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규(李昇圭)
생물 연대 미상. 동아일보 기자, 조선어연구회 회원 역임.
1. 가세 및 유년시대
선생의 성은 정씨요 이름은 약용이요 자는 미용(美庸)이요 본은 압해(押海;羅州)니 영조 38년 임오 6월 16일에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草阜面) 마현리(馬峴里 ; 지금 양주군 瓦阜面 陵內里)에서 탄생하였다.
선생의 가세는 감사 호선(好善)의 5세손이요 참의 시윤(時潤)의 현손이요 목사 재원(載遠)의 아들로서 세세 문한가(文翰家)에서 출생하여 그 유전하는 재예는 도저히 타 종족의 비륜(比倫)1)할 바 아니다. 이때에 장헌세자(莊憲世子)의 변이 있어 부공(父公) 재원이 관(官)을 버리고 향리에 귀(歸)하였는데 마침 선생이 나므로 소자(小字)를 귀농이라 불렀다.
1) 비륜(比倫): 비교하여 같은 또래나 같은 종류가 될 만함.
마현의 지세는 한강의 상류인 열수(例水)의 위에 있으니 그 뒤는 장엄한 철마산이 솟아 있고 앞에는 초천이 광주 경안고역(景安古驛) 방면에서 북류하여 마현 앞에서 한강과 합류하고 또 단양, 충주, 여주, 양근 방면으로 좇아오는 남한강과 회양, 금성, 춘천, 가평을 지나오는 북한강은 마현의 위 고랑진에서 합류되니 마현은 세 강 합세의 절승(絶勝)한 곳이다. 그 산천의 명미(明媚)한 것은 경강(京江) 연안에서 보지 못할 바라.
그러므로 이 산명수려한 영수(靈秀)한 정기는 과연 절세 철인 정다산 선생을 孕育2)하게 되었다.
2) 잉육: 잉태하고 기름.
선생은 어려서부터 穎悟함이 절륜하여 4세에 천자문을 배우고 7세에 영산시(詠山詩)를 지었는데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려 멀고 가까움이 같지 않다” (편집자 역)3)
라 하였다.
3)“小山蔽大山 遠近地不同”
부공이 크게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아해의 두뇌가 명석하여 계획이 심히 밝으니 장래에 반드시 역법,산수에 능통하리라.”
하였다.
이해에 두역(痘疫)을 곱게 치러 일점 반흔이 없으되 오직 우미(右眉)에 반흔이 있어 중분(中分)되었으므로 삼미(三眉)라 자호하고 10세 전의 저작인 「삼미집(三眉集)」은 선배 장로의 경탄함을 마지 않게 하였었다.
9세에 모부인 윤씨의 상(喪)을 당하여 애훼(哀毁)함이 예(禮)에 지나고 이로부터 부공의 근엄한 교수를 받아 경사 시문에 전력을 기울여 심오한 연구를 이루고 15세에 홍화보(洪和輔)의 딸과 결혼하여 부공의 출사함을 따라 경성에 거주하였다.
16세에 이성호(李星湖) 선생의 유고를 배독(拜讀)하고 크게 감동한 바 있어 가로되
“나의 대몽(大夢)이 「성호문집(星湖文集)」 중으로부터 깨달음이 많다”
하였다.
2. 출사(出仕) 및 際遇
정조 7년 계묘 2월에 세자 책봉의 경(慶)으로 증광감시(增廣監試)를 뵈일새 선생이 22세의 묘령으로 경의초시(經義初試)에 입격하고 이어 4월 회시(會試)에 생원 입격이 되어 선정전(宣政殿)에 사은할새 상이 특히 명하여 거안(擧顔)케 하시고 연령을 물으시고 그 연묘학박(年妙學博)한 것을 탄상하셨다.
이 뒤로부터 선생이 태학에 있었더니 상이 중용 사칠이기(四七理氣)의 변(辨)과 퇴계·율곡 강설의 동이(同異)를 물으시니 동재(東齋)4) 諸生이 다 퇴계 사단이발설(四端理發說)을 주장하되 선생은 홀로 율곡 기발설(氣發說)을 주장하였더니 이어 그 강의를 진정하매 방의(謗議)가 화연(嘩然)5)하더니 그후 수 일에 상이 도승지 김상집(金尙集)에게 일러 가로되
“약용이 진술한 바 강의가 능히 유속(流俗)을 파탈(擺脫)하여 심학(心學)의 정곡을 득하였으니 다만 그 견해가 명확할 뿐 아니라 더욱 그 공심(公心)이 귀하다.”
하시고 드디어 괴선(魁選)에 두시었다.
4) 동재(東齋): 성균관이나 향교의 명륜당 앞의 동쪽에 있는 집. 유생들이 거처하여 책을 읽었음.
5) 謗議가 嘩然: 비방하는 소리가 떠들썩함.
이 뒤에 매양 태학과시(太學課試)에 선생이 문득 비발(批拔)6)을 몽(蒙)하였었다.
6) 비발(批拔):비점(批點)을 찍어 발탁함.
하루는 중희당(重熙堂)에 입시하였더니 상이 계당주를 취하여 오라 하시니 선생이 사양하고 음(飮)치 아니하니 상이 명하여 강음(强飮)하게 하시므로 선생이 대취한지라, 상이 잠시 후에 승지 홍인호(洪仁浩)를 불러 비밀히 한 책을 전하시며 가로되
“내가 약용이 장재(將才)가 겸유한 줄을 아는 고로 이 책을 특사(特賜)한다.”
하시거늘 선생이 배수(拜手)하고 집에 돌아와 본즉 「병학통(兵學通)」1편이라.
선생이 지우지은(知遇知恩)에 감격하여 문엄장에 정거(定居)하여 더욱 학술을 연구하여 천은을 보답코자 하였다.
정조 기유에 선생이 28세로 전시갑과(殿試甲科)에 괴선이 되어 직장(直長), 한림, 수찬 등 관을 역배하였고 임자 4월에 부공이 진주 임소(任所)에서 몰하매 선생이 관을 버리고 묘측(墓側)에 거려(居廬)하더니 이해 겨울에 상이 장차 수원에 성을 쌓을 때 그 후박고하(厚薄高下)를 다 경성의 제도와 같이 하되 견고한 것은 도리어 경성에 지나게 할지라.
상이 원래 선생이 경제에 밝은 줄을 아시고 급히 부르시니 선생이 부득이하여 경성에 들어와서 인중(引重)과 기중(起重)의 법을 조진(陳)하니 상이 그 법을 좇아 활차고륜(滑車鼓輪)의 제(制)를 응용하니 과연 편리함이 비할 데 없는지라.
7)활차(滑車):도르래.
상이 대희(大喜)하시어 연신(筵臣)에게 말씀하시되 기중의 일법은 이미 경비 4만 민8)을 감생(減省)하였다 하셨다.
8) 민: 돈꿰미.
이로부터 상의 권애(眷愛)가 날로 융성하여 동부승지와 병조참의를 초배(超拜)하시니 선생이 더욱 분발하여 치군택민(致君澤民)으로 그 임(任)을 삼아서 매양 연대(筵對)할 때에 국계민생(國計民生)의 이해를 세세히 진달(陳達)하니 상이 마음을 기울여 들으시나 동렬(同列)이 이로 인하여 시기가 일층 더하여 불측(不測)의 화고에 擠陷하고자 하였었다.
9)화고: 禍網
3. 치민(治民) 및 안옥(按獄)
정조 을묘 여름에 청국 소주인(蘇州人) 주문모(周文謨)가 조선에 와서 천주교를 선포하니 국중에 신도가 날로 불어가는지라. 조정에서 그를 사학(邪學)이라 지목하여 그의 포교를 엄금하였더니 평일 선생을 시기하던 사람들이 이 기회를 타서 선생이 서교에 침염(浸染)하였다 모함하니 거조(擧朝)가 흉흉한지라.
정조께서 어찌할 수 없이 선생을 곡산부사로 제수하시어 여러 讒口의 예봉을 피하게 하셨다.
선생이 辭陛할 때에 천안(天顔)이 불예(不豫)하시어 가로되
“내가 너의 심사가 광명함을 알아 장차 대용(大用)하려 하였더니 불의에 인언(人言)이 많아서 구설로써 다툴 수 없으니 아직 外邑에 가서 침묵을 지키고 있으면 1·2년 후에는 곧 소환하겠다.”
하셨다.
선생이 곡산군에 도임하니 곡산은 해서(海西)의 벽읍(僻邑)이라 지미(地味)가 척박하고 풍속이 편사(偏詐)하여 도저히 치화(治化)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겸하여 전부터 그 고을에 수목(守牧)이 된 이가 인순투타(因循偸惰)10)하여 공사(公私)가 다 퇴폐하여 가히 착수치 못하게 되었었다.
10) 因循偸惰: 옛 습관에 빠져 인정이 경박하고 게으름
선생이 개연히 탄식하여 가로되
“조정에 있으면 인군(人君)을 사랑하고 외읍(外邑)에 있으면 백성을 근심하는 것이 그 도가 일반이라, 어찌 안은 중히 여기고 밖은 경히 여기겠느냐.”
하고 이에 정당(政堂)을 세우고 민고(民庫)를 닦고 호적을 고치고 교육을 일으키고 군포(軍布)를 감하고 강도를 징집하고 민약전(民約錢)을 두고 겸제원(兼濟院)을 설치하여 다 정정히 조리가 있어 역사는 백성을 번요(煩擾)치 아니하고 경비는 관전을 소모치 아니하되 공사간에 패연(沛然)11)히 유족(裕足)하였다.
11) 沛然: 성대함.
이에 대하여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선생이 하루는 관아의 뒷산 기슭에 석간수 흐르는 것을 보고 인부를 데리고 그 하류에 평탄한 지점을 가려 방광형으로 땅을 파되 약 1장(丈)여나 깊게 하고 천기(天氣)가 혹한한 날을 택하여 그 지저(地底)에 유지를 깔고 물을 대어 약 7~8촌의 두께가 되면 수원(水源)을 돌리고 그 물을 얼렸다. 그 다음에는 빙상 위에 조강(糟糠;왕겨)을 펴고 또 유지를 깔고 전과 같이 물을 대어 얼렸다.
이렇게 하기를 5·6차 하고 최후에 그 위에 초막으로 덮어 두었다. 그 익년 여름 6월에 청국에서 사신 행차가 황해도를 경유하여 경성으로 향하는데 연로 각 관역(館驛)에서 음식을 판비(辦備)할 때 갑자기 빙편을 구하나 얻을 수 없어 극히 곤란 중에 있었다. 선생이 그 말을 듣고 즉시 곡산장빙(藏氷)을 풀어 보내어 음식물의 부패를 방비할 뿐 아니라 청사(淸使)일행이 청량음료로 해갈하여서 비상히 유쾌하였었다. 곡산빙으로 인하여 수입된 금전은 곡산군 공용으로 썼다 한다. 이러한 기적이 많으나 이루 기록할 수 없다.
그때에 황해감사 모(某)가 비국관문(備國關文)12)을 인하여 곡산 소미(小米) 7천 석을 징수할 때 그 대전으로 현 싯가의 배액을 책납하거늘 선생이 그 불가함을 논란하고 방보(防報)하여 거절하였더니 비국당상 정민시(鄭民始)가 입주(入奏)하되 외읍 수령이 감히 조명(朝命)을 항거하니 세고(細故)가 아니라 하여 나처(拿處)하기를 청하거늘 정조께서 그 원상(原狀)을 들어 보시고 하교하여 가로되
“옛적에 재부(財賦)를 맡은 이가 각지의 싯가를 세세히 알아서 구처(區處)가 득의(得宜)하여야 민을 이롭게 하고 국을 유(裕)케 하여 서로 폐해가 없는 것이거늘 경이 지금 가장 염(廉)한 곳을 가려서 그 배액을 징수하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약용이 항거하여 좋지 않는 것은 참 특비13)한 뜻을 저버리지 아니하였거늘 도리어 죄를 주려 하느냐.”
하셨다.
12) 관문(關文):조선조 때 상급 관청과 하급 관청 사이에 주고받던 공문서.
13) 특비 : 특별히 수여함.
선생이 곡산에 있은 지 3년에 염명공직(廉明公直)하고 또한 사기(事機)를 먼저 알아 일주(一籌)도 그릇되지 않으니 백성들이 사랑하기를 부모와 같이 하고 공경하기를 신명(神明)과 같이 하여 그 체임(遞任)할까 두려워하였다.
슬프다! 선생의 우도할계(牛刀割鷄)의 수완을 소소벽읍(小小僻邑)에 시험할 뿐이요 마침내 반근착절(盤根錯節)14)을 만나 대역량을 발휘치 못하니 어찌 천고 지사(志士)의 개탄할 바 아니리오.
14) 반근착절(盤根錯節): 처리하기 어렵고 엉클어진 곤란한 사건.
기미 4월에 선생이 병조참지로 입경하였다가 형조참의로 전임하였다.
정조께서 하교하시되
“지금 항한(亢旱)을 만나 서옥(庶獄)을 심리코자 하노니 향자(向者) 해서의옥(海西疑獄)이 있을 때에 두 번 사계(査啓)15)를 보았는데 그 글월이 다 그대 손에서 나왔다 하니 그 명확 절실하여 옥사에 숙련한 것은 도저히 장구(章句)의 유(儒)로는 미칠 바 아니므로 특별히 불렀다.”
하시고 형조판서 조상진(趙尙鎭)을 돌아보시고 이르시되
“경은 다만 베개를 높이 하고 참의에게 일임하는 것이 좋다.”
하셨다.
15) 査啓: 조사하여 올린 글.
선생이 명을 받아 여러 의옥을 심리하매 일변으로 청송(聽訟)하고 일변으로 판결하여 옥은 체수(滯囚)가 없고 백성은 원왕(兎枉)이 없어그 명민공결(明敏公決)한 것은 비록 추성(秋省)에서 늙은 자라도 다 스스로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
4. 피무(被誣) 및 竄謫
선생이 讒口를 만난 것은 하나는 선생의 재예가 출중한 것이요, 둘은 정조의 은례(恩禮)가 과도한 것이다. 때마침 서교(西敎)가 전포되매 여러 간사의 무리가 이를 부회하여 마침내 선생을 화망(禍網)에 몰아넣은 것이다.
선생이 비로소 서국(西國)의 서적을 보기는 23세 되던 해 갑진년 여름에 광암(曠庵) 이개를 좇아 두미협주(斗尾峽舟) 중에서 서국의 학문이 어떠한 것을 듣고 그에 경심(傾心)하여 그 서적을 보고 잠심 연구하였었다.
그 후 선생이 30세 되던 신해에 서교사건으로 간인(奸人) 이기경(李基慶), 홍낙안(洪樂安), 목만중(睦萬中)등의 무구(誣搆)16)가 있었으나 정조가 명촉(明燭)하시므로 무사하게 되었다.
16) 誣搆 : 무고하여 읽어맴.
선생이 34세 되던 을묘에 청인 주문모의 잠입 전교한 일이 발각되매 목만중, 박장만(朴長萬) 등이 선류(善類)를 함해(陷害)코자 하여 이가환(李家煥), 정약전(丁若銓;선생의 仲兄) 등을 사학(邪學)으로 소척(疏斥)한지라 정조께서 하유변무(下諭辨誣)17)까지 하셨으나 물의가 비등하므로 이가환은 충주목사로 선생은 금정찰방(金井察訪)으로 외출(外黜)하고 이승훈(李承薰 ; 선생의 매부)은 예산에 유배하였다.
17) 下諭辨誣: 하교하여 무죄한 사람을 골라 냄
정사(丁巳)에 간당(奸黨)의 사학구소(邪學搆疏)로 인하여 선생이 곡산부사로 폄직(貶職)되었다.
경신 6월 28일에 정조께서 승하하시니 목만중, 이기선 등이 이 기회를 타서 유언비어로 선생을 중상케 하므로 졸곡(卒哭)18)을 지난 후에 곧 향리에 돌아가서 형제가 단취(團聚)19)하여 경전을 강론하고 「노자」 도덕경의
“여(與)는 겨울에 내를 건너는 것과 같고, 유(猶)는 사린(四隣)을 두려워하는 것과 같다.”(편집자 역)
를 취하여 당호를 여유(與猶)라 하니 이는 외약(畏約)의 뜻을 보인 것이다.
18) 卒哭:삼우가 지난 뒤에 지내는 제사.
19) 단취(團聚): 한 집안 식구나 친한 사람들끼리 화목하게 한 데 모임.
순조 원년 신유 2월9일(선생 40세)에 소위 책롱(册籠)사건으로 발단된 서학안(西學案)에 좌(坐)하여 선생이 拿囚되었다가 장기에 유배되고 중형 약전은 薪智島에 유배되고 3형 약종은 피살되었다.
이해 10월에 '황사영(黃嗣永)의 백서(帛書)'사건이 발각되매 간인 홍휘운(樂安의 변명), 이기경 등이 백계 모함하여 선생 형제가 재차 입옥하여 무수한 악형을 받았다.
위관(委官)이 선생에게 묻되
“네가 네 형 약종이 서교를 주(主)하여 불궤(不軌)를 모(謀)하는 줄 알았느냐.”
선생이 필(筆)을 분(奮)하여 직서하되
“임금은 가히 속일 수 있되 신하는 임금을 속이지 못한다. 형은 가히 증언할 수 있되, 동생은 증언하지 못한다.” (편집자 역)
라 하였다.
위관이 반복 심문하여 그 참혹이 극도에 달한지라. 마침 정일환(程日煥)이 해서로부터 돌아와서 聲言하되 선생이 서토(西土)의 유애(遺愛)가 있으니 가살(可殺)치 못할 것이요, 또한 수초(囚招)에 나지 아니하였으니 발포(發捕)하는 법이 없고 또는 여러 대신(大臣)이 그 압수한 바 문서를 보매 예설이아설(禮說爾雅說)20) 및 그 시율(詩律)이 다 안한정상(安閑精詳)하여 적으로 더불어 교통한 증적(證跡)이 없다 하여 드디어 궐내에 들어가 그 무죄함을 주달(奏達)하였더니 이로 말미암아 그 죄를 경감하여 선생은 강진에, 그 중형 약전은 흑산도에 유배되었다.
20) 이아(爾雅):중국 고대의 사전. 또는 문장이나 말이 올바르고 아름다움.
선생이 강진에 유배되매 중형 약전과 동반하여 나주성 북 율정점(栗亭店)에 이르러 중형은 흑산도의 배소로 가고 선생은 강진으로 갈새 형제의 권연석별(眷戀惜別)의 정은 차마 서로 분수(分手)하기 어려웠다.
선생이 배소에 이르러 사관(舍館)을 정하려 한즉 다 문을 막고 들이지 아니하여 더우기 곤란한 지경에 빠졌었다. 홀로 성동(城東)에 병온(餠媼; 떡장사노파)이 그를 불쌍히 여겨 받아 거처하게 하였다.
선생이 거처하는 집은 매병(賣餠)하는 노파의 집이므로 방사(房舍)가 狹隘하여 심히 추루할 뿐 아니라 천예배(賤隷輩)가 조석으로 喧嘩하여 잠시를 내과(耐過)치 못할지라.
그러나 선생은 8년 동안을 안연(晏然)히 경과하여 便旋할 때가 아니면 일찌기 문 밖에 나오지 아니하고 서월(暑月)을 당한즉 소창(小窓)을 열어 통기하고 죽렴을 수(垂)하여 중간을 障蔽하고 筆硯과 서적은 극히 정제하여 일호(一毫)도 난잡치 아니하였다.
무진(선생 47세) 여름에 비로소 처사 윤박(尹博)의 산정(山亭)을 빌어 이주하니 이 산에는 산다(山茶)가 다산(多産)하므로 선생이 자호를 다산(茶山)이라 하고 대(臺)를 쌓고 못을 파고 화목을 열수(列樹)하여 종로(終老)의 뜻을 보이고 저서로써 낙을 삼아 세월을 보내었었다.
5. 유환(宥還) 및 퇴로(退老)
선생이 강진 배소에 있을 제 전후 18년의 긴 세월을 유유히 보내고 다만 서적과 화목으로 벗을 삼아 잠적21)한 정회(情懷)를 위로하고 있었다.
21) 잠적 : 눈물이 괼 듯 적막함.
순조 18년 무인에 외척 김조순(金祖淳)이 병정(秉政)하였더니 그의 족당인 김이교(金履喬)가 또한 강진에 유배되었다가 이해에 해배가 되어 환경(還京)할 길에 선생을 다산으로 방문하였다.
원래 이교는 선생과 동년이요 또는 한림 동료를 같이 지내어서 선생과 계분(契分)이 깊었었다. 이때에 서로 만나 보니 청춘의 용안이 거연(居然)히 수발(鬚髮)이 호백(皓白)하게 된지라.
집수 현연하고 일야(一夜)를 경과하매 이교의 심중에는 선생이 무슨 부탁할 말이 있을 줄로 알았더니 선생이 사분(私分)의 말은 일언도 언급치 아니하고 다만 범범(泛泛)한 붕교(朋交)의 정의를 말할 뿐이었었다. 이교가 떠날 때에 선생이 십리 밖까지 전송하거늘 이교가 다시 선생을 부르면서
“여보 영감이 나에게 할 말이 없소.”
선생이 이교의 수중에 가진 접선(摺扇)을 펴서 근체율(近軆律) 한 수를 써주었다.
“역정(驛亭)에 가을비가 송인(送人)을 더디게 하고
서로 찾아 누구와 함께 있게 되려나
반자(班子)가 신선이 되어 오르니 어찌 볼 수 있으리
이릉(李陵)이 한(漢)에 돌아가니 기대하기 어렵도다
일찌기 유사(酉舍)에서 붓글씨 쓰던 날을 생각하매
경자년의 타락함을 통절히 이야기 하던 때로다
외로운 대나무 떨기가 잔월(殘月)에 비추니
옛 동산에 머리 돌리니 눈물이 주르르 흐르네”(편집자 역)22)
라 하였다.
22)“驛亭秋雨送人遲 絶域相尋便有誰 班子登仙那可望 李陵歸漢竟無期 尙思酉舍揮毫日 忍說庚年墜刀時 苦竹數叢殘月曉 故園回首淚垂垂”
이교가 경성에 환귀하여 그 선자(扇子)를 가지고 김조순을 찾아가서 때마침 추절(秋節)임을 불구하고 선자를 펴서 슬슬 부치고 있더니 조순이 그 선면(扇面)에 쓴 시를 보고 놀라 가로되
“이것이 미용(美庸)의 시가 아니냐.”
하고 남천(南天)을 바라보고 추연한 빛이 있더니 곧 궐내에 들어가 순조께 주달하여 선생을 해배케 하였다. 선생이 9월에 다산을 떠나 10월에 마현리 본제(本第)로 환귀하였다.
선생이 18년 만에 마현 본제에 돌아와 보니 鄰里 친척이 다 영락하여 생존한 이가 별로 없고 다만 백형 약현(若鉉)이 오히려 무양(無恙)23)한지라.
23) 無恙: 몸에 탈이나 병이 없다는 뜻으로 흔히 웃사람에게 자기를 말하거나 또는 아랫사람의 안부를 물을 때 쓰는 말.
이로부터 다시 세사에 유의치 아니하고 그 형을 섬기기를 엄부와 같이 하여 그 신심을 위안하고 갈건야복(葛巾野服)으로 산수간에 소요하며 안한고결(安閑高潔)하여 광고(曠古)의 감(感)을 부치다가 헌종 병자(지금부터 104년 전) 2월 22일에 마현 본제에서 병졸하니 향년이 75세라. 마현리(지금 능내리) 후록(後麓) 자좌원(子坐原)에 장(葬)하였다.
융희 4년 경술 7월에 정헌대부 규장각 제학을 증하고 시(諡)를 문도(文度)라 하였다.
6. 저서
선생은 천자(天姿)가 총민하고 두뇌가 명석하여 제자백가의 책을 과목첩송(過目輒誦)24)할 뿐 아니라 일찍부터 서구의 서적을 섭렵하여 동서고금의 치란흥망(治亂興亡)과 정치, 법률, 경제에 연구가 깊어서 그의 포부를 세상에 응용코자 하나 남들의 시기가 많아서 도저히 실행할 가망이 없으므로 뜻을 세상에 끊고 평생에 경륜하던 바를 저술에 나타내서 후인을 각성하겠다 하고 전심 주력하여 저술에 착수하였다.
24) 과목첩송(過目輒誦): 한번 보고 곧 외움.
이것이 어찌 다만 선생의 불행일 뿐이리오. 반도(半島) 민중의 대불행일 것이다. 그 일생의 저술한 서적은 아래와 같다.
1. 모시강의(毛詩講義)12권
2. 모시강의보(毛詩講義補)3권
3. 매씨상서평(梅氏尙書平) 9권
4. 상서고훈(尙書古訓)6권
5. 상서지원록(尙書知遠錄) 7권
6. 상례사전(喪禮四箋) 50권
7. 상례외편(喪禮外篇) 12권
8. 사례가식(四禮家式) 9권
9. 악서고존(樂書孤存)12권
10. 주역심전(周易心箋)24권
11. 역학서언(易學緖言)12권
12. 춘추고증(春秋考證)12권
13. 논어고금주(論語古今注) 40권
14. 맹자요의(孟子要義) 9권
15. 중용자잠(中庸自箴)3권
16. 중용강의보(中庸講義補)6권
17. 대학공의(大學公義)3권
18. 희정당대학강의(熙政堂大學講義)1권
19. 소학보전(小學補箋) 1권
20. 심경밀험(心經密驗) 1권
이상은 경집(經集) 모두 232권
21. 시율(詩律) 18권
22. 잡문전편(雜文前編) 36권
23. 잡문후편(雜文後編)24권
24. 경세유표(經世遺表;未卒) 48권
25. 방례초본(邦禮草本) 43권
26. 목민심서(牧民心書) 43권
27. 흠흠신서(欽欽新書)30권
28. 아방비어(我邦備禦;未成)30
29.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 10권
30. 전례고(典禮考)2권
31. 대동수경(大東水經)2권
32. 소학주곶(小學珠串) 3권
33. 아언각비(雅言覺非)3권
34. 마과회통(麻科會通)12권
35. 의령(醫零) 1권
36. 민보의(民堡議)3권
37. 풍수집(風水集)3권
38. 문헌비고간오(文獻備考刊誤)3권
이상은 문집(文集) 모두 314권
상기한 총 목록을 합계하면 모두 546권의 대저작이다.
그외에도 조가찬집사업(朝家纂輯事業)에 대하여 선생이 직접 간접으로 참여한 일이 적지 않다. 예를 들면「사기영선집주(史記英選集珠)」, 「규장전운(奎章全韻)」, 「옥편(玉篇)」, 「두시교정(杜詩校正)」 등이다.
이러한 종류와 기타 민멸(滅) 혹은 산거(刪去)된 것을 전부 합산하면 현존 서량(書量)의 몇 배가 될는지 모른다. 이로 보면 우리 조선 선배의 저술계에 누구나 선생을 따르지 못할 것이다. 그 대역량 대규모는 과연 세인을 경탄케 하지 아니할 수 없다.
선생이 몰한 후에도 오히려 선생을 질투 증오하는 사람이 적지 아니하여 선생의 저서를 세상에 간행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조정의 정법(政法)을 맡은 관리나 지방에 인부(印符)를 찬 목백(牧伯)이 치민(治民), 안옥(按獄)을 할 때에는 선생이 저술한 「목민심서」, 「흠흠신서」 등을 가지지 않고서는 어찌할 수 없으므로 자기의 문생고리(門生故吏)를 시켜 다 모필(毛筆)로 등초(謄草)하여 침중홍보(枕中鴻寶)25)를 삼아 휴대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5) 침중홍보(枕中鴻寶):잠자리에서도 지니는 것처럼 귀한 보배.
그러나 한 사람도 이를 위하여 출판하여 줄 생각은 없었다. 오인은 과거 100년간에 세도와 인심이 이와 같이 편협하고 이와 같이 부패한 것을 개탄치 아니할 수 없다.
선생 몰 후 103년에 권태휘(權泰彙) 군의 고심참담한 경영으로 「여유당전서」가 비로소 신조선사(新朝鮮社)에서 간행되었으니 아마 선생의 유울(幽鬱)한 정령이 이로부터 구원에서 명목(瞑目)할 줄로 생각하노라.
7. 결론
옛적에 대산(臺山) 김매순(金邁淳)이 선생의 상서평(尙書平)을 평하여 가로되
“적은 것을 비추고 깊은 것을 파헤치는 것은 비위(飛衛)26)가 이를 보듯하고 분란함을 다스리고 딱딱함을 긁어내는 것은 포정(요리사)이 소를 잡는 것 같고 독한 손으로 간악함을 치는 것은 상앙(商鞅)이 위수(渭水)에 임하는 것27) 같고 정성으로 바른 것을 호위하는 것은 변화(卞和)28)가 형산(山)에서 우는 것과 같아서 한쪽으로는 공자(孔子)의 벽을 헐어(학문을) 바로잡는 공로가 있고 한쪽으로는 주자(朱子) 문하의 모독을 받는 굳센 신하 같으니 유림의 큰 업적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없다.”(편집자역)
라 하였으니 대개 대산의 이 평론이 다만 선생의 경학을 들어 말할 뿐이요, 그 지식이 천고를 통관(洞貫)하고 학문이 만류(萬類)를 포함하여 경국(經國)의 대지(大志)를 안고 의세(醫世)의 양수(良手)를 갖춘 것은 일언도 도급(道及)치 아니하였으니 이는 대산이 아마 선생의 온오(蘊奧)29)를 다 알지 못하여 그러한 것이다.
26) 비위(飛衛):활을 잘 쏘던 사람.
27) 상앙(商鞅)이 위수(渭水)에 임하는 것: 상앙의 형벌이 몹시 엄중하여 매일 많은 사람이 형을 받아 위수가 빨갛게 됨을 말함.
28) 변화(卞和):주나라 때 초왕에게 보옥을 헌상한 사람.
29) 온오(蘊奥): 학문의 심오한 이치.
선생이 건릉(健陵;정조능호) 치평(治平)의 때를 당하여 명량(明良)의 제우(際偶)가 가위 난득지회(難得之會)라 할지라.
그러나 마침내 굴(屈)하여 펴지 못하고 색(塞)하여 통하지 못하니 이것이 무슨 까닭인가.
온 세인(世人)의 농외30)한 가운데에 홀로 황종(黃鐘), 대려(大呂)를 가지고 희세의 대음(大音)을 연주코자 하니 누가 경괴(驚怪)치 아니하리오. 일조(一朝)에 암매(闇昧)한 일로 뇌옥(牢獄)에 체수(滯囚)되매 군간(群奸)이 이 기회를 타서 불측(不測)의 화연(禍淵)에 몰아넣으려 하니 선생이 이때에 일루의 생명을 득보(得保)한 것이 또한 천행이라 하겠다.
30)聾聵(농외): 귀머거리.
급기야 남황(南荒)에 찬축함에 유리신고(流離辛苦)하여 사신(死線)이 목전에 있으나 오히려 추호도 불평한 빛이 없고 옹용한아(雍容閑雅)하여 유연31)자득(油然自得)하니 선생의 평일에 수양한 바를 이에서 추측할 수 있다. 이는 하늘이 짐짓 선생의 양심을 궁곤케하여 학문에 정력을 다하여 후세에 수교(垂敎)32) 코자 함인가.
31) 유연(油然) : 생각이 일어남이 왕성함.
32) 수교(垂敎): 아래로 가르침을 전함.
만일 그렇다면 선생의 불행이 도리어 후생의 행복이 된다 할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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