小學集註(소학집주)

8-5-3-77. 외편 - 가언 - 광경신 - 第七十七章

耽古樓主 2024. 1. 15. 03:22

소학집주

胡文定公曰
人須是一切世味 淡薄 方好 不要有富貴相.
孟子謂堂高數仞 食前方丈 侍妾數百人 我得志不爲.
學者須先除去此等 常自激昻 便不到得墜墮 《胡氏傳家錄》
胡文正公이 말하였다.
사람이 모름지기 일체 세상의 맛에 담박해야 바야흐로 좋으니富貴相이 있음을 요하지 않는다.
孟子가 말씀하시기를, ‘의 높이가 몇 길이거나 음식이 앞에 사방 한 길쯤 진열되거나 侍妾이 수백 명임을 나는 뜻을 얻더라도 하지 않겠다.’라고 하셨으니배우는 자는 모름지기 먼저 이러한 것을 제거하고항상 스스로 격앙[분발]해야만 곧 타락함에 이르지 않을 터이다.”

【集解】
世味 如飮食衣服居室之類.
世味飮食·衣服·居室 따위이다.

淡薄 謂食取充腹 衣取蔽形 居室 取蔽風雨也.
淡薄은 음식은 배를 채움을 취하고, 옷은 몸을 가림을 취하고, 거실은 비바람을 가림을 취함을 이른다.

富貴相 卽所謂堂高數, 食前方丈, 侍妾數百人之類.
富貴相은 곧 이른바 의 높이가 몇 길이 되고, 음식이 앞에 사방 한 길쯤 진열되고, 시첩이 수백 명인 따위이다.

八尺曰仞.
여덟 자를 이라 한다.

方丈 謂食饌列於前者 方一丈也.
方丈은 음식을 앞에 진열함이 사방 한 길쯤 됨을 이른다.

除去此等 卽富貴相也
이러한 것들을 제거함이 바로 富貴相이다.

【增註】
激昻 猶奮發也.
激昻은 분발함과 같다.

墜, 墮 皆落也.
는 모두 떨어짐이다.

不以富貴爲事 常自激昻而爲善 則不淪於汚下矣
부귀를 일삼지 않고, 항상 스스로 분발하여 을 행하면 비루하고 낮은 데로 빠지지 않을 터이다.”

嘗愛 諸葛孔明當漢末 躬耕南陽 不求聞達 後來 雖應劉先主之聘 宰割山河 三分天下 身都將相 手握重兵 亦何求不得 何欲不遂 乃與後主言 成都 有桑八百株 薄田十五頃 子孫衣食 自有餘饒 臣身在外 別無調度 不別治生 以長尺寸 若死之日 不使廩有餘粟 庫有餘財 以負陛下 及卒 果如其言 如此輩人 眞可謂大丈夫矣.
항상 사랑하노니諸葛孔明이 나라 말기를 당하여 몸소 南陽에서 밭갈며 명예와 영달을 구하지 않다가後來에 비록 劉先主의 초빙에 응하여山河를 宰割[분할]하여 천하를 셋으로 나누어몸이 장수와 정승의 자리에 있고손에 중요한 병권을 잡았으니또한 무엇을 구한들 얻지 못하며무엇을 하고자 한들 이루지 못하겠는가마는 마침내 後主에게 말하기를, ‘成都에 뽕나무 8백 그루와 척박한 농지 15이 있어 자손의 衣食에 자연히 여유가 있으며은 몸이 밖에 있어 따로 경영하고 헤아림이 없었고달리 生業을 다스려서 한 자나 한 치도 늘리지 않았습니다만일 이 죽는 날에 곡간에 남은 곡식이 있고 창고에 남은 재물이 있어서 폐하를 저버리지 않겠습니다.’라고 하더니죽음에 이르러 과연 그 말과 같았으니이와 같은 사람은 진실로 대장부라고 이를 만하다.”

【集說】
陳氏曰
南陽 地名.
先主 漢昭烈也 嘗三顧武侯於草廬之中.
宰宰制 割分割.
三分天下 謂昭烈居蜀 曹操居中原 孫權居江南 分天下爲三國也.
都猶居也 握猶掌也.
成都 郡名 .
百畝爲頃.
饒 亦餘也.
躬耕南陽 若將終身 及爲將相 志惟興漢 孟子稱大丈夫 貧賤不能移 富貴不能淫 武侯有之矣.
陳氏가 말하였다.
南陽은 지명이다. .
先主나라 昭烈皇帝이니, 일찍이 草廬에서 諸葛武侯를 세 번 찾아보았다.
는 나누고 제어함이요, 은 분할이다.
三分天下昭烈에 있고 曹操가 중원에 있고, 孫權이 강남에 있어서, 천하를 나누어 세 나라로 만듦을 이른다. .
와 같고, [관장함]과 같다.
成都는 고을 이름이다.
百畝이라 한다.
는 또한 남음이다.
몸소 南陽에서 농사지어 장차 일생을 마칠 듯이 여기더니, 장수와 재상이 됨에 이르러서는 오직 나라를 일으킴에 뜻을 두었으니, 孟子가 대장부를 일컬어 빈천이 <그 절개를> 옮기지 못하고, 부귀가 <그 마음을> 방탕하게 하지 못한다.’라고 하셨는데, 武侯에게 그것이 있었다.”

【集解】
調度 營計也
調度는 경영하고 헤아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