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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조선-이현보(李賢輔)

耽古樓主 2023. 5. 11. 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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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현보(李賢輔)

 

조윤제(趙潤濟)
1904-1976. 국문학자문학박사호 도남(陶南). 경북 예천 생경성제대 조선문학과 졸업서울대청구대영남대 교수와 학술원 회원 역임진단학회(震檀學會결성에 참여국문학 연구에 있어 실증주의의 초석을 놓고 나아가 민족사관의 학풍을 확립.
저서에 「조선시가사강(朝鮮詩歌史綱)」「한국 시가의 연구」「국문학사」 등이 있음

 

이현보의 자는 비중, 호는 농암(聾巖)이라 하였다. 세조 13년에 예안현(禮安縣) 분천에서 출생하니, 나면서부터 영매(穎邁)1)하였으며 또 골상(骨相)이 비범하였다 한다. 그러나 지기가 상탕(爽宕)2)하고 구검(拘檢)3)이 없어 어려서는 과렵(戈獵)4)을 좋아하고 학업에 전력하지 않더니 약관에 향교에 들어서 비로소 발분 독서하여 제배(儕輩)5)의 추중(推重)하는 바가 되었다.

1) 영매(穎邁): 빼어나고 비범함.

2) 상탕(爽宕): 활달하고 방탕함.

3) 구검(拘儉): 언행을 마구 하지 못하도록 단속함.

4) 과렵(戈獵):창으로 사냥함.

5) 제배(儕輩):동배(同輩).

 

30세에 성균관에 입학하여 그 익년에 관시(館試)에 제1에 위(位)하고 다시 그 익년에 문과 병과(文科丙科)에 통과하여 교서관권지부정자(校書館權知副正字)에 선보(選補)되었다.

 

연산군 7년에는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 겸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이 되어 비로소 사필(史筆)을 잡으니 서사(書事)에 구검이 없었고 연산군 8년에는 통사랑(通仕郞)에 승진하여 연산군에게 사관(史官)은 인군(人君)의 언동을 기록하는 것인데 멀리 부복하여서는 탑상(楊上)6)의 동정을 문지(聞知)할 수 없으니 탑전(楊前)에 조금 가까이 가서 기주(記注)에 소루(疎漏)가 없게 하여 달라 청하였다.

6)탑상(榻上):교의(交椅와상() 따위를 통틀어 일컬음.

 

연산군 마음으로는 다소 불쾌히 생각하였으나 또한 어쩔 수 없어 윤허하셨다. 그러나 그 후 세자시예원사서(世子侍詣院司書)가 되고 또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이 되어서 서연관(書筵官)의 소실(所失)을 논하다가 연산군의 진노를 받아 안기역(安奇驛)으로 유배를 당하고 말았다.

 

마침 이해에 또 사화(史禍)가 일어나니 홍귀달(洪貴達), 김굉필(金宏弼), 이원민 등은 참화를 입고, 선생 또한 사관으로 많이 직필을 하였으며 또 전에 근전(近前)을 청한 일로 추격(追擊)되어 금부에 추하(推下)되어옥에 있기 실로 70일이었더니 하루는 연산군의 오점(誤點)으로 갑자기 방명(放命)을 입어 출옥하여 예에 따라 원배소(元配所)로 다시 돌아갔다. 그러다가 중종대왕의 정국(靖國)7)으로 몽방(蒙放)되어 전적(典籍)으로 환조(還朝)하였다.

7) 정국(靖國):중종이 연산군을 폐하고 나라를 편안하게 다스린 것을 가리킴.

 

중종 2년에는 호조좌랑에 제수되고 또 사헌부 지평에 승서(陞敍)되어 일을 처결하는 데 곧아서 권(權)을 굽히지 않으므로 시인(時人)에게 ‘소주도병(燒酒陶瓶)'이란 별호를 얻었다.

 

중종 3년에는 친로(親老)8)로 해서 걸(乞)하여 영천군수(永川郡守)에 외보(外補)되어 이래 6년간 지방관으로서 많은 치적을 남기고 과만(瓜滿)9 하여 군자첨정(軍資僉正)으로 들어와 사간원 사간이 되었다가 그 익년에 다시 밀양부사(密陽府使)로 나갔다.

8) 친로(親老):부모가 연로함.

9) 과만(瓜滿): 벼슬의 임기가 참.

 

이로부터 선생의 사환(仕宦)은 외보와 내직이 섞바뀌어 분주하였으니 나가서는 밀양부사로부터 충주목사, 안동부사, 성주목사, 대구부사, 영천군수, 경주부사, 경상도 시찰사를 역임하고, 들어와서는 선공부정(繕工副正), 사복시정(司僕侍正), 사헌부 집의(司憲府集義), 군자감 부정(軍資監副正), 시예원 보덕(侍詣院輔德), 병조참지, 동부승지, 형조참의, 홍문관 부제학, 부승지, 예조참의, 형조참판, 호조참판, 동지중추를 역임하였다.

 

그간 몇 번이나 친로로써 귀양(歸養)을 복걸하였으며, 또 부모가 돌아간 뒤로는 자신의 연로(年老)로써 해골(骸骨)을 빌었으나10) 중종은 끝내 허하지 않더니 그 37년 즉 공이 76세 때에 병으로 온천에 가기를 청하였으므로 중종도 부득이함을 깨닫고 동지중추부사를 제수하고 귀향을 허하셨다.

10) 해골(骸骨)을 빌다 : 늙은 신하가 벼슬을 내놓고자 임금에게 청원함.

 

이때 공이 한강에 배를 사놓고 장차 동(東)으로 돌아가고자 하니 의정(議政) 이하로 일시 진신11)이 모두 도문(都門)에 나와 막을 쳐놓고 전별(餞別)을 하는데 그것이 도문으로부터 한빈(漢濱)에 이르도록 연달았다 하며, 또한 거마(車馬)가 변전12)하여 보는 이가 모두 근고(近古)에 드문 성사(盛事)라 하였다 한다.

11) 진신: 벼슬아치를 통틀어 일컬음.

12) 변전 : 거마의 소리가 요란함.

 

환가(還家) 후에는 영지산(靈芝山)에 정사(精舍)를 구축하고 양로지지(養老之地)를 삼아 유유자적하더니 뜻밖에 지중추부사에 특수(特授)되어 황공불이(惶恐不已)하였다. 그러자 중종이 승하하시고 인종이 사위(嗣位)하셨을 때는 노병(老病)으로 조궐(造闕)하지 못하고 신정(新政)의 요견(要見)을 소진(疏陳)하였으며, 인조 또 승하하시니 호통(呼慟)13)하여 쇠병(衰病)을 불고하고 부궐(赴闕)하려 하였으나 자제가 만류하였으므로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3) 호통(呼慟):슬퍼서 울부짖음.

 

그후 계(階)는 숭정(崇政)에 올라 명종 9년에는 간관(諫官)이 이모(李某)는 나라의 기덕(耆德)14)인데 정력이 아직 쇠하지 않았으니 소유(召諭)를 가하기를 청하였으므로 명종은 곧 강서(降書)하여 포미(褒美)하고 승일부궐(乘馹赴闕)15)하라 명하였으나 공은 상전(上箋)하여 사사(辭謝)하고 그 익년에 향년 89세로 별세하였다.

14) 기덕(耆德): 나이 많고 덕이 많은 사람. 기숙(耆宿).

15) 승일부궐(乘馹赴闕):역말을 타고 대궐에 들어옴.

 

부(訃)가 조(朝)에 들리니 상은 좌우를 돌아보시고

“여러 번 불러도 오지 않더니 이제는 그만이로구나”

하시고 진도(震悼)하셨다.

뒤에 효절(孝節)이라 시(諡)하였다.

 

공은 천성이 효우(孝友)하여 조(朝)에 있어서도 일상 양친(養親)을 잊지 않아 몇 번이나 자청하여 지방관이 되었고 일찌기 부제학으로서 내근(來覲)하였을 때는 94되는 아버지, 92되는 숙부, 82되는 구씨(舅氏)16) 외향인(鄕人) 연고자 6인을 더하여 구로회(九老會)를 지어 부모의 마음을 위로하였다.

16) 구씨(舅氏):외숙.

 

또 성(性)은 비록 고간(高簡)하였으나 접인(接人)에 있어서는 귀천의 구별이 없었으며 혹 술을 두고 청하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구태여 사양하지 않았다 한다.

 

또 산수를 좋아하여 선생이 거하는 분천은 낙동강 상류에 있어 본시 산명수려한 곳인데 임학(林壑)이 심수(深秀)한 산 동애에 한 거석(巨石)이 물에 임하여 10여 장(丈)을 두기17)하여 있는 것을 특애(特愛)하여 그 위에 애일당(愛日堂)을 구축하여 봉친유완(奉親遊玩)하는 곳을 삼고 그 바위를 농암(聾巖)이라 하여 인해 자호(自號)를 삼았다.

17) 두기 : 깎아지른 듯 서 있음.

 

치사퇴한(致仕退閑)한 후로는 더우기 계산(溪山)간에 자방(自放)하여 경(景)을 얻어 흥이 이르면 돌아감을 잊어버리고, 혹은 죽장망혜(竹杖芒鞋)로 임헌을 천척(穿陟)18)하여 일수일석(一水一石)이라도 조금 청음(淸陰)한 곳이 있으면 자리를 깔고 앉아 득의흔연(得意欣然)하고 안운(岸韻)이 삼일(森逸)하여 일점(一點) 부귀진애(富貴塵埃)의 기(氣)가 없으며, 때로는 강에 나가 경주단도(輕舟短棹)19)로 왕래유상(往來遊賞)하며 시아(侍兒)로 하여금 어부가(漁父歌)를 불리어 홍을 붙이니 표연히 유세독립(遺世獨立)한 뜻이 있어 시인(時人)이 고앙(高仰)치 않은 이가 없었다 한다.

18) 임헌을 천척():산을 오름.

19) 경주단도(輕舟短棒):작은 배와 짧은 노.

 

더우기 만년에는 어부사(漁父詞)를 얻어 미미히 20) 망권(忘倦)하였으니 원래 어부사는 작자가 불명한 것으로 단가, 장가 양편에 되어 있어 단가는 황중봉(黃仲峯)이, 장가는 퇴계가 얻어서 농암에게 준 것이다.

20) 미미히: 쉼 없이.

 

선생은 이것을 얻어 그중에 말에 불편(不偏)한 것이며 중첩된 것이며 또 전사(傳寫) 때의 와작(訛作)인 듯한 것을 될 수 있는 대로 구문 본의(舊文本意)에 인하여 증손(增損)을 가하여 장가는 12장을 9장으로, 단가는 10장을 5장으로 찬정하였다. 이것이 곧 세상에서 말하는 농암의 <어부사>란 것인데 선생은 이것을 극호(極好)하여 〈농암야록(巖野錄)〉이라 제첨(題籤)21)하고 스스로 서문을 써서 불였거니와 그 서문은 가히 그의 노퇴(老退) 후의 생활을 봄 직함이 있으니 일부를 인용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21) 제첨(題籤):제목을 써서 붙임.

 

 

“내 늙어 전간(田間)에 물러 나오니 마음은 한가롭고 일은 없어 고인(古人)의 상영22)간에 가히 부를 만한 시문(詩文) 약간 수를 부집23)하여 비복(婢僕)에게 가르쳐 불리어 시시로 듣고 소견(消遣)24)하였더니 아손배(兒孫輩)가 늦게 이 노래를 얻어 와서 보이기로 내 보니 그 어는 한적하고 의미는 심원하여 한번 음영(吟詠)함에 사람으로 하여금 공명을 탈략(脫略)하고 표표히 진외(塵外)에 하봉(遐峯)25)케 하는 뜻이 있어 이것을 얻은 후로는 전일(前日)의 완열(玩悅)26)하던 가사(歌詞)를 다 버리고 이에 전의(專意)하여 손수 등책(騰册)하여 두고 화조월석(花朝月夕)에 술을 잡고 벗을 불러 분강에 소정(小艇)을 띄워 음영하면 실로 흥미진진한 것이 있어 미미히 망권하노라.”

하였다.

22) 상영: 술을 마시면서 시가(詩歌)를 읊음.

23) 부집:모음.

24) 소견(消遣): 소일.

25) 하봉(遐峯):멀리 있는 봉우리. 여기서는 속세를 떠나 멀리 있음을 말함.

26) 완열(玩悅):즐겨함.

 

퇴계도 그에 발문을 써서

“선생이 부귀를 부운(浮雲)에 비기고 아회(雅懷)27)를 물외(物外)에 붙여 일상 단도(日常短棹)로 연파(煙波)28)의 가운데 소오(嘯傲)하고 조석(釣石) 위에 배회하여 갈매기를 좇아 망기(忘機)하고 고기를 보아 지락(知樂)한즉 그 강호지락(江湖之樂)은 가히 진의를 얻었다.”

하고 또

“선생이 매양 가빈호경(佳賓好景)을 만나면 수함(水檻)에 빙굴(憑屈)29)하고 연정(煙艇)을 희롱하여 반드시 수아(數兒)로 병창이창영(竝唱而唱詠)하고 연메이편선30)케 하면 방인(傍人)이 바라볼 때 신선과 같다.”

고 하였다.

27) 아회(雅懷):풍아(風雅)한 마음.

28) 연파(煙波): 안개가 자욱하게 낀 수면, 물안개.

29) 빙굴(憑屈): 의지함.

30) 연예이편선:손에 손을 잡고 춤을 춤.

 

선생에게는 그 문집에 자작 시조라 하여 몇 수 전하는 것이 있지마는 선생의 시가적 생활은 도리어 그저 찬정가(纂定歌)인 이 <어부사>에서 볼 수 있고, 또 선생 치사 후의 생활은 그야말로 태평한민(太平閑民)이 되어 때로 어부사를 불러 제력(帝力)이 어디 있는 것을 아는 듯 모르는 듯이 유유자적하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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