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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조선-이이(李珥)

구글서생 2023. 5. 14. 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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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이(李珥)

 

黃義敦
1891~1969. 사학자충남 생어릴 때 한학을 수학평양 대성학교휘문의숙보성고보교원을 거쳐 조선일보 사원문교부 편수관동국대 교수 역임.
저서에 신편조선역사(新編朝鮮歷史)」「중등조선역사」 등이 있음.

 

 

1. 선생의 가계(家系)와 유년시대

 

선생의 성은 이(李), 휘(諱)는 이(珥)요,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 (栗谷)이며 관은 덕수(德水)요 그의 선계(先系)는 호귀(豪貴)한 명문거족이 아니라 이름 없이 향곡(鄕曲)에 묻혀 있던 궁조대(窮措大)1)의 집으로서 그 조(祖) 천은 백면의 서생으로 일생을 마쳤고 그의 부(父) 원수(元秀)는 사헌부 감찰의 미직(微職)을 지냈었으나 「율곡전서(栗谷全書)」 세계도(世系圖)에

 

“정성스럽되 번화하지 않고 너그러워 고인(古人)의 면모가 있다.”(편집자역)

 

라 하여 그의 모당(母堂)인 신씨에 대한 찬사보다 아주 간단한 점으로 보든지 그 찬사의 내용으로 보든지 매우 진실하고 단순한 촌노인에 가까왔던 듯하다.

1)궁조대(窮措大): 곤궁하고 청빈한 선비. 빈궁한 선비.

 

그러나 그의 부계보다는 모계가 매우 유명하였었다. 외조 신명화는 기묘(중종 때)사화에 희생된 명인(名人)이요, 모친 사임당(호) 신씨는 재덕이 갖추어 있던 현부인이었다. 시문(詩文)에 능하였고 그림에 명화요 글씨에 명필로 지금껏 이름이 높다. 여공(女工)은 물론 부덕이 구비하였었다 한다.

 

「율곡전서」 세계도에

“어릴 적부터 경서에 능통하고 문(文)에 능하였으며 그림을 잘 그렸고 바느질과 자수 등에 모두 정묘하였다. 천부의 자질이 순수하고 효성스러우며 지조가 깨끗하고 말을 적게 하고 행동을 신중히 했으며 부덕을 모두 갖추었다.”(편집자 역)

라 하였다.

 

이가 다소의 과도한 찬사일는지 알 수 없으나 지금껏 남아있는 그의 작품으로 보아서 남자로서도 얻기 어려운 ‘시, 서, 화 3절(三絶)’의 명명(命名)이 울리는 동시에 그가 얼마나 유명한 재원이었음을 알 만하다. 영지유근(靈芝有根), 예천유원(醴泉有源)2)이라 하더니 과연 선생의 위대한 천품이 그의 모계로 좇아 유전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선생의 안행(雁行)3)이 4인으로서, 형은 선, 번, 아우는 우이었으나 그중에서도 선생의 재질이 가장 특수하였었다 한다.

2) 영지유근(靈芝有根) 예천유원(醴泉有源):영지에는 뿌리가 있고 단맛이 나는 샘은 그 근원이 있다.

3) 안행(雁行): 남의 형제의 높임말.

 

선생은 중종 31년 병인(1536) 12월 26일 인시에 강원도 강릉군 북평촌(北坪村;丁洞面 烏竹軒里) 외외가(外外家) 이씨댁에서 탄생하였다. 선생의 모친이 용꿈을 꾸고 선생을 낳았으므로 아명을 견룡(見龍)이라 하였고 그가 탄생하던 집을 몽룡실(夢龍室)이라 이름하여 지금껏 보존하여 오게 되었다.

 

선생의 천재는 참으로 생지(生知)4)에 가까웠다.

4) 생지(生知): 공자의 말에 '생이지지(生而知之)'라는 말이 있는데 곧 나면서부터 배우지 않아도 안다는 뜻.

 

그러므로 언어와 문자를 동시에 배우게 되었다 한다. 3세 때엔 외조모 이씨가 석류를 따 주면서 이것이 무엇과 같으냐 물으니 선생이 곧

“석류 껍질 속의 자잘한 홍구슬(石榴皮裡碎紅珠)”

이라 한 한시(漢詩)를 들어 대답하였다.

그리고 4세 때엔 「사략(史略)」 초권(初卷)을 배우다가 향선생의 그릇 가르치는 구두(句讀)를 지적하여 정정하였고 7세에 인인(隣人) 진복창전(陳復昌傳)을 희제(戱製)하여 그의 소인됨을 예언하더니 과연 후일에 적중하였으며 8세에 파주 화석정(花石亭)에 올라

 

“수풀 속 정자에 가을 깊어

시인의 시상은 가이 없구나

하늘과 잇닿아 나무는 파랗고

서리맞은 단풍은 해를 받아 붉구나

산 위에 둥근 달 돋아 오르고

강물은 끝없이 바람 머금네

변방의 기러기 어디메 가느뇨

저문 구름 속 소리 끊기네” (편집자 역)5)

5)“林亭秋已晚 騷客意無窮 遠樹連天碧 霜楓向日紅 山吐孤輪月 江含萬里風 塞鴻何處去 聲斷暮雲中

의 한시를 지어 일세의 시인을 놀라게 하였고

 

“서리 바람이 땅에 진동하니

울부짖는 여러 말들의 소리로다

눈꽃이 공중에서 흩날리니

흩어지는 천곡(千斛)의 옥가루로다”(편집자 역)

 

라 하는 〈경포대부(鏡浦臺賦)〉는 그의 10세 때의 처녀작으로서 지금껏 사람들 입에 회자하여 왔다.

 

그리고 13세에 진사 초시를 마쳤으며 14, 5세에 문장이 대성하였다 한다. 선생의 심오하고 정미(精微)한 진리적 학설은 후장에 소개하려니와 선생의 문학적 천재로만도 이렇듯 뛰어났음에 놀라지 아니할 수 없다.

 

 

2. 선생의 불교 생애

 

사람의 일생은 아무리 길더라도 그의 운명은 찰나의 감격적 충동으로부터 좌우되는 것이다.

 

가비라성(迦毘羅城) 문 밖에 일어난 생장노사(生長老死)의 환영적 충동은 부귀향락에 묻혔던 정반왕자(淨飯王子)의 미몽을 깨쳐서 3계(三界)6)의 허위와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는 동시에 6년의 고행으로 영겁의 진리를 차게 하였고

다마스코 성문 밖에 내린 대광(大光)과 신탁의 감격은 방종무뢰하던 로마 소년 바울의 정신을 회전케 하여 그리스도의 진리를 신앙하고 선전하는 성자(聖者)가 되게 하였으며

삼고초려(三顧草廬)7)의 지성적 방문에 감격이 된 제갈량은 그의 일생을 유비에게 바쳤고

황금대자(黃金大字)의 일몽(一夢)에 충동을 받은 모자진(毛子晋)은 「경사(經史)」를 간행하는 위업을 이루어 전적(典籍)의 충신으로 백세에 방명(芳名)을 끼쳤다.

6) 3(三界): (), (), 인간계.

7) 삼고초려(三顧草廬): 제갈량을 모시기 위해 유비가 그의 집을 세 번 방문했다는 고사로 삼국지에 나오는 말.

 

누구든지 큰 사업 큰 학문을 이루는 자는 이러한 감격적 충동의 동기가 없이 되는 자가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감격적 충동을 받지 못한 그의 일생은 곧 평범하고 무의미한 사막이 되고 말 것이다. 비상한 충동이 아니면 비상한 사람이 되지 못할 것이요, 비상한 사람이 아니면 비상한 사업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율곡 선생의 진리적 생애에 발인(發靭)케 된 동기도 또한 비상한 감격적 충동을 받게 됨으로부터 왔던 것이다. 지금껏 평화하고 순탄한 행복한 생활의 길을 걸어오던 꽃 같은 소년의 앞에 갑자기 폭풍우가 일어났다.

 

명랑하던 그의 가정엔 암흑의 비운이 싸고 돌았다. 총명재덕이 구비하고 은애무육(恩愛撫育)이 겸지하던 선생의 모부인(母夫人)을 영결케 된 불행이 곧 그것이다. 때는 마침 선생의 나이 겨우 16세로서 아직껏 모부인의 품속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였을 때다. 그가 선생에겐 유일하게 자애하는 모부인인 동시에 신앙의 신이요 지기(知己)의 벗을 겸하여 왔었던 바이다. 그러나 갑자기 그를 여의게 된 선생의 불행이야 어떠하였으랴!

 

“달은 밝은데 뜬구름 같은 일을 어디에 맡기리오. 온전한 곳(圓處)을 향해 쉬고 싶은 마음이 자주 생긴다.”(편집자 역)

 

아, 천리(天理)가 미원(未圓)8)하고 인사(人事)가 다한(多恨)하도다.

8) 미원(未圓): 온전하지 못함.

 

무애(無涯)의 지통(至慟)과 망극의 비회(悲懷)에 싸여 호읍(呼泣)하는 선생에게는 다시 패악하기로 유명한 그의 서모가 들어오자 설상에 가상으로 역경에 역경을 더하여 곤욕과 군박(窘迫)이 날로 심하고 가정의 불화가 날로 더하게 되었었다 전한다.

9) 군박(窘迫): 몹시 구차하고 군색함.

 

선생의 행장(行狀)에

 

“때에 선생은 상(喪)에서 벗어났으나 슬프고 경모하는 마음을 스스로 이기지 못하여 날마다 밤이면 목놓아 울었다. 하루는 봉은사(奉恩寺)에 들어가 부처의 책을 들추어 보고 죽음과 삶의 이야기에 깊이 감동하여 그 학문에 기쁨을 느꼈으니 간단하고도 높고 오묘하였다. 인간사에서 구하는 바를 끊고자 19세에 (중략) 인하여 산문(山門)에 들어가 계정(戒定)10)을 견고히 하여 침식도 잊었다.”(편집자 역)

 

라 하였고 선생의 연보에

 

“그 어머니 상을 당하매 효성스런 생각이 망극하여 견제할 수가 없었으므로 거의 성품을 해칠 뻔하였으나 우연히 불서(佛書)를 보고 따라서 큰 슬픔의 뜻을 잊게 되었다.

인하여 선학(禪學)에 감화되니 인사(人事)를 사양하고 그것을 시험하고자 하였다. 이에 드디어 금강산 유람을 했다.”(편집자 역)

라 하였다.

10) 계정(戒定): 계와 정. 몸을 절제하는 것을 계라 하고, 마음을 고요히 하는 것을 정이라 함.

 

겸양의 덕성과 견인의 지기(志氣)를 가진 선생으로도 이러한 비애와 불운의 역경에서는 헤어나기 어려웠던 것이다.

더우기 총명이 절인(絶人)한 동시에 감정이 예민하던 선생의 심리에는 날로 이상이 생겨 인생의 무상함과 세고(世苦)의 다단함을 통탄치 아니할 수 없게 되었었던 것이다.

때마침 봉은사에서 얻어 보게 된 불경의 진리는 암흑한 선생의 전로(前路)에 위대한 광명의 빛을 주게 되었던 것이다.

백척간두에서 길을 잃고 비애번민하던 그는 다시 일보를 나아가 오인의 안주할 만한 새 천지를 불타의 진리 중에서 개척하려 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곧 선생의 일생을 통하여서 특필대서할 만한 감격적 충동인 동시에 진리적 생애의 입문이요 동기라 할 만하다.

 

그래서 선생은 그의 모부인의 3년상을 마치던 익년 곧 19세 된 해 춘 3월에 가정에서 벗어나 금강산에 들어갔었다.

그에서 면벽정좌하고 침사명상(沈思冥想)하기 일주년 간이었었다. 삭발하고 승려가 되었든가, 속인의 모양 그대로 참선만 하였든가 함은 이설이 분분하여 질정(質正)11) 하기 어렵다.

11) 질정(質正): 질문하여 구명(究明).

 

그러나

 

“내가 어렸을 때 망령되이 선가(禪家)의 돈오법(頓寤法)에 뜻을 두어 입도(入道)하니 매우 빠르고도 묘했다. 만상(萬象)이 한 곳으로 돌아간다 하니 일귀(一歸)는 어느 곳인가. 이를 화두(話頭)로 삼아 수년 동안 생각했어도 결국엔 깨달음을 얻지 못하였다.” (편집자 역)

 

라 한 선생의 말로부터 보면 승려가 되고 안 되었음은 오직 외형상 문제뿐이요,

“만상이 한 곳으로 돌아가니 그 돌아가는 곳이 어디이뇨(萬象歸一,一歸何處)”

의 화두로 참선에 노력하였음은 틀림없는 바이다.

 

“수년을 생각했어도 결국엔 깨달음을 얻지 못하였다(數年思之 竟未得悟)”

라 함은 선생의 겸사(謙辭)인 동시에 유교를 전상(專尙)12)하는 환경의 공격을 두려워하여 진의를 토로치 않고 감추려 함에서 나온 말이다.

12) 전상(專尙):오로지 숭상함.

 

대총상불이법문(大總相不二法門)13)의 묘장진체(妙藏眞諦)를 확철대오(確徹大悟)한 바가 있느냐 없느냐 함은 알 수 없는 바이다.

13) 대총상불이법문(大總相不二法門): 대총상은 진여(眞如)의 실체, 불이법문은 절대차별이 없는 이치를 나타내는 법문.

 

마는 선생의 철학적 이상은 이때에 벌써 견고한 터를 잡았던 듯하다. 그의 유일한 창견(創見)으로서 발전성소미발(發前聖所未發)로 자거(自居)하던 이통기국(理通氣局)론이 불교의 진여연기론(眞如緣起論)과 유사함을 보아서도 넉넉히 그를 증명할 수 있는 바이다.

 

그리고 「풍악증소암노승시서(楓嶽贈小庵老僧詩序)」에

 

“맹자가 성선(性善)을 얘기할 때마다 반드시 요순(堯舜)을 들어 말하였는데 '마음이 곧 부처다'라는 말과 무엇이 다르냐.”(국역 「율곡집」)

고 하여 유·불 양교가 다 극처(極處)에 가서는 동일한 유심론임을 말하였고

 

“솔개는 날아서 하늘에 이르고 고기는 연못 위에서 뛰는 것이 색(色)이냐 아니면 공(空)이냐.”(편집자 역)

하여 불가의 비공비색(非空非色)만 유일한 진리적 격언으로 아는 노승을 힐난하는 동시에

 

“고기가 뛰놀고 솔개가 날으는 것이 아래위가 한가지인데

저것은 색도 아니고 공도 또한 아니로세” (편집자 역)14)

의 시를 지어서 유가의 연비누천 어약우연(鳶飛淚天 魚躍于淵)이라 한 시와 불가의 '비공비색'이란 말이 동일한 진리를 도파(道破)한 명구임을 말하였다.

14)“魚躍鳶飛上下同 這般非色亦非空

 

다시 말하면 이 우주에 가장 높은 상공에 소리개(鳶)가 날아 치받치고 가장 깊은 못(淵) 속에 고기가 뛰노는 것이 모두 생명의 약동인 동시에 우주는 생명의 우주이다. 이가 곧 생명의 미(美)를 구가한 시인 동시에 또 유일한 생명론의 철학이다. 비공비색이라 함도 또한 공(空) 곧 허위도 아니요 색(色) 곧 물질도 아닌 그 무엇이 곧 유심인 동시에 정신이요 생명이다. 유가의 ‘연비어약’이라는 생명론과 불가의 ‘비공비색’이라는 유심론은 이에서 곧 합치가 됨을 말하였다.

그리고

 

“이미 그 사이를 벌써 말로써 설명하면, 곧 경계가 되는 것이다.”(편집자역)

라 하여 노승의 집착된 망상을 갈파하였음은 참으로 통쾌하기 짝이 없는 바이다.

 

“참선에 드니 조주(趙州)15)가 없어지고

한번의 돈오에 속세를 잊는구나” (편집자 역)16)

라 하여, 참선과 돈오의 방편을 말한 시라든지

“속세 비록 혼탁하나

마니(摩尼)17)는 본래 스스로 둥글다”(편집자 역)

라 하여 무명(無明)의 업장(業障) 중에서도 진주와 같은 유심(唯心)이 자원자재(自圓自在)함을 말한 시가 모두 선생의 불교적 생애 중에서 오득(悟得)하고 함양하였던 사상의 발로라 할 만하다.

15) 조주(趙州): 중국 스님. 화두의 일화가 많음.

16) “歸參趙州無 一吾塵機休

17) 마니(摩尼): 보주 혹은 여의주.

 

그러나 선생이 입산한 지 일주년 곧 이듬해 다시 환속하여 나왔다 한다. 청정안한(淸淨安閑)한 법계로부터 다시 겁운고우(劫雲苦雨)의 진세(塵世)로 돌아오게 된 동기에 대하여는 일종 난해의 의문이다. 마는 선생의 행장에

 

“문득 생각하여 보니 석가가 그 제자들을 경계하여 생각을 더하고 감하려고 하는 것을 못하게 함은 무슨 뜻인가?

대개 그 학문은 다른 기묘한 것이 없고 다만 이 마음이 달아나려고 하는 길을 절단하여 정신을 한 곳에 모아서 고요하고 텅 빈 밝은 영역에 머물게 하고자 한 것이다.

화두를 빌어 그로 하여금 공(功)을 하찮은 것으로 여기게 하고 또 사람이 먼저 이 뜻을 알까 두려워하여 참선함에 반드시 정성되어 오로지 하지 않는 까닭에 이 금지를 두어 그를 속인 것이다.”(편집자 역)

 

라 하였고 그 아래에,

 

“이에 다른 설들이 그른 것을 깨닫고 그 학문을 다 버리고 우리의 도에만 마음을 오로지 했다.”(편집자 역)

라 하여 물작증감상(勿作增減想)이란 말을 보고 불교의 비진리임을 깨쳐서 환속한 것같이 말하였다.

그러나 그는 다 후인의 억측이요 선생의 환속한 본의는 그가 아닌 듯하다. 차라리 선생의 진의를 오해하였다 할 만하다.

 

과연 불교의 공정(工程)인 참선의 요체는 물작증감상 5자에 있을 뿐이다. 무사심무사심(無斯心無斯心)이란 말과 같은 말이다. 좋은 마음이고 나쁜 마음이고 생각지 말란 말이다.

이심제심(以心除心) 직하무심(直下無心)이라든지 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以生其心)이라든지가 다 그의 의미이다. 물작증감상만 하면, 행선(行禪)도 가하며 시선(市禪)도 가할 것이요, 물작증감상의 요체를 지키지 못하면 아무리 10년의 장시일을 두고 면벽정좌할지라도 성공하지 못하고 말 것이다.

대총상불이법문을 깨치는 방편은 면벽적 생활에 있음이 아니요, 어떠한 위치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오직 물작증감상만 하면 성공이 될 줄로 확신하였던 것이다.

동시에 묘년영재(妙年英才)인 선생이 가슴 속에서 싸워 오던 공명적 희망과 진리적 욕구를 조화하고 절충하여 일거양득코자 하였던 것이다. 당시에 가장 환영하고 존숭하는 유교에 투신하여 현실적 사회에 공명을 이루는 동시에 때때로 물작증감상의 방편으로 불교의 진리도 찾아보려 하였던 것이다. 이가 곧 선생이 하산하게 된 동기였다고 추측할 만하다.

 

 

3. 선생의 유교적 생애

 

선생은 금강산으로부터 하산하자 곧 유교적 생애에 들어서게 되었었다. 그래서 종생(終生)의 도우(道友)인 우계(牛溪;成渾), 구봉(龜峯;宋翼弼) 양 선생과 막역의 우의를 맺어 도의를 강마(講磨)18)하였고 22세에 성주목사(星州牧使) 노경린(盧慶麟)의 딸인 노씨 부인과 결혼하였고 23세에 성주 처가로부터 강릉 외가에 향하는 길에 예안군(禮安郡) 도산(陶山 ; 안동군 예안면 土溪洞)에 가서 당대의 석학인 퇴계 이황 선생을 방문하게 되었었다.

18) 강마(講磨): 학문이나 기술 따위를 배우기 위하여 강론하고 연마함.

 

조선 유교사상에 가장 위대한 양 선생의 회합은 참으로 반도(半島) 문운(文運)의 일대 성사(盛事)다.

 

그래서 한 분은 숙덕 노사(宿德老師)로 한 분은 묘년영재(妙年英才)로 서로 흠앙하고 총애하였던 것이다.

 

“시냇물 사수에서 나누어 오고

무이산 봉우리 빼어났어라

생활의 계책은 경서뿐이요

평생에 초라한 집 두어 간이네

가슴에 품은 회포 갠 날 달 같고

청담(淸談)은 세찬 물결 그치게 하네

소자, 도를 구해 들음에 있지

반나절 한적하게 온 게 아니네” (편집자 역)19)

19)“溪分洙泗派 峯秀武夷山 活計經千卷 生涯屋數間 襟懷開霽月 談笑止狂瀾 小子求聞道 非偸半日閒

 

이는 선생이 퇴계 선생의 인격과 생애를 흠앙하여 지어 바친 시요,

 

“병도 깊고 문도 닫아 봄 못 봤는데

그대 와서 심신 뚫어 꿈깨듯 하네

이름 아래 헛된 선비 아님을 알고

지난날 부끄러워 몸둘 바 없으이

포기 찬 곡식밭엔 잡초가 없고

갈고 닦은 새 거울엔 티가 없는 법

실정에 지나치는 시어는 버리고

공부에 힘쓰며 서로 친하세”(편집자 역)20)

20)“病我牢關不見春 公來披豁醒心神 始知名下無處士 堪愧年前闕敬身 嘉穀莫容稊熟美 遊塵不許鏡磨新 過情詩語須删去 努力功夫各自親

 

이는 퇴계 선생이 선생의 영재(英才)를 사랑하여 화답한 시이다. 양 선생이 실제로 면오(面晤)21)하기는 2일간뿐이었으나 평생을 두고 서로 잊지 못할 만한 인상을 받았던 것이다.

21) (面晤): 면담.

 

그러므로 서로 떠난 후에도 퇴계 선생은

 

“그 사람은 총명하고 많이 기억하고 독서한다. 자못 나의 학문에 뜻을 두고 있으니 후생이 두렵구나.”(편집자 역)

 

하여 선생의 재학(才學)을 칭찬하였고

 

“그대와 같이 재주가 높고 어린 나이에, 바른길(正路)로 나아가면 후일에 성취하는 바가 얼마나 많겠는가. 천 번 만 번 멀리 나아가면서 스스로 기약해야 할 것이다.”(편집자 역)

라 하여 서면으로 선생의 독학을 격려하였다.

 

그리고 선생은 퇴계 선생의 학덕을 크게 숭앙하는 동시에 거경궁리(居敬窮理), 용학집주(庸學輯註), 격물치지(格物致知), 존양성찰(存養省察), 사호출처(四皓出處), 성학십도(聖學十圖) 등의 문제를 들어 서면으로 왕복 변난(辯難)하였었다. 그래서 퇴계 선생의 훈도와 감화를 받음이 적지 않았었다.

 

선생의 생애는 이로부터 유교적 방면에 전주(專注)하였다. 그래서 그를 연구하여서 전력하는 동시에 곁으로 고봉(高峯;奇大升), 우계, 구봉, 사암(思庵;朴淳) 등의 학자와 왕복 변론하여 도의를 강마하였으며 군왕(君王)의 수기치인적(修己治人的) 수양서인 「성학집요(聖學輯要)」, 소학생의 교과서인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지었고 어명을 받아서 사서(논어, 맹자, 중용, 대학)의 소주(小註)를 산정하고 사서의 언해와 「주역전의(周易傳義)」, 「근사록(近思錄)」의 구결(口訣)을 지었었다.

 

그의 정치적 활동이 가장 분망할 때에도 진리를 사색하고 학문을 강구함을 잊지 않았었다. 시시로 파주 율곡, 해주 석담(石潭) 등지에 퇴은(退隱)하여 강학(講學)하기도 하였었다. 그가 금강산으로부터 하산한 이후로 병졸(病卒)하던 49세 때에 이르기까지 30년간에 간단없이 쉴 새 없이 일직선으로 유학을 연구하기에 헌신하였었다 할 만하다. 그중에서도 37세 때에 우계(牛溪)와 왕복한 서한은 그의 위대한 철학적 진리의 체계를 세운 대기록이라 할 만하다.

 

 

4. 선생의 정치적 생애와 이상

 

1) 초기의 생애

 

선생의 26세 때에 부상(父喪)을 당하여 3년의 상기를 마치고 29세(명종갑자)에 진사시와 명경과에 이어 장원이 되었다. 당시에 발신적 경로(發身的 徑路)의 오직 하나인 문과를 마침으로부터 선생의 정치적 생애의 서막은 열리게 되었다. 선생의 인격, 식견, 문장, 재능이 다 수평선에 뛰어나므로 환도(宦途)에 승진도 또한 신속하였다. 그래서 초기 10년간(명종갑자선조 갑술)에는 좌랑, 정랑, 정언, 지평, 서장관, 직강(直講), 교리, 검상(檢詳), 사인(舍人), 청주목, 응교, 사간, 전한, 승지, 직제학, 대사간, 황해관찰 등의 화직(華職)을 지냈었다.

마는 항직(亢直)한 천성과 탁월한 정견을 가진 그는 직언의 소(疏)를 여러 번 올려 시폐(時弊)를 통론하고 개혁을 주장하므로 당시에 구관(舊慣)에 젖고 습속(習俗)에 구안(苟安)22)한 군주와 대신은 그를 연소우활(年少迂闊)23)한 청년배의 호사희변적(好事喜變的) 망상으로 의아하는 동시에 신임을 불긍(不肯)하므로 초기 약 10년간에 조진모퇴(朝進暮退)하고 층등서설24)하였을 뿐이었다.

22) 구안(苟安): 한때 겨우 편안함. 잠시 동안의 안락함을 탐내는 일.

23) 우활(迂闊): 사리에 어둡고 덩둘함.

24) 층등서설(蹭蹬棲屑): 자리가 잡히지 않아 서성거리고 불안정함.

 

2) 동고(東皐)와 선생

 

그중에서도 더우기나 당시에 대신이요 원로이던 동고(李浚慶)와 의견이 상좌(相左)되어 흑은 위사훈(衛社勳; 을사사화 때 祿功)의 삭제 혹은 승지의 청대(請對)25), 인묘(仁廟)의 배향 등 문제로 선생은 개신(改新)을 규호(叫號)하고 동고는 보수를 주장하여 여러 번 충돌이 있었다.

25) 청대(請對): 급한 일로 임금 뵙기를 청함.

 

그래서 동고는 선생을 한 경조부박한 청년으로 모시(侮視)하고 선생은 동고를 한 완명(頑冥) 무식한 노인으로 질시하였던 듯하다.

백휴암(白休菴; 仁傑)의 이른바,

 

“지금 대신들은 안정만을 구하는 데 힘쓰니 그 폐단은 나약함이고 사류(士流)는 웃사람에게 의견만을 드리니 그 폐단은 격해지는 것이다.” (편집자역)

 

라 함은 당시에 동고와 율곡 양 선생을 중심하여 대신과 사류의 의견이 충돌되던 현상을 말한 바이다. 그러다가 마침내 선조 임신에 동고의 임종 유소(遺疏) 중에

 

“검소한 행동을 하지 않으며, 독서에 힘쓰지 않고 큰소리로 떠들고 뭉쳐서 붕당을 만들어 허위의 기풍을 이룬다.”(편집자 역)

 

라 하여 연소사류(年少士流)의 기풍을 배척하였으므로 선생도 이에 응하여 상소하되

 

“옛사람들은 죽으면 그 말이 선하거늘 지금 사람들은 죽으면서도 그 말이 악하다.”(편집자 역)

“마음 속으로 남을 해하려고 내세운 붉은 기는, 질투함의 효시이다.”(편집자 역)

라 하여 그를 통척(痛斥)하였었다.

마는 이로부터 겨우 4년 만에 불행히도 동·서의 당쟁이 일어나서 동고의 예언이 적중하였었다.

300년래에, 이 문제로 인하여 동인은 선생을 무상소인(無狀小人)이라 배척하고 서인은 선생의 이 일이 정당무과(正當無過)하다 변호하여 왔었다.

그러나 선생은 무상소인도 아닌 동시에 정당무과함도 아니다. 당시의 기풍으로부터 미루어서 미구에 당쟁이 일어날 것을 예측하였음은 경세장자(經世長者)인 동고의 명견(明見)인 동시에 기묘, 을사 등 사화를 여러 번 치른 나머지 군주의 심리에 붕당의 의혹 일으켜서 참화를 재연케 되지 않을까 함도 선생의 우려였던 것이다.

평소에 있어서 여러 번 충돌되던 두 분의 의견이 최후로 이 점에까지 상좌되었던 것이다. 두 분의 상소는 다 각기 자가(自家)의 의견을 진술한 것이다. 다만 연소한 청년의 예기(銳氣)와 다소의 감정이 섞이게 된 선생의 붓끝은 날카로운 공격적 언사가 좀 상도(常度)에 넘어간 듯하다. 이는 선생의 일시적 과오이다. 아마 선생도 뒤에는 추회(追悔)가 있었을 것이다. 정당무과하다 변호하는 서인도 잘못인 동시에 무상소인이라 지목하는 동인도 그릇인 듯하다.

 

3) 당쟁과 선생

 

불행히 동고의 예언과 같이 이면(裡面)으로 복류(伏流)하던 당쟁의 기풍이 선조 8년 을해(1575) 7월에 와서 표면화하여 동인, 서인의 명목으로 각립상쟁(角立相爭)하게 되었었다. 그래서 그가 300여 년래에 조선 정계에 유일의 화근이 되었었다.

김효원(金孝元)을 중심으로 한 후진 청년 일대를 동인(金이 동문 안에 살았기 때문), 심의겸(沈義謙)을 중심으로 한 선진 대관(先進大官) 일대를 서인(沈이 서소문 안에 살았으므로)이라 하여 서로 싸우고 다투기 심한 중에 선생은 항상 그를 조정하려고 애써 왔다.

 

선생의 <여이발(동인)서(與李潑書)〉 중에

 

“을해년에 서인이 약간 이겨 동인이 약간 패한 고로 그때는 내가 단지 서인 쪽으로 향해 분변하였으나(중략), 지금(선조 기묘)은 서인이 일패도지하고 동인이 크게 이겼으니 어찌 동인에게 향해 분변하지 않으리오.”(편집자 역)

 

하여 당쟁이 처음으로 일어나던 을해년에 서인을 향하여 화해를 권하였고 이수(李銖)의 의옥(疑獄)으로 서인이 참패된 이때에는 동인을 향하여 화해를 권하는 고충을 말하였었다.

 

그리고 「정재집(定齋集)」에

 

“동서의 당론이 있은 이래 색목하는 가운데 초연히 선 자는 오직 이이한 사람뿐이다. 동서 양쟁이 해결되어 세력이 서측에 기울어지면 동을 구하기 위해 서를 억제하고, 세가 동편에 기울어지면 서를 구하기 위해 동을 억제하니, 비교하면 저울질할 때 추를 앞뒤로 옮겨 평형을 이루는 것과 같다.

그 마음 씀은 공평정대하며, 지성은 가긍하다. 진실로 세상의 도(道)를 만회하려 했으나, 불행히 해를 당한 경박한 사람이 그 사이에서 나와 그 마음을 구하지 않고 그 행적을 의심하여 동서가 서로 공격하니 상처가 그치지 아니한다.

졸지에 허봉과 응개의 상소로 물러나왔으니, 과연 수습하기 어렵구나.”(편집자 역)

 

라 하였다.

중립 조정에 분주 노력하던 선생의 진상을 이에서 알 만하다. 이렇듯 공평하고 간측한 선생의 조정도 이 싸움에 근본적 화해의 효력을 얻지 못하게 되었음은 참으로 통탄할 만한 바이다.

 

4) 선조의 지우(知遇)와 선생의 만년

 

선조께서 점점 선생의 재능을 알아주시어 14년 신사(선생 46세 때)로부터 선생을 크게 신임하여 혹은 대사헌, 대사간을 시켜서 대간(臺諫)의 풍기를 정화케 하며 호판(戶判)으로서 빈핍(貧乏)한 재정을 요리하고 이판(吏判)으로서 청탁을 엄금하여 사환(仕宦)의 길을 맑게 하고 현사(賢士)와 학자를 등용하여 국정을 도우게 하며 병판(兵判)으로서 10만의 상비군을 소집하고 병제를 개량하자 주장하는 등 평소에 길러 오던 선생의 정치적 이상과 포부를 실현하여 보려 하였었다.

그리고 16년 계미(선생의 48세때) 6월에는 두만강가에서 여진의 난이 있으므로 선생이 병판의 위(位)에 있어 그를 막기 위하여 병마를 판비(辦備)하고 군량을 운수하는 등 성력을 다하였다. 마는 평소에 혐오하던 송응개, 박근원(朴謹元), 허봉 등의 배척 상소로 일시에 사직하고 그의 향제인 해주 석담으로 돌아갔었다.

그러나 선조의 여러 번 부르심을 고사하기 어려워서 동년 10월에 다시 이판의 직으로 경성에 돌아왔다가 익년(갑신) 정원 16일에 경성 대사동(大寺洞) 우사(寓舍)에서 불행히 병졸(病卒)하였다.

 

5) 선생의 정치적 이상

 

선생의 정치적 생애는 전기와 같이 낙척 불우한 중에서 일생을 마쳤으므로 그다지 큼직한 공업을 이룬 바가 없었으나 선생의 정치적 이상만은 그의 유저와 소장(疏章)으로부터 개략을 엿볼 수 있다 할 만하다.

〈병인삼책소(丙寅三策疏)〉에는

 

“바른 마음으로 정치의 근본을 세우고, 현자를 써서 조정을 맑게 하고 백성을 안정시켜 국가의 기본을 굳건히 한다.”(편집자 역)

 

의 3대책을 말하였고,

기사년에 진강(進講)한 「동호문답(東湖問答)」에는

 

“실질을 힘써 바른 것을 닦고, 간신을 분별해 현자를 쓰고, 폐습을 혁파하여 백성을 안심시켜, 배움을 장려하여 사람을 교화한다.”(편집자 역)

가 그의 주지였으며,

동년〈시무소(時務疏)〉에

 

“성스런 마음을 정하고, 도학(道學)을 숭상하며, 사림을 보호하며, 대례(大禮)를 삼가고, 기강을 떨치고 절약 검소를 숭상하며, 언로(言路)를 넓히고 현재(賢才)를 거두고 폐법(弊法)을 개혁하자.”(편집자 역)

의 9사(九事)를 말하였고

 

<갑술만언봉사(甲戌萬言封事)〉에

(1) 수기(修己)

① 성스런 마음을 분발하고(奮聖志)

② 학문을 힘쓰고(勉學學)

③ 치우침과 사사로움은 버리고(去偏私)

④ 현자를 친하고(親賢士)

(2) 안민(民)

① 정성스런 마음을 열고(開誠心)

② 공안은 개혁하고(改貢案)

③ 절약·검소를 숭상하고(崇節儉)

④ 지방의 노비를 뽑아 서울 관자에 올리는 것을 고치고(變選上)

⑤ 군정을 고치고(改軍政)(편집자 역)

 

의 9책을 말하였고

 

〈임오시폐소(壬午時弊疏)〉에

“공안을 개혁하고, 관리를 살피고 감사를 오래 맡기라.”(편집자 역)

의 3책을 들어 구폐(救弊)의 방법을 말하였으며

 

〈계미육조의(癸未六條議)〉에는

“현명하고 유능한 자를 임용하고, 군과 민을 양성하고, 재용(財用)을 족히 하며, 변방을 굳건히 하고, 전마(戰馬)를 비축하고, 교화(敎化)를 밝게 하라.”(편집자 역)

의 6대책을 들어 그의 실행함을 선조께 추청(追請)하였고

 

동년 4월 봉사(封事)에는

“공안을 개혁하고, 군적(軍籍)을 고치고, 성(省) 주(州) 현(縣)을 병합하고 감사를 오래 맡기고, 서얼을 등용하게 허락하고, 공·사의 노비 중에 재주 있는 자를 속량시킬 것”(편집자 역)

의 6조를 말하였고 이어서 10만의 상비병을 기르되 경성에 2만 인, 8도에 각 1만 인씩 배치하여 불우(不虞)의 화를 예방하자 하였으나 원려(遠慮)가 없는 단견자류(短見者流)의 반대로부터 그를 실현치 못하였었다.

 

선생의 정견은 그 시대에 있어서는 가장 마땅한 정책이며 구구한 주위의 속배(俗輩)보다는 한층 더 뛰어난 혜안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그게 다 임시적 구폐(救弊)의 소극적 정책이요, 경제, 교육, 군사에 대한 적극적 창건(創見)이 없었음은 참으로 유감이라 할 만하도다.

 

선생의 장처(長處)는 정치적 수완과 이론보다는 학자적 천재와 이상에 있다 할 만하다. 그러므로 선생을 정치적 위인으로 보기보다는 학자적 선배로 숭배하는 동시에, 다음에 선생의 학설의 경개(梗槪)를 소개하여 보려 하는 바이다.

 

 

5. 선생의 학설

 

1) 선생 이전에 조선 유교사상의 발달

 

선생의 학설을 소개하려면 먼저 조선 유교사상의 발달된 순서를 들지 않을 수 없다. 중국에서도 유교의 기원이 선진시대(先秦時代)로부터 왔음은 물론이나, 정말로 조직적 유교철학은 송유(宋儒)에서부터 비롯하였다.

 

우리 조선에서도 원시적 유교가 수입되기는 삼한시대에 있었을 것이다. 마는 송유의 학설을 수입하기는 고려 말기에서부터 비롯하였었다. 안회헌(安晦軒;향) 우이동(禹易東;倬), 백이재(白彝齋;頤正) 3선생의 손으로부터 수입되기 시작하여 백여 년간에 이익재(李益齋), 이목은(李牧隱), 정포은(鄭圃隱), 권양촌(權陽村), 정삼봉(鄭三峯), 길야은(吉冶隱), 김점필재, 조정암(趙靜庵) 등의 석학이 이어 났었으나 그는 다 수입과 해석에만 노력하여 왔었다.

 

참으로 그를 咀嚼하고 연찬하여 자가 독특의 우주관과 인생관을 세우기는 서화담(경덕)으로부터 비롯하였었다. 개척적 독창적 견지에서 송유의 사상을 받으면서도 그의 결함과 모순을 제거하고 정연한 체계를 이룬 사상가로서 화담, 퇴계, 율곡이 이어 나셨다.

 

화담은 장횡거의 유기론의 계통을 받아서 그를 더한층 조직화하는 동시에 물질불멸론의 세계적 수창자(首唱者)이다.

 

그의 뒤를 이어 다시 퇴계는 화담의 학설이 유물론에 편경(偏傾)되었음을 의아하는 동시에 정이천(程伊川), 주회암(朱晦庵)의 이기 양원론을 답습하면서 그네의 결함과 미비점을 개량하고 보충하여 자가 독특의 우주관을 조립하였었다. 동시에 화담의 유물론을 반대하였었다.

 

2) 선생의 본체론(本體論)

 

선생은 화담의 유기론을 반대하는 동시에 퇴계의 이기 양원론도 배척하였었다. 그러나 선생도 실제적 방면으로서는 이기 양자가 이성적(異性的) 존재임을 인정하는 동시에 그의 비일비이적(非一非二的) 묘계처(妙契處)를 증명키 위하여

 

“대저 이(理)라는 것은 기(氣)의 주재이고, 기는 이의 타는 바라. 이가 없으면 기는 근거가 없게 되는 것이요 기가 없으면 이는 의존할 바가 없다.

이와 기는 이미 둘이 아니면서 또한 하나의 물건도 아니다.

하나의 물건이 아닌 까닭으로, 하나이면서 둘이며, 둘이 아닌 고로 둘이면서 하나이다.

하나가 아니라는 것은 어떤 이유인가? 이·기는 비록 서로 떠나지 못하나 묘하게 합한 그 가운데서도 이는 이 자체가 있고 기는 기 자체가 있어 서로 협잡치 아니하므로 한 물건이 아니다.

두 개의 물이 아니라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 비록 이(理)가 이 자체가 있으며, 기가 기 자체가 있지만, 섞여서 간격이 없고 선후가 없으며, 떨어지고 합해짐이 없으므로 그것이 둘임을 보지 못하니 둘이 아니다. 이런 까닭으로 움직임과 정지함이 끝이 없으며, 음양의 시작이 없고, 이가 시작이 없는 고로 기 또한 시작이 없다.” (편집자 역)

라 하였었다.

 

곧 이기 양자의 자성적(自性的) 방면으로 보면 이는 이의 독립적 자성이 있고 기는 기의 독립적 자성이 있어서 아무리 '묘하게 합쳐져 서로 떨어지지 않음(妙合不相離)'의 중에서도 자가의 독특적 개성의 실재를 유지함을 증명하는 동시에 화담의 “이의 실재를 전연 부정하고 기의 동정 변화(動靜變化)의 부속적 법칙으로 간주”한 유기적 사상을 반박하였다.

 

그리고 이기 양자의 운행적 방면으로 보면 양자의 운행이 선후가 없고 이합이 없어서 아무리 이는 이의, 기는 기의 독립적 자성이 각각 있을지라도 그의 융합함이 혼륜무간(渾淪無間)하여 곧 일체 양성(一體兩性)으로서 각개의 독립적 행동이 절대로 없음을 증명하는 동시에,

퇴계의

 

“사단(四端)은 이가 일어나매 기가 따르는 것이며, 칠정(七情)은 기가 발하매 이가 그것에 타는 것이다. ” (편집자 역)

라 한 이기호발론(理氣互發論)을 배척하였다.

 

곧 이를 총괄하여 말하면 자성적 방면으로는 양원(兩元)이요 운행적 방면으로는 일원(一元)이다. 이가 곧 양성일체론으로서 스피노자의 일체양면론과 유사한 사상이다. 철학적 사색에 노력하는 자에게는 고금을 물론하고 심물양자(心物兩者)의 이성적 현상에 고통을 받지 않은 이가 없었다. 그래서 이따금 과도시기에는 이와 같이 일체 양성론을 주장하여 그네의 난문(難問)을 해결하고자 하였음은 인도에서도 구주에서도 철학사상에 종종 보는 바이다.

 

3) 이통기국론(理通氣局論)

 

이미 이기 양자의 독립적 이성(異性)의 존재를 인정한 이상에는 그의 성질상 차이점이 어떠한가 함이 곧 이어서 의문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선생은 그의 차이점을 말하기 위하여 곧 선생의 발전성소미발(發前聖所未發)이라 과시하는 이통기국(理通氣局) 4자를 부르짖게 되었다.

“이는 형태가 없고 기는 형태가 있는 고로 이는 통하고 기는 국한한다.”(편집자 역)

라는 명제를 내세우고 다시 그를 설명키 위하여

 

“이가 통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함인가. 이는 본말(本末)도 없고 선후도 없다. 응하지 않을 때도 선(先)이 아니며 이미 응한 것도 후가 아니다. 그러므로 이가 기를 타고 유행하여 천차만별로 같지 않아도 그 본연의 묘리는 없는 데가 없다. 기가 치우친 곳에는 이도 역시 치우치나 치우친 바는 이가 아니라 기이며 기가 온전하면 이 역시 온전하나 온전한 것은 이가 아니라 기이다. 청·탁·수·박(淸濁粹駁), 찌꺼기, 재, 거름 가운데에도 이는 있지 않은 곳이 없어 각각 그 성(性;거름, 재)이 되나 그 본연의 묘함은 그대로 자약(自若)하다. 이것이 이통(理通)이라는 것이다..

 

기가 국(局)한다 함은 무엇인가. 기는 벌써 형적(形跡)에 섭렵한 것이라 본말이 있고 선후가 있다. 기의 근본은 잠일청허(湛一淸虛)26)할 뿐이니 어찌 찌꺼기, 재, 거름의 기가 있으랴마는 그것이 올랐다 내렸다 부동(浮動)하여 조금도 쉬지 않는 고로 천차만별로 변화가 생긴다. 이 기가 유행할 적에 그 본연을 잃지 않은 것도 있고 그 본연을 잃은 것도 있으니 이미 본연을 잃고 본즉 본연의 기는 벌써 있는 데가 없다. 편벽된 것은 편기(偏氣)요 전기(全氣)가 아니며, 청(淸)한 것은 청기(淸氣)요 탁기(濁氣)가 아니며, 조박(糟粕)27)과 연신(煙燼)28)은 조박·연신의 기요, 잠일청허(本然)의 기는 아니다. 이는 만물의 어디나 그 본연의 묘가 그대로 있지 않음이 없지마는 기는 그렇지 못하다. 이것이 소위 기국(氣局)이라는 것이다.”(편집자역)

 

라 하여 복잡 변화의 만수적(萬殊的) 방면에서도 이(理)의 본연적 성질상엔 호말(毫末)도 변화가 없고 오직 기의 변국(變局)을 따라 위치와 표현만 수이(殊異)함이 물의 표현이 아무리 방원(方圓)의 기(器)를 따라 다르고 공(空)의 표현이 아무리 대소(大小)의 병(甁)을 따라 다를지라도 물의 자성(自性)과 공(空)의 지성은 호말도 변화함이 없음과 같음을 증명하였다.

26) 잠일청허(湛一淸虛): 순수하여 잡된 것이 없이 맑음.

27) 조박(糟粕):술찌끼.

28) 연신(煙燼): 연기와 불탄 나머지.

 

곧 우주 만반의 사변이 다 기의 국한적 변화뿐이요 이의 자성은 어떠한 변화적 위치에 있더라도 유일 불변으로서 철두철미 보편적 공통적 실재임을 증명하였다.

 

곧 이는

“덜하지도 더하지도 않으며 생기지도 사라지지도 않으며 유일불변(편집자 역)”

의 보편적 실재성(實在性)으로서 기는

“때에 따라 생기고 멸하며, 곳에 따라 변화하며, 균등하지 않음(편집자 역)”

의 국부적(局部的) 유동체임을 말하며 이기 양자의 성질상 차이점을 지적하였다. 이는 곧 불가(佛家)의 진여무명론(眞如無明論)과 흡사한 사상이다. 선생은 아무리 이통기국 4자를 자가의 창견으로 말하였을지라도 불가의 진여연기론(眞如緣起論)으로부터 우러난 사상인 듯하다. 이에서 선생의 사상이 얼마나 불교의 영향을 입었음을 알 만도 하다.

 

4) 연기론(緣起論)

 

구경적 실재(究境的 實在)는 이기 양자로서 그의 차이성은 불변적 보편적 곧 이통(理通)이며 변화적 국부적 곧 기국(氣局)임을 단언한 선생의 이론상 순서는 물론 그의 연기론 곧 선천적 실재로부터 후천적 현상계에 향하여 발작 변화됨의 원동력이 무엇에 있는가 함이 잇따른 의문이 될 것이다. 곧 이기 양자가 선천적 구경적 실재라 할진대 발전 변화적 후천세계의 원동력이 이에 있을까 기에 있을까, 또는 이기 양자에 동일한 분배로 있을까, 이기 양자의 조화적 총합체로 있을까 함이 가장 큰 의문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선생은 그의 해답으로

 

“이는 무위(無爲)며 기는 유위(有爲)인 고로 기가 발하고 이가 편승한다(편집자 역)”

 

라 하여 형이상의 이는 일종의 무위무능성(無爲無能性)이며 형이하의 기는 일종 유위유능성(有爲有能性)이 있으므로 기의 자동자행적 발전 변화 지두(地頭)에 이의 '본연의 묘'가 수승수재(隨乘隨在)일 뿐임을 단언하면서 그를 다시 석명(釋明)키 위하여

 

“기가 발하고 이가 편승함은 무슨 말인가? 음양의 동정은 그 기틀이 스스로 되는 것이지 시킨 자가 있는 것이 아니다. 양의 움직임은 이가 움직임에 편승한 것이며 이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음의 고요함은 이가 고요함을 탄 것이지 이가 고요한 것이 아니다.” (편집자 역)

라 하며

 

“천도(天道)의 조화와 우리 마음의 발하는 것이 모두 기가 발하는 데 이가 탄 것이다.

이것은 기가 이보다 앞선다는 것이 아니다. 기는 유위(有爲)이고 이가 무위(無爲)인즉 그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다.”(편집자 역)

라 하여 우주의 연기적 원동력이 기에 전재(專在)함을 중복하여 설명하는 동시에 퇴계의 이기호발론(理氣互發論)에 대하여 반대의 기치를 들었었다. 다시 말하면 음기(陰氣)의 정(靜)함과 양기(陽氣)의 동(動)함이 그 기틀이 저절로 됨이요, 이의 명령적 소사(所使)가 아닌 동시에 음양 동정이 곧 음양 2기의 자동자정(自動自靜)으로서 그중에 본연지리 (本然之理)가 수승수재하였을 뿐임을 단언한 바이다.

 

그러나 만일 이상의 단안과 같을 뿐이라 하면 이는 일종의 무위무능적 육우기승(肉疣驥蠅)29)으로서, 기의 자동자행적 독무대상에 수승수부(隨乘隨附)한 우상뿐인 동시에 본체론상에서

 

“이는 기의 주재이고, 기는 이의 편승하는 바라.” (편집자 역)

고 하여 이기 양자의 자성적 방면으로서 이원적 실재임을 긍정한 단안과 저촉이 되므로 그의 모순점을 제거키 위하여

 

“발하는 것은 기이고, 발하는 소이(所以)는 이다. 기가 아니면 능히 발할 수 없고 이가 아니면 소발(所發)하는 것이 없다.”(편집자 역)

라 하며

 

“음의 고요함과 양의 움직임은 그 기틀이 스스로 된 것이며 그 음이 고요하고 양이 움직이는 소이가 이이다.” (편집자 역)

라 하여 다시 무위도승적(無爲徒乘的) 이(理) 위에, 소이(所以) 2자의 직임(職任)을 부여하였다.

29) 육우기승(肉疣驥蠅): 천리마에 붙은 파리 또는 혹.

 

그러나 그의 ‘소이’ 2자의 명의(命意)가 어디 있는가 함이 의문 중의 의문이다. '소이' 2자의 명의가 사령(使令) 또는 명역적 의의(命役的 意義)가 아니요 측면 관찰상의 법칙적 의미인 듯하다.

곧 우주의 발전 변화적 원동력은 기에만 있을지라도 그의 발전 변화케 되는 바의 법칙은 이라 하는 의미인 듯하다. 그러나 그는 본체론상에서 주장한 양성일체론에 대한 자가당착의 모순점을 구제키 위하여 부득이한 설명으로서 선생의 연기론은 유기적 일원론임을 단언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아무러나 선생의 양성일체적 실재론은 퇴계의 양원론(兩元論)의 영향을 받아 그에서 일보를 더 나아간 바요, 선생의 유기(唯氣,일원)적 연기론은 화담의 유기론과 불가의 아뢰야식연기론(阿賴耶識緣氣論)의 영향을받은 바가 많은 듯하다.

그와 동시에 선생은 퇴계의

“이기호발(理氣互發)의 양원적 연기론 곧 우주 발전 변화의 원동력이 이기 양자에 있다”

한 퇴계의 학설을 단연히 반대하였었다.

 

“이·기 둘은, 서로 떨어질 수 없다.

이미 떨어질 수 없는즉, 그 발용(發用)도 하나다.

그러니 이기에 각각 발용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만일 그렇게 말한다면, 이것은 이가 발용할 때에 기가 혹시 미치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며, 기가 발용할 때에 이가 혹시 미치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러면 이기는 서로 떨어지고 합함이 있을 것이며, 선후가 있고 움직임과 멈춤의 끝이 있으며, 음양은 그 시작이 있을 것이니 매우 틀리는 말이다.”(편집자 역)

라 하며

 

“만일 주자도 참으로 이와 기가 서로 발용함이 있다고 하였다면 이는 주자도 잘못인 것이다.”(편집자 역)

 

라 하여 퇴계의 이기호발론을 여지없이 공격하였었다. 그는 물론 퇴계의 순연한 이기 양원론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양성일체론과 유기적 연기론을 주장한 선생으로서는 당연한 결과적 단안이라 할 만하다.

 

5) 사칠론(四七論)

 

근저(根柢)가 다르면 물론 지엽도 결과도 따라서 다를 것이다. 본체론과 연기론에서 주장이 달라온 퇴계·율곡 양 선생의 사상은 사칠론에서도 각기 자가의 특수적 근거를 따라 관찰이 다르게 되었다. 양원적 본체론의 결과로 이기호발론을 주장하던 퇴계는

 

“도의 마음에서 발한 것이 이이며, 사람의 마음에서 발한 것이 기이다.”(편집자 역)

라 하고

 

“사단은 이가 발하고 기가 그것을 따른 것이며, 칠정은 기가 발하고 이가 그것을 타는 것이다.”(편집자 역)

라 하여 오인의 심리상 사·칠 양자의 호발적 작용을 주장하여 철두철미 양원적 우주관을 세웠었다.

 

오인의 지식적 충동의 요구는 구경적(究竟的)이 아닌 양원론에 만족을 얻지 못함은 인도에서도 구주에서도 왕왕히 보는 바와 같이 당시에 퇴계의 문도(門徒) 중에서도 기고봉(대승)이 그의 비구경적(非究竟的)임에 치의(置疑)하여 사칠론에 대한 왕복 변론(往復辯論)이 있어 왔었다. 더우기나 양성일체론의 결과로 유기적 연기론을 주장하던 율곡 선생은 사칠론에서도 퇴계의 학설을 반대하지 아니할 수 없게 되었었다.

 

“우리 마음의 발용은 천지의 조화라. 천지의 조화는 두 개의 근본이 아닌 고로 우리 마음의 발용도 두 개의 근원이 아니다.”(편집자 역)

라 하며

 

“천지의 조화가 곧 우리 마음에서 발하는 것이니 천지에 이화(理化)·기화(氣化)의 구별이 있다면 우리의 마음에 이발(理發)·기발(氣發)의 구별이 있겠지마는 천지에 이미 이화·기화가 있지 아니한데 우리의 마음에 어찌 이발과 기발이 따로 있겠는가. 만일 우리의 마음이 천지의 조화와 다르다 하면 그런 말은 나의 알 바 아니다.”(편집자 역)

라 하여 맹렬한 반대론을 들으며 그를 석명(釋明)키 위하여 다시

 

“사단은 칠정의 선한 일변이고, 칠정은 사단의 집합체이니 어찌 일변과 집합체를 상대적으로 말할까.” (편집자 역)

라 하며

 

“일곱 가지 밖에 다른 정이 없으며, 사단은 다만 선정(善情)의 별칭이다.

칠정을 말하면 사단은 그라 하며 사단 칠정이 곧 동일한 감정으로서 이성적 양 물건이 아님을 설명하고 한 걸음 좀 나아가서 가운데 있는 것이다.”(편집자 역)

 

“소위 기가 발하는 데 이가 탄다는 말을 옳다 하겠다. 그러나 칠정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사단도 역시 기가 발하는데 이가 타는 것이다.”(편집자역)

라 하여 퇴계의 호발적 사칠론을 반박하고 그를 증명키 위하여

“젖먹이가 우물에 빠짐을 본 후에야 측은한 마음이 생기는 것은 소위 기가 발하는 것이요, 측은함의 근본은 인(仁)이니, 이는 소위 이가 탄 것이다.”(편집자 역)

라 하였었다.

이가 곧 유기적 일원적 연기론의 우주관을 가지신 선생이 주장하던 사칠론이다. 그와 동시에 인심도심(人心道心)의 문제에 대하여서도

 

“혹은 성명(性命)의 올바름에 근원하며, 혹은 형기(形氣)의 사사로움에서 생긴다.”(편집자 역)

라 한 주자의 학설과

 

“도심은 이에서 생기고 인심은 기에서 생긴다.” (편집자 역)

라 한 퇴계의 사상을 의거하여 미혹적 질문을 계속적으로 제출하는 우계(牛溪)의 사상을 바로잡아 주셨다. 그래서 사단칠정의 발용(發用)은 물론이거니와 인심도심의 발원도 기적 일원(氣的一元)에 있음을 단언하였었다.

 

6) 선생의 학설의 장소(長所)와 결점

 

선생의 학설을 개괄하여 말하면 퇴계가 화담의 유기론에 대한 반동으로이기 양원을 주장함과 같이 선생도 또한 퇴계의 불철저한 양원론에 대한 반동으로 양성일체론을 주장한 바이다.

 

인도와 서양에서도 思想 발달 史上에 왕왕히 보는 바와 같이 유물론의 뒤에 심물양원론(心物兩元論) 또는 양성일체론이 이어 남은 사상 발달의 공례(公例)이며 순서이다. 그러므로 선생의 사상은 화담과 퇴계의 사상을 계승하는 동시에 그네의 모순과 결함된 점을 수정하고 보충하려 하였었다. 이기 양원의 실재를 주장한 점은 퇴계 사상에서, 기적 일원(氣的一元)의 실력을 인정한 점은 화담 사상에서 얻어온 듯하다. 동시에 동적방면(動的方面)에서는 퇴계의 호발론과, 실재적 방면에서는 화담의 유기론이 다 그릇됨을 지적하였었다.

 

그러나 선생의 사상상에서도 두셋의 모순점이 없지 않은 듯하다. 필자와 같은 천견후학(淺見後學)으로 선생의 사상을 비평코자 함은 황공한 바이오나 부득이하여 2, 3 실례를 다음에 들어 보고자 하는 바이다.

 

① 본체론상에서는 기(氣)의 자성적 방면으로부터 독립적 실재성을 긍정하면서 성질론상에서는 기의 생멸 변화 또는 차별성을 부여함이 가장 모순된 점이다.

 

만일 기가 실재물이라면 생멸이 없고 변화가 없고 차별이 없을 것이요, 만일 생멸, 변화, 차별이 있다면 그는 실재가 아닐 것이다.

 

② 본체론상에서는 이기 양자의 양성일체적의 실재론을 주장하면서 연기론상에서는 이(理)는 오직 무위도승(無爲徒乘)으로서 동정 변화(靜變化)가 전혀 기의 자행자지(自行自止)뿐인 동시에 비유사지(非有使之)라 단언함이 제2의 모순점이다.

 

첫째, 연기적 원동력이 기에 있을 뿐으로서 이는 무위도승의 우상뿐이라면 이는 무론 사물(死物)이라 실재가 아닐 것이요, 이가 만일 실재라면 연기상에서도 무위도숭의 우상이 아닐 것이다. 선생은 이러한 자가당착점을 변호하기 위하여

“발하는 소이가 이이다(所以發者理也)”

하며,

“음이정(靜)하고 양이 동(動)하게 하는 소이가 곧 이(所以陰靜陽動者理也)”

라 하여, 이 위에 ‘소이(所以)' 2자의 직임을 부여하였으나

“기틀이 스스로된 것이요, 시켜서 된 바가 아니다(其機自爾 非有使之)”

며,

“발하는 것은 기다(發之者氣也)”

라 하며

“음이 정하고 양이 동함은 그 기틀이 스스로된 것이다(陰靜陽動其爾機自爾)”

등의 말이 있을 때에 벌써 우주의 발전변화가 기의 임의적 자행자동으로서 이의 무위무관함을 표현한 이상에는 ‘소이’ 2자가 아주 무의미한 허명사(虛名詞)에 지나지 못한 바이다.

 

그러므로 유이론(唯理論)을 주장하는 기노사(奇蘆沙;正鎭)가 이에 대하여 반기를 든 바이다.

 

③ 선생은 화담의

“한 기는 오래 존재한다. 간 것은 지나가고, 온 것은 계속되지 못한다.”(편집자 역)

라 하며

“모이고 흩어짐은 있으나 유무(有無)는 없다.”(편집자 역)

라 한 물질불멸론을 반대키 위해

 

“이는 변하지 않으나 기는 변한다. 원기(元氣)는 생생하여 쉬지 않는다. 간 것은 지나가고 온 것은 계속되나 이미 간 기는 이미 있는 데가 없다.”(편집자 역)

라 하였었다.

마는 이가 곧 선생의 학설상 제3의 모순점이다. 만일

“간 것은 지나가고, 온 것은 계속되나, 이미 간 기는 이미 있는 바가 없다.”(편집자역)

라 하면 '간 것은 이미 없어진다(往者已滅)’커니 ‘온 것은 어디에 생기는가(來者何處生)'라고 함이 가장 큰 의문일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지난 기가 이미 소멸되었다면 오는 기는 어디로부터 화생(化生)할 것인가? 만일에 생기(生氣)가 사멸한다면 순환이 없을 것이요, 순환이 없으면 우주는 영원히 사멸이 되고 말 것이다.

 

이가 물론 기의 생멸 변화를 긍정하는 기국론(氣局論)으로부터 온 듯하다. 마는 동정음양무시(動靜陰陽無始)라 하며 원기생생불식(元氣生生不息)이라 한 자기의 사상에도 모순당착이 되는 바이다.

 

하물며 물질불멸론을 과학적으로 긍정하는 현대에 있어서는 화담의 사상에 우단30)치 아니할 수 없는 동시에 선생의 이 사상이 정견(正見)에 일루(一累)가 됨을 면치 못할 듯하다.

30) 우단(右袒) : 한쪽의 편을 듦..

 

 

6. 결론

 

그러나 이는 다 선생의 37세의 청년시대에 발표된 사상이요, 더구나 정치적 생애에 분골(奔汨)한 시기에 사색한 바이므로 이러한 결점이 없지 못할 것이다.

 

만일 선생의 천재(天才)로써 화담의 독학과 퇴계의 수구(壽耉)31)를 겸하셨다면 그의 학문상 성취가 참으로 위대하였으련만 위치의 분망함과 수구의 단천(短淺)함으로 인하여 천재를 본능과 같이 확충치 못하고 49세의 청년으로서 중도에 돌아가셨음은 참으로 유감이라 할 만한 바이다.

31) 수구(壽耉): 늙은이가 될 때까지 삶.

 

(본문은 대정 10년 10월, 「개벽」잡지에 써주었던 글을 밑천으로 하고 다시 증가하고 수정하여 낸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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