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편은 30世家 중 네 번째 편으로 周의 개국 공신인 召公 奭이 燕에 봉해진 이후 燕의 800여 년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
燕은 춘추시대의 주 제후국이자, 전국시대의 전국 칠웅 가운데 하나였다.
周武王(姬發)이 은을 멸망시키고 그의 동생 召公 奭을 燕의 제후에 봉하여 소공 석이 燕의 始祖가 되었다.
기원전3세기, 昭王 때가 最盛期였으며, 기원전 6세기, 惠公 때에는 정치적 혼란에 휩싸였다. 燕王噲 때에는 子之를 재상으로 중용해 개혁을 추진했는데, 기원전 316년 堯와 舜을 본떠 子之에게 禪讓을 하여 커다란 정치적 혼란을 가져왔다.
기원전 227년, 燕의 太子丹이 荊軻를 자객으로 보내 秦王 政을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분노한 秦王이 王翦으로 하여금 燕을 공격케 하여 기원전 226년 燕를 함락하였다. 燕王 喜는 太子丹을 죽여 和議를 요청하며 요동지역으로 피신했지만, 기원전 222년 秦 장수 王賁에게 사로잡혀 燕은 멸망되었다.
燕이 진에 멸망하자 망명자가 만주와 조선에 유입되었으며, 秦이 망하고 초한전쟁이 시작되자 중국인이 만주와 조선에 유입되는 것이 더욱더 많아져 위만이 중국에서 망명하여 왕검성에 도읍해 衛滿朝鮮을 세웠다.
司馬遷은 太史公 自序에서
“周武王이 紂왕을 토벌하였으나 천하의 화합이 이루어지기 전에 세상을 떴다. 성왕이 즉위하였으나 나이가 어려 주공이 섭정하자 관숙과 채숙이 의심하여 淮水의 夷族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으나 召公이 앞장서서 덕으로 다스려 왕실을 편안하게 하고 동쪽의 땅도 안녕을 되찾았다. 연왕 燕王 噲의 섣부른 선양이 재앙과 난리를 불러일으켰다. <시경>의 ‘甘棠’시를 칭송하며 제4편 ‘燕世家’를 지었다.”
라고 하였다.
召公奭與周同姓,姓姬氏。
召公奭은 周와 同姓으로 姓이 姬氏이다.
周武王之滅紂,封召公於北燕。
주武王이 은 紂王을 멸망시키고 소공을 北燕에 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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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召公奭: 姬姓으로 이름은 奭이다. 召公, 召伯, 소백 召伯 奭, 召康公으로도 불린다.
주무왕의 동생으로 召와 燕의 초대 군주이다. 제 태공, 주공 단과 함께 주를 개국한 공신 중 하나로 형인 주무왕이 소강공을 召땅에 봉하고 제후로 삼았다. 그 후 주무왕 姬發이 은을 멸망시키고 召康公 奭을 燕의 제후에 봉하고, 도읍을 薊(계)로 정하게 하였다. 주무왕이 세상을 떠나고 어린 주성왕이 서자, 소강공은 주성공을 보좌하기 위해 자신의 장남인 克으로 하여금 燕 제후가 되게 하였고 자신은 서주의 수도인 鎬京과 원래 봉국인 소에 머물렀다. 주문왕, 주무왕, 주성왕, 주강왕의 4명의 군주를 섬겼다. 주성왕 치세 때, 三公이 되었고, 이어서 太保가 되었다.
▶ 周武王之滅紂: 주무왕이 은 주왕을 토벌하여 은을 멸망시켰다. 紂는 商(殷)왕조의 마지막 왕. 본명은 帝辛 또는 受이고, 紂는 무도한 군주에게 주어진 시호이다.
▶ 北燕: 河南省지역에도 燕이 있어서, 하남성 지역의 燕를 南燕이라 칭하고, 소공석의 燕을 北燕이라고 호칭하였다.
其在成王時,召公為三公:
自陜以西,召公主之;自陜以東,周公主之。
成王 재위 때 소공은 3공의 한 사람이 되었는데,
陝땅 서쪽 지역은 소공이 다스리고, 섬 땅 동쪽 지역은 周公이 다스렸다.
成王既幼,周公攝政,當國踐祚,召公疑之,作君奭。
성왕이 아직 어려서 주공 旦이 섭정하니, 집권하여 제위를 차지할 것이라고 소공이 의심하더니, 이에 주공이 <君奭>을 지었다.
君奭不說周公。
君奭(소공)은 주공을 언짢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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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成王: 周成王. 주의 제2대 왕이다. 성은 姬, 이름은 誦이다. 주무왕의 아들이다.
▶ 三公: 太師, 太傅, 太保의 官職을 三公이라 하며 당시 소공은 太保의 관직에 있었다.
▶ 自陜以西: 주 첫해에 무왕의 형제 주공과 소공 사이의 알력으로 하남성 서부의 섬현을 경계로 하여 동서를 주공과 소공이 나누어 가지면서 섬서라는 이름이 유래하였다.
▶ 當國: 국정을 주관한다. 집권하다.
▶ 踐祚: 즉위하다. 祚는 阼(조: 동쪽 계단)와 같다. 천자의 자리. 제위.
▶ 君奭: <尙書>의 篇名. 周公이 召公에게 준 글로 주공이 소공에게 함께 성왕을 보좌하자고 당부를 하는 격려의 말을 담고 있다. ‘君’은 奭을 부름에 존칭이다
▶ 不說: 마음이 맞지 않다. 說은 悦과 같다.
周公乃稱
「湯時有伊尹,假于皇天;
在太戊時,則有若伊陟、臣扈,假于上帝,巫咸治王家;
在祖乙時,則有若巫賢;
在武丁時,則有若甘般:
率維茲有陳,保乂有殷」。
주공이 말하였다.
“상 湯왕 때는 伊尹이 있어 하늘을 감통시켰다.
太戊 때는 伊陟과 臣扈 같은 이가 있어 상제를 감동하게 하였으며, 巫咸은 왕실을 보필하였다.
祖乙시대에는 巫賢 같은 현자가 있었고,
武丁때는 甘般 같은 인물이 있었다.
이렇게 포진한 신하들이 은을 지키고 다스렸다.”
於是召公乃說。
이에 소공이 마음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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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湯: 고대 商의 초대 왕. 성탕이라고도 한다. 하의 걸왕을 멸망시키고 상를 세웠다.
▶ 伊尹: 商를 개국한 湯王의 재상으로 尹은 관명인 尹正의 尹이고 이름은 摯이다. 阿衡의 관직을 맡고 탕왕을 보좌하여 하 桀王을 정벌하고 商를 개국하였으며, 탕왕의 손자인 太甲이 즉위한 다음 무도한 짓을 자행하자 추방하였다가 3년 후에 다시 왕에 복위시키고 자신은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 <史記本紀 권03. 殷本紀>
▶ 假: 이르다. 格과 통용된다. 感通. 마음에 느끼어 통함. 하늘의 마음을 만족시키다.
▶ 太戊: 商의 제9대 왕으로 성은 子이며, 이름은 太戊, 王號는 中宗이다. 현인 伊陟을 재상으로 삼아 商을 부흥하였다.
▶ 伊陟: 伊尹의 아들.
▶ 巫咸: 殷의 賢臣.
▶ 王家: 왕실.
▶ 祖乙: 하단갑의 아들. 조을왕이 즉위하여 商이 다시 흥성해졌다. 巫賢이 정치를 맡았다. <사기 본기 권03. 은본기>
▶ 武丁: 盤庚의 아우인 小乙의 아들로 이름은 武丁이며. 덕이 높아 존경할 만하기 때문에 號를 ‘高宗’이라 하였다.
▶ ‘率維茲有陳,保乂有殷’: 서경 <君奭>의 원문 일부이다.
▶ 率: 語氣詞.
▶ 維: 語助詞.
▶ 陳: 포진하다.
▶ 保乂: 다스리다. 안정시키다.
召公之治西方,甚得兆民和。
소공이 섬서 지방을 다스릴 때 백성의 환심을 많이 얻었다.
召公巡行鄉邑,有棠樹,決獄政事其下,自侯伯至庶人各得其所,無失職者。
소공이 향읍을 순시할 때면 팥배나무 아래에서 송사를 판결하고 정사를 처리하였는데, 귀족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각자 맞는 일을 맡기니 자리를 잃는 사람이 없었다.
召公卒,而民人思召公之政,懷棠樹不敢伐,哥詠之,作甘棠之詩。
소공이 죽자 백성들은 소공의 정치가 생각하고 팥배나무가 그리워 감히 베지 않고 그를 노래하며 ‘甘棠’이란 시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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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兆民: 민중. 만백성.
▶ 決獄: 심리하다.
▶ 侯伯: 작위를 가진 귀족.
▶ 哥詠: 노래하다. 哥는 歌와 통용된다.
▶ 甘棠: <詩經·召南>의 편명으로 召公姬 奭을 기리는 노래로 전해진다. 召伯이 섬서 지방을 순행하여 文王의 政令을 펼 적에 甘棠 아래에서 정사를 처리하였다. 소공 석이 세상을 떠나자 백성들은 그의 선정을 흠모하여 송사와 정사를 처리하던 감당나무를 소중히 여기고 돌보았으며, 〈감당〉이라는 제목으로 시를 지어서 그의 공덕을 노래하였으며 전문은 아래와 같다.
“蔽芾甘棠, 勿翦勿伐, 召伯所茇。
蔽芾甘棠, 勿翦勿敗, 召伯所憩。
蔽芾甘棠, 勿翦勿拜, 召伯所說。”
“우거진 팥배나무, 자르지도 베지도 마라. 소백님이 머무르시던 곳.
우거진 팥배나무, 자르지도 꺾지도 마라. 소백님이 쉬시던 곳.
우거진 팥배나무, 자르지도 휘지도 마라. 소백님이 지내시던 곳. ”
※甘棠: 팥배나무. 杜梨라고도 하며 열매가 흰 것을 棠이라 하고 붉은 것을 杜라 한다. 說는 머물러 쉬다.
▶ 已: 以와 통용된다. (허사 已참조)
自召公已下九世至惠侯。
소공 이후로 9대를 지나 惠侯에 이르렀다.
燕惠侯當周厲王奔彘,共和之時。
연 혜후 때는 주 厲王이 彘로 달아나고 共和政의 시기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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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周厲王: 춘추시대 周의 國君. 성은 姬씨고, 이름은 胡다. 夷王의 아들이고, 周穆王의 4세손이다. 탐욕스럽고 잔인하며 이익만 좇았고, 榮夷公을 卿士로 삼았다. 포악하고 사치스러운데다 오만한 성격이라 諸侯는 조회를 오지 않았고, 사람들은 그를 비방하였다. 衛巫를 시켜 비방을 감시하니 사람들이 감히 말을 꺼내지 못하고 길에서도 눈으로만 인사를 하였다. 나중에 화가 난 백성들이 서로 들고 일어나 공격하니 彘로 달아났다. 14년 뒤 체에서 죽었다. <사기 본기 권04. 周本紀>
▶ 共和: 周의 厲王이 國人暴動으로 쫓겨나고 召穆公과 周定公이 공동으로 왕을 대신하여 執政하던 시기를 뜻하며, 왕이 없이 정치가 이루어지는 ‘共和制’란 말이 여기에서 생겼다(기원전841년~기원전828년) 이 공화 원년부터 사기의 <12제후연표>가 시작되고 있다. <사기 본기 권04. 주본기>
頃侯二十年,周幽王淫亂,為犬戎所弒。
경후 20년(기원전771년)에 주 幽王이 음란함으로 인하여 犬戎에게 시해당하였다.
秦始列為諸侯。
秦가 처음으로 제후 반열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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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幽王: 周幽王. 주의 12대 왕. 정치에는 관심이 없이 여흥과 주색만을 탐닉하다 서주 왕실을 망하게 하였다. 애첩 褒似를 총애한 나머지 정비 申后와 그 소생인 태자 宜臼를 폐하고 포사와 그 소생 伯服을 정비와 태자에 책봉함으로써 申侯를 격분시켰고, 결국 견융과 신후의 연합 공격을 받고 사살되었다. <사기 본기04. 주본기>
▶ 秦始列為諸侯: 주가 견융의 난을 피해 동쪽 낙읍으로 천도할 때 양공은 군대를 거느리고 周平王을 호송하였다. 이 공으로 周平王이 襄公을 제후로 봉하고 岐山의 서쪽 땅을 하사하였다. <사기 본기 권05. 秦本紀>
二十四年,頃侯卒,子哀侯立。
경후24년(기원전767년)에 경후가 죽고 아들 哀侯가 즉위하였다.
哀侯二年卒,子鄭侯立。
애후가 2년(기원전765년)만에 죽고 아들 鄭侯가 즉위하였다.
鄭侯三十六年卒,子繆侯立。
정후는 36년(기원전729년)만에 죽고 아들 繆侯가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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繆侯七年,而魯隱公元年也。
목후 7년(기원전722년)은 魯隱公의 원년이다.
十八年卒,子宣侯立。
목후가 재위 18년(기원전711년)만에 죽고 아들 宣侯가 즉위하였다.
宣侯十三年卒,子桓侯立。
선후가 재위 13년(기원전698년)만에 죽고 아들 桓侯가 즉위하였다.
桓侯七年卒,子莊公立。
환후가 재위7년(기원전691년)만에 죽자 아들 莊公이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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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隱公: 魯隱公. 노의 제14대 임금이다. 이름은 息姑이다. 노혜공의 서장자로, 어머니는 聲子이며, 혜공이 죽자 태자인 아우 윤의 나이가 어려 노 사람들에게 옹립되어 섭정하였다.
莊公十二年,齊桓公始霸。
장공 12년(기원전679년), 齊桓公이 처음으로 제후의 맹주가 되었다.
十六年,與宋、衛共伐周惠王,惠王出奔溫,立惠王弟穨為周王。
장공 16년(기원전675년), 宋이 衛와 함께 周惠王을 공격하니 혜왕은 溫邑으로 도망쳤고, 혜왕의 동생 姬頹가 周의 왕이 되었다.
十七年,鄭執燕仲父而內惠王于周。
장공 17년(기원전674년), 鄭이 燕의 仲父를 잡고 혜왕을 주로 돌려보냈다.
二十七年,山戎來侵我,齊桓公救燕,遂北伐山戎而還。
장공 27년(기원전664년), 山戎이 燕을 침략하자, 제환공이 燕를 구원하여 북으로 산융을 정벌한 다음 齊로 돌아갔다.
燕君送齊桓公出境,桓公因割燕所至地予燕,使燕共貢天子,如成周時職;
使燕復修召公之法。
연장공이 제환공을 배웅하느라 齊의 국경 안으로 들어갔는데, 제환공은 연장공이 밟은 땅을 떼어서 燕에 주고, 燕을 제후들과 함께 천자에게 조공하도록 하고, 燕으로 하여금 주성왕 때의 직분을 따르도록 하고 召公의 정치를 다시 시행하도록 하였다.
三十三年卒,子襄公立。
장공이 재위 33년(기원전658년)만에 죽고 아들 襄公이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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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莊公: 燕莊公. 춘추시대 燕의 제17대 군주. 燕 군주는 처음으로 ‘公’이라고 칭하기 시작하였다. 公은 고대 5작위 중 최고의 작위이다. 연 장공 27년(기원전664년), 山戎이 燕을 침범하자 연장공은 齊桓公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제환공이 병사를 거느리고 북상하여 산융을 쳐서 그들을 무찌르고 孤竹國에 이르러 회군하였다. 연장공이 감사를 표시하다가 齊와 燕의 국경을 넘어버렸다. 당대에 그것이 무례로 치부되었으나 제환공은 대범하게 연장공이 넘어간 만큼의 땅을 燕에게 떼어 주었다. 제환공은 연장공에게 燕의 시조인 소공 석의 정치를 하게 하고 주 천자에게 조공을 바치게 하였다. <[史記世家]권32. 齊太公世家>
▶ 惠王: 周혜왕. 성은 姬, 이름은 閬, 시호는 惠王이다. 주 제16대 釐王의 아들이다. 기원전677년 아버지 이왕이 죽자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할아버지 주장왕의 애첩 왕요의 아들로 장왕에게 사랑을 받은 작은아버지 子頹의 일파를 탄압하여, 자퇴의 스승 위국 등 대신들의 장원을 빼앗아 짐승을 기르는 곳으로 만들었다. 또 대부 子禽, 邊伯, 祝跪, 詹父의 재산을 침해하였다.
▶ 頹: 왕자 王子 頹. 동주의 비정통 왕이다. 子頹라고 칭하기도 한다. 주장왕의 서자로, 주혜왕의 숙부이다. 장왕의 총애를 받아 혜왕 때 난을 일으켜 왕을 칭하였다. 혜왕측이 한 번은 반란군을 소자의 영읍인 溫으로 쫓아냈으나, 연과 위 두 가 자퇴를 지원해 혜왕이 쫓겨났다. 혜왕은 온으로 피했고 鄭의 여공은 자신이 13년간 망명할 때의 근거지인 櫟에서 혜왕을 맞이하였다. 자퇴는 겨울에 周의 왕으로 등극하였다. 혜왕4년(기원전673년), 정백이 괵숙과 협력해 자퇴와 그 일당 다섯 대부를 죽이고 혜왕을 복위시켰다. <사기 권04. 周本紀>
▶ 内: 納과 같다. 거두어들이다.
▶ 山戎: 北狄. 서융이라고 하며 주로 감숙성 일대에 거주하던 이민족이다.
▶ 成周: 周成王이 낙양에 王城을 건조하고서 遷都하였으므로 成周라고 한다.
▶ 職: 군왕에 대한 신하로서 조공을 하는 직분.
▶ 召公: 姓은 姬, 이름은 奭이다. 周의 정치가로서 戰國七雄의 하나인 燕의 始祖이기도 하다. 周公과 함께 周의 건국과 안정에 크게 기여하였다.
襄公二十六年,晉文公為踐土之會,稱伯。
양공 26년(기원전632년), 晉文公이 踐土에서 회맹하여 패주가 되었다.
三十一年,秦師敗于殽。
양공 31년(기원전267년), 秦의 군대가 殽山에서 晉에게 패하였다.
三十七年,秦穆公卒。
양공 37년(기원전621년), 秦穆公이 죽었다.
四十年,襄公卒,桓公立。
양공 40년(기원전618년), 양공이 죽고 桓公이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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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伯: 霸와 통용된다. 제후의 맹주
桓公十六年卒,宣公立。
환공은 재위16년(기원전602년)만에 죽고 宣公이 즉위하였다.
宣公十五年卒,昭公立。
선공은 재위15년(기원전587년)만에 죽고 昭公이 즉위하였다.
昭公十三年卒,武公立。
소공이 재위13년(기원전574년)만에 죽고 武公이 즉위하였다.
是歲晉滅三郤大夫。
그해 晉가 三郤大夫를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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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三郤大夫: 대부 郤錡와 郤犫, 郤至. 기원전574년 晉厲公이 교만하고 사치에 빠져 寵姬를 여럿 거느리고, 大夫들을 모두 내쫓고 총희의 형제들로 채웠으며, 총희의 오빠 胥童을 卿으로 삼고, 대부 郤錡와 郤犫, 郤至를 살해하였다. 결국 欒書와 中行偃에게 살해당하였다.
武公十九年卒,文公立。
무공은 재위 19년(기원전555년)만에 죽고 文公이 즉위하였다.
文公六年卒,懿公立。
문공은 재위6년(기원전549년)만에 죽고 懿公이 즉위하였다.
懿公元年,齊崔杼弒其君莊公。
의공 원년(기원전548년), 齊의 대부 崔杼가 그의 군주인 莊公을 시해하였다.
四年卒,子惠公立。
의공이 재위 4년(기원전545년)만에 죽고, 아들 惠公이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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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崔杼: 齊의 大夫. 崔武子 또는 崔子로도 불린다. 자신의 후처와 사통한 莊公을 시해하고 景公을 세워 전권을 휘둘렀지만 집안의 불화를 틈탄 慶封에 의해 멸문을 당하였다. <史記世家권32. 齊太公世家>
惠公元年,齊高止來奔。
혜공 원년(기원전544년), 齊의 高止가 燕으로 도망쳐 왔다.
六年,惠公多寵姬,公欲去諸大夫而立寵姬宋,大夫共誅姬宋,惠公懼,奔齊。
혜공 6년(기원전539년), 혜공에게는 총애하는 신하들이 많았는데, 혜공이 대부들을 제거하고 총애하는 신하 宋을 임용하려 하자, 대부들이 송을 죽였으며, 혜공이 두려워하여 齊로 달아났다.
四年,齊高偃如晉,請共伐燕,入其君。
그가 齊에 있은 지 4년 만에 齊의 高偃이 晉에 가서 함께 燕를 토벌하고 혜공을 燕으로 돌려보낼 것을 요청하였다.
晉平公許,與齊伐燕,入惠公。
晉平公이 이를 받아들여 齊와 함께 燕를 토벌하여 혜공을 燕으로 들여보냈다.
惠公至燕而死。燕立悼公。
혜공은 燕에 도착하자 죽었다. 燕는 悼公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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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燕惠公: <춘추좌씨전 노소공3년>에는 簡公으로 기록하고 있다. 춘추시대 燕의 제25대 군주로 연의공의 아들이다. 연의공4년(기원전545년), 연의공이 재위 4년 만에 사망하자, 태자인 희관이 그 뒤를 이었다. 연혜공6년(기원전539년), 당시 연혜공이 아끼는 신하들이 많았는데 그 중 대부 大夫 宋을 가장 아꼈다. 그해 겨울 신하들이 宋을 죽이자 연혜공은 齊로 달아났다. 연혜공 9년(기원전536년), 연혜공이 齊로 달아난 지 4년 만에 제경공이 상국 高偃을 시켜 晉에 가서 함께 燕를 공격하여 연혜공을 귀국시켰다.
▶ 齊高止來奔: 齊의 대부 고지가 燕으로 도망해 왔다. 기원전544년 가을 9월에 齊 公孫蠆(子尾)와 公孫竈(子雅)가 大夫 高止를 北燕으로 추방하니 高止가 도망하였다. 高止는 일을 만들어 자신의 공으로 삼기를 좋아하였고, 또 국정을 제멋대로 하였다. <춘추좌씨전·노양공29년>
▶ 姬宋: 姬는 臣으로 기록되어야 한다. 宋은 혜공이 총애하는 신하의 우두머리이다.
▶ 四年: 惠公 9년의 일로 혜공이 齊로 도망간 지 4년째이다.
悼公七年卒,共公立。
悼公이 재위 7년(기원전529년) 만에 죽고 共公이 즉위하였다.
共公五年卒,平公立。
공공은 재위 5년(기원전524년) 만에 죽고 平公이 즉위하였다.
晉公室卑,六卿始彊大。
晉의 公室이 쇠약해지고 六卿이 강대해지기 시작하였다.
平公十八年,吳王闔閭破楚入郢。
평공 18년(기원전506년)에 吳王闔閭가 초를 격파하고 수도 郢까지 쳐들어갔다.
十九年卒,簡公立。
평공이 재위19년(기원전505년) 만에 죽고 簡公이 즉위하였다.
簡公十二年卒,獻公立。
간공이 재위12년(12기원전493년) 만에 죽고 獻公이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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晉趙鞅圍范、中行於朝歌。
晉의 趙鞅이 朝歌에서 范氏과 中行氏를 포위하였다.
獻公十二年,齊田常弒其君簡公。
헌공12년(기원전481년), 齊의 대부 田常이 자신의 군주 簡公을 시해하였다.
十四年,孔子卒。
헌공14년(기원전479년)에 孔子가 죽었다.
二十八年,獻公卒,孝公立。
헌공28년(기원전465년)에 헌공이 죽고 孝公이 즉위하였다.
孝公十二年,韓、魏、趙滅知伯,分其地,三晉彊。
효공12년(기원전453년)에 韓·趙·魏의 三晉이 知伯을 멸망시키고, 그 땅을 나누어 가지니 이들 三晉이 강대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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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公室: 제후의 정권.
▶ 六卿: 晉의 强臣인 智·范·中行·韓·魏·趙 6姓을 말한다. 이들 6성은 서로 간에 정권을 차지하기 위하여 다투었는데, 晉은 결국 이들 중 한·위·조 3성에 의해 3분되었다.
▶ 吳王闔閭破楚入郢: 기원전506년 겨울, 오자서와 손무가 오의 군사를 거느리고 초를 쳤다. 초소왕은 楚 최고의 명장 좌사마 沈尹戌과 영윤 子常을 보내어 오의 군대를 막게 했으나 柏擧전투에서 자상의 욕심으로 초군이 크게 패하였다. 이어서 오군이 초의 수도인 郢을 공격하여 들어가니, 楚王은 도망갔다. [史記世家]권31. 吳太伯世家 <吳王闔廬>
▶ 趙鞅: 趙簡子. 춘추시대 말기 晉 사람으로 趙孟 또는 志父로도 불린다. 晉 내부에서 6卿이 세력 다툼을 벌일 때 2경인 范氏와 中行氏를 몰아내고 趙를 일으키는 바탕을 마련하였다.
▶ 田常: 齊의 대부 田恒을 가리킨다. 齊의 임금 簡公을 시해하고 平公을 옹립한 다음에 자신은 재상이 되었다. 齊의 易姓의 화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 知伯: 智伯. 춘추시대 말 전국시대 초기의 晉 사람으로 이름은 瑤이고, 智襄子라고도 부른다. 晉出公 17년에 趙, 韓, 魏와 함께 范氏와 中行氏의 땅을 나눠 邑으로 삼았다. 趙襄子가 한, 위와 함께 知氏를 멸족시켰다.
▶ 三晉: 春秋時代강국의 하나였던 晉이 분리되어 세워진 韓・魏・趙의 세 나라. 진의 三卿이었던 文侯魏斯・烈侯趙籍・景侯韓虔의 3家가 기원전453년에 쇠약해진 晉을 분할하여 각각 나라를 세웠는데, 戰國時代의 시작이었다.
十五年,孝公卒,成公立。
효공15년(기원전450년)에 효공이 죽고 成公이 즉위하였다.
成公十六年卒,湣公立。
성공이 재위 16년(기원전434년) 만에 죽고 湣公이 즉위하였다.
湣公三十一年卒,釐公立。
민공은 재위 31년(기원전403년) 만에 죽고 釐公이 즉위하였다.
是歲,三晉列為諸侯。
그 해(기원전403년)에 三晉이 제후 반열에 올랐다.
釐公三十年,伐敗齊于林營。
희공 30년(기원전373년)에 燕이 林營에서 齊를 격파하였다.
釐公卒,桓公立。
희공이 죽고 桓公이 즉위하였다.
桓公十一年卒,文公立。
환공이 재위11년(기원전362년) 만에 죽고 文公이 즉위하였다.
是歲,秦獻公卒。秦益彊。
그해에 秦獻公이 죽었다. 秦이 더욱 강해졌다.
文公十九年,齊威王卒。
문공 19년(기원전343년)에 齊威王이 죽었다.
二十八年,蘇秦始來見,說文公。
문공 28년(기원전334년)에 蘇秦이 처음으로 와서 문공을 알현하고 유세하였다.
文公予車馬金帛以至趙,趙肅侯用之。
문공이 마차, 금, 비단을 주어 趙로 보내자 趙肅侯가 그를 중용하였다.
因約六國,為從長。
소진으로 인해 6국이 합종하게 되었고 소진은 합종의 長이 되었다.
秦惠王以其女為燕太子婦。
秦惠王은 자기 딸을 燕태자의 부인이 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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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蘇秦: 전국시대의 정치가. 강국 秦에 대적하기 위해 나머지 6국이 연합하는 합종설을 주장하였다. 처음에 秦의 惠王을 비롯하여 제후 밑에서 유세를 하였으나 채용되지 않았으며, 秦을 두려워하는 산동의 여러 나라를 찾아다니며 六國의 연합으로 진에 대항하자는 合縱說을 주창, 燕의 文侯에 채용되었고, 또 趙·齊·魏·韓·楚·燕의 남북 縱橫說을 성공시켜 6국의 재상이 되고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15년 동안 秦의 세력을 방비하였다. 그러나 그의 정책은 동서 連衡說을 주장하는 張儀의 주장에 의해 깨어지고 齊의 신하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사기 권69. 蘇秦列傳>
▶ 說: 유세하다.
▶ 從: 縱과 같다. 합종하다. 전국시대에 6개국이 진에 대항하여 연합한 것을 말한다.
▶ 因約六國,為從長: 소진으로 인하여 6국(燕, 趙, 齊, 韓, 魏, 楚)은 합종하여 힘을 합치게 되었고, 소진은 합종의 장이 되어 6국의 재상을 겸하게 되었다. <사기 권69. 소진열전>
二十九年,文公卒,太子立,是為易王。
문공 29년(기원전333년)에 문공이 죽고 태자가 즉위하니 그가 易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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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易王: 燕의 제37대 군주이자 초대 왕. 연후 문공의 아들이자, 연왕 쾌의 아버지이다. 역왕 때부터 燕도 왕을 칭하게 되었다.
易王初立,齊宣王因燕喪伐我,取十城;
蘇秦說齊,使復歸燕十城。
易王이 막 즉위했을 때 齊宣王이 燕의 국상을 틈타 燕을 정벌하여 열 개의 성을 취하였는데, 소진이 齊에 유세하여 열 개의 성을 燕에게 돌려주게 하였다.
十年,燕君為王。
역왕10년(기원전323년), 燕의 군주가 왕을 칭하였다.
蘇秦與燕文公夫人私通,懼誅,乃說王使齊為反閒,欲以亂齊。
소진이 燕역왕의 어머니인 문공의 부인과 사통하다가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 역왕에게 齊에 사신으로 가서 反間計로 齊를 어지럽히겠다고 유세하였다.
易王立十二年卒,子燕噲立。
역왕은 재위12년(기원전321년) 만에 죽고 아들 噲가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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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易王: 燕의 초대 왕. 연후 문공의 아들이자, 연왕 쾌의 아버지이다. 이때부터 燕도 왕을 칭하였다.
▶ 蘇秦說齊: 기원전333년 소진이 齊왕에게 유세하기를
‘지금 연이 비록 약소하긴 하지만 그래도 秦王의 작은 사위입니다. 대왕께서 그 성 열 개가 탐이 나서 강한 진과 오래도록 원수가 되려고 합니다. 이제 약한 연이 앞장을 서고 강한 진이 그 뒤를 따르면서 천하의 정예병들을 불러들이게 될 터이니 이는 오훼를 먹는 것과 같습니다.”
라고 하였다. <사기 열전 권69. 蘇秦列傳>
▶ 燕君為王: 기원전323년 燕은 齊를 견제하기 위해 韓, 趙, 魏, 中山國 등과 서로 王이라 부르기로 하는 이른바 ‘五國相王’이라 불리는 동맹을 맺었다. 燕도 易王의 재위기인 이때부터 王의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 反閒: 反間. 적의 간첩을 역이용하는 것으로 <孫子兵法>〈用間〉에
“反間은 적의 첩자를 이용하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역왕 9년(기원전324년), 소진은 역왕의 모친과 사통한 사실을 들킬까 두려워 齊를 약화시킨다는 이유로 齊로 가겠다고 자청하니 역왕이 허락하였다. 이에 소진은 연에서 죄를 얻은 것처럼 꾸며서 齊로 도망가자 제선왕은 그를 客卿으로 삼았다.
燕噲既立,齊人殺蘇秦。
연왕 쾌가 즉위한 후에 齊의 군주가 소진을 죽였다.
蘇秦之在燕,與其相子之為婚,而蘇代與子之交。
소진이 燕에 있을 때 재상 子之와 사돈을 맺었으며, 동생 蘇代도 자지와 교류하였다.
及蘇秦死,而齊宣王復用蘇代。
소진이 죽자 齊宣王이 다시 蘇代를 기용하였다.
燕噲三年,與楚、三晉攻秦,不勝而還。
연왕 쾌3년(기원전318년), 초와 三晉이 함께 秦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다.
子之相燕,貴重,主斷。
子之가 燕의 재상이 되어 지위가 높아지자 국정을 독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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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燕王噲: 전국시대의 燕의 군주. 易王이 죽자 뒤를 이었다. 국정을 재상인 子之에게 맡겨 놓고, 성품이 호색하고 술에 마시고, 노는 것을 좋아하여 국정을 돌보지 않았다. 기원전316년 堯임금을 본떠 子之에게 禪讓을 해 커다란 정치적 혼란을 가져왔다. 齊宣王이 燕의 정치적 혼란을 틈타 쳐들어오면서 燕은 도읍인 薊城이 함락되고 燕王噲와 子之가 죽임을 당하였다.
▶ 子之: 전국시대 燕의 權臣. 姬姓. 燕王噲의 재상이 되었는데 권력을 장악하고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하였다. 연왕 쾌가 蘇代와 鹿毛壽의 말만 듣고 그에게 왕위를 양위하였다.
자지가 왕위에 오른 일은 燕 지배층의 불만을 샀고, 子之는 兵權을 장악하고 신진 세력을 대거 등용하며 귀족들의 반발을 억누르려 했지만, 기원전314년 噲의 太子인 姬平과 귀족들이 연합해 반란을 일으켰다. 子之는 반란을 진압했지만, 燕의 국력은 크게 쇠퇴하였다.
齊宣王이 燕의 정치적 혼란을 틈타 쳐들어오면서 燕은 도읍인 薊城이 함락되었고, 齊의 군주가 자지를 잡아 젓을 담고 연왕 噲는 자살하였다.
▶ 蘇代: 蘇秦의 동생으로 전국시대에 '종횡가'로 이름을 날렸다. 합종연횡의 주동자이자 조직가로 활약하였다.
▶ 為婚: 연의 재상 子之가 蘇秦과 사돈이 되어 燕의 권력을 얻고자 한 것이다.
蘇代為齊使於燕,燕王問曰:
「齊王奚如?」
蘇代가 齊를 위해 燕에 사신으로 오니 연왕이 물었다.
“齊의 왕은 어떻소?”
對曰:
「必不霸。」
소대가 대답하였다.
“분명 패주가 못 될 터입니다. ”
燕王曰:
「何也?」
연왕이 말하였다.
“왜 그렇소?”
對曰:
「不信其臣。」
소대가 대답하였다.
“신하를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
蘇代欲以激燕王以尊子之也。
소대는 이렇게 연왕을 자극하여 자지를 존중하게 만들려 하였다.
於是燕王大信子之。
이에 연왕이 자지를 크게 신임하였다.
子之因遺蘇代百金,而聽其所使。
자지는 이로 인해 소대에게 100금을 주어 그가 쓰는 대로 맡겨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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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奚: 어찌.
▶ 金: 고대 황금의 계량 단위로 1斤 또는 1鎰을 一金이라 하였다.
▶ 聽: 맡기다.
鹿毛壽謂燕王:
「不如以國讓相子之。
人之謂堯賢者,以其讓天下於許由,許由不受,有讓天下之名而實不失天下。
今王以國讓於子之,子之必不敢受,是王與堯同行也。」
鹿毛壽가 연왕에게 말하였다.
“나라를 國相 자지에게 양보하는 것이 좋습니다.
사람들이 堯를 현자라 하는 까닭은 그가 천하를 許由에게 禪讓했기 때문인데, 허유가 받지 않았으므로 천하를 선양하였다는 명성은 얻되, 실제로 천하를 잃지는 않았습니다.
지금 왕께서 나라를 자지에게 선양한다 해도 자지는 틀림없이 감히 받지 못할 터이고, 왕께서는 堯와 같은 덕행을 갖게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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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鹿毛壽: 鹿은 姓이고 毛壽는 이름이다
▶ 許由: 고대 전설 속에 나오는 은자이다. 요 임금이 만년에 이르러 자신의 자리를 허유에게 양보하려 하자 그는 한사코 거절한 다음 箕山으로 도망쳐 몸소 밭을 갈면서 생계를 유지하였다 한다. 후에 요 임금이 다시 그를 불러 구주의 우두머리로 임명하려 하자, 허유는 어지러운 소리를 너무 많이 들었다며 穎水로 가서 자신의 귀를 씻어 자신의 고결함을 보였다고 한다.
▶ 行: 품행. 풍덕.
燕王因屬國於子之,子之大重。
연왕은 이에 자지에게 나라를 맡겼고, 자지는 더욱 존귀해졌다.
或曰:
「禹薦益,已而以啟人為吏。
及老,而以啟人為不足任乎天下,傳之於益。
已而啟與交黨攻益,奪之。
天下謂禹名傳天下於益,已而實令啟自取之。
今王言屬國於子之,而吏無非太子人者,是名屬子之而實太子用事也。」
누군가가 말하였다.
“禹임금은 伯益을 천거하고 그후 啓의 신하를 익의 관리로 삼았습니다.
우임금이 늙어서 계에게 천하를 맡기기는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익에게 자리를 전했습니다.
얼마 후 계가 그의 무리들과 함께 익을 공격하여 자리를 빼앗았습니다.
세상에서는 우임금이 명목상 익에게 천하를 전했지만, 실제로는 아들 계로 하여금 스스로 천하를 빼앗게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왕께서 나라를 자지에게 맡긴다고 말하였으나 관리들은 태자의 사람 아닌 자가 없으니 명목상 자지에게 맡겼고 실제로는 태자가 정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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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屬: 위탁하다. 맡기다.
▶ 已而: 그후.
▶ 益: 伯益. 고대 전설상의 인물로 伯翳, 柏翳, 伯鷖, 大費등의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우임금은 동쪽을 순시하다가 會稽에 이르러 세상을 떠났으며, 천하를 益에게 전하였다. 3년상이 끝나자 익은 우임금의 아들 啓에게 양보하고 箕山 남쪽으로 피하여 살았다. <史記本紀권02. 夏本紀>
▶ 啓: 하의 제2대 왕. 姓은 姒, 氏는 夏后이다. 夏啟, 啟王, 帝啟라고도 부른다.
▶ 启人: 人은 신하와 같으며, 啓의 신하를 益의 관리로 삼았음을 말한다
▶ 交黨: 같은 당파. 무리.
▶ 用事: 집권하다.
王因收印自三百石吏已上而效之子之。
왕은 이에 300석 이상의 녹봉을 받는 관리들에게서 인수를 거두어 자지에게 주었다.
子之南面行王事,而噲老不聽政,顧為臣,國事皆決於子之。
자지가 남면하여 왕의 일을 행하고 噲는 늙어서 정사를 보지 못하여 도리어 신하가 되니, 국사는 모조리 子之가 결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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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印: 印信. 관리의 증빙.
▶ 三百石: 관리가 받는 녹봉의 수량.
▶ 效: 바치다.
▶ 顧為臣: 연왕 噲가 늙어서 스스로 쉬면서 도리어 子之의 신하가 되었음을 말한다.
顧는 오히려.
三年,國大亂,百姓恫恐。
자지가 집권한 지 3년(기원전314년), 燕이 크게 어지러워져 백관이 공포에 떨었다.
將軍市被與太子平謀,將攻子之。
장군 市被가 태자 平과 자지를 모의하여 자지를 공격하려 하였다.
諸將謂齊湣王曰:
「因而赴之,破燕必矣。」
齊의 장군들이 齊湣王에게 말하였다.
“이 틈에 쳐들어가면 틀림없이 燕를 쳐부술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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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百姓: 귀족. 百官. 전국시대 이전에 귀족과 비교하여 일반 사람을 일컫는 말. 귀족은 姓이 있었으나 평민은 성이 없었다.
▶ 恫恐: 공포에 떨다. 恫은 두려워할 ‘동’.
▶ 市被: 燕의 장군.
▶ 齊湣王: <戰國策·燕策>에는 ‘齊宣王’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齊宣王이 정당하다.
▶ 赴: 가다. 여기서는 공격하다.
齊王因令人謂燕太子平曰:
「寡人聞太子之義,將廢私而立公,飭君臣之義,明父子之位。
寡人之國小,不足以為先後。
雖然,則唯太子所以令之。」
齊왕은 이에 사람을 燕태자 平에게 보내 말하였다.
“과인은 태자가 대의를 알아 사사로움을 버리고 公道를 세우려 하고, 군신의 윤리를 정돈하고, 부자간의 지위를 바로잡으려 한다고 들었소.
과인의 나라는 작아서 앞장서거나 후원하기에는 부족하오.
하지만 태자의 명령이라면 기꺼이 따르겠소. ”
太子因要黨聚眾,將軍市被圍公宮,攻子之,不克。
태자는 이에 당파를 소집하고 무리를 모으며, 장군 시피는 궁궐을 포위하여 자지를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將軍市被及百姓反攻太子平,將軍市被死,以徇。
장군 시피와 백관들이 도리어 태자 평을 공격했고, 장군 시피가 죽자 저자거리에서 조리를 돌렸다.
因搆難數月,死者數萬,眾人恫恐,百姓離志。
몇 달에 걸친 변란 때문에 죽은 사람이 수만 명에 이르렀으며, 사람들은 공포에 떨었고 백관들은 마음을 잡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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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飭: 정돈하다.
▶ 先後: 보좌하다.
▶ 要: 부르다. 소집하다.
▶ 徇: 대중에게 공개적으로 보이다.
▶ 搆難: 변란을 일으키다. 재난을 일으키다.
孟軻謂齊王曰:
「今伐燕,此文、武之時,不可失也。」
孟子가 齊왕에게 말하였다.
“지금 燕를 정벌하는 것은 周의 문왕과 무왕 때와 같으니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
王因令章子將五都之兵,以因北地之眾以伐燕。
齊왕은 이에 章子에게 五都의 군사와 북방의 무리를 거느리고 燕을 정벌하게 하였다.
士卒不戰,城門不閉,燕君噲死, 齊大勝。
燕의 병사들은 싸우지 않고 성문을 닫지도 않아, 燕의 군주 쾌는 죽고 齊는 대승을 거두었다.
燕子之亡二年,而燕人共立太子平,是為燕昭王。
燕의 자지가 죽은 지 2년(기원전312년)에 燕 사람들이 태자 평을 옹립하니 그가 燕昭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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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孟軻: 孟子. 전국시대 鄒 사람으로 이름은 軻이고, 자는 子輿 또는 子車이다. 어릴 때부터 공자를 숭상하고, 공자의 사상을 발전시켜 유학을 후세에 전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제자백가 시대에 돌입한 시대에 묵적과 양주의 사상과 경쟁하며 유가 사상을 확립하였다.
▶ 章子: 匡子라고도 불린다. 전국시대 齊의 장군. 齊宣王 6년(기원전314) 燕에 내란이 일어난 것을 틈타 군사10만을 이끌고 渤海를 따라 진공하여 50일 만에 燕의 수도를 함락시켰다.
▶ 五都: 전국시대 齊가 설치한 5개 행정구.
▶ 北地: 齊 북부의 변경지대.
燕昭王於破燕之後即位,卑身厚幣以招賢者。
燕昭王은 燕이 齊에게 패전한 후 즉위하여 몸을 낮추고 후한 폐백으로 현자를 초빙하였다.
謂郭隗曰:
「齊因孤之國亂而襲破燕,孤極知燕小力少,不足以報。
然誠得賢士以共國,以雪先王之恥,孤之願也。
先生視可者,得身事之。」
郭隗에게 말하였다.
“齊가 우리의 혼란을 틈타 우리를 기습하여 무너뜨렸으나, 우리 燕은 작고 힘이 약해 보복을 하기에 부족함을 내가 아주 잘 알고 있소.
그러나 진실로 유능한 인재를 얻어 함께 나라를 다스리며 선왕의 치욕을 씻는 것이 나의 바람이오.
선생께서 보기에 이런 인재가 있다면 이 몸이 친히 그를 모시겠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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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燕昭王: 전국시대 燕의 군주로 이름은 平이다. 시호는 昭襄王이지만, 약칭 시호로는 昭王 혹은 襄王으로도 불린다. 郭隗와 鄒衍, 樂毅등 어진 선비를 초빙하여 父王 때 잃었던 땅을 齊로부터 되찾았고 齊의 수도 臨淄에 진입하고 莒와 卽墨을 제외한 齊의 70여 성을 점령하여 燕이 가장 강성한 시기를 이루었다.
▶ 卑身: 자신을 낮추다.
▶ 幣: 비단. 재물. 幣帛.
▶ 郭隗: 전국시대 燕 사람. 燕昭王이 齊에 복수하고자 인재를 구할 때 賢士를 초빙하는 방법을 알려주어 樂毅와 鄒衍, 劇辛 등의 인재들이 다투어 찾아와 국력이 부강해졌다. 여기서 나온 성어가 先從隗始이다.
▶ 孤: 왕이 자신을 겸손하게 일컫는 말.
▶ 共國: 함께 나라를 다스리다.
▶ 雪: 洗雪. 설욕. 씻다.
郭隗曰:
「王必欲致士,先從隗始。
況賢於隗者,豈遠千里哉!」
곽외가 말하였다.
“왕께서 꼭 賢士를 초치하려면 먼저 이 곽외부터 시작하십시오.
이 곽외보다 나은 인재들이야 어찌 천 리를 멀다 하겠습니까!”
於是昭王為隗改筑宮而師事之。
이에 소왕은 곽외를 위해 궁을 짓고 그를 스승으로 섬겼다.
樂毅自魏往,鄒衍自齊往,劇辛自趙往,士爭趨燕。
樂毅가 魏에서 오고, 鄒衍이 齊에서 오고, 劇辛이 趙에서 오는 등 인재들이 다투어 燕로 달려왔다.
燕王噲死問孤,與百姓同甘苦。
연소왕은 죽은 사람에게는 조의를 표하고, 혼자 사는 사람들을 위문하는 등 백관들과 동고동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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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致: 불러 모으다.
▶ 况: 하물며.
▶ 樂毅: 전국시대 燕의 上將軍. 본래 中山國의 사람이었으나 중산국이 趙에 망한 뒤 趙 사람이 되었다가 燕昭王에게 중용되어 상장군이 되었다. 여러 제후국과 연합하고 齊를 토벌하여 齊의 70여 성을 항복받고 昌國君에 봉해졌다. 昭王이 죽고 태자인 惠王이 즉위하였는데, 혜왕이 齊의 反間計에 말려들어 樂毅를 의심하고 대장군의 직위를 박탈하자, 樂毅는 趙로 망명하였다. <사기 권80. 樂毅列傳>
▶ 鄒衍 또는 騶衍: 전국시대의 齊의 제자백가 중 陰陽家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史記列傳권74. 孟子荀卿列傳>
▶ 劇辛: 전국시대 趙 사람으로 연 燕昭王 때 조에서 燕으로 와서 국정을 맡고, 秦와 楚, 三晋을 연합시켜 齊를 공격하였다. 燕王 喜 13년 燕의 장수가 되어 조를 공격하다가, 趙의 장수 龐煖에게 살해당하였다.
▶ 趨: 달려오다.
二十八年,燕國殷富,士卒樂軼輕戰,於是遂以樂毅為上將軍,與秦、楚、三晉合謀以伐齊。
연소왕 28년(기원전284년), 燕은 부유해지고 병사들은 기꺼이 전투에 나가려 하였으므로, 마침내 악의를 상장군으로 삼아 秦과 초, 三晉과 함께 齊를 정벌하였다.
齊兵敗,湣王出亡於外。
齊의 군대는 패했고 齊湣王은 도성 밖으로 도망쳤다.
燕兵獨追北,入至臨淄,盡取齊寶,燒其宮室宗廟。
燕의 군대만이 추격하여 임치에 진입해서는 齊의 보물을 모조리 탈취하고 궁실과 종묘를 불태웠다.
齊城之不下者,獨唯聊、莒、即墨,其餘皆屬燕,六歲。
함락되지 않는 齊의 성으로는 聊, 莒, 卽墨 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燕의 차지가 되어 6년 동안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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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樂軼: 기꺼이 출격하다.
▶ 輕戰: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다.
▶ 湣王: 齊湣王. 燕 장수 樂毅가 五國을 연합해서 齊에 쳐들어오자 齊湣王이 莒로 도망쳐서 초에 구원을 청하니, 초는 장군 淖齒를 보내 구해 주었다.
▶ 追北: 패배하여 달아나는 적을 추격하다. 北는 달아날 ‘배’.
<이 부분은 원문에는 기록이 없어 누락된 것으로 보인다>
昭王三十三年卒,子惠王立。
소왕이 재위33년(기원전279년) 만에 죽고 아들 惠王이 즉위하였다.
惠王為太子時,與樂毅有隙;
혜왕은 태자 때 樂毅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及即位,疑毅,使騎劫代將。
즉위하자 악의를 의심하여 騎劫에게 상장군을 대신하게 하였다.
樂毅亡走趙。
악의는 趙로 망명하였다.
齊田單以即墨擊敗燕軍,騎劫死,燕兵引歸,齊悉復得其故城。
齊의 田單이 즉묵에서 燕의 군대를 격파했으며, 기겁은 전사하고, 燕의 군대는 철수했으며, 齊는 잃었던 성들을 모두 되찾았다.
湣王死于莒,乃立其子為襄王。
제민왕이 莒에서 죽고 그 아들이 齊襄王을 세웠다.
惠王七年卒。
혜왕은 재위 7년(기원전272년) 만에 죽었다.
韓、魏、楚共伐燕。
한, 위, 초가 함께 燕를 정벌하였다.
燕武成王立。
燕의 武成王이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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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隙: 틈. 원한.
▶ 疑毅: 악의를 의심하다. 燕昭王이 죽고 악의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태자가 惠王으로 즉위하자, 田單이 반간책을 써서
“악의가 齊의 왕이 되려고 한다. ”
라고 소문을 퍼뜨렸다. 이에 간신들이 악의를 참소하자, 혜왕이 악의를 의심하여 騎劫에게 대장군의 직위를 대신하게 하고 樂毅를 불러들이니, 악의는 趙로 망명해버렸다. <사기 권80. 樂毅列傳>
▶ 齊田單以即墨擊敗燕軍: 齊의 전단은 卽墨싸움에서 火牛陣의 전법으로 燕의 군대를 대패시키고 齊가 잃어버렸던 70여 개 성읍을 모두 회복하였다. <사기 권82. 田單列傳>
武成王七年,齊田單伐我,拔中陽。
무성왕 7년(기원전265년), 齊의 전단이 燕을 정벌하여 中陽을 빼앗았다.
十三年,秦敗趙於長平四十餘萬。
무성왕13년(기원전259년), 秦이 長平에서 조의 40만 대군을 擊敗하였다.
十四年,武成王卒,子孝王立。
무성왕14년(기원전258년), 무성왕이 죽고 아들 孝王이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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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拔: 점령하다.
▶ 長平: 地名. 趙 上黨郡의 읍. 長平大戰은 기원전262년에서 기원전260년에 걸쳐 秦과 趙 사이에 벌어진 대규모 전투이다. 중국의 전국시대의 판도를 변하게 만든 대표적인 전투의 하나이다. 장평의 승리는 秦이 천하를 통일하는 기반이 되었으며, 패전국인 趙의 몰락을 가져온 결정적인 전투였다.
孝王元年,秦圍邯鄲者解去。
효왕 원년(기원전257년), 邯鄲을 포위하고 있던 秦이 포위를 풀고 철수하였다.
三年卒,子今王喜立。
효왕이 재위 3년(기원전255년) 만에 죽고 지금의 왕의 아들 喜가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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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孝王: 燕孝王. 연 무성왕의 아들. 재위 3년 만에 죽고 아들 희가 왕이 되었다.
▶ 解: 포위를 풀다.
今王喜四年,秦昭王卒。
燕王 喜 4년에 秦昭王이 죽었다.
燕王命相栗腹約歡趙,以五百金為趙王酒。
연왕 희가 재상인 栗腹에게 조와 동맹을 맺게 하고 500금을 주어 趙 孝成王의 생일을 축하하는 사신으로 가도록 하였다.
還報燕王曰:
「趙王壯者皆死長平,其孤未壯,可伐也。」
율복이 돌아와 연왕에게 보고하였다.
“趙王의 장정들은 모두 장평 싸움에서 죽고, 고아가 된 자식들은 아직 자라지 않아 정벌할 만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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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王喜: 燕王 喜. 孝王의 아들로, 이름은 喜이다. 燕의 마지막 왕으로 荊軻에게 秦始皇의 암살을 도모하게 한 태자 丹의 아버지이다.
▶ 約歡: 우호적인 맹약을 맺다.
▶ 栗腹: 인명. 燕의 재상.
王召昌國君樂閒問之。
연왕이 昌國君 樂間을 불러 물어보았다.
對曰:
「趙四戰之國,其民習兵,不可伐。」
창국군이 대답하였다.
“조는 사방으로 전쟁을 치르는 나라로 백성이 싸움에 익숙하므로 정벌할 수 없습니다. ”
王曰:
「吾以五而伐一。」
연왕이 말하였다.
“우리는 다섯 명으로 한 명을 칠 것이다. ”
對曰:
「不可。」
창국군이 대답하였다.
“안 됩니다. ”
燕王怒,群臣皆以為可。
연왕은 화를 냈고, 신하들은 모두 가능하다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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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昌國君樂間: 樂毅의 아들. 昌國君은 樂毅가 받은 封號로 그의 아들이 이어받았다.
▶ 四戰之國: 조의 동쪽에는 燕이 있고 서쪽에는 秦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魏와 韓이 있으며 북쪽으로는 흉노가 있으므로 四戰이라 한 것이다.
卒起二軍,車二千乘,栗腹將而攻鄗,卿秦攻代。
끝내 군대를 동원하여 두 길로 나누고 전차 2,000乘을 내어 율복에게는 鄗를, 卿秦에게는 代를 공격하게 하였다.
唯獨大夫將渠謂燕王曰:
「與人通關約交,以五百金飲人之王,使者報而反攻之,不祥,兵無成功。」
오직 대부 將渠 만이 왕에게 말하였다.
“남과 우호를 맺고 500金까지 보내 그 왕의 건강까지 빌었는데, 사신의 보고만 듣고 오히려 그들을 공격함은 상서롭지 못하니 군대가 공을 세우지 못할 터입니다. ”
燕王不聽,自將偏軍隨之。
연왕은 그 말을 듣지 않고 스스로 별동대를 이끌고 따라갔다.
將渠引燕王綬止之曰:
「王必無自往,往無成功。」
장거가 왕의 인끈을 잡아당기며 만류하였다.
“왕께서 직접 가시면 정말 안 됩니다. 가셔도 성공하지 못합니다. ”
王蹵之以足。
왕이 발로 그를 걷어찼다.
將渠泣曰:
「臣非以自為,為王也!」
장거가 울면서 말하였다.
“신은 저를 위해 이러는 것이 아니라 왕을 위해서 이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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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卒起二軍: 연왕은 율복에게 40만 군으로 조의 鄗땅을 공격하게 하고 慶秦에게는 20만으로 代를 공격하게 하였다. 그러자 조에서는 이에 맞서 廉頗에게 8만 군사로 䧚에서 율복을 맞아 싸우도록 하고, 樂乘에게는 5만 군으로 代에서 경진을 막도록 하였다. 싸움은 燕이 크게 패하였다. <戰國策31卷 燕策>
▶ 鄗: 趙의 읍.
▶ 慶秦: 慶奉으로도 쓰며 燕 장수.
▶ 通關約交: 관문을 통과하게 하고 교류를 약속하다.
▶ 偏軍: 별동대.
▶ 綬: 인끈. 도장을 매는 끈.
▶ 蹵: 蹴. 짓밟다. 차다.
燕軍至宋子,趙使廉頗將,擊破栗腹於鄗。
燕의 군대가 宋子縣에 이르자 趙는 廉頗를 장수로 삼아 호에서 율복을 격파하였다.
[樂乘]破卿秦於代。樂閒奔趙。
樂乘은 代에서 卿秦을 격파했으며 樂閒은 趙로 달아났다.
廉頗逐之五百餘里,圍其國。
염파는 500여 리나 추격하여 燕의 도성을 포위하였다.
燕人請和,趙人不許,必令將渠處和。
燕이 화친을 요청하자 趙王은 허락하지 않으면서 장거가 화친을 주관해야 한다고 요구하였다.
燕相將渠以處和。
燕가 將渠를 재상으로 삼고 화친을 주관하게 하였다.
趙聽將渠,解燕圍。
조는 장거의 요청을 듣고 燕에 대한 포위를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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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宋子: 宋子縣. 鉅鹿郡에 속하였다.
▶ 廉頗: 趙의 명장으로 秦와 魏 등과 싸워 여러 차례 적을 물리쳤으며 信平君의 칭호를 받았다. 같은 시대에 활약한 조의 재상 藺相如와의 교우는 刎頸之交라는 고사의 유래가 되기도 하였다. <사기 권81. 廉頗藺相如列傳>
▶ 樂乘: 樂毅‧樂間의 일족으로 조에 벼슬하고 있었다.
▶ 國: 국도. 도성.
▶ 處和: 참여하여 화친을 주관하다.
▶ 相: 재상으로 임명하다.
六年,秦滅東周,置三川郡。
연왕 희 6년(기원전249년), 秦이 東周를 멸망시키고 그곳에 三川郡을 두었다.
七年,秦拔趙榆次三十七城,秦置大原郡。
연왕 희 7년(기원전248년), 秦이 조의 楡次 등 37개 성을 공략해서 太原郡을 두었다.
九年,秦王政初即位。
연왕 희 9년(기원전246년), 秦王 嬴政이 즉위하였다.
十年,趙使廉頗將攻繁陽,拔之。
연왕 희 10년(기원전245년), 조가 염파를 보내 魏의 繁陽을 공격해 빼앗았다.
趙孝成王卒,悼襄王立。
趙 孝成王이 죽고 悼襄王이 즉위하였다.
使樂乘代廉頗,廉頗不聽,攻樂乘,樂乘走,廉頗奔大梁。
도양왕이 樂乘을 보내 염파를 대신하게 했으니 염파가 따르지 않고 악승을 공격하자 악승은 달아났고 염파도 大梁으로 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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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秦滅東(西)周: 기원전256년에는 赧王이 秦昭王에게 항복하여 서주가 멸망하고, 7년 후 秦 莊襄王이 동주를 멸망시켜 주는 기원전249년 秦에 의해 완전히 멸망되었다.
▶ 秦王政: 嬴政. 후일의 秦 皇. 통일 秦의 開國皇帝이자 탁월한 정치가, 전략가, 개혁가이다. 秦莊襄王의 아들로 趙의 수도인 邯鄲에서 출생하였다. 13세에 王位를 계승했고, 39세에 皇帝로 칭하였다.
▶ 悼襄王: 전국시대 趙의 國君. 이름은 偃이고, 孝成王의 아들이다. 재위 2년 李牧을 기용하고 장군으로 삼아 燕의 武遂와 方域 등지를 공격해 빼앗았다.
十二年,趙使李牧攻燕,拔武遂、方城。
연왕 희12년(기원전243년), 趙가 李牧에게 燕를 공격하게 하여 武遂와 方城을 빼앗았다.
劇辛故居趙,與龐煖善,已而亡走燕。
劇辛은 예전에 조에 있을 때 龐煖과 친하게 지냈는데 얼마 뒤 燕으로 망명해 왔다.
燕見趙數困于秦,而廉頗去,令龐煖將也,欲因趙獘攻之。
燕는 趙가 秦에게 여러 차례 곤경을 당하고, 염파도 떠나버려 방난을 대장으로 삼은 것을 보고 피폐해진 틈을 타 趙를 공격하려 하였다.
問劇辛,辛曰:
「龐煖易與耳。」
극신에게 묻자 극신이 대답하였다.
“방난은 상대하기 쉽습니다. ”
燕使劇辛將擊趙,趙使龐煖擊之,取燕軍二萬,殺劇辛。
燕은 극신을 장군으로 삼아 조를 공격하게 했으며, 조는 방난에게 맞아 싸우게 하여 燕의 군대 2만을 붙잡고 劇辛을 죽였다.
秦拔魏二十城,置東郡。
秦이 魏의 성 20개를 빼앗고 東郡을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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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牧: 조의 장수로 북쪽 변경을 수비하면서 匈奴와 東胡를 대파하였다. 진이 조의 郭開를 이용해 반간계를 써서 이목을 죽게 하고 진의 왕전이 조를 공격해서 조는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사기 권81. 염파인상여열전>
▶ 劇辛: 전국시대 趙 사람으로 燕昭王이 賢者를 초빙할 때 조에서 燕로 와 국정을 맡고, 秦와 楚, 三晋을 연합시켜 齊를 공격하였다. 연왕 燕王 喜 13년 燕의 장수가 되어 조를 공격하다가, 조 장수 龐煖에게 살해당하였다.
▶ 故: 종전.
▶ 龐煖: 전국시대 조의 장수.
▶ 獘: 弊와 통용된다. 매우 곤란하다.
▶ 易與: 대하기 쉽다.
十九年,秦拔趙之鄴九城。
연왕 희 19년(기원전236년), 秦이 趙의 땅인 鄴의 9개 성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趙悼襄王卒。
조의 悼襄王이 죽었다.
二十三年,太子丹質於秦,亡歸燕。
연왕 희 23년(기원전232년), 태자 丹이 秦에 인질로 잡혀 있다가 도망쳐 燕으로 돌아왔다.
二十五年,秦虜滅韓王安,置潁川郡。
연왕 희 25년(기원전230년), 秦이 韓王 安을 포로로 잡고 한를 멸망시킨 다음 穎川郡을 두었다.
二十七年,秦虜趙王遷,滅趙。
연왕 희 27년(기원전228년), 秦이 趙王 遷을 포로로 붙잡고 조를 멸망시켰다.
趙公子嘉自立為代王。
趙의 공자 嘉가 代에서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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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太子丹: 燕太子 丹. 燕의 마지막 태자이다. 燕王 喜의 아들이다. 성은 姬, 휘는 丹이다. 秦이 燕 잔존 세력을 계속 추격하자 연왕 喜는 전쟁의 발단이 된 태자 丹을 죽이고 그 수급을 진왕에게 바친다. 하지만 진왕은 요동까지 燕 잔존 세력을 추격하여 燕를 멸망하게 하였다
▶ 韓王安: 전국시대 韓의 제11대 왕. 韓 桓惠王의 아들. 韓은 한희왕과 한환혜왕 대의 계속 된 패배 누적을 견디지 못하고 멸망하였다. 기원전226년 한의 옛 수도인 신정에서 반란이 일어나 진은 반란군을 진압하였다. 이 반란으로 한의 마지막 군주인 韓王安이 처형됐다.
▶ 趙王遷: 趙遷. 趙 최후의 임금. 幽繆王.
▶ 趙公子嘉: 趙代王 嘉. 전국시대 趙의 제11대 군주이자, 마지막 군주. 趙氏宗主로서는 20대 종주이자, 代의 왕.
燕見秦且滅六國,秦兵臨易水,禍且至燕。
燕는 秦이 머지않아 6국을 멸망시키고, 秦의 군대가 易水까지 밀어닥쳐 화가 장차 燕에 미치리라 여겼다.
太子丹陰養壯士二十人,使荊軻獻督亢地圖於秦,因襲刺秦王。
태자 丹은 은밀히 장사 20명을 기르고 荊軻를 보내 督亢의 지도를 진왕에게 바치면서 기습적으로 진왕을 찌르게 하였다.
秦王覺,殺軻,使將軍王翦擊燕。
진왕이 이를 알아채고 형가를 죽이고는 장군 王翦을 보내 燕를 공격하였다.
二十九年,秦攻拔我薊,燕王亡,徙居遼東,斬丹以獻秦。
연왕 희 29년(기원전226년), 秦이 燕의 도성 薊를 빼앗자, 연왕은 遼東으로 도망쳐서 태자 단의 목을 베어 秦에 바쳤다.
三十年,秦滅魏。
연왕 희 30년(기원전225년), 진이 魏를 멸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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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陰: 몰래. 은밀히.
▶ 荊軻: 전국시대 말기의 자객이며 衛 사람이다. 秦 始皇帝를 암살하려 했던 인물이다. 秦의 政(후일 진시황제)은 왕으로 즉위하기 전에 燕 태자 丹과 함께 趙에 볼모로 있으면서 친하게 지냈는데, 귀국하여 즉위한 다음 태자 단을 무시하자, 태자 丹은 진왕 政에게 복수할 것을 꾀하면서 荊軻가 용감한 자객이라는 말을 듣고 그에게 복수해줄 것을 간청하였다.
<사기 권86刺客列傳 <⑤荊軻>>
▶ 督亢: 戰國時代 燕의 가장 좋은 沃士. 하북성 河北省 涿縣 동남쪽의 비옥한 땅.
▶ 王翦: 전국시대 秦의 장수로서 趙와 楚 등을 점령해 진의 천하통일에 큰 공을 세웠다.
三十三年,秦拔遼東,虜燕王喜,卒滅燕。
연왕 희33년(기원전222년), 진이 요동을 빼앗고, 연왕 喜를 사로잡아 마침내 燕을 멸망시켰다.
是歲,秦將王賁亦虜代王嘉。
이해에 진의 장수 王賁도 代王 嘉를 사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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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王賁: 전국시대 秦의 將帥. 魏, 燕, 齊 등을 점령해 秦의 천하통일에 큰 공을 세웠다. 기원전223년에는 아버지인 王翦에게 패해 요동지역으로 쫓겨나 있던 燕王 喜를 공격해 그를 사로잡고 燕을 멸망시켰다.
太史公曰:
召公奭可謂仁矣!
笆棠且思之,況其人乎?
燕[外]迫蠻貉,內措齊、晉,崎嶇彊國之閒,最為弱小,幾滅者數矣。
然社稷血食者八九百歲,於姬姓獨後亡,豈非召公之烈邪!
태사공은 말한다.
“召公奭은 어질다 하겠다!
팥배나무도 백성들이 사모하거늘 사람이야 오죽하겠는가?
燕은 밖으로는 蠻貉과 가깝고 안으로는 齊와 晉에 끼어 있었으니, 험하고 강한 나라 나라의 사이에서 가장 약소한 나라로서 거의 몇 번이나 망할 뻔하였다.
그럼에도 사직의 제사를 8, 9백년을 유지하며 희씨 성들 가운데 가장 늦게 망했으니 이 어찌 소공의 공적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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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蠻貉: 蠻貊. 고대 燕의 동북쪽에 있는 소수민족.
▶ 迫: 바싹 접근하다.
▶ 措: 사이에 두다. 끼우다.
▶ 崎嶇: 산이 가파르고 험하다.
▶ 血食: 피 묻은 산짐승을 잡아 제사를 지낸 데서 비롯되어 제사를 지내는 것을 이르는 말이 되었다.
▶ 烈: 공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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