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경(金允經)
1894~1969. 국어학자. 경기도 광주 생. 연희전문을 거쳐 일본 닛교(立敎) 대학 사학과졸업, 동우회사건,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일경에 피검되었었으며 광복 후에는 연세대교수, 학술원 회원 등을 역임하면서 우리나라 어학 분야에 크게 기여.
저서에 「조선문자 급 어학사(朝鮮文字 及 語學史)」, 「나라말본」, 「중등말본」, 「용비어천가 강의」, 「새로 지은 국어 학사」 등이 있음.
1. 머리말
현재 쓰는 조선글인 훈민정음이 창제된 이래 493년이 되었지만 갑오경장 이전까지는 이에 대한 연구는 새벽별보다 드물었다. 이를 창작한 세종과 이에 협력한 정인지(태조 5년 생 성종 9년 졸), 성삼문(태종 18년 생 세조 원년 졸), 신숙주(태종 17년 생, 성종 6년 졸), 최항(태종 9년 생, 성종5년 졸)들의 혁혁한 공로에 대하여서는 두말할 필요도 없지만 그 뒤로 갑오경장 이전까지는 이에 대한 한마디의 학설이라도 후세에 끼친 이는 열 손가락을 꼽지 못한다. 그나마도 대부분이 한자의 음운 연구가 본위였다.
잠시 열거하여 보면
○최세진(崔世珍;중종 37년 졸): 「훈몽자회(訓蒙字會)」를 중종 22년에 지어 훈민정음의 학리(學理)를 병들여 놓음.
○최석정(崔錫鼎; 인조 24년 생, 숙종 43년 졸) : 「경세정운도설(經世正韻圖說)」을 지음.
○박성원(朴性源; 숙종 23년 생, 영조 43년 졸) : 영조 23년에 「화동정음통석운고(華東正音通釋韻考)」를 지음.
○신경준(申景濬;숙종 38년 생, 정조 5년 졸): 영조 26년에 「훈민정음운해(訓民正音韻解)」를 지음.
○홍계희(洪啓禧 : 숙종 29년 생, 영조 47년 졸) : 영조 27년에 삼운성휘(三韻聲彙)」를 지음.
○홍양호(洪良浩 ; 경종 4년 생, 순조 2년 졸) : 「경세정운도설서(經世正韻圖說序)」를 지음.
○이영익(李令翊 ; 영조 16년 생, 정조 4년 졸): 유희 저 「언문지(諺文志)」에 그의 학설 인용이 보임.
○정동유(鄭東愈;영조 20년 생): 「주영편(晝永編)」을 지음.
○황윤석(黃胤錫;영조, 정조 때 사람): 순조 29년에 그의 「이재유고(頤齋遺稿)」가 그 손자 수경(秀瓊)의 손으로 출간됨.
○유희(영조 49년 생, 헌종 3년 졸):순조 24년에 「언문지」를 지음.
○이규경(李圭景;헌종 때 사람):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를 지음.
○안위(고종 때 사람): 고종 6년에 「동문자모 분해(東文字母分解)」를 지음.
이에 지나지 않는다.
갑오 이후 구한국 말엽에는 신흥의 기운에 따라
○ 이봉운(고종 때 사람) : 건양 2년 1월에 「국문정리(國文正理)」를 출간함.
○지석영(철종 6년 생, 소화 10년 졸) : 광무 9년 7월 19일에 그의 제안인 「신정국문(新訂國文)」이 발표됨.
○권정선(權貞善;고종 때 사람): 광무 10년에 「정음종훈(正音宗訓)」을 지음.
○최광옥(崔光玉;고종 17년 생, 명치 44년 졸) : 융희 2년 1월에 대한문전(大韓文典)」이란 문법서를 출간함.
○ 유길준(兪吉濬 ; 철종 7년 생, 大正 3년 졸) : 융희 3년 3월 18일에 대한문전(大韓文典)」이란 문법서를 출간함.
○주시경(周時經;고종 13년 생, 대정 3년 졸): 융희 4년 4월 15일에 「국어문법(國語文法)」이란 문법서를 출간함.
이러한 이들과 그 밖에 현존한 여러 학자들이 많이 출현하게 되었다. 그러나 갑오 이전에 있어서 조선문을 본위로 연구한 이는 오직 서파(西坡) 유희 선생뿐이다. 또 조선어 음운 연구에 가장 권위를 나타낸 이도 그이라 하겠다.
2. 선생의 가계
선생의 성은 유씨요 본은 진주(晋州)인데 초명(初名)은 경(敬)이라 일컫더니 나중에 희라 고쳤으며 자는 계중(戒仲)이요 호는 방편자(方便子), 남악(南岳), 서파의 여럿이 있다.
선생은 연산주를 내쫓고 중종을 맞아 세운 정국(靖國) 공신이요, 영의정이던 청천부원군(菁川府院君) 유순정(柳順汀)의 11대손이며 현감 유한규(柳漢奎)의 아들이다. 대대로 문장과 재지(才智)의 전통이 있는지라 유한규는 담운(澹雲) 조명교(曹命敎 ; 숙종 13년 생, 영조 29년 졸)의 문인으로 각 방면에 정통한 박학의 재사(才士)였고 모친인 전주 이씨(아버지의 4취한 부인)도 호를 사주당(師朱堂)이라 하여 여류 문장이었고 박학이었다. 그리하여 당시 명사(李昌顯, 姜必孝, 李亮淵, 李勉訥 같은 이)가 질의하였다 한다. 이씨의 저서가 많았으나 임종에 선생을 불러 놓고 「태교신기(胎敎新記; 이제 전하여 간행됨이 있음)」만 남기고 그 밖에는 다 불살라 버리게 하였다 한다.
3. 선생의 생활
이와 같이 박학의 교양이 있는 아버지 유한규와 어머니 사주당 이씨의 사이에서 영조 49년 계사 (1773) 윤3월 27일에 경기도 용인군 모현면 말뫼(馬山; 이제는 말뫼와 開日 두 동리를 합하여 일산리라 이름)에서 유희 선생은 출생되었다. 될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보게 된다는 격으로 선생의 심신의 발달은 어릴 때부터 특이하여 난 지 1년에 모친의 가르치는 문자를 이해하였고 3·4세에 4·5언의 글을 지었고 5·7세에 「성리대전(性理大全)」을 보고 기뻐서 주야로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으며 모친이 선생의 두 누이에 주려고 「계명잠(雞鳴箴)」을 초(草)하는데 선생은 먼저
“닭이 울면 일어나서 착한 일을 위해 부지런히 힘쓰는 것은 순(舜)의 무리이며, 닭이 울면 일어나서 이익을 위해 부지런히 힘쓰는 것은 척의 무리다.” (편집자 역)
라고 썼고 孔子家語의 공자 화상(畵像)을 보고 먼저 재배(再拜)하고 읽었다 한다.
1)척:고대 중국의 큰 도적인 도척을 가리킴.
9세 때에는 「서전(書傳)」의 朞三百의 주(註)를 연구하고 따로 기삼백 글 한 편을 지어 부친께 올렸으며 10세 때에는 「통감」, 「사기」 들을 암기하였다.
2)서전(書傳):「서경」을 주석한 책.
이같이 젖먹이 때부터 10세 때까지의 어린 때에 신기한 사실이 많이 신동이란 이름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러나 11세 때에는 청천백일의 벽력 같은 불행을 당하게 되었으니 이는 곧 부친이 작고하게 됨이었다. 그리하여 양친의 감화를 함께 받았다면 얼마나 선생을 더 위대하게 하였을는지 모를 것을 이때부터 49세 즉 모친상을 당할 때까지는 오직 모친의 교도와 훈도 감화를 받아 그만치 인격을 쌓아올린 것임을 잊어서는 아니 되겠다고 생각한다.
13세 때에 9장 산법(九章算法)을 연역하여 무궁수(無窮數)까지 이르렀다. 이때에 벌써 선생의 성격은 독특하게 틀이 잡힌 것이 드러나게 되었다고 엿보이는 것은 이해에 그 모친의 훈계에
“너의 천성이 속류(俗流)에 합하지 아니하니 비록 과거에 오르더라도 용납될 수 없을 것이다. 과거를 폐하고 독선(獨善)하는 것이 좋다.”
함을 보아 알겠다.
16, 17세 때에는 경사(經史)를 읽어 이천(履踐)3)의 도(道)를 통하고 치란(治亂)의 기(機)를 연구하였다. 18세 때에 감시(監試; 생원, 진사의 과거)에 발해(發解; 과거의 초시에 합격하는 일)되었으나 이미 어머니의 훈계가 있기 때문에 그 뒤로 다시 과장에 가지 않았다.
3)이천(履踐): 이행.실행.
19세 때의 일이었다. 그 어머니의 병환이 위독하매 단지하여 혈서로 천지신명께 기도하며 3일3야를 치성한 것은 선생이 얼마나 효성이 지극함을 증거하는 것이다.
37세 때에 선생은 충청북도 단양으로 이거(移居)하게 되었다. 단양, 영춘이라면 조선에서 경치 좋기로 이르는 곳이거니와 선생은 여기에서 이러한 산수를 심히 사랑하면서 약초를 심고 전지(田地)를 관개하여 근검한 생활로 재산을 모으게 되어 족당까지 윤택하게 하였다 함을 보면 선생은 과학적 진리만 애호한 것이 아니라 자연미에 대한 심미 감정도 컸으며 또한 재산을 모으되 이기적으로만 쓰지 않고 남에게까지 윤택하게 할 만치 선(善)의 추구에 양심이 날카롭던 것을 추앙하지 아니할 수 없다.
즉 선생의 정신생활은 지(知), 정(情), 의(意)의 각 방면에 원만하여 진, 선, 미의 인격을 발현함을 경모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뒤 48세 때에 선생은 광주(廣州)에 이거하였고 53세 때에는 중자씨(仲姊氏)의 너무도 울면서 권함에 못이기어 소과(小科;생원, 진사를 試取하는 과거)에 응하여 입방(入楞)되었다 한다. 헌종 3년 정유(1837) 2월1일에 선생은 출생의 고향(용인 모현면)에서 65세에 작고하였다.
선생은 성격이 곧고 행위가 반듯하기 때문에 세속에 조화됨이 적었으며 재지(智)가 뛰어나기 때문에 이를 시기하는 자가 무근(無根)한 말을 만들어 내어 선생을 해하려 함이 있었으나 선생은 도무지 스스로 변명하지 않았으며 또 그들의 단처(短處)를 말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단양에 있을 때에는 그곳 사람들이 선생의 효와 높은 품위를 경애하였고 광주에 있을 때에는 그곳 사람들이 선생을 부처님 같다고 칭송하였다 한다.
4. 선생의 저서와 학설
선생의 석학 박식은 천하의 기재(奇才)라고 칭예를 듣던 만큼 일생에 저서도 많았다.
실전(失傳)도 적지 않은 모양인데 이제까지 그 후손에게 전하여 오는 것만도 백여 권이나 되는 「문통(文通)」(사본)이 있다.
내용으로 보아 그 연구의 범위는 참으로 넓어서 천문, 지리, 의약, 복서, 종수(種樹), 농정(農政), 풍수, 충어(虫魚), 조류(鳥類), 경사(經史), 어문, 수학 들의 각 방면에 정통함을 보여 준다.
그중에 가장 가치 있는 명저로서 오늘날까지 학계에 큰 충동을 주는 것은 「언문지」 1편이다.
이와 같이 가치가 있는지라 일찍부터 학자 사이에 전사(傳寫) 차독(借讀)으로 널리 소개되었을 뿐 아니라 이능화(李能和)의 「불교통사」(대정 7년 3월 10일 발행)에 약간 인용됨을 위시하여 영사본(今西龍 소장 같은), 봉천(奉天) 김구경(金九經)의 「교간유씨언문지(校刊柳氏諺文志)」(갑술 7월 간행), 조선어학회의 「한글」 제5권 제1, 제2호부록(소화 12년 1,2월 발행), 동 단행본(소화 13년 3월 28일 발행) 「조선문학 급 어학사(朝鮮文學 及 語學史)」(소화 13년 1월 25일 발행)의 전문인용들이 세상에 유포되게 되었다.
「언문지」는 초성례(初聲例), 중성례(中聲例), 종성례(終聲例), 전자례(全字例)의 4부로 나누어 해박한 고증과 자세한 변론으로 조직적 체계를 세운 것이다. 초성에서는 광운(廣韻)이하 훈민정음, 정음통석(正音通釋)들의 과거 변천을 보인 뒤에 선생의 교정한 25모(母)가 옳음을 주장하였고 중성에서는 정음통석 이하 변천을 보인 뒤에 선생의 교정한 중성정례(中聲正例)15형과 변례(變例) 1형을 합하여 16형이 있음을 주장하였고, 종성에서는 정음통석 이하 변천을 보인 뒤에 선생의 교정한 종성 정례 6운과 변례 1운을 합하여 7운이 있음을 주장하였고, 전자례에서는 우리의 입으로 낼 만한 각종 음절의 총수를 열거하여 총계 10,250의 음이 있음을 말한 것이다.
이제 선생의 언문지에 나타난 중요한 학설 몇몇을 들어 보고자 한다.
첫째로, 훈민정음의 기원을 몽고자에 두었다고 보아서
“비록, 언문은 몽고에서 비롯되었으나 우리나라에서 완성하였다.”
라 하였으며
둘째로, 초성을 이미 말함같이 스물다섯이라 하고 그 순서를
ㄱㅋㄲㆁㄷㅌㄸㄴㅂㅍㅃㅁㅸㅹㅈㅊㅉㅿㅅㅆㅇㅎㆅㄹㆆ
이같이 벌였으며
세째로, 초성 중 설(舌), 순(脣), 치(齒)의 세 음이 각각 둘씩으로 나뉨을 거이(擧頤)와 안이 (按頤)라 하여
설음(舌音)
설단음(舌端音) 擧頤(ㅏ ㅘ ㅓ ㅝ ㅗ ㅜ ㆍ 합한)... 端ㄷ・透ㄹ・定ㄸ・泥ㄴ
설상음(舌上音) 按頤(ㅑ ᅟힲ ㅕ ᅟᆏ ㅛ ㅠ ㅣ 합한)⋯ 知ㄷ・徹ㅌ・澄ㄸ・孃ㄱ
순음(脣音)
순중음(脣重音) 擧頭(동음)…幇ㅂ・滂ㅍ・竝ㅃ・明口
순경음(脣輕音) 按頥(동음)…非ㅂ・敷ㅍ・奉ㅃ・微口
치음(齒音)
치두음(齒頭音) 擧頭(동음)…精ㅈ・淸ㅊ・從ㅉ・心人・邪ㅆ
정치음(整齒音) 按頥(동음)⋯照ㅈ・穿ㅊ・牀ㅉ・審人・ᆞ禪ㅆ
이같이 분류하고 각 음은 본래 같은 한 초음이나 중성(위 표 가운데 기입함 같이) 배합이 다르므로 조금 달리 됨 (가령 다더의 ㄷ은 端, 댜뎌의 ㄷ은 知라 한 것 같은)을 보고 각각 딴 자모를 세움은 잘못이라고 안이는 다거이에 합한다 하였으며
네째로, ㆁ의 구별이 속(俗)에 형을 쓰기는 하면서 어모(魚母)임을 모르고 이름을 ‘이행’이라 하여 둘로 끊어서 원(圓) 위의 돌기한 획을 우방에 붙이는 ‘ㅣ’(‘대, 귀’의 ㅣ같은)로 잘못 알고 또 'ㅇ'만을 ‘행’이라하여 ‘동(東), 양(陽)’의 종성과 같이 씀이 잘못이라 지적하는 동시에 ㅇ(喩母)은 초성으로 되나 종성으로 되나 아무 소리가 없는 것이지만 ㆁ(魚, 즉 疑母)은 초성으로 되나 종성으로 되나 그 소리가 드러남을 말하였으며
다섯째로, 탁음(ㄲ, ㄸ 들 같은 된소리)의 회복이다. 운서에 탁음이 없어짐은 첫째로 훈민정음에 자획의 간편을 위하여 탁음을 표시하는 자모를 따로 만들지 않고 전청(全淸)을 표시하는 자모를 병서하여 쓰라고 규정함과, 둘째로 「용비어천가」에는 전청자(全淸字)의 옆에 두 점을 찍음으로 전탁(濁)을 표하고 번역(老乞大, 朴通事 들의 漢語諺解)에는 차청자(次淸字)의 옆에 두 점을 찍음으로 전탁을 표하여 독자로 하여금 그 옆의 점 있고 없음으로 청탁을 구별하여 읽게 하고 「정음통석」에는 전청자의 옆에 검은 점(・)을 찍음으로 전탁을 표하여 구별하여 읽게 하여 이미 혼란을 일으킨 데다가 또 「사성통고(四聲通考)」에는 평성은 무점(無點), 상성은 2점, 거성과 입성은 1점으로 표시한다 규정하였기 때문에 더욱 혼란을 일으키게 되어서 어천(御天)과 번역의 방점이 현혹되고 또 「삼재도회(三才圖會)」의 흑백 권점(圈點)으로 平仄을 구별한 것은 「정음통석」의 흑백 권점의 혼란을 일으켜 후진 천학자(淺學者)는 「통고」와 「도회」의 권점을 자음에 관계하지 않고 읽게 되고, 또 「어천가」와 번역과 「통석」의 권점을 잘 구별하지 못하여 다만 본 자음대로만 읽게 된 까닭에 전탁음(ㄲㄸㅆㅉㅃ)이 다 전청음 (ㄱㄷㅅㅂㅈ)으로 변하여 버리게 됨을 말하고, 이 때문에 속(俗)에는 조선말에서 탁음을 만나더라도 ㅅ(心母)을 처음 좌편에 붙여(ㅺ ㅼ ㅽ ㅾ 같이) 쓰고 또 청음 ㅅ을 탁음으로 만듦에도 쌍형(ㅆ같이)됨을 피하기 위하여 대신에 ㅂ(幇母)을 좌편에 붙여(ㅄ 같이) 탁음을 만들게 되었지만 쌍형(ㄲㄸㅆㅃㅉ 같이)을 회복함이 정리(正理)라고 갈파하였는데 이는 신경준 기타 학자들의 일치한 주장임을 알겠으며
여섯째로, ㅏ ㅑ ㅘ ᅟힲ ㅓ ㅕ ㅝ ᅟᆏ ㅗ ㅛ ㅜ ㅠ ㅡ ㅣ들의 15자를 중성정례라 하고 옆에 붙이는 ㅣ를 중성 변례라 하여 정례 중 14자(ㅣ를 제한) 옆에 붙인 것(ㅐ ㅒ…ㅣ 같은)을 합하여 중성 총수를 29라 보았으며
일곱째로, 고금 운서에는 다 평(平), 상(上), 거(去), 입(入)의 네 가지로 중성의 독법을 구별하였으나 정음에는 필요가 없으므로 폐지한다고 하였으며
여덟째로, 종성은 ㄱㄷㅂㅇㄴㅁ의 정례 여섯과 근의 변례 하나를 합하여 모두 일곱이라 하였으며
아홉째로, 종성을 3평(三平)과 3입(三入)으로 나누었는데 그림으로 보이면 다음과 같으며
3평성(三平聲)
ㆁ어모(魚母)…동, 양(東, 陽)들의 받침(韻)
ㄴ니모(泥母)…진, 한(眞, 寒)들의 받침(韻)
ㅁ명모(明母)…침, 함(侵, 咸)들의 받침(韻)
3입성(三入聲)
ㄱ견모(見母)…옥, 약(屋, 藥)들의 받침(韻)
ㄷ단모(端母)⋯짇, 갇(質, 曷)들의 받침(韻)
ㅂ방모(幇母)…즙, 흡(緝, 洽)들의 받침(韻)
불탁(不濁)・리(裏)
ㆁ평성(平聲)→ㄱ입성(入聲) 전청(全淸)·표(表) (平入相配對應圖)
ㄴ평성(平聲)→ㄷ입성(入聲) 전청(全淸)·표(表) (平入相配對應圖)
ㅁ평성(平聲)→ㅂ입성(入聲) 전청(全淸)·표(表) (平入相配對應圖)
열째로, ㄹ을 변례라 함이다. 「사성통고」(세종 말년 신숙주 찬) 범례에
“입성은 아(牙) 설(舌) 순(脣)의 전청으로 종성을 삼아서 촉급한 것이라.”
하였고 또
“ㄱㄷㅂ 종성을 바로 부르면 남음(南音)과 같아지므로 글자마다 속음(俗音;즉 北音이니 입성이 없어진 것)을 달되 모든 운(韻)에는 ‘ㆆ’, 약운(藥韻)에는 ‘ㅸ’을 반절 밑에 달아서 구별한다.”
하였는데 「사성통해」(중종 12년 정축 최세진 찬)범례에는
“입성을 ㄹㄴㅂ 3성은 한속(漢俗)에 다 쓰지 않으나 남음(南音)에만 많이 쓰임이 있다.”
하여 입성 가운데 ㄷ을 입성 아닌 ㄹ로 대신하여 ㄷ종성이 ㄹ종성으로 변하여 음운상 한 큰 변화를 일으킨 것이므로 ㄹ종성을 변례라 하였다. 그러나 최세진이 ㄹ을 많이 낸다고 본 것은 ㄷ의 변한 소리가 아니고 일모(日母;△)를 다 ㄹ로 냄을 모르고 다 없어진 입성 중에서 ㄷ 대신으로 ㄹ을 냄으로 안 것이라 하였으며
열 한째로, ㆆㅱㅸ 들의 종성의 독법은 본 소리로 냄이 아니고 변화된 음(입성이 없어진 것)의 부호로 쓴 것임을 말한 것이다. 소위 ‘절요중성(折腰中聲)’이란 것은(蕭, 看, 尤, 藥) 원래 고음(古音)이 아니요 몽고가 지나(支那) 전폭(全幅)을 지배하게 된 뒤로 생긴 음인데 몽고운에서는 이것을 종성이라 하기 때문에 억지로 ㅱ을 달게 되었고 약운은 원래 입성이었으므로 「통고」에서 ㅸ으로 고쳤으나 번역과 「통석」에서 그것을 중성으로 고쳤다. 즉, ㆆㅱㅸ은 입성으로서 그 입성 종성이 없어진 자리에 억지로 채워 쓴 것이었음을 말하였으며
열 두째로, ㅎ종성의 가능성을 말한 것이다. ‘하ᅘᅣ’를 ‘핳하’로 나누어 읽어보면 ‘핳’의 ㅎ종성을 인정할 수 있다 하였으며
열 세째로 ‘된시옷'이란 습관이 생긴 내력을 갈파한 것이다. 또한 동시에 종성되기 어려운 치음 ㅅ이 ㄷ 대신으로 종성되게 된 내력도 말한 것이다. 「통해」에 ‘蓬’을 ‘ᄇᆡㅅ돋(舟之席)’이라 하였는데 ‘舟’는 ‘ᄇᆡ’요, ‘ᄇᆡᆺ’이 아니며, ‘席’은 ‘돋’이요 ‘ᄯᅩᆯ’이 아님을 모르고 두 말이 합할 때에 그 중간에서 나는 ‘ㅅ’을 한 자 간격을 차지하도록 쓰지 않아서 혹은 ‘ᄇᆡᆺ’같이 ㅅ받침을 만들기도 하고 혹은 ‘ᄯᅩᆯ’같이 ‘된시옷’을 만들기도 하여 받침으로 하여서는 ㄷ 대신에 ㅅ받침이 생기게 되고 초성으로 합하여서는 쌍형(濁者, 즉 ㄲㄸㅃ…들) 대신에 ‘된시옷’(즉 ㅺ ㅼ ㅽ…들)이 생기게 되었다 하였다. 「경서언해」에 이러한 중간음을 표시함이 퍽 많은 것을 인증하였다.
이 밖에도 여러 가지 귀중한 학설이 있으나 여기에 열거하기 번다하여 그만 줄이니 본서(本書)를 참고하여 주기를 바란다.
또 조선 어학의 참고재료로는 「물명유고(物名類考)」와 「시물명고(詩物名考)」가 「문통(文通)」 중에 들어 있다.
(선생의 「문통」 소화 12년 4월 1일 발행인 「한글」 제5권 제4호 소재의 李萬珪 선생의 「유희선생 약전」, 「조선문자 급 어학사」의 諺文志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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