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규(李昇圭)
생몰 연대 미상. 동아일보 기자, 조선어연구회 회원 역임.
1. 가계 및 소년시대
황희는 장수현(長水縣) 사람이라, 초명(初名)은 수노(壽老)요 자는 구부(懼夫)요 호는 방촌(厖村)이니 판강릉부사(判江陵府事) 군서(君瑞)의 아들로서 고려 공민왕 12년 계묘 2월 초 10일에 송경(松京) 가조리(可助里)에서 탄생하였었다. 그때는 고려 말기라 衰運(쇠운)에 기울어진 때다. 내우와 외환이 층생첩출(層生疊出)하여 도저히 수습치 못할 비참한 지경에 빠졌었다. 이때에 마침 절세 위인 방촌 황선생을 잉육(孕育)하여 이씨 왕조 500년의 홍운(鴻運)을 찬양(贊襄)케 하였다.
공이 어릴 때부터 신기(神氣)가 영발(英發)하여 범아(凡兒)에 초출(超出)하더니 5세가 되매 총민이 절륜하여 보는 바를 문득 기송(記誦)하니 식자(識者)가 그 위기(偉器)가 될 줄을 알았다.
14세 되던 해에 음관(蔭官)1)으로서 안복궁(安福宮) 녹사(錄事)가 되었었고 21세에 사마시(司馬試)를 마쳤고 이어 23세에 진사시(進士試)를 마쳤다.
1) 음관(蔭官):부조(父祖)의 공덕으로 얻은 벼슬.
26세 되는 해에 부공(父公)이 충주에 출재(出宰)하매 공이 아사(衙舍)에 배시(陪侍)하여 정성(定省)2)의 여가에 학문을 공구(攻究)하여 밤으로써 낮을 이어 경사백가(經史百家)의 책에 통효치 아니함이 없었다. 이는 공의 일생에 정치적 생활의 자료를 충분히 준비한 것이다.
2)정성(省):혼정신성 (昏定晨省). 조석으로 부모의 안부를 물어서 살핌
공이 27세 되던 해 문과(文科)를 마치고 익년에 성균학관이 되어서 장차 원열3)에 비영(蜚英)코자 하였으나 시운(時運)이 쇠퇴하여 자수(籍手)할 곳이 없어 한산한 가운데 날을 보내고 있었다.
3)원열:조정에 나란히 서는 관리의 행렬. 4)자수(藉手)할 곳:이바지할 분야.
2. 공의 정치적 생애의 초년
이태조의 개국이 되자 태조께서 여조의 폐정(弊政)을 개혁하고 신정(新政)을 펼새 경명행수(經明行修)한 인사를 수라(蒐羅)하매 공이 징벽(徵辟)6)에 응하였다. 이로부터 공의 일생에 정치적 생활의 서막이 열리게 되었다.
5)경명행수(經明行修): 경학에 밝고 행실이 착함.
6)징벽(徵辟):초야에 묻혀 있는 사람을 예를 갖추어 불러서 벼슬을 시킴.
이 뒤에 공이 정자(正字), 교관(敎官), 경력(經歷), 사간대언(司諫代言) 등의 직을 역임하였는데 이는 공이 30세로부터 46세에 이르기까지 약16년간 경력이다. 때는 이조 초기에 초창 미비한 시기요 공의 관직도 비미(卑微)하여 국가의 대정(大政)을 참문(參聞)치 못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공의 시설한 사업이 별로 나타나지 못하고 다만 각근봉공(恪勤奉公)하여 이르는 바에 현능(賢能)한 성예가 높았을 뿐이다.
3. 공의 정치적 생애의 중년
고어(古語)에 운(云)하되
“뿌리가 쌓이고 얽힌 나무마디가 있는 나무에서는 좋은 그릇이 나올 수 없다.”(편집자 역)
라 하였다. 공의 대정치 수완의 발휘는 47세에 지신사(知申事)가 되던 때부터 비롯한 것이다. 이보다 먼저 박석명(朴錫命)이 지신사로서 오래 국가의 기밀을 맡았더니 이에 이르러 석명이 공을 태종께 천(薦)하니 공이 드디어 석명을 대신하여 지신사가 되어 권대(眷待)7)함이 비할 데 없고 기무(機務)를 전총(專摠)하여 비록 1·2일간 보지 못하더라도 반드시 불러보시고 매양 말씀하시되 이 일은 나와 경이 홀로 아는 것이니 만일 누설하면 경이 아니면 곧 나라 하시니 그 군신의 제회(際會)가 가히 천재일우(千載一遇)라 하겠다.
7)권대(眷待):돌보아 받듦.
이로부터 형, 병, 이, 호, 공, 예, 6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사이에 대사헌, 지의정(知議政), 견명사, 참찬, 평안도 도순문사, 한성판사로 전임도 하였었다.
태종 경인으로부터 동 무술에 이르기까지 무릇 9년 동안은 공의 이상적 정치의 헌장(憲章) 문물을 제정한 시대이다.
① 종상법(種桑法)을 여행(勵行)하고
② 경제육전을 의정(議定)하고
③ 병마(兵馬)를 점검하고
④ 「고려실록」을 개수하고
⑤ 30여 종의 예법을 제정하여 이조 일대의 예악과 제도를 완성하였었다.
4. 공의 퇴처(退處) 남원(南原)시대
공의 연령이 56세로부터 60세에 이르기까지는 공의 일생에 가장 불운의 시대요 또는 가장 한산한 시대이다. 태종조에 여러 가지 정치제도를 개혁쇄신함에 분망한 때에 있어 공으로 하여금 향곡(鄕曲)에 퇴출(退黜)하여 유유한 한세월을 보내게 한다는 것은 또한 조물자의 일시 마희(魔戱)라 아니할 수 없다.
태종 16년 병신 11월 2일에 왕이 공을 불러 세자 제(양녕대군)의 무례함을 말씀하시고 장차 폐위의 뜻을 보이셨다. 대개 그때에 양녕대군은 주색에 침닉(沈溺)하여 실덕(失德)이 많고 제3자 충녕대군(세종)이 성덕이 계시므로 보위를 충녕에게 전하고자 하며 공에게 그 미의(微意)를 발표하셨다. 공의 처지로는 이에 대한 주답(奏答)이 퍽 곤란하게 되었다. 국가나 사가를 물론하고 폐장입유(廢長立幼)는 후일의 화란(禍亂)을 양성하는 근본이요 또는 충녕의 성덕이 아직 나타나지 못할 때이다. 그러므로 공이 대경대법(大經大法)을 들어 여쭈되
“국저(國儲)8)는 가히 동요치 못할 것이니 세자가 비록 실덕이 있다 하더라도 연소 기예(氣銳)한 소치요 큰 과실은 아니라.”
하였다.
8)국저(國儲): 나라의 동궁.
태종께서 이 말씀을 들으시고 크게 노하시어 가라사대
“황희가 전일에 제민(諸閔; 세자의 외척)을 제거하자 주의(主議)하더니 지금은 세자를 구호하니 이는 세자에게 붙어서 민씨의 원을 풀어 후일에 고총(固寵)하자는 뜻이라.”
하시고 이로부터 공을 소외하여 신임치 아니하고 좌천하여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로 출외(出外)하였더니 18년 무술 5월 10일에 나명(拿命)을 입어·송도 행재소에 나갔었다.
9)고총(固寵): 임금의 총애를 굳힘.
그 익일에 왕이 공의 관직을 면하여 서인을 삼아 교하폄소(交河貶所)10)에 퇴귀케 하더니 미기에 공의 향관인 남원에 이치(移置)케 되었다.
10) 교하폄소(交河貶所):교하는 지금의 파주군으로, 교하에 있는 귀양 장소를 말함.
공이 남원에 이르러 문을 막고 객을 사양하여 비록 동년 친구라도 그 면목을 보기가 드물었다. 손에 운서(韻書) 일질(一帙)을 잡고 신(神)을 응(凝)하고 눈을 주(注)할 뿐이라 비록 59세의 고령이나 자서(字書)의 음의(音義)와 방변(旁邊)의 점획이 일호의 차착(差錯)이 없었다.
공이 5년 동안 남원에 있었더니 그 사이에 태종이 세종께 전위(傳位)하시고 태상황(太上皇)이 되셨다. 세종 4년 임인 2월에 태종께서 공의 실죄(實罪)가 아닌 것을 아시고 소환의 명을 내렸다. 공이 명을 받아 경성에 돌아와서 태종께 뵈이고 사은하니 태종께서 직첩(職牒)을 환수하시고 세종께 부탁하여 곧 등용하라 하셨다.
5. 공의 정치적 생애의 모년(暮年)
공은 이미 유사(宥赦)11)를 입어 조정에 돌아오매 명성(明聖)하신 세종대왕께서 왕위에 오르시어 공으로 수상을 삼아 대정(大政)을 위임하시니 공이 지모와 충성을 다하여 경암(敬庵) 허조(許稠)로 더불어 대정을 협찬하여 예악 제도와 전장 문물(典章文物)이 다 이때에 성립하여 국가의 지치(至治)를 이루게 하였다.
11) 유사(宥赦): 너그럽게 용서되어 사면됨.
이로부터 약 20 동안은 공의 정치적 생애의 가장 득의한 시대이다. 그 여러 가지 시설한 사업은 낱낱이 다 들어 말하기는 어려우나 위로 예성(睿聖) 세종대왕을 모시고 아래로 여러 현신(賢臣)과 주선하여 고금에 탁절한 태평정치를 이루었다. 문종 2년 임신 2월 초 8일에 공이 90세의 고령으로 병졸하니 조야(朝野)가 경탄치 않는 이가 없어 말하되
“하늘이 우리 현상(賢相)을 뺏아갔다.”
하였다.
세종 묘정에 배향하고 시(諡)를 익성(翼成)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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