗聽,曰:
「崔,宗邑,不可。」
최성이 崔邑에서 늙기를 청하자 최저는 그것을 허락했으나 두 가신이 이를 수용하지 않으면서 말하였다.
최읍은 최씨 종묘가 있는 읍이라 안 됩니다.”

宗邑: 종묘가 있는 封邑.
東郭女: 棠姜. 東郭姜으로도 불린다. 東郭偃의 언니이다. 棠公과 결혼했는데, 미색을 갖추었다. 당공이 죽자 崔杼가 문상을 왔는데, 그녀를 보고는 동곽언과 일을 꾸며 아내로 얻었다. 나중에 齊莊公私通하였다. 어느 날 장공이 최저의 집에 왔다가 최저의 화살에 맞아 살해당하였다. 大夫 慶封이 최씨들을 멸족시켰을 때 그녀도 자살하였다.

 

成、彊怒,告慶封。
최성과 최강이 화가 나서 慶封에게 이 일을 알렸다.

慶封與崔杼有郤,欲其敗也。
경봉은 최저와 사이가 벌어진 터라 최저를 망하게 하려고 하였다.

成、彊殺無咎、偃於崔杼家,家皆奔亡。
최성과 최강이 당무구와 동곽언을 최저의 집에서 죽이니 집안사람들이 모두 도망쳤다.

崔杼怒,無人,使一宦者御,見慶封。
최저는 화가 났으나 사람이 없어 환관 하나에게 수레를 몰게 하고 경봉을 만났다.

慶封曰:
「請為子誅之。」
경봉이 말하였다.
그대를 위해서 그자들을 죽이겠소!”

使崔杼仇盧蒲嫳攻崔氏,殺成、彊,盡滅崔氏,崔杼婦自殺。
최저의 원수 盧蒲嫳에게 최씨 집을 치게 하여 최성과 최강을 죽이고,최씨 사람들을 모조리 죽이니 최저의 부인은 자살하였다.

崔杼毋歸,亦自殺。
최저도 갈 곳이 없어 자살하였다.

慶封為相國,專權。
경봉은 相國이 되어 권력을 멋대로 휘둘렀다.

: 과 통용된다. 사이가 나빠지다.
慶封: 제나라의 간신. 崔杼와 공모하여 齊莊公을 시해한 후 左相이 되어 국정을 농단하였다. 장공 시해 후 2년 만에 최저의 전처 아들들인 , 과 후처 棠姜소생의 宗主 지위와 領邑 승계 문제를 놓고 분란을 일으키자,이 틈을 이용해 최저 가문을 멸망시키는 간악한 행위를 저질렀다. 기원전545년에 경봉 일파의 전횡과 황음무도함에 불만을 품은 대부 高蠆欒竈盧蒲嫳, 盧蒲癸형제 및 王何가 공모해 慶氏 일족을 멸문하고 재산을 몰수하였다.

 

三年十月,慶封出獵。
경공 3(기원전545) 10, 경봉이 사냥을 나갔다.

初,慶封已殺崔杼,益驕,嗜酒好獵,不聽政令。
당초 경봉이 최저를 죽이고 더욱 교만해져서 술과 사냥을 즐기며 국정을 돌보지 않았다.

慶舍用政,已有內郤。
아들 慶舍가 정권을 잡았지만 이미 안에서 틈이 벌어지고 있었다.

田文子謂桓子曰:
「亂將作。」
田文子가 아들 田桓子에게 난리가 곧 일어날 터이다.”라고 하였다.

田、鮑、高、欒氏相與謀慶氏。
田氏, 鮑氏, 高氏, 欒氏가 함께 慶氏를 없애자고 도모하였다.

慶舍: 慶封의 아들. 慶封이 사냥을 좋아하고 술을 즐겨 아들 慶舍에게 국정을 맡기고, 자신의 妻妾과 보물을 盧蒲嫳의 집으로 옮겨 놓고서 그곳에 거처하며 노포별과 서로 처첩을 바꾸어 끼고서 술을 마시며 즐기니, 며칠 뒤에는 나라의 조정이 옮겨 갈 정도였다.
: 처리하다.
田桓子: 田文子의 아들 無宇.

 

慶舍發甲圍慶封宮,四家徒共擊破之。
慶舍가 군사를 동원해 경봉의 궁을 둘러싸 호위하자 네 집안의 무리들이 함께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慶封還,不得入,奔魯。
경봉이 돌아오다가 들어가지 못하고 노나라로 달아났다.

齊人讓魯,封奔吳。
제나라 사람들이 노나라를 나무라자 경봉은 나라로 달아났다.

吳與之朱方,聚其族而居之,富於在齊。
오나라는 朱方의 땅을 그에게 주고 가족을 데려와 살게 하니 제나라에 있을 때보다 더 부유해졌다.

其秋,齊人徙葬莊公,僇崔杼尸於市以說眾。
그해 가을, 제나라 사람들은 제장공을 이장하고 최저의 시신을 목 베어 저잣거리에 내놓아 사람들의 분노를 달랬다.

吳與之朱方: 경봉은 나라로 도망했다가 다시 나라로 도망하여 오나라 군주 句餘에게서 朱方땅을 분봉받고 정착하였다.
: 달래다.

九年,景公使晏嬰之晉,與叔向私語曰:
「齊政卒歸田氏。
田氏雖無大德,以公權私,有德於民,民愛之。」
경공 9(기원전539), 경공이 안영을 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는데,안영이 叔向에게 사사로이 말하였다.
제나라의 정권은 결국 田氏에게 돌아갈 것이오.
전씨에게 비록 큰 공덕은 없지만 공권력을 사사로이 행사하여 백성에게 덕을 베푸니 백성들이 그를 받들고 있습니다.”

十二年,景公如晉,見平公,欲與伐燕。
경공12(기원전536), 경공이 나라에 가서 平公을 만났는데, 함께 나라를 정벌하고 싶어서였다.

叔向: 춘추시대 의 정치가이다. 晉平公의 사부로서 박학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辭令에 밝았다. 子産, 晏嬰과 더불어 춘추시대의 명현으로 손꼽힌다.
平公: 晉平公. 춘추시대 나라의 國君. 이름은 이고 悼公의 아들이다. 3년 제후의 군대를 이끌고 나라를 구하기 위해 나라를 공격하여 수도를 포위하였다. 다음 해 제후들과 督揚에서 모여 대국이 소국을 침범하지 않는다는 조약을 맺었다.

 

十八年,公復如晉,見昭公。
경공1 8(기원전530), 제경공이 다시 나라에 가서 晉昭公을 만났다.

二十六年,獵魯郊,因入魯,與晏嬰俱問魯禮。
경공 26(기원전522), 경공이 노나라 교외로 사냥을 나갔다가 이어서 노나라에 들어가 안영과 함께 노나라의 예법에 대해 물었다.

三十一年,魯昭公辟季氏難,奔齊。
경공 31(기원전517), 魯昭公季氏의 반란을 피해 제나라로 도망쳐 왔다.

齊欲以千社封之,子家止昭公,昭公乃請齊伐魯,取鄆以居昭公。
제나라가 그에게 25천호에 해당하는 1로 봉하려 하자 子家가 소공을 말렸으나, 노소공은 제나라에게 노나라를 정벌해달라고 청했고, 제나라는 노나라의 鄆邑을 빼앗아 노소공을 그곳에 살게 하였다.

昭公: 晉昭公. 춘추시대 진나라의 國君. 이름은 이고 平公의 아들이다. 재위하는 중에 진나라의 六卿, 中行智氏 등이 강해지고 公室은 약화되었다. 6년 동안 재위하였다.
魯昭公: 춘추시대 노나라의 國君. 이름은 또는 , 이고, 襄公庶子이다. 노소공 25(기원전517), 계평자가 후소백과 닭싸움을 시켰는데, 계평자는 닭머리에 투구를 씌우고, 후소백은 금속 발톱을 달았다. 계평자는 크게 노해 후소백의 영역에 침범하자 후소백은 이에 원망을 품었다. 후소백의 아우 회가 후씨를 모함하고 계씨의 집에 숨었다. 이에 후소백은 계씨의 가신을 감금하니 계평자도 후소백의 가신을 가두었고 이에 후씨는 노소공에게 그것을 보고하였다. 이에 크게 노한 노소공은 계씨를 쳤다. 그러나 숙손씨가 그것을 알리는 바람에, 노소공은 패해 제나라로 망명을 떠났다. 그리고 계씨는 후소백을 죽였다.
: 와 같다.
: 25가 중심이 되어 토지신에게 제사지내는 곳이 1이다.
子家: 東門子家. 노장공의 아들인 동문양중 동문수의 자손. 동문양중의 아들인 동문귀보가 계씨 집안과 대적한 뒤 패배하여 제나라로 도망간 이후 자가씨로 개칭하였다.

 

三十二年,彗星見。
경공 32(기원전516), 혜성이 나타났다.

景公坐柏寢,嘆曰:
「堂堂!誰有此乎?」
경공이 柏寢臺에 앉아 있다가 탄식하며 말하였다.
당당하구나!
장차 누가 이 누대를 차지하려는가?”

群臣皆泣,晏子笑,公怒。
신하들이 모두 흐느껴 우는데 안영이 웃자 경공이 화를 냈다.

晏子曰:
「臣笑群臣諛甚。」
안영이 말하였다.
신은 신하들의 아첨이 하도 심해서 웃었을 뿐입니다.”

景公曰:
「彗星出東北,當齊分野,寡人以為憂。」
경공이 말하였다.
혜성이 동북방 하늘에 나타나니 우리 제나라 영역이라 과인이 이를 걱정하였을 뿐이오.”

彗星見: 과 같다. 옛 사람들은 혜성이 출현하면 불길한 징조로 인식하였다.
柏寝: 제경공 때 신축한 .
堂堂: 당당하다. 화려하고 훌륭하다.
分野: 고대에 중국을 중심으로 한 地上의 영역을 하늘의 二十八宿에 배당하여 나눈 칭호로 천문학에서 쓰는 용어이다.

 

晏子曰:
「君高臺深池,賦斂如弗得,刑罰恐弗勝,茀星將出,彗星何懼乎?」
안영이 말하였다.
국군께서는 누대를 높이 지으시고 연못을 깊이 파시면서 세금을 거두지 못하지는 않을까, 백성들이 형벌을 무서워하지 않을까 걱정하시니, 장차 茀星도 나타날 텐데 혜성 따위를 두려워하십니까?”

公曰:
「可禳否?」
경공이 물었다.
재앙을 쫓는 제사로 막을 수 있겠소?”

晏子曰:
「使神可祝而來,亦可禳而去也。
百姓苦怨以萬數,而君令一人禳之,安能勝眾口乎?」
안영이 대답하였다.
기도를 드리면 귀신을 부를 수 있고, 제사로 재앙을 없앨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백성의 고통과 원망은 만 가지가 넘으니 군주 한 사람의 기도로 없애려 해봤자 수많은 입들의 원성을 어찌 이겨낼 수 있겠습니까?”

是時景公好治宮室,聚狗馬,奢侈,厚賦重刑,故晏子以此諫之。
당시 경공은 궁실을 즐겨 짓고 사냥개와 말을 많이 기르며 사치스럽게 생활하였고, 무거운 세금과 가혹한 형벌을 즐겨 했기 때문에 안영이 이 일로 간한 것이었다.

: 茀星. 孛星이라고도 한다. 혜성. 불길함을 상징한다.
: 액막이. 재앙을 쫓는 제사.

 

四十二年,吳王闔閭伐楚,入郢。
경공 42(기원전506), 吳王 闔廬나라를 侵伐하여 초나라의 도읍 으로 들어갔다.

 

四十七年,魯陽虎攻其君,不勝,奔齊,請齊伐魯。
경공 47(기원전501), 노나라의 陽虎가 그 군주를 공격하다가 실패하자 제나라로 도망쳐 와서 노나라를 정벌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鮑子諫景公,乃囚陽虎。
鮑子가 경공에게 간하여 양호를 구금하였다.

陽虎得亡,奔晉。
양호가 도망쳐 나라로 달아났다.

陽虎: 춘추시대 말기 나라 사람. 자는 고 얼굴이 孔子와 닮았다고 한다.
季氏家臣으로 季平子를 섬겼다. 계평자가 죽자 권력을 장악하였다. 일찍 季桓子를 잡아 강제로 동맹을 맺게 하였다. 魯定公 8년에 三桓을 제거하고 삼환의 嫡子들을 모두 죽이려다가 실패하고 陽關으로 달아났다. 다음 해 삼환이 양관을 공격하자 나라로 달아났고, 다시 나라로 달아났다. 趙盾에게 귀의하여 趙簡子謀臣이 되었다.
鮑子諫景公: 鮑文子하기를
은 전에 施氏의 가신으로 있은 적이 있어서 노나라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데, 노나라는 취할 수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춘추좌씨전·노정공9>

四十八年,與魯定公好會夾谷。
경공 48(기원전500), 魯定公夾谷에서 우호를 위한 회맹을 가졌다.

犁鉏曰:
「孔丘知禮而怯,請令萊人為樂,因執魯君,可得志。」
犁鉏가 말하였다.
孔子는 예를 알지만 겁쟁이이니, 사람들을 불러 음악을 연주하게 하고 그 틈에 노나라의 군주를 잡는다면 뜻하는 바를 이룰 터입니다.”

景公害孔丘相魯,懼其霸,故從犁鉏之計。
경공은 공자가 노나라의 재상이 될까 걱정이 되고, 노나라가 패주가 될까 두려워 이서의 계책에 따랐다.

方會,進萊樂,孔子歷階上,使有司執萊人斬之,以禮讓景公。
회맹할 때 의 연주를 하자 공자는 계단을 지나 무대에 올라서, 담당 관리를 시켜 사람을 잡아 목을 베게 한 다음 예로써 경공에게 따졌다.

景公慚,乃歸魯侵地以謝,而罷去。
경공이 부끄러워 빼앗은 노나라의 땅을 돌려주며 사과하고는 회맹을 마치고 떠났다.

是歲,晏嬰卒。
이해에 晏嬰이 죽었다.

魯定公: 노정공은 춘추시대 노나라의 國君. 이름은 이고, 昭公의 동생이다. 10孔子로 재상의 일을 수행하게 했고, 齊景公夾谷에서 만났다. 제경공이 정공을 위협하자 공자가 예로써 따지니 제경공이 두려워하며 중지하고 침탈했던 노나라의 땅도 돌려주었다. 15년 동안 재위하였다.
萊人: 소수민족으로 제나라가 멸망시킨 萊夷.
: 걱정하다.

 

五十五年,范、中行反其君於晉,晉攻之急,來請粟。
경공 55(기원전493), 나라의 范氏中行氏가 군주 定公에 반역했으나 나라가 서둘러 공격하자 제나라에 와서 식량을 청하였다.

田乞欲為亂,樹黨於逆臣,說景公曰:
「范、中行數有德於齊,不可不救。」
田乞이 반란을 일으키고자 역신들과 당파를 만들 생각에 경공을 설득하여 말하였다.
범씨와 중항씨는 제나라에 여러 차례 덕을 베풀었으니 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及使乞救而輸之粟。
경공은 곧 전걸을 시켜 구원하게 하고 식량을 보냈다.

,中行反其君: 혜공 5(기원전496), 나라의 卿 中行氏范氏가 반란을 일으키자 智氏趙簡子로 하여금 그들을 공격하게 하였으며, 범씨와 중항씨는 나라로 달아났다
田乞: 田釐子 또는 田僖子라고도 한다. 田桓子의 아들. 춘추시대 말기 나라의 대신. 기원전489景公이 죽자 전걸은 경공의 유지를 뒤엎고 제도공을 군주로 세웠으며, 전걸의 아들 진항은 도공을 죽이고 簡公을 임금으로 세웠다.

五十八年夏,景公夫人燕姬適子死。
경공 58(기원전490)여름, 경공의 부인 燕姬 소생의 아들이 죽었다.

景公寵妾芮姬生子荼,荼少,其母賤,無行,諸大夫恐其為嗣,乃言願擇諸子長賢者為太子。
경공이 총애하는 첩 芮姬가 낳은 아들 는 어리고, 그의 어머니는 천하고 행실이 단정하지 않아서, 대부들은 後嗣가 될까 염려하여, 여러 아들 중 나이가 많고 어진 이를 태자로 삼길 원한다고 말하였다.

景公老,惡言嗣事,又愛荼母,欲立之,憚發之口,乃謂諸大夫曰:
「為樂耳,國何患無君乎?」
나이가 든 경공은 후계자 문제를 말하기 싫었고, 의 어머니를 총애하여 도를 태자로 세우고 싶었으나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던 차여서 대부들에게 말하였다.
즐기시구려, 나라에 군주가 없는 것을 어찌 걱정하시오?”

燕姬: 景公의 부인.
: 과 통용된다. 정처 소생의 아들.
芮姬: 景公의 첩.
憚發之口: 말을 입 밖에 내기를 꺼리다.

 

秋,景公病,命國惠子、高昭子立少子荼為太子,逐群公子,遷之萊。
가을, 경공이 병이 나자 國惠子高昭子에게 어린 아들 를 태자로 세울 것을 명하고 공자들을 땅으로 옮기도록 하였다.

景公卒,太子荼立,是為晏孺子。
경공이 죽고 태자 도가 즉위하니 그가 바로 晏孺子이다.

冬,未葬,而群公子畏誅,皆出亡。
겨울, 경공의 장례를 치르지도 않았는데 공자들이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 모두 도망쳤다.

荼諸異母兄公子壽、駒、黔奔衛,公子駔、陽生奔魯。
의 이복형 중 공자 , , 나라로 달아났고, 공자 , 陽生은 노나라로 도망쳤다.

萊人歌之曰:
「景公死乎弗與埋,三軍事乎弗與謀,師乎師乎,胡黨之乎?」
사람들이 이를 두고 노래하였다.
경공이 죽었는데도 매장에도 참여하지 못하고, 三軍의 일 또한 함께 도모하지 못하였으니 공자들이여 공자들이여, 장차 어디로 갈 것인가?”

: 安孺子. 제나라의 제27대 후작으로 이름은 이다.
어머니 예희가 총애를 받았으나, 예희가 천하고 도는 어렸으므로 대부들은 도가 후사가 될까 두려워 경공에게 나이 많고 어진 자로 태자를 삼기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경공은 이를 듣지 않았고, 경공58(기원전490)에 병이 들자 비로소 국혜자와 고소자에게 명하여 도를 태자로 삼고 여러 공자를 쫓아내 내 땅으로 옮겼다.경공이 죽자 도가 제후가 되었다.
國惠子: 國夏. 춘추시대 나라 사람으로 이름은 大夫를 지냈다. 景王의 명령을 받아 高昭子와 함께 를 태자로 세웠다. 나중에 그와 고소자가 田乞鮑牧 및 대부들의 공격을 받자 나라로 달아났다.
高昭子: 高張. 제나라의 대부.
: 제나라 동쪽 변방의 읍.
: 뭇사람. 5공자를 말한다.
胡黨之: 어느 곳으로 갈 것인가.
:장소를 나타내는 의문부사. 은 거처이고, 는 가다.

晏孺子元年春,田乞偽事高、國者,每朝,乞驂乘,言曰:
「子得君,大夫皆自危,欲謀作亂。」
안유자 원년(기원전489) , 田乞이 고씨와 국씨를 섬기는 척하면서 조회에 갈 때마다 전걸이 驂乘이 되어 호위하며 말하였다.
군께서 군주의 총애를 받으니 대부들이 모두 위기를 느끼고 난을 꾀하려 합니다.”

又謂諸大夫曰:
「高昭子可畏,及未發,先之。」
또 전걸이 대부들에게 말하였다.
고소자는 무서운 사람이니 그가 손을 쓰기 전에 먼저 손을 써야 하오.”

大夫從之。
대부들이 그 말을 따랐다.

六月,田乞、鮑牧乃與大夫以兵入公宮,攻高昭子。
원년 6, 전걸과 鮑牧이 대부들과 함께 병사들을 이끌고 안유자의 궁으로 들어가서 고소자를 공격하고자 하였다.

昭子聞之,與國惠子救公。
고소자가 이 소식을 듣고 국혜자와 함께 수레를 타고 안유자를 구원하러 갔다.

公師敗,田乞之徒追之,國惠子奔莒,遂反殺高昭子。
안유자의 군대는 패하고, 전걸의 무리가 국혜자를 추격하자 그는 로 달아났으며, 전걸의 무리는 되돌아와 고소자를 죽였다.

晏圉奔魯。
안영의 아들인 晏圉가 노나라로 달아났다.

田乞: 田釐子 또는 田僖子라고도 한다. 춘추시대 말기 나라의 대신. 기원전489, 경공이 죽자 전걸은 경공의 유지를 뒤엎고 제도공을 임금으로 세웠다.
田乞偽事: 高張國夏景公의 명을 받고서 를 임금으로 세웠다. 전걸은 이들을 살해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그들을 섬기는 것처럼 먼저 위장한 것이다.
可畏: 무섭다.두렵다.
鮑牧: 鮑國의 손자이다
昭子: 高昭子: 高張.
晏圉: 晏嬰의 아들.

 

八月,齊秉意茲。
8, 秉意玆가 노나라로 도망쳤다.

田乞敗二相,乃使人之魯召公子陽生。
전걸은 두 재상을 패배시키고 바로 사람을 노나라로 보내 공자 陽生을 불렀다.

陽生至齊,私匿田乞家。
양생이 제나라로 와서 몰래 전걸의 집에 숨었다.

十月戊子,田乞請諸大夫曰:
「常之母有魚菽之祭,幸來會飲。」
10월 무자일, 전걸이 대부을 청하였다.
의 모친이 제사를 지냈는데 부디 오셔서 술과 음식을 드시기 바랍니다.”

齊秉意茲: 병의자가 노나라로 도망쳤다. <춘추좌씨전·애공6>齊秉意兹奔鲁로 기록되어 있다. 秉意茲高夏國張의 무리였다.
陽生: 齊悼公. 춘추시대 말기 제나라의 군주로 이름은 陽生이고, 景公의 아들이다.
常之母: 田嘗菽의 모친. 田乞의 처.
魚菽之祭: 물고기와 콩을 차려 놓고 지내는 제사. 祭需가 변변치 못한 제사라는 뜻으로 자신의 집 제사를 낮추어 말한 것이다.

 

會飲,田乞盛陽生橐中,置坐中央,發橐出陽生,曰:
「此乃齊君矣!」
술자리가 마련되자 전걸이 陽生을 자루에 넣어 자리 중앙에 놓아두었다가 자루를 열어 양생을 나오게 하며 말하였다.
이분이 바로 제나라의 군주이십니다!”

大夫皆伏謁。
대부들이 모두 엎드려 알현하였다.

將與大夫盟而立之,鮑牧醉,乞誣大夫曰:
「吾與鮑牧謀共立陽生。」
대부들과 맹약하고 양생을 옹립하려는데 포목이 술에 취하자, 전걸은 대부들에게 무함하였다.
나와 포목이 함께 모의하여 양생을 옹립하기로 했습니다.”

鮑牧怒曰:
「子忘景公之命乎?」
포목이 화가 나서 말하였다.
그대는 경공의 명을 잊었소?”

諸大夫相視欲悔,陽生前,頓首曰:
「可則立之,否則已。」
대부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후회하는 듯하자 양생이 앞으로 나서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였다.
그대가 합당하다고 하면 즉위하고 그렇지 않으면 그만두겠습니다.”

鮑牧恐禍起,乃復曰:
「皆景公子也,何為不可!」
포목은 화가 미칠까 두려워 다시 말하였다.
모두가 경공의 자제분인데 안 될 것이 무엇입니까!”

乃與盟,立陽生,是為悼公。
이에 함께 맹약하고 양생을 옹립하니 그가 바로 悼公이다.

: 전대. 주머니.
伏謁: 지체가 높은 사람 앞에 엎드려 뵘.
: 속이다.
景公之命: 景公이 임종시 도를 태자로 세우라고 명하였다.
悼公: 齊悼公. 춘추시대 말기 제나라의 군주로 이름은 陽生이고, 景公의 아들이다. 경공이 죽자 태자 가 즉위하니 그가 晏孺子이다. 양생이 나라로 달아나자 季康子가 누이 季姬와 결혼시켰다. 田乞이 도공을 즉위시키고 안유자를 살해하였다. 전걸을 재상으로 삼으니 이때부터 전씨가 제나라의 정치를 독점하였다. 시호는 이다.

 

悼公入宮,使人遷晏孺子於駘,殺之幕下,而逐孺子母芮子。
도공이 입궁하여 사람을 시켜 晏孺子로 옮기게 하고, 도중에 장막 안에서 죽였으며, 이어 안유자의 어머니 芮姬를 내쫓았다.

芮子故賤而孺子少,故無權,國人輕之。
예희가 본래 천한 신분이고 안유자는 어렸기 때문에 권력을 가지지 못하여 국인들이 그들을 가벼이 여겼다.

殺之幕下: 호송하던 朱毛에 당도하기 전에 晏孺子를 야영하는 장막 아래에서 죽여 殳冒淳에 매장하였다. <춘추좌씨전·魯哀公 6(기원전489)>
: 제나라의 읍.
: 본래.

悼公元年,齊伐魯,取讙、闡。
도공 원년(기원전488), 제나라가 노나라를 정벌하여 讙邑闡邑을 빼앗았다.

初,陽生亡在魯,季康子以其妹妻之。
당초 양생이 노나라에 망명해 있을 때 季康子가 여동생을 그의 아내로 삼게 하였다.

及歸即位,使迎之。
돌아와 군주로 즉위하자 그녀를 모셔오게 하였다.

季姬與季魴侯通,言其情,魯弗敢與,故齊伐魯,竟迎季姬。
季姬季魴侯와 사통하고 있다가 그 진상을 말하자, 노나라가 감히 보내지 못한 까닭에 제나라가 노나라를 정벌하여 끝내 계희를 모셔간 것이다.

季姬嬖,齊復歸魯侵地。
계희가 총애를 받자 제나라는 빼앗은 노나라의 땅을 돌려주었다.

季康子: 춘추시대 말기 나라 사람. 季孫斯의 아들이고, 季孫肥로도 불린다. 아버지를 이어 大夫가 되어 국정을 전담하였다. 시호는 이다. 그가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 물은 내용이 <論語> ‘顔淵편에 나온다.
季姬: 계강자의 여동생.
季魴侯: 춘추시대 노나라 三桓 季平子의 아들이다.

鮑子與悼公有郤,不善。
포목과 悼公의 사이가 벌어져 사이가 좋지 않았다.

四年,吳、魯伐齊南方。
도공4(기원전485), 의 남방을 공격하였다.

鮑子弒悼公,赴于吳。
포목이 도공을 시해하고 에 부고를 냈다.

吳王夫差哭於軍門外三日,將從海入討齊。
오왕 부차는 군문 밖에서 사흘을 곡하고 바다를 통해 를 토벌하러 나섰다.

齊人敗之,吳師乃去。
를 물리치니, 吳軍은 물러갔다.

晉趙鞅伐齊,至賴而去。
趙鞅를 공격하여 賴邑까지 이르렀다가 물러갔다.

齊人共立悼公子壬,是為簡公。
사람들이 모두 도공의 아들 을 세우니 그가 簡公이다.

鲍牧: 성은 이고 씨는 . 鮑叔牙의 후손이다. 춘추시대 제나라의 대부이다.
趙鞅: 趙簡子. 춘추시대 말기 나라 사람으로 趙孟 또는 志父로도 불린다. 진나라 내부에서 6이 세력 다툼을 벌일 때 2경인 范氏中行氏를 몰아내고 나라를 일으키는 바탕을 마련하였다.
簡公: 齊簡公. 춘추시대 말기 의 군주로 이름은 이고 悼公의 아들이다. 즉위하기 전에 闞止를 총애하였다. 즉위하자 그에게 정치를 맡기니 田成子가 걱정하였다. 대부 御鞅이 진언하여 감지와 전성자가 양립할 수는 없다고 했지만 듣지 않았다. 4년 전성자가 감지를 살해하자 간공은 달아나 舒州로 갔지만 역시 전성자에게 살해당하였다. 4년 동안 재위했고, 시호는 이다.

 

簡公四年春,初,簡公與父陽生俱在魯也,監止有寵焉。
간공 4(기원전485) , 당초 간공이 아버지 陽生과 함께 노나라에 있을 監止를 총애했었다.

及即位,使為政。
간공이 즉위하자 감지에게 국정을 맡겼다.

田成子憚之,驟顧於朝。
田成子(전상)가 그를 꺼려하여 조정에서 자주 주위를 돌아보곤 하였다.

御鞅言簡公曰:
「田、監不可并也,君其擇焉。」
弗聽。
御鞅이 간공에게 말하기를,
전성자와 감지를 함께 기용할 수는 없으니 군주께서는 선택을 하십시오.”라고 했지만 듣지 않았다.

簡公: 齊簡公. 춘추시대 말기 제나라의 군주로 이름은 이고 悼公의 아들이다.
陽生: 齊悼公. 춘추시대 말기 제나라의 군주로 이름은 陽生이고, 景公의 아들이다.
監止: 闞止闞史·子我·宰我. 춘추시대 말기 나라 사람. 자는 子我 또는 宰我이다. 孔子의 제자로 언어에 뛰어났다.
<史記>에는 재아가 훗날 제나라의 장관이 되었지만, 田常의 반란에 가담했다가 일족이 몰살을 당했다고 한다. 다만<사기>의 해당 기술은 <춘추좌씨전>이나 <여씨춘추>에는 다른 기술이 있으며, 당시 반란에 가담한 사람 가운데 별명으로 같은 자를 쓴 인물이 없다는 점에서 張翼같은 학자는 司馬遷이 혼동하고 잘못 적었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為政: 정무를 주관하다.
田成子: 陳恒. 陳成子, 田常으로도 불린다. 춘추시대 나라 사람. 田乞의 아들이다. 齊簡公闞止와 함께 左右相을 맡았다. 선조들의 전통을 계승하여 大斗로 재어 양식으로 대여하고, 小斗로 재어 거둬들여 民心을 얻었다. 제간공 4년 감지와 간공을 공격해 살해하고, 간공의 동생 를 세워 平公으로 삼았다. 스스로 재상이 되어 제나라의 국정을 장악하고, 公族 가운데 강성한 이들은 모두 제거하였다.
驟顧: 자주 돌아보다.
御鞅: 諸御鞅. 춘추시대 齊簡公大夫. 다른 두 신하인 田常子我가 서로 미워하므로 한 사람을 제거하라고 간공에게 했으나 간공이 듣지 않았다. 전상이 자아와 간공을 살해하였다.

子我夕,田逆殺人,逢之,遂捕以入。
子我가 저녁에 조정에 들어갔다가 田逆이 사람을 죽이는 것을 보고서 그를 체포하여 조정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田氏方睦,使囚病而遺守囚者酒,醉而殺守者,得亡。
전씨들은 당시 서로 사이가 좋았으므로, 전역에게 병을 핑계대게 하고, 간수에게 술을 보내어 취하게 만든 다음 간수를 죽이고 전역을 도망치게 하였다.

子我盟諸田於陳宗。
자아는 전씨 종가에서 전씨들과 화해할 것을 맹약하였다.

: 저녁에 입조하다.
田逆: 陳逆. 子行으로 陳氏의 종족이다
: 田逆을 말한다.
陳宗: 진씨의 종가. 田氏는 즉 陳氏이다.

初,田豹欲為子我臣,使公孫言豹,豹有喪而止。
당초 田豹子我의 가신이 되고자 대부 公孫에게 자신을 천거해 달라고 하였는데 전표가 상을 당하는 바람에 중지되었다.

後卒以為臣,幸於子我。
그후 결국 자아의 가신이 되어 자아의 총애를 받았다.

子我謂曰:
「吾盡逐田氏而立女,可乎?」
자아가 전표에게 물었다.
내가 전씨들을 모조리 몰아내고 그대를 전씨의 수장으로 하려는데 가능하겠는가?”

對曰:
「我遠田氏矣。且其違者不過數人,何盡逐焉!」
전표가 대답하였다.
저는 전씨와는 소원합니다.
또한 거슬리는 자가 몇몇에 지나지 않는데 무엇 때문에 다 쫓아내야 합니까!”

遂告田氏。
그리고는 전씨에게 고해 바쳤다.

子行曰:
「彼得君,弗先,必禍子。」
子行(田逆)이 전상에게 말하였다.
자아는 군주의 총애를 얻고 있으니 선수를 쓰지 않으면 화가 틀림없이 그대에게 미칠 터입니다.”

子行舍於公宮
子行(내응하기 위해) 궁궐에서 거주하였다.

田豹: 전씨의 宗族.
遠田氏: 전씨와 소원하다. 먼 친척이라 하며 자아의 말을 거절한 것이다.

夏五月壬申,成子兄弟四乘如公。
여름5월 임신일, 전성자 형제들이 네 대의 수레를 타고 간공에게 갔다.

子我在幄,出迎之,遂入,閉門。
자아가 장막 안에 있다가 맞이하자 들어가서 문을 잠갔다.

宦者御之,子行殺宦者。
환관들이 막자 子行이 환관들을 죽였다.

公與婦人飲酒於檀臺,成子遷諸寢。
간공은 부인과 檀臺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전성자가 들어와서 침전으로 자리를 옮기게 하였다.

公執戈將擊之,太史子餘曰:
「非不利也,將除害也。」
간공이 창을 들고 진성자를 공격하려 하자 太史 子餘가 말하였다.
불리한 일이 아니고, 해악을 제거하려 합니다.”

成子出舍于庫,聞公猶怒,將出,曰:
「何所無君!」
전성자가 궁 밖으로 나와 무기 창고에 머물러 있다가 간공이 아직 화가 나 있다는 말을 듣고는 도망치려 하면서 말하였다.
어디 간들 섬길 군주가 없겠는가!”

檀臺: 의 이름.
: 침궁. 군주의 처소.
: 무기고.

子行拔劍曰:
「需,事之賊也。
誰非田宗?
所不殺子者有如田宗。」
자행이 검을 빼들고 말하였다.
머뭇거림은 일을 그르치는 것입니다.
전씨 종족 아닌 자 누구입니까?
그대를 죽이지 않으면 전씨 종친이라 하겠는가!”

乃止。
이에 전상이 도망치기를 포기하였다.

子我歸,屬徒攻闈與大門,皆弗勝,乃出。
자아가 집으로 돌아가 사병들을 불러 모아 궁중의 작은 문과 큰 문을 공격했지만 모두 승리하지 못하자 달아났다.

田氏追之。
전씨들이 그를 뒤쫓았다.

豐丘人執子我以告,殺之郭關。
豐丘사람들이 자아를 붙잡아 놓고 알리니 郭關에서 자아를 죽였다.

成子將殺大陸子方,田逆請而免之。
전성자가 大陸子方을 죽이려 하였으나 전역의 요청으로 사면하였다.

: 머뭇거리다.
所不殺子者有如田宗: 는 가설접속사이다 만약허사 참조

 

 

한문의 허사(虛詞) 所

한문의 허사(虛詞) 所 所以 所는 용법이 대단히 많다. 일반적인 용법은 아직도 오늘날의 成語 중에 남아있다. 所는 우선 명사로서 장소를 나타내는데, 《論語》의 爲政篇에 보이는 “爲政以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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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러 모으다.
: 궁중의 작은 문.
郭關: 제나라의 곽문.
大陸子方: 子我의 가신.

 

以公命取車於道,出雍門。
대륙자방이 간공의 명령을 빙자하여 길에서 마차를 빼앗아 타고서 雍門을 나갔다.

田豹與之車,弗受,曰:
「逆為余請,豹與余車,余有私焉。
事子我而有私於其讎,何以見魯、衛之士?」
田豹가 마차를 주려 했으나 받지 않으면서 말하였다.
田逆이 나를 위해 사면을 청하고 田豹는 내게 마차를 주었으니 내가 사사로운 은혜를 입게 되는 것이오.
자아를 섬기면서 그 원수에게 사사로운 은혜를 입는다면 무슨 면목으로 노나라와 위나라의 선비들을 보겠는가?”

 

庚辰,田常執簡公于俆州。
경진일, 전상이 간공을 徐州에서 사로잡았다.

公曰:
「余蚤從御鞅言,不及此。」
간공이 말하였다.
내가 일찍이 御鞅의 말을 따랐더라면 이 지경에 이르지 않았을 터이다.”

甲午,田常弒簡公于俆州。
갑오일, 전상이 서주에서 간공을 시해하였다.

田常乃立簡公弟驁,是為平公。
전상이 간공의 동생 를 옹립하니 그가 平公이다.

平公即位,田常相之,專齊之政,割齊安平以東為田氏封邑。
평공이 즉위하여 전상을 재상으로 삼으니 전상은 의 정사를 專斷하였고, 安平 동쪽을 떼어 전씨의 봉읍으로 삼았다.

: 와 통용된다. 일찍.
平公: 齊平公. 제나라의 제30대 후작으로 이름은 이다. 전성자가 제간공을 시해하고 동생을 옹립하였다.

平公八年,越滅吳。
평공8(기원전473), 를 멸망시켰다.

二十五年卒,子宣公積立。
평공25(기원전456)에 평공이 죽고, 아들 宣公 積이 즉위하였다.

宣公: 齊宣公. 의 제31대 후작으로 이름은 이다. 선공의 재위 기간에는 전성자 항, 전성자의 아들 전양자 반, 전양자의 아들 전장자 백, 전장자의 아들 전도자와 전화가 대를 이어 제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재위51년 만에 죽어 아들 가 뒤를 이었다.

宣公五十一年卒,子康公貸立。
선공 51(기원전405), 선공이 죽고 아들 康公 貸가 뒤를 이었다.

田會反廩丘。
田會廩丘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康公二年,韓、魏、趙始列為諸侯。
강공 2(기원전403), ,,세 나라가 처음으로 제후의 반열에 올랐다.

十九年,田常曾孫田和始為諸侯,遷康公海濱。
강공 19(기원전386), 전상의 증손자 田和가 처음으로 제후가 되었고, 강공을 해변으로 유배시켰다.

康公: 씨 제나라의 제32대 군주이자, 마지막 군주. 제선공의 아들. 14년 재위하면서 술과 여자에 빠져서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이에 전화는 강공을 해변으로 유배시켜 성 하나를 식읍으로 주어 선조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결국은 늙어서 자식도 없이 죽어 姜姓 齊는 멸망하고 만다. <사기 세가 권46田敬仲完世家>
,,: 제강공 2(기원전403), 韓氏,趙氏,魏氏가 위열왕의 명령으로 제후가 되어서 나라는 曲沃만 남았고, 결국은 작은 제후국으로 전락하였다.
田和: 강공19(기원전386), 田和가 제나라의 후가 되어 주왕실의 제후 반열에 올랐고, 그 해를 원년으로 삼았다.

 

二十六年,康公卒,呂氏遂絕其祀。
강공 26(기원전379), 강공이 죽음으로써 呂氏의 제사가 마침내 끊어졌다.

田氏卒有齊國,為齊威王,彊於天下。
전씨가 결국 를 차지하기에 이르렀으며, 齊威王 때는 천하의 강자가 되었다.

齊威王: 臨淄사람으로 성은 이고, 씨는 , 이름은 因齊이다. 戰國시대 의 군주로 齊桓公의 아들이다. 기원전356년에 등극하여 재임 중에 개혁을 통하여 부국강성한 나라를 만들었고, 스스로 으로 칭하였다. 나라를 포위하여 나라를 구원하여 覇主로 일컬어지게 되었다.

 

太史公曰:
吾適齊,自泰山屬之瑯邪,北被于海,膏壤二千里,其民闊達多匿知,其天性也。
以太公之聖,建國本,桓公之盛,修善政,以為諸侯會盟,稱伯,不亦宜乎?
洋洋哉,固大國之風也!
태사공은 말한다.
내가 에 갔는데 태산부터 낭야산까지 이어지고, 북쪽으로는 바다에 이르러 기름진 땅이 2,000리였으며, 그곳 백성들은 활달하고 많은 지혜를 감추고 있었는데 그들의 천성이었다.
태공의 성스러운 덕으로 나라의 근본을 세웠고, 환공의 흥성함으로 선정을 베풀어 제후들과 회맹하여 패자라 칭했으니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넓디 넓구나, 참으로 대국의 풍모로다!”

: 잇다.이어지다.
: 이르다.
: 와 같다. 지혜. .
洋洋: 성대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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