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상로(權相老)
1879∼1965. 승려, 불교학자. 호 퇴경(退耕). 경북 문경 생. 문경 금룡사에서 승려가 된 후 불교전문강원을 수료, 동국대 초대 총장 등을 역임. 사망 후 대종사(大宗師)의 법계(法階)에 오름.
저서에 「조선문학사」, 「퇴경역시집(退耕譯詩集)」, 「고사성어사전」, 「조선불교약사(朝鮮佛敎略史)」, 「조선선교사(朝鮮禪敎史)」, 한국지명연혁고(韓國地名沿革考)」 등이 있음.
1. 서언(緖言)
인도의 불교가 지나를 거쳐서 조선에 들어온 지 무릇 1,560여 년 동안에 고승의 배출이 도마죽위(稻麻竹葦)1)같았지마는 그중에서 가장 교초(翹楚)2)될 만한 대표적 인물을 들자면 누구나 주저치 않고 신라의 원효, 의상, 혜초, 자장, 고구려의 아도(阿道), 보덕(普德), 백제의 겸익(謙益), 고려의 의천(義天), 보조(普照)와 및 이조의 청허(淸虛)를 굴지(屈指)할 것이다.
1) 도마죽위(稻麻竹葦): 벼와 마와 대나무와 죽처럼 많음을 일컬음.
2) 교초(翹楚): 뭇사람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사람의 비유.
그러나 그들이 모두 불법을 연구하고 불교를 위하여 일생을 자자한 점으로는 누구나 동일한 바이지마는 각각 그 소장(所長)을 따라서 발휘한 바가 같지 아니하여서 법고경명(法鼓競鳴)3)의 관(觀)이 있으니,
말하건대 아도는 동방의 초조(初祖)이지마는
의상의 화엄(華嚴), 보덕의 열반(溫槃), 보조의 선종(禪宗), 겸익의 번역이 각각 일종(一宗)을 천양(闡揚)4)함에 그치었다 하여도 과언의 허물이 없겠으나
원효는 화엄 이외에 통불교(通佛敎)로써,
의천은 장경(藏經) 등 사업으로써,
청허는 근왕보국(勤王報國)하는 군략으로써 다만 신라, 고려, 조선 그 당시의 국조에만 탁연히 특출할 뿐 아니라 실로 조선 불교계에 전적 대표됨에 조금도 과람(過濫)이 없는 바인즉
진실로 청구불교(靑丘佛敎)5)의 은파(恩波)에 목욕한 우리들은 입마다 찬송하고 손마다 막배(膜拜)할 바이거늘 이제 둔졸(鈍拙)한 붓을 들어 희세(稀世)의 고승인 청허선사를 술(述)하려 함에 마치 추(錐)로써 대지를 경(耕)하고 여6)로써 창해를 구7)하려 하는 감이 있음을 자금(自禁)치 못하는 바이나 이로 유(由)하여 청허의 공업(功業)을 일인이라도 아는 자가 있다면 이는 불마(不磨)8)의 광영일까 한다.
3) 법고경명(法鼓競鳴): 불법을 가지고 서로 경쟁함.
4) 천양(闡揚):드러나 밝혀서 두루 퍼지게 함.
5) 청구불교(靑丘佛敎):우리나라 불교.
6) 瓥(예): 표주박.
7) 구(仇): 잔(盞)질함.
8) 불마(不磨): 불후(不朽).
2. 대사의 경력
대사의 법휘(法諱)는 휴정이요 자는 현응(玄應)이며 성은 완산최씨(完山崔氏)요 청허는 그 법호인데 묘향산에 많이 있었으므로 묘향산을 서산(西山)이라 하여 호를 서산이라고도 하였고 또한 조계종 노덕(老德)이므로 조계 퇴은(退隱), 조계 노납(老納)으로 쓰는 때도 있었고 사대명산 (東皆骨, 西九月, 南智異, 北香山)에 모두 주석(住錫)하였으므로 금강산 퇴은(退隱), 백화도인(金剛山白華庵道人), 풍악산인(楓岳山人), 두류산인(頭流山人), 묘향산인(妙香山人)으로 쓴 데도 종종 있다.
내외 현고조(玄高祖)는 모두 태종 때 용호방(龍虎膀)9)에 참여하여 창화(昌化; 양주)로 이거하였기 때문에 창화가 곧 병주고향(竝州故鄕)10)이었고 그 외조 김우(金禹)는 현윤(縣尹)으로 있다가 연산조에 득죄하고 안릉(安陵;安州)으로 적거(謫居)하게 되어 드디어 관서(關西) 백성이 되었다.
9) 용호방(龍虎膀):조선조 때 문·무과에 합격한 사람의 이름을 게시하던 나무판.
10) 병주고향(竝州故鄕): 중국 당나라 가도(島)가 병주에 오래 살다가 떠날 때 한 말. 제2의 고향을 말함.
부의 휘는 세창(世昌)이니 평양 기자전감(箕子殿監)이었고 모는 한남김씨(漢南金氏)라 50까지 무자하더니 중종 14년 기묘에 일몽(一夢)을 득한즉 어떤 노파가 내(來)하여 왈
“장부자(丈夫子)를 배태하실 터이므로 내하(來賀)하노라.”
하더니 익년 경진 3월에 과연 대사를 탄생하였다. 3세 때 등석(燈夕; 4월8일)에 그 부가 등하(燈下)에 취와(醉臥)하였더니 비몽간에 일 노옹이 내하여 왈
“소사문(小沙門)을 찾아왔노라.”
하고 양손으로 대사를 추켜들고 무어라 두어 마디 중얼거리더니 정상을 만지며
“차아(此兒)의 이름을 운학(雲鶴)으로 하라.”
하고 인홀불견(因忽不見)하므로 아명을 운학이라 하였다.
아이적 유희에도 항상 돌을 세워 불(佛)이라 하거나 모래를 모아 탑을 만들거나 하더니 점차 장성하매 풍신(風神)이 영수(英秀)하고 학문에 게을리 아니하며 효로써 친(親)을 사(事)하므로 주쉬(主倅)11) 이사증(李思曾)이 심히 사랑하였다.
11) 주(主倅): 고을의 장관.
9세에 모친을 잃고 10세에 부친을 잃어 영정(零丁)12) 한 신세가 의탁이 없게 되었다. 그의 숙부가 있었으나 능히 그 당시에도 그 장질을 부호(扶護)13)하지 못할 뿐 아니라 대사의 만년까지도 오히려 의지가 불상합(不相合)하였으니 대사의 〈상숙부서(上叔父書)〉에
“엎드려 빌건대, 은혜를 제대로 입지 못해 조실부모하고 상문(桑門)14)에 기대어 구차히 살아 부끄러운 마음이 첩첩합니다. 혹은 강촌에서 구걸하니 서리와 바람이 뼈에 사무치고 혹은 석실(石室)에 가부좌하고 앉으니 원숭이와 학이 이웃이 됩니다.… 일만 이천 봉 봉우리에 외로이 기거하며 천계녹수(千溪綠水)에 일신을 허하나이다. 구름 밖 고향고개를 바라보면 구슬 같은 눈물이 옷섶을 적시고 꿈에라도 양친을 뵈오면 가슴이 메입니다. …삼산(三山)의 봉우리 형태는 홀로여서 형도 없고 아우도 없고 사해(四海)의 부평초 같은 신세로 추위와 열기를 참아 냅니다. 남과 북으로 눈을 들어도 부모가 없읍니다. 동이나 서로도 지팡이가 벗이 됩니다. 짧고 거친 베로 된 누더기옷으로 무릎을 감추고 송홧가루가 근근히 끼니가 됩니다. 비록 병이 들어 죽더라도 누가 슬퍼하겠읍니까? 비록 굶어 동사한들 누가 위로해 주겠읍니까?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숙부는 살아 계시니 아버님의 정을 생각하지 못하고 이처럼 저를 박대하실 수는 없읍니다. 만일 숙부가 죽고 제 아버님이 살아 계신다면 숙부의 자식을 생각지 말라는 말입니까. 그런데 숙부의 마음은 어찌된 일입니까? 신체는 비록 백년 사이에 다하나 천년 아래로 영령은 다하지 않습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죽을 때까지 일관합니다. 옛말에도 있듯이 나를 배부르게 하고 다른 이를 생각지 않는 것이나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나를 돌보지 않음이 어찌 아비의 정이겠읍니까? 저의 원통함입니다.”(편집자 역)
12) 영정(零丁): 외롭고 의지할 곳이 없는 신세.
13) 부호(扶護): 부양하여 보호함.
14) 상문(桑門) : 절 문. 절․
이로써 추상(推想)하여 고고궁로(孤苦窮露)하던 정형(情形)은 짐작하기가 불난(不難)하니 「맹자(孟子)」의 이른바
“천(天)이 이 사람에게 대임(大任)을 내릴 때 반드시 먼저 그 마음을 괴롭게 하고 그 몸을 피로케 한다." (편집자 역)
라는 말씀을 이에서 실험할 수 있는 바이다.
대사를 극히 사랑하던 이사증은 대사의 이러한 지경에 빠짐을 차마 그대로 두지 못하여 경성으로 데리고 돌아와서 반궁15)에 취학시켜 3년이나 있었다.
15) 반궁(泮宮) :성균관과 문묘를 통틀어 이르는 말.
그러나 대사는 항상 심지가 울울불락하던 차에 관하(館下)에서 전예(戰藝)하다가 인(人)에게 재굴(再屈)16)하고 드디어 동학(同學) 수인으로 더불어 발분남유(發憤南遊)하니 초의(初意)에는 수업사(受業師) 박상(朴祥;訥齋)이 호남에 안비17)하므로 수왕(隨往)하여 독서코자 함이러나 이에 이르러서는 박공이 벌써 환경(還京)한지라.
16) 재굴(再屈): 다시 굽힘.
17) 안비(鞍轡): 안장과 고삐.
부득이 지리산에 입(入)하여 산수의 승(勝)을 탐(探)하며 내전(內典)도 피열(披閱)18)함에 호시(怙恃)19)를 조실한 통(痛)과 생사의 무상한 감이 심절(深切)하다가
“마음을 비우고 급제한 자가 곧 대장부다(心空及第者 須大丈夫漢)”
이라는 구절에 이르러 각오한 바 있어 출세의 지(志)를 결(決)하고 동반을 사결(辭訣)하며
“물을 길어서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머리를 돌리니
청산은 무수히 흰구름 가운데 있다” (편집자 역)20)
라는 시를 작하였다.
18) 피열(披閱): 열람함.
19) 호시(怙恃): 부모. 자식이 부모를 믿어 의지한다는 뜻.
20)“汲水歸來忽回首 靑山無數白雲中”
때는 21세라 드디어 발(髮)을 숭인장로(崇仁長老)에게 체(剃)21)하고 법(法)을 영관대사(靈觀大師)에게 수(受)하고는 7, 8년간 명산을 편답(遍踏)하다가 33세 때는 곧 문정왕후(文定王后) 윤씨가 수렴(垂簾)하여 연산 이후로 폐지되었던 선·교(禪敎) 양종을 부활시키고 승과를 다시 시취(試取)하던 명종 7년 임자라, 허응(虛應) 보우대사(普雨大師)의 감선(監選)에 응시하여 급제를 중(中)하고 대선(大選)의 법계(法階)를 받은 후 차차 승진하여 36세 되던 을묘 4월에는 교종판사(敎宗判事)가 되었다가 3개월 후에 또 선종판사(禪宗判事)가 되어 선·교양종사를 겸판하였다.
21) 체(剃): 머리를 깎음.
하루는 번연히 탄식하여 왈
“출가한 본지(本志)가 어찌 이에 있으랴.”
하고 곧 판사의 인수(印綬)를 해(解)하고 운유(雲遊)의 석장(錫杖)을 짚었으니 곧 37세 때였다.
3. 대사의 도학(道學)
대사는 그길로 금강산으로 장왕(長往)하여 〈삼몽음(三夢吟)〉을 지어 왈
“주인은 객에게 꿈을 말하고
객은 주인에게 꿈을 이야기하네
이제 꿈을 말하는 저 두 나그네들
역시 꿈 가운데 사람이로다”(이병주 역)22)
22) “主人夢說客 客夢說主人 今說二夢客 亦是夢中人”
라 하고 미륵봉(彌勒峰) 밑에 거하다가 산월(山月)이 승공(昇空)하여 천지가 황연(晃然)함을 보고 이연자득(怡然自得)23)하여 시를 지으니 그 말구에
"누가 한 승려의 옷 속에 있는 천 개의 부스럼을 알리오
다리 셋인 금오(金烏)24)가 한밤중 하늘을 나르네” (편집자 역)25)
라 하였다.
23) 이연자득(怡然自得):흡족하여 스스로 기꺼워함.
24) 다리 셋인 금오(金烏): 중국 고대 신화의 하나로 곧 해에서 산다는 발 셋 가진 까마귀. 태양을 달리 이르는 말이기도 함.
25)“誰知一納千瘡裡 三足金烏半夜飛”
봉성(鳳城)을 지나다가 오계성(午鷄聲)을 듣고 홀연히 애체(礙滯)26)가 박락(剝落)27)되어서
26) 애체(礙滯): 막혀 쌓임.
27) 박락(剝落): 벗겨지고 떨어짐.
“머리는 희나 마음은 세지 않는다
옛사람 그렇게 말했었지
이제 한 소리 닭 울음 들으니
장부의 할 일이 끝났는가 싶네
홀연히 자기의 것을 얻었으니
일마다 모두 이러할 뿐
수많은 금보 같은 대장경도
알고 보면 한 점의 텅빈 종이로구나”(편집자 역)28)
28) “髮白非心白 古人曾漏洩 今聽一聲鷄 丈夫能事畢 忽得自家底 頭頭只此爾 萬千金寶藏 元是一空紙”
라 하고 묘향산 향로봉에 올라서는
“만국(萬國)의 도성(都城)이 개미집이요
고금의 호걸들도 바구미 벌레 같구나
창으로 스며든 밝은 달빛 아래 청허(淸虛)하게 누우니
끝없는 솔바람의 운치가 별미로구나” (편집자 역)
라 하여 자가(自家)의 소증(所證)한 경계를 농현(弄現)하였다.
이와 같이 대사는 도승인 동시에 시승(詩僧)이어서 지은 바 시가 세(世)에 전파되어 인구에 회자하였으니 이월사상공(李月沙 相公;廷龜)이 찬한 대사 비(碑)에
“내 나이 아직 어릴 때 이미 휴정 스님의 이름을 들었거니 그 시는 사람들 사이에 많이 전해져 한번 뵙기를 고대했으나 뵐 수 없었다.”(편집자역)
라 함이 족히 좌증(左證)되는 바이다.
그러므로 대사의 시성(詩聲)이 천청(天廳)에까지 사무쳐 있던 바인데, 선조 22년 기축에 정여립(鄭汝立)의역옥(逆獄)이 일어나매 전상고인(傳相告引)29)하여 사소한 사혐으로 염외(念外)에까지 파급하니 요승 무업(無業)이 역시 대사와 여하한 혐극(嫌隙)30)이 있었던지 정과 간련(干連)31)이 있다 밀고하며, 대사의 향로봉시로써 불궤(不軌)의 의(意)를 포함하였다 하므로 전옥(典獄)에 체계(逮繫)되었으나 미기(未幾)에 석방되었으니 하나는 선조께서 그 시명(詩名)과 도예(道譽)를 소문(素聞)함이요, 둘은 그 집(集) 중에 군상축리(君上祝釐)32)의 문구가 다(多)함이요, 셋은 그 공사(供辭)33)가 개절명백(剴切明白)34)함이었다.
29) 고인(告引):죄를 범했을 때 갑은 을의 죄를, 을은 병의 죄를 끌어내어 서로 자기의 죄를 면하려는 것.
30) 혐극(嫌隙): 혐오하고 거리낌.
31) 간련(干連): 남의 범죄에 관계됨.
32) 군상축리(君上祝釐):왕에게 올리는 축하의 말.
33) 공사(供辭): 죄인이 범죄 사실을 진술하는 말.
34) 개절명백(剴切明白):아주 적절하고 분명함.
“중의 무리들이 혐극을 많이 하여 묘향산의 중 휴정도 또한 체포되었으나 국문한즉 휴정의 문집이 있는지라 보니 왕의 칭송의 가사가 많아 왕이 즉시 명하여 석방시키다.”(「선조실록」23년 경인 4월 삭 임신조 24권 9장)
“기축(己丑)에 역적을 도왔다고 잘못 잡아오니 왕이 보시고 추호의 죄가 없음을 알고 말하되 어찌 운림(雲林)의 객(客)으로 요망한 일을 하리오 하고 시집을 친히 보시다.”(鞭羊彥機 撰〈大師行狀〉)
“일찌기 여립의 옥사에 체포되었으나 목릉(穆陵)35)이 그 죄 없음을 살피시고 놓아 주니 시고(詩稿)를 받들어 보이다.”(李秉模 撰〈寧邊酬祠碑〉)”
35) 목릉(穆陵): 동구릉의 하나로 선조와 그 비의 능. 여기서는 선조를 가리킴.
“대사는 불전(佛前)에 패(牌)를 베풀고 항상 임금의 만수를 기원하니 묘향산의 승려들이 모두 이를 따른다.”(상동)
“기축의 옥(獄)에 요승 무업이 무고하여 대사가 체포되었으나 공사(供辭)가 분명하여 선조께서 그 억울함을 아시고 석방했다. 시를 올려 보이니 매우 칭찬하였다.”(이정구 찬 <청허대사비>)
“기축 반역 옥사가 일어났을 때 요승이 무고한 까닭에 체포되었으나 옥사에 대한 것이 밝게 되며 선조께서 그 이름을 들으시고 즉시 석방을 명했다.”(谿谷 張維 撰〈청허대사비〉)
그 환향시(還鄕詩)에 (2수 중 하나를 기록한다)
“조무라기 아이들 창문으로 보고
백발의 이웃 노인 뉘냐 묻는다
아이적의 이름 대니 눈물이 흘러
푸른 하늘 바다인 듯 달은 첫새벽”(이병주 역)36)
36) “一行兒女窺窓紙 鶴髮隣翁問姓名 乳號方通相泣下 碧天如海月三更”
과 행각승(行脚僧)에
“봄은 동해바다 남쪽에서 날아들고
가을은 서산과 북방으로 향한다
삼백 예순 날 하냥 뒤숭숭하니
어느 때야 고향에 갈지 알지 못하네” (편집자 역)37)
37)“春從東海南飛錫 秋向西山又北方 三百六旬長擾擾 不知何日到家鄕”
같은 것은 조탁(彫琢)을 가하지 않고 시구성장(矢口成章)38)하여 비록 노구(老嫗)라도 가해(可解)하겠으나 그 핍진한 묘사는 경인(驚人)치 않을 수 없으며 싯구 외에도 〈청야사(淸夜辭)〉, 〈임하사(林下辭)〉, 〈산중락(山中樂)〉, 〈청허가(淸虛歌)〉 제편(諸篇)은 도인(道人)의 활계(活計)를 화반탁출(和盤托出)39)하였고 〈돈교송(頓敎頌)〉, 〈선교결(禪敎訣)〉, 〈심법요초(心法要抄)〉, 〈선교석(禪敎釋)〉 제편은 학자의 괄막금비40)라 종문(宗門) 고조사(古祖師)에 손색이 소무(少無)한 바이며 <자락가(自樂歌)>의 말(末)에
“그 머무름은 그치지 않고
그 움직임이야 서서히 하며
우러러보고 웃으며
엎드려 탄식하노니
출입에 문이 따로 없고
천지가 주막이로다” (편집자 역)
라 한 단가(短歌) 1장(一章)으로도 대사의 일생 행장을 상상할 수 있는 바이다.
38) 시구성장(矢口成章):입에서 나오는 대로 시장(詩章)을 읊음.
39) 화반탁출(和盤托出):음식물을 소반에 차려서 들고 나온다는 뜻으로 일체 남기지 않고 드러냄을 이름.
40) 괄막금비 : 금비녀 같이 깎고 다듬음.
4. 대사의 지우(知遇)
선조께서는 옥중에 있는 대사의 무죄함을 하촉(下燭)하시고 즉시에 명석(命釋)하시며 대내(大內)로 불러 보시고 어서(御書)하신 당시 절구(唐詩絶句)와 및 어화묵죽(御畫墨竹)을 하사하시고 위유(慰諭)하시며 시를 지어 바치라 하시므로 대사는 그 즉석에서 묵죽 화제(畵題)로
“소상강의 대나무 가지가
성상(왕)의 붓에 살아났도다
산승(山僧)이 향내를 찾으니
잎사귀마다 가을 소리가 달렸네” (편집자 역)
라 제진(製進)하니 선조께서도 역시
“잎사귀 붓끝에서 나왔고
뿌리는 땅에서 나오지 않았도다
달이 떠올라도 그림자가 없으니
바람이 불어도 소리가 들리지 않는구나”(편집자 역)41)
라고 화답하셨다.
41) “業自毫端出 根非紙面生 月來無見影 風動不聞聲”
고래로 군신 제회(君臣際會)를 운룡풍호(雲龍風虎), 어수(魚水)42)에 비유하며 그 어려움을 천재일우로 말하는 바이다. 허신구치(許身驅驅)43)하여 휴척(休戚)44)을 여동(與同)하는 고굉주석(股肱柱石)45)에도 그다지 쉽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초야의 은사이며 하물며 방외(方外)의 도인이랴.
42) 운룡풍호(雲龍風虎), 어수(魚水):용이 구름을 좇고 범은 바람을 따르며 물고기가 물을 만났다는 뜻으로 성주(聖主)가 현명한 신하를 얻음을 말함.
43) 허신구치(許身驅恥):몸을 던져 줄곧 치달음.
44) 휴척(休戚):안락과 근심 걱정.
45) 고굉주석(股肱柱石):임금이 가장 믿는 신하.
불교가 전성시인 신라, 고려에는 국군(國君)의 구의사사46)를 받은 왕사, 국사가 허다하였지마는 그때는 으례 인천사(人天師)로 대접하여 도덕이 조금만 수이(殊異)하여도 영예가 풍미하고 귀경(歸敬)이 운분(雲奔)하던 시대일 뿐 아니라 그들은 모두 계산운월(溪山雲月)에 잠거(潛居) 포도(抱道)하여 자연히 나타나는 덕형(德馨)에서 세주(世主)의 숭앙을 받았지마는, 대사는 그와 달라서 정령(政令)으로써 종파를 폐합하고 사찰을 축소하고 승수(僧數)를 지정하고 도첩(度牒)47)을 금단하고 승과를 정지하고 전결(田結)을 삭감하고 노비를 이속(移屬)하고 입성을 금하고 배속(拜俗)을 명하여 배척 압박을 거듭하여 안으로는 혜명(慧命)이 현사(懸絲)48)같고 밖으로는 독수(毒手)가 일가(日加)하던 때인즉 설사 원효, 의상, 보덕, 의천 같은 고승이 산림 중에 있다 하여도 그 도덕 여하를 거세(擧世)에 알아볼 리 없을 터인데, 하물며 대역부도의 당인(黨引)에 피험 체포되어 유설49) 중에 있음이랴.
46) 구의사사(摳衣師事) : 예를 갖추어 스승으로 모심. 摳衣:옷을 걷어 올려 스승을 공경함
47) 도첩(度牒): 중이 되어 수계(受戒)하였을 때에 정부가 윤허하는 증명.
48) 현사(懸絲): 늘어진 실.
49) 유설 : 잡혀 갇힌 몸.
천일(天日)이 밝아서 복분(覆盆)50)의 아래에 내침도 광세희유(曠世稀有)한 일이지마는 18층 이리51)에서 입지성불(立地成佛)하는 격으로 질곡을 벗으며 용안을 뵈옵고 서화의 총사(寵賜)와 시운(詩韻)의 갱진52)이 있음은 상하천고(上下千古)에 오직 대사가 홀로 얻은 바이다. 매사에 고상하나 위급함에 대하여서는 미적거리며 응하던(高尙其事 迫而後應) 고조사(古祖師)들과 동일(同日)에 말할 바 아니다.
50) 복분(覆盆): 억울한 죄를 뒤집어 쓰고 바로잡을 길이 없음을 비유.
51) 이리 : 범어 Niraya. 지옥.
52) 갱진(賡進) : 임금이 지은 시가(詩歌)에 화답하는 시가를 지어 임금에게 바침.
5. 대사의 근왕(勤王)
추(秋)는 병상(兵象)인즉 대사의 제진한 시에
“잎사귀마다 가을 소리가 달렸도다(葉葉帶秋聲)”
구가 시참(詩讖)53)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태평연월(太平烟月)을 구가하고 민부지병(民不知兵)하던 선조 25년 임진 4월 13일에 청홍(靑虹)이 궁정(宮井)에서 일어나며 천고(天鼓)가 손유(巽維)54)에서 울리더니 일본병 25만이 병함 4만여 소를 몰아 현해(玄海)를 덮어 부산에 상륙하니 이른바 8년 풍진의 임진란이라.
53) 시참(詩讖):무심히 지은 자기의 시가 우연히 뒷일과 꼭 맞는 일.
54) 손유(巽維):동남쪽
제1봉(鋒)에 부산이 함락하고 익일에 동래가 실수(失守)하고 15일이 병영이 궤산(潰散)되고 16일에 양산(梁山), 울산이 패하고 17일에 밀양이 함(陷)하고 승승장구하여 25일에는 상주가 함락하고 28일에 충주가 함락되니 조야가 흉흉하여 부득이 거빈55)하시기를 결정하고 4월 30일에 거가(車駕)는 폭우를 무릅쓰고 서로 파천의 길을 떠나시고 5월 3일에는 경성까지 실수(失守)하고 6월 1일에는 임진(臨津)이 함몰되고 15일에는 평양이 붕궤(崩潰)하였다.
55) 거빈(去邠): 서울을 버림.
대가(大駕)는 6월 23일에 의주에 이르러서 지진두(地盡頭)56)에 계시며 도만(渡灣)을 유예하시던 때에 대사는 도를 장(仗)하고 행재소에 진알(進謁)하니 선조께서 하교하시되
“세상의 난리가 이와 같으니 그대는 가히 나라를 널리 구하라.”(편집자역)
하시므로 대사는 체읍배명(沸泣拜命)하고 아뢰되
“국내 치도(緇徒)57)가 노병(老病)하여 행오(行伍)에 불임(不任)할 자는 재지(在地)에 분수(焚修)58)하여 신공(神功)을 빌게 하고 그 여(餘)는 신이 통솔하고 군전(軍前)에 나아와 충적(忠赤)을 바치오리다.”
함에 선조께서 가상히 여기시어 8도16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摠攝)을 삼으시고 방백에게 하유(下兪)하시어 예우하라 하셨다.
56) 지진두(地盡頭):더하여 볼 나위 없이 된 판. 또는 중앙에서 멀리 떨어져 바다와 경계를 이룬 땅.
57) 치도(繼徒):승려.
58) 분수(焚修):향을 피워 수양함.
대사는 물러와 8도에 통유(通諭)하여 의승병(義僧兵)을 소모(召募)하니 그 제자 송운(松雲;四溟)은 700여 승을 거느리고 관동에서 일어나고 처영(處英 ;雷默)은 1천여 승을 거느리고 호남에서 일어나고 영규(靈圭;騎虛)는 공주에서 일어나고 해안(海眼;中觀)은 진주에서 일어나고 의엄(義嚴), 법견(法堅) 등이 재재(在在)에 기병하며 대사는 1,500여 승을 친솔하고 순안(順安) 법흥사(法興寺)에서 궐기하니 통계가 5천여 인이라.
혹은 제장과 협응하며 혹은 명병(明兵)을 후원하며 혹은 통신에 능하며 혹은 경비에 선(善)하여 제도(諸道)가 그 역(力)을 다뢰(多賴)59)하였으니
“윤두수(尹斗壽) 왈 ‘우리, 도에는 고승 휴정이 있어 널리 유시를 내려 병사를 모은다’ 하니 왕이 말하기를 ‘승병은 흩어지지 않는다.”(「선조실록」30권 11丈, 25년 임진 9월 기사조)
“승통(僧統)을 두고 승군을 모아 조정에서 묘향산의 옛 승관 휴정을 불러 그로 하여 승병을 모으니 조용히들 절에 모이는데 그 수가 천여 명이다. 제자 의엄으로 총섭을 삼고 원수(元帥)를 거느려 성원하며 또한 관동의 유정(惟政), 호남의 처영 등 제자가 장수가 되어 각각 봉기하니 또한 천여 명이었다. …승군은 붙어 싸우지는 못하나 경비를 잘하고 역사(力事)에 열심히 하며 먼저 흩어지지 않으니 여러 도에서 의지하였다. ”(「선조 수정실록」26권 26장, 25년 임진 7월삭 무오조)(편집자 역)
59) 다뢰(多賴):많이 힘입음.
삼도(三都)가 평복(平復)되매 대사가 용사 100인을 친솔하고 대가(大駕)를 받들어 환도하였으니 고승으로서 군략에 능한 자는 고금을 통하여 오직 대사 일인뿐이거니와
군권을 장악에 잡고도 도리어 이적의 내응(內應)이 되어 당병을 개문영납(開門迎納)하던 간점(奸點)한 고구려 승 신성(信誠)이나
조국이 망한 후에 비로소 일편(一片)의 주류성(周留城)을 의거하고 고왕자(古王子)를 영립하였다가 신사국제(身死國除)하던 무모한 백제승 도침과는 운니(雲泥)60)의 차로도 논할 바 아니다.
60) 운니(雲泥):차이가 너무 심함.
더우기 ‘고기먹는 자와는 도모하지 마라(肉食者無謀)’라고 할는지 ‘궁핍한 백성이 의리가 많음(瘠士之民多義)’이라고 할는지는 모르지마는
대가가 몽진(蒙塵)하던 날에
당당한 세록지신(世祿之臣)으로도
사헌부 지평 남근(南瑾), 정언 정사신(鄭士信), 수찬 임몽정(任蒙正) 등은 당초부터 호종치 아니하였고
예조정랑 송순(宋壽), 종부첨정(宗簿僉正) 민희(閔喜), 사섬시봉사(司瞻寺奉事) 이신성(李愼誠) 등은 파주에서 낙후(落後)하고
예조정랑 이홍노(李弘老), 좌랑 서성 등은 개성에서 낙후하고
사헌부 집의 권회(權恢), 대사간 김찬, 검열(檢閱) 강수준(姜秀俊), 대사성 임국노(任國老) 등은 평양에 상소거(上疏去)하고
사헌부 정언 황붕(黃鵬), 좌부승지 노직(盧稷), 동부승지 민여경(閔汝慶), 장악직장(掌樂直長) 이경전(李慶全) 등은 평양에서 낙후하고
주서(注書) 박정현(朴鼎賢), 임취정(任就正), 대교(侍敎) 조존세(趙存世), 검열 김선여(金善餘) 등은 안주(安州)에서 불사거(不辭去)하고
사헌부 지평 이경기 등은 박천(博川)에서 불사거하고
사헌부 헌납 이정신(李臣) 등은 영변에서 불사거하여
급기야 의주(義州)에 이르신 때는 몇 사람이 남지 않다 싶게 되었으니
그들은 모두 평일에 앉아 수제치평(修齊治平)을 강(講)하고
절의충효(節義忠孝)로 자지(自持)하며
‘오랑캐의 한 법(夷狄之一法)’이니
'부모도 없고 임금도 없음(無父無君)’이니 하는 온갖 악평으로 불교를 빈척61)하였지마는
판탕(板蕩)62)을 당하여는 도리어 그 사람들 총중(叢中)에서 한 사람뿐이 아니요,
십수(十數)에 가까이 장의부난(仗義赴難)63)하는 자가 나게 됨은 또한 불사의(不思議)의 한 가지이다.
61) 빈척(擯斥) : 싫어하여 물리쳐 버림.
62) 판탕(板蕩):정치를 잘못하여 나라가 어지러워짐.
63) 장의부난(仗義赴難):의를 지팡이 삼아 난리에 대처함.
그러므로 명장(明將) 이제독(李提督;如松)이 대사에게 시를 증하여 왈
“공리에는 뜻이 없고 심학(心學)과 도선(道禪)에 오로지 전심하다 이제 왕사(王事)가 위급해짐에 산에서 내려와 총섭이 되다” (편집자 역)64)
64)“無意圖功利 專心學道禪 今聞王事急 摠攝下山巔”
라 하고 〈향산수충사비(香山酬忠祠碑)〉에도(谿谷 張維 찬)
“오호라! 바야흐로 일이 커지니 옹위할 병사들이 조정을 지키지 못하고 성을 버리고 목숨만을 구하려 한다.
선비들과 계집들은 분주히 달아나고 조야(朝野)가 왜구를 피하는데 만약 대사의 적막한 산림에 병영이 없고 책임짐이 없었다면 비록 꿩, 토끼라도 깊이 잠적해 엎드려 숨었을 것이니 군사를 얻으려 하여도 얻지 못하고 오직 울면서 바삐 달아났을 것이다.
힘껏 싸운 후에야 마음이 평안함을 얻으니 대저 어찌하여 이러한가.
이미 갈 곳이 없으니 도망만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바로다.
세상에서 간혹 목릉(穆陵)을 일컬어 일찌기 대사에게 덕이 있어 옥에 갇히는 위험에서 벗어나게 한 고로 대사가 감격하여 보답하고자 한 것이 이에서 연유한 것이라 하였는데 이는 본래의 의도에서 벗어난 것이다.
어찌 더불어 군신의 대륜(大倫)을 폐하지 못함을 의논할 수 있겠는가.” (편집자 역)
함과 마찬가지로 대사는 그 천이(天彛)65)의 충절과 소질의 도략(度略)으로 군부(君父)의 급난에 위신(委身)66) 한 것이요, 한 수 시 한 폭 화의 총사(寵賜)나 또는 사중획생(死中獲生)한 사은(私恩)에 감격한 바는 아니다.
65) 천이(天彛):하늘이 내린 떳떳함.
66) 위신(委身): 몸을 맡김. 헌신.
6. 대사의 식보(食報)
대사가 기병할 때는 벌써 73세의 노령이라. 그러므로 대가가 환도하신 후에는 곧 상계(上啓)하되
“신의 나이 80이라 근력이 다하였으니 청컨대 군사를 제자 유정이나 처영에게 맡기소서. 신은 총섭의 인(印)을 돌려드리고 묘향산 옛 누각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나이다. ” (편집자 역)
라 하므로 선조께서는 그 지(志)를 하(嘉)하시고 그 노(老)를 민(関)하시어 국일도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 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의 호를 사하시어 예견(禮遣)하시니 이로부터 대사의 도의(道義)가 익고(益高)하고 명망이 익존(益尊)하여 풍악, 두류, 묘향 제산에 왕래하며 소요 자적하더니 선조 37년 갑진 정월 23일 묘향산 원적암(圓寂庵)에서 제자들을 모으고 분향 설법한 후에 자기의 영정에다
“80년 전엔 그가 곧 나더니 80년 후엔 내가 곧 그이다”(편집자 역)67)
67)“八十年前渠是我 八十年後我是渠”
라는 자찬을 쓰고 서간을 써서 송운(松雲)과 처영(處英)에게 부치고 조용히 가부(跏跌)하고 열반을 고하니 세수(世壽)는 85세였고 법랍(法臘)68)은 67하(夏)였다.
68) 법랍(法臘):득도한 이후의 햇수.
이향(異香)이 만실(滿室)하여 3·7일이나 불헐(不歇)69)하였고 영골(靈骨) 1편과 금리(金利) 3매가 있어 보현안심(普賢安心)과 및 유점사 백화암(白華庵)에 부도를 세우고 금강산비는 월사 이상공(廷龜)의 찬이며 해남 두륜산비는 계곡 장상공(維)의 찬이라.
69) 불헐(不歌): 쉬지 않음.
금자정민(錦子貞珉)이 산문에 영요(永耀)70)하는 바이며 대사의 열반 후 165년 즉 정조 12년 무신에 해남 대둔사 승 춘계(春溪), 천묵(天默)이 소장(疏狀)을 천폐(天陛)71)에 올리매 입사사액(立祠賜額)의 명이 내려 표충사(表忠祠)를 대둔사에 건(建)하여 대사로 주벽(主壁)72)하고 사명(송운), 뇌묵(처영)을 좌우에 체향하였으니 「정조실록」 동년 7월 을축(초사일)조에
“호조판서 서유린(徐有隣)이 계언(啓言)하여 승 휴정의 사적을 알려 고(故) 재상 이정구에 이어 장유가 비문 찬한 것이 있는데, 즉 이른바 서산대사는 용과 뱀이 서로 싸우는 난리에도 의를 부르짖고 왕을 근위하니 선조조가 8도16종도총섭을 명하고 의발(衣鉢)과 함께 교지를 내렸으니 호남 대둔산에 있다. 예의 영남에도 사당 건립을 허락하고 더불어 표충 두 자 액자를 내려 조가(朝家)의 표창하는 뜻에 합당한 바 있어 이를 윤허하다.”(「정조실록」26권 1장) <편집자 역)
라 하였고 사우(祠宇)가 성(成)하매 익년 기유 4월 27일 계축에 예조정랑 정기환(鄭基煥)을 명견(命遣)하시어 대사에게 유제(諭祭)하며 표충선사(表忠禪師)의 호를 가증(加贈)하였더니 묘향산 승이 역시 호유73)하므로 대둔사의 예를 종(從)하여 향산에도 표충사 건설을 허락하였으니 동 18년갑인 3월 계묘(16일)조에
“향산 서산대사 휴정 사당의 호를 수충(酬忠)이라 내리고 관리를 보내 제사를 치르고 제전(祭田)을 내렸는데 평안도 관찰사 이병모(李秉模)의 청을 좋은 것이다.”(「정조실록」 39권 41장) (편집자 역)
라 하였으니 표충사에는 서유린이 기적비(紀蹟碑)를 찬하고 수충사에는 이병모가 비를 찬한 것이 이러한 인연관계가 있는 까닭이며, 정조께서는 특히 서산대사 화상당명(畫像堂銘)을 어제하옵시어 1본(一本)은 대둔사에, 1본은 묘향산에 봉안케 하였으니 위황(煒煌)74)한 신조(宸藻)75)와 최찬76)한 보묵(寶墨)이 실로 산가만세(山家萬世)의 보장(寶藏)이다.
70) 영요(永耀): 길이 빛남.
71) 천폐(天陛) : 궁궐의 섬돌, 곧 궁궐을 말함.
72) 주벽(主壁): 사원에 모신 신주 가운데 으뜸되는 신주.
73) 호유: 호소함.
74) 위황(煒煌):환하게 빛남.
75) 신조(宸藻):임금의 글.
76) 최찬(璀璨):빛이 번쩍거려서 찬란함.
그 문(文)에 왈
“(전략) 처음에는 석장(錫杖)을 허리에 두르고 여러 절을 편력하며 불법의 말씀을 심으니 사람이 하늘의 안목을 지닌즉 운장보묵(雲章寶墨)이라.
임금의 총애가 특히 남달랐다.
지금까지 정관(貞觀)과 영락(永樂)의 서문과 더불어 도솔천과 난야(蘭若)77) 사이에 다투어 빛났다.
77) 난야(蘭若): 아란야(阿蘭若)의 준말. 한적한 곳으로 수행하기에 적당한 곳.
중년에는 종풍(宗風)을 발현시키고 널리 국난을 구제하여 창의(倡義)하여 왕을 근위함에 으뜸되는 공을 세운즉 더러움과 괴기한 기운이 맑아졌다. 지금까지 방편으로 삼은 도세(度世)의 공 무량겁토록 현세에서 영원히 남아있다.
말년에는 인연을 따라서 현신(現身)하는데 인연을 지났으매 몸을 나타내었다가 인과를 찾아 상승하여 교주(敎主)가 된즉 매화 익고 연꽃향기가 나는 피안에 이르더라.
지금까지 바라보면 엄연하고 가까이 가면 온후한 상이 서도와 남도의 향화의 처소에서 정례(禮)를 받으니 이와 같이 한 후에야 바야흐로 대천세계를 제도하고 속세에 은혜를 베풀 것이다.
면벽하고 염주를 굴리며 벽돌을 갈아 거울을 만드는 경지에 이르는 것을 자비라 하고, 탑묘(塔廟)를 널리 세우고 사경을 많이 하는 것을 자비라 하겠는가.
서남 도신(道臣)의 청으로 인하여 그 영당(影堂)에 액자를 내려 남쪽을 표충이라 하고 서쪽을 수충이라 하며 관리에게 명하여 제수를 주어 해마다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하략)” (편집자 역)
이 일절은 곧 대사의 일생에 도를 위하고 국가를 위하고 중생을 위하여 출처시종(出處始終)이 탁락위아78)하여 실로 인천대중(人天大衆)의 귀의할 바 되기에 넉넉함을 서실(敍實)한 것이니 대사는 참으로 숙원을 심고 응운(應運)하여 출세한 자이다.
78) 탁락위아(卓犖爲我): 매우 뛰어남.
“단의(單衣)79)도 빚이요
목인쟁청(木人爭靑;휴정)은
꼿꼿함이 없는 것이 아니라
남쪽에 있는 큰 바다에서 온 것일세" (편집자 역)80)
79) 단의(單衣):흩옷.
80) “單衣有債 木人爭靑 不是無脛 來自南溟”
라 한 일 선사의 임종 유참(遺讖)과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의
“휴(休)자는 목인(木人)이 서 있는 듯하고
정(靜)자는 푸르름을 다투는(爭靑) 산과 비슷하고
안사(安師)가 용호를 다스려
홀로 두 꽃 사이에 앉아 있도다”(편집자 역)81)
81)“休如木人立 靜似爭靑山 安師制龍虎 獨坐兩花間”
라고 한 대사에게 증(贈)한 시가 모두 우연한 바가 아니다.
7. 대사와 육조(六祖)
지나의 불교는 한·당(漢唐)시대에도 이미 극도로 흥왕(興旺)하였지마는 양무제(梁武帝) 보통(普通) 원년 경자 9월에 서천축국(西天竺國) 사문 달마대사(達磨大師)가 지나에 이르러 초조(初祖)가 되고 2조 혜가(慧可), 3조 승찬(僧璨), 4조 도신(道信), 5조 홍인(弘忍)까지 5세의 법맥(法脈)이 현사(懸絲)와 같다가 제6대에 이르러 비로소 혜능(慧能), 신수(神秀) 양사(兩師)가 출세(出世)하여 각각 종조(宗祖)되니 종은 비록 나뉘었으나 종조됨은 일반이라.
모두 그후 법(法孫)이 천하에 편만(遍滿)하여 달마 이후의 지나 불교를 말함에 능·수 2사(二師)의 후(後)를 제하고는 타(他)가 태무(殆無)하게 됨과 마찬가지로 조선의 불교도 나·여(羅麗)시대에는 미상불 백화가 난만한 관(觀)을 정(呈)하였으나 태종 6년에 12종을 합하여 7종을 만들고 세종 6년에 다시 7종을 합하여 양종을 만드니, 각종의 연원이 모두 단절되어 버리고 오직 지나 호주(湖州) 하무산(霞霧山)에 석옥(石屋) 청홍선사(淸洪禪師)의 심법(法)을 받아 가지고 동국으로 돌아온 태고보우(太古普愚)가 거연(居然)히 조선 불교의 초조가 되어, 태고는 환암혼수(幻庵混修)에게 전하고 환암은 구곡각운(龜谷覺雲)에게 전하고 구곡은 벽계정심(碧溪正心)에게 전하고 벽계는 벽송지엄(碧松智儼)에게 전하고 벽송은 부용영관(芙蓉靈觀)에게 전하고 부용의 밑에 비로소 대사 및 부휴선수(浮休善修) 두 법형제가 정생(挺生)82)하였으니, 그 법맥의 단전(單傳)됨이 지나에 비하여 1대가 더 있어 7대 만에 대사의 형제 있음은 다르다 할지라도 그 현사같이 위약(危弱)하던 것과 현금 조선 불교승니가 오직 청허, 부휴 양사 이외에 법맥이 다시 없는 것이 영락없이 꼭같으며 원조가 시생(始生)하였을 제 한 승(僧)이 내어(來語)하대
“‘이 아이는 혜능이라 이름하라' 그 아비가 이유를 물으니 승이 말하기를 ‘혜라는 것은 법으로써 중생을 구제해 은혜를 베품이요, 능은 능히 불사(佛事)를 지을 수 있음이라' 말을 마치자 간 곳을 알 수 없더라.”(편집자역)
라 함과 대사가 유시(幼時)에 한 노옹이 내(來)하여
“머리를 만지며 말하기를 ‘운학(雲鶴) 두 자로써 너를 이름하라’ 하거늘 부가 묻기를 ‘운학의 뜻이 무엇이오’ 하니 노인이 답하기를 ‘이 아이의 일생 행동거지는 정녕 구름과 학과 같은 때문이라’ 하고 말을 마치고 문을 나섰는데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했다.”(편집자 역)라 한 것이 마치 동일한 기축(機軸)83)인 듯하며 원조(元祖)는 객이 금강경 욈을 듣다가
“응하여 머무는 곳이 없으니 그 마음이 생기도다.”(편집자 역)에서 개오(開悟)한 바가 있고 대사는 숭인장로(崇仁長老)에게
“마음을 비우고 급제한 자는 모름지기 장부라.”(편집자 역)라는 구절에서 각오한 바 있다는 등은 심히 혹초(酷肖)84)한 바이다.
82) 정생(挺生) : 빼어남.
83) 기축(機軸):중심대.
84) 혹초(酷肖): 몹시 닮아서 비슷함.
8. 대사와 원효
원효와 대사를 서로 비교하건대 원효는 조선 불교가 지평선상에서 출발하여 절정을 바라보며 향상하던 때에 탄생하였고, 대사는 그와 정반대가 되어 조선 불교가 비등점에서부터 급전하여 영도를 바라보고 직하하던 시대에 탄생하였은 즉 원효는 비하건대 백화난만하던 춘풍화기(春風和氣)중에 108척 교동(喬松) 같고 대사는 마치 만물이 영락되던 추상숙살리(秋霜肅殺裡)에 일총 황국(黃菊) 같다고 할 수 있은즉 영화고화(榮華枯華)와 인온참담85)의 그 조제(遭際)86)가 형불상동(迥不相同)87)한 것은 말할 것도 없는 바이며 신통(神通), 도력(道力), 오경(悟境), 법량(法量)을 박지(縛地)88)의 우리로서 그 우열을 평론할 바는 아니지마는 대사를 원효와 동일(同日)에 논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한다면 그다지 틀릴 리도 없을 것이다.
85) 인은참담: 성하던 기운이 무참히 스러짐.
86) 조제(遭際): 만날 때.
87) 형불상동(逈不相同):멀어서 서로 같지 아니함.
88) 박지(縛地): 속세에 묶여 있음.
그러나 이(異) 중에 동(同)이 있고 동 중에 이가 있은즉 이제 이이동(異而同)한 일점을 들어서 말한다면, 원효의 탄생시대는 정히 불전(佛殿)이 처음 수입되던 고구려 소수림왕 2년(신라 내물왕 17년)으로부터 신라 경순왕이 권토귀항(捲土歸降)하던 을미까지 565년의 중간이 되는 신라 진평왕 39년 정축(소수림왕 2년으로부터 206년에 상당함)에 시생하였고, 대사의 탄생은 조선 태조 원년 임신으로부터 순종께서 양위합병(讓位合併)하던 경술까지 519년 동안의 중간이 되는 중종 15년 경신(태조 원년으로부터 200년에 상당함)에 강세(降世)하였은 즉 그 도정을 일상일하(一上一下)로본다 할지라도 그 입장이 중도에 당한 점으로는 상동하며, 그 환경을 일춘일추(一春一秋)로 비한다 할지라도 하나는 중춘(仲春) 같고 하나는 중추(仲秋)같아서 그 중절(仲節)에 당한 바로는 비슷하다는 말이다.
따라서 원효 당시에는 아직 불교의 모든 것이 미비하여 경전의 주소(註疏), 종지(宗旨)의 분제(分齊)가 천명(闡明)의 극에 이르지 못하였으므로 원효는 일부경(一部經)이나 일종문(一宗門)에 편국(偏局)치 아니하고 화엄, 열반, 계율, 진언(眞言), 정토(淨土), 지론(地論) 등 각종을 통하여 손을 대지 아니한 데가 없어서 가위 전 불교의 초조이며 각 종파의 개산(開山)이 되었다 하여도 과언되지 아니할 성승(聖僧)이었고, 대사 당시에는 빈척 압박의 극단으로 교의, 종지, 법제 온갖 것이 모두 영락소지(零落掃地)하여 버리고 약존약망(若存若亡)한 현상에 있었으므로 대사 역시 일선문(一禪門)이나 일교의(一敎義)에 고체(固滯)치 아니하여, 그 행직(行職)으로는 선종판사, 교종판사를 겸대(兼帶)하였고 그 저술로는 「선교결(禪敎訣)」, 「선교석(禪敎釋)」, 「심법요초(心法要抄)」, 「선가귀감(禪家龜鑑)」, 「도가귀감」, 「유가귀감(儒家龜鑑)」(합칭 「삼가귀감」), 「운수단(雲水壇)」 등이 있어 이(理), 사(事), 선(禪), 교(敎), 진(眞), 속(俗)을 통해하였으며 그 행적으로는 정종 어제의 화상당명과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편참제방(偏參諸方)89)하여 인천안목(人天眼目)이 되고 중도에는 홍제국난(弘濟國難)하여 근왕원훈(勤王元勳)이 되고 나중에는 연과섭신(緣過攝身)하여 상승교주(上乘敎主)가 되었으니 곧 출장입상(出將入相)하며 능문능무(能文能武)라.
89) 편참제방(偏參諸方):치우치지 않고 여러 곳을 두루 다님.
종지(宗旨) 천양(闡揚)에는 살불살조(殺佛殺祖)90)하고 충의병요(忠義炳耀)91)에는 제민제세(濟民濟世)하여 보살 자비가 융융(融融)92) 한 일면에 금강 분노가 혁혁하던 위인이었은 즉 그 이이동(異而同) 동이이(同而異)가 진실로 그 중간에 어떠한 불가사의의 무엇이 있지 아니한가 의심도 하게 되었다.
90) 살불살조(殺佛殺祖):임제록에 나오는 말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아비를 만나면 아비를 죽이라는 뜻.
91) 충의병요(忠義炳耀):임금과 나라에 대한 충성과 의리가 빛남.
92) 융융(融融):화평함.
9. 대사와 대각(大覺)
대각국사는 진실로 고려 불교계에 있어서만 그 업적이 위대할 뿐 아니라 조선 불교 1,500여 년의 역사상에도 대표되기에 조금도 난색이 없을 것이며 다시 세계 불교를 통틀어 가지고라도 승려의 손에 이루어진 사업으로는 대각의 우(右)에 출(出)할 자 없으니 개종(開宗)하는 것은 고래로 각종 종조(宗祖)가 동일한 바이지만 다른 고승들의 개천(開闡)한 바는 그 1종 외에는 타종을 병구겸공(竝究兼攻)93)한 자가 없으나 대각은 그렇지 아니하였으니 송(宋)의 주객원외랑(主客員外郞) 양걸(楊傑)이 대각국사를 증별(贈別)하는 시의 일절에
“일찌기 듣건대 장삼장(奘三藏)이 왕자에게 법의 길을 물으니 큰 가르침으로 유가(瑜伽)를 전하여 자은사를 창도하였다 하고 또 들으니 부석노사는 신라에서 대사라 칭하였으니 중국에서 화엄을 배우고 돌아와 기강을 날려 성(性)·상(相)이 서로 합당함이 있었지만 진선진미하다 할 수 없었으니 누가 우세승통인 대각국사께서 5종의 묘리를 다 안 것만 하랴.”(편집자 역)
라 함과 같이 현수(賢首), 자은(慈恩), 달마, 남산(南山), 천대(天臺)의 5종을 통달하였고 장경 간행으로도 요(遼), 송(宋), 거란 등의 국력으로 개간(開刊)한 것 이외에 사간본(私刊本)으로 대각국사보다 앞선 자 없다. 이렇게 개종과 간장(刊藏) 두 가지의 위대한 업적을 남겨 놓았지마는 그 인물은 왕자요 그 배경은 국력이요 그 시대는 전성시대였은 즉 지인(之人), 지력(之力), 지시(之時)로 그만한 업적이 그다지 난능(難能)하다고는 할 것도 아닐 것이다.
93) 병구겸공(竝究兼攻): 더불어 함께 공부함.
그러나 대사는 여하한 인물인가. 기자전감(箕子殿監)도 마다하고 하향에 감칩(甘蟄)94)하여 있던 일개 고사(高士)의 아들, 더우기 조실부모하고 기식고학(寄食苦學)하던 궁유(窮儒), 그 시대는 훼불척승(毁佛斥僧)하던 괴상(乖常)한 정치, 그 배경은 심산궁곡(深山窮谷)에 산재한 사원, 거기에서 화중연화(火中蓮花)처럼 대사가 출현하여 내적으로 자가사(自家事)인 선교를 천양하는 외에 간과(戈) 중에서 국가의 반태(磐泰)95)를 갱전(更奠)96)하고 도탄리에서 민생의 안도를 부여한 불교사상에 다시 그 유례없는 위공대업(偉功大業)은 오직 대사 일인뿐이다.
94) 감칩(甘塾): 즐겁게 칩거함.
95) 반태(磐泰): 평안하고 태평함.
96) 갱전(更奠): 다시 정함.
10. 대사와 제자
낭간(琅玗)97)은 대죽(大竹)에서 생(生)하고 교룡(龍)이 심담(深潭)에 회(會)함은 이(理)의 고연(固然)이라.
대사가 이미 응운(應運)하여 생함인즉 어찌 영종향수(影從響隨)98)하는 인물이 병생(竝生)치 아니하여 대사로 하여금 독왕독래(獨往獨來)케 하랴.
7) 낭간(琅玗): 아름다운 대나무의 이명(異名).
98) 영종향수(影從響隨): 그림자같이 따름.
석가세존의 전신(前身)이 도솔천궁으로부터 염부(閻浮)99)에 시생(示生)하실 때에 중다보살(衆多菩薩)이 전위후옹(前衛後擁)하고 동시응현(同時應現)하시듯, 환웅천왕이 태백산정으로부터 하강하실 때에 풍백(風伯) 우사(雨師) 3천 단부(團部)를 거느리고 내려오듯 대사도 응당숙세(應當宿世)의 원력(願力)을 타고 수화중(水火中)의 생령을 위하여 동국에 수신(受身)할 때에는 기다(幾多)의 인연 반려가 혹선혹후(或先或後)하여 병세수생(竝世受生)하여 모두 대사의 제자가 되어서 대사의 공업을 조성(助成)하였을 것이 무의(無疑)한 바이다.
99) 염부(閻浮): 인간계. 현세(現世).
대사의 제자가 천유여 인에 명가명자(名可名者)가 70여 인이라 하나 그 중에서 다시 교초(翹楚)를 열거하건대 완허원준(玩虛圓俊), 편양언기(鞭羊彦機), 송운유정(松雲惟政), 소요태능(逍遙太能), 정관일선(靜觀一禪), 뇌묵처영(雷默處英), 중관해안(中觀海眼), 기허영규(騎虛靈圭), 진묵일옥(震默一玉), 기암법견(奇巖法堅) 등이니 마치 선니(宣尼)100)의 3천 제자 중에 신통육예(身通六藝)한 자가 72인이나 사과(四科)에 참여한 자는 오직 10철(哲)뿐이며 의상의 문하에 의학지도(義學之徒)가 3천여 인이나, 영수가 될 만한 자는 10덕(德)에 그침과 같다.
100) 선니(宣尼):공자.
그렇지 아니하면 아무리 애삭(哀削)이 심하다 할지라도 승병에 응모한 자가 오히려 5·6천 명에 달하였으니 당시의 승수(僧數)가 불위부다(不爲不多)한 바이거늘 그 중에 영솔자인 이른바 의승대장이란 모두 대사의 제자의 열(列)에 있는 자뿐임은 진실로 희유(稀有)한 바이다.
편양, 완허, 소요, 정관, 진묵은 모두 단순한 도학으로 각각 일반의 대종사가 되고 그 법손(法孫)이 지금까지 계승하여 오며 송운, 뇌묵, 중관, 기허, 기암은 모두 문무 겸전하여 습정균혜(習定均慧)하는 가리사(家裡事)101)에도 남에게 손색이 없었지마는 임위발난(臨危撥難)102)하여 제고보은(濟苦報恩)하는 도중사(途中事)에는 더욱 천고의 죽백(竹帛)103)을 빛나게 하였다.
101) 가리사(家裡事):일상의 일.
102) 임위발난(臨危撥難):위기에 처해 난리를 다스림.
103) 죽백(竹帛): 서적이나 사기(史記)를 달리 일컫는 말.
세상에서는 조중봉(趙重峯;憲)의 부하에 700 의사(義士)를 장하다 하지마는 그중에도 기허영규의 부하 전부가 한가지로 순의(殉義)하였으며 현풍곽씨(玄風郭氏)의 문중에 곽기(郭起;禮谷), 곽월(郭越;定齋), 곽준(存齋), 곽주, 곽재우(郭再祐;忘憂堂), 곽재겸(郭再謙;槐軒) 및 곽자방(郭自訪)이 일문에 임림(林林)104)함을 찬도(讚道)하지마는 이는 세세장종(世世將種)으로 가정세덕(家庭世德)을 이른 바이거니와 대사(大師)의 사제(師弟)에 이르러서는 방포원정(方袍圓頂)105)으로 산수간에 이유(夷猶)106)하여 선상경급(禪床經笈)107)으로 연진(烟塵)108) 밖에 소요하다가 일조(一朝)에 대사의 유격(諭檄)이 돌아가매 동성상응(同聲相應)하여 동서남북에 의려(義旅)109)가 정정(整整)하고 진퇴주선(進退周旋)에 기율이 숙숙(肅肅)함은 불사의 사실(不思議事實)이 아니랴.
104) 임림(林林):울창함.
105) 방포원정(方袍圓頂):네모난 가사와 둥근 머리, 즉 중을 일컬음.
106) 이유(夷猶): 망설임.
107) 선상경급(禪床經笈):선을 위한 상과 경을 읽는 책상.
108) 연진(烟塵):속세.
109) 의려(義旅):의로운 무리.
이에 감(鑑)하여 법화경에 이른바
“세간을 떠나지 아니하면서 세법(世法)을 벗어남이 있다.” (편집자 역)
라 함이 여실히 증명되며 대혜선사(大慧禪師)의 말씀에
“조용한 곳에서 공부를 하는 것은 시끄러운 곳에서 쓰이고자 함이다.”(편집자 역)
라 함이 이러한 도리를 말한 것이라 한다.
도능독(徒能讀)으로 책자상에서만
“어려서는 배우고 자라서는 그를 쓴다(幼而學之 壯而用之)”
니
“몸을 닦아 천하국가를 위해 쓴다(修之於身用之於天下國家)”
니
“목숨을 버려의를 택한다(捨生取義)”
니 하는 문자를 배우고 익혀서 그것으로 조명엽환(釣名獵宦)110)의 도구를 삼다가 완급이 있을 때에는 평일의 학문 수양이 부지중에 파리변물(芭籬邊物)111)을 짓는 만조육식배(滿朝肉食輩)가 도리어 방외(方外)의 구두선(口頭禪)만도 못함을 볼 때에 이른바
“이론에만 가까이하여 이것이 큰 난리 (전쟁)의 근본이었다(彌近理而大亂眞)”
라는 일어(一語)가 뉘집 가풍을 사출(寫出)한 것이라 하여야 가할는지 알 수 없는 바이다.
110) 조명엽환(釣名獵宦):명예를 구하고 관직을 좇음.
111) 파리변물(芭籬邊物):쓸데없는 물건.
11. 결론
그러나 일 위인의 출세가 각 방면을 통하여 실로 도연(徒然)112)이 아닌 것을 대사의 전기에서 더욱 느끼는 바이다.
112) 도연(徒然):우연.
만일 그 시기에 대사의 출세가 아니었던들 조선의 국가는 어찌되었으며 불교는 어찌 되었을까. 이 점에 있어서는 조금도 상상하고 주저할 것 없이 아무것도 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노니, 진역(震域)의 전란사(戰亂史)에 있어서는 용사(龍蛇)의 풍진보다 더 심한 때가 없으니 그러한 위급 존망지추를 당하여는 마땅히 군신상하가 거국일치로 은원(恩怨)을 잊어버리고 멸사봉공할 터임에도 불구하고 동서 당쟁의 암투만을 일사(日事)하여 심지어 선조께서 용만(龍灣)행재소에서 시를 지어 조신에게 하시(下示)하신 바 그 말구(末句)에 가라사대
“조신들은 오늘 이후부터 정녕 다시 각각 서니, 동이니 하지 말라”(편집자 역)113)
113) “朝臣今日後 寧復各西東”
하였으니 당일 재조자(在朝者)에 있어서는 이보다 더 황송한 처분이 없겠거늘 심상한화(尋常閑話)로 청과(廳過)하여 버리고 여전히 일관계(一官階)의 출척(陟)과 일수급(一首級)의 공벌(功罰)도 당동벌이(黨同伐異)에서 나왔은즉 만일 대사같이 무편무당하고 유충유의(惟忠惟義)의 물외한도인(物外閑道人)의 입니입수(入泥入水)가 아니었던들 탐부(貪夫)를 염(廉)케 하고 나부(懦夫)를 입(立)케 할 자가 없었을 것이며, 화의(和議)가 성립된 후에 구호(舊好)를 복수(復修)하자는 행장(行長)의 요구가 대마도수(對馬島守)를 통하여 수년을 두고 비일비재로 육속(陸續)114)히왔지마는 감히 사명을 받들고 도해(渡海)할 자가 없어서 인순추위115)하여 10여 년을 연타(延拖)116)하다가 최후에는 동병재래(動兵再來)하겠다는 청천벽력 같은 위하(威嚇)에 놀래어 만조가 전율(顫慄)하면서 송운대사를 행인(行人)으로 천거하였으니,
그 이유가
첫째는 일본이 불교를 숭상한즉 불제자 송운은 해치지 아니하리라,
둘째는 송운은 불교인인즉 생사에 포외(怖畏)117)가 없으리라,
세째는 불행하여 해를 받더라도 일개 승려의 죽음은 국가에 하등 손익이 크지 않다는 견지에서 나온 것이니
이것은 추현천능(推賢薦能)이 아니요 자기들의 도생피사(圖生避死)하는 기계(奇計)이다.
114) 육속(陸續):끊이지 않고 계속됨.
115) 인순추위:구습(舊習)대로 자기 일의 책임을 남에게 전가함.
116) 연타(延拖):일을 끌어서 미루어 나감.
117) 포외(怖畏): 두려워함.
「선조실록」 사단(史斷)에 사신(史臣) 왈
“난리 이후 조종의 제신들은 한가지로 두려워하여 혹자는 거짓 화의하여 굴레를 도모하자는 것이요, 혹자는 훈련을 하여 후일을 도모하자는 것인데, 이러저러한 동안에 6년이 지나갔어도 계획을 바친 자가 한 사람도 아직 없다. 유정의 소가 있은즉 의직(義直)을 좇아 당면한 병을 처리하니 저 고기 먹는 무리들은 정녕 부끄럽지 않겠는가.”(「선조실록」30년 정유 4월 계유조, 사단 87권 15장)
“고루하구나, 묘당의 계략이라는 것이. 일을 다잡아 하지 못하고 헛되이 세월만 보내고 있다.
한번은 사신이 왔는데 서로 돌아보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긴급히 대응책을 세우는데 남에게 머리 깎아달라고 맡기니 이것으로 국가의 일을 도모할 사람이 있다고 하겠는가.
비변사의 여러 사람이 당당히 있으나 오히려 유정의 계략에 미치지 못하니 임금의 부름을 역마로 전하여 그의 의견을 으뜸가는 책으로 삼았다.
그의 의견을 평시에 높은 자리에 앉아 당당하더니 위급함에 이르매 누가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칠 계책을 내었는가.
이에 나라를 위해 도모하는 자는 유정 일인뿐이니 오호통재로다.”(「선조실록」37년 갑진 2월 을사조 사단 111권 20장)
“일개 사문(승려)으로 그 일을 하고자 하여 고기를 먹는 사람들과 도모하니 계책은 비루하다고 할 수 있다.” (동 3월 갑자조 사단 172권 15장) (이상 편집자 역)
라 함과 송운이 일본으로 도왕(渡往)할 때 만조 진신의 전별시(餞別詩) 중에
“적을 다스림에 좋은 계책이 없더니 운림의 노사(老師)가 일으켰구나”(澤堂 李植 詩)(편집자 역)118)
118)“制敵無長算 雲林起老師”
“허리에 긴 칼을 찼으나 오늘은 부끄러운 남아로다(芝峯 李睟光 詩)”(편집자 역)119)
119)“腰聞一長刀 今日愧男兒”
등 구(句)를 보아 대사의 사제간을 제하고는 일언일사(一言一事)의 모획(謀劃)이 없었은 즉 국(國)이 어찌 국 되기를 바라며 조정의 내에서도 문무가 불상용(不相容)하고 동서가 불상화(不相和)하여 쟁투와 시살120)을 일사(日事)하던 판국에 대사의 사제가 수립한 유공여열(遺功餘烈)이 아니었던들 악랄이 무소부지(無所不至)하는 장악의 아래에 불교의 잔해도 남겨 두지 아니하였을 것은 명약관화인즉 불교가 어찌 불교노릇을 하였으랴.
120) 시살: 전투에서 마구 침.
그러나 이것은 이연(已然)의 후를 논함이어니와 음수사원격(飮水思源格)으로 그 이전을 한번 더듬어서 대사의 대사된 소이를 추구하건대
대사가 만일 조고여생(早孤餘生)으로 영정고고(零丁孤苦)치 아니하거나 호남행정(湖南行程)에 수업사(受業師)의 환경(還京)이 아니었더면 대사는 출가치 아니하였을 것이요,
이미 출가하였더라도 문정왕후의 양종 부활과 승과 복설(復設)이 아니더면 대사는 급제와 법계와 선교종판사의 명망을 나타내지 아니하였을 것이요,
성명이 아무리 높더라도 정여립의 옥사 간련이 아니더면 선조의 총우를 받을 길이 없을 것이요,
지우가 없었더면 행재소에 진알하고 수명근왕(受命勤王)까지 있었을는지가 의문인즉,
태종·세종의 합종(合宗)으로부터 성종·연산에 이르러 근저도 없이 되게 되었던 조선 불교가
의외로 문정왕후의 청정(廳政)에 말미암아 선복선폐(旋復旋廢)된 양종 복설과 승과 경립(更立)은 전혀 대사 일인을 기취(器就)하기 위한 것이며
여립의 반역과 무업(無業)의 무인(誣引)이 전혀 대사 일인을 옥성(玉成)시켜서 일루의 불조(佛祖) 혜명(慧命)으로 하여금 영영 이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한 것이니
일 위인의 생사출처가 세도와 시국으로 더불어 막대한 인연과 영향이 있음을 이에서 더욱 명확하게 인식할 것이라 한다.
(대사 열반 후 336년 기묘 1월 15일 인왕산 하 草樓에서)
'한글 文章 > 조선명인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72.조선-정철(鄭澈) (1) | 2023.05.15 |
---|---|
71.조선-이이(李珥) (2) | 2023.05.14 |
69.조선-신사임당(申師任堂) (1) | 2023.05.14 |
68.조선-황진이(黃眞伊) (0) | 2023.05.14 |
67.조선-이황(李滉) (1) | 2023.05.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