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유섭(高裕燮)
1905∼1944. 미술사학가. 호 우현(又玄). 경기도 인천 생, 경성제대 철학과 졸업. 이화여전, 연희전문 등에 출강하면서 국내의 명승 고적을 답사하여 미술문화 연구에 진력.
저서에 「송도고적(松都古蹟)」, 「조선 탑파(塔婆의 연구」, 「조선미술문화사논총(朝鮮美術文化史論叢)」및 유저로 「한국미술사 급미학논고(韓國美術史 及 美學論攷)」등이 있음.
안견(安堅)의 자(字)는 가도(可度) 또는 득수(得守)요 호는 현동자(玄洞子)요 혹은 주경(朱耕)이라. 지곡(池谷; 충남 서산 地谷) 사람으로서 세종조에 화원(畵員)으로 관(官)이 호군(護軍)에 있었다. 생사의 연월이 미상이나 세종조에 가장 드러나기 시작하여 세조조까지 화도(畫圖)에 종사하였던 모양이요(「槿域書畵徵」의 震彙續考에는 성종 때까지 생존하였던 듯이 되어 있으나 그 文에 華使 金湜의 來朝 사실과 함께 설명이 되어 있음을 보아 김식의 내조는 세조 9년 갑신에 일차 있었을 뿐임으로 해서 성종 때란 세조 때의 오기인 듯하다), 이후 그에 관한 전기적 사실은 드러남이 없다. 그러므로 안견은 결국 세·문·단·세의 네 임금 때의 사람으로 볼 수 있고 특히 안평대군의 지우(知遇)를 얻어 그 생존이었던 세·문 양종(兩宗)사이에 가장 활약하였던 듯하다.
신숙주가 세종 27년(正統 乙丑)에 술(述)한 〈비해당화기(匪懈堂畫記;「保閒齋集」)〉에
“안견의 자는 가도요 소수(小守) 혹은 득수라고도 하였으며 본래 지곡 사람이다. 지금 호군(護軍)이 되었는데, 성품이 총명하고 민첩하며 세세하고 넓다. 옛 그림을 많이 열람하여 모두 그 요체를 얻었다. 제가(諸家)의 장점을 모아 총괄하여 절충하니 통하지 않는 바가 없으며 산수에는 더우기 그 장한 바가 있었다. 옛것에서부터 구하여도 그 필적할 만한 사람을 찾기가 어려웠다. 비해당(匪懈堂)을 모시고 있음이 오래라, 그때에 그린 것이 가장 많다.” (편집자 역)
라 하고 그의 화제(題)를 열거하였다.
즉 안견의 가장 활약하던 상황을 알 수 있고 겸하여 안평대군에게 긴착(緊着)하였던 것은 그가 비록 화원이라 하더라도 안평대군의 실추 이후 그도 드러나지 못하였을 것이 자연히 짐작되는 바이며, 또 안평대군에게 근밀(近密)하였다는 것은 안평대군이 소장하고 있던 송·원의 수많은 명화가 안견에게 끼쳐 준 영향이란 것을 생각케 한다.
원래 고려 이전에 있어서의 중국 서화의 조선으로의 수반(輸搬)이란 것은 문헌에 드러남이 없어 알 수 없지만 고려 이후에 있어서는 명화 보축(寶軸)1)의 전래가 결코 범연한 것이 아니었다.
김안로(金安老)의 「용천담적기」 같은 데는
“고려 충선왕이 연저(燕邸)에 있었을 때 만권당(萬卷堂)을 지으시고 이제현(李齊賢)을 불러 부중(府中)에 두어 원나라 학사 요수(姚燧), 염복(閻復), 원명선(元明善), 조맹부와 노니시어 그림과 서적의 전적을 많이 소장하고 있더니 그후에 노국대장공주가 올 때에 무릇 집물, 기용(器用), 간책(簡册), 서화 등의 물건이 배에 쌓인 채 바다로 떠내려오니 지금 전하는 것의 오묘한 그림과 보배로운 책이 대부분 그때 들어온 것이다.”(편집자 역)
하여 충선왕, 공민왕 양대에 도적(圖籍)이 많이 전래된 것같이 말하였지만 이도 물론 사실이기는 할 것이나 그전에 벌써 도적, 서화 등에 관해서는 상당한 수집이 있었으니 고려사 초기까지 이 도적, 서화의 반수(搬輸)가 가장 빈번히 드러나 있고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의하면 궁내의 임천각(臨川閣), 청연각(淸燕閣), 도내의 안화사(安和寺), 흥왕사(興王寺)등의 보장 사실이 풍부히 드러나 있다.
안평대군의 보축 수장도 결국은 이런 것들을 이어받은 것이었을 것이요, 또 그만한 애장가가 있다면 그 문에 출입하는 일재(逸材)2) 중에는 그것을 이용하여 한 새로운 문화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니 안견이 안평대군에게 배유(陪遊)3)함이 오랬다는 것은 결국 안평대군의 소장품이 안견에게 끼친 영향을 곧 생각케 한다.
1) 보축(寶軸):아름다운 장정. 훌륭한 두루마리 책.
2) 일재(逸材): 빼어난 재주, 또는 재주 있는 사람.
3) 배유(陪遊): 귀인을 모시고 노는 것.
예의 「용천담적기」중에
“안견이 옛 그림을 널리 열람하여 모두 그 용의(用意)의 깊은 바를 터득하더라. 곽희(郭熙)를 본뜨면 곽희가 되고 이필(李弼)을 본뜨면 이필이 되고, 유융(劉融)이 되기도 하고 마원(馬遠)이 되기도 하여 향하면 응치 않음이 없으며, 산수(山水)는 그 뛰어난 바가 최고라.”(편집자 역)
하여 안견이 수식(隨式)한 바를 들었는데 이곳에 보인 곽희, 이필, 유융, 마원 등은 모두 「비해당화기」 중에 보이는 인물들이요 송·원의 북종대가(北宗大家)들이다.
다만 곽·이·유·마를 든 것은 문식(飾)을 위한 것이냐 실적이 그러했더냐는 알 수 없고 지금 안견의 화적(畫跡)으로 전칭(傳稱)되는 잔적(殘跡)이 모두 곽희풍의 것이요(「朝鮮古蹟圖譜」14책에는 마원풍의 산수 한 폭이 있어 玄洞子란 낙관이 있으나 후인의 거짓 낙관이므로 문제되지 아니한다), 「비해당화기」 중에도 유백희(융)의 산수도가 4, 마원의 산수도가 2뿐인데 곽희의 산수도 기타 17폭이요 이필의 누각 인물 기타가 18폭 있어 곽·이가 가장 많은 편에 속함을 볼 때 폭 수가 반드시 영향의 최다성을 말함이 아닐 것이로되 당대의 巨擘(거벽)들이었던만치 그들의 영향이 지대하였음을 이내 곧 수긍할 수 있다.
이중의 이필은 화사(畫史)상 그 지위를 알 수 없으나 곽희는 북송 어화원(御書院)의 예학(藝學)으로 5대·송초(五代宋初) 간의 북종산수화의 거벽인 이영구(李營丘)가 이룬 화오(畫奥)를 참작하여 이성(李成)의 문(門)인 관동(關同)의 화풍을 전형화시켜 북종화의 한 규범을 세운 사람으로 후대 그의 영향이 지극히 컸던 사람이다.
비록 영구의 법을 배웠다 하나 다시
“능히 품은 뜻을 자유롭게 펼치어 하늘의 문채를 법으로 받고 붓이 장차 검고 두터워 산이 겹친 것과 물이 겹친 것을 많이 그리고 겨울 숲 마른 수목을 잘 그려 교묘하게 펼치니 위치가 깊고 깊은지라. 장송 거목(長松巨木)과 굽이치는 계곡과 깎아지른 절벽을 구애됨이 없이 그리되 절벽은 끊어지는 듯하고 봉우리는 우뚝 솟아올라 옴이 구름과 안개가 변하여 스러지는 듯하여 흐릿한 아지랭이 사이에서 천태만상이라.”(「佩文齋書畵譜」및 鄭昶의「中國畫學全史」)(편집자 역)
하였는데 이러한 화풍은 실로 곧 안견의 화적(畫跡)에서 그대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즉 산악은 구름같이 피어올라 중중첩첩(重重疊疊)하니 이를 운두와권풍(雲頭渦卷風)이라 하며 장송 거목은 가지마다 게의 발같이 굴곡져 있으니 이를 해조수(蟹爪樹)4)라 한다.
4)해조수(蟹爪樹): 게발처럼 생긴 나무.
연심(淵深)한 동학(洞壑)5)을 좋아 그리며 유수심원(幽深遠)한 회계(回溪)를 자주 그린다.
5)동학(洞壑): 깊숙한 골짜기.
수림은 창경(蒼勁)6)하고 옥루 산파(屋樓山坡)가 하나도 직선으로 그려지는 법이 없다. 정세(精細)한 중에 창경함을 잊지 아니하고 장중한 속에 운율을 잊지 아니한다.
6)창경(蒼勁):고아하고 굳셈.
때의 중국으로 말하면 명초(明初)라, 조맹부 이래 오·황·예·왕(吳黃倪王)의 원말 4대가로 말미암아 대성된 문인화는 바야흐로 방광소호(放狂疎豪)하여 기풍은 다시 남송원화(南宋院畫)의 정제된 것으로 회귀코자 하였으나 그는 벌써 4대가의 저러한 전회(轉回)를 겪고 난 때라 아무래도 북송의 저러한 창경한 맛은 다시 결회(抉回)7)치 못하고 끝끝내 문인화적 경향으로 기울어져 있던 때인데, 조선에서는 행인지 불행인지 문인화의 구체적 영향이 들어오지 않고 (「비해당화기」에도 원말 4대가의 진정한 문인화적은 아직 하나도 없다) 동양에서 사라지려 하는 북송 북종화법이 안견의 손에서 이다지 굳세게 보유되고 있었다.
7) 결회(扶回): 다시 찾아냄.
또 부상국(扶桑國)에서 주문(周文), 설주(雪周) 등 수묵의 대가들이 나와 각 예원의 성사를 이루었지만 그들도 남송 이후에 속하고 또는 명의 절파(浙派)이후에 속하는 것이다. 안견은 즉 북송 북종의 시대적으로 최종전(最終殿)후에 처하여 그 화법의 최고가를 점하고 있는 데 그의 의의가 있다.
안견의 영향이라 할까 또는 이 화법의 애호가 일반적이었다 할까, 그의 화풍을 계승한 자 또는 모방한 자가 적지 아니하니 석경(石敬;세종조)은 안견의 제자라 하며 정세광(鄭世光;연산군)은 그 필의(筆意)를 얻은 자라 하며 신부인(申夫人;호 사임당, 율곡 이이 母, 중종조)은 7살부터 안견을 방(倣)하였다 하며 이정근(李正根;호 心水, 중종조)도 역시 ‘그 뿌리를 짐작할 수 있다(亦祖可度)’라 하지만 다시 화적에서 본다면 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成·中 간), 나옹(懶翁) 이정(李禎;선조조), 허주(虛舟) 이징(李澄;선조조), 지재(止齋) 조직(선조조), 창주(滄州) 이성길(李成吉;明·宣 간), 회은(淮隱;성명, 시대 미상)등이 모두 그 필운을 갖고 있다.
명초(明初) 절파(浙派)의 거벽이요 근고(近古)의 제일인인 대진(戴進)도 유사한 필법을 가졌으니 명·선 이후의 저네들은 혹 이 영향도 받았겠지만 이녕(고려 인종조) 이래 조선의 산수 대가[김종직의 「점필재집」에 “동인(東人)의 산수가 대가 끊어져 이녕 이래는 다시 없었다. 그대집(李國耳)의 소족(小簇)이 안개같이 일어난 그림을 보니 비로소 그것이 삼매족(三昧族)임을 알 수 있다” 하였다] 요, 시대를 초특(超特)한 그의 화격(格)이라 그의 영향이 또한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근일 회화사상에서 ‘조선화’라는 한 별명으로 지적되는 화체는 대개 이 체를 두고 말하는 모양이다(동경 미술연구소 발행 「畫說」제8호 ‘雪の繪を語る’ 154면). 즉 그만치 이 화제는 조선화한 것이다.
그의 화적으로 지금 전칭(傳稱)되는 것이 약간 있으나 가장 확실하고 또 대표적인 것은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이다(지금 大阪에 있음). 이것은 세종 29년(正統 丁卯) 4월 20일 밤에 안평대군이 박팽년으로 더불어 꿈에 도원(桃源)에 노셨다가 안견으로 하여금 그 몽중경(夢中景)을 그리게 하신 것이니 제발(題跋)에 안평대군의 시서(詩書)가 있고 이어 원산(圓山) 고득종(高得宗), 진양(晋陽) 강석덕(姜碩德), 하동(河東) 정인지, 난계(蘭溪) 박연, 절재(齋) 김종서, 부훤당(負喧堂)이적(李迹;素夫), 동량 최항, 고양(高陽) 신숙주, 한산(韓山) 이개, 진산(晋山) 하연(河演:淵亮), 청성(淸城) 송처관(宋處寬), 선성(宣城) 김담(金淡), 평양(平陽) 박팽년(朴彭年;仁叟), 무송(茂松) 윤자운(尹子雲), 양성(陽城) 이예(李芮), 강흥(江興) 이현로(李賢老), 달성(達城) 서거정, 창녕(昌寧) 성삼문, 계산(稽山)김수온, 천봉(千峯) 범우(凡雨), 최수(崔脩) 등 당시 거환명유(巨宦名儒) 21인의 자필 제발이 붙어 있는 장축(長軸)이다. 곽희풍의 연심(淵深)한 동학(洞壑)과 유수(幽邃)한 계회(溪回)와 재절(纔絶)8)한 산악이 중중첩첩한 중에 도원경이 활연히 열렸는데 수묵이 주(主)라, 창경키 짝이 없는 중에 도림(桃林)은 홍도로 착색되고 화홍(花紅)엔 금심(金心)이 점점하여 황홀한 일경을 이루었고 산심수심(山深水深)하되 진두(津頭)의 일엽편주도 버려진 채 인적은 하나도 없고 반개(半開)한 초옥(草屋) 수영(數楹)에 훤제(喧啼)하는 계견산조(鷄犬山鳥)도 없어 정적하기 짝이 없는 화경이다.
8) 재절(纔絶): 거의 절벽같이 우뚝 섬.
문헌에는 내장(內藏)의 〈청산백운도〉가 그의 평생 정력을 다한 것이라 전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볼 수 없고, 현금의 우리가 볼 수 있는 조선화로서의 가장 지체 높고 화취 깊은 최대의 걸작은 이것이 유일한 것이다. 우리는 약간의 문헌에서 다음과 같은 화적을 볼 수 있다.
○임강완월도(臨江斷月圖):세종 29년 정묘 신숙주 서문을 씀(「보한재집」, 심수경「遣閑雜錄」)
○희우정 야연도(喜雨亭夜宴圖):혹 전자의 별명이라 함(「四佳集」)
○비해당 진(匪懈堂眞):세종 24년 임술년 안평대군 25세 때 작품. 7년 후 무진 신숙주 찬(贊)을 지음(「보한재집」)
○팔경도(八景圖)각 1
○절안쌍청도(絶岸雙淸圖) 1
○강천일색도(江天一色圖) 1
○황학루(黃鶴樓) 1
○강천만색도(江天晚色圖) 1
○분류종해도(奔流宗海圖) 1
○설제천한도(雪霽天寒圖) 1
○등왕각(藤王閣) 1
○우후신청도(雨後新晴圖) 1
○경람필련도(輕嵐匹練圖) 1
○수국경람도(水國輕嵐圖) 1
○기속생화도(起粟生花圖) 1
○유운만학도(幽雲滿壑圖) 1
○규룡반주도(州龍反走圖) 1
○은하도괘도(銀河倒掛圖) 1
○흑매죽(黑梅竹) 1
○산수도(山水圖) 2
○설제여한도(雪霽餘寒圖) 1
○제설포렴도(霽雪鋪濂圖) 1
○강향원취도(江鄕遠翠圖) 1
○춘운출곡도(春雲出谷圖) 1
○광풍급우도(狂風急雨圖) 1 )
○장림세로도(長林細路圖)
○절벽도(絶壁圖) 1
○수묵백운도(水墨白雲圖) 1
○노안도(蘆雁圖) 1
○화목도(花木圖) 2
○장송도(長松圖)1:이상 세종 27년 을축 이전 작으로 비해당 소장(보한재집)
○팔준도(八駿圖) : 세종 28년 병인 작품(「보한재집」, 「근보집」, 「사가집」, 「해동잡록」)
횡운골, 유린청(游麟靑), 추풍오(追風烏), 발전자(發電楮), 용등자(龍騰紫), 응상백(凝霜白), 사자황(獅子黃), 현표(玄豹)
○팔준도 소도(八駿圖小圖):세종 29년 정묘 작 (「六臣遺稿」)
○이사마산수도(李司馬山水圖):비해당이 안견에 명하여 그림을 그리게 하고 두자미의 시를 왼쪽에 써서 승지 진양(晋陽) 강공(姜公)에게 줌(「六臣遺稿」)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1: 세종 29년 정묘 4월 23일작(「晋山世稿」,「太虛亭集」,「근보집」, 「보한재집」, 「사가집」)
○동궁의장도(東宮儀仗圖):세종 30년 무진 3월 5일
○대소가의장도(大小駕儀仗圖):위와 같음(이상, 「세종실록」)
○묵죽도(墨竹圖):세조 9년 갑신(「근역서화징」所引震彙續考)
○산수도 팔폭
○만학쟁류도(萬壑爭流圖)
○산수도 동경(山水圖冬景)
○화목도(畫木圖)(이상「사가집」)
○청산백운도(靑山白雲圖)(「보한재집」, 「용재총화」)
○산수소폭(山水小幅)(「簡易堂集」)
○추학창연도(秋壑蒼烟圖):중면(仲易)의 시를 인재(仁齋)가 씀(「晋山世稿」)
○산수도 팔폭(山水圖八幅)(「퇴계집」)
○십폭단병(十幅短屛)(曺植「南冥集」)
○수묵삼매족(水墨三昧簇):이국이(李國耳) 소장(점필재집」)
○산수도(山水圖):즉선군화첩(卽善君畫帖)(「眉叟記言」)
○산수도팔첩(山水圖八帖): 권지부(權地部) 소장 경소수묵산수
○사시팔경도(京消水墨山水四時八景圖)(「미수기언」)
○해청도(海靑圖)(魚得江「灌圃集」)
○분벽도(粉壁圖):의빈광천제(儀賓光川弟) 소장(鄭士龍 「湖陰集」)
○산수도(山水圖)(李洪男「변고유고」)
○경작삼폭도(耕作三幅圖)(「근역서화징」소장 古畫備考)
○이왕가미술관 소장
적벽도(赤壁圖)(견본 착색)
추경산수도(秋景山水圖)(苧本淡彩) 기타 합 10帖
설천도(雪天圖)(견본 水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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