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는 前漢의 사학자 太史公 司馬遷이 상고시대로부터 전한 武帝에 이르기까지 2천여 년간의 역사를 기술한 고대 중국 역사서로 <本紀>12권, <表>10권, <書>8권, <世家>30권, <列傳>7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世家는 역사편찬 방식의 하나인 紀傳體 사서의 한 편목으로 司馬遷이 <史記>를 편찬하면서 처음으로 만들었으며, 분봉된 국가의 군주나 제후들 혹은 중요한 역사적 인물의 사적 및 사회에 특출한 재능을 보인 인물들을 주로 다루고 있다.
이편은 사마천의 사기 130편 중 史記 <世家> 30편의 첫 번째인 吳太伯에 대한 역사적 기술로, 춘추시대에 일어선 오나라의 성립과 멸망까지의 일을 기록한 것이다.
吳太伯,太伯弟仲雍,皆周太王之子, 而王季歷之兄也。
吳太伯과 태백의 동생 仲雍은 모두 周太王 古公亶父의 아들이며, 周나라의 왕 季歷의 형이다.
季歷賢,而有聖子昌,太王欲立季歷以及昌,於是太佰、仲雍二人乃奔荊蠻,文身斷發, 示不可用,以避季歷。
계력이 현명하고 聖德이 있는 아들 昌이 있었기에, 태왕은 계력을 세워 왕위를 창에게 전하고 싶어 하자, 태백·중옹 두 사람은 荊蠻으로 달아나 문신을 하고 단발하여 왕위를 계승할 수 없음을 보여줌으로써 계력을 피하였다.
季歷果立,是為王季,而昌為文王。
계력이 과연 왕위에 오르니 그가 王季이며 아들 창은 周文王이 되었다.
太伯之奔荊蠻,自號句吳。
태백은 형만으로 달아나 자신을 句吳라 불렀다.
荊蠻義之,從而歸之千餘家,立為吳太伯。
형만 사람들이 그를 의롭게 여겨 따랐으며, 1천여 戶가 넘게 귀순하여 그를 吳太伯으로 옹립하였다.
▶ 吳太伯 : 춘추시대 吳의 초대 군주이자, 吳의 시조이다.
周의 古公亶父의 장남으로 형제로는仲雍과 季歷이, 조카로는 주 문왕이 있었다. 성은 姬. 太伯으로도 호칭되며, 자기 대신 동생 季歷에게 후계를 넘기려는 아버지의 뜻을 알아채고 동생 仲雍과 함께 이민족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달아났다. <사기 본기 권04. 주본기>
▶ 周太王 : 古公亶父. 성은 姬이고, 이름은 亶父이다. 商나라 시대 周族의 수장으로 古公이라고 불려 흔히 이름과 함께 古公亶父라고 한다. 뒷날 증손자인 주나라 武王에게 太王으로 추존되어 周太王이라고도 불린다. 太姜을 아내로 맞이해 太伯과 虞仲, 季歷을 낳았다. 주나라 건국의 기초를 닦은 인물이다.
▶ 季歷 : 성은 姬이고 이름은 季歷이다. 商나라 시대의 제후국이던 周의 군주였으므로 公季나 周公季라고 하며, 뒷날 손자인 주나라 武王에게 왕으로 추존되어 王季나 周王季 등으로도 불린다. 亶父의 셋째아들로 태어났으며, 생모는 太姜이다. 太任을 아내로 맞이해 昌과 虢仲, 虢叔을 낳았다
▶ 聖子昌 : 계력의 아들 昌. 昌이 태어날 때 붉은 새가 붉은 종이 한 장을 물고 와 산모의 침실 창문턱에 놓고 날아갔다.
▶ 荊蠻 : 楚나라의 본래 이름. 초나라는 현재의 湖北省이 있는 장강 중류 역에서 일어난 춘추전국시대의 나라이다.
▶ 文身斷發 : 文身斷髪. 고대에 吳와 越지방에 몸에 문신하고 단발하는 풍습이 있었다.
文은 紋과 같다.
太伯卒,無子,弟仲雍立,是為吳仲雍。
태백이 죽자 아들이 없어 동생 仲雍이 계승하니 그가 吳仲雍이다.
仲雍卒,子季簡立。
중옹이 죽자 아들 季簡이 계승하였다.
季簡卒,子叔達立。
계간이 죽자 아들 叔達이 계승하였다.
叔達卒,子周章立。
숙달이 죽자 아들 周章이 계승하였다.
是時周武王克殷,求太伯、仲雍之後,得周章。
이때 周武王이 殷나라를 멸망시키고, 태백·중옹의 후손을 찾다가 周章을 찾게 되었다.
周章已君吳,因而封之。
주장이 이미 오나라의 군주인지라 오왕에 봉하였다.
乃封周章弟虞仲於周之北故夏虛, 是為虞仲,列為諸侯。
이어 주장의 동생 虞仲을 주나라의 북쪽 옛날 夏나라의 옛터에 봉하니, 그가 우중으로 제후의 반열에 올랐다.
▶ 卒 : 죽다. 고대에 천자가 죽었을 때는 崩이라 하고 제후가 죽었을 때는 薨이라 하며 大夫가 죽었을 때는 卒이라 한다.
▶ 周章 : 성은 姬이고, 周代 吳나라의 5대 군주이다. 그는 자신이 周나라 사람의 후예인 점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때문에 이름도 周章이라고 하였다. 주나라 초기에 分封制를 실시하여 周王이 친척과 공신들을 각지의 諸侯로 봉하였다. 주왕은 太伯을 찾아 仲雍의 후예를 제후로 봉하고, 주장을 吳나라의 군주로 삼았다.
▶ 虞仲 : 주장의 아우 仲. 周原부근의 虞의 제후로 되었다. 이 때문에 후인들은 仲을 虞仲이라 일컬었다.
周章卒,子熊遂立,熊遂卒,子柯相立。
주장이 죽자 아들 熊遂가 계승하였고, 웅수가 죽자 아들 柯相이 계승하였다.
柯相卒,子彊鳩夷立。
가상이 죽자 아들 彊鳩夷가 계승하였다.
彊鳩夷卒,子餘橋疑吾立。
강구이가 죽자 아들 餘橋疑吾가 계승하였다.
餘橋疑吾卒,子柯盧立。
여교의오가 죽자 아들 柯盧가 계승하였다.
柯盧卒,子周繇立。
가로가 죽자 아들 周繇가 계승하였다.
周繇卒,子屈羽立。
주요가 죽자 아들 屈羽가 계승하였다.
屈羽卒,子夷吾立。
굴우가 죽자 아들 夷吾가 계승하였다.
夷吾卒,子禽處立。
이오가 죽자 아들 禽處가 계승하였다.
禽處卒,子轉立。
금처가 죽자 아들 轉이 계승하였다.
轉卒,子頗高立。
전이 죽자 아들 頗高가 계승하였다.
頗高卒,子句卑立。
파고가 죽자 아들 句卑가 계승하였다.
是時晉獻公滅周北虞公,以開晉伐虢也。
이 무렵 晉獻公이 주나라의 북쪽 虞公을 멸하고 虢을 정벌하여 晉나라의 영토를 넓혔다.
句卑卒,子去齊立。
구비가 죽자 아들 去齊가 계승하였다.
去齊卒,子壽夢立。
거제가 죽자 아들 壽夢이 계승하였다.
壽夢立而吳始益大,稱王。
수몽이 계승하자 오나라는 더욱 커지기 시작하여 왕을 칭하게 되었다.
▶ 晉獻公滅虞, 虢 : 기원전655년 晉나라가 虢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우나라에 길을 빌려 달라고 하여 괵나라를 멸망시키고 돌아오는 길에 우나라를 습격하여 멸망시켰다. <사기 권39. 晋世家>。
▶ 開晉 : 진나라의 영토를 확장하다.
自太伯作吳,五世而武王克殷,封其後為二:
其一虞,在中國;其一吳,在夷蠻。
태백이 오나라를 세운 후 5대가 되었을 때 周武王이 殷나라를 멸하고, 그 후손 둘을 봉했는데, 하나는 虞나라로 중원에 있고, 또 하나는 오나라로 夷蠻에 있었다.
十二世而晉滅中國之虞。
12대가 지나 晉나라가 중원의 우나라를 멸망시켰다.
中國之虞滅二世,而夷蠻之吳興。
중원의 우나라가 망한 지 2대가 지나 이만의 오나라가 강성해졌다.
大凡從太伯至壽夢十九世。
태백에서 수몽까지 모두 합쳐 19대였다.
▶ 中國 : 중원지역.
▶ 夷蠻 : 고대 동쪽과 남쪽의 소수 민족.
▶ 大凡 : 합계.
王壽夢二年, 楚之亡大夫申公巫臣怨楚將子反而奔晉, 自晉使吳,教吳用兵乘車, 令其子為吳行人,吳於是始通於中國。
오왕 수몽 2년(기원전584년), 楚나라의 망명한 대부 申公巫臣이 초나라의 장수 子反에게 원한을 품고 晉나라로 달아났다가, 진나라의 사신으로 오나라에 와서 군사를 훈련하고 전차 사용법을 가르쳤으며, 그의 아들이 오나라의 行人이 되었으며, 오나라는 이로써 처음 중원과 교류하게 되었다.
吳伐楚。
오나라가 초나라를 쳤다.
十六年,楚共王伐吳,至衡山。
수몽 16년(기원전570년), 楚共王이 오나라를 정벌해 衡山에 이르렀다.
▶ 壽夢 : 孰姑로도 불리며, 이름을 乘이라고도 한다. 춘추 시대 吳나라의 國君. 즉위한 뒤 오나라가 비로소 강대해지자 왕을 칭하였다.
▶ 申公巫臣 : 춘추시대 초나라 사람인 屈申. 자는 子夷로 초나라의 대부인데, 申公 巫臣이라고도 한다. 楚나라 大夫 申公巫臣이 夏姬로 인하여 晉나라로 달아나자, 초나라의 장수 子反이 무신의 집안사람들을 죽이고 재산을 가로채자, 무신이 자반을 원망하게 되었다. 무신이 晉나라에서 오나라로 사신으로 왔다가 오나라의 군사를 훈련하고 수레를 타고 전투를 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었으며, 아들로 하여금 오나라의 行人이 되게 하였다. <左傳·成公二年>
▶ 其子 : 무신의 아들 狐庸.
▶ 行人 : 옛날 朝覲·聘問의 일을 맡은 관직.
二十五年,王壽夢卒。
수몽25년(기원전561년), 왕 수몽이 죽었다.
壽夢有子四人,長曰諸樊,次曰餘祭, 次曰餘眛,次曰季札。
수몽에게는 아들 넷이 있었는데, 큰아들이 諸樊, 둘째가 餘祭, 셋째가 余眛, 넷째가 季札이었다.
季札賢,而壽夢欲立之,季札讓不可, 於是乃立長子諸樊,攝行事當國。
계찰이 현명하여 수몽은 그에게 계승하려 했으나 계찰은 안 된다며 사양하였으며, 이에 큰아들 諸樊을 세워 국정을 대행하게 하였다.
▶ 諸樊 : 오나라의 초대 국왕 壽夢의 장자이다. 수몽은 제번 이외에 3명의 아들이 있었고, 그중에서도 막내 계찰은 현인으로서 명성이 자자하였다. 아버지 수몽도 거기에 기대하여 계찰을 차기 왕으로 정하고 싶은 마음이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季札은 형을 두고 자신이 왕위에 즉위하는 것을 원하지 않고, 제번이 왕위를 잇고 그 후를 동생인 余祭가 잇는 등 형제 계승의 순서를 따르자고 하였다.
그러나 余昧가 왕위를 양보하였을 때 계찰은 거부하고 도망하니, 왕위는 결국 여매의 아들인 僚가 계승하게 되었다.
▶ 攝 : 대리하다.
▶ 當國 : 국정을 관장하다.
王諸樊元年,諸樊已除喪,讓位季札。
오왕 諸樊 원년(기원전560년), 제번이 喪을 마치고 季札에게 양위하려고 하였다.
季札謝曰:
「曹宣公之卒也,諸侯與曹人不義曹君, 將立子臧,子臧去之,以成曹君, 君子曰『能守節矣』。
君義嗣,誰敢干君!
有國,非吾節也。
札雖不材,願附於子臧之義。」
계찰이 사양하며 말하였다.
“曹宣公이 죽은 후 제후와 조나라 사람들은 모두 새로 세울 군주가 의롭지 못하다 하여 子藏을 군주로 세우려 하였으나 자장이 조나라를 떠남으로써 成公이 군주가 되었으므로, 군자들이 말하기를 ‘자장이 절개를 지킬 수 있었다’라고 했습니다.
군께서 합법적 후계자이거늘 누가 감히 군을 범한단 말입니까!
나라의 국군은 제 뜻이 아닙니다.
이 계찰이 비록 무능하지만 자장의 의로움을 따르려고 합니다. ”
▶ 季札 : 춘추시대 吳王 壽夢의 네 아들 중 막내로 延陵에 봉해져 延陵季子라고 부른다. 왕의 자리를 넘겨주려 했으나, 계찰은 이를 받지 않고 시골로 내려가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훗날 계찰이 노나라를 방문하여 악공에게 <周南>, <召南>, <風>, <雅> <頌>을 연주하게 하였다. <左傳·襄公二十九年>
▶ 除喪 : 상복을 벗다. 즉, 탈상하다. 당시 거상기간은 1년이었다.
▶ 曹成公 : 춘추 시대 曺나라의 國君. 이름은 負芻, 曹共公의 손자다. 조성공2년 晉厲公이 조나라를 공격했을 때 포로로 잡혔다. 子臧을 세우려고 했는데, 자장이 송나라로 달아났다. 조나라 사람이 이에 진나라에 왕을 돌려줄 것을 청했고, 다음 해 진나라가 성공을 돌려보냈다. 아울러 자장에게 송나라에서 돌아오기를 권하였다.
23년 동안 재위하였다. <左傳·成公十三年>
▶ 義嗣 : 합법적인 후계자. 제번이 嫡長子였으므로 당연한 후계자였다는 뜻.
▶ 干 : 범하다. 거스르다.
▶ 有國 : 나라의 군주가 됨.
吳人固立季札,季札棄其室而耕,乃捨之。
오나라 國君이 한사코 계찰을 옹립하려 했으나 계찰이 집을 버리고 농사를 짓자 비로소 포기하였다.
秋,吳伐楚,楚敗我師。
가을, 오나라가 초나라를 정벌하였으나 초나라가 오나라의 군대를 물리쳤다.
四年,晉平公初立。
제번4년(기원전557년), 晉平公이 즉위하였다.
▶ 吳伐楚 : 오나라가 초나라를 공격하였으나 초나라 司馬인 子庚에 의해 대패하고 公子黨이 사로잡혔다. <춘추좌씨전 魯襄公 23년(기원전560년)>
▶ 晉平公 : 춘추시대 진나라의 군주로 이름은 彪이며 悼公의 아들이다. 진평공 3년 제후의 군대를 이끌고 魯나라를 구하기 위해 齊나라를 공격하여 수도를 포위하였다. 다음 해 제후들과 督揚에서 모여 대국이 소국을 침범하지 않는다는 조약을 맺었다. 세금을 지나치게 많이 걷고 백성들의 형편을 돌보지 않았으며, 淫樂을 즐겼다. 정치가 趙韓魏 三家로 쏠렸다.
26년 동안 재위하였다.
十三年,王諸樊卒。
오왕 제번13년(기원전548년), 왕 제번이 죽었다.
有命授弟餘祭,欲傳以次,必致國於季札而止, 以稱先王壽夢之意, 且嘉季札之義,兄弟皆欲致國,令以漸至焉。
제번이 동생 餘祭에게 왕위를 주라는 명령을 남겼는데, 차례로 전하여 나라가 결국 계찰에 이르게 함으로써 선왕 수몽의 뜻에 맞게 하였으며, 또 계찰의 의로움을 높이 평가하여 형제 모두가 나라를 점차적으로 그에게 물려주려고 하였다.
季札封於延陵,故號曰延陵季子。
계찰이 延陵에 봉해졌기 때문에 延陵季子라 불렀다.
▶ 餘祭 : 수몽의 둘째 아들.
王餘祭三年,齊相慶封有罪,自齊來奔吳。
오왕 餘祭 3년(기원전545년), 齊나라의 대부 慶封이 죄를 짓고 제나라에서 오나라로 도망쳐 왔다.
吳予慶封朱方之縣,以為奉邑, 以女妻之,富於在齊。
오나라는 경봉에게 朱方縣을 봉읍으로 주고 딸을 그에게 시집보내 더 부유하게 해주었다.
▶ 齊相慶封有罪 : 제나라 재상 경봉이 최저를 죽인 뒤로 더욱 교만해져서 술과 사냥을 즐기며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田氏, 鮑氏, 高氏, 欒氏가 함께 慶氏를 없애자고 도모하자 경봉이 노나라로 달아났다가 제나라 사람들이 노나라를 나무라자 경봉은 吳나라로 달아났다. <사기 세가 권32. 齊太公世家>
<아래의 내용은 춘추좌씨전 魯襄公 29년(기원전544년)에 기록되어 있다. >
四年,吳使季札聘於魯,請觀周樂。
吳王 余祭 4년(기원전544년), 오나라가 계찰을 魯나라에 사절로 보냈는데, 계찰이(노양공에게) 周나라의 음악을 들려주길 청하였다.
為歌周南、召南。
노나라의 악공이 <周南>과 <召南>을 노래하였다.
曰:
「美哉,始基之矣,猶未也。
然勤而不怨。」
계찰이 이를 듣고 말하였다.
“아름답습니다, 주나라의 기초가 비로소 정해졌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이 수고로워도 원망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
歌邶、鄘、衛。
‘패풍(邶風)’, ‘용풍(鄘風)’, ‘위풍(衛風)’을 노래하였다.
曰:
「美哉,淵乎,憂而不困者也。
吾聞衛康叔、武公之德如是,是其衛風乎?」
계찰이 말하였다.
“아름답고 심원합니다, 근심하면서도 괴로워하지 않음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듣기에 衛나라 康叔과 武公의 덕행이 이와 같았다고 하니, 이 노래는 ‘衛風’이지요?”
▶ 聘 : 제후 간에 문안인사를 위해 사절을 파견하다. 사절을 보내다.
▶ 周樂 : 周나라의 음악.
▶ 周南 : 周南지역(하남성 낙양 지방)의 민간에서 불리던 민요. <詩經>國風의 첫 번째 篇名. 召南과 병칭하여 二南이라 한다.
▶ 召南 : 召南지역의 민간에서 불리던 민요. <시경>국풍의 편명. 召는 중국 岐山縣의 한 지명이다.
※詩經은 風, 雅, 頌으로 크게 분류되고 다시 雅가 大雅, 小雅로 나뉘어 전해진다.
※國風 : 周나라의 통치를 받던 15개의 국가에서 유행하던 민간의 가요이다. <시경> 제1편의 제목이다. 周南·召南·邶風·鄘風·衛風·王風·鄭風·齊風·魏風·唐風·秦風·陳風·檜風·曹風·豳風등 15개국의 국풍 160편이 실려 있다.
▶ 邶, 鄘, 衛 : 패, 용, 위의 세 나라에서 채집한 음악. 武王이 紂를 정벌한 뒤에 그 땅을 나누어 三監을 설치하였는데, 삼감이 배반하자 周公이 그들을 정벌하고서 다시 그곳에 康叔을 봉하여 三監의 땅을 병합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세 나라에 모두 康叔의 敎化가 입혀졌다.
▶ 淵 : 깊고 두텁다. 淵은 深이다.
▶ 憂而不困者也 : 망한 나라의 音은 애절하여 근심하는 소리가 있으니, 이는 그 백성들이 근심하며 괴로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衛나라는 康叔과 武公의 德化가 심원하기 때문에 宣公의 淫亂과 懿公의 멸망을 만났어도 백성들은 오히려 의를 지켜 困苦함에 이르지 않았다는 말이다.
▶ 吾聞衛康叔, 武公之德如是,是其衛風乎? : 康叔은 周公의 아우이고 武公은 康叔의 9대손인데, 모두 아름다운 덕이 있었던 衛나라의 임금이다.
歌王。曰:
「美哉,思而不懼,其周之東乎?」
‘王風’을 노래하자 계찰이 말하였다.
“아름답습니다, 근심하면서도 두려워하지 않음을 볼 수 있으니 이는 주나라가 동쪽으로 천도한 뒤의 노래 아닙니까?”
歌鄭。曰:
「其細已甚,民不堪也,是其先亡乎?」
‘鄭風’을 노래하자 계찰이 말하였다.
“그 가사에 사소함이 너무 심하여 백성들이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니, 이 나라는 다른 나라보다 먼저 멸망하지 않겠습니까?”
歌齊。曰:
「美哉,泱泱乎大風也哉。
表東海者,其太公乎?
國未可量也。」
‘齊風’을 노래하게 하자 계찰이 말하였다.
“아름답습니다, 聲音이 거대하여 대국의 풍도가 있습니다.
동해제후의 모범이 될 만하니, 이는 太公이 아니겠습니까?
이 나라는 그 앞날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
▶ 王 : 王風. 王지방에서 채집한 민간의 음악.
▶ 思而不懼 : 諸侯의 종주국인 주나라가 멸망하였기 때문에 근심하면서도 오히려 선왕의 遺風이 있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 周之東乎 : 幽王이 西戎의 禍(弑害)를 만나 平王이 鎬京에서 洛陽으로 遷都한 뒤로 周王의 政令이 천하에 시행되지 않았고, 풍속이 아래의 제후와 같았으므로 ‘雅’라고 하지 않은 것이다.
▶ 鄭 : 鄭風. 정나라에서 채집한 민간의 음악. 시경의 제7편이다.
▶ 細: 사소하다.
▶ 其先亡乎 : 그 詩에 치세의 음이 있는 것은 찬미하면서도 그 歌辭가 煩碎하여 그 국운이 장구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고 평한 것이다.
▶ 齊 : 齊風. 제나라에서 채집한 민간의 음악. 시경의 제8편이다.
▶ 泱泱 : 거대한 聲音.
▶ 大風 : 大國의 風度.
▶ 表 : 모범. 귀감.
▶ 太公 : 太公을 齊나라에 봉하여 東海諸侯의 귀감이 되게 하였다.
歌豳。曰:
「美哉,蕩蕩乎,樂而不淫,其周公之東乎?」
‘빈풍(豳風)’을 노래하자 계찰이 말하였다.
“아름답습니다, 광대함이여! 즐거워하되 지나치지 않으니 이는 주공이 동쪽 정벌에서 돌아와서 지은 노래이겠지요?”
歌秦。曰:
「此之謂夏聲。
夫能夏則大,大之至也,其周之舊乎?」
‘秦風’을 노래하자 계찰이 말하였다.
“이를 일러 夏나라의 소리라고 합니다.
능히 夏나라의 소리를 낸다면 그 성음이 웅대함이 극에 이를 수 있으니, 주나라의 옛 음악이 아니겠습니까?”
歌魏。曰:
「美哉,沨沨乎,大而寬,儉而易, 行以德輔,此則盟主也。」
‘魏風’을 노래하자 계찰이 말하였다.
“아름답습니다, 부드럽습니다, 호방하면서 관대하고, 간소하여 행하기가 쉬우니 덕으로써 이를 보조하였다면 밝은 明主가 되었을 것입니다. ”
▶ 豳(빈) : 豳지방에서 채집한 민간의 노래. 시경의 제15편이다. 豳은 周나라의 옛 국도로 新平漆縣 동북쪽에 있다.
▶ 蕩蕩 : 광대한 모양.
▶ 樂而不淫 : 즐거워하되 지나치지 않았다는 것은 節度가 있다는 말이다.
▶ 周公之東乎 : 豳風은 周公이 管叔‧蔡叔의 난을 만나, 동방으로 출정한 지 3년 만에 반란을 평정하고 돌아와서 成王을 위해 후직과 선왕들은 감히 荒淫에 빠지지 않아 왕업을 이룬 것을 진술한 것이다.
▶ 秦 : 秦風. 秦나라에서 채집한 민간의 노래.
▶ 夏聲 : 西方의 소리. 秦나라는 본래 汧‧隴의 서쪽에 있는 西戎이었는데, 秦仲이 비로소 거마와 예악의 제도를 받아들여, 戎狄의 음악을 버리고 諸夏의 음악을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그 秦風을 ‘夏聲’이라 한 것이다.
▶ 周之舊乎 : 秦襄公에 미쳐 주나라를 도와 平王의 東遷을 호송한 공로로 周나라의 옛 땅을 하사받았다. 그러므로 ‘周나라의 舊樂’이라고 한 것이다.
▶ 魏 : 魏風. 魏나라에서 채집한 노래. 시경의 제9편이다. 魏나라는 姬姓의 나라인데, 閔公 元年에 晉獻公이 魏나라를 멸하였다
▶ 沨沨 : 떠 있는 포양. 부드럽다.
▶ 寬 : 너그럽고 온화하다. 관대하다.
▶ 儉 : 검소하다. 간소하다.
▶ 盟主 : 좌전 양공29년에 明主로 되어 있다. 나라가 작고 밝은 임금이 없는 것을 애석하게 여긴 것이다.
歌唐。曰:
「思深哉,其有陶唐氏之遺風乎?
不然,何憂之遠也?
非令德之後,誰能若是!」
‘唐風’을 노래하자 계찰이 말하였다.
“생각이 깊습니다, 이는 陶唐氏의 遺風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그 근심이 이처럼 깊겠습니까?
아름다운 덕을 가진 분의 후손이 아니고서야 그 누가 이와 같을 수 있겠습니까!”
歌陳。曰:
「國無主,其能久乎?」
‘陳風’을 노래하자 계찰이 말하였다.
“나라에 군주가 없으니 어찌 오래갈 수 있겠습니까?”
自鄶以下,無譏焉。
‘鄶風’이하에는 평하지 않았다.
歌小雅。曰:
「美哉,思而不貳,怨而不言,其周德之衰乎?
猶有先王之遺民也。」
‘小雅’를 노래하자 계찰이 말하였다.
“아름답습니다, 문왕과 무왕의 덕을 생각하여 배반하는 마음이 없고, 원망하면서도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으니 주나라의 덕이 쇠잔해졌을 때가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선왕의 遺民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
▶ 唐 : 唐風. 唐나라에서 채집한 민간 음악. 시경의 제10편이다. 唐風은 晉나라의 詩이다. 晉나라는 堯의 나라이었다. 그러므로 堯의 遺風이 있었다.
▶ 憂之遠也 : 근심이 깊고 생각이 深遠하였기에 그 정이 소리에 드러난 것이다.
▶ 陳 : 陣風. 陣나라에서 채집한 민간 음악. 시경의 제12편이다.
▶ 國無主 : 淫荒하고 방탕하여 두려워하고 꺼리는 바가 없기 때문에 나라에 군주가 없다고 한 것이다.
▶ 鄶 : 鄶風. 鄶나라에서 채집한 민간 음악. 시경의 제13편이다.
▶ 無譏焉 : 曹風은 시경의 제14편이다. 계찰이 회풍과 조풍의 노래를 듣고서 다시 논평하지 않은 것은 그 나라가 미소하기 때문이다.
▶ 譏 : 논평하다.
▶ 小雅 : 詩經의 305편 중72편. 작은 政事에 관한 일을 노래한 주나라의 정통 음악.
▶ 思而不貳 : 文王과 武王의 은덕을 생각하여 배반하는 마음이 없다는 말이다. 貳는 배반하다.
▶ 怨而不言 : 商나라의 紂왕의 학정을 원망하면서도 참고 말하지 않는 것이다.
▶ 猶有先王之遺民也 : 상나라 주왕의 풍속이 남아 있기 때문에 주나라의 덕이 크게 펴지지 못했다는 말이다.
歌大雅。曰:
「廣哉,熙熙乎,曲而有直體,其文王之德乎?」
‘大雅’를 노래하자 계찰이 말하였다.
“광대하고도 화락합니다, 완곡이 있으면서 내면은 곧고 힘차니 아마도 문왕의 덕을 찬양한 것이 아닙니까?”
歌頌。曰:
「至矣哉,直而不倨,曲而不詘, 近而不偪遠而不攜,而遷不淫, 復而不厭,哀而不愁,樂而不荒, 用而不匱,廣而不宣,施而不費, 取而不貪,處而不底,行而不流。
五聲和,八風平,節有度, 守有序,盛德之所同也。」
‘頌’을 노래하자 계찰이 말하였다.
“지극합니다, 곧으면서도 傲慢하지 않았고 굽히되 굴복하지 않았으며, 친근하되 핍박하지 않았고, 소원하되 사이가 벌어지지 않았으며, 옮겨 다녔으되 음탕에 이르지 않았고, 반복하되 싫어하지 않았으며, 슬퍼하되 시름에 잠기지 않았고, 즐거워하되 황음하지 않았으며, 사용하여도 부족하지 않았고, 마음이 광대하되 스스로 드러내지 않았으며, 은혜를 베풀되 허비하지 않았고, 취하되 탐하지 않았으며, 멈추더라도 정체하지 않았고, 활동하되 방탕하지 않았습니다.
五聲이 어울리고 八風이 조화되었으며, 박자에 법도가 있고 악기의 연주에 차례가 있으니 성대한 덕이 동일합니다. ”
▶ 大雅 : 文王의 덕을 진술하여 천하의 풍속을 바로잡은 것이다.
▶ 廣 : 그 덕이 광대하게 미쳤다는 뜻이다.
▶ 熙熙 : 和樂한 소리.
▶ 曲而有直體 : 악곡에 억양과 고하가 있으나 그 본체는 곧다는 말이다.
▶ 頌 : 종묘 제사의 음악. 이룬 공적을 神明께 고한 것이다
▶ 至矣哉 : 至極하다. 道가 구비되었음을 말한다.
▶ 直而不倨 : 倨는 오만함이다. 강직한 자는 오만에 이르기 쉽다. 그러므로 오만하지 않은 것을 덕으로 삼는다.
▶ 曲而不詘 : 詘은 굽힘이다. 굽히는 자는 굴복에 이르기 쉽기 때문에 굴복하지 않는 것을 덕으로 삼는다.
▶ 近而不偪 : 偪은 핍박함이다. 친근한 자는 서로 핍박하는 데 이르기 쉽기 때문에 핍박하지 않는 것을 덕으로 삼는다.
▶ 遠而不攜 : 王者는 비록 소원한 아랫사람이라 해도 멀리하거나 의심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携는 떨어지다.
▶ 而遷不淫 : 자주 옮겨 다니는 자는 지나치게 안락만을 추구함으로 흐르기 쉬운데, 王者는 비록 옮겨 다니는 일이 있어도 덕으로써 자신을 지켜 음탕함에 이르지 않았다는 말이다.
▶ 復而不厭 : 반복하는 것은 싫증을 내어 버릴 조짐이지만, 덕으로 자신을 지켜 항상 나날이 새로워지게 한 것을 말한다.
▶ 哀而不愁 : 슬퍼하는 자는 憂愁에 이르기 쉬운데, 王者는 비록 凶災를 당하여도 운명이 이와 같다는 것을 알고서 우수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 樂而不荒 : 즐거워하되 방종하지 않음은 예로써 절제하였기 때문이다.
▶ 用而不匱 : 덕이 성대하기 때문에 아무리 사용하여도 다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 廣而不宣 : 마음이 광대하되 스스로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 施而不費 : 은혜를 베풀기를 좋아하는 자는 대체로 자신의 재물을 허비하는데, 백성들이 이롭게 여기는 바에 따라 이로운 쪽으로 인도하였기 때문에 자신의 재물을 허비하지 않는 것이다.
▶ 取而不貪 : 비록 물건을 취하되 많이 얻기를 탐하지 않는 것이다.
▶ 處而不底 : 조용히 거처하고 활동하지 않으면 생각이 정체될 우려가 있다. 그러나 자신을 道로써 지키기 때문에 비록 다시 정지해 머물러 있어도 停滯하지 않는 것이다
▶ 行而不流 : 계속 행하고 정지하지 않으면 방탕으로 흐를 우려가 있다. 그러나 義로써 절제하기 때문에 방탕으로 흐르지 않는다.
▶ 五聲 : 고대 음악의 5개 음계. 宮‧商‧角‧徵‧羽.
▶ 八風 : 八方의 風氣. 일설에 金, 石, 土, 革, 絲, 木, 匏, 竹의 八音을 말한다고도 한다.
▶ 八風平,節有度,守有序 : 8音이 화음을 이루는 것이 박자에 법도가 있는 것이고, 악기의 연주가 서로의 차례를 빼앗음이 없는 것이 지킴에 순서가 있는 것이다.
見舞象箾、南籥者,曰:
「美哉,猶有感。」
‘象箾’와‘南籥’의 춤을 보고는 계찰이 말하였다.
“아름답습니다만 恨이 있는 듯합니다. ”
見舞大武,曰:
「美哉,周之盛也其若此乎?」
‘大武’라는 춤을 보고는 말하였다.
“아름답습니다, 주나라가 흥성할 때 아마 이렇지 않았을까요?”
見舞韶護者,曰:
「聖人之弘也,猶有慚德,聖人之難也!」
‘韶護’의 춤을 보고는 말하였다.
“성인의 위대함을 표현하면서도 오히려 부끄러운 德을 드러내었으니 聖人되기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見舞大夏,曰:
「美哉,勤而不德!非禹其誰能及之?」
‘大夏’의 춤을 보고는 말하였다.
“아름답습니다, 힘들게 일하고도 그것을 덕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禹임금이 아니면 누가 이런 樂舞를 만들 수 있었겠습니까?”
▶ 象箾 : 箾韶의 반주에 맞추어 武功을 상징하는 춤이며, 주 문왕의 樂舞이다.
▶ 南籥 : 南樂(周南‧召南)의 반주에 맞추어 추는 춤이며, 주 문왕의 악무이다.
▶ 猶有感 : 文王이 자신의 代에 태평을 이룩하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하는 뜻이 춤에 표현된 것이다. 感은 憾과 같다.
▶ 大武 : 武王의 樂舞다.
▶ 周之盛也其若此乎 : 武王이 周나라를 일으킬 때 그 성대함이 춤에 표현된 내용과 같다는 말이다.
▶ 韶護 : 殷나라 湯임금의 樂舞다.
▶ 聖人之難也 : 신하로서 임금을 정벌한 것을 부끄럽게 여긴 것이다. 탕임금은 하나라의 걸왕을 정벌하여 하극상으로 천하를 얻었기 때문이다.
▶ 慚德 : 부끄러운 덕.
▶ 大夏 : 우임금의樂舞이름.
▶ 勤而不德 : 禹임금이 치수를 하는 일에 근로하였으되 자기의 덕을 스스로 자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不德은 스스로의 덕을 백성에게 자랑하지 않음을 말한다.
見舞招箾,曰:
「德至矣哉,大矣,如天之無不燾也, 如地之無不載也,雖甚盛德,無以加矣。
觀止矣,若有他樂,吾不敢觀。」
‘招箾’의 춤을 보고는 말하였다.
“덕행이 지극합니다, 광대하여 덮지 않는 곳이 없는 하늘과 같고,
싣지 않는 것이 없는 대지와 같으니 아무리 성대한 덕이라 해도 이보다 더할 수 없습니다.
그만 보겠습니다, 만약 다른 樂舞가 있다 하더라도 저는 감히 보기를 청하지 않겠습니다. ”
▶ 招箾 : 舜임금의 음악. 韶箾라고도 한다.
▶ 燾 : 덮다.
▶ 觀止矣 : 音樂이나 文辭 등이 정점에 도달한 것을 찬양하는 말로 쓰인다.
▶ 吾不敢觀 : 魯나라는 4代(虞‧夏‧商‧周)의 樂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韶箾)에 이르자, 계찰은 樂이 끝났음을 알았다.
去魯,遂使齊。
계찰이 노나라를 떠나 사신으로 제나라에 갔다.
說晏平仲曰:
「子速納邑與政。
無邑無政,乃免於難。
齊國之政將有所歸;未得所歸,難未息也。」
晏平仲에게 권하였다.
“그대는 속히 봉읍과 정권을 반납하십시오.
봉읍이 없고 정권이 없어야 재앙을 면할 수 있소.
제나라의 정권은 장차 누군가에게 돌아갈 터이니, 돌아갈 곳을 찾지 못하면 재앙이 그치지 않을 터이오. ”
故晏子因陳桓子以納政與邑,是以免於欒高之難。
그래서 晏子는 陳桓子를 통해 정권과 봉읍을 반납함으로써 欒氏와 高氏가 일으킨 변란에서 화를 면하였다.
▶ 晏平仲 : 晏嬰. 晏子. 춘추시대 齊의 명재상이다. 자는 仲, 시호는 平. 제 靈公, 莊公, 景公 3대를 섬긴 재상으로서 절약 검소하고 군주에게 기탄없이 간언한 것으로 유명하였다.
晏子春秋는 그의 언행을 기록한 책이다. <史記 권62. 管晏列傳>
▶ 納 : 반납하다. 군주에게 되돌려 주다.
▶ 陳桓子 : 춘추시대 제나라 대부 田桓子, 이름은 無宇이며 시호가 桓子다.
▶ 欒高之難 : 齊 景公 14년 齊나라 대부 欒施(子旗)와 高彊(子彊)이 서로 공격한 일을 말한다.
去齊,使於鄭。
계찰이 제나라를 떠나 鄭나라에 사절로 갔다.
見子產,如舊交。
子産을 만나니 마치 오래 전부터 사귀어온 친구 같았다.
謂子產曰:
「鄭之執政侈,難將至矣,政必及子。
子為政,慎以禮。
不然,鄭國將敗。」
자산에게 일러 말하였다.
“정나라의 집정자가 사치스러우니 장차 재난이 닥치고 정권은 분명 그대에게 갈 터이오.
그대가 집정자가 되면 예의에 따라 신중하게 일을 처리하시오.
그렇지 않으면 정나라는 패망할 터이오. ”
去鄭,適衛。
說蘧瑗、史狗、史鰌、公子荊、公叔發、公子朝曰:
「衛多君子,未有患也。」
계찰이 정나라를 떠나 衛나라에 갔다.
蘧瑗, 史狗, 史鰌, 公子荊, 公叔發, 공자 朝를 좋아하여 말하였다.
“위나라에는 군자가 많으니 환난이 없을 터입니다. ”
▶ 子產 : 鄭子産. 姓은 公孫, 이름은 僑, 字는 子産.
鄭나라의 현명한 大夫로 春秋時代 후기의 뛰어난 정치가이다.
당시 楚나라와 晉나라 같은 강대국 사이에서 압박받던 鄭나라를 교묘한 외교정책과 내정개혁을 통해 유지함으로써 공자에 의해 군자로 칭송되었다.
鄭나라는 子産 등이 활약하던 시대가 지나가자 점차 쇠퇴해져서, 戰國時代 초기 韓나라에 의해 멸망하였다.
▶ 鄭之執政 : 정나라의 대부 伯有를 말한다. 백유는 포악한 사람으로 원래 이름이 양소이고, 백유는 양소의 字이다. 春秋時代의 鄭나라 사람들은 백유라는 말을 듣기만 해도 벌벌 떨면서 달아났다고 전해진다.
▶ 說 : 悦과 같다. 좋아하다. 기뻐하다.
▶ 蘧瑗 : 蘧伯玉. 춘추시대 衛나라 사람. 자가 백옥이다. 靈公 때 大夫를 지냈다.
▶ 史狗 : 史朝의 아들 文子이다.
自衛如晉,將舍於宿,聞鐘聲,曰:
「異哉!
吾聞之,辯而不德,必加於戮。
夫子獲罪於君以在此,懼猶不足, 而又可以畔乎?
夫子之在此,猶燕之巢于幕也。
君在殯而可以樂乎?」
遂去之。
衛나라에서 晉나라로 갈 때 宿邑에서 묵으려는데 종소리를 듣고 (손문자에게)말하기를,
“괴이하다!
내가 듣기로 변란을 일으키고도 덕을 행하지 않으면 반드시 주살을 당한다고 했습니다.
부자(손문자)께서는 군주에게 죄를 짓고 이곳에 와 있으니 두려워해도 부족하거늘,또 어찌 음악을 즐길 수 있단 말이오?
부자께서 이곳에 있는 것은 마치 제비가 장막 위에 둥지를 튼 것과 같소.
군주의 관이 殯所에 있는데 음악을 즐길 수 있단 말이오?”
하고 떠났다.
文子聞之,終身不聽琴瑟。
孫文子는 이 말을 듣고 평생토록 음악을 듣지 않았다.
▶ 宿 : 戚과 통용된다. 地名. 戚은 衛나라 대부 孫文子의 封邑이다.
▶ 聞鐘聲 : 孫文子가 음악을 연주하면서 치는 악기인 鐘소리를 들은 것이다.
▶ 孫文子 : 孫林父. 춘추시대 衛나라의 大夫로 文子라고도 한다.
獻公때 甯殖과 함께 동열에 섰다. 헌공이 두 사람에게 무례하자 헌공을 폐하고 殤公을 세우니 헌공은 齊나라로 달아났다. 상공12년 달아난 헌공이 영식의 아들 甯喜와 복위를 도모해 寗氏가 孫氏를 공격했는데, 손씨가 패하자 采邑인 戚을 근거지로 반란을 일으키고 晉나라로 달아났다.
▶ 辯而不德 : 변란을 일으키고도 덕을 행하지 않다. 辯은 變으로 읽어야 한다. 신하로서 군주(위 헌공)를 축출한 것은 正道가 아니다. 이미 변란을 일으켰고, 또 덕행을 닦지 않은 것을 이른다.
▶ 夫子 : 남자에 대한 존칭. 여기서는 손문자를 말한다.
▶ 畔 : 般과 통용된다. 즐겁다. 유쾌하다.
▶ 燕之巢于幕 : 지극히 위태롭다는 뜻.
▶ 殯 : 빈소. 죽은 衛 獻公을 아직 장사 지내지 않았음을 말한다.
▶ 遂去之 : 그곳에 유숙하지 않고 갔다.
適晉,說趙文子、韓宣子、魏獻子曰:
「晉國其萃於三家乎!」
晉나라에 가서 趙文子, 韓宣子, 魏獻子를 좋아하여 말하였다.
“晉나라의 정권이 아마 이 세 집안에 집중될 터입니다. ”
將去,謂叔向曰:
「吾子勉之!君侈而多良,大夫皆富,政將在三家。
吾子直,必思自免於難。」
떠나기에 앞서 叔向에게 일렀다.
“그대가 애쓰시오!군주가 사치스럽고 어진 신하가 많으며, 대부들은 모두 부유하니 정권이 장차 세 집안에게로 돌아갈 것이오.
그대는 강직하니 반드시 스스로 재난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시오!”
▶ 萃 : 모이다. 집중하다.
▶ 三家 : 晉나라의 趙, 韓, 魏 3대부의 집안
▶ 吾子 : 상대방에 대한 존칭. ‘그대’.
▶ 大夫皆富 : 大夫가 부유하면 반드시 백성들에게 은혜를 후하게 베풀 것이기 때문에 정권이 대부의 집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한 것이다.
季札之初使,北過徐君。
계찰이 처음 사신으로 갈 때 북쪽 徐國 군주에게 들렀다.
徐君好季札劍,口弗敢言。
徐君은 계찰의 칼이 마음에 들었지만 감히 입 밖에 내지 않았다.
季札心知之,為使上國,未獻。
계찰이 마음속으로 알고 있었으나 上國에 사신으로 가는 길이었기 때문에 검을 줄 수 없었다.
還至徐,徐君已死,於是乃解其寶劍, 系之徐君冢樹而去。
돌아오는 길에 서국에 들렀지만 서군이 이미 죽고 없었으므로, 이에 자신의 보검을 풀어 서국 군주의 무덤가 나무에 묶어두고 떠났다.
從者曰:
「徐君已死,尚誰予乎?」
시종이 물었다.
“서군은 이미 죽었는데 누구에게 주는 것입니까?”
季子曰:
「不然。
始吾心已許之,豈以死倍吾心哉!」
계찰이 말하였다.
“그런 말 하지 마라.
당초 내가 주기로 마음먹었는데 죽었다고 내 마음을 어길 수 있겠는가?”
▶ 過 : 방문하다.
▶ 倍 : 倍는 등질 ‘패’로 背와 통용된다. 배반하다. 어기다.
七年,楚公子圍弒其王夾敖而代立,是為靈王。
오왕 余祭 7년(기원전541년), 초나라의 공자 圍가 그 왕 夾敖를 시해하고 왕에 오르니 그가 靈王이다.
十年,楚靈王會諸侯而以伐吳之朱方, 以誅齊慶封。
오왕 여제 10년(기원전538년), 초 영왕이 제후들과 회합하여 오나라의 朱方을 공격하여 제나라에서 도망쳐 온 경봉을 죽였다.
吳亦攻楚,取三邑而去。
오나라 또한 초나라를 공격하여 세 개 읍을 빼앗고 돌아갔다.
十一年,楚伐吳,至雩婁。
여제 11년(기원전537년), 초나라가 오나라를 정벌하여 雩婁에까지 이르렀다.
十二年,楚復來伐,次於乾谿,楚師敗走。
여제 12년(기원전536년), 초나라가 다시 정벌에 나서 乾谿에 주둔하였으나 초나라의 군대가 패해 달아났다.
▶ 靈王 : 楚靈王. 초나라의 26대 군주로 본명은 圍이고 즉위 후 虔으로 개명하였다.
共王의 아들이고 康王의 동생.
형 강왕 서거 후 그 아들인 郟敖가 왕위를 계승하자 令尹직을 장악하여 연소한 왕을 겁박하면서 막강한 실권을 누렸으며,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마침내 조카인 겹오와 그 소생인 공자 莫, 平夏까지 시해한 후 왕위를 찬탈하였다.
十七年,王餘祭卒,弟餘眛立。
여제17년(기원전531년), 오왕 여제가 죽고 동생 餘眛가 즉위하였다.
王餘眛二年,楚公子棄疾弒其君靈王代立焉。
왕 여매2년(기원전529년), 초나라 공자 棄疾이 그 군주 영왕을 시해하고 왕위에 올랐다.
▶ 棄疾 : 楚 平王. 춘추 시대 초나라의 國君. 熊氏이고, 이름은 居 또는 子居이며, 자는 棄疾이다. 共王의 다섯 번째 아들이다. 靈王 때 병사를 이끌고 眞定의 蔡나라를 멸망시켰다. 영왕이 죽자 형 公子比와 子晳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四年,王餘眛卒,欲授弟季札。
여매4년(기원전527년), 왕 餘眛가 죽으면서 동생 계찰에게 왕위를 주려하였다.
季札讓,逃去。
계찰은 사양하며 도망갔다.
於是吳人曰:
「先王有命,兄卒弟代立,必致季子。
季子今逃位,則王餘眛後立。
今卒,其子當代。」
이에 오나라 사람들이 말하였다.
“선왕의 명이 있어 형이 죽으면 동생이 왕위를 계승해야 하니 계찰에게 이르러야 마땅하다.
지금 계찰이 왕위를 피해 있으니 왕 여매가 뒤를 이었었다.
지금 여매가 죽었으니 그 아들이 대를 잇는 것이 마땅하다. ”
乃立王餘眛之子僚為王。
이에 왕 여매의 아들 僚를 왕으로 세웠다.
▶ 僚 : 吳王 僚 : 춘추시대 吳나라의 제21대 군주. 성은 姬. 휘는 僚 또는 州于이다.
王僚二年,公子光伐楚,敗而亡王舟。
오왕 요 2년(기원전525년), 공자 光이 초나라를 정벌하였으나 패하여 오왕의 배를 잃었다.
光懼,襲楚,復得王舟而還。
공자 광이 두려워하여 초나라를 기습하고 오왕의 배를 다시 빼앗아 돌아왔다.
▶ 公子光 : 오왕 諸樊의 아들로 후일 오나라 왕 闔廬가 된다.
五年,楚之亡臣伍子胥來奔,公子光客之。
왕 요 5년(기원전522년), 초나라에서 망명한 신하 伍子胥가 도망해오자 공자 광이 그를 객으로 대우하였다.
公子光者,王諸樊之子也。
공자 광은 왕 諸樊의 아들이다.
常以為吾父兄弟四人,當傳至季子。
季子即不受國,光父先立。
即不傳季子,光當立。
늘 말하기를 ‘내 아버지의 형제가 넷인데, 왕위는 계찰에게 전해지게 되어 있었다.
계찰이 지금 나라를 받지 않으려 하여 나의 아버지가 먼저 왕위에 오른 것이다.
지금 계찰에게 전해지지 않았으니 나 光이 마땅히 왕위에 올라야 한다.’라고 하였다.
陰納賢士,欲以襲王僚。
그는 은밀히 유능한 인재를 받아들여 왕 요를 습격하려고 하였다.
▶ 伍子胥 : 춘추시대의 정치가로 이름은 員이며 子胥는 字이다.
초나라 출신이나 아버지가 費無忌의 흉계로 인하여 楚 平王의 노여움을 사 아버지와 형이 처형되어 초나라를 탈출하였다.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 오나라로 망명하여 오왕 闔閭에게 등용되어 손무와 함께 초나라를 격파하고 복수를 하였으나, 오왕 합려가 죽고 아들인 夫差가 즉위하자 사이가 벌어지고 모함을 받아 자살하였다.
<史記列傳 권66. 伍子胥列傳>
▶ 即 : 지금. 허사 即 참조
八年,吳使公子光伐楚,敗楚師, 迎楚故太子建母於居巢以歸。
왕 요 8년(기원전519년), 오나라는 공자 광에게 초나라를 치게 하여 초나라 군대를 무찌르고, 지난 날 초나라 태자였던 建의 어머니를 居巢에서 모시고 돌아왔다.
因北伐,敗陳、蔡之師。
이 기세를 타고 북쪽을 쳐서 陳·蔡의 군대를 擊敗하였다.
九年,公子光伐楚,拔居巢、鐘離。
왕 요 9년(기원전518년), 공자 광이 초나라를 정벌하여 居巢와 鍾離를 빼앗았다.
初,楚邊邑卑梁氏之處女與吳邊邑之女爭桑, 二女家怒相滅,兩國邊邑長聞之, 怒而相攻,滅吳之邊邑。
당초 초나라의 변경읍인 卑梁氏의 처녀들과 오나라의 변경 읍에 사는 여자들이 뽕나무를 놓고 다투었으며, 양쪽 여자들의 집안사람들까지 성이 나서 서로를 없애려 하자, 두 나라 변경의 읍장들이 이를 듣고 화를 내며 서로를 공격한 끝에 오나라의 변경 읍을 멸하였다.
吳王怒,故遂伐楚,取兩都而去。
이에 오왕이 노한 까닭에 초나라를 공격하여 두 마을을 함락시키고 돌아온 것이다.
▶ 爭桑 : 뽕잎의 채집으로 싸우다.
▶ 兩都 : 居巢와 鍾離.
伍子胥之初奔吳,說吳王僚以伐楚之利。
오자서가 처음 오나라로 도망 와서 오왕 요에게 초나라 정벌의 이로운 점을 설명하였다.
公子光曰:
「胥之父兄為僇於楚,欲自報其仇耳。
未見其利。」
공자 광이 말하였다.
“오자서의 아버지와 형이 초나라에서 살해당해서 그 원한을 갚으려는 것일 뿐이며, 이로운 점은 보이지 않습니다”
於是伍員知光有他志,乃求勇士專諸, 見之光。
이에 오자서는 공자 광에게 다른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곧 용사 專諸를 찾아 공자 광을 만나게 하였다.
光喜,乃客伍子胥。
광은 기뻐하며 오자서를 빈객으로 대우하였다.
子胥退而耕於野,以待專諸之事。
오자서는 물러나 교외에서 농사를 지으며 전제의 거사를 기다렸다.
▶ 專諸 : 춘추시대 吳나라 사람으로 楚나라 伍子胥가 왕위 승계에 불만을 가진 오나라 공자 光에게 추천한 사람으로 공자 광을 위해 吳王 僚를 죽이고자 비수를 구운 생선 뱃속에 숨겨 가지고 들어가 그를 찔러 죽였다.
자신도 그 자리에서 잡혀 죽임을 당했고, 공자 광은 왕에 오르니 곧 吳王 闔閭이다.
闔閭는 왕이 된 뒤에 그의 공을 잊지 않고 專諸의 아들을 上卿으로 중용하였다. <史記列傳 권86 刺客列傳>
十二年冬,楚平王卒。
왕 요12년(기원전515년)겨울, 초 평왕이 죽었다.
十三年春,吳欲因楚喪而伐之, 使公子蓋餘、燭庸以兵圍楚之六、𤅬。
왕 요13년 봄(기원전514년), 오나라는 초나라의 국상을 틈타 정벌에 나섰으며, 공자 蓋餘와 燭庸에게 군대를 이끌고 초나라의 六縣과 灊縣을 포위하게 하였다.
使季札於晉,以觀諸侯之變。
계찰을 晉나라로 보내 제후들의 동정을 살피게 하였다.
楚發兵絕吳兵後,吳兵不得還。
초나라가 군사를 일으켜서 오나라 군대의 퇴로를 차단하니 오나라의 군대가 돌아올 수 없게 되었다.
於是吳公子光曰:
「此時不可失也。」
이에 공자 광이 말하였다.
“이때를 놓칠 수 없다!”
告專諸曰:
「不索何獲!
我真王嗣,當立,吾欲求之。
季子雖至,不吾廢也。」
전제에게 말하였다.
“구하지 않고 무엇을 얻겠는가!
내가 진정한 왕의 계승자이니 마땅히 즉위해야 하고, 나는 그렇게 하고자 한다.
계찰이 오더라도 나를 폐하지는 않을 터이다. ”
▶ 變 : 動態. 반응.
※위의 내용은 <史記列傳 권86 刺客列傳>과 유사하다.
專諸曰:
「王僚可殺也。
母老子弱,而兩公子將兵攻楚,楚絕其路。
方今吳外困於楚,而內空無骨鯁之臣, 是無柰我何。」
전제가 말하였다.
“왕 요를 죽일 수 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늙고 아들은 어리며, 두 아우가 군사를 이끌고 초나라를 공격하였으나 초나라가 퇴로를 끊어버렸습니다.
지금 오나라는 밖으로는 초나라에게 곤경에 처해 있고, 안으로는 강직한 신하가 전혀 없으니 저를 어찌하지 못할 터입니다. ”
光曰:
「我身,子之身也。」
공자 광이 말하였다.
“나의 몸이 곧 그대의 몸이다. ”
▶ 兩公子 : 吳王 僚의 어머니가 같은 형제 蓋余, 燭庸이다.
▶ 骨鯁之臣 : 목구멍의 생선가시처럼 듣기에 괴로운 직언을 하는 강직한 신하. 骨鯁은 생선의 뼈.
四月丙子,光伏甲士於窟室,而謁王僚飲。
4월 병자일, 공자 광이 무장한 병사들을 지하실에 숨겨두고 왕 요를 술자리에 초청하였다.
王僚使兵陳於道,自王宮至光之家, 門階戶席,皆王僚之親也,人夾持鈹。
왕 요는 병사들에게 왕궁에서 광의 집에 이르는 길에 진을 치게 했는데, 대문과 계단, 출입문과 자리에까지 모두 왕 요의 측근들이었고 하나같이 장검을 들었다.
公子光詳為足疾,入于窟室,使專諸置匕首於炙魚之中以進食。
공자 광은 발이 아픈 척하며 지하실로 와서 전제에게 뱃속에 비수가 들어 있는 구운 생선을 왕 요에게 올리게 하였다.
手匕首刺王僚,鈹交於匈,遂弒王僚。
비수로 왕 요를 찌르자 칼을 든 호위병들이 전제의 가슴을 찔렀으나 마침내 왕 요를 시해하였다.
公子光竟代立為王,是為吳王闔廬。
공자 광이 왕을 대신하여 즉위하니 그가 오왕 闔廬이다.
闔廬乃以專諸子為卿。
합려는 전제의 아들을 卿으로 삼았다.
▶ 窟室 : 지하실.
▶ 鈹 : 양쪽에 날을 낸 칼.
▶ 詳為足疾 : 거짓으로 발이 아프다고 함. 詳은 佯과 통하여 가장하다.
▶ 魚炙 : 물고기에 양념을 하여 대꼬챙이에 꿰어 불에 구운 것
▶ 進 : 헌상하다. 임금께 바침.
▶ 遂弒王僚 : 오왕 요12년(기원전515년), 공자 광이 오왕 요를 자신의 집으로 초청하여 전제에게 구운 생선 요리를 왕에게 올리게 했는데, 생선의 뱃속에는 비수가 숨겨져 있었다. 왕 앞에 나아간 전제는 생선을 찢어 가르고 그 비수로 요를 찔렀다. 요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고 전제도 왕의 측근들에게 살해되었다. <사기 권86. 자객열전>
季子至,曰:
「茍先君無廢祀,民人無廢主,社稷有奉,乃吾君也。
吾敢誰怨乎?
哀死事生,以待天命。
非我生亂,立者從之,先人之道也。」
계찰이 오나라로 돌아와서 말하였다.
“선군의 제사가 끊어지지 않으며 백성들이 군주를 잃지 않고 사직을 받든다면 그가 바로 나의 군주다.
내가 감히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죽은 이를 애도하고 산 사람을 섬겨 천명에 따를 뿐이다.
자신이 일으킨 난이 아니면 추대된 군주를 따르는 것이 선조들의 법도다. ”
復命,哭僚墓,復位而待。
요의 무덤에서 복명하고 곡을 한 다음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명을 기다렸다.
吳公子燭庸、蓋餘二人將兵遇圍於楚者, 聞公子光弒王僚自立,乃以其兵降楚, 楚封之於舒。
오나라의 공자 燭庸과 蓋餘 두 사람은 병사들을 이끌고 초나라에서 포위당해 있다가 공자 광이 왕 요를 시해하고 스스로 왕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는 바로 병사들을 데리고 초나라에 항복하니 초나라는 舒땅에 이들을 봉하였다.
▶ 茍 : 만약. ~한다면.
▶ 廢祀 : 제사가 끊어지다.
▶ 復命 : 명을 수행하고 보고하다. 계찰이 사신으로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왔음을 보고함을 말한다.
王闔廬元年,舉伍子胥為行人而與謀國事。
오왕 합려 원년(기원전514년), 오자서를 行人으로 발탁하여 나랏일을 함께 의논하였다.
楚誅伯州犁,其孫伯嚭亡奔吳, 吳以為大夫。
초나라가 伯州犁를 죽이고 그 손자 伯嚭가 오나라로 도망쳐 오자, 오나라는 그를 대부로 삼았다.
▶ 行人 : 朝覲·聘問의 일을 맡은 관직.
▶ 伯州犁(백주리) : 춘추시대 晉나라 사람. 伯宗의 아들이다.
晉厲公 5년 백종이 참언을 입어 죽자 楚나라로 달아났다. 楚康王때 太宰가 되었다. 초나라의 公子 圍가 郟敖를 살해하고 자립했는데, 그가 복종하지 않을까 두려워해 겹에서 살해하였다.
▶ 伯嚭(백비) : 太宰嚭. 춘추 시대 말기 楚나라 사람. 자는 子餘이다. 帛喜 또는 白喜로도 쓰인다. 초나라 大夫 伯州犁의 손자다.
간신 費無忌가 모함하여 아버지인 백극완을 영윤 囊瓦에게 그의 일가족과 함께 살해하게 하여 오나라로 망명하였다.
三年,吳王闔廬與子胥、伯嚭將兵伐楚, 拔舒,殺吳亡將二公子。
합려 3년(기원전512년), 오왕 합려와 오자서 그리고 백비가 군사를 거느리고 초나라를 공격하여 舒邑을 빼앗고 오나라에서 도망간 두 공자를 죽였다.
光謀欲入郢,將軍孫武曰:
「民勞,未可,待之。」
합려가 초나라 수도인 郢으로 쳐들어가려 했으나 장군 孫武가 말하였다.
“백성들이 지쳐서 안 되니 기다리십시오. ”
四年,伐楚,取六與𤅬。
합려4년(기원전511년), 초나라를 공격하여 육현과 첨현을 취하였다.
五年,伐越,敗之。
합려5년(기원전510년), 월나라를 공격하여 쳐부수었다.
六年,楚使子常囊瓦伐吳。
합려6년(기원전509년), 초나라가 子常 囊瓦에게 오나라를 공격하게 하였다.
迎而擊之,大敗楚軍於豫章,取楚之居巢而還。
이에 맞서 싸워 豫章에서 초나라의 군대를 크게 물리치고 초나라의 居巢를 취하여 돌아왔다.
▶ 二公子 : 蓋余, 燭庸.
▶ 孫武 : 孫子. 춘추시대의 전략가로 본명이 孫武이며 자는 長卿으로 齊나라 출신이다. 吳왕 闔廬 때 등용되어 伍子胥와 함께 楚나라를 무찔렀다.
▶ 囊瓦 : 춘추시대 초나라의 대부. 자는 子常
九年,吳王闔廬請伍子胥、孫武曰:
「始子之言郢未可入,今果如何?」
합려9년(기원전506년), 오왕 합려가 오자서와 孫武를 청하여 말하였다.
“처음 그대들은 郢을 공격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지금은 과연 어떻소?”
二子對曰:
「楚將子常貪,而唐、蔡皆怨之。
王必欲大伐,必得唐、蔡乃可。」
두 사람이 대답하였다.
“초나라의 장군 子常 낭와가 탐욕하니 속국인 唐과 蔡 두 나라가 원한을 품고 있습니다.
왕께서 초나라를 굳이 크게 치고 싶으시다면 당과 채와 연합하여야 합니다. ”
闔廬從之,悉興師,與唐、蔡西伐楚, 至於漢水。
합려는 그들의 말에 따라 전군을 동원하고 당과 채와 함께 서쪽으로 초나라를 쳐들어가서 漢水에 이르렀다.
楚亦發兵拒吳,夾水陳。
초나라 역시 군사를 일으켜 오나라에 저항하여 한수를 사이에 두고 진을 쳤다.
吳王闔廬弟夫槪欲戰,闔廬弗許。
오왕 합려의 동생 夫槪가 출전을 청했으나 합려가 허락하지 않았다.
▶ 郢 : 초나라의 도읍지.
夫槪曰:
「王已屬臣兵,兵以利為上,尚何待焉?」
부개가 말하였다.
“왕께서 이미 신에게 군의 통솔을 맡겼고, 병법에 이로움을 으뜸으로 삼는데, 아직도 기다린단 말입니까?”
遂以其部五千人襲冒楚,楚兵大敗,走。
하고는 자신의 군사 5천 명으로 초나라를 기습하여 楚軍을 대파하여 달아나게 하였다.
於是吳王遂縱兵追之。
이에 오왕도 군사를 풀어 추격하였다.
比至郢,五戰,楚五敗。
郢에 이르기까지 다섯 번을 싸워 초나라가 다섯 번 모두 패하였다.
楚昭王亡出郢,奔鄖。
楚昭王은 郢에서 빠져나와 鄖縣으로 도망쳤다.
鄖公弟欲弒昭王,昭王與鄖公奔隨。
운의 현령인 鄖公의 동생이 소왕을 시해하려 하자 소왕은 운공과 隨나라로 도망쳤다.
而吳兵遂入郢。
오나라 군대가 마침내 영에 진입하였다.
子胥、伯嚭鞭平王之尸以報父讎。
오자서와 백비는 초 평왕의 시체에 채찍질을 가함으로써 부모의 원한을 갚았다.
▶ 屬 : 위탁하다. 부탁하다.
▶ 冒 : 나아가다.
▶ 比至 : 도착하기 전에. 比는 앞서
▶ 鄖 : 서주 초기에서 춘추시대까지의 周나라의 제후국으로 초나라에 의해 멸망당하였다.
▶ 楚昭王 : 초나라의 제29대 군주. 이름은 珍이었다가 즉위 후 軫으로 고쳤고, 이후 다시 壬으로 고쳤다. 평왕의 아들이다.
기원전506년 겨울, 오자서와 손무가 오나라의 군사를 거느리고 초나라를 쳤다. 소왕은 초나라 최고의 명장 좌사마 沈尹戌과 영윤 子常을 보내어 오군을 막게 했으나 柏擧전투에서 자상의 욕심으로 초나라군이 크게 패하였다. 이어서 오군이 초나라의 수도인 郢都를 공격하여 들어가니, 소왕은 도망갔다. 雲夢澤에 이르렀을 때 오군이 쏜 화살에 부상을 입었으며, 이리저리 도망 다니다가 운나라, 수나라에 이르렀다. 申包胥가 秦나라에 가서 군사를 내어 구원해 주기를 빌었다. 秦哀公은 처음엔 응답하지 않았지만, 신포서가 조정의 뜰에서 꿇어앉고 곡을 한 지 7일이 지나도록 그치지 않자 마침내 그 충성에 감동하여 군사를 내어 초나라를 구원하였다.
▶ 子胥, 伯嚭鞭平王之尸 : 오자서와 백비는 평왕의 시신을 무덤에서 꺼내어 채찍으로 때려 그 부친의 원수를 갚았다.
오나라 군사가 영을 공격하였을 때 오자서는 초소왕을 잡으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으므로 초평왕의 무덤을 파헤쳐서 시체를 꺼내어 채찍질을 3백 번 가한 뒤에 그만두었다. <사기 열전 권66. 오자서열전>
十年春,越聞吳王之在郢,國空,乃伐吳。
합려10년(기원전505년)봄, 월나라는 오왕이 郢에 있어 나라가 비었음을 듣고는 오나라로 쳐들어왔다.
吳使別兵擊越。
오나라는 별도의 군대로 월나라를 치게 하였다.
楚告急秦,秦遣兵救楚擊吳,吳師敗。
초나라가 秦나라에 위급함을 알리자, 진나라는 군대를 보내 초나라를 구하고 오나라를 공격하니 吳軍이 패하였다.
闔廬弟夫概見秦越交敗吳,吳王留楚不去, 夫亡歸吳而自立為吳王。
합려의 동생 夫概는 진나라와 월나라가 동시에 공격하여 오나라가 패하고, 오왕 합려가 초나라에서 물러날 수 없는 상황을 보고, 오나라로 도망쳐 돌아와 스스로 오왕이 되었다.
闔廬聞之,乃引兵歸,攻夫。
합려가 이 사실을 듣고 곧 병사를 이끌고 돌아와 부개를 공격하였다.
夫敗奔楚。
부개는 패하여 초나라로 달아났다.
楚昭王乃得以九月復入郢,而封夫槩於堂谿, 為堂谿氏。
초소왕은 이 틈을 타 9월에 다시 영으로 돌아와 부개를 堂谿에 봉하고 堂谿氏로 삼았다.
十一年,吳王使太子夫差伐楚,取番。
합려11년(기원전504년), 오왕이 태자 夫差에게 초나라를 공격하여 番邑을 점령하게 하였다.
楚恐而去郢徙鄀。
초나라가 두려워하여 영을 버리고 鄀으로 도읍을 옮겼다.
▶ 交 : 모두.
▶ 堂谿 : 지금의 하남성 西平縣 서남.
十五年,孔子相魯。
합려15년(기원전500년), 孔子가 魯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十九年夏,吳伐越,越王句踐迎擊之檇李。
합려19년(기원전496년) 여름, 오나라가 월나라를 공격하자 월왕 句踐은 檇李에서 이를 맞이하여 싸웠다.
越使死士挑戰,三行造吳師,呼,自剄。
월나라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사들에게 도전하게 하고, 죄인으로 편성된 세 小隊를 吳軍에게 돌진하게 하고, 고함을 지르며 자신의 목을 베어 죽게 하였다.
吳師觀之,越因伐吳,敗之姑蘇, 傷吳王闔廬指,軍卻七里。
오의 병사들이 이를 구경하는 틈에 월나라는 오나라를 공격하여 姑蘇에서 패배시키고, 오왕 합려의 발가락에 상처를 입히니, 吳軍이 7리를 후퇴하였다.
吳王病傷而死。
오왕은 부상이 도져 죽었다.
闔廬使立太子夫差,謂曰:
「爾而忘句踐殺汝父乎?」
합려는 죽기 전에 태자 부차에게 뒤를 잇게 하면서 말하였다.
“너는 네 아버지를 죽인 구천을 잊을 수 있느냐?”
對曰:
「不敢!」
부차가 대답하였다.
“감히 잊을 수 없습니다!”
三年,乃報越。
3년 뒤 오나라는 끝내 월나라에 보복하였다.
▶ 越王 句踐 : 춘추전국시대 후기의 월나라 군주로 允常의 아들이다. 책사 범려의 뒷받침으로 당시 화남에서 강세를 자랑하고 있던 오나라를 멸망시켰다.
춘추오패의 한 사람이다.
▶ 死士 :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사.
▶ 三行(삼행) : 죄인들로 편성된 세 小隊를 말한다. 월왕 句踐은 죄가 있어 응당 죽을 자들로써 따로 三行(세 小隊)을 編成한 것이다.
‘구천은 죄인 三行으로 하여금 劍을 목에 대고서 吳軍 앞으로 가서 “두 나라 임금께서 작전하시는데, 우리는 군령을 범하여 군주의 행진 앞에서 민첩하지 못하였습니다. 형벌을 피할 수 없으니 감히 죽겠습니다.”라고 하고서 드디어 스스로 목을 베어 죽게 하니, 오군이 이를 괴상히 여겨 주목하자, 월나라는 그 틈을 이용해 공격하여 오군을 대패시켰다. ’
<춘추좌씨전 魯定公 14년(기원전496년)>
▶ 指 : 발가락. 손가락이라고 하는 설도 있다.
▶ 卻 : 후퇴하다.
▶ 夫差 : 오나라 왕 부차는 아버지의 복수 때문에 월나라를 크게 패배시켰다. 그 뒤 오나라가 晉나라와 패권을 다투던 중에, 월나라가 기회를 잡아 공격하니, 오나라는 망하고 오왕 부차는 자살하였다. <사기 권41. 越王句踐世家>
王夫差元年,以大夫伯嚭為太宰。
오왕 부차 원년(기원전495년), 대부 伯嚭를 太宰로 삼았다.
習戰射,常以報越為志。
부차는 군사들에게 전투와 활쏘기를 익히게 하면서 늘 월나라에 복수하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二年,吳王悉精兵以伐越,敗之夫椒, 報姑蘇也。
부차 2년(기원전494년), 오왕은 정예병을 모두 모아 월나라를 공격하여 夫椒山에서 패배시켜, 姑蘇의 패배를 갚았다.
越王句踐乃以甲兵五千人棲於會稽, 使大夫種因吳太宰嚭而行成,請委國為臣妾。
월왕 구천은 甲兵 5천을 이끌고 會稽山에 머무르면서, 대부 文種에게 오나라의 태재 백비를 통해서 오왕에게 화친을 요청하며, 나라를 바치고 노비가 되겠다고 청하였다.
▶ 伯嚭 : 춘추시대 楚나라 사람. 吳나라로 망명하여 太宰가 된 뒤 越王 句踐의 뇌물을 받고 和議를 받아들이게 하여, 월나라가 오나라를 멸망시키는 빌미를 제공하였으나 월왕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史記 권41. 越王句踐世家>
▶ 夫椒 : 산 이름.
▶ 姑蘇 : 江蘇省 吳縣 서남쪽에 있는 산으로, 산 위에 吳王 夫差가 西施를 위하여 쌓았다는 姑蘇臺가 있다.
▶ 越王句踐 : 춘추시대 월나라 군주로 允常의 아들이다. 책사 범려의 뒷받침으로 당시 화남에서 강세를 자랑하고 있던 오나라를 멸망시켰다. 춘추오패의 한 사람이다.
▶ 甲兵 : 무장한 병사.
▶ 會稽山 : 지금의 浙江省紹興縣에 있는 산
▶ 大夫種:文種. 춘추시대 월나라의 관료 겸 정치가로, 字는 子禽이다. 범려와 함께 구천을 보좌하여 오나라를 멸망시키는 데 공헌하였으나, 월나라의 승상을 지내다가 기원전472년 모반을 의심받아 구천왕의 노여움을 사기 직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 因 : 통하여.
▶ 行成 : 화친을 청하다.
▶ 臣妾 : 남녀 노비. 臣은 남자 노비. 妾은 여자 노비.
吳王將許之,伍子胥諫曰:
오왕이 이를 허락하려 하자 오자서가 간하였다.
「昔有過氏殺斟灌以伐斟尋,滅夏后帝相。
“옛날 有過氏는 斟灌氏를 죽이고 斟尋氏를 정벌함으로써 夏나라의 후손 相임금을 멸하였습니다.
帝相之妃后緡方娠,逃於有仍而生少康。
상임금의 왕비 后緡은 그때 임신 중이었으며, 有仍國으로 도망가서 少康을 낳았습니다.
少康為有仍牧正。
소강은 유잉국에서 가축을 관장하는 牧正이 되었습니다.
有過又欲殺少康,少康奔有虞。
유과씨가 다시 소강을 죽이려 하자 소강은 有虞國으로 도망쳤습니다.
有虞思夏德,於是妻之以二女而邑之於綸, 有田一成,有眾一旅。
유우씨는 夏나라의 은덕을 생각해서 딸 둘을 시집보내고 綸땅을 읍으로 주고 사방10리의 땅과 500명의 백성을 거느리게 했습니다.
▶ 有過氏 : 고대의 나라 이름
▶ 斟灌 : 짐관씨. 고대의 나라 이름.
▶ 斟尋 : 짐심씨. 고대의 나라 이름.
▶ 帝相 : 相임금. 姓은 姒, 氏는 夏后이다. 夏나라의 제5대 왕으로 相王이나 相帝라고도 부른다. 제4대 왕인 仲康의 아들이다.
▶ 有仍 : 有仍氏. 고대의 나라 이름으로 상임금의 왕비 后緡의 외가이다.
▶ 少康 : 夏나라의 제6대 왕. 少康帝, 少康王. 姓은 姒, 氏는 夏后이다.
▶ 牧正 : 새와 짐승을 기르는 관리의 우두머리.
▶ 有虞 : 有虞氏. 고대의 나라 이름. 舜임금의 후대.
▶ 成 : 사방10리의 땅.
▶ 旅 : 500명을 1旅라 한다.
▶ <史記> 夏本紀에는 相에 관해 아버지 중강이 죽은 뒤에 왕위에 올랐으며, 그가 죽은 뒤에는 아들인 小康이 즉위했다는 내용만 간략히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春秋左傳>에는 太康을 왕위에서 몰아내고 중강을 왕으로 세웠던 有窮氏의 제후 羿가 권력을 장악하자 상 임금은 도읍인 斟尋을 탈출해 商丘로 도망쳐서 같은 禹임금의 후손인 斟灌氏와 斟尋氏에게 의탁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예는 신하인 寒浞에게 죽임을 당하고, 한착은 澆와 豷를 낳았다. 그리고 한착의 아들인 요는 짐관씨와 짐심씨를 멸망시키고 상 임금을 죽였다. 상 임금의 왕후인 緡은 有仍으로 돌아가 소강을 낳았으며, 소강은 하나라 신하인 靡의 도움으로 한착의 아들들인 요와 희를 죽이고 다시 하나라를 부흥시켰다고 한다.
後遂收夏眾,撫其官職。
그 뒤 하나라의 유민을 거두어 관직제도를 정돈했습니다.
使人誘之,遂滅有過氏,復禹之績, 祀夏配天,不失舊物。
그리고 사람을 시켜 유과씨를 미혹시킨 뒤 마침내 유과씨를 멸망시키고 禹임금의 공적을 회복시켜, 하나라의 선조를 천제와 함께 제사 드리고 하나라의 지난날의 제도를 잃지 않았습니다.
今吳不如有過之彊,而句踐大於少康。
지금 오나라는 유과씨만큼 강하지 않은데, 구천은 少康보다 세력이 큽니다.
今不因此而滅之,又將寬之,不亦難乎!
이 기회에 월나라를 멸하지 않고 관대하게 용서하시려 하니, 우리의 환란이 되지 않겠습니까!
且句踐為人能辛苦,今不滅,後必悔之。」
더욱이 구천은 고생을 잘 견디는 사람이라, 지금 없애지 않으면 훗날 틀림없이 후회할 터입니다. ”
吳王不聽,聽太宰嚭,卒許越平, 與盟而罷兵去。
오왕은 오자서의 말을 듣지 않고 태재 백비의 말대로 결국 월나라와 화평을 허락하고 맹약한 뒤 군대를 철수시켰다.
▶ 收 : 모으다.
▶ 撫 : 다스리다.
▶ 舊物 : 하나라가 나라를 잃기 전의 제도와 국토.
▶ 辛苦 : 고생.
▶ 卒 : 결국.
▶ 平 : 두 나라가 강화하다.
七年,吳王夫差聞齊景公死而大臣爭寵, 新君弱,乃興師北伐齊。
부차 7년(기원전489년), 오왕 부차는 齊景公이 죽고 대신들이 서로 권력 다툼을 하며, 새 군주가 어리다는 소문을 듣고 군사를 일으켜 북쪽으로 제나라 정벌에 나섰다.
子胥諫曰:
「越王句踐食不重味,衣不重采,弔死問疾, 且欲有所用其眾。
此人不死,必為吳患。
今越在腹心疾而王不先,而務齊,不亦謬乎!」
오자서가 간하였다.
“월왕 구천은 두 가지 이상의 반찬을 먹지 않으며, 두 가지 색 이상의 옷을 입지 않으며, 백성 중 죽은 사람을 조문하고 병든 자를 위문하여 장차 그들을 쓸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틀림없이 오나라의 우환이 될 터입니다.
지금 월나라는 뱃속의 질병과 같거늘 왕께서 먼저 손쓰지 않고 제나라에 힘을 기울이시니 이 어찌 잘못이 아니겠습니까!”
▶ 齊景公 : 춘추시대 제나라의 제26대 군주. 성은 姜, 휘는 杵臼. 부친은 제나라 제24대 군주 靈公이다.
▶ 新君 : 悼公. 춘추시대 말기 제나라의 군주로 이름은 陽生이고, 景公의 아들이다. 경공이 죽자 태자 荼가 즉위하니 그가 晏孺子이다.
▶ 重味 : 두 가지 이상의 반찬.
▶ 重采 : 두 가지 이상의 색깔.
吳王不聽,遂北伐齊,敗齊師於艾陵。
오왕은 듣지 않고 끝내 북쪽으로 제나라를 정벌하여 艾陵에서 齊軍을 무찔렀다.
至繒,召魯哀公而徵百牢。
繒邑에 이르러 盧哀公을 불러 百牢의 향연을 요구하였다.
季康子使子貢以周禮說太宰嚭,乃得止。
노나라의 季康子가 子貢을 사신으로 보내 周나라의 예법을 들어 태재 백비를 설득하여 겨우 그만두게 하였다.
因留略地於齊魯之南。
이 기세를 틈타 오왕은 그곳에 머물며 제나라와 노나라의 남쪽 땅을 점령하였다.
九年,為騶伐魯,至與魯盟乃去。
부차 9년(기원전487년), 騶나라를 위해 노나라를 정벌하러 나섰다가, 노나라에 이르러 맹약을 하고 떠나왔다.
十年,因伐齊而歸。
부차 10년(기원전486년), 돌아오는 길에 제나라를 공격하였다.
十一年,復北伐齊。
부차 11년(기원전485년), 다시 북쪽으로 제나라를 공격하였다.
▶ 艾陵 : 옛 지명으로, 춘추시대 齊나라 땅이다. 지금의 山東省 萊蕪市 동북쪽.
▶ 百牢 : 牛‧羊‧豕가 1牢이니, 소‧양‧돼지를 각각 1백 마리씩 잡아서 베푸는 향연이다.
▶ 周禮 : 주례에는 연회용 牢는 천자가 12뢰, 上公은 9뢰, 候伯은 7뢰, 子爵과 男爵은 5뢰로 하게 되어있다. 부차는 子爵이었으므로 5뢰에 해당하나 100뢰의 연회를 베풀라는 것은 지나친 요구였다.
越王句踐率其眾以朝吳,厚獻遺之,吳王喜。
월왕 구천이 신하들을 이끌고 오나라에 조회하고, 많은 공물을 바치자 오왕이 기뻐하였다.
唯子胥懼,曰:
「是棄吳也。」
오자서만이 두려워하여 말하였다.
“이는 오나라를 버리는 것입니다. ”
諫曰:
「越在腹心,今得志於齊,猶石田,無所用。
且盤庚之誥有顛越勿遺,商之以興。」
간하여 말하였다.
“월나라는 뱃속에 든 질병과 같은데, 지금 제나라에서 뜻을 이루었지만 오히려 돌밭과 같아서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상서의 盤庚之誥에서 화근은 절대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商나라가 흥성한 것입니다. ”
▶ 石田 : 돌밭. 무용지물.
▶ 盤庚之誥 : 書經(尚書)의 盤庚 中篇에 실려 있는 말로 殷나라 중흥 시기의 군주 盤庚이 奄에서 殷으로 遷都하려 할 때 백성들이 새 거주지로 가려 하지 않자, 여러 근심하는 사람들을 불러서 맹세하는 말을 기록한 것이다.
※尚書->商書->盤庚上
(乃有不吉不迪,顛越不恭,暫遇姦宄,我乃劓殄滅之,無遺育,無俾易種于茲新邑. )
만약 선량하지 못하고 양순하지 않아, 법도를 어기고 명령을 따르지 않고, 속이고 간사하고 나라 안팎으로 나쁜 짓을 하는 자가 있으면, 나는 그의 온 집안을 깡그리 죽여 버리고, 자손까지도 남겨놓지 않아, 이 새로운 도읍으로 씨가 옮겨가지 않도록 할 것이오. 《尚書·盤庚》
▶ 顛越 : 전락하다. 법도를 어김.
吳王不聽,使子胥於齊, 子胥屬其子於齊鮑氏,還報吳王。
오왕은 듣지 않고 오자서를 제나라에 사신으로 보내니, 오자서는 자신의 아들을 제나라의 鮑氏에게 맡기고 돌아와 오왕에게 보고하였다.
吳王聞之,大怒,賜子胥屬鏤之劍以死。
오왕은 이를 알고 크게 노하여 오자서에게 屬鏤劍을 내려 죽게 하였다.
將死,曰:
「樹吾墓上以梓,令可為器。
抉吾眼置之吳東門,以觀越之滅吳也。」
죽기에 앞서 오자서가 말하였다.
“내 무덤 위에 가래나무를 심어 오왕의 관을 짜도록 하라.
내 눈알을 도려내어 吳城의 동문에 걸어 월나라가 오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을 보게 하라. ”
▶ 屬鏤之劍 : 劍의 이름.
▶ 樹吾墓上以梓,令可為器 : “내가 죽거든 내 무덤 앞에 가래나무를 심어 그것이 자라게 되면 오왕을 위한 관을 짜도록 해라! 그리고 나의 시신에서 두 눈을 떼어내어 吳城의 동문 위에 걸어라, 내가 월나라가 쳐들어와 오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을 보리라!” <사기 권66. 伍子胥列傳>
▶ 樹 : 나무를 심다.
▶ 梓 : 가래나무.
▶ 器 : 棺.
▶ 抉 : 도려내다.
齊鮑氏弒齊悼公。
제나라의 대부 鮑氏가 齊悼公을 죽였다.
吳王聞之,哭於軍門外三日,乃從海上攻齊。
오왕이 이를 듣고 군문 밖에서 사흘을 곡하고 바다를 통하여 제나라를 공격하였다.
齊人敗吳,吳王乃引兵歸。
제나라 사람들이 오나라를 물리쳤고, 오왕은 군대를 거두어 돌아왔다.
▶ 齊鮑氏弒齊悼公 : 제도공 4년(기원전485년), 오나라와 노나라가 제나라의 남방을 공격하였다. 鲍牧이 悼公을 시해하고 오나라에 부고를 냈다. 오왕 부차는 군문 밖에서 사흘을 곡하고 바다를 통해 제나라를 토벌하러 나섰다. <사기 세가 권32. 齊太公世家>
▶ 鮑氏 : 鲍牧. 성은 姒이고 씨는 鲍. 鮑叔牙의 후손이다. 춘추시대 제나라의 대부이다.
▶ 齊悼公 : 춘추시대 말기 제나라의 國君. 이름은 陽生이고, 景公의 아들이다. 경공이 죽자 태자 荼가 즉위하니 그가 晏孺子이다.
十三年,吳召魯、衛之君會於橐皋。
부차 13년(기원전483년), 오나라가 노나라와 衛나라의 국군을 불러 橐皐에서 회맹하였다.
▶ 吳王召魯衛之君會之橐皋 : 오왕 부차13년 오왕이 노 애공을 橐皐로 불러 회맹하고, 다시 위 출공을 鄖땅으로 불러 회견하였다.
十四年春,吳王北會諸侯於黃池, 欲霸中國以全周室。
부차 14년(기원전482년) 봄, 오왕 부차는 북쪽 黃池에서 제후들과 회맹하여 중원의 覇者가 되어 주 왕실을 보전하려 하였다.
六月[丙]子,越王句踐伐吳。
6월 병자일, 월왕 구천이 오나라를 공격하였다.
乙酉,越五千人與吳戰。
을유일, 월나라의 5천 명이 오나라와 교전하였다.
丙戌,虜吳太子友。
병술일에 오나라의 태자 友를 포로로 잡았다.
丁亥,入吳。
정해일에는 월나라 군사가 오나라에 진입하였다.
吳人告敗於王夫差,夫差惡其聞也。
오나라 사람이 오왕 부차에게 패배를 보고하였는데, 부차는 이 소식이 알려지는 것이 싫었다.
或泄其語,吳王怒,斬七人於幕下。
누군가 이 일을 누설하자 오왕이 노하여 군막 안에서 7인을 죽였다.
▶ 北會諸侯於黃池 : 오왕 부차14년(기원전482년). 오왕은 북쪽으로 나아가 제후들을 黃池에 소집하여 周室을 등에 업고 패자의 자리에 앉으려고 하였다. <國語 吳語>
▶ 黃池 : 지금의 하남성 封邱縣 서남쪽.
▶ 全 : 보전하다.
七月辛丑,吳王與晉定公爭長。
7월 신축일, 오왕은 晉定公과 盟主자리를 다투었다.
吳王曰:
「於周室我為長。」
오왕이 말하였다.
“주 왕실에서는 내가 윗사람이다. ”
晉定公曰:
「於姬姓我為伯。」
이에 진 정공이 말하였다.
“희씨 성 중에서는 내가 맹주다. ”
趙鞅怒,將伐吳,乃長晉定公。
晉나라의 趙鞅이 화를 내며 오나라를 공격하려 하자, 이에 진 정공이 맹주가 되었다.
吳王已盟,與晉別,欲伐宋。
오왕은 맹약을 하고 진 정공과 헤어진 후 宋나라를 정벌하려 하였다.
太宰嚭曰:
「可勝而不能居也。」
태재 백비가 말하였다.
“승리할 수는 있겠지만 차지할 수는 없을 겁니다.”
乃引兵歸國。
이에 군대를 이끌고 귀국하였다.
國亡太子,內空,王居外久, 士皆罷敝,於是乃使厚幣以與越平。
오나라는 태자를 잃었고, 나라 안은 비었으며 왕은 밖에서 오래 머물렀고, 병사들은 모두 지쳐버렸으므로 이에 곧 사신을 보내 후한 예물로 월나라와 화친하였다.
▶ 吳王與晉定公爭長 : 도공9년(기원전482년), 晉나라 定公과 오왕 夫差가 회맹하여 黃池에서 맹주가 되려고 다투어 결국 진정공이 먼저 맹주가 되었다. <史記 本紀권05. 秦本紀>
▶ 長 : 盟主.
▶ 晉定公 : 춘추시대 진나라의 國君. 이름은 午고, 頃公의 아들이다. 재위한 지 15년 趙鞅과 中行寅, 范吉射 三卿이 內訌을 일으키자 나라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범씨와 중행씨를 격퇴했지만, 조앙의 자리는 회복시켰다. 黃池의 會盟에서 吳나라의 夫差와 우두머리를 다투다가 조앙의 도움을 받아 오나라가 진나라를 받들게 되었다. 37년 동안 재위하였다.
▶ 周室我為長 : 선조인 吳太伯은 周太王 古公亶父의 아들이며, 周나라의 왕 季歷의 형이므로 晉나라의 선조인 季歷보다 서열이 윗사람이라고 한 것이다.
▶ 趙鞅 : 趙簡子. 춘추시대 말기 晉나라 사람으로 趙孟 또는 志父로도 불린다. 진나라 내부에서6卿이 세력 다툼을 벌일 때 2경인 范氏와 中行氏를 몰아내고 趙나라를 일으키는 바탕을 마련하였다.
▶ 伯 : 霸와 통용된다. 제후의 盟主.
▶ 罷 : 疲와 통용된다. 피로하다.
十五年,齊田常殺簡公。
부차15년(기원전481년), 제나라의 대부 田常이 簡公을 시해하였다.
▶ 田常 : 齊나라의 대부 田恒을 가리킨다. 齊나라의 임금 簡公을 시해하고 平公을 옹립한 다음에 자신은 재상이 되었다. 제나라의 易姓의 화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十八年,越益彊。
부차18년(기원전478년) 월나라가 더욱 강대해졌다.
越王句踐率兵[復]伐敗吳師於笠澤。
월왕 구천이 군대를 이끌고 다시 오나라를 공격하여 笠澤에서 오나라를 물리쳤다.
楚滅陳。
초나라가 陳나라를 멸망시켰다.
二十年,越王句踐復伐吳。
부차20년(기원전476년), 월왕 구천이 다시 오나라를 공격하였다.
二十一年,遂圍吳。
부차21년(기원전475년), 마침내 오나라의 수도를 포위하였다.
二十三年十一月丁卯,越敗吳。
부차23년(기원전473년) 11월 정묘일, 월나라가 오나라를 패배시켰다.
越王句踐欲遷吳王夫差於甬東,予百家居之。
월왕 구천이 오왕 부차를 甬東으로 유배시켜 민가 100호를 주어 살게 하려고 하였다.
吳王曰:
「孤老矣,不能事君王也。
吾悔不用子胥之言,自令陷此。」
오왕이 말하였다.
“내가 늙어 군왕을 섬길 수 없다.
내가 자서의 말을 듣지 않아 이 지경에 빠진 것을 후회한다. ”
遂自剄死。
이에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越王滅吳,誅太宰嚭,以為不忠,而歸。
월왕이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태재 백비를 불충하다고 하여 목을 베고는 돌아갔다.
▶ 誅太宰嚭 : 월왕 구천이 마침내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오왕 부차를 죽였다. 그리고 태제 백비를 죽였는데, 백비가 그 군주에게 충성하지 못하고 다른 나라에서 지나친 뇌물을 받고 자신과 한 패가 되었다는 이유였다. <사기 권66. 오자서열전>
太史公曰:
孔子言
「太伯可謂至德矣,三以天下讓, 民無得而稱焉」。
余讀春秋古文,乃知中國之虞與荊蠻句吳兄弟也。
延陵季子之仁心,慕義無窮,見微而知清濁。
嗚呼,又何其閎覽博物君子也!
태사공은 말한다.
“孔子가 말하기를, ‘태백은 지극한 덕이 있다고 이를 만하다. 천하를 세 번이나 양보하였으나 백성들이 그 덕을 어찌 칭송할지를 몰랐다.’라고 하였다.
내가 <春秋>의 고문을 읽고서야 중원의 虞나라와 荊蠻의 句吳가 형제임을 알았다.
延陵季子의 어진 마음은 끝없이 의리를 사모하여 미세한 것을 보고도 맑고 탁함을 아는구나.
아! 그는 또 얼마나 식견이 넓고 학식이 풍부한 군자였던가!”
▶ 孔子言 : “子曰:「泰伯,其可謂至德也已矣!三以天下讓,民無得而稱焉。」”(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泰伯은 지극한 덕이 있다고 이를 만하다. 세 번 천하를 사양하였으나 백성들이 그 덕을 칭송할 수 없게 하였구나. ”) <論語·太白·第一章>
▶ 春秋 : 동주 시대 노나라의 편년체 역사서.
▶ 虞與荊蠻句吳兄弟也 : 우나라는 춘추시대 주나라의 제후국이며, 주태왕의 아들인 태백은 형만으로 달아나 스스로 구오라 불렀다.
▶ 清濁 ; 정치의 맑고 탁함.
▶ 閎覽 : 보고 들은 것이 많고 식견이 넓다.
▶ 博物 : 박식하다. 두루 많이 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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