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덕규(權悳奎)
1890~1950. 국어학자, 사학자. 호 애류(崖溜). 경기도 김포 생. 휘문의숙 졸업. 휘문,중앙, 중동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고 한글학회에서 「큰사전」편찬위원으로 일함.저서에 「조선어문경위(朝鮮語文經緯)」, 「조선유기(朝鮮留記)」, 「을지문덕」등이있음.
이천은 예안(禮安)사람이니 호는 불곡(佛谷)이라. 군부판서(軍簿判書) 송(竦)의 아들이다. 태조 때의 별장(別將)으로 태종 10년 경인에 무과중시(重試)에 첩(捷)하여1) 관이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이르렀다. 생각이 정교하여 악기, 의상(儀象)2), 주자(鑄字), 무기에 대한 재능이 있고 또 무략(武略)이 있었다. 그 드러난 행실을 아래에 베푼다.
1)첩(捷)하여:우수한 성적으로 남들을 이겨
2)의상(儀象):혼천의(渾天儀).
조선의 활자는 전언(傳言)에 신라조에 비롯하였다 하나 똑똑지 못한 것이요, 이조 태종 3년(1403) 계미의 동활자(銅活字)로 세계 금속활자의 효시라 하나 실상은 이 이전 썩 전에 있으니 태조 4년(1395) 을해에 서찬(徐贊)의 각자(刻字)로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를 간행한 것도 그것이요, 고려 고종 21년(1234) 갑오에 「상정예문(詳定禮文)」28본을 주자로 인출하였다는 것도 그것이다. 서찬의 각자로 「명률」을 인출 반행(頒行)하였다 함은 김지(金祗)의 「명률」 발문에 나오는 것으로 각자는 물론 목활자라 장제(長提)할 것이 없거니와, 서양의 금속활자 창조라는 1450년보다 태종3년이 1403년인즉 벌써 반세기 앞서이며 고려 고종 때의 것도 이미 주자라 하였고 그 주자 운운의 「상정예문」 발미(跋尾)의 작자가 일대 문호의 이규보인만큼 물론 신필(信筆)3)이요, 1234년은 1403년보다 또 앞서기 1세기 반이나 된즉 이처럼 조선의 활자 사용은 과연 오래다 할 것인데, 다시 생각할 것은 조·중(朝中) 양역(兩域)은 모든 것이 조창모화(朝唱暮和)하는 터이매 이보다 먼저 송(宋) 경력(慶曆)간의 교니활자(膠泥活字)4)의 모형이 아역(我域)에 진작 들어왔든지 혹시나 신라에 활자가 있어 그 영향이 이 땅에 미치지 말라는 법도 없는 것이다.
3)신필(信筆): 믿을 만한 필체.
4)교니활자(膠泥活字):진흙을 굳혀 만든 활자.
말이 좀 허탄(虛誕)에 흐르나 신라의 통일 이후 고려 중엽까지의 조·중관계는 몹시도 칠(漆)5)에 가까와 전하지 아니한 어떤 사건이 서로 유통되다 스러졌는지 알 수 없는 것이다.
5)칠(漆: 옻칠. 여기서는 알 수 없다는 뜻.
그런 까닭에 활자의 사실도 고종 이전——신라 이후에 무슨 계속적 발달이 있어 니(泥)로 목(木)으로 점차 점차하여 고종 때에 와서 철(鐵)로 주자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여말(공양왕 4년 임신)에 서적원(書籍院)을 두어 활자로 서책을 인행(印行)하도록 활자의 사용이 성대하였으며, 태종 3년에는 주자소를 설(設)하여 동활자 수십만을 주조하고 이후 500년간 동·철·도·목(銅鐵陶木)등 모든 자료로 대소정조(大小精粗)6) 수백만을 만들어 공사(公私)의 용(用)이 광(廣)하였는데, 세종 초년까지는 활자의 자양과 인쇄의 방법이 다소 완전치 못한 점이 있었으니 전에는 활자로 서(書)를 인(印)하자면 글자를 동판 위에 벌여 놓고 황랍을 녹여 부어 이것이 굳은 후에 박으므로 물력(物力)과 시간이 너무 허비되었다.
6)대소정조(大小精粗):크고 작고 정교하고 거침.
이에 세종께서는 이 부족을 꺼리시어 2년 경자에 공조참판 이천 등을 명하여 태종조의 주한 바 활자를 개주(改鑄)케 하시니 그 양(樣)이 소(小)하고 정(正)한지라. 많은 서적을 인할새 다시 이천과 전 소윤(前少尹) 남급(南汲)으로 하여금 동판을 개주하라 하시니 천 등이 대왕의 지획(指劃)을 받아 동판을 개주하여 자양과 서로 맞게 하매 용랍(鏞蠟)이 필요 없고 편속(便速)하고 해정(楷正)7)하여 공정이 전의 배나 하였다. 이 노(勞)로써 가끔 주자소에 주육(酒肉)을 하사하시어 위안하셨다. 16년 갑인에 또 이천을 명하여 활자를 주하니 이것이 갑인자라, 대자(大字)요 자양이 매우 좋았다.
7)해정(楷正): 자획이 바름.
호(胡)는 조선말 ‘되’로 한자로 써서 호라. 그 칭호만큼 미개하므로 야인(野人)이라고도 하는데 야인은 여진과 동음이사(同音異寫)로 여진의 후(後)이다. 이들이 초구(抄寇)8)를 좋아하여 늘 북방의 걱정이 되었다.
8)초구(抄寇):노략질하고 약탈함.
이때 세종께서는 동북(두만강 내외) 야인은 함길도 도절제사 김종서(金宗瑞)로 제어케 하시어 6진을 개척케 하시고 서북(파저강) 남만(南滿)에서 주입하는 압록강 지류(동서) 야인은 평안도 도절제사 최윤덕(崔潤德) 등으로 토벌케 하여 세종 15년에 개환(凱還)하였으나 17년 이후 오히려 침구를 계속하여 연년이 불안을 끼치는지라, 다시 정벌의 계획을 정하고 이천으로 평안도 도절제사를 삼아 삼군을 거느려 만포구(滿浦口)로 건너 파저강을 지나고 오라산성(元山城)을 수색하여 적의 제혈(諸穴)을 분공(焚空)하고 삼군이 돌아와 첩(捷)을 바치니 때는 세종 19년 정사 9월 16일이었다.
이천은 재교(才巧)에 장(長)한 사람이다. 종경(鐘磬), 표(表), 간의(簡儀), 혼의(渾儀), 화포, 주자에까지 그 감장(監掌)치 않은 바 없고 무공(武功)으로써 대배(大拜)에 이르렀다. 그러나 탐오(貪汚)의 행실이 있어 세상이 비루히 여긴 바 되었다. 문종 원년 신미에 졸하니 나이 76이라. 익양(翼襄)이라 시(諡)하다.
(세종실록,號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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