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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의식구조-4.戒色性向(계색성향)

구글서생 2023. 6. 10. 20:05

 

선비의 의식구조-4.戒色性向(계색성향)

 

□ 不忍見之處란 性표현

 

저자의 고향에 박참봉이라는 선비가 살고 있던 기억이 선하다. 마을에 제사가 있으면 으레 이 참봉 집에 가서 지방을 써달라 했고 사주단자도 이 참봉의 손을 거쳐야 했다. 아이를 낳으면 이름도 지어 주었으며 이 마을에서 태어난 아기의 거의가 참봉이 지어준 이름으로 호적에 올렸다. 그 이름을 지어준 댓가로 소년들은 이 참봉집에 가서 먹을 갈아 주는 사역을 번갈아 했다.

 

곧 우리 마을의 문화센터였으며 그만한 존경과 섬김을 받았던 것이다.

 

한데 그 마을에는 일단의 장난기가 심하고 유머러스한 일단의 옌네들이 있었다. 상민의 아낙들로 가진 장난을 다하여 즐거워하곤 했던 것이다. 이를테면 그 마을에 새 머슴이 들면 이 신래자(新來者)에게 곤욕을 주는 일을 이 옌네들이 되맡아 우스개거리로 삼곤 했다. 새 머슴이 나뭇짐을 지고 옌네들이 얼려있는 동네 샘가 앞으로 지나가면 살금살금 나뭇짐 뒤로 기어들어가 지게 밑으로 손을 넣어 머슴의 바짓가래를 끌어 내린다. 무거운 짐을 지고 허겁지겁하는 꼴을 보고 샘가의 옌네들은 발을 구르며 웃곤 했던 것이다.

 

이 일단의 옌네들 앞에서는 거드름을 피는 박참봉도 어쩔 수가 없었다. 오히려 선비연하고 거드름을 필수록 이 상민들의 반동은 반비례해서 컸던 것이다.

 

이를테면 여름날 삼(麻)살이 끝에 익은 삼 한 아름씩 들고 이 참봉집 문밖에 늘어 앉아 삼을 베낀다. 치마를 걷어 부치고 속곳가래를 짐짓 들어내고 앉아 일을 하면서 이 참봉의 반응을 보는 것이었다. 참봉이 영문 모르고 나오다가 이 속곳의 시위(示威)를 보고는 마냥 뛰어들어 간다. 소금물을 타오라 시켜 못볼 것을 본 부정한 눈을 씻는다.

 

뿐만 아니다. 이 짓궂은 옌네들은 동네 칙간인 공동변소에 참봉이 들어가 있는 것을 알면 숨을 죽이고 다가가 칙간문을 열어젖힌다. 당황해 도망치는 꼴을 보고 주저앉아 땅을 치며 웃는다던가 -.

 

일련의 이 같은 장면은 사양(斜陽)의 선비에 대한 신흥 상민세력의 반동 과정으로 파악할 수가 있겠다. 다만 이 유머러스한 반동이 왜 성(性)을 암시한 색(色)을 둔 영역에서 주로 행해졌던가에 주의를 하게 된다.

 

그것은 선비의 본질 가운데 색을 기피하는 기색(忌色) 또는 색을 경계하는 계색(戒色)이 중요한 원형질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조때 서울 운종가에서 아내의 간통을 적발한 남편이 그의 아내의 국부를 돌로 쳐 죽인 사건이 있었다. 이때 이 사건을 다룬 관가에서 조서를 꾸미는데 국부의 표현 문구를 두고 논란이 심하였다.

국부 같은 천한 말을 쓴다는 것은 선비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나 법문서이기에 사실은 기록해야 했기 때문이다. 고심 끝에 함양의 오일섭이라는 선비가 아이디어를 냈다.

그는 「모가 나지 않은 돌로 차마 보지 못할 곳을 때려 죽였다〔以無方之石 打殺不忍見之處〕」라 조문을 지어 올렸다.

국부를「부인견지처」로 표현하므로서 한국선비의 忌色하는 의식구조를 충족시켰으며 이 같은 성에 대한 점잖은 표현은 그 후의 법문서에 한 본보기가 되어 씌어져 왔던 것이다.

 

忌色성향은 여느 생활 속에도 찌들어 있었다. 이를테면 사랑방에 어른이 계시면 비록 그 장소가 사랑방에서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여자들은 소리를 내어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아내나 딸일지라도 함구언(緘口言)이라 하여 입속말이나 귓속말로 의사를 통해야 한다. 여자의 음성에는 색기(色氣)가 있어 집안에 그 기피해야 할 기가 찬다는 것은 선비 가문에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기색을 음양의 역학에 합리화시킨 습속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조상이나 신령에게 바칠 떡이나 술을 빚을 때 여자들은 창호지로 입을 막고 그 빚는 작업을 진행해야 한다. 여자의 입에서 뿜게 마련인 색기는 금기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여자의 속곳이나 여자의 체취가 스민 이불닛 요닛 등의 빨래를 앞마당에 말려서도 안 된다. 그것들은 아무리 응달이라도 뒤란에서만 말려야 했다.

 

한국인의 강인한 기색의지는 주술적으로 치닫는다. 그 한 실례로 디딜방아의 기피를 들 수 있다.

 

옛날에 좀 산다는 집은 담 안에 자가용 디딜방아를 두고 살았다. 옛 속담에도 있듯이 방아는 성교행위의 상징이고 그 심볼리즘은 옛사람들에게 상식화돼 있었다. 가통이 엄한 집에서는 이 디딜방아를 담 안에 두질 않고 쿵덩쿵덩하는 방아찧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만한 거리 밖에 두는 것이 상식이었다. 디딜방아를 담 안에 둔 가문과는 통혼(通婚)을 않는 집안도 있었던 것이다.

 

눈이 크고 허리가 가늘고 손이 섬세하고 살결이 부드럽고 콧날이 선 그런 여인상은 오늘날에 있어 미인의 조건이 돼 있다. 한데 옛 한국사회에서는 이 같은 아름다운 조건은 무자상(無子相)이라 하여 철저히 배격을 받았었다. 그 저의는 색기가 많기 때문이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겠다.

 

참판 이식(李拭)은 퇴계와 밀접한 친분을 가졌던 분이다. 그는 퇴계의 어록을 모두어 책을 만들었는데 그 가운데 퇴계의 인간적 갈등을 엿볼 수 있는 이색적인 대목을 추려볼 수가 있다.

 

퇴계가 장자에게 남긴 말로 다음 세 토막이 그것이다.

 

『내 성품이 번거로운 것을 싫어하고 고요한 것을 좋아하니 부득이 부자손(父子孫)이 형편을 보아서 따로 살아야겠다. 』

 

『부자간에 따로 사는 것이 본래 아름다운 일은 아니나 옛적에 동궁, 서궁, 남궁, 북궁 제도가 있었으니 함께 거처하면서도 재산을 따로 가질 바에는 차라리 따로 살면서 재산을 함께하는 것만 하겠느냐.』

 

『네가 갈 데가 없어 처가살이를 하며 궁색하다니 매양 네 글을 보면 문득 며칠 동안 마음이 즐겁지 않고 심사가 산란하기만 하구나』

 

일련의 이 어록을 볼 때 퇴계는 선비의 조건 가운데 기조가 되는 부자 동거의 모럴을 깨고 어떤 절박한 이유에서 맏아들을 별거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던 강박된 상황을 엿볼 수가 있다. 그것은 본의가 아닌 것이 분명하고 또 밝힐 수 있는 떳떳한 것도 못되었던 것 같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이식의 아들이 이평숙(李平叔)이고 이평숙의 외손집에서 퇴계가 이평숙에게 직접 쓴 편지 한 장이 후세에 발견되었는데 그 피봉에는 「도중에서 비밀히 떼어보라 [道次密啓看]」란 글이 씌어 있었다. 이 편지는 퇴계가 머물던 도산(陶山)에서 퇴계와 작별하고 돌아올 때 말로 다할 수 없는 사연을 적은 것이었다.

 

『내가 일찌기 재취를 했는데 한결같이 불행하여 자못 번거롭고 심사가 산란하여 진정시킬 수 없을 때가 있었다.』는 것이 그 사연이었다.

 

퇴계가 재취했고 그 재취한 처가 악처였음은 후세에 알려진 사실이긴 하나 당세에는 이 재취의 사실이나 그 재취 때문에 당하는 갈등을 외부에 알리기는 커녕 내색을 해서도 안 되었던 것이다. 비단 퇴계가 거유(巨儒)라서가 아니라 한낱 선비로써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곧 여색의 기피는 선비의 조건이요 생명이었기에 이 조건이 주는 본능적 인간과의 갈등이 이 퇴계의 말 못할 고민을 빚어놓았던 것이다. <성호사설>

 

■ 同寝忌色의 試煉

 

율곡이 명나라 사신의 원접사(遠接使)로 황주(黃州)에 갔을 때 일이다. 황주 목사가 율곡을 대접하기 위해 황주명기인 유지(柳枝)로 하여금 수청을 들게 했다. 곱게 차린 유지가 방에 들자, 율곡은,

 

『네 자태를 보니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겠다. 하지만 사랑을 하면 나는 너를 거느리고 기색(忌色)의 대강(大綱)을 범하는 것이 되니 그것을 감당하기는 사랑보다 더 무거우니 물러가 주는 것이 좋겠다.』

고 물렸던 것이다.

그 후 율곡이 해주에 살았을 때 이 유지가 멀리서 찾아와 뵙기를 원하자 방에 들이지도 않고 「유지사(柳枝詞)」란 각기시(却妓詩)를 써주고 끝내 만나지 않았다 한다. <남계집>

 

율곡이 죽자 유지는 달려가 곡을 하고 3년간 복상을 하였기로 일설에는 보다 깊은 정실을 억측하기도 했으나 우리 옛 기도(妓道)에서 색을 뺀 기생의 의리라는 게 높이 평가받았던 실례로 미루어 보아 복사(服喪)했다는 것을 기색의 파계로 속단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명종때 학자 성제원(成悌元)이 보은현감을 배명받고 청주에 이르렀을 때 목사가 춘절(春節)이라는 이름의 명기를 시종케 하였다. 성제원은 이 춘절과 더불어 충청도 산천을 두루 구경하고 다녔으나 시종 동상불범(同床不犯)이란 선비의 조건을 지켜냈던 것이다. 산천을 유람하면서 경치 좋은 곳에 이르면 그림을 그리고 시를 읊어 수십 폭의 시화가 쌓이게 되었다.

춘절과 이별할 즈음에 성 제원은 말했다.

 

『비록 내가 너를 불범했다 손 치더라도 남들은 그것을 믿지 않을 것이고 춘절은 동주(성제원의 호)의 기첩이라 하여 널 돌아보지도 않을 것이다. 아울러 먹고 살기도 어려울 테니 내 이 시화 십여 폭을 너에게 줄 것이다. 지나가다가 나를 잊지 않은 사람들이 이 그림을 보고 너를 도와줄 것이다. 』

 

그 후 성제원의 손자가 감찰이 되어 청주에 들렀을 때 이 말을 하니 그 노기(老妓)가 아직 살아있다 하여 불러 보았더니 이미 80 노령이었다. 줄곧 그 시화첩으로 생계를 유지해 왔는데 난리통에 그것을 잊어버렸다 했다.〈魯西日記〉

 

미암(眉岩)이 소시에 현감이 되었을 때 백인걸(白仁傑)이 무장(茂長)의 원으로 와 있었는데 마침 참판 송인수(宋麟壽)가 감사가 되어 와서 세 사람이 매우 즐거워하였다. 송공(宋公)이 부안(扶安) 기생 한 사람을 좋아하나 정은 통하지 아니하고 데리고 다니기만 하였다. 미암을 편지로 청하여 와서 함께 놀았다. 뒤에 송공이 임기가 되어 갈려 갈 때에 여산에서 송별을 하는데 두 사람과 기생이 같이 참석하였다.

송공이,

『내가 이 여자의 영리한 것을 사랑하여 일년 동안 자리를 같이하고서도 정을 통하지 않은 것은 실로 내가 겁낸 때문이었다. 』

하니 기생이 곧 앞산에 여러 무덤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그렇다면 저 산에 옹기종기한 것이 모두 내 서방의 무덤인가요. 』

하였다.

그것은 감사를 원망하는 말이었다. 〈識小錄〉

 

기색으로 유명한 김창협(金昌協)이 관서지방을 안찰(按察)할 때 계향이라는 자색있는 기생이 그 고집을 꺾고자 가진 수법으로 도전을 했다. 떠날 즈음에 손이라도 한 번 잡아달라고 애원하자 한삼(汗衫)으로 손을 싸고 난 다음 잡아주었던 것이다.

이때 손을 잡고 계향이 읊기를 -

 

시 하나 없는 사객(使客)은 단청에 장님이요,

색을 멀리하는 사나이는 부귀(富貴)에 중이런가

 

하였다.<陽江雜話>

 

정다산(丁茶山)의 목민심서에 감사 한지(韓祉)가 관기(官妓) 수십 명을 항상 옆방에 둬두고는 단 한번도 범하지 않았던 고사를 인용해 놓고 있다. 한지(韓祉)가 호서(湖西)의 선비로 청주에 머물렀을 때 강매(强梅)라는 재색을 수청들게 하였으나 손도 대질 않았다. 사흘이 되던 날 밤 잠결에 몸에 와 닿는 부드러운 피부의 촉감을 느끼고 한지는 잠을 깼다. 누군가고 물었더니 강매이었다. 무슨 수작인가고 따지자 수령이 엄명하기를 만약 네가 한지의 정을 못 얻으면 죄를 줄 것이라 하여 염치를 무릅쓰고 잠입하였다고 고백했다.

 

이 말을 듣고 한지는 이불 속에 들라 하여 열사흘 동안 한 이불 속에서 잤으나 끝내 불범하였다. 한지가 떠날 제 너무나 야속다 하여 강매가 울어대자 수령은,

『강매는 체취를 만년에 남겼고 사군(한지)은 꽃다운 이름을 백세(百世)에 머물게 했다. 』

하였다.

 

이토정(李土亭) 지함(之菡)이 자질을 교훈할 적에 여색을 가장 경계하여 항상 말하기를,

『기색에 엄하지 못하면 그 나머지는 족히 볼 것이 없느니라.』

하였다.

그가 제주(濟州)에 들 때에 목사가 그 이름을 듣고 영접하여 객관에 머물게 하면서 아름다운 기생을 택하여 그 객관으로 보내면서 창고의 곡식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네가 만약 이군의 사랑을 받기만 하면 이 한 창고를 상으로 주겠다. 』

하였다.

기생이 토정의 사람됨을 이상히 여겨 반드시 지조를 깨뜨리게 하려 하였으나 공이 마침내 더럽힘을 당하지 아니 하니 목사가 더욱 공경하고 중히 여겼다 했다. 〈海東名臣錄〉

 

이 밖에도 조 광조(趙光祖)나 김인후(金麟厚), 박응남 (朴應男), 성혼(成渾), 이안눌(李安訥), 임제(林悌), 서경덕(徐敬德), 이지함(李之菡), 정술(鄭述), 송인수(宋麟壽)의 기색에 관한 고사들은 선비들 간에 소문나 있었으며 이 기색이 혹심하여 성불구의 야릇한 경지까지 몰아간 사례도 사기(史記)에 더러 찾아볼 수가 있다.

 

□ 섹스 노이로제의 王子

 

『제안(齊安)은 무한히 아름다운 아내를 두었으며 항상 말하기를 「부녀자는 더러워서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한다」하여 마침내 부인과 마주 앉지도 않았고,

생원 한경기(韓景琦)는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의 손자인데 마음을 닦고 성품을 다스린다는 구실로서 문을 닫고 홀로 앉아 일찌기 그 아내와 서로 말한 일이 없었으며 만약 종년의 소리라도 들리면 막대기를 들고 내쫓았다.

김자고(金子園)에게는 외아들이 있었는데 소학군자(小學君子)를 자처하여 음양의 일을 기피하므로 자고는 그 후사가 끊어질 것을 염려하여 그 일을 잘 아는 여자를 단장시켜 함께 자게 했더니 그 아들은 놀래어 상밑으로 도망쳐 나오질 않았다. 그 뒤에는 붉게 단장하고 족두리한 여자만 보아도 외면하고 길을 피해갔다. 』<용재총화(慵齋叢話)〉

 

앞에 지적한 제안이란 곧 예종(睿宗)대왕의 아들인 이모(李瑁)로 기색이 심하여 죽을 때까지 성생활을 하지 않아 유명하다.

 

인조(仁祖) 경연(經筵)에서 묻기를,

『공자(孔子)의 말에 색(色)을 조심하고 투쟁(鬪爭)하는 것을 조심하고 탐하는 것을 조심하라고 하였는데 세 가지 중에 어느 것이 제일 어려운가.』하니

오윤겸(吳允謙)이,

『색을 조심하기가 가장 어렵습니다. 』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탐하는 것을 조심하기가 가장 어렵다고 생각한다.』

하니

공이,

[색을 조심하기가 어렵다는 것은 반드시 요물(妖物)에 마음을 빠뜨리는 것만이 아니라 부부의 사이에 혹 예(禮)로서 서로 접하지 못하면 이것도 또한 색을 조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이 과연 옳다.』

하였다.

 

정인지(鄭麟趾)가 어릴 때에 아버지를 잃고 과부 어머니를 모시고 가난하게 사는데 글재주가 조달(早達)하고 용모가 옥과 같았다. 일찌기 바깥 집에서 밤이 늦도록 글을 읽었다. 담을 사이에 둔 이웃집에 처자가 있었는데 얼굴이 유별나게 곱고 집안이 높은 양반이었다. 문틈으로 눈을 대어 공이 미소년이고 글 읽는 소리가 맑은 것을 보고 마음으로 사모하여 밤에 담을 넘어와서 가까이하려 하므로 공이 정색하여 거절하니 소녀가 소리 지르겠다고 하였다. 공이 거절하기 어려움을 알고 말하여 달래기를,

『내일 모친에게 말씀드려 백년의 인연을 맺을 것이오. 지금 한번 정을 이기지 못하면 정조를 잃은 여자가 되어 내 마음에 불쾌할 것이니, 우선 참았다가 두 집에서 정식으로 혼례를 하는 것만 못하다.』

하니 처녀가 매우 기뻐하여 약속하고 갔다.

공이 다음날에 모친에게 고하여 다른 집으로 옮기고 마침내 그 농장도 팔아서 종적을 끊어 버렸던 것이다. 〈於于野譚〉

 

■ 戒色의 옷자락

 

박영(朴英)의 후손들은 대대로 옷자락이 잘리운 두루마기 한 벌을 유물로 물려받는 가통이 있었다. 그 옷자락이 잘리운 두루마기에는 다음과 같은 戒銘이 일화에 담겨 따랐던 것이다.

 

그는 어느 날 저녁 무렵 화려한 옷차림에 준마를 타고 남소문(南小門)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골목 어귀에서 미색이 유별나게 눈을 끄는 한 여인이 손짓을 하였다. 그는 혹하여 말에서 내려 그 여인을 따라 깊숙한 골목으로 따라 들어갔다. 집에 이르니 날은 어두워져 있었다. 한데 이 여인은 그를 앞에 두고 눈물을 흘렸다.

까닭을 물으니 나즈막한 말로,

『공의 풍채를 보니 여느 사람이 아닌데 나 때문에 비명에 죽게 되었으니…』

하고는 말끝을 흐렸다.

그는 그게 무슨 뜻인지 따져 물었다. 그 미녀는 살인강도 일당의 미끼였던 것이다. 밤중이 되자 방의 윗쪽 다락으로부터 여인을 부르는 소리가 나며 큰 밧줄이 내려왔다. 지붕으로부터 줄을 타고 침입한 것이다. 그 도적 무리가 다락에 이르렀을 때 다락 벽을 발로 차 무너뜨려 짓눌러 놓고 급히 여인을 업고 몇 겹의 담을 뛰어넘어 나왔다. 이 여인을 안전한 곳에 데려다 놓자 이젠 여인이 진정으로 두루마기 자락을 붙들고 늘어졌다. 그는 칼을 빼서 그 잡힌 옷자락을 자르고 담을 뛰어넘어 나왔다. 그 후 그는 그 두루마기를 대대로 물려 계색(戒色)토록 하였던 것이다.<기재잡기(寄齋雜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