耽古樓主의 한문과 고전 공부
98.조선-김정희(金正喜) 본문
황의돈(黃義敦)
1891~1969. 사학자. 충남 생. 어릴 때 한학을 수학. 평양 대성학교, 휘문의숙, 보성고보교원을 거쳐 조선일보 사원, 문교부 편수관, 동국대 교수 역임.
저서에 「신편조선역사(新編朝鮮歷史)」, 「중등조선역사」등이 있음.
1
선생의 성은 김, 명은 정희, 자는 원춘(元春)이요, 호는 추사(秋史), 완당(阮堂), 예당(禮堂), 시암(詩庵), 과파(果坡), 노과(老果), 노격(老隔), 담연재(覃硏齋) 등의 많은 별칭이 있었으며 경주인이요 유당(西堂) 김노경(金魯敬)의 아들로서 모 유씨가 수태한 지 24개월 만에 탄생하니 때는 정조 병자이었었다.
선생의 천성이 효우(孝友)하고 박학다문하였으며 순조 기사에 생원시를 마쳤고 동 기묘에 문과에 급제하여 규장각대제(奎章閣待制)로 문한(文翰)의 중임을 맡았었고 호서안렴사(湖西按廉使)로서 직지(直指)의 풍이 있었으며 대사성을 지나 병조참판에 이르렀고 철종 병진에 졸하니 향년이 71세였다.
그리고 선생의 나이 24세에 그의 부 노경의 사행(使行)에 隨員이 되어 연경에 가서 당세에 유명한 홍유(鴻儒)인 옹방강(翁方綱), 완원(阮元)과 교유함으로부터 선생의 학문과 서법이 크게 진전하여 반도 유일의 대학자가 되었으므로 그를 시기하는 자가 많아졌었던 것이다.
순조 경인에 그의 부 노경이 국혼(國婚;趙后) 저희(沮戱)와 세자(문조) 대리 방해라는 죄명으로 무척(誣斥)을 받아 도배(島配)가 되었으므로 동 임진에 선생이 명원소(鳴寃疏)를 올려 그를 변석(辯釋)하였더니 그의여화(餘禍)가 차차로 파급이 되어 헌종 경자에 선생도 또한 엄형을 받고 제주도에 안치되어 있기 10년간에 이르렀었다.
제주도에서 10년 만에 겨우 생환한 선생은 다시 권돈인(權敦仁)의 예론죄(禮論罪)에 干連되어서 동 신해에 북청으로 찬축되었다가 익년 임자에 방환되었으니 전후 적거생애(謫居生涯)가 13년간이었다. 이 13년 동안 선생의 궁액은 극심하였었으나 선생의 학덕이 이에서 크게 수양되었었고 선생의 서도가 이에서 通神이 되었던 것이다.
2
조선에서 서도 변천을 살펴보면 삼국시대 중기 이전엔 점선현신사비(黏蟬縣神祠碑), 영락대왕비 등의 漢隷가 유행되었고 이후엔 진흥왕순수비, 경주 남산성비(南山城碑) 등의 육조체(六朝體)가 있었으며, 남북조이후로 고려 충렬왕 이전까지 약 500년간엔 구솔경체(歐率更體)가 전폭적으로 유행하였고 충선왕 이후로 이조 초년까지는 조송설체(趙松雪體)로 거의 통일이 되었으며 중기 이후로는 진체(晉體 : 왕희지체)를 숭배하는 동시에 시비와 안진(贋眞)을 불구하고 순화각첩 (淳化閣帖), 난정첩(蘭亭帖), 유교경(遺敎經), 황정경(黃庭經), 악의론(樂毅論) 등의 고첩(古帖)을 모범하기에 전력하였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지나에서 금석학을 중심으로 하여 신홍하는 비파(碑派)의 서도는 선생으로부터서야 처음으로 수입이 되었었다.
1)안진(贋眞): 가짜와 진짜.
「阮堂集」에
“나는 어릴 때부터 글씨에 뜻을 두었었다. 24세에 연경에 들어가 여러 명현 碩儒를 보고 그 緖論)을 들었다. (중략)
우리나라 사람들이 배우는 바와는 크게 다르다.
한나라와 위나라 이하로 금석문자가 수천 種에 이르러 鐘에 새긴 것의 위에까지 거슬러 올라가고자 하면 반드시 북비(北碑)를 보아야 한다. 비로소 그 조(祖)의 원류가 어디서부터 나왔는지를 알게 되었다.” (편집자 역)
라 하여 서도에 배우고자 하면 먼저 한 · 위 이하 금석문자 곧 분비를 다견(多見)치 않아서는 안 되겠다 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악의론에 이르면 당나라 때부터 이미 친분이 없었다. 6조 때 사람의 글인 황정경, 당경(唐經)에서 생겨난 유교경, 동방삭이 칭찬했다는 조아비(曺娥碑) 등의 글씨는 모두 내력이 없는 것이다. 각첩(閣帖)은 왕을 위하여 지은 것으로 모방하고 바꾼 바가 더욱 얽히게 되었다. (중략) 중국에서 지식이 있는 사람은 악의, 황정 등의 글로부터 각첩에 이르기까지 모두 언급하기를 부끄러워한다.”(편집자 역)
라 하여 동인(東人)의 가장 숭배하는 고첩이 다 안품(贋品)으로서
‘용이 하늘의 문으로 날아오르고 호랑이가 봉황의 궁궐에 누워 있음(龍跳天門虎臥鳳闕)’의 기개를 가졌던 왕우군(王右軍)의 진적(眞蹟)이 아닌 동시에 서도를 배우는 사람은 이에 미혹하여서는 안 되겠다 갈파하였었다. 이가 곧 반도에서 비파(碑派)의 첫 부르짖음으로써 첩파(帖派)의 미몽을 깨치게 하던 바이다.
선생의 서법은 어느 방면에 가장 치중하였을까?
「완당집」에
“예서는 서법의 할아버지가 된다. 만일 서도에 마음을 두고자 한다면 예서를 알지 못하면 할 수 없다. 예서의 법은 반드시 굳세고 고졸(古拙)한 것이 주가 되나 그 고졸한 것은 쉽게 얻을 수 없다. 한나라 예서의 묘는 오로지 고졸한 곳에 있다.” (편집자 역)
라 하여 한예의 묘를 구가하였었다.
동시에 선생의 서법도 또한 예서에 가장 신통하였었다. 선생은 김생(金生) 이후에 반도 유일의 서도 대가로 자타가 다 인정하는 바이다.
마는 그에 대한 대표적 평론을 들으면 다음과 같다.
“완당의 글씨는 소시로부터 늙음에 이르기까지 계속적으로 변천해왔다. 소시에는 오로지 동현재(董玄宰)에게 뜻을 두었으며 중년에는 담계(覃溪)를 좇아서 그 글씨를 본받기에 힘을 다해 농후하면서도 소골(少骨)의 흠이 있었다. 그리고 나서는 소미변(蘇米變)과 이북해(李北海)를 좇아 더욱 무성함과 굳셈을 더해서 드디어 신통한 진수를 얻게 되었다. 만년에는 바다를 건너 돌아온 후 다시 구속되는 바가 없이 두루 섭렵하여 뭇 서가의 장점을 모아 스스로 한 법을 이루었다. 신기(神氣)가 오는 것이 바다의 조수와 같았다. 비단 문장뿐만이 그런 것이 아닌데도 알지 못하는 자들은 호방하고 방자하다고 생각하여 그 근엄함의 지극한 것을 알지 못한다. 이런 까닭에 나는 일찌기 후생 소년들에게 일러 완당 선생의 글씨체가 쉽게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편집자 역)
이는 헌재 박규수(朴珪壽)의 정평으로서 완옹(阮翁) 일대의 서도사(書道史)라 할 만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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