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文章/조선명인전

93.조선-신위(申緯)

구글서생 2023. 5. 19. 0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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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상찬(車相瓚)
1887~1946. 저널리스트, 한시 시인, 수필가. 호 청오(靑吾). 강원도 춘천 생.보성전문졸업. 「개벽」의 창간 동인이며 신간 「개벽」의 발행인. 이어 「별건곤(別乾坤)」, 「신여성(新女性)」, 「농민」, 「학생」 등을 발간. 〈관동잡영(關東雜詠)〉 등의 한시 및 사화(史話), 수필 등 다수를 발표.
저서에 「조선사 천년비사」, 「해동염사(海東艶史)」, 「조선야담사화전집」등이 있음.

 

 

1. 그의 일평생

 

선생의 성은 신씨, 관(貫)은 평산(平山)이요 명(名)은 위(緯), 자는 한수(漢叟)니 소시에 일찌기 경기도 시흥 자하산(紫霞山;그의 선영 소재지)에서 글을 읽었기 때문에 인하여 자호(自號)를 ‘자하’라 하였다.

그의 문벌은 세세 한경(漢京)의 명문 귀족으로 중조(中祖)는 이조 초 상신(相臣) 문희공 개(槩)요 8대조는 임란 순국명장 충장공(忠壯公) 입(砬), 7대조는 인조조 영상 경정(景禎), 고조 확(瓊)은 현종 때 명필로 관(官)이 부사(府使)에 이르고 부 대승(大升)은 참판 또 4종(四從) 작(綽)은 호를 석천(石泉)이라 하였으니 영종조 대사성으로 전서(篆書)를 잘 썼었고 처부(妻父)는 조윤형(曺允亨)으로 호를 송하(松下)라 하였으니 또한 서화로 저명하였다.

그는 영조 45년 기축(1769) 8월 11일에 한성에서 고고의 소리를 발하여 정조 원년 정유(그때 9세)에 처음으로 취학하였는데 원래 천부의 시재(詩才)가 있어서 겨우 입학을 하면서부터 능히 시를 지으니 남들이 모두 재동이라 칭하였다.

그리고 차차 장성함을 따라 더욱 시를 전공하며 겸하여 서화에 힘을 써 또한 성가(成家)하니 이른바 자하의 삼절(三絶)이 그것이다(一詩二畫三書).

그의 형 경(經)은 진사로 바둑이 일국의 선수(善手)였는데 그와 한 방에서 공처(共處)하였으나 그는 한번도 그 방면에 눈을 뜨지 않고 자기의 취미에 맞는 시서화에만 진심하였으니 거기에 대한 그 용심(用心)이 어떠한 것을 족히 짐작할 것이다.

 

그후 정조 23년 기미에 비로소 문과에 등(登)하니 때에 그의 연령은 31세였다. 그보다 앞서 그의 동년시기(童年時期)에 정조께서는 그 재명(才名)을 들으시고 친히 편전으로 부르셔서 재예를 한번 시(試)하여 보시고 크게 기특히 여겨 병풍에 붙일 큰 글씨와 비전(祕殿)1) 기둥에 붙일 연서(聯書)를 명하여 쓰게 하시고 또 선생의 저(著)한 「춘추의례(春秋義例)」와 「대례녹본(戴禮錄本)」 2서를 어람하신 후 내각에 장치하시며 또 서국(書局)을 열고 서(書)를 편하는데 특히 선생을 불러 포의(布衣)로 그 역(役)에 예(預)케 하였더니 마침 모 대신이 저방(沮妨)하여 그만 중지되고 이에 이르러 비로소 포의를 면하고 초계문신(抄啓文臣)의 선(選)에 여(與)하게 되었다.

1) 비전(祕殿):왕이 기거하는 궁전.

 

그러나 공은 남처럼 구구스럽게 관계 승진하는 데 유의치 않고 또 일찌기 시사(時事)를 논하다가 당로자(當路者)의 기휘(忌諱)에 촉(觸)하여 외구재외(畏懼在外)하였던 까닭으로 입조한 지 10여 년을 지나 순조 11년 신미 즉 43세 되던 해에 비로소 정3품에 승(陞)하였다.

 

그리고 그 익년 임신 7월에 주청사 서장관(奏請使書狀官)으로 청도(淸都 : 북경)에 부(赴)하였는데 그 전날에 완당(阮堂;추사) 김정희(金正喜)선생이 포의로 연경에 가서 그때 그곳의 명필 담계 옹방강(翁方綱)에게서법을 배울 때에 그의 아들 수곤(樹崑)과 교류하여 공의 재예를 많이 칭송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공이 옹씨의 부자를 찾았더니 그들 부자는 특별히 환영하며 또 선생의 시·화·서를 실지로 보고 크게 칭상(稱賞)하여 공의 재명이 일시에 청도에까지 떨치게 되었다.

그는 그 길로 돌아와서 병조참지를 수(授)하고 그 익년 계유(순조 13년 공 45세)에는 외직으로 곡산부사(谷山府使)가 되었다가 순조 16년 병자(공 나이 48) 봄에 직을 해(解)하고 귀경하게 되었는데 재직 중에 그곳의 큰 폐막인 군렴(軍斂)을 탕제하여 군민이 모두 그 은정(恩政)을 감복하였던 까닭으로 부로들이 모두 길을 막고 원류(願留)하였다.

그후에 승지 제직(諸職)을 역(歷)하고 순조 18년 무인(공 나이 50세) 봄에는 또 춘천부사로 부임하였는데 그곳에서 행악하는 토호를 조치하고 궁핍한 자를 구휼하여 자못 선정의 칭송이 있었더니 그 익년 기묘 가을에 장관(長官)과 불합(不合)한 일이 있어 그만 인(印)을 괘(掛)2)하고 돌아오게 되니 부민들이 모두 애석히 여겨 경외(境外)에까지 출송하며 심지어 체읍하는 자가 많았다.

2)(): 걸쳐 놓음. 즉 내놓음.

 

그후 순조 22년 임오(공 나이 54)에는 종2품에 승하여 병조참판을 배(拜)하고 또 28년 무자(공 나이 60) 가을에는 강화유수를 배하니 그것은 당시 대리(순조의 대리) 문조(文祖 :익종)께서 문학을 좋아하여 공을 특히 우대하는 까닭에 그 배명(拜命)이 있게 된 것이다.

그해 겨울에는 문조께서 특히 공에 명하여 당시 절구(唐詩絶句)를 선(選)하고 순조 30년 경인(문조 대리 4년 : 공의 나이 62세)봄에는 또 문조께서 친히 '양연산방(養硯山房)’ 4자를 써서 공에게 하사하시고 또 18 나한도의 모영(模詠)을 명하시니 일반이 모두 영광스럽게 여겼었다.

 

그러나 그해 5월에 불행히 문조께서 22세의 춘추로 일찌기 승하하시니 때에는 마침 외척 김씨가 정권을 천롱(檀弄)하기 시작하며 평소부터 공이 문조의 수우(殊遇) 받는 것을 퍽 미워하였으므로 문조가 승하하심에 이르러서는 공이 스스로 불안한 생각을 품고 그해 7월에 직을 사하고 귀(歸)하였는데, 언자(言者)가 벌써 외척의 사주를 받고 공을 심히 공격하므로 공은 성외(城外)에 나가서 죄를 대(待)하고 있었더니 상이 그 원정(原情)을 알으시고 특지(特旨)를 내리시어 도리어 그 언자를 해도(海島)에 유배하고 선생은 무사하게 되었으나 그래도 어의(於義)에 역시 불안하여 그만 한경(漢京)을 사(辭)하고 시흥군 자하산장으로 은거하게 되니 그곳은 곧 공의 선영 근처로 소시에 글을 읽던 곳이었다.

 

그후 순조 31년 신묘(공 나이 63) 4월에 다시 형조참판의 배명이 있었으나 때에는 공이 각병(脚病)으로 7년 동안이나 신음하던 중이므로 병사(病辭)하고 또 그 익년 임진 4월에는 승정원 도승지를 배하였으나 공소(攻疏)가 또 있어서 일시 하옥까지 되었더니 미구에 유석(宥釋)3)되고 이어 도승지로 또 공을 부르게 되니 공으로서는 사세가 진퇴양난하게 되어 드디어 궁문 밖에 복(伏)하여 죄를 청하였더니 그날 밤에 상께서 누차 출사하라는 엄명이 계시므로 최종까지 감위(敢違)치 못하고 색책(塞責)4)으로 평신진 첨사무직(平薪鎭僉使武職)에 취보(就補)하였다.

3)유석(宥釋):너그러히 용서되어 풀려남.

4)색책(塞責): 책임을 완수함. 또는 책망을 면함.

 

그리고 순조 33년 계사(공 나이 65세) 3월에는 다시 내직으로 사간원 대사간의 언관이 되었더니 그해 겨울에 경기어사(京畿御史) 이시원(李是遠)이 전날 공의 강화유수 때 익직(溺職)5) 한 사(事)가 있다 논하여 드디어 그 선향인 평산(平山)으로 적(謫)하게 되었다.

5) 溺職: 직무를 감당하지 못함.

 

그러나 그 익년 갑오 4월에 다시 유환(宥還)되어 동월(冬月)에 도승지를 배하고 또 그 익년 헌종 원년 을미(공의 나이 67) 가을에는 이조참판을 배하여 전주(銓注)6)를 행하게 되었는데 일이 필(畢)한 후 모 대신(某大臣)으로부터 그 일의 순격(循格)되지 않을 것을 논하여 따라서 파직을 당하였다가 다시 대사간으로 특제(特除)하니 공은 스스로 기과(己過)를 핵(劾)하고 사면(辭免)하였더니 미구에 다시 병조참판을 배하게 되었다.

6) 전주(銓注): 관리의 임명을 위하여 합당한 인물을 가려서 임금에게 천거함.

 

그후 헌종 4년 무술(공의 나이 70)에는 또 호조참판으로 이배하였는데 어명에 의하여 어병서(御屛書)를 서진(書進)하고 9년 계묘(공 나이 75세)에는 상이 건릉(健陵)에 행행하시는데 정조 때 초계문신(抄啓文臣)에게 가자(加資))를 내리시게 되어 공도 또한 가의대부(嘉義大夫)의 가자를 하게 되고 10년 갑진(공 나이 76)에는 공이 병으로 누웠었는데 상께서 어사를 친히 보내 하문하시고 녹용을 하사하셨으며 익년 을사에 77세의 고령으로 한성 장흥방제(漢城長興坊第)에서 졸서(卒逝)하여 자하산 선영 밑에 장(葬)하였다.

7) 가자(加資): 3품 통정대부 이상의 품계에 올려 주는 것.

 

 

2. 그의 인물과 3절(三絶)

 

공은 풍신(風神)도 아름답게 잘났거니와 성질이 또한 호탕불기하며 시, 화, 서가 절특한 동시 가요 음률을 좋아하고 또 여색(麗色)을 즐겨하여 항상 그의 주위에는 시인, 묵객과 가인염희(歌人艶姫)가 별로 떠날 날이 없었으니 한양조(漢陽朝) 계엽(季葉)8)에 대표적 풍류시인이라면 대표적 풍류시인이요, 또 대표적 호협 귀족시인이라면 또 대표적 호협 귀족시인이다.

8)한양조(漢陽朝) 계엽(季葉): 이조 말엽.

 

임백호(林白湖)와 시대, 처지, 경우는 다를지라도 그 호탕불기한 성격과 행동은 다소 방불한 점이 있다.

 

그는 소시에 일찌기 제생(諸生)들과 같이 태학(太學)에 가서 승보시(陞補試)를 보게 되었는데 때는 마침 밤이 되어 중천에 달이 떠오르니 시권(試卷)에 글을 쓰다가 그 월색을 보고는 흥이 자발하여 그 시권에다 글을 쓰지 않고 붓을 들어서 그의 신묘독특한 필법으로 묵죽(墨竹)을 그리고 시권은 다시 들여놓을 생각도 하지않으니 시장(試場)에 있는 여러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성하여 그의 있는 곳을 에워싸고 구경하며 그의 좋은 풍채와 묘한 화법을 책책칭탄(噴噴稱歎)하고 또 시보(試補)하는 것을 초개같이 여기는 데 경이 감탄하였다. 그 한 일만 가지고 보아도 그의 성격과 행동의 여하한 것을 족히 추지(推知)할 것이다.

 

그리고 공의 부인 조씨가 무자(無子)하고 측실의 몸에서 명준(命準), 명연(命衍), 명우, 명두(命斗) 4인을 생(生)하였는데 당시 국가의 제도는 남의 서자는 청환(淸宦)을 주지 않고 천대하였기 때문에 일반 민간에서도 그 제도에 따라서 소위 문벌을 보지하려고 적자가 없고 서자만 있을 경우에는 비록 원촌(遠村)의 인(人)이라도 의례양자(依例養子)를 하는 부자연의 일이 공해(公行)하게 되었다.

그러나 공은 그러한 제도, 풍속을 전연 타파하고 서장자(庶長子) 명준으로 사자를 삼았다. 그것은 어찌 보면 작은 일 같지마는 그 당시에 모든 것을 초월하여 그 일을 행한 것은 여간한 용기와 해탈의 사상을 가지지 않고서는 못 할 것이다.

 

그는 당시 여러 외척에게 많은 미움을 받았지마는 유독 순조의 국구 풍고(楓皐) 김조순(金祖淳;영안 부원군)과는 소시로부터 서로 알 뿐 아니라 그도 서화를 잘 하는 까닭에(풍고는 역시 묵죽의 선수다) 특히 공의 재예를 기애(嗜愛)하여 공의 사생활이나 또는 공생활에 무슨 곤란, 긴급의 일이 있을 때면 직접 간접으로 항상 구조를 받게 되었다.

 

공의 시는 처음에 성당(盛唐)을 배우다가 다시 송(宋)의 소동파를 배운 후 전날에 지은 시집을 전부 소화(燒火)하여 버리고 43세 즉 신미 이후부터 다시 수편(蒐編)하되 옹방강에 써준 경수당(警修堂)이란 당편(堂扁)의 명(名)을 취하여 「경수당집」이라 칭하였더니 공의 졸서 후에 제2자 명연과 그의 문인(門人)이 신미 이전의 시까지 모아서 한 데 첨부하여 10여 책을 만들고 문(文)도 또한 수책이 되었는데 근대 광무(光武) 11년 정미 2월경에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이 지나 남통주(南通州 ; 강소성)에서 3년의 세월을 비(費)하며 그것을 재삼 고선(再三考選)하여 상하 2권(내용은 상하 모두 6권으로 편함)으로 하고 명은 「신자하시집(申紫霞詩集)」이라 경(更)하여 판행(判行)하였으니(자금은 全錫潤이 담당함) 그것이 곧 금일 조선에 많이 행해 있는 「자하시집」이다. 그의 시에 대하여는 당시부터 여러 사람들의 평이 있었으니 즉 풍고 김조순은 자하의 묵죽도(墨竹圖) 발문(跋文) 중에 운하되

“자하의 시는 그 묘(妙)를 자창(自創)하여 인(人)의 가규(可窺)치 못할 바라...”

라 하고 청국(淸國) 장추음시어(蔣秋吟侍御)는 운하되

“자하 시는 소황(소동파와 黃山谷)과 근(近)하다”(「畫林新詠」 참조)

라 하며 또 「자하집」을 교편 간행한 창강 김택영은 그 서문에 운하였으되

“오동(吾東)9)의 시는 고려의 이익재(李益齋 : 제현)로써 종(宗)을 삼고 본조(本朝) 선인간(宣祖~仁祖) 시대에 계작자가 가장 성(盛)하여 이오봉(李五峯;好閔), 차오산(車五山:천로), 백옥봉(白玉峯:光勳), 허부인(許夫人 ; 난설헌), 권석주(權石洲 ; 필), 김청음(金淸陰;尙憲), 정동명(鄭東溟;斗卿) 제가(諸家)가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풍웅고화(豊雄高華)의 취(趣)를 주(主)하였으나 영묘(英廟) 이하에는 풍기(風氣)가 일변하여 이혜환(李惠實), 금대(錦垈) 부자와 이형암(李炯菴;德懋), 유냉재(柳冷齋;得恭), 박초정(朴楚亭;제가), 이강산(李薑山;書九) 같은 이들이 혹은 기궤(奇詭)를 주(主)하고 혹은 첨신(尖新)을 주(主)하여 그 일대의 승강(升降)한 적(跡)이 고(古)에 비하면 마치 성(盛) 만당(晩唐)과 같았는데 오직 신공(申公)이 강산 제가의 뒤를 직접(直接)하여, 시, 화, 서 삼절로 천하에 들었으되 그 시는 소자첨(蘇子瞻)으로써 스승을 삼고 방(旁)으로 서능왕(徐陵王) 마힐(摩詰), 육무관(陸務觀)의 간(間)에 출입하여 그 오철(悟徹)함이 영영(瑩瑩)하고 그 치돌(馳突)함이 표표10)하여 능히 염(艶)하고 능히 야(野)하며 능히 환(幻)하고 능히 실(實)하며 능히 졸(拙)하고 능히 호(豪)하며 능히 평(平)하고 능히 험(險)하여 천정만상(千情萬狀)을 마음대로 얽어다가 모두 활동시키되 삼연(森然)히 목전에 있는 것같이 하여 독자로 하여금 눈이 현란하고 신(神)이 취케 하여 만무(萬舞)가 방장(方張)하고 오제(五齊)가 방농11)한 것같이 하니 광세(曠世)의 기재(奇才)를 구(具)하고 일대의 극변(極變)을궁(窮)하여 그 쇠만(衰晩)을 뛰어난 대가라 가위 (可謂)하겠다. (하략)”

하였다.

9) 오동(吾東):우리 동방.

10) 표표:개가 달리는 것처럼 재빠름.

11 오제(五齊)가 방농: 제사에 쓰는 다섯 가지 술이 모두 진함.

 

그리고 화(畵)는 일찌기 유년시대에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선생에게 그 수법을 배웠는데 특히 묵죽은 그 묘를 극하였다.

청의 옹방강은 그의 묵죽에 시를 제(題)하되

“푸른 숲 깊은 물이 만을 이루고

바다에서 솟은 희뿌연 달은 동산 위에 비껴 있네

담묵색에 기대인 푸른 낭새의 꼬리를 쳐다보고

맑은 바람은 500년을 깨끗이 하네” (편집자 역)12)

라 하고

12)“碧玉林深水一灣 烟橫月出海東山 却憑淡墨靑鸞尾 淨掃淸風五百間.”

 

이공재함자하묵죽가(李公在咸紫霞墨竹歌)에는 왈

“자하의 높은 재주는 일세의 영웅이요 만종과 천사를 구름같이 보는구나. 서화는 옛날과 가까와 오묘함을 갖추었고 오직 대(竹)그림은 7분을 얻었다. 옛 만물을 좇아 그림에 돌아오니 대그림을 그렸다 함은 일찌기 못들었네. 송나라의 문여가가 능히 울렸고 소동파의 귀신 같은 붓과도 거의 진짜처럼 뺏었네. 향풀과 기운 소나무도 시원치 않고 오직 두 사람만이 대그림에 귀신도 울릴 수 있으니 자앙(子昂)과 이간도 어찌 말할 수 있으랴.

자하의 대그림을 지금 친히 보니 몸이 옷을 이기지 못해 서까래를 잡았구나. 가슴 속의 대나무를 휘갈겨 그리니 빙 둘러보는 자도 사방을 놀래네. 그림에 능하고 또 글씨에도 능하며 시는 글씨나 그림보다 훨씬 낫구나. 하늘과 땅 사이에 이런 사람이 있는 줄 몰랐네. 붓 잡아 먹물 찍음은 귀신이 돌보는 것 같고 질풍과 폭우, 나는 봉황도 서로 향하는구나. 손오(孫吳)는 감히 육도삼략을 시험하지 못하고 분육도 굳셈을 잃어버렸네. 내가 천하의 많은 선비를 보았지만 어찌 그대 그림같이 기상이 안정되고 웅장한 필법이 있겠는가. 근엄하고 무거운 법칙은 방탕함이 적고 안정성은 탄옹 강표암(姜豹菴) 노인과 나란히 짝을 이루네. 하물며 나와 함께 늙도록 맺은 결의가 어려서부터이겠는가. 내가 늙어서도 오히려 미친 듯이 묵죽가를 구하니 자하, 자하여, 나는 늙었도다. 비록 너의 재주를 사랑하나 너에게 어찌하겠는가.”(편집자 역)

라 운운하였고

풍고의 자하묵죽 발(跋)에는 또 왈하되,

“자하 노우(老友)는 10여세 때로부터 벌써 삼절에 진(臻)하여13) 고금에 그 필(匹)이 선(鮮)하니 그 재(才)는 역시 천생(天生)이다. (중략) 화(畫)는 기묘청수(奇妙淸秀)하여 운림석전(雲林石田)의 주(儔)14)가 아니면 가히 더불어 대할 자가 없다. …”

운하고

장추음(蔣秋吟)은 또 말하되

“화는 지금에 그 필(匹)이 무(無)하다.”

고 하였다.

13) ()하여:이르러.

14) ():.

 

또 그의 서는 비록 시화만은 못하나 역시 일가를 성(成)하여 옹담계에게도 많은 칭상을 받았으며 담계는 일찌기 공에게

“겉으로는 방종하나 속으로는 엄밀하다(外似放縱 內實嚴密)”

란 서결(書決)을 수(授)하였다.

 

이상의 제평(諸評)을 보면 그의 인물과 시서화가 얼마나 탁월한 것은 누구나 짐작하겠으므로 여기에 다시 췌론치 않고 끝으로 정염시, 애사 몇 편을 뽑아 다능하고 다정다한한 그 풍류 시인의 일편모를 시(示)하기로한다.

 

제금성여사예향화란(題錦城女史藝香蘭)

“사람을 그리되 그 한(恨)을 그리기는 어렵고

난초를 그리되 그 향기를 그리기도 어려운데

향을 그리고 더불어 한을 그렸으니

당연히 그림을 그릴 때 애끓는 고통이 있었으리”

 

소아청이필묵시지, 사이노자조(小娥請以筆墨侍之, 謝以老自嘲)

“미인의 눈썹을 맑게 쓸어 내리니 하이얀 모시로다.

애끓는 정어(淸語)를 말함에 있어 아름답게 소곤거리는구나

아름다운 사람은 낭군의 나이를 묻지 못해

오십 년 전에는 23세라네”

 

함흥금아별 삼첩 (咸興琴娥別三疊)

“북산 누각 아래 만세교(萬歲橋)가에

한겨울 천기의 바람이 맑고 고우니

어느 곳 노인이 와서 음주를 하겠는가

금비녀 열 두 개를 끌어안고 단잠을 자는데

실 같은 바람이 흘러 흥이 모두 달아났네

다시금 고운 손, 옥 같은 방 앞을 어찌 찾느니

함관령 푸른 벼랑

행인이 이르면 말발굽은 자꾸 차바퀴를 재촉하네

여자 아이 여럿이 매화 속에서 웃음 짓고

이리저리 휘날리는 바람과 눈발이 옥같은 뺨을 때려오네

연이어 즐거움이 정자 가운데 있음을 알며

다음날 아침에는 거문고를 뜯고 싶은 마음이구나

말들은 사람의 행동과 얼굴색을 본뜨고

석양의 저무는 연기가 솟는다

버들가지 언 것을 끊어 정자 앞에 멈추어

정벌하는 채찍을 주어도 지니지를 못하고

이별한 후에야 당시의 추억을 망연히 간직할 뿐이네

혈색(血色)이 풀어지니 잦은 눈물이 흐르고

아름답던 머리는 쇠하는 나이에 이르렀도다

시(詩) 쓰는 붓은 아직 건장하건만

오랑캐의 글만 본뜨고 마네

가야금에 덧붙여 마음은 신선이 되어 춤을 추듯 하는데….”

 

구세여홍임이가명상도하시청지과기재야(九歲女興任以歌名聽之果奇才也)

“겁이 나서 사람을 부축해 돌다리를 건너니

아미와 머리채의 절묘함이 견줄 데가 없구나

하늘이 낸 미련한 지위는 능히 놀랄 자리로다

바람을 타는 노랫소리는 창으로 빠져 나가고자 하는데

두관(콩)의 첫 향기가 춘항(春巷)을 흔들고

부용(芙蓉)이 일찍 나와 추강(秋江)을 건너가니

처녀의 어리석음이 도리어 총명함을 의심하게 하니

말 그대로 푸른 원 50강(腔)이로구나”

 

증상산가기도화선(贈象山歌妓桃花仙;象山은 즉 谷山)

“문득 아름다운 이의 거문고 타는 옆을 지나니

수심 깃든 아미가 한눈에 나타나는구나

편벽되고 불쌍한 성품이 풍진(風塵)에 늙었구나

날지 못하는 도화여, 풀나무로 된 선녀로다

호수 위에 돌아오며 옛것을 읊으니

강남(江南)의 기뻐하던 이구년(李龜年)이로구나

새로운 곡조의 악보가 향기를 뿜어내고

그대의 부채는 가히 후왕(侯王)이 묵전(墨)을 맹세함을 기다리는구나”

 

상수기(桑樹技)

“오씨녀(吳氏女)는 일찍 과부가 되어 자식 하나를 두었으나

자식이 문득 병이 들어 위기에 처했도다

오씨가 그 자식의 죽음을 차마 보지 못하여

밤에 일어나 뽕밭에 가서 자살을 했네

이웃사람들이 그를 슬퍼하여 뽕나무 가지 노래를 지으니

지아비를 곡(哭)하고 어찌 또 아들을 곡하리오

스스로 뽕나무 가지에 몸을 매었구나

어미가 죽으매 자식은 자꾸 어미를 찾거늘

집안 사람들이 그를 위로하며 함께 탄식하도다

3, 4일 후 아이 병이 나아 명이 호전됨이 어찌 그리 늦지 않은가

부인의 단견이 이에 이르렀으니

청컨대 그대는 세상일을 좁게 보지 말라

아이를 위한 것이나 죽음을 위한 죽음이었으니

밤마다 음울한 바람이 뽕나무를 휘돌고

부엉이가 밤새 울어대니 참으로 가련하구나” (이상은 편집자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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