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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고려-최영(崔瑩)

구글서생 2023. 5. 8. 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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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최영(崔瑩)

 

김상기(金庠基)

1901~1977. 사학가, 문학박사. 호 동빈(東濱). 전북 김제 생.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사학과 졸업. 서울대 교수, 국사편찬위원, 독립운동사 편찬위원, 학술원 회원 등을역임,

저서에 「동학과 동학란」, 「동방문화사교류농고」, 「고려시대사」, [중국고대사강요(中國古代史綱要)」, 「동양사기요(東洋史記要)」 등이 있음.

 

본문의 ‘×, ×왜적, 왜구의 표기인 바, 당시 시대 상황(일제시대)에 의한 표기임.

 

최영은 말기 고려조의 지주로서 왕조의 운명은 그의 두 어깨에 지워 있었다. 그러한만큼 그의 사적은 여말 역사의 대부분에 긍하는 것이며 여말역사는 그의 개인사(個人史)의 전부인 감이 있다. 그러므로 이하 몇 가지 조항으로써 그의 사적의 경개를 적어 볼까 한다.

 

최영은 여조에 있어 소위 교목세가(喬木世家)1)의 출신이다. 개국공신 준옹의 후예로서 유청(惟淸)의 5대손이요, 옹(雍; 충렬왕조의 문신)의 손이며 사헌규정(司憲糾正) 원직(元直)의 아들이니 충숙왕 3년(1316)에 출생하였다. 그는 풍자(風姿)가 괴위(魁偉)2)하고 여력(膂力)3)이 과인하여 처음에 무사로서 양광도도순문사(楊廣道都巡問使)의 휘하에 속하여 여러번 ×적(賊)을 금토(擒討)4)하여 공을 세워 용명을 날렸으며 공민왕 원년 9월에 조일신(趙日新)이 난을 일으켜 국왕을 협제(脅制)할 제 최영은 안우(安祐), 최원(崔源) 등으로 더불어 조일신 일당을 주멸(誅滅)하여 호군(護軍)으로서 출세하게 되었다.

살필 규

1) 교목세가(喬木世家):여러 대를 중요한 지위에 있으면서 나라와 운명을 같이하는 집안.

2) 괴위(魁偉):크고 위대함.

3) 여력(警力):체력.

4) 금토(擒討):사로잡고 토벌함.

 

 

1. 대륙 원정과 홍적격퇴

 

공민왕 3년에 최영은 대호군(大護軍)으로서 유탁(柳濯), 염제신(廉悌臣) 등과 같이 정병 2천을 인솔하고 원에 부원(赴援)하였으니 당시 원의 세력은 이미 쇠퇴하여 각지에서 군웅(群雄)이 봉기하였다. 방국진(方國珍)은 절동(浙東)에서, 한산동(韓山童)·유복통(劉福通)은 하남(河南: 이 도당을 홍두적 또는 홍적이라 부름)에서, 장사성(張士誠)은 산동고우(山東高郵)에서, 서수휘(徐壽輝)는 강서(江西)에서 각각 난을 일으켜 원의천하는 혼란상태에 빠졌다.

이에 원의 승상(丞相) 탈탈(脫脫)은 스스로 대군을 일으켜 장사성을 칠새, 고려에 향하여 원병을 청한 것이다. 그리하여 고려군이 전봉(前鋒)이 되어 고우를 공격하여 전후 27전에 많은 전과를 거두고 다시 육합(六合城; 강소성 육합현)을 공취(攻取)한 후 회안로(淮安路) 방어에 당하여 팔리장(八里莊), 사주(泗州), 화주(和州) 등지에서 격전을 거듭하였으며 회안성에서 고려군이 적선(賊船) 8천여 소(艘)에 포위되었을 때에 최영은 몸에 수창(數槍)을 입으며 분격하여 거의 그것을 섬멸하였다.

 

이와 같이 용명을 대륙에 떨치고 돌아온 후에 동 5년에는 인당으로 더불어 압록강 서(西)의 8참(八站)을 공취하여 대륙에의 요충을 확보하고 그 익년에 대장군으로 서해(西海), 평양, 니성(泥城;昌城), 강계체복사(江界體覆使)에 취하였다.

동 8년 11월에 이르러 3천의 홍두적이 압록강을 넘어들어 표략(剽掠)5)을 행하고 돌아간 다음에 12월에는 홍두적의 거괴(巨魁) 모거경(毛居敬)이 대거 침입하여 (4만의 무리라 함), 의주(義州), 정주(靜州 ; 의주 부근), 인주(麟州;同上)를 유린하고 서경(西京)을 공함(攻陷)할새 당시 최영은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로서 이암, 경천흥(慶千興) 등 제장(諸將)으로 더불어 생양(生陽;中和), 철화(鐵和; 평양부근), 서경, 함종(咸從) 사이에서 적을 요격하여 자못 공을 세웠었다.

5) 표략(剽掠): 협박하여 빼앗음.

 

다시 동 10년 10월에 10만이라 호(號)하는 홍두적이 물밀듯이 침입하여 송경까지 돌입한 후에 잔학을 자행하였다. 익년 정월에 최영이 안우, 이방실(李芳實) 등으로 더불어 적을 크게 격파하고 경도(京都)를 수복하여 일등훈(一等勳) 도형벽상(圖形壁上)에 전리판서(典理判書)가 되었다.

 

 

2. X() 擊攘

 

X구는 여조(麗朝) 쇠망의 한 원인이라 할 만큼 그의 침해는 매우 잔혹하여 연해 일대가 오랫동안 소연(騷然)하던 것으로서 최영과 같은 이도 일생 동안 이의 소탕에 종사하였던 것이다.

 

최영이 처음에 양광도순문사 휘하로서 용명을 날리기도 이 X구 격파로 인한 것이거니와 공민왕 7년경에 이르러는 X구의 세가 더욱 창궐하므로 4월에 최영은 양광전라도 적(賊)체복사가 되어 오예포(長淵)에서 400여 소를 격파하여 다대한 타격을 주었으며 동 14년 3월에 X구가 교동(喬桐), 강화(江華)를 침략하매 최영이 동서강도지휘사(東西江都指揮使)로 동강(東江)에 진수(鎭守)하다가 신돈의 참언(言)으로 인하여 계림윤(鷄林尹)에 파천되었다.

 

동 20년에 소환되어 다시 찬성사(贊成事)가 되었더니 22년경에 이르러 X구의 환(患)이 갈수록 치열하매 최영이 6도도순찰사로 그에 당하였다.

그는 군호(軍戶)를 점적(點籍)6)하고 전함을 건조할새 군정(軍政)을 숙청키 위하여 장수, 수령의 불량한 자를 출척(黜斥)하고 군수(軍需)를 보충키 위하여 연령 70 이상자에 대하여도 미곡을 거두는 등 방비 강화에 노력하였으나 이로 인하여 민원이 또한 일어나기도 하였다.

6) 점적(點籍): 조사함.

 

우왕 2년 7월에 ×구가 연산(連山) 개태사(開泰寺)를 무찔러 원수(元帥) 박인규(朴仁珪)가 패사(敗死)하매 이에 최영이 출정하기를 자청하니 우왕은 그의 연로함을 염려하여 만류하려 하였으나 최영은 X구를 지금에 제압하지 아니하면 후일에는 도(圖)키 어려운 것과 다른 장수는 필승을 기(期)키 어려우며 사졸도 평소부터 훈련한 것이 아니면 공을 거두기 어렵다는 것을 들어 굳이 출정을 원하였다. 그리하여 왕의 윤허를 얻자 그는 당일로 발정(發征)하여 남으로 향하였다. X구는 깊이 오지에 침입하여 연산으로부터 홍산(鴻山)에 이르러 살략을 자행하여 형세 자못 성하던 것이니, 최영은 홍산에 이르러 먼저 험요(險要)한 곳을 점거하고 진격을 개시할새 제장이 외축(畏縮)하여 나아가지 못하는지라, 최영이 사졸에 앞서 전진하여 적을 제압하였다. 그때에 적의 일시(一矢)가 최영의 입술에 명중하여 선혈이 임리(淋漓)7)하였으나 그는 신색(神色)도 변치 아니하고 유유히 쏘아 그 적을 거꾸러뜨린 다음에 비로소 박힌 화살을 뽑으며 더욱 분전하여 적을 섬멸하였다.

7) 임리(淋漓):피 또는 땀 같은 것이 뚝뚝 떨어지는 모양.

 

이것이 유명한 ‘홍산싸움’으로서 X구도 이로부터 최영을 백수 최만호(白首 崔萬戶)라 하여 심히 무서워하였다.

 

우왕은 격전의 광경을 그린 <홍산파진도(鴻山破陣圖)〉에 이색(李穡)을 명하여 도찬(圖贊)을 짓게 하고 최영에게 시중(侍中)을 제수하려 하였으나 그는

“시중이 되면 가벼이 출정치 못하는 것이니 ×구를 평정한 후에 주소서.”

하고 굳이 사양하였으므로 철원부원군(鐵原府院君)을 봉하였던 것이다.

 

당시 강기(綱紀)가 극도로 문란하고 인심이 해이하여 X구의 화를 더욱 입게 되던 것이니 동 3년 3월에 X구가 밤을 타가지고 착량(窄梁)에 돌입하여 전함 50여 소를 불사르고 사자(死者) 1천여 인을 내었으며 다시 강화로 들어가 무난히 살략을 감행하였다. 이는 착량 방비에 당하고 있던 만호(萬戶) 손광유(孫光裕)가 최영의 절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술에 취하여 자는 동안에 불의의 습격을 받아 일어난 사건이며 강화 만호 김지서(金之瑞)도 싸우지 아니하고 달아난 결과, 강화 일대가 소연(蕭然)케 된 것이다. 그때에 또 경상도 원수 김진(金鎭)도 ‘소주도(燒酒徒)’라는 별명을 받으며 군정을 돌아보지 않고 일도(一道)의 명기(名妓)를 모아 휘하로 더불어 감음(酣飮)8)을 일삼다가 일차 X구가 이르매 창황히 단기(單騎)로 도주하여 대패를 입은 일이 있었다.

8) 감음(酣飮): 한창 흥겹게 술을 마심.

 

이러한 것을 볼 때에 최영은 눈물을 흘리며 통탄하고 이러한 무리를 군율로써 베고자 하나 천살(擅殺)9)의 혐의를 또한 피하지 아니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우왕은 도리어 법을 굽혀 앞서 최영의 주장으로 옥에 가두었던 손광유를 석방하고 유배시켰던 김진에게 의마(衣馬)까지 사여(賜與)하려 하매 최영은 정형(政刑)이 壞亂됨을 한탄하며 상벌이 전도되는 것을 극히 간(諫)하였다.

9)천살(檀殺):제멋대로 죽임.

 

때에 마침 한발이 심하므로 널리 국내 제사(諸寺)에서 기우를 행하거늘 최영은 도당(都堂)에서

“지금 정형이 문란하여 공이 있는 자를 상(賞)치 아니하고 죄 있는 자를 벌하지 아니하니 하늘이 어찌 비를 주랴.”

하고 시정(時政)에 대하여 중인(衆人)에게 통절히 한탄하였다 한다.

 

최영이 6도도통사(六道都統使)로 드디어 근기(近畿)10) 연안을 횡행하던 ×구를 물리친 다음에 근기의 요충인 강화, 교동의 방비를 강화하기 위하여 왕께 주청하여 호족(豪族)이 점거한 도내(島內)의 사전(私田)을 걷어 군량에 충당하고 장정과 군졸을 증파하여 그곳에 둔수(屯戍)케 하였다.

10) 근기(近畿): 서울에서 가까운 곳.

 

동년 5월에 이르러 우왕은 송도가 해안에 가까와 X구의 화를 입기 쉬운 곳이라 하여 철원에 이도(移都)할 계획을 세웠으나 이에 대하여 최영은 오지(奧地)에 천도하면 더욱 海寇의 기유(覬覦)하는 마음을 일어나게 하여 국세가 일축(日蹙)11)될 것과 인민을 소요케 하고 농사에 방해되는 것을 들어 반대하고 징사고수(徵師固守)의 책(策)을 주장하여 천도의 의(議)를 침식(寢息)케 하고 다시 송도의 방비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내성(內城)의 축조를 주청하였다.

11) 일축(日蹙): 날로 줄어듦.

 

그 익년 4월에 X구는 또다시 착량에 집중하여 승천부(昇天府; 豐德)에 치밀어 장차 경도에 침구할 것을 성언(聲言)하매 중외(中外)의 인심이 흉흉하였다. 송도 일대를 계엄(戒嚴)하고 제군(諸軍)을 동서강(東西江)에 배치한 다음에 최영이 해풍(海豐)에 진을 치고 제군을 제독(提督)할새 적은 최영의 군만 격파하면 경도를 가히 엿볼 것이라 하여 해풍에 직충(直衝)하였다. 최영은 사직의 존망이 이 일전에서 결(決)할 것이라 하여 적봉(賊鋒)에 당하였으나 일시(一時)는 형세가 자못 불리하였다.

 

그러나 이성계(李成桂;이태조의 前諱), 양백연(楊伯淵) 등으로 더불어 合擊하여 거의 적을 섬멸하고 안사공신호(安社功臣號)를 받았으며 동 6년에는 최영이 해도도통사(海道都統使)를 겸하여 X구에 비(備)하려 제장으로 더불어 동서강에 출(出)할새 마침 병이 발하였다. 제장은 그의 병을 염려하매 그는

“장군이 군사를 이끌고 밖에 나가매 어찌 병을 염려하랴.”

하며 또 약을 권하니 그는

“내 이미 늙은지라, 생사가 명(命)이 있거니 어찌 반드시 약을 먹어 생(生)을 구할 것이 있느냐.”

하고 물리쳤다 한다.

 

오랫동안 X구의 화를 입어 국내 각지 특히 경상, 강릉(강원), 전라 3도의 인민은 업(業)을 잃고 기사(飢死)하는 자가 많았다. 최영은 제도(諸道)에 명하여 '시여장(施與場)’을 베풀어 자량(慈良)한 자를 택하여 주관케 하고 관미(官米)로써 미죽(糜粥)12)을 지어 모맥(牟麥)13)이 익을 때까지 진휼(賑恤)케 하고 특히 농월(農月)의 민폐를 생각하여 전함을 건조하는 데 승도(僧徒)를 많이 모용(募用)하였다.

12) 미죽(糜粥):.

13) 모맥(牟麥):밀과 보리.

 

그리하여 거함 130여 척을 지어 각지의 요해(要害)를 분수(分守)하는 등 ×구 방비에 노력한 결과 우왕 9년경에 이르러서는 그의 화가 점점 적어지게 되었다.

 

 

3. 내란의 감정(戡定)14)

14) 감정(戡定):난리를 평정함.

 

말기 고려에는 외구와 아울러 내환이 속발(續發)하여 동치서분(東馳西奔)하던 최영으로도 응수(應酬)에 겨를치 못하였다. 앞서 공민왕 원년의 조일신의 난도 최영의 손으로 진정되었거니와 동 12년 윤3월에 평장사 김용(金鏞)이 그의 일당을 사주하여 난을 일으켜 흥왕사(興王寺) 행궁(行宮)을 공위(攻圍)할 때에 최영이 급보를 듣고 우제, 안우경(安遇慶), 김장수(金長壽) 등으로 더불어 그것을 격파하여 일등훈(一等勳)에 진충분의좌명공신(盡忠奮義佐命功臣)의 호를 받고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로, 다시 평리(評理)에 승진되었다.

 

김용의 난에 뒤를 이어 다시 덕흥군(德興君 ; 충선왕의 서자로 원에 歸附한 자) 사건이 일어났으니 이 사건은 김용의 난과도 관계가 있었던 듯하다. 애초에 최유(崔濡)라는 자가 몽고에 반부(反附)15)하려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바 고려에서는 공민왕의 배원책(排元策)이 노골화하여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永興)와 임토(林土;벽동), 니성(泥城) 등 구강(舊疆)을 회수하고 특히 원 순제(元順帝)의 후(后) 기씨(奇氏;고려인) 일족의 전횡이 심하므로 기철(奇轍) 등을 주륙(誅戮)하였다.

15) 반부(反附): 돌이켜 부합함.

 

이에 최유는 공민왕을 원망하는 기후(奇后)를 달래어 공민왕의 대(代)로 덕흥군을 세우기로 하고 미리 김용과도 연락을 취하였던 듯하다. 그리하여 김용이 몰락되매 최유는 그 익년 정월에 원병(元兵) 1만으로 덕흥군을 끌고 본국에 침입하였다. 이에 최영은 도순위사(都巡慰使)로 정병을 인솔하고 안주(安州)에 부(赴)하여 제장으로 더불어 적을 달구(獺ㅁ;安州)에서 대파하여 둔주(遁走)케 하였다.

 

다음 최영은 제주의 목호(牧胡; 몽고인)를 토멸하여 제주의 주권을 완전히 회복한 것이니 원래 여·몽 양국의 관계가 친밀케 된 후로 몽고는 제주도에 목장을 열어 말을 길러 왔었다. 이 목마(牧馬)하는 몽고인, 즉 목호는 본국의 세력을 믿고 자못 방자한 행동을 하여 오던 것으로서 공민왕23년 4월에 명으로부터 제주의 목마 2천 필을 요구한 데 대하여 목호합적(牧胡哈赤), 석질리필사(石迭里必思), 초고독불화관음보(肖古禿不花觀音保) 등은 다만 300필밖에 진송(進送)치 아니하여 명사(明使)의 감정을 상함에 이르렀다.

 

이에 전부터 목호를 괘씸히 보아 오던 터이라 단연히 토벌을 행하기로 하여 동년 7월에 최영이 양광전라경상도도통사가 되어 염흥방(廉興邦), 변안열(邊安烈), 임견미(林堅味), 지윤 등으로 더불어 전함 314소에 사졸25, 600인을 거느리고 출정하였다. 8월에 나주(羅州) 영산(榮山)에서 열병(閱兵)을 행하고 최영은 각군과 규율을 정할새 자기는 왕명을 받았으니 자기의 말이 곧 왕의 말이니 자기의 명령에 절대로 복종할 것을 약속하고 검산곶(黔山串)으로부터 일제히 돛을 들어 풍파를 무릅쓰고 추자도(楸子島)를 거쳐 제주에 이르러 부서(部署)를 정한 다음에 사면으로 분공(分攻)할새, 먼저 제주의 토관군민(土官軍民)에 대하여 안도할 것을 포고하고 명월포(明月浦)에 나와 3천여 기(騎)로 거적(拒敵)하는 적괴(賊魁) 등을 좌우로 분격하여 크게 적을 무찌르며 추격하여 한라산 남(南)의 호도(虎島)에 몰아넣고 최영이 스스로 정병(精兵)으로써 진격하매 석질리필사는 출항(出降)하고 초고독불화관음보는 단애에 투신하여 자살을 하였다. 다시 동도(東道)의 합적(哈赤), 석다시만(石多時萬), 조장홀고손(趙莊忽古孫)등의 잔적을 섬멸하여 말 1천 필의 다대한 노획을 얻었다. 이때에 최영은 군율을 엄하게 한 결과 삼군(三軍)이 전율하여 추호라도 범하는 자가 없었다. 동년 10월에 반사(班師)16)하매 공민왕이 이미 붕거(崩去)한지라, 최영은 재궁(梓宮)17)에 나아가 복명을 하였던 것이다.

16) 반사(班師): 군사를 이끌고 돌아감.

17) 재궁(梓宮):임금의 관. 재는 가래나무. 임금의 관은 가래나무로 만듦.

 

 

4. 정치상의 행적

 

최영은 열혈적 남아로서 용강충직(勇剛忠直)하고 청검불구(淸儉不苟)의 정신으로써 국정에 당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강기는 너무나 문란하였고 정치는 흐려진 지 이미 오랜지라, 직정경행(直情徑行)18)하는 최영의처단에는 자못 지나친 점이 있을 것도 면치 못할 바이다. 그러나 강기를 다시 진작하고 국정을 쇄신하여 암약(暗弱)한 우왕을 도와 사직을 편안케 하려던 것이 그의 단단한 일념이었다. 우왕은 본래 암약한 위에 유행(遊幸)과 출렵(出獵)을 즐겨하였던 것이니 이에 대하여 최영은 눈물을 흘려가며 간하여 자주 우왕을 감동시켰다.

18) 직정경행(直情徑行): 생각나는 대로 숨기거나 꾸밈 없이 행동으로 나타내는 일.

 

동왕 14년에 왕은 최영의 딸을 비(妃)로 맞으려 하매 최영은 자기의 딸이 누추할 뿐만 아니라 초부19)의 소출(所出)도 아니므로 지존(至尊)에 배(配)할 것이 되지 못하니 만일 굳이 드리고자 하면 자기는 삭발하고 산에 들어가겠다고 울며 사양을 하였다.

19) 초부:초례로 맞은 부인. 그의 딸이 서출이라는 말

 

그러나 우왕은 드디어 그의 딸을 맞이하여 영비(寧妃)로 봉하였나니 최영이 그와 같이 고사한 것은 국정에 당하여 외척의 혐의를 피하려는 데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한다.

 

최영은 천성이 청렴결백하여 국가에서 사여하는 공전(功田)도 사양하고 받지 아니하므로 전민(田民)을 상사(賞賜)하는 대(代)로 철권(鐵券)20)을 사하였던 일도 있거니와, 우왕이 일찌기 전토(田土)를 사하매 그는 국가의 창름(倉廩)21)이 비었다 하여 받지 아니하고 스스로 미곡을 내어 군량을 보족(補足)하기도 하였다.

20) 鐵券: 임금이 공신에게 나누어 주는 훈공을 기록한 서책. 이는 영원불변의 중서임을 뜻함.

21) 창름(倉廩):곳집. 창고.

 

그러나 당시 집정한 재추(宰樞)와 일반 관헌은 거의 인민을 침탈하여 사복(私腹)을 채우는 무리인지라, 최영은

“집정이 이(利)를 즐겨 적악(積惡)을 하여 스스로 화패(禍敗)를 재촉하니 노부(老夫)가 장차 어찌하랴.”

고 탄식도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때로 도당에서 그의 폐해를 통론하고 여러 재상과 서로 금약(禁約)을 맺은 일도 있으며, 일찌기 역신(逆臣) 김용을 벤 뒤에 김용이 가졌던 묘아안정주(猫兒眼精珠)를 들여 도당 일좌가 돌려 가며 구경할 제 홀로 최영은 돌아도 보지 않고

“용의 뜻은 이따위 물건이 상(喪)하게 한 것이거늘 제공(諸公)은 무엇을 구경하는가.”

하였다.

얼마나 개결(介潔)한 말이냐.

 

그리고 그는 우왕 14년에 왕을 움직여 임견미, 염흥방 등을 베고 이인임(李仁任)을 경산부(京山府;星山)에 유배시킨 것도 그들이 탐학무도하여 인민을 침탈하고 국정을 탁란(濁亂)케 한 까닭이거니와, 이 임·염에 대한 처사는

“일생의 과혹(過酷)한 일이라”

고 최영 자신도 자못 뉘우친 바이다.

 

이상으로 국정에 관한 최영의 염결(廉潔)한 자취를 들었거니와 법형(法刑)에 있어서도 가차가 없었다. 일찌기 그의 질서(姪壻) 안덕린(安德麟)이 살인죄를 범하였을 때에 도당에는 최영의 관계를 고려하여 안의 죄를 경(輕)히 하고자 최영이 판리(判理)하는 순위부(巡衛府)에 이계(移繫)케 하였더니 최영이 크게 노하여 살인한 자는 마땅히 헌사(憲司)에서 처단할 것이라 하여 헌사로 돌렸으며 우왕의 유온(乳媼)22) 장씨가 재상을 참소(讒訴)하여 음해코자 하매 감연히 일어나 장씨의 제거를 강행하였으니 이는 최영이 아니고는 행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22) 유온(乳媼):유모.

 

우왕시대에 경도의 물가가 등귀하여 상고(商賈)들은 폭리를 다투었다. 최영은 이 같은 간상배(奸商輩)를 탄압키 위하여 市物은 먼저 경시서(京市署)로 하여금 가격을 정하고 세인(稅印)을 표시하여야 비로소 매매를 허하되 만일 인표가 없는 것을 파는 자는 척근(脊筋)을 꿰어 죽이기로 하고 대구(大鉤)23)를 저자 위에 걸어 市人을 공포케 하였다.

23) 대구(大鉤): 갈고리.

 

그리하여 이 정책은 마침내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던 것이나 그의 국정에 대한 열의는 십분 엿볼 수 있다.

 

 

5. 요동 공벌(遼東攻伐)

 

여말의 대륙관계는 매우 복잡미묘한 바가 있었다. 대륙에는 원(元)이 이미 쇠퇴하고 신흥의 주명(朱明)이 세력을 떨치매 공민왕은 국내로부터 원의 세력을 배제하며 북방의 강역을 회수하는 등 소위 배몽(排蒙)정책을 취하는 동시에 일면으로는 명과 통화책(通和策)을 취하였다. 이리하여 국내에서는 소위 향명파(向明派; 정몽주, 박상충, 정도전 등)까지 생김에 이르렀다. 그러나 공민왕 23년에 명사(明使;徵馬의 목적으로 온 것) 채빈(蔡斌) 등이 돌아갈 때 그를 호송하던 김의(金義)가 중도에서 채빈을 살해하고 마필을 빼앗아 가지고 북원(北元 : 몽고)에 달아난 사건이 일어난 후로 명의 태도는 자못 까다롭게 변하여 위압을 가하려 하였다. 그리고 우왕 13년에 요동으로부터 돌아온 자가

“명제(明帝)는 장차 처녀, 수재, 환자(宦者) 각 1천, 우마(牛馬) 각 1천을 요구하려 한다.”

고 보(報)하며 이에 대하여 도당에서는 모두 근심을 하였으나 최영은

“이같이 할진댄 병을 일으켜 치는 것이 좋다.”

고 주장하였다.

 

고려에서는 처음부터 대명(對明) 국교에 자못 성의를 보여 왔으나 명의 태도가 이와 같이 까다로와지매 조정에서는 최영을 중심으로 배명렬(排明熱)이 점점 높아지게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에 동 14년 2월에 설장수가 명으로부터 돌아와 명의 ‘통빙(通聘) 거절’과 ‘원에 속하였던 철령 이북의 땅은 요동에 속할 것이라’는 요구를 보하매 최영은 우왕께 권하여 비밀히 요동 공벌의 계획을 세웠더니, 다시 명의 철령위(鐵嶺衛) 건설의 보가 들어오자 최영은 8도의 병을 징집하여 동교(東郊)에서 열병하고 우왕은 요양(遼陽) 공격의 명을 내렸다.

 

이에 대해 이성계(여진의 三善, 三介,胡拔都 등과 北元의 納哈出과 X寇를 격파하여 큰 공을 세워 당시 최영과 어깨를 겨눌 만한 위세를 가졌다)는 여러 가지 이유를 붙여 출사(出師)의 불가함을 술(述)하였으나 최영은 왕에게 타언(他言)을 듣지 말 것을 권하여 요동 공벌을 단행함에 이르렀다.

 

이와 동시에 최영은 배후(裵厚)를 북원에 보내어 요동 협격(挾擊)을 약속하였으며(이에 앞서 북원에서도 定遼衛협격을 청하여 온 일도 있었음) 또 그때에 명의 요동병이 거의 다 북원 정벌에 부하여 요양 방비가 소루(疎漏)하다는 정보도 있었으므로 최영은 요동 정벌에 자못 자신을 가졌던 것이다.

 

4월에 우왕이 평양에 나아가 그곳으로 여러 도병(道兵)을 집중하고 승도(僧徒)를 소집하여 군에 충당하는 동시에 대호군 배구(裵矩)를 시켜 압록강에 부교(浮橋)를 가설케 하였으며, 최영을 8도도통사로 하여 조민수(曺敏修)로 좌군도통사, 이성계로 우군도통사를 삼아 5만 대군으로 진격케 하고 우왕은 최영으로 더불어 평양에 유주(駐)하여 지휘에 당하였다.

 

이성계, 조민수는 위화도(威化島; 압록강 중)에까지 가서 다시 회군하기를 주청해 보았으나 청허(聽許)가 되지 아니하매 야심을 품고 있던 이성계는 이에 최대의 결심과 용단으로써 회군을 천행(擅行)하여 창머리를 거꾸로 대군을 끌고 돌아섰으니 이것이 유명한 위화도회군이라는 획기적 대사건이다.

 

도수(徒手)로 평양에 머무르던 우왕과 최영은 크게 낭패하여 송경으로 분환(奔還)하였으나 제군은 급히 추급(追及)하여 서울에 들어와 국왕과 최영을 포위하였다. 불의의 변을 당한 최영은 최후를 각오하고 울음으로 작별하는 우왕께 하직하면서 조용히 사로잡혔다. 그리하여 최영은 바로 고봉(高峰;高陽)에 유배되고 인하여 우왕도 강화로 폐출되었으니 이것이 여조 최대의 비극이며 최후의 운명이었다.

 

위화도회군은 이러한 결과를 맺은 것으로서, 이로부터 이씨의 신흥세력은 욱일승천의 세를 보여 드디어 왕조를 앗은 것이다. 요동 공벌이 이와 같은 결과를 나타낸 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것이나, 그중에도 가장 큰 원인으로는 국가의 주석(柱石)인 최영이 대군을 이성계에게 맡기고 도수로 평양에 처져 있던 것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백전노장인 최영은 처음부터 삼군을 지휘하며 출정코자 하였더니 암약한 우왕은 신변의 불안을 염려하여 최영을 놓지 아니하고 전선에까지 동행하려 하므로 할 수 없이 평양에 주저앉게 된 것이며, 그리고 최영은 원래 자신이 강한 사람으로서 모든 일을 자기를 표준으로 생각하던만큼 교목세신인 그의 마음을 미루어 이씨의 회군이라는 것은 몽상치도 못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세심한 최영은 일면에 있어 출정 원수를 견제키 위하여 그들의 처자를 수감하려는 계획까지 품었었으나 질풍신뢰(疾風迅雷)와 같은 이씨의 행동에 미처 거기에까지 손을 돌리지 못하였다 한다.

 

여하튼 이 사건은 최영의 천고유한(千古遺恨)일 뿐만 아니라 대외적으로 보아 조선사상의 일대 통한사(痛恨事)라 할지니, 최영이 요동 공벌을 일으킨 것도 사대자(事大者)류의 논조와 같이 조략광망(粗略狂妄)24)의 거(擧)가 아니라 대륙 원정의 경험을 가진 그로서는 자기나 이성계의 용병에 몽고와도 연락이 되면 십분 성공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던 듯하다.

24) 조략광망(粗略狂妄):조잡한 계략과 몹시 간략하여 보잘것이 없고 망령되어서 이치에 맞지 않음.

 

최영의 일생을 개관하여 보면 출장입상(出將入相)에 오직 충직강의의 정신으로 기울어져 가는 여조를 지탱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공사(公私)에 있어 세인을 경복(敬服)케 하는 바가 많았으니 용병에 있어서도 특히 군율을 엄히 하여 필승을 기하므로 사졸이 일보만 퇴각하여도 그것을 베어 삼군을 경계하였다. 그리하여 대소백전(大小百戰)에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으며 시석(矢石)이 교비(交飛)하는 전진(戰陣) 중에도 신기(神氣)가 안한(安閑)하여 조금도 두려워하는 빛이 없는 용장이었다.

 

그러나 일방으로 군마공총25)한 사이에도 왕왕히 시가를 읊조려 낙을 삼았다 하니 유장((幽壯)한 그의 정서를 또한 엿볼 수가 있다.

25) 군마공총:군대일에 바쁨.

 

그리고 그의 청백하고 염결(廉潔)한 행사는 위에서도 적었거니와 이는 그의 천성에서 나온 바이다. 16세 때에 그의 부친으로부터 “금 보기를 돌과 같이 하라”는 유계(遺戒)를 받고 일생동안 그 말을 지켰다 한다. 그리하여 산업에 뜻을 두지 않고 누애(陋隘)26)한 집에 의식이 자주 결핍하나 편안히 처하며 호화를 일삼는 자는 돈견(豚犬)만치도 보지 아니하였다.

26) 누애(陋隘):누추하고 좁음.

 

그러므로 당시 재상들은 다투어가며 서로 요청(邀請)27)하여 진수(珍羞)를 베풀어 사치를 자랑하나 홀로 최영은 손을 맞이할 제 해가 저물어야 나물밥을 내므로 주렸던 손들은 그나마 달게 먹으며

“철성(鐵城君號)의 음식은 매우 맛이 있다”

하니 최영은

“이도 또한 용병의 술(術)이다”

하고 웃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27) 요청(邀請): 청하여 맞아들임.

 

그는 최후로 형을 받을 때에

“내가 만일 탐심(貪心)이 있었다면 무덤 위에 풀이 날 것이요 그렇지 않다면 풀도 나지 아니하리라.”

하더니 그의 무덤(高陽 大慈山)은 과연 한 줌의 떼도 나지 아니하여 붉게 벗어졌으므로 속칭에 홍분(紅墳)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는 최영의 묘에 토피(土皮)가 벗어져 풀이 없는 것을 그의 염결한 데에 부회(附會)하여 생기게 된 말이려니와, 그의 청렴한 것은 후세에까지 전하는 바이다. 그러나 일방에 있어 그의 호장(豪壯)한 정신은 무사의 기상을 그대로 나타내던 것이 있나니 그의

“녹이상제 살찌게 먹여 시냇물에 씻겨 타고

용천설악을 들게 갈아 둘러메고

장부의 위국충절을 세워 볼까 하노라”

는 노래라든지

“삼척 검두로 사직을 안전히 하고(三尺劍頭安社稷)”

라는 이성계의 창구(唱句)에

“한 가지의 채찍으로 천하를 평정하네(一條鞭末定乾坤)”

이라 한 그의 댓구는 용장(勇壯)한 기백을 십이분으로 나타낸 것이다.

 

끝으로, 최영의 최후에 대하여 몇 가지 적어 보면 그는 동년(우왕 14년)12월에 73세의 고령으로 이씨 일파의 손에 참형을 받았다. 형을 받을 때에 사색(辭色)도 변치 아니하고 천고의 분한을 품은 채로 조용히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니, 그날에 송도의 시민은 파시(罷市)를 하고 원근의 가동(街童)과 항부(巷婦)까지 눈물을 흘렸다 한다.

 

그리고 당시인(當時人)으로 그의 죽음을 조상하던 원천석(元天錫)의

“수경(水鏡)이 빛을 덮으니 돌기둥이 무너졌고

사방의 백성이 다 슬퍼하도다

빛나는 공과 업이 끝내 사라져 버렸으니

그대의 충성은 죽어도 후회 없으리라

기사(紀事)로 엮을 일이 넘칠 만큼 모여 있건만

가련타, 황토는 이미 무덤이 되었네

구천의 어두움에 생각이 미쳐

눈을 동문에 걸어 두어도 분하게도 열리지 않네" (편집자 역)28)

28)“水鏡埋光柱石頹 凡方民俗盡悲哀 赫然功業終歸朽 確爾忠誠死不死 紀事靑編會滿秩 可憐黃壤己成堆 想應重下 掛眼東門憤未開

라는 시와 변계량(卞季良)의

“위엄 떨쳐 나라를 바로잡으니 백발이 성성해졌도다

말 배우는 길거리의 아이도 그 명성은 이미 알았네

한 조각 장부의 마음은 죽지 않았으니

천추의 물이 태산을 가로지르는구나" (편집자 역)29)

29)“奮威匡國鬢星星 學語街童盡識名 一片壯心應不死 千秋水與泰山橫

라 한 싯구로도 최영에 대한 당세의 신망과 추도의 정황이 어떠하였음을 알 수 있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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