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한글 文章/선비의 의식구조 (28)
耽古樓主의 한문과 고전 공부
□ 放浪人의 風流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이 방랑 생활 도중 중흥사(中興寺)에 있을 때 일이다. 비가 내린 뒤, 시냇물이 불면 종이를 썰어 1백여 조각을 만들고 사람을 시켜 붓과 벼루를 가지고 뒤를 따르게 한다. 시내를 따라 내려가다가 물결이 급한 곳을 골라 앉는다. 그곳에서 율시(律詩) 혹은 오언절구(五言絶句)를 지어 종이에 써서는 물에 띄워 보내고, 멀리 떠내려간 것을 보면 또 써서 띄워 보내기를 밤이 늦도록 계속하여 종이가 다하면 돌아오곤 했던 것이다. 또 그는 길 가다가 시흥(詩興)이 솟으면 등에 진 배낭에서 낫을 꺼내서 서 있는 나무를 깎고 시를 쓰기를 좋아하였다. 한참 읊고 나서는 문득 곡을 하여 깎아 버린다. 옛날 선비들이 유람할 때나 유배길에 오르면 이 나무밑둥을 깎아 시를 쓰기 위..
□임금 앞에서 史筆 빼앗은 老蔡 중종때 선비 이홍간(지중추부사)은 어떠한 세도의 압력 밑에서도 소신을 밝혔으므로 속세적 차원에서 행복하지 못했던 전형적인 선비였다. 간신 남곤 일파에 의한 젊은 엘리트 학자 조광조 일당의 축출정변인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남곤의 세도는 절대적이었다. 이 때 평안평사(平安評事)라는 미직에 있던 이 홍간(李弘幹)은 남곤의 사위 이선에게 남곤을 규탄하는데 서슴치 않았다. 『지정(남곤의 호)은 오늘날 가장 명망높은 분이긴 한데 두 번이나 고변(告變)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 이선은 이 말을 남곤에게 일러바쳤고 이 구설수로 남곤이 집권하고 있는 동안 변방으로만 쫓겨다녔던 것이다. 남곤이 죽은 다음 장령(掌令)의 벼슬에 올랐는데 그는 정변음모 혐의로 귀양가게 된 영..
■守令의 自虐祈禱 기우(祈雨) 관계 자료를 수집·분류하는 과정에서 어느 지방을 다스리는 수령이 제주(祭主)가 되는 기우제의 빈도가 가장 잦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를테면 어느 한 고을이 가물면 그 고을의 수령인 목사나 현감이, 한 지방이 가물면 지방의 관찰사가, 나라 전체가 가물면 임금이, 그 가뭄은 자신의 부덕이나 악정의 소치로 보고 그 죄책을 하느님에게 비는 형태로 기우제가 진행되었던 것이다. 그 실례는 다양하다. 기우제의 제단에 수령이 바지자락을 걷고 올라선다. 수령은 두 손을 맞쥐고 하늘을 올려 보며 하느님에게 기구하는 자세를 취한다. 그럼 복면한 사제들이 곤장을 들고 올라와서 이 수령의 종아리를 내려친다. 피가 터져 나오도록 친다. 수령은 용서비는 기사(祈)의 주문을 외운다. 문헌에 따라서는..
■ 가마고개의 悲劇 하동(河東) 옥종면(玉宗面) 종화골에서 안계골로 넘어가는 고개가 있다. 「가마고개」로 불리우는 이 고개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구전된다. 광해군 때 일이다. 남명(南溟) 조식(曺植)의 학통을 이어받은 종화골의 한 명문 집안에서 딸을 출가시키고자 가마 행차를 하였다. 공교롭게 이때 퇴계 이황의 학통을 이어받은 안계골의 한 명문 집안에서도 딸을 출가시키고자 가마행차를 하였다. 이 양가(兩家)는 수백 년 동안이나 학통이 다르다는 것을 두고 다투어온 적대 가문이었다. 이 적대하던 가문의 두 가마가 공교롭게 이 고개마루에서 부딪치게 되었다. 비록 좁은 고갯길이기는 하지만 가마가 못 비켜가리 만큼 좁진 않았다. 고개 아래는 낭떠러지로 남강(南江)의 지류인 덕천강(德川江)이 흐르고 있었다. 어느 ..
□ 不忍見之處란 性표현 저자의 고향에 박참봉이라는 선비가 살고 있던 기억이 선하다. 마을에 제사가 있으면 으레 이 참봉 집에 가서 지방을 써달라 했고 사주단자도 이 참봉의 손을 거쳐야 했다. 아이를 낳으면 이름도 지어 주었으며 이 마을에서 태어난 아기의 거의가 참봉이 지어준 이름으로 호적에 올렸다. 그 이름을 지어준 댓가로 소년들은 이 참봉집에 가서 먹을 갈아 주는 사역을 번갈아 했다. 곧 우리 마을의 문화센터였으며 그만한 존경과 섬김을 받았던 것이다. 한데 그 마을에는 일단의 장난기가 심하고 유머러스한 일단의 옌네들이 있었다. 상민의 아낙들로 가진 장난을 다하여 즐거워하곤 했던 것이다. 이를테면 그 마을에 새 머슴이 들면 이 신래자(新來者)에게 곤욕을 주는 일을 이 옌네들이 되맡아 우스개거리로 삼곤 했..
3. 抵抗性向 ■ 青盲抵抗 권세에 저항하는 행동유형 가운데 한국 고유의 이색적인 한방식이 여말(麗末)부터 일제(日帝)까지 지속되어 왔었다. 청맹(靑盲)이라 하여 눈을 뜨고 있으면서 장님 행세를 하고 불의의 세상에서 자기를 철저하게 소외시키는 레지스탕스다. 불의가 지배하는 세상은 그에게 있어 암흑이며 이 암흑을 소외시키는 「청맹 선언」을 하면 임금이나 조정에서도 그 인위적 장님의 청맹행위를 보장해줘야 했다. 그 청맹행위에 반감을 품은 짓궂은 임금이나 세도가는 이 청맹을 하는 이가 청맹을 깨뜨리는 일이 있는가를 감시하기 위해 사람을 상주시켜 감시를 하기도 했다. 청맹에 관한 기록은 여말 이성계의 득세에 대한 저항 수단으로 처음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같은 저항수단은 우리나라에서 독창된 것이 아니라 후한시대에..
□ BBC 프로듀서의 打算性 아프리카 케냐에서 있었던 일이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악어와 하마의 군서지(群棲地) 머치슨 폭포의 상류를 관광하고자 관광회사에 차편을 신청했다. 한데 관광철이 아니라서인지 손님은 필자하고 영국 BBC방송에서 근무하는 미국인 프로듀서의 부부 단 세 사람이었다. 관광회사측은 이맛살을 찌프리겠지만 우리는 꽤 오붓한 여행을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바로 친해질 수가 있었다. 그는 직업상 아내와 항상 떨어져 살게 되기에 투정이 심하여 이 투정을 소화시키기 위해 자신은 원치도 않는 이런 여행에 이처럼 連行되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 일행은 한 소읍에서 점심을 같이하였다. 5불짜리 식당(부페)이었다. 다 먹고 나서 필자는 이들 몫까지 합하여 15불을 치러 주었다. 아는 사람으..
□ 갓 쓴 벌거숭이와 網巾病 연암(燕岩)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이 사신 따라가는 연행(燕行) 길에 동포들이 모여 사는 고려보(高麗堡)란 마을을 지나갈 무렵 소낙비를 만났다. 비를 피하느라 한 점포에 들자, 마루에는 늙고 젊은 여인 다섯이 부채에 붉은 물감을 들여서 처마 밑에 말리고 있었다. 이때 별안간 사신 행차에 따라온 말 몰잇군이 알몸으로 비를 피해 뛰어들었다. 옷을 벌거벗고 머리엔 다 헤어진 벙거지를 쓰고 있었는데 벗은 옷을 머리 위로 쳐들어 벙거지가 젖는 것을 막는 엉거주춤한 자세였다. 박지원은 그 꼴을 「사람도 아니요 귀신도 아닌 그야말로 흉칙하기 이를 데 없었다」라고 했다. 물론 마루에서 일하던 아낙네들은 닭 쫓기듯 방 안으로 들어갔고 대신 주인이 뛰어나와 호통을 쳤다. 박지원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