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유섭(高裕燮)
1905∼1944. 미술사학가. 호 우현(又玄). 경기도 인천 생. 경성제대 철학과 졸업.이화여전, 연희전문 등에 출강하면서 국내의 명승고적을 답사하여 미술문화 연구에 진력.
저서에 「송도고적(松都古蹟)」, 「조선 탑파(塔婆)의 연구」, 조선미술문화사논총(朝鮮美術文化史論叢)」 및 유저로 한국미술사 급미학논고(韓國美術史 及 美學論攷)」등이 있음.
공민(恭愍)은 명실(明室)의 사시(賜諡)이 고려조의 존시(尊諡)는 인문의무용지명렬경효대왕(仁文義武勇智明烈敬孝大王)이시다.
고려조의 제31대 왕이시요 제28대 충혜왕과 동복제(同腹弟)로서 충숙왕의 제4비 명덕태후(明德太后;洪奎의 딸)의 소출이시며 선화(善畫)1)로 이름 높으신 충선왕(「동국문헌」화가편)의 영손(令孫)이시니 초휘(初諱)는 기(旗)요, 후에 전으로 개휘하시고 몽고 휘를 백안첩목아(伯顔帖木兒)라 하셨으며 이재(怡齋)·익당(益堂) 등은 그 아호이시니다.
충숙왕 17년 경오 5월 6일에 탄생하시어 강릉대군(江陵大君)으로 봉해지시고 충혜왕 복위 2년 신사 5월에 원 순제의 소명으로 입연숙위(入燕宿衛)케 되었으니 때의 부령(富齡) 12세 때다.
8년 후 20세 때에 원의 종실 위왕의 딸인 보탑실리(寶塔室里)를 취하시니 이가 곧 휘의(徽懿)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시요 후에 이제현(李齊賢), 한의(韓義), 안극인(安克仁), 염제신(廉悌臣)의 딸을 취하셨으나 무후하셨고 충정왕 3년 신묘 10월 22세의 춘추로 등극하셨다가 어위(御位) 전후 23년 만에 보령 45세로써 훙어하시었다.
왕은 이미 선화(善畵) 충선왕의 영손이시요 ‘천종(天縱)이 다능(多能)’(「父齋集」에 보임)하신 분이라. 자유(自幼)로 벌써 총명인후(聰明仁厚)하시다는 찬(贊; 「고려사」사신 찬)이 있었던만치 ‘백기(百技)에 구능(俱能)’(「靑城集」에 보임)하시어 후에 북송 휘종으로 더불어 예림(藝林)에 갑을(甲乙)의 논의를 받게끔 되셨으니 이러한 장본(張本)은 저 10년 숙위에 그 트집이 상당히 응어리졌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1)선화(善畵):도화서(圖畵署)에 소속한 종6품의 잡직 관원이 원뜻이나 훌륭한 화가라는 뜻으로 쓰였음.
즉 왕이 대원자(大元子)로서 연경에 숙위 10년 하실 때 원조의 예원(藝苑) 풍조를 보면 남송화원(南宋書院)이래의 북종화파가 황경(皇京)을 중심하여 의연히 남아 있었고 조맹부를 창두로 하여 오홍(吳興) 일파의 복고적 문인화파가 강남을 중심하여 전국적 예림의 대세를 이루고 있던 때이다.
다만 이와 같이 문인화적 경향이 예림의 대세를 이루었다 하더라도 이는 야파에 속한 일이요 관선파의 경향은 아니었다. 물론 원조(元朝)에 들어 전대부터 있던 도화원은 없어지고 따라서 화인(畵人)에 대한 적극적 우우(優遇)가 없었던 까닭에 관선파라 하여 대단한 것이 아니었지만 어국사(御局使)가 있었으니 다소의 화인은 있었을 것이요, 이들의 손으로 화원체(書院體)는 계승되어 명조(明朝)에 들어 도화원이 소생되매 선덕(宣德)년간까지 그 화맥이 남게 된 것이지만, 일반 문인고사(文人高士)들은 삭북(朔北)의 취막민2)으로서 중원에 군림한 원실(元室)이 예학(藝學)을 존중할 줄 모르고 한민(漢民)을 덕화치 않으매 우우부한(寓憂付恨)3)하여 필묵으로 자명(自鳴)하고 야일(野逸)로 방광(放狂)하여 공정농려(工整濃麗)에 긍긍(兢兢)치 아니하고 청운일흥(淸韻逸興)에 소견(逍遣)케 되어 당·송의 시화 일치의 정신으로 복고하려 하고 또는 흉중일기(胸中逸氣)를 초초사지(草草寫之)하여 신운일기(神韻逸氣)를 얻음이 사자(寫字)와 같음이 있으려 하는 서화 일치의 새로운 정신이 팽배해 있던 것이다.
2)취막민: 흉노족의 천막을 이름이니 그 속에 사는 흉노족을 말함.
3)우우부한(寓憂付恨):걱정과 한스러움을 기탁함.
이러한 경향의 지도를 일반적으로 조맹부 일인이 한 것같이 말하나 이는 그 주도적 지향을 말함이겠고, 대세는 하필 그 안에서만 출발된 것은 아니니 일찌기 문민(文敏)이 전순거(錢舜擧)에게 서도를 물었을 때 전이 답왈
“예체(隷體)일 뿐이라. 화사(書史)가 능히 이를 변해(辨解)한다면 가히 날개가 없이 나는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도리어 사도(邪道)에 떨어져 더욱 공교하고 더욱 소원하리라.”(편집자 역)
하였다 함을 보아 가히 알 것이요, 그후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은 비일비재하게 나타났다. 조맹부의 주장은
“작화(作畵)의 고의(古意) 있음을 귀히 여기고 만일 고의 없으면 비록 공교(工巧)타 해도 무익한 일이니 이제 사람은 용필(用筆)이 섬세하고 전색(傳色)이 농염하면 곧 능수(能手)라 할 줄 알 뿐이요, 고의가 없기로 해서 백병(百病)이 횡생(橫生)하여 가히 볼 수 없게까지 됨을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그림은 간솔(簡率)한 듯하나 식자는 고(古)에 가까움을 알 것이요 따라서 아름답다 하리라.”
하였다 한다.
이러한 주장을 하던 조맹부 자신은 출사하여 한림승지(翰林承旨)에 이르러 궁금(宮禁)4)에 출입하였고 또 충선왕의 연저(燕邸) 만권당(萬卷堂)에 드나들어 고려인과의 접촉이 가장 두터웠지만 이러한 예술의욕이 충분히 발휘되어 수법과 주장이 일치되기는 그의 정신을 이어받은 원말 4대가(황공망, 오진, 아찬, 왕몽)의 손에 이르러서이다. 공민왕이 연경에 숙위하시던 때는 즉 저러한 경향의 대표적 주장자였던 조맹부의 졸후(원 至治 2년 졸, 향년 69) 20년이요 황, 오, 아, 왕 등 4대가의 활약시대였다. 즉 시대로써 말하면 중국 회화사상 일대 전기를 이루려던 때에 제회(際會)5)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일반론적으로 말한다면 왕은 이러한 신경향의 화법을 충분히 접수하시어 이땅에 이식하셨을 줄로 논할 수 있을 것이나, 그러나 지금 왕의 친적(親蹟)으로 전칭되어 있는 <천산대렵도(天山大獵圖)〉의 단편이라든지 왕의 화풍을 전하는 한두 자료에 의한다면 왕은 이러한 신흥의 화의(意)와는 인연이 머셨던 듯하다. 왕은 물론 조자앙(趙子昂 ; 맹부의 아들)과 같이 서화에 함께 감능(堪能)6)하셨을 뿐더러 화(畵)에는 인물, 도석(道釋), 산수, 누각, 화조, 초충(草虫)에 무불향응(無不向應)하셨다.
4) 궁금(宮禁): 궁궐.
5) 제회(際會): 당하여 만남. 임금과 신하 사이에 뜻이 맞음.
6) 감능(堪能):능력이 있어 일에 통달함.
이왕가미술관 소장품 사진첩 해설 같은 데는 왕의 단폭에 조자앙의 풍을 엿볼 수 있다고까지 하였다. 조자앙의 진적(眞蹟)을 볼 수 없는 필자로 이 가부를 말하기는 어려우나 기술한 바와 같이 문민(자앙의 시호)이 당대 예림한원(藝林翰苑)의 거벽(巨壁)을 이루었고 후대 영향이 지대하였더니만치, 또 시대로도 얼마 상거가 없고 환경으로 그의 친적에 많이 접하실 수 있던 왕이시었던만치 자앙의 영향이 왕에게도 있었다는 것은 무리한 바가 아니나, 왕의 화적(畫蹟)으로서 사진(寫眞)이 오히려 많음은 비록 전하는 문헌의 불비(不備)라는 결함을 작량(酌量)하고서라도 왕의 조자앙에 대한 근밀성을 의심케 함이 많다.
「용재총화(慵齋叢話;세종조 성현 저)」에 말하되
“물상(物像)을 묘사하는 것은 천기를 얻은 자가 아니면 정밀할 수 없다. 능히 한 가지 물(物)에 정밀하면서 중품(衆品)에 정밀하기는 더욱 어려워 우리나라 이름난 화가들 가운데도 드물다. 근대로부터 볼 것 같으면 공민왕의 화격(畫格)이 심히 높다.”(편집자 역)
라 하고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 ; 성종조 김안로 저)」에는
“〈아방궁도(阿房宮圖)〉를 그린 것은 인물이 파리의 머리만큼 작으나 관삼대(冠衫帶)가 모두 섬세하게 구비되어 정밀하고 섬세하기가 더불어 짝할만한 것이 없다.”(편집자 역)
라 하였고
숙종대왕의〈천산대렵도 어제(天山大獵圖御題)〉에는 그 기승(起承)구에
“천산에 사냥하는 말이 어둡기가 풍진(風塵)과 같고
필력(筆力)이 견고하고 정밀하기가 신과 같구나”(편집자 역)7)
라 하였고,
7)“天山獵騎暗風塵 筆力堅精信有神”
서(書)에 관하여는 「익재집(益齋集 ; 이제현 저)」에
“천년 곧은 나무를 쪼개 집을 만들고 황금색의 아름다운 옥으로 그릇을 만든 것과 같다.”(且指堂 檜心禪師에게 하사하신 것)(편집자 역)
라 하였고 다시
“율정(栗亭)이라고 제(題)한 두 큰 글자는 철점(鐵點) 은구(銀鉤)가 천지를 비추네.”(윤택에게 하사하신 것)(편집자 역)
라 하였고, 「목은집(牧隱集;이색 저)」에는
“큰 글자의 심온(深穩)하기가 만 근의 솥과 같다.”(龜谷 覺雲禪師에게하사하신 것)(편집자 역)
라 하였고
「청성집(靑城集 ; 영조조 성대중)」에는
“글자체가 높고 크며 중후하여 엄연히 태평의 기상이 있어 공민왕의 손에서 나온 것 같지 않으니 왕자(王者)의 필(筆)을 억누른 까닭이라 범인(凡人)과 다르지 않은가.”(안동 映湖樓 題額)(편집자 역)
라 하여 저 화적과 여러 평을 종합하면 화적은 정세주밀(精細周密)한 중에 견강호매(堅剛豪邁)한 기풍이 뜨고 자체(字體)에는 엄연 중후한 속에 태평화상(太平和像)의 청분(淸芬)8)이 뜬 모양이니 화풍에 예체(隷體)를 뜻하나 스스로 간솔함을 말한 조자앙과는 어떠할까 한다.
8)청분(淸芬):맑은 향기.
즉 기풍상으로는 문민과 공통됨이 있었다 하여도 가하겠지만 화법으로서는 오히려 구파인 화원북종(畫院北宗)에 가까우시지 아니하였던가 추측하는 바이니, 이는 중국 자체에 있어서도 조맹부 등의 의식적 주장이 있었다 하나 신생의 초기에 있었고, 그 영향으로 4대가의 대성함이 있다 하나 이는 실제로 그들의 직접적 생활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직접 생활이요 행동으로서 그네들에게는 용이히 한 새로운 운동으로 이해되고 추수(追隨)되었을 것이지만 이것도 요컨대 원실(元室)의 덕피(德被)9)가 미치지 못하고 고맙게 여겨지지 않던 일부에서요, 그것이 회화 전반 특히 당시의 어국(御局)에까지는 영향됨이 적었을 것이요, 이러한 운동이 회화미술의 한 규범을 이루어 원칙적 전형이 되기는 세태를 격한 명·청 이후이니, 원실 궁금에 계셨다가 일찌기 고려로 돌아오신 공민왕으로서 그들 문인화의 전형들과 같기를 말한다면 이는 사실의 왜곡일 뿐이니, 말하자면 공민왕의 화풍은 과도기적인 곳에 머물러 계셨음이 곧 실정인가 한다.
9)덕피(德被): 은덕을 입음.
이조 초엽에 들어서도 중국의 참다운 문인화는 아직 수입이 못 되었는데 하물며 공민왕시대이랴. 공민왕의 화적을 전하는 문헌 중에 하나도 문인화적 화제(畵題)가 없음이 이 사실을 웅변으로 입증하는 것이라 하겠으니 다음의 목록을 참조할지어다..
○조경자사도(照鏡自寫圖) : 옛날에는 장단의 화장사(華藏寺)에 있었음.(허목「眉叟記言」,「林藝瞻慕堂集」)
○노국공주진(魯國公主眞): 왕 즉위 14년 작(「고려사」 후비열전)
○율정 윤택진(栗亭 尹澤眞): 왕 즉위 10년 작(「고려사」열전 및 묘지)
○성산군 이포진(星山君 李褒眞) : 왕 즉위 21년 3월 경오에 그 아들 인임(仁任)에게 줌. (「고려사」세가 권 제 42)
○유원정 진(柳爰廷眞):왕 즉위 22년 4월(「고려사」세가 권 제 44)
○파평군 윤호진(坡平君 尹虎眞)(「목은집」)
○염신신진(廉愼臣眞)(「금석총람」소재 묘지 및「고려사」열전)
○행촌 이암진(「청파문집」 및 「근역서화징」, 「대동운옥」)
○이강진(李岡眞)(「목은집」소재 묘지)
○손홍량 진(孫洪亮眞)(「여지승람」안동 임하사조)
○흥덕사 석가출산상(興德寺 釋迦出山像)(「용재총화」)
○동자보현육아백상도(童子普賢六牙白象圖) : 귀곡 각운에게 하사함. (「목은집」)
○달마절위도강도(達摩折葦渡江圖):同上
○산수도(「四佳集」)
○추산도(秋山圖) : 밀직 윤호에게 하사함. (「목은집」)
○왕왕갑제유화산수(往往甲第有畫山水)(「용재총화」)
○천산대렵도(天山大獵圖) : 낭선공자(郎善公子) 소장. 현재 이왕가미술관에 단폭(斷幅)이 둘, 총독부박물관에 단폭이 하나 있음. (列聖御製 肅宗題詩 및 앙엽기)
○이어도(鯉魚圖)(「동문선」권 51. 이담 찬)
○아방궁도(阿房宮圖)(「용천담적기」)
○삼양도(三羊圖)(「근역서화징」)
○제석정(帝釋幀) : 춘천 청평사에 있다가 명종 무오년에 이름난 화가인 이군오(李君吾)가 발견. (「조선불교통사」하편 및「懶菴雜著」,普雨和 撰중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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