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도(李丙燾)
1896- 사학자. 호 두계(斗溪). 경기도 용인 생. 일본 와세다(早稻田) 대학 사학과졸업. 서울대 대학원장, 진단학회 회장, 학술원 회장 등을 역임. 근대한국사학 수립에막대한 공을 세움.
저서에 「한국사대관」, 「한국사(고대편, 중세편)」, 「한국 고대사회와 그 문화」 등이 있음.
1. 대왕의 역사상에 처한 위대성
정음(正音)을 상용하는 무리의 길이 잊히지 못할 큰 은인인 이조 제4대 세종대왕은 자래(自來)로 '해동요순(혹은 동방요순)'의 칭찬을 듣는 성군이거니와, 대왕의 역사상에 처한 존재는 실로 특이하고 위대한 바가 있었다. 이조의 개국이 아직 연천(年淺)하여 모든 것이 초창의 역(域)을 벗지 못할 즈음에 위대한 포부를 가지고 각종의 시설, 경영, 개혁, 정리를 성(盛)히 하여 조선의 기초를 확립하고 태조의 유업을 수성(守成)한 의미에 있어서도 대왕의 특이성을 인(認)할 수 있지만, 이보다도 그 억제치 못할 문화욕(문화적 충동), 창조욕(창조적 충동)에 움직여 재래의 동방(조선) 문화 내지 온갖 동양 문 음미 검토하여 혹은 그 정화를 재현하고혹은 종종의 신문화를 창출하여 반도의 문화로 하여금 가장 의의 있고 광휘 있게 한 동시에 길이 은택을 후세에 끼친 점에 있어, 더욱 그 위대성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대왕은 비단 동방 역대 제왕 중에 걸출하실 뿐만 아니라 인류사상에 있어서도 드물게 보는 영주(英主)요 위인이라고 하겠다. 그 성지(聖知)와 인덕(仁德)은 과연 중국인의 전설상 이상적 군주인 요·순에 견줄 만하며, 그 포부의 웅대함과 사려의 주밀하심은 저 나마(羅馬)1)의 유스티아누스대제나 청(淸)조의 강희(康熙) 황제와 같이 일컬을 것이요, 제례작악(制禮作樂)의 성한 점으로 보아서는 조선의 주공(周公)2)이라고 할 만하였다.
1) 나마(羅馬):로마(Rome).
2) 주공(周公):주나라의 정치가. 문왕(文王)의 아들이며 무왕(武王)의 아우. 무왕을 도와서 주(紂)를 쳐부숨. 또 주대(周代)의 예악 제도는 그가 계획하여 이룬 것임.
만일 대왕으로 하여금 이네들과 같은 환경 속에 임하게 하였던들 얼마나 더 위대한 훈업(勳業)을 남기었을지! 이루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대왕의 탄생을 조선에 두심이 대왕 자신에 행(幸)이었든가 조선에 행이었든가는 대답을 기다릴 것 없이 현명한 독자 제군이 잘 알 것이다. 서술상 편의로 다음에 다시 항목을 나누어 대왕의 성행, 포부, 내치 및 외교에 관하여 좀 자세히 말하려 한다.
2. 대왕의 성행, 재학(才學) 및 포부
대왕의 휘(諱)는 도(陶)요 자는 원정(元正)이니, 태종의 제3자요, 태조의 손자이시며 모후(母后)는 원경왕후 민씨(元敬王后 閔氏)였다. 태조 6년 4월 10일 한양 잠저(潛邸)에서 탄생하여 태종 8년에 충녕군(忠寧君)을봉하고 동왕 12년에 대군에 진봉(進封)되었다가 동왕 18년에 장형 제의 폐저(廢儲)로 인하여 대신 세자에 책립되고 이어 부왕의 선(禪)을 받으셨다.
폐세자는 즉 양녕대군으로 강봉된 이니, 본래 품행이 부정하고 학문을 좋아하지 아니하여 매양 잡류배로 더불어 음희(淫戱)와 유럽(遊獵)을 일삼는 등 자못 실덕이 많을새, 드디어 이를 폐하여 광주(廣州)에 방(放)하고 대신 현(賢)을 택하여 충녕을 세우게 된 것이었다.
그때 대왕의 나이는 22세셨으니, 그 용모의 우아하심과 자질의 총명하심이며 고금에 통달하심과 및 그 강유(剛柔)의 겸덕은 과연 당시 부왕 이하 군신의 중망(衆望)의 촛점이 되셨다. 같은 형제로서 양녕과는 정반대요 호대조(好對照)셨다. 대왕은 더욱 천성이 학문을 좋아하여 일찌기 서(書)를 독(讀)하심에 백 번을 거듭하시고 그중에도 「좌전(左傳)」, 「초사(楚辭)」에는 다시 백 번을 더하여 문(文)의 의리(義理)를 다하시며, 또 비록 병환 중이라도 오히려 독서를 폐하심이 없었다 한다. 태종께서
“충녕군(세종)은 천성이 총명하고 호학불권(好學不倦)하여 비록 성한극서(盛寒極暑)라도 종야독서(終夜讀書)하여 손에서 책이 떠날 사이가 없다.”
하심은 세종 탁저(擢儲)3) 때에 하신 말씀이거니와, 세종 자신의 말씀에도
“나는 서사(書史)를 한번 눈에 거치기만 하면 잊지를 아니한다.”
하시고, 또
“내가 궁중에 있어 팔을 끼고 한좌(閑坐)한 적이 없었다.”
고 하신 것을 보면, 오인은 더욱 그 총명의 절인(絶人)하심과 학문에 대한 열성 근면에 경복치 아니할 수 없는 바이다.
3) 탁저(擢儲): 임금의 대를 이을 세자로 발탁됨.
대왕의 일상생활은 이러한 근면 중에 있어, 즉위하신 후에도 매일 인시(오전 4시)에 기침하여 평명(平明)에 군신의 조회를 받으시고 다음에 정사에 임하시며 또 다음에는 경연(經筵)4)에 어(御)하시어 (儒臣과 더불어) 서(書)를 강하시고 입어(入御)하여서도 오히려 서사(書史)를 열람하시는 것으로써 일과를 삼아 조금도게을리하심이 없었다.
4) 경연(經筵):임금이 학문을 닦기 위해 신하들 중에서 학식과 덕망이 높은 사람을 궁중에 불러 경적(經籍)과 사서(史書) 등을 강론하게 하던 일.
대왕은 이와 같이 근면불태의 미질(美質)을 갖추셨을 뿐만 아니라 다취 다방면의 기호와 창의 창작의 대재(大才)를 겸비하여, 경사(經史)에 박통하심은 물론, 정치, 경제, 법률, 문학, 음운학 및 불노(佛老)의 서(書)로부터 천문, 지리, 역산(曆算), 음악, 의약, 병학(兵學) 내지 이들에 관한 기구기계(器具機械)에 이르기까지 심중한 취미를 가지시어 혹은 친히 이를 연구 발명하는 학자도 되시고 혹은 전문가를 지휘하여 공부 제작케 하신 일도 있지만, 그 지휘 지도도 대왕과 같은 역량의 인물이 아니면 적(適宜)를 얻기 어려웠다. 대왕은 이 밖에 서화 방면에까지도 유의하시어 묘경(妙境)에 입(入)하셨거니와 (특히 蘭竹에 長하심) 그 얼마나 다취다능의 인물이셨던가를 알 수 있다.
대왕의 이러한 다방면적 기호와 창조적 천재는 저 근면불태의 미질과 아울러 늘 그 두뇌와 사지를 움직여 실제의 사위(事爲)로 나타나지 아니함이 없었으니, 대왕에게는 ‘무사(無思)’와 ‘무위(無爲)’가 도리어 고통이고 금물이었다. 즉 사(思)하고 위(爲)함이 무상의 쾌락이었다. 그러나 대왕은 결코 무의미 무소용의 것을 사려하시거나 영위하시지는 아니하였다. 일의 대소를 불문하고 반드시 의의있고 가치 있는 일이라야만 사위(思爲)하시기를 마지 아니하셨다. 달리 말하면, 대왕은 이상의 인물이신 동시에 실행의 인물이셨다. 자기의 이념에 비추어 옳은 것이라고 생각된 일은 좌우 군신의 어떠한 반대가 있을지라도 이를 관철 실행하시고 마셨다.
대왕은 원래 전통적 숭유주의(崇儒主義)의 군주시라, 그 학문, 정치, 도덕이 유교의 규범을 지키심이 많았지만, 대왕의 유교주의는 결코 편협하고 고루하고 공리공담적인 것이 아니었다. 즉 ‘온고지신(溫故知新)’,‘격물치지(格物致知)’, ‘곡창방통(曲暢旁通)’, ‘이용후생(利用厚生)’,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주안으로 한 통유주의(通儒主義)의 유교였다. 그러므로 그 견식의 탁월하심은 도저히 속유(俗儒)가 이에 미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재위 32년간의 문치(文治)는 실로 후인을 놀라게 함이 많을 뿐 아니라 길이 은택을 금일에까지 내리심이 있으니, 정음의 창작과 같은 것은 그 가장 두드러진 예의 하나일 것이다.
대왕은 내치에서만이 아니라 외치에 있어서도 큰 포부를 실행하시어 남으로 대마도 왜인을 위무하시고 북으로 야인(野人 ; 여진)을 여러 번 토벌하시어 압록강과 두만강 근처에는 저 유명한 4군(四郡)과 6진(六鎭)을 설치하여 국가의 세력을 신장케 하였다. 즉 대외관계에 있어서도 각각 적의한 정책을 쓰셔서 더우기 북변에 대하여는 진취의 책(策)을 베푸시어 외구(外寇)로 하여금 용이히 빈틈을 엿보지 못하게 하셨다.
대왕께서 이와 같이 내외 양 방면에 득의의 치(治)를 행하시게 된 것은 원래 그 위대한 성격과 포부에 인함이 많지만 또한 그 밑에 기다(幾多)의 보좌의 신(臣)이 있어 이에 심혈을 다함에도 있었다. 황희(黃喜), 맹사성(孟思誠), 허조(許稠), 김종서(金宗瑞), 최윤덕(崔潤德) 기타 문무 제신은 실로 대왕을 위하여 생(生)한 고문이요 수족이라고 할 만한 인물들이었으니, 대왕의 용인(用人)하심이 또한 적재 적임주의에 편중하셨던 것이다. 요컨대 대왕의 일대사업은 대왕 한 분으로도 수성(遂成)할 수 없었고, 또 제신만으로도 성취할 수 없던 것으로, 이 군신 상하가 각각 그 소(所)를 얻어 합심 협력함에 비로소 이루어진 것이라 하겠다. 황희, 허조는 사퇴한 후라도 불시의 소명이 있을까 하여 야불해의(夜不解衣)하였다 함은 유명한 이야기이거니와 이것만으로도 그때 군신의 사이가 얼마나 친밀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3. 대왕의 내치 일반
1) 집현전의 설치와 편찬사업
내치 중에도 먼저 들지 않으면 안 될 것은 집현전의 설치, 학자의 우대 및 각종 서적의 편찬사업에 취하여서니, 이는 대왕의 사업 중에 가장 큰 의의를 가졌던 것이다. 집현전은 일종의 학술연구소, 즉 왕립 아카데미로서, 국내의 준재를 뽑아 이곳에 모아 경사(經史)를 중심으로 기타 학술을 토구(討究)하며 각종의 서적을 편찬케 하던 곳이니, 이미 정종 때에 잠시 설치되었다가 곧 폐지를 당하였던 것인데, 대왕 2년에 이르러 다시 이를 부활시켜, 문학의 사(士) 수십 인을 이에 선충(選)하여 그중 10인은 경연(왕의 독서하는 곳), 10인은 서연(書筵;세자의 講書하는 곳)의 요무(要務)를 띠게 하였었다. 그리하여 학사들은 매일 여기에 출근하여 고전을 연구하고 조석으로 논사(論思)하여 일관(日官)이 때를 아뢴 뒤가 아니면 물러가지를 못하였다. 대왕은 이것으로 만족치 않다 하여 집현전의 유신(儒臣;학사)들을 교대로 숙직케 하며, 그중에도 자자(孜孜)히 독서하는 자에게는 그 취면(就眠)을 기다려서 친히 御裘(어구)를 벗어 그 위에 덮어 주시는 등 그 총접(寵接)이 실로 두터웠다.
이와 같은 뜨거운 장려로 인하여 문학의 사(士)가 빈빈(彬彬)5)히 배출하고 학술의 융성이 그 극에 달하였으니, 저 권도(權蹈;후에 제로 개명), 권채(權採), 남수문(南秀文), 유의손(柳義孫), 신석견(辛石堅; 후에 碩祖로 개명), 성삼문(成三問), 최항(崔恒), 어효첨(魚孝瞻), 박팽년(朴彭年), 이개(李愷), 하위지(河緯地), 유성원(柳誠源), 정인지(鄭麟趾), 양성지(梁誠之), 신숙주(申叔舟), 이석형(李石亨) 등은 다 당시 집현전의 저명한 학사로서 대왕의 우악(優渥)6)하신 대우를 받던 유신들이었다.
5) 빈빈(彬彬):문물이 성하게 빛이 남.
6) 우악(優渥):은혜가 넓고 두터움.
이중의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은 후일 단종 복위운동을 꾀하다가 죽은 충절의 사(士)이지만 대왕의 우우(優遇)와 은의에 감격하여 성심성의 진충갈력(盡忠竭力)의 사풍(士風)이 이들 사이에 미만하였던 것은 속일 수 없는 사실이었다.
대왕 8년에는 대제학 변계량(卞季良)에게 명하여 이들 문신 중으로부터 연소하고 재행(才行) 있는 자를 선택케 하여 이들에게 장가(長暇)를 주어 소위 ‘유산독서(遊山讀書;賜暇讀書)’와 ‘분번입직(分番入直)'을 하게 하고 관으로부터 경비와 기구를 공급케 하였으니, 이는 대왕께서 유신이 시무(視務)로 인하여 강학(講學)에 전심치 못할까 우려하시어 이에 시일의 여유를 주어 한정(閑靜)한 산사에 가서 경사(經史), 백자(百子)로부터 천문, 지리, 의약, 복서(卜筮)에 이르기까지 자유껏 연구케 하여 이들을 장차 크게 쓰려는 동기에서 출발하신 것이었다. 즉 특수한 인재를 양성하여 그 천분(天分)에 맡기어 최대의 발휘, 최대의 창조력을 산(産)하려는 독적이셨다.
대왕은 이와 같이 학자를 우대하고 학문을 장려하시는 동시에 친히 유신을 지도하시어 국(局)을 나누어 여러 가지 서적을 편찬 혹은 간행하여 널리 세상에 반포케 하였다. 당대 편찬서의 중요한 자를 연대순에 의하여 들어 보면 표와 같다.
책이름 | 찬자 (撰者) | 편찬연대 |
수교고려사 | 유관·변계량 | 세종 3 년 |
효행록 | 설순 | 세종 10년 |
농사직설 | 정초·변호문 | 세종 11년 |
오례의 | 허조·강석덕 | 세종 12년 |
팔도지리지 | 맹사성·권진 등 | 세종 14년 |
칠정내외편 | 정인지·정초 | 세종 15년 |
신찬경제속육전 | 황희 등 | 세종 15년 |
삼강행실 | 설순·권채 | 세종 15~16년 |
자치통감훈의 | 윤회 이하 여러 유신 | 세종 17년 |
통감강목훈의 | 이계전·김문 | 세종 18년 |
동국연대가 | 권도 | 세종 18년 |
신주무원록음주 | 최치운 등 | 세종 20년 |
고려사(신찬) | 신개·권제 | 세종 20~24년 |
훈민정음 | 세종어제 | 세종 25년 |
치평어람 | 정인지 등 | 세종 27년 |
의방유취 | 집현전 유신 및 의관 | 세종 27년 |
제가역상집 | 이순지 | 세종 27년 |
용비어천가 | 정인지 등 | 세종 27년 |
역대병요 | 집현전 유신 | 세종 27~단종 원년 |
동국정운 | 집현전 유신 | 세종 29년 |
석보상절 | 수양대군(세조) | 세종 29년 |
월인천강지곡 | 세종어제 | 세종 30년 |
사성통고 | 신숙주 | 세종 31년 |
고려사(개수) | 김종서·정인지 | 세종 31 ~ 문종 2년 |
이 제서(諸書) 중 「고려사」에 있어서는 표시와 같이 수상 회의 개판이 행하여졌으니 대왕께서는 원래 사학에 대한 소양이 깊으시고 견해가 높으신만큼, 조금이라도 사필이 부정불공(不正不公)하여 사실에 어긋남이 있으면 이를 묵과치 아니하시는 터이므로 이와 같이 누차의 麗史 編修를 거듭하게 되었던 것이거니와, 24년 권제 등이 撰進한 (제2회의) 「고려사」는 인쇄까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편수에 공평을 결한 점이 있다 하여 대왕께서는 그 책의 頒賜(반사)를 정지케 하시고 또 집필한 사관에게 형(刑)을 가하시기까지 하였다 한다. 이를 보더라도 대왕께서 얼마나 사필의 공평과 사기(史記)의 정확을 주장하셨던가를 알 수 있다.
그 다음 「효행록」과 「삼강행실(三綱行實)」은 유교주의의 윤리 수신에 관한 서(書)로 이런 유의 교화를 민간에 널리 보급시키기 위하여 만든 책이며 또 「농사직설(農事直說)」은 현존한 조선 농서 중에 가장 오랜 것으로 이래 농가의 보전(寶典)이 되다시피한 책이지마는, 이 역시 대왕의 애민주의(愛民主義)에서 또는 농본사상에서 편찬된 것이다. 「의방유취(醫方類聚)」는 모두 365권에 달하는 방대한 의학서로 세종 25년으로부터 27년에 걸쳐 완성된 것이니 동방 의약의 집대성이라고 할 수 있으며, 태조 7년에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 30권을 편찬한 일이 있으나, 이 「의방유취」는 거기에 비하면 10여 배의 분량이므로 양으로 보더라도 동방의학사상 공전의 대업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다음 「훈민정음」은 우리가 세계적으로 자랑하는 언문(諺文) 그것이니, 25년에 대왕이 친히 국(局)을 궁중에 설치하시고, 최항, 성삼문, 정인지, 신숙주 등의 제 학사로 더불어 이를 고심, 안출하시어 3년 후인 28년 9월에 이르러 일반에게 발표하신 것이었다. 그때 발표된 정음은 자모 합 28자 즉 ㄱㅋ(아음), ㅌㄷㄴ(설음), ㅂㅍㅁ(순음), ㅈㅊㅅ(치음), ᅙㅎㅇ(후음), ㄹ(반설음), △(반치음) 등 17자의 자음과 ᅌ ㅡ ㅣㅗ ㅏ ㅜ ㅓ ㅛ ㅑ ㅠ ㅕ의 모음 11자로 성립된 것인데 그중 ᅙ△를 제한 외에는 금일 우리가 사용하는 글자와 다름이 없다.
정음 발표 전년(前年)에 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이조 6대 즉 목조로부터 태종까지의 사적을 적은 가사)」와 그후 12년에 된 「동국정운(東國正韻;韻書)」, 「석보상절(釋譜詳節;석가 일대의 사적)」 및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석가에 대한 찬송)」은 다 이 신문자를 이용하여 편저한 것이니 조선 어문학의 일대 고전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중 「월인천강지곡」(후에「석보상절」과 혼합함)은 대왕의 어제(御製)인만큼 더욱 의의가 있고 또 우리 흥미를 가일층 이끄는 바이지만, 이에 의하여 우리는 대왕의 불교에 대한 신앙이 어떠하신가는 물론이요, 문학에 대한 조예와 재분이 얼마나 높으셨던가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정음의 창제는 앞에 든 제서(諸書) 중, 또는 대왕의 전 업적 중 가장 광휘 있고 가장 가치있고 또 가장 위대하여 조선사상의 공전의 위업이라 하여도 가하거니와 대왕의 창의와 성열(誠熱)과 과단이 아니었다면 일찍이 정음의 출현을 보았을까 의문이다. 정음의 기원에 대하여는 세간에 종종의 설이 있으나 어떻든 이는 결코 타문자의 모방, 혹은 타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라 전혀 조선인의 독창에 계(係)한 만출(晩出)의 문자라고 볼 수밖에 없으니 그 연구 안출한 방법이 비상히 과학적이요 음운학적임에서도 그러함을 알 수 있지만, 더욱 정인지의 「훈민정음 서문」에
“정음의 창제는, 선인의 도(道)를 받아서 서술한 바가 아니라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편집자 역)
라 하여 이를 가장 단적으로 말하지 아니하였는가. 여기에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한 것은 역시 그것이 자연한 과학적 이론에 응하여 안출된 것을 다소 신비하게 말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면 대왕은 어떠한 동기로 이러한 훌륭한 신문자를 창조하심이었던가. 원래 학문을 좋아하시고 더우기 음운학에 밝으시어 발명 창작의 천재를 가지신 대왕이시므로 정음의 제작을 그다지 의외의 發案(발안)이라고는 말할 바 아니나, 그 제일의 동기는 나라마다 각기 문자가 있어 제나라의 어음(語音)을 기록하되 오직 조선만이 고유의 문자가 없다 하여 이를 매우 유감으로 여기심에서 출발하신 것이며, 그 다음으로는 상류 혹은 지식계급 간에 사용하는 한문과 관공문서 상에 쓰이는 이두문자와 같은 것은 일반 민중에게 널리 통용되지 못하는 까닭에 우부우부(愚夫愚婦)가 말하려고 하여도 다 자기의 심중을 펴지 못함이 많으므로 이를 매우 민망히 여기심에서 동기하였던 것이다.
「훈민정음」첫머리에
“어제 왈(曰) 하시대 나랏말이 중국에 달라 문자와 더불어 서로 통하지 아니함이라. 고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종내 그 뜻을 펴지 못함이 많은지라. 내 이를 불쌍히 여겨 새로 28자를 만드노니 사람마다 쉽게 배워 나날이 씀에 편하게 하고자 함이라.” (편집자 역)
고 하신 것은 즉 이를 말씀하심이니, 그 얼마나 거룩한 동기시며 또 얼마나 귀중한 말씀인가!
여기서 우리는 또한 대왕의 민족을 사랑하는 의식과 민중을 본위로 삼는 왕도정치의 일단을 엿볼 수도 있는 것이다. 대왕은 이상의 인(人)이시요 실행의 인이신만큼 이 신제 문자의 실행 보급에 대하여도 여간 노력하신 바가 아니었으니, 비단 위에 말한 「용비어천가」, 「동국정운」, 「석보상절」 및 「월인천강지곡」에만 이를 응용하였을 뿐 아니라 농잠서(農蠶書)와 유불 경전의 번역을 기도하시어 불경에 있어서는 우선 금강경 제가해(金剛經諸家解;冶父頌,宗鎭提綱,得通說誼,證道哥,南明繼頌)의 번역을 세자(문종)와 수양대군(세조)에게 명하여 공찬(共撰)케 하시는 동시에 친히 이를 지도하시고 또 친히 그중의 남명계송 30여 편을 번역하시기까지 하였으며, 유가 경전에 있어서는 30년에 집현전에 명하여 직제학 김구(金鉤(구))의 주사(主司)하에 사서(四書)를 번역케 하신 일이 있었다. 그러나 대왕은 후수년(後數年)에 향수 불과 54세로 승하하시기 때문에 불경 번역의 완성을 보지 못하시고 유교(遺敎)를 내리시게 되었고 김구의 사서 번역은 재위 중에 과연 완성을 고하였든지, 혹은 이와 같은 경우에 빠지고 말았든 것인지 자세치 못하다.
어떻든 대왕은 정음 발표의 직전 직후에 있어 그 응용 실행방법을 골고루 고려하시어 저술 편찬에는 물론이요, 기타 이과취재(吏科取才)7)와 관공문서 상에까지라도 정음을 사용케 하시려던 형적이 있었다. 정음 반포 직후인 28년 10월에는 대왕이 대간(臺諫)의 죄를 열거하시는 서교(敎)에 정음을 용(用)하신 일까지 있었다.
7)이과취재(吏科取才); 조선조 때 과거 외에 인재를 뽑기 위해 실시한 특별 채용시험. 음자제(蔭子弟)나 녹사, 서리(書吏) 등 일정한 신분을 가진 자에게 제한된 한도 내에서 관직을 주기 위하여 제정되었음.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말하여 둘 것은 대왕의 정음 창제에 대하여 집현전 학사 중에는 일찍부터 반대의 일파가 있었던 것이니, 최만리(崔萬理)를 비롯하여 신석조, 김문, 정창손(鄭昌孫), 하위지 등은 성의예지(聖意睿智)가 있는 바를 앙찰(仰察)치 못하고 국문의 창제가 하등의 의의 없는 ‘무보(無補) 유해(有害)’의 것이라고 하였다. 만리 등의 정음 반대소(疏)가 들어오매 대왕께서는 대단히 불쾌히 여기어 가라사대,
“너희들은 용음합자(用音合字)하는 것이 모두 옛적 것에 위반된다 하니, 설총의 이두는 이음(異音)이 아니고 무엇이며 운서(韻書)의 4성 7음 자모를 내가 바로잡아 놓지 아니하면 누가 할 것이냐? 내가 앞서 정창손에게 말하기를 ‘국문으로써 삼강행실을 번역하여 널리 민간에 돌려 우부우부도 다 알아보게 하고 싶다’고 하였더니, 지금 창손의 말은 ‘삼강행실 반포 후에 아직 충효열(忠孝烈)이 많이 나지 아니하니, 인(人)의 행·불행은 자질 여하에 달린 것이거늘 하필 이를 국역한 뒤라야 효과가 있으리오’하니 이는 유자(儒者)의 말이 아니다.”
라고 하시고 이들을 곧 금부에 가두었다가 놓아 주셨는데, 창손에게는 특히 파직을 명하시고 김문에게는 (전후의 말이 일치하지 않는다 하여) 국문을 행하시기까지 하였다. 당시 정음 시행의 이면에는 이러한 부유(腐儒)들의 불찬성파도 있었지만, 강유(剛柔)의 덕을 겸하신 대왕 앞에는 문제거리가 아니었다(위의 대왕의 말씀에 의하면 삼강행실도 친히 번역을 하시려고까지 하셨던 것을 알겠다).
세종 일대에는 위와 같이 여러 가지 종류의 서적이 편찬되고 간행되는 일면에 활자 및 인쇄술에도 개량 혁신을 가하여 일단의 진보를 보였다. 활자의 발명 사용은 조선이 세계의 선진으로 자랑하는 바이지만 이미 여조(麗朝)말엽으로부터 시작되어 태종 3년 계미(1403)에는 주자소를 두고 동(銅)활자를 제조하여 서적을 인쇄하였거니와(그때의 활자는 소위 계미자란 것이니 字本은 경연 소장의 古註詩書 「左氏傳」에서 취하였음), 활자의 자양과 인쇄술에는 다소 불완전한 바가 있었다.
즉 태종 때의 인쇄법은 활자를 동판 위에 벌여 놓고 황랍을 녹여 그 위에 들어부어 굳어 붙은 후에 인쇄를 하기 때문에 납을 허비함이 많고 또 활자가 고르게 앉지를 못하고 두어 장을 박으면 植字(식자)가 벌써 움직여, 하룻 동안에 박아 내는 능률이 여간 부족치 않았다. 그래서 세종께서는 2년(庚子)에 공조참판 이천 등을 명하여 태종조 소주(所鑄)의 활자를 개주(改鑄)케 하고(소위 庚子字란 것이 그것이다) 3년 신축(1421)에는 또 친히 지교(指敎)하시어 이천과 전소윤(前少尹) 남급(南汲)을 명하여 동판을 개주하여 자양과 서로 들어맞도록 하매 용랍의 필요 없이 식자가 바르게 되어 하루에 수십백 지(紙)를 인출(印出)하였다 하며, 또 16년 갑인(1434)에는 이천에게 명하여 구활자(大字)를 개주하되 경연 소장의 「효순사실(孝順事實)」, 「위선음즐(爲善陰隋)」, 「논어」등 서(書)를 자본으로 삼고, 부족되는 것은 수양대군(세조)으로 하여금 쓰게 하여 20여만 자를 주조하니 하루의 소인(所印)이 40여 지(紙), 자체의 정치완정(精緻完正)함과 인쇄의 능률이 전일에 비하여 배나 진보하였다 한다. 조선 활자에 소위 갑인자라고 하는 것이 즉 이것으로서 당시 이에 의하여 인쇄된 서적이 매우 많았는데, 동 16년에 인쇄한 「자치통감」은 특히 신주(新鑄)의 대자(大字)로써 하였고 18년 「통감강목훈의」에는 강(綱)은 신활자로써, 목(目)은 구활자로써 박았다고 한다.
2) 악률(樂律)의 정리
악률은 고래로 제도화하여 역조(歷朝)의 제왕이 매양 제례작악에 힘을 써오는 바이지만 우리 세종대왕께서는 특별한 이해와 상당한 연구를 이 방면에 가지시어, 항상 채원정(蔡元定; 송대의 사람)의 「율여신서(律呂新書)」를 좋아하시어 그 법도의 심히 정밀함을 칭탄(稱歎)하시고 일찍부터 조선 구악(舊樂)에 대하여 일대 혁신을 기도하셨는데, 이때 대왕의 이 뜻을 몸받아 노력 공헌한 사람은 박연이란 악학(樂學)에 정통한 사람이었다. 박연은 처음에 악학별좌(樂學別坐)란 벼슬에 있어 세종 7년에 주청하여 악서를 찬집한 일도 있거니와, 동년에 해주에서 거서가 나고 남양에서 경석이 나매 시인(時人)은 이를 큰 상서(祥瑞)라 하고 대왕께서도 개연히 느끼신 바가 있어, 박연을 명하여 이것으로써 아악의 악기를 개조케 하셨다. 연은 왕명을 받들어 해주산의 거서의 입(粒)으로 척촌(尺寸)의 단위(1粒은 1分, 10粒은 1寸)를 삼아 황종 1관을 만들고, 남양산의 경석으로 신경(磬) 2가(二架)를 만들어 위에 바쳤더니 군신들은 이를 탄망(誕妄)하다 하거늘 대왕께서는 신경과 중국의 경을 들여오라 하시어 그 치는 소리를 비교해 들으시고 가로되
“중국의 경은 과연 맞지 아니하되 신경은 옳게 되고 소리도 청미(淸美)하나, 단 이측(夷則) 1매의 소리가 맞지 아니함은 무슨 까닭이냐.”고 물으셨다.
연이 곧 살펴본즉 그것이 먹줄 친 데까지 완전히 다 갈리지 아니한지라, 즉시 이를 갈아 먹줄이 없어지매 그 소리가 비로소 맞게 되었다고 함은 유명한 이야기이거니와, 이를 보면 (박연도 무던하지만) 대왕의 음악에 대한 소양과 이해가 얼마나 높으셨던가를 알 수 있다.
이에 대왕은 박연을 擢用(탁용)하여 천여 년간 전래의 구악을 정리 혁신하는 중임을 맡기셨다. 즉, 고래의 아악, 당악, 향악의 모든 악기, 악곡, 악보 등을 수정 혹은 개량케 하여 세종 15년에는 처음으로 조제(朝祭)에 아악을 쓰게 되었으며, 정대업, 보태평, 발상, 여민락 및 봉황음 등의 저명한 악곡들을 제작하였다. 세종조에 정리가 된 악률은 세조조의 다소의 개혁을 거쳐 현금에까지 전래하여 이왕직 아악대가 성히 쓰고 있는 바이다. 이 악(樂)은 금일 지나나 일본 내지에도 없는 동양 최고의 악이니, 그 악기 중의 수종은 지나 상대의 고진악기(古珍樂器) 그대로의 형상을 보전하고 있을 뿐 아니라 금일에 그 합주가 성히 행하는 등 실로 기적을 정(呈)하고 있는 터이다.
3) 역상 방면(歷象方面)에 관한 업적
다음에 역상 방면에 취하여 살펴보면 대왕께서는 역시 여기에 심중한 취미를 가지시어, 14년에 이에 관한 제 기구를 제작하시려 하여 정인지, 정초(鄭招)로 고전을 조사케 하시고 이천, 장영실로 그 제조를 감독케 하시어 7년의 세월이 걸려 세종 20년에 완성을 고하니, 대소 간의대(大小簡儀臺;관측기)와 흠경각(欽敬閣; 다음에 보임)과 혼의(渾儀;天球儀)와 앙부일구(仰釜日晷;日時計)와 자격루(自擊漏;水時計) 등이 즉 그것이었다.
이들 중에 제일 정교를 극한 것은 흠경각(경복궁 내 千秋殿 서쪽 뜰에 있었다 함)이었는데, 각(閣) 중에는 고(高) 7척의 지산(紙山)을 만들어 그 속에 옥루기륜(玉漏機輪)이란 큰 시계를 앉혀놓고 수력으로 여러 가지의 기관, 즉 4신, 12신, 고인(鼓人), 종인(鐘人), 사신(司辰), 옥녀(玉女) 등을 운행 회전케 하여 천연의 시각과 조금도 틀림이 없었다 한다. 또 그 누락한 여수(餘水)를 가지고는 의기8)를 만들어 그릇이 비면 기울어지고 중간쯤 되면 평정하고 차면 엎어지도록 하여 천도영허(天道盈虛)의 이(理)를 보게 하고, 지산의 주위에는 빈풍 칠월시에 의하여 4시(四時)의 경(景)을 작(作)하고, 목(木)으로써 인물, 조수, 초목의 형상을 각하여 이것을 절후에 따라 안배하여 민생가색(民生稼穡)의 艱(간)을 알게 하였다 한다.
8)의기(倚器):중국 주나라 때 임금을 경계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그릇. 물이 가득하면 엎어지고 알맞으면 반듯하고 비면 기울어지게 만들었다 함.
9)가색(稼穡): 곡식 농사.
이름을 흠경이라 한 것은 「서경(書經)」에 “광대한 하늘의 힘으로 인민에게 그때 그때 해야 할 일을 지시함(欽若昊天 敬授人時)”의 뜻에서 취한 것이다.
위의 여러 의상(儀象)은 실상 대왕의 의장(意匠)에서 나온 것으로, 백공(百工)도 그 뜻을 헤아리지 못하였으며 오직 장영실(護軍)만은 기재(奇才)를 가지고 대왕의 예지를 승찰(承察)하여 한껏 기교를 부려 맞지 않음이 없으매, 대왕은 매우 그를 사랑하셨다 한다. 그리하여 그때 사람들은
“박연과 영실은 실상 대왕의 성(盛)한 제작을 위하여 응기이생(應期而生)한 사람이라.”
고까지 말하였던 바이다.
15년에는 대왕이 친히 고금의 천문도(天文圖)를 참고하시어 신도(新圖)를 만들어 돌에 새기게 하시고 정인지 등에게 명하여 여러 역서(曆書)를 참작하여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을 편찬케 하시고 또 이순지(李純之)로 하여금 선유(先儒)의 역대 의상(儀象)에 관한 논문을 찬집케 하였으며, 역관(曆官)을 마니산(江華), 한라산(濟州), 백두산(甲山)에 파견하여 북극의 고도를 측정케 한 일도 있었다.
여기에 오인이 더욱 경복(敬服)하여 특서할 것은 대왕 24년(1442)에 동(銅)으로 측우기를 제조케 하여 이를 서운관(書雲觀;天文曆象測候에 관한 사무를 맡는 관청)에 비치하여 우수(雨水)의 심천(深淺)을 측정케 하고 동형의 기(器)를 각도 각읍에 배부하여 국내 각지의 우량 분포를 명확케 하심이었다. 측우기의 발명은 이때 구주(歐洲)에서는 몽상치도 못하던 일이었다.
1890년 출판의 독일 잡지 「Himmel und Erde(천지)」중에 게재된 기상기계 연혁사에 의하면 구주에서 기계로써 우량을 측정하기는 1639년에 비롯되었다 한다. 즉 이탈리아 인 베네데토 카스텔리(Benedetto Castelli)가 이해 6월에 기계를 가지고 우수(雨水)의 심천을 측정한 일이 있었다 한다. 과연 그렇다면 조선은 이보다 앞서기 실로 200년 전에 우량 관측의 제도를 전도(全道)에 시행하였다. 그 방법까지라도 지나 또는 타국에서 전래된 것이 아니라 전혀 세종대왕의 성의 독창(聖意獨創)에서 나온 바이며, 또 현금의 우량기에 비한다 하더라도 그 정조(精粗)에 심한 逕庭10)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조선 고대 관측기록 조사보고 참조).
10) 逕庭(경정): 현격한 차이.
4) 민정(民政) 및 법제상의 제 업적
대왕의 민정, 법제상의 제 업적을 관찰하건대 대왕은 민본주의의 정치로써 종시 일관하였다. 민본정치라면 어폐가 있을지 모르나 여하튼 인민을 본위로 하고 국민을 목표로 한 왕도의 정치였다. 즉 일반 국민의 간고(艱苦)에 대하여 깊은 동정을 가지고 임한 애휼(愛恤)의 정치였다. 그러므로 대왕께서는 항상 심궁(深宮)에 처하시어 인민의 간고를 잘 찰식(察識)치 못하심을 탄식하시어 위에 말한 흠경각 내의 지산사시경(紙山四時景)에까지 인민 가색의 간을 보이신 일도 있지만, 대왕의 말씀을 그대로 이끌어 말하면
“우리나라의 민생 중에 어찌 곤궁한 자가 없을소냐. 내가 궁중에서 생장한 까닭에 민생의 간고를 일일이 알지 못한다.”(「세종조 사실」)
라고 하시고, 또
“자손들이 심궁(深宮)에서 자라나 경운(耕耘)의 고(苦)를 알지 못하니 가탄할 일이라.” (同書 勸農桑條)
고 하셨다.
대왕은 이러한 왕도주의하에서 혹은 궁민구제(窮民救濟)의 법을 강(講)하시어 지방 관리로 하여금 늘 구휼사업에 뜻을 쓰도록 하게 함은 물론이요, 환곡법(還穀法; 매년 봄에 穀을 대여하여 가을에 받아들이는 법)의 실행을 철저히 하여 세민(民)의 경제를 융활(融闊)케 하고 자주 농서(農書)와 교서(敎書)를 반포하여 극력으로 농사를 권장하며, 조선통보(朝鮮通寶)를 주조하여(5년) 화폐의 유통을 여행(勵行)하였고 또는 인재 등용의 길을 넓혀 과거 이외에 도천(道薦)의 법을 시행하여 각 도관찰사로 하여금 덕행재예(德行才藝)의 우월한 자를 추천케 하고(20년), 수령 6기(守令六期 ; 임기 6년)의 법을 강행하여 (7년) 임기 안에 자주 천동(遷動)하는 것을 허치 아니하였으며, 더욱 여말 이래 문란에 함(陷)한 전제(田制)·세법을 탐구하여 전분육등(田分六等), 연분구등(年分九等)의 법을 안출 시행하였으니 (25년)—전분은 토지의 肥瘠(비척)에 의하여 6등에 나누고, 연분은 매년의 수확을 9등에 나누어 납세의 차를 설(設)한 것인데——이 전분·연분의 법은 정음의 발명과 같이 조선 문화사상의 일대 위관(偉觀)이라고 한다.
또 특히 형옥(刑獄)에 대하여 신념(宸念)11)하시어 사법 관리로 하여금 죄를 될 수 있는 대로 경감할 길을 만들어 원한을 품는 자가 없도록 하게 하라 하심은 물론이요, 금부삼복(禁府三覆)의 법을 세워(3년) 당연히 사형에 처할 사람이라도 반드시 세 번 복심(覆審)케 한 것이라든지(「세종조사실」 恤刑獄條에 “교서에 왈, 무릇 죽을 죄라도 반드시 세 번 복심케 하여 목숨을 중히 여기게 하였다. 지금 형조에서 이 복심 이후에는 다시 元券을 살피지 않아 이 법의 뜻에 어긋난다. 이제부터 매번 元券에 의해서 판결케 하라”하였다) 안옥의 도(圖)를 반(頒)하고(8년) 「무원록(無寃錄)」의 신주(新註)를 간(刊)하고(20년), 12년에 태배(苔背)의 형을 금하고(사람의 오장의 系가 다 등에 매였다 하여 특히 태배를 금함), 노유금신(老幼禁身)의 법을 제(除)한 것(15세 이하 70세 이상은 살인 강도를 제한 외에는 금고에 처하지 않고 15세 이하 80세 이상은 비록 죽을 죄라도 또한 금고를 면케 하는 법)이 대왕의 성심에서 나온 정법(政法)이 아님이 없었다.
11) 신념(宸念): 임금의 생각 또는 걱정.
더욱 여기에 특필치 않으면 안 될 것은 저 노비구살(奴婢毆殺)에 대한 금지령으로서 설령 노비에 죄가 있다 하더라도 이를 관부에 고하지 않고 자의로 살해한 자에 대하여는 법률에 의하여 처단할 것을 유시(諭示)하심이었다(26년).
대왕의 말씀을 빌면
“노비는 비록 천한 자이나 이 역시 천민(天民)이라 어찌 함부로 무고(無辜)를 죽일까 보냐. 인군(人君)의 덕은 생(生)을 호(好)할 따름이니 무고의 피살함을 앉아 보고 마음이 척연(惕然)12)치 아니할 수가 있으랴.이로부터 노비에 죄가 있다 할지라도 관에 고하지 아니하고 구살하는 자는 한결같이 구례(舊例)에 의하여 과단(科斷)하겠다.”
고 하셨다.
12) 척연(惕然):근심하고 두려워하는 모양.
이 얼마나 어질고 자비스런 말씀인가!
노예를 천시 학대하던 옛날에 있어 이러한 금령을 내리신 점으로 보아도 대왕의 정치가 얼마나 인도주의에 바탕하였던가를 인식시켜 준다.
다음에 한 가지 더 말하여 둘 것은 방화시설에 관한 사적(事跡)이니, 세종 8년 2월에 경성(京城) 내에 대화재가 일어나 시서(市署) 및 인가 2, 170여 호가 연소하여 인(人)의 사자(死者)를 많이 낸 일이 있었는데, 이로 인하여 시민의 소동은 물론, 대왕께서도 크게 진려하시어 일변으로 방화자의 체포, 실호자(失戶者)의 구제를 명하는 동시에 일변으로는 중신을 모으시고 방화의 방법 및 그 시설에 관하여 토의하셨다.
그 결과 종종의 방법이 안출되어 성내 연접 가옥에 있어서는 방화장(防火墻)이라는 것을 쌓게 하고, 시내의 도로를 종전보다 넓히고, 각 관청 안에는 방화용의 우물을 파고 종묘 궐내 및 종루 누문(종로)에는 각각 구화기계(救火機械;소방기구)를 비치게 하였으며, 또 금화도감(禁火都監;미구에 修城都監과 합하여 수성, 禁火, 濬川, 도량 修築을 관장함)이라는, 지금으로 말하면 일종의 소방서와 같은 것을 두어 방화의 사무를 맡게 하였는데, 화재가 있을 때는 종을 쳐서 신호를 삼게 하였다.
물론 그때 방화기구란 것은 금일의 것에 비하면 대다히 유치하였겠지만 위의 방법 시설은 거의 현대적이라고 할 만큼 용의주도한 것이었다. 어떻든 이는 조선 소방사상에 일 신기원을 작(作)할 만한 사실로서, 오인의 흥미와 주의를 이끄는 바이다.
5) 교정 방면(敎政方面)의 치적
대왕은 위에 말한 바와 같이 전통적으로 유교를 존중하고 표방하던 만큼, 온갖 방면에 있어 유교주의의 규범을 준수함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니, 학교 교육, 과거시험에는 물론, 기타 일반적으로 유학을 장려하여 사기를 양성하고, 특히 「효행록」, 「삼강행실도」 등을 광포하여 민간 교화에 윤리사상을 강화하고, 관혼상제 (기타 일상생활)에 있어 유교 의식을 여행(勵行)하여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준칙할 것을 자주 명령하였다. 또 대왕이 원자(元子;文宗)·원손(元孫; 단종)의 입학식을 다 성균관에서 거행하여 사박사(師博士)의 강서(講書)를 받게 하였던 것은 당시 사림이 일대광영으로 여기던 사실이거니와, 어떻든 우리는 이조의 유교 입국주의가 대왕에 이르러 더욱 철저하였던 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리하여 대왕은 초년에 부왕(태종)의 뜻을 이어 불교단체에 억압정책을 써서 6년에는 재래의 5교(五敎;慈恩宗, 화엄종, 始興宗, 中道宗, 南山宗) 양종(兩宗;조계종, 천태종)을 개혁하여 선(禪)·교(敎)의 2종으로 감하고, 국내에 오직 36사(本山)와 사전(寺田) 7,950결을 남기고 그 나머지의 사사전민(寺社田民)은 죄다 혁파하여 학교, 기타 공가(公家)에 속하게 하는 거(擧)에 출(出)하였다.
이 밖에 불교도에 대하여 종종의 금압(禁壓)을 가하여, 일시 대왕의 억불정책은 전대에 비하여 일층 더 심한 바가 있었다. 그러나 대왕은 애초부터 불교에 대하여 몰이해적으로 임하신 바는 아니었다. 다만 여조 이래 불도(佛徒)의 적폐가 많아 거기 대한 반동으로 개국 초로부터 다소의 제재를 가하여 오던 것에 다시 일보를 내킨 것에 불과하거니와, 여기에는 유신들의 권청(勸請)과 의견에 의한 바가 많았던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대왕 자신에 있어서는 궁중의 여러 가지 전통적 습속으로 인하여는 그 박학다취의 관계로 일찍부터 불서를 보시고 부지불식간에 불교에 대하여 어느 정도까지 신앙과 이해를 가지시고도 외면으로는 여러 유신들의 배불적 분위기에 끌리시어 이를 노골적으로 표현치 못하셨던 바이다.
그후 불교의 신앙이 점점 깊어가심에 따라 대왕은 표면상으로도 호불(好佛)의 주(主)로 자처하시어 여러 가지의 불사 법회를 공공연히 행하심은 물론이요, 25년에는 국내 사찰의 중창과 수리를 허하는 법령을 발하시고, 29년에 왕비 심씨(沈氏;昭憲王后)가 승하하심으로부터는 그 명복을 축하는 의미로 불전의 번역 간행을 도모하시어 수양대군에게 명하여 「석보상절」을 편찬케 하시고 또 친히 「월인천강지곡」을 제(製)하셨으며 이와 때를 같이하여 30년에는 궁내에 侈麗(치려)한 불당을 일으키게까지 되었다. 대왕의 전일 억불은 만년에 이르러 전혀 호불(護佛)로 변하였다.
여기에 놀란 유신들의 반대는 대단 격렬하여, 내불당(內佛堂) 기공을 간지(諫止)하는 상소가 물밀 듯하였으나 대왕께서 조금도 이에 움직이지 아니하시매, 성균관 학생들은 휴학을 동맹하고 집현전 학사들은 죄다 전(殿)을 등지고 물러가 버렸다. 이로 인하여 다소 신충(宸衷)을 번거롭게 하였으나, 대왕의 타오르는 신앙의 불꽃은 어찌할 수 없으며, 그리하여 이해에 훌륭히 내불당의 낙성을 보게 되고, 5일에 걸쳐 성대한 경찬회를 베풀었다. 이에 전후하여 궁중에 신불(信佛)의 풍이 미만하여 수양, 안평의 2대군은 불(佛)을 숭봉함이 가장 열렬하였고, 김수온(金守溫) 등 경불파(敬佛派)의 문인들과 더불어 대왕을 협찬하여 불교 문화에 적지 아니한 공헌을 바쳤다.
요컨대 대왕 만년의 숭불정신은 조선 불교계에 신활기를 띠게 하는 동시에 그 숭유사상과 아울러 유·불 양 방면의 빛나는 업적을 들게 한 소이였다. 그러나 대왕의 이 방면 사업은 세조가 이를 이어 대성하였던 것을 잊어서는 안 되니, 「월인석보」의 간행, 능엄경·법화경·반야심경·영가집·금강경·아미타경·원각경 등의 諺譯(언역) 간행이 다 세조조에 이르러 완성되었던 바이다.
이상은 대왕의 내치 중 특히 문치를 주로 하여 말하였거니와, 대왕은 결코 문(文)만 숭상하신 것이 아니요, 무(武)도 중히 여기시어, 항상 문무 병진을 꾀하시었다. 그리하여 대왕은 군사의 훈련, 무기의 제조, 도성 및 외방성진(外方城鎭;특히 연해지방의 성진)의 수축, 병선(兵船)의 개량, 병서의 간행을 성히 하여 무비(武備)에 게을리하심이 없었다. 세종 7년에 교(敎)를 내려 중외(中外)의 군대로 하여금 매월 2일마다 연습을 행하게 하시고 8년에는 전곶(箭串;纛島)에 행행하시어 친히 금갑(金甲)을 입으시고 백관으로 더불어 대열병의 의를 행하셨으며, 그 후에도 열병·전렵(田獵)을 그치심이 없었거니와, 간혹 민폐를 이유로 삼아 이것의 정지를 청하는 자가 있으면 대왕께서는 매양
“강무(講武)는 조종의 성헌(成憲)이요 선왕의 정제(定制)며 또 군국(軍國) 중사(重事)라 이를 폐하여서는 안 된다.”
고 말씀하였다(8년 및 18년).
더욱 화포, 화약의 제조에 관하여는 특별한 용의를 가지시어 혹은 수철(무쇠)로써 화포를 시주(試鑄)케 하시며(26년) 혹은 동으로써 이를 주조하려 하여 8도에 명하여 각 지방 관아의 파동기(破銅器) 및 폐사(廢寺)의 동기(銅器)를 계수(計數) 보고케 하시며(27년), 왕자 임영(臨瀛)·금성(錦城)의 2대군으로 하여금 화포의 일을 감장(監掌)케 하여 공장(工匠) 장려의 책을 삼으시며(27년) 감련관(監鍊官)을 여러 도(道)에 파견하여 화포를 개조케 하고(동상), 또는 화약 제조의 술(術)을 습지한 자로 사직 후 향거(鄕居)한 때는 소재관(所在官)으로 하여금 그 동정을 살피게 하여 원방(遠方)에 내왕함이 없도록 하였다.
이때는 북방에 이미 4군 6진을 설치한 뒤라 여진인과의 관계가 더욱 미묘하였으므로 이와 같이 무기 화약에 세려를 쓰심이거니와, 26년에 주자소 모인(模印)의 병서 60건(件)을 평안(平安)·함길(咸吉;함경)양 도에 분송한 일이 있는 것도 이러한 관계로 인함이 아니었던가 한다. 어떻든 대왕은 중문(重文)과 동시에 숭무(崇武)도 주의로 삼아 무비(武備)와 국방에 불절(不絶)한 주의를 가지셨던 것은 재언을 기다리지 않는다.
4. 대왕의 대외 정책과 6진·4군의 개척
다시 방면을 바꾸어 대왕의 외치에 대하여 고찰하면, 중국과의 관계, 즉 대명(對明) 관계는 평화상태에 있었으므로 여기에는 생략하기로 하고, 오직 대마도 및 야인(野人 ; 여진)에 대한 교섭이 복잡다단하여 북지(北地)에는 특히 4군 6진을 개설하게 되었으므로 이 양자와의 관계에 취하여만 말하려 한다.
1) 대마도와의 관계
대마도 및 일본 내지 연해지방(沿海地方)의 해적들은 그 내침행악(來侵行惡)이 이미 고려 중·말엽부터 있어 이후 길이 반도의 숙환이 되다시피 하였거니와, 세종대왕 즉위 원년에는 중국 방면으로 향한다고 칭탁하던 해적의 일대가 충청·황해의 연안을 침범하여 손해를 끼치고 간 일이 있었다.
이때 왕위를 세종에게 양하고 상왕의 위(位)에 있어 군정을 총찰(總察)하시던 태종께서는 대왕과 제신으로 더불어 의논하신 후 이 틈을 타서 해적의 소굴인 대마도를 정벌하여 근본적으로 숙환을 제거하려 하셨다.
그리하여 상왕은 곧 이종무(李從茂), 유정현(柳廷顯), 최윤덕(崔潤德) 등을 명하여 병선 227척과 병졸 1만 7천여 인을 이끌고 가서 대마도를 정벌케 하였다. 무(茂) 등이 병(兵)을 나누어 사면으로 진격하여 처음에는 처처에서 승리를 얻어, 적중(賊衆)을 포참(捕斬)하고 적선적자(賊船賊資)를 분탕(焚蕩)함이 많았고, 이 고첩(告捷)을 접하신 상왕으로부터는
“자고로 군사를 일으켜 적을 토벌함의 뜻이 죄를 문책함에 있을 뿐이니 많은 살생을 내지 마라.” (편집자 역)는 회유(回諭)까지 있었던 것이, 종말에는 아군의 경진(輕進)과 적의 후원으로 인하여 마침내 목적을 달치 못하고 돌아오게 되었다(이해 조정에서는 대마도 再征을 議하다가 중지하였다).
이때 일본 내지에서는 몽고·조선의 대연합군이 내습한 것으로 오인하고 구주(九州) 방면의 여러 호족들이 전력을 들어 이를 후원하였다 한다.
이 정벌이 이와 같이 성공은 못 하였지만, 대마도에 하여 응징을 줌에 넉넉하였고 더욱 전후에 물자상의 고통은 막대하였으니 그것은 조선과의 교통 두절로 말미암아 물자의 공급을 받지 못하였던 까닭이다(원래대마도란 땅은 산악이 중첩하여 경작지가 매우 적고, 육상 산물은 도민의 口腹을 채움에 족하지 못하여 도민은 항상 商利와 침략에 의하여 생활을 유지하여 오던 것이다). 그리하여 동년 대마도 주(主) 종정성(宗貞盛)은 마침내 가신(家臣)을 보내어 사죄의 의를 표하고 교통의 허가를 걸(乞)하였다. 조정에서는 이로부터 평화 무유책(撫柔策)을 적용하여 그 청을 허락하고, 이어 3포〔三浦;熊川의 乃而浦(薺浦), 동래의 富山浦(釜山浦), 울산의 鹽浦)를 열어 도인의 호시(互市;무역), 조어(釣魚;어업)를 공허(公許)하되 일이 끝나면 귀도(歸島)할 것을 조건으로 하였다.
그러나 그후 도인은 이 조건에 불구하고 3포에 내주(來住)하는 자가 많아지매, 조정은 이에 대하여 누차 제한을 가하여 구주자(久住者)이외는 전부 철귀(撤歸)를 명하였으며, 또 세종 25년 계해에는 도주(島主)와 계해약조(癸亥約條)라는 조약을 체결하여 도주의 세견선(歲遣船;해마다 물자를 얻기 위하여 조선에 파견하는 사선)을 50소(艘)에 제한하고 세사미두(歲賜米豆;每歲 島主에게 내리는 米豆)를 200석으로 정한 외에 다시 부득이한 경우에는 세견선 외에 수삼의 특송선을 보낼 수 있음을 규정하였다. 대왕께서는 오히려 도주의 확실한 도서(圖書;證印)가 아니면 대마도 및 일본으로부터의 송선을 들이지 아니하도록 엄규(嚴規)를 정하였으니――이는 물론 가칭 사선(使船)의 출입의 폐(弊)를 막기 위함이거니와-그 도서는 동제(銅製)의 것으로 이를 조선 예조에서 제조하여 일편은 조선에, 일편은 도주에게 준 것이다.
대왕이 이와 같이 대마도에 대하여 순연한 회유책을 쓰신 것은 도인의 경우와 정상이 저 야인과는 좀 다른 까닭에 기인한 것이니, 즉 그곳은 야인과 같이 그렇게 지경(地境)을 연(連)치 아니하고 또 생활의 자(資)를 구략(寇掠)에서보다도 상리(商利)에 의뢰하려고 하는 편이 더 많았던 때문이다. 그러면 야인과의 관계는 어떠하였던가?
2) 야인과의 관계 및 6진 4군의 개척
야인이라 함은 당시 압록강 외 및 두만강 내외지에 산거(散居)하던 여진족을 말함이니 야인과 여진은 동음이사(同音異寫)의 서칭(書稱)으로 보아 좋다고 생각된다. 야인은 대개 토지가 척박하여 생활의 자(資)를 토지나 상리(商利)에 구하려 함보다 구략에 의뢰하려 함을 더 좋아하였다. 그래서 그들의 구략은 그 족성(族性)의 흉한무지(凶悍無知) 반복무상(叛服無常)13)함과 아울러, 일찍부터 반도의 큰 두통거리가 되어 북계(北界)의 인민들은 이 때문에 고침안면(高枕安眠)의 꿈을 꿀 때가 없었다.
13) 반복무상(叛服無常):반역하거나 복속하기를 빈번히 함.
(1) 동북 야인과의 관계와 육진 개척
함경도 방면의 동북 야인에 대하여는 여조 중엽에 유명한 윤관(尹瓘)의 여진 정벌과 9성의 설치를 일시 보게 되었지만, 여말에 태조가 그 방면에서 일어나심에 미쳐서는 그들에게 은위(恩威)를 겸시(兼施)하여 그 개척의 공은 실로 두만강변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그후 야인들은 오히려 침략을 그치지 아니하여 연년 북계(北界)를 소연케 하므로 태종 때에는 태조의 설(設)하신 두만강변에 경원부(慶源府 ; 지금 慶興南)를 부득이 경성(鏡城)으로 퇴이(退移)케 하는 동시에 그(경성) 이북의 땅은 사실상 버린 바가 되었다. 이로 인하여 야인의 오랑캐, 오도리(斡都里) 부족들은 속속 강남에 이주하여 지금의 회령(會寧)에는 맹가첩목아(猛哥帖木兒)라는 추장이 있어 명나라로부터 건주좌위(建州左衛)의 장관의 인수(印綬)를 받았었다. 그후 태종은 경원부를 구지에 회복하려 하시어 우선 부(府)를 부거(富居)에 진치(進置)케 하였더니 야인의 침구는 여전한 상태에 있었다. 세종 7년에 정신(廷臣) 간에 경원부를 또다시 용성(龍城;지금의 楡城)으로 퇴축(退縮)하자는 의논이 일어나매, 대왕께서는
“조종의 봉강(封疆)을 축(縮)할 수는 없다. 지(地)를 척(拓)함은 조종의 뜻이라.”
하는 이유로 정신의 의(議)를 청납(聽納)치 않으시고, 14년 6월에 정부 제조(諸曹)의 결의로써 경원부는 그대로 부거에 두고 새로 다시 영북진(寧北鎭)을 부의 서지(西地)에 있는 석막(石幕 ; 지금의 富寧)에 설치하였다.
이 영북진의 설치는 실로 변토 경영(邊土經營)에 진취책을 쓰시려는 대왕의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대왕의 포부는 결코 이 치진(置鎭)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만일 기회만 있으면 일보를 더 나가 직북(直北)으로는 오목하(斡木河 ; 지금 會寧 西流의 강) 유역을 병합하고 동북으로는 두만 하류의 구 경원지(慶源地)를 수복하려는 의사도 가지셨던 것이다.
익 15년에 오목하의 야인 추장 맹가첩목하의 부자(父子)가 타부족에 습살(襲殺)되었다는 보지(報知)가 있으매 과연 대왕은 일대 호기가 왔다 하시어 황희, 맹사성 이하 제신을 모아 의논하신 후 김종서로 함길도 도절제사를 삼아 이 방면 경영의 중책을 맡기셨다. 그리하여 종서의 경영에 의하여 익 16년에 석막의 영북진을 지금의 행영(行營)에 옮겨 종성군(鐘城郡)이라 칭하고 22년에 군(郡)을 다시 지금의 종성으로 옮겼으며 그간 경원부도 부거로부터 지금의 경원으로 옮기고, 다시 회령·경흥의 2진을 더 일으켰다.
처음 이 4진(종성·경원·회령·경흥)을 개척하려 할 때에 종서가 가장 이를 역주(力主)할새, 혹자는 말하기를 종서가 유한한 인력을 가지고 가성(可成)치 못할 거역(巨役)을 개(開)하려 하니 그 죄는 주(誅)에 가당(可當)한다 하였다. 그러나 대왕은
“비록 과인이 있어도 종서가 없으면 이 일을 분별하지 못하고 비록 종서가 있었어도 과인이 아니면 이 일은 주관하지 못한다.”(편집자 역)
라 하시고 엄연히 진취주의를 고집하셨던 것이다.
그 후 종서는 북변의 사정과 방비에 관한 일대 장서를 올리매, 대왕은 이를 보시고 더욱 종서를 애중히 여기시어 남도의 인민을 이에 이주케 하시고 다시 은성·부령(석막)의 2진을 가설하여 소위 북변 6진을 완성한 후, 장성을 강변에 축(築)하여 험(險)에 험을 가하여 길이 북경(北境)을 유지하게 되었다.
(2) 서북 야인에 대한 경략과 4군 설치
압록강 방면의 서북 야인에 대한 경략은 역시 여말로부터 시작되어 태조의 무공이 여기에도 많았지만, 특히 태종 초에는 강계부(江界府)를 설(設)하고 동 16년에는 갑산(甲山)의 일부를 할(割)하여 여연군(閭延郡)을 설치하였다. 그런데 강외(江外)의 야인은 이곳에도 그 야성을 아끼지 아니하여 세종 14년 겨울에는 파저강(婆猪江;동가강) 야인 400여 기(騎)가 여연군에 돌입하여 인물을 표략(剽掠), 막대한 손해를 끼쳤다.
이 馳報(치보)를 들으신 대왕께서는 크게 노하시어 사람을 보내어 그 진상을 조사케 하신 후 이 방면에 책임을 가진 여러 관리를 질벌(迭罰)하시고 새로 최윤덕(崔潤德)으로 평안도 도절제사, 김효성(金孝誠)으로 도진무사(都鎭撫使), 최치운으로 경력, 이숙치(李叔時)로 평안도 관찰사를 삼으시어 익년 3월에 최윤덕 등을 명하여 건주위(建州)의 야인 이만주(李滿住;즉 파저강 야인) 등의 여러 소굴을 토벌케 하셨다. 윤덕 등은 명을 받아 평안·황해 양도의 군마를 강계(江界)에 모으고 병 1만 5천여 명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적지에 들어가 남녀 230여 명을 사로잡고 170명을 참획하는 등, 대승리를 얻어 개선하니, 이때 여연군과 강계군 중간에는 자성군(慈城郡)을 두어 일방 양군의 연락을 짓게 하는 동시에 타방으로 야인방어의 충(衝)에 당케 하였다.
그러나 이번 토벌은 야인으로 더욱 원(怨)을 품게 하여 세종 17년 중에는 3차나 여연군을 침습하여 역시 인물의 손해가 많았다.
이후 연년세세 변군(邊郡)이 불안하매, 대왕은 재차 정벌에 의(意)를 결하시어 이번에는 이천으로 평안도 도절제사를 삼아 19년 9월로써 이를 실행케 하셨다. 천은 여연·강계의 양 절사(節使)와 더불어 병 8천을 통솔하고 군을 3대(三隊)에 나누어 강을 건너 오라산성·오미부(吾彌府; 모두 지금의 懷仁縣 부근) 등의 적혈을 공위(攻圍)하여 그들의 가옥과 곡물을 분탕하고 돌아왔었다. 그 후(22년)에 여연 동쪽에 무창군(茂昌郡)을 두고 또 그 후(25년)에 우예군(虞芮郡)을 여연·자성 중간에 설치하여 마침내 서변 4군을 정하게 되니, 4군은 즉 여연·자성·무창·우예의 제군을 이름이다. 이 4군은 세조 때에 이르러 부득이 폐운(廢運)에 빠지게 되었지만, 어떻든 세종대왕 당시에는 금일의 조선과 같은 강역을 가졌던 것이니, 금일 조선이 압록·두만 양 강으로써 만주와 경(境)을 나누게 된 것은 역사적으로 소구(遡究)하면 전혀 대왕의 사업에 기인한 것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대왕은 재위 32년, 춘추 54세란 한참 경영에 왕진하실 아까운 나이에 승하하시어 포부를 완전히 수성(遂成)치 못하시고 특히 만년 불교 문화에 관한 종종의 기도 계획이 바야흐로 진행되어 장차 큰 성과를 거두려고 하시던 차에 나라를 버리시게 되어 억조(億兆)의 유감이 적지 아니하였지만, 그러나 그동안 문무 양 방면에 끼치신 업적, 더욱 그 제례 작악의 성(盛)과 정음 창작의 공훈은 가위 백왕(百王)에 초출(超出)한다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대왕의 시(諡)를 ‘장헌(莊憲), 영문(英文), 예무(睿武), 인성(仁聖), 명효대왕(明孝大王)’이라고 한 것은 결코 지나친 미칭이 아니며, 세조의 「역대병요어제서(歷代兵要御製序)」에 대왕을 찬송하여
“문무를 밝혀 정비하고 예법을 세우고 음악을 지었으니 공덕이 높도다. 융성하기 3대에 이르러 태평시대가 되니 옛적의 요순 때보다 더 낫다. 운운” (편집자 역)
이라 함도 과찬이 아닌, 실로 요령을 얻은 말씀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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