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한글 文章/선비의 의식구조 (28)
耽古樓主의 한문과 고전 공부
■ 徐居正의 罪案이 된 金時習의 詩 옛날 바닷가에 한 어부가 살았다. 그는 바닷가에 날아드는 해오라기와 친하게 되어 그가 가면 가까이 날아와서 놀기까지 했다. 어부는 이 해오라기 얘기를 아내에게 했다. 아내는 그 가깝게 와서 노는 해오라기 한 마리를 잡아오라고 했다. 어부는 그렇게 하려고 맘을 먹고 이튿날 바닷가에 나갔다. 한데 해오라기는 한 마리도 어부 가까이 날아들질 않았다. 이것은 어부에게 해오라기를 잡으려는 기심(機心)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기심은 옛 한국 선비들의 사고나 행동에 막중한 비중을 차지했던 것이다. 그 기심의 유무를 두루 깊이 통찰하므로써 교우 여부를 정하였다. 또 말을 주고받는데도 기심이 있나 없나 여부를 따지는데 세심하였다. 기심은 곧 교작(巧作)의 예비심이다. 機計란 말의 본뜻..
■ 金宗瑞를 구박한 黃喜의 底意 역사를 앙가쥬망(참여)과 드가쥬망(비참여)의 끝바꿈이라고 풀이하기도 한다. 곧 나와 나의 부모형제, 친구, 사회, 국가 등 나 밖의 모든 것과의 대결에서 그 속에 구체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앙가쥬망이라고 하고 나 밖의 것은 그것이 악하건 선하건 아랑곳없이 나에 관련된 일에만 국한해서 관심을 갖는 것을 드가쥬망이라 한다. 오늘 한국인의 성향을 정의하면 분명히 드가쥬망 시대에 살고 있다 하겠다. 본래 한국인은 가족 중심적이기에 가족을 한계로 한 그밖의 것에 무관심하고 그 안의 것에는 철저한 참여를 했었다. 그러나 서구화의 의식변천과 대가족제도의 붕괴때문에 이 내향참여(內向參與)의 전통마저도 상실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오늘날 나와 아랑곳없는 나 밖의 일이면 그것이 아무리 악한 일..
■ 革新相臣의 受難 태종 말년에 계속해서 몹시 날이 가물었다. 그 가뭄을 자신의 부덕으로 돌리고 죽기 전에 왕위를 세종에게 물리고 들어앉을 만큼 가뭄이 혹심했던 것 같다. 가뭄은 민심을 소란케 하는 직접적인 동기가 됐었다. 그리고 당시 사람들은 천재지변이 일어나면 그것은 정사(政事)를 잘하지 못한 데 대한 응징의 천벌로 이해했었다. 그러기에 백성들은 그 혹심한 가뭄의 원인을 당시의 악정에서 찾는다는 것이 자연스런 추세였다. 전국 각지에 익명서(匿名書)가 나붙기 시작했는데 한결같이 이 가뭄은 하륜(河崙)이 정권을 잡아 구제(舊制)를 버리고 새 제도를 마냥 만들어냈기 때문이라 하였다. 결국 태종 말년의 가뭄은 옛부터 있었던 제도를 개혁한 데 대한 민심의 반동으로 귀결되며 이 같은 사실은 한국인의 사고방식이 ..
□ 庇雨思想과 그 人脈 동대문 밖을 나와 동덕여중고의 뒷녘으로 돌아든다. 신설동과 보문동의 경계 즈음해서 우산각(雨傘閣)골이라는 옛 마을 이름을 확인한다. 옛 서민들은 이 지명을 우산각골이라 불렀지만 선비들이나 식자들은 비우당(庇雨堂)골이라고 불렀었다. 근근히 비를 가린다는 초라한 당집이 하나 있었으며 그에 연유된 지명이었다. 우산각은 곧 비우당의 서민들 칭호였던 것이다. 구한말이나 일제 초기만 해도 이 비우당의 주춧돌과 비우당을 뒤덮는 노송 한 그루가 남아 있었다는데 일제 때 도시계획에 의한 신설동의 신설 때 그 흔적이 사라지고 만 것이다. 지금은 이 우산각골에 호화주택들이 들어서 있어 마냥 무상했다. 비우당이 있었을 곳으로 추정되는 지점에도 호화로운 한옥이 들어서 있었다. 행여 그 주춧돌이라도 뜨락에..
■ 姜海壽의 人間試煉 「아브라함」은 성서에서 위대한 신앙적 영웅으로 추대받는다. 그는 인간적인 것의 상징적 표본인 그의 외아들과 신과를 둔 선택의 시련에서 신을 택하였기 때문이다. 「아가멤논」은 그의 귀여운 딸을 풍신(風神)에게 바치고 희랍의 영웅이 되었고 [에프타」역시 그의 외동딸을 신전에 바치고 이스라엘의 영웅이 되었다. 선택은 인간실존의 가장 진한 상황이다. 강화 선비인 첨정 강해수(僉正·姜海壽)는 이역 땅 심양에서 이 선택의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자기 눈앞에는 그의 외아들과 그의 아우가 오랏줄에 묶인 채 등을 대고 있었다. 그 옆에 이모(異母)의 신주(神主)도 있었다. 이들은 정축호란(胡亂)때 강화에서 호병(胡兵)에게 납치당한 포로였다. 피로(被虜) 중에 어머니는 죽었으므로 신주만을 지니고 있었..
■ 天子의 졸린 목을 朝鮮백성이 아파해 중종 34년(1539)에 조선사신이 명나라에 갔을 때 명황제가 예부로 하여금 이 사신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도록 하였다. 의당히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사대(事大)사상에 찌든 당시 한국조정에서는 의당한 일 이상의 감격을 하고 그 잔치를 베풀어준 데 대한 사은편(謝恩便)을 다시 몇 만리길 멀다 않고 북경(北京)에 보내고 있다. 그 사은편이 들고 간 표문(表文) 속에 진하게 흐르는 사대사상을 엿보기로 하자. 『천은이 깊이 어루만져 주심에 내외의 차별이 없고 하늘의 은택이 태연히 내려 넓으신 은총이 미천한 데까지 미쳤습니다. (중략)어찌 표를 받들고 간 아랫사람에게 특별히 잔치를 풀어주는 특수한 영광이 내릴 줄 알았겠읍니까. 은혜가 뼈에 사무치고 살에 젖었으니 몸소 넓은..
■自殺과 선비 인조 때에 남한산성이 포위되었을 때에 장유(張維)가 말하기를, 『성이 만약 불행하게 된다면 칼을 가지고 자살하기는 어려우니 어찌하여야 잘 죽을 수 있겠는가.』 고 말한 일이 있다. 『칼을 빼어 제 목을 찌르는 것은 진실로 장사(壯士)의 할 일이지 선비로서 능히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중신(重臣)이니 오직 군부(君父) 옆에서 모시고 있다가 만약 亂兵에게 죽지 아니하고 적이 잡아서 항복받으려 할 때에는 굴하지 아니할 뿐이다. 내가 비록 내 손으로 목을 찌르지 않더라도 적이 칼질을 하지 아니하겠는가. 잘 죽는 도리는 이와 같은 것에 불과하다.』고 이식(李植)이 대꾸했다.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문을 듣자 장유는 눈물을 흘리면서 자기의 목을 칼로 찌르지 못하고 이식에게 이르기를, 『우리..
□ 마음의 벌거숭이 - 禿山辯 영등포 가리봉동을 지나 시흥에 이르기 중간지점, 왼편에 1백여m 되는 야산이 있다. 그것이 독산(秀山)이며, 이 산 이름이 연유가 되어 그 인근 마을을 독산동이라 한다. 이 산은 옛부터 벌거벗었기로 그 같은 슬픈 이름을 얻은 것 같다. 조선 왕조 초 이곳에 살았던 유명한 선배 강희(姜曦)의 호가 독산이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강희(姜曦, ?~?)를 찾아와 자네가 호를 독산이라 한 것은 살고 있는 지명(地名)을 따른 건가 딴 뜻이라도있는 건가 하고 물었다. 이에 그는 그 유명한 독산변(秀山辯)을 늘어 놓았다. 『내 집 지은 곳에 산 하나가 있는데 활딱 벗겨져서 나무가 없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독산이라 한다. 어찌 이 산의 토성(土性)이 본래부터 나무가 없어 그러하리오. 한성..
□韓國 굴뚝이 낮은 이유 농촌의 골목길을 걸어보면 연돌 높이가 지붕 높이를 웃돈다는 법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유럽 농촌을 걸어 보면 벽돌로 쌓은 우람한 연돌 들이 지붕 위로 우뚝우뚝 솟아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서양의 연돌은 마치 부의 상징 인양 하늘 높이 치솟아 연기를 내어 뿜고 있음을 본다. 한데 한국의 연돌은 마치 그것의 노출이 부끄러운 듯 처마 밑에 초라하게 숨겨져 있으면서 연기를 위로 뿜는 것이 아니라 벽이나 처마에 반사시켜 아래로 내려 깔고 있다. 연돌이 높을수록 불을 잘 들인다는 물리의 ABC를 한국인이 몰랐다는 이치는 성립되지 않는다. 왜냐면 수천 년 동안 수천만 명이 시행착오를 겪는 동안 그까짓 간단한 이치를 발견 못했다고는 믿어 지지가 않기 때문이다. 또 짚으로 이는 처마 밑의 ..
□ 消遥巾과 混沌酒 조선왕조 중엽의 학자 한강 정구(寒岡 鄭逑)는 어느 날 이 퇴계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 『조식(曺植)이 일찌기 정몽주의 진퇴에 관하여 의심을 하였읍니다만 제 생각에도 포은의 죽음이 자못 가소롭습니다. 공민왕조에 대신 노릇을 13년이나 하였으니 벌써 「불리하면 벼슬을 그만 둔다」는 옛 성현의 의리에 가히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읍니까. 』 여말에 야은 길재(冶隱 吉再)가 목은 이색(牧隱 李穡)에게 그의 거취에 대해 물은 일이 있다. 이때 목은은 『나 같은 무리는 대신이기 때문에 나라와 더불어 기쁜 일과 슬픈 일을 함께해야 하니 물러갈 수 없거니와 그대는 물러갈 만하다.』했다. 길재는 이 말을 듣고 거취를 결정하고 목은에게 돌아갈 것을 고하니 그에게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써 주었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