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의돈
1891~1969. 사학자, 충남 생. 어릴 때 한학을 수학. 평양 대성학교, 휘문의숙, 보성고보교원을 거쳐 조선일보 사원, 문교부 편수관, 동국대 교수 역임.
저서에 「신편조선역사(新編朝鮮歷史)」, 「중등조선역사」등이 있음.
성은 이, 명은 용, 자는 청지(淸之)요 호는 비해당(匪懈堂), 또는 매죽헌(梅竹軒), 또는 낭각거사(琅珏居士)라 하며 세종의 제3자로서 안평대군(安平大君)을 봉하였으므로 세인이 안평대군이라 부르기를 많이 한다. 태종 무술에 탄생하였다가 단종 계유에 화를 입어 죽었으니 수(壽)가 36세였었다.
대군은 성군 세종대왕의 아들로서 위대한 혈통을 받고 난만치 각 방면으로 천재(天才)가 초월하였었다. 시문과 서화에 다 능한 중에도 더욱 서법이 奇絶(기절)하여 당시에 천하제일이라 숭앙케 되었었다. 그리고 또 풍류호화(風流豪華)의 생애를 즐겨하겨 쾌인쾌유(快人快遊)로 일세를 용동(聳動)1)케 하였던 것이다.
1)용동(聳動): (무섭거나 놀랍거나 또는 기쁘거나 하여) 몸을 솟구쳐 뛰듯 움직임.
「용재총화」에
“비해당은 왕자로 학문을 좋아하며 또 시문에 뛰어나고 서법이 기이하고 절륜하여, 천하의 제일이다.
또한 그림을 잘 그리고 거문고 타는 기술이 능하며 성격 또한 호탕하고 옛것을 좋아하며 명승 찾는 것을 즐긴다. 북문 밖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또 남호(南湖) 가에 담담정(淡淡亭)을 지어 萬卷(만권)을 장서하여 문사(文士)들을 모아 12경시를 짓고 또 48영을 지었다.
혹은 불을 밝혀 밤새 이야기하고 혹은 달빛 아래 배를 타거나 혹은 점괘를 보거나 장기나 바둑을 두었으며 거문고와 퉁소 소리가 그치는 일이 없다.
마시는 것을 좋아하여 너무 취하고 한때의 명유(名儒)들과 교제하지 않음이 없으며 무뢰배들 역시 많았다. 돌아가서는 장기를 두는데 장기 말은 모두 옥을 사용하며 글자에는 금도금한 것을 사용하였다. 또 사람으로 하여금 가는 명주를 짜게 해 즉시 일필휘지를 휘갈기니 초서와 해서가 어지럽게 섞였다.
그것을 구하는 자가 있으면 즉시 그것을 주었다. 이런 유의 일들이 많았다.” (편집자 역)
라 함이 곧 그의 진상을 말한 바이다.
이와 같이 시문 서화와 박혁사죽(博奕絲竹)2)으로 당대의 명사를 다 모아놓고 궁사극치(窮奢極侈)의 생활을 하여 온 결과로 마침내 그의 형 수양대군의 猜疑(시의)를 받아서 계유사화(癸酉士禍)에 황보인, 김종서 등과 같이 잡혀 멸문(滅門)의 참화를 당하게 되었었다.
2)박혁사죽(博奕絲竹): 장기와 바둑과 거문고와 피리.
대군의 필법은 고려 중기 이후로 반도에 가장 유행하던 송설(松雪; 조맹부)체이다. 호매, 활발한 그의 필치는 반도 유일의 대가로 숭앙이 되어 왔을 뿐 아니라 지나의 능서가(能書家)도 놀라지 아니할 수 없게 되었다.
「용재총화」에
“안평대군은 오로지 자앙(子昂)을 모방해서 그 호탕함이 상하가 함께 늠름하여 날아 움직이는 뜻이 있다. 예겸(倪謙) 봉사(奉使)가 우리나라에 와서 그 필적을 보고 아끼며 말하기를
'지금 진학사(陳學士)가 중국의 서단에 이름이 높거늘 그러나 왕자에 비하면 미치지 못한다'
하고 글을 받아갔다.”(편집자 역)
라 하였고
「용천파적기(龍泉破寂記)」에는
“예겸이 사신으로 왔을 때 신숙주가 그와 함께 놀고 있었는데 손에 책 한 권을 들고 있었다. 겉표지에 몸집 큰 늙은이 둘을 그렸고 이어서 비해당이 글씨를 썼다.
예겸이 그를 보고 가로되
'필법이 심히 오묘하다. 이 누구의 작품인고’
하매 신숙주가 거짓으로
'내 친구 강경우(姜景遇)다’
하니 예겸이 종이를 가져와 글을 청하였다.
숙주가 인재(仁齋)의 글씨를 주니 같은 필치가 아니었다.
세조가 이를 듣고 말하되
'왕손 공자의 글이라 문장이 단아하고 귀하며 예(藝)에 있어서 어찌 그릇됨이 있겠는가'
하며 비해당에게 영을 내려 써주게 하였다.
후에 국인이 연경에 가서 묘필(妙筆)을 구하니 연인(燕人)들이 말하기를
'너희들 나라에 제일인자가 있거늘 어찌 수고로이 멀리서 구하느냐’
하였다.
이로써 청(淸)의 자취를 알 수 있으니 중국에서 중히 여김을 본다.”(편집자 역)
라 하였으며
「경수당집(警修堂集)」에는
“고계가 내가 가지고 있는 안평대군 견본(絹本)3) 진적에 발문을 써서 말하기를 이는 능히 송설의 재주라, 성스런 필치를 본따 움직인 것이 진실로 분명하다.”(편집자 역)
라 하였다.
3)견본(絹本):명주에 쓰거나 그린 시화.
이로부터 보면 지나 명·청(明淸) 양대의 대표적 대가인 예겸 옹방강(翁方綱)4)으로도 이렇듯 찬탄하기를 마지 아니하였던 것이다.
4)옹방강(翁方綱): 청대의 학자, 서도가. 호는 담계. 금석과 서화에 정통하고 서도에 뛰어났음.
그러나 계유참화와 역대 전란에 그의 유적이 거의 소실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그의 진적(眞蹟)을 얻어 보기가 효천(曉天)에 성신(星辰)5)과 같이 드물게 되었음은 가장 유감이 되는 바이다.
5)효천(曉天)에 성신星辰):새벽하늘의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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