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文章/조선명인전

44.고려-이제현(李齊賢)

구글서생 2023. 5. 7.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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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이제현(李齊賢)

 

이승규(李昇圭)
생몰 연대 미상, 동아일보 기자, 조선어연구회 회원 역임.

 

사람이 세상에 나서 도덕이 일시의 중망(重望)을 띠고 문장(文章)이 시대의 풍기(風氣)를 떨치고 勳業이 일국의 안위를 매어서 살아서는 명신(名臣)이 되고 죽어서는 상귀(上鬼)가 된다 하면 이는 위대한 인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로써 고려 500년 사상의 인물을 헤아려 보면 익재(益齋) 이제현이 가히 당할 만하다 하겠다.

 

선생의 성은 이씨요 자는 중사(仲思)요 호는 익재니 고려 충렬왕 13년 정해 12월에 경주에서 탄생하였다.

 

선생의 천성이 영오(穎悟)하고 자품(資品)이 순수하여 어려서부터 의연히 성인과 같더니 15세에 이미 속(屬)할 줄 알아서 작자의 기상이 있었다. 이해에 성균시(成均試)에 입격하였는데 선생이 말하되 이는 작은 기술이라 족히 나의 덕을 크게 이루지 못하겠다 하고 더욱 경전을 연구하여 지당한 도(道)로써 절충하니 그의 아버지 문정공(文定公) 진(鎭)이 크게 기뻐하되 하늘이 혹 나의 집을 더욱 창성케 하려 한다 하였다. 그때 국재(菊齋) 권부(權溥)가 시관(試官)이 되어서 선생을 보고 크게 기이히 여겨 女壻를 삼았었다. 이로부터 선생의 학식과 명망이 날로 높아 예문관, 춘추관에 選入하매 동관(同館)한 제인(諸人)이 다 선생에게 추양(推讓)하여 감히 문(文)을 의논하지 못하였다. 그 후에 직강(直講), 규정(糾正), 판관(判官), 안렴사(按廉使) 등의 직을 역배(歷拜)하여 다 職事에 근로하므로 더욱 신망이 중(重)하게 되었다.

 

선생이 28세 되는 갑인년에 頤齋 백이정(白頭正)이 비로소 원나라에서 정주(程朱)의 학설을 얻어 동환(東還)하매 선생이 먼저 이재에게 나아가 사수(師受)하였는데 동방의 이학(理學)이 창명(倡明)되기는 이재와 선생으로부터 효시가 되었다 한다.

 

이보다 먼저 충선왕이 원나라에 있어 원의 인종(仁宗)을 도와 내란을 평정하고 무종(武宗)을 영립한 고로 양조(兩朝)의 은총이 비할 데 없었더니 이해에 (충숙왕 원년) 충선왕이 원조(元朝)에 청하여 그 아들 충숙왕에게 나라를 전하고 충선왕은 태위(太尉)의 직으로 원도(元) 연경에 머물러 있어 만권당(萬卷堂)을 짓고 문학에 취미를 붙이고 있었다. 인하여 가로되 연경은 천하 문학의 선비를 뽑아 모은 곳인데 나의 부중(府中)에는 그와 대등할 사람이 없으니 이것이 나의 수치라 하여 선생을 연경으로 불러 부중에 두었는데 원의 학사 요수(姚燧), 염복(閻復), 원명선(元明善), 조맹부 등이 다 왕의 문에 놀거늘 선생이 그 사이에 주선하여 학식이 더욱 나가니 원 학사 등도 다 歎賞함을 마지 아니하였다. 1

 

하루는 왕이 여러 학사들과 같이 시를 지을새 왕의 시에

“닭울음이 문 앞 버드나무와 흡사하도다(鷄聲恰似門前柳)”

라는 구가 있었다. 여러 학사가 묻기를 이 말의 출처가 어디 있느냐 하였다. 왕이 대답하지 못하여 곤란한 지경에 빠졌었다. 그때에 익재가 왕을 모시고 있다가 왕을 대신하여 빨리 대답하기를 우리 동인(東人)시에

“초하룻날 지붕머리에서 금닭이 우는 소리가

늘어진 수양버들 가지가 바람에 나부끼는 모양과 흡사하구나” (편집자역)1)

1)“屋頭初日金鷄唱 恰似垂楊旻袋長

라 하는 구가 있으니 이는 닭울음의 가늘고 긴 것을 버들가지의 연하게 늘어진 것에 비유한 것이니 우리 전하께서 이 뜻을 취하여 쓰신 것이다. 또는 한퇴지(韓退之) 금시(琴詩)에

“떠도는 구름과 버들꽃에는 뿌리와 가시가 없다(浮雲柳絮無根落)”

라 하였은즉 옛사람도 성음(聲音)을 버들꽃에 비한 자가 있다 하니 만좌(滿座) 칭탄(稱歎)하였다.

 

그때에 충선왕이 무심히 지은 시에 만일 익재의 민첩한 해답이 없었다면 여러 학사의 조소를 면치 못하였을 것이다. 선생의 문장이 나라를 빛나게 하는 것이 과연 어떠한가?

 

선생이 33세 되던 기미년에 충선왕이 원제(元帝)에 청하여 강남에 어향(御香)을 내리게 하고 왕이 기회를 이용하여 남으로 강절(江浙)에 놀아 보타산(寶陀山)에 이르렀다가 돌아왔었다. 그때에 선생이 왕을 모시고 수천 리를 왕반(往返)하였는데 무릇 강산 누대의 풍물이 좋은 곳에서는 반드시 시를 지어 회포를 풀었다.

 

선생이 35세 되던 신유년은 원 영종의 지치(至治) 원년이라 환자(宦者) 안독(顔禿) 백고사(伯古思)가 전부터 충선왕을 원망하여 왕을 원 승상 팔사길(八思吉)에게 참소하여 영종의 명으로 왕을 토번(吐蕃) 철사결(撤思結)의 지방에 안치하니 경사(京師)에서 멀기가 1만 5천 리가 되는지라. 수종하는 재상에 최성지(崔誠之) 등이 다 도망하여 보이지 않고 오직 직보문각(直寶文閣) 박인간 전대호군(前大護軍) 장원지(張元祉)등 18인이 왕을 좇아 배소(配所)에 갔었다. 그때에 선생은 경사에서 왕의 본저를 지키고 있어 분통함을 참지 못하여 시를 지어 정승 유청신(柳淸臣)과 찬성 오잠(吳潛)에게 올렸다. 그 시는 강개격절(慷慨激切)하여 보는 자의 감동을 일으킨다.

 

선생이 37세 되던 계해년에 충선왕이 토번에 있어 오래 돌아오지 못하므로 선생이 장문의 글을 지어 원랑중(元郎中) 및 승상 배주(拜住)에게 올려서 왕의 피무(被誣)한 것과 그 신고만단(辛苦萬端)인 것을 들어 누누한 천여 말이 지성 간측(懇惻)하여 배주의 심리를 감동케 하므로 배주가 곧 상주(上奏)하여 왕을 타사마(朶思麻)의 땅에 양이(量移)2)하거늘 선생이 자청하여 왕께 문후하겠다 하고 즉시 연경에서 발정하여 함관(函關)을 넘어 농서(隴西)를 경유하여 간험(艱險)한 조주를 답파하고 만리의 왕께 분문(奔問)하였다.

2) 양이(量移):섬이나 변지로 멀리 귀양 보냈던 사람의 죄를 감등하여 내지나 가까운 곳으로 옮기는 일.

 

그 노상에서 보는 바를 따라 감흥한 시는 충분(忠憤)이 애연(藹然)3)하여 선생의 일심허국(一心許國)한 지성은 누구나 탄복치 아니할 수 없다.

3) 애연(藹然):왕성한 모양. 대단함.

 

이보다 먼저 충선왕이 고려 왕위는 그 제2자 충숙왕에게 전하고 심왕(瀋王)의 위는 충렬왕의 손(孫) 고에게 전하였는데 심왕 고가 연경에 머물러 있어 원의 종실 양왕녀(梁王女)에 결혼하니 간세(奸細)의 무리가 심왕 고에게 아부하는 자 많아서 본국에 폐해를 끼침이 적지 않았었다. 이때에 이르러 권한공(權漢功), 채홍철(蔡洪哲) 등이 충숙왕을 폐하고 심왕 고를 추대하려 하여 원의 중서성(中書省)에 상서하였으나 받지 아니하여서 그 꾀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오잠, 유청신 등이 또 중서성에 상서하여 고려 국호를 폐하고 원의 행성(行省)을 고려에 두어 원의 내지(內地)와 같이하기를 청하거늘 원제가 그 말을 청신(聽信)하여 정동행성(征東行省)을 고려에 두고자 하는지라, 그때 마침 충선왕이 토번으로부터 연도(燕都)에 돌아와서 선생으로 하여금 글을 지어 도당(都堂)에 올려 그 일을 변석(辨析)하라 하거늘 선생이 「중용」 구경장(九經章)의 수원인(綏遠人)의 의(義)를 부연하여 도도히 수천 언으로 그 불가함을 논하니 이로 인하여 그 의논이 침식되었다. 이때에 만일 선생의 명정 통쾌한 변론이 없었더라면 고려는 국호까지 없어질 뻔하였다.

4) 수원(綏遠): 중국의 옛 성() 이름. 지금은 내몽고 자치구에 편입됨.

 

이로부터 선생의 관직이 높아져서 추성량절공신(推誠亮節功臣)의 호를 주고 첨의평리(僉議評理) 정당문학(政堂文學)의 직에 전임되고 김해군(金海君)을 봉하고 삼중대광(三重大匡) 영예문관사(領藝文館事)의 직을 역임하였다.

 

선생이 53세 되던 기묘 2월에 충숙왕이 승하하매 정승 조적이 백관을 협박하여 영안궁(永安宮)에 군사를 주둔하고 선언하기를 군측(君側)의 악소(惡小)를 쫓아버린다 하나 내실은 심왕 고와 통모(通謀)하여 불측의 변을 일으키려 함이다. 충숙왕의 장자 충혜왕이 경기(輕騎)를 거느리고 급히 쳐서 죽이니 그의 당이 원도(元都)에 있는 자가 심히 많아서 백계(百計)로 왕의 죄를 구무하여 필경은 원이 사신을 보내어 왕을 불러 형부(刑部)에 가두고 또 왕의 신하 김윤(金倫), 한종유(韓宗愈) 등 십여 인을 옥에 던져 화가 장차 불측할 지경에 이른지라. 선생이 분연히 가로되 나는 오군지자(吾君之子)를 알 뿐이라 하고 뒤를 좇아 연경에 가서 붓으로써 혀를 대신하여 명백히 변석하니 원이 깨닫고 왕을 놓아 위(位)에 복(復)하니 듣는 자 다 송연하여 가로되

“이모(李某)는 담이 몸보다 크다.”

하였느니라.

 

익년 4월에 선생이 연경으로부터 동환하니 군소(群小)들이 더욱 와언(訛言)을 선동하여 선생을 중상케 하는지라. 선생이 조정의 일이 가히 할 수 없는 줄 알고 이로부터 산야에 병적(屛迹)5)하여 나오지 아니하고 「역옹패설(櫟翁稗說)」 한 편을 저술하였었다.

5) 병적(屛迹): 자취를 감추어 버림.

 

그동안에 원나라 사신 타적(朶赤)의 무리가 와서 교천사조(郊天赦詔)를 반포한다 하므로 충혜왕이 영접하기 위하여 성 밖에 나갔더니 타적이 왕을 잡아 말 위에 싣고 달려가거늘 군신들이 惶愴하여 어찌할 줄 모르는지라. 선생이 원나라 정부에 상서하여 놓기를 청하나 듣지 않고 왕을 게양(揭陽)으로 유배하니 연경으로부터 거리가 1만 리라. 왕의 신하 중에 한 사람도 따라가는 자가 없고 전거(傳車)로 빨리 몰아가다가 중로(中路) 악양(岳陽)에서 승하하였다.

 

선생이 58세 되던 갑신년에 충목왕이 즉위하여 선생을 배하여 삼사사(三司事)를 판(判)하고 부원군에 진(進)하고 서연(書筵)을 두어 선생으로 사부를 삼았다.

 

선생이 말씀을 여쭈되

“옥이 티가 있으면 반드시 양공(良工)의 조탁을 얻은 연후에 그 보기(寶器)를 이루나니 인군(人君)이 어쩌다 잘못함이 없으리오. 반드시 어진 신하의 계옥(啓沃)6)을 기다린 연후에 그 성덕을 이루는 것이니 현유(賢儒)를 가려서 경의(經義)를 강(講)케 하고 재상을 친하고 소인(小人)을 멀리하여 군덕(君德)을 보도(輔導)케 하고 정방(政房)을 파하여 청알(請謁)의 길을 끊고 공과(功過)를 표(標)하여 요행을 막고 금은금수(金銀錦繡)를 금하여 검덕(儉德)을 밝히고 부렴(賦斂)을 개벽케 하여 백성을 편안케 하기를 청하였다.”

6) 계옥(啓沃): 충성스런 말을 임금에게 아룀.

 

이상 수천 언이 다 인주(人主)의 귀감이요, 정치의 요결이나 집정자가 듣지 아니하므로 드디어 상서하여 물러가기를 청하였다.

 

이 뒤로부터 선생이 한격(閑隙)이 있으므로 「효행록(孝行錄)」을 찬(撰)하고 왕이 또 선생께 명하여 민지(閔漬)의 지은 바 「본조편년강목(本朝編年綱目)」에 궐루(闕漏)가 많다 하여 개찬케 하고 또 명하여 충렬, 충선, 충숙 3조의 실록을 편찬케 하였었다.

 

충목왕의 뒤에 충정왕이 즉위하여 3년에 훙(薨)한지라. 그때에 공민왕이 원도에 있어 왕위를 계승하였는데 본국에 돌아오기 전에 선생을 배(拜)하여 우정승을 삼고 동정성사(東征省事)를 권단(權斷)케 하니 선생이 고사하되 허락치 아니하고 또 도첨의정승(都僉議政承)을 배하거늘 선생이 부득이 행공(行公)하여 법사(法司)로 하여금 제도(諸道)를 고핵(考覈)7)하여 백성의 질고(疾苦)를 묻고 공과(功過)를 안렴(按廉)하고 현준(賢俊)을 등용하고 간신을 유찬(流竄)하여 정령(政令)을 밝히니 왕이 원에 머물러 있은 지 수개월에 나라가 공허하였으나 선생의 조처가 마땅한 것을 얻으므로 사람들이 힘입어 편안하였다.

7) 고핵(考覈): 생각해서 조사하여 밝힘.

 

그때에 조일신(趙日新)이라는 권신이 있어 왕을 옹립한 공을 빙자하여 포횡교자(暴橫驕恣)하여 선생의 직위가 자기 위에 있는 것을 시기하거늘, 선생이 왕께 여쭈되

“신이 늙고 병들어 감히 정승의 직에 거하지 못하겠다.”

하니 왕이 허락치 아니하거늘 또 표를 올려 고사하였다.

 

그해 겨울에 조일신이 불령의 무리를 모아 밤에 궁중에 들어가서 그가 미워하고 꺼리는 사람을 다 살해하였는데 선생은 마침 사직하고 집에 있으므로 그 화망(禍網)에서 벗어났다. 그 후에 일신이 주(誅)에 복(伏)하매 왕이 선생을 일으켜 우정승을 삼고 순성직절문덕찬화공신(純誠直節門德贊化功臣)의 호를 주었다.

 

선생이 71세 되던 정유년에 본직으로 치사하고 사제(私第)에 한거(閑居)하여 객을 대하여 술을 놓고 고금을 商論하여 미미히8) 게으르지 않고 나라의 대정(大政)이 있을 때에는 왕이 반드시 사람으로 하여금 자문하여 결정하고 혹시는 선생을 궁중에 인견하여 경사(經史)를 강론하고 치도(治道)를 방문하매 선생이 충정을 다하여 간곡히 진주(陳奏)하니 왕이 더욱 경중(敬重)히 여기었다.

8) 미미히:열심히 노력하여.

 

이후로부터는 선생이 저서에 착수하여 국사(國史)를 편찬하고 「금경록(金鏡錄)」을 찬하고 또 「기년전지(紀年傳志)」를 고쳤는데 그후 홍건적(紅巾賊)의 난에 다 분실하고 말았다.

 

공민왕 11년 임인에 홍건적이 경성을 함몰하매 御駕가 남천(南遷)한지라. 선생이 75세의 노령으로 왕을 상주(尙州)에 분문하고 눈물을 뿌리고 탄식하여 가로되

“금일의 파천이 당(唐) 현종(玄宗)의 녹산(祿山)의 난을 피함과 어찌 다르리오.”

하고 인하여 가마를 호(扈)하고 청주에 이르렀었다. 적이 평정되매 선생이 여러 재상을 거느리고 왕께 여쭙되

“송도(松都)는 종묘(宗廟)가 있은즉 국가의 근본이니 속히 환가(還駕)하여 民望을 위로하소서.”

하니 왕이 그 말을 좇아 곧 환가하였다.

 

공민왕이 신돈에게 미혹하여 국정의 문란함이 많은지라, 선생이 왕께 여쭙되

“신이 일찌기 신돈을 한번 본즉 그 골법(骨法)이 흉인이라 반드시 후환을 끼칠 것이니 가까이하지 말라.”

하였더니 신돈이 이로 인하여 선생을 백방으로 무함(誣陷)하였으나 그 연고덕소(年高德邵)하여 평일에 중망(重望)을 지고 있으므로 가해치 못하였다. 신돈이 패하매 왕이 가로되

“이익재의 선견지명은 가히 미칠 수 없다.”

하였다.

 

공민왕 16년 정미 선생이 81세의 고령으로 병몰(病沒)하니 시(諡)를 문충공(文忠公)이라 하고 공민왕 묘정에 배향하였다.

 

외사씨(外史氏) 왈

“이익재의 일생은 극히 다사다난한 시대이다. 국약주소(國弱主少)하므로 원의 압제는 날로 심하여 국왕의 여탈폐립(與奪廢立)이 다 그 손에 달렸고 겸하여 간세(奸細)의 무리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본국과 원나라 사이에 참간(讒間)이 성행하여 상·하가 위구(危懼)하여 영일이 태무(殆無)하였다. 선생이 이때를 당하여 단단한 정충(精忠)으로 6조를 역사(歷仕)할새 그의 신고처참(辛苦悽慘)한 것은 무엇이라 말할 수 없다. 혹은 적충(赤忠)을 다하여 충선왕을 만 리에 분문하기도 하고 혹은 문장을 발휘하여 원조와 교섭하여 국난을 막기도 하고 혹은 만난을 무릅쓰고 서촉(西蜀)과 강남을 답파하여 견식을 넓히기도 하고 혹은 지모를 다하여 군덕을 보도하기도 하고 혹은 기강을 세워 서정을 정리하기도 하였었다. 이러한 가운데 선생의 평생 대절(大節)은 조금도 굽힘이 없고 심사(心事)가 청천백일과 같아서 누구나 경앙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백세(百世) 뒤에 선생의 유풍(遺風)을 듣는 자는 그 흥감함이 과연 어떠한가?”

9) 참간(讒間):교우(交友), 군신 등의 사이를 헐뜯어 이간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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