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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文章/조선명인전

77.조선-윤선도(尹善道)

구글서생 2023. 5. 16. 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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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윤선도(尹善道)

 

조윤제(趙潤濟)
1904~1976. 국문학자, 문학박사. 호 도남(陶南), 경북 예천 생, 경성제대 조선문학과졸업. 서울대, 청주대, 영남대 교수와 학술원 회원 역임. 진단학회(震檀學會) 결성에 참여, 국문학 연구에 있어 실증주의의 초석을 놓고 나아가 민족사관의 학풍을 확립.
저서에 「조선시가사강(朝鮮詩歌史綱)」, 「한국시가의 연구」, 「국문학사」 등이 있음.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 혹은 해옹(海翁)이라 하는 전라도 해남인이다.

선조 20년 6월 21일에 한경(漢京)에서 탄생하니 어려서부터 자품이 특이하고 총명이 과인(過人)한 데다가 또 학을 좋아하여 경사백가(經史百家)를 통하고 의약, 복서(卜筮), 음양, 지리에 능하였다. 그 위에 지신(持身)이 엄숙하여 아직 10여 세에 산사에서 사승이 수륙대회(水陸大會)를 열어 유석(儒釋)이 온통 구름같이 모여 떠들어도 본체만체하고 글만 읽고 앉았었다 하며 또 성(性)이 강의(剛毅) 정직하여 부귀도 그 마음을 가히 움직이지 못하였다 한다.

 

별로 사우(師友)는 없었으나 성현의 유훈을 존신(尊信)하고 선유(先儒)의 유서에 유심하여 심사추구(尋思推究)하되 훈고문자에 구애함이 없이 스스로 자득하는 묘가 많았고 어렸을 때부터 노년에 이르도록 종시 소학을 패복(佩腹)하여 항상 동강도(董江都)의 말을 외우며 그 의(誼)는 밝히되 그 이(利)는 꾀하지 않고 그 도(道)는 밝히되 그 공(功)은 헤아리지 않는 이것은 군자의 지심처사(持心處事)의 요긴한 점이라 하였다 한다.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한 것은 공의 25세 때였으나 때는 바야흐로 광해정난(光海政亂) 때로서 얼신 이이첨(李爾瞻)이 국병(國柄)을 잡고 선류(善類)를 함해(陷害)하며 당여(黨與)를 광식(廣植)하여 그들에게 촉범(觸犯)하는 자면 모두 찬축을 당하는 지경이었었다.

공은 아직 포의(布衣)의 사(士)이나 세록지가(世祿之家)에 나서 이것을 그냥 보고 있을 수 없어 초야로부터 이첨의 전권난정(專權亂政)의 상(狀)이며 의정(議政) 박승종(朴承宗)과 국척(國戚) 유희분(柳希奮)의 망군부국(忘君負國)의 죄를 수천 언으로써 극언 항소하여 조야를 놀라게 하였다.

그 말이 심히 격절(激切)하여 대신이 모두 두려워하고 이첨도 감히 발언하지 못하였으나 그러나 이로 하여 도리어 이첨 등에게 먹히어 경원(慶源)으로 유배를 당하고 말았다. 때는 바로 공(公)의 29세 때였었다.

 

공은 이 명(命)을 듣고 태연히 나아가 배소에 이르니 이곳은 북도극변(北道極邊)의 땅이요 경성으로부터 2천여 리나 되는 곳이라, 풍기(風氣)가 절수(絶殊)하고 식도(食道)가 또한 곤란하여 속반(粟飯) 채갱(菜羹)1)을 먹되 공은 오히려 안여(晏如)하였고 다만 두문(杜門)하여 독서로 일을 삼았으며 때로는 구학(丘壑)을 소요하여 우국(憂國) 사친(思親)의 감회를 음영(吟詠)하고 지냈다.

1)채갱(菜羹): 나물국.

 

그러나 그때는 언사(言事)로 북천(北遷)하여 있는 사류가 공만이 아니었었다. 이첨 등이 또한 이것을 불쾌히 여겨 남천(南遷)을 시키니 공은 이번에는 기장(機張)으로 옮아 여기서 멀리 친상(親喪)의 부고를 받게 되었다. 효성이 지극한 공은 곧 제수를 갖추어 궤연(几筵)에 송전(送奠)하여 제문을 지어 그 지통(至痛)을 펴니 보는 자가 애감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한다. 그러자 인조반정이 되어 제수(諸囚)를 방석(放釋)하자 공도 풀리어 금오랑(金五郎)으로 소환을 받으니 謫居 실로 8년간이었다.

 

공은 벌써 관계에 뜻이 없어 미기(未幾)에 관을 파하고 향리 해남에 돌아가 이래 5·6년간 조용히 배소의 피로를 휴양하며 가정의 친(親)을 두터이 하였더니 인조 6년에는 다시 봉림(鳳林;후일의 효종)·인평(麟坪)양대군의 사부(師傅)로 택선되어 상경하였다. 공의 강학(講學)은 극히 엄정하여 교훈하기를 소학으로써 근본을 삼고 과정(課程) 규모의 차례는 한갓 고인(古人)의 성법(成法)을 좇아 격치함양(格致涵養)으로 힘을 썼다. 뿐만 아니라 반드시 옛 공자(公子)의 득실선악(得失善惡)을 끌어 반복 진설(盡說)하니 인조 더욱 공을 신임하여 임기가 그쳤으나 다시 5년을 겸찰(兼察)케 하였다.

 

여기에 공의 득의 있는 환로가 열리어 호조좌랑에서 공조정랑에 아승(俄陞)하고 따라서 사복 첨정, 한성 서윤에 취승(驟陞)하였으며 인조 11년에는 증광별시(增廣別試)에 급제하니 곧 세자시강원문학(世子侍講院文學)이 되었다. 그러자 공을 질시하는 자가 생겨 비어(飛語)를 만들어 함해코자 하였으므로 종환(從宦)에 뜻을 끊고 향리에 돌아가고자 하였더니 또 성주현감(星州縣監)에 피임되어 외관으로 많은 공적을 남기고 사유로 해서 인조 13년에는 귀향 두문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 익년은 곧 역사에 유명한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인조대왕은 난을 남한산성으로 피하시고 빈궁(嬪宮)과 원손대군(元孫大君)은 강도(江都)로 향하여 성세 위급(聲勢危急)을 고하였다. 공은 본래 애국·애군지사 이러한 위급을 보고 편안히 향리에서 자리를 뜨뜻이 하고 있을 수 없었다. 곧 향리 자제와 가복(家僕) 수백을 모아 주야주행(晝夜舟行)강도로 향발하였으나 이르렀을 때는 벌써 강도가 함락하고 말았었다. 분노를 참지 못하여 이번에는 다시 해남으로 돌아와 남한(南漢)으로 가려 하였더니 해상에서 이미 성하(城下)에 화의(和議)가 정해지고 대가(大駕)는 치도(置都)하셨다고 들리었다.

 

애국의 열정에 타는 공은 이러한 치욕의 보(報)를 그냥 듣고 있을 수 없어 배에서 내리지도 않고 그 길로 탐라에나 들어가 두 번 이 세상의 하늘을 아니 보려 결심하고 배를 그쪽으로 몰아갔었다. 그랬더니 노차(路次)에 보길도를 지나매 峯巒이 수려하고 洞壑이 심수(深邃)하였으므로 배를 멈추고 올라가 두루 살펴보니 과연 천석(泉石)이 절승한 상외(想外)의 가경이었다. 그러면 탐라까지 갈 것이 없다 하고 이곳을 부용동이라 명명하여 낙서재(樂書齋)를 축실하고 종로지지(終老之地)로 정하여 버렸다.

그리하여 여기서 자의음영(恣意吟詠)하면서 세상을 잊으려 하였더니 그 익년인 인조 16년에는 또 질공(嫉公)하는 조신(朝臣) 간에 출처진퇴(出處進退)의 논이 일어나 영덕(盈德)으로 유배를 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번은 그 익년에 곧 방치가 되었으므로 집에 돌아와 가사를 아자(我子)에 맡기고 수정동에 복축(卜築)2)하여 있다가 다시 문소(聞簫),김쇄(金鎖) 양동(兩洞)을 얻어 그 천석에 한처(閑處)할 수 있었다.

2) 복축(卜築):살 만한 땅을 가려서 그곳에 집을 지음.

 

그랬더니 불의에 인조께서 승하하시고 효종대왕이 즉위하시니 공은 본래 효종의 대군 때 사부라 곧 소(疏)로써 병으로 분곡(奔哭)치 못하였음을 사죄하고 또 시정(時政)을 논하여 현도(縣道)를 경유하여 올렸더니 감사 이시만(李時萬)이 각하하고 말았다.

 

여기에 공은 그 아들 인미(仁美)를 제궐(諸闕)시켜 상정(上呈)하고 또 겸하여 見却代呈3)하게 된 일을 상소하였다.

3)견각(見却): 남에게 거절당함.

 

효종은 이에 대하여 우비(優批)한 해답을 주고 석일(昔日) 사부의 공을 말씀하시고 또 수이 만남을 약속하셨다.

여기에 기공배(忌公輩)들은 다시 공의 복용(復用)을 겁내어 그 자식을 보내어 투소(投疏)하는 것은 은연히 조정을 탐시(探試)코자 함이니 가히 나국정죄(拿鞫定罪)할 것을 청하였으나 효종은 그를 들어 주지 않았고 도리어 공의 경학의 높음을 생각하셔서 사예(司藝)로써 특소(特召)하셨다.

 

공은 소명을 받고 상경 배알하매 대왕은 크게 기뻐하시어 특히 승지를 제수하시며 경연에 참여하라 명하셨다. 그러나 상의(上意)가 권권(眷眷)4)할수록 반대파의 기질(忌嫉)함은 더욱 심하여 공의 신변은 점점 위험하여졌다.

4)권권(眷眷): 늘 마음 속에 잊지 않고 있는 모양.

 

이것을 본 공은 오래 있음이 불리할 것을 알고 정세 위박함을 상소하여 해골(骸骨)을 빌었더니 효종은 이를 허하지 않았다. 허하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예조참의에 특진시키고 속히 취직하기를 명하였다. 이렇게 되니 공은 더우기 어려워 그 모진(冒進)할 수 없음을 상소하고 전개(鐫改)5)하기를 청하였으며 또 외천(畏天), 치심(治心), 변인재(辨人材), 명살벌(明賞罰), 진기강(振紀綱), 파붕당(破朋黨), 강국유도(强國有道), 전학유요(典學有要)의 시무8조(時務八條)를 올렸다.

5) 전개(鐫改):관등을 강등시킴.

 

그럴수록 효종의 공을 아끼는 마음은 두터워 곧 비답(批答)하여 말씀하기를

“경의 소사(疏辭)를 보니 실로 나라의 대경대법(大經大法)이 구재(具在)하여 언언(言言)이 절실하고 자자(字字)이 근간(勤懇)에 재삼 읽었으나 그칠 줄 모르겠노라.

내 비록 불민하여 감히 복응치 못하겠으나 따라 소장(疏章)을 올리어 나의 과실을 공(攻)하여 불체(不逮)를 보하는 것이 소망이니 속히 나가 찰직(察職)하라.”

하셨다.

6)批答: 상소에 대한 임금의 下答.

 

그러나 공은 종시 나오지 아니하고 또 한편 반대파는 공을 함해함이 심하였으므로 상도 부득이 그 환향(還鄕)을 허하시고 말았다.

 

그후 또 중궁(中宮)의 병환으로 소명을 받아 상경하여 첨지 중추부사에, 또 특명으로 공조참의에 제수되니 이때는 당쟁이 더욱 치열할 때라 공을 무해(誣害)코자 하는 자 또한 속출하여 사람의 사관(仕官)에 어찌 매양 특명으로만 하느냐고까지 하는 사람이 있어 대왕께서도 할 수 없어 체직(遞職)을 허하셨으나 때는 공에 질환이 있고 또 질기자(嫉忌者)가 공연히 위어(危語)를 만들어 내어 무해코자 하였으므로 드디어 남귀(南歸)하지 못하고 고산(孤山)에 초사(草舍)를 창건하여 머물러 있었더니 마침 송준길(宋浚吉), 이단상(李端相) 등의 정개청(鄭介淸) 추무(追誣)와 그 손자 국헌(國憲)의 송원소서(訟寃疏書)의 정원(政院)각하사건이 일어났다.

여기에 공은 그 통분을 참지 못하고 유선수무(儒先受誣)와 옹폐성총(雍弊聖聰)의 일로 수천 언의 상소를 하게 되자 공의 공척(攻斥)은 일시에 폭주하여 효종도 부득이 그 직(職)을 파하고 말았다. 그러자 그 익년효종께서는 갑자기 승하하시고 현종이 즉위하시게 되었다.

 

고산은 효종의 우예(優禮)를 받은 신하였었다. 효종의 승하는 공의 신상에 적잖은 변화를 가져왔으니 대왕이 승하하시자 곧 여기 2대 문제가 일어나게 되었다.

즉 하나는 산릉(山陵)문제요 하나는 조대비의 제복(制服)문제였으나, 첫째 산릉문제는 먼저 수원으로 정하였던 것을 불가라 하는 자가 있고 또 마침 이상진(李尙眞), 기중윤(奇重胤) 등이 건원릉(健元陵) 내강(內岡)을 천(薦)하였으므로 공은 특명에 의하여 간산(看山)하고 돌아와서 그 국용(國用)에 합당치 못함과 수원을 그냥 쓸 것을 주상하였더니 여기에 대신 3사(三司)와 송시열(宋時烈), 송준길 등의 일대 반대론이 일어나 드디어 인산(因山)은 건원릉 내강으로 정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 후에 능 위 봉수(封樹)의 경비(傾圮)로 인하여 능침은 다시 여주 홍제동으로 모시게 되었다.

7) 경비(傾圮): 한쪽으로 무너짐.

 

산릉문제는 대강 이리하여 해결되었으나 그 다음 조대비 복제문제는 용이히 그 해결점을 발견하지 못하고 문제는 다시 정치적으로 전개하게 되었으니 원래 이 문제는 효종대왕이 次子로서 대위에 올라 왕통을 계승하였기 때문에 조대비는 적자의 예로써 3년복을 입어야 하겠느냐, 서자의 예로써 기년복(朞年服)을 입어야 하겠느냐 하는 것이다.

송시열, 송준길 등 노론파는 체이부정(體而不正)의 설을 끌어 효종대왕은 인조대왕의 서자이니 마땅히 서자의 예로 기년복이 가하다는 것이고 고산 등 남인파에서는 종통(宗統) 적통(嫡統)은 나누어서 둘로 할 수 없으니 적자의 예로 3년복이 가당하다는 것이다.

쌍방의 논쟁은 점점 치열하여 고산은 상소로써 항쟁하였으나 그 말이 너무 과격하고 또 선왕(先王)에 범(犯)함이 있다 하여 드디어 삼수(三水)로 유배를 당하였다. 당시 공은 73세였으나 조금도 난색을 보이지 않고 배소에 이르러 사람에게 편지를 부쳐

“죽지 않고 배소에 도달하니 도형(徒刑)이 아닌 천행(天幸)으로 실로 임금의 은혜를 입음이요, 위로는 하늘이 있음을 볼 수 있고 아래를 보면 땅이 있으니 일월성신과 언덕 또한 내 나라 같구나.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을 보더라도 부자군신의 예가 있음을 알겠으니 이만하면 노년을 보내기 족하리오.”(편집자 역)

라 하였다.

공의 늠름한 태도를 가히 볼 수 있을 듯하나 삼수는 조선 최악의 지방이라 신축년의 天旱으로 북청(北靑)에 이배하려 하였으나 송시열 등의 반대로 이루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대간이 또 일어나 도리어 위리(圍籬)를 가하고 말았다.

 

그후 또 가뭄으로 인하여 광양(光陽)에 이배되어 여러 번 경사(慶赦)가 있고 또 심리도 있었으나 끝내 송시열, 홍명하(洪命夏) 등의 반대로 석방되지 못하다가 현종 9년에 이르러 겨우 석방되니 그때 나이 81세였다. 아직 정신 기력과 시청언동(視聽言動)이 쇠하지 않고 여년(餘年)을 한적자오(閑適自娛)하다가 미양(微恙)8)으로 낙서재에서 세상을 버리니 향년이 85였다.

8)微恙: 가벼운 병.

 

그후 세상은 다시 뒤바뀌어 남인의 천지가 됨에 숙종 을묘에는 이조판서에 추증이 되고 충헌(忠憲)이라 시(諡)하였다.

 

이상은 대강 그의 시장(諡狀)9)에 의하여 공적(公的) 고산의 약력을 말하였으나 마침 당쟁이 자못 치열한 시대에 나서 직언감간(直言敢諫)하는 그의 성격이 전후 18년의 생애를 배소에서 보내게 하였다.

9)시장(諡狀):재상이나 학자들에게 시호를 주려고 관계자들이 의논하여 임금에게 아릴 때에, 그가 살았을 때의 한 일들을 적은 글발

 

고산을 위하여는 실로 동정하지 않을 수 없으나 포의(布衣) 때부터 치군택민과 애군애국으로 자임(自任)하는 그에게는 그 시대에 또한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 다시 관점을 돌려 그의 사적 생활에 대하여 말하여 보자.

먼저도 말한 바와 같이 공은 지신(持身)이 극히 엄숙하여 평거(平居)에도 반드시 의관을 정제하고 종일토록 단좌하되, 의측10)하는 일이 없으며 음식 기거가 모두 항절(恒節)이 있어 비록 자제 僕妾이라도 낮에 누워 있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한다.

10) 倚仄 : 기울어짐.

 

또 위의가 장중하고 도량이 침홍(沈弘)하여 보는 사람이 무서워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하며 학문은 소학파의 계통을 받아 기묘사화 후 세상을 들어 소학을 대금(大禁)하고 부형이 또 그 자제에게 경계하였으나 공은 여기에 학문의 원리가 있음을 신념으로 가지고 비록 연장자라도 글을 가르칠 때는 반드시 「소학」을 선수(先授)하고 그런 연후에 「대학」, 「논어」, 「맹자」, 「중용」, 「시」, 「서」 6경에 미쳤으며 노장서(老莊書) 등의 소위 이단 서류는 일절 이를 척거(斥去)하였다. 그리고 자제 문인의 교도는 자자불권(孜孜不倦)하여 적소에 있을 때도 내학자가 있으면 선지(先知)로써 후지(後知)를 각(覺)하고 선각으로써 후각을 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여 거절하지 않았다 한다.

 

그러면 다음에 고산의 일생을 통해 볼 때 공은 정치가였던가 도학가였던가 문학가였던가.

전기(前記) 그의 전기(傳記)로 보건대 그는 당쟁의 와중에 뛰어들어가 당당한 남인의 투사로서 송시열 일파와 싸우고 나왔으니 정치가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고래(古來)의 학자에 누가 정치가적 색채가 없는 이가 있었을까 하고 보면 그를 단순히 정치가로서만 두고 볼 수는 없다.

오늘날 그의 유저로서 남은 「고산집」 6권에 의하여 다시 그의 학적 공적을 살펴보면 예설(禮說)을 비롯하여 도학에 대한 서한 왕래를 볼 수 있고 또 시문, 詞章의 조예가 있음을 능히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로써 또 그를 곧 도학자라 문학자라 하기는 아직 주저하지 않을 수 없을 듯하니 그러면 결국 고산은 평범한 고한학자(古漢學者)라는 데에 지나지 못하였던가.

물론 고산은 이 의미에 있어 평범한 한학자에 지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의미에 있어 고산을 문학자라 이름부를 수 있으니 그는 곧 우리 조선 문학에 있어서 단연 두각을 나타내고 일반 작가에 뛰어났다는 것이다.

 

원래 고산은 일반 한학자와 마찬가지로 경학 1위 문학 2위의 고집에서는 탈출하지 못하였다. 사부 당시에 효종대왕에게 시를 설명한 말 가운데도

“시란 성정(性情)을 읊은 까닭에 정신이 흘러야 하므로 알지 못하고서는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시골 백성들의 사물의 법칙을 따르는 것과 유관하다.

독서의 유리함이나 행서(行書)의 이익됨은 시골 사람들의 물정과 세태를 잘 말해 주는 것이어야 한다. 많은 기록의 자료를 취하고 두루 보아 악을 경계하는 것이 부족하지 않았는지, 선을 본받는 것에 부족됨이 없었는지 보아야 하니 이 모든 것이 정자(程子)가 이른바 한정한 언어로 보는 데 부족함이 없는 바이다.” (편집자 역)

라 하였거니와

조선의 시가 특히 시조 단가에 있어서는 누구도 그의 추수(追隨)함을 허하지 않았다.

오늘날 남은 그의 작품으로는 〈유회요(遺懷謠)〉, 〈우후요(雨後謠)〉, 〈산중신곡(山中新曲)〉, 〈산중속신곡(山中續新曲)>, <어부사시사(漁夫四時詞)>, 〈몽천요(夢天謠)〉 등이나 이들은 모두 그의 대작(大作)으로 일독 일음(一讀一吟)에 가히 아협(牙頰)간에 그 신의(新意)를 맛볼 수 있다.

 

고산의 시가적 생활이 시작되고 또 경영된 것은 홍우원(洪宇遠)이 그 시장에서

“병자(丙) 후에 다시 세상에 뜻이 없어 인사(人事)를 사절하고 산을 찾고 바다를 찾아 물 좋은 경승을 택하여 거처하다.

흐르는 물을 끌어 나무를 심고 그 위에 정자를 지어 산수지락(山水之樂)을 즐기다.

가야금과 피리를 두고 노래와 춤을 익히도록 했으며 맑은 가락 늘어진 가락을 때때로 감상하여 들으니 그로써 회포를 의탁하고 우울을 달랬다. 또한 산중신곡, 어부사 등을 지으니 이로써 그 뜻을 알 수 있다.”(편집자 역)

라 이른 바와 같이 병자 이후 진세(塵世)에 낙을 얻지 못하고 산간수변(山間水邊)에 그 뜻을 구해 자연과 상부상침(相浮相沈)하던 때인 듯 싶은데

고산 자신도 「금쇄동기(金鎖洞記)」에서 저간의 생활을 말하여

“표표히 세상을 버리고 독립해서 우화등선하는 뜻을 갖게 하지마는 부자군신의 윤리에 벗어나게 하지 않게 하고 조수경산지훙(釣水耕山之興)과 탄금고부지락(彈琴鼓缶之樂)을 갖게 하지마는 또한 자기의 전철(前哲)의 방촉(芳觸)을 경앙(景仰)케 하고 선생의 유풍을 가영(歌詠)케 한다.”

하였다.

그러한 생활은 저절로 그를 시가 작가에 유도하였을 것은 의심할 수 없거니와 그는 항상 자연에 취재하여 그에 몰입하고 평소에 다작은 힘쓰지 않았다.

홍우원도 그 시장에

“평생 음영 저작을 좋아하지 아니하고 물음이 있으면 답하고 일이 있으면 술회하다.”(편집자 역)

라 이른 바와 같이 그 저작을 아끼고 울분을 푸는 정도에 마친 듯하다.

그러나 한번 붓을 들어 창작을 시작하면 전인(前人)을 답습하지 않고 신의(新意)를 창립하여 나갔으니 여기에 고산의 시가는 종래의 시가에서 일층 새로운 맛을 가져오게 되었다.

 

지금 그 작품을 일음(一吟)하여도 알 바와 같이 실로 자연은 고산에 의하여 일층 이해되고 또 일층 그 미를 발휘한 듯하며 조선어는 그에 의하여 일층 그 예술적 가치를 발견한 듯한 느낌이 있다.

그래서 김수장(金壽長)은 「해동가요」에 그의 작품을 평하여

“이 노인이 노래 부르는 법은 세속을 떠난 듯 맑고 고고하니 내가 보건대 이러한 법은 만장(萬丈)의 봉우리를 어렵게 오르는 것과 같다.”(편집자역)

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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