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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조선-홍경래(洪景來)

구글서생 2023. 5. 19. 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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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윤(玄相允)
1893~ ?. 신소설가사학자교육자호 기당(幾堂). 평북 정주 생.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사학과 졸업. 3·1운동 때에는 민족 대표의 1인으로 독립운동에 참가광복 후 서울대 예과부장을 거쳐 고려대 초대 총장 역임. 6·25 남침 중에 납북됨.
신소설 「한(恨)의 일생」「박명(博命)」과 저서에 「조선유학사(朝鮮儒學史)」등이 있음.

 

 

1. 경래의 위인

 

정조 임인년간에 경래가 평안도 용강군 농가에서 출생하니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용감하였었다. 아이들과 더불어 유희할 때에도 뜀질과 무거운 것을 들기와 달음박질과 높은 데를 뛰어오르기와 병정놀음 같은 것을 많이 하였었다. 그 후 경래가 자라매 몸은 비록 석대(碩大)치 아니하나 눈에 광채가 있고 예기가 있으며 기도(氣度)가 웅대하고 사상이 고상하며 무슨 일에든지 대담하고 용감하며 또한 과단성이 많아서 한번 작정한 후에는 후회하는 일이 없었다 한다.

 

경래가 처음에 중화군에 사는 자기 외숙되는 유학권(柳學權)이라는 사람에게 가서 글을 배우고 있더니 서숙(書塾)의 후면에 해압산(海鴨山)이라는 산이 있고 그 앞에 요포(腰浦)라는 내가 있는 것을 보고 경래 8세 때에 싯구를 읊어 왈

“해압산에 걸터앉아 요포강에 발을 씻다” (편집자 역)1)

라 하니 듣는 사람이 놀라지 않는 이가 없었다.

l)“坐海鴨山 洗足腰浦江

 

증사(曾史)를 읽다가 진승(陳勝)의 “장사(壯士)가 죽지 않거니와 죽으면 큰 이름을 드러내리라.” (편집자역)

한 술회의 구절에 이르러 선생의 제지도 불고하고 박안대독(拍案大讀)하면서 눈을 감고 2,3회를 고성(高聲)으로 읽었다 한다.

 

12세 때에 선생이 〈송형가〉라는 글제로 글을 지으라 하니 경래가 이에 응하여 지은 것이 있었는데 그중에

“가을바람이 물을 뒤엎음은 장사의 주먹

대낮의 따뜻한 양기는 천자의 머리” (편집자 역)2)

라는 구가 있었다.

2)“秋風易水壯士拳 白日咸陽天子頭

 

선생이 주점(珠點)을 주면서 “추풍역수장사권이요 백일함양천자두라” 과연 댓구가 잘 되었다 칭찬하였다. 그런즉 경래는 그 칭찬에 대하여 기뻐하지도 아니하고 선생의 앞에 나와 꿇어앉으면서 선생의 낭독을 정정하여 왈 “추풍역수장사권으로 백일함양천자두를”하고 읽을 것이라고 말을 하였다.

 

경래의 이 말을 들은 유학권은 대단히 경래의 장래를 근심하고 추연히 불락(不樂)하여 왈

“나는 앞으로 너를 교도할 수가 없으니 너는 명일을 기하여 너의 집으로 돌아가기를 바란다.”

하고 익일에 유씨는 자기 매부에게

“경래의 사상이 수상하니 장래를 경계하라.”

는 서간을 써 부치면서 경래를 자기의 집으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그 후 경래는 동중(洞中) 서당과 자기집과 혹은 부근 산사에서 따로이 사부가 없이 자습을 하였는데 경사(經史)는 물론이요 널리 병서와 의복풍(醫卜風)등의 술서(術書)도 섭렵을 하였다 한다.

 

“문에 종사하는 자는 반드시 무도 갖추어야 하다(有文事者 必有武備)”

라 하여 자기의 좌우(座右)에 반드시 장검을 세워 두며 또한 때때로 검무도 익혔다 한다.

어느 때에 지은 것인지 모르나 경래는 또

“달이 뭇 별을 몰아 푸른 하늘에 진을 치고

바람이 낙엽을 몰아 가을산에서 싸움을 하네” (편집자 역)3)

라는 시를 지었다 한다.

3)“月將衆星陣碧空 風驅木葉戰秋山

 

후일 경래가 이제초(李濟初)를 만나기 위하여 개천군을 향하다가 마운령 위에 올라서 지은 시가 있는데 그 싯구는 이러하다.

“마운령 위에서 구름을 헤치고 앉으니

만학 천봉이 차례로 조알하는구나” (편집자 역)4)

4)“摩雲嶺上披雲坐 萬千峯次第朝

 

의병장 현인복(玄仁福)의 「진중일기」에 왈

“경래의 위인됨은 소인이었으며 행사가 교활하여 사람을 현혹시키는 것을 기량이라고 생각해서 스스로 용력(勇力)이 있다고 했으나 사람들은 그 실제를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자못 가볍고 민첩하여 각 도를 재빠르게 왕래하면서 부랑배를 결탁하였다.” (편집자 역)

라 하였고

수와(守窩) 백경해(白慶楷)의 「창상일기(滄桑日記)」에 왈

“사람됨이 교활하고 걸음을 잘 걸었다. 남을 속이는 것을 일삼았고 원근에 출몰하여 부랑배와 결탁했다.”(편집자 역)

라 하였다.

 

이상의 2개 문헌과 고로(古老)의 구전에 의하면 경래는 행보가 심히 능하여 하루에 4, 5백 리를 걸었다고 한다. 그리고 경래는 의논이 풍발(風發)하고 문사(文辭)가 능하며 또한 교제와 수작이 능란하여 감히 범치 못할 위엄과 예기도 있으며 또한 사람을 감동시키고 복종케 하는 일종의 마력도 있었다 한다.

 

 

2. 거사의 동기

 

경래가 진사시에 응하기 위하여 처음으로 경사에 온 것은 19세 일이었다. 때에 경래의 학력은 실로 우월하여 남들이 허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경래 자신도 자못 자신하는 바가 있어서 급제를 하여도 장원으로 급제할 것을 믿고 있었다. 그러나 응시한 결과는 예상과 달라서 경래는 부중(不中)이 되었다.

 

이때에 국정은 심히 濁亂하여 당쟁의 폐습과 외척의 용사(用事)가 날로 심하여 조정에는 회뢰가 공행하고 관리에게는 침어(侵漁)5)가 무쌍하여 기강의 해이가 여지없이 되어 있고 인민의 피폐가 극도에 달하였었다.

5) 侵漁:침탈.

 

그러므로 과거 같은 것도 공도(公道)는 조금도 행하여지지 않고 오직 분경(紛競)과 협잡으로 시행되어 고시는 일종 형식뿐이었다. 그리하여 권문대가들은 자기 자제들을 위하여는 아무러한 때에라도 별시(別試)니 증광(增廣)이니 도기(到記)니 하여 가지고 과거를 임의로 보이며 또한 식년(式年)에 행하는 과거에도 권척(權戚)의 자제들은 장옥(場屋)에 가지도 아니하고 자기집 사랑에 앉아 있으면서 사람을 시켜서 대신 과거를 보게 하며 또는 남의 시권(試券)을 절취하여 봉미를 따고 자기 성명을 쓰든지 하여 급제를 하는 것이다. 급제를 하여도 그들은 으례 장원급제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천 리 백 리를 발이 부풀면서 보따리를 하여 지고 모여 온 과유(科儒)들은 아무리 정성스럽게 글씨를 쓰고 글을 지어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이렇게 정식으로 참되게 과거를 보아 가지고는 급제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된다면 우연히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권척 이외의 자제들이나 지방 사람들이 간혹 급제가 되는 것은 측면으로 이면으로 금전을 써서 협잡과 분경을 행한 때에 한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이때에 경래의 부중도 당시의 사세로 보아 극히 당연한 일이었고 또 이 과거의 장원과 급제들도 으례 권귀자제(權貴子弟)의 소점물이 되었었다. 비록 전부터 말로는 들었으나 이 광경을 눈으로 처음 본 경래는 경악과 실망과 비분이 여간이 아니었었다. 이때 경래의 취할 바 태도로 하여서는 과거를 계속하는 것과 또 그것을 단념하는 두 가지가 있었던것이다. 그런데 과거를 계속하려면 경래도 역시 남과 같이 금전을 쓰거나 다른 추태를 부려서 협잡을 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경래의 성질로 하여서는 이것이 절대로 될 수 없는 일이었다. 또 설사 경래로 하여금 백 보를 사양하여 이런 일을 하여 가지고 진사나 대과를 급제하였다 하여도 자기가 평안도 사람이고 양반이 아닌 이상에는 미관말직으로 몸을 마치는 이외에 별수가 없을 것이다.

 

원래 이조의 정치가 국초부터 서북 사람은 성질이 강한(强悍)하여 등용하면 찬탈의 염려가 있다 하여 절대로 등용을 하지 아니하였었다.

이리하여 처음에는 서북 사람을 외이불용(畏而不用)한 것이나 3, 4백 년을 지나는 동안에 왕화(王化)가 불급(不及)하고 양반이 멸유(蔑有)하니 자연 서북 사람들은 무무(貿貿)6)하여지고 풍속이 야비하여져서 조정에서는 천이불용(賤而不用)하게 되고 인민간에서는 천대 멸시를 하게 된 것이었다.

6) 무우(貿貿): 무식하고 촌스러움.

 

그러므로 당시에 서북 사람 중에 혹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있어도 10년에 출륙(出六)7), 20년에 가자(加資)하여 종신토록 사적(仕籍)에 있어도 2품 이상에 오르는 이가 절무하고 소위 행직(行職)도 찰방이나 겸춘추(兼春秋)나 말석의 간관에 불과하였었다.

7) 출륙(出六):7품직에 있던 관원이 그 임기가 만료되고 성적이 좋아서 6품으로 승급하는 것.

 

그리고 이것도 가산을 탕진하여 가면서 10년, 20년 유경(留京)을 하여 아침에는 모동(某洞) 대감댁에 저녁에는 모동 대감댁에 분주히 비안노슬(婢顏奴膝)로 납미헌첨(納媚獻諂)을 하여 가지고 간신히 도득(圖得)하는 것이었다.

 

순조 초년 임술에 <관서제인정정부서(關西諸人呈政府書)〉에 의하면

“글은 나라를 경계지우고 무예는 고을을 지키는 것입니다. 비록 하늘에 통하는 학문과 사람을 울리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다시 벼슬에 나아갈 희망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말을 배울 만한 나이에 이른 아이들은 이미 서북인들을 모욕하는 것부터 배워서 천하다고 하며 항상 능멸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평상시 거처할 때도 자주 거만하게 '서인 서인' 하면서 서인이라는 말을 그치지 아니하며 문득 또 말하기를 ‘서북놈 서북놈’합니다.”(편집자 역)

란 문구가 있는데 이것을 보아도 당시 관서 사람들이 받고 있던 대우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때에 경래는 과거를 다시 계속치 않기로 결심하고 다른 길로 향하기로 작정하였다. 그리하여 경래의 머리에는 어떤 섬전(閃電)이 빛나고 경래의 주먹에는 형용할 수 없는 모종의 힘이 불끈 주어졌다. 다시 말하면 이때에 경래는 이런 정정(政情)을 보고 그대로 무관심하게 방임하거나 또는 용렬하게 타협하는 태도를 취하지 아니하고 용감하게 나아가 이것을 개혁하고 이것을 바로잡기를 결심한 것이었다.

 

 

3. 교결군웅(交結群雄)

 

1) 국내 시찰

 

이렇게 풍운을 가슴 속에 비장한 경래는 경성으로부터 향리에 환래하니때에 마침 경래의 부친이 세상을 떠났다. 경래가 이것을 동리 뒤에 장례하고 얼마동안 거상(居喪)하다가 표연히 경장(輕裝)을 차려 가지고 지사(地師)라 자칭하고 국내 시찰을 떠났다.

그리하여 남으로 경상, 전라와 북으로 함경도를 편답(遍踏)하여 가는 곳마다 인정 풍토와 정치 경제의 폐막과 영재달사(英才達士)가 누구인 것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경래의 생각에 거사에 적당한 처소는 경성도 남도도 북도도 아니요 역시 불평이 많고 원한이 큰 관서지방이라고 느껴졌다. 그러므로 황·평 양도에는 특별히 일층 유의하여 각지를 방방곡곡 살펴보았다.

 

2) 우군칙(禹君則)과의 상봉

 

경래가 이렇게 각지를 유력하다가 평안도 가산군 청룡사에서 한 사람을 만나니 이는 곧 우군칙(일명 용문)이었다. 군칙은 본래 태천 출생으로서 남의 서자였다고 한다. 경래보다 5,6년 연장이 되는데 지혜가 있고 학문이 풍부하나 당시의 인습으로 보아 천정(天定)의 질곡을 쓴 사람이라 어떠한 경륜 포부가 있어도 남과 같이 출세하여 전시(展施)할 희망이 절대로 없는 것을 알고 산승이 되어 각종 서적을 읽으면서 세간을 물외(物外)로 보고 있던 터이었다.

후일 군칙의 공사(供辭)에 의하면 처음에는 경래와 만나 같이 수십 일을 지나도 별로 통정한 일이 없었다가 익년에 경래가 다시 청룡사에 왔을 때에 월여(月餘)를 지내다가 비로소 刎頸의 교(交)8)가 된 것이라고 한다.

8) 刎頸의 교():죽고 살기를 같이하여 목이 떨어져도 두려워하지 않을 만큼 친한 사귐. 또는 그런 벗을 이르는 말.

 

3)김창시(金昌始, ?~1812)와의 결교

 

곽산군 사는 김창시는 재지(才智)와 문장이 일찍부터 저명하여 진사시에 급제하고 더욱 시명(詩名)은 당시 도내에서 으뜸이 되어 있었고 또 재산도 여유하여 실로 유력하고 망중(望重)한 사람이었다. 어떤 때 경성에서 향리로 내려오다가 황해도 봉산군 동선령에 당도하니 어떤 청의동자(靑衣童子)가 말머리를 막으면서

“나리님은 평안도 곽산 김진사님이 아니시오니까?”

하는지라 창시가 이상히 여기면서 '그러노라' 한즉 그 동자 공손히 읍하면서 왈

“우리 선생님이 오늘 진사님께서 이곳을 지나실 것을 알고 저를 보내시면서 잠깐 뫼시고 오라 하더이다.”

하는지라 창시가 더욱 이상히 여기면서

“너의 선생님이 누구시며 또 너의 선생님 계신 곳이 어디냐?”

하고 물은즉 동자 답왈

“우리 선생님은 최도사이신데 계시기는 이곳에서 한 10리 길 되는 곳에 계십니다.”

하였다.

창시가 이에 쾌락하고 말과 마부는 嶺下의 旅店에 가서 기다리라 명하고 자기는 단신으로 동자를 따라 최도사가 있는 곳을 갔었다.

 

가서 만난즉 이 도사는 다른 사람이 아니요 곧 홍경래였었다. 山高谷深한 곳에 한 간 초당을 지어 놓고 峨冠博帶로 서안을 대좌하여 병서를 읽고 있었다. 창시를 영입하여 하루 낮 하루 밤을 유숙케 하면서 고금을 담론하며 治亂을 말하다가 말이 국사에 미쳐 당폐(黨弊)와 외척의 용사(用事)와 양반의 폐습이며 서적(庶嫡)의 계급과 상민의 고통과 서북 인민의 불평과 문무의 차별 등을 말한 후에 이것을 개혁하고 그리하여 인민을 구제하는 것은 진실로 유심자(有心者)의 마땅히 행할 바 의거라는 말을 역설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창시는 드디어 경래에게 마음을 허하는 막역의 동지가 되고 말았다.

 

4) 이희저(李禧著)의 인입

 

이희저는 가산군 이속(吏屬)인데 당시 도내에서 굴지하는 거부였었다. 구간(軀幹)이 걸대(傑大)하고 의협심이 있으며 일찌기 무과에 등제하여 자못 성망이 있었다. 경래는 희저를 인입키 위하여 이하 수책(數策)을 썼다. 제일착으로는 우군칙의 처 정씨를 시켜 筮人을 가장하고 희저의 처를 왕방(往訪)하여 그 손금을 보고 불출수년(不出數年)에 대길할 신수라는 것과 또 점을 쳐서 수성(水姓) 가진 사람을 만나면 대길하리라는 것을 말하게 하고, 제이착으로는 한두 해 있다가 우군칙을 시켜 지사(地師)를 가장하고 희저를 왕견(往見)하고 그 부산(父山)을 본 후에 대지(大地)라고 칭찬하고 당년에 발음(發蔭)할 것을 말하게 하였다. 그런 후에 최종으로 경래가 도사복을 입고 희저를 야간에 비밀히 왕방하여 자기의 계획을 말한 후에 희저로 하여금 동지가 되게 하였다.

9) 발음(發蔭):산음(山蔭)과 선(先蔭) 같은 것이 내려 운수가 열림.

 

5) 역사(力士)의 구득

 

경래가 이미 군칙, 창시, 희저를 얻은 후에는 역사를 구득하였는데 그 구득하던 경로와 사실은 지금에 알 수 없으나 그 씨명(氏名)만을 기록에 의하여 기술하건대 아래와 같다.

 

개천:이제초(李濟初) 이제신(李濟信) 형제, 이해유(李海有)

정주:홍이팔(洪二人;홍총각), 김택련(金宅鍊), 박이두(朴以斗), 엄이련(嚴以鍊), 한처곤(韓處坤), 엄계량(嚴季良)

봉산:윤후검(尹厚儉)

중화:차종천(車宗天)

평양:양소유(楊少有)

철산:정인범(鄭仁範)

송도:권경백(權景伯), 임사항(林思恒)

의주:김희련(金禧連)

영변:김운용(金雲龍), 차남도(車南道)

용천:채유린(蔡裕隣)

황주:신덕관(申德寬)

자산:황재청(黃再淸)

순안:김희태(金希泰), 홍성련(洪成鍊)

안주:양수호(楊秀浩), 양수점(楊秀漸)

박천:한신행(韓信行), 김지헌(金之軒), 최대운(崔大運)

재령:김석하(金石河), 장지환(張之煥)

가산:김인보(金麟甫)의 아들, 이성항

 

6) 부호와의 결탁

 

경래가 이같이 일변으로 역사를 구득하는 동시에 일변으로는 각지의 부호 거상을 결탁하였는데 그 성명이 아래와 같다.

정주:김이대(金履大;좌수), 이방욱(李邦郁)

곽산:박성신(朴星信;첨사), 장홍익(張弘益)

안주:박성저(朴聖著)

박천:한지겸(韓志謙)

선천:유문제(劉文濟), 계형대(桂亭大)

미상:장억대(張億大), 김치용(金致用)

 

이 밖에도 평양, 송도와 용천, 의주의 거상들은 거의 다 일맥상통하는 것이 있어서 후일 경래가 다복동에서 기병할 때에 남북 대로로 누구가 보내는 것인지 알지 못하게 혹은 돈바리 혹은 금은바리 혹은 비단바리가 수미상접(首尾相接)하여 왔다는 것을 들으면 당시 각지의 부호 거상들과의 연결이 어떤 정도이었던 것을 상상할 수가 있다.

 

7) 각지 유력가와의 연결

 

경래는 또다시 각지의 유력가를 동지로 만들었는데 이 역시 성명만을 기록에 의하여 적으면 아래와 같다.

 

철산:정경행(鄭敬行;전 부사), 정성범(鄭聖範), 정복일(鄭復一 ; 수교), 정사용(鄭士容), 정대성(鄭大成)

정주:최이륜(崔爾崙;수리), 이정환(李廷桓), 정진교(鄭振喬), 강신원(康信元), 이침(李琛)

선천:최봉관(崔鳳寬;수교), 원대천(元大天), 원대유(元大有), 문영기(文榮基)

곽산:고윤빈(高允彬), 양재학(楊再鶴), 김지욱(金之郁), 김대훈(金大勳), 심대흘(沈大屹), 양재익(楊再翊)

가산:윤원섭(尹元燮), 강윤혁(康允赫), 김대덕(金大德), 이맹억(李孟億)

박천:김혜철(金惠喆), 한일항(韓日恒), 김성각(金成珏)

안주:김명의(金銘意;진사), 김대린(金大麟), 이인배(李仁配)

영변:김우학(金遇鶴;좌수), 남명강(南明剛 ; 수리)

태천:김윤해(金允海;좌수), 변대익(邊大益 ; 창감), 이인식(李寅植;수교), 이취화(李就和; 수리)

구성:차용수(車龍秀), 허우, 장주국(張柱國), 조금룡(曺今龍) 이용태(李龍泰)

삭주:이팽년(李彭年)

위원:김가(이름은 모름)

초산:김성모(金星模)

창성:강석모(姜碩模)

강계:김택련(金宅鍊)

이상 경래 진중 서기 박삼옥(朴三玉) 공사(供辭).

 

현인복의 「진중일기」에 왈

“만(灣)으로부터 송(松)에 이르기까지 부호와 거상들이 많이 권내로 들어왔다. 황해와 평안 양도에서는 파산하여 감당하기 어려웠으니 모두 개와 독수리(鷹犬)10)라 하였다.”(편집자 역)

101 鷹犬: 사냥하는 매와 개. 쓸모 있고 재능 있는 사람의 비유.

 

백경해의 「창상일기」에 왈

“성세(聲勢)는 한양까지 몰래 연결되고 도당들은 서북 양도에 두루 퍼져 있다.”(편집자 역)

 

이상의 인물들을 보면 당시 양서(兩西)에 있어서 모두 다 유력한 분자들이다. 혹은 거만의 부호들이며 혹은 망중(望重)한 사인(士人)들이며 혹은 좌수, 수리, 수교 들이니 경래의 유인하는 마력도 큰 것이었음은 물론이나 당시 서토(西土) 인사들의 불평도 여간이 아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4. 기병

 

1) 辛味大凶과 민심의 동요

 

이 모양으로 경래 일파가 거사의 계획을 착착 진행하고 있는 동안에 일대 기회가 도래하니 이것은 곧 신미년의 대흉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백 집의 촌에 한 집도 계량(繼糧)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가을부터 절량된 집이 많고 사처에서 도적이 횡행하여 인심이 실로 토붕와해(土崩瓦解)의 형세가 있었다.

 

경래는 이것을 보고 이해 10월에 돌연히 10여 년 동안 종적을 끊었던 고향에 출현하여 가족을 인솔하고 타도로 반이(搬移)한다고 칭언(稱言)하면서 살우치주(殺牛置酒)하고 향당 부로(父老)에게 작별을 고한대 경래의 종제 응래(應來), 덕래(德來)가 울면서 물어 왈

“이러한 흉년에 형님이 가면 가족의 생계를 어떻게 하려고 하십니까?”하였다.

경래 이 말을 듣고 앙천소왈(仰天笑曰)

“우리 땅 우리 입을 옷이 어디 가면 없겠는가(我田我衣 何處無之)”

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경래는 자기의 노모와 형과 처 최씨와 아들을 데리고 고향을 떠나 가산 다복동으로 이거하였다. 그리고 자기는 대녕강(大寧江) 위의 신도(薪島)에 장신(藏身)하고 있었다.

 

2) 다복동의 지세

 

가산의 다복동은 대녕강을 옆에 끼고 폭은 비록 3, 4리에 불과하나 남북이 20여 리에 달하는 산곡이다. 좌우에는 나지막한 산이 구릉형으로 연(連)하고 그 위에는 당시에 송림이 무성하여 있었다. 동중(洞中)은 내동, 외동으로 나뉘어 있는데 인연(人烟)이 희소하였었다. 북으로는 동리 뒤 수보 땅에 경의대로(京義大路)를 지고 있고 남으로는 서해에 임하여 있으며 동으로 재 하나를 넘으면 대녕강이어서 해륙의 교통이 매우 편리하고 은현출몰(隱現出沒)이 자유자재한 곳이었다.

이때에 경래는 희저를 시켜서 내동에 수십 간의 가옥을 일으키게 한 후에 희저로 하여금 이거케 하고 그곳을 거사의 총본부가 되게 하였었다.

 

3) 신도 회의

 

경래가 신도에 온 후에 얼마 안 있다가 각지에 산재한 동지를 신도로 소집하여 비밀리에 일대 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서 결의한 사항은 아래와 같다.

 

① 임신 정월에 기병할 일

② 기병은 각지에서 동시에 일제히 행할 일

③ 그때까지 제반을 준비할 일

④ 일층 비밀을 엄수하고 연락을 긴밀히 할 일

 

이 회의의 결의에 의하여 경래는 희저에게 명하여 박천진두(博川津頭)의 추도(林島)에 혈실(穴室)을 만들어 그 안에서 주전(鑄錢;摠字 박은 것)하게 하고 또 일변으로 희저를 시켜 다복동에 사금(沙金)을 몰래 뿌리고 금이 산출된다고 揚言하여 채금을 시작하고 모여 오는 광부들을 위협하여 군사를 훈련케 하고 또 일변으로 다복동에서 군기(軍器)와 군복을 제조케 하고 김창시에게 명하여 ‘임신기병(壬申起兵)’ 4자를 파자하여 “한 선비가 관을 비껴 쓰니 귀신이 옷을 벗고 10필에 1척을 더하니 작은 언덕에 두 다리가 있다(一士橫冠 鬼神脫衣 十疋加一尺 小丘有兩足)”11)18자를 만들어 동요를 지어서 민심을 산란케 하고 또 각지에 있는 동지에게 명하여 군수품과 금전을 다복동으로 송래(送來)케 하니 기록에 산견되는 것만으로도 그 수가 아래와 같았다.

11) 여기에서 한() 선비가 관을 비껴 쓴다는 것은 ''자를 나타내는 것이며,

귀신()이 옷을 벗는다는 것은 '자를 말한다. 그리고 십() ()1척을 더한다는 것은 자이고 작은() 언덕()에 두 발이 있다는 것은 자를 말한다. 따라서 합치면 壬申起兵이 된다.

 

선천의 유문제, 최봉관은 도창(刀槍), 조총을 송래

동 계형대는 군량미 100석을 수로로 운래

정주의 정진교는 탄환과 촉룡(燭籠)을 송래

곽산의 박성간은 전 500량과 백미 15석을 송래

철산의 정복일은 각색 기치(旗幟)를 위속(葦束)에 재래(賫來)

영변의 남명강, 김우학은 전 2천량과 마안(馬鞍) 16좌(坐)를 태래(駄來)

▶幟: 깃대치

 

4) 발병 시기의 인상과 일부 계획의 실패

 

오랫동안 비밀 엄수에 훈련을 쌓은 경래의 일당도 정말 구체적으로 각양 준비를 착수하고 보니 비밀이 탄로될 위험이 각각으로 증가하여졌었다. 그리하여 경래는 부하의 의견을 참작하여 드디어 발병 시기를 12월20일로 인상하였다. 그리고 부서를 작정하여 경래는 평서대원수(平西大元帥)가 되어 남군을 영솔하고 안주를 향하기로 하며 김사왕은 부원수가 되어 북군을 영솔하고 의주를 향하게 하고 우군칙은 총군사(軍師)가 되어 남군을 수행케 하며 김창시는 부군사가 되어 북군을 수행케 하고 이희저는 도총(都摠)이 되어 남북 양군의 군수 일반을 관할케 하였다.

 

그리고 경래는 각지에 동지를 파송하여 혹은 걸인을 가장하며 혹은 필묵 행상을 가장하여 12월 20일을 전기(前期)하여 예정지에 가서 그 지방의 내응(內應) 동지와 암호로 연락을 취하고 있다가 기일이 되면 각기 담당한 지방에서 일제히 기병하여 그 지방을 점령하도록 명령하였다.

 

경래는 또다시 다복동의 감시와 주목을 완화하고 타처로 회전케 할 목적으로 평양에 부하를 파송하여 그곳에 있는 내응하는 동지와 협력하여 12월 15일 야반을 기하여 대동관(大同館)을 화약으로 폭파시키고 그 소요하는 틈을 타서 각 공해에 충화(衝火)하며 관장을 살해케 하였었다. 그러나 공교하게 이때에 대동관에 매치(埋置)하였던 화약의 도화선은 우설수(雨雪水)에 침습(浸濕)이 되어 소정한 시각보다도 늦어서 그 익일 오후 일포시(日晡時)12)에 발화되었었다.

12) 일포시(日晡時):저녁때.

 

그러고 보니 백주의 일이라 인민의 소요도 대단치 아니하고 또 다른 행동도 하수(下手)할 여지가 없이 되었었다. 그러나 대동관의 발화가 수상한 때문에 관변(官邊)의 경계가 엄하게 되었었다. 그러므로 명을 받아 나갔던 부하들은 대경실색하여 다복동으로 환래케 되었다.

 

또 12월 17일에는 선천, 곽산, 박천 등지에서 경래의 부하들이 관변에 피착(被捉)되어 사실이 전부 발로케 되었다. 그러고 보니 12월 20일도 기다릴 수가 없이 되었다. 그러므로 경래는 이런 급보를 듣고 부득이 부하를 불러 긴급회의를 열고 12월 18일에 기병을 단행키로 결정하였다.

 

5) 발병

 

이날 정오에 경래가 대원수복으로 단에 올라 공손히 하늘에 제사하고 군례에 의하여 부하 제장의 하례를 받은 후에 김창시로 하여금 ‘고국민(告國民)’의 격(檄)을 낭독하고 제장으로 더불어 피를 마셔 맹서를 짓고 다시 장졸의 숭호(嵩呼)13)를 받으니 그 소리가 천지를 움직이는 듯하였었다.

13) 숭호(嵩呼):백성이 임금의 만세를 부름.한의 무제가 숭산에서 등봉(登封)할 때곳곳에서 만세 소리가 들렸다 함.

 

그런데 그 격문은 지금 항간에 전하는 것이 그 진부를 알 수가 없고 다만 그중의

“문과로는 지평(持平)과 장령(掌令)을 지날 수 없고 무과로는 첨사(僉使)와 만호(萬戶)를 지날 수 없다.” (편집자 역)

의 일구만은 지금도 고로(古老)의 구비에 의하여 확실히 전하여 온다.

즉일에 대원수령으로 군기 숙청에 관한 명령과 군복에 관한 제도를 발포하니 군복은 모두 청(靑)을 사용하고 계급은 흉배에 홍단(紅緞)을 붙여 구별하고 관은 장관(將官)은 전립 또는 호피관(虎皮冠)을 사용하며 병졸은 모두 홍건(紅巾)을 쓰게 한 것이었다.

 

 

5. 전쟁의 수미(首尾)

 

1) 남군의 초세(初勢)

 

이같이 발병한 경래는 발병 즉일로 다복동을 출발하여 가산읍을 습격하니 읍 중에 있던 내용 동지가 兵仗을 갖추어 가지고 鼓譟하면서 삼교변에 출영하였다. 군수 정기는 놀래어 이속과 군졸을 부르나 좌우가 공허하여 일인도 응하는 자 없었다. 창황히 곤돈(困頓)하다가 난병에게 참살되었다.

 

익일에 경래는 일지병(一枝兵)을 분견하여 정주성을 점령케 하고 자기 자신은 박천을 진공하여 군수 임성고(任成皐)의 항복을 받은 후에 다시 병사를 파송하여 구성과 태천을 초항(招降)케 하고 도처에 창미(倉米)를 헤쳐 빈민에게 분급(分給)하니 투항하는 자 장꾼 같았다. 박천진두를 공략한 후에 송림에 진군하니 이날이 23일이었다.

 

2) 북군의 전전(轉戰)

 

전자에 경래의 명을 받고 북래한 김사용 등은 각기 변장으로 곽산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12월 18일에 곽산읍을 야습하니 군수 이영식(李永植)이 벽간에 숨었거늘 잡아서 옥에 가두었더니 틈을 타서 도주하였다. 이에 김사용은 능한산성(凌漢山城)을 빼앗은 후에 선천을 진공하니 군수 김익순(金益淳)이 군문에 와서 투항하였다(익순은 시인 김립의 조부).

 

사용은 또다시 동림과 서림의 양 산성을 함락시키고 철산을 나아가 치니 군수 권수(權琇)는 출분(出奔)하고 정복일 등은 안으로 응하여 거의 '무인지경'같이 입성하였다. 이로부터 사용은 다시 군사를 나누어 양책(良策)을 공발(攻拔)하고 날개를 남으로 전향하여 용천읍을 점령하고 또다시 북상하여 의주를 향하였다.

 

3) 송림의 패전

 

이같이 경래는 남북 각지에서 기병한 지 旬日이 못 되어 8군의 지역을 점령하였다. 이 형세로 안주를 건너 평양을 향하였다면 파죽의 형세로 소향(所向)의 성부(城府)를 일고(一鼓)에 정하였을 것이거늘 경래가 이것을 행하지 못한 것은 실로 천고의 유감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경래가 이같이 남진을 속도(速圖)치 못한 것은 이유가 있으니 그 이유는 이러하다.

 

먼저 경래가 박천을 점령하였을 때 이 당시 안주 병영의 막장으로 있다가 며칠 전부터 다복동에 내투(來投)하여 경래의 부하가 되어 있던 김대린(金大麟), 이인배(李仁配), 이무경(李茂京), 이무실(李茂實) 등이 경래에게 헌책(獻策)하여 왈

“현재 안주가 공허하였으니 안주를 진공함에는 급격물실(急擊勿失)하여 속전 즉결함이 상책이외다. 만일 시일을 천연(遷延)하면 도리어 안주에서는 5진영 군사를 소집하여 군비를 정돈할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니 장군은 속히 진군하사이다.”

하였다.

이 헌책에 대하여 경래는 그럴듯이 생각하였으나 이때 총참모로 있는 군사 우군칙이 이를 불가라 하여 ‘경적(輕敵)’이 득책이 아니라는 것을 고집하였다.

이것을 본 김대린 등은 ‘대사거의(大事去矣)'라 하고 심중에 초조하여 이렇게 완만히 하여 견패(見敗)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경래의 수급(首級)을 가지고 안주에 환귀하여 ‘장공속죄(將功贖罪)'를 청하는 것이 자기들에게 유리하다고 생각하여 기회를 보다가 경래의 방에 들어가 검을 빼어 경래를 습격하였다.

원래 경래가 효용(驍勇)이 있는지라 검을 받아 몸을 피하고 시졸을 불러 대린 등을 참살하였으나 이때에 경래의 전립이 반쯤 떨어지고 경래의 두각에 부상이 있었다.

군중은 이 사실을 극비에 붙이고 진두를 경유하여 송림으로 진군하였으나 경래의 상처가 발열(發熱)이 되어 막내(內) 수뇌부 간에는 수미(愁眉)를 펴지 못하고 안주 진공에 대하여는 5, 6일간을 거의 속수무책으로 아무 계획을 행하지 못하고 있었던 일이다.

 

이러는 동안에 안주에서는 병사(兵使) 이해승(李海昇), 목사 조종영(趙鍾永) 등이 관하 제군을 소집하여 방비를 엄중히 하다가 경래의 군사가 송림에 내진(來陣)한 지 수일이 되어도 안주를 진공치 못하는 것을 보고 반드시 준비에 부족한 것이 있는 것이라 하여 29일에 공세를 취하여 가지고 3로로 나누어 청천강을 건너 송림에 내방(來迫)하였다. 이러고 보니 경래의 진에서도 윤후검, 변대언, 홍이팔에게 명하여 3로로 나누어 접응케 하였다.

 

그런데 접전한 지 수각에 처음에는 병영의 관군이 저항치 못하고 퇴각하다가 안주성내로부터 새로이 원병이 내도하매 기세를 회복하여 가지고 재차로 환격하니 경래군의 일각(변대언의 진)이 먼저 붕괴하였다. 홍이팔이 아무리 독전에 노력하나 亂軍의 대세를 만회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경래군은 부득이 총퇴각을 행하여 진두에 퇴진하였다가 散卒을 다시 수합하여 가지고 정주성으로 입진하였다. 이것은 인근 제읍 중에 정주성이 가장 견고하므로 이 성에 입진하여 북군과 연로를 취하며 또 압록강 상류지방의 정예로운 산포수의 來援을 기다려 남진을 재도(再圖)하려는 전략적 퇴각에 기인한 것이었다.

 

4) 사송야(四松野)의 전패와 북군의 붕궤

 

송림의 전승이 있은 후에 관군은 기세를 얻어 경래를 따라 정주성 밖에 진군하는 동시에 일 부대의 장병은 북군과 경래와의 연락을 차단키 위하여 수비의 약한 틈을 타서 곽산읍을 회복하였다. 북군의 사용은 이 급보를 듣고 이제초로 하여금 다시 남행하여 이것을 구원케 하였었다. 제초가 자기의 효용을 믿고 소부대의 병졸을 인솔하고 주야로 치행(敎行)하여 새벽에 곽산의 운홍관(雲興館)에 도달하니 관군의 복병이 제발(齊發)하는지라.

제초가 전투하여 이것을 격파하고 다시 진행하여 곽산의 사송야에 내도하니 관군이 운하 (雲霞)같이 접응하였다. 일포시까지 접전하다가 제초가 마상에서 몸을 날리는 바람에 말 등자가 끊어져서 그만 땅에 떨어졌다. 제초가 사세가 글러진 것을 보고 앙천대소하면서 스스로 결박을 받았다.

 

이윽고 관군의 陣門에 나아가 신문을 받을 때에 관군이 먼저 그 다리를 도끼로 꺾으니 제초가 대노하여 일어나 박승(縛繩)을 끊고 좌우의 수인을 주먹으로 격살하였다. 마침내 관군이 제초에게 행형(行刑)을 할 때 몸에 칼이 들어가지 않았다. 갑옷을 벗기고 검시한즉 몸에 철사로 그물을 맺어서 입고 있었다 한다. 다시 목을 찍으나 칼이 들어가지 아니하므로 제초가 웃으면서 자기의 頷下14)를 가리키고 이곳을 찌르라 하여 드디어 목적을 달하였다고 한다(「곽산군수 첩보」).

14) 함하(領下): 턱 아래.

 

이때에 또 의주지방에는 허항, 김견신(金見臣)등의 의병이 일어나 처처에서 북군을 격파하고 다시 관군과 합력하여 정주를 향하고 남진하니 사용이 양책관(良策館)으로부터 선천의 동림성에 퇴진하였다가 역시 수개월이 못 되어서 함락되고 사용은 부득이 정주로 출주(出走)하였다. 이때에 북군의 참모 김창시는 압록강 상류지방에 가서 산포수의 원병을 일으키기 위하여 우선 창성의 호윤조(胡胤祖)라는 동지를 찾아가다가 구성지방에 조문형(趙文亨)이란 자에게 척살(刺殺)되었다. 이러고 보니 북군은 여지없이 붕궤되고 말았다.

 

5) 정주의 농성

 

송림의 인패는 경래에게 대하여 가위 치명상이었다. 한편 관군에게 대하여는 기세를 올려준 것이 되고 다른 한편으로 일반 인민에게 대하여는 경래의 인기를 沮喪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곽산이 먼저 관군에게 회복되고 사송야의 전패가 계속하며 구성, 태천의 양군이 또한 관군에게 奪回되고 북군이 각지에서 붕궤된 것이 모두 다 그 원인은 송림의 전패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송림의 전패는 또한 그 원인이 병졸이 정예치 못한 데 있있다. 다시 말하면 당시 경래에게 비록 용장은 있었으나 정예한 병졸은 없었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경래는 강계지방의 산포수로 조직된 압록강 연안의 원병이 오는 것을 旱天의 雲霓같이 고대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원병이 오는 것을 기다리기 위하여서는 우선 정주성을 고수치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경래는 부근의 倉穀을 성내로 수입하고 성문을 견수하고 장기의 농성을 하기로 작정하였다. 그리고 경래가 이같이 농성을 행한 이면에는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으니 이것은 당시에 일어났던 박종일(朴鍾一)의 난이 어떻게 전개되는가를 관망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한편으로 당시에 정부에서는 난보(亂報)를 접하고 상하가 대경실색하여 이요헌(李堯憲)으로 순무영(巡撫營)을 경성에 설시케 하고 박기풍(朴基豐 : 후에 柳孝源이 대신함)으로 순무중군(巡撫中軍)을 삼아 경영병(京營兵) 천여 명을 인솔하고 정주로 향하게 하고 관북친기위(關北親騎衛)와 송영기병(松營騎兵)으로 후원이 되게 하고 이 밖에 평안병사가 관하병 2천을 솔래(率來)하며 평안도 내의 각읍 군수가 또한 기백 명씩의 군사를 솔래하고 또한 의주, 정주 등지에서 의병이 불소(不少)하게 來會하였다. 그러므로 당시 정주성 밖에 와서 結陣한 관군이 그 수가 만여 명에 달하였었다.

 

이렇게 양방이 서로 대치하고 있는 동안에 관군은 여러 번 공성전(攻城戰)을 행하였으나 매차 불리에 귀(歸)하였고 도리어 성내측으로부터 습격을 당하여 3월 9일에는 함종진(咸從陣)이 전멸하고 3월 20일에는 우림장(羽林將) 허항이 전사하며 3월 22일에는 순무대진(巡撫大陣)이 劫掠을 입었다.

 

그리고 경래측은 지난번 신도 회의에 내참하였던 산읍 동지들이 송지렴(宋之濂) 같은 자는 호병(胡兵)을 초래하며 산포수대를 조직키 위하여 휴대하고 간 막대한 군자금을 자기의 私用에 충용하고 또한 송림 패보를 들은 후에는 태도를 돌연히 변경하여 그 군자금의 일부로 의병을 일으키며(平亂 후에 지렴은 이 공으로 초산부사가 됨) 초산, 강계 등지의 동지들은 송림 패보를 들은 후에는 형세를 관망하게 되어 경래가 갈망하는 원병은 조직부터 착수치 아니하고 있었으며 또 성내에서는 疫癘의 유행과 양식의 절핍과 동지의 사망(김사용, 이하유가 전상사) 등의 여러 사정이 있어서 곤궁이 자못 심하였었다. 그러나 양방이 서로 어떻게 하지 못하고 성을 격하여 대치하여 상지(相持)하기를 4개월에 달하였다.

 

6) 성의 함락

 

원병이 오지 않을 것을 처음부터 알았다면 경래는 마땅히 성문을 열고 나가서 당당히 관군으로 더불어 평야에서 접전하여 최후의 승부를 결하든가 혹은 두른 것을 뚫고 산읍으로 출주(出走)하여 후일의 권토중래(捲土重來)를 기하든가 양자 중에 하나를 택하였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중에 있는 경래는 동지들의 약속만을 믿고 형세가 변한 것을 모르고 한갓 고성(孤城)을 지키고 있었으니 만고의 유감이다.

 

4월 19일 평명에 정주성의 북성이 관군이 장치한 화약에 인하여 체성(體城) 10여 간이 폭파되었다. 이때를 타서 관군은 물밀듯이 일제히 구입(驅入)하고 경래의 군사는 동북 방면으로부터 서남 방면으로 구축되어 군세가 다시 수습할 수 없이 되었다. 경래가 서장대(西將臺)에 있다가 막료를 따라 남문을 향하다가 유환(流丸)에 가슴을 맞아 난군 중에서 절명되고 그 나머지의 장졸은 혹은 사로잡히며 혹은 도망하였으나 대다수는 모두 다 참살이 되었다.

 

이것으로써 난은 종결을 고하였는데 이때 경래의 나이는 30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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