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기(李秉岐)
1891~1868. 시조시인, 국문학자, 수필가. 호 가람(嘉藍). 전북 익산 생. 한성사범을 거쳐 조선어강습원을 수료. 조선어연구회를 조직했으며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위원, 서울대, 단국대 교수, 학술원 임명 회원 등을 역임. 저서에 「국문학전사(國文學全史)」,「역대시조선(歷代時調選)」, 「시조의 개설과 창작」, 「국문학개론」등이 있으며 시조집으로 「가람시조집」, 「가람문선」등이 있음.
정항은 나이 적을 때부터 환로(宦路)에 나서 일을 잘 처단하고 마음을 바르게 쓰고 고려의 숙종, 예종, 인종 3조를 섬기고 죽을 때에는 집에 벼 한섬이 없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탄식하되
“30년 근시(近侍)와 11년 승제(承制)로 이와 같이 가난하다.”
하고 부미(賻米) 100석과 포 200필을 주고 어필(御筆)로써 특히 석안(夕安)이라는 시호를 써 주었다.
정서는 이런 정항의 아들이고 공예태후(恭睿太后)의 매서(妹婚)이고 내시랑중(內侍郎中)이라는 벼슬이 되고 인종에게 남다른 귀여움을 받고 대녕후(大寧侯) 경(暻)과 친하고 항상 더불어 놀았다. 공예태후는 인종의 계비요, 대녕후 경은 공예태후의 기출(己出)1)인 인종의 둘째 아드님이다.
1) 기출(己出): 자기가 낳은 자식.
처음 인종의 비는 이자겸의 제3녀와 제4녀이니 이는 이자겸이 타성(他姓)으로 비를 삼으면 권총(權寵)이 덜릴까 하고 강청하여 들인 것인바, 이자겸이 마침내 패하매 간관(諫官)의 말을 듣고 다 폐하고 다시 중서령(中書令) 임원후(任元厚)의 따님으로 비를 삼으니 이가 공예태후이다.
인종이 일찌기 꿈을 꾼바 임자(荏子)2) 5升과 황규(黃葵)3) 3승을 얻었다. 척준경이 해몽하기를 임(任)씨로 후비(后妃)를 삼고 다섯 아들을 두고 그중 세 아들은 임금 노릇을 할 징조라 하더니 그 후 과연 공예태후 임씨를 얻어 의종, 대녕후 경, 명종, 원경국사(元敬國師) 충희(沖曦), 신종(神宗)인 다섯 아드님과 승경(承慶), 덕녕(德寧), 창락(昌樂), 영화(永和)인 네 궁주(宮主)4)를 낳았다.
2)임자(荏子): 들깨.
3)황규(黃葵):해바라기 씨.
4)궁주(宮主): 고려 때의 서출 왕녀의 칭호. 조선조 세종 때 옹주로 바뀜.
공예태후는 당초 둘째 아드님 대녕후 경을 사랑하여 태자를 삼고자 하였다. 인종의 다음을 이어 즉위한 의종은 이 때문에 그 어머니를 원망하고 그 아우 대녕후 경을 혐의(嫌疑)하지 아니치 못하였다.
대녕후 경은 도량이 크고 중심(衆心)을 얻은바, 의종의 유모의 남편으로 가장 득총(得寵)하던 환자(宦者) 정함이 산원(散員) 정수개(鄭壽開)를 꾀어 대성(臺省)과 대리(臺吏) 이분(李份) 등이 대녕후 경을 추대하여 임금을 삼는다 하고 무고를 하니 의종은 이 말을 곧이듣고 족치려 하자 간신(諫臣) 김존중(金存中)은 유사(有司)를 시켜 안문(按問)하기를 청하여 안문하였으나 아무 사실이 없으므로 정수개는 자자를 하여 흑산도로 귀양을 보냈다. 정함은 거저 저의 허물을 벗고자 하여 또 외척조신(外戚朝臣)이 대녕후 집에 출입한다 하소연을 하고, 김존중은 또한 정서와 공예태후의 아우 임극정(任克正)과 사이가 좋지 못한 터이라 정서가 대녕후와 친하여 항상 더불어 노는 것을 기화로 삼아 김존중과 정함 등이 유언비어를 지어내어 의종을 더욱 의혹케 하였다.
그리고 재상과 간관들도 복합(伏閤)5)하여 청하되 정서가 대녕후를 교결(交結)하고, 그 집으로 청하여 연악유희(宴樂游戱)를 하였으니 그 죄는 용서할 수 없다 하고, 어사대(御史臺)도 또 정서가 종실과 음결(陰結)하고 밤으로 모여 연음(宴飮)한다 하매 정서와 양벽(梁碧) 등 다섯 사람을 가두고 대녕부를 파하고 대녕후의 노(奴) 김참과 악공 최예(崔藝) 등을 유형하고 정서를 동래로, 양벽을 회진으로 귀양보내고 재상 최유청(崔惟淸)은 정서의 매서로서 정서가 연회할 때에 그릇을 빌려주어 대신의 체면을 잃었다고 폄직(貶職)이 되고 잡단(雜端) 이작승(李綽升)도 정서의 매서로서 집에 있으면서 그 핵론(劾論)에 불참하였다고 폄직이 되었으며 그 뒤 얼마 안 돼 이부(吏部)의 청으로 정서와 최유청과 이작승의 죄를 정부(政簿)에 기록하고 의종 11년에 대녕후 경을 천안부로 귀양보내고 정서의 매서인 우부승선(右副承宣) 김이영(金永)을 또 폄직시키고 정서를 거제현으로 귀양을 옮겼다.
5) 복합(伏閤):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 조신(臣) 또는 유생들이 대궐문 밖에 이르러 상소하고 엎디어 청하던 일.
그때 최예는 사죄(赦罪)가 되어 서울로 돌아와서 그 아내와 불화하니 그 아내가 최예는 상기 대녕후의 집에 왕래한다고 무고한바 의종이 국문을 명하였으나 무험(無驗)하였으며, 의종은 본디 도참을 믿고 여러 아우와 우애를 못하고 의심을 놓지 못하여 가만히 간신을 시켜 대녕후의 죄를 논핵하라 하고 공예태후가 구원할까봐 먼저 태후를 보제사(菩濟寺)로 모시고 부득이하여 하는 양으로 하고 드디어 달리 죄를 칭탁하여 대녕후의 가동(家僮)들을 죽이었다.
처음 정서가 동래로 귀양을 갈 때 (의종 5년?) 의종이 정서더러 이르되
“오늘 일은 조정 의논으로 말미암아 박부득이(迫不得已) 한 바이니 가 있으면 응당 소환하겠노라.”
하였다.
정서는 귀양살이로 해와 달을 보낸 지 오래고 오래건마는 나날이 기다리는 소명은 이르지 않는다. 다만 거문고를 어루만지고 노래를 지어 부르니 그 노래가 어찌나 처량하고 서글프던지 그뒤 사람들이 그의 호 과정(瓜亭)으로 그 노래를 이름하여 정과정(鄭瓜亭)이라 하였다.
「익재집(益齋集)」 소악부(小樂府;고려 충숙왕조 이제현 저)의
“임금 그리움에 옷이 젖지 않는 날 하루도 없지만
정사(政事)는 봄산의 자규와 같네
어느 것이 옳고 그른지 사람들아 묻지 마오
다만 조각달과 새벽별만이 알고 응할 뿐이라”(편집자역)6)와
6)“憶君無日不需衣 政似春山蜀子規 爲是爲非人莫問 只應殘月曉星知”
「도은집(陶隱集;고려 공민왕조 이숭인 저의
“비파의 한 곡 정과정은
처연한 소리 차마 들을 수 없어라
고금을 돌아봐도 다소 한스러움
주룩주룩 내리는 가을비에 이소경(離騷經)만 읽고녀” (편집자 역)
7)이소경(離騷經):초사(楚辭)의 편명(名). 춘추전국시대 초나라 충신 굴원(屈原)이 지은 부(賦)로서 참소를 만나 궁정에서 쫓겨난 몸으로 연군(戀君)의 정을 읊은 서정시, 초사의 근원을 열었다.
8)“琵琶一曲鄭瓜亭 遺響棲然不忍聽 俯仰古今多少恨 滿簾秋雨讀騷經”
과
「대봉집(大峯集;이조 성종조의 양희지 저)」의
“타향에 선 나그네 머리 희어
만나는 사람마다 푸르름을 볼 수 없네
맑은 밤은 깊어 창에는 달이 가득하여
비파 끌어안고 정과정 한 곡 부르다”(편집자 역)9)
9)“他鄕作客頭渾白 到處逢人不見靑 淸夜沈沈滿窓月 琵琶一曲鄭瓜亭”
이 모두 이를 두고 지은 시들이다. 이 시들을 보더라도 극히 그 처완(凄婉)함을 짐작하겠으며 「고려사」 악지(樂志)에는 이런 가사를 사리부재(詞俚不載)라고 적지 아니하였으나 「악학궤범(樂學軌範)」권 5에는 이를 삼진작(三眞勺)이라 하여
“전강(前腔) 내니믈 그리자와 우니다니
중강(中腔) 산접동새 난 이슷하요이다
후강(後腔) 아니시며 거츠르신달 아으
부엽(附葉) 잔월효성이 아라시리이다
대엽(大葉) 넉시라도 님을 한대 녀져라
부엽(附葉) 벼기더시니 뉘러시니잇가
이엽(二葉) 과도 허믈도 천만 업소이다
삼엽(三葉) 말힛 마러신뎌
사엽(四葉) 살웃브뎌 아으
부엽(附葉) 니미 나랄 하마 니자시니잇가
오엽(五葉) 아소 님하 도람드르샤 괴오쇼셔”
라 하는 노래가 적혀 있다.
이 노래가 즉 유명한 〈정과정>이다. 이 노래의 첫머리 두어 절은 위에 적은 이제현의 역시와 같은 뜻이고 그 다음 절들도 모를 것이 없다. 다시 지금말로 풀어 보면
“내 님을 그리우어 울더니
두견이는 비슷하오이다
안이시며 겉이신들
잔월효성이 알으시리이다
넋이라도 님은 한데 따르지어라
의탁하더신 이 뉘러시니있가
과도 허물도 천만 없소이다
멀리 말으시오 슬프고녀
님이 나를 하마 잊으시니있가
아소 님아 잔사설 들으사 사랑하소서”
라는 뜻이겠다.
「고려사」 열전에는 종종 정서를
“성격은 경박하나 재예가 있다(性輕薄有才藝)”
라 평하였으나 이것이 차라리 예술가의 장처(長處)일는지 모르겠다. 예술가는 본래 비흡삼두작(鼻吸三斗醋)한다는 정치가류와도 달라 편협하다는 평이 아니면 이런 평을 받기 쉬운 것이다. 정서는 세가(世家)에 태어나 풍류를 좋아하고 애인하사(愛人下士)하던 대녕후를 만나 추축(追逐)이 잦다가 의종의 혐의와 정함, 김존중의 무함으로써 동래, 거제로 쫓겨다니며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신세가 되어 거문고나 타고 그 노래를 부르며 눈물을 흘리던 것이다. 의종도 그 말년에 단기(單騎)로 거제에서 遜位10)를 할 때 거문고 그 소리를 듣고 아니 울지 못하였으리라.
10) 손위(遜位): 왕위 또는 관위를 남에게 물려 줌.
“과도 허물도 천만 업소이다
말힛 마러신뎌
살웃브뎌 아으
니미 나랄 하마 니자시니잇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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