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규(李昇圭)
생몰 연대 미상. 동아일보 기자, 조선어연구회 회원 역임.
공의 성은 문씨요 초명(初名)은 익첨(益瞻)이더니 후에 익점이라 개칭하고, 자는 일신(日新)이요 호는 삼우당(三憂堂)이니 강성현(江城縣;丹城) 사람이다. 고려 말기의 사람이니 그의 생년월일은 미상하다. 소성(素性)이 자상강직(慈詳剛直)하고 효성이 지극하여 비록 극한성서(極寒盛暑)라도 혼정신성(昏定晨省)의 예를 폐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 이가정(李稼亭)에 나가 배워 그의 아들 목은(牧隱)과 계분(契分)1)이 깊더니 나이 30 되던 해에 정포은(鄭圃隱)으로 더불어 동방(同膀)에 등과하여 행(行)와 문장이 세간에 나타났었다.
1)계분(契分): 뜻이 맞는 친한 벗끼리의 두터운 정분.
이때는 공민왕조이다. 공이 사명을 받들고 원나라에 갔었는데 덕흥군(德興君) 탑사첩목아(塔思帖木兒)는 고려 충선왕의 얼자로 원도(元都)에 머물러 있었는데 여러 불령의 무리가 내외화응(內外和應)하여 덕흥군을받들어 고려왕을 삼으려 하여 화기(禍機)가 불측하게 된지라.
마침 찬성사(贊成事) 이공수(李公遂)가 공민왕의 명을 받들어 원조(元朝)에 가서 강직히 변명하므로 무사히 해결되고 덕흥군이 패하매 공을 지목하여 덕흥의 당이라 하여 여러 번 원제(元帝)의 위하(威嚇)를 입었으나 조금도 굽히지 아니하니 드디어 공을 교지(交趾)2)로 찬적(竄謫)하였다가 3년 만에 사환(赦還)하여 본국에 돌아왔었다.
2)교지(交趾):현재 베트남 북부, 통킹 하노이 지방.
공이 교지에 있을 때에 목면을 재배하는 것을 보고 생각하되 인민의 생활과 국가의 이원(利源)이 여기에 있다 하여 그 씨(核)를 얻어 본토에 시종(試種)코자 하나 교지인의 방금(防禁)이 지엄하여 목면종 한 개를 국외로 유출치 못하게 하여 국외로 나가는 사람은 다 행리(行李)3)를 수색하여 목면종이 있으면 다 압수하므로 가지고 나올 길이 없었다. 공이 가만히 서너 개의 목면종을 필관(筆管;붓두껍) 속에 넣어 가지고 간신히 나왔다.
3)행리(行李): 행장.차림새.
공이 본국에 돌아와 본즉 목면을 재배하는 법을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공이 그 구(舅) 정천익(鄭天益)에게 부탁하여 시험하여 심으라 하였더니 서너 개 종자 중에 겨우 한 개가 싹이 나서 자라는지라. 인하여 3년 동안을 계속 재배하여 전국에 번연(蕃衍)4)하여 드디어 목면의 산지가 되었다.
4)번연(蕃衍):번성(蕃盛)
목면에 대한 취자차(取子車 ; 속칭 씨아), 탄면기(彈綿機 ; 속칭 활), 제사기(製絲機;속칭 물레가락), 방직기(紡織機; 속칭 베틀) 등의 기계 발명도 다 문씨의 족당이 잠심(潛心) 연구한 데서 나온 것이다.
우리가 고서(古書)를 읽을 때에 '남래길패(南來吉貝)’라는 문자를 보았었다. 그 주(註)에
“길패는 곧 면화(棉花)다. 임읍국(林邑國)으로부터 길패가 나왔다. 그것이 아취5)같이 활짝 폈을 때 그것을 따서 길쌈하여 베를 짠다.”(편집자역)
라 하였다.
5)아취: 거위의 솜털.
임읍은 즉 교지라. 원래 면화는 열대지방의 소산이므로 북방제국에서는 재배할 줄을 모르고 의복용 면포는 남방으로부터 수입하므로 고서에 '남래길패'라 쓴 것이다.
공이 면화 종자를 재래하여 조선 전토에 보급케 함으로부터 인민의 일상 의복에 무궁한 이원(利源)을 열어 놓을 뿐 아니라 국가의 경제에도 면포로 인하여 국외로 유출하는 화폐를 방지하였으니 국리민복(國利民福)에 대은택(大恩澤)을 입힌 공의 사업은 우리에게 만세불망(萬世不忘)의 인상을 주고 있다.
공은 동방 이학(理學)에도 실상 유공(有功)한 사람이다. 공이 교지로부터 돌아오매 당시 학자들이 칭장(稱獎)6)치 않는 자가 없었다.
6)칭장(稱獎):칭찬하여 표창함.
우왕조에 성균 사성(司成)이 되어서 학문을 강론하여 미오(微奧)한 의리를 구명하고 창왕(昌王)조에 좌간의시학(左諫議侍學)이 되어서 상서하여 위학(爲學)의 도를 의논하였다.
그러나 그때는 여조(麗朝)의 말기라 사신(邪臣)이 천명(擅命)하고 승니(僧尼)가 횡행하여 대세가 이미 그릇되어 가히 구할 힘이 없으므로 해골을 빌어 향리에 돌아가서 문을 닫고 깊이 앉아 성화(聖學)이 전(傳)치 못한 것을 근심하여 도를 논하고 의를 강함으로써 몸의 책임을 삼았었다.
7)천명(檀命):제멋대로 함.
이태조께서 등극하시매 여러 번 불러도 나오지 아니하고 나이 70에 향제(鄕第)에서 병몰하였다. 태종조에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추증하고 강성군(江城君)을 봉하고 시(諡)를 충선(忠宣)이라 하였다.
퇴계 이선생이 왈
“공은 행동에 옳음이 있으며 또한 학문으로써 세상에 저서가 있다.”(편집자 역)
라 하고 율곡 이선생 시왈(詩曰)
“신농씨는 사람에게 밭가는 것을 가르치고
후직(后稷)은 사람에게 곡식 거두는 것을 가르치고
충선(忠宣)은 우리 백성에게 옷을 입혔다
풍요롭게 한 공이 앞사람들의 배가 된다" (편집자 역)8)
8)“神農敎民耕 后稷敎民穡 忠宣衣我民 豐功倍前昔”
라 하고
우암 송선생이 왈
“정주(程朱)가 죽은 후 오직 우리 동방에 문성공 안유와 충선공 문익점 두 현자가 그것을 얻어 전하여 우리의 도가 찬연히 다시 빛나게 했다.”(편집자 역)
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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