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文章/조선명인전

54.조선-양성지(梁誠之)

구글서생 2023. 5. 9. 03:57
반응형

조선-양성지(梁誠之)

 

문일평(文一平)
1888~1939. 사학자. 호 호암(湖巖). 평북 의주 생. 일본 와세다(早稻田) 대학 정치학부중퇴. 상해에 있는 대공화보사(大共和報社)에 근무, 귀국 후 중동·중앙 등에서 교편을잡았고, 중외일보 기자를 거쳐 조선일보 편집 고문으로 7년간 근무.저서에 「조선사화」, 「호암전집」, 「조선문화예술」, 「한국의 문화」등이 있음.

 

500년간에 학자 문인이 많았었고 또 모신 책사(謀臣策士)도 적지 않았으나 대개는 정주(程朱)의 학설과 반마(班馬)1)의 장구(章句)를 철습(掇拾)2)하는 이들이요, 그렇지 않으면 대의명분을 구실로 삼아 함부로 대외경(對外硬)을 부르짖는 이와 인의(仁義)의 공탄(空彈)3)을 가지고 국방의대본(大本)을 삼으려고 하는 우원무모(迂遠無謀)4)한 무리는 얼마든지 있었다.

1)반마(班馬): 중국 전한(前漢) 때의 유명한 역사가인 반고(班固)와 사마천(司馬遷)을 아울러 일컫는 말.

2)철습(掇拾): 거두어 주워 모음.

3)공탄(空彈): 헛된 방편.

4)우원무모(迂遠無謀):세상일에 어둡고 지모 없음.

 

그러나 자아의 현실을 정시하여 백년대계는 세우지 못할망정 일국의 치화(治化)를 의식적으로 계획적으로 잘해 가자는 실제적 경륜가에 이르러서는 희귀하기 짝이 없다. 눌재(訥齋) 문양(文襄) 양성지(梁誠之)로 말하면 이조 성시(盛時)에 배출한 인물 중에 있어서 실제적 경륜가로서 한 이채가 되었다. 양문양(梁文襄)의 이름은 성지요, 호는 눌재니 문양은 그 졸후의 사시(賜諡)다. 세종조 집현전 학사로, 세조조 이판(吏判)으로, 성종조 대제학으로 이처럼 6조를 역사하는 동안에 문교상에 끼친 대공(大功)은 말할 것 없거니와 정치상 공의 의견과 언론은 어느 것이 당시의 경책(警策)이 되지 않으며 후세의 명감(明鑑)이 되지 않으랴.

 

공은 항상 역사의 실제에 착안하여 위국(爲國)의 요도(要道)를 입론(立論)함이 특색이었는바 그 당시에 있어서 정체(正體)를 가장 잘 이해하던 경륜가였다. 요순(堯舜)만을 유일한 이상적 성군(聖君)으로 추앙하는 시절에 단군의 숭사(崇祀)5)를 주장한 이가 이 눌재 선생이었으며, 중국사만을 일반 교과서로 사용하는 시절에 동국사(東國史)의 고구를 주장한 이가 이 눌재 선생이었으며, 거세(擧世)가 한화(漢化)의 풍에 휩쓸리는 시절에 국속(國俗)의 존중을 주장한 이가 이 눌재 선생이었었다.

5) 숭사(崇祀): 숭배하여 제사지냄.

 

그뿐이 아니라 문신으로서 무사(武事)를 많이 말한 이 눌재 선생 같은 분이 드물 것이다. 조선에는 문묘(文廟)는 있으나 무묘(武廟)는 없으니 마땅히 무묘를 세우고 무성(武聖)을 주위(主位)로 하여 동국 역대의 명장을 배향하자고 건언(建言)하였음과 요·금(遼金) 고속(古俗 ; 그 실은 고구려 유속)을 본받아 춘추로 3월 3일과 9월 9일에 교외에서 대사(大射)를 시(試)하여 사기를 진작하고 무풍을 장려하자고 건언하였음은 확실히 문묘국에 대한 일대 경책이다.

 

군정십책(軍政十) 중에 특히 군호(軍戶)의 우휼(優恤)6)을 역설하여 가로되

 

“신라의 풍속에 전망자(戰亡者)를 숭작(崇爵)으로써 영예롭게 하고 그 유족을 관록(官祿)으로써 부양하였으니 위국진충(爲國盡忠)의 용사가 생겨남이 우연함이 아니다. 근일 전사자에게는 특휼의 은전이 없고 으례 주는 부미(賻米)7)까지도 청촉(請囑)해서 겨우 받게끔 된즉 이러고서야 어찌 사졸(士卒)의 모험심을 고분케 하랴.”

 

이는 선생이 당시 군정의 결함을 통쾌하게 지적한 바이거니와 무인을 멸시하는 이 폐풍은 교정되지 못한 채로 500년을 내려왔다.

6) 우휼(優恤):두터운 은혜로 구휼함.

7) 부미(賻米):부의로 보내는 쌀.

 

선생은 정병주의(精兵主義)인만큼 양보다도 질에 치중하여 군사를 뽑음에는 반드시 시재(試才)8)함을 주장하였고 병역의 토대인 호적의 정밀을 기할 것과 또 독신의 복역을 면할 것을 군국의 3대 원칙으로 삼았음은 선생의 탁견이라 하겠다. 그 외 비변십책(備邊十策) 같은 것은 국방에 관한 근본방침을 상술한 것인바 또한 선생의 대표적 의견이라 할 수 있다.

8)시재(試才): 재주를 시험함.

 

세조의 명에 의하여 선진(選進)한 「팔도지리지」와 연변방수도(沿邊防戍圖)는 실측 지도가 없는 그 당시에 있어서 위대한 공헌임은 말할 것도 없다.

 

선생은 농정(農政)에 유의하여 일찌기 건의하기를 무농(務農)의 본(本)이 지력(地力)을 잘 이용함에 있은즉 모름지기 국가로서 개간사업을 일으켜서 해택(海澤)9)과 강포(江浦)에 방축을 설하고 수전(水田)을 만들자고 주장하였거니와, 직업이 없는 유수(遊手)들을 몰아다가 노역을 시켜 평시에 농업을 힘쓰게 하고 여가에 무예를 익히게 하면 일거양득이 된다고 하였다. 이는 너무 이상에 흐르는 듯하나 또한 사실에 치중하지 아님이 아니다.

9)해택(海澤): 간석지(干潟地).

 

선생은 민생을 위하여 소극적으로 민폐를 제거하고 적극적으로 민복(民福)을 증진할 기다의 건언이 있었지만 그중에도 각 도군현에 의료기관의 설치를 주장함과 같음은 참말 감사할 바이다. 그 설에 가로되 질병은 생민(生民)의 가장 괴로와하는 바이니 경중(京中)에는 비록 의사와 의원이 있어서 진병시약(診病施藥)하나 지방에는 그렇지 못하여 궁촌(窮村) 인민이 한번 질병에 걸리면 그 신고(辛苦)의 상(狀)을 차마 볼 수 없다. 지방의 대소를 따라 의원 수의 다과를 정하여 전의감(典醫監)에 와서 의술을 연구한 후 각 해당 지방에 돌아가 진병시약하게 하고 감사로 하여금 그 성적의 양부(良否)를 조사하여 포폄을 행케 하면 이같은 혜정(惠政)이 없겠다고 하였다.

 

선생은 사회정책에 대해서도 일종 진보적 의견을 가졌으니 그 한두 예를 들건대, 백정의 양민될 길을 터주자고 함과 또 노비의 노역을 편중케 하지 말고 균일하게 하자고 주장함이다. 그러나 일보를 더 내켜서 노비의 폐지에 상념이 미치지 못한 것은 시대가 시대이므로 또한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선생은 풍속에 대해서도 얼만큼 개량주의를 가졌으니 혼례에 있어서는 간단하게 할 것을 말하였고 연찬(宴饌)에 있어서도 절검(節儉)하게 할 것을 말하였다.

 

선생은 그 당시 고문시험(高文試驗)인 과거에 대해서도 그 과목을 현대 시의(時宜)에 적합하도록 개정할 것을 여러 번 제의하였거니와, 선생은 예술 특히 음악에도 이해를 가졌으니 아악을 잘 보호하자고 말하였으며 본국 및 중국악 외에 번악부(蕃樂部)란 것을 따로 설치하여 일본악과 여진악을 아울러 채용하자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선생에게 있어서 현대적 의의를 함축한 주장으로 말하면 도서의 보존 및 간행을 꾀한 것이다. 언제나 그렇지 않으리오마는 문화가 담겨 있는 도서의 보존은 사회의 문화 존속을 위한 중대 사명의 하나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선생은 이렇게 말하였으니, 중국으로부터 온 서적은 비록 산일(散逸)하더라도 오히려 가히 구할 수 있거니와 본국 문사(文史)10)는 한번 유실되면 다시는 얻을 수 없으니 동국 소찬(所撰)의 책은 반드시 인출·전사 또는 구구(購求)하여 적어도 10건씩을 만들어 관각(館閣)과 여러 사고(史庫)에 두자고 하였다.

10) 문사(文史):문장과 역사 또는 문학과 사학.

 

어디로 보든지 선생은 실제 경륜가가 아닐 수 없다.

 

선생의 소장(疏章)과 시문을 모은 전서(全書)로 말하면 본래 「가집(家集)」 6권과 「주의(奏議)」 10권이 있던 것이 중간에 산일(散失)11)되어 버렸다 한다.

11) 산일(散失):흩어져 더러 빠져서 없음.

 

현존한 「눌재집(訥齋集)」 6권 3책은 선생의 후손 양대수(梁大樹)라는 이가 산일한 중에서 수취(蒐聚)하여 간판(刊版)한 것으로 그 후 정조께서 각신(閣臣)에게 명하시어 개인(印)한 것이다. 그 내용은 주의, 잡저 및 고금시 약간 수와 부록으로 김수온(金守溫), 서거정(徐居正) 등 명류(名流)의 시문 수편을 실었었고 또 선생의 유사유묵(遺事遺墨) 등을 거두어 넣었다.

 

그러나 선생이 6조를 역사하는 동안에 주소(疏)와 사적(事蹟)이 실록에 적혀 있는 것도 본집에는 누락된 것이 있으며 본집에 수재(收載)된 것도 어떤 것은 목록만 있고 그 전문이 탈일(脫失)되었으므로 독자의 개탄을 불금(不禁)하던바 최근에 이르러 선생의 후손인 모씨가 널리 실록과 기타 모든 전적(典籍)에 보이는 선생의 일문(快文)을 수출(搜出)하고 또 혹 원집에 없는 선생의 일문을 발견해서 새로 제목을 붙여 고람(考覧)에 편케 하여 「눌재속집(訥齋續集)」 4권 1책을 만들었다. 이 속집은 원집에 대하여 보조적 효용을 하는 동시에 독자적 가치를 가진 것이다.

 

선생의 제치방략(制置方略)이 많이 변방에 있었는바 북방비어(北方備禦)에 관한 초·차(初次) 상소 및 3차 상소와 편의18책(便宜十八策;28책의 잘못?)이 모두 원집에 목존문일(目存文侏)12)했던 것을 이 속집에 실었음은 잃었던 야광주를 다시 찾은 듯한 희열이 생긴다.

12) 목존문일(目存文侏):목차만 있고 내용은 분실됨.

 

청개정전정병제소(請改正田政兵制疏)를 비롯하여 진시정(陳時政) 6책과 응지상시폐육사(應旨上時弊六事)와 기타 십수 소(疏)는 아주 원집에 빠진 것이 속집에 실렸는데 그중에도 청파중국치진개주소(請罷中國置鎭開州疏) 같은 것은 조선과 한토(漢土)와의 관계를 역사적으로 논한 필독할 문자로서 선생의 원견탁식(遠見卓識)13)이 자행간에 번쩍임을 살필 것이다.

13) 원견탁식(遠見卓識):멀리 보는 식견과, 뛰어난 인지력을 가짐.

 

속집의 분류는 원집의 그것에 의하여 주의, 잡저 및 부록 맨 끝에 유사(遺事) 이렇게 편차(編次)하여 원집·속집 함께 4책으로 만들었다. 이 속집의 출판은 눌재 연구의 학도로 하여금 여러 책을 섭렵하는 노력을 생략해 준만큼 사의를 표하는 바로서, 이런 유익한 서적이 금후에도 자꾸 간행되어 우리네 고전문화를 고구함에 대하여 많은 편리를 주기를 바라는 바다.

 

눌재 선생을 말할 때에 기이한 일화가 하나 있으니 그는 다름이 아니라 정조께서 궁중도서관인 규장각을 설치하시고 세조께 일찌기 건의한 눌재의 각재(閣制)를 그대로 채용하였은즉 눌재의 건의가 300여 년 만에 비로소 가납(嘉納)함을 입어 실현된 셈이다.

 

그러므로 정조께서도 말씀하시기를 규장각이 비록 오늘날 설치되었으나 그 실 창시의 공로자는 양문양이라 하여 각신에게 명하시어 「눌재집」을 간행케 하고 특히 어제(御製)의 서(序)를 권수(卷首)에 실어서 우대의 뜻을 보이셨음은 구천에 있는 선생에게도 일대 영예가 될 것이다.

 

그런데 더욱 기이한 것은 이 규장각을 설치한 지 15년 동안에 각관(閣官)된 30명이 모두 선생의 외손이었으니 우연이라 할까 응보(應報)라 할까 참말 놀랄 바이다.

 
반응형

'한글 文章 > 조선명인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56.조선-장영실(蔣英實)  (1) 2023.05.09
55.조선-세종대왕(世宗大王)  (1) 2023.05.09
53.조선-박연(朴堧)  (1) 2023.05.09
52.조선-이천(李蕆)  (1) 2023.05.09
51.조선-황희(黃喜)  (1) 2023.0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