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의돈(黃義敦)
1891~1969, 사학자. 충남 생. 어릴 때 한학을 수학. 평양 대성학교, 휘문의숙, 보성고보교원을 거쳐 조선일보 사원, 문교부 편수관, 동국대 교수 역임. 저서에 「신편조선역사(新編朝鮮歷史)」, 「중등조선역사」등이 있음.
1. 유년시대
선생의 성은 이(李), 관(貫)은 한산(韓山)이며, 명은 색(穡), 자는 영숙(穎叔)이요, 호는 목은(牧隱), 시(諡)는 문정(文靖)이다. 선생의 부는 원조(元朝)에 등과하여 문명이 일대에 울리던 가정(稼亭) 이곡(李穀)이요, 모는 함창군부인(咸昌郡夫人) 김씨로서 고려 충숙왕 15년 무진 5월 5일 (신미)에 영해부(寧海府) 괴시리(槐市里) 그의 외택에서 탄생하였다.
선생의 「독서처가서(讀書處歌序)」서에
“나는 태어나서 2년 만에 부모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왔다.”(편집자 역)
라고 하였음을 보면 선생이 태어난 후에 부모와 같이 외가에서 장양(長養)하다가 2세 때에야 처음으로 그의 고향인 한산(서천군 한산면)에 돌아갔던 것이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총명의 재질이 범류(凡流)에서 뛰어나고 배우기를 좋아하였던 듯하다. 그의 행장에
“총명과 지혜가 보통과 달라서 스스로 글을 읽을 줄 알았으며 글을 보면 곧 될 수 있었다.”(편집자 역)
라고 함이 이를 말한 바이다. 따라서 10여 세에 벌써 문장이 유창하였던 듯하다.
“내 옛 신사년에
나이 이제 열 넷이었네
백자운(百字韻)을 겨우 이뤄
요행히 진사(進士)를 얻었네”(편집자 역)1)
1)“我昔歲辛巳 行年十四 立成百字韻 饒倖取進士”
라 함은 선생의 추억시로서 14세 때에 성균시장(成均試場)에서 100자 운의 장편시를 단시간에 곧 이루어서 진사시에 입격(人格)이 되었음을 말한 바이다.
편린을 미루어 전체를 짐작함과 같이 이 한 싯구로 보아도 선생의 재학(才學)이 얼마나 숙성하였던가 함을 알 만하다.
2. 면학시대
그러나 선생이 정말로 학문에 대하여 면려각고(勉勵刻苦)한 시대는 진사시에 입격이 된 이후부터이었다. 「송씨전」에
“송씨가 저자로부터 종이 등을 가져와 더욱 힘쓰기를 권했으나 내가 얻을 수 없다가 시험에 우연히 합격하였다. (중략) 그러나 생각하기에 요행히 얻은 것이지 내가 실제로 재주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니 배우기를 힘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학문에 뜻을 세우고 다행하게도 중도에 폐하는 일 없이 지금에 이르렀으니 모두 시(詩)와 서(書)의 힘이다. " (편집자역)
라고 함을 보면 선생이 학문에 대한 굳은 뜻을 세우기는 진사시에 입격이 된 뒤로부터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14세엔 교동 화개산(華蓋山)에서 독서하였고 16세엔 최충의 건설로 고려 일대에 문교의 중심이 되던 9재(齋)에 가서 각촉부시(刻燭賦詩)하는 집회에 참가하여 시문의 재능을 싸웠으며 17세 때엔 삼각(三角), 감악(紺嶽), 청룡(靑龍) 등 산에서 글을 읽었었고 18세엔 서천 대둔산, 19세엔 평주 모란산 등지에 전거(轉居)하면서 글을 읽기에 전력하였던 것이다.
유한정적(幽閑靜寂)한 산사를 찾아다니면서 공부하기에 전력하는 동시에 동양 문화의 원산지인 지나대륙에 유학하기도 원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19세에 부인 권씨를 맞이하여 결혼의 예를 거행한 뒤에 마침 원국에 가서 사환(仕宦)에 종사하는 그의 부친께 근친 겸 유학의 길을 떠나게 되었었다.
그래서 이듬해 12세 때에 원국의 국립대학인 벽옹(辟雍)에 입학하여 23세까지 4년간 재학하면서 과공(課工)에 정근하여 고금의 경적(經籍)을 널리 고구하는 동시에 당대에 산두(山斗)의 망(望)2)을 진 우문자정(宇文子貞), 구양현(歐陽玄), 오백상(吳伯尙) 등의 석학을 종유(從游)하여 흉금을 넓히었었다.
2) 산두(山斗)의 망(望):태산(泰山)과 북두성(北斗星)같이 우러러봄.
그러므로 선생의 섬박(瞻博)한 학문과 웅건한 문장은 다 이에서 성숙이 되었던 것이다. 이어서 24세 되던 해 정월에 가정 선생의 상을 당하고 분상차로 고려에 돌아와서 3년간 은거하여 있는 동안에 더욱더욱 연마와 조탁의 공을 더하였던 듯하다.
3. 과제(科第) 출신시대
조선 또는 지나에 있어서 과거에 정치적 방면에 출신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먼저 과거에 입격자가 되어야 하였었다. 과거라 함은 문과, 무과의 2종으로서 무과에 급제한 자는 지금 사관학교 졸업생과 비슷한 자격을 주었고 문과에 입격한 자는 지금 고등문관 시험의 합격자와 동일한 대우를 받았었다. 그때에 가장 영달의 길을 찾으려면 오직 문무과에 응시하여야 할 뿐이다. 그러므로 선생도 26세에 3년의 상을 마치자 5월에 본국에서 시취(試取)하는 문과에 응시하여 을과(乙科) 제일인으로 입격이 되었었고, 이어서 동년 추기(秋期)에 원국에서 고려에 파견하여 시취하는 정동행성향시(征東行省鄕試)에 또 입격이 되어 영예가 전국에 울렸었다.
그래서 공원사(貢元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원나라에 건너가자 익년(27세시) 2월에 원국에서 재선하는 회시(會試)에 맞쳤고 3월에 최후로 어전에서 시취하는 전시(殿試)에 응하여 마침내 원조 문과 제2갑(第二甲) 제2명(第二名)에 합격이 되면서 원조로부터 '응봉한림문자승사 즉동지제고 겸 국사원편수관(應奉翰林文字承事即同知制誥 兼 國史院編修官)'의 영직을 받았었다. 그리고 그 즉시에 榮貴의 금의(錦衣)로 대부인께 귀성키 위하여 동국으로 돌아왔었다.
“내게는 장부의 눈물이 있어
울어도 30년간 떨어지지 않았네
오늘 정반(亭畔)을 떠나가니
그대 위해 한 줄 글 지어 풍전(風前)에 부치네” (편집자 역) 3)
3)“我有丈夫淚 泣之不落三十年 今日離亭畔 爲君揮灑寄風前”
라 함은 동방(同膀)의 장원 우계지(牛繼志)의 이때에 선생을 전별하던 명작으로서 지금껏 인구에 회자하여 왔었다. 선생이 고향에 돌아오자 본국 조정에서 또한 예문응교(藝文應敎)의 영직을 배명하였다.
4. 정치적 생애
이로부터 선생의 40년간 정치적 생애의 서막은 열리기 비롯하였다. 선생의 엄박한 학문과 웅건한 문장은 당대의 대표적 대가로 지칭케 되는 동시에 고려 말기에 도미적(掉尾的) 명주인 공민왕의 알아준 바 되어 요직과 청환(淸宦)을 순차로 밟아가게 되었다.
28세엔 내서사인(內書舍人) 전의부령(典儀副令)을 지나 서장관으로 다시 원국에 갔었고 원조에서 또 한림, 경력(經歷) 등 관(官)을 지내다가 이듬해에 동귀(東歸)하여 이부시랑, 한림직학사가 되었으며 인재 발탁과 문한제작(文翰製作)의 중임을 맡았으며 30세에 국자좨주로서 국학의 인재를 교양하였고 우간의(右諫議)가 되어 은악4)의 당론을 토하였으며 31세에 우부승선(右副承宣), 33세에 좌부승선(左副承宣)이 되어 왕명을 출납하였다.
4)은악:화평하면서도 곧은 말.
34세엔 홍두적(紅頭賊)의 난을 피하여 공민왕을 모시고 남천하여 복주(안동군), 청주 등지에서 두류하기 3년간이다가 36세에 환도하자 호종일등공신(扈從一等功臣), 밀직제학(密直提學), 우문관(右文館) 제학의 봉훈(封勳)과 영직의 배명을 이어 받았으며 38세에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 보문각(寶文閣),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이 되어 군국의 기밀과 문한의 중임을 맡아 보았고 이어서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누차에 다수의 인재를 간선하였으며 42세에 숭록대부 삼사우사 진현관 대제학 겸 성균대사성으로서 뇌정(雷霆) 같은 공민왕의 진노하에서 직언으로 극간하여 무죄한 시중(侍中) 유탁(柳濯)을 구출하였으므로 직성(直聲)이 전국에 울렸었다.
「고려사」본전에 보면
“시중 유탁 등이 글을 올려 마암영전(馬巖影殿)의 공사에 대하여 간했다. 왕은 대노하여 유탁 등을 하옥시키고 이색으로 하여금 그를 국문케 하였다. 왕은 이 일로 탁을 죽이려고 해서 이색에게 명하여 죄를 논하는 글을 짓게 하였다. 색이 탁의 죄명을 청하니 왕이 말씀하시기를
'오랫동안 수상에 있으면서 의롭지 못한 일을 많이 했다. 그리하여 큰 가뭄에 이르게 한 것이 그 하나요, 연복사(演福寺)의 땅을 빼앗은 것이 그 둘이요,
공주가 승하했는데도 3일간이나 제사를 지내지 않은 것이 그 셋이요,
그 장례를 낮추어 영화공주(永和公主)의 예로 한 것이 그 넷이니
불충과 불의가 이보다 더 큰 것이 어디 있으랴’
하였다.
색이 말하기를
‘이것은 모두 지나간 일입니다. 근래에 탁 등이 침영전(寢影殿)의 공사를 간했으니 비록 이 네 가지 일에서 죄목을 찾더라도 사람들은 모두 글을 올린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또 이 네 가지 일이 모두 죽을 죄가 아니라 하더라도 원하건대 다시 생각해 주십시오’
라고 하였다.
왕은 더욱 노하여 급히 거행하기를 촉구하니 색이 엎드려 말하기를
‘신이 차라리 죄를 얻는다 할지라도 어찌 감히 글을 가지고서 그 일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중략) 왕이 시중 이춘부(李春富)에게 명하여 어보(御寶)를 봉했으나 감히 나아가지 못했다. (중략)
이에 색에게 명하니 색은 왕이 더 노할까 두려워 이에 봉하니 글에 말하되
'신 색이 삼가 봉합니다’
라고 하였다.
왕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덕이 부족하다고 내 말을 따르지 않으니 이것을 가지고 가서 덕이 있는 자를 구해서 섬기도록 하라’
고 하였다. ”(편집자 역)
이에서 선생도 '왕명 불복종죄'로 하옥 신문하였으나 충직하고 태연한 변대(辨對)에 공민왕도 마침내 감(感悟)되어, 유탁과 선생이 일시에 석방케 되었었다.
44세에 정당문학(政堂文學)의 중직으로서 불행히 모부인의 간우(艱憂)를 만나 잠깐 휴직하였다가 익년에 다시 기복(起復)5)하여 전직(前職)을 공행(供行)하였으며 46세에 한산군(韓山君), 57세에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을 봉하였고 58세엔 당시의 대신으로서 인신(人臣)의 최고위인 문하시중에 이르렀었다.
5) 기복(起復):기복출사(起復出仕). 상중에는 벼슬을 하지 않는다는 관례를 깨고 상제의 몸으로 벼슬자리에 나아감.
이로부터 선생은 곧 조정에 숙덕(宿德)이요 원로로서 몇 해 동안 그의 일언일동이 정계의 대세를 좌우케 되었었다. 동시에 우왕도 또한 문신에 선생과 무신에 최영을 가장 신임하였었다. 이때가 아마 선생의 40년간 정치적 생애 중에 가장 득의의 절정에 오른 시대였던 것이다.
5. 모년(暮年)의 궁액(厄) (1)
그러나 “달은 차면 기울어지고 사물도 무성하면 쇠퇴하게 됨”(편집자역)은 자연의 공례이다. 득의 절정에 오른 선생의 운명도 또한 불행의 겁운(劫雲)이 덮어들게 되었다. 혁명의 이지(異志)를 품고 문무의 실권을 차차로 독점하려 하던 이태조가 우왕 14년(무진)에 위화도로부터 환군하면서 그가 가장 두려워하던 최영을 죽여 반대당의 실력을 감쇄(減殺)케 하자 만조가 거의 이태조의 독무대가 되고 말았었다.
그러나 촌철(寸鐵)의 실력이 없더라도 전국의 민망(民望)을 일신에 집중하고 있는 선생의 일동일정은 국민의 준적(準的)이 되는 동시에 이태조도 선생을 외적(畏敵)으로 생각하여 주의와 경계를 게을리하지 아니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선생도 또한 이태조의 위세가 날로 높아가는 동시에 ‘주약신강(主弱臣强)’하는 형세를 매우 우려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강신(强臣)을 누르고 약주(弱主)를 도와 보려고 하였던 듯하다.
「고려사」 본전에
“태조가 회군하여 종실에서 간택하여 세우려고 했다. 조민수(曺敏修)는 창(昌)을 옹립하고자 하여 당시에 색이 명유(名儒)임을 생각하고 그의 의견을 색에게 자문하였다. 색도 또한 창을 세우고자 하여 마땅히 전왕의 아들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여 드디어 창을 세웠다. " (편집자 역)
라 하였다.
이가 곧 이태조의 주장을 반대하고 죄없이 쫓겨나간 우왕의 아들 창왕을 세워서 왕실의 혈통을 붙들어 가려고 한 뜻인 듯하다.
그리고「태조실록」권 1에
“공민왕이 승하한 뒤로부터 천자는 매번 집정대신을 징발했으나 모두 두려워하며 감히 가려고 하지 않았다. 문하시중 이색이 창으로 하여금 친조(親朝)케 하고자 하였으며, 또한 왕관(王官)으로 하여금 감국(監國)을 청하기 위하여 입조하기를 자청했다. 창은 색과 첨서밀직 이숭인(李崇仁)을 보내어 경사에 가도록 했다.
'하정(賀正)에 또 왕관으로 하여금 감국을 청하니 태조가 색을 지칭하여 강개하다고 했다. 태조가 위엄과 덕이 날로 성하여 가는 중에 색이 외지에 나가 그가 돌아오기 전에 변란이 있을까 두려워했다. 이에 아들 하나를 일행의 하나로 데리고 가기를 청하였다. 태조는 전하(태종)로 하여금 서장관으로 삼게 했다. (중략) 색은 중국어로 대답하여 친조를 청했다.”(편집자역)
라 하였고
「고려사」 본전에도 이와 대동소이한 글이 적혀 있다.
이가 곧 이태조의 당과 그의 반대당인 선생 일파와 사이에 암중에 싸우던 외교전의 일절이었다.
군국의 실권을 잡은 이태조와 위세를 겨룰 만한 실력이 없으므로 선생은 오직 외교적 술책으로부터 그를 제지하여 보려 하였던 듯하다. 그래서 창왕으로 하여금 명국에 친히 입조케 한 후에 이태조의 비행을 명국에 상진(詳陳)하고 그의 세력을 의뢰하여 이태조의 일당을 진멸하고 왕정을 복고케 하든지 그렇지 못하면 왕관 곧 명의 관리를 청하여 국정을 감독케 하는 동시에 이태조의 세력을 감쇄코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눈치를 먼저 챈 이태조는 그 일행의 행동을 감시키 위하여 태종으로 서장관을 시켜 미행케 하였다. 「실록」과 「고려사」에는 선생이 환국키 전에 변이 있을까 두려워하여 태조의 한 아들을 청하여 종행케 하였다 하였으나 실지에는 그의 반대로 태조가 자진하여 그의 아들로 하여금 미행케 하는 동시에 사행(使行)의 동정을 감시한 듯하다. 그러므로 그의 감시를 받게 된 선생은 본래의 계획을 실현키 어렵게 되었던 것이다.
겨우 명 태조의 인견시(引見時)에
“그대는 원에서 한림 벼슬을 했으니 마땅히 한어(漢語)를 이해할 것이다.”(편집자 역)
라고 묻는 기회를 타서 한어로 ‘청친조(請親朝)’의 한 마디를 부르짖는 동시에 명주의 동의를 얻어서 예정의 계획을 수행코자 하였던 것이다. 마는 오래 폐지하였던 끝에 난삽하게 나온 한어는 명 태조에게 잘 들리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외국의 내정을 간섭치 아니하려 하던 태조는
“그대의 한어는 숨쉬는 소리가 나는 것과 비슷하구나.” (편집자 역)
란 한 마디로 소쇄(笑殺)하는 동시에 다시 물어보지 않고 말았다.
그러므로 선생은 돌아와서
“지금 이 황제는 임금이 될 마음이 없는 임금이다. 나는 황제가 반드시 이 일을 물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황제는 묻지 않았다. 황제가 물은 것은 모두 내 뜻과는 다른 것이었다. "(편집자 역)
라 한탄하였다.
선생의 이 계획이 실패에 돌아간 동시에 이로 인하여 이태조의 당에게 큰 치의(致疑)를 받았던 것이다.
「태조실록」권 11에
“도전(道傳 ; 정도전)이 듣고 마음에 그것을 꺼리면서 상(上)에게 말했다. ‘근(近;권근)은 이색이 아끼는 제자입니다. 그런데 색은 일찌기 지난 기사년간에 황제에게 참소했으나 뜻을 얻지 못한 일도 있었읍니다. 지금 근이 사신가기를 청하니 반드시 다른 뜻이 있을 것입니다. 청컨대 권근을 파견하지 마십시오.” (편집자 역)
라고 하였다. 이는 정도전이 이로부터 8년 후 태조 5년 병자에 있어서도 선생의 '청친조'의 한 마디를 회상하면서 여계(餘悸)6)가 상존하여 그의 문생인 권근까지도 위험시하였던 바이다. '청친조'의 한 마디가 얼마나 이태조당에게 미움을 받았던가 함을 알 만하다.
6) 여계(餘悸):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림.
그뿐만 아니라
“색이 경사(京師)로부터 돌아와서 이숭인, 김사안(金士安) 등과 더불어 서로 여흥(驪興)에서 우왕에게 알현하기로 약속했는데, 색은 먼저 혼자서 알현하기로 기약을 했었읍니다. 그가 홀로 알현할 때에 말한 것이 공적인 것인지 사적인 것인지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편집자 역)
라 함은 이태조당의 오사충(吳思忠), 조준(趙浚) 등이 선생을 공격한 상소로서 선생이 명으로부터 돌아오면서 대담히 여주(驪州)에 폐축(廢逐)되어 있는 고군(故君) 우왕을 배알한 것을 말한 것이다. 그중에 더우기 타인이 없는 사이에 홀로 가서 보았던 것이다. 당시에 권위가 흔천(掀天)7)하고 생살을 임의로 하는 이태조당의 가장 의혹과 위험의 눈으로 질시하는 폐주를 독현(獨見)하였음은 참으로 선생의 결사적 각오가 있었던 듯하다.
7)흔천(掀天):흔천동지(掀天動地). 천지를 뒤흔들 만한 큰 세력.
나날이 熾盛하여 가던 이태조의 세력은 마침내 조민수, 변안열(邊安烈) 등을 차례로 죽이고 창왕 원년(己巳) 12월에 창왕을 마저 폐축하는 동시에 왕씨가 아니요 신돈의 자손이라 덮어씌어 우·창 양왕을 죽이고 암약(暗弱)한 공양왕을 세워 자당의 이용이 되게 하였었다.
동시에 선생도 또한 반대당의 영수로 지목되어 여러 번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게 되었었다. 그의 탄핵을 받은 죄목은
① '마땅히 전왕의 아들을 세워야 한다'라고 하여 창왕을 세우게 한 것.
② 명국에 갔다 와서 폐왕 우를 독현한 것,
③ ‘창을 받들어 입조케 하고 신우8)를 영립(迎立)’하는 비책을 계획한 것 등이다.
8)신우:우는 왕씨의 자손이 아니고 신돈의 자식이라 하여 신우라 한 것임.
그래서 처음엔 장단에 귀양갔고 이듬해 공양왕 2년(경오) 4월엔 함창(咸昌;상주군 함창면)에 이배(移配)하였더니 동년 5월에 윤이(尹彝), 이초(李初) 등이 명국에 호소하여 이태조당을 구제(驅除)하려던 사실이 탄로되매 그의 연루로 선생도 또한 청주옥에 체수(滯囚)되었으나 마침 청주읍을 침몰케 하던 폭우와 홍수의 천재가 당시의 집권자를 놀라게 하여 무사 방면의 은전을 입게 되었다.
그러나 그 뒤에도 여러 번 대간의 논핵을 받아서 함창, 금주(州 ; 시홍), 여흥(여주) 등지로 유찬의 생활을 이어 하였다.
“인정이 어찌 무정한 사물과 같아
지나는 곳 오는 해가 점점 화평치 못하구나
동쪽 울타리로 눈을 돌리매 부끄러움이 얼굴에 가득하니
진짜 국화가 거짓 연명(도연명)을 대하는구나”(편집자 역))
9)“人情那似物無情 觸境年來漸不平 偶向東籬蓋滿面 眞黃花對僞淵明”
이는 선생이 이때에 자가(自家)의 심경을 도파(道破)한 명구이다. 공(公)으로는 500년 종사가 거의 복멸케 되어 가고 사(私)로는 일문(一門)의 부자 형제, 동서 유찬의 곤경에서 선생의 모년(暮年) 생애도 또한 동정의 일국루(一掬淚)를 뿌리지 아니할 수 없게 되었다.
6. 모년의 궁액 (2)
임신 7월 17일에 왕씨의 왕조가 최후로 마치고 이태조의 혁명이 성공되어 왕위에 오르게 되면서 제일착으로 왕씨의 일족과 불복의 유신을 어떻게 처치할까 함이 가장 큰 문제이었다. 그래서 동월 28일에 반포된 17조의 교서 중에 우현보(禹玄寶), 이색, 장수 등 56인의 결당모란(結黨謀亂)한 죄가 있음을 선언하는 동시에 현보, 색, 장수 등은
“職帖을 회수하고 폐서인(廢庶人)하며 해상에 띄워보내 종신토록 불치(不齒)10)케 하라." (편집자 역)
라고 처분하였고 동월 30일엔 그를 실행키 위하여 선생을 장흥에 안치케 되었었다.
10) 불치(不齒):불치인류(不齒人類). 사람축에 들지 못함.
그리고 동년 8월에 선생의 중자(仲子) 종학(種學)이 거창 배소(配所)에서 불행히 손흥종(孫興宗)의 손에 맞아 죽었으므로 선생의 가슴에 비애와 고민이 한층 더 느끼게 되었을 것이다. 동년 10월에 의외에 사령(赦令)을 받아서 한산, 여흥 등 고향에 자유로 왕래하면서 여년을 보내었다마는
“소리 없는 번뇌는 내 마음이니
소리는 사람 귀에만 들릴 뿐이라
두 생각 모두 이룰 수 없으니
깊은 산 속에 달려들어가
소리 높여 종일토록 통곡함만 못하네" (편집자 역)11)
11)“無聲煩我心 有聲落人耳 兩思無一可 不如走入深山裡 擧聲終日哭”
이는 선생의 비통인울(悲痛湮鬱)한 그때의 흉중을 가장 잘 그려낸 명시이다. 선생의 가문에 화앙(禍殃)이 천잉12)하여 태조 3년(갑술) 8월 1일에 50년래에 유일의 지기(知己)로 가장 믿고 사랑하여 오던 부인 권씨의 상을 당하면서부터 더욱 고적한 비애를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12) 천잉 : 자주 거듭함.
그러므로 다고다한(多苦多恨)한 진속(塵俗)의 겁해(劫海)를 등지고 정적유수(靜寂幽邃)한 강원도 오대산을 찾아 여년을 보내려고 결심하였던 것이다.
마는 의외에 내린 이태조의 소명은 마침내 그 뜻을 이루지 못하게 하였었다. 태조의 건국한 제4년이 되매 차차로 百事가 자리잡히고 전조의 여세가 완전히 소멸이 되어 우려가 적어지게 되었으므로 선생을 한 번 불러 보는 것이 조금도 위험이 없었을 뿐 아니라 도리어 민심을 매수하는 이익이 있을 듯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태조 4년(을해) 11월에 특지(特旨)로 선생을 부르자 동월 24일에 선생이 궁중에 들어와 태조에게 보이게 되었으니 이가 개국 후에 처음으로 대면케 된 때이다.
「태조실록」권 8에
“4년 올해 11월 신유 삭(朔) 정묘(7일)에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가 한산군 이색에게 쌀과 콩 100석을 보냈으나 받지 않았다.
갑신 (24일)에 한산군 이색이 오대산으로부터 왔다. 전에 색이 바깥구경을 원하여 임금이 은혜를 내려 편한 대로 하도록 하였다. 색은 관동 유람을 청하고 오대산에 이르러 머물렀다. 상이 사람을 보내어 그를 부르니 이에 이르러 오게 되었던 것이다. 상이 옛친구의 예로 대접하여 조용히 담화하고 술을 내어 흡족히 마셨으며 나갈 때에는 중문(中門)까지 배웅을 나오셨다. ”(편집자 역)
라고 하였다.
전조의 구신과 창업의 신군이 처음으로 대면케 된 자리에 태조의 대우가 어떠하였으며 선생의 처신이 어떠하였을까? 그를 생각하면 가장 흥미있는 문제이다. 전기(前記)의 글을 보면 태조가 옛날 상종하던 친구의 예로써 평등하고 친절하게 대우한 것은 사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용히 더불어 말하는 중에 선생의 언동은 그 어떠하였을까.
「암창연화(暗窓軟話;申欽 저)」에는
“태조가 색을 부르자 색이 이르러 인견(引見)하게 되었다. 색이 긴 읍을 하고 절을 하지 않았다. 태조가 어탑(御楊)에서 내려와서 빈객을 맞는 예로써 접하고 문득 강관(講官)으로 하여금 모시고 차례로 열을 짓게 하였다. 태조가 어탑에 돌아가 앉자 색이 앙연(昂然)히 일어나서 '늙은이에게 앉을 자리가 없소'라고 말하였다. "(편집자 역)
라고 쓰여 있다.
장읍불배(長揖不拜)의 거지(擧止)와 "늙은이에게 앉을 자리가 없소"의 1구어가 다 선생의 불복적 언동으로 60여 년간 臣事하여 오던 왕씨를 위하여 정절을 지키는 동시에 이조에게 굴슬(屈膝)치 아니하려는 표시인 듯하다.
그러나 「태조실록」권 9에 실린 선생의 본전에
“색이 나아가 알현하고 말했다. '나라를 여는 날에 어찌 저로 하여금 알게 하지 않았읍니까. 만일 제가 그것을 알았다면 반드시 읍양(揖讓)의 예로써 했을 것입니다. 다시 빛이 생겨나는데 말장수 무리와 같은 자로써 우두머리를 삼으셨읍니까?'라고 했으니 배극렴(裵克廉)을 지칭한 것이다.
남은이 말하기를 ‘어찌 그대와 같은 늙고 썩어빠진 선비에게 알게 하리'라고 하니 상이 은을 꾸짖어 다시는 말을 못하게 했다.
그리고 옛친구의 예로써 대하고 중문에까지 나아가 송별했다. 뒤에 그것을 논하는 자가 있었는데 남재(南在)가 색의 아들인 종선(種善)을 불러 말했다. '존공이 광언(狂言)을 한다고 하니 반드시 화를 면치 못할 것이오'라고. ” (편집자역)
하였다.
당일에 만일 선생이 이런 말을 하였다면 그의 평소에 지켜오던 정절과 인격은 이 한 말로써 오손(汚損)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이선(李選)의 「승국신서(勝國新書)」에도 선생의 절의를 의문에 붙인 것이 이 까닭일 것이다.
“늙은이가 앉을 자리가 없다”란 한 마디와 “어찌 나에게 알리지 않았는가”란 한 마디의 진가(眞假)를 무엇으로 판정할까? 이에서 선생의 인격적 가치는 운니(雲泥)의 차가 있을 것이다.
마는 “존공이 광언을 하니 반드시 화를 면치 못할 것”이라고 한 남재의 말로부터 보면 그의 화를 받을 만한 광언이 무엇일까? 아마도 “만일 내가 그것을 알았다면 마땅히 읍양의 예를 행했을 것이니 다시 빛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한 1구어는 곧 태조에게 면첨한 말로서 그리 화를 받을 만한 광언이 아닐 것이다. 아마도 “늙은이에게는 앉을 자리가 없소”라고 한 말이 그때의 환경에 있는 사람에게 좋지 못하게 들렸으므로 만일 가지 않으면 화를 받으리라 한 말일 것이다.
그리고 선생의 평소에 숭고한 인격으로 보아서 또는 유리곤고(流離困苦) 중에서도 변심치 않은 역사로 보아서,
“동쪽 울타리로 눈 돌리매 부끄러움 얼굴에 가득하니 진짜 국화가 거짓 연명을 대하는구나”라 한 청고한 시상으로 보아서
결코 비루한 언동을 하지 않았으리라 추측하는 바이다. 더우기나 당시에 44세의 청년인 남은으로서 68세의 존장을 향하여 더구나 군주 앞에서 “그대와 같은 늙고 썩어빠진 선비”라 한 욕설을 하였을 리가 없을 것이다. 이는 아마 당시에 선생과 무슨 험극(嫌晩)이 있던 사가(史家)의 손으로부터 집필이 된 무록(誣錄)인 듯하다.
「태조실록」권 2 태조가 정(鄭)과 문답한 조(條)에 '이색은 유학의 조종'이라 찬도(讚道)하였음을 보면 사세상 마지 못하여 선생을 찬축(鼠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적지 않게 숭배하고 애석하였던 듯하다. 그리고 오랫동안 격면(隔面)이 되었던 두 분이 한 자리에 모아 군신의 계급을 버리고 故舊의 정례로 한화(閑話)와 정배(情盃)를 주고받은 뒤로는 더욱 애착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금월 27일(정해)에 태조는 선생에게 밭 120결, 미두(米豆) 100곡(斛), 염 5곡을 주었고 12월 8일(정유)에는 미두 100곡과 주육(酒肉)을 賜送하였으며 동월 23일엔 죽요여(竹腰輿)를 주었고 25일(갑인)에는 또 연회를 베풀어 선생을 초대하였다. 이가 다 군신의 견지를 떠나서 고구의 정으로부터 준 바이다. 그러므로 선생도 또한 고구의 정으로 받았을 것이다. 동일한 미두의 사송이라도 전번(11월 7일)에 받지 않고 금번에 받았음이 “반드시 명분이 있어야 할 것인저” 부르짖던 유가의 견지에서는 어떠한 심장(深長)의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태조실록」권 9에 선생에게 한산백(韓山伯)과 오고도제조(五庫都提調)를 배명한 기록을 들어 선생의 최후의 처신이 실절(節)에 돌아갔다 말하는 이가 없지 않다. 그러나 그는 오직 태조로부터 우우(優遇)의 허명(虛名)을 주었을 뿐이요 봉공(奉供)의 실직(實職)이 아니므로 선생도 또한 출신행공(出身行供)한 일이 없었던 듯하다. 따라서 이 기록으로만 보아서 선생이 고려조를 위하여 60년간 지켜오신 名節을 오손하였다 논단함은 가장 경솔한 의논으로서 우리의 수긍키 어려운 바이다.
덧없는 세월은 선생으로 하여금 69세의 일생을 마치고 다정다한한 오탁악세(五濁惡世)를 영결케 하였다. 때는 태조 5년(병자) 5월 7일(계해)이다. 그러나 그의 임종에 대하여서 여러 가지로 의운(疑雲)에 쌓이고 이설이 紛紜13)하여 왔다.
13) 紛紜 : 여러 사람의 의논이 일치하지 않고 떠들썩함.
「태조실록」권 9에
“계해 (7일) 한산백 이색이 여흥 신륵사(속칭 벽사)에서 졸하였다. (중략) 병자 여름 5월에 신륵사로 피서하기를 청하여 떠나려고 할 때에 병이 나서 이미 깊어졌다. 그때 어떤 중 하나가 말을 하고자 하니 색이 손을 들어 흔들면서 말했다. '삶과 죽음의 이치에 나는 아무런 의심도 없다' 말을 마치매 이내 졸하였다.” (편집자 역)
라 하였고
「송와잡기(松窩雜記 ; 이기 저)」에
“초3일에 벽란도(碧瀾渡)로부터 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 올라갔는데 호송하는 사신도 역시 따라왔다. 초7일에 여흥 청심루(淸心樓) 아래 연자탄에 이르러 공이 배 안에서 숨을 거두었다. 공이 몰한 것에 대해 사람들이 많이 의심했다. 대개 고려의 자손들이 배 안에 있어서 보니 모두 정도전, 조준 등의 술책이었다. 여러사람들이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편집자역)
라 하여 선생의 임종이 불행히 舟中에서 비명으로 된 것같이 쓰여있다.
「송자대전(宋子大全)」 흥이택지서(興李澤之書)에
“지난 한두 해를 여포(驪浦)에 있었다. 여포의 사람들과 중의 무리들이 모두 이른바 연탄(燕灘)이라는 곳을 가리키면서 이곳이 목은 이 술을 마시고 명을 다한 곳이라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더욱 전에 듣던 것이 망언이 아님을 믿게 되었다.”(편집자 역)
라 하였다. 이로부터 보면 선생이 연자탄 배 안에서 독주를 마시고 비명에 하세하였음이 사실로서 우암(尤庵) 때까지 300여 년간 민간 구비에 유전하였던 듯하다.
7. 결론
이상에 쓰여 있는 기록을 읽어 보면 선생의 전모를 대강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마는 이에 다시 몇 가지 요령을 들어 간략히 결론을 지어 볼까 하는 바이다.
1) 선생의 인격
「태조실록」 본전에 보면
“색은 본래부터 총명하고 예지로왔으며 학문은 정밀하고 넓었으며 마음이 너그러워 용서를 잘 하였고 일에 처해서는 자세하고 밝았다. 재상이 되어서는 할 일에 힘썼으며 가볍게 기뻐하지 않았고 후학을 가르침에 부지런하고 나태하지 않았다. (중략) 평생을 남이 듣기 싫은 소리나 얼굴빛을 하지 않았다. 술을 마실 때에도 부드러워 그 자리가 어지럽지 않았으며 마음속에 품은 뜻이 거리낌이 없고 말과 행동이 조심스러웠다. 오랫동안 왕의 총애를 받았는데도 기뻐하지 않았으며 두 번이나 환란을 만났는데도 슬퍼하지 않았다. " (편집자 역)
라 하였고
「고려사」본전에는
“색은 바탕이 밝고 민첩하여 많은 책을 두루 살폈다.(중략) 후학을 면학케 하여 사문(斯文)을 일으키는 것으로 자기의 임무를 삼아서 학자들이 모두 우러러 사모했다. (중략) 평생 꾸짖는 말이나 싫어하는 얼굴빛이 없어 모나지 않았으며 남과 잘 어울렸다. 농사나 가사를 직접 다스리지 않아서 자주 굶었지만 그것을 개의하지 않았다.” (편집자 역)
라 하였다.
공정한 사가의 붓으로 써 있는 이 두 기록을 보아서 선생의 인격이 얼마나 안상진중(安詳珍重)하고 원만 쇄락하며 부귀로 기뻐하지 않고 곤액에도 태연하여 동심(動心)치 않는 인격적 수양이 있었음을 알 만하다. 더우기나 뇌정같이 무서운 공민왕의 진노하에서 앙연히 서서 어명을 거항하고 어인(御印)을 근봉(謹封)하면서 서서히 자기의 소신과 소회를 상진하여 공민왕의 유견을 돌리고 유탁의 횡사를 구출한 점으로 보든지 적당의 환현(環現) 중에서 조금도 의구심이 없이 폐주 우왕을 태연히 배현한 점으로 보든지 선생의 인격이 어떠하였음을 짐작할 만하다.
2) 선생의 절의(節義)
제 5, 6장에 쓰여 있는 바와 같이 우왕 14년 (무진)으로부터 이태조 5년(병자)까지 9년간에 많은 변혁과 곤액을 치러 가면서도 여조에 진충(盡忠)하려는 송백(松栢)같은 정절을 끝끝내 지켜왔던 것이다.
“두 번이나 환란을 만났으나 슬퍼하지 않았다”라 한 실록의 찬사가 정말로 선생의 실정을 도파(道破)한 바이다.
“관(棺)도 충군의 뜻은 덮지 못하니 긴 무지개 되어 다 펼쳐 보리라.”(편집자 역)
함은 문인 이첨의 선생을 弔哭한 挽詞이다. 충군의 소지(素志)를 이루지 못하고 중도에 돌아간 선생의 영령은 응당 긍천(亘天)의 장홍(長虹)14)이 되어 마음껏 한번 펼쳐 보리라 한 뜻인 듯하다.
14) 장홍(長虹): 긴 무지개.
3) 선생의 문학
「고려사」에
“시와 문장을 지으매 붓을 잡으면 곧 글이 이루어져서 막힘이 없었다.(중략)
나라의 문한(文翰)을 장악한 지 수십 년에 자주 중국과 견주어서 칭해지곤 했다.”(편집자 역)
라 하여 선생의 문장이 유창하여 중국에까지 울렸음을 말하였고
「태조실록에는
“문장을 만드매 붓을 잡으면 곧 글을 이루었으며 글의 뜻이 정밀하였다. 문집 55권이 세상에 돌아다닌다. ”(편집자 역)
라 하였으며
임사홍(任士洪) 「서사가집서(徐四佳集書)」에
“집대성한 사람은 오직 목은일 뿐이다. 선생이 몰한 뒤에는 쓸쓸하게 백 년이 지나도록 그와 같은 사람을 듣지 못하였다.”(편집자 역)
라 하였고
「허균시화(許均詩話)」에
“이문정공의 〈영명사(永明寺)를 지나며〉란 작품은 조탁하지도 않고 탐색하지도 않았으나 우연히 음률에 정확히 맞으니 읊으매 신격이 있다.”(편집자 역)
라 하였고
홍여하(洪汝河)의 「휘찬여사(彙纂麗史)」에는
“동국의 문장은 최치원에 의해 처음으로 그 원류가 개척되었으며 이규보가 그 흐름을 유창하게 만들었고 이제현이 처음으로 본궤도에 올려놓고 이색에 와서 집대성되었다. ”(편집자 역)
라 하였으며 김창협(金昌協) 같은 대가로도 동국의 한문학을 평론함에 선생의 문장을 수위에로 추상(推賞)하였었다.
선생의 시는 웅혼하고 화평하며 담백하고 청려하여 황종(黃鐘) 대려(大呂)의 음률을 듣는 듯하며 선생의 문은 섬박하고 웅건하며 典重하고 유창하여 장강대하(長江大河)가 흐르는 듯하다. 위로는 최치원, 이규보, 이제현 등의 제가를 집성하였고 아래로는 정몽주, 이숭인, 권근, 변계량 등의 후학의 길을 열어 주었다. 선생은 문학으로 보아서도 당대의 종사(宗師)요 백세의 명성(明星)이라 할 만하다.
4) 선생의 종교
선생은 물론 한학자인 동시에 유학자이다.
그러므로「고려사」에는
“색은 학식(學式)을 고쳐 정하고 매일 명륜당에 앉아서 경(經)을 나누어 수업을 시켰다. (중략)
정주 성리학이 비로소 흥하게 되었다.”(편집자역)
라 하였고
「태조실록」에는
“색은 말을 분석하고 속뜻을 파헤치면서 문득 저녁이 되도록 게으름을 잊었다. 이에 단지 읽고 암송하는 공부와 공리를 따지는 말들이 없어지고 성리학이 부흥하게 되었다.”(편집자 역)
라 하여 선생이 성균관 대사성으로서 정주 성리학을 힘써 교육한 공적을 찬미하였었다.
선생의 행장(行狀;권근 저)에는
“여러 종류의 책을 널리 섭렵했으며 성리학에는 더욱 깊었다.”(편집자역)
라 하였고
신도비문(神道碑文 ; 하륜 저)에는
“성리학으로써 동방을 울렸다." (편집자 역)
라 하여 선생이 이학(理學)에 심수(深邃)한 학식이 있었음을 말하였다.
선생은 당대에 유교의 종사로서 지나에서 새로 발흥하는 정주의 이기학(理氣學)을 수입하여 크게 선양하였었다. 그러므로 그의 문하에서 정몽주, 권근 같은 이학자가 배출하여 이조 유교의 선구가 되었었다.
그러나 편협한 유학자와 같이 유교 이외에 다른 학설과 사상을 전언 배척한 것은 아니다. 동시에 불교에도 취미를 가졌던 듯하다. 다시 말하면 유교를 경(經)으로 하고 불교를 위(緯)로 하였던 듯하다.
혹은 “도가 같지 않으면 서로 더불어 모의하지 않는다(道不同不相爲謀)”라 하고
혹은 “나는 석가를 즐기지 않는다(予不樂釋氏)” 하였으나
인각사(麟角寺) 무무당기(無無堂記)에는
“나는 이런 까닭에 불교를 거부하지 않는다. 혹은 심히 서로 더불어 좋아함이 있으니 대개 불교에서 취할 만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편집자역)
라 하였고
〈호법론발(護法論跋)〉에는
“비록 그러하나 오탁악세에서 선을 한다고 해서 복이 되는 것도 아니며 악을 한다고 해서 화가 되는 것도 아니다. 불교가 아니면 어디로 귀의하겠는가?” (편집자 역)
라 하여 불교에 의귀치 아니할 수 없음을 말하였었다. 그리고 신륵사 대장각기(大藏閣記)에 보면 우왕 7년 신유 4월에 선생이 그의 선군 가정(稼亭)선생의 유지를 이어서 조부모와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경(經), 율(律), 논(論) 3장을 인출(印出)하여 여흥 신륵사에 대장각을 짓고 봉안하는 동시에 누차 전경회(轉經會)를 열었었다.
그리고「태조실록」권 2에
“원년 임신 12월 경진에 첨서중추원사(簽書中樞院事) 정총에게 명하여 대장경원문(大藏經願文)을 출하여 바치게 하였다.
총이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어찌 불사에 권권(拳拳)15)하십니까. 청컨대 믿지 마십시오’
하였다.
15) 권권(拳拳):진실한 마음으로 정성스럽게 지킴.
상이 말씀하셨다.
'이색은 유가의 조종인데도 불교를 믿는다. 만일 믿을 만하지 못하면 어찌 색이 믿겠는가?'
총이 대답했다.
‘색이 세상의 대유(大儒)이긴 하지만 사람들에게서 기롱을 당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상이 말씀하셨다.
'그러면 색이 너에게도 미치지 못하느냐, 다시는 그런 소리를 말라.”(편집자 역)
하였다.
이상의 모든 기록으로부터 미루어 보면 선생은 유교의 종사인 동시에 불교에도 상당한 신앙을 가졌던 것이다.
여말부터 부패한 불교에 염증이 난 청년 일대에서 새로 수입되는 정주학을 환영하는 동시에 불교를 배척하는 기풍이 일어나자 이조 500년간에는 유교를 전상(專尙)하고 불교를 극단으로 천시하였으므로 학자로서 불교를 신앙한 것이 큰 수치로 알아왔었다. 그러므로 일부 사론(士論)에서 선생의 숭불을 백옥(玉)의 일하(一瑕)로 험잡아서 공격의 자료를 삼은 이도 있었고, 선생의 자손 중에서는 선생이 불교를 신앙치 아니하였다 역변(力辯)하기에 몰두한 이도 있었다.
마는 불교를 신앙한 것이 그다지 수치가 아니다. 현실주의에 입각한 유교의 생애를 밟아가면서도 그의 편소한 규모에 집착이 되지 않고 광탕무애(廣蕩無涯)하고 원융자재(圓融自在)한 불교적 대이상의 깨달음이 있었다면 그는 곧 원만한 인격자요 고원한 이상가일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나는 선생이 유·불 양 방면에 종사하였다 함을 차라리 숭배코자 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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