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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의식구조-1.尊頭性向(존두성향)

耽古樓主 2023. 6. 3. 20:10

선비의 의식구조-1.尊頭性向(존두성향)

 

□ 갓 쓴 벌거숭이와 網巾病

 

연암(燕岩)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이 사신 따라가는 연행(燕行) 길에 동포들이 모여 사는 고려보(高麗堡)란 마을을 지나갈 무렵 소낙비를 만났다. 비를 피하느라 한 점포에 들자, 마루에는 늙고 젊은 여인 다섯이 부채에 붉은 물감을 들여서 처마 밑에 말리고 있었다.

 

이때 별안간 사신 행차에 따라온 말 몰잇군이 알몸으로 비를 피해 뛰어들었다. 옷을 벌거벗고 머리엔 다 헤어진 벙거지를 쓰고 있었는데 벗은 옷을 머리 위로 쳐들어 벙거지가 젖는 것을 막는 엉거주춤한 자세였다. 박지원은 그 꼴을 「사람도 아니요 귀신도 아닌 그야말로 흉칙하기 이를 데 없었다」라고 했다. 물론 마루에서 일하던 아낙네들은 닭 쫓기듯 방 안으로 들어갔고 대신 주인이 뛰어나와 호통을 쳤다. 박지원은 「하인이 매우 무례해서 이런 일을 저질렀다고 봅니다」하며 이 한국인의 추태를 극진히 사죄하였던 것이다.

 

무례한 한국인이라 그런 몰골을 했을까. 남녀유별(男女有別)은 중국인보다도 숭상한다는 한국인인데 말 몰잇군이라는 소인이라서 그런 무분별한 행동을 저질렀을까.

 

이와 같은 의혹은 정조 때의 실학자로서 폐립론(廢笠論)을 주창한 이덕무(李德懋)의 인용 실례가 해명해 주고 있다.

 

조선의 한 역관(譯官)이 토사우(土砂雨)를 만나 온몸을 온통 적셨다. 이 역관은 젖은 옷을 벗고 알몸이 됐으나 관(冠)만은 그대로 눌러쓰고 사신 행렬에 들어서는 바람에 중국인의 웃음을 샀다 한다.

 

이 두 가지 나신대관(裸身戴冠)의 사실(史實)을 두고 우연한 일치라고 보아 넘길 수는 없다. 한국인과 관(冠) 사이에는 어떤 유기적 관계가 있다는 한 맥락(脈絡)의 표현으로 봐야 할 것이다.

 

성종(成宗) 때 학자 최부(崔溥, 1454~1504)는 제주도 경차관(敬差官)으로 제주도에서 근무하다가 친상(親喪)의 부음을 듣고 육지로 오는 도중 풍파를 만나 명나라까지 표류를 한다. 그 표류는 가혹한 것이었다. 몸에 지닌 모든 것을 유실하고 혼비백산한 상태로 표착했는데도 머리에 쓴 삿갓 [喪笠]만은 단정하게 쓰고 있었으며 이를 본 중국인들이 목숨보다 강한 관모(冠帽)에의 집착에 혀를 내어 흔들었다 한다.

 

□ 無冠萬歳는 萬歳가 아니다.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일어났던 날 밤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서광범(徐光範) 등 정변 주체 멤버들이 고종의 침전 정문인 협양문(協陽門)에 이르렀다. 이들은 일부 행동대로 하여금 침전 인근에서 폭약을 터뜨려 임금을 놀라게 하는 한편 임금으로 하여금 일군(日軍)을 청해 어신(御身)을 보호토록 하려는 심산이었다.

 

이 협양문을 지키는 무감(武監)이 이 밤중의 침입자를 받아들여줄 턱이 없었다. 주의를 끄는 것은 이 무감이 이들을 문 안에 들여놓을 수 없는 명분이다. 폭력 혁명을 하는 이들이 정장(正裝)했을 리 없고 한결같이 평복(平服)에 무관(無冠)차림이었다. 관을 쓰지 않고는 임금 앞에 나설 수 없다는 것이 이 무감에게는 더 소중했던 것 같다. 무감은 애걸을 했다. 정장(正裝)은 못갖추더라도 착관(着冠)만은 해달라고. 이 무감에게는 쿠데타보다도 관(冠)이 더 소중했던 터이다.

 

□ 冠의 象徵的 意味

 

존두(尊頭)는 곧 선비사상의 본질 가운데 하나였다. 얼핏 보기에 비합리적이고 비인간적이며 고식(姑息)적인 그런 마이너스적 가치의 사상인 것만 같다. 그러기에 선비사상이 저주받을 수 있는 소인(素因)이 됐던 것도 부정할 나위가 없다.

 

현대인은 항상 근시적이며 당세(當世)적이고 인스탄트의 가치만을 가치로 안다. 효과가 시각적으로 드러나고 손아귀에 쥐어져야 만이 효과로 안다.

 

이 현대인의 가치관과 효과관으로 선비사상을 볼 때 오차가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선비 사상은 나타나는 가치관과 효과로 형성된 사상이 아니므로다. 오히려 나타나는 현재의 개념은 고통으로 표현되고 미래와 과거에다 가치와 효과를 두어 그 미래에서 현재로 소급되는 가치, 그 과거에서 현재로 연장되는 가치에서 존재 가치를 찾는다.

 

존두 사상도 그 같은 개념으로 파악이 된다.

 

예기 관의편(禮記 冠義篇)에 ‘관(冠)은 예(禮)의 시초이다’라고 했다. 이곳에서 예란 사나이가 한 사람 몫으로 행동할 수 있는 본을 말한다. 남자가 사회적으로 성인이 된다는 것은 곧 성인으로서의 예의범절을 지켜야 한다는 강제규정이 내포된다. 아버지의 아들로서, 임금의 신하로서, 형의 아우로서, 연장자의 연하자로서의 예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곧 사람으로서의 본(本)이며 그 본이 관(冠)으로 시작되고 상징된다. 관례(冠禮)는 한국적 성 인식(成人式)의 표현이랄 수 있다.

 

세계 모든 종족에게 성인식(成人式)이 있고 그 의례가 있다. 할례(割禮), 발치(拔齒), 입묵(入墨), 문신(文身), 코나 귀의 천공(穿孔), 모발(毛髮) 또는 체모(體毛)의 제거 등 고통이 수반된 육체적 가학(加虐)으로 성인(成人)이 된다. 한데 한국인은 관(冠)을 쓰는 관례(冠禮)로서 성인이 된다. 일단 관례를 거쳐 성인이 되면 관동지별(冠童之別)이라 하여 아무리 나이 많은 총각 앞에서도 어른 대접을 받았다.

 

관은 곧 예를 지키는 인간으로서의 자격이요, 상징이다. 관은 예를 지키는 인간으로서 고된 책임 끝에 얻어지는 훈장같은 것이다. 관을 쓰지 않는다던가 관을 훼손한다든가 하는 것은 예인(禮人)이 아니거나 예인으로서의 훼손을 뜻하였다.

 

관이 없다는 것은 인간상실이요 인간실격이었다. 관은 곧 선비사회의 규범인 예를 강제하는 정신적 채찍이요 관은 선비사회의 자율적 인간조성의 기틀이었다. 관을 쓰고 비위를, 악을, 죄를 저지를 수 없었다. 관을 쓰고 남의 각시에게 추파를, 음욕을, 재욕을, 권욕을 부릴 수는 없었다.

 

한국인을 자율적 인간으로 사회에 조화시켜 온 역할을 이 관이 담당했다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머리는 상(上)이고 위를 뜻한다. 서열에 있어 머리는 넘버 원이다. 한국인은 이 세상에서 서열에 가장 예민하고 서열의식에서 자기를 파악하며 그 의식을 체질화하고 사는 서열민족이다.

 

연회 자리에 가도, 회의석상에 가도 서열대로 앉아야 하고 엘레베이터 하나 타는 데도 서열순으로 타고 내려야 한다. 이 서열의식 없이는 함부로 앉지도 먹지도 가지도 못한다. 발언의 순서도 그렇다. 세미나 등 집회에서 선후배 관계, 사제(師弟)관계의 서열에 사로잡혀 이견(異見)이나 반말을 할 수가 없다. 그러기에 서열의식이 강한 한국에서 순수한 학문의 토론은 불가능하다는 말도 진리이다.

 

낯선 종씨(宗氏)끼리 만나면 통성명을 하고 이름의 항렬로 서열을 따지는 것으로 인사는 시작된다. 만약 늙은 A가 젊은 B보다 항렬이 낮으면 A란 늙은이는 B란 젊은이에게 큰절을 하고 경어를 써야 한다.

 

한국사회의 특질은 이 서열을 본질로 하는 종적 구조로 되어있으며 이 서열의 장점 단점도 많다. 다만 이 한국사회의 특질을 유지시키는 선비사회의 개념적 사상이 존두사상인 것이다.

 

신령(神靈)이나 임금이나 조상이나 부모 스승 등 서열의 윗부분에 국한해서 머리를 숙일 뿐 그 밖의 아무것에도 머리를 숙인다는 것은 인간존엄의 포기로 안 것도 그 때문이다.

 

왼손보다는 오른손이 귀중하므로 머리부분을 왼손으로 만진다는 법은 없었다. 왼손은 소피를 본다던가 발을 씻을 때만 쓰고 오른손은 두상을 매만질 때만 썼다.

 

곧 존두사상은 서열의식을 굳히는 근본적 공식이며 이 존두사상에 주형(鑄型)되므로써 만이 서열사회에서 인간의 조건을 갖출 수가 있었다.

 

현대의 한국인은 관을 벗어 버렸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아직도 그 너른 관의 테 아래서 살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서구적 가치관에 비추어 저주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관이 갖는 심층의 가치를 발굴하므로서 개념적 관은 항상 우리 한국인이 쓰고서 살고 싶은 것이다.

 

□ 尊頭에서 尊長으로

 

이 같은 존두사상이 구체적 덕목(德目)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존장(尊長)이란 한국적 가치관이다.

 

머리를 존대한다는 것은 곧 스승이나 연로자를 존대하는 존장 의식을 한국인에게 부식(扶植)시켜 놓았으며 이 또한 한국인의 조건으로 한국인을 지배해 내린 요소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조경(趙儆)이 한 재상의 집에 갔더니 한 늙은 음관(蔭官)이 먼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주인의 손자 아이가 나이 이제 육칠 세인데, 너무 귀여워한 나머지 버릇이 없어져 음관에게 희롱하고 욕을 하곤 하였다.

공이 정색하고 말하기를,

『어린 아이가 심기가 정하여지지 않았기로 비록 매를 쳐 가르쳐서 어른과 늙은이를 공경하라 하여도 오히려 그 교훈을 받들지 못할 터인데 지금 도리어 어른을 모욕하라고 가르치니, 이 아이 생각에 이미 늙은이에게 거만해도 괜찮다고 여겨지면 다음에는 형에게도 거만할 수 있고 아버지에게도 거만할 수 있고 임금에게도 거만할 수 있다고 생각할 터이니 악역(惡逆)을 범하는데 이르지 아니 할른지 어찌 알겠소.』

라고 하니 주인이 기가 막혀서 말하지 못하였다 한다.

 

오성(鰲城) 이항복(李恒福)이 정승으로 있을 때 고관(高官)이 찾아와도 다 앉아서 절을 받았는데 하루는 신훈도(申訓導)가 뵙기를 청한다고 하니 공(公)이 버선발로 나아가서 맞아들여 마루에 오르게 하고 고개를 숙여 그의 말하는 바를 듣고 응대하는 것이 심히 공손하기에 집안 사람이 괴(怪)히 여겨 물었다.

 

그 사람은 공이 아이 때에 수업하던 스승이었다. 이튿날에 공이 그 숙소에까지 가서 회사(回謝)하고 면포 십여 필과 쌀 두어 섬을 여비로 주니,

『여행에 필요한 것은 두어 말 쌀이면 족합니다. 』

하고 그 나머지는 받지 않았다 한다.

 

이세정(李世靖)이 정유(丁酉)년 진사(進士)로 경학(經學)이 정(精)하고 깊었다. 나이 육십여 세가 되도록 여러 번 과거를 보았으나 합격하지 못하고 이웃 자제들을 가르치어 그에게 수업하여 출세한 자가 많았다. 이찬성 희강(李贊成 希剛), 성참판 응경(成參判 應卿), 김동지 공석(金同知 公碩) 그리고 김안국(金安國), 김정국(金正國) 형제 모두 그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그는 성질이 졸직(拙直)하고 사물에 대한 수완 능력이 없었다. 수업하던 이들이 어울려 천거하여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로 제수되었다. 임기가 차서 청양현감(靑陽縣監)이 되어나갔는데 그때 최찬성 숙생(崔贊成 淑生)이 새로 충청도 관찰사에 제수되었다. 수업하던 여러 사람이 성문 밖에 나가서 관찰사를 전송하면서 청양현감을 부탁하기를

『그는 우리들이 수업한 사장(師長)인데 학문과 맑은 지조가 있는 분이니 함부로 폄고(股考)를 하지 말게.』

하니 최공이 허락하고 갔다.

그러나 부임한 처음에 수령의 성적 고사에서 말등(末等)이 되어 파면이 되어 돌아왔다. 김정국(金正國) 형제가 김공석과 함께 최공을 가서 보고

『충청도 내에 어찌 백성을 해치는 간악한 수령이 없길래 우리 스승을 말등에 떨어뜨렸는가. 공(公)의 성적고사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였다.

최공이 말하기를

『다른 고을은 비록 간악하나 다만 한 도적뿐이니 백성이 오히려 견딜 수가 있지마는 청 양고을은 원은 비록 청백하나 여섯 도적이 밑에 있으니 백성이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뱃속이 텅 빈 사람이 어찌 한 고을에 원 노릇을 할 수가 있는가.』

했다.

이에 김 정국은

『이사장(李師長)의 뱃속에 육경(六經)이 가득 찼는데 어찌하여 뱃속이 텅 비었다 하는가.』

하니

『자네들이 모두 이씨 뱃속의 육경을 나누어 자기의 뱃속을 채우고 그것으로 과거에 올라 출세하였으니 이씨의 배가 비록 크더라도 자네들 허다한 사람이 빼앗아 갔으니 그 뱃속에 남은 것이 있을 수 있겠나.』

하였다.

 

이상의 고사(故事)들에서 선비들의 존장기풍이 어떠하였는가를 엿볼 수가 있다. 곧 인격 면에서, 학식 면에서, 신분 면에서, 벼슬 면에서, 또 경제적인 면에서 비록 하위에 있더라도 존장에 대한 존경만은 대단하였으며 이 존장에의 존경에 하자가 있다는 것은 곧 선비로서 치명적인 결격사유가 되었던 터이다.

 

□ 尊右卑左思想

 

성리학이 인간행실을 모럴의 우리 속에 얼마나 철저히 잡아 가두었는가의 본보기로서 평택에 우거했던 우남양(禹南陽)의 행실을 들 수 있겠다. 문헌에 그는 두문(杜門)한 채 독서만 하고 제사날 제주(祭酒)를 손수 뜨기 위해 문밖을 나가는 이외에는 볼 수도 없었다 하였다. 이 드문 나들이 때는 처와 더불어 읍(損)을 하는 상례를 하였고 여종마저도 문전 몇 걸음 앞에는 딛지 못하게 여색을 멀리했으며 친구도 어찌나 가리는지 서경덕(徐敬德)과 최수성(崔壽城) 이외에는 확인시켜 집에 들이지도 않았다 한다. 기묘사화 때 그 불의를 통탄하여 불식(不食)의 저항 끝에 죽었던 우남양의 행실은 그 후 유가에 전설적인 것이 되어 내려왔다. 전에 의하면 제사 때 이외에는 고개를 숙인 일이 없었고 머리카락이 한 가닥이라도 빠질까 봐 머리도 빗은 일이 없으리만큼 존두사상에 철저하였고, 신을 신는다든가 가려운 하체를 긁든지 밑을 닦을 때와 같이 비천한 작업을 할 때는 반드시 왼손을 쓰는 존우(尊右)사상에도 철저하였다 한다. 문안에서 여자들이 비록 처나 딸일지라도 입속말인 함구언(緘口言)을 하게 하여 음기(陰氣) 排除를 철저히 금하였고, 이웃에 있는 방앗간의 방아찧는 행위가 음탕하다는 인류학적인 사고로까지 기색(忌色)을 발전시켜 방앗간을 옮기도록 한 철저한 행실 성리학자였다고 한다.

 

이 우남양의 행동에서 존우하는 사고방식과 행동방식에 주의를 끌게 한다. 우(右)는 오른쪽이란 뜻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귀하고 바르고 또 현명하며 소중하다는 뜻이 있으며 해가 돋는 동쪽을 뜻하기도 했다. 북녘을 향해 서면 오른쪽이 동쪽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명문이나 명족을 우성(右姓)이라 하고 정도(正道)를 우도(右道), 학문을 숭상한다는 말을 우문(右文) 한다고 한다. 반면에 왼편을 뜻하는 좌(左)는 위에서 내려준다, 멀리한다, 불편하다,천하다, 정도가 아니라는 뜻으로 정도가 아닌 가르침을 좌도(左道), 나쁜 관직으로 옮겨가는 것을 좌천(左遷)이라 했다. 영어도 오른 쪽은 바르다는 말과 같다. 인도의 고행승(苦行僧)들의 습속에도 두상에 손댈 일이 있으면 오른손으로 하고 몸의 하체, 이를테면 소변을 본다든지 신발을 신는다든지 하는 작업은 반드시 왼손으로 했다.

 

그이와 같은 존우비좌(右卑左) 사상은 세계 공통적이며 원인은 여러 학설이 많으나 많은 사람의 손이 이우벽좌(利右僻左)하기 때문으로 보는 것이 가장 보편적이고 유력하다.

 

□ 尊左異說

 

이와 같은 존우사상은 한국선비의 생활습속을 여러 모로 규제해왔다. 이를테면 광화문같이 세 개의 문이 있는 궐문을 드나들 때에도 중문은 왕과 중국 사신의 전용문이고, 사대부나 양반은 오른쪽 문, 중인 이하의 서민들은 왼쪽 문으로 드나들었다. 법도 있는 집에서는 손님이 왔을 때 왼쪽 대문을 열고 맞이하거나 왼쪽 장지문을 열고 맞이하면 큰 실례로 알았다. 또 상전이나 윗사람의 오른편에 앉거나 서 있어도 그건 실절(失節)로 호통을 받았다.

 

한말까지 종로에서는 거마(車馬)나 천민은 좌측통행을 하고, 양반은 우측통행을 했다. 차마에게 존귀한 오른쪽을 걷게 할 수 없다는 것이 그 발상이었다. 가리마를 가를 때 잘못하여 왼쪽으로 기운 듯하면 불길하다고 욕을 먹었다. 종(奴)을 매매할 때 왼손잡이면 그 값이 반감(半減)되었고, 밥상이나 술상 시중에서 편의상 왼손을 썼다간 큰 실례로 간주되었다. 첩이 본처를 질투하여 저주할 때 본처의 화상을 자기 화상 왼쪽에 그려 놓고 주문을 외웠다.

 

한말 민비(閔妃)의 사주를 받은 정동(貞洞)의 한 무당이 대원군의 이름을 당벽(堂壁)에 써놓고 좌시(左矢)를 쏘아 맞추므로써 저주했었다. 좌시란 곧 왼손으로 쏘는 활인 것이다. 이처럼 존우비좌(尊右卑左) 사상은 철저하게 생활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역(易)에서는 양(陽)을 좌(左)로, 음(陰)을 우(右)로 하였으므로 좌존우비(左尊右卑)하는 습속도 있었다. 왜냐하면 한국인은 양을 숭상하고 음을 흉악시했기 때문이다. 이같은 사상은 이미 한나라 시대에 중국에서 형성되어 좌측에 길(吉)이 있고 우측에 흉(凶)이 있다하여 좌존(左尊) 취향이 있었다.

 

이 같은 좌존사상은 역(易)이 생활화하면서 한국 민중들 틈에 토속화되기도 했다. 특히 아들을 낳는데 큰 가치를 부여했던 산속(産俗)에서 좌존사상은 확고하였다.

 

옛 한국인들은 양(陽)인 남자가 수태되는 방위가 자궁의 왼쪽이며, 음인 여자가 수태되는 방위는 자궁의 오른쪽이라는 것을 확고하게 믿었다. 그러기에 사정(射精)을 할 때는 왼쪽에 치우쳐 하였고 수정한 여자는 반드시 좌와(左臥)하고 누어야만 했다. 밴 아이가 아들이냐 딸이냐를 판단해 보는 습속으로 무심코 임부를 등 뒤에서 불러보는 간단한 수법을 잘 썼다. 만약 임부가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 보면 그건 아들이고 반대쪽이면 딸로 추정했다. 배가 왼쪽으로 치우쳐 부르면 아들로 알았고 아이를 낳아서 첫 옷을 입힐 때 아들은 왼 소매부터, 딸은 오른 소매부터 입힌다.

 

중국의 관제(官制)를 모방하여 좌의정(左議政)을 우의정(右議政)의 상위에 랭킹시킨 것도 이 역학(易學)의 음양사상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존좌의 습속은 이같이 남존(男尊) 사상에 국한되어 음성적으로 속전되어 왔고 존우사상은 양성적으로 번져 왔음을 알 수가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