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기(李秉岐)
1891~1968. 시조시인, 국문학자, 수필가. 호 가람(嘉藍). 전북 익산 생. 한성사범을 거쳐 조선어강습원을 수료. 조선어연구회를 조직했으며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위원, 서울대, 단국대 교수, 학술원 임명 회원 등을 역임.
저서에 「국문학전사(國文學全史)」, 「역대시조선(歷代詩調選)」,「시조의 개설과 창작」, 「국문학개론」 등이 있으며 시조집으로 「가람시조집」, 「가람문선」 등이 있음.
중종 때에 윤상공(尹相公) 은보(殷輔), 남공(南公) 효의(孝義) 등이 현량(賢良)으로 추천하여도 굳이 사양하고 다만 진사로 늙어 죽은 신명화(申命和)는 본디 평산(平山)의 대성(大姓)으로서 세업을 혁혁하게 이어왔으나 천성이 순실(淳實)하고 지조와 기개가 있다. 어려서부터 독서를 하되 詞章만 읽는 것이 아니라 그 선악으로 권계를 삼아 식궁(飾躬)1)하기에 급급하였고 비례(非禮)와 비의(非義)의 행동을 아니하여 항상 그 규범을 지녔다.
1) 식궁(飾躬): 몸을 닦음.
그리고 그 부인 이씨도 용인망족(龍仁望族)으로 법도가 있는 가정에서 생장한바 마음이 유화하고 순정하며 어려서 삼강행실(三綱行實)을 읽어 그 대의를 깨치고 커서 시가에 들어와 효봉(孝奉)과 승순(承順)을 다하여 부인의 도리를 알뜰히 하였다. 과연 신진사는 한 개결(介潔)한 선비요 이씨는 현철(賢哲)한 부인이다.
“양자의 아름다움이 서로 합하고 예의와 공경이 지극하게 갖추어짐(兩美相合 禮敬備至)”
이라는 칭송을 받을 만하였다.
신 진사와 이씨와는 이러한 좋은 가정을 이루고 수려한 관동 승지요 대도호(大都護)인 강릉에서 살았다. 강릉은 워낙 최씨의 고을이다. 최씨는 신 진사 부인의 외가인바 이곳에 살게 된 것도 이런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신 진사는 나이 그 부인보다 4년이나 위였으나 47세밖에 못 살고 그 부인은 그 갑절을 더하여 90세나 살았으며 아드님은 한 분도 못 두고 따님만 다섯을 낳아 길렀다.
신사임당은 그 둘째 따님으로 연산주 10년 갑자 겨울 10월 29일 강릉에서 낳았다. 천생이 온아하고 영혜 (英慧)한 자질로 이런 가정의 훈도와 훈육을 받으며 어릴 때부터 경전을 통하고 속문(屬文)2)을 잘하고 한묵(翰墨)을 능란히 하고 또 침선과 자수까지라도 다 정묘하였다.
2) 속문(屬文): 문장을 지음.
그러나 지조가 정결하고 거도(擧度)가 한정(閒靜)하고 일을 안상(安詳)하게 하고 입이 뜨고 조심성이 많고 그리고 퍽 겸손하며 효성도 지극하여 부모의 병환이 있을 때면 얼굴빛도 틀리다가 병환이 나아서야 비로소 회복이 된다.
신 진사가 여러 따님 가운데 가장 이 따님을 애중하였다.
그 나이 열 아홉 되던 해 용재(容齋) 이행의 종질이 되는 이원수(李元秀)와 결혼을 하였다. 그 전해 조정에서 처녀들을 광선(廣選)한다는 풍설이 떠돌아 만구(萬口)가 흉흉하고 처녀를 둔 집에서는 되는 대로 혼처를 구하여 함부로 지내며 비록 사대부의 집이라도 그 예를 갖추는 이가 없되 신 진사만은 도리어 그런 걸 분개히 여기고 조용히 예대로 납폐(納幣)를 한 것이다.
그리고는 그 사위 이원수더러
“내 딸이 많은데 다른 딸은 집을 떠나가더라도 그다지 그리울 것이 없으나 네 아내만은 내 곁을 떠나게 할 수 없다.”
하고 그뒤 얼마 안 되어 신 진사는 죽었다. 그 상례를 마치고 사임당은 신부례를 하여 한성(경성)에 와 그 시어머니 홍씨를 보았다. 하루는 종족이 모여 잔치를 하는바 여자 손님들이 다 웃고 이야기를 하되 사임당은 홀로 묵묵히 있다.
홍씨가 가리키며
“신부는 어찌 말을 아니하느냐.”
한즉 무릎을 꿇고 옷깃을 가다듬어
“여자가 문 밖을 나지 못하여 한 가지도 본 것이 없사오니 무엇을 말씀하리까.”
하매 좌중이 다 부끄러워하였다.
그후 강릉으로 근친을 갔다가 돌아올 때 그 자친(慈親)과 울며 이별하고 대령(大嶺)에 이르러 북평(北坪)을 바라보고는 그리운 눈물을 겨워 오랫동안 머뭇거리다가
“늙으신 어머니는 강릉에 계신데
이내 몸은 서울을 행하여 가는도다
머리를 돌이켜 북촌을 바라보노니
흰구름은 날아 내리고 저문 뫼는 푸르도다”3)
하는 이 시를 지었다.
3)“慈親鶴髮在臨瀛 身向長安獨去情 回首北邸時一望 白雲飛下暮山靑”
그때 서울집은 수진방(壽進坊; 지금의 청진정 등지)에 있었으며 시어머니 홍씨는 늙어 집안일을 돌보지 못하고 사임당이 맏며느리의 도리를 다하였다.
남편 이원수는 사람됨이 소방하여 살림을 할 줄 모르고 그리 넉넉지도 못하였는데 퍽 존절히 하여 지내고 모든 일을 자단하지 않고 반드시 시어머니께 물어 가지고 하고 시어머니 앞에서는 종들도 꾸짖지 않고 말은 가만가만히 하고 얼굴은 화기롭게 가지며 남편이 실수하는 일이 있으면 간곡히 간하고 자녀가 허물이 있으면 일깨워 이르고 부리는 것들이 잘못하면 잘잘못을 타이르는지라, 모두들 공경하고 그 환심을 얻었다.
그러면서도 항상 강릉은 잊지 못하여 한밤중 고요할 때이고 보면 눈물을 흘리고 혹은 그 밤이 다하도록 한잠을 이루지 못하기도 하였다.
한번은 일가집 하님이 와서 거문고를 타매 사임당이 그 소리를 듣고 눈물을 지으며
“거문고 소리가 그리운 이를 더 그립게 하는구나.”
하였으며 또 어느 때에는 어머니를 생각하고
“밤마다 달보고 빌되
살아서 보아지이다”4)
하는 싯구를 지었다.
4 )“夜夜祈向月 願得見生前”
아드님은 넷을 두었는바 큰 아드님은 선(璿), 둘째 아드님은 번, 셋째 아드님은 이(珥), 막내 아드님은 우다. 그 셋째 아드님은 우리가 태산처럼 숭앙하는 학자요 정치가이신 율곡선생이다.
48세 되던 해 봄에는 삼청동으로 이사하고 이원수가 조운사(漕運事)로서 관서로 가매 준, 이 두 아드님이 배행을 하였다. 이때 사임당이 눈물을 흘리며 편지를 써 보내더니 5월에 이르러 우연히 병이 나서 2, 3일 앓고 다시는 못 일어나겠다 하고 그달 17일 새벽에 그 남편과 두 아드님을 보지도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 버렸다.
사임당은 경사(經史)도 통하고 시문도 능하고 필법도 묘하였다. 그 막내 아드님 우는 그 필법을 배워 명가가 되었다. 또 비범한 화재(畵才)도 있어 일곱 살 적부터 유명한 안견(安堅)의 화법을 배워 산수, 포도, 초충 등의 그림을 잘하여 그 법을 누가 능히 견줄 이가 없었다.
사임당이 일찍이 어느 집 잔치에 가서 본즉 한 부인이 편방(便房)에 갔다 오더니 머리를 긁고 눈썹을 찡그리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 그 까닭을 물으매 홍금(紅錦) 웃치마를 얻어 입고 온 것이 그 한 폭을 더럽혔으니 새것으로 갈으려고 해도 가난하여 할 수가 없다고 한다.
“그러면 내게 청하라. 새것으로 갈아 주리라”
하고 드디어 붓을 휘둘러 폭마다 포도를 그렸다. 그 신운(神韻)이 생동하였다. 이 포도를 가지고 저자로 나가 팔았다. 저자 사람들이 다투어 사려 하였다. 그 값이 몇 갑절이 더 되었다. 새것으로 홍금 위치마 한 감을 바꾸고도 남았다. 그는 크게 고마와하였다. 또 누가 그의 초충화첩(草蟲書帖)을 포쇄(曝驪)5)하노라고 마당가에 내놓았더니 닭들이 달려들어 초충을 쪼아 버렸다 하기도 한다.
5) 포쇄(曝驪): 햇볕에 쬐어 말림.
이런 일화로도 전함과 같이 그 당시부터 그의 수적(手蹟)을 퍽 귀중히 알던 것이다. 그의 그림을 장첩(粧帖), 족자, 병풍으로 또는 글씨를 판각하기도 하여 보장(寶藏)하여 왔으며 천성(天成), 절묘, 절보(絶寶)라는탄상을 하던 것이다.
사임당은 이런 시문 서화로 불후의 작을 전하며 탁월한 예술가로도 일컬으려니와 보다 더 여자의 천직인 현모양처로서 거룩하신 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는 규방의 사표가 되고 또한 성모라고도 할 수 있다. 그 호를 사임당(思任堂) 또는 시임당(媤姙堂), 사임당(師姙堂), 임사재(姙師齋)라 하고 옛날 주문왕의 모친인 태임(太任)의 덕을 우러러 비기던 것도 그럴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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